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세친의 식전변설

수선님 2019. 6. 2. 12:22

임 병 환*

【주제분류】불교철학, 유식사상

【주 요 어】세친, 사현, 식전변, 아뢰야식, 삼성

【요 약 문】

유식교학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는 식론(識論)과 삼성설(三性說)이다. 일체가 식의 표상(表象)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식론은 유식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주제로 세친은 그의 저서 ?유식삼십송?에서 이전에 논의되어오던 식론을 보완하여 이른바 식전변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그의 완성된 사상을 보이고 있다. 식의 전변이란 삶의 시원이 되는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八識)과 그에 부수하는 여러 심소들이 상호 인과관계를 이루는 연기적(緣起的)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삼성설이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세 가지 속성으로 연기의 세계를 말하는 의타기자성과 범부의 전도된 세계를 말하는 변계소집자성과 진여의 세계를 말하는 원성실자성을 말한다.

세친은 30개의 짧은 게송에서 무려 19개의 송으로 식전변의 세계 곧 경험세계가 생멸하는 메커니즘을 자세히 보이고 이어서 그 세계가 의타기자성의 연기의 세계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범부들의 전도된 세계가 형성되고 동시에 그곳에서 진여의 원만한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열반의 세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시하고 있다.

 

1. 머리말

유식(唯識, vijñaptimātra)사상은 중관(中觀)사상과 더불어 대승이라고 하는 큰 수레의 양 바퀴를 이루고 있는 사상체계이다. 이 사상은 일체가 오직 식의 표상(表象, vijñapti)뿐이며 외계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가사(yogācāra, 觀行者)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의 선정체험을 기반으로 해서 아뢰야식연기설[識論]과 삼성설(三性說) 등의 핵심적 교학과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이나 걸린다는 점수적(漸修的)인 수행론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에 대한 이론전개는 공(空)사상에 기초하면서도 아비달마적인 특징을 보인다.

?유가사지론석?에서는 당시에 유식사상이 흥기하는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 “불멸 후 중생들이 부파불교의 유견(有見)에 집착하는 그릇된 풍조에 대하여 용수가 ?중론?을 지어 그 잘못을 물리쳤는데, 후대에 다시 용수의 공(空)을 잘못 해석하여 공견(空見)에 집착하는 잘못이 있게 되었고, 그러한 풍조를 시정하기 위하여 유식사상을 펼치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대립하고 있던 아비달마교학의 유견과 중관학파의 공견이 종합․지양되어 식일원론(識一元論)의 유식사상체계에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유식사상의 여러 주제들은 ?해심밀경?이나 ?유가사지론?에서는 별개로 다루어지다가 무착(Asaṅga)의 ?섭대승론?에서 종합․체계화되며, 이후 세친(Vasubandhu)에 의해서 보완되어 이른바 초기유식사상은 완성된다. 세친은 먼저 ?유식이십론?을 지어 일체만법이 유식[唯識無境]임을 논증하고, 이어서 ?유식삼십송?을 지어 만법유식인 장(場)에서 우리들의 경험세계가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을 식전변(識轉變, vijñāna-pariṇāma)이라는 그의 독자적인 용어로 설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식론을 보완한 완성된 아뢰야식연기설[식전변설]이다. 세친은 불과 30개의 짧은 게송에서 무려 19개의 게송을 할애하여 식전변의 구성요소[質料因]를 명시하면서 그것들의 작용에 의하여 경험세계가 생멸하는 메커니즘을 보이고, 동시에 삼성․삼무성설로써 그 식들이 일으키는 연기적 현상의 본질이 공성(空性)임을 천명하고 있다.

세친은 그의 만년의 저작인 ?유식삼십송?에 주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세친유식의 핵심용어인 식전변의 의미에 대하여 예부터 여러 논사들과 후대의 학인들에 의하여 많은 해석이 있어왔다. 먼저 인도의 유력한 논사들인 안혜(Sthiramati)와 호법(Dharmapāla)의 해석이 모범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이에 대한 현장(玄奘)의 한역문구에 대하여 중국 법상종의 학인들은 아주 복잡한 해석을 덧붙였고 그리고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또한 안혜․호법 양사의 해석에 대하여 다시 대동소이한 해석을 가해오고 있다.

