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금강경 사가해

수선님 2019. 11. 3. 12:50

금강경 사가해

‘함허(涵虛)스님 일물서(一物序)’ 강설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 <금강경 사가해> 강설 중

2011. 04. 12~20)

무비(無比)스님

전법도량 염화실

http://cafe.daum.net/yumhwasil/

<금강경 사가해 ‘함허스님 일물서(一物序)’ 강설>

차례

금강경 사가해 제1강 1부 (금강경 해설) ……………………………… 3

금강경 사가해 제1강 2부 (一物序: 有一物於此하니~) …………… 10

금강경 사가해 제1강 3부 (絶名相호대~) …………………………… 28

금강경 사가해 제1강 4부 (內含衆妙하고~) ………………………… 36

금강경 사가해 제2강 1부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 54

금강경 사가해 제2강 2부 (我迦文이의 說誼-奇哉奇哉라~) ………… 70

금강경 사가해 제2강 3부 (言言利刃當陽이요~) ……………………… 90

금강경 사가해 제2강 4부 (何止重輝佛日이리오~) ……………………111

금강경 사가해 제3강 1부 (又於經疏~) ……………………………… 133

금강경 사가해 제3강 2부 (則文義之舛錯者~) ………………………… 148

‘함허(涵虛)스님 일물서(一物序)’ ………………………………………… 172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序說 ……………………………………………… 214

● 동화사(桐華寺) 한문불전승가대학원(漢文佛典僧伽大學院) <금강경 사가해(金剛經 四家解)> 강설 중 가장 앞 부분에 설하신 함허(涵虛)스님의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序(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서)[“일물서(一物序) 또는 함허서(涵虛序)]” 부분(2011. 04. 12 ~ 20)만 정리하였음.

<금강경 사가해> “일물서(一物序)” 강설의 녹취 원문은 인터넷 카페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에 공개되어 있는 釋대원성 님의 녹취임.

● 네모 상자 안에 한문(漢文) 원문 다음에 있는 한글 번역문 중 윗 부분(신명조 글자체)은 인터넷 카페 염화실에 있는 “금강경오가해”와 인터넷 카페 천불동의 “금강경오가해_무비스님” 파일에서 옮긴 것이고, 아랫 부분(궁서 글자체)은 <역주 금강경삼가해 언해>에서 일물서(一物序) 번역 부분만 옮겼음.

금강경 사가해 제1강 1부 (2011. 04. 12) [金剛經 五家解]

釋대원성 | 조회 693 |추천 1 |2011.06.28. 14:58

http://cafe.daum.net/yumhwasil/HsLO/1

동화사(桐華寺) 한문불전승가대학원(漢文佛典僧伽大學院)

금강경(金剛經) 사가해(四家解)

무비스님:

지난 화요일(2011.4.5) 개원을 하고 오늘 첫 개강일입니다.

예상보다 많은 스님들이 오셨고, 우리 일반 불자님들도 이 어려운 한문 불전을 공부하시겠다고 이렇게 모이신, 숫자로서는 참 많이 모였습니다. 처음이다 보니까 진행하는 문제라든지ㆍ강의의 분위기라든지ㆍ스님들도 모처럼 발심해서 이렇게 공부를 시작하게 돼서 평소에 책을 많이 접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좀 얼떨떨 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 하고, 차츰차츰 공부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동안 서툴고ㆍ분위기가 짜여지지 않던 것들도 잘 짜여질 것입니다. 몇 번 하면 곧 그렇게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

그 동안 이렇게 열린 한문불전(漢文佛典) 교육기관이 여기저기 많이 있습니다. 특히 대표적인 것이 서울에 있습니다만, 그 교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것이 교육원 지침도 있습니다. 교육원 지침도 있지만, 교육원 지침을 참고로 해서 각계 승가대학원(僧伽大學院)에서 재량으로 앞뒤를 좀 바꿀 수도 있고, 또 加減(가감)도 할 수가 있도록 되어 있어서... 전번 이 일을 책임지고 주선을 했던 스님이 강의를 저부터 해달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의논을 하다가 금강경 오가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렇게 요청이 왔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의논한 끝에 이 책 제목이 <金剛經四家解(금강경 사가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앞 표지에 보면, <금강경>에 대한 네 분의 해석인데요. 六祖大鑒禪師 口訣(육조대감선사 구결)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했고, 冶父道川禪師 頌(야보도천선사 송). 게송으로써 해석을 하고, 豫章宗鏡禪師 提綱(예장종경선사 제강)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하고, 涵虛堂得通 說誼(함허당득통 설의), 해석의 그 형식이 좀 달라서 그렇지 이것 다 해석입니다.

‘오가해’에도 보면 ‘함허당득통설의(涵虛得通說誼)’가 들어 있는데, 함허득통선사(涵虛得通禪師)가 스스로 ‘설의(說誼)’라고 하는 이름으로 <금강경> 원문도 당신이 해석을 하고, 六祖스님의 해석에도 또 해석을 붙이고, 야보도천(冶父道川) 스님 게송에도 또 해석을 붙이고, 각각 선사들의 금강경 해석문에 함허(涵虛)스님이 그것을 또 재차 해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 스스로 자기 이름을 넣어서 6가해라고 하지를 않고, 5가해라고 해서 자신은 그냥 그 다섯 분의 내용 내지 금강경까지 해석한 것을 설의(說誼)라고 이렇게 붙이고 말았는데요.

사실은 그 외에 두 분이 더 있어서 그 분들까지 해서 5가해지요. 함허스님은 빼버리고요. 그런데 그중에 두 분 규봉 종밀 선사하고, 부대사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그 두 분 것은 약간 성격이 다르다고 해서, 세 분 것하고 함허스님 것을 합해서, 함허스님을 좀 격상 시켜서 1가로 넣었습니다. 1가로 넣어서 4가해라고 하고, 과거 조선시대에 출판된 책을 보면 5가해가 있고, 3가해가 있고 그렇습니다. 여기서 3가해라고 할 때는 함허스님을 빼버리면 3가해인데, 함허스님의 글이 아주 뛰어나거든요. 그 누구의 해석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에, 이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일가라고 넣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후배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일가로 넣어드려야 옳다.” 이런 여론이 쭉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책을 편찬하면서 과감하게 “사가해(四家解)다.” 이렇게 해서 涵虛得通禪師를 일가로 넣어드렸습니다.

