불교와 인문과학 1

의상계 화엄학파의 사상과 신라불교에서의 위상

수선님 2019. 6. 2. 12:26

의상계 화엄학파의 사상과

신라불교에서의 위상


佐藤 厚 / 東洋大學




차 례


※ 머리말

Ⅰ. 문제의 소재

Ⅱ. 義湘系華嚴學派의 개관과 문헌적 특징

1. 개관

2. 文獻的特徵―口傳性과 秘義性―

Ⅲ. 義湘系華嚴學派의 思想的特徵

1. 「無住」의 强調와 「五尺成佛思想」

2. ꡔ大乘起信論ꡕ批判

Ⅳ. 中國華嚴學派에의 대응

Ⅴ. 新羅佛敎에서의 位相

Ⅵ. 結論




※ 머리말



본 논문은 2001년 東國大學校에서 열린 普照思想硏究院의 發表會에서 발표한 것이다. 본 논문에 대해서는 해주스님과 인경스님이 좋은 논평을 해주셨다. 두 분은 각각 한국에서 화엄학과 고려시대 선학에 관한 전문가이어서, 그런 분들이 논평을 해주신 것을 필자는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학회당일에 연구발표 뿐만아니라 논평을 겸하는 것은 일본의 주요 불교학회에서는 행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 학회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써 논평자가 필자의 논문을 어떻게 읽었는가를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깊이있는 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를 살리기 위해, 본 논문은 명백한 오식을 제외하고는 발표당일 그대로 하며, 대신에 부록으로서 논평문에 대한 답변을 싣는 것으로 한다. 이것에 의해 독자에게 논점이 정확히 전달되며 아울러 논의를 계속진행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I. 문제의 소재



義湘系 華嚴學派(以下, 義湘系로 약칭한다)는, 한반도 불교 중에서 신라시대 義湘(625-702)에서부터 고려시대 均如(923-973)까지를 범위에 넣는 약 300년에 걸친 화엄학파를 가리킨다. 이 점은 연구자 사이에서 대개 일치하고 있다1).

의상계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金知見[1972]을 비롯하여, 金相鉉[1988], [1991]에 의하여 인물․문헌에 대해 상세한 해석이 진행되었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인 특색에 대해서 많이 연구되어 있다.

이 중에 의상계의 사상은 대개 「實踐的 華嚴思想」이라고 평가된다. 그것은 의상이 저술보다는 교화에 힘썼다고 하는 평가때문인데, 주로 의상의 저술과 언행, 그리고 제자의 언행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 이면에는, 많은 저술을 하고 상세한 체계를 구축했던 法藏(643-712)을 실천의 반대어로서 「교학적(이론적)」이라고 하는 것이 염두에 두어져 있을 것이다. 또한, 많은 경론에 주석을 한 元曉(618-686)와도 대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주로 외면적인 요소로부터 의상 및 그의 계통을 실천적 화엄사상이라는 언어로 특징지우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는 실천적․교학적이라는 표면적인 구분에 머물지 않고, 의상계의 실천성이 어떤 사상에 기본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법장, 원효등과 어떻게 다른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해명하지 못하면, 화엄사상이나 신라불교에서 의상계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한 필자의 최근 연구2)에 새로운 연구 성과를 추가하여 의상계 사상의 특징을 중국화엄학파와의 관계에서 지적하고, 최종적으로는 신라불교중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리 본고의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상계의 상승에 대해서는 口傳性․秘義性을 특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논의의 소재가 중국화엄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독자의 秘義的 해석을 하며 전승되어 온 것을 말한다. 이 배경에는 ꡔ화엄경ꡕ의 본질만을 추구하고, 타교학을 고려하지 않는 사상적 배타성이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이 의상계의 논의가 중국이나 일본의 화엄과 다른 점이다.

둘째, 의상계의 사상이 화엄사상인 것은 틀리지 않지만, 교판론이나 교리론이 중심이 아니고, 근본적인 입장은 「五尺成佛思想」으로 불릴 수 있는, 現實의 身體에 의한 直接的인 眞理의 體得이다. 그 근저에 놓여있는 것은, 「無住」라는 존재론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직시하는 사유형태이다. 한편, 이것에 반대하는 사유로서 ꡔ大乘起信論ꡕ에 기초한 교설이 비판된다. 또 이것도 의상계와 중국 화엄의 다른 점이다.

셋째, 이상 두가지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의상계는 ꡔ화엄경ꡕ혹은 화엄교학만을 심화시킨 학파이다. 이것은ꡔ起信論ꡕ을 중시하여 여러 교학을 회통하였던 元曉․太賢등과는 다르다. 이것이 신라불교에서의 의상계의 특징이다.




II. 義湘系華嚴學派의 개관과 문헌적 특징



1. 개관


의상계의 흐름은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의상과 직제자의 시대(7세기후반-8세기중엽)


671년에 의상이 신라에 귀국하고, 제자에로의 전법의 시대가 시작된다. 문헌으로서는 直弟子인 智通의 ꡔ智通問答ꡕ의 逸文, 道身의 ꡔ道身章ꡕ의 逸文, 그리고 그것에 관련된 문헌으로서 법장찬이라고 전해지는ꡔ華嚴經問答ꡕ이 있다. 이들 세 문헌은 의상의 강의록에 그 기본을 둔 것으로서 성격을 같이하며, 내용적으로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이외에도 ꡔ叢髓錄ꡕ과 均如文獻에 直弟子의 證言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들로부터 그 시기에 의상계에서는 ꡔ五敎章ꡕ硏究와 ꡔ法界圖ꡕ註釋을 저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논의의 특징으로는 첫째, 화엄학에 관한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둘째, 후술하듯이 「五尺成佛思想」이라고 부르는 사상형태가 보인다는 것이다.


2) 神琳․法融의 時代(8世紀중엽)


의상계화엄학에서 주목되는 것은 神琳(?-750-?)과 法融의 시대이다. 神琳은 義湘의 直弟子인 相元의 弟子로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나아가 그의 설이 후대에 계승되는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는 入唐하여 融順(생몰년미상)에게 師事했다고 전해지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이어 法融은 神琳의 제자이다. 그는 신림과 함께 ꡔ十句章ꡕ의 성립에도 관련되어 있으며, ꡔ法界圖ꡕ의 註釋도 하고 있다. 이 시기부터 의상계는 독자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ꡔ十句章ꡕ 이다. ꡔ十句章ꡕ의 편찬자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神琳과 法融이 그 성립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ꡔ十句章ꡕ에는 중국화엄학의 논의에 기초하면서도 독자의 신비적 색채를 띤 해석을 하고 있다. 다음 세대부터는 그것에 대한 주석작업이 시작되어 150년정도 지나 균여의 시대까지 연결된다. 또한 주제가 ꡔ法界圖ꡕ나 ꡔ五敎章ꡕ등의 해석과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주석할 때는 반드시 ꡔ十句章ꡕ의 논의를 끌어들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3) 法融 이후, 均如 이전(8세기후반- 9세기초)


법융이후의 인물로서는 質應, 梵體 등이 나와 위에서 말한 독자의 교설을 전승한다. 또 ꡔ法界圖ꡕ 註釋에서는 ꡔ眞記ꡕ, ꡔ大記ꡕ등이 저술된다. 그 외, ꡔ簡義章ꡕ이나 ꡔ古記ꡕ등도 이 시대 저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대에도 그들 나름의 독자성이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神琳․法融의 사유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4) 均如의 시대와 그 주변(9세기후반-10세기)


균여의 시대를 전후해서 의상계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것은 균여 및 그 논적에 보이는 것처럼 교판론을 행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은 종래의 의상계와는 다른 모습이다. 다만, 기본 베이스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상세한 것은 본고의 목적이 아닌만큼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2. 文獻的特徵―口傳性과 秘義性―


여기서는 의상계 문헌의 특징으로서, 구전성과 비의성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구전성에 대해서 살핀다. 의상계 문헌에서의 논의의 대상은 첫째는, 중국화엄문헌이지만, 다른 하나는 의상계 인물의 언행이다. 그것은 저술에서 인용한 것보다는 대화로 전승되고 주석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3). 거기에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논의가 많으며,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 논의도 많다.

