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 목 차 ▒
번역자의 말 ▲ 위로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의 최초 법문이면서 가장 직설적인 법문으로 불교의 초석이자 핵심인 사성제와 팔정도가 집약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경입니다. 교학과 수행을 두루 겸비한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은 그러한 면에서 더욱 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서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교리적으로 해설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과 접목시켜 그것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고 해탈과 열반을 이룰 수 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본서는 훌륭한 위빠사나 수행 교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마하시 사야도의 감로수(甘露水)와 같은 법문을 번역하면서 가슴 벅찬 희열과 감동을 느꼈으며 오래전 인도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에 갔을 때의 그 감명을 되살렸습니다. 참으로 법의 맛은 세간의 다른 어떤 맛보다도 뛰어남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가 수행이 부족하고 배움이 일천하여 위대하신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혹시나 잘못 번역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지만 번역할 때 일차적으로 영어본을 저본으로 하면서 본문에 인용된 경과 주석서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보완하였으며, 원래 영어본에는 없지만 각 경과 주석서의 번호와 페이지를 빨리성전협회(PTS) 기준으로 명시하였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술어에는 상세한 각주와 도표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번역상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해봅니다. 그래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이는 사야도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역자의 과실임을 밝히면서 독자 여러분의 매서운 질책을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괴로움을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인 팔정도를 닦아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 스님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과 조언을 받았음을 밝히면서 이 자리를 빌려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또 부족한 역자에게 번역을 흔쾌히 맡겨주신 한국 위빠사나 선원의 묘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008년 6월, 김한상 합장
일러두기 ▲ 위로
(1) 본문의 삼장(Tipiṭka), 주석서(Aṭṭhakathā), 복주서(Ṭīka)는 모두 미얀마 6차 결집본이다. 하지만 경전번호는 모두 PTS본에 의거해서 괄호로 표기하여 제시하였다.
예) M123/iii.123은 중부 제 123번 경임과 동시에 중부 제 3 123쪽에 나타남을 , M123은 중부 제 123경을, M.iii.123은 중부 제 3권의 123쪽을 나타낸다.
(2) 각주는 빠알리어 술어의 어원과 기본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해당술어가 처음 나오는 곳에는 빠알리어를 병기하고 만약 통용화된 한문술어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병기하였다.
(3) 각주는 어느 곳을 읽어도 이해하기 쉽도록 여러 곳에서 중복 설명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표를 첨부하였다.
(4) 본문의 모든 술어는 가급적 한글로 풀어서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해당 술어의 이해를 돕고 한문 불교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 괄호에 한문을 병기하였다.
약어 ▲ 위로
A. Aṅguttara Nikāya(앙굿따라 니까야)
AA. Aṅguttara Nikāya Aṭṭhakathā(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
Asl. Aṭṭhasālini(아따살리니, 법집론 주석서)
B. Buddhavamsa(불종성경)
Dhs. Dhamma Saṅgaṇī(법집론)
Dhp. Dhamma Pada(법구경)
DhA. Dhamma Pada Aṭṭhakathā(법구경 주석서)
D. Dīgha Nikāya(디가 니까야)
DA. Digha Aṭṭhakathā(디가 니까야 주석서)
J Jātaka(본생담)
Nid. Niddesa(의석)
M. Majjhima Nikāya(마찌마 니까야)
MA. Majjhima Nikāya Aṭṭhakathā(마짜마 니까야 주석서)
Miln. Milinda Pañhā(밀린다왕문경)
Ps. Paṭisambhidā Magga(무해해도)
PTS Pāli Text Society(빠알리 성전 협회)
Pm. Paramatthamañjūsa = Visuddhimagga Mahāṭīkā (청정도론 주석서)
Pug. Puggala-Paññati(인시설론)
S. Saṁyutta Nikāya(상윳따 니까야)
SA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상윳따 니까야 주석서)
SAṬ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상윳따 니까야 복주서)
Sn. Sutta Nipāta(경집)
SnA. Sutta Nipāta Aṭṭhakathā(경집 주석서)
U. Udāna(감흥어)
Vbh. Vibhaṅga(분별론)
Vin. Vinaya(율장)
Vis. Visuddhi Magga(청정도론)
VsTi Visuddhi Magga Tīkā(청정도론 복주서)
제1장
미얀마력, 따우탈린(Tawthalin) 1324년(서력 1962년), 새로운 달, 첫날에 법문하다.
1. 서문 ▲ 위로
오늘은 따우탈린1의 새로운 달,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초의 법문인「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은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직설적인 것입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는 이 경전을 모르는 신자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이 경전을 외우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초전법륜경 독송회’를 마련하여 그룹별로 이 경을 읽으며 또 경청합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미얀마 불자들은 이 경을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현재 미얀마에는 빨리 경전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대역(對譯, Nissaya)과 다른 형태의 번역서들이 수없이 많이 나와 있지만, 정작 도과를 성취하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도전하는 수행자에게는, 실제로 이들 경전에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수행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문헌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경전을 공부할 때마다, 이것을 실 수행2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전의 이름으로 양곤의 명상센터를 공식 개관하였고 이곳에서 누차 이 경에 대한 법문을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명상센터가 새로 개설되면 우리는 항상 이 경전으로 개관식 법문을 합니다.
불교 경전은 세 가지 주요한 부분, 즉 삼장(三藏 Ti-Piṭaka)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경장(經藏) - 쑤따 삐따까(Sutta Piṭaka)
2. 율장(律藏) -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3. 논장(論藏) - 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 Piṭaka)
초전법륜경은 다음과 같은 오부(五部)로 구성된 경장(經藏)에 속해있습니다.
1. 장부(長部) - 디가 니까야(Digha Nikāya)
2. 중부(中部) - 마찌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3. 상응부(相應部) -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āya)
4. 증지부(增支部) -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āya)
5. 소부(小部) - 쿠다까 니까야(Khuddaka Nikāya)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개 품(品)으로 나눕니다.
➀ 유게품(有偈品 Sagāthāvagga)
➁ 인연품(因緣品 Nidānavagga)
➂ 건도품(健度品 Khānavagga)
④ 육처품(六處品 Salāyatanavagga)
⑤ 대품(大品 Mahāvagga)
대품(大品)은 다시 대상응(大相應), 각지상응(覺支相應) 염처상응(念處相應 )과 같은 열두 개의 소상응(小相應)으로 나누며 그중에 맨 마지막이 제상응(諦相應)입니다.
초전법륜경은 제상응(諦相應), 제 2품(品) 첫째 경이며, 제6차 결집3 을 진행할 때에도 그렇게 독송하였습니다. 제6차 결집에서는 초전법륜경이 상윳따 니까야 ,제3권(368-371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는,
“한 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4.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라는 문구로 법문을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부처님 입멸, 3개월 후에 개최된 제1차 결집에서, 마하까사빠 장로가 질문하고 아난다 장로5가 독송한 것입니다. 마하까사빠 장로6는 아난다 장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벗 아난다여, 초전법륜경은 어디서 설한 것입니까? 누가 설했고 누구를 대상으로 설한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설해졌습니까?”
아난다 장로는 대답했습니다.
“스승이신 마하까사빠여,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 근처의 사슴동산(鹿野苑)7, 현인(仙人)의 거처인 이시빠따나8에 계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수행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나니.”
2. 이 경전을 말씀한 시기 ▲ 위로
서문에는 정확히 어느 날짜에 경전을 설하셨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경과 마찬가지로 ‘한때’ 혹은 ‘어느 때’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전들이 설해진 년, 월, 일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다면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대(年代)별로 본 상세한 정보는 경을 암기하고 독송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경전이 설해진 정확한 날짜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전법륜경의 경우는 설해진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하신 법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경장(經藏)이나 율장(律藏)에서도, 부처님께서 대력(大曆) 103년, 카손(Kason) 대보름날 정각을 얻으셨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이 초전법륜경을 우안거(雨安居, Wāso)9가 끝난 다음인 대보름날 초저녁에 설하신 것이 됩니다. 지금은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으로,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10에 드신 지 정확히 2506년이 되는 해입니다.
열반에 드시기 전에 45년 동안 가르침을 편 기간을 고려하면 모두 2551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첫 법문을 하신 것은 2551년 전 우기가 끝난 대보름날입니다. 서양학자들은 이것을 60년이나 당겨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계산에 따르면 2491년 전에 첫 법문이 있었던 것으로 됩니다. 법의 바퀴(法輪)를 굴린 것은 동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양의 계산법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첫 법문은 2551년 전에 설해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슴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사슴동산(鹿野苑)은 사슴들이 평화롭게 뛰놀던 숲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숲의 나무들이 벌채되어 경작지와 사람들 주거지로 이루어진 탁 트인 평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래전 옛날에는 신통력을 가진 벽지불11들이 간다마다나 산으로부터 날아와 한적한 이곳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주 먼 과거의 정각자(正覺者)들도 초능력으로 하늘을 올라 이곳에 오셨고 똑 같은 장소에 내려와서 첫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인(仙人)의 거처, 혹은 보금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경의 서문에서는,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의 사슴동산에 계실 때 다섯 비구들에게 첫 법문을 하셨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서문에서 알 수 있는 꾸밈없고 불충분한 정보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므로 다른 경에서 자료를 하나 가져오겠습니다.
3. 세 가지 서문 ▲ 위로
경전 서문에는, 부처님께서 이 경을 누구에게, 혹은 무엇을 설하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주 먼 과거의 배경 이야기를 해주는 서문이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부처인 보살(菩薩)12이 부처가 되기까지, 연등불(燃燈佛, 디빵카라붓다13)에게 수기(受記)를 받는 것에서부터 세따케뚜라는 천인15의 왕으로 도솔천에 재생14할 때까지, 붓다가 되기를 서원하고 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먼 과거에 있었던 배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며 또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둘째. 중간시기의 배경이야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서문이 있습니다. 도솔천의 생을 마치고 내려와 지혜의 왕좌에 앉아 정등각(正等覺)을 얻은 이야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서문에 어느 정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방금 언급한 초전법륜경의 가르침과 같이 최근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서문이 있습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한 때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어두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제 앙굿따라 니까야, 삼집(三集)의 수쿠말라경(Sukhu māla Sutta, A.i.143)과 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의 빠사라시경(Pasarāsi Sutta),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 Mahāsaccaka Sutt,), 마찌마 니까야의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āJkumara Sutta) 상가라경(傷歌邏經 Sangarava Sutta), 그리고 쿠다까 니까야, 경집(經集 Sutta nipāta)의 출가경(出家經 Pabbajjā Sutta), 정근경(精勤經 Padhāna Sutta) 및 다른 많은 경전상의 자료들을 가지고, 둘째 범주에 속하는 서문에서 가져온 관련 인용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 보살과 세속적 즐거움 ▲ 위로
보살은 도솔천에서 생을 마친 후, 카삘라와뚜(Kapilavatthu)16의 숫도다나 왕의 정실왕비인 마하마야 데위의 태내에 들어갔습니다. 보살은 대력 68년의 카손 보름날, 금요일에 룸비니 숲, 사라나무의 즐거운 숲에서 태어났고 이름을 싯달타라고 하였습니다. 열여섯 살에는 데와다의 왕족인 수빠붓다의 딸 야소다라 데위와 결혼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4만 명의 궁녀들에 둘러싸여 장엄한 궁전에서 왕궁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싯달타는 화려함과 장엄 속에서 감각적 즐거움에 완전히 빠져있었습니다. 하루는 정원의 향연과 환락을 위해 시중들을 데리고 왕실의 즐거운 숲으로 나갔습니다.
숲으로 가는 길에 그는 노쇠한 늙은이를 보고 충격을 받아 왕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두 번째는 아프고 병든 사람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왔습니다. 세 번째 나갔을 때는 죽은 사람을 보고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급하게 발걸음을 되돌렸습니다. 보살이 느꼈던 놀람과 동요는 마찌마 니까야의 성구경(聖求經)에 나와 있습니다.