‘사가해(四家解)’라는 이름은 처음 나온 이름인데요. 내용이 그렇게 됐습니다. 옛날 ‘오가해(五家解)’때의 두 분이 빠지고, 그 대신에 함허스님을 일가(一家)로 승격시켜서 四家解가 됐다. 책 제목을 해석하면 그런 뜻입니다.

<금강경>은 우리 所依經典(소의경전)이기도 하고요. 또 보통 일반 불자들도 익히 아는 경전입니다. 그리고 또 이 경전을 외운다든지 사경을 한다든지 하는 일반불자들이 아주 많지요. 금강경의 원문에 대해서는 해석본이 또 그렇게 많습니다. 무수히 많아서 금강경 원문은, 여기 계신 분들도, 스님들은 거의 주지사시고 일선 포교 현장에서 금강경 강의도 하시고 하는 분들이라서 원문은 익히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함도 있지만, 말하자면 전통 강원 교재를 가지고, 漢文佛典교육이니까, 그래서 漢文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또 가능하면 漢文의 문리까지 얻어서 漢文으로 된 경전이나 어록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사실은 그런 취지에서, 漢文佛典의 교육기관이 생긴 겁니다.

아마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그런 목적으로 오셨을 겁니다. 물론 경전에 대한 공부ㆍ어록에 대한 공부도 좋지만, 또 여기서 漢文으로 된 경전이나 어록을 읽는 방법도 배워서 스스로도 해석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여기서 공부를 하면 그런 능력을 반드시 배양해서, 항상 남에게 배울 것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해 가면서 경전이나 어록을 강의 할 수 있도록 그런 실력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漢文佛典교육기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냥 여기는 신도님들의 경전 법회가 아니고, 또 일반 법회는 더욱 아니고, 그야말로 漢文佛典을 가지고 학교에서 공부하듯이, 강원에서 공부하듯이 그렇게 공부하는 장소입니다. 그러한 마음자세를 충분히 준비 하셔야 할 줄 압니다.

복습ㆍ예습 이런 것들도 철저히 하시고ㆍ필기도 철저히 하시고ㆍ여러 가지 참고서도 스스로 공부에 살펴봐 가면서 노트도 하시고, 사실은 가능하면 숙제도 좀 내고 싶어요. 그래서 숙제도 제대로 해오게 하고, 이러한 분위기가 돼야 ‘이 漢文佛典교육기관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신 분들도 사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고 오셨을 겁니다.

‘한문불전승가대학원(漢文佛典僧伽大學院)’이라고 이름은 근사하게 붙여놓고, 이것 뭐 법회냐? 공부하는 곳이냐? 분별이 안 된다면, 이것이 좀 곤란하지요. 기대에 어긋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잔뜩 기대하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주 쉽게 ‘거 뭐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일, 그저 물에 물탄 듯이, 죽에 죽탄 듯이 하는 것. 뻔 한 것 아니냐?’ 고 이렇게 쉽게 생각하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공부는 자기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여기서 강의 하는 사람에게는 한 1할 정도 돈을 받는다면, 나머지 9할은 본인의 몫입니다. 그것 아셔야 됩니다. 본인의 마음의 준비ㆍ예습ㆍ복습 이런 것들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서 공부의 효과가 크리라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경전의 분류]를 먼저 볼까요? 경전에 접근 하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전에 접근 하는 길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 방식으로 접근 하는 길이 있고, 또 한 가지 길은 모든 학문이 서구화 되면서 불교경전도 서양학문 형식으로, 연구하고 분석해서 접근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금강경을 두고 생각한다면, 금강경의 설명이 곧 되겠지만, 부처님이 언제쯤 무슨 경전을 설하셨고ㆍ언제쯤 무슨 경전을 설하셨고ㆍ언제쯤 무슨 경전을 설하셨고, 이것을 부처님의 일생, 그것도 49년입니다. 45년이 아니고...

49년 설법에다가 배대를 합니다. 딱 딱 분할해가지고 어느 시기에, 최소한도 몇 살 때, 성도하시고 몇 년 됐을 때 이 경전을 설했다. 이렇게 이해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통 방법입니다.

현대적인 접근방법은 경전 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합니다. 그것은 현대학문이 ‘이 경전은 언제쯤 성립이 됐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한 300년까지의 불교를 원시불교ㆍ또는 초기불교ㆍ또는 근본불교,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그 근본불교에 해당되는 내용은 ‘전부 그 때에 경전이 결집됐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부파불교 시대에 결집된 경전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근본불교시대가 끝나고, 대중부ㆍ상좌부, 크게 두 개 파로 나뉘고, 대중부에서도 몇 가지로 나눠지고ㆍ상좌부에서도 몇 가지로 나눠지고, 이렇게 해서 20개 부파가 나누어진다. 불교의 어떤 발달사적인 과정에서 경전도 같이 봅니다. 경전도 불교의 변천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른 경전은 그만 두고라도 금강경은 그럼 언제쯤이라고 보느냐? 세존 열반 후 500년경에 ‘금강경이 성립이 됐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학자들이 연구해본 결과, ‘그 때 편집됐다.’ 아주 겸손하게 표현하면 “결집이 됐다.” 이렇게 나가고, 그것을 조금 과감하게 표현하면 “편집이 됐다.” 결집ㆍ편집. 의미는 비슷하지만 어감이 많이 달라요. 우리 신앙인으로서는 “결집이 됐다.” 이렇게 해야지, “편집이 됐다.” 하면 이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또 정말 아주 과감한ㆍ놀라운 표현으로는 “그 때 만들어졌다ㆍ제작이 됐다. 500년경에 금강경이 제작 됐다.” 이렇게 까지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런 관점에서 경전을 볼 때는 “경전 작가” 라고 하는 표현까지도 있습니다. “경전 작가”

특히 대승경전, 금강경 계통의 경전이 600부 반야라고 해서 얼마나 많습니까? 이 금강경 계통의 경전이 600부 반야입니다. 법화경 계통의 경전ㆍ화엄경 계통의 경전. 이런 것들이 대승경전의 주류인데, 이런 경전은 부처님열반 500년경부터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그 다음에 한 1000년까지, 심한 경우는 기원이후까지, 부처님이 열반1000년까지 경전이 끊임없이 “편찬이 됐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한 연구가 있고, 또 연구에는 충분한 이유를 발견을 해서 경전발달사에 어떤 과정을 말하자면 서술한 책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런 길이 있는데요. 그런 것은 다른 기회에, 또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이고, 또 이 교육체계가 그렇게 공부하도록 잡혀있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면 물론 전통적인 어떤 생각과 좀 현대적인 안목으로 넘나들긴 하겠습니다만, 여기는 전통적으로, 말하자면 한 2000여년 이상 경전을 보아온 그 안목입니다. 그 안목으로 경전을 볼 때, 이 8만대장경을 天台五時敎(천태오시교)라고 해서, 경전을 분류할 때, 天台스님께서 경학을 가장 잘 보았다고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경학연구에 역사적으로 아주 뛰어난 분이지요. 그 분이 다섯 단계의 내용으로 8만대장경을 분류를 했어요. 그것을 五時敎라고합니다. 天台스님이 했다고 해서 천태오시교(天台五時敎).

