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초기 대승불교 교단의 성립과 조직에 대한 一考

수선님 2019. 8. 25. 11:38

초기 대승불교 교단의 성립과 조직에 대한 一考

-諸異說을 중심으로-

淨土學硏究 제20집(2013.12)

홍순우(신해)/동국대학교 선학과 박사수료.


• 목 차 •

Ⅰ. 들어가는 글

Ⅱ. 대승의 정의 및 대승비불설의 제기

1. 대승의 정의

2. 대승비불설의 제기

Ⅲ. 대승불교 성립배경과 연대

1. 대승불교의 성립배경

2. 대승불교의 성립연대

Ⅳ. 초기 대승불교 교단의 성립 및 조직

1. 대중부 성립설

2. 불전문학의 보살

3. 불탑숭배의 영향

4. 새로운 설의 제기

1) 대승경전의 불설(佛說)

2) 대승불교의 간다라기원설

3) 인도 불교변이론(佛敎變移論)

5. 보살교단의 조직

1) 성문승가와 보살가나

2) 보살교단과 비문과의 관계

Ⅴ. 남겨진 문제들

Ⅵ. 나가는 글


한글요약

새로운 불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불교의 출발이 기존 불교내의 주류였던 소승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대승불교의 성립과 배경 등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정설로 내려진 것은 없는 상태이다.


종교사를 고찰하기 위한 방법에는 대략 두 가지의 기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역사적인 변천사로서의 사실에 근거한 조사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사 변천동력인 사상사적 측면이 된다. 그러므로 불교사 자체의 전개과정 못지않게 불교교단사의 성립과 조직에 관한 연구는 과거사의 규명과 함께 미래불교의 방향모색에도 유의미하기에 매우 중요시 여겨지고 있다. 특히 현재 공부하고 있는 대승경전, 그리고 초기의 대승불교라고 하는 것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는지에 대한 고찰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주지하듯 대승불교의 시발점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다만 경전의 번역시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대승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경전들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대승비불설’을 계기로 하여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로 대승의 성립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발표되어져 왔지만 현재까지는 히라가와 아키라의 견해로 가장 유력하게 좁혀진 상태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히라가와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우에다와 사사키, 그리고 서양의 쇼펜과 폴 해리슨등에 의하여 비판이 되어지고, 그들은 새로운 학설을 피력하며 히라가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대승불교에 있어서의 성립과정, 그리고 대숭의 ‘불설’과 ‘비불설’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상태이고,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져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과 조직에 관하여, 히라가와의 설을 비롯한 그 외 다른 여러 가지의 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Ⅰ. 들어가는 글


불교가 종교로서 성립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는 교설과 교단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암송에 의존하는 인도 특유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입멸 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경전결집이라는 독특한 불교의 경전전승방식과 함께 교단의 분파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부처님 입멸 후 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 부각된 제2결집과 교단의 분파는 주지하듯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 못지않게 그 시대적 표징을 읽는 관점이 중요 논제로 등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불교가 다른 문화권으로 전래․수용되면서 파생하는 종교사상의 변형을 들 수 있다. 대승과 소승-이것이 동북아불교권의 불교사상 구분법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구분법에 익숙하며 이 틀에 의지하여 불교사를 이해해왔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어졌으며, 그것의 조직은 또한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에 대해 명확히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서가 빈약한 인도문화가 갖는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승불교는 결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흥기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일어난 여러 가지 운동을 계기로 인하여 점차 대승불교로 결정되어 간 것이다.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연구는 대승비불설의 제기로 시작하여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어 왔으나,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에 이르러 그의 학설로 상당히 좁혀진 상태이다. 하지만 대승비불설의 문제는 현재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여전히 대승불교 성립 기원의 문제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에 결부되어 널리 회자되어지고 있다. 대승불교는 보살이 출현함으로서 성립된 보살 불교이다.


히라가와는 그 발생을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에서 찾았다. 그러나 히라가와의 죽음을 전후해서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등에 의해 비판적인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할 수 있다.


Ⅱ. 대승의 개념 및 대승비불설


1. 대승의 정의

大乘(Mahāyāna)은 小乘(Hīnayāna)에 대비되는 말로서 ‘큰 수레, 큰 탈 것’을 의미한다. 대승은 진실한 깨달음으로 특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의 차안에서 깨달음의 피안으로 함께 실어 나르는 큰 가르침을 말한다.


대승을 ‘큰 수레’에 비유한 것은 그 가르침이 ‘자리이타’의 교리이기 때문이며 자리와 이타를 겸비하고 있기에 대승불교를 ‘대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행반야경』권1 도행품 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승’(Mahāyāna)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다. 어떤 것을 마하연삼발치라 하며 이 마하연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마하연 가운데에 머물며, 어찌하여야 마하연 가운데에서 벗어나며, 누가 마하연을 성취한자 입니까?”라는 부처님과의 문답에서 ‘대승’(Mahāyāna)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도행반야경』의 성립 이전에 이미 대승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승이라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불멸 후 몇 백 년이 지난 1세기경으로 추정한다.


