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윤회의 근거 = 이전 순간에서 상속되어지는 의식 & 불생불멸의 불성(佛性)

수선님 2019. 9. 8. 11:52

 

의식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나 모양 또는 폐쇄성이 없습니다.

 

 

그것의 본질은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이 어떤 조건을 만나게 되면 대상을 반영합니다.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고 상이한 양상을 띠는 것은

그것이 원인과 조건이라는 다른 영향력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마음은 비슷한 유형의 앞선 마음에 의존해서 생겨나는데,

그러자면 그보다 앞선 시작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연속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이 반드시 앞선 순간의 마음에 의존해서 일어나지 않고 까닭 없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 마음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앞선 의식에 연속으로 일어나지 않고,

그대신 물질적인 것에서 일어난다면 부조리하게도 언제든지 일어나거나 결코 일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 또한 부조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의식은 앞선 의식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앞선 순간의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연속에는 시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식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 연속 때문에 마음은 좋은 상태로 변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

우리의 경험은 윤회의 영역에 제한되게 됩니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열반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현상은 마음이 부리는 재주 또는 유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회라고 하는 청정하지 못한 현상은 청정하지 못한 마음의 유희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청정한 현상은 청정한 마음의 유희입니다.

 

 

윤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논리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은 빛과 앎의 실체로써 반드시 이전 순간의 의식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일단 의식이 이전 순간의 의식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연속체인 의식에 발단이 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반적인 의식과 가장 미묘한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이로써 재생 이론이 확립됩니다.

 

 

불교 경전에는 감정과 마음에 관한 많은 정보가 있는데 특히 금강승의 가르침에 많이 있습니다.

 

 

금강승의 가르침이 생리학적인 힘의 적용과 제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차원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더 거친 차원의 마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미세한 마음,

훨씬 더 미세한 마음과 같이 다양한 층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밀교의 경전에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감각적 차원의 의식, 혹은 마음이 온전히 작동하고 아주 활동적일 때, 비록 그와 동시에 생각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감각적 차원의 의식이 훨씬 더 지배적입니다.

 

 

꿈을 꿀 동안에 감각적인 의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각만이, 다른 차원만이 작동합니다.

 

 

꿈을 꾸지 않고 깊이 자는 동안에는 또 다른 차원의 더 깊은 의식(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기절을 하면, 설사 호흡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또 다른 차원의 깊은 마음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생리적, 육체적 기능이 멈춥니다.

 

 

예를 들어 심장 박동이 멈추고 뇌에서 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경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 때 모든 거친 차원의 마음은 멈춥니다.

그 때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은 멈추고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인 차원이 멈춘다는 것이고

의학적으로 죽음이 선언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를 가르치셨던 스승님은 돌아가신 후 13일 동안이나 몸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최근에, 일 년 전인 듯한데 티베트의 한 고승도 열반하신 후 거의 3주 동안이나 몸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 린포체의 몸이 그대로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람살라의 병원에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기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사람을 보내 그 기계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머리에 연결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함께 왔습니다.

 

 

비록 그때 아주 구체적인 분석이 최종적으로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의학적으로 죽음의 선언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분의 뇌에 여전히 어떤 전기적인 신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미세한 의식이 그의 몸 안에 남아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미세한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의식에는 아주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족첸 전통의 독특한 한 방법은

기본적인 마음과 본래적인 자각(리그파, rigpa, 불성)의 구별에 기초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구별은 다음과 같은 것에 기초해서 이해됩니다.

 

 

더 우발적이고 더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본성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보통 상태의 마음>의 특색입니다.

 

 

<본래적인 자각(리그파, rigpa, 佛性)>은 그와 같은 불안정함이 없이 항상 존재하며,

의식의 근원적인 본질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 둘은 이렇게 구별되어집니다.