그것은 근거가 있습니다. <법화경>의 窮子譬喩(궁자비유)에 근거 하여, 화엄부 경전ㆍ아함부 경전ㆍ방등부 경전ㆍ반야부 경전ㆍ법화부 경전. 이렇게 다섯 시기로 보는데, 법화경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신해품에 수보리ㆍ가전연ㆍ마하가섭ㆍ목건련, 이런 분들이 자신이 불교에 몸담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행한 그 수행경험담을 하나의 비유로써 쭉~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은 내용도 아주 풍부하고ㆍ아기자기한 비유가 참 많습니다. 그것이 소위 궁자비유(窮子譬喩)인데, 이 궁자비유가 성경에도 나와 있다고 이야기들 하지요.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父子가 살았는데 아들이 어려서부터, 어느 날 집을 나가서 성인이 될 때까지 혼자 돌아다녔어요. 아무 의지처가 없으니까 그저 밥 얻어먹고ㆍ좀 힘이 있을 때는 품팔이 하고, 그것도 아주 막노동으로 노숙자 생활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품 팔 곳을 찾다가 어느 거부장자 집 앞에서 기웃기웃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저~기, 대청마루에 아주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리고 시중들도 여럿이 둘러 서있는데 아주 으리으리한 모습을 한 그 집주인이 앉아있습니다. 그 집주인이 바라보고 있는데, 이 거지인 아들은 아버지인 줄 모르는데 아버지는, 어려서 도망간 아들이지만 멀리서 보고 저것이 내 아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수십 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저~ 문 앞에 와있으니까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막 뛰어나가서 아들을 반기려고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그만 기절을 해버립니다. 일꾼들을 시켜서 기절한 아들을 깨우고, 그러다가 방법을 달리... 어떻게ㆍ어떻게 일꾼들을 시켜서 다른 동네의 아들을 그 집에 와서 똥을 퍼 나르고ㆍ마당 청소를 하고ㆍ여기 저기 구석구석 청소를 하는 일에서부터 차츰차츰 그 집안의, 아주 큰 어마어마한 궁궐 같은 집이니까요. 그 집안을 자유롭게 출입 하다가 나중에는 그 집안의 재산 상황을 다 알게 되고요. 그 다음에는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사람은 본래 일꾼이 아니고, 내 아들이다.” 라고 공포하게 되지요. 그래서 재산을 전부 물려주게 되는 “그런 경우와 똑 같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 모든 불교인들이 불교수행을 함에 있어서, ‘거의 이와 같은 경로를 우리가 걸어가고 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정말 진짜 불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놀랍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려고 하거나ㆍ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아이고 그것 내분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은 조금 불교에 눈을 뜨면, 불교 안에서 뭔가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기도를 하든지ㆍ뭘 하든지 간에 하여튼 무슨 이유에서든지, 이유를 챙겨서 세속적인 이익을 바라보고, 말하자면 불교에 대해서 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지요. 승속을 막론하고 많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우리들의 불교에 대한 어떤 태도의 일종인데요.심지어 가섭ㆍ수보리ㆍ목건련 같은 이런 이들도 처음에는 그랬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두고두고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하기로 하고요.

아무튼 그 이야기에 근거해서 화엄부 경전을 보면,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고 6년 고행 끝에 일주일 간 명상에 들었다가, 마지막에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성도를 하셨는데, 성도하시고 21일 동안, 도를 이룬 그 어떤 정신세계. 법희선열ㆍ또는 환희심ㆍ법락.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을 때의 정신 상태를 그린 것이 화엄경입니다. 그것이 21일간입니다. 그래서

‘최초 화엄 삼칠일(最初華嚴三七日)’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지인 아들이 대 부호인 아버지를 보고 경악해버린 것과 같은 시기다. 화엄경에 보면 사리불ㆍ목건련 같은, 부처님의 오른팔ㆍ왼 팔과 같은 그런 상수제자도 그야말로 “귀머거리와 같았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화엄경은 귀머거리와 같았다.” 그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배대를 합니다.

<화엄경> 사실은, 아까 “경전에 접근 하는 길이 두 가지 길이 있다.” 고 했는데, 경전 발달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화엄경 역시 500년ㆍ600년경에 편집 된 것이 학자들의 연구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 예를 들어서 이 이야기대로라면 성도하고 삼칠일후에, 말하자면 삼칠일동안 설하신 것이라면, 수보리ㆍ목건련등, 제자가 한 사람도 없을 때 아닙니까? 그런데 화엄경에는 다 나옵니다. 제자들이 다 나와요. 그것도 사실, 우리가 어려서 강원에 있을 때 그런 것이 상당히 궁금했어요ㆍ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아니, 성도하고 삼칠일동안 설하신 경전 속에, 제자가 한 사람도 없을 때 어떻게 거기에 수보리ㆍ목건련ㆍ사리불 이런 사람들이 거기 등장 하는가?’ 그랬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별것도 아니었었습니다. 사실 알고 보니까...

전통적으로는, 화엄경을 설하니까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저~~ 유치원생의 수준에 맞추어서 설한 것이 아함부 경전이다. 그래요. 대 부호인 아버지 집에서 똥을 퍼서 나르고 품값을 받는 식이다. 그랬습니다. 그 거지가 자기 집에서, 그 재산이 전부 자기 것인데, 외동아들이니까요. 아버지는 늙었고, 결국 자기에게 다 돌아올 것인데 거기에서 가장 험한 일을 하면서 거기의 똥을 퍼서 날라서 겨우 하루의 막노동 품값을 받아서 살아가는 그 시기였다고 하는 것. 이것이 전통 경전 해석상으로 보면 아함부 경전이 전부 그 수준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전통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은 아함경을 별로 크게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합니다.

