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유식사상(唯識思想)-정통에 가장 가까운 이론

수선님 2019. 10. 27. 11:47

 

<유식사상(唯識思想,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

고려 유식사상의 본거지였던 원주 법천사지(사적 제466호)

차례

1. 유식사상(唯識思想)이란

2.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라 한다.

3. 유식학의 대가들

4. 유식사상의 특징

1)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의 관계

2) 유식사상이란 마음에 관한 것이다.

3)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추구하고 있다.

5. 주요 유식사상

1) 8식(八識)의 구조

2)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

3) 심왕(心王, citta)과 심소(心所, caitta)

4) 유식 4분설(四分說)

5) 유식 사지(唯識四智)

6) 4선근(四善根)-4가행위(四加行位)

7) 유식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五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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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지의 주인공 지광국사의 현묘탑-국보 제59호(현재 고궁박물관 뜰에 있음)

1. 유식사상(唯識思想)이란


유식사상(산스크리트어 비즈납티마트라/vijnaptimatra)은 유식학, 유식론, 유식설 혹은 유식불교라 불리며, 마음의 역할과 구조 기능, 마음의 현상을 밝히는 불교심리학이다. 유식학은 실제적인 수련에 의해 성립된 불교 심리학으로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심리학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이론이 너무나 번잡해서 옛날부터 골치 아픈 학문의 대명사로 지목돼 왔다. 따라서 까다롭고 방대한 유식의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므로 여긴 최대한 간추려서 논의를 하겠다.

유식사상은 용수(龍樹, Nagarjuna, AD 150~250?)가 정립한 중관사상(中觀思想)에서의 공사상(空思想)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용수가 죽고 80여년이 지난 4세기 전반에 대두됐다. 그리하여 유식사상은 중관사상의 공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발전시켰다.

미륵(彌勒,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에 의해서 최초로 천명된 유식사상은 미륵의 제자인 무착(無着)과 그에 이은 무착의 동생 세친(世親)에 의해서 조직화되고 체계화됐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그리하여 팔만대장경을 손에 넣고 쥐어짜면 남는 것은 마음 심자(心)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유심론(唯心論)적 성격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있었다. 초기에 6처(六處)와 12처(十二處)설이 있었는데, 여기서 12처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인식기관에 의거해 여섯 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인 <잡아함경>엔 ‘마음은 일체법의 근본이 된다.’라고 했으며, <증일아함경>엔 ‘마음이 번거로우면 중생이 번거롭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보다 대승적으로 유식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화엄경>의 유심사상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만약 사람들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본바탕을 알아야 한다. 일체는 오르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내고, 오온(五蘊-이 몸뚱이)도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마음은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체성과 작용이 집합해 이루어진 인격체를 뜻한다. 이와 같은 인격체마저도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심위법본(心爲法本)]는 것이다.

그리고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 심외무경(心外無境)이라고 해서 ‘만법(萬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식(識)의 표상(表象)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인식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마음을 떼어 놓고는 불교를 논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은 같은 말이고, 유식사상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 <해심밀경> 등의 만법유식(萬法唯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유가유식학파의 선구적인 유가사(瑜伽師)들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자각한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 vijnapti=마음)일 뿐이라는 지각이 ‘유식(唯識)’이라 했다. 그리고 유식에 바탕 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오직 표상식(表象識)일 뿐이라는 명제가 이 학파 학설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주변에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사물이 자기의 마음과는 독립적으로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육체, 다른 인간, 나아가 산이나 강 등 자연계와 같이 모든 지각대상은 대체로 자기의 마음 밖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부파불교에서도 대개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식일원론(識一元論)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행과 악행은 물론 객관세계와 접촉하면서 생활하는 인과(因果)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고 했다.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마음의 인식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일체의 삼라만상이 오직 마음에 의해서 변화되며, 마음을 떠나서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 곧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이러한 유식불교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을 좀 더 현실화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에 있어서 삶의 공간인 현실, 즉 대중세계를 인정하고, 깨달음 즉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간 단계인 보살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구분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이론을 현실성 있게 체계화했다.

그리하여 여래장사상이나 화엄사상, 천태사상 등은 모두 유식불교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식불교의 영향을 받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속제[俗諦, 심생멸문(心生滅門)]와 진제[眞諦, 심진여문(心眞如門)]를 구분하고, 일심이문(一心二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여기서 경(境)은 마음을 떠나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의미하고, 식(識)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유식무경이란 말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고 외적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심론(唯心論)의 주장이다. 즉,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유가행파에서 無相有識론과 有相有識론의 차이

무상유식론은 인식하는 과정에서 식에 투영된 형상은 허망한 것이므로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길가의 밧줄을 뱀이라고 착각했다가 밧줄인 것을 알게 될 때 식에 투영된 형상이 뱀이었다가 밧줄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표상은 인식의 본질이라기보다 망상의 소산이므로 허망하다고 주장한다. 섭론종으로 발전.

유상유식론은 식에 나타나는 형상을 실제라고 주장하는 유상유식을 창안한 디그나가는 유식학의 식론을 인식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아뢰야식의 종자에 의한 종래의 인식론적 학설이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직접지각의 성립을 대상과 주관의 관계로 설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에 나타나는 형상을 의타기성이라 하고 외계 대상물의 실제를 부정함으로써 유식 본래의 취지를 살렸다. 법상종으로 발전.

-하룻밤에 읽는 불교. 알에이치코리아/소운 240~1 참조



법천사지 당간지주

2.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라 한다.


유가행파(瑜伽行派)는 용수의 중관파(中觀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두 기둥을 이루었다. 유가행파란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흔히 유가유식(瑜伽唯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승불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사상들이다.

유가행(瑜伽行)이란 요가차라(Yogacar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역한 말이다. 요가(Yoga)라는 원어의 발음을 한자로는 유가(瑜伽)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유가행, 즉 ‘요가차라’는 요가의 실천을 뜻한다. 말 그대로라면 유가행파는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도에서 몸을 비틀며 하는 체육운동의 하나인 요가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행파는 요가의 실천에 기반을 두면서, 이론적으로는 유식설(唯識說)이라는 독자적인 교의를 확립하고서, 중관파와 함께 인도에서 쌍봉을 이루었던 대승불교의 학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굳이 유가행파(瑜伽行派)라는 명칭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인도의 유명한 육파철학(六派哲學) - 4세기 굽타왕조(Gupta王朝) 때 인도에서 확립된 정통 브라만 사상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철학 체계 -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몸을 비틀어가며 하는 운동인 요가 수행자들의 뿌리인 요가(Yoga)학파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불교의 유심론적(唯心論的)인 경향이 첨예화돼 하나의 특별한 학파를 이룬 것이 유가행파라 할 수 있다. 유식설을 주장하는 유가행파가 독립된 학파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공(空)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관파의 공사상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려는 사고방식을 시정할 필요가 대두됐던 것이다.

그리고 교리 상 항상 문제가 돼 왔던 윤회의 주체를 해결함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을 탐구함으로써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이라는 근본식(根本識)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존재를 산출해 내는 근본식(인식작용)으로서 제8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것을 설정하고, 이것을 근본바탕으로 해 그 위에 제7말나식(末那識, Manas)과 6식을 배치한 8식설을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초기 대승불교에 나타나는 유심사상(唯心思想)과 일맥상통하는 점은 있으나 초기 대승불교의 유심사상이 <화엄경>과 <기신론>의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에 기초를 둔 진여(眞如)에 근거한 존재론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면, 유식사상은 아뢰야식에 근거한 인식론적 철학적 해명이다.

선과 악도 마음이 발생하는 것이며, 악을 멸하고 선을 실행하는 것도 마음이 하며, 범부의 무지를 정화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마음이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 등 6식에 의해 업력이 조성된다고 한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도 있었다.

그런데 소승불교는 심 · 의 · 식(心意識)으로 6식(六識)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들 심 · 의 · 식은 그 체성(體性:근본 성품)이 일체(一體)라고 했다. 이에 대해 유식불교에서는 심의식을 8식으로 나누고 8식의 심체(心體:마음을 이루는 근본 성질)는 각각 다르다고 했다.

법천사지

3. 유식학의 대가들


* 미륵(彌勒, 산스크리트어 Maitreya/마이트레야, AD 270?~350?)---미륵은 승려의 이름인 경우와 보살의 이름인 두 가지가 있다. 유식학의 창시자인 미륵은 미륵보살과 다른 실존 인물이었다. 남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식학을 펼쳐서 유가행파(유식학파)를 열어 그 개조가 됐고, 제자로 무착(無著, 300?~390?)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무착이 편집 출간한 미륵의 저서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어서 후세에 유식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오대부론(五大部論)이라고 했다.

①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②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③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④ 변중변론(辨中邊論),

⑤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蜜經論)


※해심밀경(解深密經)---인도의 중기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유심사상(唯心思想)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어서 유식사상(唯識思想) 흥기에 많은 영향을 기친 경전이다. 유식수행의 실제를 이론화한 저술이 <유가사지론>이고, 이 논서로부터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이 분기했다. 이 <해심밀경>에 유식(唯識)이란 용어가 가장 먼저 사용됐다.

원래 명칭은 상디니르모차나 수트라(Sa­mdhinirmocana-sutra)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으며, 한역으로는 전역(全譯)의 2종과 부분역 2종이 있으며, 티베트역으로는 전역 1종이 있고, 이 티베트어역을 통한 프랑스어역이 있다.

<해심밀경>은 기원후 300년경에 성립됐다고 보며, 중기 대승경전에 속하고, 문답형식으로 논술돼 있어서 경(經)이라기보다는 논(論)의 부류에 속한다. 인도의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과 중국 등지의 법상종(法相宗)의 근본경전 중 하나로서, 신라의 고승 원측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지었다.


*무착(無着, 산스크리트어 Asanga/아상가/阿僧伽, 300?~390?)---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했으며, 세친(世親)의 형이고, 북인도 간다라국(Gandara)의 수도 푸루샤푸라(Purusapura)-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페샤와르(Peshawar) 출신이다.

처음에는 소승불교(부파불교)인 화지부(化地部)에 출가해 열심히 수행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뒤에 미륵의 가르침을 받게 돼, 대승불교의 모든 경론을 연구하고 유식불교를 확립했으며,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가 됐다. 유식설을 조직 ·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외에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저술했으며, 미륵의 주요저서인 오대부론(五大部論)를 편집 출간했다. 그리고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십지경(十地經)> 등 대승경전의 유심사상을 종합해,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마음에 의해 현상계가 창조되고 실현된다는 유식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대승경전과 미륵과 무착의 논전에 나타난 유식사상을 초기유식학이라고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 산스크리트어 Mah?y?na-sa?graha 마하야나상그라하)>은 ‘대승(大乘)을 포섭(包攝)한 논’이라는 뜻으로 무착(無着)이 저술한 대승불교의 논서이다. 무착은 중기 대승불교의 유가행파 유식설의 입장에서, 이에 앞선 <반야경>이나 용수의 중관불교(中觀佛敎)의 사상과 유가행파의 근본경전인 <해심밀경(解深密經)>, 미륵의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등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이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직화해 대승불교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섭대승론>을 저술했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으며 한역 3본(三本)과 티베트역이 현존한다. 진제(眞諦)가 개조인 중국의 섭론종은 바로 이 <섭대승론>에 의거한 종파이다.


* 세친(世親, 산스크리트어 Vasubandhu/바수반두, 320?~400?)---천친(天親)이라 하기도 하고, 바수반두(婆藪槃豆)라고 음사한다. 무착의 친동생으로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출가해 소승 교리를 연구하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있었다. 무착은 대승불교를 비방하는 세친의 행위를 염려해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해서 <십지경(十地經)>을 보여주고 유식사상을 설명해 대승불교에 귀의케 했다.

※십지경(十地經)---<화엄경> 중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 십지품(十地品)을 말함. 십주경(十住經)이라고도 한다.


이후 세친은 무착의 유식학을 계승해 이를 완성시켰으며, 여러 대승경전을 연구해 대승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가행파를 인도 대승불교의 주류로 이루어냈으며, 그의 유식학을 조직유식학(組織唯識學)이라고 칭한다. 조직유식학은 8식의 심체[심왕(心王)]와 심체의 작용[심소(心所)]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들 정신계와 물질계의 인연관계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을 말한다.

세친의 저서엔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俱舍論)>이 있고, 미륵-무착으로 이어진 유식학을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결집했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에서 우리의 인식 활동을 꿈에 비유하면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식은 식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논했다.

<유식삼십송>은 여러 서적에 나온 유식설을 30개의 송(頌)으로 집약해 체계화했다. 563년에 진제(眞諦)가 한역했고, 현장(玄奘)도 648∼649년 사이에 한역했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함께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을 거치면서 틀을 갖춘 유식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저자 자신의 유식설을 완성한 책으로 평가된다. 이 <유식삼십송>에서 8식을 설파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심층의식으로서 여기서 우리가 지은 업(業)의 자취가 종자(種子)와 같이 축적돼 있으며, 그것들이 발현해 자아의식인 제7식 말라식(末那識)과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으로써 지각되는 경험세계를 연출한다고 했다.

따라서 경험세계는 식(識)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식의 상분(相分)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분을 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부의 인식상태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작용 그 자체도 항상 생성소멸하는 의타적 존재로서 이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부르며, 이렇게 식의 본성을 깨닫고 나면 외계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이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른바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이다.

그리고 세친의 또 다른 저서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은 모든 유식사상을 백 가지 단어에 포함시켜 체계화한 논전이다. 이와 같은 저서들은 모든 유식학을 잘 정돈해 축소했기 때문에 몇 사람의 학자만이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그 밖에 일반인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안혜(安慧)와 호법(護法) 등 28명의 학자들이 해설서를 간행했으며, 그 가운데 열 사람의 해설서가 가장 훌륭했다. 그 열사람은 난타(難陀), 친승(親勝), 화변(火辨), 덕혜(德惠), 안혜(安慧), 호법(護法), 정월(淨月), 최승자(最勝子), 승우(勝友), 지월(智月) 등을 말하며, 이들은 유식학의 대학자라는 뜻에서 후세에 십대논사(十大論師)라고 불렀다. 십대논사들이 유식학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해서 이 시대를 유식발전기(唯識發展期)라고 한다.


* 진나(陳那, 산스크리트어 Dinnaga/딘나가)---5~6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진나(陳那)는 음사한 이름이고, 의역해 대역룡(大域龍)이라고도 한다. 불교논리학인 인명론(因明論)을 대성시켰다. 남인도 브라만가문 출신으로 불교로 개종한 후 출가했다. 이후 세친의 문인이 돼 특히 유식과 논리학에 정통하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학을 정립함으로써 인도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유식설에서는 견분(見分), 상분(相分), 자증분(自證分)의 삼분설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정리문론(正理門論)> , <무상사진론(無相思塵論)> , <관총상론송(觀總相論頌)> , <장중론(掌中論)> 등이 있다.


* 호법(護法, 산스크리트어 Dharmapala/다르마팔라, 530~561)---달마바라(達磨波羅)로 음역한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주석을 더해 세친의 사상 해석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다. 6세기 중기 드라비다국 대신(大臣)의 아들로 태어나, 그 나라 공주와의 결혼 첫날밤에 신방을 몰래 빠져나와 출가했다. 그의 학문은 대승과 소승에 모두 정통했고, 특히 유식학 연구의 대가였다. 그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지어 유식사상의 기반을 다졌다. 이 논서는 현장(玄奘)을 통해 중국에도 전해져 중국 법상종 성립의 계기가 됐다.


* 안혜(安慧, 산스크리트어 sthiramati, 510~570)---남인도 나라국(羅羅國) 출신의 승려로, 유식학과 인명(因明)에 정통했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 <유식삼십송석론(唯識三十頌釋論)>을 지었고, 그 외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등의 저서가 있다.


* 현장(玄奘, 602?~664)---중국 당나라시대의 승려로 자신의 교리적 의문에 해답을 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계현논사(戒賢論師)의 지도를 받으며 유식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산더미같이 많은 불교 경론들을 갖고 귀국했다. 많은 책을 가져온 현장은 당(唐) 태종의 유래 없는 환영을 받아 막강한 국가적 후원 아래 여러 불경을 한역했다. 중국 유식학 계통의 법상종을 열릴 기초를 닦았으며, 당시 현장의 문하에는 국내외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현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그의 번역 작업을 돕고 그 문헌들의 주석에 전력을 쏟았던 사람이 규기(窺基, 632~682)였다.


* 규기(窺基, 632~682)---중국 법상종의 사실상 개조로서, 자은대사(慈恩大師) 혹은 대승기(大乘基)라고도 불린다. 17세에 출가, 현장(玄奘)의 제자가 돼 유가유식종(瑜伽唯識宗)을 전수받고, 다시 인명학(因明學)을 익혔으며, 28세 때 스승을 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했다. <성유식론>의 번역에 있어서는 단지 규기만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 후 <성유식론>의 연구에 힘써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를 저술했고, 그 외에도 반야심경의 주석서인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般若波羅蜜多心經幽贊)>과 <장중추요(掌中樞要)> 등을 저술했다. 그 밖에 <유가론약찬(瑜伽論略纂)>, <법화현찬(法華玄贊)>,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 등 50부(部)를 저술해 사람들이 그를 백본소주(百本疏主) 혹은 백본논사(百本論師)라고 했다.

규기는 한마디로 7세기 즈음 동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불교 주석가라고 할 수 있다. 규기는 백본소주(百本疏主)라고 불리듯 새로 유입된 수많은 불교 경론을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에 자신의 온 지성을 쏟아 부었다. 그의 작업 중 뛰어난 것은 여러 유식학설을 한데 모아 집대성한 〈성유식론>을 번역한 일과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를 직접 쓴 것이다. 이 논서와 그 주석서들에서부터 중국의 새로운 유식학 즉 법상종이 시작됐으므로 규기는 법상종의 초조로 불리게 됐다. 물론 그의 불법 계승과 방호에 빛을 발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그의 스승 현장의 원력이 많이 작용했다.