이러한 성격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8세기 중후반의 神琳․法融의 시대부터이고, 그 대표적 문헌이 앞에서 언급했던 ꡔ十句章ꡕ이다. 거기에는 화엄교학에 관한 논의가 기본이 되어있지만, 여러 곳에 神琳․法融등의 논의로 채워지고 있다4). 후대에는 이것을 주석대상으로 할뿐아니라, 같은 개념을 설하고 있는 ꡔ法界圖ꡕ나 ꡔ五敎章ꡕ의 해석에도 이 ꡔ十句章ꡕ의 논의가 반영된다. 이렇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口傳된 논의가 의상계 화엄학 특유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

둘째, 비의성은 그렇게 구전되는 것이ꡔ華嚴經ꡕ의 본질을 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지엄의 창시라고 전승된 ꡔ華嚴經ꡕ의 發生段階를 설하는 五重海印은 義湘系 특유의 발생론적인 華嚴經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神琳의 言行이라고 전해지는 總別의 五重解釋(六相에 관한 논의)5)이나 ꡔ十地經論ꡕ解釋의 문제인 根本入의 八難(八개의 심오한 의미:이것도 육상에 관한 논의임)6)등이 있다. 이 중에 후자에서는 「이 八難을 알면, ꡔ十地經論ꡕ주석을 보지 않고도 地論의 妙旨를 알 수 있으며, 역으로 모르면 아무리 많은 주석을 강의한다 해도 地論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하여, 비의성이 농후해진다. 이것과 사상적으로 공통된 것은 質應이 설하고, 梵體→潤玄으로 상승되는 ꡔ華嚴經ꡕ의 십중해석(ꡔ古記ꡕ)7)이다. 여기서도 「ꡔ華嚴經ꡕ의 十重解釋을 알지 못하면 ꡔ華嚴經ꡕ의 깊은 뜻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설해진다.

이외에도 비의성을 전해주는 것으로서는 表訓과 大正角干의 논의를 縜綸이 훔쳐들었다고 하는 ꡔ華嚴經ꡕ三本定등의 교설을 설한 것8)외에도 지엄이 설했다고 하는 十重總別9) 등도 있다. 지엄이 과연 그것을 설했을까는 증명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이것 역시 의상계 사유형태 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비밀스러운 내용이 갖추어져 구전되는 의상계 독자의 교설은 중국이나 일본의 화엄과는 달리 이채를 띤다. 그 배후에는 의상계가 타교학과 논리적인 회통을 추구하는 등 개방적인 논의를 좋아하는 집단이 아니라, 폐쇄적이며 이론적으로 자기 완결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고 추측하게 한다. 이런 성격은 다음에 서술하는 사상적 특징과도 상응한다.




III. 義湘系華嚴學派의 思想的特徵



1. 「無住」의 强調와 「五尺成佛思想」


筆者는 의상계 사상의 특징을 「無住」의 강조와, 그것에 기초하여 성립된 五尺成佛思想이라고 생각한다.

「無住」는 空觀을 基調로 하는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술어인데, 의상계에서는 화엄교학의 존재론에 기반을 둔 제법의 無自性性과 그것을 전제로 한 존재형태의 자재를 의미한다. 나아가 의상계에서는 이것에 기반을 두고 자기 신체를 세계와 일체인 존재로서 파악한다. 筆者는 이것을 의상계의 궁극의 모습, 말하자면, 성불로 보고 「五尺成佛」思想이라고 명명했다. 이 용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붙이자면, 화엄일반의 술어를 사용할 경우 결국 교리적인 배경을 연상하기 때문에, 다른 화엄교학(中國이나 日本등)과의 차별성이 희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敎判論」이나 「法界緣起論」등의 화엄학 술어로 설명할 경우, 그 용어의 출전이 중국화엄사상에 있는 만큼, 결국 의상계에서 설하는 내용은 중국화엄사상과 평면적으로 연결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의상계의 독자성을 적절히 설명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그런 어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특별한 개념을 내어 보인 것이다.


1) 無住의 强調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無住」는ꡔ般若經ꡕ이나 ꡔ維摩經ꡕ등 空觀을 주로 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술어이다. 중국에서는 인도의 공관을 계승한 삼론학파가 중시하는 개념이지만, 화엄에서는 일반적으로 교리의 근간에 위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의상계에서는 「無住」를 敎說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많다10). 용례를 보면, 「一乘無住本法」처럼 앞에 「一乘」을 붙인 예나, 「無住空」․「無住本」․「無住體」․「無住法性」․「無住別敎」등과 같이 「空」, 「本」, 「體」, 「法性」, 「別敎」등이 뒤에 따라오는 예가 있다.

그 내용을 총괄적으로 서술하자면, 無住의 어의대로 근본적인 실체를 갖지 않는 공으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다만, 이것이 인도의 중관이나 중국의 삼론학파등과 같이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화엄교학의 존재론에 입각해서, 무자성이기때문비로소 일법에 제법이 집약된다는 것을 중시한다. 특히, 의상계에서는 그 집약점을 자신의 신체(五尺)로 표현하는 데 특징이 있다.

이 예로서 표훈과 의상이 나누었던 無住에 관한 문답을 들어보겠다.(便宜上, 問答을 두가지로 나눈다)

 

① 表訓德이(義)相和尙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無住입니까」 和尙이 답한다. 「내 범부의 五尺身이 (過去․現在․未來의) 三際와 동등하여(稱) 不動인 것이 無住이다」

② (表訓이) 묻는다. 「만약, 三際의 입장에서 그것(五尺身)을 나눈다면, 다종의 五尺이 존재합니까」라고 하였다. 和尙이 말하길 「이것은 緣의 五尺이기 때문에, 一을 따르면 즉 一, 多를 따르면 즉 多이다」라고 하였다11).


우선, ①에서 의상이 「五尺身」으로써 설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五尺이란 자신의 신체를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이것으로부터 부처의 교설을 연설해간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어 ②에서 表訓의 질문에 대해 의상이, 五尺이 「緣」의 존재이기 때문에 「一을 따르면 즉 일, 多를 따르면 즉 多」라고 설한 것이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화엄교리에서는 ꡔ法界圖ꡕ의 「大緣起陀羅尼法」, ꡔ五敎章ꡕ의 「十玄緣起無碍法門義」교설에 기원한다. 그 내용은 제법은 無自性이며, 그것이 존재하게 된 것은 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一․多 등 다양한 존재형태가 있게 된다고 설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①諸法의 無自性性, ②緣에 의한 존재, ③ 어떠한 존재형태도 가능하다는 것이 의상계 존재론의 근간을 이룬다.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신체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에 실천성이 있는 것이다.

智儼이나 法藏에도 「無住」의 용례는 보이지만, 의상계와 같이 그것을 중심적인 교리로 강조하는 예는 없다. 한편, 징관에게 무주를 강조하는 예가 보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의상계의 입장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징관의 용례는 「心性無住」와같이 心의 無住를 설한다. 이것은 「一心法界」로 대표되는 저「心」이 중심교학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의상계에서는 이른바 근원적․추상적 원리를 세우지 않고 「物」과 「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12).


2) 五尺成佛思想


이어서, 「五尺成佛思想」으로 논의를 진행해 보자. 「五尺」이란 길이의 단위이며, 인간의 신장을 의미한다. 五尺成佛이란 그 구체적인 수량을 지닌 인간에게 일체가 집약된다고 하는 사유방법이다. 환언하면, 五尺의 자기 신체 자체가 진리와 일체라는 것이다. 의상계문헌에서의 五尺의 용례에는 앞에서 서술한 無住에 관한 논의외에 다음과 같이 것이 있다.