5. 세속의 길 ▲ 위로
보살은 이렇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늙어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내와 자식, 노예, 염소와 양, 닭과 돼지, 코끼리, 말, 가축, 금, 은, 유정물, 무정물, 쾌락과 호화로움, 이 모든 대상은 늙도록 되어 있다.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그런 쾌락에 둘러싸여 파묻혀 지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있는 감각적 대상을 갈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늙음, 질병, 죽음과 같이 어울리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저속한 일이다.”(성구경, M26)
“스스로 병들고 죽어 가도록 되어 있는데,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것을 찾아나서는 것은 성스러운 추구이다.”(성구경, M26)
6. 출세간의 길 ▲ 위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살이 처음에는 세속적인 것에 빠져 있던 것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에는, 나 스스로 태어나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역시 또 태어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원하였다. 나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역시 또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원하였다.”
이는 쾌활한 궁녀들 무리 속에서 야소다라와 함께 살았던 시절, 쾌락을 추구하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다음,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의 평화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스스로 태어나고 늙어가도록 되어있는 것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태어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비할 수도 없고 능가할 수도 없는, 열반의 평화를 찾는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늙음과 질병, 죽음이 없는 열반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목표였으며, 우리는 그것을 좀 더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나이 들고 노쇠한 어떤 사람이 자기처럼 나이 들고 쇠약한 다른 남자나 여자를 찾거나, 아직 나이는 들지 않았어도 곧 늙어버릴 누군가를 짝으로 찾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사려 깊은 일이 아닙니다.
또 건강이 나빠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린 다른 사람을 짝으로 구한다면 너무나 불합리한 일일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건강이 좋은 상태에 있더라도 곧 병고를 받게 될 그런 사람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사려 깊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해서 즐기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배우자 중 한쪽은 곧 병으로 몸져눕게 되고 다른 짝이 돌봐주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됩니다. 배우자 중 한쪽은 죽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슬픔과 비탄만을 남겨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부부는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이라는 불행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있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주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것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 이 명상센터의, 신도, 비구, 재가자 여러분도 가장 성스러운 것인,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7. 보살의 출가 ▲ 위로
보살이 즐거운 숲으로 네 번째 유람을 나갔을 때 한 출가 사문(沙門)과 마주쳤습니다. 세속의 삶을 버리고 공덕을 쌓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문의 말을 듣고, 보살은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 사문이 되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리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얻으면 그 지혜를 세상에 전해 주어 다른 중생들에게도 늙음, 질병, 죽음이라는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생각과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날, 거의 같은 시각에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보살은 “장애(Rāhula)가 태어났구나. 족쇄가 태어났구나.”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보살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은 이 아이가 실제로 보살에게 족쇄가 되고 출가를 하고자 하는 계획에 장애가 되기를 바라며 새로 태어난 손자를 라훌라 왕자(장애왕자)17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세속의 즐거움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보살은 그날 밤 왕궁 무용수들이 제공하는 여흥에도 동요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았으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낙심한 무용수들은 악기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잠에 들었습니다. 한 밤중에 잠을 깬 보살은 기대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고 장엄한 궁전이 마치 송장들로 가득한 공동묘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한밤중에 마부인 찬나(Channa)18를 데리고 왕궁의 전속 말인, 칸다까라를 탄 채 위대한 출가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아노마 강에 이르렀을 때 보살은 모래강변에 선 채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왕의 장신구를 버리고 범천(梵天) 간띠카라19가 준 주황색가사를 걸치고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때 보살은 겨우 스물아홉이었고 쾌락을 추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나이였습니다. 아직도 한창 젊음을 누릴 나이에 왕국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야소다라 비(妃)와 시종들이 주는 쾌락과 편안함을 버리고 출가한 것은 참으로 경외스러운 일입니다.
8. 대 사문 알라라를 찾아가다 ▲ 위로
당시 보살은 출세간에 이르는 실질적인 통찰지혜를 얻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범한 인물로 알려진 사문 알라라를 찾아갔습니다. 알라라는 팔선정(八禪定, lokiya-jhãna)20 가운데, 일곱 번째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완전히 통달하여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부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선정력을 얻은 이런 스승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을 실제로 가르치는 믿을 만한 스승의 역할을 했습니다. 알라라는 그 당시 부처님처럼 유명하였습니다. 상좌부경전에는 알라라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북방불교 학파의 불전(佛傳)인「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Lalitavistra)」21에는, 알라라가 웨살리주에 살았고 삼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9. 거룩한 현인 알라라에게 배우다 ▲ 위로
보살이 어떻게 거룩한 현인(賢人) 알라라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그런 나는 이와 같이 무엇이 출세간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추구하게 되었고, 비교할 수 없고 위없는 평화를 찾기 위해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거기서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 깔라마여. 저는 당신의 교법과 가르침 밑에서 출세간의 행[淸淨梵行]22 을 닦기 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알라라가 대답했습니다. ‘존경스러운 벗 고따마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환영합니다. 이 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스승이 알아서 증득한 것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격려의 말을 하고 나서 알라라는 보살에게 교법의 실질적인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10. 마음을 다독이는 말 ▲ 위로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곧 스스로 자신처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알라라의 말은 무척 신심을 북돋아 주고 격려가 되었습니다. 실용주의적인 교법은, 오직 스스로, 짧은 시간 안에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믿음과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더 고무적인 것입니다. 보살은 알라라의 말에 만족하고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한 믿음만으로 알라라가 법을 배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알라라는 확실히 스스로가 법을 깨달았고, 법을 알고 이해하고 있다.”
정말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알라라는 권위적인 어떤 경전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알라라는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깨달은 것만 말했습니다.
수행을 가르치는 스승은 반드시 알라라처럼 과감하게 자기의 확신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소 법을 실천해보지도 않고, 자기 방식만의 체험이나 깨달음도 없으면서, 오직 경전만을 통하여 수행법을 배운 것으로 수행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주장하거나 수행에 대한 법문을 하고 책을 쓰는 것은 가장 모순되고 부적절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아직 임상 실험을 거치지도 않고 스스로 경험해 보지도 않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함부로 투여할 수 없는 약물을 처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가르침과 간행물들은 확실히 의지할 수 없고 또 영감을 얻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알라라는 과감히 스스로 깨달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보살은 그런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알라라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있다. 알아라에게만 노력, 알아차림(sati)23, 집중,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있다.“
그러고 나서, 알라라가 스스로 배우고 알았다고 하는 그 법을 깨닫기 위해 매진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보살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는 법을 배웠습니다.
보살은 알라라 깔라마에게 가서, 스스로 알았고 그 속에서 머물며 살아간다고 주장하는 무소유처와 자신이 지금 도달한 것이 같은 단계인지를 물었습니다. 알라라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법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깨닫고 그 속에 머물며 살아간다고 선언한 이 법은 벗 고따마가 도달한 것과 같은 단계입니다.”
그리고 알라라는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습니다.
“벗 고따마는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무소유처는 쉽게 얻을 수 없는데, 벗 고따마는 그것을 짧은 시간 안에 증득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랄 만한 것입니다. 존자와 같은 이런 뛰어난 도반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내가 법을 깨달은 것처럼 그대도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내가 깨달은 법을 그대도 압니다. 그대가 깨달은 법을 나도 압니다. 벗 고따마는, 법에서는 나와 동격입니다. 벗이여, 오십시오. 둘이 같이 머물면서 이 무리를 이끌어 갑시다.”
이렇게 스승 알라라는 보살을 자신과 완전히 동격의 제자로 인정하고 자신이 거느린 모든 제자의 거의 반수인 백 오십 명을 지도하는 임무를 부여하면서 보살을 존중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수행처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거기 있을 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법은, 혐오를 말하지도 않고, 갈애를 없애거나 멈추게 하지도 않으며, 최고의 지혜와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요함으로 인도하지도 않고, 번뇌를 해결하는 열반으로 인도하지도 않는다. 단지 무소유처에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일단 거기에 가면 육만 겁(劫)24이라는 긴 수명이 따른다. 거기서 목숨이 다하면 업의 존재(業有)로 다시 태어나서 또다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내가 찾고 있는 죽지 않는 방법이 아니다.”
이렇게 무소유처에만 이르는 그 수행법에 관심이 없어진 보살은 그것을 버리고 알라라의 수행처를 떠났습니다.
11. 현인 웃다까를 찾아가다 ▲ 위로
알라라의 처소를 떠난 보살은 당분간 혼자의 힘으로, 불사(不死)의 길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하여 극도의 고요함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때 보살은 라마뿌따(라마의 아들 혹은 현인 라마의 제자)라고도 하는 우다까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보살은 우다까가 있는 곳으로 가서 현인 라마의 법과 가르침 밑에서 출세간의 길을 가고자 했습니다.
보살이 우다까 밑에 있으면서 겪은 여러 가지 체험, 우다까가 법을 어떻게 자신에게 설명해주었고, 보살이 그 교법을 어떻게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으며, 우다까가 얻은 법을 어떻게 깨달았고 그것을 다시 우다까에게 설명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다까 또는 라마뿌따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라마(Rãma)의 아들(putta), 또는 라마의 제자였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현인 라마는 선정(禪定)의 여덟 단계를 모두 밟고 가장 높은 선정의 단계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보살이 우다까에게 갔을 때에는 이미 스승인 라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마가 성취한 것을 우다까에게 물으면서 과거 시제인 ‘선언했다(pavedesi)’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라마가 스스로 깨닫고, 또 경지에 들었다고 선언한 라마의 교법은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라마에게만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있다.”
이 장에서는 우다까가 보살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 교법을 알고 라마도 이 교법을 알았습니다. 그대는 라마와 동격이고 라마는 그대와 동격입니다. 존자여, 오시오. 둘이 같이 머물면서 이 무리를 이끌어갑시다.”
그리고 보살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라마의 제자 우다까는 성스러운 길을 가는 내 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경전의 인용을 보면, 보살은 현인 라마를 만나지 않고, 라마의 교법을 배운 제자인, 우다까를 만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보살은 우다까가 설명한 방법에 따라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할 수 있었습니다. 교법을 배워 현인 라마처럼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하고 경지에 머물게 되자 보살은 우다까로부터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입니다.
상좌부 문헌에는 우다까가 어디에 머물렀고 그 추종자들이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지만, 북방불교에서 전하는 붓다의 일대기인 방광대장엄경(放光大莊嚴經)에 의하면, 우다까의 수행처는 라자가하(王舍城 RaJgaha)25지역에 있었으며 칠백 명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보살과 만날 당시 우다까는 아직 비상비비상처선(非想非非想處禪)을 얻지 못했음을 유념해야합니다.
우다까는 현인 라마가 얻은 단계를 보살에게 설명해주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보살이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해서 자기 스승과 동격이 된 것으로 판명되자 보살에게 전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복주서(復註, Ṭīkā)에 의하면, 우다까는 후에, 보살이 행한 선례에 따라 용맹 정진하여 최종적으로 최상의 선정단계인 비상비비상처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수행처에 잠시 동안만 지도자로 머물었습니다. 곧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법은 혐오를 말하지도 않고, 갈애를 없애게 하지도 않으며, 통찰지혜와 최고의 지혜, 그리고 열반을 얻기 위한 고요함으로 인도하지도 않는다. 단지 비상비비상처에만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일단 거기에 도달하면 팔만사천겁의 긴 수명을 누린 후 다시 욕계의 존재로 돌아와서 더 많은 괴로움을 당한다. 이는 내가 갈구하는 죽지 않는 교법이 아니다.”
그리고는 비상비비상처에만 이르는 그 교법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져서 그것을 버리고 우다까의 수행처를 떠났습니다.
12. 우루웰라 숲에서 아주 심한 고행을 하다 ▲ 위로
우다까의 수행처를 떠난 후 보살은 비할 수 없는 평온을 향한 길, 불사(不死)의 열반을 추구하면서 마가다를 편력하였습니다. 유행(遊行)하는 동안 쎄니가마라는 큰 마을 근처의 우루웰라 숲에 이르렀습니다. 숲속에서 보살은 깨끗한 네란자라 강을 보았습니다. 상쾌한 곳, 고요한 깊은 숲, 탁발을 나가기에 적합한 근처의 마을이 있는 깨끗한 시내를 감지하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용맹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러고는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때만 해도 보살은 아직 바른 정진(正精進)의 정확한 수행법을 닦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행은 당시 인도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고 또 널리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수행과 관련하여 보살은 세 가지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13. 세 가지 비유 ▲ 위로
무화과나무에서 갓 베어 푸른빛이 감도는 젖은 나뭇가지를, 역시 젖은 수액(樹液)이 흐르는 촉촉한 나뭇가지로 비비면 불이 일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아내와 가정과 같은 감각적 즐거움의 대상과 어울리고, 내면에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애욕의 즐거움과 탐욕을 여전히 즐기고 있다면, 아무리 용맹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지혜, 통찰,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보살에게 떠올랐던 첫 번째 비유였습니다.