*중국의 유식학

현장 유식학의 발달과 한계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유가사지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장은 미륵에서 시작한 유식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도불교를 중심으로 배운 현장의 유식학에는 중국의 정서와는 다른 필연적인 문제점을 품고 있다. 이것이 五性各別說*이라고 하는, 인간마다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불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제창한 학설이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구분 짓는 신분 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러한 신분 제도가 없기 때문에 맹자가 天命靡常이라고 하여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 것이나, 사기』 「陳涉世家에 흔히 회자되는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은 권력에 의해 재편되는 중국의 신분 구조를 잘 나타내는 예이다.

현장도 이러한 주장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식론이 중국에서는 위험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그것이 인도불교의 정설이므로 그대로 전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를 시행한 현장의 유식학은 제자인 자은 규기(632~682)에 의해 발전하지만, 보편성과 평등을 앞세운 화엄종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주류에서 물러나게 된다.

 

*五性各別說: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 제시하는 다섯 가지 인간 유형.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현장(玄奘규기(窺基)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으며, 이들 인간 유형이 성불(成佛)이라는 불교의 목적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현실적으로 제창한 학설이다. 대승불교의 근본이상에 의하면 모든 생명에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근기(根機)에 따른 천차만별의 상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별한 인간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문정성(聲聞定性):성문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진리를 즐겨 듣기는 하나 실천이 없는 소승(小乘)의 성자를 가리킨다. 독각정성(獨覺定性):성문보다는 지적으로 월등하지만 여전히 이타(利他)의 보살행을 결여한 소승적 수도인을 말한다. 보살정성(菩薩定性):보살의 이상과 행위를 실천하는 대승의 수도자로서, 오성(五性) 중 가장 뛰어난 존재이며,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성불이 기약된다고 보고 있다.

 

부정정성(不定定性):아직 선악이 나누어지지 않은 가능성의 존재로서, 선도 악도 될 수 있는 일반적 가능태(可能態)를 가리킨다. 무유정성(無有定性):성불에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존재로서, 전생부터의 악업이 쌓여서 성불을 이룰 가능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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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인간 유형 제시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관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지막의 무유정성을 놓고 대승불교 사상계에는 큰 논란이 있었다. , 법화경이 등장한 이후 아무리 극악한 존재라 할지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일천제성불설(一闡提成佛說)’이 일세를 풍미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은 이 오성각별설을 전면으로 부정하여 일성개불설(一性皆佛說)’을 제창하였다. , 다섯 가지의 현실적 인간 유형은 인정하지만 성불에 있어서는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대립은 끝내 유식불교를 분열시켜서 유상(有相무상(無相)의 구분 외에도 또 다른 분파를 초래하였다.

 

특히, 중국 법상종의 사상가들은 원측 등이 주장하는 일성개불설을 비판하여 그와 같은 사상 계통의 저술들을 전부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생애를 중국에서 보낸 원측의 저술들이 인멸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원측의 학설은 티베트지역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으며, 우리 나라의 의적(義寂태현(太賢경흥(憬興) 등 유식사상가들은 대체로 원측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



* 신라의 유식학---중국에는 유식학을 이념으로 한 지론종과 섭론종, 그리고 법상종이 생겼다. 이에 대해 한국의 유식학은 원광법사(圓光法師, 555∼638)가 섭론종을 수학했고, 다음으로 신라의 원측법사(圓測法師, 613∼696)가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원측법사는 15세에 중국에 유학해 처음에는 섭론종의 유식학을 전공했으며, 그 밖에 대승과 소승의 교학을 연구하고, 어학도 뛰어나 6개 국어를 잘 했다고 한다.

원측법사는 이어서 현장법사가 도입한 법상종의 유식학을 연구해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등에 대한 연구서를 규기보다도 먼저 발표했다. 이와 같이 원측은 규기를 비롯한 중국계의 학자들과는 달리 모든 유식학을 종합해 일승(一乘)적인 사상을 건립했다.

이러한 학문의 특성 때문에 중국에 유학한 학승은 물론 중국승려들까지도 원측법사의 지도를 받았다. 원측은 서명사(西明寺)에 오래 주석했기 때문에 원측의 호를 서명(西明)이라 했으며, 서명을 추종한 학자들은 서명학파 또는 신라의 유식종이라고 칭했다.

원측법사의 직계제자로는 도증(道證)이 있으며, 도증은 원측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을 저술해 중국계 학자들의 비판을 타파했다. 현재 남아 있는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와 둔윤(遁倫)법사의 <유가론기(瑜伽論記)> 등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저술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유식학을 전공한 학자로는 원효(元曉)를 들 수 있다. 원효는 <해심밀경>과 <성유식론>, <유가사지론> 등 많은 유식학의 경전과 논전을 연구해 주소(註疏)를 썼다. 현재 남아있는 저술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이장의(二障義)>를 비롯해 <유가사지론소>와 <성유식론소> 등이 있다. 또 원효는 <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현존의 저술에 유식학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원효는 진제(眞諦)가 전한 아마라식(阿摩羅識)설과 현장(玄奘)이 전한 아뢰야식설을 함께 인용한 것으로 봐서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학을 모두 통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저술에 의해 신라의 유식학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현재도 일본과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신라인들의 저술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유식학은 신라의 고승인 지통(智通)과 지달(智達), 지봉(智鳳) 등이 일본에 건너가 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유식학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저술을 통계해 보더라도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더 많았다. 이러한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쇠퇴했다.

※인명(因明, 산스크리트어 hetu-vidy?)---5∼6세기경에 성립한 불교논리학, 논증의 근거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인(因 hetu)이란 논증의 형식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뜻하는데, 이것은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인명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법상종(法相宗)의 흔적---현장(玄奘)에 의해 본격적으로 중국에 소개된 유식사상은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에 의해 법상종으로 개종됐다. 그 법상종이 7세기경 원측법사(圓測法師)에 의해 신라에 전해졌다. 그 후 신라 말에 원주 법천사(法泉寺)가 세워지고, 고려시대 들어서서는 이 법천사가 법상종의 중심사찰이 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 법천사지(사적 제466호)엔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의 흔적을 비롯한 많은 유물 유적이 남아 있다.

법천사지

4. 유식사상의 특징


1)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의 관계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고통의 현실 세계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나와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부정을 뒷받침해 주는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다. 붓다는 연기법에서 온갖 현상들은 다만 인연 따라 존재할 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에 부파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은 공(空)이지만 그 만법을 이루는 요소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공적 반야사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공(空)사상의 공을 설명하기가 난해하므로 보충적으로 설해진 것이 중관사상(中觀思想)이다. 그러나 중관사상 역시 현실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어 다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唯識사상이 中觀사상의 미비점을 지적한 점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상계를 십이연기 중 /인식작용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다. 다른 인도학파에서는 윤회하는 주체를 아트만이라고 설정한다. 아트만은 한 육체가 소멸하면 다음 육체와 함께 윤회하여 재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無我를 주장하기 때문에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아라면 사후 무엇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부파불교인 아비달마 시대부터 추구해온 불교철학의 난제였다. 십이연기를 실체적인 구조로 규정하는 설일체유부는 업을 원동력으로 하여 윤회하는 業感緣起를 말한다. 은 과거세의 어리석음[無明]에 영향을 받아 행위를 유발하는데, 그 과거세의 이 행한 과보를 받는 것이 현재세의 순간이라는 것으로 무명과 현재의 업을 연결시켜 윤회를 설명한다.

유식사상도 설일체유부에서 해석하는 구도와 동일하게 보지만, 식이 순간순간 소멸하고 생성하는 刹那滅이라고 해석하는 데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식설의 해석에서 보이는 또 다른 난제는 찰나 찰나에 소멸하고 생성하는 식이 어떻게 과거세의 어리석음과 결합하여 현재세의 업을 생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가행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설정한다.

*三性說

瑜伽行派唯識無境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原性實性의 세 가지 단계로 설정한다. 변계소집성이란 범부들이 실체가 아니 것을 顚倒妄想하여 집착하는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이란 相依相對하면서 공존하는 연기로 생성하는 현상계의 실상을 말한다. 원성실성이란 연기로 생기하는 의타기성을 깨달으면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가 펼쳐지는 상태를 말한다. 중관학파는 삼성 중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으로 공성을 설명하여 번뇌가 곧 공성이라고 설하나 유가행파, 곧 유식학파는 거기에 연기의 세계인 의타기성을 더해 삼성설이라는 세 가지 단계/경계로 공성을 설명하게 되었다. 결국 三性說에서 중요한 것은 의타기성이고, 이는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이해해야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유가행파의 의도를 담고 있다. 하룻밤에 읽는 불교 개정판/소운 222~235쪽 참조

 

유식사상에서는 제8아뢰야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아트만에 대한 인도인의 집착-독자부는 補特伽羅는 아트만과 유사한 의미로, 윤회의 주체라 주장하며, 실제로 금강경에서 비판/주장하는 四相,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에서 아상이 바로 아트만이며, 인상이 보특가라에 해당한다. 자이나교는 수자상을 윤회의 주체로 본다.

-불교사 100장면 147

무아윤회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용수(龍樹)의 중관사상에 의해 이론적 기반을 구축했던 공사상(空思想)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인식의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키게 했다. 유식설은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고도의 심리학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유식의 사상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인식의 한계성 및 심층심리와 거기에 잠겨 있는 이기성(利己性)의 실태를 정면에서 추구하고, 진실한 자기의 모습, 마음의 성찰을 바탕으로 하면서 탐색했다.

중관사상은 공의 논리를 전개했으나 체계적인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현실적 존재가 어째서 이 같은 질서 위에 성립돼 있는가 하는 까닭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것이 유식사상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식(識, 인식작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상의 요점은 상식적으로는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라고 믿어지는 물질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인식작용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작용이 보는 것이라면 그 대상 즉 경계(境界)는 보여지는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유식은 아비달마의 유적존재관(有的存在觀)과 반야 공사상의 무적존재관(無的存在觀)을 중관적으로 인식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사상을 논리화하고자 했다. 반야사상이 지나치게 출가자 중심의 사상이었다면 유식사상은 중생과 깨달은 자를 구분해 현실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심층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이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는 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을 했고, 인간의 심원한 인간 응시의 사상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공과 마음의 해탈을 가르치고자 했다. 중관불교가 초기불교이래의 예지를 강조하고, 인간존재의 이법을 탐구하며 반야와 공의 실천을 강조했다면, 유식불교는 마음의 심층세계와 해탈의 심리를 탐구했기에 이 양자는 대승불교 사상의 양대 기둥을 이루었다.


2)유식사상이란 마음에 관한 것이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서 정립된 유가학파의 근본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돼 있는 종자로부터 생긴 것으로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해서 생긴, 결국 자기 자신의 인식수단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모두 마음 작용인데, 견분은 인식하는 장(場)이 되고 상분은 인식하는 대상(對象)이다. 즉, 견분(見分)은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등 사물(事物)을 마음 안에 끌어들여 인식하는 주체인 심식(心識) 작용이고, 그 반대가 인식의 대상인 상분(相分)이다. 따라서 주관의 부분이 견분이라 하고, 객관의 부분이 상분(相分)이다. 견분은 대상을 인식하는 인식 주관의 작용이므로 만일 견분이 없다면 어떻게 관조(觀照)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받아들이기를 나와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들의 현상인 만법(萬法)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 만법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인식하는 근본 이유는 내 몸에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오근(五根), 즉 안(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입), 신(身/피부)이 나의 주변에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 귀로 들을 수 있는 한계,… 등과 같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그 기능은 제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가지는 한계 밖의 정보까지를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지 않고도 보고, 듣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기관의 기능을 초월한 식(識/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식은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때부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고, 피부로 느낀 것들을 저장해서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은 이렇게 쌓여온 식이 있기에 가능하다. 만법(萬法)이 실제 존재한다기보다는 식이 저장해 놓은 종자(種子)에 의해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다. 식이 없다면 만법을 알 수 없다. 그러니 식이 없다면 만법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 의하면 유(唯)는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고, 식(識)은 오직 심체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광활한 초원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이 나무를 보고, 지친 나그네는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수는 베어서 가구를 만들고 싶어 할 것이고, 상인은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할 것이다. 또 화가는 스케치하기에 바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물을 놓고 각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식(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식이 곧 마음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옛 여인이 생각나서 골똘히 그 여인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이 때 “이봐, 저것 좀 봐, 참 아름답지?”라 하며 옆의 친구가 건드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경치는 지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다. 분명히 눈으로는 봤을 텐데,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없다. 왜 그럴까? 눈은 마음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이란 식이다. 곧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식(識/마음)이다. 5근(五根)은 다만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의 가치는 우리들 마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마음은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크게 보면 곧 식(識)이다. 식이란 다섯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적 인식(전5식/前五識)과 이를 분별하는 의식(意識) 내지는 인식활동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식을 이와 같이 정의 할 수 있으나, 유식불교에서는 이 식(6식) 외에 인간의 정신세계가 제7식 말라식(manas)과 제8식 아뢰야(alaya)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식을 넓은 의미에서 마음이라 하며, 좁은 의미로는 제8식만을 지칭한다. 마음은 작용을 통해 겉으로 들어난다. 즉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작용이다.


*유식무경. 변중변론 - 대상, 중생, 자아, 요별. 마치 선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영상, 예를 들어 원의 홀로그램이 식에의해 나타난 것 처럼, 모든 객체와 주관은 식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모든 것은 아뢰야식 내부에 있는 종자의 힘에 의해 발현되었다는 결론으로 이끌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개연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외계대상의 부정으로 귀결될 것이다.(마음과 철학 164쪽)

*일수사견


3)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마음의 현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 철학이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번뇌를 가져다주는 근본으로서 실체적인 개념, 즉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관념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실체적인 개념이 생겨나는 마음의 구조와 그러한 개념을 떠난 진실된 마음의 구조를 상세히 밝혔다.

곧 우리의 마음은 서로 관계하며 연기(緣起)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구조를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구조이다.

전식득지, 줄여서 전식(轉識)이란 망상과 분별을 일삼는 유루(有漏)의 식을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 번뇌로 인해 오염된 망식(妄識)을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전환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 중생의 마음은 무명 업식(無明業識)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은 반야의 무분별지(般若智)이다. 우리가 깨달음의 경지로 간다 함은 우리들의 무명 업식을 버리고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유식에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하며, 이 전식득지를 근본 취지, 즉 대의(大意)로 하는 것이 유식학이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중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전식득지를 통해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곧 전식득지는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지혜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규명한 것이다.

이 전식득지의 구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지혜는 미래에 계속된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의식이 지혜로 바뀐 순간부터 지혜는 계속해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보살의 이타행(利他行)과 자비행(慈悲行)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더욱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혜가 증득되는 전식득지의 경계는 용수(龍樹)의 공사상에서 보이는 공(空)을 체득하는 경계임을 알 수 있다. 공의 체득을 통해 열반의 경계가 나타나듯 전식득지 또한 이타행과 자비행의 근원으로서 대승보살의 위대한 정신적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식설은 식(識) 이외의 존재를 부정해 ‘오직 식만 있고 대상세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세계도 없다’는 입장에 서서 반야(般若)의 공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다만 요가라는 실천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근본자세에서 보면, 수행단계에서는 적어도 마음, 즉 식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식이 존재하는 양상을 수행에 의해 오염된 상태로부터 청정한 상태로 변혁하기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 속의 온갖 오염된 종자(種子)를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만으로 가득 채우는 전의(轉依)가 유식설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루식(有漏識)을 돌이켜 무루지(無漏智)를 얻는’ 전식득지는 유식의 목표이자 불교의 궁극적 지향이다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제59호)

5. 유식사상의 중요 개념


1) 8식(八識)의 구조


※심성(心性)과 심상(心相)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을 심성과 심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성은 모습이 없어 이름을 칭하기가 어렵지만 방편으로 진여 또는 불성 및 공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 진여를 바탕으로 해서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이라고 한다. 심성은 진제(眞諦)로서 평등해서 차별이 없지만 심상은 속제(俗諦)로서 차별이 있으며 차별의 마음을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상의 체성을 8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8식설이다. 이는 심의식(心意識)을 분류한 것으로서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심체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들 심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6식(六識)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6근(6根)이라 해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 대상인 육경(6境)을 만날 때, 각각의 감각 장소인 육근을 통해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6식(6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식이다. 초기 불교에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육근이 육경을 만났을 때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육식이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존재 속의 인식작용이 18가지 범주로 나누어졌음을 알게 되는데, 이것을 모두 합쳐 18계(十八界)라고 한다. 즉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눈, 귀, 코, 혀, 몸뚱이(피부), 마음(뜻)의 6종의 감각기관, 즉 6근과 그 대상인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사물 혹은 현상[법(法)]의 6경, 그리고 이 6근, 6경을 연(緣)으로 해서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6식을 합한 것이 18계이다.


※근(根)---여기서 근(根)이란 식(識)을 일으키는 근거라고 해서 근이라 한다.

※식(識, vijnana-skandha)은 알다, 인식하다, 요별하다는 의미이며, 넓은 의미로는 대상을 감각, 지각, 사고하는 마음의 활동 일반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은 마음을 일컫는다. 단 불교의 식(識)은 서양과학의 의식(意識)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유식론(唯識論)이 발전하면서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여덟 가지[팔식(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그리고 그 식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8식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으로서,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고,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했다.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는데, 즉 눈(眼)이 색(色)을 접촉하면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꽃을 보고 꽃임을 알아보는 게 안식이다.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는데, 즉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소리를 듣고 종소리라고 아는 게 이식이다.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는데, 즉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 비식(鼻識)이 일어난다. 냄새를 맡고 쿠린내라고 아는 게 비식이다.