안혜는 그의 범본주석서인 ?유식삼십송석?에서 전변이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인이 변하여 그 원인과는 다른 새로운 결과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인과(因果)의 상속의 메커니즘이 변화에 있음을 말하고, 이에 비해 ?성유식론?에서 호법은 전변은 내식[內識]이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으로 사현[似現]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인과상속의 과정을 인식론적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본래 안혜․호법 양사는 수학하고 활동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세친유식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세친 유식에서 식전변이란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해서 8식과 그에 부수하는 다수의 심소들이 순환적이고 입체적인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에 의해서 경험세계가 현현한다고 하는 기본적 의미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비록 양사가 표현하는 패턴이 다른 것임에도 나가오가진(長尾雅人)은 ?中觀と唯識?에서 거의 같은 해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학자들은 대부분 안혜․호법 양사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면서, pariṇāma(轉變)라는 산스크리트어에 관한 어원분석을 하고, 전변이라는 말이 상키야학파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변과 같은 말이나 그 사용개념이 다르다는 것과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경량부(輕量部)에서 사용한 용어를 세친이 유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또는 변화를 의미하는 전변이라는 단어가 초기불교 이래 각 학파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를 살펴보는 등등의 분석들이 대부분이다. 또는 안혜가 말한 전변에서 인과상속이 동시(同時)인 경우와 이시(異時)인 경우가 모두 포함된다는 요코야마고우이치(橫山紘一)의 주장과, 동시인 경우에만 전변이라고 주장하는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의 주장과 같은 세세한 분석 등도 있다. 물론 이러한 세밀한 분석이 언어문자로 표현된 경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소양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국소적 분석에 치우치는 것은 마치 나무 몇 구루만을 지나치게 관찰하다가 산 전체의 숲을 보아야 하는 일에 소홀한 경우와 같다고 생각된다.

세친이 말하는 식전변설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식교학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식설(識說)과 삼성설(三性說)을 함께 고찰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발전된 유식사상에서는 식설과 삼성설은 결합되어 현상이 성립하는 인식론적 과정과 그것의 존재론적 진상이 함께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심밀경?이나 ?유가사지론?의 단계에서는 이 두 이론의 연관성이 명시적으로는 드러나지는 않고 있으나, ?중변분별론?과 ?대승장엄경론?의 단계에서 의타기성이 허망분별의 식과 결합되어 논해지기 시작하고 ?섭대승론?에 이르러서는 아뢰야식과 종자설 그리고 유식무경설을 포섭하는 삼성설이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세친이 ?유식삼십송?의 짧은 게송에서 경험세계가 현현하는 데 있어서 질료인이라고 할 수 있는 50여 개의 심소(心所)를 낱낱이 거론하고 곧바로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삼성․삼무성설을 설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식전변설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시하고자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제 2장 ‘식전변의 메커니즘’에서는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과 그에 부수하는 51심소(성유식론에서 열거한)들이 순환적․입체적으로 연기적 관계를 맺어 경험세계를 산출하는 메커니즘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 3장 ‘식전변과 존재의 실상’에서는 식론과 삼성설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의타기성이 원성실성과 불일불이(不一不異)한 관계에 있듯이 의타기성인 식전변의 범부의 삶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가교(架橋)가 되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2. 식전변의 메커니즘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안혜와 호법—현장 모두 주석서의 첫머리에 세친이 이 송을 지은 목적에 대하여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주어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게 하기 위해서 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번뇌는 아견(我見)과 아집(我執)에서 일어나므로 인무아를 알게 하여, 또 소지장이란 대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이므로 법무아를 알게 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겠다는 말이다.