◆義湘

和尙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른바 無著佛이니, 세간에 안주하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 오늘 나의 오척신을 이름하여 세간이라 한다. 이 몸이 허공법계에 편만하여 모든 곳에 이른다. 그 때문에 정각이라고 한다13). (義湘의 十佛에 대한 해석)

「心佛이니 安住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마음을 쉬면 부처이며,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가 아니다. (中略)이 때문에 마음이 안주하면 법계의 제법은 내 오척신에 나타나는 것이다14).(義湘의 十佛에 대한 해석)


◆神琳

神林의 해석에 따르면, 「一乘法界圖」중 「法界」의 「法」은 所證이다. 오늘의 내 마음은 能證이다. 즉 이 能所의 불가득처가 바로 「一」이다. 能修人의 행위를 「乘」이라 한다. 이런 不動의 軌則에 分齊가 성립하기 때문에, 「法界」라고 말하는 것이다. 法界法의 本位는 나의 오척신이다15).(神林의 ꡔ법계도ꡕ題號의 해석)


◆法融

이른바 「一」은 能과 所가 없는 가운데, 편의상(假) 억지로 그것을 나눈다면, 能觀의 一과 所觀의 一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하면, 만약 스스로(自)의 신심에 제법을 통섭한다면 無側․無遺이고, 能所를 絶하는 것이 能觀의 一이다. 이 신심의 주처를 所觀의 一로 한다16).(法融의 ꡔ法界圖ꡕ중 「中道」의 해석)

「中道」라는 것은 삼세간을 자신의 신심으로 삼는다. 한 물건(一物)도 신심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7).(法融의 ꡔ法界圖ꡕ 「中道」의 해석)

「世間에 安住한다」는 것은, 三乘의 의미로는, 出世하여 성불하기 때문에 「安住」가 아니다. 一乘의 意味에서는 三世間을 자기의 신심으로 하기 때문에, 「世間에 安住한다」고 하는 것이다18). (法融의 ꡔ法界圖ꡕ「十佛」의 해석)

性의 立場에서 이것을 논한다면, 緣前有法이다. 왜냐하면, 연에 대해서 논할 경우, 오늘의 연중에 나타나는 五尺 이것은 緣起本法이고 無側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緣 이전에는 一法도 없다. 性에 대해서 논한다면, 그것은 本有性起의 法體이다19).


◆崇業

海印鏡 중에 나타나는 像은 나의 오척신이며, 삼세간을 갖추어 따로 住處가 없기 때문에 無住라 한다20).


◆ꡔ大記ꡕ

訓德의 뜻에, 즉 「眞」은 無住本法이다. 「性」은 本分의 種이다. 本分의 種은, 만약 文處를 지시하자면, 初會果地五海이다. 이 五海로써 本識의 體로 삼는다. 이 본식에 約해서, 뒤의 諸會 중에 혹은 種性이라고도 하고, 혹은 行業이라고도 하며, 혹은 願善決定等등이라고 한다. 만약 上根人이라면 바로 證分에 의거하여 自身心이 바로 즉 法性임을 얻는다. 그러나 이 證處는 名相을 絶하였기 때문에, 中下人은 아직 능히 믿지 못한다. 그러므로 五海 이것은 네 本識의 근원이라고 설한다21).


◆均如

다음 문장은 화엄교학 개념인 十法을 나의 몸으로 해석한 예이다. 十法은 敎義․理事등 5개의 상대개념이고, 이것들이 동시에 갖추어져 상응한다는 것등을 설하는 것이 십현문이다.

그저 吾身에 約하여 十對十門을 논한다면, 첫째는 나의 五尺身이 解를 생하게 하는 것이 敎임을 드러낸다. 즉 이것은 所詮의 의미가 된다. 둘째는 나의 五尺身이 즉 法性에 합치함을 理로 삼는다. ꡔ經ꡕ에서 말하길, 「衆生卽法身, 法身卽衆生」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五體四大는 역연히 차별함을 事로 삼는다22).

이름붙일 수 없는 法性은 法界法 名位의 부동처이다. 지금 나의 五尺身이란 다만 五尺, 이것뿐이다. 이 五尺上에 나아가 佛名․法名을 이름붙이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이름붙일 수 없는 法性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五尺의 이름은 바로 즉 法體이다23).


이처럼 義湘系 文獻 중에 五尺을 中心的 存在로 구상한 예는 義湘에서 均如에 이르기까지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의상계의 기본적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그 발상의 근원을 서술하고자 한다. 다음의 ꡔ眞記ꡕ文이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法性에는 微塵의 法性, 須彌山의 法性, 一尺의 法性, 五尺의 法性이 있다. 만약 오늘 五尺法性의 입장에서 논하자면, 微塵의 法性, 須彌山의 法性等은 自位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五尺에 稱成한다. 小位를 늘리지 않고, 大位를 줄이지 않은 채로 능히 (五尺을) 이룩하는 것이다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法性」이라는 추상적 원리로 생각되기 쉬운 존재가, 微塵이나 須彌山등의 「물건」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며, 그 중에 五尺이라는 구체적이고 측량가능한 존재인 「자기자신」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다만, 단순히 자기자신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이라면, 宗敎的인 言說중에 그다지 신기한 것은 아니며, 실천수행자가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의상계도 그러한 경지에 달해서 전승한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특징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존재중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존재중에서 진리를 이해한다」라는 사고의 교리적 증명도, 역시 제법의 無自性에 입각한 존재론이다. 여기에는 동일한 사유에 기반을 둔 六相論이 있다. 六相은 ꡔ十地經論ꡕ에 기반을 두고, 화엄학의 지엄에서 비롯하여, 義湘, 法藏으로 전개된 설이다. 특히 법장의 ꡔ五敎章ꡕ에서의 집의 비유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현실존재의 사물이 相卽相入의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것을 일체법의 수준까지 확장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六相은 어디까지나 비유이지만, 의상계는 그것을 地로 설명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사이의 관계를 궁구해간다. 이것은 六相에 대한 논의 중에 「○尺의 柱가 ○步의 기와와 상즉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25)라는 문제설정 자체에 나타난다. 즉 義湘系에서 六相은 華嚴의 緣起世界, 소위 法界緣起라는 理念上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形而下의 문제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넓게 말하면, 중국불교의 한 특징인 「觸事而眞」(現象 그대로가 眞理임)의 연장선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현실중에 진리를 찾아내는 정도가 다른 사상에 비해서 의상계의 경우가 강하다.

이런 의상계의 기본사상을 접하면, 선의 교설과 비슷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의상계의 사상에 東山法門 등의 선의 영향이 지적되어 있다26). 다만, 필자는 선사상의 영향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初期禪宗의 중심적 테마는 心의 문제로서, 그 心을 어떻게 관찰해 갈것인가, 또 어떻게 안심의 상태로 가져갈 것인가라는 것이지만, 의상계에서는 그런 문제설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27).

마지막으로 이상 서술한 의상계의 신체에 의한 진리의 파악을 잘 표현한 예로서 神琳과 大雲法師君의 문답을 들수 있다. 내용은 「因分可說, 果分不可說」이라는 화엄교학의 근본적인 문제로 연결되는 緣起分과 證分에 대한 문답이다. 다만, 이 문답은 교학적인 것은 아니다.