제4식은 혀로 맛을 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는데, 즉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 설식(舌識)이 일어난다. 혀로 맞을 보고 달다고 느끼는 게 설식이다.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하는데, 즉 몸(身)의 피부(觸)에 접촉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난다. 몸이 접촉했을 때 부드럽다고 느끼는 게 신식이다.


이처럼 5근(五根)이 5경(五境)을 만나 일어나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는데, 이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인식이다. 이와 같이 식(識) 가운데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등 전5식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등 5근(根)이라는 육체의 다섯 부분에 의지해 활동하는 심식들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제6식은 어디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이냐 하는 것이다. 보통 제6식이 의(意)를 근거로 해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그 의근(意根)이라는 생각의 덩어리가 어떻게 제6식의 근거(뿌리)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견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소승불교의 견해를 보자. 인간의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즉,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말이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즉 앞생각을 의근으로 해서 뒷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6식의 의지처는 몸뚱이의 일부분이 아니라 생각[의(意)]이라서 심근(心根)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 활동에는 전5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상이라든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일어나는 여러 사고, 기억, 추리, 예상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것들을 제6식인 의식이라 한다. 즉, 제6식인 의식(意識)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마음을 뜻한다. 현재는 눈, 귀, 코, 혀, 몸 등 5근을 통해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선과 악을 결정하며, 모든 생각을 결정해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한다. 이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해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즉, 제6식인 의식은 전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 작용으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6 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5식과 공동으로 작용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과 단독으로 작용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 있다.


※오구의식(五俱意識)---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5식과 함께 작용해 그 대상을 분별하고 의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독두의식은 혼자 작용하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제6식인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5식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인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강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사고하는 정신적용 대부분이 이 제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바로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하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어서 요별식(了別識)이라고도 한다.

즉 전5식에 의해 인식이 일어나더라도 제6식에 의해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거나, 이것이 뭐다, 저것이 뭐다, 하는 분별이 생겨야 한다. 예컨대 꽃을 보고 꽃이라고 아는 것은 안식이고, 이어서 예쁘다거나 저 꽃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제6식 의식이다. 마찬가지로 맛을 보고 무슨 맛이라고 아는 것은 설식이지만 이어서 달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6근이 6경을 만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식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발생하는 조건은 6근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경우에 여섯 가지 경계(6경)에 부딪치고, 거기서 식이 일어나야만(확연한 느낌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식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눈(眼)의 경우를 보자, 외출했다가 귀가했다면, 그동안 길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그저 살짝 스쳐 지나간 정도였으므로 비록 접촉은 있었지만 확연한 느낌이 없었기에 접촉에 의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안식(眼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의식(意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으로 등록이 되지 못한 것이다. 느낌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부딪치거나,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라야만 안식이 일어나서 인식이 된다.

반면에 마주 오는 사람들 가운데 유별나게 예쁜 여인이 있어서 유심히 봤다고 하자, 이를 땐 안근이 제대로 갖추어서 눈길이 ‘예쁜 여인(경계)’에 닿아(부딪쳐) 유심히 봤을 것이고, 따라서 안식이 일어나서 의식에 의해 ‘예쁘다’ ‘한번 사귀고 싶다’ 하는 느낌인 의식이 성립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맹인의 경우 안근이 없기 때문에 색경이 있더라도 안식의 작용을 할 수 없어서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의 경우도 비슷하다. 소리라는 경계는 눈(안근)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드시 귀(이근)로만 들어온다. 입이나 혀를 통해서 소리를 인식하는 건 아니다. 즉 어떤 소리(경계)가 내 귀(이근)를 통해 들어와서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대뇌피질에 있는 의식(제6식)으로 가서, 아 이것이 차 소리구나, 아니면 기다리던 두부장수가 왔구나 하고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독서삼매에 들어 있으면 밖에서 차 소리나 두부장수 종소리가 났지만 못 듣는다. 이식(耳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귀(이근)가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경계가 다섯 가지 식을 통해 제6식(의식)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을 장미꽃이다, 비행기 소리다, 커피 냄새다, 꿀맛이다 하고 각기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몸으로 접촉해서 좋거나 싫은 것도 경계(촉경)이지만, 마음속에서의 온갖 느낌들, 이를테면 외로움, 답답함, 우울함, 질투 등의 느낌도 경계(법경)이고, 일상의 삶에서 시달리는 것은 경계 아닌 것이 없다. 즉 중생은 온갖 경계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좋은 경계가 닥치면 즐거워하고, 나쁜 경계가 닥치면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허나 수행자의 삶은 그 어떤 경계가 와도 좋고 나쁨의 분별이 없이 늘 여여(如如)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여함을 추구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런데 이 제6식이 동물에게도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동물에게도 제6식은 분명히 있다. 먹을 것을 보면 침을 흘리는 개의 마음이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이 아니라, ‘거칠지만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다시 말해 제6식의 결과라는 말이다. 애완견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제6식이 작용해서 그렇다. 그러니 동물들은 그저 지능이 낮을 뿐, 비록 거칠지만 의식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 조주 종심(趙州 從諗, 778~897)이란 선사가 있었다. 멋진 화두를 많이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선사인데, 어떤 선승이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조주선사께서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헌데 다른 스님이 물으니 이번에는 있다고 했다. 이는 개의 불성 유무를 놓고 따져 묻는, 즉 사소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견해를 타파한 공안(公案)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개에게 비록 미약한 6식은 있으나 불성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개는 스스로 수행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성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개보다 못한 사람이 많겠지만.

헌데 소승불교에서는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뒷생각이 앞생각을 뿌리로 의지해서 일어난다고 했다. 즉, 의근(意根)이 앞생각이라 했다. 하지만 돌발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어버렸다든지, 아니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이 일어나났을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생각의 등무간연이 단절될 경우, 제6식의 뿌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학이다.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의 뿌리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했다. 즉, 대승의 유식사상에서는 제7식 말나식을 의(意)라 하는데, 제6식이 이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므로 ‘의식(意識)’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제6식은 법경(法境)을 소연(所緣)으로 하고, 제7 말나식을 소의로 하는 식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제6식을 표층의식이라 한다. 본심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을 새로이 설정한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을 봤으며, 의식의 근거가 앞생각이라 했다. 즉, 소승불교에서는 앞생각이 뒷생각의 뿌리가 된다고 봤으나 유식학에서는 말나식을 상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나식은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로서,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 그리고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처럼 유식학에서는 8식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식(識)을 마음이라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마음을 일컫는 것이고, 보통 마음이라 하면 전5식을 포함한 제6 의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마음 혹은 생각이란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그리고 제7식부터는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심리로 들어간다. 따라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장미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에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 있다고 하자. 그 게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전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제6식은 보다 심층의식인 제7식, 제8식의 근거 위에서 제대로 의미를 발휘할 수 있다.


② 제7식 - 말나식(末那識, manas)

인간의 육신은 수만 년을 거쳐 진화해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육신의 진화에 따라 진화해왔다. 그리하여 초기 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 대승불교 유식학의 발전에 따라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은 여덟 가지(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8식(識)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인데,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며,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식(識)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즉,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고,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고,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고,

제4식은 혀로 맛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고,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한다.


이 5근(오관/五官)에 의지해서 생기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고,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식(意識)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한다. 이와 같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의 여섯 기관이 외부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인식이 6식인데, 그 중 제6식인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5식(前五識)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체로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며, 이 제6식까지를 보통 표층의식이라 한다.

그리고 유식학에서는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이며,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라고 해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하며, 무의식의 영역이라 했다. 따라서 제1식부터 제6식까지의 표면의식(표층심리)은 인간의 본심이 아니고,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의식으로 들어가는 제7 말나식이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고 했다.

제7식 말나식을 마나스식(Manas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칠감(七感), 전식(轉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말나식보다 더 심층의식으로서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고,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인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두 형제에 의해 유식학(唯識學)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AD 4세기 후반경인데,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바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나식은 삼식(三識)의 하나로서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해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는 아상(我相)을 가진, 이기심(egoism)이 있는 아주 깊은 무명의 뿌리이다. 이 말나식(末那識)은 6식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집착하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의식으로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 삼식(三識)---유식(唯識)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신 부처님 사상을 토대로 마음과 마음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의 불가분의 관계를 규명해낸 학설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심(心). 의(意). 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셋을 3식이라 한다. 심(心)은 아뢰야식을 말하고, 의(意)는 말나식을 말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을 일컫는다.


* 제7식은 제6식보다 심층심리이다.

말나식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6식(六識) 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6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광범위한 활동을 하므로 평상시의 의식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약 사고로 인해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하거나 정신착란이 일어난다면 그 때 제6식의 뿌리인 의근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식학(唯識學)에서 제6식의 뿌리로 제7식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했다.

그리고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해 갈 때, 일부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돼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AD 4~5세기 인도의 유식학파 사람들은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면서 부사의(不思議)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됐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가 있어서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제6 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제6식인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심. 의. 식(心. 意. 識) 3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했다. 즉,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했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六識)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스크리트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뢰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8식으로 분류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心識)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제6식이 바로 이 제7식인 의(意)를 소의(所依 : 근본)로 하고 있는 식이므로 그 이름을 ‘의식(意識)’이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6식 외에 전5식조차도 오염시키는 게 제7 말나식이다. 결국 제7 말나식은 6식 모두를 오염시키므로 6식에 대한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셈이다.


* 제7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다.

그리고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제7식의 작용이 활발하다고 했다. 인간의 자기 존재성을 자아(自我)라 하며,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작용이 자아의식이고, 이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제7식인 말나식이다.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의 본원인 것이다. 그래서 제7식 말나식을 자아의식이라 한다.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제7식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러한 심리작용은 자기 자신의 자의식에 집착해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我執)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자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무명의 뿌리이다.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나’라는 사람, 내가 여기 있다, 나는 고귀한 존재로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잘 났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제7식 말나식은 미세한 생각, 비언어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며, 모든 집착과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나’라고 하는 자아집착의식(自我執着意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집착으로 오염된 자아의식이다. 따라서 중생의 온갖 못된 생각은 모두 말나식이다.

그리고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정적이고 실재적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기적 사고를 최소화하며, 궁극적으로 멸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를 최고의 수행 목표로 한다.


* 제7식은 이기심이 있는 의식이다.

인간은 자아의식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기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에 항상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의 4번뇌가 일어난다고 본다.


아치(我癡)---아치란 자아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무명이라고도 한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의 자기라는 것, 그러한 자기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견(我見)---아집(我執)이라고도 하는데, 자기의 견식(見識)을 고집하는 일이다.

아만(我慢)---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가 존재한다고 거만하게 우쭐하는 것이다.

아애(我愛)---아탐(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되어진 허상의 자아상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한 생사윤회의 고(苦)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4번뇌(4혹/四惑)와 함께 하므로 말나식을 망식(妄識)이라고도 한다. 즉 말나식은 인간 의식의 뿌리가 돼서 그때그때 나쁜 생각, 좋은 생각, 모든 허튼 생각을 계속해서 온갖 망상을 만들어내므로 수행이란 결국 말나식을 정화하는 것이다.

* 제7식은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한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 이외에 사량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8식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기분 나쁘다’라는 분별을 한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한다. 누가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이고, 센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런 결정을 제7식이 사량하는데,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치중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이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해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즉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을 나타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제7식 말나식이다.


* 말나식은 그릇되게 인식, 사량하는 경우가 있다.

제7식 말나식부터의 인간 심리 관찰을 보면, 불교에서 ‘마음’이란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려준다.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 정신이 아닐 때의 마음 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인데, 그것은 표현이 좀 모호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느냐 하면, 대개의 경우 바로 이 제7식까지이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해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돼 저장된다. 즉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제7식이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 국회에서 입법을 하는 것, 검사가 기소를 하고 판사가 선고를 하는 것, 대기업 CEO가 기업경경을 하는 것, 그리고 작게는 가정주부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사는 것 등을 비롯해서 사회나 가정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판단이나 결정이 대부분 이 제7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제7식이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더러 그릇되게 인식하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국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판단 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두가 제7 말나식이 잘못 사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라는 마음 자체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위험스럽게 여긴다. 어떤 경로나 어떤 이유로든 작위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을 번뇌의 주범으로 본다. 예를 들어 쟌발쟌(Jean Valjean)을 두고 보자, 그가 나쁜 사람인가, 선량한 사람인가,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의 예,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하자. 물건을 훔쳐간 도둑은 내겐 분명 도둑놈이고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도둑에게 되레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게서 훔친 것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을 해서 그 기증받은 사람에게는 은인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나의 ‘확신’은 주관적 사건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사항은 아니란 말이 된다.

이와 같이 얼핏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지거나 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것 같은 우리의 ‘의식’이 사실은 착오와 번뇌의 주범이라는 것이 유식학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보듯이 제7식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함으로써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는 심식(心識)이기도 하다.

이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식의 시비분별 작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때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조차도 실은 제7식의 분별상(分別相)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란 곧 이 제7식을 제어하려는 데에 그 시작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에고’에 집착하는 인간이 어찌 귀한 ‘에고’를 죽이고 뿌리 뽑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해 스스로를 길바닥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도의 수행이 돼야만 미련 없이 제7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③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심층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이다. 이 제8식 아뢰야식이 제7식 말나식의 뿌리(의지처)이다. 즉,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말나식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제8식 아뢰야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정(淨)과 염(染), 선과 악 모두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이나 염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제8식, 心)은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6識)을 총괄해서 마음의 흐름에서 주체가 되는 잠재의식이다. 6식의 활동은 인식된 것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보존성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존재가 이어져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따로 상정하고 있다. 즉 업의 저장소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산스크리트어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종자를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돼 있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모든 일어난 일이나 생각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 아뢰야식이다. 여러 행위가 필름에 찍히듯이 업이 돼 아뢰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바로 말나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무시이래 각자가 해온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가 돼 제8식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된다(마치 CCTV에 녹화 저장하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훈습(薰習) 혹은 습기(習氣)라고 하는데, 종자에는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가 있고,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 모든 종자를 훈습시켜 담아둔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들을 저장하는 훈습작용을 한다. 우리가 잠자다가 꾸는 꿈은 제6의식의 영역인데,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업)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또는 전생이 꿈이나 상상을 통해서 보이는 것은 아뢰야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전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몸을 이루는 오온, 즉 생. 수. 상. 행. 식이 죽으면서 해체되어 흩어져 있다가 몸이 만들어질 때 들어가는데 오온은 다른 사람의 오온과 섞여 中有, 바르도, 구천을 떠돌다가 끼리끼리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끼리 모였다가 再生의 순간, 즉 새로 생명을 받게 되는 중생의 몸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이 섞여서 들어가기 때문에 전생의 일부만 들어간다. 더불어 부모와 조상들의 유전자까지 섞여서 들어가기 때문에 온전한 전생이라고 볼 수 없다. 환생 설화가 많은 티베트불교에서도 현생자가 전생자의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생멸하는 , 곧 모였다가 흩어지는 불교의 자아와 힌두교의 절대불멸· 불변의 자아(아트만)는 다르므로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며, 완전한 윤회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전생이 보이는 것은 온전한 전생의 그것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전생도 내 어뢰야식에 저장돼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전생이 보일 수 있다. 見月忘指. 왜 달을 봐야지, 손가락, 그것도 끝을 보는가? 강까지 끌고 왔으니 목 마르면 알아서 마셔라. 전생을 보고 싶은가? 수행해서 아뢰야식을 건드려라, 보일 것이다. 다만 견월망지. 여실지견.

<도봉별곡 생각>

그리고 그 잔상들이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종자)을 형성하기도 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결과(업)를 일으키는 특수한 에너지(氣)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신체를 유지시켜 나가는 업력(業力)과 윤회의 심종자(心種子)가 저장돼 있는 곳으로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고 존재의 밑바탕에 붙어 있다가 알맞은 환경과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업력이 원동력이 돼 다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저장된 종자가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현행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으며,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로 계속 이어지면서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아뢰야식에는 모든 행위(업)가 발생 즉시 자동적으로 저장 입력된다. 행동하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저장되는 의식의 저장 탱크, 선악의 저축 뱅크다. 그리하여 6식의 심층에 아뢰야식이 있으며, 이 아뢰야식은 육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생으로 이관된다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바로 업(業)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이란 전생의 아뢰야식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으면 종자(아뢰야식)는 다른 모태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연기설(阿賴耶緣起說)’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해 일체 만법이 연기하는 것이 아뢰야연기설이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우리 몸속(아뢰야식)에 입력된 의식을 말하는데,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일어나는 생각을 업식(業識)이라 한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고 우리 마음 작용에 의해 변하며, 수행 정진에 의해 소멸도 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서 업이 소멸되면 아뢰야식 또한 없어지는 것으로 수행을 통해 자기 업장을 다 소멸시키면 아뢰야식 또한 소멸되는 것이니, 고정된 실체 혹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에 있다. 그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선정 수행을 함으로써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만 원권 돈다발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사람은 남이 볼가 봐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 넣고, 어떤 사람은 남이 보든 말든 돈을 주워서 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관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를 한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그 차이는 그들이 과거에 정신적 육체적 경험에 의해 축적돼온 종자의 차이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봤기 때문에 그 본 것이 종자로 저장돼 있다가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자기네 부모가 했던 짓을 자식도 따라서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종(善種)을 낳고 다시 선행을 가져오며, 악행은 악의 종자를 낳고 다시 악한 행동을 생산한다. 한번 훈습된 종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현행되는데 선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을 쌓으면 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악의 종자는 업장소멸을 위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의 종자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다.

