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은 7권 28품으로 되어 있고 2처3회(二處三會 )의 설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처란 영축산 기사굴 산중과 허공 보탑중이며, 3회는 기사굴 산중에서 1회, 허공 보탑중에서 2회, 다시 기사굴 산중으로 내려와서 3회에 걸쳐서 설하셨습니다.
설해진 품으로 말하면 제1회는 서품(序品, 제1)에서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1) 44번까지이고 제2회는 견보탑품 45번부터 촉루품(囑累品, 제22)끝까지이고 제3회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부터 경문 끝까지입니다.
대개의 경전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되는데, 서분에는 통성(通序)와 별서(別序)가 있습니다. 통서는 다른 경전과 공통되는 서문이고 별서는 유독 이 법화경에서만 볼 수 있는 서문입니다.
통서에는 증신서와 발기서가 있으며 신(信; 如是) 문(聞; 我聞) 시(時;一時) 주(主;佛) 처(處;王舍城) 중(衆:與大比丘衆)의 육성취(六成就)로서 경전의 공통적인 서문이 구성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전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끝나는데 이 『법화경』에서는 유별 적문과 본문으로 나뉘고 또 거기에 따로따로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두 번 나뉘는 것이 법화경의 특색입니다. 적문(迹門)의 서분은 서품 모두가 서분에 해당됩니다.
앞에서 경을 보는 자세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는데, 그때 언급한 많은 대중이 여기에서 소개됩니다.
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2.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 산중에 계시사, 큰비구들 만 이천인과 함께 하시니, 이 분들은 다 아라한이라. 모든 누(漏)가 이미 다하여 다시는 번뇌가 없으며, 자기의 이로움을 전부 얻어서 온갖 유(有)의 결박에서 벗어나 마음이 자재함을 얻으셨다.
3. 그들의 이름은 아야교진여, 마하가섭,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 사리불, 대목건련, 마하가전연, 아누루타, 겁빈나, 교범바제, 이바다, 필릉가바차, 박구라, 마하구치라, 난타, 손타라난타, 부루나, 미다라니자, 수보리, 아난, 라후라이니 이들은 여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대아라한들이다.
4. 또한 배우고 있는 사람(學), 다 배운 사람(無學) 이천 인과 마하파사파제 비구니는 육천의 권속과 함께 있었으며, 라후라의 어머니 야수다라 비구니도 또한 그의 권속들과 함께 있었다.
5. 보살 마하살 팔만 인이 있었으니, 이들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모두 다 다라니와 설법 잘하는 변재를 얻어서 불퇴전의 법륜을 굴리시며, 무량한 백천의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여러 부처님 처소에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어서 항상 모든 부처님의 칭찬 받는 바가 되었으며, 자비로서 몸을 닦아서 부처님 지혜에 잘 들어가며, 큰 지혜를 모두 통달하여 저 언덕에 이르르니, 그 이름이 무량세계에 널리 퍼지고 능히 무수한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는 이들이었다.
6. 그들의 이름은 문수사리보살, 관세음보살, 득대세보살, 상정진보살, 불휴식보살, 보장보살, 약왕보살, 용시보살, 보월보살, 월광보살, 만월보살, 대역보살, 무량력보살, 월삼계보살, 발타바라보살, 미륵보살, 보적보살, 도사보살등 이러한 보살마하살 팔만 인과 함께 있었다.
『화엄경』이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해서 문수, 보현이 좌우보처라면 『법화경』은 석가모니불(화신불)이 주불이고 문수, 보현이 좌우보처로 되어 있습니다.
맨처음에는 문수보살이 등장하고 마지막 「보현보살 권발품」에서 보현보살이 마지막에 회향으로 딱 회통을 칩니다. 그것은 화엄경하고 형식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성립 특히 최상승경전인 법화와 화엄의 구성이 어떻게 되엇는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그때에 제석환인이 그의 권속 이만의 천자(天子)와 함께 하였고 또 명월천자 보향천자 보광천자 사대천왕이 그들의 권속 일만 천자와 함께 하였다. 자재천자 대자재천자도 그의 권속 삼만 천자와 함께 하였으며 사바세계의 주인인 법천왕 시기대범 광명대범 들이 그의 권속 만이천 천자와 함께 하였다.
8. 또 여덟 용왕이 있었으니 난타용왕, 발란타용왕, 사가라용왕, 화수길용왕, 덕차가용왕, 아나바달다용왕, 마나사용왕, 우발라용왕 등이 각각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였다.
9. 네 긴나라왕이 있으니 법긴나라왕, 묘법긴나라왕, 대법긴나라왕, 긴법긴나라왕이 각각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였다.
10. 네 건달바왕이 있으니 낙(樂)건달바왕, 낙음(樂音)건달바왕, 미(美 )건달바왕, 미음(美音)건달바왕이 각각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였다.
11. 네 아수라왕이 있으니 바치아수라왕, 거라건타아수라왕, 비마질다라아수라왕, 라후아수라왕이 각각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였다.
12. 네 가루라왕이 있으니 대위덕가루라왕, 대신거루라왕, 대만가루라왕, 여의가루라왕이 각각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였다.
13. 위제희의 아들 아사세왕도 약간의 백천 권속과 함께 하여 각각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물러가 한쪽에 앉으셨다.
여기까지가 신· 분· 시· 주· 처· 중(信聞時主處衆), 소위 육성취의 공통적인 서문인데 어느 경전이든지 대중이 나오는 이야기는 형식을 같이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서문인데 이 별서 가운데에도 대중이 또 모입니다. 그리고 상서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법화경』의 특징이며 별서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14. 이때 세존께서는 사부대중에게 에워싸여 공양과 공경 존중과 찬단을 받으심이라.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대승경을 설하시니 그 이름이 『무량의경(無量義經)』이라.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아끼시는 내용이었다.
『무량의경』이 이렇게 앞에 나오기 때문에 『무량의경』과 『묘법연화경』과 『보현보살 행법경』을 합하여 『법화삼부경』이라 하여 간혹 출판되는데 거기엔 그런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팔만대장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무량의경』과 나머지 여타 경전이 서론이고 『법화경』이 본론이며 『보현보살 행법경』이 결론이라고 배대합니다.
과거에 숱하게 설한 많은 경전도 결국은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서 설했으므로 서론에 해당됩니다. 즉, 부처님이 72세까지 설하신 경들은 모두 서론이고 볍화경이 본론이며 보현보살 행법경이 결론이라고 보는 과판(科判도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법화경에 매료된 분의 이야기지만 그런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15. 부처님께서 『무량의경』을 다 설하신 뒤 가부좌를 하시고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드시니 몸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심이라.
16. 이때에 하늘에서는 만다라꽃, 마하만다라꽃, 만수사꽃, 마하만수사꽃을 부처님과 모든 대중에게 흩뿌리며 넓은 부처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17.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시, 천룡,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과 소왕(小王)전륜성왕등 모든 대중이 미증유(未曾有)를 얻어 환희하여 합장하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우러러 뵈었다.
18. 그때 부처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白毫相)으로 광명을 놓으사 동쪽으로 만 팔천세계를 비추시는데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어서 밑으로는 아비지옥(無間地獄)과 위로는 아가니타천(有頂天)까지 환히 비추었으며 이 세계에서 저 국토까지의 육도 중생들도 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국토에 계신 부처님들도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부처님이 설하시는 경전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19. 아울러 저 국토의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갖가지 수행으로 도(道) 얻음을 보며, 또한 모든 보살 마하살이 가지가지 인연과 가지가지 믿음과 가지가지 모습으로 보살도(菩薩道) 행함을 보며, 또 모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심을 보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로써 칠보탑을 세우는 것까지 보임이라.
이렇게 광명속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다른 경전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서론이라 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여기에서 『법화경』설함을 듣고 보는 것도 부처님의 광명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미륵보살은 여기에서 “어찌된 일인가?” 하고 알고싶어 하지요.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왜? 라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아무 일도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법화경도 왜? 왜 부처님이 저런 상서를 놓았는가에 대한 미륵보살의 문제의식 때문에 그 오묘한 세계, 절대적인 진리, 묘법의 진리인 법화경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경문
20.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었다. 나는 이제 천인과 사문, 바라문의 대중에게도 말하노라. 사리불아, 나는 옛날 일찍이 이만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위없는 도를 위하여 항상 너를 교화하였기에 너 또한 오랜 세월동안 나를 따라 배웠고 내가 방편으로 너를 인도한 까닭에 나의 법 가운데 태어났느니라.
강의
위의 경문은 사리불이 깨달은 내력을 설명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이만 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공부할 때 한편으로는 캄캄한 무명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리불을 방편으로 인도하였기에 지금 부처님이 성불하였을 때 사리불도 따라서 성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성자리, 본성자리는 시작이 없는 고로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 깊고 깊은 우리 본성의 근원자리는 동일 생명이기에 아니 모르니. 너니 나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그런 분별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이고 현재도 하나이며 영원히 하나인 자리입니다. 여기 이만 억 부처님 처소에서 사리불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다 같이 그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경문
21. 사리불아, 내가 옛날에 너에게 뜻과 원을 불도에 두라고 가르쳤건만 너는 지금 모두 잊어버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멸도를 얻었다`하므로 , 내가 이제 너에게 본래 원을 세워 행하려던 도(道)를 기억케 하고자하는 까닭에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이 대승경을 설하노라. 그 이름은 묘법연화경이고 이는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염려하고 아끼는 바이니라.
22. 사리불아, 너는 미래세에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겁을 지나서 천만 억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정법을 받들어 지니며 보살로서 행해야 할 도를 갖추어서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 그때의 이름은 화광여래, 응공지,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리라.
23. 그때의 나라 이름은 이구(離坵)이고 그 땅은 평정하고 청정하게 잘 장엄되었으며 편안하고 풍족하고 즐거워서 훌륭한 사람(天人)들이 번성하게 되리라. 그곳 유리로 된 땅에는 팔교차로가 있고 황금줄로 경계를 삼았으며 그 곁에는 칠보로 된 가로수가 있어서 항상 꽃과
과일이 무성하리라. 그곳에서 화광여래는 또한 삼승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게 되리라.
강의
여기의 이구(離坵)라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의 모든 어두움, 부정적인 면, 먹구름들이 모두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성불한 사람으로서는 모든 장애가 끝났기에 이러한 불행과 어둠이란 것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이 성공한 것을 성불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 좋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자기가 목적하던 바를 이루었을 때 성불했다고 하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과 모든 업연이 다 끊어졌다고 봐도 좋습니다. 이젠 찬란한 태양과 창창한 앞날만이 그에게 있게 되어 희망차고 시원함만 있는 것이 이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에 인가를 받은 사리불에게만 이구라는 나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성불이란, 성공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백 퍼센트 긍정적인 사고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부정적인 측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성공하지못합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 않는 일을 계획하고 자기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된다고 어리석게 밀고 나가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치밀하게 생각하고 자기 분수에 맞게 계획했다면 그땐 긍정적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성공 안할 수가 없고 그땐 먹구름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지요.
경문
24. 사리불아, 저 부처님이 출세할 때 비록 악한 세상은 아니나 본래의 서원인 까닭에 삼승법을 설할 것이니라.
강의
본래의 서원이란 일체 중생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다 성불의 길로 인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처음부터 고차원적인 이야기, 불교의 본래 목적만 가지고 자나깨나 그것만 피력한다면 아마도 불교를 좋아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절에 올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방편을 쓰지 않고 한가지 성불만 부르짖는다면 사실 절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성불에 얼마나 매력을 느낄지 의문입니다. 지금은 밝은 세상이니까 알 것을 다 알아야 될 시대이기에, 옛 조사 스님께서도 한 가지 성불만 이야기한다면 법당 앞에 풀이 세 길이나 자라서 풀을 매는 데도 큰 어려움이 따를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안오니까 풀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경문에서도 부처님이 본래의 서원을 쓴 까닭에 삼승법으로 설한다고 하였고, 법화경 설하기 이전까지의 40년 동안의 방편설을 통해서 일승으로 나아간다는 법화경 사상입니다.
경문
그 겁의 이름은 대보장엄이라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대보장엄이라 하는가 그 나라에서는 보살로서 큰 보배를 삼는 까닭이니라.
강의
겁의 이름이란 옛날에 흔히 쓰던 연호를 말합니다. 그리고 ‘보살로서 큰 보배를 삼는다`는 것은 금은 보화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자, 훌륭한 사람들로서 그 국토를 장엄하고 보살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국보를 삼는 것이지요.
경문
25. 그곳의 모든 보살들은 한량없고 가없이 많아서 생각으로 헤일 수 없으며 산수로도 비유할 수 없어서 부처 지혜의 힘이 아니면 능히 알 수 없느니라.
26. 만약 그 보살들이 걷고자 하면 보배의 꽃이 발을 받들며 이런 보살들은 처음으로 발심한 이가 아니고 모두 오래 전에 덕의 근본을 심어서 한량없는 백천만 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청정히 범행을 닦았음이라. 이들은 항상 여러 부처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항상 부처지혜를 닦아서 큰 신통력을 갖추었고 일체의 모든 법문을 잘 알며 소박하고 정직하여 함이 없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한 이와 같은 보살들이 그 나라에 가득하리라.
27. 사리불아, 화광부처의 수명은 십이소겁이니 왕자로서 부처되기 전은 제외함이라. 그 나라 사람의 수명은 팔소겁이니라.
28. 화광여래가 십이소겁을 지내고는 견만보살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시면서 비구들에게 이르기를 ‘ 이 견만보살이 다음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은 화족안행, 다타아가토, 아라하, 삼먁삼불타라하며 그 부처님 나라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하리라.
강의
위의 경문은 사리불이 화광여래가 되어서 견만보살에게 수기주는 것을 이야기 해야 될텐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 일까지 다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견만보살이 성불하면 화족안행여래가 되며 그 국토도 또한 화광여래가 태어난 국토와 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우리라는 예언을 하시는 겁니다. 이는 시간적인 제한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초월한 것입니다.
경문
29. 사리불아, 이 화광불이 멸도한 후에 정법이 이 세간에 머물 때는 32소겁이고 상법(像法)이 세간에 머무름도 32소겁이니라.
강의
보통 법을 세가지로 나누는데 500년을 단위로 할 때는 제 55백 년이라 하여 5가지로 나누고, 셋으로 나눌 때는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라 합니다. 여기 경문에선 정법과 상법만 이야기했는데 화광여래는 12소겁까지 계시고 정법시대는 32소겁까지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정법이란 정법(正法)이 행해질 때, 즉 부처님 당시와 똑 같을때가 32소겁이고 상법시대란 비슷하다는 뜻으로 정법시대와 비슷한 시대가 32소겁 동안 흐른다는 것입니다. 말법시대는 대개 훨씬 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법시대가 끝나면 그 부처님의 법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이야기됩니다.
불교는 어느 경전 하나만 제대로 공부한다면 불교 전반을 이해 할 수 있고 또 한 페이지 속에서도 불교 전체 내지 팔만대장경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비유품에서는 구체적으로 사리불이 수기 받은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것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얼마만큼 확신하는가 안 하는가에 따라서 법화경의 입장에서 볼 때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까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참선이나 다른 대승경전 등을 수없이 접했고 그렇지 못했더라도 그 경전들이 부르짖는 중요한 사상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법화경의 말씀들이 새삼스럽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경전을 배우지 못하고 오직 법화경만을 의지해서 비로서 불교를 알게 되었다면 훌륭하지 못한, 수행이 없는 사람도 다 수기를 받을 수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은 아주 신기한 가르침이고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경문
30. 그때 세존께서는 거듭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31. 사리불은 내세에
부처되어 지혜가 넓은 이가 되면
그 이름은 화광여래로다.
마땅히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며
보살행을 다 갖추어서
십력 등의 공덕을 쌓아
위없는 도를 증득하리라.
32.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
겁의 이름은 대보장엄이고
그 나라 이름은 이구이니
청정하여 티가 없으며
유리로써 땅을 이루고
금줄로써 길의 경계를 삼으며
칠보로 된 온갖 색 가로수엔
항상 꽃과 열매가 무성하리라.
강의
경전에서 극락 세계를 그린다든지 사리불이 성불했을 때의 세계, 또는 화장세계를 그릴 땐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르고 우리의 현실 생활과도 거리가 먼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운 세계, 행복의 세계, 꿈과 이상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위의 경문에서도 땅이 유리로 되었다면 실지로 살기는 힘들겠죠. 식물이 자랄 수도 없고 사람이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나무도 나무의 성질로 된 나무라야지 칠보로된 나무는 나무로서 쓸모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과 맞지는 않으나 여기에서 귀중한 보물, 값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세계를 꾸민 것은 이상향을 그린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경문
33. 그 나라의 모든 보살들은
뜻과 생각이 아주 견고하고
신통과 바라밀이 이미 다 갖추었으며
수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보살도를 잘 배우리니
이와 같은 큰 보살들은
화광 부처님이 다 교화하리라
화광불이 왕자 시절에는
나라와 세속의 영화를 다 버리고
범부로서는 최후의 몸으로
출가하여 성불하리라
34. 화광불이 세상에 머물기는
수명이 12소겁이며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은
8소겁이리라
그 부처님 멸도하신 후
정법이 세상에 머물기는
32소겁이니 널리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
35.정법이 멸하여 다한 뒤엔
상법이 32 소겁 동안 머무르고
그 뒤엔 사리를 널리 유포하여
천상과 인간이 두루 공양하리니
화광불이 하시는 바
그 일이 다 이와 같으니라
복과 지혜 구족하신 성존께선
가장 수승하여 비길 바 없으니
그가 바로 네 몸이므로 응당히
스스로가 기뻐하고 경허할지라
36. 그때에 사부대중인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와 천룡 · 야차 · 건달바 · 아수라 · 가루라 · 긴나라 · 마후가라 등의 대중들은 사리불이 부처님 앞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 받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크게 환희하여 뛸 듯이 기뻐하였다.
37. 그들은 제각기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석제환인과 범천왕 등도 수많은 천자와 함께 훌륭한 하늘옷과 하늘의 만다라꽃과 마하만다라꽃 등을 부처님께 공양하니 그 뿌린 하늘옷은 허공에 머문채 회전하였으며 하늘에서 백천만 가지의 악기가 허공에서 한꺼번에 울려 퍼지고 온갖 하늘꽃이 비오듯 내렸다.
강의
위의 경문은 사리불이 순조롭게 수기를 받아서 나중에 부처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든 이들이 축하를 해주고 공양을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보현십대행원가 중에서 다섯 번째의 수희공덕원이라 하여 남이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의 입장으로는 부처님께 동료 한 사람이 먼저 수기를 받는다면 당장에 시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의 광경은 사부대중뿐 아니라 아수라 · 긴나라 · 마후라가 등의 모든 대중이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대중이 따라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전부다 수기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성불이 곧 내 성불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시샘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었고, 남이 잘하는 것에 대해서 순수하게 따라서 기뻐해 주는 좋은 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경문
38. 그때 허공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은 옛날 바라나에서 처음 법륜을 굴리시고 이제 여기에서 또 가장 높고 훌륭한 법문을 설하시도다.
39. 그때 여러 천자들은 거듭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40. 부처님은 바라나에서
사제(四諦)의 법문을 가르치시사
모든 법이 오온의 생멸임을
분별하여 설하시고
지금은 또한 가장 묘하고
위없는 큰 법문을 설하시니
이 법은 매우 깊고 오묘하여
능히 받는 자가 많지 않으나
41. 저희들은 옛부터 오늘까지
세존의 설법 자주 들었으나
일찍이 이같은 깊고 미묘하고 높은
법문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께서 이 법을 설하시니
우리들은 다 따라서 기뻐합니다.
큰 지혜인 사리불이 이제
높은 수기를 받으시니
우리들도 또한 이와 같이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며
일체의 세간에서 가장 높은 무상사
(無上士)되오리다.
강의
위 경문에서 ‘가장 위없고 높고 심오하고 미묘하고 최상의 법문’이란 무엇인가? 그동안 앞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보통 인간도 다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과 비유로 극찬을 하더라도 인간이면 누구나가 다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의 씨앗만 잘 가꾸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잘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이 결국 법화경의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생명이자 바로 나의 진실한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내 진실한 생명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생명인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하면 아직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것이고, 불교적인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도 결국은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얼마만큼 확고히 믿느냐, 얼마만큼 깊이있게 알고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깨우쳐주고자 하는 것이고, 깨우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자꾸 여러 번 듣고 되뇌이고 경전을 읽음으로써 그것이 어느 날 나에게 와닿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이 있기까지에는 순전히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왜 꽃을 들었는가?’ 그것이 화두라면, 그 화두를 계속 들고 있다고 해서 계속 의심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결재 중에 화두를 들 때도 열 시간씩 시간을 짜서 참선을 하는데 열 시간씩 해봐야 일념이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한 시간 하나 열 시간 하나 안되기는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영원히 일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열 시간을 해도 일념이 안 될지라도 그래도 열 시간을 하는 사람에겐 열 시간하는 중에 어느 땐가 일념이 문득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고 또 모든 사람이 다 부처라는 이 이치도 이와 같아서 반복하는 가운데서 진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습이 반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선(禪)의 교재라는 ????서장(書狀)????에 보면 글자 두 마디로 표현됩니다. ‘생숙 숙생(生熟 熟生)’이라 설은 것(반야)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세속적인 무명)은 설게 한다는 뜻입니다. 설은 것을 익숙하게 한다는 것은 자꾸 익숙하게 될 때까지 반복하는 그 과정에서 가슴에 와닿는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 우주를 다 잊을 만큼 일념이 되면서 성성하고 적적한 일념이 되기는 참 어렵겠지만 그래도 반복을 하다보면 어느 날 열 시간중에 한두 시간에서 너댓 시간까지도 일념이 되는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육년간 수행을 했지만 어느 날 아침 샛별을 척 보는 순간 늘 보던 그 별이 부처님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확 열도록 하는 별이 된 것이죠. 그 별은 그날 처음 뜬 것도 아니었고 매일 매일 보던 그 별이었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가운데 손에 있는 작은 과일을 들여다 보듯이 확연하게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문
세존께서 이 법을 설하시니 우리들은 다 따라서 기뻐합니다.
큰 지혜이신 사리불이
이제 높은 수기를 받으니
우리들도 또한 이와 같이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며
일체의 세간에서 가장 높은
무상사(無上士) 되오리다.
42.불도는 불가사의하여라.
방편으로 근기따라 설하시니
우리들이 지은 복업과
지금 세상이나 과거세상에서
부처님 뵈온 공덕을
모두 불도에 회향합니다.
