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의 형성과 발전
목 차
Ⅰ. 서론 : 초기 불교란 무엇인가.
Ⅱ. 시대적 배경
Ⅲ. 붓다의 일생과 불교의 탄생
1)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
2) 성장과 출가
3) 수행과 성도
4) 초기 불교의 성립과 발전
5) 붓다의 입열반
Ⅳ. 초기 불교 교단의 형성과 성격
1) 교단의 성립
2) 율체계의 형성
3) 불교의식
Ⅴ. 초기 불교의 가르침
1) 사성제
2) 삼법인
3) 오온설
4) 연기설
Ⅵ. 결론 : 초기 불교 사상의 의의
Ⅰ. 서론 : 초기 불교란 무엇인가.
초기 불교는 붓다에 의해 불교라는 한 종교가 탄생한 시기부터 붓다의 입멸(入滅) 이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시기까지를 일컫는다. 붓다의 생몰(生沒) 연대에 대한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B.C 6~5세기 경의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불교의 기본적 골격이 되는 특징들이 형성된 중요한 시기이나, 그 사료가 매우 빈약한 편이다. 단지 우리가 아는 바는 이 시기의 불교가 당시의 인도에 있어서 힌두교와는 엄연히 다른 하나의 종교운동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이 새로운 공동체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붓다, 즉 ‘깨달은 자“라고 인정하였고, 붓다가 각(覺,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서 깨친 진리를 새롭고도 궁극적인 진리와 귄위를 지닌 것으로 승인하였다. 이것은 즉 붓다라고 하는 개인의 인격과 성취에 대한 공동체의 전적인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불교시대는 불멸 후(붓다 사후,) 약 100년경의 2차 결집 사건으로 막을 내리며 부파불교시대로 이행된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기본적 골격이 결정되었던 초기 불교시대를 살펴보면서, 그 탄생배경 및 전개과정, 그 성격과 구조 그리고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시대적 배경
이 장에서는 초기 불교의 탄생이 가능했던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 발생 이전의 인도에는 갠지스강의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아리아인이 목축과 농경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브라만이라는 사제계급을 중심으로 ‘카스트’라는 계급제도를 이루는 브라만교의 문화를 완성시키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인은 그후 점차 동쪽으로 진출하여 B.C. 6세기에 이르면 갠지스강의 중류 및 하류에 정주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지역의 사회와 문화에 현저한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들 수 있는 변화는 이 아리안들이 새로운 정착지에서 원주민인 문다인, 드라비다인 등과의 혼혈을 통하여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발달된 철기를 중심으로 힘을 갖고 있던 아리아인들이었으나, 이 융합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아리아인만의 전통적인 풍습들이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고, 기존의 브라만교의 문화 역시도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단의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식구조의 전향성이 돌출되었고, 그것은 마침내 자이나교, 불교등의 혁신적 종교들이 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갠지스강의 비옥한 토지가 가져다 준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갠지스 강가에서의 풍부한 농산물의 수확인 잉여물자의 교환을 가능케 하였고 생활의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농기구를 포함한 생활용품의 수공업이 발달하여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고 많은 소도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도시를 중심으로 군소국가들이 점차 번영하였는데, 이들 도시의 경제적 발전이 진행되면서 이들 도시를 거점으로 한 대국의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들 대국은 인접한 약소국을 합병함으로써 이른바 전제군주를 출현시키고, 고대국가의 면모를 나타나게 되었다. 이 당시의 대국은 16개국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코살라, 마가다, 아반티, 밤사라는 4대국이었다. 이들 중에서 코살라 국과 마가다 왕국은 불교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상과 같은 경제적 발전과 왕권의 신장은 전통적인 ‘카스트’제도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새로운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출신계급과 상관없이 부를 축적한 이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왕권의 신장은 기존의 최고 카스트인 브라만 사제 계급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브라만교는 사회적 영향력이 현격하게 약화되게 되고, 브라만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적 사상가들이 속출하게 되는데, 이 시대의 혁신적 사상가들을 총칭하여 사문(沙門, Sramana)이라고 부른다. 사문들은 당시 브라만에 대립되는 정신적 지도자들로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두루 편력하면서 숲속에서 수행하였다. 이들은 그 생활의 형태에 따라 유행자(遊行者), 둔세자(遁世者), 고행자(苦行者), 걸식자(乞食者)등으로 불리웠는데, 그것은 이들이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를 유행(遊行)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주위에는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에 의하여 승가(僧伽, samgha)라는 생활 공동체가 형성되게 되었는데, 이들 공동체는 사회적․계급적 신분의 차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인 성격을 띤 집단이었다. 초기 불교 역시도 당시 브라만의 사회적 특권이나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사상적 운동의 하나였으며, 새롭게 등장한 도시 상공인 층들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여 그 사회경제적 기반을 잡은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새로운 사상가들은 62견(見)과 363종의 논쟁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고, 불교의 경전에 따르면,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하여 당시의 붓다와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여섯 가지의 사상들이 유행되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서로 엇갈리는 종교적․사상적 교설은 당대 사회에 심각한 사상적 혼란과 종교적 방황을 불러일으켰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사상적 배경속에서 불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붓다의 일생과 불교의 탄생
