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식설(心識說)의 개요
불교는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중심의 종교이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리의 내용도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진여성(眞如性)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하여 인간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 원시불교에서부터 비롯하며, 소승불교시대는 더욱 논리화되었다. 그러나 불타가 말씀해 놓으신 교리를 보다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소승교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여 또 다른 인간의 심성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A.D 4세기경에 나타난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A.D 4세기경 무착보살(無着菩薩)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이 학문은 인도는 물론 중국을 거쳐 한국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연구되었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이 주체가 되어 삶의 현상을 창조한다는 대승적인 학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성을 가장 세분화하여 설명해 주는 학문이다.
그 사상의 핵심을 보면,
* 번뇌로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선악에 윤회하는 중생을 설명하는 학설(相).
* 청정무구한 불성과 진여심을 설명하는 학설(性).
* 선악의 범부심을 정화하는 보살도적 수행을 설명하는 학설(因位)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학설을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의 마음을 안식(眼識) 등 8종(八種)의 마음으로 분류하여 선과 악의 정신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8종의 마음 가운데,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선악의 행동이 나타나며 그 행동이 원인이 되어 선악의 현상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그 마음의 종류와 명칭을 보면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 8식(八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마음은 항상 번뇌를 가진 범부심을 말한다. 선행과 악행을 야기하며 동시에 선인(善因)을 조성하여 선과(善果)를 받고 악인(惡因)을 조성하여 악과(惡果)를 받으면서 인고에 얽매여 윤회하는 마음을 설명하는 학설인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사상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을 야기하는 범부심이 있는 가운데 그 마음의 실성(實性)은 지혜로우며 선과 악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실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성과 불성과도 통하며 이를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도 한다. 아마라식은 무구식(無垢識)이라고 번역하며 인간의 청정한 마음을 의미한다.
이 청정한 마음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구족되어 있는 마음이며 모든 진리를 한눈으로 다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대지혜(大智慧)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착한 본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모든 진리와 통할 수 있으며 열반과 해탈을 실현할 수 있는 본성을 항상 보존하고 있다.
셋째로 위에서 말한 번뇌로운 8식을 정화하여 지혜와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고통이 없고 항상 안락한 대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정화는 물론 중생과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수행하여 많은 공덕을 쌓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은 번뇌로운 심성을 정화하여 본래의 불심(佛心)을 회복하고자 하는 대승적인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유식학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셋째의 수행설을 제외하고 첫째의 8식설과 둘째의 식(識)의 실성인 진여심 등은 모든 인간의 성품을 설명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셋째의 수행설은 망심을 정화하여 진여심을 회복하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8식에 대한 성품을 분류하면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으로 분류된다.
이는 선악의 상대적인 심성이며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 아집에 사로잡힐 수 있는 번뇌의 심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심성은 영원하고 불변한 번뇌심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시적인 번뇌심으로 본다. 이러한 범부심이 정화되면 이들 마음의 본바탕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의 지혜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인간은 선과 악이 대립되는 마음의 소유자로서 온갖 번뇌를 야기하면서 본래 소유한 참다운 마음을 덮어버린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 논술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요지를 몇 가지로 나누어 말 할 수가 있는데, 이들 심성을 유식학에 의하여 이른바 심리학적으로 해설하려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좀 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에서 거론한 안식 등 8식을 전체로 설명하고, 또 이들 식의 실성인 지혜와 진여심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유식학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준유식사상이라 할 수 있는 여래장식(如來藏識)과 불성(佛性) 등도 함께 설명해 볼까 한다.