헌데 원래는 8식까지만 있다고 했으나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후대에 제9식인 아마라식(Amala)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됐다.


*아뢰야식의 執受 기능


④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Amala-vijnana)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혹은 아말라식(阿末羅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鎭如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 602-664) 계통의 법상종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섭론종의 9식설을 구유식이라 하고, 현장의 8식설을 신유식이라 한다.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원측(圓測)은 9식설을 취하지 않고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한다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과 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현장(玄奘) 이후에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8식이 성불하면 제9 아마라식이 되며, 제9식 아마라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9식 아마라식은 일반 중생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 대중이나, 아니면 이제 겨우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들일진대 감히 부처님의 경지인 제9식이야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부처님 경지가 아닌 중생들이야 8식까지만 논의해도 되는 것이다.

법천사지 유물

2)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


유식 3성이란 유식불교에서 우리 마음의 존재 양식, 그리고 만유의 실상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의타기성(依他起性) ·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이는 모든 존재의 양상을 마음속으로 환원해 3종으로 분류한 것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체만법은 3성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3성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인데, 3성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스스로 자성(自性)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모두 무성(無性)이다.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하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하지만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쓴다.

이러한 3성은 유식사상의 중심개념이자 유가유식종이나 법상종 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근본교의 중의 하나이며,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①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산스크리트어 parikalpita-svabh?va)


‘변계소집성’의 이름 가운데 ‘변계(遍計)’는 진리를 망각하고 이리저리 잘못 헤아려 억측하는 것으로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악시비(善惡是非)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마음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그냥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계산하면서 보고 듣고 하므로 잘못 보고 잘못 듣게 되기 때문에 변계한다. 그리고 소집(所執)은 변계에 의해 잘못 보거나 계산된 대상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계(計)’는 계탁(計度, 헤아려 판단함)을 뜻하는데, 무명을 일으킨 무지를 말한다.

따라서 무지로 말미암아 물질과 마음의 인연법과 진실성을 망각하고, 집착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 번뇌 망상에 빠지는 성질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이는 우리 중생 차원의 ‘마음가짐’으로서, 모든 것에 두루 집착해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성품이다. 즉,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는 말인데, 이를 다른 말로 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한다.

그리고 변계소집이란 사물을 잘못 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함이며, 모든 착각은 다 변계소집이다. 즉, 보리열반(菩提涅槃)이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지만 그 실(實)을 보지 못하고 보리열반을 따로 찾는 것 등이 모두 변계소집성이다.

변계는 6식 7식으로 하고, 언어를 사용해 변계한다. 그러므로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해서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돼서 윤회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모두 무명(無明)과 탐(貪) . 진(瞋) . 치(痴)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진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바로 보지 못하고, 번뇌를 야기해 악업을 짓는다. 그리하여 온갖 분별로써 마음속에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있다.

‘저 사람이 밉다’ 하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린 마음에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중생심은 나의 망정(妄情), 나의 망상(妄想)에만 있지 원래 본바탕인 법성(法性)의 자리인 리(理), 즉 우주의 참다운 진리에는 없다. 그래서 정유리무(情有理無)인 것이다.

중생은 이와 같이 정유리무의 상태에 있는지라, 중생의 망정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 한다. 즉, 본래 없는 것을 범부의 망상으로 갖가지 추측ㆍ억측을 통해 있다(有)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토끼 뿔’ 같은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토끼의 뿔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긴 귀를 뿔로 착각하는 경우처럼 깨달음에 의해 관조(觀照)된 경지가 아니라, 범부의 미망 때문에 있는 것처럼 잘못 판단하는 일체의 사물현상이 변계소집성이다.

일반 가정의 경우,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이니까 예쁘고도 예쁘다. 헌데 이것도 정에 끌려, 자식에 집착해서 치우치게 본 것이다. 이처럼 망상으로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이 곧 변계소집성이다.

중생은 매사에 집착하는 이와 같은 변계소집성에 얽매여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을 뿌리쳐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가정, 마을이나 나라, 온 세계나 우주에 평화가 올 것이다. 이와 같이 변계소집성은 번뇌를 뜻하지만 다행인 것은 번뇌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수행하면 없어질 수가 있다.


② 의타기성(依他起性, 산스크리트어 paratantra-svabh?va)


‘의(依)’는 의지, 의탁의 뜻이고, 제법이 타(他)를 의지해 일어난다는 말로서 인연(因緣)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한 연기법을 유식에서는 바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이는 만물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뜻으로, 사물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성소멸(生成消滅)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의타기성은 인연이기 때문에 무자성, 자성(自性)이 없다는 소리이고, 즉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나타내는 유식의 철학관이다.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이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타에 의존하지 않으면 결코 기(起)가 되지 않는 것이니, 세상만물은 타와의 인연에 의해 생길 뿐 홀로 자생(自生)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타기성은 만물을 생(生)하게 하는 이치이다. 아무리 사람으로 윤회할 수밖에 없는 종자(種子)를 스스로 지니고 있어도 내 부모와의 인연 없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의타로 기(起)하는 것이다. 산천초목의 현상이 그렇고 모든 물질이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현상도 그렇다. 인연소생(因緣所生)이므로 모두 의타기인 것이다.

한 송이 꽃이 피는 것도 꽃씨나 태양이나 기후, 공기와 물과 영양분이 뿌리와 줄기와 잎에 영향을 미쳐 생기는 일이다. 즉, 우주 천지의 모두가 거기에 관련돼 있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인다라망(因陀羅網)처럼 온 세상이 연결돼 있다. 남을 의지해 존재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의타기성으로서 우주 만물 그 어디에도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고, 그 어느 것도 자기의 원인만으로는 나지 못하며, 반드시 다른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 사바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이처럼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 ‘너’라는 존재, 풀 한 포기조차도 모두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태양계(太陽系)나 우주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현상계의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이 인연이 돼 나타나는 이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따라서 의타기성은 여환가유(如幻假有), 즉 모든 것은 고정돼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삼라만상 이것들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허깨비같이 가짜로 모양을 나툰 것일 뿐이다. 순간 찰나도 같은 모습,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이런 허깨비 같은 존재를 중생들은 망정으로, 망상으로 헤아려서 있다고, 좋다고, 싫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까닭에 공성(空性)이다. 존재를 존재하게 한 근원이 소멸될 때 만물은 공(空)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만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고 공(空)이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무상하고, 공(空)이고, 허망하다는 말이다. 소중한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내 집이나 모두가 다 가짜로 잠시 중생의 망식에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재하지 않다는 말이다.

마음 또한 의타기로 생긴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인 경계와의 인연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에 의해서만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5근 6식을 지니고 있어도 경계인 상대가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5근 6식이 다 잠들어 꿈도 꾸지 않는다면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나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으로부터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수도 없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한다.

이런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중생들 삶의 보편적인 본래모습이다. 그런데 의타기성에서 분별심을 일으켜 왜곡시켜 보면 변계소집성이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원성실성이 된다. 의타기성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체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뜻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자리로서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③ 원성실성(圓成實性, 산스크리트어 parini?panna-svabh?va)


원성실성은 본래적인 것,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한다. 원만, 성취, 구경, 진실의 의미로서 이른바 불성(佛性), 법성(法性), 본성(本性), 진여(眞如), 실상(實相)의 경계가 원성실성이다. 즉,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가 원성실성이고, 중도이며, 이것이 우리의 본래성품이다.

그러나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 진여, 부처와 여래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을 한다. 하지만 ‘정무리유(情無理有)’이다. 정무리유란 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없지만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말 정유리무(情有理無)는 망정으로 인해 이런 참다운 도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물건이나 유정(有情)이나 어느 존재를 볼 때, 바로 보면 원성실성이고, 잘못 보면 변계소집성이다.

한 송이 꽃을 보더라도 꽃은 꽃대로 자연 그대로 피어나온 것이데, 그 꽃을 두고 우리 중생은 곱다, 안 곱다, 예쁘다, 밉다 하고 마음을 일으킨다. 본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따라서 본래대로 본다면 진여불성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연기(眞如緣起)이고, 중도(中道)로서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인연 따라서 된 것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지만 그러나 우주의 참다운 모습은 다만 공인 것이 아니라 결국 원성실성이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그런 자리를 말한다.

망령된 중생의 마음에서는 불성이 안 보인다. 그러나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영원한 우주의 도리, 진리에서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원성실성은 정무리유의 진여실상의 묘체(妙諦)로서,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러한 삼성으로 비공비유(非空非有) 한,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밤에 뱀인 줄 알고 놀랐는데, 다음날 자세히 살펴보니 노끈임을 알게 됐다는 예화가 있다. 여기서 뱀인 줄 알고 놀란 것은 변계소집성의 상태이다. 그런데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게 된 것은 그 모습에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거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져서 그렇게 놀란 것이다. 이는 노끈과 마음이 인연화합한 것이므로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뱀이 아니라 노끈임을 알게 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망정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인 법성(法性)의 자리인 리(理), 즉 우주의 참다운 도리에는 없다는 정유리무(情有理無)의 세계로서, 유위유루(有爲有漏)의 상태에 있는 미혹한 범부의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의타기성은 모든 것은 고정돼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여환가유(如幻假有)의 세계로서 유위무루(有爲無漏)의 상태에 있는 수행자들이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범부의 망정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정무리유(情無理有)의 세계로서 무위무루(無爲無漏)의 상태이며, 우리의 본성이고, 불성이며, 진여, 진공묘유인 부처가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원성실성의 세계 또는 세계관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했을 때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학에서 말하는 유식3성인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성(自性)이 없다고 부정하는 이론을 삼무성설 혹은 삼종무성설(三種無性說)이라고 한다. 즉 3성은 모두 인연소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스스로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이들이 모두 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무성(相無性) . 생무성(生無性) . 승의무성(勝義無性)의 3무성에 의해 유식 3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유식에서 3성은 마음에 의해 전개된 현상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3무성은 3성이 철저한 무자성에 의거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3성과 3무성의 교리는 유식사상의 근본성격을 나타내며, 유식사상이 불교의 무아(無我) . 무자성(無自性)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유식설은 식(識) 이외의 존재를 부정해 ‘식만 있고 대상계는 없다’라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은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계도 없다는 입장에서 반야 공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相無性)이고,

*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며,

*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① 상무성(相無性) - 상무성이란 형상과 특질을 가진 존재는 본래 자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것은 변계소집성에 의해 분별된 상에는 자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온갖 분별과 망상으로 집착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변계소집성은 허구적인 것으로 자성이 없고, 일체만법의 상(相)은 무성이라는 것이다.


② 생무성(生無性) - 의타기성은 삼라만상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므로 만법은 인연 따라 생하는 것이지 자성으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생무성이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에 자성이 없다는 의미로 의타기성의 연기적인 존재는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③ 승의무성(勝義無性) - 승의무성은 원성실성의 무성성(無性性)을 말하며, 불교에서는 승의무성(勝義無性)을 진여성(眞如性)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궁극적인 진리, 즉 승의(勝義)로서만 실재할 뿐 아무런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는 원만 상주하는 것으로 만유의 근원인 원성실성은 곧 절대법이므로 아무런 모양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유식30송>의 제24송에 “승의무성이란 원성실성이 무성임을 밝힌 송이다. 원성실은 의타기로 생기한 마음을 계탁(計度-상상하고 분별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찰나생멸의 이치에서 불변부동하고 무생무멸의 성(性)이 아니기 때문에 제1의제에 속하며 이를 승의제라 한다. 승의제란 본래 공(空)하여 무소유이므로 유와 무를 초월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제를 수순(隨順)하므로 승의라 하는 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돼 있다. 이는 승의무성이란 승의 즉 궁극적으로 무자성이란 의미로 원성실성은 근본적으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천사지 유물

3) 심왕(心王, citta)과 심소(心所, caitta)


우리 몸[색(色)]에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여섯 가지 감각기관[6근(六根)]이 있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대상[6경(6境)]에 부딪쳤을 때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데 이것을 식(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이 일어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렇게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마음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이 때 치밀하게 고찰된 교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승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식을 세분해서 8식으로 나누었다. 즉 6식 외에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nana)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을 설정해서 전체 8식으로 나누었다. 이 8식을 마음의 주체 혹은 마음의 체성(體性)이라 해서 심왕(心王, 산스크리트어 citta)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 일컫는 식(識)에는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과 그에 종속돼 있는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 마음부수, 산스크리트어 caitta)라는 것이 있다. 마음의 체성을 심왕(心王)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체성이 마치 국왕과 같아서 명령만 내리면 그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서 함께 따라다녀야 하는 것에 비유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신하가 국왕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듯 마음의 체성에 의해 나타나는 작용도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심왕(心王)은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심소(마음부수)는 신하가 국왕에 소속돼 수족처럼 역할을 하듯이 심왕의 소유물로서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다하는 작용인이다. 따라서 ‘심소(心所)’란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한 명칭을 줄인 이름이고, 일명 ‘마음부수(附隨)’라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따라다니는 마음이란 뜻이다. 심왕과는 전혀 관계없이 심소만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없으므로, 심소란 심왕에 소속된 다양한 심리활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작용한다는 말일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광고를 보다가, ‘아! 이 게 그 유명한 로렉스 시계구나’ 하는 안식(眼識)이 일어나고[심왕], 동시에 좋다,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일어난다[심소]. 이때 눈은 안근(眼根)이고, 물건은 대상(色=境)이며, ‘로렉스 시계구나’하는 것은 심왕이고,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심소이다.

8가지 심왕은 혼자 움직이지 않고 신하를 대동하듯이 늘 심소를 대동해서 움직이는데, 그 심소엔 51가지가 있다. 마음(심왕)이 일어 날 때 함께 발생하는 것이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로서, 이 마음의 작용은 ‘구생연(俱生緣)’으로 설명 된다. 예컨대 어떤 근(根)이 어떤 대상[경(境)]에 부딪쳐 마음(심왕)이 일어날 때, 동시에 마음의 작용(심소) 51가지 중 몇 가지가 함께 일어나고 또한 함께 소멸한다.

※구생연(俱生緣)---마음은 혼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심소(마음부수)와 함께 일어난다. 즉 왕이 가면 신하가 뒤 따르는 것처럼 마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마음부수, 즉 마음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구생연이란 이와 같이 ‘함께 생기는 조건’이란 뜻이다.

이처럼 심왕과 심소 이 둘은 반드시 서로 상응(相應)해 일어난다. 즉, 인식의 장에서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같은 대상을 반연(攀緣)하므로 연상(緣相)이 같다고 하고, 같은 양상으로 알아차리므로 지상(知相)이 같다고 하며, 연상과 지상이 같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가 상응한다고 한다. 심왕과 심소의 관계는 반듯이 심왕에서 심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고, 심왕은 언제나 마음의 작용을 있게 하는 장의 흐름이다.

그리고 ‘식’(識)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대상의 전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심왕(心王)에 부수적으로 일어나 대상의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작용이 심소이고, 이런 마음의 작용을 대지법(大地法)이라 한다.

※대지법(大地法, 산스크리트어 mah?-bh?mika)---8식 가운데 어느 식(識)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즉, 마음은 대지(大地)와 같기 때문에 심식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를 대지법 (大地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심식에는 수많은 작용들이 있으므로 심소(心所)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마음의 작용들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심식(心識)의 내용도 완전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음의 체성과 작용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왕과 심소의 불가분의 관계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 의하면,

* 항의심기고(恒依心起故) -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해 작용을 일으킨다.

* 여심상응(與心相應) -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한다.

* 계속어심(繫屬於心) -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심소는 심왕에 소속돼 명령을 받고 움직이므로 심소는 심왕의 소유물로서 아소(我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깊은 관계로 행동을 같이하는 것을 상응(相應)이라고 하는데, 심왕과 심소 둘 사이에는 오의평등(五義平等)으로 만나는 상응관계이다.


※ 오의평등五義平等)---대상의 전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작용인 심왕(心王)과, 심왕에 부수적으로 일어나 대상의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작용인 심소(心所)가 다섯 가지로 동등한 성질을 가진다는 말이다.

① 소의평등(所依平等) - 심왕이 6근(六根) 가운데 어느 근(根)을 의지처로 하면, 심소도 같은 근을 의지처로 해 일어남을 말한다. 마음은 근거가 없이 발동하지는 않는다. 장미꽃을 보면 기분이 유쾌해진다고 할 때, 장미꽃을 보자 마음이 유쾌해졌다면, 장미꽃을 보는 감각기관인 눈(眼)에 의존해서 유쾌한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이 경우, 어떤 꽃을 장미꽃이라고 알아차린 안식(眼識)이라는 심왕과 유쾌함을 유발한 마음이라는 심소는 모두 눈에 의존해서 발동한 것이다. 이처럼 심왕과 심소는 동일한 감각기관을 통해 작용한다. 이 감각기관은 마음이 의존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소의(所依)’라 불리므로, 이 경우를 일컬어 ‘소의평등’이라고 한다.

② 소연평등(所緣平等) - 눈이 보는 대상도 장미꽃이고 유쾌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 대상도 장미꽃이다. 다시 말해서 심왕과 심소가 동일한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을 소연(所緣)이라고 하므로, 이 같은 경우를 ‘소연평등’이라고 한다. 심왕과 심소는 대상(=소연)을 같이 한다는 말이다.

③ 행상평등(行相平等) - 여기서 ‘행상(行相)’이란 마음에 비친 객관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니 행상평등이란 심왕과 심소가 같은 대상을 봄으로 대상의 모습이 같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심왕이 보는 것이나 심소가 보는 대상의 모습이 같은 것을 ‘행상평등(行相平等)’이라 한다.

④ 시평등(時平等) - 눈으로 장미꽃이라고 알아차린 시기와 좋아서 유쾌한 마음이 일어난 시기가 같다. 이는 심왕과 심소가 동일한 시기에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실을 일컬어 ‘시(時)의 평등’이라고 한다. 심왕과 심소는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이다.