『도행반야경』이 대승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면, 최초로 대승의 입장을 선언했던 경전은 『소품반야경』일 것이라고 시즈타니 마사오(靜谷正雄)는 그의 저서 제6장 제1절을 <최초의 ‘대승’ 선언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승’(Mahāyāna, 摩訶衍)이라는 말을 최초로 명확하게 사용하였던 것소품반야경일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입장을 ‘대승’이라고 선언했던 최초의 사람들은소품반야경의 편집자일 것이다.'


반면 ‘소승’이라는 말은 최초의 대승경전인『도행반야경』이나『방광반야경』등 초기의 반야경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이 번역한 『소품반야경』권9에서의 “이 소승법으로써…” 등의 표현과 또한 축법호가 번역한『광찬반야경』권7에서는 “소승을 행하는 자는 불도에 따르지 않는다.”는 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광찬반야경』은 286년에,『방광반야경』은 291년에 번역되어진 것을 미루어 ‘소승’이라는 말이 성립된 것은 ‘대승’의 사용보다 훨씬 후대인 3세기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승은 주로 북방불교 문화권에서 신봉되어져 왔고 소승은 남방 상좌부에서 계승 발전되어 왔다. 소승의 ‘열등한’, ‘버려진’등의 의미는 대승이 소승을 비하해서 업신여기는 의미로 부른 것이지 소승이 자칭해서 불렀던 것은 아니다.


2. 大乘非佛說의 제기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들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오랫동안 믿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이나 논서의 내용을 몇 단계로 분류한 교상판석이 행해지고 그것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있는 신심있는 불자들에게 갑자기 대승경전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불자들에겐 너무도 큰 충격과 혼란이 오게 될 것이다.


인도에서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 대승경전에 대한 비불설론은 끊임없이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논란은 대승으로부터 소승이라고 부르며 저급한 가르침이라고 온갖 경멸을 받은 부파 측으로부터 나왔다. 부파에서는 거의 대승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비해 대승 스스로가 불설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승이후에 발생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A.D 1세기 무렵 인도에서 중국으로 동진한 불교는 애초부터 대승불교가 주류가 되어 전해졌다. 따라서 전하여진 대승경전이 당연히 불설임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대승만이 참다운 불교요, 부처님의 眞說일 뿐 소승은 하열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기에 중국 불교에서는 대․소승의 논란이 거의 없었다.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일본 불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시대까지는 모든 경전은 부처님의 直說이며, 대승경전 역시 당연히 부처님의 眞說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眞說이 아니라고 하는 도미나가 나가모도(富永仲基 1715-1746)의 ‘대승비불설’을 시조로 불교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한학에 소양이 깊었던 도미나가는 24세에 교토 만복사에서 황벽판 대장경의 판목 인쇄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대장경을 열람하게 되면서 경전의 교리상의 차이와 역사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직접 설법으로부터 순차적, 역사적으로 발달, 前說에 後說이 추가되어 간다고 하는 ‘加上’ ‘相加上’ 설을 발견하고「出定後語」라는 책을 썼다. 그는 불멸 후 500년에 출현한 대승은 ‘加上說’로서 ‘非佛說’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본 불교계를 전면적으로 뒤흔들었고 이에 대한 첨예한 학문적, 종교적 논쟁이 펼쳐졌다. 그러나 당시 일본 불교계의 대세를 움직이지 못하고 대승불교의 정법성과 우월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종결되어졌다.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서역의 불교연구가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는 대승경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스리랑카, 버마, 태국 등의 불교실태가 소개되어 팔리어의 불교만이 초기불교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소개됨으로서 일본에서도 대승경전이 후대에 성립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무라카미 센쇼우(村上專精 1851-1929)는 메이지 27년 사카이 노양(境野黃洋), 와시오 준케이(鷲尾順敬)과 더불어「佛敎史林」을 간행하여 대승경전이 불타의 직설이 아님을 논증하여 대승비불설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승불교가 불타의 직설이 아님을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Ⅲ. 대승불교 성립배경과 연대


1. 대승불교의 성립배경

기원전 180년 인도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인 마우리아(Maurya, 孔雀)왕조가 멸망하고 인도는 여러 작은 국가들로 사분오열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이민족들의 계속된 침입과 전쟁으로 인하여 베다 전통의 의례와 희생 제의는 더 이상 준수되어지지 않고, 오직 죽은 자의 유골을 보존하는 분총(墳塚,eḑūka) 숭배를 권장하는 이교도들이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이것은 인도 당시의 어렵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인도인들의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갈망으로 분총 숭배가 훗날 불교의 탑 숭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는 이란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인도 내의 힌두교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져 대승불교의 핵심인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불교교단은 당시 아쇼카왕 이후 왕실과 부유한 상인층으로부터의 후원으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된 생활로 인하여 교단은 선정수행과 교리적 탐구에 몰두 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재가신자와는 구별되어졌다. 부파불교는 점점 전문화되어 업과 윤회, 선정과 보시의 공덕을 강조했지만, 현실적으로 재가불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보다 쉽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을 갈망하였고 이에 따른 ‘보살’사상이 등장하게 되었으리라 추론해 볼 수 있다.