1)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
불교는 고타마 붓다(Gautama Budda)가 창시한 종교이다. 붓다라고 하는 말은 ‘깨어 있는 사람’ 또는 ‘진리를 깨친 사람’을 의미한다. ‘불(佛)’ 또는 ‘불타(佛陀)’라는 말은 중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 음을 모사해서 기록한 한자이다. 불교의 역사 속에서 ‘붓다’는 인간의 이상적 존재였으므로, 실제로는 많은 붓다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조로서의 역사적 존재인 붓다는 특별히 ‘고타마 붓다’라고 부른다.
고타마 붓다는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나라인 사캬(Sakya)족의 왕자로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숫도다나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마야이다. 고타마는 성(姓)이며 싯다르타는 ‘뜻을 다 성취할 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고타마 붓다’는 그가 깨달음을 얻은 후 붙여진 이름이며, 사캬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혹은 석존(釋尊), 세존(世尊)이라고도 불린다. 사캬족의 영역은 현재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 걸친 소범위로서, 남쪽과 서쪽은 라프티강을 경계로 코살라 왕국과 접하고 있었으며, 자치는 인정되었지만 코살라 왕국의 지배하에 있는 속국이었다. 룸비니는 현재에도 네팔의 타라이 소재의 지방에 있는 현의 명칭으로 남아 있는데, 불전의 룸비니 동산은 ‘룸민디’라는 사원이 있는 네팔 국경 내의 4킬로미터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붓다의 출생 연대는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후대에 와서 불탄년을 정하여 기려왔는데, 중국과 한국 등 북방에서는 B.C 1027년으로, 인도와 실론, 타이, 등의 남방에서는 B.C 624년으로 정해왔다. 학계에서는 B.C 566, 564, 563, 463년 등 다양한 설이 제시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기에는 사서가 부족하기에 대개 B.C 6~5세기로 상정하고 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불교계가 채택한 공통불기(共通佛紀)는 B.C 624년이다.
2) 성장과 출가
싯다르타는 왕족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본질적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 수행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당시의 어려운 정치사회적 상황이 그의 탈세속적 수행을 부추겼으리라는 설도 있다. 당시 코살라 국은 사캬족을 정치적으로 예속하여 압박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태자인 싯다르타로 하여금 사캬국의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었으리란 추측이다. 그 외에도 당시 인도 사회는 현세에서의 해탈을 위해 오직 자기 수행에만 전념하는 유행자들의 출현시대였고, 사회적인 불안이 종교적인 구도열로 연결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위에서 싯다르타가 가족과 국가 모두를 버리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 ‘장애물’이 태어났다고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Rahula, 장애물이란 뜻)라고 하였다. 즉 집착의 대상인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출가를 지연시킨다는 뜻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왕국의 대를 이을 후사가 태어난 것이므로 오히려 출가의 결심을 다지게도 하였다. 그의 나이 29세 때 그는 드디어 출가를 하게 된다.
3) 수행과 성도
출가한 싯다르타는 당시 최대의 왕국이었던 마가다에 도착하였다. 마가다는 당시 혁신적 사상가들의 중심지였으며, 각지에 그들의 공동체인 승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종교적 실천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선정주의(禪定主義)이며, 또 하나는 고행주의(苦行主義)이다. 선정주의는 정신통일에 의하여 정신적 작용이 중지되어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입장이다. 싯다르타는 당시 가장 명망 높은 선정주의자였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사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싯다르타가 찾던 괴로움이 없는 안온한 상태의 열반이 아니었다. 싯다르타는 이 선정주의를 버리고 고행주의자들이 있는 고행림(苦行林)으로 갔다. 그가 출가한 이후 한곳에서 가장 오래 수행한 곳이 이 고행림이다. 그는 6년 동안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한 심한 육체적 고행을 하였으나, 어느 날 문득 자기에게 남은 것은 초췌한 몸과 피로한 마음뿐임을 깨달았다. 고행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정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원인이 바로 욕망의 근본인 육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욕망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학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육체가 인간에게 남아있는 한 완전한 자유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 이 고행주의의 난점이었다.