초기불교 이래의 무아사상은 부파불교부에서 아공법유론(我空法有論)으로 이해되었고 이를 비판한 중관학파는 연기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법도 공하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 我空法空)을 주장했고, 유식학파는 아공법공의 주장에는 중관학파와 같은 노선에 있으나 우리들의 생래적(生來的)인 인식작용 즉 식의 활동 자체는 의지처[假有]로써 그 존재성을 인정하고 다만 그 식의 활동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부정함으로써 법무아를 논증하고자 했다. 세친이 ?유식이십론?에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세간에는 아법(我法)의 현상이 있으며 경전(經典)에서도 아법의 현상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라는 반론에 대하여, ?유식삼십송?에서 ‘아법은 실재하지 않으나 범부의 허망분별의 의식세계인 식의 전변에서 가설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변(轉變 ; pariṇāma)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사태가 인연생멸을 되풀이 하는 변화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이론인 연기설(緣起說)의 내용을 이루는 한 개념이다. ?아함경? 곳곳에서 반복하여 설하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교설은 불교사상이 고정불변의 실재론을 부정하고 연기론에서 출발했음을 시사한다. 또 ?잡아함?에서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라는 교설은 무아이면서 인과가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인과의 상속은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단히 변화하면서 이어지는 연기의 세계에서는 고정불변의 주체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식전변은 식이라는 어떤 고정된 것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유식삼십송?에서 “아뢰야식은 폭류처럼 변한다.”라고 설하고 있듯이, 유식의 식은 찰나멸하면서 변화하고 이어지는 흐름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로부터 변화를 전변이라고 말하는 바라문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안혜(安彗 ; Sthiramati)가 전변이란 “변이성(變異性 ; anyathātva)이다. 인(因)의 찰나가 멸하고 인의 찰나와 성질이 다른 과(果)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은 식이 찰나멸하면서 변화하는 흐름의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유식론?에서 호법—현장(Dharmapāla—玄奘)은 “전변이란 내식(內識)이 변화하여 아법(我法)의 외경상(外境相)을 사현(似現)하는 것이다.”라는 주석은 식의 인식작용에 중점을 둔 해석이지만, 식의 흐름과 변화를 의미하는 점에서는 안혜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허망된 것(假設, upacāra)에 의지해서 갖가지 아와 법의 모습이 생겨난다.

그것들은 식의 전변에 의지하는 것이며, 이 전변하는 모양은 세 가지이다.

이숙(異熟識)과 사량(思量識)과 요별경(了別境識)이 그것이다.

아(我)란 자아, 유정, 명자(命者) 등 인격적 주체를 의미하는 말이고, 법(法)이란 여기서는 온(蘊), 색(色) 등 사물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가설이란 어떤 것이 그곳에 없는데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현상이 성립하는 것에는 그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유식논사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아와 법은 비존재이지만 그것들이 사현(似現)되는 장이 식전변이라는 것이다. 유식학파의 초기 논서인 ?유가사지론?에서도 ?반야경?의 공․무자성을 오해해서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그들을 소위 악취공자(惡取空者)라고 부르고 “만약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에서 누가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설하겠는가”라고 힐문하여, 어떤 사태가 성립할 때에는 그것이 의지하는 장(場)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에 불교 내외에서 대론을 위한 형식논리가 발달되어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식이 전변한다는 것은 심층심리인 아뢰야식과 그로부터 전변되어 나온 7개의 식(末那識, 眼, 耳, 鼻, 舌, 身, 意識)과 51개의 심소들이 순환적으로 인과관계를 맺는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식들의 연기적 인식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인식활동이란 호법—현장의 틀로 말하자면, 식[識體]이 인식주관[見分]과 인식객관[相分]으로 분화되어 내식[아뢰야식]에 종자로서 증장되어있는 외경을 닮은 사태가 상분에 영상으로 떠오르고 그것을 인식주관인 견분이 외경의 실체로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성유식론?에는 이와 같은 관계를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삼법전전(三法展轉), 인과동시(因果同時)”라고 설하고 있다. ‘종자생현행’이란 아뢰야식 안에서 성숙된 종자가 표면심으로 전변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등류습기 곧 명언종자로부터 말나식과 6식이 발생한다. 그리고 발생한 식들의 인식활동이 범부에게 아(我)와 법(法)으로 계탁(計度)된 경험세계이다. ‘현행훈종자’란 그 현행한 표면심이 찰나에 멸하면서 그 습기를 아뢰야식에 종자로서 이식하는 것을 말한다. 자세히 말하면 말나식과 6식이 등류습기를, 6식 가운데 선과 악의 마음이 이숙습기(異熟習氣)를 각각 훈습한다. 그리고 훈습된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생장 발달[增長]해서 새로운 힘을 일으키는 힘을 갖는데 이 과정을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 한다. 따라서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 그리고 종자생종자의 관계는 입체적․순환적인 흐름이다.