보살의 출현은 대승불교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보살사상의 형성에 기여했던 구세주로서의 조로아스터교의 샤오샨트(Shaoshyant)가 미래불인 미륵불과 유사하며 민중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약속한다. 또한 당시 인도 내의 힌두교의 새로운 형태인 유신론의 대두와 관련되어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인격신에 대한 관념이 그 당시 신앙관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초기불교에는 없었던 아미타불의 믿음을통한 구제는 힌두교의 헌신적 유신론에 대응하여 생겨났다고 볼 수있다.


소승이 아라한이라는 自利적 목표를 추구하는데 비해 대승은 보살이라는 이타적 종교성을 지향하며 소승과 대승이 명백히 구별되어 진다. 이 ‘보살’ 관념의 기원은 불전문학과『반야경』에서 나오는 ‘연등불 수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전문학에서의 보살은 부처님의 전생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성불이 결정되어진 ‘보살’이다. 그러나『반야경』즉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은 관음, 문수 등 소수의 대보살을 제외하고는 대승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자로서의 범부 보살을 말한다. 대승불교가 연등여래의 수기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부처님 전생의 보살행을 본받아 나도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 대승불교의 성립연대

대승불교에서는 진보된 불타관과 관련하여 철학적으로 깊은 교리가 발전했다. 그중 ‘一乘’(eka-yāna)의 교리를 가장 먼저 들 수 있다. ‘일승’이란 ‘하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모든 사람은 보살이 되기 때문에 보살을 교화하는 가르침만이 있다는 것이다. ‘일승’은『법화경』의 주된 사상이나 이미『도행반야경』 권5(‘一道’라고 함)11),『대집경』,『보적경』,『화엄경』등의 많은 경전에서도 설해져 있다.


또한 대승불교가 갖는 특색 중의 하나로 ‘空사상’을 들 수 있는데『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을 ‘空의 지혜’로서 ‘무집착 空’을 설하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연기를 ‘空’이라 보는 교리와도 통하게 된다.


교단사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없으므로 대부분 대승경전을 의지하여 그 자료를 얻고 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이 곧 대승불교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에서 대승경전을 번역한 연대를 추정하여 그의 대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이며 불교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되었던 것은 서기 2세기 이후부터이다. 후한의 桓帝(146-167 재위)시대에 안식국의 안세고가 낙양에 와서 소승경전 34부 40권을 번역했던 것과 桓帝․靈帝(168-189 재위)시대에 월지의 지루가참이 대승경전 13부 27권을 번역했던 것이 중국에서 불교경전을 번역하여 출간한 최초이다.


위의 지루가참이 번역한 경전 중에 도행반야경이 중국에 전해졌던 것은 서기 170년경이므로 150년경에는 이 경전이 이미 대월지국에 존재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로써 짐작컨대 가장 오래된 ‘도행품’등의 성립은 서기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감이 확실하다.


또한 지루가참이 번역한『반주삼매경』에는 서방의 아미타불과 그 정토인 극락세계(Sukhāvatī, 修摩提)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도『반주삼매경』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이『도행반야경』이나 다른『반야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반야경』과는 다른 계통의 대승 교단에서 이루어진 신앙이다.


아미타불 신앙을 설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은『대아미타경』이다. 지겸의 번역(222-253)으로『반주삼매경』보다 후대에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아미타불의 신앙이 반주삼매와는

별도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립 시기는『도행반야경』과 비슷한 초기라고 간주되고 있다.『대아미타경』에서는 경전 내용 가운데에『도지대경』과『육바라밀경』을 인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대승경전 속에서도 발견된다. 가장 오래된 대승경전 속에 다른 대승경전을 인용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더라도 대승사상은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초기 역경승 지루가참이 번역한 경전들을 통해 보더라도 서기 1세기에는 대승불교의 교리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으며, 최초의『반야경』외에도 여러 가지 계통의 경전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참조 해 본다면 대승불교 기원의 하한선은 최소한 기원전 200년경으로 상한선은 기원 100여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초기 대승불교 교단의 성립과 조직


