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타난 고통과 구원의 구조
이 효 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1. 머리말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관세음보살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중적인 신앙대상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관음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나아가 불교의 서구 전파를 통해 지금은 서양에서도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관음은 불교가 전해질 때 항상 가장 앞서서 전파되는 보살 중 하나이다. 코울만(Coleman)은 인도의 대승불교가 유행하게 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이유는 보살의 등장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보살이 바로 관음이라고 말한다. 또한 테이(C. N. Tay)는 관음신앙을 가리켜 ‘아시아 절반의 신앙’이라고 지칭하면서 아시아권 전역에서의 관음신앙의 전파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관음이 가장 대중적인 보살이 되고, 아시아 절반의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법화경(法華經)의 유포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 즉 동아시아 삼국 모두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전 중 하나이다. 이것은 법화경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의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대중신앙의 모습에서는 보문품(普門品)의 구원관이 법화경의 유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도 있다.
보문품의 관음은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관음을 통해서 자신이 처했거나 처할지도 모르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 속에서 보문품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대중의 신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보문품에 대한 분석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보문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고통-구원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법화경 보문품에 나타나는 고통의 종류와 구원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보문품이 대중의 신앙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보문품의 구원관이 관음신앙의 여러 가지 형태 중에 하나인 점에 비추어, 보문품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어구 중 하나인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를 통해서 보문품의 구원관을 분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고통과 구원의 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문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보문품이 대중의 실제 신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관음신앙과 일반 대중신앙의 관계 또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주제에서 보이는 ‘고통’이라든가 ‘구원’이라는 단어는 불교라는 종교에서는 부차적인 용어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고(苦)’라고 보며, 그 안에 고통과 고난이 모두 포함된 넓은 의미로 ‘고’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통의 문제는 어쩌면 매우 작고 실제적인 것이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 중생에게는 언제나 ‘고’(苦)보다 ‘고통’(苦痛)이 우선한다.
이뿐만 아니라 ‘구원’이라는 용어도 불교에서는 생소하다 못해 유일신 신앙을 가진 타종교의 용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불교를 서술할 때는 ‘구원론’(soteriology)보다는 ‘깨달음’(enlightenment)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은 통상적인 구원론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구원론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몇 가지 주제들이 학술적인 문헌에서 되풀이된다. 구원론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것(individual)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우주적이고 인간학적인 이원론을 전제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것인가 구원받지 않을 것인가 라는 절대적인 선택의 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다. 구원받는 것은 종종 ‘현세적인’ 구원과 ‘내세적인’ 구원으로 이분된다. 과거와 현재의 많은 학자들의 수중에서, 일차적으로 구원론적 관념들은 종교들을 서열화하는 진화론적 척도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볼 관음신앙의 구원론은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지만, 절대적인 선택보다는 상황에 따른 상대적인 선택을 중시하고, ‘내세적인’ 구원보다는 ‘현세적인’ 구원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전인적인 존재를 문제로 삼는 ‘큰 구원’에 관련된 것이라면, 보문품의 구원은 현실적인 고통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구원’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그러한 기존의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서 특히 일반 대중이 접하는 신앙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며, 이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필수적이다.
2. 보문품에 나타난 고통의 구조
1) 고통 현상에 대한 이해
고통이라는 단어를 불교식으로 떠올린다면 아마도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고통인 것이며, 그것에는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는 삼법인(三法印)의 논리 중 하나인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갈애와 같은 번뇌로 이루어진 현실세계가 고통이라는 것을 직시한다는 사성제 중 하나인 고성제(苦聖諦)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들은 개인이 매 순간순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고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것은 주로 쾌락이나 즐거움에 대립되는 뜻을 가진 용어로 쓰인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스로 견디기에 아프고 힘든 일에 대해서 ‘고통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통의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마음이 괴롭고 아픔’이다. 