강의
여기에서 우리가 잘 분별해야 될 것은 불교의 본질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정이나 인정에 맞다고 하여 그것만이 불교라고 편안하게, 내 나름대로 안주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경지는 아니고 방편으로 시설해 놓은 중간 단계의 것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를 하든지 불사를 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잘먹고 잘사는 데다 모두 회향한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끝의 경문엔 ‘내가 지은 복업과 금세와 과거세에 닦은 것과 부처님을 뵈온 모든 공덕들을 내 개인적인 소망에 회향치 않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그 길에, 깨달음의 길에 회향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진짜 나를 위하는 것이지요. 이 한 구절에 회향의 바른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경문>
70 이때 문수사리 보살은 대중 가운데서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71 내가 생각하니 지난 세상
무량한 오랜 겁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은 일월등명불이시라.
세존께서 설법하시어
많은 중생 건지시고
무수억 보살들을 불지혜(佛智慧)에 들게 하심이라.
그 부처님 출자전에
낳으신 여덟 왕자는
대성(大聖, 父)의 출가함을 보고
또한 범행(梵行)을 따라 닦음이라.
72 그때 부처님이 대승을 설하시니
『부량의경(無量義俓)』이라
모든 대중들 속에서
널리 분별하시니라.
부처님이 이경을 설하시고는
곧 법좌 위에서
가부좌로 삼매에 드시니
이름은 무량의처 삼매라.
73 하늘에선 만다라 꽃비 내리고
하늘북은 저절로 울리며
모든 천룡 귀신들은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일체의 모든 불국토가
즉시에 크게 진동하며
부처님이 미간의 광명을 놓으사
희유한 일이 나타남이라.
74 그 광명은 동방으로
일만팔천 국토를 비추시어
일체 중생의
생사 업보처를 보이고
모든 불국토는
많은 보물로 장엄되어서
유리와 파리색으로 보임은
부처님의 광명 때문이며
혹은 여러 천상 인간들과
용, 신장, 야차들과
건달바, 긴나라들이
각기 부처님께 공양함을 봄이라.
75 또한 모든 여래를 보니
자연히 성불하시어
몸은 금산(金山)같이
단엄하기가 매우 미묘하여
맑은 유리속에서
진금상(眞金像)을 나타냄과 같으며
세존이 대중속에서
깊은 법의 뜻을 펼치시니
낱낱의 불국토마다
성문(聲聞) 대중이 수 없음이라.
이는 부처광명이 비춤으로 하여
저들을 모두 볼 수 있음이라.
76 혹은 어떤 비구들은
산림 속에 있으면서
정진하고 정계(淨戒) 지키기를
맑은 구슬을 보호하듯 하며
또한 모든 보살을 보니
보시, 인욕 등을 행하되
그 수가 항하사 같음을 봄은
부처 광명이 비추신 때문이라.
또한 여러 보살들을 보니
모든 선정에 깊이 들어
신심(身心)이 고요히 부동함으로써
위없는 도(道)를 구하며
또한 모든 보살들을 보니
법의 적멸상(寂滅相)을 알아서
각기의 국토에서
설법하여 불도를 구함이라.
77 그때 사부 대중은
일월등명불께서
큰 신통력 나투심을 보고
그 마음이 환희하여
각기 서로 묻기를
이 일은 무슨 인연일까 함이라.
78 천상, 인간이 받드는 세존께서는
그때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묘광보살을 찬탄하시되
너는 세간의 눈이 되어서
일체가 귀의하고 믿으리라.
능히 법장을 받들어 가지며
내가 설법한 바와 같이 하면
오직 너는 능히 증들ㄱ하여 알리라.
세존께서 이렇게 찬탄하여
묘광보살을 환희케 하심이라.
79 이 『법화경』을 설하시되
육십 소겁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설하신 강장 묘한 법을
이 묘광 법사가
다 능히 수지 하심이라.
80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어
대중들을 기쁘게 하신 뒤
이윽고 그날에 곧
천상, 인간 대중에게 이르시되
제법 실상의 뜻을
이미 너희를 위해 설햇노라.
나는 이제 오늘 밤중에
열반에 들리니
너희는 일심으로 정진하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모든 부처 만나기 어려워서
억 겁에나 한 번 만나리라.
세존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저마다 슬픔을 머금고 “부처님 멸도
하심이 어찌 이리 빠른가?“함이라.
81 성주(聖主)이신 법왕께서
무량 중생을 위로하시는데
내가 만약 멸도할지라도
너희는 근심과 두려워 말라
여기 덕장(德藏)보살이
무루(無漏)의 실상(實相)에
마음이 이미 통달하여
이 다음에 부처가 되리니
이름은 정신(淨身)이며
또한 무량 중생을 제도하리라.
82 부처님이 그 밤에 멸도하시니
섶이 다 타서 꺼지듯 하였으며
모든 사리는 분포하여
무량한 탑 세우고
비구, 비구니 등
항하사처럼 많은 수가
다시 더욱 정진하여
위없는 도를 구하였음이라.
83 이 묘광 법사는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받들어 가지고 팔십 소겁 동안이나
널리 『법화경』을 폄이라.
이 여덟 왕자는
묘광 법사에게 교화받고
무상도(無上道)에 견고히 하며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뒤에
대도(大道)에 수순하고 행하여
잇따라 부처를 이루어서
차례로 수기(授記)하니
최후의 천중천(天中天, 佛)은
그 이름 연등불이시라.
모든 신선의 스승으로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시도다.
84 이 묘광 법사에게
그 때 한 제자가 있었으니
마음이 항상 게으르고
명리(名利)에 탐착하여서
명리 구하실 싫어하지 않아
자주 명문집에 가서 놀며
익히고 외움을 등한히 하여
다 잊어버려 통달하지 못하니
이 인연으로 이름을
구명(求名)이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많은 선업을 행하여
수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큰 도를 수순하게 행하여
육바라밀을 갖추어서
석가 세존을 친견하니
그 후에 부처가 되어
미륵이라 부르리라.
모든 중생 제도하되
그 수는 한량이 없으리라.
85 저 부처님 멸도 후에
게으른 자는 그대요
묘광 법사라는 이는
곧 지금의 이 몸이라.
내가 본 일월등명뷸의
옛날 상서로운 빛도 이 같으니
이로서 지금의 부처님도
『법화경』을 설하려 함을 알겠도다.
86 지금 모습이 옛 상서와 같음은
제불(諸佛)의 방편이시라.
이제 부처님 광명을 놓으심은
실상의 뜻을 밝히려 하심이니
모든 이들이여! 마땅히 알지라.
합장하고 일심으로 기다릴지어다.
부처님은 법의 비를 내리어
구도자를 충족케 하시리니
삼승(三乘)을 구하려는 사람들로서
만약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부처님이 마땅히 꿇어 없애어
모두 남김없이 하리라.
<강의>
여기서 잠시 살펴 볼 것은 문수보살이 보살이면서 연등불을 가르쳤지요. “문수보살은 과거 천불(千佛)의 스승이다”라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보살이면서 연등불의 스승이라는 점이, 부처님의 지혜를 대지문수라 하는데 높고 높은 부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것이 문수보살이고 문수는 부처님의 지혜를 어깨에 메고 출현한 모살입니다.
그러나 미륵보살은 구명보살로서 과거에 『법화경』을 수없이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부처님 앞에서 그런 상서를 보고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문수에게 상서의 징조에 대해 묻게 되었지요. 결국 그 의혹의 발단으로 『법화경』이 설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위리 중생들도 모두 무시이래로 법화경의 절대적인 진리, 묘법이라는 최고의 진리속에서 무한한 세월 동안 이미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서두에도 그런 말을 했지만 우린 알든 모르든 이미 묘법 속에, 제법실상의 이치 속에 함께 살아왔음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껏 미혹한 상태에서 있었지요. 이도 또한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미혹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보다 더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무한한 과거생을 실상 묘법이라고 하는, 소위 절대의 진리 속에서 함께 살아 왔었다는 것입니다.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 ) 가리(可離)면 비도(非道)〔老子〕.”라는 말이 있지요.
도(道)라는 것은 한순간도 우리의 삶과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떠나 있는 것이라면 도(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간에 상관없이 도는 한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떠나있는 것이라면 우리와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고 취할 바도 없으며 귀한 것도 아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가 정진하는데 중요한 자세가 되겠습니다.
『법화경』은 이런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지, 경(經)은 교학에서 그냥 하는 소리려니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곤란합니다.
여기에서 미륵보살의 경우를 보십시오. 한순간도 『법화경』이 미륵을 떠나있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이러한 뜻으로 이해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고 봐집니다.
이렇게 해서 통서와 별서는 일단 끝나고 「방편품」에 들어가겠습니다
◎ 경문
10. 그때 세존께선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11. 부처는 헤아리기 어려움이라 모든 천상이나 인간과 일체중생의 무리는 부처를 능히 알지 못하리라. 부처의 힘과 무소외(無所畏)와 해탈과 모든 삼매와 그리고 부처님의 모든 법을 능히 측량할 자 없느니라.
12. 본래 무수한 부처님 따라 구족하게 행한 모든 도(道)인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은 보기도 어렵고 요달키 어려우나 한량없는 억겁에 이 모든 도를 닦아 마치고 도량에서 과(果)를 얻어 이룸은 내 이미 다 알고 보았노라.
13. 이와 같은 크신 과보와 가지가지 성(性),상(相)의 뜻은 나와 시방세계 부처님만이 능히 이 일을 아느니라. 이법은 가히 보일 수 없어서 말과 모양이 적멸함이니 다른 모든 중생류로서는 능히 알지 못하리라. 허나 모든 보살들 가운데 믿음이 견고한자는 제하노라. 모든 부처님 제자들이 일찍이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일체의 번뇌가 이미 다하여 정각을 이룬 몸(最後身)에 머무른 이 같은 모든 사람들도 그 힘으로는 감당치 못하리라.
14. 가령 이세간에 가득 찬 사람이 다 사리불과 같더라도 그들이 함께 생각을 다하여도 부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으면 시방에 가득한 모든 사람이 다 사리불과 같으며 다른 제자들이 또한 시방에 가득하여서 함께 생각할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리라.
15 벽지불의 날카로운 지혜와 번뇌가 없는 최우신을 얻은 이가 또한 시방세계에 가득하여 그 수효가 대숲같이 많더라도 그런 이들이 모두 일심으로 무량한 억겁 동안을 부처의 참된지혜 생각하려 해도 작은 부분조차 알 수 없느니라.
16. 새로 발심한 보살이 수 없는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뜻과 이치 요달하며 또한 설법을 잘 하는 이가 벼. 삼. 대. 갈대와 같이 사방세계에 가득하여서 일심과 묘한 지혜로써 항하사겁 동안이나 다 함께 사랑 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알 지 못하니라.
17. 불퇴전의 모든 보살들이 그 수가 항하사와 같이 하여 일심으로 생각하고 구할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리라.
18. 또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누(漏)가 없는 불가사의한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내가 이미 모두 갖추었으니 오직 내가 이 상(相)을 알고 시방의 부처님도 그리하리라.
19.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님 말씀은 다름이 없나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마땅히 큰 믿음의 힘을 낼지니라.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한 후에 요긴한 진실을 설하느니라.
20. 모든 성문 대중과 연각을 구하신 이에게 이르노니 내가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게 하리라.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삼승의 가르침을 보이시지만 중생들이 곳곳에 집착하므로 이끌어 내어 벗어나게 함이로다.
21. 이때 대중가운데는 성문들이 있었는데 누(漏)가 다한 아라한인 아야교진여 등 천이 백인과 성문, 벽지불의 마음을 낸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가 제각기 이런 생각을 하였다.
22. 지금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은근히 방편을 칭찬 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시되 부처님이 얻은 법은 매우 깊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말씀의 뜻은 알기 어려운지라 일체의 성문 벽지불들은 능히 미칠 수 없다고 하시는가.
23. 부처님께서 한 해탈의 뜻(一解脫義)을 설하시면 우리들도 또한 이 법을 얻어서 열반에 이를것이데 지금 말씀하시는 뜻은 알 수 없도다.
24. 그때 사리불이 사부대중의 의심함을 알고 자기도 또한 알지 못하여 부처님께 사뢰었다.
25.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제일 방편이 매우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법이라고 은근히 칭찬하십니까. 저는 옛부터 일찍이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26. 지금 사부대중도 다 함께 의심하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이 일을 자세히 설해 주십시오,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매우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법이라고 은근히 찬탄하십니까.
27. 이때 사리불이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28. 지혜의 태양 거룩하신 세존께선 오랜만에 이 법을 설하시는데
29.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 십력과 사무외와 삼매와 선정과 해탈 등의 불가사의한 법을 얻었지만 도량에서 얻은 바 이법은 능히 물어볼 사람 없었고, 내 뜻은 측량키 어려워서 또한 묻는 사람 없었다. 하시고 묻는 이 없이 스스로 설하고 행하신 도를 찬탄하시되 매우 깊고 미묘한 지혜는 모든 부처님이 얻으신 바이라
30. 번뇌가 다한 아라한들과 열반을 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모두 의심에 떨어졌거늘 세존은 왜 이런 말씀하십니까. 연각을 구하는 자들인 비구 비구니와 모든 하늘 용 귀신과 내지 건달바 등이 서로 보고 망설이면서 양족존을 우러러 봅니다. 이일은 무슨 까닭인지 원컨대 부처님께서 해설해 주소서.
31. 모든 성문들 중에서 저를 으뜸이라 말씀하시지만 지금 저의 지혜로서는 의혹을 능히 요달치 못 하겠습니다. 이것이 최고(구경)의 법입니까. 행할 바의 도(道) 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 받은 제자들은 합장하고 우러러 기다리오니 원컨대 미묘한 음성으로서 지금 실답게 말씀해 주소서.
32. 모든 하늘과 용 귀신 등 그 수효가 항하의 모래 같으며 부처를 구하는 보살들은 팔만인이나 되며 또한 여러 만 억 구토에서 전륜 성왕들이 이르러 와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합장하고 구족한 도를 듣고자 합니다.
33. 그때 부처님께서 사라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다시 설할 것이 아니니 만일 이 일을 말하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이 다 놀래고 의심하리라.
◎ 강의
법화경 을 설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부처님의 초기교설에서는 마음의 번뇌를 다 제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이 중생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하였습니다(소승교). 그래서 성문 연각 아라한을 뛰어넘어 부처님같이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기가 성숙하고 수준이 높아 졌을 때 성불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그 시기가 바로 『법화경』을 설하게 된 때 입이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지만. 초기엔 할 수 없이 지붕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통해야만 올라갈 수 있으므로 사다리라는 방편의 물질을 가설해 놓은 것 같이, 초기의 성문 연각의 방편을 통해서 마음을 깨닫는 성불의 경지가 우리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설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자기의 지식이나 소견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집착하고 안주해서 버리기를 싫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얻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이 거듭 거듭 사양하시며 '놀라고 믿지 않고 의심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 경문
34. 사리불이 거듭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컨대 설하소서, 설하여 주소서. 왜냐하면 여기 모인 무수한 백천만억 아승지 중생들은 일찍이 여러 부처님을 친견하여 모든 근기가 매우 영리하여 지혜가 명료하여 부처님의 설하심을 들으면 능히 공경하고 믿으리이다.
35. 그때 사리불은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위없이 존귀하신 법왕이시여 염려치 말고 오직 설하소서. 여기 모인 무량한 대중은 능히 공경하고 믿을 자들입니다.
36.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만두어라. 사리불아 만약 이 일을 말하면 일체세간의 천, 인, 아수라들이 다 놀라고 의심하여 증상만의 비구는 큰 구렁텅이에 떨어지리라.
37. 그때 세존께선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38. 그만 두자 그만 두자 설할 것이 아니니 내 법은 미묘하고 생각키 어려워, 모든 증상만의 사람들은 듣고 필히 공경하고 믿지 않으리라.
39. 그때, 사리불이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컨대 설하소서 설하여 주소서 지금 여기 모인 저와 같은 백천만억 사람들은 세세생생에 이미 일찍이 부처님으로부터 교화를 받았으니 이 사람들은 반드시 공경하고 믿어서 인생의 긴긴 밤에 안온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40. 그때 사리불은 이 뜻을 거듭 펴라고 게송으로 사뢰었다. 위없는 양족존 이시여 원컨대 제일의 법을 설하소서. 저는 부처님의 장자이니 오직 분별하여 설하소서. 여기 모인 무량한 대중은 이 법을 공경하고 믿으오리다.
41. 부처님은 일찍이 세세에 이러한 무리들을 교화하여서 다 일심으로 합장하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저희들 천이백 대중과 그 밖의 부처를 구하는 자들에게 원컨대 이러한 대중을 위해 오직 분별하여 설하여 주소서. 우리들이 이 법을 들으면 곧 환희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 강의
여기에서 다시 과목을 펼쳐보면. 정종분(正宗分)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간략히 삼(三)을 열어서 일을 나타내는 것(略開三願一)이고, 두번째는 널리 삼(三)을 열어서 하나를 나타내는 것(廣開三願一)이 있습니다. 개삼현일(開三願一) 이란 성문. 연각. 보살등 삼승의 문을 열고 나서면 부처라는 하나의 길이 나오는데 그것을 일승(一乘)이라 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법설주(法設周)와 비설주(譬設周) 인연주(因緣周)라하여 적문중에서도 중요한 골격인 정종분에서 설하여지고 있습니다. 법설주는 청법대중이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상관없이 법을 그대로 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분이 있는데 그는 유명한 사리불 이지요. 이렇게 법설주에서 깨달은 사람을 상근기라 합니다. 비설주는 법설주에서 깨닫지 못하는 중근기의 중생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개삼현일의 도리를 설하는 것입니다. 인연주 는 비설주에서도 깨닫지 못한 하근기의 중생을 위하여 설함을 뜻합니다.
그 밑의 과목을 보면 정설(正設), 영해(領解), 술성(術成), 수기(授記)로서 반복되어 있는데. 제일 수승한 사리불에게 설한 것이 정설(正設) 입니다. 그리고 사리불이 이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을 영해(領解)라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제자들이 잘 이해했는가 들어보시고 인정해 주는 것을 술성(術成)이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명(佛名)을 주고 수기(授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식으로 비설주와 인연주가 펼쳐지는데 43번 부터가 정설 부분입니다. -계속-
<경문>
20. 그때 미륵보살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지금 세존께서 이런 신통변화의 모습을 나타내시니 무슨 인연으로 이런 상서가 있는 것일까? 지금 불세존이 삼매에 드셨는데 이는 불가사의하고 희유한 일이라. 마땅히 누구에게 물어야 하며 누가 능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21.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문수사리 법왕자는 일찍이 과거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공양해 왔으므로 반드시 이런 희유한 모습을 보았으리니 내 이제 이 일을 물어 보리라."
22. 이때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여러 천룡귀신들도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런 부처님의 광명과 신통의 모습을 이제 누구에게 물어야 알 것인가?"
23. 이때 미륵보살이 자기 의혹도 해결하고 또 사부대중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여러 천룡 귀신들의 마음도 헤아려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상서로운 신통의 모습이 있으며, 큰 광명을 놓아 동방의 일만팔천 국토를 비추어서 부처님 세계의 장엄들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까?"
24. 이에 미륵보살은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물었다.
<강의>
앞의 질문을 시적으로 운을 맞추고 곡조를 붙여서 거듭 묻습니다. 그래야 대답하는 이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극히 인간의 상식에 가까운, 우리 인간의 성정을 결코 떠나서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경전에서만 있는 이야기로 봐서는 안 되고, 우리의 일상사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로 끌어내려서 우리 곁에 두고 생각하는 경전으로 봐야 될 줄 믿습니다.
경은 경, 나는 나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래서는 안 되고, 특히 수행인들은 경전의 가르침,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 일상생활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라고 마음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미륵보살이 그 물음을 거듭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게송을 읊습니다. 앞의 내용과 같지만 더 세세하게 묻고 있습니다.
<경문>
25. 문수사리여,
도사(導師 ; 佛)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미간 백호의 큰 광명을 널리 비추시어 만다라꽃 만수사꽃으로 비 내리시며 전단의 향기로 중생마음 즐겁게 하시니 이 인연으로 땅은 장엄되고 청정하여서 이 세계는 여섯 가지로 환희에 떨리니 이를 본 사부대중은 모두 다 기뻐하고 몸과 생각이 상쾌하여서 미증유(未曾有)를 얻었습니까?
26. 미간의 광명이 동방을 비추시매 일만팔천 국토가 다 금빛과 같아지고 아비지옥으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중의 육도 중생들이 생사의 나아갈 바와 선악의 업연으로 좋고 나쁜 과보 받음을 여기에서 다 보게되며
27. 또한 여러 부처님과 성주사자(聖主師子)를 보니 경전을 연설하시되 미묘하기 제일이며 그 음성 청정하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든 보살 가르치시길 수없는 억만이라 범음(梵音)이 깊고 묘하여 사람들이 즐겨 듣게 하시며
28. 각각의 세계에서 바른 법을 설하실제 갖가지 인연과 한량없는 비유로써 불법을 밝게 비추어 중생을 깨닫게 하시되 어떤 사람 고통속에서 생로병사 싫어하면 열반을 설하시어 그 괴로움 끊게 하고 어떤 사람 복있어 일찍이 부처님께 공양하며 수승한 법 구하려하면 그를 위해 연각(緣覺)을 설하시고 만약 어떤 불자 가지가지 행을 닦아서 위없는 지혜 구하면 청정한 도(道)를 설하시도다.
29. 문수사리여, 내가 여기 있으면서 이러한 천억 가지의 일을 보고 들으니 이같은 많은 일을 이제 간략하게 설하리라.
30. 내가 저 국토의 모래같이 많은 보살을 보니 갖가지 인연으로 불도를 구하는데 보시를 행함에 금 은 산호와 진주 마니며 자거 마노와 금강과 값진 보배와 노비와 수레들 보배로 장신된 연과 가마로 즐겁게 보시하여 불도(佛道)에 회향하고 이것[承]이 삼계(三界)에서 제일이라 부처님들이 찬탄하기를 원함이라. 혹 어떤 보살은 네 말이 끄는 보배 수레와 난순화개(欄楯華蓋)로 장식하여 보시하며
31. 또 어떤 보살은 몸뚱이와 손발과 처자까지 보시하여 위없는 도를 구하고 어느 보살은 머리와 눈 신체를 기브게 바쳐서 부처지혜 구함을 보겠음이라.