⑤ 사평등(事平等) - 심왕과 심소는 각각 하나씩 일어나고, 동시에 둘 이상의 심왕과 심소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장미꽃을 보고서 마음이 유쾌해졌지만, 이 좋은 기분이 그 꽃에 벌레가 있는 것을 보면 불쾌한 기분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눈으로 장미꽃을 보고 유쾌한 기분과 불쾌한 기분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다. 불쾌해진 것은 장미꽃이 아닌 벌레를 보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또 벌레는 없더라도 주변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탓으로 장미꽃을 보면서 유쾌했던 마음이 불쾌해질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그 불쾌감은 눈으로 알아차리는 안식의 작용이 아니라, 코로 알아차리는 비식(鼻識)의 작용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심왕이 안식에서 비식으로 바뀌면서 그 대상도 장미꽃으로부터 고약한 냄새로 바뀐 탓으로 불쾌한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심왕에 대해 하나의 심소가 작용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기분이나 생각을 일으킨다. 심왕과 심소는 일 대 일의 관계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일컬어 ‘사(事)의 평등’이라고 한다.


상응(相應)이란 이와 같이 평등이 두루 갖추어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마음의 체성과 마음의 작용은 의지할 곳(所依根)과 인식의 대상(所緣境)과 행동하는 시간(時)과 활동하는 일들이 모두 동일하다.

이처럼 마음과 마음작용 즉 심왕과 심소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며 동시에 모든 대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마음과 마음작용을 따로 분리시켜 말할 수 없는 것이 정신세계이기는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들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따로 심소(心所)만을 분리해 그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심소론(心所論)이라고 한다. 즉 심소만을 가지고 논술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무한한 작용들이 있으며, 마음(心王)과 그 작용(心所)을 해설한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종래에 설명돼 왔던 심소론들을 엄밀하게 취사선택해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필히 없어서는 안 되는 심적 작용만을 재조직했다.

이들 내용을 보면, 심왕은 여덟 가지로 한정돼 있지만, 심소는 매우 다양하다. 유식학에서는 다양한 심소들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심소의 6위(6位)].

① 변행심소(邊行心所) 5가지

②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③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④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⑤ 선심소(善心所) 11가지

⑥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이렇게 6위에 모두 51가지 심소가 있다. 학파에 따라선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6위의 심소들은 마음작용에 나타나는 그 기능과 성질별로 구별한 것이다. 이들 6위 심소 하나하나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① 변행심소(遍行心所)---변행심소는 심식의 종류를 불문하고, 어떤 심식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심왕)이 일어날 때면 모든 심식에 두루 나타나면서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심소로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한다. 여기에는 5종의 심소가 있는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을 말한다.

촉(觸)이란 심소는 8식(八識) 가운데 한 식(識)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최초로 그 심식의 작용이 대상에 닿는 것을 촉이라 한다. 예를 들면 눈의 시선(眼識)이 보고자 하는 대상물(色境)에 닿거나, 또는 귀로 듣는 마음(耳識)이 어떤 소리에 닿았을 때의 찰나를 촉이라 한다. 이는 오관을 통해 객관계의 대상물에 마음이 닿는 순간을 뜻한다.

예컨대 큰 소리 때문에 촉이 성립된다면, 그 즉시 마음 안에는 경각심이 나타난다. 이를 작의(作意)심소라고 한다. 이 작의심소는 갑자기 큰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는 등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에는 수(受)심소가 일어난다. 이는 작의심소가 앞에 무엇이 나타났다고 경종을 울려주면 그 대상의 내용을 접해 사실 그대로 안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고[고수(苦受)], 또 마음에 알맞으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낙수(樂受)] 된다. 그리고 대상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면 그저 그런대로 좋고 나쁜 생각 없이 무심히 받아들이게[사수(捨受)] 된다.

그 다음 상(想)심소는 밖을 통해 어떤 대상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대상의 모습을 구별(取像)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思)심소는 마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모습에 대해 선(善)이다, 악(惡)이다 하는 선악의 결정을 내려주는 작용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심소를 5변행심소라고 하는데, 이들 작용은 어떤 심식에든지 반드시 나타나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는 정신작용이다.


② 별경심소(別境心所)---별경심소란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의 5 가지로서, 온갖 마음에 두루 통해 일어나지 않고, 심왕이 특정한 경계에 대해서 일어날 때만 그 심왕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이다. 그러니 모든 심왕에 두루 작용하는 변행심소에 반대되는 심소이다.

예를 들면, 좋은 경계를 만나면 욕(欲, 욕심)의 심소가 일어나고, 결정하고 선택할 필요로 하는 경계를 만나면 승해(勝解)의 심소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승해(勝解)란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해 확신하는 마음작용 혹은 대상을 확실하게 이해해 굳게 믿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염(念)은 기억하거나 알아차림, 마음챙김의 작용을 말하고, 정(定)은 선정, 삼매를 말한다. 그리고 혜(慧)는 정(定)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 분별, 반야, 관(觀), 의심 끊음 등의 마음작용이다.


③ 부정심소(不定心所)---사(伺, 세밀하게 고찰), 심(尋, 개괄적인 고찰), 수면(睡眠, 잠자는 것), 악작(惡作, 후회하는 마음작용) 4가지로서, 그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어서 널리 선. 악. 무기(無記) 3성에 통하면서도, 일체 마음에 반드시 수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닌 마음작용을 말한다.


④ 선심소(善心所)---선심소(善心所)는 그 성질이 오로지 선(善)인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하는데, 달리 말하면, 오직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과 상응해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信, 믿음), 참(懺, 자기가 과실을 자기 스스로 반성하는 것), 괴(愧, 남에 대한 잘못을 반성하는 것), 무탐(無貪, 무집착), 무진(無瞋, 성 내지 않는 것), 무치(無癡, 지혜, 어리석지 않는 것), 근(勤, 정진), 경안(輕安, 평온한 마음 상태, 혼침이 없는 것), 불방일(不放逸, 방종하지 않음, 성실), 행사(行捨, 적정/寂靜, 고요함, 마음의 평정), 불해(不害, 중생을 해치지 않는 마음, 자비) 등 11가지 심소를 말한다.


⑤ 근본번뇌(根本煩惱)---본번뇌(本煩惱) . 근본혹(根本惑) . 본혹(本惑)이라고도 하며, 모든 번뇌 가운데서 그 근본이고 자체인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 6가지 번뇌를 말한다.


⑥ 수번뇌(隨煩惱)---근본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분(忿, 분노), 한(恨, 한탄), 뇌(惱, 번뇌), 부(覆, 죄를 감추는 것), 간(慳, 인색함), 질(嫉, 질투), 광(誑, 속이는 것), 첨(諂, 아첨), 해(害, 남을 해치는 것), 교(驕, 교만함), 무참(無懺, 부끄러워할 줄 모름), 무괴(無愧, 악한 짓 을 하고 뉘우침이 없음), 혼침(昏沈, 혼미하고 침울한 마음상태), 도거(掉擧, 들뜨고 혼란스러운 마음상태), 불신(不信, 못 믿음), 해태(懈怠, 게으름), 방일(放逸, 방종), 실념(失念, 집중하지 못해 기억할 수 없는 마음상태), 산란(散亂, 대상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 부정지(不正知, 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것) 등 20가지 번뇌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심소가 51가지인데, 오온(五蘊)으로 설명할 때 식(識)은 마음이고, ‘수(受). 상(想). 행(行)’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런데 오온에서 말하는 ‘행(상카라)’이 심소(心所) 51개에 해당한다. 행에서 수(受, 느낌)와 상(想, 인식)을 따로 떼어 놓은 것은, 느낌과 인식이야말로 마음의 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행(行)에서 따로 떼 내어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작용은 위의 심소 51가지 외에 ‘수 . 상’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의식 상태는 8식이라는 심왕의 작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왕과 심소가 서로 상응해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상태를 갖게 되다. 상응이란 원래 결합이나 화합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상응은 몇 가지 마음 작용이 협동해 하나의 감각이나 지각 또는 사고를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눈으로 볼 때, 시각이라는 하나의 마음 작용만이 활동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안식이라는 하나의 심왕과 이것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심소가 함께 작용해 그 대상의 모습을 나름대로 파악하며, 이에 따라 좋다든가 싫다는 등의 어떤 느낌을 갖는다. 따라서 시각은 안식과 이에 상응하는 심소로 이루어지는 복합체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나 지각은 곧 심왕과 심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심왕과 심소는 그 대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 심왕은 대상의 총체적인 모습, 즉 총상(總相)을 인식하고, 심소는 대상의 세세한 모습, 즉 별상(別相)을 인식한다. 이 두 가지 작용의 차이는 그림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해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스승이 하나의 모범으로 그림의 개략적인 모양을 묘사해, 제자에게 그 그림을 완성하도록 가르친다고 하자. 이에 제자는 거기에 색을 칠해 그림을 완성시킬 것이다. 이 경우에 스승은 심왕과 같고 제자는 심소와 같다. 이 그림을 제자가 어떤 솜씨로 완성시키는가에 따라 그 그림의 좋음과 나쁨 혹은 잘됨과 잘못됨도 결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것도 심왕과 상응하는 심소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정신작용의 본체인 심왕(心王)에 종속된 심소(心所)가 지혜롭지 못해서 탐(貪) . 진(瞋) . 치(痴) . 만(慢) . 의(疑)와 같은 번뇌에 젖어 무명을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법천사지 유물

4)유식 4분설(四分說)

유식 4분(四分)이란 유식학에서 인식의 성립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다. 심(心)과 심소(心所)의 작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4분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식(識) 자체가 대상을 변화해 인식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식은 주관과 객관을 변화시켜서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 위에 나타난 모든 모습을 경상(境相)이라 하며, 이를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모습을 상대해 인식하는 것을 견분(見分)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自證分)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정신계를 종합적으로 관찰해 보면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가 마음에 의해 인식되고, 나아가서 물질계도 마음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로써 유식사상이 성립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4분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처음 4세기경의 무착(無着, Asanga)과 5세기 초의 난타(難陀, Nanda)는 2분설을 주장했고, 5세기 말에 진나(陳那, Dinnaga)는 3분설을 내세웠으며, 6세기에 이르러 호법(護法, Dharmap?la)이 4분설을 정립했다.

유식에서는 마음[식((識)] 속에는 반드시 두 갈래[2分]가 있다고 말한다. 의식 속의 주체적인 측면인 견분[능연(能緣)]과 그 대상의 측면인 상분[소연(所緣)]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러한 2분설은 유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심분설(心分說)이다.

이러한 2분설은 사물을 보는 인식 과정에서, 눈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은 단지 중개 역할만 하는 것이고, 사물을 보는 주체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유식에서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은 식(識-마음)이다. 식이라는 것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맞물려서 어우러져 있는 장(場)이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 없어도 식이라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눈이 없는 색이 없고 색이 없는 눈이 없으며, 눈과 색이 만난 안식(眼識)의 장에서 ‘하나 된 흐름’이다.

이와 같이 유식에서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안근(眼根)이라는 감각기관에 의해서이다. 동시에 마음과 다르지 않은 안식이 스스로 식 자신을 대상으로 해서 그것을 지각한다고 생각한다. 즉, 마음이 보고 있는 것은 그 당체(當體)인 마음이 드러낸 것이다.

예컨대 보름달을 보고 있다고 할 때, 안식의 대상은 안식이 드러낸 보름달이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눈의 망막에 비친 보름달은 안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낸 보름달이며, 우리는 그 달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의식이 만들어낸 보름달만 존재할 뿐[유식(唯識)], 의식과 분리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보름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무경(無境)]는 말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내 마음이 만들어낸 보름달을 본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존재를 인식으로 환원한다”는 유식의 주요이론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과를 본다고 가정할 경우에 안근(眼根), 즉 눈의 망막에 사과의 상(像)이 비쳐지게 되는데, 이것을 상분(相分)이라 한다. 이 상분은 다시 뇌의 시각중추에 가서 비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견분(見分)이다. 그리고 마음속의 기억 창고[아뢰야식] 속에는 과거에 저장해 둔 사과의 상(像)이 있는데, 이것을 자증분(自證分)이라 한다. 이 자증분을 끄집어내 견분과 비교함으로써 견분과 동일한 것인가를 확인한다. 이때 확인 작업을 하는 주체를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 한다. 여기서 증자증분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주체를 마음이라고 한다. 이처럼 유식의 4분설은 마음을 네 가지 존재 영역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의 대상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4분은 결국 마음 세계 안의 능 - 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4분 가운데 상분은 객관적이거나 바깥 경계의 모습이므로 소연(所緣)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관적인 심식의 작용이므로 능연(能緣)이다. 즉 견분은 오직 바깥 경계의 상분을 반연하고, 자증분을 반연(攀緣-인연에 얽힘)한다. 또 증자증분은 다시 자증분이 되고 소연이 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① 견분(見分)과 상분(相分) - 유식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모든 식(識)은 주관과 객관으로 변화시켜서 인식한다고 한다. 즉, 이 말은 존재를 인식으로 환원한다는 것으로, 유식의 주요한 담론이다. 즉, 아래와 같다.


견분(見分, 能) - 의식 내의 주체

상분(相分, 所) - 의식 내의 객체


그리하여 마음 위에 나타난 모든 모습을 경상(境相)이라 하는데, 이를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식에서는 인식대상을 상(相, nimita)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2분만을 생각하면, 우리의 식을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보는 자’가 바로 견분에 해당하고 ‘보이는 대상’이 상분에 해당한다. 유식에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작용은 바로 이 상분과 견분의 대립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견분은 보는 것을 인식하는 주관이고, 상분은 보여지는 대상, 즉 인식대상인 객관을 말한다. 견분은 사물(事物)을 인식하는 주체인 심식(心識-마음) 작용이고, 그 반대가 인식의 대상인 상분(相分)이다. 따라서 주관의 부분을 견분(見分)이라 하고, 객관의 부분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분은 심(心)과 심소(心所) 자체가 생길 때 나타나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경계를 말하며, 견분은 심과 심소 자체가 생길 때 소연의 경계인 상분을 식별하는 인식작용으로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경계를 잘 비추어 보는[견조(見照)] 작용을 뜻한다. 즉, 견분은 단순한 시각작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일반에서의 주관의 모든 작용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견분은 식(識) 중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부분이며, 보통 능연(能緣)이라 하고, 그 대상을 소연(所緣)-상분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自證分)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정신계를 종합적으로 관찰해 보면,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가 마음에 의해 인식되고, 나아가서 물질계도 마음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작용을 이와 같이 견 . 상 2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인식상의 견분과 상분, 즉 주관과 객관이 근원적으로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 그 둘을 포괄하는 식 자체로부터 분화된 결과임을 의미한다. 견 . 상 2분화에 앞서 그 둘을 포괄하는 그들 공통의 소의(所依)가 곧 식 자체인데, 이 식 자체를 식의 자증분(自證分)이라 한다. 이와 같이 상분과 견분은 함께 자증분에 의거해서 일어난다.

알고 보면 견분과 상분이 둘이 아닌데 다만 중생이 무명으로 인해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객이 생기니 이것이 중생의 마음이고, 업식(業識)이고, 끝없는 윤회가 있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면 그 모든 것을 바로 알게 된다.

② 자증분(自證分) -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에 의한 자신의 인식 작용을 확인하는 부분.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면 저것이 무엇이라고 인식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걸 증명하는 부분이 자증분이다. 주관에 의해 인식되는 객관의 현상을 견분(見分)이라 하는데 대해, 자증분은 자체분(自體分)이라고도 하며,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이 대상 경계에 부딪치는 순간 일어난 인식이 대상경계를 선험적으로 분별없이 그대로 인식하는 경우를 말한다.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은 하나 된 흐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관을 대상에서 떼어 낼 수 없고, 대상을 주관에서 떼어낼 수 없다. 떼어낼 수 없는 ‘하나 된 식장의 흐름’을 자증분(자체분)이라 했다. 유식에서 3분이란 상분과 견분에다 자증분을 더한 것을 말한다. 상분을 바라보며 인식 작용을 하는 것이 견분이라고 하면 견분의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것이 자증분이다. 즉, 인식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의 의식작용을 넷으로 나눈 것 중, 상분(相分)을 인식하는 작용을 견분(見分)이라 함에 대해 다시 통각적증지(統覺的證智)를 주는 작용을 자증분이라 한다.

인식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는 이미 주객이 분리돼 있는 상태이다. 의식이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관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말이다. 자증분(自證分)이라는 것은 식장(識場)에서 견분과 상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앎을 말한다. 즉, 견분과 상분 둘 사이의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작용이다.


③ 증자증분(證自證分) - 자증분을 다시 증지(證知)하는 인식작용, 자신의 인식 작용을 다시 확인하는 부분을 말한다. 자증분은 스스로 증명하는 부분, 우리 마음 자체를 말한다. 증자분에서 ‘자(自)’는 견분이고, ‘증(證)’은 증지의 뜻으로 자체 상 견분의 작용을 인지하는 것이고, 증자증분의 ‘증(證)’은 증지이고, ‘자증(自證)’은 자증분이므로 자증분의 작용을 거듭 인지하는 것이 증자증분이다.

자증분은 사물을 파악하는 자기의 인식작용(견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즉 자증분은 견분과 상분 둘 사이의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작용이지만 증자증분은 이 자증분을 재확인하는 부분이다. 견분과 상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자증분이 있는 만큼, 그 자증분의 작용을 다시 확인하는 또 하나의 마음작용이 요청된다. 그리하여 증자분을 확인하는 또 다른 마음작용이 증자증분이다.

