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열반사상*1)
조 수 동**
[한글 요약]
원효는 그의 『涅槃經宗要』에서 열반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소개하고 여러 異論들을 그 특유의 和諍의 논리로 화회시키고 있다. 첫째, 열반의 번역 문제에 대해 원효는 密語로 보면 열반은 많은 뜻을 포함하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지만, 顯了語로 보면 음성에 따라 중생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滅度라 번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 열반의 體性은 無垢眞如라는 견해와 果地의 모든 덕이라는 두 견해가 있다. 그리고 열반의 공, 불공에 대해서는 부처의 공덕, 부처의 자비, 부처의 지혜 등은 불공이고, 생사·열반은 모두 허망하여 공·무소득이므로 佛法도 공이라는 것이다.
셋째, 열반의 종류에는 일체중생에게 공통된 진여, 법성과 중생이 수행하여 번뇌를 소멸한 뒤에 얻는 열반의 구별이 있다. 또한 생을 유지하면서 얻는 유여열반과 육신이 소멸한 뒤에 완전한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무여열반의 구분이 있다. 붓다의 자비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유여열반이 중생구제의 취지에 더 부합된다.
넷째, 열반의 특성으로는 법신, 반야, 해탈이 있는데 이들이 평등하고 원만하게 함께 갖추어지고 일시에 동체가 되어야 열반이 된다.
다섯째, 열반은 常樂我淨의 사덕을 갖는데 이것은 부정적 허무적 견해를 버리고 망집을 떠난 중도적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원효는 이쟁을 화회하기 위해서 비연비불연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진리는 전체를 보아야 된다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다. 원효는 화쟁의 원리를 중생심인 일심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대립되고 모순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해 있는 평등하고 원만한 해탈자이다.
주제분야 : 불교, 한국불교
주 제 어 : 원효, 열반, 화쟁, 일심
1. 서 언
석존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를 획득했다는 것이며 다시 생사에 윤회하지 않는 智見이 생겼다는 것이다. 석존은 그 깨달음을 통해 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알며, 세상의 모든 속박을 끊어 일체에 집착이 없는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석존은 인간의 자유에는 상대적 한계와 무한히 향상하는 진보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석존은 무아를 깨달아 현실은 부자유스럽고 괴로움의 세계라고 하였다. 또한 석존은 이러한 자유를 근거로 하여 역사성과 인륜성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으며, 아울러 방임적 자유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中道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 이러한 자유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은 해탈1)인데, 우파니사드 문헌에 있어서 해탈은 '새로운 비밀의 깨달음'이고, 그 가르침의 전수에 있어서도 개인과 개인과의 비밀성이 강조되지만, 불교에서는 그러한 비밀성은 없고 해탈의 보편성이 강조된다. 해탈이란 내·외적인 대상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어 무애자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불안, 격정, 무지 등의 번뇌의 心火가 완전히 없어져서 마음이 지극히 순수, 청정, 평안하고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2), 엄격하게 구분한다면 마음이 순화되기 이전의 비본래적 모습인 욕망의 繫縛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면 열반은 繫縛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의 내적 양상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은 인간의 저차원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고차원적인 삶에로 자기 변혁하는 인간의 내적 자세와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은 언설로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미에 있어 여러 견해가 나타나고 있고, 또한 적당한 번역어 없이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효의 『열반경종요』는 열반에 관한 이러한 다양한 논의들을 화회하여 열반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열반경종요』는 당시 법상종의 無性佛性, 一乘方便說의 교의에 대응하여 一乘眞實說을 주장하는 『열반경』에 대한 현존하는 귀중한 주석서이다. 木村宣彰은 『열반경종요』가 체제면에서 정영사 혜원의 『大乘義章』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학설 내용에 있어서는 원효의 독자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였다.3) 원효는 대승의 『대반열반경』을 중심으로 하여 불성, 열반을 논의하고 있는데, 경의 인연과 종지, 열반의 번역, 열반의 체와 상, 열반의 허실, 열반의 종류, 열반의 덕 등에 대해 중국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것을 붓다 본래의 의미로 화회 시키고 있다. 본 연구는 열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원효의 『열반경종요』에 나타난 원효의 열반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열반의 의미
열반은 인도 고우파니사드 문헌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개념이다. 그것이 불교의 흥기 이전 또는 그 당시에 자이나교 등 여러 학파에서 실천 수행의 최고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있던 개념을 불교에서 도입하여 사용한 이후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다.
열반은 닛바나(nibbana)의 음역이며, 泥洹, 泥曰, 洹槃那, 涅槃 등으로 음역된다.4) 字意로서 nirv??a, nibb?na는 불어 끈다는 nir-v?라는 말에서 유래했지만, 원시불교에서는 이것을 보통 번뇌를 불어 끈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열반을 탐·진·치의 滅이라 하고 있다.5) 열반은 字義로는 완전히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그 내용은 최고의 목적을 가리키기 때문에 적극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열반의 내용이 바로 붓다가 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불전에서 열반은 부정적 방법, 긍정적 방법, 역설적 방법, 상징적 방법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부정적 방법은 열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의미 표현으로 열반을 無死, 不滅, 無斷, 不生成, 生의 消滅, 不生, 해체되지 않음, 괴로움의 소멸, 최상, 궁극적 해탈 등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 경험적 현상의 부정, 경험적이거나 초월적인 양자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괴로움의 소멸이란 모든 현상에 대해 무상과 무아를 자각하여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미움과 탐욕과 무지가 소멸하는 것이며 그 결과 마치 불이 꺼진 것처럼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다.6) 이것을 『숫타니파타』에서는 아무런 소유도 없고 집착해 얻는 일이 없는 것 ― 이것이 바로 피난처이다. 또한 그것은 열반이라 부른다. 그것은 노쇠와 죽음의 소멸이다.7)라고 하고 있다. 열반은 삶과 죽음의 바퀴가 멈추는 것이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는 피난처로 이것이 노쇠와 죽음의 소멸인 열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자기와 타자에 대한 이원성을 벗어나 영원한 평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경험적 현상의 부정이란 무상, 무아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경험적이거나 초월적인 것 양자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란 열반이 절대적 소멸, 절대적 허무, 공 또는 완전한 공허와 같다는 의미이다.8) 그렇지만 『상응부경전』에서는 열반을 소멸과 동일시하는 견해에 대해 그것을 극히 사악한 이단이라고 하여 배척한9)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열반을 절대적 소멸로 보게 되면 상주론과 절멸론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려 했던 붓다의 정신과 반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열반을 무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절대적 허무와 같은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과 같다.