1. 대중부 성립설

대승불교가 대중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는 마에다 에운( 田慧雲 1864-1930)으로, 그는 메이지 36년(1903)에「대승불교사론」을 저작하여 대승비불설을 반박하였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 위하여 제1결집 전설과 부파불교의 자료 등에 보살장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하고 그 원류를 부파불교와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부파의 교리와 대승불교의 교리적 유사점 및 「部執異論疏」에 보이는 “대중부가 법화․열반 등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라는 기술 등을 근거로 ‘대승불교 대중부 기원설’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커다란 연구 성과로, 후대 불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마에다는 한역경전의 치밀한 논증을 통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대승불교가 부파의 대중부로부터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학자의 견해와도 일치하여 난린나카사 덧트(Nalinaksa Dutt), 체르바스키(Th. Stcherbatsky, 1866-1942), 케른(Hendrik Kern, 1833-1917)은 모두 한결같이 대중부야말로 대승불교 발전의 선구자일 것이라는 견해에 논거를 대고 있다. 그러나 케른은 대중부와 대승의 교리의 공통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승이「바가바드 기타」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 또한 인정하고 있다. 그는「바가바드 기타」와『법화경』의 유사한 게송의 구절을 대조함으로서「바가바드 기타」의 박티(Bhakti-信愛)신앙이 대승경전 불탑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무르티(T.R.V. Murti)는 여기에 의문을 표명하였고, 그는 불교사상에 내재되어 있는 다이나미컬한 성격이 일원론과 범신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콘즈(Edward Conze, 1904-1979)도 불신론, 아라한을 인간적으로보는 점, 공사상, 법무아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의 기원에 기여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중부의 많은 학자들이 교리적인 공통점을 들어 인정함으로써 한동안 대중부가 대승불교의 원류임을 정설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2. 불전문학의 보살

히라가와는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하였다고 보고 보살의 관념발생을 초기불교자료부터 자타카와 미륵보살을 통해 검토하였다. 연구 결과 보살이라는 관념이 도출되지 않음을 결론지었고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혼입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에 그는 보살관념의 문제를 불전문학에서 자타카와 연등불 수기의 사상과 자료를 통해 고찰해 나간다. 여기서 연등불 수기에서 처음으로 보살이라는 관념이 나타남과 동시에 불탑신앙에서도 보살관념의 출현을 찾고 있다.


같은 불전문학 속에서도 자타카는 부처님의 전생 중 여러 가지 몸을 바꾸면서 수행했던 당시의 문학과 선행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연등불 수기는 먼 과거세에 수행자였던 부처님이 어느 때 연등불(Dipamkara Buddha)을 보고서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는 서원을 세우자 연등불이 그대는 미래세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문학이다. 이 불전문학을 히라가와는 강조한다. 그리고 이 연등불 수기의 사상은 아마도 부파가 분열하고 대승이 흥기하던 중간에 출현하였을 것임을 여러 학설에 입각하여 논증하며, 그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이라는 관념은 아마도 연등불 수기를 계기로 하여 고안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부처님은 이 때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 석존이 수행한 것은 깨달음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사람,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 바로 보살이다. 수기를 받은 후 석존은 자각적으로 노력하고 6바라밀의 수행에 힘썼던 것이다. 그는 수기를 받음으로써 성불할 것임이 확정되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불타

가 아니다. 이 수행자는 수기를 받지 않은 사람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구별이 부득이 필요함에 따라 보살(bodhisattva)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런 사람은 보리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보살이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히라가와의 견해는 야마다 료시루(山田龍城)가 명명한 ‘本生 보살’(보리를 구하는 사람)과는 달리 ‘授記 보살’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타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 불탑숭배의 영향

인도 불교의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가람은 기본적으로 탑당과 승방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의 구성 요소와 성립 과정은 달랐고 예배 대상의 원초적인 형태로는 불탑(스투파)을 들 수가 있다. 스투파는 본래 분묘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그 기원은 불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투파는 범어로 ‘쌓다’라는 의미이다. 한역 경전에서는 ‘탑’ 등으로 음사되고, 번역하여 묘(廟)․총(塚)등으로 표기한다. 불탑의 시초는, 불멸 후 마가다의 아자타삿투왕을 선두로 한 왕들이 사리를 분배받아 8개의 사리탑 및 병탑(甁塔)․회탑(灰塔)을 건립하여 공양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파사익왕이 가섭불의 탑을 건립했다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탑이 존재했었던 것 같다. 『마하승기율』에 의하면 사리가 있는 것을 탑이라 하고 사리가 없는 것을 지제(支提)라고 한다.


히라가와는 대승불교의 기원을 교단사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여타의 학설과 다른 점으로 그의 전공이 율장인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는 율장에 기록된 탑과 관련된 부분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불탑의 소유 문제에 있어서 승려들은 불탑의 소유권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짓는다. 율장에 나온 불탑 관련 항목은 바라제목차의 여섯 번째 항목인 百衆學法1)에 여러 번 등장한다. 『사분율』 비구계본에 나오는 불탑관련 계목들은 부처님 재세 시에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아쇼카왕 재위 시 여덟 군데의 탑을 해체해 전국에 나누어 많은 불탑을 세웠기에 불탑에 대한 예배가 보다 쉬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 진다.

1) 백중학법(식차가라니, sikkhā karaṇiyā, śikṣā-karaṇīya): 식차가라니는 바라이나 승잔죄와는

달리 승가를 대상으로 참회하거나 또는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만으로 청정하게 된다.


히라가와의 연구는 이러한 불탑과 관련되어 진전된다. 그는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불탑 숭배이고 그 중심에는 재가신자가 있으며,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이 대승불교의 원류라고 주장한다.26) 이것은 대승불교의 대중부 성립설과 대승불교의 창시자는 출가자들일 것이라는 가설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획기적인 것으로 그의 연구의 독창성을 인정받게 된다.