요즘 남방 불교가 많이 들어와서 아함부 경전이 많이 소개가 돼서, 그 안에도 삶의 어떤 교훈들이 좋은 것이 많이 들어 있지요.

방등부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여기저기를 출입할 수 있는 시기. 이것도 웃기는 이야기지요. 자기 집에 출입 마음대로 하는 것이 뭐 그리 장한 일입니까? 그런데 말하자면 똥을 퍼서 나르고 품값을 받는 시기에서 조금 한 단계 높아진 경우를 “방등부 경전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공부하려는 <금강경>을 위시한 반야부 경전은 아버지의 재산과 보물의 상황을 알게 된 시기다. 그랬습니다. 알게 된 시기다. 그래서 사실은 이 반야부 경전이, 특히 금강경이 우리의 소의경전(所依經典) 이기도 하고, 아주 간결하고 뜻이 단순하기 때문에 자고로 선사들이 아주 좋아하는 경전이긴 합니다. 선불교하고 상당히 어떤 분위기가 비슷해서 상당히 좋아는 하지만, 그저 재산상황을 알 정도지,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시기는 아닙니다.

<법화부> 경전이 “아버지의 재산과 가업까지 물려받는 시기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천태스님은 특히 법화경을 위주로 모든 경전을 말하자면 정리를 합니다. 모든 경전을 정리를 하는데, 법화경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법화경이 제일 위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은 사실은 부처님교설의 완성입니다. 부처님교설의 다른 모든 경전을 다 섭렵해 볼 때, 그야말로 완성 단계에 이른 것이 말하자면 “법화부 경전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공부하려는 “반야부 경전, <금강경>은 미완성이겠네.” 사실 경전 전체를 두고 볼 때, 미완성입니다. <법화경>보다는 좀 낮은 차원입니다.

금강경 사가해 제1강 2부(有一物於此하니~)|(2011. 04. 12)

釋대원성 | 조회 577 |추천 1 |2011.06.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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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것은 전통적으로 강원에서는 으레 외우는데, 여기서도 외우셔야 돼요. 특히 한 30번쯤 써서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 써서 외워야 어디 가서든지 板書(판서)를 할 수 있으니까요. 쓰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외우면 별 쓸모가 없습니다. 1강-1의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窮子驚愕華嚴時(궁자경악화엄시). 窮子가 驚愕할 때가 華嚴時다.

除糞定價阿含時(제분정가아함시)다. 똥을 퍼 나르고 값을 받는 때가 아함경 설할 때다.

出入自在方等時(출입자재방등시)다. 그 집에 출입이 자유로울 때가 方等時다.

令知寶物般若時(영지보물반야시)다. 보물을 알도록 재산상황, 어디에 산이 있고ㆍ어디에 무슨 회사가 있고, 이런 것을 다 알 수 있는 때가 반야부다.

傳付家業法華時(전부가업법화시). 그랬지요. 家業을 전해준 시기. 재산을 온통 다 아들에게서, 그 거지가 어느 날 이렇게,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이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입니까? <법화경>을 처음 설할 때라 하더라도 부처님 49년 설법에 비춰본다면, 41ㆍ2년경부터 비로소 부처님의 전 재산을 물려받는 때가 됐다. 이렇게 된 겁니다.

부처님 연세가 얼마나 되느냐? 71세 이후입니다. 72세부터 처음 비로소 부처님이, 당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법화경>을 통해서 다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요. 또 한 30번 쓰시면서 반드시 외울 것이 있습니다.

阿含十二ㆍ方等八. 햇수로는 아함경을 12년, 방등부 경전을 8년. 그러면 20년 되지요?

二十一載談般若(21재담반야). 載자가 햇수라는 '재' 자입니다. 年이라는 것과 같아요. 21년간 반야경을 말씀하셨다.

終談法華又八年(종담법화우8년).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말씀하셨는데 또 8년이라 그랬어요. 方等八이니까 여기서 두 번째 八이라서 又八年 그렇게 말합니다.

最初華嚴三七日(최초화엄삼칠일). 처음 화엄경을 3ㆍ7일 설했다.

이것이 꼭 이 순대로 설했느냐? 안 설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 결집이 됐든 간에, 법화부 경전은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최후로 설하신 경전. 설하신 그 입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이 됐습니다. 이것 잘 들어야 됩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00년ㆍ600년경에 결집이 됐지만, 화엄경을 결집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도를 깨닫고 3ㆍ7일 동안, 당신의 깨달음이 정말 진짠가? 가짠가?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해 보고, 한편 들떠서 法喜禪悅(법희선열)에 아주 도취해 있기도 하는 그 3ㆍ7일 동안의 부처님의 정신세계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이 된 겁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결집한 것이 말하자면 “화엄경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럼 아함부 경전은 아주 초기, 아주 초보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한 것으로...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아함부 경전이 나중에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많습니다.

논서(論書)들이, 倶舎論(구사론)같은 것이 얼마나 뒤에 만들어졌습니까?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다 그 어떤 내용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설립했거든요.

대강, 경전의 분류와 반야부 경전인 <금강경>의 위치를 전체 경전에서 굽어볼 수가 있었습니다. 華嚴時(화엄시)ㆍ鹿苑時(녹원시). 녹원시라고 하는 것은 아함시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 성도하시고 5비구를 만나서 처음 녹야원에서 설해진 것이 아함부 경전이고, 그리고 또 그것이 녹원시ㆍ아함시, 이렇게 두 가지로 부르지요. 그 다음에 방등시ㆍ반야시ㆍ법화열반시. 열반경도 마지막 열반할 무렵에 설하신 것으로 그려졌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 된 것이 열반경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꼭 열반하는 그 순간을 그대로 그려 놨다. 그렇습니다. 그대로 그려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 날 제가 열반경을 써도 그 열반하신 광경에 초점을 맞추어서 경전을 결집하게 되는, 그것은 말하자면 “열반할 시기에 설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문제가 이해가 안 되면 항상 궁금합니다.