‘삼법’이란 최초의 종자, 다음의 현행, 현행이 만든 종자이며, 이 세 법(法)은 찰나멸하면서 변화를 겪은 서로 다른 법들이다. 그리고 ‘인과동시’라고 하는 것은 인(因)과 과(果)가 힘을 주고받는데 있어서 멸한 전법(前法)이 후법(後法)과 힘을 주고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인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우유가 요구르트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요구르트는 우유와 달라져 있지만 동시에 우유에서 요구르트로의 변화에 시간적 단절을 생각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또한 식전변을 인전변(因轉變, 因能辯)과 과전변(果轉變, 果能辯)으로 나누고 다시 과전변은 이숙(아뢰야식)전변, 사량(말나식)전변, 요별경(前6식)전변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인전변이란 아뢰야식 속에서 선, 악, 무기 등 여러 종자들이 마치 흙 속에 묻힌 씨앗처럼 점점 성숙되어 현행으로 전변하는 잠재적인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선의 현행은 선종자를 악의 현행은 악종자를 무기의 현행은 무기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저장한다. 이처럼 인과가 같은 성질의 종자를 등류습기(等流習氣, 等流種子)라고 하고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등류습기는 현재 개인이 경험하는 제현상을 산출하는 종자이고, 이것을 명언종자라고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활동은 언어적 개념에 의하기 때문이다. 또 선악의 행위는 업종자를 아뢰야식에 훈습하고 이 업종자에 의해 업의 과보가 생기는데 이것은 미래의 자기를 형성하는 종자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에 명언종자와 업종자가 잠재적 힘을 갖는 것을 인전변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과전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개체가 전생의 업의 과보에 의해 인간으로 태어날 때 아뢰야식이 모태를 빌어 특정한 개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개체의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7전식이 생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아뢰야식과 7식을 3부분으로 나누어 이숙전변, 사량전변, 요별경전변이라고 한다. 이상의 과전변에 대한 이론은 안혜의 설이고, ?성유식론?에서 호법—현장이 말하는 과전변은 인전변에 의해 성립된 8식 각각의 자체분에서 인식주체인 견분(見分)과 인식대상인 상분(相分)이 생겨 인식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인전변(인능변)에 관해서는 안혜의 설과 호법—현장의 설이 거의 같다.

유식의 세계는 식일원론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8식의 전변[인식작용]에 의해서 범부의 경험세계가 지속된다. 세친이 식이 전변하는 양태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소상히 설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미혹한 삶이 발생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근본 원인과 모습을 알게 하여 그것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병에 걸린 사람에게 평소의 잘못된 식생활이나 오염된 환경의 여러 모양을 말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질병이 야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1) 이숙전변