열반의 긍정적 표현은 평화, 집착의 소멸, 고통의 지멸로서의 고요한 상태, 지복, 초월적 지혜, 관조, 안전 등으로 묘사된다.10) 열반은 최상의 행복의 상태이며, 느낌과 감정이 긍정적으로 성취된 상태이다. 그것은 고통으로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이것을 "이 세상에서 애욕을 떠난 지혜로운 수행자는 불사와 평안을 누리는 영원한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11)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열반은 절대적인 무위열반계로도 묘사된다. 즉 열반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지, 수, 화, 풍이 아닌 영역이 있다. 무한한 공간도 아니며, 무한한 의식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의식이 아닌 것도, 무의식이 아닌 영역이 있다. 이 세상도 아니고, 세상을 넘어선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가 도리인 것도 아니고, 달도 아니고, 해도 아닌 영역이 있다. 나는 말하는데, 그 영역은 옴도 없고, 감도 없다. 머무름도 없고, 파괴도 없다. 시작도 없고, 구성됨도 없다. 결과도 없고, 원인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고통의 끝이다.12)
열반이 절대라는 의미는 열반이 世俗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시발점으로 현실적 요소가 그 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열반을 절대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붓다는 절대적인 근원자와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침묵하고 있으며, 열반과 같은 궁극적인 진리는 논리적 범주에 의해서 적절하게 파악될 수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느껴지고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붓다는 초월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붓다가 스스로 열반을 얻었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그가 열반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알았다는 것이지 해탈·열반과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합리적인 지적 사변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無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다시 마음을 통일하여 사색하고 수행하여 그 이해를 완전히 자기와 하나가 되게 체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의식의 소멸도 아니고, 정신의 영원한 억압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열반은 이러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욕망과 자아 실체의 개념을 없애는 것이다.
열반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은 無住의 상태에 머문다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없다는 궁극적인 느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표현은 열반을 시원한 동굴, 홍수 속의 섬, 저 건너 언덕, 성스러운 도시, 피난처, 은신처, 성역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13) 원효는 열반을 설명하여 "원래 무릇 열반의 道됨은 도가 없으면서도 도 아닌 것이 없고, 머무를 곳이 없으면서도 머무르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그 도가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먼 것임을 알 수 있다."14) 라고 하여, 열반은 궁극의 도리이며, 집착을 여읜 것이라 하고, 열반을
極果의 大覺이란 實性을 체득하면서도 마음을 잊는 것이고, 실성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眞妄을 섞어 하나가 된 것이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겠으며, 眞妄이 섞였으니 무엇이 그것의 진실이 되는가. 이것은 즉 理智가 모두 없어지고, 이름과 뜻 그것이 끊어진 것 이것을 열반의 玄旨라 한다.15)
라고 설명하고 있다.
3. 원효의 열반사상
1) 열반과 대멸도
『대반열반경』은 소승과 대승의 두 종류가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석존 입멸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여 기록되고 있으며, 석존 입멸 후의 교단의 의지처가 '법'과 '자신'에 있음을 밝혀 법과 율을 중심으로 교단을 운영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異本이 전해지고 있는데, 팔리본 Mah?parinibb?na Suttanta, 산스크리뜨본, 티베트본, 『장아함경』의 「유행경」, 白法祖역의 『佛般泥洹經』, 失譯의 『般泥洹經』, 法顯譯의 『大般涅槃經』, 의정역인 『根本說一切毘奈耶雜事』 등이 있다.
이들 異本들은 또한 그 구성요소에 있어 相違가 인정되는 데, 그것은 경전이 편집될 때 가감, 증보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내용상에서 보면 7不退轉法은 불교와 당시 정치 사회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며, '자신'과 '법'의 중시는 이후 교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법의 중시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이 되고 있다. 대승의 『대반열반경』은 붓다 입멸의 사실을 계기로 하여 붓다의 본질이 법신에 있음을 말하고 佛身常主, 一切衆生悉有佛性, 一闡提成佛의 사상 등을 주된 가르침으로 하고 있다. 원효는 『대반열반경』을
지금 이 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큰 바다이고, 方等의 비밀창고이며, 그 가르침은 헤아리기 어렵다. 진실로 廣湯하여 그 끝이 없고, 매우 깊고 깊어 바닥이 없다. 바닥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다. 끝이 없으므로 갖추지 않음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 온갖 물의 흐름을 一味로 돌아가게 하여 붓다의 뜻의 지극히 공평함을 열어서 백가의 다른 쟁론을 화해시켰다.16)
라고 하여, 이 경이 대승의 큰 가르침으로 경전의 모든 서로 다른 논의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원효는 『대반열반경』의 宗旨를 말함에 있어 여섯 가지 주장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長壽의 인과와 최후의 諸陰의 법문에 이르는 36가지 의미, 4종류의 大義,17) 出世의 인과(無上因果), 當常現常의 二果, 圓極一果, 모든 부처님의 秘藏이 無二實性한 것 등이다.18) 원효는 이들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다고 하여 그것은 마치 많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 큰 바다가 되는 것과 같이 佛意에 포용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열반의 번역문제에 대해서도 열반을 번역할 수 있다는 견해와 번역할 수 없다는 두 견해가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열반을 번역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체로 열반을 滅度라 번역하고, 열반을 번역할 수 없다는 주장은 외국어는 이름과 뜻을 함용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어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涅은 不의 뜻이고, 槃은 滅, 覆, 去來, 取, 不定, 新과 故, 障碍, 有, 和合, 苦의 뜻이라고 하여, 열반은 不滅, 不覆, 不去不來, 不取, 無不定, 無新故, 無障碍, 無有, 無和合, 無苦 등의 뜻이 있어19) 하나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열반의 많은 뜻 가운데 한 가지 의미만을 취하여 멸도라 번역하였고, 전자의 경우는 번역자가 어떤 때는 뜻을 따라 멸도라 번역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音寫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열반이라는 개념을 번역자에 따라 멸도라 번역하기도 하고, 또는 音寫하기도 한데서 생긴 오해라 보여진다.20)