늘 궁금하고 의혹투성이가 되는 것이지요. ‘아 이것 참, 어째서 열반경이 40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열반 그 짧은 시간에 그 방대한 경전을 부처님이 돌아가시면서 힘도 좋았나? 그 40권이나 되는 경전을 설했단 말인가?’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어릴 때는 그것이 참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3ㆍ7일 동안 그 많은 80권 <화엄경>, 아무리 글 잘 읽는 사람도 3ㆍ7일 동안 못 읽어요. 잠 안자고 읽어도 다 못 읽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어떻게 3ㆍ7일 동안 80권 화엄경을 다 설했나?’ 사실은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 몇 백 년 뒤에 설했지만 그 3ㆍ7일 동안 부처님이 깨달음의 법열에 도취해 있을 때, 부처님의 그 정신세계를 그려놓은 그것이 말하자면 “화엄경이다.” 누가 지금 부처님의 깨달음의 어떤 정신세계를 그린다고 할 때, 그것은 “3ㆍ7일 안에 설하신 것이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전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그 내용을 다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전부, 말하자면 “아함부 경전은 성도하시고 처음 12년 동안 설했다.” 라고 이렇게 짜 맞추는 겁니다. 방등부 경전은 그 다음 차원이니까 “그 다음에 8년간 설하신 것이다.” 라고 이렇게 단계를 높여서 짜 맞추는 것을 우리는 “배대(配對)” 라는 말로 쓰지요. 우리 강원에서는 전통적으로 “배대한다.” 그래요.

그 다음에 반야부 경전은 양이 워낙 많다보니까, 그래서 21년간... 전체 대장경의 양으로 보면 그 정도 차지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했다.” 라고 이렇게 말하자면 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를 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 정리가 기가 막힌 정리입니다. 그래서 근래에 [신수단경] 이라든지 [고려단경] 이라든지 이런 것들 뒤에 목차를 만들 때도 거의 여기에 맞추어서 했습니다. 전통의 이 분류법에 맞추어서 했어요. 뒤에 학자들이 경전 발달사적으로 맞추어서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大乘非佛說(대승비불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5ㆍ60년 전에 어떤 일본 학자가 그 이야기를 해가지고 아주 왈가왈부 했는데, 그것도 사실은 아주 철이 덜든 소리지요. 부처님이라고 하는 의미가 석가세존이냐? 아니면 깨달은 분이냐? 이 문제지, 결국은 깨달은 사람이 부처라는 뜻이니까, 깨달은 사람이 했으면 다 부처님이 하신 겁니다. 3000년 뒤에 누가 경전을 편찬을 해도, 깨달은 사람이 경전을 편찬했다면 역시 석가모니부처님이 한 것으로 이름을 붙여요. 그리고 아난존자가 듣고 결집한 것으로 합니다. 그것이 경전편찬의 절대 원칙인데, 그 원칙을 모르니까 아~, 그거 석가모니 설한 것이 아니라고ㆍ大乘非佛說이라고ㆍ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고ㆍ아니라고ㆍ가짜라고, 이런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경전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 못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다음에 질문을 통해서 마저 이해하도록 그렇게 하고요.

<금강경 사가해> 교재를 급히 만들다 보니까 교재 편집이 조금 거칠게 됐습니다.

‘제목 차례’에 쭉~ 여러 가지가 있고, 내려와서 중간에 금강반약파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상권이 있고, 넘어가서 하권이 있고, 거기에 또 서분(序分)이 있고, 정종분(正宗分)이 있고, 유통분(流通分)이 있고 사이사이에 그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서른 두 단락으로 나눈 32分 이름이 쭉~ 있고, 오른쪽에 보면 ‘斷求佛行施住相疑(단구불행시주상의)’, 이런 식으로 여덟 자씩 제목을 붙인 것이, 이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금강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의해서 붙인 제목인데, 참고로 달아놨습니다.

그 다음에 ‘金剛般若波羅蜜經 科分(금강반야바라밀경 과분)’이라고 해서, 序分(서분)은 여기까지, 正宗分(정종분)은 여기까지, 流通分(유통분)은 여기까지 해서 流通分 본문을 3페이지에 그려놨습니다.

그 다음에 ‘금강경 32분 과목’을 간단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러두기’에, 글자가 옛날 목판본은 혼용이 많아요. 太(태)자하고 大(대)자하고 혼용하고, 자취 迹(적)자도 책받침 있는 것하고 발 族(족) 있는 것하고 혼용하기도 하고요. 또 “집착” 할 때 붙을 着(착)자하고, “저술” 할 때 著(저)자하고, 그것도 막 혼용 합니다. 글자 비슷하게 생겼지요? 着자를 著자로도 읽고, 著자를 着자로도 읽고요. 목판본에는 그런 것들이... 옛날에는 전부 물리로... 여기서는 着자가 됐어도 著자로 봐야하고, 著자로 됐어도 着자로 봐야하면, 으레 그냥 그렇게 넘어 갔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여기서 간단하게 해놨습니다.

그 다음에 金剛經 四句偈(사구게). 금강경은 사실은 대개 네 가지 四句偈를 들고, 혹은 세 가지 四句偈를 들기도 하고 그러는데, 여기는 친절하게 참고하라고 몇 가지를 더 ‘이렇게도 四句偈를 볼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참고로 해놨습니다. 강의 하면서 나중에... 넘어 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들어가면 알겠지만, 원본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오가해>를 함허스님께서 만나서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단 말인가? 한 부처님과 다섯 조사스님들의 심장이 여기에 다 토로가 됐다.’ 이 한 권의 책속에 ‘一佛五祖之心(일불오조지심), 한 부처님과 다섯 조사의 마음이 여기에 다 담겨있구나!’ 이렇게 감동을 하시면서 거기에 대한 당신의 해설을 쓰기 시작 했습니다. 五家解를 처음 만나가지고... 누가 五家解를 편찬 했는지 그 당시 함허스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단 말인가?’ 하고 감동을 하면서 그것의 해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야말로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序說(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서설)”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서문(序文)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서문은 우리가 공부할 시간에 비춰보면, 이 四家解, 이것도 상당히 양이 많아서 얼마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지만, 꼭 이 ‘오가해서설(五家解序說)’, 이것은 함허(涵虛)스님의 서문(序文)인데, 이것은 꼭 우리가 하나ㆍ하나 공부하고 넘어가야할 것입니다.

서문(序文) 중에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해서 이것을 “一物序” 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불교같이 좋은 글 많은 종교나 철학이 없지요. 그래서 그 중에서도 서문을 세 가지를 꼽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 둬야할 서문(序文)이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서문이 ‘往復序(왕복서)’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청량스님이 <화엄경>을 해설을 하시면서 당신이 쓰신 서문입니다.

