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알기

법화칠유(法華七喩)

수선님 2019. 8. 11. 11:45

법화칠유(法華七)

대승경전은 보수적인 출가 중심적, 계율에 의하여 엄격한 수행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론적이고 현학적인 불교를 지양(止揚)하여 석존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불탑을 중심으로 신앙하고 신봉하던 수행자 집단과 재가자측, 즉 일반대중에서 발생한 산물이다. 그러기에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교설 내용도 번잡한 교의나 이론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하고 대중적인 불전문학의 내용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교설 내용들도 거의 비유와 인연담(因緣談)이 많이 수용된 것이다.


[법화경]도 그러한 작품의 하나로 그 내용 중에 옛날부터 "법화칠유"라고 하여 매우 중시되어 왔다. 그러므로 제2권 가운데 제3 비유품의 내용을 먼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법화칠유法華七兪
화택비유火宅譬喩 - 제2 비유품譬喩品
궁자비유窮子譬喩 - 제3 신해품信解品
약초비유藥草譬喩 - 제5 약초유품藥草喩品
화성비유化城譬喩 - 제7 화성유품化城譬品
계주비유繫珠譬喩 - 제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
왕계비유王繫譬喩 - 제14 안락행품安樂行品
의사비유醫師譬喩 - 제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 비유품에서 화택의 비유를 설하고, 제2 신해품에서 장자궁자의 비유, 제5 약초유품에서 운우의 비유, 제7 화성유품에서 화성의 비유, 제8 오백제자 수기품에서 계보주의 비유, 제14 안락행품에서 정주의 비유, 제16 여래수량품에서 의사의 비유 등이다. 이들 일곱 가지 비유 말고도 제6 수기품에 '대왕선의 비유'와 제15 종지용출품의 '젊은 아버지와 늙은 아들'의 비유가 있다.


1. 화택의 비유 火宅譬喩


첫 번째 비유인 화택은 '삼계화택의 비유'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리불존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기도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에 사리불의 간청에 따라 이제 진실로 비유를 써서 이 뜻을 밝혀야 한다고 해서 설해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유를 통해서 참된 의미를 발굴해 내는 것이다. 비록 비유가 어설픈 점이 있다할지라도 그 전하려는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어설픈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 즉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글줄과 글귀의 문구에 걸리어 그 본의를 잃어버리면 마치 늙은 할머니가 나뭇잎을 가져와 세면서 돈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글의 바른 종취(宗趣)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연로한 한 거부 장자가 있었는데, 단 하나의 문만 있는 대 저택에 많은 노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 저택은 매우 낡아 무너지려는 곳인데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화재가 일어났다. 그런데 장자의 아이들은 노는 데 열중하여 장자가 밖에서 나오라고 소리쳐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자는 꾀를 내어 아이들이 갖고 싶어했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문 밖에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문 밖으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 수레가 없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수레를 달라고 요구하자. 아버지는 부자이기 때문에 아주 그보다 더 크고 화려한 흰 소의 수레를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유명한 말씀이


"삼계는 편안함이 없다. 오히려 불난 집과 같다. 온갖 고통이 충만하므로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의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다. 그 중의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라는 문장이다.


여기서 거부장자란 부처님이고, 큰 저택이란 미혹한 중생의 세계이다. 그리고 화재란 이 탐(貪), 진(瞋), 치(癡)란 미혹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뇌하며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아가 아들들이란 일체중생으로서 부처님께서 이 고통의 세계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서 양의 수레란 성문의 사제법과 사슴의 수레란 연기법과 소의 수레인 보살도란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설하시어 유인하고서 마지막으로 흰 소의 수레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열어 보이신 것이다.


이 "삼거(三車) 일거(一車)의 비유"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삼거가(三車家)'와 '사거가(四車家)'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 사슴, 소와 크고 흰 소의 수레를 같은 것으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이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즉 중국 {법화경} 주석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승 중의 불승(佛乘)과 삼승의 구별을 초월한 불승(佛乘)이 있다고 하는가 하면, 혹은 삼승 중의 불승 이외에 불승은 없다고 보는가에 의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실한 대승과 방편의 대승이 있다고 하는가? 혹은 대승에는 그러한 구별은 없다고 하는가?’였다. 전자는 '사거가(四車家)'라 하는데 이에는 천태종의 천태대사와 화엄종의 현수법장이 이를 주장하였고, 후자는 '삼거가(三車家)'라 하는데 여기에는 삼론종의 가상대사와 유식종의 자은규기대사가 여기에 속한다.


2. 장자궁자의 비유 窮子譬喩


두 번째, 장자궁자의 비유는 앞의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신해품에서는 수보리존자와 대가전연, 대가섭, 대목건련존자 등 사대성문의 환희에 찬 고백이 설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환희로운 느낌(깨달음 내용)을 이 장자궁자의 비유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삼계화택의 비유는 석존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고,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성문제자들의 대표주자들이 화택의 비유와 유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장자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어려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여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긍긍하며 50년을 방랑하다가 우연히 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장자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한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거지인 아들은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장자가 임금과 같이 시종들로 둘러싸여 앉아있는 위풍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가 버린다. 도망가는 자가 그의 아들임을 알아본 장자는 사람을 보내어 붙잡으려 했는데, 그 아들은 그만 놀라고 두려워서 혼절해 버리고 만다.