시즈타니 마사오(精谷正雄)는 히라가와의 이와 같은 견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시대승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폴 윌리엄(Paul Williams) 또한 히라가와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여하튼 그의 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 들여왔으나 최근 들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4. 새로운 설의 제기


1) 대승경전의 佛說

이러한 설에 비판을 제기한 이는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로서 그는 초기의 대승경전이 기존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재가신자들(어떤 사람들은 진보적 비구까지도 포함 한다.)에 의해 편찬 내지 결집되었다는 설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는,


"신자나 재가인은 물론 각자가 아니다. 신자는 부처에 귀의하여 ‘불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가 쓴 책을 불설이라는 체제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또 소위 재가인이 가령 재가적 구도자로서의 보살이라 하여도 그들도 또한 구도자이며 이미 도(道)에 다다른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자각을 갖지 않은 자가 각자(覺者)라는 입장에서 쓰여진 대승경전을 자작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일이다."


자기의 입장을 표명한 뒤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이 밝힌 “그들 (새로이 대승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자신이 불타의 진의라고 확신한 사상을 불타에 가탁하여 결집하고, 더욱 종래의 성전(소승의 경․율․론) 이상으로 불타의 진의를 대표하는 것이 대승경전이다.”라고 한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는 대승경전이 스스로 아직 불타에 이르지 못한 자가 불타의 진의를 확신한 사상을 불타에 가탁한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불타가 되었다고 하는 자각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깨달은 것, 즉 자기의 경험을 사상으로서 표현한 것이라고 하고, 대승경전 작가가 스스로 각자가 되었다는 논거로서 미륵의 대승장엄론경 및 그에 대한 세친석의 기술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논에)성립하고 있으므로(siddhes)라는 것은 만약 다른 사람이 정각하여(abhisambuddyha)설하고 그것이 불설인 것(Buddha-vacanatva)으로서 성립하고 있으면 지금 정각하여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곧 부처(Buddha)이다.


그는 미륵 세친의 말을 인용하여 대승경전이 자기는 正覺한 자, 즉 불타라는 자각을 지녔던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책이 불설이라는 체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대승경전은 부처를 믿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된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며 기존연구의 공통된 잘못은 바로 이점을 무시하고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부처가 된다는 입장을 버리고 부처를 믿는 입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는 기존의 간과했던 면을 예리하게 지적한 점에서는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가 못하다.


또한 근래 서구에서는 쇼펜(Gregory Schopen), 폴 해리슨(Paul Harrison)등에 의해 히라가와의 선구적 업적이 비판되고 있다. 쇼펜은 비문의 명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그 증

거를 바탕으로 대승불교 운동은 출가수행자 집단에서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쇼펜의 연구 방법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헌적 중심의 연구가 간과해 온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 대승불교의 간다라 기원설

현재까지는 대승불교가 인도의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을 토대로 발생하였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대승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고 한다면, 마치 처음 대승비불설의 학설을 대한 것처럼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최근 리차드 솔로먼(Richard Salomon)37)에 의해서 대승불교가 간다라에서부터 형성되었음을 밝히는 ‘대승불교 간다라 기원설’이 발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불교 관련 사본들은 대부분 간다라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사본들은 크게 12개의 두루마리로 된 씨니어 콜렉션(Senior collection), 100여 개의 작은 자작나뭇잎 단편으로 구성된 스코엔 콜렉션(Schoyen collection)2), 대영 도서관 콜렉션3)으로 구분된다.

2) 스코엔 콜렉션: “스코옌 콜렉션은 노르웨이 스코옌 부자(父子)가 수집한1만5000여 점의

방대한 양의 사본들로 이 중 불교사본은 약 1500여종에 이른다. 대부분이 1993∼2000년에

걸쳐 입수된 것으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지역에서 발견됐다. 종려나무 잎, 자작나무 껍질,

동물가죽 등에 쓰여진 이 사본들은 1∼8세기경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최고(最 古)

의 불교사본들 중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스코엔 콜렉션 가운데 사본 번호 2385에서

강경범본이 포함되었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길기트 사본 발견 이후금강경범본에

대한 추가적 정보를 얻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정경숙, 대한불교조계종 표준본금강경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 사학위논문, 2010) pp.22-25 참조.40)

3) 대영 도서관 콜렉션: 대영 도서관이 간다라 지방에서 출토된 29개의 자작나무 껍질 뭉치로

된 사본을 수집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 던 간다리어나, 카로쉬티 문자로 기록된

불교 사본군을 일컫는 것으로,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법구경이라든가코뿔소경

등도 수록되어 있다.