다시 말하면 여래장식은 아라야식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심성설로서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부처님과 같은 여래의 심성을 부장(覆藏)하고 있다는 사상을 펴나가는 심성의 명사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에 의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불안(佛眼)으로 일체의 중생을 관찰해 보니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우치한 마음 가운데 에 여래의 혜와 여래의 안(眼)과 여래의 몸이 있으며 이 여래는 부동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더라. 선남자야, 일체의 중생은 어느 세계(諸趣)에 있더라도 번뇌로운 몸 가운데 여래장이 항상 번뇌에 오염되지 않고 진리로운 덕상(德相)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나와 같아서 하나도 다름이 없더라."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성은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서 부처님과 다름없는 지혜로움과 지혜의 눈과 몸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도 거의 같은 말이 있다.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옛적부터 무량한 번뇌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가난한 집에 진금(眞金)이 있어도 가족들이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성에 여래장과 불성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확실히 믿고 마음을 덮어 지혜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번뇌심을 수행을 통하여 정화해 나가면, 누구나 자신에게 이미 보존해 왔던 여래장심과 불성을 점차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자신의 불성을 완전히 회복하면 부처님과 같이 지혜로움과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성 및 진여에서 나타나는 지혜를 유식학에서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 4지(四智)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지혜는 곧 불성에서 나타나는 지혜의 광명으로서 항상 우리 마음속에 빛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이며 번뇌를 야기하여 스스로의 불성을 장애하며 덮어버리고 무지하게 사는 것이 중생의 입장이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자기 속의 보배를 망각하고 남에게 구걸하여 항상 열등의식을 갖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론(佛性論)에서는 불타가 중생들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은 중생들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5종의 과실을 없애준다는 것은
첫째, 중생들에게 열등의식을 없애주기 위하여
둘째, 무지한 사람의 교만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셋째, 허망한 집착을 없애주기 위하여
넷째, 진실된 진리에 비방함을 없애주기 위하여
다섯째, 거짓된 자기에 대한 아집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생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는 교설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경전이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들 다섯 가지 법문 중 중생들의 열등의식인 하열심(下劣心)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큰 자각을 불러 일으켜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지혜로움을 망각하고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감히 스스로를 멸시하고 또 나약하게 생각하는 사상을 떨쳐버리고 항상 전지(全知) 전능(全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의 불성을 계발하는데 정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성에는 8식과, 8식의 본성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 그리고 여래장성과 불성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표현이다.
그밖에도 공성(空性)과 불공성(不空性), 그리고 유아성(有我性)과 무아성(無我性) 내지 이숙성(異熟性)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표현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심성(心性)에 대한 표현들은 인간의 일심(一心)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일심의 오묘함은 한이 없어 과거의 성현들도 마음을 언어로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도 얕은 지식으로 일심의 도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세속지(世俗智)로 전공한 유식학이라는 학문에 의하여 위에서 소개한 8식과 불성, 그리고 주변의 인간성과 관련된 학설을 참고하여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소승불교의 심식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름이 많다. 그리고 그 이름 하나 하나의 뜻이 조금씩 다르다. 그것은 불교에서 그만큼 인간의 마음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종래의 복잡한 심성설을 종합하여 식상(識相)과 식성(識性)으로 크게 구별하여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고 있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 초창기의 유식학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탐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므로 매우 복잡하였다. 그러나 세친논사(世親論師) 이후의 후기 유식학은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과 [백법론(大乘百法明門論)] 등을 통하여 잘 정리되었고 또 식상과 식성 등으로 구별하며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이제 그 구별에 따라 전자인 식상에 대해 그 유래 등 하나하나 살펴볼까 한다.
1) 원시불교의 심식설
위에서 유식학에서는 우리 마음을 식상(識相). 식성(識性)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고 하였다. 그 식상은 범부심을 뜻하고 식성은 불성(佛性) 또는 진여성(眞如性)을 의미하며 그리고 불심(佛心) 또는 보살심(菩薩心)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보살심은 정화의 길에 있는 심성이기 때문에 완전한 식성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범부심보다는 마음의 정화가 거의 이루어졌다는 입장에서 보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상은 곧 번뇌를 야기하고 선행과 악행을 일삼아 그 행동의 업력으로 안락과 고통을 받게 되는 유루심(有漏心)을 뜻하고 식성은 청정무구하고 생과 사를 떠난 해탈의 마음이며 열반의 진리를 실현하는 무루심(無漏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식학의 특징은 범부들의 마음(識相)을 낱낱이 해설하여 번뇌와 악을 야기하여 윤회하게 되는 동기 등 원인과 결과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계몽해 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은 대승불교 가운데 범부의 심성과 현실의 입장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유식학적 심성설이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가 그 유래를 간단히 설명하고 내용 설명에 들어갈까 한다.