32. 문수사리여, 내가 보니 여러 왕들이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위없는 도를 묻고 좋은 국토와 궁전 신하 시녀들을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법복을 입으며
33. 혹 어떤 이는 비구가 되어 고요한 데 홀로 앉아 경전읽기를 즐겨하며 또 어느 보살을 보니 용맹정진하기를 깊은 산에 들어가 불도를 사유하며 또한 욕심을 떠나 항상 고요한 데 머물면서 깊은 선정을 닦아서 오신통(五神痛)을 얻으며 어떤 보살을 보니 편안히 좌선하고 합장하여 천만 가지 게송을 모든 법왕(法王)을 찬탄함이라.
34. 또 어떤 보살은 지혜가 깊고 뜻이 견고하여 부처님께 법을 묻고 듣는 대로 간직하며 어느 불자를 보니 선정 지혜 구족하여 한량없는 비유로써 대중 위해 설법할 제 기꺼이 법을 설하여 모든 보살을 교화하고 마의 군사 격파하여 법고를 두드리네.
35. 어떤 보살을 보니 고요하게 편히 앉아 천룡(天龍)이 공경해도 기뻐하지 않으며 어느 보살은 숲속을 자유로이 거닐 때와 지옥의 고통을 같이 여겨 불도에 들게하고 어느 불자를 보니 일찍이 잠자지 않으며 숲속을 경행하여 부지런히 불도를 구하며 또한 계(戒)를 다 갖추어서 위의가 무결하여 구슬같이 깨끗하게 불도를 구함이라.
36. 어느 불자를 보니 인욕의 힘이 있어서 오만한 사람이 꾸짖고 때려도 모두 다 능히 참고 이로써 불도를 구함이라.
37. 또 어떤 보살은 온갖 유희를 즐기는 어리석은 권속을 떠나서 지혜인과 친근하며 일심으로 어지러움 없애고 산림 속에서 모든 생각 거두어 억만 년 동안 이렇게 불도를 구함이라.
38. 어떤 보살은 좋은 반찬과 음식과 백 가지 탕약으로 부처님과 스님들께 드리며 훌륭한 의복과 그 값이 천만 량의 것과 값도 모를 좋은 의상으로 부처님과 스님께 드리며 천만억 가지의 전단향목과 보배로 된 정사(精舍)와 여러 가지 침구들을 부처님과 스님께 바치며 꽃과 열매 무성한 아름다운 동산 숲과 샘물이 흐르는 맑은 못으로 부처님과 스님께 보시하며 이렇게 갖가지로 미묘하게 보시를 하되 싫어함이 없이 환희로써 위없는 도를 구함이라.
39. 혹 어떤 보살은 적멸법(寂滅法)을 설하되 갖가지 가르침으로 수없는 중생을 가르치며 어느 보살은 모든 법의 성품을 관하되 두 모양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음을 보며 어느 불자를 보니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어서 이 미묘한 지혜로써 무상도를 구함이라.
40. 문수사리여, 또 어떤 보살은 부처님 멸도 후에 사리에 공양하며 어떤 불자는 여러 탑묘[寺]를 조성할제 수없는 항하사같이 하여 국토와 세계를 장엄하기를 보탑의 높이가 오천(五千) 유순이며 넓이나 길이가 똑같이 이천(二千) 유순이라. 각각의 탑묘마다 천 개의 당번이 휘날리고 진주로 꾸며진 휘장에서 보령소리 울려오니 모든 천룡과 신(神) 인(人) 비인(非人)들이 향과 꽃과 기악으로 항상 공양함이라.
41. 문수사리여, 여러 불자들이 사리에 공양하려고 탑묘를 장엄하니 그 경계가 자연히 특수하게 아름다워서 천상의 수왕(樹王)이 꽃 만발한 듯함이라.
42. 부처님이 한줄기 광명을 놓으사, 나와 모인 대중들은 이 국토의 갖가지 특수하고 미묘함을 보게되니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과 지혜는 참으로 희유함이라. 한줄기 청정한 빛 놓으시어 무량국토 비추시니 우리들은 이를 보고 미증유를 얻었습니다.
43. 불자인 문수여, 우리들의 의심을 풀어주소서 사부대중이 당신과 나를 우러러 봅니다. 세존께선 무슨 일로 이런 광명을 놓으십니까? 불자여 대답하여서 의심풀어 기쁘게 하소서 무얼 이롭게 하시려고 이런 광명을 펼치십니까?
44.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얻으신 미묘한 법을 여기에서 설하려 하십니까? 수기하려 하십니까? 모든 불토(佛土)가 온갖 보배로 장엄됨을 보이고 모든 부처님을 보이심은 작은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45. 문수여, 마땅히 아소서. 사부대중과 천룡과 신들이 당신을 우러르니, 무엇을 설하려 하심입니까?
이렇게 게송으로 자세하게 묻고 있는데 부처님의 광명 속에서 나타난 미묘한 일들 중에는 중생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수행법 등이 쭉 소개되어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러한 수행법들을 우리의 수행과 연결시켜서 눈여겨 보면 좋겠습니다.
강의
(지난달 경문 43.44.45에 대한 강의)
도(道)는 무엇이고, 깨달은 마음의 세계는 무엇인가? 경전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성공의 비결을, 행복의 비결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몹시 좋아하는데 그 복은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비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참으로 좋고 바람직한 일이기에, 이렇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석가모니도 그 행복을 찾아서 육 년 고행을 하셨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도 그 행복의 소재를 깨달은 것이고, 성공의 비결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가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성공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행복을 성취하신 부처님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흉내내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불교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생로병사 때문에 출가하여 생로병사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다른 말로 바꾸면 사실 불행하고 불안했어요. 마음이 편치 않아 집을 뛰쳐나와서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하였다는 것은 불행하고 불안한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졌다는 말입니다.
그 편안함은 진정한 편안함이며 한 순간의 편안함이 아니라, 한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진짜의 편안함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부처님께서 하고 싶은 일을 성취한 것이고, 그분의 인생이 납월 팔일 비로소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의 소재는, 부처님의 성공의 소재는 어디 있을까요?
결로부터 말씀드리자면 바로 자기 자신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샛별을 보고 깨달았지만, 샛별로부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행복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성공을 얻어냈지,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다 하나, 보리수나무가 행복이나 편안함을 준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원리는 알고 보면 간단하나, 우리는 습관과 상식대로 자꾸 밖에서 구하려고 헤매기 때문에 제대로 찾아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 행복한 것, 이러한 성공은 결국 내 자신 속에 있더라 하는 것은 만고에 도저히 바꿀래야 바꿀 수 없는 철칙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육 년 고행 끝에 깨달은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앉은자리를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상태이기에, 자기 자신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보고(寶庫)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힘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빌고 기도 올리는데, 그것은 맞는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부처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거든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는 차별이 없는 것이어서, 무엇이라 이름 붙여도 좋습니다. 무엇이라 이름 붙이더라도, 이는 ‘동일한 하나’라는 가르침이고, 이것이 불교의 최대 가르침이고 최고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에게 빈다는 것은 나에게 빈다는 것이고, 진실한 내 생명, 저 깊은 내 마음 자리, 부처인 마음자리, 부처인 나의 진실생명에게 비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여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에게 다 맡겨 버리세요. 내 성공도 행복도, 뭐든지 전부 내 진실생명인 부처님께 맡긴다면 성취하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로부터 출발해서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회향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못해, 나는 안 돼, 난 할 수 없어.’라고 하는 말은 결국 나를 모독하는 일이고 더 나아가 부처를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이 아닙니까? 부처님을 그렇게 모독하고는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불교의 궁극인 부처님의 성도를 이야기하려니까, 이 자리에선 도(道)에 대한 본질을 밝혀야지 다른 방편을 이야기할 계제가 아닌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는 대목도 부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드신 것인데, 이를 보면 성도의 궁극의 의미와 통하기 때문에 장황하게 성도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부처를 믿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나의 행복과 내가 얻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면 첫째로 자기 자신을 모독하는 일이 곧 부처님을 모독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먹구름 낀 부정적인 시각, 곧 ‘나는 못 해,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처님의 진실생명을 외면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방방곡곡의 사찰에 계신 부처님께 천 배 만 배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불성(佛性)에 하는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어 써야 한다는 것이 성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경문
46.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원컨대 사부대중을 위하여 그 인연을 설하셔서 의심을 떠나게 하소서.
47.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언사의 방법으로 설한 것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함이었다’고. 이 모든 설하심은 다 보살들을 교화하기 위함이니라. 그러나 사리불아, 이제 다시 비유로써 이 뜻을 밝히리니 모든 지혜인들은 이 비유로서 알게 되리라.”
48. 사리불아, 어떤 나라의 한 마을에 큰 장자가 살았는데, 그는 매우 늙었으나 재물은 한량이 없어서 전답과 가옥과 시종들이 많았느니라.
49. 그 집은 넓고 컸으나 대문이 하나 뿐이었는데, 그 안에는 일백 명 이백 명 내지 오백 명이 어울려 살고 있었느니라. 집과 누각은 헐고 낡았으며 담벽은 퇴락 하였고, 기둥뿌리는 썩고 대들보는 기울어 몹시 위태하였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한꺼번에 불이 나서 집을 태우고 있었느니라.
50. 장자의 여러 아이들은 그때 열 명 스무 명 혹은 서른 명이 그 집 속에 있었느니라.
51. 장자는 사방으로부터 큰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52. 나는 비록 불타는 집에서 무사히 나왔으나, 아이들은 불난 집 속에서 즐겁게 노느라고 이를 알지도 못하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으니 불길이 몸에 닿으면 고통이 극심할텐데도 걱정 없이 나올 생각도 못하는구나.
53. 사리불아, 이 장자는 또한 내 몸과 손에 힘이 있으니 마땅히 옷상자나 책상에 담아 집으로부터 나오리라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이 집은 문이 오직 하나이고 협소하다고 생각하였느니라.
54. 모든 아이들이 어리고 아직 철이 없어서 노는 것에 팔려 있다가 자칫 떨어지면 불에 타게 될 것이니, 내가 마땅히 그들에게 불난 일이 얼마나 겁나고 두려운가를 말하리라. 또한 이 집은 이미 불타고 있으니 불타는 피해를 입지 않도록 빨리 나오게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서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빨리 나오라.”
강의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강 짐작하실 것입니다. 불타는 집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일 것이며, 우리들의 상식이고, 우리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경문
55. 아버지는 비록 측은히 여겨 좋은 말로 간절히 달래었으나, 아이들은 즐겁게 노느라고 좀체 믿으려 하지 않고, 놀래지도 않으며 끝내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더구나 무엇이 불이며, 무엇이 집이고, 어떤 것이 목숨을 잃는 것인지도 모르고 다만 동서로 달음질치면서 아버지를 쳐다볼 뿐이었느니라.
강의
우리도 불교를 만나 절에 드나들면서 부처님의 안목으로 설하신, ‘인생은 어떤 것이다. 세상은 어떤 것이다.’라는 법문을 수없이 듣지마는 그저 들을 때뿐이지요. 아무리 불난 집에서 나가라고 해도, 무엇이 불인지 어디가 집인지 무엇이 목숨을 잃는 것인지 모르고 다만 그런 말을 하시는 부처님 얼굴만 멀끔히 쳐다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경문
56. 그래서 장자는 곧 이런 생각을 하였느니라. 이 집은 이미 큰불에 타고 있으니 나와 아이들이 만약 이때 나가지 않으면 필시 불에 타게 되리니 내가 지금 방편을 써서 아이들과 함께 이 피해를 모면하리라.
57. 아버지는 아이들이 전부터 좋아하는 갖가지 진기한 장난감이라면 반드시 좋아할 것을 알고서 말하였느니라. “너희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갖기 힘든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지금 갖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리라.”
강의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집이랑 성을 만들며 놀고, 또는 상점에서 산 장난감을 애지중지하며 좋아합니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참 우스운 일이나, 그들로서는 아주 귀중한 것이어서 어쩌다 잘못되어 침범이라도 당하면 싸우고 심지어 코피가 터지는 사태까지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聖人)들의 눈으로 보면 우리 어른들도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울고불고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쌓고 짓던 모래성도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나서 어머니가 부르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른들도 지금은 온갖 내 삶의 모든 가치를 그것에 걸었던 일들도, 인생의 황혼이 되면 대지의 어머니가 부르는 데도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총총히 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는 아이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이 법화경의 비유가 얼마나 적절하고 현실적인 것입니까? 그래서 이 불난 집의 비유가 유명한 것이지요.
경문
58. “지금 문밖에는 가지가지의 양이 끄는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가 있는데, 아주 놀기 좋으니 너희들이 이 불난 집에서 빨리 나가면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
59. 그때에 아이들은 아버지가 말씀하신 진기한 장난감이 꼭 원하던 것이었으므로 각기 마음이 다급해서 서로 밀치고 앞을 다투어 불난 집에서 뛰어 나갔느니라.
60. 이때 장자는 아이들이 무사히 탈출하여 모두 네거리에 나와 앉아 있고, 다시는 장애가 없음을 보고는 그 마음이 태연하여 기쁘고 즐거웠느니라.
61. 이때 아이들은 각각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먼저 주신다던 좋은 장난감인 양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를 지금 주십시오.”
62. 사리불아, 그때에 장자는 모든 아이들에게 각각 똑같은 큰수레를 주었느니라.
강의
우리는 진리의 문중에 들어왔으므로 이 대목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 장자는 애초에 양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는 있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수레가 있다고 하면 아이들이 믿지도 않을뿐더러 따르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작은 양 수레 등으로 불난 집에서 나오게 한 뒤 크고 훌륭한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똑 같이 나눠준 것입니다.
이제 무엇이 방편이고, 무엇이 결정적인 소리이며, 진짜 부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었던 결정적인 마지막 가르침, 최고의 가르침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새겨야 합니다.
경문
43.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 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다시는 의심 없이 친히 부처님 앞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았습니다.
44. 그러나 여기의 천 이백 명의 마음이 자재한 사람들은 옛날 배우고 있을 때 부처님이 항상 가르치시길 ‘나의 법은 능히 생로병사를 떠나고 마침내는 열반하리라.’ 하셨기에
45. 배우는 사람이나 다 배운 사람도 각자 스스로 나라고 하는 소견과 있다 없다는 소견만 떠난다면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세존 앞에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듣고는 다 의혹에 떨어졌습니다.
강의
여기서 듣지 못했던 것이란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그런 뜻의 말씀을 안 했는가 하면 부처님이 불법을 펴기 시작한 초기엔 사람들이 당장 생로병사 때문에 허덕이고 있으므로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이야기 하다보니까 괴로움을 소멸해서 편안하게 열반에 들라고 고집멸도를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인 성숙을 기다려 최종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인 ‘부처님같이 살아라. 보살같이 살아라.’인 것이지요.
그러면 부처님 같이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라고 하면 우린 얼핏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진동하는, 우리가 잘 볼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을 연상할 수 있는데 그런 것만은 절대 아닙니다. 불교는 바로 인생 그 자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 말고는 달리 도(道)란 없는 것이기에, 옛 도인들이 고생 고생해서 깨닫고 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노라.’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살아가는 이치지요.
또는 ‘안횡비직(眼橫鼻直)이라.’하여 사람이면 누구나 눈은 가로로 째져있고 코는 세로로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기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보다 더 간단하고 더 진실한 말씀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을 관세음보살처럼 한 순간만 실천한다면 그 순간을 우리는 보살로서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한순간 한순간이 겹치고 익숙해지고 그런 시간이 연장된다면 그 인생은 보살의 인생이 되고 부처님같이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외에 더 진실하고 단순한 원리는 없고 이것이 바로 불교적인 이치입니다.
위의 경문에서 사리불이 대중들을 대신해서 의심을 일으킨 것은 그 당시 천이백 대중의 의심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평소에 불교에 대한 의심을 대변해서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로서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성도한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사신 그 일이 부처인 것입니다. 누가 부처님께 길을 물었다면 대충대충 가리켜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그대로 따라가면 틀림없이 찾고자 한길이 분명히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눈먼 제자 아나율이 ‘누가 나를 위해 복을 지을 것인가?’하고 바늘 귀를 들고 중얼거릴 때 지나던 부처님께서 ‘아나율이여, 내가 그대를 위해서 복을 짓고 싶다’하고 바늘과 실을 받아들고 바늘귀를 꿰니 아나율이 깜짝 놀라서 ‘아니 이 세상에 부처님같이 복 많은 이가 없는데 이렇게 작은 복을 또 지으려 하십니까?’하고 말하였지요. 그때 부처님께선 ‘그런 말하지 마라, 아나율이여.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복 짓기 좋아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하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꼭 복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런 작은 일이라도 솔선 수범하여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그 삶이 부처인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하늘에 오르고, 온갖 신통변화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또 부처가 되는데 어떤 단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한 순간 한 순간 부처처럼 행동하고 부처처럼 사는 것이 부처이지, 부처님이라고 해도 부처 노릇을 안 한다면 부처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도 부처 노릇하면 그땐 부처인 것인데, 이는 본질적으로 부처인 것은 동등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기 마침 사리 불이 의심을 가졌던 이 대목은 우리들에게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불교적인 삶이 과연 무엇인가, 또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이 어떠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성급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불교인들에 있어선 그 어느 날보다도 성도재 일이 중요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일을 중요시하게 되기까지 또한 조상을 천도하는 의식이 불교에 있기까지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그것은 부처님이 도(道)를 이룬 것이 연유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도들이 그 나름대로 좋아하고 믿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도 사실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석가모니라고 하는 역사적인 존재가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아미타불이나 경전상에서의 숱한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대상들, 공부하는 방법들, 이러한 일들이 이해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음력 12월 초 하루부터 부처님이 되신 날인 성도일(12월 8일)까지의 한 주일은 각 사찰마다 각별히 기도와 대법회가 열리고, 전 불교도들이 다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또한 선방에서는 12월 초하루부터 8일 새벽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의 한 주일간을 특별 용맹정진기간으로 잡고서 24시간을 눕거나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을 전혀 안 자다 보니까 오히려 하루 종일 졸게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 폐단으로 생각되어서, 하루 중에 제일 졸음이 많이 오는 자정부터 3시까지 푹 자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근래에는 세 시간씩 자면서 하는 가행 정진을 수행하는 선방이 늘고 있습니다. 평소 선방에서 입제 할 때는 하루 8시간에서 12시간 정도 공부하는 보통 정진 수행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불교 전통적인 관습을 신도들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재 일 전 한 주간을 용맹정진이나 가행 정진, 기도와 대법회를 하는 유래는 무엇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6년간 피나는 고행을 하심으로부터 도를 깨닫을 수 있는 분위기가 영글어지고, 완전히 완숙된 상태에서 12월 초하루부터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고행을 해서 몸을 학대하는 것. 이것이 수행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육신을 학대하는 것이 꼭 도를 이루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 고행을 버리고 니련선하라는 강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그때까지 행하고 있으시던 ‘일마일맥(一麻一麥)’이란 식사법 즉 하루에 한 알(곡식)을 잡수시는 식생활을 폐지하고, 우유로 끓인 죽을 잡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의 우유 죽은 최고의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몸을 씻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고는 정신을 가다듬고서 아주 바람직한 참선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납월 초하루부터 일주일동안 정진하여 초여드렛날 새벽에 샛별을 보고 도를 통하게 되었는데, 그 일주일간의 정진이 깨닫기 전의 마지막 정신이었고, 가장 값지고 바람직한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성취하셨기에, 후인들이 이를 전통으로서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육년 간의 고행도 소중한 것이고, 그 고행을 통해서 석가모니의 정신세계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경전에서 고행이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는 말을 잘 쓰지요. 도에 맞게, 순리에 맞게, 어떤 이치에 맞게 닦아가는 것,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서, 여기에 적절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옛날 거문고를 타다가 부처님께 출가하여 공부하던 소냐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기만 오르고 공부가 안되어 그만 집어치우고 싶다고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 소냐야, 너는 마을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탓다고 하는데 사실이냐? 그렇다면 거문고 소리를 잘 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는 대답하길 “거문고 줄은 너무 잡아당겨 팽팽해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고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잘 나자 않습니다. 아주 알맞게 조이는 것, 마음의 지혜로써 알맞게 조여졌을 때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경험의 감각으로 아는 것이지, 어떤 고정적인 방법이 있지 않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선 “그래 그렇구나. 거문고가 그렇듯이 너의 공부하는 것도 꼭 그와 같은 이치여서, 너무 서두르고 조인다고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풀어져도 공부가 안되고, 순리에 맞게 적당히 자기에게 알맞게 차근차근 해나가면 반드시 이룰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완전히 배제하고 배격한 상태에서 하는 수행이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이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 도리에 맞게 적당히 해야 된다는 부처님의 공부 방법으로서 오늘까지 유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나 참선을 하지 않은 스님들까지도 이 일주일간을 굉장히 뜻깊게 기념하고, 초파일 행사보다도 오히려 성도재 일을 용맹 정진하는 기간으로 정하게 된 유래가 바로 부처님이 성도 하신 그 때부터인 것입니다.
아울러서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으며, 도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 경문
57 이때 회중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천룡,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 비인과 여러 소왕과 전륜성왕 등의 모든 대중들은 미증유(未曾有)를 얻어서 환희하여 합장하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58 그때에도 여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으로 광명을 놓으사 동쪽으로 일만팔천 불토를 비추시니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어서 지금 보는 이 모든 불국토와 같았습니다.
59 미륵이여 마땅히 알지니, 그때 회중에 이십억 보살이 있어 법문을 즐겨 듣고자 하였는데 이 보살들은 그 광명이 불국토를 널리 비춤을 보고 미증유를 얻었으며, 그 광명이 비추게 된 인연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60 그때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은 묘광이고 그에겐 팔백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때 일월등명불께서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묘광보살을 인연하여 대승경을 설하시니 그 이름이 『묘법연화경』이라.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바였다.
61 육십소(六十小) 겁 동안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그때 모인 청중도 또한 한곳에 앉아 육십소 겁 동안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서 부처님의 설법 듣기를 밥 먹는 순간처럼 여겼으며 그때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몸이나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지루함을 내지 않았습니다.
62 일월등명불께선 육십소 겁에 이 경을 설해 마치시고 곧 범천, 마왕, 사문, 바라문과, 천, 인, 아수라 등에게 잃게 말씀하셨다.
63 “여래는 오늘 밤중에 마땅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리라.”