아울러 원효는 열반에는 密語와 顯了語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밀어의 의미에서 보면 열반은 많은 뜻을 포함하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지만, 현료어는 그 부류의 음성에 따라 널리 중생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멸도라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러한 도리로부터 볼 때 양자의 주장이 모두 회통될 수 있다고 하였다.21) 이러한 두 논점은 경에 나타나고 있는 근거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경에 근거하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각자의 주장이 전체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열반을 번역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열반을 大滅度라 번역한다. 大의 의미에는 여래가 증득한 도의 체가 두루 하여 밖이 없고, 작용이 유정에 두루 미치어 널리 포섭하고, 제도함에 있어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간적 선후 관계는 아니다. 滅에는 무위로 돌아간다는 뜻인 事滅, 寂漠의 뜻인 理滅, 영원히 여읜다는 의미인 德滅, 斷除의 의미인 擇滅의 네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滅을 이와 같이 설명하면 열반 자체를 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원효는 부처는 일체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머무름이 없는 근원에 도달했으므로 열반은 머무는 곳이 없고, 지혜가 소멸하면 이치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智滅이 因이 된다고 하고, 지혜는 理에 의해서 번뇌를 멸할 수 있기 때문에 理는 소멸의 因이 되고, 智는 滅의 果가 되므로 열반이 滅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같이 滅은 큰 체와 큰 작용이 둘이 아니고 차별도 없어서 이미 건너가야 할 彼岸도 없고 건너야 할 此岸도 없다. 떠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大滅이라 한다는 것이다.22)
度에는 도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23) 究竟과 到岸義 두 의미가 있다. 첫째, 到岸은 끊는다는 뜻으로 번뇌를 여의고 멸하면 중생은 구제된다. 그러므로 常도 아니고, 斷도 아니기 때문에 멸도라 한다. 둘째, 究竟義란 번뇌를 멸하게 되면 덕이 究竟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열반과 번뇌와의 관계에 대해서 열반이 번뇌를 끊은 것인가 아니면 번뇌를 내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원효는 번뇌를 끊어 없앤다는 것은 이미 생겼던 번뇌를 끊어 없앤다는 것으로 지나간 것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어서 그 뜻이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 여기에 해당되고, 그리고 번뇌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으로 뒤에 나타날 결과를 바라보고 한 말이기 때문에 그 뜻이 구경함으로 부처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부처도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이고 보살도 번뇌를 내지 아니한다. 이렇게 보면 번뇌를 끊는 것을 열반이라 하지 않고,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지만, 이들 양자 사이에는 상위함이 없다.24)
2) 열반의 體性과 虛實
앞서 원효는 열반의 도됨은 도가 없으면서 도 아닌 것이 없고, 머무를 곳이 없으면서도 머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實性을 체득하면서 마음을 잊고, 실성이 둘이 아님을 알고, 理智가 모두 없어지고 이름과 뜻 그것이 모두 끊어진 것이 열반이라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열반의 體性은 무엇인가? 원효는 열반의 體性에는 無垢眞如와 果地의 모든 德이라는 두 설이 있다고 하였다. 無垢眞如를 열반의 체로 보는 견해는 열반이 부처의 法性, 法性空, 自性寂靜한 것, 眞如證智라는 것에 근거한다. 이렇게 보면 始覺은 열반의 體性이 될 수 없다. 그리고 果地의 모든 德이 열반의 체라는 견해는 本覺, 始覺을 구별하지 않고 열반의 體性을 말한 것으로 열반의 三事, 大我, 일체 지혜, 三身이 드러내는 無上菩提가 여기에 속한다.
원효는 열반의 체에 이러한 두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열반과 보리에 각각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먼저 상이점을 살펴보면 보리는 果로 덕을 증득 할 수 있으므로 道諦에 포섭되고, 열반의 果는 증득 된 법이어서 滅諦에 포섭된다. 공통점으로는 果地인 도제는 열반이고, 과지에서 증득 되어야 할 진여도 역시 菩提이다. 이들 관계는 생사에 있어 內根의 始終을 생사라 하는 것이 그 상이점이라면, 모든 잡염법이 모두 생사라는 것은 공통점이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果地의 덕을 열반이라 하면 始覺의 공덕도 열반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열반에도 生因이 있게 된다. 열반의 生因과 了因에 대해 원효는 열반의 뜻은 적멸에 있고, 적멸의 덕은 요해한 바에 합쳐진다고 하였다. 즉 보리는 生因에서 생긴 것이지만 了因에서 요해되므로 열반은 당연히 요인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생인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상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5)
생사의 법은 허망하고 열반의 과는 진여이다. 열반이 보리의 지혜를 얻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진여를 그 체성으로 하는 열반은 虛인가 實인가, 空인가 不空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먼저 열반의 體性이 眞이고, 不空이라는 견해는 『대반열반경』의 "진해탈자는 곧 여래이다. 여래는 결정코 불공이다." "공이란 일체 생사이다. 불공이란 대열반이다."26)라고 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불공이란 부처의 법신, 부처의 덕성과 지혜, 자비의 작용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래장이 번뇌와는 불상응하고 청정법과는 상응한다는 것과 같다.
열반이 공이라는 주장은 생사열반은 모두 허망하여 공·무소득이므로 불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공이란 제법의 실상이므로 제법의 실상 면에서 보았을 때 일체의 현상들이나 범부·보살·여래 등은 모두 공하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열반이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방편설이고, 열반이 實有하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망령되게 취한 경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두 주장에 대해 원효는 종래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敎相判釋에 따라 각자가 근거하는 경전에 의거하여 열반이 공 또는 불공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효는 먼저 그 말만을 취해서 보면 모두 佛意에 어긋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지만, 단지 결정된 집착이 아니라면 법문이 서로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 주장 모두 타당하다고 하였다. 원효는 그 이유를 德患相對門과 相待無自性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德患相對門에서 보면 첫째 주장이 옳아서 생사가 空, 열반은 不空이다. 妄心에서 경계를 취하기 때문에 따로 경계가 없으므로 空이고, 망심을 취하여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아이다. 그러나 참된 지혜로 증득 된 도리는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불공이고 眞智를 증득 하여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대아이다. 둘째, 相待無自相에서 보면 둘째 주장이 옳다. 왜냐하면 생사·열반은 똑같이 무자성이므로 불공과 공이 상대하고, 我와 無我, 無待와 有待가 相待하기 때문이다.27)
그래서 원효는 대열반은 相·性도 아니고, 空·不空도 아니며, 我·無我도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非空은 無性, 非不空은 有性, 非我는 有相, 非無我는 無相을 각각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非無我이기 때문에 大我라 하고, 非我이기 때문에 무아이며, 非空이기 때문에 實有이고, 非不空이기 때문에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여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립적인 쟁론은 없다는 것이 원효의 화회의 입장이다.
