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제대로 알려고 해도 조리 있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스승도 드물고, 책을 보려고 해도 무슨 책부터 먼저 보아야 할지 난감하다고 합니다. 한문으로만 되어 있는 경전이라서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으며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경전이라도 어투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전의 종류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다른 종교에서는 경전이라도 한 권만 달랑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면 됩니다. 불교에서는 경전의 종류와 양이 얼마나 많은지 오죽하면 팔만대장경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종류도 왜 그리 많은지, 어떤 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으뜸이라고 했다가, 어떤 경에는 아미타불이 최고라고 했다가, 또 어떤 경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으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뿐만 아니라 보살의 종류도 많습니다. 관세음보살도 등장하고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등 종류도 많습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다 모아 놓은 《만불명호집》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명왕이나 천이니 하는 호법신장의 종류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갈피를 못 잡습니다. 초심자들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제법 체계적으로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갈피를 못 잡기는 오십 보, 백보입니다. 물어봐야 실천이 제일이라면서 그저 절만 하라고 합니다. 아니면 염불을 하던지 보시나 많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불자들은 그저 불상 앞에 절만하며 복만 비는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스님들은 무조건 하심만 하라고 하면서 신도가 고분고분하기만을 바랍니다. 모르는 것이 있어 답답해도 도무지 물어볼 데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가 도리어 야단만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중들은 불교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줄 안내서나 요령 있게 요점을 잘 가르쳐 줄 안내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불교 공부의 첫째로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문 위주의 경전들도 사람들이 불교에 접하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다고 나선 저 같은 사람도 공부하다가 보면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닌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 불교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불교는 어차피 실천이 따라야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그 기본 원리만 잘 알면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어 보며 길을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경전의 난해함이나 교리 해설서의 부족 같은 문제가 불교 공부를 하는데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공부를 좀 한 사람들도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에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접근하기 때문에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또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할 때에는 불교를 통하여 어떤 보상을 바라고자 하는 심리가 앞서 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천면에서도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에 공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공에 대해서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큰 소리 치고 거기에 대해 강의까지 하는 사람이 실제의 생활에서는 공을 잘못 이해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근본 목적을 망각하고 불교를 접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망각이 아니라 애초부터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불교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가르침인가?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다고 느끼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에서 지향하는 목표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불교의 모든 교리가 그 목표를 향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그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모든 교리가 그것을 향해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 따라 어떻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성불(成佛)이라는 것입니다. 성불은 글자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거창한 목표처럼 느껴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같은 범부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까마득해서 가망 없는 일로 여기고 처음부터 포기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입니다. 그러면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부처가 되면 뭐가 좋을 것 같습니까? 부처가 안 되어 봐서 모르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성불의 경지는 너무 까마득해서 우리 범부들이 어떻게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범부가 성불한다고 하니까 너무 거창해서 엄두를 못 낼 수도 있으니 편하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불은 부처가 된다는 뜻으로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을 얻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고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고, 즉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 상태를 또 다른 말로는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안온한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 성불이고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생로병사의 근원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출가를 하여 수행을 하고 마침내 성불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불교를 공부해 보려는 것도 대전제는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되고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안온하고 행복한 삶만 계속된다면 머리 아프게 불교를 공부 할 필요도 없고 엉덩이 짓무르도록 앉아서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처가 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 괴로움이라는 것이 놓여 있기 때문에 그 해결을 위하여 불교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사소한 고뇌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로병사라는 근원적인 괴로움이 항상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불교를 통하여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괴로움으로 가득 찬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근본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며 성불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괴로움의 실상을 바로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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