◉ 강의
여기에서 무여열반과 유여열반을 정확하게 조금도 가식 없이 표현하자면 유여열반은 번뇌는 사라졌는데 이 몸뚱이는 남아 있음을 말하고 무여열반은 이 몸마저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 열반의 진정한 의미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줍잖은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런 것이 아니고 열반은 그대로 적멸 상태를 말합니다. 부처로서의 삶은 그것을 일러 불성이라 하고 열반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 『법화경』에서 그런 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열반경』을 설명할 때는 정직하게 열반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부처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불성이라 했는데, 그래서 여기선 소승의 열반을 싫어하고 일불승(一佛乘)을 주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번뇌가 사라진 열반에 안주 하는것,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불교는 그런 소승의 열반을 깨뜨리고 나와서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부처님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고 불교 본래의 뜻인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번뇌가 다 사라져버린, 아주 편안하고 조용한 상태에 정체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하여 일어난 올바른 불교 운동이 대승 불교운동이라 하는 것이죠. 『법화경』이 대승 불교운동의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열반을 사정없이 몰아치고 부처로서의 삶, 활기찬 의욕에 넘치는, 원력에 넘치는, 그러한 생명력 있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의 무여열반을 말씀하심은 과거에도 법화경을 설하신 후에 열반에 드셨고 석가모니도 법화경을 설하시고는 열반에 드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는 최후 결판으로 법화경을 설하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며 과거의 일월등명불도 그러했고 지금 석가모니도 그러하심을 의미합니다.
◉ 경문
64 그때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덕장(德藏)이라. 일월등명불께서 그에게 수기를 주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5 “이 덕장보살은 다음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은 정신(淨身), 다차아가토[如來], 아라하[應供], 삼먁삼불타[正遍知]라 하리라.”
66 부처님은 수기(授記)를 주신 뒤 곧 한밤중에 무여열반에 드셨습니다.
◉ 강의
수기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리가 받는 입장에선 받을 수(受) 자를 쓰고 부처님께서 주는 입장에선 줄 수(受)자를 쓰는 것은 수계할 때 쓰므로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기(記)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기록이란 뜻입니다.
미래에 언제 성불하여 중생들을 교화하는 일에 대한 사건이나 그 사람에 대한 것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스님이나 신도가 계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는 것 자체가 기(記)를 받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법화경』에서 예를 들면 사리불이나 수보리는 불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법화경에서 비로소 불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의 수기는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인정이고 예언이 되는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불명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미 다 부처가 될 것을 예언 받은 것이나 똑같다고 봐집니다. 제가 법화경을 보니까 그런 확신이 서졌습니다.
불명 받은 것을 그렇게 알아야 퇴전하지 않습니다. 불명을 받음으로써“나는 이제 수기를 받은 사람이다.” 예를 들면 무비(無比)하면 무비라는 부처가 될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뜻으로 불명이 지어진 것 같습니다.
◉ 경문
67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 묘광 보살이 『묘법연화경』을 가지고 팔십소(八十小)겁 동안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니 일월등명불의 여덟 왕자들은 모두 묘광 보살을 스승으로 삼았고
묘광 보살은 그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 왕자들은 무량백천만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나서 다 불도를 이루었으니, 최후에 성불한 이의 이름이 연등불이셨습니다.
68 팔백 제자중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구명(求名)이라. 이익에 탐착하여서 비록 여러 경전을 읽을지라도 통달하지 못하고 많이 잊어버리므로 구명이라 하였습니다.그러나 이 사람은 또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무량 백천만억의 부처님을 만나서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 하였습니다.
69 미륵이여 마땅히 알지니, 그때의 묘광 보살이 어찌 다른 사람이리오. 내가[문수]바로 그사람[묘광]이며, 구명 보살은 바로 그대였습니다. 지금 이 상서를 보니 근본(예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까닭에 생각하건대 오늘 여래께서는 마땅히 대승경을 설하시리니, 이름은 묘법연화경이요,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입니다.
◉ 강의
부처님이 호념[늘 아끼고 보호하고 생각함]하는 경전이니까 법화경의 값어치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읽으면 영험이 있습니다. 영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치문에 나오는 이야긴데, 옛날 담언이란 스님이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법화경을 열심히 일고 있었는데, 늘 한 마리 꿩이 와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꿩이 뭘 알겠습니까? 우리도 잘 모르는데, 그런데 느낌은 있습니다. 담언 스님이 법화경을 읽으면서 그 뜻에 대한 깊은 희열과 환희심, 깊고 깊은 느낌들은 그 분위기를 압도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자리에 와있는 꿩이 미물이지만 그 분위기속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겠지요.
“여시아문 일시불…”무슨 듯인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보다 더 깊은 곳에, 저 깊고 깊은 정신세계의 교류가 사람과 미물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결국엔 꿩이 죽어서 그 아래 마을 왕 씨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출가하였는데,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징표로서 단익이라는 제자가 되어서 법화경을 주니까 한번에 다 외워버리는 것이었어요. 참 법화경의 영험은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런 예화들이 수없이 많아서 영험록이 법화경보다 더 많습니다.
경문
63. 그 수레는 높고도 넓으며 온갖 보배로 꾸며졌고, 난간이 들려있으며 사면에는 방울을 달았고, 그 위에는 휘장을 덮었고 또한 진기한 보배로써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석줄로 엮어서 늘이었느니라. 그리고 모든 영락을 드리웠으며 폭신한 자리를 겹겹이 깔아놓고, 단침을 놓았으며 흰소에게는 멍에를 메었는데, 소는 살결이 깨끗하고 몸매가 훌륭하고 기운이 세어 결음걸이가 평정하고 빠르기는 바람과 같으며 또한 많은 시종들이 호위 하였느니라.
64, 그렇게 한 까닭은 이 큰 장자가 재물이 한량없어서 모든 창고가 갖가지로 가득찼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였느니라, 나의 재물은 한이 없는데, 시시한 작은 수레로서 아이들에게 줄수는 없도다.
65. 지금 이 아이들은 모두 다 내 아들이라. 사랑함에 치우침이 없으니, 내 이와 같이 칠보로 된 큰 수레가 한없이 많으므로 응당 평등한 마음으로 각가 줄 것이요, 차별하지 않으리라,
66 그 까닭은 나의 물건으로써 온 나라에 두루 나눠줄지라도 오히려 모자람이 없거늘 어찌 하물며 나의 아들들에게 일까보냐.
강의
위 경문의 뜻은 사람 사람이 모두 원만한 불성을 지닌 부처잉고, 본성이 모두 똑같이 평등한 원리인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장자에게 재산이 넉넉함으 우리 모두에게 갖워진 능력과 위신력이 한없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왜소하게 본다던지 자신을 스스로 먹구름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우리의 본래의 성품을 모독하는 것이고, 위신력을 불신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를 아는 것이 불교 궁극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경문
67. 이때 아이들은 각각 큰수레를 타는 미증유를 얻었으니, 이는 본래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었느니라.
강의
이 대목은 장자가 아이들을 불난 집으로부터 꺼낼 때, 그들이 좋아하는 방편을 썼다는 것과 꺼낸 후 그들에게 맞는 수준의 방편이 아니라 상상도 못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두 평등하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요와 부귀와 복덕은 꼭 부처님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재산임을 비유로서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일부만을 나타냈을 뿐이지, 천배 만배가 무궁무진하게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우린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최종적으로 한신 수레에 대한 이야기는 조그만 방편에 대한 이해로서, 우리는 그러한 소소한 이익에 집착하고 머물러 있기 십상인데, 그것은 결국 불난 집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이 대목에서 눈을 크게 확 뜨고, 다시 더 나아갈데가 없는 마지막 가르침임을 알아야합니다.
경문
68. 사리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장자가 아이들에게 보배로 된 수레를 똑같이 준 것이 허망하다고 하겠느냐.
69. 사리불이 말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장자가 아이들로 하여금 화재를 면하게 하고 생명을 보전시킨 것만도 허망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보전한 것만도 이미 좋은 장난감을 얻은 것과 같거늘 하물며 다시 방편으로 저 불난 집에서 구제한 것이리까.
70. 세존이시여, 만약 이 장자가 아주 작은 수레 하나 주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허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장자는 처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방편을 써서 아이들을 구하리라.“하였던 것입니다.
71. 이 까닭에 허망하지 않거니와 또 하물며 어찌 장자가 자기의 재물이 한량없음을 악로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고자 똑같이 큰 수레를 주는 것이겠습니까.“
72.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그렇고 그렇다, 네가 말한바와 같으니라.
73. 사리불아,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세간의 아버지가 되느니라.
74. 모든 두려움과 쇠약하고 고뇌로운 우환과 무명의 어둡고 막힌 것들이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으며,
75. 무량한 지견과 십력과 사무소외를 다 성취하고, 큰 위신력과 지혜력이 있어서 방편바라밀과 지혜바라밀을 구족하고, 대자대비로서 항상 게으름 없이 좋은 일을 찾아서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느니라.
76. 삼계의 헐고 낡은 화택에 태어나서 중생들의 생로병사와 우비고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어리석고 어둠에 덮인 삼독의 불에서 건져내어서 그들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려느니라.
77. 모든 중생을 보니 생로병사와 우비고뇌의 불에 타고 있으며, 또한 오욕과 재물로서 갖가지 고통을 받느니라. 또한 탐착과 구함으로 현세에서는 온갖 고통을 받고, 후세에선 지옥 축생 아귀의 고통을 받으며, 만약 천상에 나거나 인간계에 태어날지라도 빈궁하고 고생스러우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과 미운 사람과 만나는 등, 이와 같은 온갖 고통에 빠져있을지라도 중생들은 즐겁게 유희하며, 그것을 알려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놀라지도 않으며, 또한 싫어하는 마음도 내지 않고, 해탈을 구하지도 않으며 이 삼계의 화택에서 동서로 치달리며 비록 큰 고통을 만날지라도 이를 근심치 않느니라.“
78. 사리불아, 부처님은 이것을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느니라. 나는 중생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응당 그 고난에서 건져내고 무량하고 가없는 부처 지혜의 즐거움을 주어서 그들에게 유희케 하리라.
79. 사리불아, 여래는 또 이런 생각을 하여느니라, 만약 내가 위신력과 지혜력으로서 방편을 버리고,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여래의 지견과 힘과 두려움 없음을 찬탄만 한다면, 중생들은 이것으로 제도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중생들은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면치 못하고 삼계의 화택에서 불타게 되나니,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으리오.
80. 사리불아, 마치 저 장자가 비록 몸과 손에 힘이 있으나 쓰지 않고 다만 은근한 방편으로서 아이들을 화택의 재난에서 건져낸 연후에 각각 보배의 큰수레를 주었듯이, 여래께서도 또한 그와 같이 비록 힘과 두려움 없음이 있지마는 쓰지 않고, 다만 지혜방편으로서 삼계의 화택에서 중생을 건져 제도하기위하여 삼승인 성문, 벽지불과 일불승을 설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81. 너희들은 삼계의 화택에 있기를 좋아하지 말고, 거칠은 색, 성, 향, 미, 촉을 탐내어 애착하면 곧 불에 타게 되느니라.
82. 너희들은 삼계에서 빨리 나와서 마땅히 삼승인 성문, 벽지불과 일불승을 얻으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이 일을 보증하노니, 이는 결코 허망하지 않느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라. 여래는 이러한 방편으로서 중생들을 권유하여 나아가느니라.
83. 또한 이런 말씀을 하시되, 너희는 마땅히 알아라. 이 삼승법은 모두 성인이 칭찬하는 바로서, 자재하여 속박이 없고 의지하여 구함이 없나니, 이 삼승에 오르면 무루의 근기, 힘, 깨달음, 도, 선정, 해탈, 삼매 등으로서 스스로 즐기며 무량한 안온과 쾌락을 얻으리라.
84. 사리불아, 만약 어떤 중생이 안으로는 지혜의 성품을 지니고 부처님으로부터는 법을 듣고 믿어 가지로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삼계에서 속히 벗어나고자, 스스로 열반을 구하는 이를 성문승이라 하느니라. 마치 저 아이들이 양의 수레를 구하려고 화택에서 나온 것과 같느니라.
85.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믿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연의 지혜를 구하며, 혼자 있거나 고요함을 즐기면서 모든 법의 인연을 깊이 알면 이를 벽지불승이라 이름하나니, 마치 저 아이들이 사슴수레를 구하려고 화택에서 나옴과 같느니라.
86.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믿어서, 부지런히 수행정진하며 일체지혜인 부처지혜, 자연지혜, 스승없는 지혜와 여래지견과 힘 두려움 없음을 구하고 무량한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며 천상과 인간을 이익케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케 하면 이를 대승보살이라 하나니, 이런 대승을 구하는 고로 마하살이라 이름하느니라. 마치 저 아이들이 소의 수레를 구하기 위하여 화택에서 나옴과 같느니라.
87. 사리불아, 저 장자가 아이들이 화택에서 무사히 나와, 두려움 없는 곳에 이르른 것을 보고는 자기의 재물이 한량없음을 알았으므로 큰수레를 똑 같이 아이들에게 준 곳과 같느니라.
88.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중생의 아버지인지라, 무량한 억천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삼계의 괴로움인 두렵고 험난한 길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음을 보느니라.
89. 이때 여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되, 나는 한량없고 가없는 지혜와 힘과 두려움 없는 등 모든 부처님 법을 갈무려 있고 이 중생들은 다 나의 아들이므로 평등하게 대승을 준 것이요, 어떤 사람이라도 홀로 멸도케 하지 않고, 다 여래의 멸도로서 멸하여 제도케 하리라.
90. 삼계에서 해탈한 모든 중생에겐 모두 다 제불의 선정과 해탈 등의 오락기구를 줄 것이며, 이는 모두 한 모양 한 종류로서 성인들이 칭찬하는바이고, 능히 청정하고 미묘한 제일의 즐거움을 내느니라.
91. 사리불아, 저 장자가 처음엔 세가지 수레로서 아이들을 끌어 낸 뒤에는 보물로 장식된 제일 평안하고 커다란 수레로서 주었지만, 이것이 저 장자에게 허망한 허물이 아니듯이, 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허망하지 않느니라.
92. 처음에는 삼승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한 후에는 대승으로서 제도하여 해탈케 하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한량없는 지혜와 힘과 두려움 없는 모든 법장이 있어서 일체 중생에게 대승법을 주시지만 능히 그것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이러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서 삼승으로 설하게 된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93. 부처님은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강의
부처님 말씀은 짧은 구절이나 똑같은 구절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몇 번이고, 몇 년이고, 몇 생을 두고서라도 읽고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이렇게 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도 계속 읽고 외우고 쓰고 또 듣고 하는데, 이렇게 거듭 반복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반복하는 것이 신(神)의 경지에 이르는 지름길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전을 편집할 그 당시는 지금처럼 모든 여건이, 특히 종이나 인쇄기술이 풍부하지 않고 대단히 귀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말씀하셨던 그 내용을 다시 또 시(詩) 형식을 빌려서 거듭 반복해서 경전에다 이렇게 기록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왜 이렇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설하셨을까. 특히 부처님의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는 대승경전에서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 「비유품」의 게송을 보면 앞의 내용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더 사실적으로 깊이 있게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란 형태가 없는 것을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상징은 형태가 있는 것을 형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내 보인다고 사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 게송에서 보이는 온갖 귀신과 잡동사니, 짐승들이 들끓고, 집이 썩어 내려앉고, 거기다가 불까지 났다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세상, 우리 현실의 문제, 세계의 정세 등 현대인들의 인성(人性)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서 나오는 말세적인 온갖 상황들을 정말 진실하게,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처참한 것인가 할 정도로 생각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세상 어느 구석엔가는 지금도 여기에서 표현된 것 같은 아주 처참하고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상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경문
94. 비유컨대 저 장자에겐
큰 저택이 있었으니
그 집은 오래되어 낡았고
또한 무너지려 하였으며
95. 그 집채는 높고 위태롭고
기둥뿌리는 썩어 부러지고
대들보는 기울어지고
축대는 무너졌으며
담과 벽은 헐리우고
발랐던 흙은 떨어지며
이엉은 썩어 떨어지고
서까래는 드러났으며
담장은 비뚤어져서
더러운 것이 가득한데
오백 명의 사람들이
그 속에 살고 있었더라.
강의
이 경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주변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인 상황이라든지, 경제적인 상황, 세계정세 등을 실지로 속속들이 들여다 보면, 얽히고 설키고 복잡미묘한, 한치의 틈도 줄 수 없는 긴박한 우리 삶의 현실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업관계, 노사관계, 정치현실의 이해관계 등 인간관계의 복잡미묘한 현장에서의 당사자들은 밖에서의 힘들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거나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야기한다한들 그 진실성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필설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문제들을 이렇게 비유로써 표현했을 뿐이고, 여기서의 500인들은 우리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문
96. 소리개, 올빼미, 부엉이, 독수리, 까마귀, 까치, 비둘기, 뻐꾸기, 뱀, 독사, 살무사, 전갈과 지네들과 그리마들.
노래기와 쥐며느리 살퀭이 족제비 쥐들과 온갖 나쁜 벌레들이 뒤섞여 치달리며.
97. 똥 · 오줌 냄새나는 곳엔 더러움이 흘러 넘치고 말똥구리 등 온갖 벌레들이 또 그 위에 몰려들며 여우, 이리, 야금 등은 씹어 뱉고 짓밟으며 죽은 것을 뜯어 먹어 살과 뼈가 낭자하도다.
98. 여기에 뭇 개들은 몰려와서 끌고 당기며 굶주려 야윈 것은 떨며 이리저리 먹을 것을 찾다가 다투면서 물어뜯으며 으르렁 짖어대도다.
99. 그 집이 공포스럽기는 이와 같은 모습이라, 구석구석마다 모두 도깨비나 허깨비가 있으며,
100. 야차와 악귀들은 사람고기를 씹어 먹으며 나쁜 벌레의 무리들과 사나운 짐승들은 새끼치고 젖먹이며 제각기 감추고 기르도다.
강의
이 경문들은 어떻게 보면 공포스럽게 꾸민 애들 이야기 같지만 이는 진정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있었던 걸프전을 우린 기억할 것입니다. 인접한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것도 처음부터 무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싸우고, 먹히고 있는 곳에 그 싸움을 말리는 척하면서 이익을 챙기려는 나라들이 30여 국이 모였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주동하는 나라도 있고 또 하는 수없이 동조하는 나라도 있고 또 하는 수 없이 동조하는 나라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도와주는 것입니까? 전부 저들의 이익을 계산하고, 거들어 주는 척 하면서 석유 한 방울이라도, 공사 한 건이라도 얻으려는 계산이 없다면, 뭣하러 자기 국민들의 인명을 함부로 던지겠습니까? 사람도 살기 어려운 찌는 사막 속에서···.
이는 이 법화경문에서 그려 놓은 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한 걸프전 상황이 어찌 그곳에만 있겠습니까? 지금 온 세계가 전부 걸프전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우리 산업역군들이 사업하고 정치하는 그 현장도 내부를 속속들이 분석해 보면 그 상황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겠지요.
바야흐로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고 부처님이 몇천 년 전에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일일이 떠올려서 지적하기보다는 이런 불난 집의 상황을 그리고, 거기에 오백 명이라는 중생들이 그런 아수라장 같은 곳에 전혀 상황을 모르고 희희낙락거리며 애들같이 뛰놀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경문
101. 야차들이 달려와서 앞다투어 잡아먹고 먹고나서 배부르면 나쁜 마음 더욱 더 치성하여 투쟁하는 소리가 심히 두렵고 두렵도다.
102. 구반다 귀신들은 흙더미에 걸터앉아서 어느 때는 땅 위로 한 자 두 자씩 뛰어 오르며 왔다 갔다 돌아다니며 제멋대로 희희덕거리면서 개의 두 다리를 잡고 후려쳐 기절시키며 다리로 목을 눌러서 겁낸 개를 스스로 즐겨하도다.
103. 또 다른 귀신들은 그 몸이 길고 커다란데 벗은 몸은 검고 야윈 채로 그런 속에서 항상 살면서 큰 소리로 악을 쓰고 먹이를 찾아 절규하도다.
104. 또 어떤 귀신들은 목구멍이 바늘 같으며 어떤 귀신들은 쇠머리 같은 머리를 하고 혹 사람고기를 먹거나 혹 개도 잡아 먹으며 머리는 산발하고서 잔인하고도 흉악하게 기갈에 시달린 듯이 울부짖고 치달리도다.
105. 야차와 아귀들과 나쁜 새와 짐승들도 굶주림에 사방으로 창틈을 엿보나니 이와 같은 온갖 환란과 두렵기가 그지없도다.
106. 이렇게 낡고 헐은 집은 한 사람의 것인데 그 사람이 외출한 지 얼마되지 않은 사이에 곧바로 이 집에서 홀연히 불길이 일어나 사방으로 한꺼번에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니 대들보 기둥 서까래가 폭음을 내며 진동하는데 부서지고 떨어지며 담과 벽이 무너지도다.
107. 온갖 귀신들은 큰 소리로 절규를 하고 부엉이 등의 새들과 구반다 귀신들은 두렵고 겁에 질린 채 스스로 나올 줄 모르더라.
108. 나쁜 짐승과 독충들은 구멍 찾아 숨어들며 비사사 귀신들도 또한 그 속에 살았는데 복덕이 없는 탓에 불길에 쫒기면서도 서로서로 해치며 피를 빨고 살을 뜯어먹도다.
야간의 짐승떼들도 이미 다 죽었는데 크고 악한 짐승들이 다투어 몰려와서 찢어먹으니 매운 연기만 자욱히 사면에 가득하도다.
109. 지네와 그리마와 독사의 무리들은 불길에 타게 되어서 다투어 구멍에서 탈출하는데 구반다 귀신들은 쫓아가서 잡아 먹도다.
110. 또 여러 아귀들은 머리에 불이 붙어서 기갈과 뜨거운 고통에 황급히 달아나도다.
111. 그 집은 이와 같이 몹시 두렵고도 무서움이라.
지독한 피해와 화재 등 모든 재난이 하나가 아니더라.
112. 그때 이 집주인은 대문 밖에 당도하여 어떤 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의 아이들이 처음엔 장난을 즐겨하여 이 집안에 들어갔으나 어린 것들이 철이 없어서 장난만 즐긴다’고 하더라.
강의
이것이 우리들 중생의 모습입니다. 위의 경문에서 본, 처참하고 먹고 먹히는 인간사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나면 진절머리가 나지만, 또 한편에선 그것을 즐기고, 그것에 재미 붙여서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리석고 철이 없어서 무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경문
113. 장자는 이 말을 듣고 불난 집에 뛰어 들어가서 적절한 방법에 구해내 불타 죽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을 타이르는데 온갖 환란을 설명하도다. ‘나쁜 귀신 독한 벌레에다 불길까지 끊이지 않으며 살무사와 독사 전갈 등 여러 가지 야차들과 구반다 귀신들과 야간 여우 개들과 부엉이, 독수리, 올빼미와 지네 등의 다족의 무리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니 몹시도 두렵고 무섭거늘 이러한 고난 속에다 하물려 큰 불까지 났음이랴.’
