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생사는 무엇인가?

수선님 2019. 6. 30. 11:37

지유스님: 그렇다면 생사(生死)란 무엇인가 ?
마음 속의 생각이다.
난 줄로 알고, 죽은 줄로 알고, 온 줄로 알고, 간 줄로 알고 있는 생각이다.
생각은 환상(幻想)이니 생사거래(生死去來)란 실체(實體)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 하나를 미(迷)하여 무변(無邊)의 번뇌(煩惱)를 일으킨 사람을 중생(衆生)이라 하고,
마음 하나를 깨달아 무변의 묘용(妙用)을 일으킨 사람을 제불(諸佛)이라 한다.


장군죽비: 某甲이라면
"제불"이라 한다 하지 않고 "부처님"이라 한다 할 것이니,
제불은 3신
(법신, 보신, 화신)인 일체 부처님을 총칭하는 것이나
사람이 깨달아 이룬 부처님이라는 것은 3신을 모두 갖춘 개체인 화신을 존칭하는 인격체이므로 같은 듯하나 엄연히 구별해 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로소이다.
여기서도
"마음 속의 생각" 이라 하셨으나 마음과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오, 범부의 생각이든 불조의 생각이든 마음으로부터 일으킨 것이 생각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외다.

지유스님: 마음이 미(迷)하면 번뇌가 되고, 깨달으면 묘용이 된다는 말이다.
미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요, 깨달으면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미(迷)했다는 것은, 마음 속에 생각(相)이 가려서 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마음 속의 생각을 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한 원인(原因)은 마음속에 생각(相)이 가려서이니, 생각을 놓아 버리면 바로 생각 아닌 마음이 된다.
생각 아닌 곳에 능히 감각(感覺)할 줄 아는 영지(靈知)가 뚜렷하다.
이 영지(靈知)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기요, 생사(生死)와 상관없는 영원(永遠)의 안식처(安息處)인 것이다.
염원(念願)하고 있던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마음을 사람마다 갖추어 있고, 내지(乃至) 미물곤충(微物昆蟲)에 이르기까지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갖추어 있다고 한다.

장군죽비: 여기서도
"있다고 한다"하니 자기의 지견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할 것이로소이다.
또한 감각할 줄 아는 영지가 생각을 일으킬 줄 모른다면 그것은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닌 것이로소이다.

지유스님: 그런데 중생(衆生)은 마음 속에 망상집착(妄想緝着)이란 구름이 가려서, 이 좋은 보배를 보지 못하고 환(幻)과 같은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여 신음(呻吟)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 속에 가리고 있는 구름을 덜어 주기 위해 법(法)을 설(說)하여,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마음에 돌아 가게 한 것이 중생제도(衆生濟度)이다.

장군죽비: 옳은 말씀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가리고 있는 구름을 덜어주기 위해"가 아니라 "청정(소소영영)한 마음의 밝은 반야(지혜)의 발현을 장애 하는 구름(번뇌, 망상)을 스스로 걷도록 하기 위해서" 라 함이 옳을 것임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 하겠소이다.

일체 사량(思量:생각)이 끊어진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를 사량분별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무리(無理)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놓아야 비로소 비사량처(非思量處)에 계합(契合)될 것이다.
비사량(非思量)이라 하니 아무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목석(木石)같이 생각하여 멍하게 있어서도 안 된다.
사량(思量)이 아닌 곳에 뚜렷이 영지(靈知)가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기에 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과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했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 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었기에 마음이 고요(空寂)하고 동시에 영지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원만(圓滿)하다.
그러나 미(迷)한 사람은 마음 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지 못했기에 마음이 어지럽고(散亂) 동시에 혼매(昏昧)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공적과 영지가 둘 다 결(缺)한 것이다.
공적과 영지라 하지만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자체(自體)가 공적 하면서 영지 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본심(本心)을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활(生活)에 공기(空氣)는 일분(一分), 일초(一秒)도 여의고는 살 수 없는 소중(所重)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는 바람에 공기의 존재(存在)를 모르고 있듯이, 우리의 본심도 어느 장소(一切處)나, 어느 시간 일체시(一切時)에도, 또 망상분별(妄想分別)로 작용(作用)을 했든, 아니했든 우리의 생활(生活)에 있어서 일분, 일초도 여읜 일없이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으나 이 본심(本心)을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분주(散亂)하여 그 생각을 쫓고, 쫓기느라고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는 본심(本心)을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장군죽비: 위의 말씀 또한 중언부언의 자비가 넘치는 옳은 말씀이라 할 것이외다.