4) 열반의 종류
(1) 대·소승의 열반
원효는 열반을 설명함에 있어 부파불교의 犢子部와 薩婆多部, 그리고 대승의 열반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犢子部에서는 열반이 범부와 성인에 공통된다고 하고, 3가지 열반을 말하고 있다. 즉 성인의 지위에서 얻은 무위인 有學, 無學, 범부가 지혜로 번뇌를 끊고 얻은 열반인 非學非無學이 그것이다. 그리고 薩婆多部 즉 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滅이라 하고, 無學人만이 번뇌를 끊고 무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열반은 오직 無學人에게만 가능하다고 한다.28)
그런데 일반적으로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이 번뇌와 반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煩惱障을 소멸한 것을 열반으로 보고 있다. 체르바츠키에 의하면 분별설부에서는 공간과 열반이 그것들의 특성, 실제, 개성, 그리고 그들 고유의 존재를 소유하였다는 데 근거하여 궁극적 실제라고 생각하였다.29) 즉 열반은 의식과 생명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 안에서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는 견해이다. 비파사론사들은 열반을 無로 보지 않고 無爲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현상의 배후에 잇는 일종의 본체적이고 무조건적인 실재이다. 그들은 열반이 단순한 부정이라는데 반대하여 하나의 궁극적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나가르주나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반면 경량부는 열반은 단지 허무, 적멸이라고 본다. 이 설에 대해서는 유부, 상좌부, 중관학파 모두가 반대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다음의 네 가지 경우로 열반을 설명한다. 첫째, 범부, 이승, 보살, 부처 모두에 열반이 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대반열반경』이 근본 이념으로 하고 있는 일체중생실유불성설에 근거한 것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인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체중생 모두에게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열반이란 "모든 범부들이 세속의 도리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어 없애는 수행을 닦아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둘째, 범부, 성인에 구별되는 열반으로 열반은 성인에게는 있고, 범부에게는 없다. 이것은 중생을 正定聚, 邪定聚, 不定聚로 나누어서 사정취의 중생에게는 열반이 없다는 것으로 여래장사상이나 실유불성사상이 정립되기 이전 유식사상의 성차별설이나 일천제 불성불설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대승, 소승을 구별하여 대승에게는 열반이 있고, 소승에게는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 소승에게 열반이 없다는 것은 성문, 연각의 二乘에게 열반이 없다는 것으로 이것은 『유마경』 등에서 주장된 견해이다. 넷째, 因位와 果位를 구별하는 것으로 열반은 因位에서는 없고, 果位에서는 있다는 것으로 오직 부처만이 열반을 증득 한다는 견해이다.30)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 있어 열반은 煩惱障과 所知障을 소멸한 것으로 법체와 경계가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음도 멸도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열반은 획득되는 것도 아니오, 도달되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며.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31)라고 하였다. 즉 열반은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根本智를 얻은 직후에 또 後得智를 얻는다고 하기 때문에 후득지의 작용 또한 열반이다. 이것을 무주처열반이라 하는데, 이것은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 열반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불교 본래의 열반이라 할 수 있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공통점은 열반이 無記性으로 變壞가 없고, 허무가 아닌 수행자의 실천에 의해서 얻어지는 自證의 경지라는 것이다. 상이점으로는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을 常住, 安樂, 淸淨, 至福한 것이며, 대상적인 것이고, 번뇌와는 반대이며, 有餘·無餘와 擇滅·非擇滅이라 말해지며, 煩惱障이 소멸한 것이라 설명하고, 반면 대승의 중관학파에서는 열반을 空, 中道, 主客未分의 것이며, 또한 열반은 번뇌와 不二이고, 煩惱障과 所知障이 소멸된 것이며, 존재와 비존재의 상대성 위에 있는 것이라 하고 있다.
(2) 성정열반과 방편괴열반
열반에는 性淨涅槃과 方便壞涅槃, 有餘涅槃과 無餘涅槃의 구별이 있다. 性淨涅槃은 진여·법성이 본래 오염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청정열반이라 하고, 또 如如한 이치가 범부와 성인에 공통하기 때문에 同相涅槃이라 한다. 方便壞涅槃은 지혜와 자비가 善巧하여 양 극단의 치우침을 여읜 뒤에 나타나는 진여이다. 양 극단의 치우침을 轉依하여 양 극단에 머물지 않고 모든 번뇌와 미혹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또 無住處涅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열반은 凡夫位에는 공통하지 않기 때문에 不同相涅槃이라 한다.32)
성정열반과 방편괴열반은 동일한 진여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으로 청정에 自性淸淨과 離垢淸淨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성청정은 본래 해탈한 것 즉 性解脫이다. 자성청정이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을 如來藏이라 한다. 여래장은 번뇌와 함께 하고 있지만 본래 번뇌와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離垢淸淨은 자성청정에 부차적으로 있던 客塵煩惱가 완전히 소멸되어 완전하게 轉依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자성청정한 마음은 우리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성으로 진여 그 자체이고 법신인 반면 수행을 통해서 얻은 리구청정은 색신과 보신이다.