114. 아이들은 철이 없어서 비록 아버지 타이름을 듣긴 하나 오히려 짐짓 재미 붙여서 놀기를 그칠 줄 모르더라.
115. 이때 장자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이 이와 같으니 내 더욱 근심하도다. 지금의 이 집에는 하나도 즐거울 게 없건만 이 아이들은 노는 데만 빠져 있어서 내 타이름을 듣지 않으니 장차 불에 타게 되리라.’
116. 그때 문득 생각하기를 온갖 방편을 다 베풀어 주리라.
여러 아이들에게 말하되 ‘나에게 있는 여러 가지의 진귀한 장난감 중에서 묘한 보배의 좋은 수레인 양 수레, 사슴 수레, 큰 소의 수레가 있는데 지금 문 밖에 있으니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라.
내 너희들을 위해서 이런 수레를 만들었으니 마음에 드는 대로 가지고 즐겁게 놀아라.‘
강의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여러 가지 비유는 계속되고 있지만 여기에선 세 가지 방편을 말씀하시고 일단락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집의 처참한 상황들은 이 세상의 모습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이것도 몹시 괴로운 일인데 더구나 이곳에 불이 났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무상(無常)에 대해서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불난 집의 모습에다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탐진치 삼독과 백팔번뇌 팔만사천 가지 번뇌가 들끓기 때문에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경문 중에서 야차, 귀신, 벌레, 짐승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로 먹고 먹히고, 찢기는 것은 번뇌의 요동침을 그린 것입니다.
이런 번뇌만 하더라도 충분히 처참한 상황인데다가 무상이라는 불길까지 가세하여 늙고, 병들고, 죽는 상황까지 겹쳐서 우리를 요동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이 화택의 「비유품」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것입니다. 오백 명의 아이들은 바로 우리 중생들을 말하는 것이고, 장자라는 아버지는 부처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불난 집에서 또 온갖 것이 들끓는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해내기 위해서 방편을 베푸는 것이죠. 그 방편은 교훈으로서 양, 사슴, 소의 수레가 바로 우리를 불난 집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가르침, 즉 불교인 것이고,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는 신행활동이 그 세가지[三乘]에 모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세 가지뿐입니까? 이 삼승은 삼천승도 되고 삼만승, 더 나아가 온갖 각양각색의 방법들이 다 동원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벌어지는 온갖 불교 행사들에 인연을 맺고 그를 통해서 신심이 깊어지고, 차츰차츰 지혜의 눈도 뜨게 되고 끝내는 성불하게 되는 것이 부처님이 베푸신 방편들인 것입니다.
경문
93.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다만 꽃 한송이만이라도 탱화에다 공양한다면
점차 수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며
혹 어떤 사람이 예배를 하는데 다만 합장만 하거나
내지 한 손만 들거나 혹은 고개만 까딱하며
이로써 불상에 공양한다면 점점 무량불을 친견하게 되며
스스로 위없는 도를 이루고 널리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되
섶이 다하여 불이 꺼짐과 같으니라
94. 어떤 사람이 산란심으로 탑묘에 들어가서 한번만 ‘나무불’했다면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95.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나 멸도한 후에라도
이러한 법문을 듣게 된다면 다 이미 불도를 성취하느니라
96. 미래의 모든 세존들도 그 수는 한량이 없으나
이 모든 여래께서도 또한 방편으로 설법하시리라
97. 일체의 모든 여래가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의 무루지(無漏智)에 들게하며 만약 이 법문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성불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98. 모든 부처님의 본래 서원은 부처님이 수행한 불도를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도를 함께 얻고자 하시니라
------------------------------------------------------------ 강의
우리는 부처님의 서원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소원만 성취시키려 하지 부처님의 서원이 무엇인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모든 부처님의 서원은 우리들이 성불하는 것이기에 부처님 서원을 따르는 것이 결국은 내 소원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욕심이 앞서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리고 이것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의미에선 상대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것이 궁극에 가선 내 소원을 성취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겐 많고 많은 소원이 있지만 그중 가장 궁극적인 최후의 소원이라면 우리가 모두 눈뜬 삶을 사는 것, 정말 꿈에서 깨어난 인생을 사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부처님의 소원이기도 하기에, 부처님의 서원을 들어드리는 것이 실제는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경문
99. 미래세의 모든 부처님이 비록 백천만억의 수없는 법문을 설할지라도
그 실은 일승(一乘)을 위함이니라.
100.복과 지혜 구족한 제불세존은 법이 항상 성품이 없으며
불종자(佛種子)가 인연으로 일어남을 아시므로 일승을 설하시니
이 법은 법의 위치에 주하며 세간의 일체상으로 항상 있음을
보리 도량에서 이미 알았으나 도사(導師)는 방편으로 설하느니라
101.천상과 인간이 공양을 받드는 현재의 시방 부처님은
그 수가 항하 모래수만큼이라 세간에 출현하여서
중생을 안온케 하려고 이같은 법을 설하느니라
제일의 적멸을 아시건만 방편력을 쓰는 까닭에 갖가지의 길을 보이시나
실은 일불승을 위함이니라
102.중생의 모든 행위와 마음깊이 생각하는 바와 과거의 익힌 업들과
욕망과 성품과 정진력과 모든 근기의 둔하고 영리함을
아시고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으로써
근기따라 방편으로 설하시니라
--------------------------------------------------------- 강의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부수적인 많은 가설물들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재를 높은 데까지 나르고 또 사람이 올라서서 일할 수 있게끔 많은 가설물을 설치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건물이 완성될 때 보면 불필요한 가설물들은 말끔히 치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 염불하고 참선하고 절하는 것 등은 사실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을 만나고 우리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데 이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중생근기에는 불상숭배, 이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실법으로도 그 훌륭하고 위대한 인격에, 깨달음에 예배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단순한 인격에 예배하는 차원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근기가 성숙해지면 불상이 없는 데서도 할 수 있으며 더 더욱 근기가 원숙되면 그러한 데서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불교공부하는 것, 마음 닦는 것, 기도라고 하는 것이 사실 그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초과정을 절대 무시하고 나무라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에 접근하는 데 정말 필요 불가결한 일들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백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꼭 그러한 일로서 우리들이 거쳐가야 할 과정이기에 방편품이 중요하고, 방편과 일불승과 여러 가지 삼승의 관계를 누누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특히 법화경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총망라해서 정리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런 방편의 문제, 눈뜸의 문제, 깨달음의 문제, 깨어있음의 문제와 일승과 삼승의 관계를 잘 소화하고 잘 풀어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방편품입니다.
경문
103.지금 나도 이와 같이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가지가지 법문으로써 불도(행복의 길)를 펴 보이느니라
104.나는 지혜의 힘으로써 중생의 성품과 욕망을 알고서
방편으로 모든 법을 설하여 다 환희롭게 하느니라
105.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내가 부처의 눈으로 관하여
육도 중생을 살펴보니 빈궁하고 복과 지혜가 없어서
생사의 험한 길에 들어가서는 고통이 계속 끊이지 않으며
오욕에 깊이 집착하는 것이 검은 소가 꼬리를 아끼듯이
탐욕과 애착에 스스로를 가리어 눈멀고 어두워 보지 못하며
큰 지혜의 힘을 지닌 부처님과 괴로움 끊는 법을 구하지 않고
모든 삿된 소견에 깊이 들어가 고(苦)로써 고(苦)를 버리고자 할새
이런 중생을 위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켰노라
106.내가 처음 보리도량에 앉아 보리수 아래서 관하고 경행하며
삼칠일을 지내면서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되
내가 얻은 지혜는 미묘하기 제일이건만
중생 모두 근기가 우둔하여서 쾌락에 착하여 어리석고 어두우니
이같은 무리들을 어떻게 제도할 것인가
107.이때 모든 범천왕과 모든 하늘과 제석천과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과 그리고 대 자재천과
그 밖의 여러 하늘대중인 백천만의 권속들이
공경 합장하고 예배하면서 내게 법륜굴리기를 청하였노라
--------------------------------------------------------------- 강의
여기에 나온 천왕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로 볼 수도 있고 또 액면대로 천상사람들이라 해도 좋으며 부처님 마음속의 긍정적인 좋은 생각들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청법한 것을 받아들여서 삼칠일만에 석가 세존께선 녹야원에서 최초 설법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중은 처음 공부를 같이 하던 다섯 비구들이었습니다. 그때 이후 불법은 많은 발전과 더불어 동서고금으로 숱한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전파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생동안 많은 가르침을 폈는데 그 대사수의 가르침들이 방편에 해당됩니다. 방편이란, 우리가 강을 건너려면 뗏목이든지 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들이 다 방편에 해당됩니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은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입니다. 배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강이 아름답더라도 강에서 어정대는 것은 방편에 어정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강을 건너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세계인 저 언덕에 가야만 완전무결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불이니 열반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표현을 합니다만, 법화경에선 소승열반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그것도 일종의 방편이랄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깨달음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깨달음이란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부처로서 사는 인생살이를 말하는 것이지 깨닫고 나서 자기 깨달음에 도취되어 있는 것은 역시 소승이며 법화경에선 배척하는 바입니다.
부처로서의 인생을 펼치는 것, 보살로서의 인생을 펼치는 것, 이것이 법화경의 근본 목적이랄 수 있습니다.
경문
127.비록 다시 가르치나 믿어 가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욕망에 물들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니 128. 이러한 방편으로 삼승을 설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삼계의 고통을 알게 하고 세간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보이려고 연설하는 바이다.
129. 이 아들들이 만약 그 마음을 결정하게 되면 새가지 밝음(三明)과 육신통(六神通)을 구족하여 연각과 불퇴진의 보살경지를 얻으리라.
130.그대 사리불이 나는 중생을 위하여 이러한 비유로써 일불승을 설하노니 너희들이 만약능히 이 말을 믿고 받아 지니면 일체의 모든 이가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131. 이 일불승은 미묘하고 청정하기 제일이라.
132. 모든 세간에서 위없이 높으므로 부처님이 기뻐하시며 일체의 중생들도 칭찬하는 바 되어 공양하고 예배하며 한량없는 억 천의 모든 힘과 해탈과 선정과 지혜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불법(佛法)이며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얻어야 모든 아이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밤낮으로 항상 유회하게 하며 여러 보살들과 성문 대중들이 함께 이 보배수레를 타면 도량에 곧 이르리라.
133. 이러한 인연으로 시방세계에 다시 구하여도 다른 가르침은 없으니 부처님의 방편은 제외하느니라. 사리불에게 말하노니 너희들 모두는 다 나의 자식이요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라. 너희들은 오랜 세월에 온갖 고통으로 불타거늘 내가 모두 건져내어 삼계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134.내가 비록 앞에서 너희에게 멸도를 말했으나 이는 다만 생사를 다했을 뿐 실다운 멸도가 아니니 이제 꼭 해야 할 일은 오직 부처님의 지혜니라. 만약 어떤 보살이 이 대중 가운데서 능히 일심으로 부처님의 실다운 법을 들으면 모든 부처님 세존은 비록 방편을 쓰지만 교화되는 중생들은 모두 다 보살이니라.
강의
불교에 처음 입문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된 고요한 상태(열반)를 강조하나. 이것은 기초적인 방편의 말씀인 것이고, 본질적인 부분에 들어와서 우리가 꼭 해 마쳐야 할 일은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를 이루는 것입니다. 평화나 행복도 전부 지혜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불교에선 지혜와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앞서 예를 든 불난 집에서의 근심, 걱정, 문제점, 불행 등이 수없이 들끊는데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입니다. 그 지혜는 이 세상을 떠나 다른 데로 피신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불 속에 있으면서 지혜로써 해결한다. 는 의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연꽃은 우리의 소질과 능력과 지혜를 한껏 꽃피운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불이나 부처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연꽃은 어디에서 피는 것인가? 반드시 낮은곳, 더러운 진흙탕의 늪에서 초연히 피는 것입니다. 인간의 처참한 삶 속에서 부처님과 같은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우는 것, 그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마지막 경문의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으로서 좀 더 잘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 , 좀 더 지혜롭게 살려는 사람, 깨달음에 조금 관심을 가진 사람,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을 모두 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경문
135.어떤 사람이 지혜가 적어 애욕에 깊이 탐착하면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고재(古諸)를 설하느니라 중생들은 마음으로 기뻐하여 미증유를 얻으니 부처님이 설한 고제는 진실하여 다름이 없느니라.
136. 만약 어떤 중생이 고통의 근본을 모르고 고의 원인에 집착하여 잠시도 버리지 못하면 이런 사람 위해서는 방편으로 도제(道諦)를 설하느니라. 모든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 근본이라. 만약 탐욕을 소멸하면 의지할 바 없으니 모든 고를 멸진해야 도제라 이름하느니라. 멸제를 위한 까닭에 도를 수행하는 것이니 모든 고의 속박을 벗으면 해탈이라 하느니라.
137. 이 사람은 어디에서 해탈을 얻었는가. 다만 허망을 떠난 것을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이나 실로는 아직 일체에서 해탈하지 못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되 이는 참된 멸도가 아니라 하여 이 사람은 아직 위없는 도를 얻지 않은 고로 내 생각으로는 멸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리라.
강의
무엇이 해탈인가? 다만 허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했습니다. 허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이는 참으로 명료하고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허망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데 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허망세간을 허망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이다 하고 규정짓는 것은 우리의 전통 사회제도, 관례, 관습들은 실로 고장된 기준이 아닌데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을 설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 관습 등은 모두가 허망한 것으로 마음속에 꽉 절여 있어서 도저히 떠날려고 해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내가 어렸을 적 상원사 선방에 있을 때 어떤 채공담당스님이 계셨는데 그는 무김치 한 가지로 매일 다르게 반찬을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무김치는 이렇게 썰어먹어야 한다는 고정 상식에서 벗어나 끼니마다 다른 모양, 다른 빛깔로 상에 올려 놓는 것이지요. 그 스님의 머리엔 무김치라는 고정관념이 전혀 없었으므로 여러 가지 요리로 변화를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해탈은 생사 해탈이 목적이긴 하지만 우선 이 생사해탈을 하려면 보통 우리의 상식에서부터의 해탈, 즉 살아가는 데 대한 여러 가지 고집과 상식에서부터 해탈하는 훈련을 쌓아야 생사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그마한 일에도 해탈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크나큰 생사해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옷을 입는 데도, 가구를 배치하는 데도, 변화를 줌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새로운 가치와 인생전반에 걸쳐 신선한 생기가 감도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허망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시원스럽게 살아야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간을 삼종세간(三種世間)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는 기세간(器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지정각(智正覺)세간으로서 이 세상을 내용적으로 간단하게 분류한 것입니다. 기세간이란 바로 우리의 환경, 즉 국토와 자연 산하대지 등 우리를 담고 있는 자연환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3천 년 전에 생긴 종교이고. 또 그 가르침이 펼쳐질 당시엔 오늘날같이 환경이 파괴되고 공해문제로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교에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이 국토를 ‘우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중생세간이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을 중생세간이라 하고, 지정각세간이란 우리들의 정신세계로서 깨닫고자 하는 세계,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 등을 말합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수행, 깨달음의 문제, 눈 뜨고 꿈 깨고 마음을 밝히는 이런 세계가 지정각세간이라면 이는 정신적인 세계, 우리의 이상의 세계이지요. 그 외의 우리는 보통 중생으로서 중생세간이고 이런 중생을 싣고 있는, 우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 이 산하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릇이라는 표현을 아주 적절한 것으로 어쩌면 이시대의 자연과 인간과의 도저히 나눌 수 없는 그런 관계를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그릇에 대해서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금이 가거나 이빨 빠진 그릇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그런 그릇을 개밥그릇으로나 사용하고 아무리 좋은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릇에 더러운 똥을 담았었다면 다시는 음식 담는 그릇으로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관념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릇이고, 거기에 대한 관념이 철저한 데도 불구하고 요즈음 우리의 귀중한 생명을 담고 있는 이 환경(큰그릇)에는 너무나도 관대하고 무관심하지 않나 생각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남태평양의 이스트라는 섬에는 거대한 석상들의 유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기는 지금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황폐화되어 있는데 예전엔 원래 비옥한 땅으로서 숲이 울창하고 고도의 문명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답니다. 그들은 찬란한 문화유적으로 보아 아주 발달된 문화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환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지 못한 관계로 자연을 훼손하고 급기야는 그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배를 만들려 해도 벨 나무가 없어서 몽땅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적탐사 연구원들만이 이따금 방문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토, 이 지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자연을 우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하셨던 바, 우리는 이 그릇을 소중하게 간직해야지 그릇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면 그 속에 담겨있는 우리들도 안전하지 못함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쌓아 놓은 온갖 과학문명의 유산들, 각종 편의제품들, 높은 빌딩, 눈부신 문화시설 등을 던져버리고, 제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셔보고 죽었으면 하고 미개발지로 달려가는 현상이 없다고 장담 못하는 것입니다. 이즈음 여러 환경보호 단체가 이 문제를 일깨우고 있지만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에 힘입어 올바른 인식과 함께 자연환경과 내가 둘이 아님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경문
138. 나는 법왕으로서
법에 자유자재하므로
중생을 안온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였노라
그대 사리불이여
나의 이 법인(진리의 도장)은
세간을 이익케 하려고
설하는 것이니라
강의
부처님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이익과 행복을 주시려 하는가?
어떤 기술 개발이나 과학을 발전시켜 물질적인 풍요로써 이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실상)을 확연히 깨달아서 그것으로써 인생의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여, 그 삶으로 써 인간의 이익과 행복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가 인류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고 육체적인 아픔을 치료하는 것이 시급하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 해결되었다고 인류가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안목을 열어주고 마음을 밝히고 깨어있는 삶, 열린 마음으로 인생의 진실을 파악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수준높은 삶으로의 길이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사업이나 공익사업, 복지사업 등에 등한히 해온 중요 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 의료사업이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으로 종지를 삼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복지 사업도 아주 훌륭한 일이지만, 그보다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것, 법으로써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셨기에 위의 경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문
139. 가는 곳 어디서든지
함부로 전하지 말지니
만약 듣는 사람이
따라 기뻐하고 받들어 지니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아비발치( 물러서지 않는자) 이니라
140. 만약 이 경의 법을
믿고 받아지니는 사람
이 사람은 일찍이
과거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며
이법을 들었음이라
141.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네가 말한 바를 믿는다면
곧 나를 보는 것이 되며
또한 너를 보는 것이며
비구승과 모든 보살까지
보는 것이 되느니라.
강의
법화경의 가르침,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을 뵙는 것이고, 사리불을 보는것이며 비구와 모든 제불보살님을 보는것이 됩니다.
옛날 바카리라는 비구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늙고 병들어 어느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다가 임종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한번 꼭 뵙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선 급히 그를 방문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하셨습니다. 그때 바카리는 힘겹게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려 하였는데, 이를 본 부처님께선 이를 말리며. “나도 이미 늙고 썩어가는데, 이 몸뚱이에다 절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라고 하는 이 외형적인 모습을 부처라 하고, 외형적인 모습에다가 예경을 했던가? 나는 곧 법이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본다.”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게 된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 바카리 스님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처가 아니라 참다운 부처님에게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리불이 설하는 법화경을 듣고 믿는 사람은 곧 나, 부처를 보는것이고 비구승과 제불보살을 보는 것이 된다고 경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어떤 형상으로서 나라고 하거나, 설법으로서 나라고 하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처와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여기에서 눈떠야 하는 것입니다.
경문
142. 이 법화경은
깊은 지혜인을 위해 설함이라
얕은 지식으로 듣게 되면
미혹하여 알지 못하리니
일체의 성문과
그리고 벽지불로서는
이 경문 가운데서
힘이 미치지 못하느니라
강의
법화경 방편품에서 5천 명의 대중이 부처님의 설법장에서 박차고 나갔었지요. 이들은 부처님이 이제까지 설하지 않은 훌륭한 법이 있다고 칭찬하고 이어서 설하려 하자. 그 자리에서 나간 것입니다. 여태까지의 부처님 법을 다 알고 있다는 증상만의 생각으로, 또 무슨 법이 있을까?하고 나간 것, 위의 경문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은 이를 가리킨 것입니다.
경문
143. 너 사리불도
이 법화경에는 오히려
신심으로써 들어 왔거늘
하물며 다른 성문들이랴
그 나머지 성문들도
나의 말을 믿는 까닭에
이 경을 따를 뿐
자기 지혜의 분은 아니니라
강의
이 경문의 뜻은, 여태까지는 이 세상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이라는 말만 알고 있었는데, 바로 네 자신이 부처이고 따라서 모든 이들도 함께 본질적으로 부처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고 나니, 스스로의 지혜로써 요달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이니까 믿는 정도인 것입니다. 사리불이 이 정도의 이해인데, 다른 성문과 연각들은 오죽했으랴 하는 의미입니다.