林德이 설법했을 때, 大雲法師君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緣起分의 說法은 말씀하신대로이지만, 證分의 說法은 어떤 것입니까.」 林德은 묵묵히 있다가 이윽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君의 質問에는 대답이 끝났다」. 雲法師君은 이해할 수 없었다. 林德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君이 이 질문을 내었을 때, 앉아있던 마루를 비롯해, 일체법계의 제법이 동시에 질문하였다면 옳다. (이와는 반대로)다만, 君만이 질문하고, 그 외의 일체법이 질문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틀린 것이다.」 法師君은 (林德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法界의 咽喉, 無盡의 舌端이 同時에 질문을 낸다는 것은 緣起分의 질문입니까」. 林德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三世間法이 同時에 질문을 낸다〉는 것은 證分의 질문이다.〈黙然히 계합하되 不動임〉은 證分의 說이다.〈三世間法이 각각 自位에 머물러, 本來不動이다〉라는 것은 증분의 聞이다」28)


이 논의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화엄교학보다도 오히려 선어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는 五尺이나 自身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 자신의 질문이 일체법계와 감응하는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 의상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2. ꡔ大乘起信論ꡕ批判


의상계 문헌에서는 일승과 삼승을 대비하여 그 교리적 우열을 논하는 곳이 많다.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은 비판대상으로서의 삼승설이 ꡔ大乘起信論ꡕ의 교설로 생각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비판의 배후에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無住」의 입장과는 반대의 입장이 있다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이는 것의 배후에 추상적인 원리를 설정하는 입장이다. 이것을 ꡔ起信論ꡕ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일심은 염정법의 근거이며, 이것을 수용한 眞如隨緣說에서는 일심이 만물을 생산해내는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을 의상계에서는 「無住」의 사유형태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비판하고 있다. 아래에서 그 예를 소개한다.

우선 ꡔ도신장ꡕ에서는 두 개의 파도가 상즉상입하는 존재방식을 삼승과 일승의 두 입장으로부터 논한다. 삼승에서는 두 개의 파도의 所依가 되는 본체를 설정하고 그것을 동일성의 근거로 삼지만, 일승에서는 그와같은 것을 세우지 않고, 두 사물의 無自性을 근거로 상즉상입을 성립시킨다고 설한다.29) 여기서 설해지는 삼승설은 현상의 배후에 진여나 理등을 상정하는 것이고, 특히 파도를 비유로 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파도와 물과 濕性의 관계를 설하는 ꡔ起信論ꡕ이 염두에 두어졌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ꡔ起信論ꡕ의 眞如隨緣說을 일승설과 대비하여 비판하는 ꡔ眞記ꡕ의 예를 소개한다. 여기서는 ꡔ法界圖ꡕ의 「不守自性隨緣成」句를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三乘의 입장에서 논하자면, 自性淸淨心이 無明의 風의 緣에 따라 差別된 萬法을 만든다. (이에 비해서) 一乘이라면, 緣의 前에는 法이 없기[緣前無法] 때문에, (삼승처럼) 먼저 眞性이 있고, 隨緣하여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30).


여기서의 주제는 「隨緣」의 사유방식을 둘러싼 삼승과 일승의 차이이다. 삼승설에서는 「自性淸淨心」, 「無明風」이라는 말로써 알 수 있듯이. ꡔ起信論ꡕ의 여래장연기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에 비해서 일승에서는 삼승과 같이 제법의 근거로서의 원리를 세우지 않고 「緣前無法」을 설하고 있다. 이것이 제법의 무자성을 전제로 하고, 緣에 의해 법이 존재한다는 앞의 「無住」를 둘러싼 논의와 연결된다고 추측된다. 이 「緣前無法」이라는 용어는 다른 의상계 문헌에도 보이기 때문에31) ꡔ大乘起信論ꡕ을 批判하는 하나의 술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여기서도 여래장연기와 일승의 입장을 구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ꡔ大記ꡕ에서는, 삼승에서는 本末의 病을 치료하기 위해 始覺이 本覺과 동일함을 설하지만, 六相에 의해 그것을 치료한다고 설하고 있다32).

이처럼 의상계에서의 ꡔ起信論ꡕ비판, 엄밀히 말하면, 「의상계가 ꡔ起信論ꡕ의 교설로서 생각했던 것에 대한 비판」은 현실의 배후에 추상적인 진리를 도출하는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의상계의 근본사상인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진리의 파악」,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五尺成佛思想과 상반되기 때문에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이다33).




IV. 中國華嚴學派에의 대응

-수용의 방법과 교학의 차이-



1. 수용의 방법


의상계문헌에 인용되는 중국화엄학의 章疏는 지엄과 법장이 중심이다. 澄觀의 저술은 799년에 梵修가 신라에 전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ꡔ三國遺事ꡕ). 實際로 그것이 어느정도 연구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의상계 문헌중에서의 인용은 10세기 均如이전으로는, 9세기후반으로 생각되는ꡔ大記ꡕ에 보일 뿐이다. 또한 宗密(780-841)에 관해서는 균여의 저작에서 일부 인용될뿐, 중요도에서는 澄觀보다도 낮다. 李通玄(635-730. 혹은 646-740)에 대해서는 인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교학을 구축하는데 소재로 했던 것은, 지엄과 법장이 중심이고, 이것은 약 300년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지엄과 법장을 수용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첫째, 智儼은 철저하게 현창된다. 그 요인은 의상의 스승이라는 것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의상계에서는 智儼說을 최대한 이용하고, 또 智儼에 유래한다는 독자적 교설도 세운다. 이처럼 의상계에서 지엄은 그들의 교학형성에 있어 커다란 의지처이고, 또한 그들에게 부족했던 혹은 원하는 교학을 지엄에 가탁하였다고 생각된다34).

둘째, 이에 반해, 법장은 다량의 저술을 남겼기 때문에 많은 경우 敎證으로 사용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의상과의 차별화가 시도된다. 예를 들면, ꡔ十句章ꡕ의 「敎義二大有五重」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는 竪盡法界(法藏)와 橫盡法界(義湘)가 구별되고 그 차이가 문제되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서 의상과 법장을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하려는 의상계의 의식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두 종류의 法界를 구분하는 敎證을 보아도, 그것이 양자의 차이로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의상과 법장의 차별화를 도모하려 했던, 8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교설이라고 생각된다.

그 배후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의상계 교학이 기본적으로는 8세기 중후반 神琳․法融의 시기에 확립했다는 성립사정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시기에 의상계의 기본적 사고방법이나 해결해야할 문제가 적체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해서 사상을 전개하는 것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서 골몰하였다고 생각된다.



2. 敎學의 차이


이어서 전술한 의상계의 화엄사상을 근거로 중국 화엄학파와의 차이를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주로 법장이후, 종밀까지를 염두에 둔다.

첫째는, 체계성의 결여이다. 이것은 「敎判」의 사유방식에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화엄의 교판은 五敎十宗判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오교판은 異論이 있기는 하지만, 화엄의 대표적 교판이라고 생각된다. 원래 교판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불교학 전체를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오교판을 설하는 경우, 그것이 어떻게 우열을 가르든지간에 불교전체를 정리한 것이었다. 즉, 다섯번째에 위치하는 원교의 입장에서 만든 불교질서이다. 이것은 법장이후 慧苑, 澄觀, 宗密 등 교설에 농담이 있기는 해도 중국 화엄학파에 일관된 스타일이다.

이에 반해서 의상계에서는 오교판보다는 2교판을 주로 설정한다. 즉 ꡔ華嚴經ꡕ과 그것이외로 이분하는 사유방법이다. 이것은 지엄이 창시했다고 전승되는 五重海印說에 나타난다. 그것은 비로자나불에서 보현보살로의 법의 이행과정, 교법의 발생과정을 중시하여 추구하는 사유방식이며, 화엄경 외에는 모두 「所流所目」이라는 형태로 일괄된다. 이같은 ꡔ華嚴經ꡕ中心主義가 의상계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는, 첫째와도 관련되지만, 전술했던 ꡔ起信論ꡕ 혹은 여래장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중국화엄학파에서 여래장사상은 교설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법상종의 교리를 회통할 때에는 여래장사상의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법상종을 한정된 교설로 위치짓는다. 반면, 그 여래장사상을 원교와는 차별된 교리로 봄으로써 ꡔ華嚴經ꡕ의 우위를 확보한다. 중국화엄에서는 여래장사상에 대해서 그런 「利用」과 「批判」이라는 2단계로 취급하게 되었다. 법장 이후 慧苑․澄觀등에서는 여래장사상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의상계에서는 앞에서 본 것처럼 ꡔ起信論ꡕ 혹은 如來藏思想에 대해서 비판 혹은 ꡔ華嚴經ꡕ과의 차별화만을 도모하여, 중국과 같이 2단계로 취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이 중국 화엄과는 크게 차이나는 점으로서 의상계 화엄의 특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V. 新羅佛敎에서의 位相



그런데, 이상과 같은 의상계의 특징은 기본적으로는 신라불교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첫째, ꡔ華嚴經ꡕ中心主義에 대해서 말하자면, 의상계에서는 ꡔ화엄경ꡕ관계의 경론외에 주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법상종과 논의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초기에조차 신역유식설을 연구하여 그것과 회통하려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ꡔ화엄경ꡕ이나 화엄교학상의 문제만을 연구한 모습만 보일뿐이다. 신라에서는 원효를 비롯하여 太賢 등은 실로 많은 경론을 주석한다. 원효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런 다양한 경론을 ꡔ起信論ꡕ을 중심으로 회통해가는 것이 그 나름의 불교를 소화한 태도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 의상계에서는 신역이나 여래장계 경론의 주석은 보이지 않고, ꡔ華嚴經ꡕ만을 파고들었다.