원효는 성정열반이라 할 때 거기에는 총체적인 것과 구별하여 보는 두 측면이 있다고 하고, 각자의 측면에서 그것을 화회시키고 있다. 먼저 구별하여 보면 성인이 증득한 성품에는 분별성에 대해서 本來淨을 증득 하는 것과 依他性을 바라보면서 轉依淨을 증득 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총체적인 면에서 보면 범부나 성인 차별 없이 모두 열반이 있다. 범부에게도 열반이 있다는 것은 여래의 본질인 법신이 일체중생들에게 편만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일체 중생은 空性이라는 근원적 사실에서 보면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양자에게 있어 진여는 무차별하다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부처님의 법문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 설법한 내용에는 서로 장애가 없다고 하였다. 보살이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범부들이 이미 열반에 들어간 것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보살은 그것이 본래 열반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부가 이미 열반에 들어가 있어도 그것은 성인이 들어가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범부는 스스로 열반에 들어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明과 無明을 어리석은 자는 둘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는 그 성품이 不二임을 아는 것과 같이 범부와 성인은 그 성품의 차이는 없지만, 그렇다고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범부와 성인, 생사와 열반은 不一不異, 非有非無, 非入非不入, 非出非不出함을 알아야 한다고 원효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양 극단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붓다의 입멸은 당시의 불교도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들은 석존의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그 죽음을 통하여 어떤 영원성을 찾으려고 하였으며, 그것은 그가 깨달은 진리 즉 다르마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고정화됨에 따라 생존하면서 완전히 열반을 증득 한 것은 유여열반이고, 죽어서 신체가 離散한 것을 무여열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가 일어나게 된 것은 수행자들에게 있어 그들이 수행하여도 번뇌를 완전히 끊기 어렵기 때문에 생전의 열반과 내세에 증득 하는 열반을 구별한 데서 연유한다. 이 경우 유여열반은 이미 결코 성불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번뇌에 대한 滅의 理로 수행의 완성이다. 수행의 완성은 교리상 번뇌장만을 제거한 阿羅漢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타는 所知障까지도 제거한 一切智者라고 생각되게 되었다.
그런데 번뇌뿐만 아니라 육체조차 멸한 灰身滅智인 사멸의 상태를 열반, 혹은 般涅槃이라 부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다나』에 닷바마플라풋타가 공중에 날아올라 火定에 머무르며 열반에 들어갔을 때, 붓다가 "몸은 깨어지고, 정신력은 없어지고, 受도 또한 모두 타 없어졌다. 諸行은 止息했고, 意識은 滅盡에 달했다."33)라고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붓다의 입멸은 방편의 몸인 生身의 입멸이고 그 근거가 되는 법신은 상주불멸 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상대의 반대로서의 절대가 아닌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상대 그대로를 다 포함하는 참으로 절대적인 영원성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열반도 소승의 灰身滅智의 소극적인 열반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적극적인 열반을 추구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열반의 체는 동일하지만 身으로 보면 煩惱身, 生身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고, 생신을 의지하여 열반을 얻는다고 하였다. 생신을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 하는 것이 有餘身界涅槃이라면 아라한이 일체의 번뇌를 다 끊어 없애고 들어가는 열반을 無餘身界涅槃이라 한다. 또한 유부에서는 數滅인 무위의 체가 가장 善한 것임을 밝혀 열반이라 하고, 몸과 지혜가 현재 없어진 것은 무상의 멸인 유위이기 때문에 열반이 아니라고 하였다. 현재의 因을 끊어 없애서 미래의 생후에 과보의 법이 생기하지 않는 것은 수멸이 아니고 무기이기 때문에 열반이 아니라는 것이다.34)
『성실론』에서는 假名과 實法 이 두 마음이 없는 것이 유여열반이고, 心身이 공하여서 미래에 다시 생기하지 않는 것을 무여열반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몸과 지혜가 현재 멸한 것은 열반이 아니다. 『성실론』에서는 集의 원인을 끊어 없앰으로서 고의 果報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수멸의 지혜로 보고, 그 과보는 無常邊行苦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과보가 일어나는 것도 멸제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譬喩部(경량부)에서는 集의 원인을 끊어서 고의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비록 열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數滅이 아니라 無記라 하였다. 또 『婆娑論』에서는 유여신계 열반은 善이며 道果이고, 사제에 소속된다고 하고, 무여신계 열반은 無記로 道果가 아니고, 사제에도 소속되지 않는다고 하였다.35)
대승불교에서는 유여·무여열반을 化現, 實義, 大小, 三身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 화현이란 설일체유부와 독자부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유여·무여열반을 實이 아니라 化現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 實義란 轉依眞如로 열반의 체를 삼는다는 뜻으로 유여열반은 因을 끊어 없앰으로써 나타나고, 무여열반은 果가 이미 드러났다는 뜻에서 열반이라 한다. 三身과 관련해서 말하면 그것은 無住處涅槃이다. 왜냐하면 應·化의 二身은 生하기도 하고 滅하기도 하여 진여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러나 법신은 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진여와 다름이 없으므로 따로 열반에 머무를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應·化의 二身은 열반에 머무르지 않지만 그것은 법신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법신도 따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무주처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셋째 大小는 이승들의 열반을 유여열반, 부처님이 증득 하신 열반은 무여열반이라 보는 견해이다. 넷째, 三身이란 應·化 二身은 몸과 지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유여열반이고, 법신은 몸과 지혜가 평등하고 일체의 相을 초월하여서 마침내 적멸 하기 때문에 무여열반이라 한다. 그리고 無垢眞如는 응신과 화신에서 보면 유여열반이지만, 법신에서 보면 무여열반이다.36)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말하면 열반의 본질은 번뇌의 속박을 끊은 現法열반에 있으며, 붓다의 성도야말로 완전한 열반의 증득이다. 또한 종교적 실제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무여열반 보다는 오히려 유여열반 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붓다는 종교 실증자로서 현재 영원한 열반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체험을 얻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불교는 깨달음의 지혜를 통해서 열반에 도달함과 동시에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 실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붓다에게 있어서 무여·유여열반의 구별은 의미 없다고 볼 수 있다. 지혜와 자비라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볼 때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어 중생 구제를 위해서 그것을 발휘할 수 있어야 참다운 열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열반의 특성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 붓다는 역사성을 벗어나 순수한 理로서의 붓다 즉 法身이 된다. 열반을 이미 理라고 하면 그 때 열반은 법신과 결합된다. 또 열반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 점에서 지혜와 혜탈의 두 덕을 갖고 있다. 그래서 법신, 반야, 해탈을 열반의 삼덕이라 한다. 法身은 佛地의 일체 공덕으로 유일한 법계이며, 영원한 진리이다. 반야는 법신의 성품이 스스로 맑고 통달하여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는 것으로 생사의 분별을 떠나는 지혜이며, 해탈은 법신이 모든 번뇌의 繫縛을 떠나서 장애 되는 것이 없는 것 즉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법신은 아무 활동이 없지만 법신은 붓다이기 때문에 거기에 妙用인 지혜와 해탈이 있고, 이들의 조화 통일로서 열반이 있게 된다. 이 같이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은 개별적으로 보면 서로 다르지만, 그 三相이 一味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37) 원효는 열반의 특성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유를 생사의 세 가지 근심을 對治하기 위해서 라고 하고 있다.38) 즉 법신은 고의 과보인 五陰의 몸을 대치하고, 반야는 번뇌의 미혹의 법을 제거하고, 해탈은 모든 業障에 얽매이는 因을 여의기 위해서 이다.