싯다르타는 고행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수행의 길을 떠나게 된다. 지난 시절 왕궁에서 누렸던 극도의 호화로운 생활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듯이, 이러한 극심한 고행 또한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뿐이라는 그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랜 고행으로 지친 몸을 네란자라 강물로 씻고,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소녀에게서 우유죽을 공양받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 정좌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싯다르타는 선정에 들어 네 종류의 선정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전생을 보고, 일체 중생의 죽음과 윤회를 보았으며, 무명(無明)이나 탐욕 등의 불순물을 제거하였고, 마지막으로 대각(大覺)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 때 그의 나이 35세 였다. 이제 그는 드디어 붓다가 되었다. 붓다가 성도한 곳이란 뜻에서 그곳을 붓다가야(Buddagaya)라고 하며 그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른다. 붓다는 대각을 성취하는 동안, 후에 불교의 중요한 초석이 되는 두 원리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사성제와 연기법(緣起法)이다.
4) 불교의 성립과 발전
붓다가 성도 직후 새로운 가르침을 펴기 위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라나시의 녹야원이었다. 그곳에는 앞서 붓다가 고행을 버리고 떠날 때, 그를 타락했다고 비난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붓다가 녹야원에서 이들 다섯 비구(比丘)에게 설법한 사실을 불법(佛法)의 첫 펼침,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中道)와 사성제로 요약된다. 중도라는 것은 수행에 있어서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그 방법으로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어서 오온(五蘊)과 무아(無我)설을 가르쳤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점차 초기불교의 교의가 확립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정리되어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이 초전법륜이 의미하는 바는 명실상부한 종교로서 불교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전법륜이라는 사실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초전법륜의 가르침을 통해서 다섯 비구(比丘)는 득도하고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이러써 불교는 불(佛,붓다), 법(法,dharma,붓다의가르침), 승(僧,samgha,불법을 받드는 교단)의 삼보(三寶)를 갖추게 되었다. 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초전법륜 이후로 80세에 입적할 때까지 45년 간을 붓다는 갠지스강 유역의 각지를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그러나 이 45년 간의 교화활동 중 그 행적을 차례로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은 최초와 최후의 수개월뿐이다. 붓다의 교화활동 범위는 동쪽으로는 참파, 북쪽으로는 카필라밧투와 코살라의 사밧티, 서쪽으로는 캄맛사다르마, 남쪽으로는 마가다의 가야와 밤사의 코삼비에 이른다. 붓다의 교화와 가장 관계가 깊은 곳은 사밧티, 라자가하, 베살리, 카필라밧투 등이다. 유명한 설법장소로는 바라나시의 녹야원, 왕사성의 죽림정사, 그리고 사위성의 기원정사이다. 당시 불교는 많은 불제자들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고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초기불교의 영향력은 상당히 국소적이었다. 붓다 생전의 대부분의 설법은 마가다와 코살라 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불교가 인도 전역 및 외국에까지 널리 전파된 것은 불멸 후 몇백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5) 붓다의 입열반
붓다는 성도한 지 45년이 되는 80세 때에 북쪽 쿠시나가라국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스스로를 섬(대승경전은 등불로 번역)으로 삼고, 법을 섬(등불)으로 삼아, 결코 남을 섬(등불)으로 삼지 말라.
또한
모든 생(生)한 것은 반드시 멸(滅)하는 법이다(無常).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
이것이 붓다가 남긴 최후의 설법이었다. 이윽고 붓다는 80세를 일기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Ⅳ. 초기 불교 교단의 형성과 성격
1) 교단의 성립
불교의 교단형성은 초전법륜으로 귀의한 다섯 비구(比丘)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불교 교단의 성격은 기존의 유행공동체적인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붓다는 제자의 수가 늘어 60명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유행(遊行)하라”고 일렀다. 이것은 불교 승가의 최초기의 성격을 단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불교의 사문을 석자사문(釋子沙門, 석가족 출신의 사문)이라 하고, 그 가르침을 석자(釋子)의 법(석가족 출신이 설한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불교가 당시 유행자의 일파로 간주되었음을 나타낸다.