설령 무화과 나뭇가지가 물에 젖지는 않았지만 갓 베어져 나와서 여전히 수액이 흐르는 푸른색이라면 아무리 비벼주어도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아내, 가정과 같은 감각적 대상을 저버렸다 할지라도 내면에는 여전히 애욕의 즐거움과 탐욕스런 생각을 즐기고 있다면, 지혜, 통찰, 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비유는 바라문 담미까 사문들의 수행방법에서 참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바라문들은 젊어서부터 성스러운 사문의 삶을 살다가 마흔여덟 살이 되면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다시 결혼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정수행을 하는 동안에도 탐욕스런 생각으로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비유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물에 젖지 않고 수액이 말라버린 나뭇가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마른 나뭇가지는 서로 비벼대면 불이 붙습니다. 이처럼,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버리고 탐욕스런 생각과 갈애를 뿌리 뽑으면, 극단적인 고행을 하거나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지혜와 통찰,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14. 마음으로 생각을 짓누르는 아주 심한 고행 ▲ 위로
세 번째 비유에 따라 보살은 두 가지 방법을 놓고 다음과 같은 고행의 길을 고려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갖다 붙여서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을 마음으로 억누르고 제압하고 짓누르면 어떨까?”
여기서 인용한 빨리어 경전은 마찌마 니까야의 사자후품(師子吼品)에 있는 고상식지경(考想息止經 Vitakka Sandhana Sutta)26 원문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 경에서 언급한, 마음으로 생각을 누르는 방법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신 후에 정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행법은, 저절로 일어나는 번뇌를 나타날 때마다 알아차려서 소멸시키는, 염처경27 기타 유사한 경전의 위빠사나 수행법에 포함이 됩니다. 여기에 묘사된, 마음으로 생각을 억누르는 방법은, 중도의 지혜를 얻기 전에 보살이 닦았던 수련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四念處]28수행법과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의 고행은 도덕적인 마음으로 악을 억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방법이 옳다면 여기에서 보살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이 방법으로 심한 고통만 겪었을 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택하게 된 다른 고행 역시 보살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걷게 했을 뿐입니다.
당시 보살이 행했던 고행은 오늘날 어느 불교학파의 추종자들이 행하는 마음 소멸 수행법과 어느 정도 유사해 보입니다. 일본에 전법여행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큰 절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의 명상법은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정신적 활동)이 비워져서, 도의 끝, 즉 무(無)의 상태인 공(空)에 이릅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젊은 대승불교 승려 여섯 명 정도가 가부좌를 한 채 열을 지어 앉습니다. 스승인 방장스님이 막대기를 들고 수행자들의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수행자들의 등에 일격을 가합니다. 얻어맞는 동안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서 공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교법입니다. 실제로 이는 마음으로 생각을 억눌러서 생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이를 꽉 깨물고 마음으로 생각을 억누르려는 보살이 채용한 기법과 아마도 같을 것입니다. 그 노력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으로 드러났고 두 겨드랑이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렸음에도 보살은 위없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15. 들숨날숨을 억누르는 선정 몰입 ▲ 위로
그때 보살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숨을 제어하고 숨을 쉬지 않는 선정에 집중하면 어떨까?”
그러한 생각으로 입과 코의 들숨날숨을 억제하였습니다. 입과 코를 통하는 숨을 통제하자 귀에서는, 공기가 밖으로 솟구쳐 나와 개구리가 내는 요란한 울음소리 같은 굉음이 들렸습니다. 몸에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보살은 집요하였습니다. 보살은 입과 코만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마치 힘센 사람이 망치로 머리를 조각내는 것과 같고, 머리둘레를 질긴 가죽 끈으로 조이는 것과 같은 큰 고통을 일으키며 맹렬한 바람이 정수리로 파고 들어왔습니다. 날카로운 백정의 칼에 베인 듯 맹렬한 바람이 배안으로 밀고 들어와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숯 구덩이 위에서 구워지는 듯 배속에 맹렬한 불이 일어났습니다. 보살은 통증과 고통에 압도되어 기진맥진한 채 쓰려져 누웠습니다.
쓰러져 있는 보살을 본 천인들이 “사문 고따마는 죽었다.” 고 말했습니다. 다른 천인들은 “사문 고따마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어가고 있다.” 또 다른 천인들은 “사문 고따마는 죽은 것도 아니요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을 뿐, 아라한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지혜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16. 극심한 단식 ▲ 위로
그래서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음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더욱 더 모질게 정진하면 어떨까?”
보살의 이런 생각을 알고 천인들이 말했습니다.
“고따마 님, 음식을 완전히 끊지는 마십시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늘의 영양분을 존자의 피부 털구멍을 통해 주입할 것입니다. 그러면 존자께서는 그것으로 연명할 것입니다.”
그러자 보살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완전히 단식한다고 선포하면 천인들은 털구멍을 통해 하늘의 영양분을 주입할 것이고 그것으로 나는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보살은 하늘의 영양분을 주입받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천인들의 제안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점차적으로 적게 먹기로 결심하고 겨우 한 줌밖에 안 되는 콩죽을 먹을 정도로 식사량을 줄여나갔습니다. 매일 다섯이나 여섯 숟가락 정도의 콩죽으로 연명하면서 몸이 아주 초췌해졌습니다. 손발은 여위고, 피부와 힘줄,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척추가 울퉁불퉁한 혹과 돌기형태로 튀어나왔습니다. 넓게 흩어진 뼈들은 돌출되어 극심한 고행을 하고 있는 보살의 그림에서와 같이 보기 흉하고, 송장 같은 몰골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빛은 구덩이 안으로 오그라들어 우물 속 깊이 잠긴 물에서 나오는 반사광처럼 보였습니다. 머리 가죽은 땡볕에 말라비틀어진 푸른색의 연한 조롱박처럼 오그라들었습니다. 극도로 초췌했기 때문에 뱃가죽을 만지려고 하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더듬으면 뱃가죽이 만져졌습니다. 보살은 너무나 극단적으로 절식하였기 때문에 대소변을 보기도 힘이 들어 앞으로 넘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극도로 초췌한 보살의 몸을 보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검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문 고따마의 얼굴은 갈색이다.” 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문 고따마는 시끈가오리와 같은 푸른 갈색이다.”라고 했습니다. 깨끗하고 밝고 빛나던 피부가 그렇게 변했습니다.
17. 마라의 설득 ▲ 위로
보살이 자신을 조복하기 위해 극도의 고행을 하며 분투하고 있을 때 마라(Māra)29가 와서 보살을 동정하는 척하며 설득력 있게 말을 했습니다.
“벗 고따마여, 그대는 아주 마르고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그대는 이제 죽음의 문턱에 서있다. 그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천에 하나이다. 살아남아라.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 그대가 산다면 선업을 지어 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마라가 언급한 공덕행은, 해탈의 길로 이르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수행(修行)을 통해 얻어지는 공덕이나 위빠사나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도를 성취하여 얻는 공덕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마라는 오직 성관계를 하지 않는 선정수행과 성스러운 불의 숭배를 통해 얻어지는 공덕만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수행을 하면 내생에 고귀하게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생의 축복에 현혹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공덕은 티끌만큼도 필요하지 않다. 너는 그런 공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해라.”
어떤 공덕도 필요하지 않다는 보살의 발언에 대해서는 한 가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살처럼 윤회30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공덕행을 버리고 그것을 추구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오해입니다. 한때 어떤 사람이 나한테 와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마라가 의미하는 공덕은,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한 통찰지혜의 계발이나 도를 성취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마라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보살도 역시 공덕 수행에 대한 정확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행을 고귀한 수행으로 여기고 여기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마라에게 “나는 어떠한 공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열반에 이르는 공덕 수행을 언급한 것이 아니고, 행복한 내생을 보장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런 행위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도 우리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보살이 ‘나는 네가 말하는 공덕은 티끌만큼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기술한 것은 마라가 의미하는, 내생을 보장하는 공덕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열반에 이르는 공덕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때 보살은 고행을 하는 것이 높은 지혜를 얻는 방법이라는 잘못된 생각 속에서 여전히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바람은 강물을 말려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피나게 노력하고 있을 때 바람은 왜 내 피를 말려버리지 않는가? 피가 다 말라버리면 담즙과 점액도 마를 것이다. 또 몸뚱이가 황폐해지면 내 마음은 더욱 맑아질 것이다.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확고히 자리 잡을 것이다.”
마라도 단식 수행을 하면 해탈과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려에서 마라는 보살을 구슬려서 단식의 도를 중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섯 수행자들도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식수행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해탈에 대한 설법의 첫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보살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정성을 쏟으면서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엔 극단적인 자기학대가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라는 믿음이 보편적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18. 올바른 판단 ▲ 위로
아무런 성과 없이 극단적인 자기학대로 6년을 보낸 보살은 다음과 같이 추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많은 사문과 바라문들이 자기학대를 하면서 고통스럽고, 고문당하는 듯한,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하지만 그 어떤 괴로움도 나와 같거나 그것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미래의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나보다 심한 고행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극심한 고행으로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높은 경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번뇌(kilesa)31를 제거할 수 있는 성자의 혜안(慧眼)32 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이 고통과 고행의 길 말고도 깨달음을 얻을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보살은 어린 아기였을 때 부왕 숫도다나가 가까이에서 밭갈이 의식의 행사에 바삐 몰두하고 있을 동안 잠부나무 그늘 밑에 혼자 앉아 초선(初禪)에 들었을 때를 생각했습니다. 보살은 이 첫 번째 선정 방법이 진리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19. 아기 때 처음 선정에 들다 ▲ 위로
보살은 카손(Kason), 즉 4월 보름날에 태어났습니다. 왕실 밭갈이 의식 행사는 나욘(Nayon), 즉 우안거(5월이나 6월)가 지나고 한두 달 후쯤에 열렸다고 생각됩니다.
어린 아기는 잠부나무 그늘 밑의 장엄한 침구로 꾸며진 침상에 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기왕자를 공손히 지켜보는 왕실시종들이 있는 임시 아기방주위로 휘장이 드리워지고 장막이 만들어졌습니다. 왕실 밭갈이 의식 행사가 화려하고 장엄하게 진행되고 왕이 몸소 축제에 참여하자 왕실시종들은 가까운 밭에서 행해지고 있는 화려한 광경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아기왕자가 잠들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장막 안에 아기를 안전하게 눕혀 놓고 축제를 즐기러 갔습니다. 아기 보살은 주위를 둘러보고 시종이 아무도 없자 일어나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습니다.
수 많은 생을 통해 습관이 된 수행에 힘입어 본능적으로 들숨과 날숨[出入息]에 마음을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살은 곧바로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기쁨(樂 sukha), 집중(定 samādhi)의 다섯 가지를 특성으로 하는 초선(初禪)에 들었습니다.
시종들은 얼마동안 없었습니다. 축제에 정신이 팔려 늦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시종들이 돌아 왔을 때, 나무 그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동되었지만 왕자가 누워 있는 잠부나무 아래의 그늘은 원래 있던 같은 장소에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아기 보살은 침대위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숫도다나왕이 보고를 받았을 때 잠부나무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광경과 아기가 앉아있는 자세를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경외심으로 왕은 자기 아들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보살은 유년시절에 얻었던 들숨과 날숨의 선정에 몰입했던 경험을 떠올리고는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그 기억을 면밀히 되짚어 보니 들숨날숨의 수행은 참으로 깨달음을 얻는 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선정 경험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선정의 기쁨(얻고자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그 기쁨(얻고자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
20. 식사를 다시 시작하다 ▲ 위로
그리고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몸이 이렇게 여위어 가지고는 선정을 얻을 수 없다. 예전처럼 단단한 음식을 좀 먹으면 어떨까? 그렇게 몸에 영양이 보충되어 튼튼해지면 선정을 위해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이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자 다섯 수행자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보살이 태어났을 때 정각자인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점쳤던 왕실점성가이자 고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덟 명의 왕실점성가가 왕궁에 있었습니다. 아기왕자의 미래에 대한 점을 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들 중 세 명은 각각 두 손가락을 치켜들고, 이 아이는 전륜성왕33 이 되거나 아니면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될 것이라는 두 가지의 선언을 했습니다. 남은 다섯 명은 각각 한 손가락만을 치켜들고, 이 아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붓다가 될 것이라는 한 가지 해석을 내렸습니다.
