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의 해설

수선님 2019. 11. 3. 11:40

 

ㅡㅡㅡㅡ선시박사 김형중 법사ㅡㅡㅡ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반야심경》은 팔만대장경 가운데서 260자로 된 가장 짧은 경이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서 설법했는데 《반야경》을 무려 21년이나 설했다. 600부 《반야경》은 대장경 가운데 최고로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고 밑바탕이 된다.

이것을 권으로 축약한 경전이 《금강경》이고, 또 이것을 260자로 요약한 경전이 《반야심경》이다. 또 이것을 글자로 요약하면 (空) 사상이다.

공(空)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자신을 형성하는데 독자적인 고유한 성질, 즉 실체가 없이 인연화합에 의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존재의 본질(본체)의 세계를 밝힌 교리(이론)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 고유한 실체가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도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상하게 변화하고 결국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세상의 근본으로 물질을 파악하고 있다. 공의 원리에 따른 ,비움을 강조. 나와 관련된 물질만 관심.

유학은 이치와 현상으로 , 삶에 관련된 물질에 대한 관심.

기독교는 신으로.

맑스주의는 물질로 파악하고, 변증법의 원리에 따른 , 행복을 추구, 나와 관련 유무와 상관 없는 물질.)

형상이 있는 모든 사물은 결국 허망하게 없어지고 말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연연해 봐야 소용이 없다. 우리의 육신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흙 · 물 · 불 · 바람으로 흩어지고 만다. 아무리 육신을 사랑하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집착해 봐야 허무하게 소멸하고 만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러한 무상과 공의 도리를 깨닫고 소유(有, 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인생은 꿈과 같고, 허공에 뜬 구름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이러한 무상한 도리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고통은 애착과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 無明)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고 무지를 타파하면 고통도 사라진다.

《반야심경》에서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몸과 정신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진 진리와 사상까지도 공하여 실체가 없다. 망상과 집착으로 만들어 낸 허상이다. 그래서 객진번뇌라고 한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번뇌가 본래 실체가 없고, 잠시 내 마음 속에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고통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통도 고통을 없애는 진리인 사성제, 십이연기법도 모두 공하다. 이러한 공의 도리를 설한 것이다. 공의 이치를 터득하여 깨달은 지혜를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다.

《금강경》에서 “형상이 있는 모습을 보되 그것이 실체가 없는 형상(空)인 것을 보면 여래를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다.
형상을 떠나(離相) 공의 이치를 보면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안심을 얻을 수 있다.

선가의 가르침도 선정을 통해서 공의 이치를 깨달아 유상(있음, 형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放下) 안심을 얻고 해탈을 한다고 한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어 모든 중생이 함께 정토를 이루저 잘 사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를 금강석과 같이 단단한 반야 지혜의 칼로 끊어 없애는 길을 설하고 있다. 《반야심경》이 한국 ·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모든 불교 법회의식에서 독송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반야심경》을 수지독송하고 사경하고 전파하는 공덕은 부처님을 예배 공양하는 일보다 백천 배 크다고 가르쳤다. (2009년 3월 2일)

싯다르타가 6년 고행으로 얻은 지혜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었다.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삶이 ‘무상과 무아의 바다’에 포위되어 있는 ‘고해(苦海)임을 먼저 인식하야 한다. 이것이 3법인(三法印)에서 말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공의 이치를 깨달아서 진리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면 생사는 본래 없다. 오고 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본래의 마음자리인 불성(자성)의 세계는 중도(中道)의 세계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거불래(不去不來)이고,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세계이다. 따라서 삶도 죽음도 없고, 오고 감이 없는 공(空)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인연 따라 하늘의 구름처럼 온 곳 없이 나타났다가, 가는 곳이 없이 사라질 뿐이다.

생사가 없고 오고 감이 없는 무생(無生)이 실상의 모습이고, 공의 모습이고, 선의 오도(悟道)의 경지이다. 이 도리를 깨달아야 생사의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세계가 반야 공관(空觀)의 세계이며, 이것을 깨달은 것을 반야 지혜 또는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아놀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4855028/1596770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