즉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의 상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언어로서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은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통증의 차원(pain)이나 정신적인 괴로움(suffering)의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 통증은 전적으로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감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 통증은 동물과 같이 감각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체의 의식작용이 개입한다. 즉 동일한 자극이라도 개인의 경험, 상황, 성격, 심리상태, 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서 그 아픔의 정도와 질, 그리고 반응이 달라진다. 또한 여기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괴로움(suffering)은 우리가 통증을 느낄 때뿐만 아니라 통증에 대한 기억이나 이로 인한 근심과 걱정 등의 의식작용에 더욱 의존한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통은 상처를 입는다는 의미에서 수동성이다. 고통을 인식한다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취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의식 행위의 능동적인 수행이 아니고 오히려 적대적인 것, 곧 굴종이다. 그것은 심지어 굴종에 대한 굴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아파하는 의식이 의식하는 내용이 바로 고통이라는 것, 즉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 고통은 수동적으로 의식 안에 주어진 것이지만 수용할 수 없는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한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고통 속에서의 감성은 수용 가능한 감성보다 더 깊은 곳에 아무런 방어나 보호 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통에 대해서 에밀 시오랑(Emil M. Cioran)은 ‘고통은 외부의 요인이나 구체적인 신체기관의 동요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방식에 따라 측정된다. 그러므로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고통이라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봉호는 고통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죽음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시키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고통이라는 경험 덕분에 인간이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고통은 모든 ‘부정적인 것’을 부정적이게 하는 근본 경험이며 ‘문제’를 ‘문젯거리’로 만드는 기본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이 고통의 범위도 각각 다르다. 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통은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고통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동이 바로 의사소통이다. 고통 그 자체는 사적인 언어로 밖에 표현될 수 없지만 다른 어떤 내면적인 필요나 요구보다 더 강하게 의사소통을 요구하며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표출시킨다. 이 욕구가 바로 고통에 대한 항의이며 고통의 감소나 제거를 바라는 행동을 요구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즉 고통은 주체의 표현충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고 그 충동에 따라 고통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개가 바로 언어다.
또한 이때 바로 남과 다른 자신의 상황은 사람에 따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힘을 끌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이 작동하는 방식과 범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고통의 범위에 내/외부의 압력이 가해지면 그때부터 종교의 힘을 빌어서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며 그 수단이 바로 언어인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 고통이 극복되는 상태 즉, “외부로부터, 어떤 강력한 상황으로부터 행복한 일(felicity)이 찾아올 때 그것을 구원(Salvation)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고통은 두려움을 수반하는데, 인간은 절대자의 힘을 빌어서라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기근과 한발, 폭풍과 번개에 의한 생명의 위험, 적과 야생동물의 습격, 질병과 전염병, 아이가 없다는 수치심에서 기인하는 비난과 불만으로 인해, 인간은 지고한 존재들에게 열렬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 외부로부터의 충격 -> 고통의 느낌 ->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 의지표명의 수단 즉 언어 -> 언어를 통한 극복 -> 고통의 해소 및 구원의 성취 |
그러므로 고통은 결국 그 자체로 대단히 사적인 경험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의식하고 표현하는 언어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경험인 것이다. 고통의 경험을 통한 자기 의식과정은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고를 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불교 경전 중에서 고통과 구원의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 보문품이다. 다음 장에서는 보문품에 나타난 고통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개인적 고통의 구조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보문품에 나타난 고통의 구조
불멸이후 부파불교 시대까지의 불교를 학문으로서의 불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대승불교가 시작된 이후의 불교는 신앙의 불교라고 할 수도 있다. 수많은 불교신앙 형태가 바로 대승불교의 시작 후에 나타났다. 또한 불보살이라는 절대적인 신앙대상이 발전하게 된 것도 바로 대승불교시대 이후이다.
불교에서 보살이 신앙대상이 되면서부터 불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의 범주에 불(佛)과 함께 보살(菩薩)을 함께 넣기 시작했다. 이것이 불보살에 대한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관음에 대한 신앙도 바로 이러한 불보살 신앙이 시작되고 나서 성립하게 된 것이다. 불보살에 대한 신앙은 불교가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틀을 갖추는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관음신앙이 처음 시작할 때가 언제인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지만 관음신앙이 발전하게 되면서 관음관계 경전들도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경전이 바로 법화경 제 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이다.
보문품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모두 12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7가지 어려운 난[七難]과 3가지의 독[三毒], 그리고 2가지의 원하는 것[二求]을 가리킨다.