업과 과보의 상속문제, 윤회의 주체에 관한 문제, 생명이 지속되는 근거 등에 대하여 부파불교의 논사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왔다. 그리고 유식학파는 그러한 논의들에 대하여 아뢰야식과 말나식이라고 하는 심층의식을 더 세워 종래의 6식(六識)이 아닌 8식(八識)의 심식구조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유식의 경론(經論)에 의하면 아뢰야식은 신체의 기능을 유지하고, 유정이 사는 세계[器世間]를 유지하고, 모든 업의 습기[종자]가 저장․증장되어 경험세계를 사현하고, 기절을 하거나 멸진정에 들어 의식이 없어져도 계속 활동하며 우리가 범부로 있는 한 끊임없이 생사가 되풀이 되는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근원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현상이 생한다는 이론은 바라문계통의 상키야(數論)학파에서 말하는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현상이 유출된다는 이른바 그들의 전변설과 유사한 외양을 갖는 이론구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식학파의 아뢰야식은 찰나멸하면서 변화해가는 범부들의 망식(妄識)이어서 순수의식이니 원질과 같은 개념과는 다르다. ?해심밀경?에서 “아뢰야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고, 일체 종자는 폭류(瀑流)와 같다. 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뢰야식을 불변의 자아(ātman)라고 여길까 우려해서 범부들에게는 설하지 않는다.”라고 설하는 것은 당시에 아뢰야식에 대하여 불교 내외의 다른 학파들과 논쟁이 심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뢰야식이 폭류와 같다고 하는 것은 흐르는 물줄기가 동일하게 보이지만, 연이어 새로운 물이 흘러가면서 형성되듯이 아뢰야식도 찰나로 생멸변화하면서 인과의 상속이 부단히 계속되면서 변화해간다는 의미이다.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은 어원에서 보더라도 ālaya가 ‘머물다’, ‘저장한다’라는 뜻이 있어서 장식(藏識)으로 의역(意譯)되기도 하고 영어권에서는 store로 번역되듯이 무엇인가를 그 안에 담는 창고라는 의미로 그 곳에 모든 업이 종자로써 저장되고 성숙되고 변화되어 인연에 따라 경험세계로 나타나고 내세로 생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와 같은 창고로서의 아뢰야식과 그 안에 담기는 종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섭대승론본?은 ‘종자는 모든 법을 발생시키는 특수한 힘[功能差別]이며, 종자와 아뢰야식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의 주석에 따르면 종자는 용(用)이며 아뢰야식은 체(體)로써 용은 작용을 말하고 체는 그 작용의 총화가 된다.

아뢰야식은 심층의식이기 때문에 우리의 6식으로는 아뢰야식의 인식작용을 감지할 수가 없지만 아뢰야식도 식으로써 인식활동을 하며, 그 인식대상은 이식된 종자와 개체의 몸과 유정이 살고 있는 세계[器世間]라고 한다. 아뢰야식이 이들을 유지[관리]한다는 것은 어느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인식으로써 자기 안에서 인식주체인 견분이 인식대상인 상분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능에서 아뢰야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고도 한다. 아뢰야식의 인식작용에는 다섯 가지 심소(五遍行心所) 곧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만이 함께하는데, 수(受)는 즐겁고(樂受), 고통스럽고(苦受),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不苦不樂受) 3가지 상태 중에서 불고불락수와만 함께하고, 선(善)이나 불선(不善)의 심소가 없어서 선심이 되거나 악심이 되어 활동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아뢰야식의 성질을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중성(中性)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완전한 중성이 아니라면, 선, 악 등의 다양한 종자들을 받아들여 그 습기대로 증장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의 활동이 이숙전변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숙(異熟, vipāka)이란 ‘다르게 성숙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심층심리인 아뢰야식의 한 속성을 말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이숙식이라고도 부른다. 또 원인(因)과 결과(果)가 성질을 달리 하는 것도 이숙이다. 예를 들면, 과거세에 내가 악행을 지어서 그 과보로 현재 힘든 일에 종사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면 그 원인은 악이었지만 그 결과인 고통이나 가난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식교학에서 말하는 심소(心所)는 유부에서 말하는 심소를 거의 다 수용하면서 보완한 것들인데, 심소란 마음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마음작용들이다. 이것들을 유식학파가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으로 심과 심소들의 인과관계는 일상의 정서와 부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식과 반드시 함께 한다는 다섯 가지 심소(五遍行心所) 곧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은 마음이 어떤 대상과 접할 때 최초로 일어나는 반응들이다. 예를 들면 천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 그 소리에 대한 접촉이 있고, 무엇일까 하는 관심이 있을 것이고 좋고 싫음이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생각들이 이어질 것이다.

이숙의 전변 곧 아뢰야식의 활동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수행을 통하여 그 질을 바꾸어야 하는데 이것을 유식수행론에서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은 범부의 근원적인 망식(妄識)으로 수행을 통하여 그 망식이 식의 활동을 멈출 때 즉시 그것이 식(識)에서 지(大圓鏡智)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을 아뢰야식을 멸해야 한다느니 소실시켜야 한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식삼십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윤회의 주체인 범부의 아뢰야식은 아라한(arhat)의 계위(階位)에서 소실된다고 한다. 아라한은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성자이고 대승의 무학과위(無學果位)라고 한다. 아무튼 아라한의 계위에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아뢰야식은 소실되고 바로 그 자리가 대원경지(大圓鏡智) 곧 진여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2) 사량전변