간다라 사본이란 간다라 지방에서 출토된 사본을 일컫는다. 간다라 지방은 현재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지방으로 솔로몬은 이 지역이 기원후 1∼3세기경, 인도 불교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솔로몬에 의하면 이 간다라 지방은 이제까지 한역장경과 같은 문헌을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을 뿐이고,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간다리어에 대한 정보는 인도지역에서 출토된 비문과 동전 그리고 중국 신장(Xinijang)지역의 니야(Niya) 유적에서 발견된 일반 공문서를 통해 얻어진 것에 국한된다. 하지만 지금 진행중인 사본 연구를 통해 산스끄리뜨어에서 파생된 언어이자 빨리어의 자매어격인 간다리어에 대한 이해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이 언어가 고대 인도불교에서 사용된 중요한 언어적 표현수단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솔로몬은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간다리어로 된 수많은 불전 사본과 그 단편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간다리어 불장은 원래는 삼장을 두루 갖춘 완전한 형태의 경전군 이었을 것”이라고말한다.


솔로몬은 또한 대승불교의 기원도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대영도서관 콜렉션과 시니어 콜렉션이 대부분 소승불교 관계의 문헌임에 반해, 스코엔 콜렉션에서 발견된 바드라칼피카경(『현겁경』)은 기원후 2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간다리어로 보고된 최초의 대승경전이라고 한다. 『현겁경』 사본의 실체는 일본 불교대의 마츠다 교수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이 경전의 발견은 대승불교가 A.D 2세기 무렵 간다라 지방에서 흥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여러 비문들과 기타 자료들의 정보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솔로몬은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스코엔 콜렉션은 다른 두 개의 사본군 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기원 후 200년경의 산물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간다라 사본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3) 인도 佛敎變移論

일반적으로 과거의 교단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에 관련된 전승일수록 오히려 후대에 자신들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점차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보기에는 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언급하지 않는 자료들의 철저한 조사에 근거하여 먼저 가설을 세우는 방법을 택한다.


사사키 시즈까(佐佐木閑)는 아쇼카왕의 破僧 비문과 대중부 『마하승기율』에 보이는 破僧 방지에 관한 기술에 대응하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율을 세밀하게 검토하여 파승의 정의를 고찰한다. 그 결과 모든 율에 따라 파법륜승(破法輪僧, cakrabheda)과 파갈마승(破羯磨僧,karmabheda)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파승 정의가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게 된다. 파법륜승은 ‘불설에 위반되는 의견을 주장하는 자가 독자의 그룹을 형성하는 것’이며 파갈마승은 ‘승단 내에서 따로따로 포살등의 승단 행사를 집행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율에 근거하여 원래 파법륜승이었던 파승의 정의가 파갈마승으로 전환해 갔을 가능성을 논증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파법륜승은 부처님 재세 시에 승단을 분열시켰던 데바닷다가 유일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사사키에 의하면, 아쇼카왕 시대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파법륜승에서 파갈마승으로 파승의 정의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 교단의 운영 형태에도 영향을 미쳐, 그 이전에는 자신들과 다른 교리를 설하는 집단은 파승 집단이라고 여겨 비난하였으나, 파승 정의가 파갈마승으로 전환되면서 교리는 달라도 승단 행사를 함께하는 한, 모든 집단을 불교 승단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다른 설을 주장하는 자들끼리도 共主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파승 정의의 전환을 계기로 불설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교의의 다양화를 용인하여, 불교 역사상 그 많은 형태의 승가 공동체가 모두 불교라는 이름으로 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파승 정의가 변형됨에 따라 대승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의 발생을 가능케 한 불교 승단의 특수한 상황이 분명해진다. 일단의 이런 가정이 승인된다면 대승의 기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방향성이 필연적으로 도출 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대승불교는 불교승단 내부에서 생겨난 것으로 출가자와 그것을 지원하는 재가자가 일체가 되어 대승불교를 일으켰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는 대승불교와 부파불교를 대립 개념이 아닌 동일한 원인에서 생겨난 두 방향의 현상이기에 대립 보다는 오히려 동일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불교 승단 내부에서 점차 대승이 나타난 것이라면, 반드시 일종의 회색지대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대승과 비대승으로 엄밀하게 분류할 수 없다.

네 번째로는 사상의 다양화가 용인 되어 대승이 발생했다고 한다면, 대승은 다원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승의 기원을 단일한 그룹이나 단일한 부파에서 구하는 것은 불합리하게 된다.


물론 그와 같은 가능성도 고려하면서 연구를 진전시킬 필요는 있지만, 결코 처음부터 단일 기원을 상정하고 연구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 일단 그러한 단일 기원설에 말려들면 원래 상태로는 되돌릴 수 없게된다는 것이 사사키의 주장이다.


5. 보살교단의 조직


1) 성문승가와 보살가나

대승경전에 자주 언급되어지고 있는 ‘보살중’(菩薩衆)의 의미는 ‘보살들’이라는 경우와 ‘보살 가나(bodhisativa-gana)’인 경우가 있다. ‘집단’이라는 의미인 ‘승가’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것은 부파 교단의 ‘성문승가(聲聞僧伽, 쉬라바카 상가)’에 대비되는 것으로 비구 교단은 ‘비구승가’라 부른데 대하여 보살의 집단은 ‘보살가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히라가와는 초기의 대승 교단에서 출가한 보살이 성문 승가에서 구족계를 받고 성문 승가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문승 이외에다른 보살승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보살승’이라는 용어의 성립은 부파불교가 아닌 보살 교단이 출현하였음을 나타낸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들이 부파의 비구 승가와는 다른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대승경전에도 반영되어 있다. 많은 대승경전에는 그의 첫 머리에 ‘聲聞衆’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런 경우 ‘대비구중 1250, 보살5000’ 등처럼 비구와 보살을 따로따로 나타내고 있다. 맨 먼저 비구중을 열거하고 다음에 비구니중을 열거한다. 이어서 보살의 무리를 열거한다. 이렇게 따로따로 열거하는 것은 그들의 승가가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앞에서 그들이 뒤섞여 앉았던 적은 없었다.