둘째, ꡔ기신론ꡕ비판의 경우, 이것이 신라불교에서의 의상계의 위상을 보여주는 특징이다. 주지하듯이 신라에서는 원효를 비롯해 ꡔ起信論ꡕ을 주석한 인물이 많은 것으로부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경론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ꡔ起信論ꡕ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의상계의 태도는 이러한 흐름과는 사유를 달리한다.

셋째, 의상계와 신라후반기에 융성한 선과의 관계도 문제이지만, 현단계에서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 어렵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신라에서의 화엄과 선의 관계는 화엄이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실천적인 선에 의해 배척되었다고 지적되었다35). 이 견해는 얼핏 보면 타당한 것같기도 하나, 전술한 의상계의 모습을 염두에 둘 때 의문이 든다. 앞에서 본 것같은 의상계의 사상, 즉 ꡔ화엄경ꡕ만을 연구하고 자기와 일체화하는 태도, 구체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보는 태도는, 결코 형이상학적이라고는 말 할 수 없고, 오히려 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形而上學的」과「實踐的」이라는 사상적 대립항이 양자를 갈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 다른 요인은 현단계에서는 알 수 없다.




VI. 結論


이상과 같이 문제의 소재에서 제시한 의상계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이처럼 의상계 화엄학파는 교리수준에서 그 同異를 문제시하는 것보다는 화엄교학만을 전심전력으로 연구했던 집단이고, 그런만큼 특화된 집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도 의문이지만, 역사적으로 실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배후의 정치상황으로서는 義湘系의 기본사상을 확립했던 750年이후는 신라의 불교에서는 600년대에 보는 것같은 중국불교의 수입과 그 소화의 시기가 막 끝난시기이다. 중국에서도, 법상종의 활동이 쇠퇴하고, 화엄종도 법장 이후 안정된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중국은 安史의 난에 의한 盛唐에서 中唐에로의 변혁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대상황이 얼만큼 의상계 사상의 첨예화에 기여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금후의 과제로 삼고싶다.

정리하면, 의상계 화엄학파는 화엄학파이면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는, ꡔ華嚴經ꡕ만을 이상할 정도로 특화한 집단이다. 그것이 후대에 義天(1055-1101)에 의해 비판된 원인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런 교학은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따라 갈 수 있지만, 다른 풍토에서 전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의상계가 중국은 물론, 일본화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요인이지 않을까.


引用․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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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文化硏究所編[1982]ꡔ韓國華嚴思想硏究ꡕ(東國大學校出版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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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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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源植[1988]「新羅下代海印寺と華嚴宗」(佛敎史學會編ꡔ韓國華嚴思想史硏究ꡕ所收, 民族社)



부록:논평문에 대한 답변


이하, 논평문에 대한 답변을 기록한다. 논평문은 따로 게재될 예정이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위해 요점만을 기록한다. 논평문은 발표당일 것을 사용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게재된 논평문과 다를 수도 있다. 지면의 제약상 답변하는 질문을 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1海住스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1:「五尺成佛思想」에 대해서

【질문】

[1] 논평자의 견해에 따르면, 의상과 그 제자들이 중시한 것은 法보다도 法性이다. 따라서 그들은 五尺보다도 五尺法性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을 표현할 경우 「五尺成佛思想」보다는 「五尺法性成佛思想」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2] 「나의 범부의 五尺身이 三際와․․․」가 가능한 근거는 무엇인가?

[3] 五尺은 緣의 존재이기 때문에 相으로 보아야만 하는가? 혹은 相을 性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만약, 五尺을 相=法으로만 파악한다면, 五尺法性와 須彌山法性 등이 계합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4] 五尺을 相으로 본다면,「오늘 나의 오척신인 이 육체가 虛空法界에 편만하고․․․」가 성립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5] 無住는 緣起가 아니고, 不起而起인 法性性起인 것은 아닌지?

[6] 無住, 空, 中道, 無分別과 法性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7] 無側은 어떤 의미이고, 그 경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8] 「海印鏡中에․․․」라고 설한 경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9] 「自身心이 바로 그대로 法性임을 얻는다」라는 말도, 五尺을 身心=法으로가 아니라, 法性 혹은 法性性起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되지 않은가?

[10] 「抽象的 原理로 생각하기 쉬운 法性이라는 존재가․․․」라는 중에, 法性은 抽象的 原理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뿐인가? 만약 전자이면, 法性을 理法界, 五尺을 事法界로 보는가? 後者라면, 法性이 事法(五尺)으로 緣起에 속하는가? 이것과 관련하여 法性을 證分에, 眞性을 緣起分의 世界로 하는 義相의 說明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답변】

위의 질문에서 논평자의 기본적 논점은「相」과 「性」과의 구별과, 그 중에 「性」(法性, 性起도 同意로 생각됨)의 중시로 이해된다. 「相」과 「性」을 일반적인 용어로 환언하면, 현실로 나타난 모습과 그 근저에 있는 진리일 것이다. 논평자는 그 진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 필자의 기본적 관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의상계에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相」이 그대로 「性」이라는 것이다. 그 「性」은 현실로서의 존재를 초월한「一味」의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존재를 설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相」과 「性」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라는 문제 자체는 논의되지 않는다.

다만, 논평자가 중시하는 「性」(性起)이라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본질적으로 현실로서 나타나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의미에서 말한다면, 논평자와 필자의 견해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위 質問의 內容을 3종류로 분류하여 답변하고자 한다.


(1) 相과 性을 둘러싼 질문

우선, 질문[1]에 대해서 답변하면, 論理的으로 논평자와 필자의 견해는 동일하다고 말 할 수 있다. 문제는 명명의 방식이다. 어느 쪽도 문제는 되지 않지만, 필자로서는 「나의 신체가」라는 직접성을 중시하기 위해 「五尺成佛」로 말하고 싶다. 義相系가 相보다도 性을 중시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상계에서는 양자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3], [9]는 거의 동일한 질문이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의상계의 사상을 相과 性의 관계로 설명하면, 相을 떠난 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五尺이라고 말할 때는 이미 性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된다. 혹시 法性性起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질문[5]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의상계 문헌에 그런 의미에서의 法性性起라는 용어는 볼 수 없다. 질문[10]에 대해서 답변하면, 먼저, 필자의 견해는 논평자가 제시한 것 중에 五尺과 法性을 하나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法性이 事法으로서 緣起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의상계에서는 그러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반복되지만, 의상계의 주장은, 논평자의 용어를 빌리면, 法性이 事法上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法性과 事法을 구별하는 것은 소위 三乘의 견해가 된다. 마지막으로 ꡔ法界圖ꡕ의 證分과 緣起分을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과는 관계없다고 생각된다.


