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모든공덕의 어머니
성공스님(부산관음사 조실)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팔만대장경을 총별(總別)로 나누면 화엄경은 총경(總經)이고
그 이외의 경은 별경(別徑)에 속합니다.
화엄경은 별경의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화엄경만 알면 다른 경전은 다 아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엄경의 초점을 알면 바로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알게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하신 내용의 초점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초점은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네 가지입니다.
믿고, 알고, 행하고, 증득(=깨달음)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을 이루는 네 기둥이요,
그것은 곧 불법의 기둥이 되기도 합니다.
화엄경은 이처럼 신해행증이 주가 되기 때문에 제목부터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의 믿을 신(信),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의 해(解),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의 행(行),
의인증입성덕분(依人證入成德分)의 증(證)이라는 네 가지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믿음을 어떻게 설해놓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믿음은 흙과 같다고 했습니다.
화엄경에는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도의 근원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일체 모든 선근은 믿음으로부터 성장하며
열반 무상의 길도 믿음으로부터 개척되고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
믿음은 바로 흙과 같이 만물의 근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모든 만물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땅덩어리입니다.
그 다음으로 화엄경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면 농사짓는 법을 알아야 하고 밥을 한다면 밥짓는 방법을 알아야 하듯이 일체 모든 법칙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고 바르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 있고 아무리 훌륭한 농업기술을 알았다 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불법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행을 안 하면 헛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불자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실행의 측면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보여집니다. 믿는다는 차원에서 이 절 저 절 다니고 알아야겠다고 불교대학을 열성으로 다니기는 하지만 믿고 아는 만큼 실행하는 것에서는 뒤떨어진다 이 말입니다. 배우려고 열성을 다하는 것만큼 실행을 해야 합니다. 신(信), 해(解), 행(行)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머리카락 하나만큼이라도 더 비중을 둔다면 그게 바로 행(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하면 되겠습니까?
화엄경에는 그 실행방법으로 열 가지 바라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를 더해 열 가지 바라밀을 실천과 수행의 방법으로 설해놓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알았으면 이 열 가지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외우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화엄경에 설해 놓은 열 가지 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을 꿰뚫는 방법입니다.
화엄경은 십바라밀의 실천과 관련 단계적으로 50단계를 설해놓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50층 불법이라는 고층 건물을 짓는데 50계단을 하나 하나 세밀하게 설해놓은 것입니다.
십바라밀을 실천함에 있어 열 가지 바라밀을 믿는 십신(十信)의 단계가 있고,
믿는다는 바탕 위에 그 열 가지 바라밀에 머무는 십주(十住)의 단계가 있으며,
머무는 것으로 본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행하는 십행(十行)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십회향(十廻向)이 있습니다.
회향이라고 하면 어떤 일을 마칠 때 쓰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 불자들이 많지만 회향은 무엇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더 크게 보다 진취적으로 돌려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을 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십회향 다음에는 십지(十地)가 있습니다.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를 합한 50가지에 등각, 묘각, 구경각을 보태면 53가지가 됩니다.
53선지식은 사람을 상징으로 나타내면서 동시에 53가지의 단계을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보시, 지계, 정진 등을 실천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을 원력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의 48원, 석가모니불의 10대 발원 등 스스로 원을 세우고 그것으로 실천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실천의 힘이 바로 역(力)입니다. 다른 이가 강물을 건너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 그 사람을 업고 건널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내 힘이 부족하면 함께 강물에 빠져버리게 되므로 스스로 힘을 길러 두루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智)는 지혜로움을 다시 한번 강조해 놓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실천하는 원동력은 지혜입니다.
이렇게 화엄경에 설해놓은 실행방법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증(證)의 경지가 옵니다. 증은 곡식의 열매를 따는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서 공부를 해서 깨쳐야겠다 하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설사 공부를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한다 하더라도 열 가지 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각에 불과하고 개인주의에 불과합니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독각불입니다.