보살 가나는 출가 보살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보살’에는 ‘보시를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없기에 당시의 불탑에 쌓여져 있는 공양물을 보살들이 직접 소비할 자격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살들은 불탑에 소속된 자들로서 교리적으로는 ‘부처의 집에서 태어난 佛子’가 되기 때문에 불탑의 공물을 받을 교리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부의 부파교단에서 ‘불탑에 공물을 바쳐도 큰 과보를 얻지 못한다.’고 하여 모든 불탑에 항상 충분한 보시물이 쌓여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공양물이 없을 때는 출가 보살도 탁발의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부파불교의 승가와는 다른 단체로서 보살 가나의 조직은 어떠했을까? 『십주비바사론』 권162에서는 출가 보살이 머무르는 장소를 ‘탑사’와 ‘아란야처(āranya-āyatana: 숲속)’라고 말한다. 탑사는 몸이 아플 때 요양하는 곳, 경전을 학습하는 곳, 장로 보살에게 인사하고 성스런분(부처․보살)을 공양하는 곳 등의 의미를 갖고 아란야는 정적한 곳이기에 경전의 독송 등은 탑사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출가 보살의 생활 기반이 탑사와 아란야이고, 걸식을 주로 하며, 옷은 가사이고, 화상․아사리 등의 지도자가 있으며, 250계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보면 출가 보살들이 생활하는 바는 성문 승가의 비구들이 생활하는 바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문의 승가에서 중요한 것은 승가에 들어온 보시물을 공평히 분배하는 것과 승가의 회의를 갈마작법으로 실행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들이 보살 가나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2) 보살 교단과 비문과의 관계

대승 교단은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의 비문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쿠샤나시대의 대승 교단은 세력이 약하여 우세한 소승 교단 사이에서 지하 잠행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 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대승불교가 출현했던 서기 전후의 시기에는 불탑의 건립이 성행했다. 따라서 비문들도 적잖게 출토되었는데, 그러한 비문들 중에는 불탑을 부파 교단에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비문은 있으나 보살 교단에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비문은 없다. 즉 ‘대승’이라는 말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서기 1세기에는 이미 많은 대승경전이 저술되어 있었고, 그들 중에 ‘대승’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2세기 이후에는 많은 역경승들이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도래하였는데, 그러한 역경승들의 대부분은 대승경전의 번역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인도에서는 대승불교가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문에 ‘대승’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초기에서 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러하다. 다만 굽타왕조시대에 ‘대승의 不退 비구 승가’(서기 508-509)라든가 팔라왕조시대에 ‘보살 가나’(서기 860년 경)라는 호칭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이와 같이 비문에서는 초기만이 아니라 전후를 통하여 대승의 교단에 대한 자료가 적다.


그러나 비문에 없기 때문에 대승 교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5세기에 인도를 여행했던 법현의「불국기」와 7세기에 인도를 여행했던 현장의「대당서역기」에서는 인도에 많은 대승의 승가람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승의 교단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비문에 나타난 예가 지극히 드문 이유는 첫째, 보살 가나는 불탑에서 기숙만 할 뿐 불탑과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고, 불탑도 율장에 의하여 승가에서 수납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보살 가나는 사방승가처럼 종교 단체로서의 규칙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보살불교는 재가자의 불교 운동에서부터 발전했기 때문에 보살 가나는 최초엔 재가 보살과 출가보살의 양쪽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가는 보시를 하는 측이고 출가는 보시를 받는 측이다. 같은 가나 내에서의 재물은 출가와 재가의 공동소유가 되므로 재물이 재가로부터 출가로 이동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재가와 출가의 양측을 내포하는 교단은 양측 모두에 타당한 규칙을 갖지 않으면 안 되므로 교단의 규칙이 애매하게 되고, 교단의 독립성이 명확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재가와 출가의 공동 교단에서는 교단의 유대도 약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서는 戒가 중요시 되고 다양하게 설해져 있으나 律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보살 가나가 종교 단체로서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라면 율이 존재했을 것이다. 율은 교단의 조직이다. 만일 보살 가나가 처음부터 출가 보살만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면 독립된 단체 규칙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재가와 출가의 공동체였기에 그에 따른 의․식․주는 출가자 위주로 규칙이 성립되었고 보살 가나에서는 율이 제정되지 않은 채, 종교적으로 독립하여 한데 뭉친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보살 가나는 菩薩戒를 유대로 삼아 성립한 종교 단체이고, 佛寶에 포섭되어 불타에 대한 신앙으로 결합하며, 각자 자기에 적합한 수행 규범을 수지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Ⅴ. 남겨진 문제들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고찰해 보았다. 최근까지 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대승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재가자들의 불교운동이라는 점과, 대승불교의 성립이 부파의 대중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로 모아지고 있다.


