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티벳불교] 감뽀빠의 네가지 가르침 - 칼루린포체의 주석

수선님 2019. 6. 16. 12:23

[티벳불교] 감뽀빠의 네가지 가르침 - 칼루린포체의 주석

우리들은 소중한 인간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달마수행을 실천할 기회와 여건을 가질 수 있고, 광대하고 심오한 불법의 가르침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것 중에서 감뽀빠의 네 가지 가르침은 모든 수행도에 대한 간결한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가르침: 마음을 달마로 돌리기


첫번 째의 가르침은 윤회하고 있는 우리들의 상황과 세 가지 낮은 세상인 지옥, 아귀, 축생과 세 가지 높은 세상인 인간, 수라, 천상으로 향하는 다양한 목적지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들은 지옥에서 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생을 이끄는 선행과 악행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업의 과정을 통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유전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수행도의 처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달마로 돌리기 위해 윤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네 가지 일반적인 준비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

첫번 째 준비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인생의 중요함이다. 삼보의 축복과 영향에 힘입어 우리는 선행을 과거세에 쌓았고, 이 결과 우리는 현생에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났고, 달마를 실천할 기회와 여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과거세에 선행을 쌓을 수 있었고,.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현생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었다. 마치 한밤에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이 윤회하는 중생들이라면 낮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이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대단히 희유한 일이다.

두번 째 준비는 무상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정말로 잘 활용해야하고, 인단 존재의 원만한 능력을 실제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윤회의 흐름을 끊어 뛰어넘어 불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의해 완성된다. 아울러 우리는 지계와 무상함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도록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찰라 찰라로 변해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한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순간에 꺼져 버릴지 모른다. 마치 물거품처럼, 풀잎에 맺힌 아침이술처럼 우리는 없어질 수 있다.

세번 째의 준비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업보, 인과응보와 같은 업의 개념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현재와 미래의 관게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네번 째의 준비는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운 윤회의 본질을 통해 달마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숙고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절박한 죽음과 무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에 혹하게 되고, 감정의 갈등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것이 생기게 되면 생이 엄청나게 힘들어 지고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가를 모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지 못하게 되고, 우리의 상황을 좋게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우리의 삶이 끝나버리게 되고, 죽을 시점이 다가오게 된다. 우리가 안정적인 수행의 기초를 다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무런 도움없이, 두렵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준비를 통해 우리는 마음을 달마로 돌릴 수 있다.

두번 째 달마: 달마가 길이 된다

가르침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달마의 가르침이 우리 인생의 길이 되는 네 가지 달마의 두번 째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보다 훨씬 수승한 삼보에 대한 자세가 변하기 시작하고, 아울러 윤회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와 동등하거나 하열하게 된다. 첫번째의 자세는 우리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때 일어난다. 불성 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일체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깨달은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가르침을 깨닫고 전하며, 우리들에게 이 길은 보여줄 수 있는 수행자들의 집단인 승가를 알게 된다. 비밀승에서는 귀의의 대상에 삼보 외에도 라마, 이담, 호법신 등이 있다.

달마가 우리의 길이 될 때, 우리는 두 번째의 자세인 자비를 개발하게 된다. 우리와 함께 윤회하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계가 무한하고, 모든 방향으로 항하고 있으며, 중생들의 세계는 세계 끝가지 펼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어느 순간에 이 셀 수 없는 중생들 중의 한 중생은 나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셀 수 없이 윤회하는 동안 우리는 매우 가까운 업의 연결고리를 이들과 함께 했을 수도 있다. 자비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모든 생명이 똑같고, 모든 존재는 똑같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해하게 될 때 다른 모든 중생들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모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이 두 번째의 태도다.

*자비심의 개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더라도 우리 자신의 한계에 대해 정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른 중생들을 도와 줄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정말로 미약하다.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성을 성취하는, 보살의 인식을 일깨우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높은 보살의 단계에서는 혼란속에서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화현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된다.