거기서 장자는 지혜방편으로 쓰는데, 아들을 놓아주고 후일에 그 아들과 비슷한 형상을 한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변소 청소부의 일을 하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그리고 날이 점점 지나자 장자도 허름한 옷을 입고서 다가가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안심하고 일하도록 위로하면서 점점 친숙해진다. 이후 장자는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면서 더욱 격려를 해주면서 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자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그 아들을 불러 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도록 맡긴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하자 국왕이나 친척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가 자기의 친아들임을 밝히고 일체 가업을 그 아들에게 전해준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부장자는 부처님이고, 그 아들은 성문들이며, 오랜 기간의 방랑생활은 미망의 세계에서 괴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부가 되어 일하는 동안 점점 마음이 열리어 마침내 장자의 아들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바로 성문들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참다운 장자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성문들(제자들)이 부처님께 고백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중국 천태지의대사의 불교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천태지자대사는 이 비유에 의해서 불교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시교판(五時敎判)이라는 것으로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이다. 즉 석존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기간을 49년으로 보고 가난한 아들이 가출해서 들어와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기 가지가 50년이라는 세월 비유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약초비유藥草譬喩 (운우(雲雨)의 비유)


세 번째, 운우의 비유는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로 불린다. 신해품에서 대가섭 등이 가난한 아들의 비유에서 자기들이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들임을 깨우쳤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임에 대하여 이 약초유품에서는 석존께서 그들을 위하여 또 비유로 설하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에는 수많은 초목들이 있는데 그 종류도 다종다양하다. 그러한 초목들에 구름은 비를 뿌리는데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셔주지만 초목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갖가지 종류에 따라서 성장하면서 갖가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러 국토의 다양한 초목은 그 차별이 있지만 구름 덩어리는 평등하게 골고루 모든 국토와 초목들에게 평등하게 비를 뿌리어 적셔 준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진리의 가르침이 다종다양한 세계와 중생들을 일미(一味)로서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다양한 세계의 다양한 중생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것을 수용하는데 이를 삼승이나 오승(五乘) 등의 차별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일불승(一佛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의도이고 목적이다.


이 비유는 크고 작은 초목을 소초, 중초, 상초와 소수 또는 대수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소초는 사람과 하늘, 중초는 성문과 연각, 상초와 소수 그리고 대수는 보살에 비유되는데, 천태대사의 해석에 따르면 소초는 인천승, 중초는 성문과 연각의 이승, 상초는 삼장교의 보살, 소수는 통교의 보살, 대수는 별교의 보살에 비유하였다.


4. 화성(化城)의 비유 化城譬喩


네 번째, 화성의 비유는 앞의 수기품에서 대가섭 등에게 수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음 화성유품에서 부루나 등의 하근기의 성문들을 위해 과거의 인연을 설하게 된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것을 거듭 설명하기 위해서 "보소화성(寶所化城)의 비유"를 설한 것이다. 이 비유는 전술한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부처님의 대자비를 강조하고 중생구제를 위해 어떻게 마음을 기울여 일불승(一佛乘)으로 인도할 것인가를 설하는 것이다.


옛날에 한 인도자가 대중을 이끌고 오백유순이라는 멀고 험한 보배가 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였는데, 대중들은 피로해 지쳐서 도중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거기서 인도자는 삼백유순 되는 곳에 임시로 하나의 성을 만들어 사람들을 그곳에 충분하게 휴식하도록 하여 평안한 생각을 일으켜 이미 목적지에 도달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다음에 사람들의 피로가 풀리자 임시로 만든 화성을 없애고 이 성은 나의 방편력으로 만든 것이고 진실로 보배가 있는 곳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다시 출발시켰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화성(化城)이란 성문과 연각의 이승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승은 부처님께서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다. 즉 믿음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을 위해 일시적인 안식처로 삼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승의 열반은 참다운 열반이 아니라 임시로 만든 열반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보처(寶處)는 곳 부처님께서 계시는 참다운 열반의 처소이며 바로 일불승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친 것이다.