열반과 열반의 세 가지 특성 즉 법신, 반야, 해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열반 자체는 총체적이고, 법신, 반야, 해탈의 삼법은 개별적이다. 그것은 첫째, 이 三法을 함께 갖추어야 열반을 이루게 되지만, 각자 따로 들면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둘째, 삼법이 평등하고 원만하게 되면 열반을 이루지만, 평등하지 않으면 열반을 이룰 수 없다. 셋째, 삼법이 일시에 이루어져야 열반을 이룬다. 넷째, 삼법이 同體가 되어야 열반을 이룬다. 열반과 삼법과의 이러한 관계는 화엄의 六相圓融의 설과 유사한 설명방식이라 하겠다. 예컨대 하나의 집을 이루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의미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여러 구성요소들이 함께 원만하고 평등한 관계로 일시적으로 관여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 이같이 삼법이 개별적이고, 열반은 총체적이지만, 이치를 따져서 말하면 열반, 법신, 반야, 해탈의 4가지의 공덕은 다 총체적인 것도 되고, 개별적인 것도 된다. 즉 一이 一切에 즉하고, 일체가 일에 즉한다. 一과 一切가 상호 원융무애 하다. 그러므로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다음으로 열반의 세 특성 중 법신에 色相이 있는가의 논란이 있었음을 원효는 소개하고 있다. 즉 법신은 원래 색상이 없지만 機緣을 따라 화현하는 색상이 있다는 주장과 법신의 실덕에는 장애 없는 색상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먼저 機緣을 따라 化現하는 색상이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은 영원히 분별을 떠나 진리의 근원에 돌아와 법계로 몸을 삼기 때문에 색상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중생들을 위해서 색상을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 구제라는 자비의 실천을 위해서 化現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처의 색상도 지혜의 눈을 빌어서 본 색상이므로 미묘한 색상이지 경계를 갖고 있는 우리들의 감각적인 색상은 아니다. 그리고 법신의 실덕에는 장애가 없는 색상이 있다는 것은 분별에서 만들어지는 거친 색상은 여의었지만 萬德을 닦아 감득한 미묘한 색상은 있다는 것이다. 즉 장애가 되는 색상은 없지만, 장애 없는 무애자재한 색상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주장에 대해 원효는 결정적으로 한 쪽만을 취하면 둘 다 옳지 않지만, 부처의 공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만을 진실이라 여기지 않으면 둘 다 옳다고 하였다. 그 두 주장은 첫째, 捨相歸一心門에서 보면 일체의 덕상은 동일한 법계이고, 第一義의 몸이어서 색상에 차별된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 從性成萬德門에서 보면 色心의 공덕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어 萬德을 갖추게 되어 32相 80種好 등의 무량한 상호 장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39) 이러한 두 입장에서 보면 앞의 두 주장은 서로 장애가 없기 때문에 異相은 없다.
부처의 몸은 몸이 아니면서 곧 몸이요, 識이 없으면서 곧 식이다. 마음을 여의었으나 역시 마음을 여의지 않았고, 처소가 없으면서도 처하고, 집이 없으면서도 집에 있고, 像이 없으면서도 相이어서 모든 相을 장엄하였다.40)
6) 열반의 사덕
열반의 사덕이란 常樂我淨을 말하는데, 그 의미에 전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두 입장이 있다. 먼저 개별적인 입장에서 보면, 常이란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이 없다는 것으로 법신의 뜻이 된다. 常에는 法常과 佛常이 있는데, 法常은 生滅이 없다는 의미로 常身이며, 佛常은 老死가 없다는 常壽의 의미가 있다. 법신은 보신과 화신 두 몸의 근본이 되고 本覺이 상주한다. 그러므로 보신과 화신도 모두 상주한다. 樂은 생사의 고통을 떠나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열반의 뜻이다. 이 樂에는 受를 끊는 락, 寂靜의 락, 覺知의 락, 不壞의 락의 4 종류가 있다. 수를 끊는 락과 적정의 락을 열반의 락, 각지의 락과 불괴의 락을 보리의 락이라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왜냐하면 보리와 열반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我는 중생이 자아가 없다는 것에 대대한 것이며, 一如가 된 몸은 妄執을 떠난 진여 그대로라는 것으로 부처의 뜻이다. 我에도 法我와 人我가 있는데, 法我는 체가 진실하고, 항상하며, 변이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人我는 자재하다는 뜻이다. 眞實我는 열반의 아를 말하고, 自在我는 보리의 아를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아를 대열반이라 한다"는 것처럼 涅槃我와 菩提我는 하나로 구별이 없다. 淨은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었다는 것으로 法의 의미인데, 果淨, 業淨, 身淨, 心淨이 있다. 果淨은 有의 25가지 과보를 벗어난 것을 말하며, 業淨은 범부의 모든 업인을 벗어난 것이고, 身淨은 佛身常主이고, 心淨은 부처의 마음에 번뇌가 완전히 없음을 말한다. 과정과 업정은 離德이고, 신정과 심정은 修德이다. 이 둘도 이름만 다를 뿐 다 같은 열반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사덕은 상호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다. 즉 사덕이 법신, 열반, 반야, 해탈의 뜻이 된다는 것이다. 「덕왕보살품」에 "불성을 봄으로써 열반을 얻는다. 상과 락, 아와 정을 대열반이라 한다."41)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 사덕의 각각에는 다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法身 常德에는 부처님은 차별 없는 성품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유위인 생사를 버리지 않았고 무위인 열반도 취하지 않았다. 즉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에 유위인 생사를 버리지 않았고, 열반이 생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에 무위인 열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단견과 상견을 초월한다. 둘째, 涅槃 樂德은 일체 意生身의 고를 여의는 것과 일체 번뇌의 습기를 없애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의생신의 고를 없애는 것에 의해서 적정의 락을 드러내고, 일체의 번뇌 습기를 없애는 것에 의해 覺智의 락을 드러낸다. 셋째, 佛 我德은 我見의 치우침을 여의는 것과 無我見의 치우침을 여의는 것의 두 의미가 있다. 我見에 치우치지 않음으로서 허망한 나에 집착하는 것을 벗어나고, 無我見에 치우치지 않음으로서 무아에 집착하는 희론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 이에 大我를 얻는다고 한다. 넷째, 解脫 淨德에는 분별의 성품을 통달하는 것과 의타의 성품을 제거하여 없애는 두 의미가 있다. 분별의 성품을 통달함에 의해서 자성의 청정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본래 자성청정이고, 의타의 성품을 제거하여 없앰으로써 方便壞의 청정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離垢淸淨이 된다.