불교의 심식설(心識說)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원시교리인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 이른바 삼과설(三科說)에서 이미 원시적인 심식설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내용이 비록 원시적인 심식설이기는 하지만 범부의 심식을 매우 깊이 설명하고 있다.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인간의 마음을 육식(六識)으로 분류하여 모든 정신생활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심식으로부터 나타나는 행위는 곧 업인(業因)이 되고 이 업인은 다음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인과의 도리도 잘 설명하고 있다.
2) 소승불교의 심식설
원시불교의 심식설은 소승불교에 이어져 더욱 발전을 보게 된다. 소승불교는 일명,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라고도 하는데 이는 매우 탐구적인 명칭이다. 즉 아비(阿毘)는 공경하고 결택(決擇)한다는 뜻이며, 달마(達磨)는 진리 또는 물질과 정신계를 모두 포함한 법(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명칭이 말해 주듯이 아비달마 불교 시대는 정신계와 물질계를 깊이있게 탐구하고 정신계와 물질계는 모두 업력의 힘에 의하여 운영되고 유지된다는 이론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업감연기(業感緣起)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업력에 의하여 결과로 초감(招感)되고, 감응되어 연기(緣起)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말은 인연이 모아 결과가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며, 이를 의역하면 창조라는 말로도 쓰인다. 무엇이든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승불교는 업력에 의하여 인간의 현실은 물론 삼계 육도(삼계 六道)인 우주도 창조되고, 또 정신의 현상도 선과 악 등 유루성(有漏性) 등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는 필연적으로 그 업력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마음을 중심하여 밝혀내는 데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하여 원시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육식설(六識說)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작용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를 심소(心所)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육식은 행동을 나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마치 국왕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심왕(心王)이라 하고, 이 심왕에 소속되어 착한 행동(善行)과 나쁜 행동(惡行)을 야기하는 정신작용을 심소(心所)라고 이름하였다.
이들 심왕과 심소의 행위에 입각하여 선업과 악업이 결정된다. 이러한 심소론(心所論)은 [품유족론(品類足論)]과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구사론(俱舍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소승 가운데서도 가장 잘 정리된 구사론에 의하면 선법(大善地法)과 악법(大煩惱地法) 등을 야기하는 46종의 심소법(心所法)이 있다. 이와 같이 심왕(心王)과 심왕에 의하여 나타나는 심소(心所)가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 행동은 곧 업인으로 조성되어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곧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기도 하고 미래세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업력의 결과를 순현보(順現報), 순차보(順次報), 순후보(順後報), 순수정보(順不定報)라고 분류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학설을 기초로 하여 선인(善因)은 선과(善果), 악인(惡因)은 악과(惡果) 등의 인과법뿐만 아니라 수시로 변천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이숙(異熟)의 인과법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업력은 마음속 어느 곳에 보존되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육식(六識) 가운데 제6의식(意識)이 있는 눈, 귀, 코, 혀, 몸 등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통제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평소에 몸과 마음으로 조성되는 업력까지도 보존하는 주체라고 믿어왔었는데 그러나 그 의식이 불완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의식이 평상시에 잘 활동할 때에는 별로 문제가 없지만 그러나 만약 어떤 불의의 사고나 극한 상황하에서 의식이 분명치 않을 때는, 의식의 체성이 영원한 생명체로서, 또는 미래세까지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가 과연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업력의 보존체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심리분석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민하던 소승논사(小乘論師)들은 제6의식(意識) 이외에 또 다른 심성(心性)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심성은 금생과 내생에 관계없이 중생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또 업력도 보존하여 주며 동시에 인연에 따라 모든 결과까지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주체를 소승불교시대의 여러 부파(部派)들은 다각도로 탐구하여 다음과 같은 심체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중부(大衆部)는 근본식(根本識)이라 하고, 상좌부(上座部)는 유분식(有分識)이라 하며, 독자부(犢子部)는 보특가라(補特伽羅), 화지부(化地部)는 궁생사온(窮生死蘊), 경량부(經量部)는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고 명칭을 정하여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 인간의 심성을 부단히 연구하고 탐구하여 합리적인 인과사상과 윤회사상 등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은 한없이 넓고 깊어서 이 시대에도 그 논리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 의무를 대승불교에 넘기게 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의 심식설은 그 시대의 사상 가운데서 핵심이 되었지만 아직도 불교의 사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A.D 4세기경 무착보살이 출세하여 대승적인 심식설로 개혁하기에 이른다. 