사량전변이란 말나식의 활동을 말한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전변되어 나온 식이며 자기를 산출한 아뢰야식을 자기라고 집착하는 마음이다. 제 6의식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자아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식이다. 자아집착으로 더러워져 있다고 해서 염오의(染汚意)라고도 불리며 무시이래로 훈습되어온 범부의 선천적인 마음이다. 항상 자기중심적인 생활이 이 식에서 기인하나 심층심리의 미세한 활동이라서 우리의 의식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식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도 이 식은 활동을 계속하고 5변행심소 이외에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의 4번뇌와 함께 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나식이 4번뇌의 더러움에 덮여 있으면서도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별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치․아견 등의 수행을 방해하는 번뇌의 더러움으로 덮여있지만 그것들이 불선(不善)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심층심리에서 작용하는 미세한 심리이기 때문에 미래세에 선악의 어떤 결과를 초래할 힘을 갖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말나식을 유부무기(有覆無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식은 아라한, 멸진정, 출세간도에서 소멸된다고 한다.

3) 요별경전변

요별이란 인식작용을 말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이건 말나식이건 식인 한 요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境)을 인식하는 전6식의 작용은 미세하지 않고 대략적이기 때문에 요별경이라고 부른다. 전6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의 전5식과 의식이다. 이 전6식은 초기불교 이래 언급되어온 감각, 지각, 사고 등의 표층심리에 해당하는 마음작용들이다. 전5식은 감각적 인식이며, 그 인식대상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한정한다. 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활동하면서 그 결과를 인식하는 것(五俱意識)과 의식만이 단독으로 활동(獨頭意識)하기도 한다. 전5식의 기능은 직관적 감각이기 때문에 거기에 선악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의식과 함께 활동하기 때문에 선, 악, 무기의 3성이 된다고 한다. 의식은 전5식의 대상을 실체시하여 법집(法執)을 일으키고, 심층의식을 대상으로 하여 아집(我執)을 일으킨다고 한다.

?성유식론?에서 설하는 6식과 함께하는 심소는 변행심소(遍行心所), 별경심소(別境心所), 선심소(善心所), 번뇌심소(煩惱心所),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부정심소(不定心所) 등 6부류 51종이나 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심소들의 작용은 범부들의 의식패턴이다. 예를 들면 별경심소라는 것은 수행을 추진하는 마음인데, 깨닫고자하는 욕망(欲)이 있어야겠고, 가르침에 대한 수승한 이해(勝解)가 있어야겠고, 좋은 기억력(念)도 필요하고, 동요 없이 집중(定)해야 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慧)가 필요하다는 실천적인 심리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심소들도 모두 그러한 패턴들이다. 이 6식의 전변은 범부들의 일상(日常)이 된다. 51개 심소들을 보면 선이 있고 악이 있고 깨닫기 위한 몸부림이 있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과학적 지식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거나 폐기되는 경우를 보면서 살고 있다. 비근한 예로 물리학, 천문학, 의학적 지식 등이 그러함을 보아왔다. 그러나 우리 범부의 정서는 지금처럼 태양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뇌의 구조가 그대로 있는 한, 일상의 자연스런 삶 속에서는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3000년 전이건 3000년 후이건 범부의 정서패턴은 태양이 있는 한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천 년 전에 부모에게는 효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성적 추리로써 당위시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자식 간에 존재하는 자연스런 윤리정서이기 때문이다.

세친이 낱낱이 열거하고 있는 심소들은 우리들 범부의 정서패턴으로 수행으로 그 정서패턴의 질을 완벽하게 변화시키지 않는 한, 범부의 전도된 경험세계를 창출시키는 영원한 질료인이 되는 것이다. 유식교학으로 말하면 그러한 정서는 무시이래로 훈습․증장되어 온 것인데 쉽게 바뀌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식수행론에서 범부가 부처의 지위에 오르는 데는 3 아승기겁이나 걸린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이 전변[인식활동]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 유식의 세계는 이 8식이 전변하는 세계일뿐이며, 이밖에 따로 아법이 있다는 생각은 망분별이다. 세친은 ?유식삼십송?의 제 1송에서 ‘아와 법은 식전변의 장에서 가설된다.’라고 주장하고 이어서 그 전변하는 양상을 상세히 보이고 제17송에서 다시 범부의 경험세계가 식전변에 의해 가설됨을 강조하면서 일체가 유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모든 식이 전변하여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이치에 의해서 그것들[實我實法]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는 오직 식뿐이다.