마찌마 니까야의 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 주석서(제 2권.p92)에 의하면 이들 다섯 왕실점성가는 가정생활에 얽매이기 전에 세상을 버리고 숲에 들어가 선정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종성경(佛種姓經)에 대한 주석서와 다른 몇몇 경전에서는, 일곱 명의 점성가들이 각각 두 가지의 해석을 나타내는 두 손가락을 치켜 올렸지만, 후에 꼰단냐 존자가 될 제일 젊은 바라문인 꼰단냐만이 한손가락을 들어, 이 아이가 미래에 반드시 붓다가 될 것이라는 확고한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젊은 바라문은 네 명의 다른 바라문의 아들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나와 합심하여 ‘다섯 수행자 모임’을 결성하고 보살의 위대한 출가를 기다렸습니다. 보살이 우루웰라 숲에서 극단적인 고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이 위없는 지혜를 얻으면 그것을 우리와 함께 나눌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처음 듣는 사람이 되리라.’ 고 하는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와 보살의 시자(侍者)가 되었습니다.
다섯 수행자들은 보살이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그의 행동을 오해하고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한줌의 콩죽을 먹고 살면서도 높은 지혜를 얻지 못했는데 다시 단단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얻기를 기대하겠는가?”
그들은 보살이 정진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와 영화를 누리는 예전의 호사스러운 삶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혐오감을 느끼며 보살 곁을 떠나서 베나레스의 사슴동산(鹿野苑)에 가서 지냈습니다.
21. 깨달음 ▲ 위로
다섯 수행자들이 떠나자 보살은 완전히 혼자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해탈을 위해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찌마 니까야의 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 제 2권. p192)에서는 보살이, 어떻게 보리수 아래 지혜의 왕좌에 앉아서, 2주 내내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정진하면서,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ñāṇa)와 깨달음을 얻었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출가하여 극단적 고행을 하면서 6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여전히 젊고 건강한 35살의 나이가 되어 15일 이내에 제대로 된 식사를 다시 하니 예전처럼 몸이 차올라서 삽십이상[三十二相]34을 되찾았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식사를 통해 체력과 에너지를 보강한 보살은 출입식념(出入息念 anāpāna sati)35을 하면서 일으킨 생각(위따카),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희열(삐띠), 행복(쑤카), 마음이 대상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를 특성으로 하는 초선(初禪)의 지복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는 희열, 행복, 집중을 수반하는 이선(二禪)에 들었습니다. 삼선(三禪)에서 보살은 행복과 마음이 대상 한곳으로 집중된 상태인 심일경성(心一境性 )을 즐겼으며 사선(四禪)36에서는 평온(捨 upekkhā)과 청정한 알아차림을 즐겼습니다.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으로 환산하면 대력 103년, 즉 2551년 전인, 카손(4월) 이른 보름날에, 보살은 세나니가마 마을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앉아 탁발 나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을 장자의 딸인 수자타가 보리수 정령(精靈)에게 공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자타는 하녀를 먼저 보내 성수(聖樹)가 뻗어있는 자리 아래를 정돈하도록 하였습니다. 보살이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하녀는 나무의 신이 몸소 그들의 공양을 받으러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녀는 매우 흥분한 채 달려가서 여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수자타는 아침 일찍 요리한 우유쌀죽을 십만 금의 가치가 있는 황금발우에 담고 다른 황금발우로 그것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발우를 들고 보살이 앉아있는 반얀 나무 아래로 나아가서 보살의 손에 발우를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디 존자님의 소원이 제가 가진 소원처럼 이루어지소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떠났습니다.
수자타는 처녀시절 반얀나무에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제가 동일한 신분과 계급을 가진 남편을 얻고, 처음 낳은 아기가 사내아이면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수자타의 기도는 성취되었고 그날의 우유쌀죽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나무정령에게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보살이 자신이 올린 우유쌀죽을 들고 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는 가장 큰 공덕이 되는 고귀한 행동을 하였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보살은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가서 목욕을 했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서 보살은 수자타가 준 우유쌀죽을 49개로 둥글게 뭉쳐서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보살은 강에 황금발우를 던지면서 “만약 내가 오늘 부처가 된다면 이 그릇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라.”라고 말했습니다. 발우는 세차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상당한 거리를 올라가, 용왕인 깔라의 거처에 도달하면서 강 속으로 가라앉아 과거불(過去佛)인 세분 붓다의 발우가 모셔져 있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살은 강가 근처의 숲 사이 빈터에서 하루 종일 휴식을 취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도중에 풀 베는 사람 소띠야를 만나 여덟 움큼의 풀을 받아서 보리수 쪽으로 갔습니다. 인도에서는 흔히 성자들이 풀 묶음을 깔아서 앉거나 잠잘 곳을 준비하였습니다. 보살은 동쪽 나무 아래 풀을 깔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위없는 절대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라는 엄숙한 결의로 풀 깔개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동쪽을 향해 앉았습니다.
이때 마라가 보살의 결의를 방해하고 깨달은 자[覺者]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보리수 아래의 자리를 다투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은 보시 등과 같은 십바라밀을 행하며 무수한 세월동안 쌓아온 공덕을 불러 일으켜, 해가 뜨기 전 마라의 방해공작을 물리쳤습니다.
이렇게 마라가 사라지자 보살은 밤의 첫째 시간에 선정을 통해 전생을 아는 지혜[宿命智]를 얻었고 밤의 중간 시간에 천안(天眼)을 얻었으며, 밤의 마지막 시간에는 12연기(paṭicca-samuppāda)37를 숙고하고, 이어서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아는 통찰지혜를 계발했습니다. 이 통찰지혜에 이어서 사성제(四聖諦)의 지혜를 얻고, 마지막에는 일체를 아는 지혜인 정등각(正等覺)을 얻었습니다.
정등각자가 되신 부처님은 네 번째 과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지복을 누리고 새롭게 찾아낸 법을 오래도록 반조하면서 보리수 아래 지혜의 왕좌위에서 7일을, 그리고 다른 여섯 곳에서 각각 7일을 머물며 총 49일을 보내셨습니다.
22. 심한 고행은 자기 학대다 ▲ 위로
15주에는 염소지기(Ajjpãla)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머물면서 부처님은 고행을 멈추게 된 사실에 관하여 이렇게 회고하셨습니다.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는 고행에서 벗어났다. 내가 그 쓸모없는 고행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해탈을 하여 정각을 이룬 것은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의 허점을 노리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시해왔던 마라가 곧바로 부처님에게 말했습니다.
“고행 말고는 존재를 정화시킬 방법이 없는데 고따마는 청정의 길에서 벗어났구나. 고따마는 오염되어 있으면서도 청정해졌다고 잘못 믿고 있구나.”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불사(不死)를 이루기 위한 극단적인 고행들은 마치 뭍과 모래 둑에 올라온 배의 키나 노처럼 모두 쓸모없고 무익한 것이다. 그 무익함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형태의 자기학대를 버렸다.”
주석서에는 식사를 불충분하게 하고 옷을 부실하게 입는 것과 같은 그런 극단적 수행이 자기학대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초전법륜경을 다룰 때 경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자기학대인 그런 극단적인 고행을 여기서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23. 첫 설법을 어떻게 펼까 깊이 생각하시다 ▲ 위로
일곱 군데의 다른 장소에서 각각 칠일을 보내시고 나서 50일째 부처님께서는 다시 염소지기의 반얀나무로 돌아왔습니다. 나무에 앉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셨습니다.
“과연 누구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을까? 누가 이 법을 빠르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자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배움이 있고 능숙하고 지성을 갖춘 알라라 깔라마가 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지혜의 눈에 번뇌의 먼지가 덜 낀 사람이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 먼저 가르침을 주면 어떨까? 그 사람이라면 이 법을 빠르게 이해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맨 먼저 찾고자 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념, 열정, 부지런함, 알아차림, 지성을 겸비한 신자들로 새로운 수행센터를 개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이러한 덕성을 구족한 그러한 신자들만이 빠르게 통찰지혜를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귀감이 됩니다. 신념, 열정, 부지런함, 알아차림, 지성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나이가 많아 몸과 마음이 나약해진 신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남다른 능력을 지닌 세 사람38 (사실 나의 친척이었습니다)과 함께 시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들은 수행 3일 만에 생멸의 지혜(udayabbaya-ñāṇa)에 이르렀고 희열과 행복의 단계에서 수반하는 빛과 영상을 보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러한 빠른 성과는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방법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보급될 수 있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빠르게 법을 이해할 사람에게 첫 법문을 펴고자 하신 것이었고 알라라 깔라마를 떠올리자 한 천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알라라 깔라마는 이미 7일전에 죽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에게 혜안이 생기면서, 과연 알라라가 7일전에 죽었고 그 선정의 힘으로 무색계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에 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4. 7일 차이로 도와 과를 놓치다 ▲ 위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깔라마 일족의 알라라를 잃은 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알라라는 충분히 성숙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도를 닦아 아라한과를 즉시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때 이른 죽음으로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무소유처천은 물질(色)39 이 없이 오직 마음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설령 부처님께서 그곳에 가서 그에게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소유처천의 수명은 매우 길어 육만 겁이나 됩니다. 거기서 수명이 다하고 나면 다시 인간계에 태어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치고 범부40로의 윤회를 반복하면서 때로는 4악처(apāya)41로 떨어져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알라라를 잃은 것을 크나큰 손실이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근기는 되지만 우리가 펼치고 있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사념처 수행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채, 혹은 그런 가르침을 듣기는 했지만 수행을 하려는 노력 없이 죽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여기 모인 선한 사람들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5. 하루 밤 차이로 크나큰 기회를 놓치다 ▲ 위로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대 현인 라마의 아들(제자)인 우다까에게 첫 법문을 펼 생각을 하셨습니다. 천인이 다시 부처님에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다까 라마뿌따는 어제 저녁 죽었습니다.”
부처님에게 혜안이 생기면서, 우다까 현인이 실제로 어제 밤 초경에 죽었고 선정의 힘으로 비상비비상처천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도 역시 무색계(無色界)로서 그 수명은 팔만 사천겁이나 됩니다. 이 세계는 서른한 가지 중생계(三界)42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높은 곳이지만 거기서는 법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미 높은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 법을 듣는 것만으로도 라마뿌따는 즉각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라마뿌따는 하루 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것을 놓치고 다시 그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대 현인 라마의 아들(제자)인 우다까를 잃은 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은 다시 누구에게 첫 법문을 펴실 것인지를 생각하셨습니다. 천안(天眼)으로 보니, 다섯 수행자들이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인 녹야원에 있었습니다.
26. 첫 법문을 펴기 위해 길을 떠나다 ▲ 위로
부처님께서는 베나레스로 향했습니다. 과거의 정등각자들도 같은 여행을 했는데 신통력으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따마 부처님께서는 길에서 나체 수행자 우빠까를 만나 감화시키기 위해 걸어서 가셨습니다.
불종성경(佛種姓經)과 본생경(本生經)의 주석서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우안거의 보름날에 여행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은 보리수로부터 18 유순(由旬)43, 즉 142마일이 떨어져 있는 곳이고 이곳을 부처님은 걸어서 가셨다고 하는데 그 거리는 신통력 없이는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우안거의 여섯 번째 상현(上弦)일을 출발날짜로 한다면 적당할 것입니다.
27. 나체 수행자 우빠까를 만나다 ▲ 위로
가야로 향하는 길에 부처님께서는, 보리수에서 얼마 가지 않아서 나형외도(裸形外道)의 큰 지도자인 나따뿌따의 제자로서 나체 수행자인 우빠까를 만나셨습니다. 부처님을 본 우빠까는 말했습니다.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차분합니다, 그대의 피부색깔은 청정하고 빛이 납니다44 그대는 어느 분에게로 출가하였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일체승자요 일체지자이니
일체 법에 물들지 않는다.
일체를 버렸고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했으며
일체를 알았으니 무엇을 더 의지하랴?”