초기 불교 시대에 있어서 교단은 네 그룹(四衆, 四部衆) 또는 일곱 그룹(七衆)으로 구성되었다. 4중 또는 4부중이란, 비구(比丘, bhiksu : 출가 남자 수행승), 비구니(比丘尼, bhiksuni : 출가 여자 수행승), 우바새(upasaka : 재가(在家) 남자 신도), 우바이(upasika : 재가 여자 신도)를 말하고, 7중이란 4중에 사미(sramanera : 20세 미만의 남자 출가승), 사미니(sramaneri : 20세 미만의 여자 출가승), 식차마나(siksamana : 비구니의 구족계를 받기 직전의 2년 간, 여자 출가승.)를 추가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승가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비구와 비구니, 그것도 특히 비구중(比丘衆)이었다. 불전에 의하면 여인의 출가가 허락된 것은 붓다의 만년인 후대에 와서이다. 출가승 위주의 이러한 승단체제는 초기 불교 시대 이후 부파불교시대를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운동이 흥기하면서 이 출가승단 위주의 배타성은 비판되기에 이른다. 비구, 비구니중은 당시 사회 속에서 출가수행자들을 일컫는 사문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재가의 애욕생활을 떠나 출가하여 독신으로 걸식하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또한 탁발(托鉢)로 목숨을 유지하고 늘 삼의일발(三衣一鉢)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니거나 저축하지 못하였다.
초기 불교 교단은 유행공동체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나, 인도의 특수한 기후적 조건에 의하여 점차 ‘안거(安居)’라는 제도를 정착시켰고, 그로 인하여 완만하지만 유행에서 정주(定住)생활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안거를 위한 거주지에는 주처(住處)와 원(園) 두가지가 있었다. 주처는 일반적으로 비구들에 의해 세워졌던 일시적인 장소로서 안거가 끝난 후에 그대로 내버려둔 것이고, 원은 도시 가운데나 교외에 있는 과수원, 화원으로서 소유자가 이를 영구적으로 승가에 기증하여 종교적 집회, 선정 또는 법에 대한 토론장으로 사용한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이들이 안거를 위한 일시적 정주지에 불과하였으나 3개월 간의 단체생활을 하는 동안 공통의 의식이 제정되고, 식량 또한 한꺼번에 많은 양을 희사받게 되어 행걸규정의 필연성이 약화되자, 마침내는 주처나 원이 반영구적인 정주지, 즉 승원의 성격으로 변화되게 된다. 이처럼 유행에서 정착생활로의 이행은 완만하였지만, 이미 초기 승가에서 형성이 되었다. 그리고 계율이 형성되면서 비구승가는 더 이상 유행자의 일단이 아니고 정착한 수도승의 모임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2) 율체계의 형성
계율(戒律)이란 불교교단에 있어서의 행위의 규정이다. 계(戒)의 원어는 sila인데, 본래 본성, 성격, 습관,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좋은 습관’, ‘선한 행동’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계를 다 갖추면 마음 가운데 무구청정(無垢淸淨)한 안락을 감수할 수 있다고 하여, 본래 계를 지키는 것은 금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구들의 정주화, 집단화, 주처의 승원화가 진전됨에 따라 보다 광범위하며 금제적인 율(律) 체계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들 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기초가 되는 삼귀의계와 오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삼귀의계(三歸依戒)는 불교입단의 자세를 표명함과 동시에 귀의함의 목적을 명시한다.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붓다에게 귀의하여 다른 외도(外道)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모든 계의 기본이며 수행인의 입단계이다. 다음으로 오계(五戒)는 모든 계율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忘語), 불음주(不飮酒)의 다섯 계목이다. 이 오계 중 앞의 4개의 계를 특히 4바라이법이라고 부른다. 이 것을 어기는 것은 모든 죄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대한 것으로서 승가에서 추방당하는 중죄이다.
3) 불교의식
인도 불교교단의 행사로서 정기적인 것으로는 한 달에 두 번 계경을 염송하는 것을 듣고 자기 반성을 하는 포살(布薩), 여름철 우기에 90일간 석굴이나 승원 등에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安倨), 그리고 안거 마지막 날에 행하는 자자(自恣)등이 있고, 한편 임시적인 것으로는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가는 자들을 위한 입단의식인 수계(受戒)가 있다. 이러한 규정은 오늘날에도 남방의 여러 불교국에서 비교적 충실하게 실행되고 있다. 이중 초기 불교시대부터 잘 이행된 것은 안거와 자자, 포살이다.