원효는 열반의 많은 덕 가운데 오직 이 4덕만을 세우는 이유는 4가지 장애를 없애고, 4가지 환난을 뒤엎고, 4가지 전도를 대치하고, 4가지 相을 여의기 위해서 라고 하고 있다. 첫째, 4가지 장애를 없앤다는 것은 범부 등에 있는 장애를 없애는 것을 말한다. 생사에 탐착해서 淨德에 장애가 있는 一闡提, 허망한 我에 집착하여 我德에 장애 있는 외도, 고를 두려워하여 樂德에 장애가 있는 성문, 利他의 마음을 내지 않아 常德에 장애가 있는 연각 등의 장애를 각각 대치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는 4가지 뛰어난 因行 즉 信心, 般若, 三昧, 大悲을 닦아야 된다.
둘째, 4가지 환난을 뒤엎는다는 것은 윤회하는 생사의 4가지 환난 즉 무상, 고, 무아, 부정을 뒤엎는 것이다. 셋째, 4가지 전도를 대치한다는 것은 성문의 4가지 무위에 전도되는 行 즉 무상, 고, 무아, 부정은 법신의 무위인 4가지 덕을 뒤엎어 없애기 때문에 성문의 무위에 대한 4가지 전도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 4가지 상을 여읜다는 것은 윤회하는 생사의 4가지 모습 즉 緣相, 因相, 生相, 壞相을 여읜다는 것이다. 연상인 무명의 더러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정덕, 인상인 업의 얽매임을 벗어나기 위해 아덕, 생상인 미세한 고를 벗어나기 위해 락덕, 괴상인 무상의 소멸을 벗어나기 위해 상덕을 건립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덕은 법신, 반야, 해탈의 三事를 벗어나지 않고, 삼사는 二我에 들어오고, 二我는 하나의 대열반이다. 一은 一切에 즉하고, 일체는 일에 즉하니 이것이 부처님의 비밀장이라 한다.42) 다시 말하면 상락아정이란 곧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부정을 통하여 미혹이나 망집 등으로부터 나온 상, 락, 아, 정을 깨뜨리고, 부정적, 허무적 견해 또한 깨뜨려서 미혹이나 망집 등을 완전히 떠나 여실한 지혜인 중도적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다.
4. 화쟁사상
원효는 지금까지의 열반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異諍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화회시키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異諍이 일어나는 이유는 각자의 이론이 常과 無常의 한 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사덕문」의 화쟁편에서 그 異諍의 대표적인 것으로 법신은 상주하고 화신은 起滅한다는 쟁론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부처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이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부처의 본질은 화신인 석존의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에 있다. 원시 『대반열반경』의 "너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라는 석존의 말은 석가모니 붓다 입멸 이후 불교의 본질이 진리에 있음을 설파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중생 구제를 위해 화현한 화신인 석가모니부처는 불교의 본질이 아니다. 불교의 본질은 상주하는 법신에 있다.
법신과 화신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특히 報身佛에 대해서는 그것이 상주한다는 견해와 무상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상주한다는 주장에는 첫째, 보신불의 공덕은 생함은 있지만 멸함이 없다. 또한 生因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다. 그러나 理를 증득 함이 究竟하기 때문에 相을 여의었고,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보신불의 공덕은 비록 生因에서 생기지만 그것은 생의 상을 여의었고, 본래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는 것이지만 도를 깨달은 뒤에 보신의 공덕이 성취되기 때문에 본래부터 시초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신불은 三際를 멀리 초월하여 응연히 상주한다. 이렇게 보면 보신이 상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의 化相에 대한 것이지 보신을 말한 것은 아니다. 부처의 報身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邪見이라 하였다.43) 報身이 무상하다는 주장은 보신불은 生因에 의해 생긴 것으로 因과 果가 있기 때문에 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보신을 상주라고 한 것은 보신이 법신을 의지하여 상속함이 미래제가 다하도록 끝이 없고, 老死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주장에 대해 원효는 두 주장 모두 맞기도 하고 모두 틀리기도 하다고 하였다. 양자가 결정코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 모두 과실이 있지만 극단에 치우침 없이 아무런 장애 없이 말하면 모두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래, 응공, 정변지, 이를 상이라 합니까, 무상이라 합니까? 붓다가 말하기를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만일 두 변에 집착하면 과실이 있다.44)
라고 한 것과 같다. 보신불은 상주가 아니지만 생각 생각에 멸함이 없다. 장애 없이 말하면 두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은 보신불의 공덕이 相과 性을 여윈 것이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멸 하는 상을 벗어나 구경에는 적정하여 작위함이 없다. 그러므로 상주라 한다. 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상주의 성품을 여의어서 작위하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라 한다. 또한 性을 여의고 相을 여위는 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상즉한다. 그러므로 생하고 멸하는 것이 상주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러한 도리에서 보면 두 주장 모두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는 무상을 주장하는 견해나 상을 주장하는 견해 모두 그 정의가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상을 고집하는 견해는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에 작위하는 법이 아니고, 작위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二身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법신은 무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원효는 일체 유위법은 모두 惑業으로부터 생기지만 법신은 惑業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유위가 아니다. 그러나 법신은 자재하여 二身의 유위의 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무위도 아니다. 