부처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승이 없고,
나와 같은 사람이 없다,
사람과 신들의 세상에서,
나와 대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을 들은 우빠까는 과연 부처님이 아라한과를 얻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나에겐 스승이 없고, 지상에도 천상에도 나와 동등한 존재는 없다.
나는 세상의 아라한(應供)이며, 위없는 스승(無上師)이며 유일한 붓다며 깨달은 자니, (모든 번뇌를) 끄고 (열반의) 적멸을 이루었다.”
그러자 우빠까는 부처님께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가는가를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법 바퀴(法輪)를 굴리러 까씨 성으로 가노라. 눈먼 이 세상에서 나는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우빠까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자처하는 바에 따르면 그대는 무한한 정복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같이 번뇌(漏 āsava)의 멸진을 이룬 자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정복자(jina)다. 나는 모든 생각, 견해, 일체 삿된 관념(잘못된 법)을 정복하였다. 우빠까여, 그래서 나는 정복자, 승리자다.”
우빠까는 제자들로부터 승리자란 의미의 지나로 불리는 나따뿌따가 이끄는 나형외도(裸形外道)에 속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처럼 진정으로 번뇌를 치유하고 제거한 사람만이 지나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28. 그릇된 생각에 가려 있으면 진리는 보이지 않는다 ▲ 위로
부처님께서 자신이 참된 무한 정복자라고 선언 하시자 나체 수행자 우빠까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요.”
머리를 갸우뚱하고는 부처님께 길을 양보하고 자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우빠까가 부처님과 만난 이 사건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때 우빠까는 실제로 정등각자와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신이 진짜 부처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여전히 회의적이었던 것은, 우빠까가 나형외도의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수행법에 대해 들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올바른 방법을 가르치고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취하고 험담을 합니다. 그릇된 생각이나 견해에서 나오는 이런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우빠까가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반응했지만 얼마 후 부처님께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믿음을 지니고 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을 떠나고 나서 우빠까는 사냥꾼의 딸 짜빠와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나자 가정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부처님께 출가를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여 아나함과[불환자, ānāgami]45 를 얻은 후 죽어서 범천계인 정거천(淨居天)의 무번천(無煩天)에 태어나 거기서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우빠까와 만나 이런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하신 부처님께서는 베나레스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가 우빠까의 모든 질문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29. 이시빠따나에 도착하다 ▲ 위로
저 멀리서 자기들 쪽으로 걸어오는 부처님을 본 다섯 수행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서로 간에 약속을 했습니다.
“벗들이여, 제멋대로 정진을 포기하고 호화로운 생활로 되돌아간 사문 고따마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우리들은 그에게 경배하지도 말고, 가서 인사를 하고 발우와 가사를 받아주지도 말자. 하지만 고따마는 고귀한 가문 태생이므로 원한다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는 마련해 주자.”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그들은 그의 빛나는 휘광으로 인해 자신들이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한 명은 가서 부처님에게 인사를 드리며 발우를 받고 다른 한명은 가사를 받았으며 또 다른 한명이 발 받침대를 준비하는 동안 나머지 한명은 발 씻을 물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처님을 자신들과 동격으로 생각하고 예전처럼 고따마로 호칭하며 “나의 벗(āvuso)46이여”라고 불경스럽게 불렀습니다.
부처님은 준비된 자리에 앉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를 고따마란 이름이나 벗이라고 부르지 말라. 여래(如來)47는 최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고 다른 부처님들처럼 정등각자이다. 귀를 기울여라, 비구들이여.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법을 일러주고 가르쳐주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따라 행하면, 오래지 않아, 바로 금생에, 자신의 지혜의 힘으로 깨달아서, 아라한과, 즉 열반을 증득하여 머물 것이다. 이는 그대들이 좋은 가문의 혈통으로서 출가하여 집 없는 생활을 하면서 추구한 궁극적이고도 최고의 목표인 출세간의 길이다.”
부처님의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다섯 수행자들은 여전히 회의적이었으며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그런 품행과 그런 실천과 그런 엄격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조건을 넘어선 성자가 갖추어야할 특별한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이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그대는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호화로운 생활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런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가 갖추어야할 특별한 지혜와 통찰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은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어린 보살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을 때 보살이 반드시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점쳤던 이전의 왕실점성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살이 궁핍함을 떠나 엄격한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릇된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고행이 깨달음을 얻는 올바른 길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부처님께서 불사(不死)를 얻고, 깨달은 자가 되었음을 명확히 선포하는데도 여전히 회의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한번 품게 되면, 그러한 생각에 강하게 집착하여 어떠한 진리도 그들을 바꾸거나 믿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바른 길로 인도 해주려는 사람을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그러한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불경하고 폄하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오류와 자기기만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수행자들에 대한 큰 자비심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과거의 여래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성취를 위해 수행하지 않았으며 용맹정진을 포기하지 않았고 번뇌를 소멸시키는 참된 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호화로운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최고의 존경을 받을 만하고, 위없는 성취를 하고 정등각을 얻은 여래가 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두 번째에도 다섯 수행자들은 똑같은 식으로 반박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이들이 여전히 무지와 무명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세 번째로 그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섯 수행자들이 그래도 똑같은 항의를 하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잘 생각해보아라. 그대들과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우리들은 6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왔고 내가 극단적인 고행을 하고 있을 때 곁에서 나를 시중들었다. 그대들은 예전에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그러자 다섯 수행자들은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그의 지혜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필시 위없는 지혜를 얻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공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존자님. 우리들은 전에 존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최고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 아라한이 되었고, 과거의 부처님들처럼 위없는 성취를 이룬 여래가 되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등각자가 되어, 불사를 얻었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나는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고 가르쳐 주리라. 만약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한다면 그대들은 머지않아 짧은 시간 안에, 지금 생에, 자신의 직접적인 지혜로 깨달아, 명문가의 혈통으로서 출가하여 집 없는 생활을 하면서 추구하였던 출세간의 궁극적이고도 최고의 목표인 아라한과, 즉 열반을 이루고 머물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다섯 수행자들은 비로소 받아들이려는 마음상태가 되었고 부처님께서 펴실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전해주실 지혜를 받고자 열심히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설한 내용은 서문의 중간시기에서 골라낸 사건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나는 들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가까운 과거로 와서, 어떻게 부처님께서 법의 바퀴[法輪]를 굴리기 시작하셨는지를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미안마력 1324년(서력 1962년)으로 환산하여 서력 2551년 전인 우안거 보름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해가 막 지려는 찰나였지만 하늘은 아직 밝고 붉은 빛이 감돌았으며 밝은 노란 색을 띤 달이 동쪽하늘에서 막 올라왔습니다. 쌍윳타 니까야, 대품(大品)의 주석서는 해와 달을 하늘에서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첫 법문이 설해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법문을 듣는 이들은 인간세계에서는 오직 다섯 수행자들이었지만「밀린다왕문경」48에 의하면 일억 팔천만 범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법문을 들을 행운을 얻게 된 다섯 수행자들과 범천, 천인들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열렬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초전법륜경을 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Dve 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 비구들이여, 수행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나니.”
주석서의 해석에 의하면, 여기서 언급한 안따(antā)는 문법적으로 꼬따사(kotthāsa) 혹은 바가(bhāga)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언덕, 부분, 사물의 일부를 뜻합니다. 하지만 법문의 뒤에 언급한 중도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안따(antā)를 극단, 끝으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더구나 ‘부분이나 사물의 일부’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어떠한 부분이나 일부가 아니라 두 가지 반대되는 끝이나 사물의 극단에 있는 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따(antā)를 ‘두 극단’ 혹은 ‘부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싱할리어나 태국어 주석서는 안따(antā)를 ‘나쁜 부분’을 의미하는 ‘lānmaka koṭṭhāsa’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나쁜 것’ 혹은 ‘수행’이라는 미얀마어 번역과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그래서 먼저 간결하게 ‘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 혹은 수행을 따라서는 안된다.’라고 알아두어야 합니다.
Katame dwe. Yo cãyam kãmesu kãma sukhalikānuyogo-hino,
gãmmo, pothujJniko, anariyo, anatthasamhito.
Yo cãyam attakilamathãnuyogo-dukkho, anariyo,anattha-samhito.
두 가지 극단 혹은 수행이란 무엇인가? 욕망의 대상인 감각 대상을 좋아하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쾌락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또 이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 극단(수행)은 세속 사람들의 습관으로, 저급하고(좋지 못하고) 속된 것이며, 범부들이 탐닉하는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것입니다. 청정하지 못하고 품위가 없으며 그래서 성자들이 추구하지 않는 길입니다. 이득이 없고 또 참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으로서 피해야 합니다.
즐거운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49 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한 쾌락의 대상을 좋아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그것을 즐김으로써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극단을 이루는 수행은 수준이 낮고 저속하며, 통속적이고 고결하지 못하며 이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의 삶을 버린 수행자는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과 같은 또 다른 극단 혹은 수행은 괴로움만 낳을 뿐입니다. 사람이 늘 습관적으로 하는 식사를 하지 않거나 옷을 입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학대로 무익합니다. 청정하지도 고귀하지도 못하며 이런 수행은 성자들이 추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찾는 참된 이익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극단적인 수행인 고행을 피해야 합니다.
이 두 극단을 피함으로써 중도(中道)라고 하는 참된 길에 도달합니다.
30.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다 ▲ 위로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āgamma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i, nāna karani, upasamãya, abhiññã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비구들이여, 이 두 극단을 따르지 않은 여래(如來)는, 중도의 지혜를 얻었느니, 이로서 혜안[智見, cakkhu]이 생기고 지혜가 생겼으며 이것이 고요함(번뇌의 소멸)으로 인도하고 더 높은 지혜와 고통의 끝인 열반으로 인도하였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길을 피함으로써
중도에 이르렀다.
이 참된 길을 닦아서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며
열반을 증득하였다.”
팔정도로 알려진 중도가 어떻게 혜안(慧眼)과 지혜를 생기게 하고 어떻게 고요함(upasama)과 바른 깨달음(sambodha)으로 인도 하는지는 다음 주 법문에서 다룰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 모두가 이 위대한 초전법륜경과 그 서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잘못된 길, 즉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게 되어 중도인 팔정도를 닦게 되고 그로써 혜안과 높은 지혜를 얻어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빠르게 이루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역주(譯註) : ▲ 위로
1. 따우탈린(Tawthalin)은 양력 9월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얀마에서는 매월 첫날이 되면 새로운 달을 맞이하여 지난달의 죄를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봉사와 희생을 다짐한다. 이 날을 New Moon day(월삭,月朔, 혹은 호데쉬)라고 한다.
2.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나(bhāvanā)는 사유를 쫓아다니지 않고 정신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 즉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을 철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불교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정(定)인 삼매(samādhi)을 닦는 집중수행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혜(慧)인 통찰지혜(paññā)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전자는 <정품>에서 40가지 명상주제를 통해서, 익힌 표상(uggaha-nimitta)과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을 일으키고 이것에 집중하여 본삼매(appana-samādhi)를 증득하는 삼매수행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후자는〈혜품〉에서 82법의 고유성질과 연기성을 각각 찰라(khaṇika)와 조건(paccaya)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7청정을 닦아서 16가지(또는 10가지) 위빠사나의 지혜를 체득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되는 통찰지수행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직역되었다.
(1) 사마타(samatha)
사마타(samatha)는 고요함, 맑음 등의 뜻이다. 모든 불선법(不善法)이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 지(止)로 옮겼고 영역은 concentration이다. 이 단어는 삼매(sama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사마타는 네 가지 색계선(色界禪)과 네 가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는 8가지 선정의 경지(等持 samapatti)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appanā-samādhi)와 근점집중(upacārā-samādhi)와 같은 깊은 마음집중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는 사마타 수행을 위한 다양한 명상주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주석서에서는 38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청정도론」에서는 최종적으로 40가지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의 핵심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인데 대상에 집중을 해서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일으키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이 될 때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극복되고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근본집중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수행만으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 진․ 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의 상태를 풀면 다시 이러한 탐․ 진․ 치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강력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이 지혜의 힘으로 이들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고 꿰뚫어서 탐진치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위빠사나(vipassanā)
위빠사나(vipassanā)란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in) 보는 것(sight)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는데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고 있으며 영역은 insight로 정착되었다.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해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의 삼법인을 통찰, 혹은 꿰뚫는 것을 뜻한다. 오온(五蘊)의 삼법인을 철견함으로써 탐욕, 성냄, 어리석음, 사견, 자만, 의심등과 같은 열 가지 번뇌(kilesa)를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괴로움의 종식인 깨달음에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마음집중, 즉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 필요한데 이러한 찰나집중은 오온에 대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를 통해 얻어진다.