무착보살은 [해심밀경]의 심의식(心意識)설 등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소승불교에서 주장해 온 육식설에다 제7말나식(末那識)과 제8아라야식을 더 보태어 8식설로 논리화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소승불교의 육식설과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심소(心所)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설명하는 이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승불교에서는 전념(前念)이 후념(後念)에 대한 의지처가 된다고 해서 전념(前念)을 의근(意根)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의식불명 등 심식의 단절이 있으면 고정불변한 의근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근본 번뇌의 발생과정과 의근을 진리롭게 설명하려면 제7말나식이라는 심성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말나식을 우리 인간의 죄악의식(罪惡意識)의 발생처로 하고, 또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무착보살은 제8아라야식을 정하여 이 심식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심식을 유지시켜 주고 생명과 수명도 유지시키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업력이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어 현재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또 미래의 윤회도 가능케 하는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8종으로 분류하여 모든 정신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심의식(心意識)사상과 팔식(八識)
위에서 심식설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원시불교의 심식설과 소승불교의 소승불교적인 심식설에서 진일보한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학에 속하는 팔식설(八識說)이다. 그런데 이들 팔식설을 설명하기 전에 또 하나의 중요한 학설을 소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을, 이른바 심의식(心意識)이라고 표현하는 학설이다. 이 심의식 사상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심성을 잘 표현해 준 심성설이다. 이 사상도 역시 원시불교에서 비롯되며 소승불교에 이어서 유식학 조직에 크게 기여한 학설이다.
먼저 원시불교에 나타난 심의식 사상의 개요만을 소개하고 다음에 소승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학에 나타난 심의식 사상을 비교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원시불교에서는 심(心), 또는 의(意), 식(識) 등을 산발적으로 거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잡아함경] 등에서는 심의식을 동시에 거론하여 그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心意識)은 잠시도 정지되어 있지 않고 밤낮으로 전변(轉變)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심의식은 잔나비가 임야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의 마음도 항상 움직이면서 활동하는 상태에 있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심의식은 번뇌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면 곧 없어지는 심성(我已彼欲心意識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시불교에서는 심의식에 대하여 안정된 심성이 아니라 항상 번뇌로운 작용을 야기하고 있는 심성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번뇌심은 욕심 등 번뇌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심상(心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승불교시대에 와서 더욱 확대하여 설명되고 있다.
1) 소승의 심체일설(心體一說)
소승불교는 마음의 체는 하나라고 하였다. 즉 소승불교의 논서에 속하는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에 의하면 "심(心)은 곧 의(意)이며, 의(意)는 또 식(識)으로서 그 체성(體性)은 서로 같으며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소승불교시대에는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명칭이 서로 표현만 다를 뿐 그 체성은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의식사상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체사상을 통해 본다면 인간의 심성은 그 체성이 각기 다르며 활동도 다르게 한다는 학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의 심체(心體)는 유일한 것이며 그 활동하는 작용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학설은 소승불교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였다는 세친론사(A.D 4세기)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심의식 세 가지 이름은 그 표현의 뜻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 체성은 유일하다(心意識三名 所詮議難異 而體是一)”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여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심체(心體)를 하나로 본 것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친론사는 심의식의 내용과 작용을 매우 심오하게 설명하고 인간의 심성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심(心)은 집기(集起)라는 뜻이 있으며, 집기라는 말은 여러 가지 정신활동(心所作爲)과 몸과 입과 뜻의 행동 등으로 조성되는 업력을 심(citta)에 집합하여 보존했다가 정신과 육체 등의 행동으로 출현케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 등 여러 행동을 업력이라고 하는데, 그 업력은 밖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다음의 결과인 행동과 미래세의 과보 등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 의(意)는 사량(思量)이라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manas라고 하며 이를 음사하여 말나(末那)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나에는 사량의 뜻이 있으며 사량의 내용은 마음속의 인식대상(所緣境)을 집착하면서 인식(量度)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량심(思量心)은 자신의 진여성을 잘못 이해하여 집착하면서 번뇌를 야기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思)은 말과 행동을 발동시킨다는 뜻도 있다.