이것은 법신이 비록 혹업으로 인하여 생긴 유위는 아니지만, 자재로이 몸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凝然히 동작이 있다는 것이다.45) 또한 常을 고집하는 견해에서 말하는 '비로소 있게 되는 공덕'이라고 하면 그 이전까지는 공덕이 편만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만일 공덕이 편만하지 않다면 법계을 증득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이 되어 법신이 편만하지 않다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즉 法身遍滿이나 진여무차별설에 어긋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원효는 이론상의 여러 쟁론들을 화회하기 위해 주로 상반된 두 주장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원효는 異論을 화회하기 위해 非然非不然의 논리를 사용함을 알 수 있었다. 非然非不然이란 부분적인 진리도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임이 인정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의 진리일 뿐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 즉 여러 주장들이 경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체적 진리가 아닌 부분적인 진리이다. 여기서 그러한 진리의 부분성을 붓다의 진의에로 돌리려고 하는 원효의 입장을 볼 수 있다. 붓다도 진리의 부분성에 대해서 그 부분성을 인정하지만 진리는 전체를 보아야 된다고 하고 있다. 진리는 대립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보통의 진리는 오류에 대립하는 것이며 양자 택일적인 것이지만, 불교에서의 진리는 분별성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고, 제2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46)
총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는 그 전체를 보아야 된다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다. 그런데 원효에 있어 그러한 진리의 당체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원효에 있어 화쟁의 원리도 역시 一心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 대승 중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별다른 체가 없다. 오직 일심으로써 그 자체로 삼는다. 그러므로 법이란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고 한 것이다."47) 일심은 세간·출세간의 모든 법을 포섭한다. 그것은 染·淨의 현실적인 모든 차별을 초월하고, 또한 心源에서 그것을 포용하여 화합하고 있는 포괄적인 것이다.48) 일심은 변치 않는 근원자이므로 홀로 청정하고 진·속을 융합하고 있다. 이것은 유·무, 공·불공에도 집착하지 않는 해탈자의 마음이다.49) 일심은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으므로 나가고 들어감이 없어서 空에도 有에도 있지 않다. 또한 일심의 체는 본래 적정하여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일심은 양 극단을 떠나 자타가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원효의 화회정신은 결국 대립되는 것들을 자신이 포용하면서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하고 있는 一心에 그 근원이 있다고 하겠다.
5. 결어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임과 동시에 스스로 붓다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해탈 열반하여 대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자유라는 말은 해탈로 표현되고 해탈을 얻은 마음의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원효의 『열반경 종요』는 『대반열반경』을 중심으로 불성과 열반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소개하고 여러 異論들을 그 특유의 화쟁의 논리로 화회시키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반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는 열반을 멸도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견해와 그 의미를 번역할 수 없다는 두 견해가 있다. 번역할 수 없는 이유는 중국어의 한계에 의한 것이며, 멸도라는 번역은 열반의 많은 의미 중 하나만을 취하여 번역한 것이다. 원효는 密語로 보면 열반은 많은 뜻을 포함하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지만, 顯了語로 보면 음성에 따라 중생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멸도라 번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 열반의 體性에는 無垢眞如와 果地의 모든 덕이라는 두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열반과 보리에 각각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果地인 道諦도 열반이고 果地에서 증득 되어야 할 진여 역시 보리라는 것이다. 상이점은 보리는 果로 덕을 증득 할 수 있으므로 道諦에 포섭되고, 열반의 과는 증득 된 법이어서 滅諦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空, 不空에 대해서는 부처의 덕성, 부처의 자비, 부처의 지혜 등은 불공이고, 생사열반은 모두 허망하여 空·無所得이므로 佛法도 空이라는 것이다.
셋째, 열반에는 性淨·方便壞涅槃, 有餘·無餘涅槃의 구분이 있다. 성정·방편괴열반이 동일한 진여를 근거로 하는 점은 같다. 성정열반은 진여·법성으로 일체 중생에게 공통된 것이며, 방편괴열반은 수행하여 번뇌를 소멸한 뒤에 나타나는 열반이다. 유여·무여열반의 구별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열반은 번뇌장이 소멸한 것이라 하고, 무여열반을 완전한 열반이라 본 경향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유여·무여열반에 대한 명확한 구별은 없으며, 오히려 붓다의 자비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유여열반이 중생구제의 취지에 더 부합된다 하겠다.
넷째, 열반의 특성으로는 법신, 반야, 해탈이 있다. 법신은 苦의 과보인 오음의 몸을 대치하고, 반야는 번뇌를 제거하고, 해탈은 업장의 원인을 벗어나는 것이다. 열반의 이 세 가지 특성은 그것이 함께 갖추어지고, 평등하고, 원만하게, 일시에 同體가 되어야 열반이 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즉 一이 一切에 즉하고, 一切가 一에 즉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열반의 四德은 常樂我淨이다. 상은 법신, 낙은 열반, 我는 부처, 淨은 법의 뜻이다. 이 4가지 덕만을 세우는 이유는 4가지 장애를 없애고, 4가지 환난을 뒤엎고, 4 가지 전도를 대치하고, 4가지 相을 여의기 위해서이다. 즉 常樂我淨은 부정적 허무적 견해를 버려 미혹이나 妄執을 완전히 떠난 중도적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 異諍의 화회에 대해 원효는 여러 논사들의 주장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는 즉 非然非不然의 논리로 그것을 화회하고 있다. 주장이 경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성을 가지지만 그것은 일부분의 진리일 뿐 완전한 진리는 아니기 때문에 붓다의 진의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다. 원효는 대승의 모든 법은 一心을 체로 삼는다고 하여, 대립되고 모순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해 있는 평등하고 원만한 해탈자인 一心 즉 중생심을 화쟁사상의 근거로 삼고 있다.
[출처] 원효의 열반사상-조수동|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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