3.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불교 역사상 지금까지 총 6차례의 결집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6차 결집은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직후 불기 2500년을 기념하여 정부의 주도로 미얀마, 양곤에서 1954년 5월 17일에 개최된 결집이다. 이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결집을 이끌어가는 질문자 역할을, 삼장법사인 민군 사야도는 질문에 답하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번역한 Evaṃ me sutaṃ에서 evaṃ은 부사로서‘ 이와 같이, 이처럼’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영어의 ‘thus’가 적합한 뜻이라 하겠다. 如是로 한역되고 있다. me는 ‘나’를 뜻하는 일인칭 대명사 asmad의 조격(助격 Instrumental) 단수형이다. ‘나에 의해서’란 의미다. sutaṃ은 ‘들어진’의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문은 수동태의 문장으로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었다’는 뜻인데 상좌부와 대승의 양 전통에 속하는 경전들은 모두 이 말로 시작된다.
중국에서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옮겼다. 영역도 ‘Thus have I heard'이다. 여기서 ‘이와 같이’는 ‘이 경에 설해진 그대로’라는 뜻이고 ‘나’는 아난(Ānanda)존자를 말한다. 남북 전통에서 모두, 일차 결집(結集)에서는 아난 존자가 경(經)을 외우고, 우빨리(Upāli) 존자가 율(律)을 먼저 외워서, 그 곳에 모인 오백 아라한들이 그것을 합송해서 부처님 말씀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경과 율로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후대에 결집된 대승경전도 모두 이런 표현으로 시작해서 경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아난 존자가 직접 세존으로부터 들은 말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5. 아난다(Ānanda)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부처님의 후반부 25년 동안 시자로 있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배웠으며, 경의 결집에서 경을 암송하는 역할을 맡아서 불법의 체계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부처님 제자 중 다문(多聞)제일이라고 불렸다.
6. 마하까사빠(Mahākassapa)장로는 마가다의 마하띠타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삐빨리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든 조각과 똑 같은 여자가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요건을 만족시키는 바따 카삘라니라는 처녀를 싸갈라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주고받다가 들켜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삐빨리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60여개의 호수를 소유하고 정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근 4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동시에 아내 바따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까사빠는 벨루와나의 향실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바따는 나중에 빠자빠띠 고따미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마하까사빠는 부처님의 반열반 후 교단을 이끌고 1차 결집을 주도한 분으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불렸다.
7. 사슴동산(鹿野苑)이라 옮긴 원어는 Miigadāya이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MA.ii.188)는 “사슴들에게 두려움 없이 머무는 장소로 주어졌기 때문에 미가다야(Miigadāya)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신 유서 깊은 곳이다.
8. 이시빠따나(Isipatana)는 지금의 인도 사르나뜨로 바나라시에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세존께서 우루웰라에서 고행을 그만두시자 다섯 비구는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세존께서는 정등각을 성취하신 뒤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셔서 중도로 표방된 팔정도를 내용으로 하는 최초의 가르침을 펴셨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서는 “예전에 벽지불들이 간다마다나 산에서 7일 동안 멸진정(滅盡定)에 들었다가 탁발을 하기 위해 허공을 날아오다가 이곳에 내려서 도시로 들어가서 걸식을 하여 공양을 마친 후 다시 이곳에서 허공으로 올라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현인(isi)들이 이곳에 내리고 이곳에서 올라갔다고 해서 이시빠따나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9. 와소(Wāso)란 비가 많이 내리는 3개월 동안 출가자들이 주거를 바꾸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정주하는 우안거(雨安居)를 말한다.
10. ‘불어서 꺼진’이라는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수명이 남아 있고,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면 이러한 오온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11. 벽지불(辟支佛)이라 번역한 빠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빠쩨까는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라는 뜻이다. 벽지불은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태어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들과도 다르다. 이런 특이한 위치에 존재하는 깨달은 분이 벽지불로써, 중국에는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으로 번역되었다. 서양에서는 Slient buddha, Private buddha, Independently Enlightened one등으로 옮긴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들의 거주처는 히말라야의 간다마다나(Gandhamādana)산이라고 한다.
12. 보살(Bodhisatta)은 bodhi(覺, to enlighten)와 sattva (有情, to be)의 합성어이다. 본래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覺有情)’이고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해서 붓다라고 불리기 이전의 상태를 보살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 원음 보디사뜨와를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한 것을 다시 보살로 줄여서 부른다. 그리고 이 개념은「본생경(本生經)」에서 금생만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모든 전생을 다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겁(劫)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십바라밀(dasa-parami)을 닦아야 한다. 이 십바라밀에는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출리(出離 nekkhamma) ④ 지혜(智慧 paññā) ⑤ 정진(精進 viriya) ⑥ 인욕(忍辱 khanti) ⑦ 진실(眞實 sacca) ⑧ 결의(決意 adhiṭṭhāna) ⑨ 자애(慈愛 mettā) ⑩ 평온(平穩 upekkhā)이 있다.
13. 디빵까라 붓다(燃燈佛 Dīpaṅkara Buddha)는 4아승지(asaṅkheyya) 10만겁(kappa)전에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인 수메다(Sumedha)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성불의 수기(受記)를 내려준 부처님이다.
14. 재생(再生)은 영어 rebirth를 번역한 낱말이다. 영어권에선 rebirth가 빨리어의 jāti(태어남)의 역어로 자리 잡고 있고, 또 상좌부 불교 전통에서도 12연기의 태어남(生)을 재생으로 확고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별무리가 없다. 그러나 rebirth를 우리말로 ‘재생’이라 옮길 경우엔 다소 문제가 따를 수 있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에서 이해하는 환생이나 재생의 관념과는 다른 불교의 특색을 나타내기에 미흡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서에서는 이 rebirth를 문맥에 따라 윤회(輪廻), 재생(再生), 태어남, 다시 태어남 등으로 옮겼다.
15. 천인(deva)에는 세 종류가 있다.
① 인습적인 천인(sommuti-devā): 왕과 왕비와 왕자들을 말한다.
② 태생적인 천인(upapatti-devā): 사대왕천을 비롯하여 그보다 높은 천인들이다.
③ 청정한 천인(visuddhi-devā): 번뇌가 다한 아라한들이다.
이 가운데서 태생적인 신들을 일반적으로 천인이라 한다. 즉 6가지 욕계천상과 16가지 색계천상과 4가지 무색계 천상에 거주하는 천인을 말한다.
16. 까삘라와뚜(Kapilavatthu)는 부처님의 고향이자 히말라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까족의 수도이며 까삘라(Kapila) 현인의 충고로 옥까카 왕의 왕자들이 터를 닦은 도시이다. 그래서 까삘라와뚜라고 이름 지었다.(DA.i.259) 부처님 당시에는 숫도다나를 왕으로 한 공화국이었다.
17. 라훌라(Rāhula)는 고따마 부처님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숫도다나 왕의 초청으로 까삘라와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처님에게 보내서 유산의 승계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 공양을 들고 궁을 떠났다. 라훌라가 쫒아 나서자 부처님은 사리뿌타를 시켜 라훌라를 승가에 입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부처님은 이에 동의했다. 어렸을 때 라훌라는 한줌의 모래를 집어 들고 ‘오늘 내가 이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을 얻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때 거짓말을 잘 하는 아들에게 부처님은 교계라훌라암바약림경(敎誡羅糉羅菴婆藥林經 Ambalatthika-Rāhulovāda Sutta)」(M.61)을 설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라훌라가 열여덟 살 때에는, 교계라훌라대경(敎誡羅糉羅大經 Mahā-Rāhulovāda Sutta)(M.62)을 설해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교계라훌라소경(敎誡羅糉羅小經 Cūla-Rāhulovāda Sutta)(M181)을 설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도록 하였다.
18. 찬나(Channa)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마부였다. 그는 부처님께서 성도한 뒤에 까삘라와뚜를 방문하셨을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처님과 법에 대한 집착과 자만심이 너무나 강해서 출가의 이익을 체득할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입멸직전 유훈으로 찬나에게 최고의 처벌(brahmadaṇḍa)를 내리라고 말씀하셨다. 찬나는 이 처벌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만심과 제멋대로 하던 성질을 버리고 홀로 한거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Vin.ii.292)
19. 간띠카라(Ghatīkāra)는 까사빠 부처님(Kasapa Buddha)시대에 살았던 옹기장이로 까사빠 부처님의 열렬한 신도였다. 눈먼 부모를 모시느라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불환과를 얻은 성인이었다. 친구인 젊은 바라문 죠띠빨라에게 까사빠 부처님의 설법을 듣도록 했다. 죠띠빨라는 그 법문에 감동해서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까사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죠띠빨라가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이고 간띠까라는 죽은 뒤 범천이 되어 이렇게 싯다타 태자가 출가할 때와 성도한 뒤에 고따마 부처님을 찾아온다.(SN.i.60, M.ii,45)
20. 여덟 개의 세간의 선(lokiya-jhãna)이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여덟 가지 선정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➀에서 ➃까지의 네 가지 선정이 색계선(色界禪)이고 ➄부터 ➇까지의 4처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다. 원래 경장에서는 앞의 네 가지 선만을 선이라 불렀으나 뒤에 아비담마와 주석서에서는 확장하여 앞의 네 가지 선은 색계선(色界禪)이라 하고 뒤의 4처는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고 칭한다.
색계사선(초선부터 제4선까지)과 무색계 사처(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세간의 선은 모두 사마타 수행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위빠사나만으로는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수행이라서 색계선과 무색계선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삼매(samādhi)를 닦아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에 들면 그것이 색계 마음이고 이러한 선에 들어서 죽으면 그 선에 따라서 색계천(色界天)인 초선천(初禪天),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에 태어나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삼매(samādhi)를 닦아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들면 그것은 무색계(無色界)의 마음이요 이러한 선에 들어서 죽으면 그 선에 따라서 무색계(無色界)인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등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은 비록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수행은 되지만, 생사윤회의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는 통찰지혜가 없이는 삼계(三界)의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세간의 선(lokiya-jhãna)이라 하는 것이다.
21.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Lalitavistra)은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부처님의 유희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전설적인 생애를 묘사한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이다. 이 작품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저작을 대승불교 전통에서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대사(大事 Mahāvastu)와 마찬가지로, 이방광대장엄경도 후대의 자료들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된 부분도 다소 포함하고 있다.
문체 면에서뿐만 아니라 신성한 존재가 현세에서 활동하는 것을 '유희'나 '놀이'로 보고 있는 점에서도, 힌두교의 푸라나(Purāṇna) - 전설과 그 밖의 민간전승들을 집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문헌류 - 문학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작품 도입부에서는 대승불교 경전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라, 신비한 광채에 둘러싸여 명상에 깊이 잠겨 있던 부처님이 1만 2,000명의 비구와 3만 2,000명의 보살들 앞에서 이 경전의 내용을 설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특히 부처님의 잉태와 탄생에 관련된 부분에 고대의 기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들이 풍부하게 첨가되어 있다.
방광대장엄경은 대승불교 전통에서 매우 신성한 경전으로 존중되고 있으며, 불교예술의 여러 분야에 많은 영감을 제공해왔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에 있는 부조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308년 서진(西晋)에서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한역된 보요경(普曜經)은 이 작품의 한 이본(異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때인 683년에는 디바하라(地婆訶羅)에 의해 방광대장엄경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대희락경(大戱樂經)이라고도 불리며,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해 전하는 불전(佛傳) 중에서 가장 상세하다고 하는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도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22. 영어로 holy life로 되어 있는 것을 출세간의 길이라고 번역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출세간이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속적으로는 선정수행(禪定修行)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선정수행은 빨리어로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ā-cariyā)로 brahmā(梵) + cariyā(行 행위)의 합의어다. 이를 중국에서는 범행(梵行이라고 직역했고 다른 말로는 청정범행(淸淨梵行)이라고도 한다. 범천(brahmā)은 거친 욕망을 제거하여 성욕(性慾)이 없는 데서 나온 것으로 그 근본 의미는 성생활을 완전히 여읜 삶이다. 출가해서 독신으로 살면서 순결하게 사는 비구의 삶을 가리키지만, 경전에서는 간혹 8계를 서약하고 평생토록 모든 성관계를 완전히 끊는 재가수행자의 삶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브라흐마(brahmā)는 경전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신을 나타낼 때는 대문자인 Brahmā로 표기하여 색계초선천(色界初禪天)의 세가지 범천(梵天), 즉 범중천(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Brahma-purohitā)과 대범천(Mahā-brahmā)을 뜻한다.