먼저 보문품에 나오는 일곱 가지 난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큰불 속에 들어가게 된 중생: 화난(火難)
2. 큰물에 떠내려가게 된 중생: 수난(水難)
3. 금은보화를 구하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나찰들에게 잡히게 된 백천만억 중생: 풍난(風難)
4. 칼에 맞아 죽게 된 중생: 검난(劍難)
5.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야차, 나찰들의 악한 귀신들이 괴롭히려고 할 때: 귀난(鬼難)
6. 죄를 지었거나 죄를 뒤집어쓰고 목에 칼을 차고 몸이 묶이고 손과 발에 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히게 된 중생: 옥난(獄難)
7. 귀중한 보물을 가지고 위험한 길을 가던 많은 상인들이 삼천대천국토에 가득 찰 정도로 많은 도적무리를 만났을 때: 적난(賊難)
이 일곱 가지 난은 모두 만약[若]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들에게도 닥칠지도 모르는 만약의 고통과 재앙들을 열거하여 중생이 겪을지도 모르는 모든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칠난과 더불어 보문품에 나타나는 또 다른 고통은 바로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이다. 이 삼독심 또한 불교에서는 고치기 매우 어려운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의 고통은 바로 두 가지 원하는 바[二求]이다. 이는 아들을 낳기 원하는 것과 딸을 낳기 원하는 것이다. 이 것 둘 다 과학의 시대인 현대에도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할 때에는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 고통들을 분석해보면 고통에도 층위가 있음이 드러난다.
고통의 종류 | 층위에 따른 고통의 분류 |
큰불=화난(火難) | 자연적 고통 |
큰물=수난(水難) | |
태풍=풍난(風難) | |
칼=검난(劍難) | 인위적 고통 (관계적 고통) |
야차/나찰=귀난(鬼難) | 신화적 고통 |
감옥=옥난(獄難) | 인위적 고통 (관계적 고통) |
도적무리=적난(賊難) | 인위적 고통 (관계적 고통) |
탐/진/치=삼독심(三毒心) | 개인적 고통 (심리적 고통) |
아들을 원함/ 딸을 원함=이구 (二求) | 개인적 고통 (심리적 고통) |
위의 표는 고통을 주는 대상과 그 고통의 층위를 분석한 것이다. 위의 표를 통해서 본다면 불, 물, 태풍, 칼, 귀, 옥, 적, 삼독심, 이구는 모두 고통을 주는 원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고통을 주는 원인을 ‘악’이라고 한다. 악은 사회적 악과 자연적 악으로 구분될 수 있다. 사회적 악은 남을 때린다든지 살인을 하는 것, 혹은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 등 인간사회에서 인위적으로 고통을 야기 시키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적 악은 천재지변과 같인 자연현상이 주는 고통의 원인을 말한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해서 모두 ‘악’이라고 규정짓기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불교에는 ‘악’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기보다는 고통의 원인이 업과 무지,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온다고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불, 물, 태풍과 같은 자연적 고통은 개인의 힘이나 업보가 드러나는 고통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 세 가지 고통은 모두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칼이나 도적무리, 죄와 같은 인위적 고통은 대상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다. 즉 고통을 주는 자와 고통을 받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고통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업의 관계를 통해서 해소해야하는 고통이 되는 것이다. 신화적 고통이라고 명명한 다섯 번째 고통은 종교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말한다. 불교에서 야차와 나찰은 선악 구분으로 나눈다면 악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에게서 받는 고통은 현실 속의 고통은 아니지만 종교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고통의 하나다. 그리고 삼독심이나 이구의 경우는 모두 개인이 가지는 고통이다. 탐하고, 욕심 부리고 어리석은 것은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행위이고 마음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구는 개인적 고통임과 동시에 개인의 자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중 자연적 고통과 신화적 고통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상을 스스로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개인적 고통과 인위적 고통은 결국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들 속에는 선의 대립적인 모습으로서 ‘악’이라고 규정지을만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대위신력(大威神力)으로만이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고통들은 모두 자신의 힘보다는 더 큰 힘에 의해서 가해지는 고통들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게 되며 이때 관세음보살은 모든 고통에서 꺼내주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대상의 힘을 얻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바로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칭명의 신앙을 보문품에 나오는 어구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3. 念念勿生疑에 나타난 구원의 성격
구원론이라는 말은 영어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인 sōtēria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은 ‘병에서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주는 선물’이다. 이 말에서 구원자(saviour)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병든 자가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의 변화를 의미한다. 의미를 확대시켜보면 병든 사람이 병이 낫는 것도 구원이며,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도 구원이고, 어려운 순간에 처했다가 빠져나오는 것도 구원일 수 있다. 혹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다가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고통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그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더 이상 고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구원이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건으로 번뇌에 빠졌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종교의 세계에서는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종교적 이상의 실현을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삶에 초점을 두면 구원론은 종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 신앙 속에서 대표적인 구원자는 바로 관음이다. 관음은 무수한 수명을 가지고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이러한 모습은 보문품에서의 관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칠난(七難)과 삼독(三毒) 그리고 이구(二求)를 모두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서 관음을 그리고 있다. 또한 보문품에는 중생에게 일어날 수 있는 고통을 제도하는 방법이 단 하나로 명시되어 있다. 