(2)용어를 둘러싼 질문

질문[6]에 제시된 개념들의 동이를 자세히 논하는 것은 지면의 제약으로 어렵지만, 의상계에서는 空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中道와 無分別은 義相의 ꡔ法界圖ꡕ에 나오며, 無住와 法性은 ꡔ叢髓錄ꡕ에 나온다. 이것들은 모두 諸法無自性이라는 존재론을 전제로 하는 것에서 공통된다. 중도는 三乘이 분별하는 모든 사고형태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無分別과도 동의어이다. 또 無住와 法性에 대해서는 본문을 참조하길 바란다. 질문[7]의 「無側」을 필자는 「치우침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내용적으로는 無自性이나 無住와 동일하며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현재 알려진 中國華嚴 등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상계 계통의 독특한 용어로 생각된다.


(3)根據과 實踐에 관한 질문

[2],[4],[7],[8]은 五尺成佛의 근거와 그에 이르는 실천에 관한 질문이다. 우선 근거를 묻는[2],[4]에 대해서는, 원문에 명확히 설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의상계 문헌에 보이는 論理構造로부터 보자면, 五尺身이 無自性이기때문이라고 보인다. 이어 實踐에 관한 질문인 [7],[8]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의상계 문헌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이러한 경지는 상당히 고차원의 정신수준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실천을 겸하는 것임은 예상할 수 있으나 알 수 없다.


■2:秘義性과 排他性

【질문】

[1] 論者는 義相系 思想이 배타적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은 ꡔ華嚴經ꡕ이나 華嚴思想自體의 본질과는 다르다. 또 義相의 敎說이 華嚴思想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오해될 수도 있다. ꡔ華嚴經ꡕ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과 사상적 배타성이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장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 ꡔ華嚴經ꡕ의 본질은 다른 사상을 포섭하고 융섭하는 것이며, 円融하고 自體無碍한 世界일 것이다.

[2]秘義性의 예로서 「智儼의 創始라고 전해진 華嚴經의 발생단계를 설하는 五重海印」을 들고 있는데, 「發生論的 華嚴經觀」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였는가?

[3]理論的인 것과 秘儀性에 어떻게 상관관계가 성립하는가?

[4]義相系의 특징을 지적하기위해 억지로 특별한 개념을 만든 것은 아닌가?


【답변】

[1] 이것은 「排他的」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에 기인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논평자가 말하는 원융은, 「ꡔ華嚴經ꡕ 내지 華嚴思想이 그 자체로 원융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필자가 서술하는 원융/배타라는 의미는 논평자가 말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즉, 필자가 논한 테마는 「新羅佛敎에서의 義相系의 位相」이다. 이 테마는 신라에 존재했던 여러 학파중에 의상계 사상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문제로 한다. 신라에 존재했던 학파는, 법상종 교학과 원효같은 화쟁의 교학이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전통을 반영하며, 다양한 논의를 그 원리에 의해 회통과 비판을 행하였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토양에서의 사상은 「排他的」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円融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같은 장소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의상계 사상은 초기를 제외하고, 다른 교학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神琳 이후가 되면, ꡔ華嚴經ꡕ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특유의 폐쇄된 논의가 발달한다. 그들의 교학은 원융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특화된 논의만을 하는 것은 다른 사상체계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논의 형태를 「원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의상계 사상을 「排他的」으로 이해하였다.

[2] 「發生論的 華嚴經觀」은 ꡔ華嚴經ꡕ의 敎法이 발생하는 순서를 설한 것이고, ꡔ十句章ꡕ의 「敎義二大有五重」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忘像海印에서 시작하여, 교법이 보현에 위탁되어, 거기서부터 일체중생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설한다. 이것은 의상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된 논의이고, 이것을 秘義의 한 예로 한 것이다.

[3] 여기서 말하는 「秘義」란 선의 機緣語句와 같이 언어에 의해 언어를 초월하는 사태를 설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화엄교학의 술어를 사용한 논리이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화엄교학에서 보자면 특이한 설이라는 의미이다.

[4] 억지로 만든 造語는 아니다. 본문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의상계의 특징적인 논의를 화엄학 일반의 술어로 설명하면 그런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五尺成佛」은 「事理無碍의 現實態」등으로도 이름붙일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중국화엄과의 차이를 보기 어렵다. 필자는 될 수 있는대로, 의상계의 인물이 사용했던 용어를 사용하여 그 논리를 밝힘과 동시에 특징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물론 보다 명확히 정의될 수 있는 용어가 있으면 바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3:義相系의 ꡔ大乘起信論ꡕ비판

【질문】

義相系 華嚴學派가 ꡔ大乘起信論ꡕ(以下ꡔ起信論ꡕ)에 기반을 둔 사상을 비판하였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과 사상적 차이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의상의 法性円融思想은 理事無碍에 근본을 둔 事事無碍의 極地로서의 法性性起이며, 理事無碍를 중시하는 ꡔ起信論ꡕ思想과는 다르다. 그러나, 중국화엄가들이 파악한 ꡔ起信論ꡕ思想은 元曉가 사용한 의미와는 크게 다르다. ꡔ起信論ꡕ思想을 중국화엄가가 대승종교로 판석하였다면, 원효는 ꡔ大乘起信論ꡕ思想을 화엄보법으로서 높이고 있다. 논자는 어떤 이유로 中國華嚴思想家와 元曉를 같은 계열로 보고, 의상학파와 다르다는 견해를 제출하였는가?

【답변】구체적으로는 拙稿[2000]․[2001]을 참조바란다. 또 중국화엄가와 원효의 ꡔ大乘起信論ꡕ이 동일한 차원에서 서술된 것에 대해서는, 본 논문이 그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충분한 서술이 된 것을 인정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ꡔ大乘起信論ꡕ의 위치를 낮게 설정하는 것과(義相系), 낮게 설정하지만 활용하는 것(中國華嚴)이었다.


■4:中國華嚴學派와의 관련

【질문】

 義相系 華嚴學派의 사상을 中國華嚴學派와의 관계에서 지적했다고 하지만, 中國華嚴思想과의 대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답변】적어도 ꡔ大乘起信論ꡕ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있어서 대비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중국화엄사상도 인물과 저작에 따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를 논의의 전체로 삼고 충분히 폭넓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5:義相系 華嚴學派의 전파에 대한 문제

【질문】義相系 華嚴學派는 ꡔ華嚴經ꡕ만을 특화한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풍토에서 전개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의상중심이라면 모르지만, ꡔ華嚴經ꡕ中心의 교학이 왜 전파되기 어려운가 ?

【답변】필자는 의상계 교학이 널리 전파되지 않았다고 서술했을 뿐, ꡔ華嚴經ꡕ을 중심으로하는 敎學 전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화엄사상이라 해도, 왕권과 결합하는 수준, 교학 수준 등 여러 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왕권과 결합하는 수준에서는 華嚴思想은 동아시아에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교학수준에서는 여러 형태가 존재하며, 그 중에 義相系統은 주변지역(中國이나 日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인경스님의 質問과 그에 대한 답변


【질문】

[1] 五觀의 體系를 重視하면, 義相系 華嚴學派가 근본으로 하는 것은 無住가 아니고, 實相이지 않을까?

[2] 義湘系에서도 五敎判이 사용되지 않는가? 어째서 二敎判만을 말하는가?

[3] ꡔ大乘起信論ꡕ批判에 대해서, 논자는 無住의 반대입장이기 때문으로 보지만, 논평자는 화엄의 法界緣起를 근거로 비판하였다고 생각한다.