(2) 보통명사로 쓰이면 브라마(brahmā)는 ‘신성함, 거룩함, 고귀함, 최상, 위대함’등의 뜻이 된다. 이 경우는 대부분 합성어로 쓰이는데 본문의 brahma-cariya, 최고의 처벌을 뜻하는 brahmā-daṇḍa,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으로 옮기는 brahmā-vihāra 등이 있다.
23.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念), 억념(憶念)이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유익한 마음의 작용(心所)이다. 그래서 영역도 mindfulness로 정착되어 가는 추세이다. 이 사띠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미「청정도론」(Vis.IV.49)에서는 사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사띠는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 노력, 통찰지혜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집중[定]으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사띠는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띠는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사띠에 의지하고, 사띠는 보호로써 나타난다. 사띠 없이는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볼때 사띠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사띠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띠는 대상의 주위를 맴돌거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대상에 바로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다.
(2) 사띠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움켜쥐거나 거머쥐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대상에 깊이 들어간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어서 그것을 파지하고 파악하는 심리현상이다.
이렇게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않으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도 없고, 통찰지혜를 통해 그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 유도할 수도 없다.
(3) 사띠는 확립이다. 사띠는 첫째의 대상에 깊이 들어감과 둘째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것(철저하게 거머쥐는)을 근거로, 이제 대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4) 사띠는 마음을 보호한다. 대상에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있으면 그 대상을 통해서 나쁜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보호라고 말한다. 마음에 대상을 챙기는 알아차림의 강한 힘에 의해서 마음은 나쁜 표상 등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나쁜 표상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 외에 이 사띠(sati)와 함께 경전에 빈번히 등장하는
삼빠쟌나(sampaJñña)는 ‘충분하고 분명하게 앎’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정지(正知)로 옮겼고 서양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등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이 사띠와 삼빠쟌나는 경전에서 결합된 형태로 자주 나오며 중국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겼다. 본서는 사띠(sati)를 ‘알아차림’으로 삼빠쟌나(sampaJñña)는 ‘분명한 앎’으로 옮겼다.
24. 겁(劫)이라 번역되는 깝빠(kappa)는 고대 인도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이다. 영역은 world cycle, aeon라고 한다. 이 겁에는 ➀ 중간겁(中間劫 antara-kappa) ➁ 아승지겁(阿僧祗劫 asaṅkheyya-kappa) ➂ 대겁(大劫 mahā-kappa)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열 살에서 8만 4천 년으로 증가하였다가 다시 열 살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중간겁(中間劫)이라 한다. 이 중간겁의 20배에 해당 하는 기간이 아승지겁(阿僧祗劫)이며 이 아승지겁이 넷이 모이면 대겁(大劫)이다. 한 대겁의 기간을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한 유순(由旬)이 되는 큰 바위를 백 년에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비유하셨다.(S15:5/ii.181-82)
25. 라자가하(王舍城 RaJgaha)는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의 라지기리이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16개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곳이 마가다와 꼬살라였다. 마가다의 수도가 바로 이 라자가하였으며 꼬살라의 수도는 사왓티였다. 16개 나라는 부처님 말년에 이 두 나라로 통일이 되었고 다시 부처님 열반 후에는 마가다가 인도를 통일하였다.
26. 고상식지경(考想息止經 Vitakka Sandhana Sutta)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쫓기 위한 명상의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살이 의도적으로 마음으로 생각을 짓누르려는 것과 이 경을 빗댄 것이다.
27. 염처경(念處經 (Satipṭṭhāna Sutta)(M10)은 마찌마 니까야에 나오는 경이고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ṭṭhāna Sutta)(D21)은 디가 니까야에 나오는 경으로 미얀마본과 태국본에 의하면 이들 경전은 같은 것이다. 다만 스리랑카본을 저본으로 삼은 영국 PTS본만이 사성제의 설명에 관한 부분에 있어 조금 다를 뿐이다.
28.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번역한 사띠빠따나(satipaṭṭhāna)는 sati(알아차림)+paṭṭhāna(확립)의 합성어로 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고 옮겼고 영역은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이다.「대념처경」과「청정도론」에는 이것을 모두 4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몸(身 kāya): 14가지
① 들숨날숨(出入息)
② 네 가지 자세
③ 네 가지 분명한 앎
④ 32가지 몸의 형태
⑤ 사대(四大)를 분석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2) 느낌(受 vedanā):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⑤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⑥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⑧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⑨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3) 마음(心 citta):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이 없는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이 없는 마음 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⑥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만한 마음 ⑨ 커진 마음 ⑩ 커지지 않은 마음 ⑪ 향상된 마음 ⑫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⑬ 집중된 마음 ⑭ 집중이 안 된 마음 ⑮ 자유로워진 마음 ⑯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4) 마음의 대상(法 dhamma): 5가지
①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파악함
②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를 파악함
③ 감각장소(十二處)를 파악함
④ 깨달음의 7 가지 요소(七覺支)를 파악함
⑤ 사성제(四聖諦)를 파악함
29. 마라(Māra)는 초기경과 주석서들을 통해 크게 세 문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악함이 의인화 혹은 상징화된 존재로서의 마라이고, 하나는 천신으로서의 마라이며, 또 하나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이다.
➀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는 그래서 빠삐만(波旬 Pāpiman)으로 불리는데 사악한 자,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또 나무찌(Namuci)라고도 불리는데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이다.
➁ 신으로서의 마라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欲界)의 최고 높은 천상이다. 그래서 그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한다고 한다.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이나 인드라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고 군대를 가지고 있다.
➂ 그리고 경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 즉 열반이 아닌 모든 것은 마라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응부』에서는 오온(五蘊)을 마라라고도 하는 등 마라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모든 것은 마라의 영역에 속는 것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수다원 이상의 성자가 되기 전에는 항상 마라의 감시영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런저런 것을 다 포함하여 다섯 가지로 마라를 분류하는데 그것은 ➀ 신으로서의 마라 ➁ 번뇌로서의 마라 ➂ 오온으로서의 마라 ④ 업으로서의 마라 ⑤ 죽음으로서의 마라이다.
30. 윤회(輪廻)의 원어는 삼사라(saṃsāra)로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보통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 주석서에서 5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 윤회라고 정의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沒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래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 지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自我)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변하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기 때문이다.
윤회는 쌍윳타 니까야(S15:13)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등 경전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은 법구경(Dhp.153-154)의 오도송에서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라고 윤회가 종식된 데에 대한 감회를 밝히고 계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고 그 중에서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vikā)’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생사윤회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로 대별되는 모든 번뇌들을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31. 번뇌(煩惱)로 옮긴 낄레사(kilesa)는 그 자체가 더러워져 있으면서 그것과 관계된 마음요소들을 더럽히기 때문에 오염원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도 이러한 낄레사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 defilement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이 낄레사는 마음속의 더러운 것이 외부로 누출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아사와(漏 āsava)라고도 한다. 낄레사에는 다음의 10가지가 있다.
➀ 탐욕(lobha) ➁ 성냄(dosa) ➂ 어리석음(moha) ④ 자만(māna) ⑤ 사견(diṭṭhi) ⑥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⑦ 해태(thīna) ⑧ 들뜸(uddhacca) ⑨ 양심없음(ahiri) ⑩ 수치심없음(anotta)
32. 여기서 혜안(慧眼)은 영어의 knowleage and vision인데 이를 직역하면 지혜와 눈을 말한다. 이때의 지혜는 일반적인 앎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불교의 지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다. 그리고 vision도 단순한 눈, 혹은 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바른 믿음, 확고한 견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빨리어 경전에서는 이 둘을 냐나-다싸나(ñāṇa-dassana)로 함께 나타나고 중국에서는 지견(智見)으로 옮겼다.
33.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옮긴 짜까와띠(cakka-vatti)는 고대 인도의 이상적 제왕으로 이 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늘의 차륜(車輪)이 나타나고, 왕은 그 선도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대주(四大洲)를 평정한다고 여기는 데서 이 이름이 생겼다. 불전에는 이 왕이 윤보(輪寶)·백상보(白象寶)·감마보(紺馬寶) 등의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또 부처님과 같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갖추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34. 32상(三十二相)은 부처님과 전륜성왕만이 갖추고 있는 훌륭한 신체적 특성이다.『디가 니까야, 대전기경(大傳記經)(D14)과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D30)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⑴ 비구들이여, 여기 대인은 발바닥이 편평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의 발바닥이 편평한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⑵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輪)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는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輪)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춘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⑶ 속눈썹이 길다. …
⑷ 손가락이 길다. …
⑸ 손과 발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
⑹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막이 있다. …
⑺ 발꿈치가 발의 가운데 있다. …
⑻ 장딴지가 사슴 장딴지와 같다. …
⑼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도 두 손바닥으로 두 무릎을 만지고 문지를 수 있다. …
⑽ 음경이 감추어진 것이 마치 말과 같다. …
⑾ 몸이 황금색이어서 자마금(紫磨金)과 같다. …
⑿ 살과 피부가 부드러워서 더러운 것이 몸에 붙지 않는다. …
⒀ 각각의 털구멍마다 하나의 털만 나있다. …
⒁ 몸의 털이 위로 향해 있고 푸르고 검은 색이며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있다. …
⒂ 몸이 넓고 곧다. …
(16) 몸의 일곱 군데가 풍만하다. …
(17) 윗몸이 커서 마치 사자와 같다. …
(18) 어깨가 잘 뭉쳐져 있다. …
(19) 니그로다 나무처럼 몸 모양이 둥글게 균형이 잡혔는데, 신장과 두 팔을 벌린 길이가 같다.
(20) 등이 편평하고 곧다. …
(21) 섬세한 미각을 가졌다. …
(22) 턱이 사자와 같다. …
(23) 이가 40개다. …
(24) 이가 고르다. …
(25) 이가 성글지 않다. …
(26) 이가 아주 희다. …
(27) 혀가 아주 길다. …
(28) 범천의 목소리를 가져 가릉빈가 새 소리와 같다.
(29) 눈동자가 검푸르다. …
(30) 속눈썹이 소와 같다. …
(31) 두 눈썹 사이에 털이 나서, 희고 가느다란 솜을 닮았다.
(32)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은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는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이러한 32상(三十二相)은 디가 니까야, 삼십이상경에서 설명하듯이 부처님이 갖추신 지와 덕과 자비 등을 몸의 모습 32가지로 형상화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대인(大人)으로 번역한 마하싸따(Maha-satta)는 maha(大)와 satta(有情)의 합성어로 특히 대승불교 경전에서 보살의 미칭으로 자주 언급되는 술어이다. 중국에서는 마하살(摩訶薩), 대사(大士)라고도 번역되었고 영어로는 Great Being이다.