이 모든 식이란 앞에서 말한 8식과 그에 부수하는 심소들을 말하고, 분별이란 식의 작용을 말한다. 식이 전변하여 인식주체인 견분과 인식대상인 상분으로 나누어져서 아와 법이 가설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으며 일체는 오직 유식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존재하는 것들의 세 가지 속성을 말하는 삼성․삼무성설을 설하여 식이 전변하는 세계의 본성이 공성임을 말하고 있다.

3. 식전변과 존재의 실상

유식교학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은 식론과 3성설이다. 식론은 유식무경을 표방하는 유식학파의 성립의 기반이 되는 이론으로, 세친은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하여 8식과 그에 부수하는 여러 심소(心所有法)들이 인과법칙에 따라 생멸․변화하는 이른바 아뢰야연기설을 식전변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하여, 식론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삼성설은 ?반야경?과 중관사상의 부정의 논리에 대한 유식학파의 반성적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속성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세속과 공성의 세계가 별개가 아님을 보여준다. ?해심밀경?에서 언급되는 삼자성은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 등이다. 이것들은 식론에 의해 전개된 인식구조를 계승하고 있는데 ?중변분별론?에서는 ‘허망분별은 존재하며 의타기성이 허망분별임’을 설하고 ?섭대승론본?에서도 ‘허망분별에 포섭되는 모든 식’이라고 설하고 ?성유식론?에서도 ‘여러 연으로 생기한 심왕 심소의 체와 상분 견분 그리고 유루 무루가 다 의타기성’이라고 설하고 ?유식삼십송? 제17송에서도 ‘식의 전변이 허망분별의 의타기성임’을 설하여, 식의 기능과 삼성설이 이론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삼(자)성설은 존재의 속성이 있음(有)을 말하는 것이어서 곧바로 삼무(자)성을 설하여 그 자성이 공함을 말하고 삼자성과 삼무자성은 표리(表裏)관계에 있음을 보인다.

의타기(자)성(paratantra-svabhāva)은 연기(緣起)를 의미하는 유식논사들의 신조어(新造語)로, 한역에서도 보이듯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존재 형태’ 곧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을 말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과 그 심소들이 의타기자성이다. 범부가 무시이래로 아뢰야식에 훈습되고 증장되어온 습기[종자]로 말미암아 식이 견분 상분으로 분화되어 허망분별[인식작용]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식전변이며 아뢰야연기이며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범부는 그 연기하는 현상을, 아법(我法)으로 사현(似現)된 현상을, 허망분별의 현상을 실체시하여 그것들을 실아(實我)․실법(實法)으로 계탁(計度)하는바, 이것이 변계소집(자)성이며 그것은 마치 눈병이 심한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머리카락 같은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다. 그리고 의타기의 식으로부터 변계소집자성이 제거된 상태 다시 말하면 오염된 의타기자성이 청정하게 될 때 그것이 그대로 원성실자성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자성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유식삼십송?에서 세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타기자성이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떠난 것이 원성실자성이다.

이어서 연기의 장(場)인 의타기자성과 진여의 세계인 원성실자성이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유식삼십송? 제22송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타기자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상 등의 자성과 같이, 이것(원성실자성)을 보지 않고서 그것(의타기자성)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성실자성과 의타기자성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양자는 단절되어 있어서 범부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양자가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뜻에서 다르지 않다(不異)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전혀 같은 것이라면, 염오의 세계가 진여의 세계와 같아서 범부가 수행할 필요가 없게 되는 모순에 처하게 되어 다르다(不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양자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해심밀경?에서도 ‘승의제와 유위제법이 불일불이하다.’라고 설하는 데서 볼 수 있고, 대승불교를 일으켰든 사람들의 ‘생사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이다(生死卽涅槃).’라는 선언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식교학에서는 인연소생의 연기하는 세계 곧 의타기의 세계는 가유(假有)로서 그 존재성을 임시로 인정한다. 다시 말하면 식의 연기적 활동인 식전변의 세계는 가유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범부의 전도된 망상[변계소집]이 일어나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수행에 의한 완성된 세계 곧 원성실성의 진여의 세계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세친은 인연소생의 세계, 의타기의 세계, 가유의 세계가 펼쳐지는 메커니즘을 식전변이라는 이름으로 설시하여 진여의 세계가 먼 곳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4. 맺는 말