* 식(識)은 요별(了別)의 뜻으로 해석한다. 즉 범어인 Vijinona(毘若南)을 번역한 말로서 모든 대상(境界)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계를 대상으로 하여 좋다 나쁘다 하는 인식을 하는 것이 요별의 뜻이다.
이상과 같이 세친논사는 심의식을 매우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정신활동의 내용을 종래의 이론보다 훨씬 깊고 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심의식 사상은 대승불교에 이어지면서 유식학에서는 소승적인 사상을 대폭 개혁하고 또 그 사상을 대승적으로 크게 증보하였다.
2) 대승의 심체별설(心體別說)
위에서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의 심체일설을 살펴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심체일설을 혁신하여 심체별설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심의식을 각각 분리시켜 오늘날의 팔식사상으로 조직화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 심의식 사상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경전과 논전을 예를 들면 [해심밀경]의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을 비롯하여 [유가사지론], [현양성교론], [아비달마론] 등 여러 경론을 들 수 있다.
이들 경론에 의하면 심(心)과 의(意)와 식(識) 등은 그 활동과 역할하는 작용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체성도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소승불교에서 대체로 심의식의 체성을 동일하다고 본 것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에서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심체(心體)의 동일성과 심체의 구별성을 말하는 심체일설(心體一說)과 심체별설(心體別說)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심체별설을 설명하는 심의식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심(心)은 곧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말하며 아라야식은 정신과 유체 등으로 조성한 업력과 일체의 종자(種子)를 능히 집취(集聚)하여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은 일체시(一切時)에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인간이 사는 객관세계도 반연하여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 의(意)는 말나식에 해당하며 항상 사량의 작용을 야기한다. 사량이린 말은 무아(無我)의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의 전도심을 나타내는 망심(忘心)의 작용을 항상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의(意)는 염오(染汚)의 번뇌를 야기한다고 해서 염오의(染汚意)라고 별칭한다.
이 말나식은 심층심리에 속하는 심체로서 내면세계의 진실성을 망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며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사종의 번뇌를 항상 야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진리에서 이탈하고 죄와 악을 범하게 된다고 하였다.
* 식(識)은 육식(六識)을 말하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식들이 활동하는 내용은 항상 요별(了別)하는 작용을 나타낸다. 요별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여 안다는 뜻으로 중생들이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성(性)을 보지 못하고 겉모양(相)만을 보면서 이것저것 구별하는 차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식(識)이라고 하면 항상 대상(境界)을 요하며 그 대상을 인식하는 상대적인 작용이 있음을 뜻한다. 이는 경계가 없는 이치(無境界)와 모습이 없는 진리(無相法)을 깨닫지 못한 마음의 인식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심의식 사상은 원시불교에서 시작하고 소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유식학적인 팔식사상의 발달에 기초가 된다. 즉 심(心)은 아라야식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이라 하며, 식(識)은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이라 하는 등 심의식을 각각 팔식(八識)에 배정하여 대승적인 심식사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의 심식사상과 나아가서 불교의 심성사상 발달을 알려면 심의식 사상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한 것은 심의식 사상을 모두 번뇌가 있는 염오의 심성으로 보아왔다는 점이다. 마음에는 번뇌를 동반하는 유루심과 번뇌가 없고 청정무구한 무루심이 있다고 보는 것이 통례인데 위에서 살펴본 심의식은 전자의 유루심에 속한다.
그리하여 심의식 가운데 심은 윤회의 주체이며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아라야식으로 인정하고, 의는 항상 사량심과 번뇌심을 야기하는 말나식으로 인정하며, 식은 우리 인간의 일상 정신생활인 인식과 선악의 행위를 유발하게 하는 육식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심성과 정신생활을 논리화하는 데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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