먼저 안거(安倨)는 매년 3개월의 우기 기간에 있어서, 외출 시 자신도 모르게 초목이나 작은 생물들을 죽여, 금지된 살생을 범하게 되고 또한 행절에도 적합지 않다 하여 그 기간에는 동굴 또는 사원에 머물며 좌선과 수학에 전념한다. 이 우기의 수행을 안거, 우안거(雨安倨) 또는 하안거(夏安倨)라 하며, 안거의 시작은 결제(結制)라 하고 안거의 끝은 해제(解制)라고 부른다. 이 안거의 제도는 이전의 브라만교에서도 행하여지고 있던 것을 붓다가 채택하여, 1년 1회의 안거로써 수행의 성과와 법랍(法臘)의 위계를 정하는 기초로 삼았다. 자자(自恣)는 하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안거하고 있던 수행승들이 자기 반성을 하고 고백함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무례를 사과하고 심신을 모두 결백하게 하는 행사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포살은 한 달에 두 번 동일지역의 승려들이 모여 계경을 송함을 듣고 자기 반성을 하고 죄과를 고백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계(戒)에 정주하여 선법(禪法)을 기르기 위함이다. 포살이 행하여지는 날은 매월 15일과 30일이다.
Ⅴ. 초기 불교의 가르침
초기 불교의 교설(敎說)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붓다 당시에는 불교교리 서적이나 이론서 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그 가르침은 구전되었을 뿐이다. 붓다의 교설이 구전단계를 지나서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B.C. 1세기 경 실론의 상좌부에서였다. 따라서 오랜 구전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붓다의 설파내용 이외의 후세의 사상이 많이 혼입되어 전해진다. 그러나 여러 경들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사상들은 붓다의 사상에서 연유한 초기 불교의 기본교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본적 교리로는 사성제, 삼법인(三法印), 오온(五蘊), 무아설(無我說), 연기법(緣起法)을 일컫는다.
1) 사성제
사성제는 붓다의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설한 내용을 전하는 ‘전법륜경’의 주요골격을 이루는 것으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 “모든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이 가르침은 중요시되고 있다. 사성제의 내용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이다.
먼저 첫 진리인 고제는, 모든 것은 괴롭다고 말한다. 괴로움에는 팔고(八苦)가 있는데,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미운 것을 만나고(怒憎會),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 그리고 오취온(五取蘊)이 있다.
두 번째 집제는 괴로움의 원인을 말한다.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욕애(慾愛), 유애(有愛, 존재에의 욕망), 무유애(無有愛, 비존재에의 욕망)를 들고 있다.
세 번째 멸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가르친다. 즉,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난 완전한 상태, 존재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마지막 도제는 현세의 괴로움을 끊고, 열반에 이르는 방법에 관해 말한다. 이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이것은 실천적 수행 덕목으로 정견(正見:바른견해), 정사유(正思惟:바른생각), 정어(正語:바른말), 정업(正業:바른행위), 정명(正命: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올바른 노력), 정념(正念:올바른 기억), 정정(正定:올바른 명상)이다.
고․집․멸제는 인생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라면 도제는 그 문제해결에 대한 실천적 수행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2) 삼법인
붓다가 다섯 비구들에게 설한 두 번째 법문은 ‘무아상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가르침의 요점은 삼법인(三法印)으로 요약된다. 이는 현실세계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계를 이루는 세 가지 법(法, dharma)의 특성을 뜻한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인데,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들 때도 있다. 또는 이 모두를 합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먼저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이 세계의 존재하는 어느 것이나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생(生)하고 머물다가(住), 변하여(變) 결국은 사라져버리고(滅) 마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한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제법무아는 인간이란 단지 항상 변하고 있는 여러 존재요소(法)들의 묶음 자체로서 오로지 현상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하였다. 인간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법’이라고 부르는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존재요소들의 결합으로서, 이 법들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브라만의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말하는 아(我 : atman)와 같은 어떤 불변한 실체나 본질은 없다고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라는 인식으로, 제행무상하고 제법무아이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무상한 것이며, 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곧 괴로움의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앞의 세 가지 현실세계에 대한 이상세계로서 열반을 의미한다. 열반(nirvana)이란 고통이 멸진한 상태로서, 마음이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에 이르는 이상경이다.