이상과 같이 4분의 네 가지 마음의 존재 영역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집어내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 ― 그 대상이 허구적인 것이든 실재이든 ― 에 마음을 기울인다고 하자. 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이 대상을 파악하는 어떠한 인식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한 예로 동트기 전 골목길에서 돌장승을 보았다 하자.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생긴 것이 꼭 사람 같아 보이니, 평소에 겁이 많은 사람은 이 돌장승을 보고 강도로 오인할 수 있겠고, 비교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은 그대로 돌장승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4분설에서는 이 양자의 마음 자체를 자증분으로, 사람 같이 생긴 ‘그 무엇’인 인식 대상을 상분으로, 강도로 보거나 돌장승으로 보거나 하는 마음속의 인식 방식을 견분이라 부른다. 이것은 ‘강도다’ 또는 이것은 ‘돌장승이다’라고 하는 일차적 판단은 자증분, 견분, 상분,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일차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일차적 판단을 대상으로 삼는 반성적 마음이 일어나며, 이러한 반성적 마음을 4분설에서는 증자증분이라 부른다. 즉 ‘아! 강도가 아니고 돌장승이구나’ 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 증자증분이다.

그러니 4분설은 자증분에다 증자증분을 더한 것이다. 자증분이 견분을 확인하는 더 깊은 차원의 인식작용이라고 했을 때는 이 자증분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증자증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증자증분을 내세운다면 증자증분을 인식하는 증증자증분도 있어야 될 것이고, 나아가 증증자증분을 인식하는 증증증자증분도 있어야 할 것이다. 즉 4분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분설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유식의 논사들은 증자증분을 다시 인식하는 것은 바로 자증분이라고 해 4분설에서 매듭짓고 있다. 유식에서는 이러한 4분설을 정통으로 하고 있다.

위와 같은 네 가지 설은 식의 연기관계에 대한 설명이지 단순한 인식체계가 아니다. 인식 자체를 삶의 전체로 보아 식을 자체, 이분, 삼분, 혹은 사분의 연기관계로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관계가 전체 삶이기 때문에, 인식주관과 객관 등을 분리시켜서 독존적 요소로 봐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관계를 잊고 하나 속의 나눔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다. 이와 같이 생각 속에서만 나누어지는 것이 사량(思量)이다. 그러나 여래는 자기 한정과 사회 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고 했다.

법천사지

5) 유식 4지(唯識四智)=불과사지(佛果四智)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목적은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대장경을 손에 넣고 쥐어짜면 남는 것은 마음 심자(心)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잡아함경>엔 ‘마음은 일체법의 근본이 된다.’라고 했으며, <증일아함경>엔 ‘마음이 번거로우면 중생이 번거롭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의 현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깊이 분석한 부파가 유식불교이다.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인간에게 영원불멸하고 절대적인 것이란 다만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유식학은 진실 된 마음의 구조를 상세히 밝혔다.


*유식사상의 전식득지와 비슷한 사상이 맹자의 성선설에 나온다. 그런 측면에서 같은 상자의 반열에 있다고 보다. 유교의 사단칠정론을 잘 연구해보자.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

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또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수립하려 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

사단(四端) 유학(儒學)에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을 내세우며 이것을 사단(선을 싹틔우는 4개의 단서, 실마리)인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나누었다.

사단은 각각 (仁) · (義) · (禮) · (智)의 사덕으로 발전한다.

  • 측은지심(惻隱之心)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줄 아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

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만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에 따르고 그의 욕구에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한 뒤에야 사양하는 데로 나가고 예(禮)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했고 교육의 효과를 강조했다.

-순자의 성악설과 말나식이 이기식이라는 점에서 유식사상은 닮은 점이 있다.


유식학은 불교사상 중에서 특히 이론적인 학문의 성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데, 유식학파 교리에 의하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수행단계가 수행 5위(수도5위)이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도위(修道位). 구경위(究竟位)라고 하는 다섯 단계를 거침으로써 중생의 마음은 차츰 부처의 마음으로 변하게 돼 마침내 구경위에 이르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거친 결과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란 중생의 업식(의식)이 맑아지면 지혜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서로 관계해 연기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범부의 8가지 의식이 변해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의 4지가 된다고 한다. 유루(有漏)의 8식(識)을 통해서 얻는 무루(無漏)의 4종 지혜라는 말이다.

즉, 우리의 의식 가운데 가장 심층의식으로 불리는 제8식 아뢰야식이 정화돼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심층의식이 지혜로 바뀜으로써 나머지 의식도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제7식 말나식이 정화돼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뀐다. 편등성지란 자아의식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대아적(大我的) 지혜이다.

그리고 제6 의식이 정화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고, 이어서 안. 이. 비. 설. 신 등 전5식이 정화돼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뀌는데, 이는 실제 행동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모두 지혜롭다는 이성적 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의 8식은 현상일 뿐 그 본성은 결코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인데, 이것이 전의에 의해 번뇌로 오염된 식(識)이 청정하고 분별이 없는 지혜로 전환된다고 하며,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가 곧 유식교학의 근본취지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번뇌로 오염된 의식이 정화돼 부처님의 지혜로 전환한 네 가지 지혜를 유식 4지(唯識四智) 혹은 불과사지(佛果四智)라고 한다.

그리고 8식이 정화돼 4지를 증득하는 것은 자신만을 고집한 아집(我執)의 마음을 비우는 아공관(我空觀)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사물과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의 집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하고 색 . 수 . 상 . 행 . 식의 하나하나에 모두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집착을 해서 탐욕을 발생하는 법집(法執)의 마음을 비우는 것을 법공관(法空觀)의 경지라 말한다. 이와 같은 아공과 법공은 곧 말나식과 의식의 아집과 법집의 번뇌를 정화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번뇌도 함께 정화하게 된다.

이렇게 번뇌에 오염된 8식이 정화돼 4지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유식실성(唯識實性)이라고 하는 마음의 본체인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실성이란 유식학에서 마음의 체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유식실성은 진실하고 변화가 없는 진여성(眞如性)이다. 그리하여 이 마음의 실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으면서 마음속을 빛나게 하는 지혜를 발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와 깨달음을 유지하는 불성(佛性)에서 발생하는 지혜가 4지(四智)로서, 곧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등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① 대원경지(大圓鏡智)---대원경지는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무명(無明)을 모두 제거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지혜이다. 즉, 오염된 유루(有漏)의 제8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진여본성이 드러난 청정한 지혜란 말이다. 비추어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이 소멸돼,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대원경(大圓鏡)처럼 된 상태로서, 여기서 ‘대(大)’라 함은 시간 ·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원(圓)’은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우주 전체가 대원경처럼 변화돼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것을 아는 원만한 지혜이다.

이것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에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쳐 모자람 없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며, 자신과 진여법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이 지혜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의 영상이 있는 그대로 환하게 비치듯이 모든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이타적인 지혜[보리(菩提)]로서 그 모습[경상(境相)]이 우매하지 않고, 체성과 형상이 모두 청정하고 원만한 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러한 공덕을 중생과 보살들에게 베풀어주는 지혜이다. 즉, 만덕(萬德)을 원만하게 구족해 모든 법을 깨달아 안 것을 말하는데, 불과(佛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지혜이다.


※잡염법(雜染法)---아뢰야식은 모든 잡염법의 저장소 역할을 하며, 윤회의 주체이다. 잡염법은 허망 된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그 반대의 청정법(淸淨法)은 진실 된 원성실성을 말한다.


② 평등성지(平等性智)---오염된 제7 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이다. 즉, 유루의 제7식을 전환해 얻는 무루(無漏)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여기서 평등한 성품이란 진여(眞如)를 말하며, 진여는 체성이 평등해 일체법에 두루 함으로 평등성이라 한다. 또한 지혜가 그것을 반연(攀緣)하므로 평등성지라고 한다. 말나식에서 자아집착 작용에 의한 모든 차별심이 소멸돼 일체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제도 활동을 하게 된다.

제7 말나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해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성지는 일체의 법과 자타의 유정(有情)들을 모두 평등하게 이익을 주는 대자대비의 지혜이다.


※반연(攀緣)---‘반연’에서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③ 묘관찰지(妙觀察智)---오염된 유루의 표면의식인 제6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무루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실상을 잘 관찰해 자유자재로 설법을 베풀어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는데 사용하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즉, 묘관찰지는 중생의 근기(根機)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고 훌륭하게 법을 설해 모든 의심을 끊게 한다.

통달위(通達位)에서 그 일부분을 얻고 불과(佛果)에서 전체를 성취한다. 묘(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재(自在)를 말하고, 관찰은 모든 법을 관찰해 정통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개별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상태가 변화돼, 모든 사물의 자체상[自相]과 보편적인 특질[共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즉, 묘관찰지는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체에서 나타내는 자상(自相)과 서로 의존하고 상부상조하며 공동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공상(共相)을 무애자재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가 있는 수행인은 공덕과 보배를 대중들에게 베풀며 큰 진리를 가르쳐서 모든 의심을 없애주고 큰 이익과 즐거움을 베풀어주게 된다.


※통달위(通達位)---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행 5위(修行五位)에서 제3위를 일컫는다.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되며,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하며, 이는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④ 성소작지(成所作智)---불과(佛果)에 이르러 오염된 유루의 전5식(前五識)이 변혁해 이루는 무루의 지혜이다. 즉,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신(身) 등의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는 지혜이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하므로 성소작지라고 한 것이다. 이 지혜는 모든 중생을 관찰하며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는 지혜로서, 이 지혜는 본심에서 발생하는 원력(願力)에 따라 이타적인 자비의 사업을 성취한다. 즉, 본원(本願)의 해야 할 일을 해 마치는 지혜이다.


그런데 위의 네 가지 지혜는 수행에 의해 점진적으로 성취되느냐, 아니면 단박에 증득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설 가운데 어떤 입장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능변계성(能遍計性)인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통달위(通達位)에서 일부[一分]를 증득하고, 이후의 십지 중에서 점차 닦아서 불과(佛果)에 이르러 그 전체[全分]를 증득한다. 그리고 현량성(現量性)인 아뢰야식과 전5식이 각각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로 전환되는 것은 성불할 무렵에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구경의 부처님 지혜는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마치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확실히 보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성불이란 이렇게 닦아서 사지(四智)를 구족하게 되고 법신, 보신, 화신의 모습으로 자재해 육도의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를 드리우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실성(實性)은 네 가지 지혜를 발생하며 자비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실성은 4열반(四涅槃)을 실현한다. 4열반은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과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과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을 말한다.

첫째,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은 마음의 번뇌가 거의 정화됐으나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지만 고통이 없는 열반을 실현한다.

둘째,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번뇌가 완전하게 정화돼 열반이 구현된 것을 말한다.

셋째,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은 어떠한 거주처에서든지 항상 안정과 즐거움을 실현하는 열반을 뜻한다.

넷째,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은 본래 자성이 청정하고 진실한 진리를 간단없이 보존하고 있는 열반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은 4지와 4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며, 진여의 본성이기도 한다. 이 경지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실현하는 진리의 세계이다. 즉 아공은 아집이 없는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것이고, 법공은 모든 현상계가 인연의 집합체로서 그 인연의 법체가 본래 공한 것임을 증득한 경지이다. 이는 편견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없는 절대 평등한 일진법계(一眞法系)를 실현하는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실성은 진여(眞如)와 불성(佛性), 또는 법계(法界), 실제(實際), 공(空), 승의(勝義), 법성(法性)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며 이는 하나의 진리를 이 그 이치에 따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진리는 마음 외에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의 실성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유식이라고 한다.


※능변계성(能遍計性)---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라고 잘 못 보는 것.

※현량(現量)---불교의 인식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새 말로 바꾸면 현량은 ‘직관(直觀)’이고 비량은 ‘추리(推理)’이다. 예를 들어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으로 통한 것이고, 먼 산 너머에서 연기가 날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불이 났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으로 통한 것이다.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법천사지 유물

6) 4선근(四善根)=4가행(四加行)

유식불교에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수행 5위(修行五位)라는 수행과정의 다섯 단계가 있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로서 보살 5위(菩薩5位), 수도 5위(修道5位)라고도 한다. 이 다섯 단계의 제2위인 가행위(加行位) 내에 다시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네 단계가 있어 이를 사선근(四善根) 또는 사가행(四加行)이라고 한다.

4선근(四善根) 또는 4가행(四加行)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처음 수행해야 할 네 단계를 말한다. 물론 이런 과정을 밟지 않고 매우 드물게 순서 없이 바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업장도 가볍고 총명해야 한다.

대개 사람의 경우, 본래 불성이 있다고 하나 나쁜 버릇에 물들어 있고, 업장(業障)을 많이 지어서 이것을 녹여 들어가려면 순서를 밟아가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순서를 밟아 올라가는 시초의 단계를 4선근(四善根)이라고 하는 것은 착한 뿌리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4선근에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世第一)의 네 단계이고, 이 네 단계의 수행과정을 거쳐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과정을 알지 못하면 혼자 토굴 같은 곳에서 열심히 수행을 해서 어떤 경계를 만나면, 이 게 어떤 경지인지 몰라서 헤매게 된다. 다음은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 밝힌 네 가지 수행단계의 요약이다.


※가행(加行)---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 힘을 쓰고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① 난위(煖位) - 4선근 가운데 첫 번째 자리로, 불을 일으키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문지르면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마찰열에 의해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없애는 불이 생기기 전에 접촉된 부분의 선근을 이에 비유해 난(煖)이라고 한다. 이 난위란 선정에 의해 사물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 범부의 지혜로써 4제(四諦)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로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② 정위(頂位) - 정(頂)이란 산꼭대기를 의미하는데, 범부의 지혜로는 최상의 단계이므로 정수리라 한다. 이 선근은 그래도 불확실한 선근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정(頂)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인위(忍位)에 들게 되며, 물러서면 난위(煖位)에 떨어지는 위치로서,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 같다 해서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범부의 지혜로써 사제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최상의 단계이다.

③ 인위(忍位) - 인위에서는 선근이 확정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위치를 말한다. 즉, 범부의 지혜로 4제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서 이를 인정해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사제의 이(理)를 인가(忍可)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단계이다.

④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 아직도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는데, 유루법(有漏法)이 존재하는 세간 중에서 최상의 선근이 일어난 위치라는 말이다. 즉, 가장 뛰어난 범부의 지혜에 이른 단계로서 그 다음 단계가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이다.


<다음은 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청화(淸華)스님의 법문을 요약한 것임>


4선근(四善根)은 견성오도(見性悟道) 하기 전에 우리가 더욱 증가시켜야 하는 네 가지 선근을 말한다. 즉, 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 즉 견도(見道) 직전의 수행계위이다. 견성오도 해야 참다운 자기이다. 견성오도하기 전에는 가짜 자기이다. 견성오도를 해야 참다운 대아(大我), 진아(眞我)가 된다.

따라서 견성오도 하면 바로 성자(聖者)인데, 성자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미처 성자가 못 된다 하더라도 수행자는 그 과정은 좀 알아야 한다. 그걸 모르고 수행하다가보면 여러 경계가 많이 있는 법이라서 자기 공부가 얼마나 돼 가는지 짐작을 못한다.

때문에 <능엄경(楞嚴經)> 같은 경에는 우리가 점차로 올라가는 4선근 법문에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설해 놓았다. 또 <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같은 데에도 역시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4선근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① 난법(煖法)


4선근 가운데 처음이 난법이다. 이것을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얻을 득(得),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둠이 깔려 무겁다가 마음이 훤하게 밝아 와서 마음이 시원해 온다는 말이다. 수행에 처음에 들어가면 어두움이 갔다 왔다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공부하다보면, 맑아져서 몸과 마음이 개운하며 가볍고 또한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며 수마가 와도 별로 피로도 못 느낀다.

그리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는데 이때는 혼침(昏沈)도 안 오고 그야말로 어떠한 분별망상도 줄어지는 것이다. 분별망상이나 혼침은 다 맑지 못하니까 오는 것이지 우리가 개운하고 쾌적하고 상쾌할 때에는 그게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르르해지고, 전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온다.

이런 때가 난위(煖位), 이른바 명득정(明得定)의 밝음을 얻었다는 경계이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이고, 난법의 단계까지만 가도 그 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그 명득정의 맑음을 얻었어도 말 많이 하고 남하고 싸우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공부를 해서 명득정이라는 밝음을 얻었으면 그 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소중하게 아끼면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해야만 더욱 정화가 된다.


② 정법(頂法)


그 다음 두 번째 단계는 정법이다. 정법을 명증정(明增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더할 증(增), 밝은 기운이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밝은 기운이 희미했다가 공부를 더하면 밝은 기운이 온 전신을 엄습한다.

이러할 때 기분 좋은 것은 다른 즐거움에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 공부는 건강 악화나 노이로제 같은 것이 붙을 수 없다. 공부해서 몸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해지면 잔병치레 같은 것이 붙지 못한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신지학(神智學)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신수양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정화되면 몸도 따라서 정화되는 법이다. 따라서 이 명증정(明增定)은 우리 마음이 그만치 시원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시원하면 자연히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머리도 눈도 시원해지고, 병균도 침범을 못한다. 맑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 암이나 병균 따위가 침범할 수 없다.

③ 인법(忍法)


그러다가 제3이 인법이다. 참을 인(忍), 이 인법을 인순정(印順定)이라고도 한다. 인순정은 밝은 기운이 덤벙거려도 그때는 별로 후퇴가 안 된단 말이다. 이런 기운이 딱 몸에 배여서 습관이 돼서, 그렇게 되면 나쁜 짓을 못한다. 욕도 안 나오고 지나치게 욕심도 부리려야 부릴 수도 없고, 다 허망하게 생각이 되니까 그렇다.