경문
144. 또 사리불아
교만하고 게으르거나
나라는 소견을 가진 자에겐
이 경을 설하지 말라
범부는 얕은 식견으로
깊이 오욕에 탐착하므로
듣고도 잘 알지 못하므로
또한 설하지 말지니라
145. 사람들이 만약 믿지 못해
이경을 훼방한다면
곧 일체 세간에서
부처 종자를 끊음이니
혹은 얼굴을 찌푸리며
의혹을 품느니라
146. 너는 마땅히 이 사람의
죄보를 들어보라
만약 부처님이 계시거나
열반한 후에
그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비방하거나
또 어떤 이가 독송하고
써서 가지는 것을 보고
가벼이 여기고 미워하며
또는 원한까지 맺은
이 사람의 죄보를
너는 이제 들어보라
147. 이사람이 명을 마칠 때
아비지옥에 들어가서
일겁을 다 채우고
그 겁이 다한 뒤엔 다시 태어나
이와 같이 전전하기를
무수겁 동안 지니리라
148. 지옥에서 나와서는
다시 축생으로 태어나되
검고 병이 들어서
사람들 발에 채이고
또 사람들에겐
미움받고 천대 받으며
항상 기갈에 시달려서
골육이 앙상하며
살아서는 심한 고초와
죽어서는 자갈무덤이니
부처종자를 끊은 까닭에
이런 죄보를 받느니라
강의
부처의 종자를 끊은 사람은 진리를 등지고, 올바른 삶의 길을 등진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서, 빛이며 광명이고 우리의 희망이 내재된 진실한 모습인 부처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어둡고 괴로운 지옥세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모델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과 가능성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끝내는 그곳에 도달하게 하는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경문
149. 만약 낙타가 되거나
혹 나귀로 태어나면
항상 무거움 짐을 싣고
채찍을 맞으며
오직 물과 풀만 생각할 뿐
다른 것은 아는 바 없으니
이 경을 비방한 까닭에
이 같은 죄보를 받느니라
150. 어떤 이는 야간이 되어
마을에 들어가면
몸뚱이는 몹쓸 병에 들고
또 한 쪽 눈은 멀어서
어린애한테서
매를 맞게 되며
온갖 고통 다 받다가
어느 땐 죽게 되며
이렇게 죽고 나서는
다시 큰 구렁이 몸을 받아
그 모습이 크고 길기는
오백 유순이나 되며
귀먹고 발도 없어서
배로 기어다니다가
온갖 작은 벌레들에게
뜯어 먹히면서
밤낮으로 고통받기를
쉴 사이가 없으니
이경을 비방한 탓으로
죄보가 이 같으니라
151. 만약 사람이 되더라도
육근이 아둔하여
난장이나 절름발이가 되고
장님 꼽추 귀머거리가 되며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며
입에선 추한 냄새 나고
귀신들이 붙은 바 되고
빈궁하고 천박하여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며
병이 많고 수척하여
의지할 데 전혀 없어서
다른 이와 친하려 해도
사람들이 생각지 않으며
만약 무엇을 얻을지라도
금방 다시 잃게 되며
만약 의술을 배워서
병을 치료하더라도
다시 다른 질환에 걸리고
혹은 죽기까지 하며
만약 스스로 병이 들어도
치료할 사람이 없으며
설사 좋은 약을 먹더라도
병이 더욱 악화되며
만약 다른 이의 반역죄나
약탈과 절도 등
이와같은 죄의 재앙에
억울하게 걸려드느니라
강의
위의 경문들은 대승을 등지고, 밝은 진리의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만, 이런 것이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고 충분한 교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도 들을 땐 겁을 내면서 자신을 비추어 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들을 하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런 강력한 말씀을 구구절절이 하신 것 같습니다.
강의
법화경의 비유품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의 인생살이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고 비유하시고 그 불타는 집에서 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아버지가 밖으로 이끌어 내듯이,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화택에서 어떻게든 끌어내야 되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니 자비의 원력과 교화의 방편이고 지혜인 것으로, 지혜의 밝은 등불을 밝혀서 우리들을 저 안전한 세계로 이끌어 낸다는 것이 비유춤의 골자인 것입니다.
장자인 아버지는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이끌어낼 때 그 아이들의 수준과 적성에 맞는 이야기를 통해서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인 것으로, 사실 있지도 않았지만 미혹한 중생들의 근기에 맞춘, 일상적인 우리 생활 수준에 근접하고 퍽 설득력이 있는 내용들을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삼승법으로, 그 많은 방편들 즉,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가르침,수행법,각종 행사들까지도 모두 이 삼승법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삼승법이 목적은 아니지만 그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목적지인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의 세계, 부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중간에 많은 산과 들을 지나서 가듯이, 가다가 중간의 경계가 좋다고 구경하고 놀다가 되돌아 간다면 참으로 곤란하지요. 눈을 뜨고 사는것, 깨달음에 의해서 사는것,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목적이고 우리가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인 것입니다.
나는 초파일에 등이나 켜고 가족의 축원이나 빌면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인연으로 결국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어떤 종교나 학설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모든 뭇생명들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깨닫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고 법화경의 핵심인데, 이것을 믿지 않는다든지 이런 올바른 이치에 대한 가르침을 비난한다면 그에 대한 과보가 있다는 것과, 그 이전에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가르침을 믿지 않고 등졌을 땐 현실적으로 그 사람의 삶이 어떠한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나열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기불이 발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우정 촛불을 켠다든지 조그만 등불을 밝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불교는 온전히 빛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빛이 없다면 하루도 살 수가 없고, 그 불편함을 넘어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부처님은 지혜의 빛을 던져주기 위해 오셨으므로, 지혜의 불을 밝히는 일이 불교이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투신 뜻인것입니다.
지장경에 보면 지옥의 세계를 낱낱이 표현했는데, 철위산 동쪽 너머에 해와 달이 비치지 않는 곳에 대아비지옥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캄캄한 곳, 빛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 지옥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현실 속 에서도 빛이라는 것과, 인생문제에 있어서도 마음의 슬기, 곧 지혜의 빛이 전혀 없다고 가정할 때, 그길은 몹시 캄캄하고 험한, 그리고 고단한 길임은 확실합니다.
법화경의 첫시작에 '부처님이 미간에서 백호광을 놓으사 동방으로 일만팔천 세계를 비추자 온갖 것이 다 비추었다.' 고 하는 빛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알 수 없는 먼 과거에 일월 등명불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해와 달과 등불 모두가 밝은 빛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맨처음 미간 백호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법화경의 진리의 세계가 광명으로 시작됨을 뜻하고, 그다음 계속해서 똑같은 이름의 일월등명불이 세상에 출현하길 이만불이 나타나시어 지혜의 빛이로 세상을 한껏 밝히신 것입니다.
그 무한대의 빛이 없는 혼돈과 무명의 세계, 지옥의 세계에서 바람직한 지혜의 빛이 충만한 극락의 세계로 환하게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연등불에게 인가받아 비로소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연등불이란 등불을 밝힌 부처님이란 뜻이지요. 또한 아미타불도 한량없는 빛을 뜻하고 화엄경의 비로자나 부처님도 '광명으로 두루 비추는 부처님'이란 뜻으로 어디를 봐도 지혜의 빛으로 온통 싸여서, 어두운 마음을 지혜의 빛으로 밝히는 작업이 불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펴려면 법화경으로 설명되고 좀더 펴려면 화엄경으로, 더 넓게 펴려면 팔만대장경 전체로 설명하고, 아주 오그리면 반야심경 한편으로 더 요약하려면 부처님이 연꽃 한송이들어 보임으로써 설명하고 또 등불 하나로써 불교의 진리가 다 설명되는 것입니다. 참 묘하지요? 불교는 원리론이기 때문에 큰스님들은 주장자 한번 쾅 치는 소리에 불교가 다 들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동작속에 온 우주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 것이어서, 이 원리만 제대로 꿰뚫고 있으면 주장자 하나드는 것. '할'하는것, 등불하나, 한 송이 꽃, 그 어디에도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와 삶의 길이 들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등불하나에 불교의 대의와 부처님의 사상이 다 함축되었음을 보았을 때, 이러한 높은 가르침을 비난하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라면 반드시 진리의 빛을 등진 사람인 것이고, 결국 어두운 곳에서 온갖 불행과 불만, 아픔, 쓰라림, 실패등의 지옥 같은 현상들을 접할 수밖에 없음을 여기에서 낱낱이 파헤쳐 보인 것입니다.
경문
152. 이와 같은 죄인은 영원히 부처를 보지 못하며 성인 가운데 왕이 설법하고 교화할지라도 이같은 죄인들은 불법 만나기 어려운 곳에 태어나 미치고 마음이 산란하여 끝내 불법을 듣지 못하며 항하의 무래수와 같은 한없는 세월동안 벙어리로 태어나서 육근이 온전치 못하리라.
153. 항상 지옥에 있으되 마치 정원에서 노닐 듯하고 여러 악도에 드나들기를 자기 집처럼 여기며 낙타 나귀 돼지 개 등 이런 축생류에 처하게 됨은 이 경을 비방한 까닭에 이 같은 죄를 받느니라.
강의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치를 도저히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비방하는 사람들은 결국 올바른 삶의 길을 등진 사람들로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그러하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 아무소리도 못듣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좋은 말, 진리의 올바른 말을 해주어도 그것이 납득이 안 가서 귀머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경문
154. 만약 사람으로 태어나도 눈 귀먹고 벙어리 되어 가난하고 쇠약한 것으로 스스로를 장엄하며 습진 종기와 조갈 증세와 옴 나병 악성 종기등 이러한 병들로써 의복을 삼으며 몸은 항상 악취가 풍겨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며 나라는 생각에 집착해서 성내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음욕이 치성하여 금수를 가리지 않으니 이 경전을 비방한 고로 이런 죄를 받느니라.
강의
진리를 등진 사람들, 특히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물질이나 명예로써 인생 최대의 가치를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한푼도 남에게 쓸 줄 모르고 철저히 돈만 안다든지, 눈앞의 이권만 생각하고 그 외엔 전혀 남의 말이나 종교 문화 예술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비방과 질시를 서슴지 않고 사는 추한 모습들을 여기에다 그렸다고 봐도 좋습니다.
『초발심자경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구더기가 더러운지 깨끗한지 가리지 못하고 기어다니는 것을 사람들은 몹시 싫어 하지요. 이렇듯 성인들은 우리 수행자들이 추하고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 현실주의자로 전락해 버리면 그 사람의 삶은 추할 수 밖에 없고, 그 처참한 어둠의 현상들을 이루 다 말로써 할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경문
155.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이경을 비방한 자는 그 죄를 말한다면 겁이 다해도 끝이 없느니라 이와 같은 까닭으로 너에게 짐짓 말하노니 지혜 없는 사람에겐 이 경을 말하지 말지니라.
156. 만약 근기가 영리하고 지혜가 밝아서 많이 듣고 애써 알려 하며 불도를 구하는 자라면 이와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 것이며 만약 어떤 사람이 일찍이 천백억 부처를 친견하고 온갖 선근을 심어서 깊은 마음이 견고하거든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정진하길 항상 자비심을 닦으며 신명을 아끼지 않거든 가히 설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공경하되 다른 마음이 전혀 없으며 범부의 어리석음을 떠나고 홀로 산림에 있으면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지니라.
157. 또 사리불아 만약 어떤 사람이 못된 소견들을 버리고 선지식을 친근하거든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 것이며 만약 불자가 계를 청결히 지키되 마치 맑고 밝은 구슬 같고 대승 경전을 구하거든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성 안 내고 정직하고 부드러우며 일체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제불을 공양하거든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지니라.
158. 또 어떤 불자가 대중 가운데서 청정한 마음으로 가지 가지 인연과 비유와 언사로써 걸리없이 법을 설하면 이와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 것이며 만약 어떤 비구가 일체지를 얻으려고 사방으로 법을 구하여 합장하고 받들어 지니며 다만 대승 경전만을 받아 지니기 좋아하고 다른 경의 한 게송도 받아 지니지 않거든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지니라.
강의
여기에서 대승경전과 다른 경전이나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 말한 것은, 대승불교 처기에 소승경전과 소승을 믿는 사람들, 특히 부처님의 사상을 소승적으로 보아서 대승경들은 불설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고 깨우치기 위해서 이런 문구가 더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법화경이 성립하게 된 시대적인 배경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문
159. 어떤 이가 지극한 맘으로 부처님 사리를 구하며 이런 맘으로 경을 구하고 얻은 뒤엔 받을어 지니며 그는 또다른 경전을 구할 뜻이 전혀 없으며 이 같은 사람에겐 가히 설할지니라.
160. 사리불에게 이르노니 내가 설한 이런 모습의 불도를 구하는 자들도 말하려면 끝이 없느니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능히 믿고 이해하리니 너는 마땅히 그들을 위해 묘법연화경을 설할지니라.
강의
이 세상엔 좋지 않은 사상과 부정적인 사고로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이지만 또 한편으론 긍정적이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화경을 설해줄만한 사람들, 또는 불도를 구하여 받들어 지니고자 하는 사람들도 한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철저히 법화경과 다른 경에 선을 긋고 법화경 일변도로 옹호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다른 경전이라 칭한 것은 소승경전을 말함이고,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깨달음에 대한 불신과 우리마음의 깊고 오묘한 세계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에 대해 크게 이해가 없는, 단순하게 분별하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실 마음의 세계라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거든요. 우리가 육근을 통해서 육경을 분별하면서 사용하는 마음의 작용은 빙산의 일각도 안되는 아주 미미한 일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여러 가지 수행 방법들, 기도나 염불 참선 등은 거대한 마음의 세계의 힘을 이끌어 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부처님의 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음주력이나 석가모니 염송을 하는데, 그 의미와 함께 우리의 기대감과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힘이 맞닥뜨리는 것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거사가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교통사고가 났다고 직감하는 순간 강력하게 '관세음보살'하고 외쳤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완전히 휴지조각처럼 부서졌는데, 그의 다리는 찰과상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를 뜯어내고 빼낸 다리가 너무도 완전하기에 도저히 믿을수 없다고 주위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힘은 어마든지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이 부처님의 거대한 힘인 것이고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인 것입니다. 이는 기도나 참선 염불등 우리가 강력하게 집중하여 폭발할 때 이끌어 내는 우리 자신의 힘인 것이지요. 그러한 거대한 세계가 제대로 발현되었을 때 그것을 부처 또는 성불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를 도대체 믿지 않고 비방하며 성불이란 것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고, 무한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어떻게 성취한단 말인가 하고 비웃는 사람들에겐 이런 법화경의 법문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부처이다라고 하는 높은 가르침은 그들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비난할 소지가 있으므로 자기 눈을 자기가 찔러 봉사가 되는 꼴이기에 그들에게 설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경문에서 부정적인 현상들을 나열한 것은 그러한 세계에 대해서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심지어 비난할 때 거대한 마음의 세계가 어둠으로 막혀서 지옥 같은 현상이 벌어짐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비유품을 요약한다면 우리가 본래로 부처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고 부처로서 살아가는 일행일불(一行一佛)주의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본성이 부처라는 입장이라면, 또 그것이 마음에 와 닿는다면 하루 24시간 중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부처답게 행동하거나 행동이 안되면 말이라도 부처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은 부처인 것이고 이러한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연스럽게 부처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일행일불주의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연극이나 장난으로라도 봉사 흉내를 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그 순간만은 영원히 봉사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실천사상 이랄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잣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의 부처를 믿고 내가 하는 한 행동 한순간의 생각과 말들을 부처로 전환시킬때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완성된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대승적인 교리에 입각한 삶인 것입니다.
◉경문
42. 그때에 세존께서는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미 끈질기게 세 번이나 청하니 어찌 설하지 않겠는가. 너희는 이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내 이제 너희를 위해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43.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회중에 있던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오천인 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물러갔다. 왜냐하면 이 무리들은 죄의 뿌리가 깊고 무거우며 교만하여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못하고도 증득했다고 하여 이 같은 어물이 있는 까닭에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므로 세존께선 잠자코 제지하지 않으셨다.
◉강의
위의 경문에서 나타나는 오천인의 퇴장은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법화경』을 통해서, 그동안 부처님의 수없이 많은 가르침을 들어온 불자들로서 ‘이만큼 공부했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던 교만에 찼던 사람들, 자기 앎에 대한 어줍잖은 집착자들, 나름대로 불교에 대한 기성사상에 매달린 사람들을 경전에서 증상만자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나쁜 속성을 경계하고 보다 나은 것을 향해서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제일 바람직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가 구도이기에 보다 성장하고 깊어지고 넓어지려면 값있는 삶을 살려는 태도가 있어야 하고, 보다 나은 새로운 안목과 보다 깊은 진리, 보다 열린 삶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새로운 이치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는 말들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내가 그 말의 경지까지 되고자 하는 뜻에서, 구도 적인 삶을 펼치고자 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증상만의 사람들이 퇴장한 것은 그러한 구도 적인 태도가 모자랐고 부단히 자기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스스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퇴보하는 무리들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흔히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읽고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읽고 있는 동안, 듣고 있는 순간, 생각하는 동안만은 최소한 실천인 거입니다. 이렇다면 이런 순간들은 우리 삶에 귀중하고 소중한 값진 시간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다른데서 보낸 시간과 비교해 볼 때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문
44. 그때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나의 이 대중들은 다시는 지엽이 없고 순전히 정실(貞實)만 있으니 사리불아, 그와 같은 증상만인들은 물러감이 좋으리라. 너희는 잘 들으라. 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45.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겨 듣고자 합니다.
46.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이러한 미묘한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때가 되어야 설하는 것이니 마치 우담발화가 때가 되어야 한 번 피는 것과 같으니라.
47. 사리불아, 너희들은 마땅히 부처님이 설함을 믿을지니 그 말은 허망하지 않느니라.
48.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이 마땅함을 따라서 설하는 법은 그 뜻이 알기 어려우니라.
49. 왜냐하면 내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언사로서 모든 법을 서하지만 이법은 생각과 분별로는 알 수 없고 오직 부처님들만이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니리라.
◉강의
법(法)이란 실법(實法)또는 불승(佛乘)부처가 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진리)은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나 지역 민족 등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가치가 바뀌어도 부처님의 진리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대나 그 민족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알면 되겠습니다.
◉경문
50.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시기 때문이니라.
51. 사리불아, 무엇을 일러 모든 부처님이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52. 모든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지견을 열어서[開]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의 부처지견을 보이려고[示]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지견을 깨닫게[悟]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 지견도(知見道)에 들게[入]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니라.
◉강의
불교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부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 그것은 개시오입 불지지견(開示悟入 佛之知見)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을 요약하면 일대사인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지견을 연다는 것’은 부처의 성품 속엔 이러한 소견 이런 사상과 정신 이런 자비 지혜 등을 가졌다고 열어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청정케 한다’는 것은 부처지견을 열어서 그것이 빛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것만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지견을 열어서 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는 까닭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중생의 부처지견을 보이려고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것은 우리들의 불지견 즉 못난 우리 중생들에게도 불지견이 있음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이고자 하심이고 ‘불지견을 깨닫게 한다’는 것은 부처님만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불지견을 부처님처럼 저렇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의 지견도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이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어떻게 믿어도 좋습니다. 각자의 욕구와 취미와 문제의식이 다르더라도 결국은 최종적으로 개시오입 불지지견이 목적이라는 사실만 알면 되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성불이 되겠지요. 부처님은 이런 뜻으로 왔고 불교가 이것 때문에 존재하기에 사찰이 있는 이유도 불교도가 있는 이유도 결국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경전에서 찾기 쉽지 않기에 『법화경』에선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다 했다고하여 총 결산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경문
53. 사리불아, 이것을 모든 부처님들이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 것이라 하느니라.
54.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며 모든 하는 바는 항상 한 가지 일만을 위하심이니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것이니라.
◉강의
열반을 증득하여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 부처의 삶을 우리들의 삶으로 승화하기 위해서, 부처의 지견과 사상대로 살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즘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바쁘게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쉽게 변화되리라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대승의 가르침과 인연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떠내려가는 물결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작은 나뭇가지나 풀뿌리라도 잡고 한 번쯤 버티어 보자는 운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또 가끔 떠내려 가다가 한 번씩 언덕으로 올라와서 자신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가만히 관망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 이런 것이 공부이지 당장에 깊은 깨달음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그런 정도의 자신과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것들이 가장 쉽고 우리에게 가까운 공부의 효과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위의 경문에서 이야기했듯이 부처님은 오직 이 한가지 일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고 불자들의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계속
경문
55. 사리불아, 여래는 다만 일불승(一佛乘)을 위한 까닭으로 중생을 위해서 설법하시고 나머지 가르침인 이[二; 二乘]나 삼[三; 三乘]은 없느니라.
강의
일불승(一佛乘)이란 모든 사람이 진리로 나가는 것을 말하며 최상의 진리, 부처의 지견, 우리들의 묘심 등 실다운 법을 말합니다.
‘나머지 가르침인 이승(二乘)이나 삼승(三乘)은 없다’는 것은 불교 집안에 들어와서 어떤 종류의 수행을 하더라도 결국은 성불에 귀착되어야지 다른 목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참선을 해도 이것을 하면 건강이 좋다든지 신통이 자재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하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목적이 옳으면 다 거두어 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불이라고 하면 대개 거부감 내지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결국은 바른 삶, 눈뜬 삶, 깨어있는 삶을 뜻합니다. 가장 정상적인 생각과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꿈 깬 사람이고 성불과 거리가 멀지 않은 사람입니다.
경문
56. 사리불아, 일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57. 사리불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무량하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로써 중생을 위하여 제법을 연설하셨으니, 이 법은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이 중생들은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끝내는 모두 일체종지[一切種智; 부처님의 지혜]를 얻었느니라.
58. 사리불아, 미래의 제불도 세상에 출현하면 또한 무량하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제법을 연설하시느니라. 이 법도 다 일불승을 위한 고로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끝내는 일체종지를 얻으리라.
59. 사리불아, 현재의 시방에 무량한 백천만억 불국토의 제불세존은 이익되게 하는 바가 많아 중생을 안락하게 하나니, 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무량무수의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로써 중생을 위하여 제법을 연설하시니라. 이 법도 다 일불승을 위한 까닭에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이 법을 듣고 마침내는 모두 일체종지를 얻으리라.
60. 사리불아, 이 부처님들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니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에게 보이고자 하심이며 부처님의 지견으로 중생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지견에 들어가고자 하심이니라.
61. 사리불아, 나도 지금 또한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가지가지 욕망에 마음 깊이 집착함을 알므로 그 본성을 따라서 갖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과 방편의 힘으로써 법을 설하느니라.
강의
위의 경문중에 오 불장(五 佛章;다섯 부처님의 이야기)이 있습니다. 제일 불장은 46번의 제불(諸佛;모든 부처여래께서는···)이고 제이 불장은 57번의 과거불이고 제삼 불장은 58번의 미래불이며 제사 불장은 59번의 현재불이고 제오 불장은 61번의 석가모니불로서 방편품에서는 다섯 부처님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문
62. 사리불아, 이렇게 함은 다 일불승과 일체종지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63. 사리불아, 시방세계중에는 오히려 이승(二乘)도 없거늘 어찌 하물며 삼승(三乘)이 있겠는가.
64. 사리불아, 부처님들은 오탁악세의 세상에 나셨으니 이른바 겁탁 번뇌탁 중생탁 견탁 명탁이니라. 이같이 사리불아, 겁탁으로 어지러울 때에는 중생이 번뇌가 많아서 간탐하고 잘투하며 여러 가지 나쁜 근성을 이루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에서 분별하여 삼승으로 설하시니라.
강의
오탁악세(五濁惡世)중에서 겁탁(劫濁)이란 겁이 흐른다는 것으로 겁에는 감겁과 증겁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나이가 길 때를 팔만사천 세까지이고 제일 짧을 때는 십 세까지 인데, 부처님 당시엔 백 세쯤이고 백 년마다 한 살씩 줄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삼천 년이 지난 지금은 칠십 세로 점점 짧아지는 감겁에 놓였으며 시대적으로 매우 혼탁하여 기근 질병등의 천재나 전쟁 등의 사회악을 말합니다.