즉, 이기적인 깨우침에 치우치면 독각이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강하면 보살이요,
그 자리이타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불법은 자신이 깨우쳐야 되고, 깨우친 후에 중생을 이롭게 한 후에 제도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면목을 두고 어떤 스님들은 심즉시불(心卽是不)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또 어떤 스님은 비심비불(非心秘佛)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다른 스님은 무심무불(無心無佛)
즉, ‘마음도 부처도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 어떤 스님의 말이 맞고 어디에 맞춰야 할까요? 모두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이 세 말은 모두 하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심즉시불’은 석가모니불을 나타냅니다.
‘비심비불’은 노사나불에 해당되고
‘무심무불’은 비로자나불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물질의 세계에 해당되는 석가모니불의 차원에서 보면 처처가 부처입니다.
상대성이 있는 세계 즉, 공기의 세계인 노사나불의 차원에서 보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닙니다.
절대성 즉 진공의 상태인 비로자나불의 경지에서 보면 중생도 부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물질에 진공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밥 먹고 똥 누는 게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깨달음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 깨닫기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내가 없으며 생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모두 망념이라 했는데 몸이 어디에 있고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내가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어디에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을 쥐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망념입니다. 긍정이 있으면 벌써 부정이 따라 옵니다. 없다 하면 벌써 꽉 들어찬 것이요, 마음 비웠다 하는 순간 비웠다는 생각이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웠다는 생각 자체도 없어야 진정하게 빈 것입니다.
아니다. 아니다. / 아닌 것도 아니다.
비워라. 비워라. / 비운 것도 비워라.
없애라. 없애라./ 없는 것도 없애라.
바로 이것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설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긍정과 부정, 있음과 없음을 뛰어 넘은 불법의 가르침은 절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두루 통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불법을 믿고 알아 배웠으면 일상생활에서 빈틈 없이 써먹을 수 있는 진정한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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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각.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이야기를 설법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가 무상정등각이라고 하는것인데 그것이 일반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는 지고지난한 깨달음이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성도하심이 일반사람들이 평생에 알지 못하고 이해할수 없는 지고지난한 깨달음이라면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그런데 신경쓰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아무런 도움이 안될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마도 설법하는 스님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울 뿐이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 무상(無上)이라는 말은 위가 없다는 말이니 다른무엇과 비교하여 그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상대적인 말이다. 정등(正等)은 바르지 못한 다른 등급의 당대적인 무엇이 또 있다는 말이다. 왼쪽에 있는 백장미는 선명하고 오른쪽의 백장미는 선명하지 못한데 대비되는 다른 꽃이 옆에 있으므로 확실하게 차이가 나고 분별할수가 있다.
부처님 재세당시에 인도에 사상적 조류가 백화제방하는 시절이었다는데 일반적으로 그 사상조류를 육사외도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비되는 대표적인 사상이 흔히 말하는 있다 없다 하는 유무상단(有無常斷)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다는 말이냐 하면 절대불변하는 참나라는 본질이 있다는 주장으로 요즈음으로 말하면 기독교의 참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영원주의라고도 하는데 이를 상견(常見)이라고 한다.
무엇이 없다는 말이냐 하면 죽으면 만사휴이라서 영혼도 없고 모든것이 끝장이기 때문에 살아서 공덕도 소용없고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과보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는데 이를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이 단견(斷見)을 세상사람들은 보통 단견(短見)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중도(中道)라는 말이 세상에서 변질된것만큼이나 한참 빗나간 이야기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상정등각이라고 하고 중도라고도 하는데 중도라는 말은 절대로 하얀장미도 아니고 빨간 장미도 아니고 분홍장미라고 주장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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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각(妙覺)
①부처님의 불가사의 절묘한 무상의 깨달음. 깨달음 그 자체.
②보살52위(位), 42지(地)의 하나. 보살수행의 최후의 위(位)로
번뇌를 단절하여 지혜가 원만하게 갖추어진 위(位)를 말함.
등각(等覺)상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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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이르기를 '등각,묘각'이라하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이 묘각입니까?
"색(色)에 즉하고 공(空)에 즉함이 등각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한(二性空) 까닭에 묘각이라 하며,또한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없음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두 이름을 세운 것으로서, 본체는 하나요,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내지 일체법이 모두 그러하니라."
아놀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4855028/1596726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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