④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다가 거기에서 더욱더 공부를 정진해 나가면 그 다음 단계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세제일법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란 뜻이다. 견성(見性)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법은 못 돼도 세간적인 범부에서는 제일가는 법이 세계일법이다. 이때에는 우리 마음이 맑아져서 그 가운데 훤한 광명이 비추는 이른바 심일(心日)이 비춰온다. 마음에 해가 비춰온다는 말이다. 심일이 비춰오면,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정진을 계속하면 마침내 견성오도에 이르게 되지만 아직 도인(道人)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심일까지 비춰 와도 함부로 행동하면 어디로 간 곳 없이 없어져버린다.

따라서 경망한 사람들은 명득정을 얻어 몸만 좀 시원하고 알음알이가 생기고 또 무슨 판단이 잘 되고 그러면 그냥 공부가 다 됐다고 튀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평생 거짓말쟁이가 되고 남을 엄한 길로 인도하고 업만 짓고 만다.

따라서 이 4선근인 명득정, 명증정, 인순정, 세제일법, 이런 경계에서 가짜 도인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참 경계(警戒)를 많이 해야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4선근법이 일본 사람이 쓴 불교 책에도 잘 안 나온다. 더구나 우리나라 선(禪)에서는 그저 단박에 깨쳐버린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추구해서 화두(話頭) 일변도로 나가기 때문에 4선근의 체계에 대한 전문성 있는 법문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능엄경>이나 <구사론> 또는 <유식론> 등에는 이렇게 점차로 공부하는 점수법(漸修法)을 아주 착실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가 사실 공부할 때는 이런 경계를 꼭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만 좀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만 차근차근 공부를 하다 보면 짐작하게 된다. 더러는 이런 경계를 한 번에 다 초월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점차로 닦아서 서서히 가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개인의 품성이나 용맹정진의 힘 따라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분명히 이것은 우리 범부가 거치는 선근이고, 부처님께서 밝혀놓으신 과정인지라 참고하면 그때그때 자기 공부를 점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위[上]를 모르면 조금 기분이 좋고 밝아진 것 같으면 견성오도 한 것으로 알고 함부로 행동하고 묘각(妙覺)이라는 것도 함부로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묘각이란 초지(初地)의 보살이 환희지(歡喜地)를 성취한 경지에 이른 뒤, 십지(十地)까지 올라가서 부처[佛界]를 성취해야 묘각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다.


우리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이나 불경을 보면서 한없이 겸허해야 한다. 겸손하게 조그마한 자기 알음알이를 배제해야 교만심과 증상만(增上慢)을 피할 수 있다.

증상만, 이것은 못 깨닫고 깨달았다하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수행자로서는 가장 큰 병이다. 승려가 그러면 결국 승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고 만다. 도인(道人)이 아니면서 도인인 척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이다. 자기는 물론 남까지 함정에 빠뜨린다. 내 공부가 지금 어느 정도에 이르렀을까. 이것을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점검을 해주면 좋지만 그런 스승이 없으면 자기 나름대로 한계를 몰라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공부가 다 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난법(煖法)은 밝음을 얻는 때이고, 정법(頂法)은 더욱더 정화가 되고 맑음이 증가돼서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고 피가 맑아져서 순환도 잘 되고, 그래서 자연히 건강도 좋아진다. 요새 선방 가서 보면 약봉지가 설친다. 그러면 공부를 잘 못했구나 하고 반성해야 한다. 정말로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하고 계행청정(戒行淸淨)하게 생활할 때는 웬만한 병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땅히 명증정이라, 우리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다 생각할 때는 병균도 침범을 못한다. 그 맑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에이즈나 암 따위가 침범하겠나.

이렇게 해서 금생에 재가 불자들도 도통(道通)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제일법이라, 세간에서 제일가는 이 법을 애쓰고 닦아 가노라면 내생(來生)에 가서는 견성오도 할 날이 올 것이다.

지광국사 현묘탑

7) 유식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位)

유식에서 수행 5위(修行五位)란 <유식30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며, 보살 5위(菩薩5位), 수도 5위(修道5位), 수행위차(修行位次), 수행계위(修行階位)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시대부터 이미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설해지고 있었던 것으로서 유가(瑜伽)에서 지향하는 목표와 소승(小乘)에서 바라는 이상이 비록 다를지라도 그 수행과정 자체는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모든 인식활동으로 얻어진 번뇌를 정화하고, 이의 본성인 진여성(眞如性)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유식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8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識)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된 허망한 인식인 망식(妄識)을 대승적인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하는 수행 5위에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가 있으며, 그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자량위(資糧位) - 자량위는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를 말한다.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지혜와 복덕, 선근과 공덕을 쌓는 준비단계이다. 매우 초보적인 이 단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는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번뇌는 아직도 정화되지 않고, 허망한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나와 너’가 존재하고, 매사에 상대적이며, 의존적이라는 것을 머리로 깨달은 상태이다.

옛날에 먼 길을 가려면 노자(路資)와 식량(食糧)을 준비해 가듯이 자량위 수행은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자량으로 삼는다. 그리고 붓다의 말씀을 깊이 신해(信解)하고서 대승의 순해탈분(順解脫分), 즉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심(三十心)을 닦는 단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자량위 단계는 유식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과 비슷한 단계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상태라서 인식의 상황에서 쉽게 잠복된 번뇌에 끌려간다. 하지만 자량위 단계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건강하고, 사회적인 배려심이 깊고, 자아와 세계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매우 깊게 잘 이해하고 있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 좋은 벗[선우(善友)]을 만나는 것이고, ㉡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굳은 의지[작의(作意)]가 필요하며, ㉢ 이러한 여건들을 충분히 갖추고[자량(資糧)] 출발해서, ㉣ 신해(信解)로서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가르침을 강한 정신으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한다.


※순해탈분(順解脫分)---분(分)은 원인을 뜻하며, 해탈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계위, 해탈에 수순하는 단계란 말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삼현(三賢-현자의 세 단계)을 말하고, 유식설에서는 자량위(資糧位)를 일컫는다.

여기서 삼현이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로 나아가는 오정심관(五停心觀) . 별상염주(別相念住) . 총상염주(總相念住)을 말하는데, 유식학에서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등 삼십심을 삼현위 혹은 내범부위(外凡夫位-깨달음 밖의 단계)라 한다. 이러한 삼현위는 지전보살(地前菩薩)의 단계이다. 보살 수행 5위 중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면 지전보살이라 하며, 현자라 하고, 통달위부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 했다.

삼현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사유로 말미암아 마음이 해탈의 방향으로 굳어진 단계로서 이러한 삼현위는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든 존재의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을 전체적으로 관찰 수행함으로써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해 열반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이라 한다.

② 가행위(加行位) - 가행도(加行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하는데,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일주일이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 가행위(加行位)로서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도 한다.

제1위 자량위의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써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로서 인식의 주객(主客)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해 현상을 ‘나와 너’,또는 ‘나와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정신적 습관을 자각하고, 그러한 습관을 제거하는 훈련을 닦아나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唯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지심(止心, samatha)과 관법(觀法, vipasyana)이 가행위 단계에서 근원적인 사유의 단계로 실수(實修)된다.

그리하여 번뇌가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은 모두 허구라고 주시하는 단계이다. 이렇게 수행해나가는 가운데에 자연히 심신은 경쾌해지고 여러 가지 신통력도 일어나며,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는 4선근(四善根)도 차례로 생겨 순결택분(順決擇分)에 들게 된다. 즉, 자량위 수행을 거쳐 가행위에 들어서서 더 공부를 하면 가행위 중의 첫 번째 단계인 난위(煖位)에 이른다.


※지전보살(地前菩薩)---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십지(十地)라 하는데,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십지가 있다.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오른 보살을 초지보살(初地菩薩)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보살을 지전보살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통달위부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 하는데, 진여법성을 확실하게 깨우쳐서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계를 말하며, 초지보살에서 십지보살까지를 말한다.

※순결택분(順決擇分)---‘결택(決擇)’은 결단하고 가려서 사유한다는 말로서 번뇌가 없어진 세계로 방향이 정해지는 단계이다. 즉,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모든 의심을 끊고 4제(四諦)를 사유하는 성자의 경지로 나아가는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四善根)을 말한다. 이는 다음 통달위에 이르기 위해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이다.


③ 통달위(通達位) -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도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즉, 보살 십지(十地)의 첫 단계인 환희지[초지(初地)]에 입문한 상태를 말한다.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통달위에서는 참으로 마음의 흐름을 명확히 보아 무아(無我)인 줄 알게 되고,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는데, 지전의 수행위가 자량위와 가행위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 그런데 분별심이 없어지지만 아직 반연(攀緣)하는 작용이 남아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즉 후천적인 번뇌[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번뇌[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분별기번뇌가 끊어지면 통달위이다. 통달위에 오르게 되면 청정의 힘이 굉장히 강해지고, 번뇌의 근원인 ‘나와 나의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지에서도 아직까지 인간이라는 궁극적인 존재는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이와 함께 하는 번뇌는 요지부동이라는 것이다. 몸에 침투된 번뇌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으며, 각종 종자(種子)를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은 변화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근본이 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 일반에서 수행의 단계를 크게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라는 3도로 구분할 때, 앞서 말한 자량위와 가행위에 이 통달위를 더해 견도로 간주한다.

④ 수습위(修習位) - 수도위(修道位)라고도 하며, 통달위에서 아직도 정화하지 못한 부분을 더욱 정화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이다. 그 동안 긴 기간에 걸쳐서 끊임없는 수행과 그로 인해 체득된 무분별지의 발현에 의해 아뢰야식 중에 있는 번뇌와 주객체의 잠재력을 함께 단절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은 나 자신이 공(空)한 것을 깨닫는 것이고, 법공은 인연의 법이 공(空)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空)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소지장(所知障)이 없어지고, 동시에 번뇌장(煩惱障)이 정화되면서 그 동안 장애를 받아 발휘되지 못했던 지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이는 점차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져 가는 본격적인 수행 과정이다. 보살 십지 중 첫 단계인 초지의 둘째 단계이고, 삼도(三道)로 말하면 수도(修道)에 해당한다.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있다. 번뇌장은 탐. 진. 치(貪瞋癡) 등에 의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 것이고, 소지장이란 기왕에 조금 알고 있는 알음알이(얕은 지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이다. 번뇌장은 자기 자신의 감정적인 열정과 관련된 번뇌이고,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한 번뇌이다. 반면에 소지장은 외적인 현상의 존재가 실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에 기초한 번뇌이다. 소지장은 지혜의 결여로서 결국은 깨달음의 장애가 된다. 번뇌장이 정서적인 혼란을 가리킨다면, 소지장은 지적인 편견과 우매함을 포괄한다.

※삼도(三道)---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 과정인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이르는 말이다.


⑤ 구경위(究竟位) - 구경위는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의 4위의 수행을 통해 8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지위에 오른 과위이다. 즉, 구경위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의 보살들이 수많은 기간에 걸쳐서 수행을 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중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체적인 감각이나 의식 등의 주관적인 인식활동을 통해 얻은 모든 알음알이들이 완전히 제거돼 다시는 번뇌나 망상과 같은 삿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이때는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잠재의식에 묻어온 번뇌를 다 뿌리 뽑아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로 일치된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인격의 완성 정각성불(正覺成佛)이다. 즉,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로서, 삼도로 말하면 무학도(無學道)라고도 불린다. 무학도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단계라는 뜻이므로, 여기서 수행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는 부처라는 수행의 결실, 즉 불과(佛果)를 얻었다고 한다.

이상이 유식에서 말하는 5위의 수행단계로서, 중생은 현재 번뇌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면 번뇌가 사리지고,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으로 보살도에 나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진여眞如 tathata , 불교에서 궁극적 진리,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말.

여여·여실·여라고도 한다.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한다. 진여라는 개념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유가행파와 여래장사상에서도 진여는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 내용은 학파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었다.

내용

진여는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로 불교의 여러 학파에서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입각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주장한 설을 널리 채택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一心)을 참되고 한결같은 본체적인 면과 변화하고 움직이는 현상적인 면으로 나누고, 이를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라 하였다. 그리고 참되며 한결같은 진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언진여(離言眞如)를 간략히 밝히고, 이어서 그래도 감히 말로써 설명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밝힌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장을 두었다.

본체로서의 진여가 과연 절언인가 부절언(不絶言)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논쟁이 전개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진여를 사(事, 現象)에 대한 이(理, 본질적인 원리)로 이해하고, “이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도 아니고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이며 또한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이기도 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이언진여에 대한 몇 가지 점을 말을 빌려 밝히고 있다.

① 진여는 전체성·보편성·영원성을 지닌 대총상(大總相)이며, ② 진여는 참된 이해를 낳게 하는 원리원칙으로서의 법(法)이고, ③ 진여는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며, ④ 일심을 그 체(體)로 하고 있고, ⑤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시간성을 초월하고 있으며, ⑥ 망념(妄念)을 떠나 있기 때문에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문자와 개념으로 알릴 수 있는 것도, 분석적 사변이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진여에 대한 두번째 설명은 말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말에 의거한 진여 설명은 부정으로서의 공[如實空]과 긍정으로서의 공[如實不空]으로 다시 분류된다. 궁극적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실공을 세웠고, 진여의 자체에는 완벽한 상태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기 위하여 여실불공을 세운 것이다.

즉, 여실공의 진여는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라고 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모습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실불공으로서의 진여는 영원하여 불변하고 공평무사한 법이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실불공의 진여가 깨달은 사람에게만 온전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원효는 상기시키고 있다.

진여에 대한 세번째의 설명은 진여를 본체[體]와 속성[相]과 작용[用]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진여의 체는 보이지 않는 초험적인 것이고 선험적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여 그 자체이며, 본각(本覺)이기도 하다. 이 체의 모습은 범부라 하여 주는 일이 없고 부처라 하여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진여의 상은 진여한 마음이 갖는 완벽한 덕성이다.

그 덕성이란 ① 대지혜이고 광명이며[大智慧光明], ② 모든 대상세계를 남김없이 두루 비춰 주며[偏照法界], ③ 진실한 인식이며[眞實識知], ④ 그 본래의 성격은 청정한 마음이며[自性淸淨], ⑤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자재하고 더러움이 없으며[常樂我淨], ⑥ 청량하고 변화됨이 없으며 자재로운 것이다[淸凉不變自在].

이 여섯 가지 진여의 속성들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본체를 세속적인 표현을 통하여 열거한 예에 불과하다고 원효는 단서를 붙였다. 진여의 용은 진여심의 작용면에의 위대성이다. 이 용에 대한 설명은 본각을 회복해서 가진 부처를 내세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진여의 용이 무슨 까닭으로 있게 되는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진여의 작용은 ① 제불여래(諸佛如來)가 본래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단계에서 대자비를 발하여 갖가지 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고, ② 대서원(大誓願)을 세워 무한한 겁(劫)을 통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계를 해탈시킨다. ③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에 따로 중생관(衆生觀)을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이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원효는 진여의 작용이 있게 되는 이 세 가지 중에서 ①을 결과가 나타나게끔 하는 행위, 즉 본행(本行)이라 하였고, ②를 본래의 소원[本願], ③을 위대한 능력을 지닌 대방편(大方便)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과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작용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작용은 참되고 한결같아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중생이 보고 듣는 데 따라서 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진여의 작용은 대방편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초월자적인 존재가 힘없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베푸는 그 무엇이 아니라 중생심 그 자체의 작용이며, 진여한 중생심 속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발현되는 작용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효의 진여에 대한 주장은 중생의 본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후대의 우리 나라 불교계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장 유식학의 발달과 한계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유가사지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장은 미륵에서 시작한 유식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도불교를 중심으로 배운 현장의 유식학에는 중국의 정서와는 다른 필연적인 문제점을 품고 있다. 이것이 五性各別說*이라고 하는, 인간마다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불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제창한 학설이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구분 짓는 신분 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러한 신분 제도가 없기 때문에 맹자가 天命靡常이라고 하여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 것이나, 사기』 「陳涉世家에 흔히 회자되는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은 권력에 의해 재편되는 중국의 신분 구조를 잘 나타내는 예이다.

현장도 이러한 주장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식론이 중국에서는 위험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그것이 인도불교의 정설이므로 그대로 전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를 시행한 현장의 유식학은 제자인 자은 규기(632~682)에 의해 발전하지만, 보편성과 평등을 앞세운 화엄종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주류에서 물러나게 된다.

 

*五性各別說: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 제시하는 다섯 가지 인간 유형.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현장(玄奘규기(窺基)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으며, 이들 인간 유형이 성불(成佛)이라는 불교의 목적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현실적으로 제창한 학설이다. 대승불교의 근본이상에 의하면 모든 생명에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근기(根機)에 따른 천차만별의 상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별한 인간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문정성(聲聞定性): 성문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진리를 즐겨 듣기는 하나 실천이 없는 소승(小乘)의 성자를 가리킨다.

독각정성(獨覺定性): 성문보다는 지적으로 월등하지만 여전히 이타(利他)의 보살행을 결여한 소승적 수도인을 말한다.

보살정성(菩薩定性): 보살의 이상과 행위를 실천하는 대승의 수도자로서, 오성(五性) 중 가장 뛰어난 존재이며,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성불이 기약된다고 보고 있다.

부정정성(不定定性): 아직 선악이 나누어지지 않은 가능성의 존재로서, 선도 악도 될 수 있는 일반적 가능태(可能態)를 가리킨다.

무유정성(無有定性): 성불에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존재로서, 전생부터의 악업이 쌓여서 성불을 이룰 가능성이 없다.

 

이상의 인간 유형 제시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관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지막의 무유정성을 놓고 대승불교 사상계에는 큰 논란이 있었다. , 법화경이 등장한 이후 아무리 극악한 존재라 할지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일천제성불설(一闡提成佛說)’이 일세를 풍미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은 이 오성각별설을 전면으로 부정하여 일성개불설(一性皆佛說)’을 제창하였다. , 다섯 가지의 현실적 인간 유형은 인정하지만 성불에 있어서는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대립은 끝내 유식불교를 분열시켜서 유상(有相무상(無相)의 구분 외에도 또 다른 분파를 초래하였다.