지유스님: 그러니 본심(本心)을 보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어지러운 생각부터 쉬어야 한다.
어떤 물건을 관찰(觀察)할 때, 만일 마음 속에 생각이 복잡(複雜)하거나, 들떠 있으면 세밀(細密)히 관찰되지 않는다.
세밀히 관찰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가라 앉아 있는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또 기둥시계(時計)의 일초, 일초, 초(秒)를 새기는 추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크기가 같지만, 낮에는 잘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 낮에는 환경(環境)의 소음(騷音)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밤에는 낮보다도 소음이 적고 조용하기 때문에 잘 들리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에는 차이(差異)가 없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쉬면 본심(本心)을 본다고 했는데, 생각을 쉰다는 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執着) 생각을 놓는다는 말이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것이 마음 속을 가로 막아 마음이 막힌 것이니, 마음을 막았던 생각을 놓으면 막힌 것이 없어지니 마음은 저절로 열리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무 탈없는 가슴 속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 넣고 스스로 답답하고 불안(不安)해 하는 것과 같다.
불안의 원인이 돌멩이 때문이니 돌멩이만 덜어내면 원래(元來) 탈없던 가슴이라,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저절로 없어지고 만다.
마음 속에 집착(執着)하고 있던 생각을 놓은 자리에 드러난 본심(本心)은 모든 망념(妄念)을 여의었기 때문에 지극(至極)히 고요(空寂)하고, 망념의 구름이 덜어졌으니 지극히 신령(靈知)하다.

장군죽비: 말씀인즉 옳다 할 것이나,


그러하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논리의 일관성이 갈지자(之)라서 좀 어지럽소이다.

지유스님: 망념(妄念), 망념(妄念)하지만 망념이란 자세(仔細)히 관찰(觀察)해 보면 실제(實際) 있는 실물(實物)이 아니다.
그것이 실(實)로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은 착각(錯覺) 때문이다.
착각은 관찰부족(觀察不足)에서 온 것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실제 있는 것은 아닌데, 만일 실물(實物)로 본다면 착각이요, 잘 살펴 보지 못한 데서 착각했다고 하겠다.
망념도 마찬가지다. 모양도 없는 마음속에 망념의 그림자(映像)가 비치고 있는 것뿐이니, 이 망념의 정체(正體)를 포착(捕捉)하려고 가만히 망념 속을 들여다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목전(目前)에 산(山)이 있으면 산(山)인 줄 알고, 물이 있으면 물인 줄 아는 영지(靈知)가 뚜렷하지 않는가 !
이 영지(靈知)가 바로 자기(自己)의 본심(本心)이다.

이 본심(本心)은 공적(空寂)하여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고, 영지(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본심(本心)은 일체(一切) 모든 생각의 근원(根源)이요, 일체선악(一切善惡) 만법(萬法)을 갖추어 있고 생사(生死)의 시발점(始發點)이며 종점(終點)인 것이다.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 이 사과를 보는 데 눈에 눈병(病)이 없고, 그 밖에 장애물(障碍物)이 없는 한(限), 만(萬) 사람이 보면 만 사람이 똑같이 붉은 사과일 것이다.
또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 귀천승속(貴賤僧俗)의 차별(差別)이 없다.
붉은 사과를 붉다 하고,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는 데는 만인(萬人)이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當然)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異常)하다 하겠다. 당연(當然)한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본 것이 본심(本心)이다.

장군죽비: 계속된 말씀 옳기는 옳으나 중언부언의 거듭되는 자비로소이다.

지유스님: 당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데는 아무런 재주나 기교(技巧)가 필요(必要)치 않다.
재주나 기교를 부리게 되면 도리어 사실을 비뚤게 보게 된다.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본 본심(本心)은 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 일체(一切) 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고, 천진(天眞) 그대로 원래(元來)의 모습이다.
그런 자리에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이 붙어 있겠는가 ?
그래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思量分別)을 놓아 버리면, 본심(本心)은 보기 싫어도 보아지는 것이다.
이 본심(本心)은 끝없는 과거(過去)와 끝없는 미래(未來)에 걸쳐 무한(無限)한 시간 속에 단 한번도 생멸한 일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存在)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時間)과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공간(空間)과 그 속의 모든 생멸(生滅)은 한 마음 속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본심(本心)에는 생사(生死)니, 번뇌망상(煩惱妄想)이니 하는 것이 붙어 있을 수가 없으나,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에, 어느 쪽 하나라도 결(缺)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본심(本心)은 영지(靈知)이면 그대로 공적(空寂)이요, 공적이면 그대로 영지이니, 공적과 영지가 둘이 아니다.
장군죽비: 거듭 중복된 옳은 말씀이외다.