5. 계보주(繫寶珠)의 비유 繫珠譬喩


다섯 번째, 계보주의 비유는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라고도 불린다. 이 오백제자 수기품에서 오백 명의 아라한이 수기를 받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궁극의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의 깨우침을 이 비유로써 말하면서 기뻐한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가난한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고 술에 취해 잠들어 버렸다. 그 때 마침 친구는 일이 있어 외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친구는 자고 있는 가난한 친구의 옷 속에 보배구슬을 넣어주고 외출한다. 가난한 친구는 술이 깨자 친구의 집에 작별을 고하고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역시 곤궁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는데 그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친구가 준 보주를 어찌하고 이렇게 곤궁한 생활을 계속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준 보주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헛되이 고생하면서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부처님이고,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을 들어서 부처의 종자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어버리고 번뇌에 찌든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승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부처님을 다시 만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듣고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6. 정주(頂珠)의 비유 王繫譬喩


여섯 번째, 정주의 비는 적문(迹門)의 마지막인 안락행품 중에 설해져 있다. 이 품은 먼저 문수보살이 말세의 중생들을 위해 [법화경]을 어떻게 해설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신 것이다. 즉 만일 보살이 말세의 중생을 위해 [법화경]을 해설하려면 네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한다고 선하신 것이다. 그 네 가지란 보살이 행할 곳과 친근할 곳에 머무르고, 바른 말을 하는데, 바르게 뜻을 행하고, 큰 자비를 행해야 한다고 설하신다. 즉 네 가지 안락행에 머물러 [법화경]을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화경] 경전 가운데 최상의 경전이며, 제불여래의 비밀한 창고이고, 이제까지 설한 다섯 가지 비유가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한 선교방편임을 설하여 경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품의 끝에 어느 전륜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하는데 그 싸움에 전공이 있는 병사들에게 상으로 논밭과 집, 마을 여러 가지 보배, 코끼리, 말, 수레 등을 준다. 그러나 왕의 머리털 속에 감추어진 명주(明珠)만은 주지 않는다고 설한다. 하지만 공적이 가장 큰 병사에게 이것을 주었다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주는 부처님께서 최상의 믿음을 가진 최상자에게 설하는 가르침 즉 [법화경]을 말한다. 그리고 병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모든 제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교화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따라서 다양한 수행을 하고 번뇌를 극복하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보고 그 극복의 과정을 보고서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설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명주에 비교되는 [법화경]은 가장 용감하게 잘 싸워 일체의 번뇌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7. 의사의 비유 醫師譬喩


일곱 번째, 의사의 비유는 여래수량품에 설해진 것이다. 이 여래수량품은 본문(本門)의 중심이 되는 품으로서 부처님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개현(開顯)하는 것이다. 즉 적문(迹門)에서 법(法)의 개회(開會)와 인(人)의 개회가 시행되고, 여기서는 법(法)을 설하고 수기를 주는 주체인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을 열어서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법화경}의 개회사상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앞의 종지용지출품에서 상해보살 등 4대보살을 비롯한 6만 항하사의 보살들이 사바세계의 지하에서 솟아 올라왔다. 그런데 미륵보살 등 보살들은 이제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 보살들에 대해서 어디서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부처님을 찾아간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서 솟아난 보살들은 당신이 성도 이래 교화했던 보살들이고, 지하나 허공에서 일심으로 정진하며 위없는 지혜를 구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이 말을 들은 미륵보살 등은 더더욱 의혹을 품고 부처님은 성도 이래 40여 년을 지나는 데 불과한데 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보살들을 교화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25세의 젊은 사람이 백세의 노인을 가리켜 나의 아들이라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 곳이 바로 법화7유 이외의 부소자노(父少子老)의 비유이다) 이에 미륵보살은 어떻게든 이 의혹을 풀어주십사 하고 간청한다. 이상이 종지용출품의 개요인데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설해진 것이 바로 여래수량품이다.


일체 세간의 사람들은 석존께서 카필라국의 궁전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는 도량에 앉아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진실로 부처님께서 성불한 것은 무량무수무변 백천만의 나유타 겁이었고 설한다. 그로부터 이 사바세계에서 설법하고 교화하였으며 수많은 그 외 나라에서도 중생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였다고 설한다. 이 사이에 당신은 연등불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열반에 들었다고도 했는데 그러한 설법내용들은 모두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라고 설한다. 거기서 거듭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 "의사의 비유"를 설했던 것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어떤 의사가 우연히 멀리 타국에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에 없는 사이에 아이들이 잘못하여 독약을 마셔버렸다. 그 무렵 의사인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괴로워하며 구원을 바라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해독약을 조제하여 주었다. 거기서 본 마음을 잃지 않은 아이들은 그것을 복용하고 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독이 깊이 퍼져있던 아이들은 약을 먹으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의사인 아버지는 꾀를 내어 다른 나라로 들어가 심부름꾼을 아이들에게 보내어 '아버지가 죽었다'고 알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비탄에 빠져 본래의 마음을 되찾아 약을 먹고 완쾌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당연히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삼독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중생들이다. 그리고 조제약은 바로 부처님의 최종적 진실한 가르침인 {법화경}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을 보인 것은 말을 듣지 않는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결코 반열반에 드시지 않으시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어서 빨리 치유약을 먹고 삼독에 중독된 고통을 벗어나 제정신을 찾도록 바라고 계신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비유적 설명은 우리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진실한 자식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진실한 의도를 깨닫도록 한 것이다. 즉 우리들은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임을 깨달아 똑같이 깨닫기를 바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