‘往復이 無際(왕복무제)나 動靜은 一源(동정일원)이라’고 해서, 그 많고 많은 수십 만 종의 불교 글 중에서 첫 손가락 꼽는, 아주 짧지만 첫 손가락 꼽을 정도로 아주 뜻이 깊고ㆍ글이 아름답고 해서 往復序를 꼽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고 하는 함허스님의 <금강경> ‘일물서(一物序)’.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해서 ‘一物序’라고 별명이 그래요. 이 一物序도 往復序 못지않은 서문입니다. 이것 아주 대단한 글입니다.

그 다음에 ‘馬防序(마방서)’. 이것은 <임제록>. 임제록을 편찬해서 당시 아주 유명한 문장가이면서 많은 벼슬을 살았고, 사회의 지명도가 아주 높았던 불자. 마방(馬防)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임제록 서문이 또 유명합니다.

서문(序文)을 치면 이 세 가지 서문을 알아줍니다. 옛날에 선방에 방부 들일 때, 가서 “방부 들이러 왔습니다.” 하지 않고, 임제록 馬防序를 선방 앞에 가서 걸망을 턱 내려놓고 큰 소리로 외우면, 그 사람은 무조건, 물어볼 것도 없이 방부를 받아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치 임제록서문을 외울 정도로 임제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니까 선방에서 방부를 받아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교는 역사가 깊기 때문에 기록되지 아니한 불교. 口傳(구전)불교도 아주 많습니다. 입으로만 전해서 내려온 불교도 상당히 많아요.

‘馬防序’ 같은 것을 선방에 방부 들일 때, 무조건 서문을 외우면 무사통과로... 어디의 누구 상좌이고ㆍ어디서 왔느냐? 물어볼 것 없이 무조건 방부 받아줬다 하는 이것도 말하자면 기록 이 외에 “어떤 불교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一物序’가 그만치 중요하니까 꼭 여러 번 쓰시고, 외울 수 있으면 외우면 이것은 그 내용이 워낙 출중한 내용의 단계에 있어서 한 번 이것 외워놓으면 평생 써먹어도 남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것 다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보겠습니다.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그랬지요? 그것이 원문이고, 괄호하고 ‘說誼(설의)’, 해 놨는데, 이것은 함허스님께서 당신이 有一物於此하니 ←이렇게 서문을 써 나가시면서 有一物於此라고 하는 말의 해석을, 다시 재차 해석을 붙이는 것이 한 열줄 가까이, 여러 줄 됩니다. 이것은 내용만 아시고 외울 것은 없습니다. 외우면 더욱 좋고요.

만약에 외운다면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그 다음에 밑에 단락에 ‘絶名相(절명상)호대’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렇게 연결하면 됩니다.

絶名相호대. 그 다음에 또 ‘貫古今(관고금)하고,’ 그 다음에 띄어서

‘處一塵(처일진)호대 圍六合(위육합)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서문, 원문이고 괄호안의 설의(說誼)라고 하는 것은, 서문을 당신이 써놓고 ‘이것 누가 깊이 있게 제대로 이해하겠나?’ 그런 아주 충정에서 또 당신이 스스로 해석을 붙인 겁니다. 往復序도 청량스님께서 당신이 서문(序文)을 써놓고, 서문의 글은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 거기의 해석이 한 권입니다.

그만치 서문을 아꼈고, 서문에 함축된 뜻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무려 한 권이나 서문을 해석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사실은 펼치면 팔만대장경이지만, 간추리면 “할” 한 번에 다 포함시킬 수가 있고, 또 주장자 한 번 드는 데에 그 속에 다 포함시킬 수도 있지요. 그것이 불교 이치의 특색입니다.

有一物於此하니

유일물어차하니

여기에 한 물건(物件)[一物]이 있으니

한 물건[一物]이 여기에 있으니

說誼 ; 一物이 何物고

설의 ; 일물이 하물고

“한 물건(物件)이란 어떤 물건인가.”

한 물건[一物]은 어떤 물건인가?

○ 秖這一著子는 希夷焉하야 絶情謂하며 髣髴焉하야 看似有하며

○ 지자일착자는 희이언하야 절정위하며 방불언하야 간사유하며

○ 다만 이 하나는

희이(希夷)하여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며

방불(髣髴)하여 보면 있는 듯 하고

○ 오직 이 일착자(一著子)는 희이(希夷)하여 뜻(생각)으로 여김이 끊어지며, 방불(髣髴)하여 봄에 있는 듯하며, 【‘희’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이’는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고, ‘방불’은 희미하게 느끼는 것이고,】

蠁曶然하야 難可追하며 恍惚然하야 難可測이니 非迷非悟라

향홀연하야 난가추하며 황홀연하야 난가측이니 비미비오라

향홀(響昒)하여 따라갈 수 없으며

황홀(恍惚)하여 측량하기 어려우니

미(迷)도 아니고 오(悟)도 아니라,

매우 빨라서[蠁曶] 가히 좇음이 어려우며, 황홀(恍惚)하여 가히 헤아림이 어려우며, 모름(미혹함)도 아니며. 앎(깨달음)도 아니다. 【‘향’은 많은 것이고, ‘홀’은 어둑한 것이고, ‘황홀’은 어질어질한 것이다.】

有一物於此하니

유일물어차하니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有 = 있다. 무엇이요? 한 물건. 어디에요? 여기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 아니면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출발이 아주 근사하지요? 불교에는 佛法正見(불법정견)ㆍ바른 견해, 佛法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正見” 하면, 바른 견해가 도대체 뭐냐?ㆍ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가 도대체 뭐냐?ㆍ뭘 가지고 바른 견해라고 하느냐? 팔정도에도 물론 正見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바른 소견. 이것을 딱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無我(무아)사상이고ㆍ하나는 一心(일심)사상입니다.

<금강경>이 이 서문에 근거한 일물(一物)사상이라고 그러지요. 一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일심(一心)사상과 무아(無我)사상입니다. 이것은 말의 뜻은 정 반대입니다. 무아(無我)인데 一心이 어디 있단 말이냐? 一心인데 왜 無我란 말이냐? 그렇지요.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논란이 아주 보통 아닙니다.