지유스님: 공적과 영지를 둘로 보는 것은 영지가 되면 산란(散亂)하여 공적이 결(缺)하고, 공적이 되면 혼침(昏沈)하여 영지가 결하여 온전하다 할 수 없다.
장군죽비: 지금까지의 옳은 말씀이 삼천포로 빠졌다 할 것이니, 위의 말은 옳지 못한 것이로소이다.
둘이 아니라고 위에서 일러 놓고도 이분 스스로 영지와 공적을 둘로 보는 삿된 소견이니,
영지에 산란이 없고 공적에 혼침이 없는 것이니 공적영지는 둘이 아닌 것이라 定일 때 공적이라 이르며, 혜의 작용을 할 줄 아는 것을 일러 영지라 이르나 둘이 아닌 것이외다.
선학자의 소견인 것이외다.

지유스님: 수레의 양(兩)바퀴에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바로 나가지 못한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하나라야 참된(眞) 영지요, 참된 공적이라 하겠다.

장군죽비: 공적과 영지는 하나씩 떨어져 갈라 지는 것이 아님을 實悟하지 못한 분별하는 소견이로소이다.
空寂靈知나, 昭昭靈靈이라는 그것 자체가 그대로 淸淨本然의 일체를 구족한 것이라 여기에 다시 입을 댈 것이 더 없는 것임을 안다면 중언부언 할 것이 없다 할 것이로소이다.

지유스님: 참된 영지(靈知)는 지식분별(知識分別)이 아니니
장군죽비: 영지는 그저 이름하여 영지한 법성이요, 자성이요, 부처요, 마음이니, 이것을 두고
'지식분별이 아니니'라 한 말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외다.
이야말로 둥근 구멍과 모난 막대기로소이다.
공적영지, 소소영영, 부처, 마음, 자성, 법성, 본성 등...은 그 하나를 두고 때에 따라 가려 쓰는 名句일뿐 다른 것이 아니올시다.

지유스님: 공적이요, 참된 공적은 무기혼침(無記昏沈)이 아니니 영지인 것이다.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 아닌 공적과 영지가 원만(圓滿)한 마음이라야 심중(心中)의 혼침과 산란을 녹이고, 양륜(兩輪)을 갖춘 수레와 같이 똑바로 전진(前進)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열반(涅槃)의 언덕에 도달(到達)할 것이다.

장군죽비: 옳은 말일지라도 공적영지한 것은 절대로 무기혼침이 없음을 먼저 깨달았다면 이런 말씀이 필요치 않을 것이외다.

지유스님: 일상생활(日常生活)의 동(動)과 정(靜)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 공적과 영지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과 산란을 녹여 가는 것이 수도(修道)일 것이다.
장군죽비: 행주좌와 동정을
"뜻에 맡기고" 공적영지를 온전히 할 수 있어 "혼침과 산란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이 法理에 맞는 실다운 말인가를 다시 자세히 살펴야할 대목이로소이다.
動과 定
(일상사) 가운데 일들을 뜻(뜻은 곧 情인 생각== "인연 따라 순리에 맡긴다" 하면 그런 대로 가하다 하겠으나)에 맡기고 공적영지를 온전히 할 수 있다면(그렇게도 되기가 불가능 하지만) 공적영지에 다시 혼침과 산란을 녹일 것이 있어 수도를 해야 할 것을 필요하다 하니, 논리의 모순이 되며 법리에도 어긋난다는 말이외다.

지유스님: 초심자(初心者)는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쉬우니, 동(動)과 정(靜)에 잘 조절(調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향(一向)에 동(動)해도 안되고, 일향(一向)에 정(靜)해도 안될 것이다.
수도(修道)가 숙련(熟練)되고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일체(一切)무애(無碍)가 될 것이다.
공중(空中)의 새가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더라도 공중에 흔적(痕跡)이 남지 않듯이 !

장군죽비: 말씀인즉 옳다 하겠으나, 이러한 법문으로는 범부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 할 것이니, 원론적인 이런 현란하고 그럴싸한 말은 말일뿐이니, 구경에 이르는 방편수단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로소이다.
대체로 교학자들의 이런 논리가 그럴 듯은 하나, 목마른 이들에게 태평양 물을 말하는 것과 같아, 한 컵의 물이라도 직접 떠 마시는 길을 지시해 줌에 견줄 바가 아닌 것이외다.()


※ 법문이나 선문답을 살필 때는
누가 한 것이라는 선입견은 절대로 갖지 마셔야 하며,
오직 말뜻을 자세하고 자세하게 살펴 그 법리의 是와 非를 냉철하게 가려야 말에 속지 않을 것임을 일러드리는 바이외다.
한 말씀 더 한다면
"곳"이라는 말들을 자주들 쓰는데 곳(處)이란 별도로 따로이 있는 장소가 아님을 반드시 알아 명심하고 써야할 용어임을 알기 바라는 바이로소이다.

 

 

 

 

 

 

 

 

 

 

통융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kds11002/13480159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