이 삼(사)법인의 내용은 그 본질에 있어서 사실상 사성제와 그 구체적 내용이 중복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오온설(五蘊說)
오온설은 불교의 인간관으로서 붓다가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하였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오온(五蘊)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구성요소이다. 그것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온(蘊, 모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들(色)과 신체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통해서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의지적으로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다섯 요소들이 한데 묶여진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온설이다. 문제는 이 오온의 묶음이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항시 변하는 무상한 것이라는 데 있다. 붓다는 이 무상한 오온을 취(取)하여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는 인간을 다섯 개의 존재 묶음으로 분석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인간 분석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과는 다른 불교 교유의 무아설(無我說)로 연결된다. 이들 오온의 화합이 존재를 구성할 뿐, 이들 오온을 지배하는 불변의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바로 무아설이다. 나아가 붓다는 이 오온이 무상하기에 오온은 고(苦)라고 하였다. 인간존재는 이 무상한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번뇌를 낳는다. 오온에는 탐욕이 있어 번뇌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오온을 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있어서 ‘취(取)’라고 하는 것은 애(愛)에 따라 일어나 집착과 번뇌를 구성하는 작용이다. 이처럼 인간은 무상한 오온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어 괴로움을 낳는다고 한다.
4) 연기설
왜 고(苦)가 나타나는가. 고는 무엇에 의해 성립되는가. 이 이유를 찾아 원인이 되는 것을 소멸시키면 그것의 결과인 ‘고(苦)’도 소멸된다고 하는 사고방법이 연기설을 이룬다. 연기설의 전형적인 교설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연기설의 구체적 표현이 인연연기설(因緣緣起說)이다. 인(因)이란 직접적인 원인을 뜻하고, 연(緣)이란 간접적 원인으로서의 조건을 뜻한다. 모든 현상의 변화는 이러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한 결과이며,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12지(支)연기설은 이 연기의 법칙을 구체적인 12항으로 나누어서 인간의 유전(流轉)을 설명하는 것이다. 12지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이다. 이 열두 항목이 각각 그 앞의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사(老死)’현상의 궁극적 원인을 ‘무명(無明)’에까지 연결시켜 12항목으로 설명한 것이 12지연기설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생과 사의 괴로움은 무명으로부터 비롯되므로, 이 무명을 멸하면 생사의 괴로움도 소멸하게 된다. 무명이란 것은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붓다의 깨달음의 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무지를 말한다. 이 무지로부터 생과 사의 괴로움이 시작되어 12지연기의 순환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연기론 역시도 무아설과 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12지 연기의 순환관계 어디에도 어떤 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그 과정을 통과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오직 인간의 존재는 이들 제법(12지)의 연속으로서 존재할 뿐,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Ⅵ. 결론 : 초기 불교 사상의 의의
앞에서 초기 불교 사상의 내용을 사성제, 삼법인, 오온설, 연기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중요한 것으로서 윤회와 업사상이 있다. 붓다는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윤회와 업사상을 인도의 고유한 전통사상으로 받아들이면서 불교세계 속에 도입하였다. 다만 브라만교와 다른 것은 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방법의 차이뿐이었다. 그 방법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불교의 무아설이 브라만교의 아트만론과 다르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교리적으로 불교의 무아설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을 부정하고 있다. 아트만을 배척하는 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람들은 아트만을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아트만에 집착하여 오히려 해탈을 위한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며, 둘째, 만일 아트만이 그처럼 순수한 인간의 내면적 존재라면, 그것은 왜, 어떻게 불순한 인간의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첫 번째 것은 실천수행상의 문제이며 두 번째 것은 이론상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원의 문제가 당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사하는 의미이다. 붓다의 무아설은 종래 아트만설을 중심으로 전개하던 브라만교에 대한 정면도전인 셈이었다. 브라만들은 범아일여의 사상을 고귀한 것으로 받들면서, 그 사상의 전수자인 브라만 계급들을 특권층으로 고수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계급이나 가문에 따라 인간의 지위와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고 카스트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이와 같은 계급에 의한 특권적 차별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치는 카스트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행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붓다의 사성평등(四姓平等)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종교이론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불교는 이성적인 지식계급 및 하층민에게도 크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복음이었다. 이것이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초기불교의 형성과 발전|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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