35. 출입식념(出入息念)이라 번역한 아나빠나사띠(anāpānasati)는 ana(들숨)+pana(날숨)+sati(알아차림)의 합성어로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해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수식관(數息觀), 안반념(安念般)이라고도 한다. 이 수행법은 위빠사나도 되고 사마타수행도 된다. 마하시 사야도에 의해 계발된 순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고,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풍대(風大)를 주 대상으로 삼아서 수행을 한다. 청정도론(Vis.VⅢ.145~244)에서는 마찌마 니까야의 출입식념경(M118)에 준해서 출입식념을 16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36. 네 가지 선을 경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喜 pīty)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樂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된다. 물론 이 4 가지 대상에서 마음이 한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 즉 집중(定 samādhi)은 다 있다. 이를 도표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선(四種禪) | |
초선(初禪) | 일으킨 생각(尋),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삼매(定) |
이선(二禪) | 희열(喜), 행복(樂), 삼매(定) |
삼선(三禪) | 행복(樂), 삼매(定) |
사선(四禪) | 평온(捨), 삼매(定) |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는 초선(初禪)의 일으킨 생각(尋 vitaka)이 가라앉고 평온(捨 upekkhā),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이 있는 경우를 이선(二禪)으로 한 것이다. 이를 도표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다섯가지 선(五種禪) | |
초선(初禪) | 일으킨 생각(尋),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삼매(定) |
이선(二禪) |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삼매(定) |
삼선(三禪) | 희열(喜), 행복(樂), 삼매(定) |
사선(四禪) | 행복(樂), 삼매(定) |
오선(五禪) | 평온(捨), 삼매(定) |
37. 12연기(十二緣起), 또는 연기법(緣起法)으로 옮기는 빠띠쨔사무빠다(paṭicca-samuppāda)에서 paṭicca는 ‘(그것을)향하여 가고서’이며 ‘의지하여’의 뜻을 나타낸다. 또 samuppāda는 ‘함께 위로 간다’는 뜻으로 ‘일어남, 발생, 근원, 기원’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빠띠쨔사무빠다(paṭicca-samuppāda)는 ‘의지하여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dependent origination이라 번역한다. 이 연기는 본질적으로 윤회의 연기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나고 죽는 윤회의 바퀴를 축으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돌아가게 하는 조건들을 밝힌 것이다. 쌍윳타 니까야(S.ii.1)에 나오는 연기법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들이 일어난다. 행을을 조건으로 식(識)이 ,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名色)이,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집(取)이, 집착을 조건으로 업의 존재(有)가, 업의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여기서 무명과 행은 과거세에 속하고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미래세에 속한다. 중간의 여덟 가지 각지는 현재세에 속한다. 이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데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연기(paṭiccasamuppāda)
삼 세 | 12 각지 | 20형태 및 4무리 |
과 거 | 1. 무명(無明) | 다섯 과거의 원인들: |
2. 상카라(行)들 | 1, 2, [8, 9, 10] | |
현 재 | 3. 식(識) - 입태 |
|
4. 정신-물질(名色) | 다섯 현재의 결과들 : | |
5. 여섯 감각장소(六入) | 3 ~ 7 | |
6. 감각접촉(觸) |
| |
7. 느낌(受) |
| |
8. 갈애(愛) | 다섯 현재의 원인들 : | |
9. 취착(取) | 8, 9, 10, [1, 2] | |
10. 존재(有) |
| |
미 래 | 11. 태어남(生) | 다섯 미래의 결과들 : |
12. 늙음(老)-&-죽음(死) | 3 ~ 7 |
38. 마하시 사야도가 따톤에서 밍군 제타완 사야도(Mingun Jetavan Sāyadaw)로부터 집중적인 수행을 닦고 난후 1938년 고향마을 쎄이쿤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사촌형제 3명을 비롯하여 50명의 수행자에게 7개월 동안 위빠사나를 가르치셨을 때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위빠사나 지혜의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한다. (Mahasi Biography, by Ashin sīlānandā, Buddhasā sasanā Nuggaha Organization, Yanggon, 1981)
39. 물질(色): 빨리어의 루빠(rūpa)는 중국에서 색(色)으로 통일되어 옮겼지만 문맥에 따라 물질일반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형상과 색깔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1) 물질 일반으로서의 rūpa : 오온의 처음인 색온(色蘊)으로 아비담마의 28가지 물질로 나타난다. 이 28가지 물질은 크게 사대(四大)와 파생된 물질의 두 종류로 나뉜다. 영역은 matter, materiality, corporeality라고 한다.
(2) 형상, 색깔로서의 rūpa: 눈[慧眼]의 대가 되는 것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처(六處) 중의 하나이다. 영역은 visual object라고 한다.
40. 범부(凡夫)로 번역되는 뿌투쟈나(puthujJna)는 천신과 인간,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아직 중생을 윤회계에 묶어두고 있는 족쇄를 끊지 못한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반면에 수다원,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성자라 부르고 수다원 이상의 성자의 경지에 들지 못한 모든 중생을 통틀어 범부라고 한다. 주석서(DA.i.59)에서는 범부를 “개개인의 여러 가지 형태의 번뇌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범부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눈먼 범부와 선한 범부로 나누고 있는데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등을 호지하고 반조하지 못하는 자를 눈먼 범부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선한 범부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DA.i.59)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놓는 족쇄(samyoJna)에는 열가지가 있다. ① 유신견(有身見 ② 회의적 의심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➃ 감각적 욕망 ➄ 악의 ➅ 색계에 대한 집착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 ➇ 자만 ➈ 들뜸 ➉ 무명(無明). 그리고 ①부터 ➄까지는 5가지 거친 족쇄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하고 ➅부터 ➉까지는 5가지 미세한 족쇄로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수다원은 ①에서 ③을, 사다함은 ➃와 ➄를, 아라한은 나머지 ➅에서 ➉까지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낸다. 범부의 영역은 ordinary worlding이다.
41. 악처(惡處)로 옮긴 아파야(apāya)는 고통과 비참함이 즐거움보다 훨씬 더 많은 세계로 불선업을 저지른 이들이 태어나는 곳들의 통칭이다. 여기에는 ①지옥(niraya) ②아귀(peta) ③축생(tiracchānayoni) ④아수라(asura)의 네 가지가 있다. 중국에서 사악도(四惡道), 사악취(四惡趣)로 옮겼고 영역은 four nether worlds, four lower worlds이다.
42. 31가지 중생계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이 31가지 중생계는 중생의 마음에 있는 여러 현상이 외부로 반영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계층조직은 마음의 계층조직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어서 이 둘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생명체들이 사는 세상이나 마음의 경지는 참으로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신적 깊이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 31가지 중생계이고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세계(三界)로 나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삼계는 세상(bhumi/loka)과 마음(citta)의 두 가지에 다 적용되는 용어라는 점이다.
먼저 세상으로서의 삼계(三界)를 살펴본다.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육욕천(六欲天)이다. 색계는 초선천(初禪天)부터 사선천(四禪天)까지의 16가지 색계천(色界天)이다. 무색계는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부터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까지 4가지 무색계천(無色界天)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세상은 모두 중생들 마음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욕계는 다양한 감각적 욕망(kāmā)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사는 곳이다. 색계는 색계선(色界禪)이라 불리는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선정의 심리상태에 있는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고, 무색계는 무색계 사선의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이들 31가지 중생계, 즉 삼계(三界)는 갈애를 근본으로 한다. 그래서 주석서는 욕계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가 지배하는 곳이고, 색계와 무색계란 존재 자체에 대한 갈애(有愛)가 남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로 마음으로서의 삼계를 살펴보겠다. 논장에서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크게 욕계마음, 색계마음, 무색계마음, 출세간마음의 넷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색계마음은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본삼매에 든 심리상태를 뜻하고, 무색계 마음은 무색계선에 든 상태를 뜻하며, 선정(본삼매)의 경지에 들지 않은 나머지 모든 심리상태를 욕계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열반에 든 심리상태를 출세간마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욕계에 있는 인간이 초선에 들어있으면 그때 그는 욕계에 머물지만 색계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욕계에 있는 인간이 열반을 실현하면 그는 욕계에 머물지만 그의 마음은 삼계를 벗어난 출세간의 경지이다.
이처럼 삼계는 세상과 마음의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고 삼계를 분류하는 가중 중요한 기준은 바로 선정(본삼매)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본삼매의 증득 없이는 불가능한 마음이고 세상이다. 한편「청정도론」은 “계(戒 sīla)는 악처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내고, 집중은 욕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지혜는 모든 존재(삼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낸다”라고 적고 있다. 비록 선정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수행은 되지만, 생사윤회의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는 통찰지(paññā)가 없이는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삼계를 설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을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집중을 닦아서 감각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31가지 중생계(三界)
세상 | 영역 | 수명 | ||
무색계(無色界) |
| 31.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30.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29.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28.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 84,000 대겁 60,000 ” 40,000 ” 20,000 ” | |
색계(色界) | 사선(四禪) | 淨居天 | 27. 색구경천(色究境天) 26. 선견천(善見天) 25. 선현천(善現天) 24. 무열천(無熱天) 23. 무번천(無煩天) 22. 무상유정천(無上有頂天) 21. 광과천(廣果天) | 16,000 대겁 8,000 ” 4,000 ” 2,000 ” 1,000 ” 500 ” 500 ” |
| ||||
삼선(三禪) | ⑳ 변정천(변정천) ⑲ 무량천(無量천) ⑱ 소정천(小淨天) | 64 대겁 32 ” 16 ” | ||
이선(二禪) | ⑰ 광음천(光音天) ⑯ 무량광천(無量光天) ⑮ 소광천(少光天) | 8 대겁 4 ” 2 ” | ||
초선(初禪) | ⑭ 대범천(大梵天) ⑬ 범보천(梵보천) ⑫ 범중천(梵衆天) | 1 무량겁 1/2 ” 1/3 ” | ||
욕계(欲界) | 육욕천(六欲天)
| ⑪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➉ 화락천(化樂天) ➈ 도솔천(兜率天) ➇ 야마천(夜摩天) ➆ 삼십삼천(三十三天) ➅ 사대왕천(四大王天) | 16,000 천상년 8,000 4,000 2,000 1,000 500 | |
| ➄ 인간(人間) | 정해지지 않음 | ||
악처(惡處) | ➃ 아수라(阿修羅) ➂ 아귀(餓鬼) ➁ 축생(畜生) ➀ 지옥(地獄) | 정해지지 않음
|
43. 유순(由旬)으로 음역한 요자나(yojana)는 고대 인도의 길이 단위로서 소를 멍에 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갈수 있는 거리이며 대략 7마일 즉 11km의 거리라고 한다.
44. 범부들은 보거나 듣는 것에 영향을 받아 고통을 받는 반면 부처는 모든 것을 초월해서 차분하고 안색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45. 아나함과를 얻은 성인은 정거천(淨居天)에만 태어나고 그보다 더 낮은 세상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거기서 열반에 든다. 그래서 불환과(不換果)라고도 한다. 이 정거천에는 ➀ 무번천(無煩天) ➁ 무열천(無熱天) ➂ 선현천(善現天) ➃ 선견천(善見天) ➄ 색구경천(色究境)의 다섯 가지 하늘이 있다.
46. 벗이라고 번역한 아우소(āvuso)는 동등한 위치에서 존경하여 부르는 말이지만 제자가 부처님을 이렇게 부르는 법은 없다. 대신에 제자는 부처님을 존자(bhante)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기에 즈음해서는 젊은 비구는 장로비구에게 존자란 뜻의 반떼(bhante)나 아유스마(āyasmā)라고 부르고 장로비구는 젊은 비구들에게 아우소(āvuso)라고 부를 것을 지시하셨다.
47. 여래(如來)라 번역한 Tathāgata는 ‘이렇게 오신 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호칭하시는 말이다. 영역은 The Perfect one이라고 한다.「청정도론」(Vis.Ⅶ.2)등에 나오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다음과 같다.
① 아라한(應供 Arahan) ②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③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明行足 Vijjā-caraṇa-sampanna) ④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Sugata) ⑤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 Lokavidū) ⑥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Anuttara) ⑦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⑧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m) ⑨ 부처님(佛 Buddha) ⑩ 세존(世尊 Bhagavā)
48.「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ā)」은 서기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메난드로스 왕(밀린다 왕)과 인도 스님 나가세나 간에 행해진 불교 교리에 관한 문답을 담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전 편찬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진 경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로 미얀마에서는 빨리 5부 니까야의 일부로 다루고 있으니까 경으로 간주해도 무난할 것이다.
49. 감촉(觸)으로 옮긴 뽀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상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논장에서는 감촉을 지(地), 화(火), 풍(風) 셋 중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감촉은 물질에 속하고 감각접촉은 심리현상인 마음의 작용[心所]에 속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 육처(六處)의 촉(photthabba)은 물질이고 12연기에서의 촉(phassa)은 심리현상이다.
이처럼phoṭṭhabba와 phassa는 완전히 다른 술어이다. 본서에서는 phoṭṭhabba를 감촉이나 촉감으로, phassa는 감각접촉으로 옮기고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해당 빨리어를 병기하였다.
[출처] 초전법륜경|작성자 양벌리영수과외독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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