이타의 자세는 상대적인 보리심이라고 한다. 이 마음을 일으키고자 희구하는 것은 대승수행의 기초이고, 모든 공덕을 담는 그릇이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은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하는 똥렌(Tong len)이다. 이것의 토대는 우리는 하나이고, 반대로 이 우주에 있는 중생들은 무한정이다. 만약 한 사람이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없앤다면 가치있는 목표가 아닌가. 따라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짊어질려고 마음을 먹고, 심지어는 잠재적인 또는 고통의 원인까지도 짊어져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공덕, 행복, 재물 등을 줄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즐기는 어떤 것, 고위하고 가치있는 어떤 것, 긍정적이고 행복한 어떤 것을 우리는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주고 받는 방법이야말로 보살의 동기를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한 자비는 '중생들과 관련된 자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 자신이 자비심을 경험한다. (2) 다른 존재는 자비심의 대상이다. (3) 다른 중생들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자비심을 느끼는 실제적인 행동이 있다고 하는 세 가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이중적인 분별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 골격이 대승을 수행하는 우리의 길에 대한 준비다. 이와 같은 종류의 자비심이 세워졌으면 우리는 두번째의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즉 자신이 자비심을 느끼고 있는 것, 자비심의 대상, 자비심 그 자체는 환상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가지가 세속적인 것이고 절대적인 궁극적인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자체가 없는, 단지 환상과 같은 것으로 이 셋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현상이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모든 현상에 관련된 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대승수행의 핵심이다.

이 두번 째의 자비심을 토대로 세번 째의 자비심인 '무연자비'를 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주객에 관련된 모든 것을 초월한다. 이것이 불성으로 귀결되는 궁극적인 경험이다. 이 모든 자비심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체중생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우리는 궁극적인 깨달음오로 향하는 길에 올라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기르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대승의 수행방편이다.

감뽀빠의 세번 째 달마는 길을 따라 가면서 우리의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공의 체험이다. 명상에서 우리의 마음과 모든 경험이 투영해 내는 것이 근본적으로 실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마음이 투영해 내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으로 존재한다. 공에 대한 인식은 궁극적인 보리심이다.

바다와 마음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빈, 어떠한 특징 즉 궁극적인 실체가 없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내적인 사고와 같은 것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 명상을 통해 우리가 마음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마음이 투영한 것은 근본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영은 한 순간도 바다와 떨어지지 않고 파도가 일어났다가 바다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비록 우리가 마음이 본질적으로 공하다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현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현재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우리는 이것에 대해 강렬하게 집착한다. 우리는 이 몸이 실재하고, 자존적인 실체를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꿈에서는 우리는 다른 종류의 몸을 경험한다. 모든 현상적인 존재는 이 '꿈의 몸'과 관련되어 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를 경험한다. 그러나 꿈에서 깨고나면 꿈의 세계는 궁극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꿈의 세계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고, 방안에, 우리의 몸속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꿈이 끝나면 실체도 간단히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의 투영이다.

인도의 띨로빠(Tilopa)와 나로빠(Naropa), 티벳의 마르빠(Marpa)와 밀라레빠(Milarepa)와 같은 깨달은 대성취자는 현상의 세계에서 기적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현상계를 공하다고, 마음의 투영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적을 행할 수도 있었고, 현상계를 바꿀 수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궁극적인 실제와 부동이라고 집착할 때에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우리의 존재는 그 업이 완전히 소멸되면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죽음에서 마음은 육체의 몸에서 확실하고 마지막으로 분리된다. 이것은 분리에 불과하다. 지속되는 것은 마음이고, 이 마음이 발도(중음)의 단계로 나아간다. 사후의 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현상계를 경험한다. 비록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의식의 상태뿐이지만 마음은 습관을 따라가게 된다. 따라서 경험이 궁극적인 실체라고 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확신은 육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계속된다.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은 꿈속이나 깨어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한 티벳스님의 이야기가 이것을 설명해준다. 제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티벳에 있는 우리 집 근처에 족첸(Dzogchen)이라고 하는 닝마빠사원이 있었다. 이 절에 있던 스님이 더 이상 절에 있고 싶지 않고, 장사를 하고 싶어 절을 떠났다. 장사를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전생의 업으로 절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여러 사람들이 따르는 달마를 가르치는 스승이면서 동시에 상당한 돈을 모은 상이이 될 수 있었다.

한 날 그는 영적조정력을 가지고 있는 주술가를 만났다. 상인은 그의 이런 능력을 알지 못했고, 주술가를 주문을 외어 상인이 아이의 경험을 가지게 하고, 많은 재산과 대가족을 부양하게 하고, 이런 식으로 생을 보내다가 흰머리에 몇 안 남은 이를 가진 노인이 되게 했다. 그리고 나서 이 모든 환상이 없어졌다. 환상에 빠져 있던 기간은 불과 하루나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 상인이 마술에서 깨어났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환영과 같은 긴 생의 삶, 고놔뇌 등만 남았다.

상인의 환영과 같이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은 마술과 같다. 대승경전에서 세상의 경험은 물위에 떠 있는 달과 같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경험은 세속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제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마음의 본질적인 공함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혼동을 몰아내고, 둘째로 이것을 통해 모든 현상의 환상적인 본성을 드러낼 때 감뽀빠의 세번 째 달마를 이해하게 된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0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