사실 一心의 문제와 無我의 문제. 이것만 제대로 우리가 이해하고 또 이해를 넘어서 남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불교 거의 간추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無我” 많이 들어봤잖아요. 무아는 空ㆍ緣起ㆍ無我. 이것이 전부 같은 맥락이고, 一心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一物이니, 우리 선불교에서, 특히 선불교에서 가장 중심되게 말하자면 강조하는 것. 가장 깊이 강조하는 것이 一心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선사들이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입만 떼면 無我이야기 하고ㆍ緣起이야기 하고ㆍ空이야기 하는 선사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一心은 이해가 안 되고 無我는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신분이 선사들은 강사든 상관없이 자기 이해되는 것을 가지고 불교라고 하니까 그것은 사실은 양심적이고 좋은 현상입니다. 선사가 그런 이야기 하니까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양심적으로 ‘나는 불교를 無我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자나 깨나 無我를 이야기할란다.’ 그것은 어떻게 사실은 괜찮은 입장이지요. 여기는 처음부터 一物, 이것은 一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一物이라는 말이 훨씬 낫지요. 한 물건. 여기에 대해서 함허스님 스스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설의(說誼)’라고 하는 말은 설명ㆍ해설. 이런 뜻입니다. ‘의(誼)’자가 “의논하다.” 하는 뜻이니까요.

說誼 ; 一物이 何物고

설의 ; 일물이 하물고

1. 일물(一物)이 何物(하물)고? 그랬지요? 一物 이라는 것이 무슨 물건이냐? 一物이 何物고?

○ 秖這一著子는 希夷焉하야

○ 지자일착자는 희이언하야

○. 동그라미[○]는 圓(원)입니다. 스스로 원(圓)[○]을 이렇게 탁~~. 한 물건이라는 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圓을 턱~ 그려 보인 겁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何物고? 물었으니까요. 하나 척~~ 이렇게 그려놓고, 

秖這一著子(지자일착자)는, 다만 이 일착자(一著子).(著: ‘저’ 자지만 여기서는 ‘착’이라고 같이 본다고 했지요? 엄격하게 하면 이것은 著:‘저’자지만 통용입니다.)다만 이 一著子. 一物을 말하는 것입니다. 一著子 = 이 하나. 이 하나는 圓을 두고 하는 것이지요.

이 하나는 希夷焉(희이언)하다. 그랬습니다. 希夷焉하다. ‘희(希)’자는 들어도 들리지 않고, ‘이(夷)’자는 봐도 보이지 않는다. 希夷焉하다. 틀림없이 있어요. 틀림없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려고 하고, 눈을 닦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絶情謂하며

절정위하며

그래서 絶情謂(절정위)하며, 絶 = 끊어졌다. 情謂 = 생각으로ㆍ우리 뜻으로 뭐라고 요량해봐야 요량되지 않는다. 뜻으로 아무리 요량해봐야, 알려고 요량해봐야 요량되지 않는다. 알아지지 않는다. 情으로 이름을 끊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髣髴焉하야 看似有하며

방불언하야 간사유하며

2. 髣髴焉(방불언)하야 看似有(간사유)하며, 방불언(髣髴焉) = 비슷하다. 비슷해요. 뭔가 있는 듯해요. 그래서 보매, 있는 것 같다.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말하고ㆍ보고ㆍ듣고 하는데, 틀림없이 뭐가,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말입니다. 흡사할 방(髣)자ㆍ흡사할 불(髴)자입니다. 흡사하다. 비슷하다. 비슷해서 보매 있는 것 같다.

蠁曶然하야 難可追하며

향물연하야 난가추하며

그 다음에 또 蠁曶然(향홀연)하야, 이것은 아주 빠르다고 하는 어떤 모양이라고 하는데, 蠁曶然 = 아주 빠른 모양인데요. 아주 빨라서 難可追(난가추)라. 가히 쫓아갈 수가 없다. 쫓아가기 어렵다. 그렇지요.

미국 생각하면 순식간에, 0.1초안에 미국가지요. 달ㆍ태양ㆍ아니면 몇 백만 광년 밖에도 우리 한 생각은 순식간에, 절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0.01초 만에 몇 백억 광년까지도 달려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물건의 됨됨입니다. 이 한물건의 됨됨이예요. 그래서 難可追라. 했습니다. 쫓아갈 수가 없다. 워낙 빨라서 쫓아가기 어렵다.

‘염속도(念速度)’ 라고 하는 말도 있지요? <갈매기 조나단> 기독교인이 썼는데도 보면, 염속도‘,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갈매기가 생각 딱 하면 어느 언덕이 딱 가 있고, 또 생각 딱 하면 어느새 모래사장에 탁 가 있고, 그런 광경이 나옵니다. 아 그것 참, ‘상당한 경지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難可追하며 그 다음에

恍惚然하야 難可測이니 非迷非悟라

황홀연하야 난가측이니 비미비오라

3. 恍惚然(황홀연)하야 難可測(난가측)이니. 이것은 우리가 보통 황홀하다고 할 때, 황홀할 ‘황(恍)’자ㆍ황홀할 ‘홀(惚)’자입니다. 恍惚然해서 難可測이니, 가히 측량하기 어려움이니,

非迷非悟(비미비오)라. 이것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니다. 모른다고 하니까 알 것 같고, 안다고 하니까 또 모르겠거든요. 非迷非悟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니다. 아주 참, 우리 불자들은 우리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철저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不可以凡聖으로 稱이며 無我無人이라 不可以自他로 名일새 故로 但云一物이니라

불가이범성으로 칭이며 무아무인이라 불가이자타로 명일새 고로 단운일물이니라

범부나 성인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며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음이라. 가히 자타(自他)로써 이름할 수 없음이니 고(故)로 다만 한 물건이라 하시니라.

가히 범부나 성인으로 일컫지 못할 것이며, 나[我]도 없고 남[他]도 없어 가히 나와 남으로 이름짓지 못할 까닭으로 다만 이르기를 ‘한 물건’이라 한다.

不可以凡聖으로 稱이며

불가이범성으로 칭이며

不可以凡聖(불가이범성)으로 稱(칭)이며, 이것을 “범부다ㆍ성인이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범부와 성인으로써 일컫지 못한다. 일컬을 수가 없다. 말할 수가 없다.