번뇌탁(煩惱濁)이란 탐 · 진 · 치 등의 번뇌가 많고 온갖 잡생각이 치성하여 여러 가지 정신적인 악덕이 난무함을 말합니다.
중생탁(衆生濁)이란 중생들의 심신의 자질이 저하됨을 말합니다.
견탁(見濁)이란 사악한 견해나 사상들이 난무함을 말하며, 이 시대가 그러하므로 우리는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잣대로 잘 재고 살핌은 물론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도 방편설 보다는 진실한 대승의 법으로서 올바르게 평가하고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명탁(命濁)이란 목숨이 짧아졌다고도 보며 직업이 다양하다 보니까 옳지 못한 직업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는 일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경문
65. 사리불아, 만약 나의 제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라 하면서 제불여래께서는 다만 보살들을 교화시키는 일을 한다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면 이는 불제자가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며 벽지불도 아니니라.
강의
위의 경문이 뜻하는 바는 부처님께선 보살들을 교화해서 끝내는 성불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인데, 이런 일을 듣지도 알지도 못했다면 그는 불제자나 아라한 벽지불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라한이나벽지불은 상당한 도를 이룬 사람인데 아무리 신통이 자재하고 불교의 정통을 잘 지키며 계를 잘 지킨다 할지라도 ????법화경????의 기준에서 본다면 불제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불교도의 상식은 어떤 불교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그 최종의 목적은 성불이다. 꿈에서 깨어있는 사람, 지혜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길이 성불의 길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길을 지향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문
66. 또 사리불아, 모든 비구 비구니가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아라한을 얻었다 하며, 이것이 최후의 몸이고 구경열반이라하여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뜻이 없다면 마땅히 알라. 이러한 무리는 모두 다 교만한 자이니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비구가 실로 아라한이 되고서도 이 법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느니라.
67. 부처님이 멸도한 후 부처님이 안 계실 적에는 제외할지니, 왜냐하면 부처님이 멸도한 후 이런 경전을 수지 독송하고 그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니라. 만약 다른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 이 법 가운데서 문득 해결하고 요달하게 되리라.
강의
위의 경문중에서 ‘부처님 멸도 후 부처님이 안 계실적에는···’이 구절에 담긴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물론 살아 있는 부처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 없을 때는 제외한다는 것으로 아는 것이 제일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가 부처님같이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이 불법 속에서 완전히 인생문제 생사문제 성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계속-
경문
68. 사리불아, 너희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믿고 이해하여서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지닐지니라. 제불여래의 말씀은 허망하지 않아서 여타의 다른 법(乘)은 없고 오로지 일불승만 있느니라.
강의
법화경을 신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일문일자(一文一字)가 시진불(是眞佛)이다.”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이는 “한 문장이나 글자 한 자가 그대로 참부처이다.”라는 주의가 법화경사상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불교적인 모든 행위는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하는 일, 법화경의 가르침, 금강경․화엄경 또는 부처님 제자들의 이야기, 조사들의 언행등 팔만 대장경의 가르침, 그 외에도 불교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향을 피우고 등을 다는 것, 먹물 옷을 입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온갖 일들은 전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원점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성도한,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일들 인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만든 어떤 새로운 제도라든지 일들도 모두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온갖 불사(佛事)는 전부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깨달음으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연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이 바로 법화경이라 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한 문장, 한 글자까지도 전부 ‘부처’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또 그 작업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글자 한 자 한 구절이 전부 깨달음 그 자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커다란 향나무를 이리 쪼개고 저기 쪼개어 불상도 만들고 염주도 만들고 다른 여러 가지도 만듭니다. 그런데 보면 삐져 내버린 조각들이건 염주건 불상이건 중생상이건 간에 전부 향기가 나고 향나무 임에는 틀림없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문일자가 참부처라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법화경을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이고 법화경을 이렇게 알면 바로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입장에서 생각할 것은, 앞에서 전 14품의 적문과 후14품의 본문을 이야기 했는데,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두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적문(迹門)으로서 자취적인 형체 행적, 이런 의미의 부처님이고, 이러한 부처님이 있게 한 본래의 부처님은 본문(本門)으로 나누어서 봅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게끔한 주인공이 있을 것이고(본문), 오늘날 이렇게 살고 있는 현상적이고도 외형적인 여러 분이 있습니다(적문). 현재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주인공)이 이렇게 살아가도록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자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문과 본문으로 나뉘어졌는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부분은 전14품의 적문중에서도 중요한 「방편품」입니다. 후14품의 본문에서는 「여래수량품」이 중요하지요.
원래 불교라고 하는 것은 길이 하도 복잡하고 많다 보니까 딴길로 헤매게 되어 있습니다. 또 깨달음이라고 하는 큰 길이 나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좋을 대로 가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는 이 길에 대하여 마음 속에 한 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이상에는 좋든 싫든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미 성불의 길로 들어 섰기에, 그것을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간에 성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불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삶, 인생이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성공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경문
69. 그때 세존께선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70. 비구 비구니로서 교만함을 품은 이들과 아만에 찬 우바새와 큰 믿음 없는 우바이들 이와 같은 사부대중은 그 수효 오천 명이라. 스스로 제 허물 보지 않고 계행에도 결함이 있어서 그 허물 감추고 아끼는 잔꾀 가진 이는 이미 나갔음이라. 대중 가운데의 찌꺼기들은 부처님의 위덕으로 물러 갔느니라. 이들은 복덕이 적어서 이 법을 받아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71. 여기의 대중은 지엽이 없고 오직 정실만 있으니, 사리불아, 잘 들으라. 모든 부처님은 얻으신 법을 한량없는 방편력으로서 중생을 위하여 설하느니라. 중생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갖가지의 행위들과 약간의 욕망과 성품들은 선세의 선, 악업들이라. 부처님은 이를 다 아시고 여러 인연과 비유와 말씀과 방편력으로 일체중생들을 환희케 하시고 혹은 수다라(經)와 가타(게송)와 본사(전생담)와 본생담과 미증유를 설하시며 또한 인연담과 비유와 기야(應頌)와 우바제사경(論)을 설하노라.
72. 우둔한 근기는 소법을 좋아하며 생사에 탐착하여서 모든 한량없는 부처님의 깊고 미묘한 도는 행하지 않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므로 이를 위해 열반을 설하는 것은 내가 이런 방편을 베풀어서 부처지혜에 들게 함이니라.
강의
열반은 무엇을 말합니까? 활활 타는 불이 다 사그러져 싸늘하게 식은 상태, 즉 우리 마음 속의 온갖 복잡한 번뇌가 다 식어 사라진 상태, 참으로 편안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편안하긴 하지만 적극적인 삶을 거기에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화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상과 다른 것입니다. 열반이란 얼른 들으면 좋습니다. 모든 번뇌가 다 사라져서 편안한 것 같으나, 대승의 가르침, 부처님의 본의는 부처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보살로서의 만행을 닦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반을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럴 오해의 소지는 많으나 부처의 삶은 그런 것을 절대 표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법은 아주 적극적이고 의욕에 넘치고 원력에 넘치는, 아주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인생을 권하고 있습니다.
나이나 배움의 정도 능력 등 그러한 겉모습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활기차고 희망과 기대가 넘치는 의욕에 찬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삶인 것이고, 부처님은 지극히 적극적인 삶을 늘 펼쳐 보이고 그렇게 살기를 강요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살았습니까? 관세음 보살 지장 보살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한 적극적인 삶이 바로 불교에서 나아가야 할 삶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동안 중생들이 너무나 고통에 차있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에 바쁘기 때문에, 그런 원력에 넘치고 남을 위해서 적극적인 인생을 살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일찍이 처음부터 그런 부처의 삶 보살의 삶 같은 말씀은 안하셨던 것입니다.
경문
너희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마땅히 불도를 이룬다’하는 말을 일찍이 말하지 않은 까닭은 말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이라. 지금이 바로 이때이기에 결정코 대승을 설하노라. 나의 이 구부(九部)의 법은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여서 대승에 들어감을 근본삼으려고 이 까닭에 이 경을 설하노라.
강의
대승이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살겠다는 것으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법화경은 대승중의 대승이기에 번뇌만 가라앉혀 나 혼자만 편안하겠다(열반)는 것이 소승이라면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법화경을 공부할 정도라면 이미 그런 정도의 개인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보고, 보다 더 큰 삶을 펼칠 시기라는 것이지요.
경문
73. 불자의 마음들이 청정하고 부드러우며 또한 영리하여서 무량한 부처님 처소에서 깊고 미묘한 도를 행하므로 이런 모든 불자를 위하여 이 대승경를 설하노니 내가 수기하는 이같은 사람은 내세에 불도를 이루리라. 깊은 마음으로 부처 생각하고 청정한 계율 닦아 지닌 고로 이들이 성불한다는 말 들으면 큰 기쁨이 몸에 가득하리라. 부처님을 그들의 마음 알기에 대승을 설하느니라.
강의
내세(來世)라는 것은 오는 세상, 즉 죽고난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다음 순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내일도 좋고 한 시간 후도 좋습니다. 그것이 내세의 바람직한 해석입니다.
경문
74.성문이나 보살이 내가 설한 법을 듣고 한 게송만 기억해도 모두 성불함에 의심 없으리라.
75. 시방의 불국토 가운데는 오직 일승법(一乘法)만 있음이요.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으나 부처의 방편설만은 제하느니라. 다만 거짓 이름으로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이고 불지혜를 설하려는 연고니라. 제불이 이 세상에 나오심은 오직 이 한가지 사실이요, 나머지 두 가지는 진실이 아니니 마침내 소승법으로서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느니라.
강의
불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간에 전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이라도, 예를 들어서 방생한다고 미꾸라지 사가지고 가다가 다 죽이는 꼴이 나더라도 그것도 역시 성불의 길로 향하는 일이기에 목적은 성불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과보를 받게 되어 있지만 그 동기가 성불하는데 있으므로 그 동기속에 싸잡혀 있는 꼴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다 성불하기 위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걷는 것 버스타는 것, 기차타는 것, 자전거 타는 것, 비행기 타는 것의 목적은 모두 서울을 가기 위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기왕 서울을 갈 바엔 좋고 빠른 기차를 타는 것이 굳이 걷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새마을호도 있는데 무엇하러 자전거 타고 가겠어요? 더 빠른 비행기도 많은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왕이면 지름길 효과 있는 길, 같은 노력을 들여서 수확이 좋은 것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하기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불교적인 행위는 전부 깨달음을 향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에는 오직 부처되는 일, 그 하나뿐이고 또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며 좋든 싫든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이 둘도 없고 셋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은 제외한다고 한 것은, 우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호랑이가 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지로 호랑이는 오지 않지만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가 온다고 했대서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방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편이 필요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방편에만 머물러서는 안되지요. 방편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소승인 것이고 목적이 성불을 위한 일이라면 대승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계속
경문
76. 부처님은 스스로 대승에 머무시고 그 얻은 바 법과 같이 해서 정과 혜의 힘으로 장엄하여 이것으로 중생을 제도함이니 스스로는 위없는 도(道)인 대승과 평등법을 증득하고도 만약 소승법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교화했다면 이는 간탐에 떨어지리니 이 일은 옳지 못하리라.
77. 만약 어떤 이가 부처믿고 귀의하면 여래는 속이지 않으며 간탐이나 질투의 뜻도 없느니라. 모든 법 가운데서 악을 끊었으므로 이 까닭에 부처님은 시방에서 홀로 두려울 바가 없느니라.
78. 나는 상(相)으로 몸을 장엄하고 광명으로 세간을 비추므로 무량한 중생에게 존경받을 새 이는 참말씀(實相印)을 설하기 때문이니라.
79.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의 중생들이 나와 다름이 없게 함이라. 옛날 내가 소원했던 것이 지금에 이미 만족하였으니 일체중생을 교화하여서 다 불도에 들게 함이었느니라.
80. 만약 내가 중생을 만나면 다 불도로서 가르치건만 지혜없는 자들은 잘못 알고 미혹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느니라.
강의
이 방편품은 방편에 대한 내용들인데, 부처님께선 왜 이런 방편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어둡고 지혜없고 미혹하고……. 일률적으로 못났을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으로 못났기에 온갖 방편을 다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못나고 우매하고 미련한 그러한 중생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런 많은 방편을 베풀어 눈뜨게 해주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의 경문들은 제가 몹시 좋아하는 대목입니다만, 부처님의 넉넉한 자비가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경문
나는 아노라. 이런 중생들은 일찍이 착한 근본 닦지 않고 오욕에 굳게 집착하여서 어리석음과 애착으로 번뇌를 내며 모든 욕망의 인연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지며 육도중에 윤회하여 온갖 고초를 두루 받으며.
강의
흔히 불교에서는 삼악도와 육도윤회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를 몹시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장경에 나오는 전설적인 것들은 물론 상징적이긴 하지만 그런 지옥의 형태가 그대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또 아귀라는 것도 경에서 설명되어진 액면 그대로의 아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지옥같은 인생살이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편안히 경전공부를 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지옥 같은 삶을, 지옥 같은 시간을 많이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수라 같은 인생도 내 주위에서 얼마든지 보고 듣는 바이고 내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아수라 같은 인생를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24시간, 365일 늘 그런 것은 아니로되 어느 한 순간이라도 아수라 같은 인생을 늘 접하고 있습니다. 또한 축생 같은 인생, 천상 같은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천상세계와 극락세계가 경전에 아주 호화찬란하게 그려져 있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극락 같은 인생도 얼마든지 있고, 천상 같은 삶도 지옥같은 삶을 사는 과정에서 가끔씩은 맛보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얼마든지 간단하게 육도윤회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 천상에 있는 하늘세계가, 신선의 세계가 정말 있다한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요는 경전에 담겨져 있는 오묘한 의미들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못해서 사실은 우리의 생활상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되겠지요.
경문
태중에서 작은 형상을 받아 세세에 고통이 점점 불어나고 덕이 없고 복이 없는 사람되어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삿된 소견의 숲속에 들어가서 혹은 있다 혹은 없다는 등의 이러한 여러 견해를 의지하여 62가지 잘못된 소견을 가지며 허망한 법에 깊이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고 굳게 지키며 아만으로 스스로를 높게하고 아첨과 마음굽어 불성실하며 천만억의 오랜 세월동안에도 부처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또한 바른법도 듣지 못하니 이같은 이를 제도하기 어려우니라.
강의
낡은 옷은 벗어버려야 새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새옷을 입어야겠다고 하면서 낡은 옷을 안 벗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의 사상, 생각, 다른 사람에 대한 소견들도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 자꾸 새롭게 새롭게 발전하려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가진 생각에 대해서는 굳게 잡고는 버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라도 자기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문
81. 이 까닭에 사리불아, 내가 그들을 위해 방편을 베풀어서 모든 고(苦)가 다한 길을 설하여 열반으로써 보이니 내 비록 열반을 설했으나 이 또한 참된 멸도가 아니니라.
82. 모든 법은 본래로부터 항상 스스로가 적멸한 모습이니 불자가 이런 도를 행한다면 내세에 부처를 이루리라. 위해 사구게(四句偈)는 법화경에서 중요시 되는 사구게입니다. 또한 이것은 시식할 재의 끝부분에 영가를 떠나보낼 때 하는 마지막 게송인 것입니다.
제법(諸法)이란 지금 말하는 나, 말하는 대상, 여러분의 육신과 정신세계, 우리가 의지하는 건물과 땅덩이 공간과 시간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법은 항상 본래부터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열반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은 적멸상이 아니고 온갖 차별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적멸상이란 온갖 차별상이 다 사라져버린 실제의 모습이며 차별상의 본체(本體)가 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은, 우리 인식으로 이해되어지는 모든 것들이 차별상이라면, 이 인식되어지는 세계의 본체(주체․모체․실상)는 적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멸상은 통일되어 있고 여러 가지 상이 아닌 하나인 것입니다. 부처나 우리나 적멸상의 입장에선 하나이나 차별상이 되었을 때는 부처가 있고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남녀가 있고 동서가 있지만 적멸상에는 동서, 남녀, 부처와 중생이 없는 본래의 모습 그 자리가 바로 적멸상입니다. 그러기에 윗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차별된 현상인 제법은 본래부처, 근본을 본질을 따져서 보니까 적멸상이라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한다면(적멸상의 이치를 실천한다면), 적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즉시 부처가 된다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멸상, 우리 생명의 실상, 제법의 본체를 깨닫는 그 순간 그대로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란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는 분이니까 그렇습니다.
경문
83. 내가 방편력이 있어서 삼승법을 열어 보였으나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다 일승도를 설하시느니라. 지금의 이 모든 대중들은 마땅히 모든 의혹을 다 제거하라. 제불의 말씀은 다름이 없어서 오직 일승이고 이승은 없느니라.
84. 과거의 무수한 겁에 한량없이 성불한 부처님들은 백천만억 가지로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이와같은 여러 세존께서는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수없는 방편력으로써 모든 법상(法相, 이치)들을 설명하셨으니 이 모든 세존들께서도 다 일승법을 설하시어 무량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가게 하셨느니라.
강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달음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와 관계된 모든 것들은 그 시원(始原)이 깨달음에서 나온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은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지금까지 펼쳐온 법화경 경문들의 내용도 간추리면 이런 뜻을 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삼승을 열어 보였지만 결국은 일승도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에서 목탁․요령․염주․죽비․경전 등이 나왔지만 이것들은 결국에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도구이듯이 여러 수만 가지의 삼승도 일승에서 나왔고 종래엔 일불승으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어떤 불교행위든지 간에 이 원칙만 안다면 잘못 헤매일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경문
85. 또한 모든 큰 성인인 부처님은 일체세간에 있는 천상, 인간의 여러 중생들의 깊은 마음속 욕망을 아시고 다시 다른 방편으로써 제일의 뜻을 나타내게 하심이라.
86. 만약 어떤 중생들이 과거 여러 부처님들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보시를 하며 혹은 지계와 인욕과 정진․선정․지혜 등으로 가지가지 복과 지혜를 닦으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다 불도를성취했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사람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우면 이와 같은 중생들도 이미 다 불도를 성취했느니라.
87. 모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사리에 공양하는 사람이 만억 가지의 탑을 세우되 금과 은과 파리와 자거와 마노와 매괴와 유리 구슬로써 훌륭하게 널리 꾸미어 모든 탑을 장엄하며 혹은 돌로 된 탑묘를 세우되 전단향과 침수향나무와 목밀과 그 밖의 다른 재목과 벽돌․기와․진흙 등으로 꾸미며 만약 넓은 들판에 흙을 쌓아 부처님 탑묘를 세우거나 내지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들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은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88.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위해 여러 형상을 건립하며 여러 가지 상호들을 새기면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89. 혹은 칠보로써 만들거나 놋쇠와 적동․백동과 백납과 아연․주석과 쇠붙이․나무․진흙으로 만들며 혹은 아교로 칠한 베로써 불상을 장식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다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90. 채색으로 불상을 그리되 백복이 장엄된 형상으로 자기가 그리거나 남을 시켜도 이미 다 불도를 이뤘느니라.
91. 심지어 아이들이 장난으로 풀과 나무와 연필이나 혹은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부처님을 그렸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점점 공덕을 쌓아가서 대자비심을 구족하게 되어 이미 불도를 다 이루었고 오직 보살들을 교화하여서 무량중생을 제도하였느니라.
92. 만약 어떤 사람이 탑묘와 부처님 상과 탱화에 꽃과 향과 번개로서 경건히 공양하거나 만약 사람을 시켜 음악을 하되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며 퉁소․피리․해금 공후와 비파․징․요령과 이같은 갖가지 묘음으로써 다 고르게 공양올리며 혹은 즐거운 마음으로 부처님 공덕을 노래하는데 비록 작은 소리였을지라도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강의
이상으로 볼 때, 삼귀의 노래를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조그맣게 모기소리를 냈더라도 이미 성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자비와 관용과 아량과 그 수용하는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들은 부처님이 온갖 방편을 다 기울여서 한 중생도 놓치지 않고 다 성불하도록 하는 자비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별안간 장자의 집에 불이 났었다. 삽시간에 불길이 온 집안을 덮었다. 모든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집 밖으로 뛰어 나오고 있는데 장자의 아들들은 집에 불이 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들의 놀이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내 아들들이 모두 불에 타죽고 말겠구나. 마땅히 좋은 방편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장자는 생각하고 평소 남달리 장난감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장자는 "얘들아 여기 좋은 장난감이 있으니 어서 나와 봐라"하고 소리쳤다. 그때 아이들은 장난감이라는 소리에 신명이 나서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하여 밖으로 뛰어나온 아이들에게 장자는 어떻게 했었는가?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큰 장자가 살고 있었다. 장자는 이미 나이 많고 쇠약해졌으나 재산은 한량이 없었다. 토지와 집에 딸린 하인도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집은 크고 넓었는데 문은 오직 하나가 있어 많은 사람이 출입하였다. 백 명 이백 명도 또는 오백 명도 되었다. 장자가 이 집에 산지도 세월이 오래 흘러 재목은 썩고 담장은 금이 가고 기둥도 좀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안간 이 집에 불이 났다. 그리고 삽시간에 불길이 온 집안에 퍼졌다. 집안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문밖으로 뛰어 나갔는데 오직 장자의 아들들만은 나갈 줄을 몰랐다. 장자의 아들은 30명이나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래어 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들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장난에만 정신 팔며 놀고 있었다. 불이 금방 집을 덮쳐 위험이 급박했는데도 전혀 알지 못한다. 장자는 아들들의 위험을 보고 급히 뛰어 나오라고 소리치지만 아들들은 아예 들은 척을 않는다. 불이 나고 집이 타고 있다하여도 불이어디 있으며 집이 어떻단 말인가? 하면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놀고만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자는 생각하였다. <이러다가는 내 아들을 다 타죽이겠구나. 마땅히 묘한 방편을 세워야겠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하니까>하고는 급히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어서 나와 봐라 여기 좋은 장난감이 있다. 빨리 와서 갖지 않으면 후회한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문 밖에 있으니 어서 나와 타고 놀아라.” 그때에 아들들은 장난감이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뜩 들어 신명을 내어 서로 밀며 닥치며 문 밖으로 뛰어나오니 드디어 불집의 난을 면하게 되었다.