대승불교의 대중부 기원설은 점차 부파불교의 교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미야모도 쇼손(官本正尊 1893-1983)에 의해 비판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히라가와에 의해 다른 측면으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었다. 히라가와는 대승불교 성립의 기원을 불탑신앙과 불전문학의 보살의 출현으로 확신하였다. 히라가와의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최근 들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에다는 대승불교의 본질문제를 들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대승불교 경전을 설한 작자들의 문제였다. 우에다는 만약 대승경전이 히라가와의 견해처럼 보살의 출현으로 흥기 한 것이라면, 그들은 신자나 재가자로 깨달은 사람들이 아니다. 覺者가 아닌 그들이 대승경전을 저술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견해가 부처님의 진의라고 확신한 사상을 불타에 가탁하여 결집하고, 그것을 종래의 성전이상으로 불타의 진의를 대표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佛說’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며 히라가와의 불탑신앙과 불전문학의 기원설에 정면으로 비판을 제기하였다.


또한 앞에서 ‘破僧 變移論’을 주장한 사사키는 대승의 기원 문제를 논할 경우 반드시 명기해야 할 필요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대승의 기원으로서 특정한 부파를 거론하면서도, 그것은 그 계통의 대승과 그 특정부파 사이의 개별적 관계에 불과하며, 대승전체의 기원이 그 특정 부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 대승은 다원적 종교운동이며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 중의 한 계통에 관한 기원 해명이라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

둘째, 첫 번째와는 반대로, 대승의 기원이 어떤 특정한 부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 대승과 그 부파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 부파 이외의 부파로부터는 대승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 이 논증이 없다면 다원 발생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사키는 이와 같이 대승 기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여전히 대승의 기원 문제는 연구 과제로 남아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사키는 히라가와 같이 대승의 기원에 대한 확실한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사키는 히라가와가 설정한 문제, 선별해 낸 자료, 사용한 방법들은 거의 대부분 지금도 그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단지, 히라가와가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확신에 의해 아주 조금, 이론을 비약시켰기 때문에 최종 결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미세한 비약을 시정하고 방향성을 바꾸어 주면 히라가와의 연구는 훌륭하게 되살아 날 것이고 여전히 그의 연구의 상세한 검토 없이는 대승의 기원을 찾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나 최근에 발표된 리차드 솔로먼의 ‘대승불교의 간다라 기원설’은 대승불교의 ‘불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비불설’로 혼란을 야기 시켰던 것만큼이나, 대승불교가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되었다는 획기적인 학설이다. 지금까지의 대승불교의 기원에 관한 학설로 본다면 솔로먼의 이와 같은 견해는 대승불교의 기원을 뒤흔드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솔로먼의 간다라에서 출토된 불교 관련 사본 연구는 불교학, 특히 대승블교의 성립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고 귀중한 연구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Ⅵ. 나가는 글


이상에서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배경과 교단의 조직 그리고 관련된 학설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대승비불설의 제기로 인한 대승불교도의 정체성 혼란에서 시작된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 기록의 미비와 산재되어 있는 문헌 취합 등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채 계속 연구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대승불교의 흥기에 관하여 우선은 대중부를 중심으로 한 부파교단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주류를 이루었다. 1971년대에 들어 히라가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승 흥기에 관한 학설을 제시한다. 율장 전공자인 그는 율장속의 탑과 관련된 부분에 주목하였고, 이에 관한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대승불교는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한 ‘재가 보살’과 ‘출가 보살’ 들이 ‘自利利他’의 종교적 이념을 실천하자는 재가자 중심의 불교 혁신운동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의 학설은 방대한 문헌적 고증과 다양한 가설로 구성되어 한동안 대승 흥기의 정설로서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히라가와의 학설에 반대하여 사사키는 새롭게 등장한 불탑 신앙자들은 재가자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출가자들이 위주로 되었고 재가자들이 그들을 지원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이 두 교수의 연구 방법론은 확실히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하여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승불교 흥기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대승비불설’이다.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의 논의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셨다는 ‘親說論’과 또 하나는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지만 경전의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佛說論’이다.


‘친설론’은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논란이 되었고, ‘불설론’은 스스로 아직 부처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자가 불타의 진의를 확신한 사상을 불타에 가탁한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불타가 되었다고 하는 자각을 가진 사람 즉 正覺한 자에 의해서 쓰였다는 것이다.


대승경전이 불설인가? 비불설인가? 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대승경전이 ‘불설’이든 ‘비불설’이든, 경전의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역사상 부처님의 친설은 아닐지라도 ‘포괄적 불설’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이면서 신앙의 종교로 여전히 인류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개방성과 적극성이 대승불교의 장점일 것이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219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