【답변】질문[1]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만, 五觀이 완전히 성립되는 것은 初期用例(엄밀히 말하면 9세기 경의 ꡔ大記ꡕ에서의 용례)외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유보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질문[2]는 필자의 서술 부족에 기인한다. 물론 의상계 문헌 중에 오교판은 많이 나온다. 그 가운데, 의상계의 본의는 ꡔ華嚴經ꡕ과 그 외라는 형태이지 않을까?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질문[3]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즉 無住의 立場=法界緣起로 보는 경우이다. 다만, 필자는 의상계의 사상적 원리에 법계연기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싶지 않다. 내용은 크게 변함이 없지만, 그것에 의해 주장하려는 것이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기타(발표회장으로부터의 質問과 그에 대한 답변)


【質問】ꡔ大乘起信論ꡕ에 대한 비판은 중국 화엄사상가들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ꡔ大乘起信論ꡕ敎說은 理事無碍이고, 이에 대해 華嚴思想은 事事無碍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의상계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답변】확실히 그렇게도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ꡔ道身章ꡕ에서는 三乘緣起와 一乘緣起의 차이를 직접 대비하여 논하는데, 이런 예가 중국 화엄에 존재하는가?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 ꡔ大乘起信論ꡕ에 유래하는 것으로 보이는 교리를 華嚴思想과 직접 대비하여 비판하는 자세이다. 중국화엄에서는 全佛敎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ꡔ大乘起信論ꡕ은 ꡔ華嚴經ꡕ에 비해 낮은 교리로 설명되지만, 華嚴敎理의 核心과 一對一로 비판한 것은 아니다.


Keywordː

義相, 義相系 華嚴思想, 無住, 一乘法界圖, 法界圖記叢髓錄, 大乘起信論, 五尺成佛論

 



The Hua-yen Thought of Uisang Lineage and Its Position in Silla Buddhism


SATO Atsushi



This paper discuss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Hua-yen thought of Uisang (625-702) and his successors within the context of Silla Buddhism as well as Chinese Hua-yen thought, offering the following conclusions. First, the modes of transmission are taken to be oral instruction 口傳性 and mysterious interpretation 祕義性. Though their characteristic doctrines are based on standard Chinese Hua-yen teachings, the members of the Uisang lineage chose to label it as "mysterious interpretation," despite the fact that its real application has been through verbal discussion, rather than through texts, which in turn implies a seeking of the essence of the Hua-yen Sutra. This kind of approach is not found in the works of native Chinese Hua-yen masters. Another distinctive approach of Uisang is that of seeing the characteristic of thought to be apprehension of the truth directly through the body 五尺成佛思想. This is based on the view of non-abiding 無住 and seeing truth in individual phenomena, rather than as universal principle. In this respect, the discourse of the Awakening of Faith 大乘起信論 is criticized for its centering on the teaching of universal truth. In Chinese Hua-yen, on the other hand, the Awakening of Faith 大乘起信論 is criticized from the Hua-yen perspective, but is nonetheless well-used as a tool to criticize the positions of the Chinese Faxiang school 法相宗. This is a move not made in the Uisang lineage. In this respect the Uisang lineage also distinguished itself from other major streams of Silla Buddhist thought, most notably that of Wonhyo, who utilized the Awakening of Faith as a hermeneutic tool to reconcile the doctrinal differences found in the various streams of East Asian Mahayana.


1) 義湘系華嚴學派의 人物․文獻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金相鉉[1991]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여기에 의거한다.

 


2)拙稿[1998]「義湘系華嚴文獻に見える論理-重層的敎理解釋」, 同[1999]「義湘系華嚴思想における無住」, 同[2000]「義湘系華嚴學派の基本思想とꡔ大乘起信論ꡕ批判-義湘と元曉の對論記事の背後にあるもの-」, 同[2001]「如來藏の鏡と華嚴の鏡-義湘系華嚴學派におけるꡔ大乘起信論ꡕ批判の一例」

 


3)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이는 것이 ꡔ古記ꡕ이다.

 


4) 均如ꡔ十句章円通記ꡕ所引ꡔ十句章ꡕ의 다음 예를 참조. 우선, 「二隨文取義有五種過」에는 「融,問琳德,何故一中十盡,十中一不盡耶,…(中略)…琳德歎曰,此乃昔相元師,於相德前所問之義也,汝今亦問,歎已答言」(ꡔ十句章円通記ꡕ卷上,48c-49c)가 있고, 또 「六寄因陀羅彰義辺際」には,「欲彰上融義,內無中心,外無辺際,寄因陀羅也,琳德云,喩如世界旋,無始終無內外別,如用手寸廻水成波,因陀羅亦爾,一指波中,法界一切世界,現前安立,此諸世界一一塵,攝入一指波,亦此一指波中,法界亦復如是重重無盡也,如一塵中現一尺,十步千步等亦爾,若向內尋心,入入猶外,向外尋辺,出出猶內,何以故,入於白玉,黑玉帶白玉,影入於白玉,何云黑玉,唯是內非外,反可云黑玉是外,白玉是內也,問,與微細門,何別,融德答,因陀羅彰法無盡分齊,微細微細門現法極勝貌,謂因陀羅門,一塵中,現十方世界,微細門,一塵中,現十方世界,不動遠近大小,安立貌也,問,微細相容,與一多相容,何別,琳德答,相容齊同.」(ꡔ十句章円通記ꡕ卷下,67bc)

 


5)ꡔ法界圖記叢髓錄ꡕ卷上之二(ꡔ大正藏ꡕ45․736c-737a)

 


6)ꡔ敎分記円通鈔ꡕ卷10「林德云,根本入處有八難.若知此八難,雖不見本疏,亦可謂知地論之妙旨.若不解此,則雖講一十家二十家疏,不可謂知地論人也.」(ꡔ韓佛全ꡕ4․504ab)

 


7)ꡔ法界圖記叢髓錄ꡕ卷下之二所引ꡔ古記ꡕ「此是梵體德所傳,潤玄德所授也.梵體德云,昔質應德,在世達藪,講起信論時云,若不得知花嚴經中十重解釋者,終不能得華嚴文義.又若不知起信論中八重解釋,則亦不能得此論文義也.」(ꡔ大正藏ꡕ45․767ab)

 


8)ꡔ十句章円通記ꡕ卷下(ꡔ韓佛全ꡕ4․63ab)

 


9)ꡔ叢髓錄ꡕ卷上之二(ꡔ大正藏ꡕ45․737ab)

 


10) 人名 回數        用例(回數)

1 道身 (25回:無住空,大小同一無住,無住本)

2 智通 (3回)

3 表訓 (1回: 五觀(因緣觀,緣起觀,性起觀,無住觀,實相觀),無住本法

4 眞定 (1回: 無住體,無住理)

5 神琳 (2回: 一乘平等敎中無住本體)

6 法融 (2回: 一乘無住本法,無住法性)

7 ? (1回: 無住義)

8 眞秀 (1回: 無住法性)

9 ? (19回: 無住別敎,不共無住別敎,無住本法,無住理,無住敎)

10 均如 (20回: 無住法爲中道,無住法性中道,一種無住法性,無住緣起之心,一乘無住緣起)

※지면의 제한으로 출전은 생략한다.

 


11)表訓「表訓德問相和尙言,云何無住.和尙曰.卽我凡夫五尺身稱於三際而不動者是無住也.問.若約三際分之則多種五尺耶.和尙云,以是緣之五尺故.須一卽一須多卽多也.」

 


12) 문제는「無住」를 사용하는 思想史的인 배경이다. 의상의 ꡔ法界圖ꡕ에는 「無住」의 예는 없다. 의상은 같은 것을 「不住」로 표현한다. 이것은 아직 검토의 단계이지만, 의상의 사상배경에 ꡔ維摩經ꡕ의 영향이 컸던 것은 아닌가, ꡔ維摩經ꡕ에 기본을 둔 三論敎學的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의상의 중도의와도 관련되지만, 이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의상계에서는 삼론에서 볼 수 있는 「空寂」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모든 것이 공이라는 사유는 없고,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無自性을 기본으로 해서 자기의 세계가 집약되는 점을 중시한다.

 


13)ꡔ叢髓錄ꡕ卷二之上所引ꡔ古記ꡕ「和尙曰,「所謂無著佛安住世間成正覺故」者,今日吾五尺之身,名爲世間.此身遍滿虛空法界,無處不至.故曰正覺.」(同前․758a)

 


14)ꡔ叢髓錄ꡕ卷二之上所引ꡔ古記ꡕ「心佛安住故者,息心卽佛,起心非佛.如人以水淨器,不知能淨濁水也.水淨影明,水濁影昏.心法亦爾.息心法界円明,起心法界差別.是故心安住,則法界諸法,現於吾五尺身也.」(同前․758a)

 


15) 神琳「神林之意,則一乘法界圖者,法界之法是所證,今日我心是能證.卽此能所不可得處是一,能修之人行位名乘.如是不動之軌則分齊成故,云法界也.法界法之本位,是吾五尺身.」 이 중 大正藏의 「六」을 高麗藏에 의해 「云」으로 정정한다.