수레는 높고 크고 가지가지 진귀한 보물로 잘 꾸며져 있다. 장자가 이 모두들에게 값진 보배를 나누어 주었던 것은 모두를 평등히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며, 치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문 밖에 나와 큰길가 흙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장자는 아들을 구한 기쁨이 대단하였다. 그때 아버지를 본 아이들은 달려와서 양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를 어서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다. 그때 장자는 아들들에게 똑같이 큰 수레 하나씩을 내어주었다. 그 수레는 높고 크며 가지가지 보화로 꾸몄고 사방에 방울을 달고 번을 달고 진귀한 보물로 잘 치장되었다. 그리고 한 마리의 흰 소가 끄는데 그 소가 또한 뛰어났다. 털빛은 희고 살결은 깨끗하고 형체는 크고 덕스러우며 힘이 대단히 세다. 걸을 때는 반드시 걷는데 빠르기는 바람과 같다. 이런 수레를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장자는 실로 보배가 한량이 없었던 것이다. 장자가 어찌하여 양 수레나 사슴 수레같은 작은 수레를 주지 않고 고루 큰 수레를 주었을까? 장자는 어린 것들 모두가 자기의 친자식이며 평등히 사랑하여 치우침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장자는 누구이며 아들은 누구일까? 장자는 부처님을 비유하심이고 아들이란 모든 중생을 가리킨다. 부처님은 공덕이 한량없고 무한의 위신력을 가져 자재하시다. 이 부처님 집안에 출입하는 사람은 오백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상과 인간과 지옥과 아귀와 축생 등 오도 중생을 가리킨 말이다. 그 중에 아들이 혹 열 이십 삼십 명이나 된다 하였으니 이는 성문 연각 보살승을 가리킨 말씀이시다. 이들 삼승 사람들은 모두가 색 수 상 행 식 등 오온을 집으로 삼고 있는 것이며 이 오온은 번뇌와 업으로 인하여 세차게 타오르고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놀라지 않을 것이며 급히 뛰어나오고자 하지 않으랴. 부처님은 이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 아들들로 하여금 속히 삼계의 불집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우시며 또한 인도하시는 것이다. 금방금방 이 몸이 허물어지고 금방금방 이 세계가 변해가는 것을 그것을 모르고 탐착하고 재미있다고 빠져있는 중생들을 온갖 방편을 베풀어서 일깨워 주신다. 범부들은 미하여 이 사실을 모르고 불집에서 놀이에만 정신 팔고 있는 아이들처럼 태연히 있는 것이다. 오욕에 탐착하고 지혜가 없다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것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속히 뛰어나오라, 외치지만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이 몸둥이가 오온으로 된 것이며 오온은 바로 불붙은 집과 같은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서 불은 무슨 불이며 집은 무슨 집인가? 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탐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등 이 세 가지 독한 것을 삼독이라 하지만 불 가운데서도 이 불이 참으로 독한 불이다. 삼독의 불이 오온의 집을 또한 안에서 불 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인 부처님은 너무나 자비하시고 너무나 지혜로우시다. 아이들이 놀이개를 좋아하는 것처럼 중생들은 소득을 희망한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로 불집에서 정신없는 아이들을 달래어 문 밖으로 뛰어나오게 하였으니 이들 수레란 바로 성문과 연각과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이 삼승은 우선 불집에서 중생들을 끌어내는 데는 족한 것이다. 양 수레나 사슴 수레는 한 사람이나 혹 두 사람을 태울 수는 있는 것이다.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는 불집에서 정신없는 아이들을 달래어 문 밖으로 뛰어 나오게 하였으니 이들 수레란 바로 성문과 연각과 보살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면서 먼저 자기구제 자기해탈의 자그마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펴셨다. 계행을 가지며 보시에 힘써 천상에 나고 또한 삼매를 닦아 사과(四果)를 얻게 하셨다. 이래서 족히 자기만이라도 삼계화택에서 벗어날 길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제 불집에서 뛰어나온 아들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그들은 편안한 땅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장자는 이들 아들에게 고루 큰 수레를 나누어 주었다. 이 수레는 온갖 장엄과 공덕이 가득하고 자재한 위신력을 가진 큰 수레다.
부처님은 이 세간에 아버지이시다. 일체 두려움과 고뇌와 무지를 영영 없이하였고 무량한 대신력과 대지혜력과 대방편력을 갖추시어 항상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그들을 삼계화택에서 건져내심에 쉴 날이 없으신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
부처님은 일대사 인연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일대사 인연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보여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더욱이 부처님께서 이 현상계에 몸을 나투시면서 중대한 선언을 하셨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그것이다. 사실 부처님은 우주간에 홀로 존귀한 분임에 틀림없다. 천상천하에서 이제까지 그토록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이 선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존엄을 설파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까지는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인간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선언을 하시기 이전에는 신에게 예속되어 있기가 일쑤였다. 심지어 불귀신 물귀신 바람귀신들에게도 예속되어 있어왔다. 귀신에 뿐만 아니라 하등동물에게까지 그것들이 힘이 세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에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탄생은 인간존엄의 사상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와 유사한 사상은 불란서혁명 당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인권선언을 부르짖은 일이다. 그러나 이 서양의 인권선언은 신에게 예속되어 제한된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부처님의 인간존엄사상은 우주의 만유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 사람은 누구나 다같이 불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상계에서 볼 때는 남녀가 있고 노소가 있고 귀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한갓 인연의 소치일 뿐, 본체(本體)에 있어서는 한가지로 평등하게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본래 존엄한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제일 위대한 존재라고 해서, 어떤 식자(識者)는 상형문자 큰대[大]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두 팔을 벌리고 있으며, 두 다리는 땅을 딛고 서 있는 자세이다. 허공을 향한 머리는 이상(理想)을, 땅을 디딘 다리는 현실을, 그리고 두 팔과 손은 그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동체(胴體)가 체(體)라면 거기에 달린 사지는 용(用)의 작용을 한다.
석존께서도 탄생하신 그 순간에 한 손으로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켰다는 것은 실상계(實相界)와 현상계를 아울러 지적하는 것이었으며 달리 말해 이상과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미혹의 바다에 빠져있는 중생을 건져주기 위해서이다. 저 언덕에서 자비롭게 소리치는 부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좀처럼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친히 직접 미망의 바다에까지 들어오셔서 중생과 더불어 살며 구제의 방편을 강구한 것이다.
그 방편이 『법화경』 신해품(信解品)에 잘 나타나 있다.
장자의 외아들이 어려서 가출하여 집을 잃고 떠돌이로 방황하기 50년. 장자도 외아들을 찾기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아들은 우연히 아버지집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다.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기쁨에 넘쳐 하인으로 하여금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아들은 장자의 집이 하도 화려한데 놀라, 해를 입을까 두려움이 앞서, 졸도할 정도로 한사코 집에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장자는 방편을 써서 당분간은 하인들과 더불어 넉넉한 품삯으로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하였다. 차츰 그 집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이윽고 곳간의 금은보화의 관리까지도 맡기게 되었다.
장자는 자신의 여명이 다한 것을 알고 하루는 일가친척, 친구, 지기들을 모아놓고, 하인의 한 사람이 자기 아들임을 모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기 재산의 전부를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던 아버지를 찾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은 기쁨에 넘쳐 그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 장자는 부처님이고 그 아들은 중생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외아들처럼 사랑하고 계시다.
如富長者知子志劣 여부장자지자지열
以方便力柔伏其心 이방편력유복기심
然後乃付一切財物 연후내부일체재물
佛亦如是現希有事 불역여시현희유사
『법화경』 「신해품」게송의 일부
부자인 장자가 아들의 뜻이 용렬한 것을 알아서 방편으로써 부드럽게 그 마음을 조복시키고 그러한 뒤에 이에 일체 재물을 부탁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이와 같이 드물게 있는 일을 나타내시었도다.
1.악을 깨닫다.
법화경의 골격이 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은 「즉신성불(즉신성불)」과 「사바세계가 곧 불국토 」라는 것인데 법화경에는 문수보살. 미륵보살. 보현보살 등이 나타나 부처님의 설법을 돕고 있다. 그중에 보현보살의 활약하는 의미에 대해서 나는 근일 깊이 느끼는 바가 있다. 첫째 법화경에는 많은 오해가 있었다. 이 몸으로 곧 부처가 된다는 즉신성불이라는 말의 큰 의미가 있는 것을 등한히 했던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일념삼천이라는 법문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었는데 그때 나는 일념은 일순간의 마음이다. 삼천이라 하는 것은 극대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이 일념 속에 삼천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는 공식적인 설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내 나이 팔십이 되고 보니 그 법문의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하게끔 되었다. 분명히 부모에게서 받은 이 몸을 가지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들 인간은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없고서는 즉신성불이니, 사바세계가 곧 불국토니 하고 말할수록 그 반면에 인간은 또 다른 약점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옛 성인들이 보현보살을 중히 여긴 뜻이 알만 해진다. 보현보살은 참회를 설하는 보살이다. 만약 참회를 뺀다면 보현보살의 존재이유는 없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참회는 육근청정이라는 것이다. 육근청정이라 하는 것은 눈이나 귀와 코가 청정하다는 뜻이지만 결국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보현보살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에게 참회를 가르칠 것이라 생각한다. 참회라 하면 천주교에서 신자가 참회를 하면 신부가 그것을 용서한다고 하지만 불교에는 누구든 인간에 대한 심판자는 아니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없고 따라서 신이라는 개념도 없다.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므로 인간이 아무리 진보 향상하더라도 신은 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절대타자이고 그 입장에서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이 불완전한 것을 악인, 또는 약자라고 한다. 살인이나 도적질한 것만이 악인이 아니고 불보살에 비교하여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마음이 악이라는 말 가운데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그런 악인이라는 자각은 불보살의 훌륭한 행위나 말씀에서 알게 된다. 그것을 모르면 참회심이 날 리가 없다. 참회라 하는 것은 다만 죄를 고백하고 사과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기생활이 불완전한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잘못이 없는 생활에 들고자 맹세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2.모두에 이어지는 것
그러면 불교도의 서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보살의 사홍서원으로서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 」으로서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불보살의 훌륭한 행에 자기도 가까와지고자 하는 이상을 세워 그 이상을 실현할 노력이 없다면 이상은 한낱 공상이 되고 만다. 거기에는 구체적 노력이 필요한데 이상을 세우지 않는 행동은 망동이 된다. 공상과 망동을 떠나 이상을 실현하는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 서원인 것이다.
여기서 참회라 하는 것은 자기 생활의 불완전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는 불보살님과 똑같은 생활을 하려고 서원하는 것으로서 거기에 참회의 의미가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나타내지만 보현보살은 진리를나타낸다. 법화경 서품에 전개되는 세계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온갖 중생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경건히 합장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우러러 본다. 즉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유기적필연의 공존관계가 전개 되어 있다.
그때 부처님은 선정의 모습, 즉 적연부동의 모습으로 유기적 필연의 공존관계라는 대우주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때에 부처님의 미간에서 광명이 뻗혀 나와 동방 일만팔천국토를 비추었는데 거기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이 신기한 것을 본 대중들은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기대와 의문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있던 미륵보살자신도 똑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지혜보살이 문수보살에게 이것이 무슨도리인가 질문하였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은 옛날에도 이런일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큰 법을 설하게 되는 징조라고 대답하였다.
3. 올바른 방편
다음에는 방편품이다. 참된 지혜를 알게 되면 여러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방편이다. 예를 들어 학생에게 강의를 할 때에 교사 자신이 잘 알고 강의를 하면 반드시 학생들에게 알 수 있도록 어떻게든지 방법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 뉴욕의 한 아파트 근처에 공원이 있는데, 그 근처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항상 놀러갔는데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어머니가 아기에게 물어니 아기말이 공원에는 친절한 할아버지가 계셔서 수학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것은 학교선생님보다 재미있고 잘 알게 되므로 돌아오는 시간을 잊었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공원의 할아버지가 누구인가 알아보니 아인슈타인이었다는 것이다. 근본을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이기에 국민학교 어린이에게 까지 알도록 설명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지혜가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보살도 六바라밀 중에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있는데 이 지혜는 지식을 얻는 마음의 능력이다. 참된 것을 자기가 얻어면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는 열 두가지 명호가 있다.
그중에 세간해(世間解)라는 것은 남성, 여성 각기가 환경도 사정도 재능도 각기 다르지만 부처님은 하나 하나 안다는 것이다. 거기서 바른 방편이 있게 되어 법화경의 방편품은 참된 의미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 언제나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문수보살과 미륵보살이 활약하여 즉신성불의 뜻을 말씀하고 있다.
4. 부처님 자리에
법화회상에서 부처님이 설법하고 계실 때 그 앞에 훌륭한 탑이 나타났다. 이 탑 안에는 다보여래 가 계셨다. 부처님은 다보여래와 나란히 앉아 계셨다. 다보여래의 탑이 공중에 있을 때 부처님이 거기 앉았으니 부처님은 높은 자리에 앉았고 대중들은 땅위에 앉았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부처님에게서 감로법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거기에 이르고자 생각한 것으로서 이 부분은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은 법화경은 인간가치를 대단히 높이 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인간이 성을 내면 지옥에도 떨어진다. 성낸 사람 자신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 괴로움이 지옥고다. 천태대사도 말하기를 『성낸 마음이 가득할 때 그 사람이 빠진 경지가 지옥이다 』라고 했다. 아귀라 하더라도 입을 것 먹을 것을 탐내서는 안되는 것을 잘 알지만 남의 친절이나 봉사를 탐하고 그 탐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괴로움은 크다. 이런 때 떨어지는 경지가 아귀도인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은 한쪽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현보살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여야 한다고 자각을 촉구한다. 그러지 않고는 법화경을 믿는 것이 아니게 된다.
5. 보현보살의 가르침
법화경 최후의 장에는 보현보살이 나타난다. 경에는 『그때에 보현보살이 자재한 신통력과 위덕과 명문으로서 무량무변한 대보살과 함께 동방에서 왔다 』하였는데 동방이라 하는 것은 인도의 동쪽이 아니다. 불교에서 동은 사물이 시작하는 모양이고서는 사물을 거두는 형이고 북은 사물을 간직하는 형이고 남은 사물이 무성한 형태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말하는데 이 사바세계는 남염부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현보살이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거기 모인 대중을 대신하여 부처님께서 멸도에 드신 후 「어떻게 하면 법화경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한다. 부처님은 그에 대하여 네가지를 성취하면 부처님이 멸도한 뒤라도 법화경을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다고 대답하셨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부처님이 호념하여 주시는것 여기에 호념이라 하면 부처님께서 다만 보호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가 속히 성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원이므로 이 본원을 성취하도록 이바지할만한 자신이 있어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 부처님께 호념된다. 둘째는 여러가지 덕본을 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충돌도 많다. 그런 때 자신은 최후에 성불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이것이 모든 덕본을 심는 것이 된다. 세번째로 바른 정에 드는 것이다. 법화경 입장에서 말하면 인간세상에는 적으나마 바른 정이 있다.
그래서 바른 정의 모임이 일할, 삿된 정의 모임이 일할, 중간의 팔할은 부정취이다. 부정취라고 하는 것은 형세따라 어느 쪽으로 든 기울어 진다는 것으로서 현대는 매우 위험한 시대라고도 생각이된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일에 대하여 그 한 이유로서 부인의 타락을 말한다. 부인의 타락이라는 것은 남성의 타락과 같은 것이다. 성도덕이 퇴폐하여 카알라일은 말하였다. 우리들 인간세계에서는 이 부정취의 동향이 문제가 된다. 저들의 동향 여하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부정취를 어떻게 하여 정정취로 향하게 할까? 될 수 있는대로 사정취가 부정취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인간 사회가 지속되고 휼륭히 되느냐의 여부는 부정취의 동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끝으로는 일체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부족한 것을 참회하여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것을 깊이 반성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보현보살은 대강 이런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모두가 귀한 자기 자신
겸손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이웃을 다정하게 대하고 늘 웃는 낯을 띄운다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화를 내고 남을 탓하는 버릇이 곧 중생심인 줄 안다.
「법화경」에는 상불경보살품이라는 짤막한 가르침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하시던 때의 이야기이다. 위덕왕(威德王)이라는 이름을 가진 임금의 밑에서 묵묵히 수행하는 구도자의 진실한 이야기인데 퍽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름 그대로 상불경보살은 어느 누구도 가벼이 대하지 않는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혹은 나이가 어린 사람일지라도 공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는 동구 밖에서 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해를 지운다.
그 겸손의 밑바닥에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믿음이 있다.「법화경」의 사고 방식대로 표현한다면「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 된다.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귀해 보이고 모든 물건이 내 것처럼 아까와 보이는 것이다.
요사이처럼 빈부 격차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시대도 드물 줄 안다. 온통 신문의 논조(論調)가 그렇고 사람들의 의식 자체도 그렇게 물들여져 간다. 이와 같이 「가진자」와 「못가진 자」를 나누는 사고 방식은 끝내 양자의 감정을 첨예화하게 대립시켜 간다.
모 가진자는 억울하다. 똑같이 공부하고 더 많은 노력을 했느데도 왜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느냐고 한탄이다. 그러나 가진 자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피땀어린 댓가로 이루어 놓은 부와 명예를 단순히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매도당하는 것이 분할런지도 모른다. 없는 자는 가지려 하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가진 자는 뺏기지 않으려 한다. 이 풀리지 않는 악순환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상불경보살을 생각해 본다. 그와 같이 이상을 지닌 사람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가진 자가 겸손해 지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상별경보살의 서원(誓願)을 간직하는 길 뿐이다. 물리적 제재는 언제나 반발이 따른다. 무턱된 희생의 강요도 또한 불협화음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겸손과 넉넉한 너그러움
가진자의 오만처럼 꼴불견인 것은 다시 없다. 부모 잘 만나서 혹은 장가 잘 든 덕분에 거드름을 피운데서야 어디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인가. 비단 부의 과시 뿐만 아니라 지적(知的)인 오만도 무척 볼썽 사납다. 「나는 잡문(雜文)은 안쓰는 성격이라서…」이 세상에는 논문만 읽는 사람이 전세내서 사는 곳은 아니다. 그것이 돈이건, 명예건, 학식이건, 혹은 수행이건 간에 가진 이는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대각(大覺)을 얻우신 후 비로소 부처라는 인격을 얻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위대성은 「깨친 사실」에 있다기보다, 그것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에게 널리 현양하셨다는 데에 있다. 그 분은 자신을 마다하는 무명(無明)의 사바(娑婆) 속에서 그 빛나는 예지의 빛을 드높이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못가진 자」의 억울함도 시정되어야 할 필연성을 지닌다. 못가진 자의 의연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이 비굴해 진다는 것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실증을 나는 인도에서 배웠다. 인도의 지성인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집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변변한 구두 한 켤레 없이 살아 가지만 조금도 비굴함이 없다.
그들의 영혼은 기름지고 마음은 넉넉하였다. 삶의 의미를 보이지 않는 미래 속에 침잠(沈潛)시킬 줄 아는 멋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교를 잘 믿는다는 것이 결코 법회(法會) 열심히 나가고 시주 잘 하는 일에만 있는 것은 아닌 줄 안다. 늘 겸손한 마음씨를 지닐 줄 아는 것,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가꿀 줄 아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절은 「절」을 많이 해서 절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지극한 수행인은 겸손한 사람이다. 어려울 때 배운 법문(法門)중에 하심(下心)한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친다. 나보다 못한 이를 없이 여기지 않는 자세, 억울한 심사를 지그시 누를 줄 아는 마음씨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 하심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겸손하다는 뜻이 된다. 예로부터 스님들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가운데 「빈도(貧道)」라는 것이 있다. 이 얼마나 멋있는 표현인가. 주어도 준 바가 없고 채워도 가득함이 없다. 한결같이 가난한 마음뿐이다. 몸에 걸친 것은 누더기, 가진 것은 발우(鉢盂)와 지팡이 그의 마음 속에는 늘 넉넉한 너그러움이 넘칠뿐이다.
시대가 변하고 인심이 달라진다고 해도 이 「빈도의 정신」은 달라져서는 안된다. 또 그것은 비단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실천 덕목일 수만은 없다. 어느 사람이건그 내면의 세계는 반드시 밖으로 우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게 현대 속에서 우리는 가난한 얼굴 보다는 번들거리는 모습을 많이 본다. 수심에 가득 찬 얼굴, 뻔뻔스러운 얼굴, 삶의 번뇌에 지친 얼굴들을 대할 때 마다 겸손하면서도 넉넉한 얼굴이 그리워진다. 석굴암 대불의 모습에서 풍기는 그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이 자주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잘 낫다는 생각을 「대승 기신론」에서는 만(慢)․의(疑)․견(見)으로 요약한다. 만(慢)이란, 물론 교만한 마음을 가르킨다. 내가 남보다 낫기 때문에 상대방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는 논리의 비약을 가르킨다. 의(疑)란, 매사에 여우같은 의구심을 갖는 그릇된 마음씨를 뜻한다. 혹시 속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즉 불신(不信)의 장벽이다. 견(見)이란, 자기만을 내세우는 일이다. 남의 말에 귀기울이고 남의 지혜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고집하는 아집이다.
이 세가지 그릇된 마음은 모든 「어리석음」을 근본으로 한다. 자기의 실상(實相)을 왜곡할 수 밖에 없는 그릇된 자기 인식 때문이다.
부처가 되기 위한 보살
부처님은 언젠가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다「비구니들아, 저 히말라야의 광활한 산맥이 온통 보석으로 뒤덮히고 갠지스의 물줄기가 다 황금으로 변한다 해도 중생들의 욕망은 그침이 없으리라」
인간은 결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려는 구도(求道)의 자세를 지닐 때, 비로소 인간의 인간다움이 발휘될 수 있다.
상불경보살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는 결국 인간의 근본 자세가 겸손하고 지족(知足)함에 있음을 말해 준다. 옛날 신라나 고려 때의 군왕과 귀족들은 이 가르침을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 부처님의 가르침이 소중한 만큼 진한 삶이 되고자 힘썼던 것이다. 그것이 곧 국력이며 민족혼으로서 응결된다.
가진 자의 겸손은 이렇게 폭넓은 반향(反響)을 일으킬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록 금과 옥조라 한들 생활 속에 실천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우리는 많은 다른 신행을 본다. 혹은 기도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불자, 혹은 불공(佛供)만을 마음에 두는 불자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불교관을 본다. 개중에는 그저 「좋은 말씀」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바로 성문(聲聞)이고 연각(緣覺)이다.
불교의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보살이 되어야 한다. 보살이 되려는 서원, 그 보살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이룩하려는 원행(願行)이야말로 우리 불교의 지배적 경향이어야 한다.
절문 앞에서 합장하며 신도를 맞는 스님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상불경보살의 이미지를 본다. 합장한 손끝에서 시리도록 저려 오는「경건함」을 느껴 본다. 그러면서 빈도가 자꾸 부도(富道)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파온다.
[출처] 법화경의 사상 연구|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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