어떠한 종류의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구원의 방법은 오직 ‘일심칭명(一心稱名)’의 염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일심칭명’의 부분이다. 만약 고통을 겪는 중생이 ‘일심칭명’을 하지 못한다면 관음이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고통속의 중생이 일심칭명만 할 수 있다면 관음은 중생의 모든 고통을 다 끊어줄 수 있는 능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이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일심으로 염송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중생만이 바로 관음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본 장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심칭명’과 ‘염념물생의’에 나타나는 구원의 방식이다. 2장에서 살펴 본 수많은 고통들이 단 두 가지만 마음에 새겨서 실천하면 한순간에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면 고통에서 해방되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며 그 고통의 해방은 삶이 끝난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삶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 삶 안에서 성스러움이 실현되는 성의 속화(俗化)이면서 동시에 속의 성화(聖化)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관세음보살’을 말하는 순간, 동시에 자신의 소원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더불어 의심하는 마음을 모두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행위를 동시에 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언어 자체가 일정한 행위적 효력을 가지면서 종교적 실천을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행적 언어의 차원 즉 말함과 동시에 결국엔 그렇게 그 언어대로 되어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말하기를 통해 행동하는 방식, 즉 ‘말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오스틴(J. L. Austin)이 그의 ‘발화행위이론’(發話行爲理論; 話行論)의 관점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행동하는 말(문장)’을 ‘이행문’(performative utterance)이라고 부른다. 오스틴은 문장을 발화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행위를 하는 것이며, 발화의 표출이 바로 행동의 이행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러한 행위를 이행하는 것이 바로 발화의 목적이기도 하다. 더불어 말이 발화되는 주위의 사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적절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행문들이 성공하는 적절한 조건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1-1 관습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관습적인 절차가 있어야 한다. 1-2 그 절차에 명시된 상황과 사람들이 적절해야 한다. 2. 그 절차가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3-1 이행자는 절차에 명시된 바에 따라 요구되는 사고, 감정, 의도를 가져야 한다. 3-2 이에 따르는 행동이 명시되면 이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 행동을 이행해야 한다. |
1-1의 상황을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행적 발화를 했는데도 발동된 절차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발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발화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이다. ‘소원을 성취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서(발화) ‘반복적인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절차불이행) 소원을 성취하고 싶다는 말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불어 1-2의 유형처럼 관습적인 효과(소원성취)를 위해서는 상황과 사람들(중생과 관음)이 적절해야 한다. 중생은 있는데 관음이 없거나 관음은 있는데 중생이 없다면 1-1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2의 완전한 이행자(중생)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수행(염불)을 해야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에는 3-1과 같이 중생이 하고자하고 얻고자 하고 되고자 하는 바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생의 특정한 목적이 있어야만 염불이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결과적으로 3-2의 관련된 사람들이 그 행동을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관음이 중생의 염불을 듣고 고통에서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들 과정 중 단 하나라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에는 발화=수행의 절차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관세음보살염불로 정리하면 다음의 두 표와 같다.
1-1 소원성취를 위한 반복적인 염불이 있어야 한다. 1-2 염불을 하고자 하는 (고통에 빠졌거나 소원이 있거나 하는) 상황과 중생이 적절해야 한다. 2. 염불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3-1 중생은 염불을 하는 것에 따라 요구되는 사고, 감정, 의도를 가져야 한다. 3-2 관음이 중생의 염불을 듣고 중생의 고통을 구원해야 한다. |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행문 | 관세음보살염불 |
1-1 | 관습적인 효과 | 소원성취 |
1-1 | 관습적인 절차 | 염불 |
1-2 | 절차에 명시된 상황과 사람들 | 중생, 관음 |
2 | 이행자 | 중생 |
3-1 | 사고, 감정, 의도 | 하고자 하는 바/ 얻고자 하는 바/ 되고자 하는 바/ |
3-2 | 이에 따르는 행동 | 염불 행위-->고통의 구원 행위 |
이런 행위들을 반복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 소원을 성취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염불로 구원을 바라는 행위를 할 때에는 염불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이라는 행위 속에 자신의 의지를 의심 없이 첨가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오스틴의 이론에 입각하여 의례를 연구했던 벤자민 레이(Benjamin Ray)는 이행적인 접근법(performative approach)이 “의례의 중심적인 메커니즘일 뿐만 아니라 말의 도구성, 즉 말들의 인과적 ‘힘’에 대한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토마스 로슨(E. Thomas Lawson)과 로버트 맥컬리(Robert N. McCauley)도 발화 행위 분석을 통해 우리가 “화자(speaker),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초인간적 행위자(culturally defined superhuman agents), 그리고 의례공동체의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의미론적 체계에 의해서 의례의 구조와 의미가 결정되는” 방식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 본 관음염불도 마찬가지이다. 관세음보살염불은 일반적인 이행문과는 다르게 관음이라는 문화적(종교적)으로 정의된 초인간적 행위자를 수반하는 이행작업이다. 구원을 바라는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을 일심칭명하는 것을 통해서 언어적인 의례(verbal rite)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에서 말하는 관음염불의 목적에서도 드러난다.