 


16) 同前「所言一者,無能所中,且强分之,有能觀一有所觀一.謂若了自身心,總攝諸法,無側無遺,絶能所,則爲能觀一.卽此身心住處,爲所觀一也.」(同前․717a)

 


17)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法記ꡕ「中道者,以三世間爲自身心,無有一物非身心者故也.」(ꡔ大正藏ꡕ45․730a)

 


18) 同前「安住世間者,三乘中,出世成佛故,非安住.一乘中,以三世間,爲自身心故,云安住世間也.」(同前․757a)

 


19)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法記ꡕ「就性論之,緣前有法.何者,就緣論時,現於今日緣中之五尺是緣起本法,無側而立.故緣以前無一法也.就性論時,本有性起法體也.」(同前․723c)

 


20)「海印鏡中所現像者,吾五尺身,具三世間無別住處故,云無住.」

 


21)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大記ꡕ「訓德意,則「眞」者無住本法也.「性」者本分種也.本分種者,若指文處,初會果地玉海也.以此五海爲本識體.約此本識,後諸會中,或云種性,或云行業,或云願善決定等也.謂若上根人,直依證分,得自身心正卽法性.然此證處絶名相故,中下之人,未能信得.故說五海是汝本識之源.」(ꡔ大正藏ꡕ45․722c)

 


22)ꡔ叢髓錄ꡕ卷下之二所引ꡔ円通首座記ꡕ「且約吾身,論十對十門者,一吾五尺身,表令生解爲敎,卽是所詮爲義,二吾五尺身,卽同法性爲理,經云,衆生卽法身,法身卽衆生,故五體四大,歷然差別爲事,(後略)」(ꡔ大正藏ꡕ45․763c-764a)

 


23)ꡔ叢髓錄ꡕ卷下之二所引ꡔ円通首座記ꡕ「不可目之法性者,法界法之名位不動處也.若今我五尺身者,唯五尺是耳.此五尺上,不許更目佛名法名故,云不可目之法性也.此五尺名,正卽法體,」(ꡔ大正藏ꡕ45․766a)

 


24)ꡔ叢髓錄ꡕ卷上之一所引ꡔ眞記ꡕ「法性者,微塵法性,須彌山法性,一尺法性,五尺法性.若約今日五尺,法性論者,微塵法性,須彌山法性等,不動自位,稱成五尺.不增小位,不減大位,而能成也.」(ꡔ大正藏ꡕ45․731下)

 


25) 均如ꡔ十句章円通記ꡕ卷下所引ꡔ十句章ꡕ「四因果相形現義無盡」에는 「章曰,四因果相形現義無盡者,喩如一尺木,十步木,相形,方得長短位,若不形,不得長短位,是故知一尺是長位,十步是短位,若一尺無長位,竝在一處,相形不得十步長位,是以請一尺人中,擧十步幢受與,請十步人中,受與一尺,如是相形法界一切相對諸法,准例之,是故諸法,隨擧一法,皆盡攝一切,無所相形,無勝劣品,如是法中,始論一乘法相也,以此義驗,定知,知前五重敎義,一一互具五重,無勝劣相對也,互形奪,准上解之.」(ꡔ韓佛全ꡕ4․66上). 또 「十隔越科文成義自在」にも「章曰,十隔越科文成義自在者,…(中略)…想公云,最上一尺瓦,稱一尺分齊,踏二十步,何以故,無瓦不成舍,無瓦不成舍故,諸緣亦不成,是故一尺,直是二十步,乃至,是一寸非增減一尺也,問,柱本一尺石,是二十步耶,答,是也,問,壞本緣耶,答,只一尺則二十步,何一尺位動哉,同異相中,欲成全力,一尺石在柱本,破全力,至不作際時,在柱頭在瓦上,能成舍也.」(ꡔ韓佛全ꡕ4․79下-80上)

 


26) 石井公成[1996]

 


27) 이것에 관련하여 의상계 저술에서는 「眞心」「妄心」「觀心」등과 같이 心에 관한 기술은 극소수이다. 단지, 의상이 말한 언어로서는 「用心」이 있다. 또 ꡔ叢髓錄ꡕ所引ꡔ法記ꡕ에도 「心을 조용히 하면 운운」과 같이 마음에 관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實習에 관한 구체적인 표현은 없다. 의상계에서는 본문 중에 서술하는 것 같이 「자기와 세계가 일체라는 확신」만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언행은 높은 경지로부터 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괴로움이나 종교적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도 단순한 논리뿐으로, 실은 실천 혹은 체험과 그 傳授의 세계에서 왕생하여 논리는 단순하게 된다. 또한 「實踐」에 대해서는 관법․대화 등이 생각되지만, 현존하는 의상계 문헌에서는 그다지 볼 수 없고, 다음의 두가지 정도뿐이다. 華嚴觀(義湘と直弟子智通),六相觀(法融)

 


28)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古記ꡕ「又林德說法之時,大雲法師君白言.緣起分說法如是.證分說法云何.林德黙然有頃云.答之已了也.雲法師君未會.林德云.君之起此問時,所坐之床,及一切法界諸法,同時發問者是耳.但君問而餘一切法不起問者非也.法師君白六,法界咽喉無盡舌端同時發問者,緣起分之問乎.林德云,三世間法同時發問者,證分之問.稱於黙然不動者,證分之說.三世間法各住自位本來不動者,證分之聞也.」(ꡔ大正藏ꡕ45․722a)

 


29)ꡔ叢髓錄ꡕ卷上之一所引ꡔ道身章ꡕ「問.西風波非東風波.東風波非西風波.但約二波之水體不二義,得言卽門.則約二波不得卽門.若爾,但約此事彼事理體無二,得言卽門.何得二事,不除論相卽門耶.答.若放二風,水無二波.旣無二波,以何卽何乎.旣以此卽彼.故可知不除二波,論相卽耳.非約理體論相卽矣.此中,此波之水,與彼波之水,□體是一.故波雖無盡,體言卽一者,三乘義耳.若非此波卽無彼波,若非彼波卽無此波,是中門.此彼非自性故,在於彼波.彼波非自性故,在於此波.是卽門者一乘也.」(ꡔ大正藏ꡕ45․724a)

 


30)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眞記ꡕ「若約三乘論者,自性淸淨心,隨無明之風,緣成差別萬法也.若自一乘義,則以緣前無法故,非先有眞性而隨緣成.」(ꡔ大正藏ꡕ45․722b)

 


31)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法記ꡕ(ꡔ大正藏ꡕ45․723b),均如ꡔ釋華嚴敎分記円通鈔ꡕ卷10(ꡔ韓佛全ꡕ4․501a)

 


32)ꡔ叢髓錄ꡕ卷上之二所引ꡔ大記ꡕ「又當始覺同本覺之位,有凡聖一異之病故,以同相治之.謂卽同本覺之日,執凡聖一身故,以異相治之,凡聖各異故,云不一.以同相治之,凡聖一量故,云不異也.」(ꡔ大正藏ꡕ45․737bc)

 


33) 다만, 의상계에서 ꡔ起信論ꡕ이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法融의 弟子 質應이 「ꡔ起信論ꡕ의 八重解釋을 연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으로부터 의상계도 ꡔ起信論ꡕ을 중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다음에 언급하듯이 重層的 敎理解釋과 관련된 기사이고, 거기서 ꡔ起信論ꡕ은 어느정도 변형된 형태로 해석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元曉나 中國華嚴學派 등처럼 교리적 회통을 목적으로 했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34) 木村淸孝[1980]

 


35) 예를 들면 崔柄憲[1980]등.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282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