유식교학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는 식론(識論)과 삼성설(三性說)이다. 식론은 만법유식(萬法唯識)을 표방하는 유식사상의 기저(基底)를 이루는 주제로 세친은 그의 저서 ?유식삼십송?에서 이전에 논의되어오던 식론을 보완하여 이른바 식전변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그의 완성된 사상을 보이고 있다. 식의 전변이란 삶의 시원이 되는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八識)과 그에 부수하는 여러 심소들이 상호 인과관계를 이루는 아뢰야식연기설을 말한다.

세친은 30개의 짧은 게송 중에서 무려 19개의 게송으로 식이 전변하여 현상을 이루는 메커니즘을 소상히 보이고 있다. 일체가 식의 전변에 의한 표상일 뿐이며 식의 밖에 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무아 법무아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무시이래로 외계에 실아실법이 존재한다는 망분별에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식의 전변으로 떠오르는 영상을 실체시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고(苦)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관을 수행하여 해탈하지 않는 한 그 고통은 지속되며 이것이 윤회인 것이다.

아뢰야식을 비롯한 8식과 51심소들이 인과관계를 이루는 식전변의 장(場)은 분명 수행에 의해서 정화해야할 장이지마는 또한 그곳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수행이 시작되는 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친은 곧바로 존재하는 것들의 세 가지 속성을 설하여, 식전변이 의타기의 세계이며 그곳에서 범부들이 허망분별의 식을 실아실법으로 계탁하는 전도된 삶이 지속되고 동시에 그곳에서만이 유식관의 수행에 의해 진여의 원만한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열반의 세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시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成唯識論?(?大正新修大藏經? 권31)

?攝大乘論本?(?大正新修大藏經? 권31)

?攝大乘論?(?大正新修大藏經? 권31)

?唯識二十論?(?大正新修大藏經? 권31)

?唯識三十頌?(?大正新修大藏經? 권31)

?瑜伽師地論釋?(?大正新修大藏經? 권30)

?雜阿含?(?大正新修大藏經? 권2)

?中邊分別論?(?大正新修大藏經? 권31)

?解深密經?(?大正新修大藏經? 권16)

安 慧, ?유식삼십송석?, 박인성 역, 민족사, 2000.

橫傘紘一, ?唯識哲學?, 묘주 역, 경서원, 1989.

高崎直道, ?唯識入門?, 春秋社, 1994.

________, ?唯識思想?, 春秋社, 2001.

Abstract

 

 

Concerning the theory of Vasubandhus transfortation of concsiouness

Byunghwan Lim

There are two essential subjects in Vijñānavāda. one is the theory of consciousness, another is the three types of nature of phenomena. The former is a subject which is a foundation of Vijñānavāda. Vasubandhu, in the Vijñāptimātratā-trimshikā-kārikā, shows his thought through a new term of transfortation of consciousness which develops the theory of consciousness argued by some thinkers before. Transfortation of consciousness means the course of conditioned arising which is consist of eight classes of consciousness and mental factors. The latter, that is, three types of nature of phenomena is the other-dependent nature, the imagined nature and the ultimate nature; these are a theory which means that the world of the truth and the phenomenal world are neither the same as, nor different from.

Vasubandhu argues that the world of transfortation of consciousness, which is the mechanism of the world of experience, is very the world of the other-dependent nature through 19 verses. By proving that the full enlightened world is in the world which is reversed by people, he shows that nirvana isn't away from our ordinary life.

【Key words】Vasubandhu, storehouse consciousness, transfortation of consciousness, the three types of nature of phenomena, appearing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6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