 

 

--- 아래는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문] 죽어서 나는 인연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멸하고 말기 때문이다. 멸함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불에 태우면 재가 되어버리고, 둘째는 벌레에 파먹혀 똥이 되어버리며, 셋째는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지금은 단지 그 없어지는 것만이 보일 뿐 다시 나오는 이나 후생에 몸을 받는 이를 보지 못하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답] 만일 그대가 몸은 멸하여 곧 없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중생들이 전생에 익힌 바의 근심과 기쁨과 두려워함 등이 있다 하겠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울기도 하고 혹은 웃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익혔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근심과 기쁨을 계속 내는 것이다.
 

 

또 마치 송아지가 나자마자 젖을 찾아 먹는 것과 같고

돼지와 양의 족속은 그가 나서 얼마 되지 않아도 곧 암수의 교합(交合)을 아는 것과 같으며,

아들은 같은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데도 잘생기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며,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부자로 살기도 하며, 총명하기도 하고 암둔하기도 하는 등 저마다 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만일 전세의 인연이 없다면 다름이 없어야 하리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보아도 후세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그대는 먼저 “특별히 가는 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람 몸 안에는 비단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몸 안의 6정(情)은 저마다 아는 것이 있나니, 법을 들을 수도 있고 냄새 맡을 수도 있으며,

맛볼 수도 있고 댈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들을 수 있는 법조차도 오히려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알 수 있는 것이랴.
나는 것이 있고 죽는 것이 있는 법도 역시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대는 육안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지만 천안을 지닌 이는 명료하게 보게 된다.

 

 

마치 사람이 한 방에서 나와서 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나니,

이 몸을 버리고 뒷몸을 받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만일 육안으로 볼 수 있다 하면 천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천안과 육안과 어리석은 이와 성인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는 곧 그대가 축생과 같이 보는 것이 되니 어찌 후세를 보고 알 수 있다 하겠는가.

 

이 몸은 금세(今世)의 5중(衆)의 인연 때문에 다시 후세를 낳고 5중의 행업(行業)이 상속하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과보를 받게 된다.
 

 

또 마치 겨울 나무는 비록 아직 꽃과 잎과 열매가 없다 하더라도 시절을 만나게 되면 차례로 나오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죽어서 나는 것이 있음을 안다.
 

 

또 현재의 세상에서 전생의 일[宿命]을 아는 이가 있나니, 마치 사람이 꿈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피로했다가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그가 거쳐 지나간 길을 아는 것과 같다.

 

 

또 온갖 성인과 안팎의 경서(經書)는 모두 후세를 말씀하고 있다.
 

또 현재의 세상에서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켜서 허물이 중하며, 성을 내고 질투를 하고 의심을 내어 안으로 시달리기 때문에 몸이 바짝 마르고 얼굴빛이 즐겁지 않게 된다.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에 해를 받음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키겠는가.
 

 

만일 착한 법과 청정하게 믿는 업의 인연을 내면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고 마음이 기뻐지므로 몸이 가뿐해지고 안색이 온화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이 있으므로 착함과 착하지 않은 일이 있다.
이제 틀림없이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단지 중생이 육안이라 보지 못하고 지혜가 얇기 때문에 삿된 의심을 낼 뿐이니,

비록 복된 일을 닦는다 하더라도 짓는 일이 천박하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사(藥師)가 왕을 위하여 병을 치료할 때 왕은 은밀히 그를 위하여 집을 지어 놓았는데 약사는 모르고 있다가 돌아와서 그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 동안에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왕을 치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과 같다.
 

 

또 성인이 말씀하는 현재의 일을 진실로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후세의 일을 말씀해도 모두 믿을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밤에 험한 길을 갈 때 길잡이가 손을 내주면 믿어도 좋다고 하는 까닭에 곧 붙잡고 따라가는 것과 같나니, 비지(比智) 및 성인의 말씀으로써 반드시 후세가 있는 줄 알 수 있다.
 

 

그대는 육안의 죄가 중하면서 비지가 박(薄)하기 때문이며 또 천안이 없는 데다 스스로 지혜가 없어서 성인의 말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후세를 알 수 있겠는가.
 

 

그대는 천안(天眼)의 밝은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를 의심하며 스스로 죄악에 빠지려 하나니,

이 죄업의 인연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로 왕생(往生)을 설명하는 것이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30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