 

특히, 중국 법상종의 사상가들은 원측 등이 주장하는 일성개불설을 비판하여 그와 같은 사상 계통의 저술들을 전부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생애를 중국에서 보낸 원측의 저술들이 인멸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원측의 학설은 티베트지역 등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으며, 우리나라의 의적(義寂태현(太賢경흥(憬興) 등 유식사상가들은 대체로 원측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

불교사 100장면 261. 262쪽 오성각별설 참조

 

*부록

<4연(緣) -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


연(緣)은 원인 일반을 가리키기도 하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인(因)과 구별해서 보조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연과 인을 합쳐 인이라 하기도 하고, 연이라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연(緣)은 여러 경우에 쓰이기는 하나, 대개 인연(因緣)과 같은 말로서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4연은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온갖 유위법(有爲法)]이 생기는 것에 대해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4세기경 세친(世親)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sa)>에 실려 있는 4연을 구마라습은 인연(因緣), 연연(緣緣), 차제연(次第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번역했고, 현장(玄?)은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으로 구분해서 번역했다. 그런데 4연(四緣)은 주로 마음과 관계돼 마음의 활동을 잘 도와주는 인연관계를 뜻하고, 마음을 중심으로 한 유식(唯識)의 뜻을 설명해주고 있다.


1, 인연(因緣)


인연을 산스크리트어로 hetu-pratyaya라고 한다.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 중의 하나인데, 인(因)은 생기(生起)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연(緣)은 오랜 기간 성장을 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인(因)이 존재자[법(法)]의 생기(성립)에 관계되는 원인이라고 한다면, 연(緣)은 존재자의 유지와 존속에 관계되는 원인이므로 인연은 인과 연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면, 나무의 근본적인 원인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씨앗이 변해서 나무가 된다. 그래서 나무의 씨앗은 인(因)이고, 그 나무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물과 햇빛, 흙, 공기와 같은 것은 외부의 조력으로서 이것이 연이다.

그러니 인(因, hetu)이 결과를 만들기 위한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원인이라면, 연(緣, pratyaya)은 인을 도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간접적이고 외적인 원인(즉 조건이나 상황)이다.

그래서 불교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생멸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유위법의 현상은 원인이 되는 인과 그 결과인 연에 의해 발생하며, 항상 변화하고 일순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헌데 인(因)은 존재자가 본유적(本有的)으로 갖추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에 바뀔 수가 없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연(緣)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나의 노력에 의해서 나의 존재환경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어렸을 때 갓 태어난 나의 존재는 지금의 나의 존재의 직접적인 인(因)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면서 나의 뒷바라지를 해 주신 부모, 나를 잘 가르쳐준 스승, 나의 친구, 내가 성장한 환경 모두가 지금의 나의 존재에 대한 연(緣)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그와 같은 속성을 인(因) 중에서도 내인(內因)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삶의 환경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니, 이 외적환경인 연(緣)을 외인(外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외인은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이 외인인 연(緣)에 의해서 불교가 종교로 성립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수행을 통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연(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緣-外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곧 인간의 작위(作爲)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선행과 악행이 미래의 세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 불교사상이다.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것은 인연성(因緣生), 연생(緣生), 연기(緣起) 등으로 부르는데, 연기란 인연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며, 인과 연의 화합해 따라 생기(生起)했던 것은 인연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대승에서는 이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일체의 존재를 공(空)이라 한다.


2, 소연연(所緣緣)


소연연(所緣緣)은 산스크리트어로 alambana-pratyaya이며, 연연(緣緣)이라고도 한다. 소연연은 마음이 의지하는 모든 경계(境界)를 가리킨다. 즉 심적 활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모든 인식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소연연은 바깥 대상을 인식주관으로 끌어들여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인식주관의 지향작용이라 할 수 있다. 소연(所緣)이 원인이 돼, 마음이나 마음작용이라는 결과가 생길 때, 마음이나 마음작용의 대상을 소연연, 마음이나 마음작용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색깔 ? 형태 ? 소리 ? 냄새 등 감각 대상이나 개념 ? 관념과 같은 사유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없이 마음이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대상들을 ‘소연연’이라 불러 마음의 생성원인에 끼워 넣는다. 그러니 유식학적으로는 6식(六識)의 대상이 되는 6경(六境)이 소연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연연이란 마음이 뭔가 인식하게 하는 대상, 혹은 무엇이 일어날 때의 객관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에 걸린 달력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하자. 이때 고향을 떠올리게 한 마음작용의 원인이 된 달력의 그림이 바로 소연연이다.


3, 등무간연(等無間緣)


등무간연은 산스크리트어로는 samanantara-pratyaya이며,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는데, 서로서로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말한다.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하며, 이런 현상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은 마음의 활동, 즉 이미 발생한 결과가 곧 바로 다음 순간의 결과를 낳도록 돕는 연(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뒤의 생각은 앞의 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는 증상과(增上果)에 해당한다.


※찰나생멸(刹那生滅)---지극히 짧은 순간인 찰나에도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생겨나면서 무한의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돼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 한다. 결국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나’는 없다는 무상을 말하므로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도 한다.

※증상과(增上果)---어떤 유위법[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길 때에 자기 이외의 다른 일체 직 · 간접적인 영향을 통틀어 증산과 혹은 능작인(能作因)이라 하고, 그 결과를 증상과라 한다. 능작인과 증상연은 같은 개념이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마음은 부단히 흐르는 ‘상속(相續)’이다. 따라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한 찰나 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불교는 존재세계를 ‘무상(無常)의 상(相) 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한 찰나 한 찰나 생성소멸이 이루어지는 ‘찰나적’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든지 어떤 찰나에 생성되기 위해서는 전 찰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흐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경우도, 마음이 부단한 흐름인 한, 바로 직전 찰나의 마음이 원인이 돼서 그 결과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는데, 직전 찰나의 마음과 현 찰나의 마음이 시간적으로 붙어있어서 간격이 없고[무간(無間)], 또 우리가 일상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마음[등(等)]이 꼬리를 물고 찰나적으로 이어지면서 그 질이 거의 같은[등(等)] 생각이 이어진다.

따라서 등무간연은 앞 사람이 건너가고 나서야 다음 사람이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 같은 것이다. 즉, 먼저 발생한 생각이 종식될 때라야 이 종식이 조건이 돼 다음 찰나의 새로운 생각이 발생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심리상태가 생길 때는 반드시 이전 순간의 심리적용이 자리를 내주고 새 심리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만큼, 이전 순간의 심리작용이 다음 순간의 심리작용을 발생하게 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것은 동일한 순간에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심리현상이 동일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말이다.

구마라습의 분류에 의거하면, “인연(因緣)에는 시간의 선후로 펼쳐지는 차제연(次第緣=등무간연)이 있고, 공간적으로 전개되는 증상연(增上緣)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혈연은 차제연에 해당하고, 지연(地緣)과 같은 것은 증상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연(緣)과 연(緣)이 서로 물리는 연연(緣緣=소연연)도 있다. 이 모든 인연들이 덩굴처럼 어우러지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헌데 혈연 지연은 인연의 평등성을 놓치는 인간의 굴레이다. 왜 그런가? 이 문제는 증상연에서 다시 살펴보자.


※반연(攀緣)---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인연, 혹은 도 닦는 것을 방해하는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쓸데없는 일들을 말한다. 오이, 호박, 칡과 같이 넝쿨식물을 반연식물이라 한다.

4, 증상연(增上緣)


증상연(增上緣)은 산스크리트어로는 adhipati-pratyaya이다. 이상의 3연(緣) 이외의 일체의 간접적인 원인을 증상연이라 한다. 연(緣)을 두 가지로 구분해 어떤 특정현상이 존속하게끔 하는 직접적인 것을 인연(因緣)이라고 하고, 어떤 특정현상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간접적으로 조력하는 연을 증상연이라고 한다. 예컨대 눈이 말짱하고 정신도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시각대상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햇빛이 없으면 시각이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이 경우에 햇빛이 있는 것은 시각이 생기기 위한 보조적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보조적 원인을 모두 통틀어서 ‘증상연’이라 불러 생성원인 항목에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우주만물이 총체적으로 증상연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증상(增上)’이란 영향을 주는 힘을 뜻한다. 우리가 기억한 일들이 모두 동일한 힘으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강력한 기억으로 남고, 어떤 것은 약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건이 산출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원인으로서의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과 그 사건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으로서의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의 2가지가 있다.

증상연은 결과의 생기(生起)에 힘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증상연(增上緣)으로 부른다는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그 자체 이외의 모든 사물에 대해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곧 십이처(十二處) 모두가 증상연(增上緣)이라 할 수 있고, 모든 존재는 어느 하나의 존재에 대해 증상연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증상연은 존재의 원인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불교 특유의 개념이다.

헌데 지연(地緣), 학연(學緣) 같이 증산연이기는 하나 이런 지연 학연과 같은 것은 인연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도구화할 가능성이 짙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도구로 활용하기 쉽다는 말이다. 정치판에서 지연 학연을 내세우는 작태야말로 인연을 오염시키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만남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함으로써 인간의 진실성을 오염시킨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굴레이다. 오염된 인연 그것이 인간의 굴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2012년) 대선 때 안철수는 자기 부인이 호남 출신임을 내세워 호남에 가서 자기는 ‘호남의 사위’라고 떠들어댔다. 지연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자를 옹호하는 중(법륜)도 있었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용어해설

(, 산스크리트어: sammā, 팔리어: sammā) 또는 바름은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확(正確)을 뜻하는데, 정확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기준(基準)이나 사실(事實)에 잘못됨이나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맞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1] 정견(正見) 등의 8정도(八正道)와 정관찰(正觀察) 등에서의 정()이 이 뜻에 해당한다. ()의 반대말이다.

(, 산스크리트어: sammā, 팔리어: sammā)은 완전함 또는 철저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정각(正覺)은 완전한 깨달음 또는 철저한 깨달음을 뜻하고, 정심해탈(正心解脫)은 완전한 심해탈 또는 철저한 심해탈을 뜻한다.

()은 불편불의(不偏不倚) 즉 치우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 경우는 중() 또는 중도(中道)와 같은 말이다. 이 뜻은 정오(正午)를 뜻하는 정중(正中)처럼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이며, 중도(中道) 상태의 무간등(無間等) 즉 중도(中道) 상태의 현관(現觀) 즉 치우치지 않은 현관(現觀)을 뜻하는 정무간등(正無間等)과 같은 불교 교학의 용어로도 쓰인다.

()은 평평함 또는 고름을 말하며, 색경(色境) 중 형색(形色: 8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은 깨끗함, 맑음, 청정함의 뜻으로 무루(無漏)를 말한다.[6] 유루(有漏)를 뜻하는 염()의 반대말이다. 둘을 합쳐서 염정(染淨)이라 하는데, 유식학에서 염정(染淨)은 수행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즉 소지(所知)이다.

()은 선()의 다른 말이다.

 

(, 산스크리트어: śānta)3(三火) 즉 탐 · · 치의 불선근이 그쳤기[三火息] 때문에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게 된 고요함을 뜻하는데, 택멸(擇滅, 산스크리트어: pratisajkhyā-nirodha, 팔리어: patisavkhā-nirodha) 즉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 산스크리트어: śānta)은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416행상(四諦 十六行相: 4성제를 관찰하는 16종의 관법 또는 관행[13]) 가운데 하나로, 4성제 중 멸제에 대한 4가지 관찰[觀法 또는 觀行]인 멸() · () · () · () 가운데 정()을 말한다. 이것은 '택멸 즉 열반이란 모든 3(三火) 즉 탐 · · 치의 불선근이 그쳤기[三火息] 때문에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게 된 고요함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 이러한 수행[行相]을 정()이라고 한다.[

()은 추() · () · () · () · () · ()6행관(六行觀) 가운데 하나로 상지(上地)에 대해 정()이라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은 적정(寂靜)하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상지(上地)의 온갖 유루법(有漏法)은 오직 커다란 노력[大劬勞]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은 삼마지(三摩地, 산스크리트어: samādhi, 팔리어: samādhi, 산스크리트어: ekāgratā, 팔리어: ekaggatā, 영어: concentration, one-pointedness, unification, unification of mind)의 다른 말이다.

()은 선(, 산스크리트어: dhyāna,팔리어: jhāna, 영어: meditation), 디야나, 선정(禪定) 또는 정려(靜慮)의 다른 말이다.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 또는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서 극략색 · 극형색 · 수소인색 · 변계소기색 · 정자재소생색의 5가지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가운데 하나이다.[21][22][23] 정자재소생색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정자재(定自在)로 생겨난 색'이다. 정자재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선정[]의 자재(自在)로 선정(禪定)의 역량 즉 선정의 힘 즉 선정력(禪定力)을 뜻한다. 따라서 정자재소생색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선정력에 의해 생겨난 색'이다.

정자재소생색은 선정(禪定)에 의해 나타나는 형상으로, 예를 들면, 물이나 불에 대해 선정을 행하여 심일경성의 상태가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물이나 불 등을 말한다.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정자재소생색 즉 선정력에 의해 생겨난 색은 가법(假法) 즉 실체가 없는 물체인 경우도 있고 실법(實法) 즉 실체가 있는 물체인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8지 이상의 보살에 의한 것으로, 이 경우에서는 선정력으로 지 · · · 풍의 4대종을 실제로 조합(組合: 여럿을 모아서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게 함)하고 조작(操作: 일정한 방식에 따라 다루어 움직임하여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납을 금으로 바꾸는 등의 연금술적인 변형을 일으켜 실제의 객관적 물질이 나타나게 한다. 이렇게 나타난 물질은 실제의 객관적 물질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 물질의 본질적 용도 그대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실제의 포도주이기 때문에 잔치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고 실제의 금이기 때문에 실제로 화폐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실법(實法)이다. 이에 비해 제7지 이하의 보살과 범부의 선정력에 의해 생겨나는 물체는 아직 객관적 물체는 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실체성이 없는 가법(假法)이다.

 

제행(諸行, 산스크리트어: sarva-saṃskāra, saṃskāra, saṃskṛta, saṃskārāḥ, samanta-cāritra)'모든 행(,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이라는 뜻으로, 일체의 유위[一切有爲] 즉 모든 유위법을 통칭한다. 구체적으로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75법과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5100법의 법체계에서 무위법을 제외한 모든 법들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 심의 모든 현상, 즉 모든 물질적 · 정신적 현상을 말한다. 3법인 또는 4법인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의 제행은 이 경우의 뜻으로 즉 '모든 유위법' '· 심의 모든 현상'을 뜻한다.

설일체유부의 575법의 법체계에서의 나열 순서와 법수(法數)에 따르면 제행(諸行)은 색법(色法: 11가지) · 심법(心法: 1가지) · 심소법(心所法: 46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14가지)의 총 72가지 법을 통칭한다.

유식유가행파5100법의 법체계에서의 나열 순서와 법수(法數)에 따르면 제행(諸行)은 심법(心法: 8가지) · 심소법(心所法: 51가지) · 색법(色法: 11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의 총 94가지 법을 통칭한다.

제행(諸行)'모든 행(, 산스크리트어: caryā, 팔리어: cariyā)' 또는 모든 행업(行業)이라는 뜻으로, 보리(菩提) 즉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행하는, · · 뜻으로 짓는 모든 선한 행위 또는 실천을 말한다. 즉 선한 3(三業) 또는 선한 3(三行)과 같은 말이며, 만행(萬行)이라고도 한다.

제행(諸行)'모든 행(, 산스크리트어: संस्कार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 영어: (mental) formations)'이라는 뜻으로,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모든 3업 또는 3행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12연기의 유전연기의 무명연행(無明緣行)의 문맥에서 말하는 것으로, 무명(無明)에 바탕하여 일으키는,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모든 마음(6식 또는 8,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통칭한다. 달리 말하면, 무명에 의한 모든 의지력 · 충동력 · 의욕 · 인식 등을 통칭한다.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īja, 팔리어: bīja)는 유식학 관계의 용어로서, 업에 의해 마음(특히 아뢰야식을 말함) 속에 깃들여지는 습기(習氣: 문자 그대로는 '깃들여진 기운', 업에 따른 인상 또는 세력)를 말한다. 사람이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인상이나 세력이 아뢰야식에 남게 되는데, 이렇게 아뢰야식 속에 깃들여진 습기는 후에 인연이 갖추어지면 현행(現行: 현재화, 현재세력화)하여 업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뜻에서, 업에 의해 마음 속에 깃들여지는 습기가 마치 과실 나무의 씨앗과 같다고 하여 종자라고 한다.

그리고, 습기(習氣), 규기의 성유식론술기2권에 따르면 '기의 분[氣分]', '() 즉 세력 또는 힘의 한 형태'로 훈습에 의해서 성립된 세력 또는 힘을 뜻하며, 곧 종자와 같은 말이다.

 

()는 불교에서는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죄()는 크게 성죄(性罪: 본질상 죄)와 차죄(遮罪: 막은 죄)2가지로 나뉘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2(二罪)라 한다. 성죄는 5악 가운데 살생(殺生) · 투도(偷盜) · 사음(邪婬) · 망어(妄語)5역죄나 10악죄처럼 선 · · 무기의 3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성질이 악이어서 고타마 붓다의 제지(制止)가 없었어도 죄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차죄는 선 · · 무기의 3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성질이 악은 아니나 고타마 붓다가 제지하였으므로 비로소 죄가 되는 것으로, 예를 들어 5악 가운데 하나인 음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시산회 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298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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