관음염불을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의 타력에 의지하지만 수행자 자신이 그 과정에서 망념을 버리고 마음을 맑혀 괴로움에서 구제되고 여기서 지혜를 얻어 최후에는 신행자 스스로가 관세음보살이 되도록 인도한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신도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있거나 고통에 빠져 있을 때에도 직접적인 기도문구가 아닌 ‘관세음보살’을 되뇌는 것이다. 타력 즉 다른 대상의 이름을 부르면서 결국에는 자신이 수행을 이루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관음염불이 완전한 타력신앙이 아니라 타력적 자력신앙이라는 말이다. 속의 차원인 ‘자신의 소망’을 의심을 가지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종국에는 성의 차원인 ‘스스로가 관음이 되는 순간까지’ 만끽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염불이 바로 그 자체로 삶의 유일한 자리가 되고 성의 구체적 실현이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일심칭명의 염불은 세속적 소망과 성스러운 수행이 접합하는 성과 속의 매개자리가 되는 것이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염불과 같은 행위를 언어적인 의례라고 말하면서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은 염불과 같은 언어에 내재한 신비한 힘을 믿었고, 고대적이고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즉 말해지는 의례(spoken rite)는 흔히 기계적인 의례(mechanical rite)를 보다 완전하고 정밀하게 만들지만, 염불의 경우처럼 ‘말해지는 의례’가 ‘기계적인 의례’를 완전히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들리는 염불보다 ‘들리지 않는’ 염불(내면의 언어)이 구원 효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중생이 관세음보살을 한마디 하는 순간 그 말 한마디에는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적 의례를 통한 구원의 방식은 몸짓이 언어로 번역되는 것처럼, 언어(말도)도 몸짓으로 번역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관세음보살 염불을 ‘염념물생의’하게 외치는 것 자체가 바로 언어적 의례의 구원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세음보살은 가장 친근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 중에 하나이다. 관음이 아시아권 전역에서 중요한 신앙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법화경의 유포와 관련이 있다. 그 중에서도 보문품은 관세음보살의 구원관을 나타내는 좋은 자료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보문품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인 ‘고통’의 종류와 ‘구원’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중생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내적 혹은 외적인 충격으로 고통의 대상자가 고통의 느낌을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해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게 된다. 이 의지는 바로 의지표명의 수단인 언어를 통해서 반복 수행됨으로써 극복되고 결과적으로 고통의 해소 및 구원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보문품에 나타나는 고통은 화난(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검난(劍難), 귀난(鬼難), 옥난(獄難), 적난(賊難), 탐(貪), 진(瞋), 치(痴), 구남(求男), 구여(求女)의 열두 가지이다. 이 중 화난, 수난, 풍난은 자연적 고통으로 검난, 옥난, 적난은 인위적 고통, 귀난은 신화적 고통 그리고 탐, 진, 치와 구남, 구여는 개인적 고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바로 ‘일심칭명(一心稱名)’과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이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관음염불을 하고 그 염불을 의심 없이 반복함으로써 말이 가지는 힘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행동(몸짓)으로 이루어지면서 소원이 성취되어 구원을 받는 형태를 띠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약한 바와 같이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말하고 있는 고통은 중생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통들이다. 비록 현 시대적인 모습과 경전 내의 시대적인 차이 때문에 생소하게 보일 수 있는 고통들도 있지만 그 내적 의미를 파악한다면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고통들인 것이다. 이러한 많은 고통들이 결국에는 일심칭명과 염념물생의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참뜻이다.
본 논문은 고통이 구원되는 과정을 발화수행이론이라는 이론적 틀로서 설명해보고자 하였다. 이행문에서 보이는 효과와 절차, 상황과 사람들, 이행자, 사고, 감정, 의도 및 이에 따르는 행동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염불에 적절히 대응시킬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언어가 행위가 되고 행위가 구원이 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3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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