범부라고 할 수가 없고ㆍ성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최소한도 그 물건 그것은 그렇다 이 말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어떤 작용. 身 口 意 3업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작용은 우리 행위에 따라서 범부적일 수도 있고ㆍ성인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인 한 물건에 대해서는 “범부다ㆍ성인이다.” 일컬을 수가 없다.

無我無人이라 不可以自他로 名일새

무아무인이라 불가이자타로 명일새

無我無人(무아무인)이라. 나도 없고ㆍ너도 없다. 이것은 나니 너니 할 그런 어떤 한계가 없습니다. 無我無人. 그래서

不可以自他(불가이자타)로 名(명)일새. 가히 自다, 他다. 자신이다ㆍ남이다 하는 것으로써 이름 할 수 없을세. 아니 不자를 “없다ㆍ아니다ㆍ못한다.” 이렇게도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故로 但云一物이니라

고로 단운일물이니라

故(고)로, 그러므로 但云一物(단운일물)이니라. 다만, 말하기를 일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주장자를 한 번 들 수도 있고ㆍ손가락을 한 번 세울 수도 있고ㆍ또 주장자를 한 번 쾅 내리칠 수도 있고요. 그런 것 많이 보았지요? 그것이 결국 뭐겠습니까? 一物이라고 하는 말보다 더 간단하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六祖(육조)가 云(운), 6조 혜능스님이 이 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선가귀감에도 서산스님이 一物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도 있습니다.

六祖가 云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로대 柱天下柱地하고 明如日黑似潻하야

육조가 운유일물호대 무두무미하며 무명무자로대 주천하주지하고 명여일흑사서하야

육조(六祖) 스님이 이르시길 한 물건이 있으되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명(名)도 없고 자(字)도 없으되 위로는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꽉 차 있으며 밝기는 태양과 같으며 검기로는 옻칠과 같도다.

육조가 이르기를, “한 물건이 없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자(字)도 없으되, 위로 하늘을 괴며 아래로 땅을 괴며, 밝음이 해와 같으며 검음이 옻칠[漆]과 같아서,

常在動用中호대 動用中에 收不得者가 是니라

상재동용중호대 동용중에 수부득자가 시니라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있으되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서 거둘래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항상 움직임과 작용 가운데 있되, 움직임과 작용 가운데서 잡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이것이다. 【‘동’은 운동하는 것이고 ‘용’은 작용하는 것이다.】

六祖가 云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로대

육조가 운유일물호대 무두무미하며 무명무자로대

六祖가 云 有一物(유일물)호대,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되

無頭無尾(무두무미)하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無名無字(무명무자)로대, 名도 없고 字도 없으며,

柱天下柱地하고 明如日黑似潻하야

주천하주지하고 명여일흑사서하야

上柱天下柱地(상주천하주지)하고,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는 땅을 버티고 있다. 하늘에 까지 꽉 차 있고, 땅에 까지 꽉 차 있다. 오직 그 한 물건이 이 세상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다른 것 없어요. 오로지 그 한 물건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커요.

明如日黑似潻(명여일흑사칠)하야,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옻, 옻칠 해놓으면 새카맣지요. 검기는 옻과 같아서, 그렇지요. 밝은 입장은 참, 그렇게 밝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캄캄하기로 하면, 어찌 그리 또 캄캄 합니까?

常在動用中호대 動用中에 收不得者가 是니라

상재동용중호대 동용중에 수부득자가 시니라

常在動用中(상재동용중)호대, 항상 動用하는 가운데 있되, 움직이고 작용하는 가운데 있되 動用中(동용중)에, 움직이고 작용하는 가운데에

收不得者(수부득자)가 是(시)니라.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 收不得者.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然雖如是나 一物之言도 亦强稱之而已라 故南嶽讓和尙이 道하사대

연수여시나 일물지언도 역강칭지이이라 고남악양화상이 도하사대

비록 그러히 이와 같으나 한 물건이라는 말도 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라. 그러므로 남악회양화상[육조 스님 제자]이 이르시되

그리하여서 비록 이와 같으나, ‘한 물건’이라는 말도 또 굳이(억지로) 말할 따름이니, 이런 까닭으로 남악회양 화상이 이르기를,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하시니 有一物於此者는 不離當處常湛然故로 云爾니라

설사일물이라도 즉부중이라하시니 유일물어차자는 불리당처상담연고로 운이니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맞지 않다 하시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당처(當處)[바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말숙하고 고요함]한 고로 그렇게 말씀하셨음이니라.

“‘한 물건’이라 일러도 곧 맞지 못하리라.” 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함은 당처(當處)를 여의지 아니하여 항상 맑은 까닭으로 그리 이른 것이다.

然雖如是나 一物之言도 亦强稱之而已라

연수여시나 일물지언도 역강칭지이이라

然雖如是(연수여시)나,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一物之言(일물지언)도, 一物이라는 말도

亦强稱之而已(역강칭지이이)라. 또한 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다ㆍ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다.

亦强稱 之ㆍ而ㆍ已. 이것이 다 나중에 허자(虛字)ㆍ실자(實字), 이런 문제도 익숙하기 되면 말씀을 드릴 텐데, 우리나라에서 그 깨달음과 글까지 아주 뛰어나게 갖추신 분이 신라 때는 원효스님을 치고ㆍ고려 말이지만, 이 분은 고려 말 조선 초입니다. 고려스님으로서는 함허스님을 치고ㆍ또 조선 중엽에 와서는 서산스님을 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깨달음의 경지와 그 깨달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그런 능력ㆍ문장, 어찌 보면 함허스님이 더 뛰어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글이 뛰어난 사람들은 이런 허사(虛辭)를 많이 써요. 실질적인 글을 표현하는 내용의 글자보다도 그것이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본뜻을 나타내는 데는 불필요 하지요.

그러나 전체 그 문장은 그런 것이 들어감으로 해서 之자ㆍ而자ㆍ已자, 그런 것이 들어감으로 해서 글이 아주 화려해지고, 아름다워 지고 그렇습니다. 여기 법당에 저런 다른 것, 탱화 안 걸어도 좋아요. 다른 것 다 떼어도 좋습니다. 등 하나도 안 달아도 돼요. 법당만으로도 법당 역할은 충분히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장엄들이 쭉~~ 있음으로 해서 법당이 훨씬 법당다워지지요. 그와 같은 것을 虛辭(허사)라고 그러고, 기둥이 있고ㆍ천장이 있고ㆍ문이 있으면 이것은 實辭(실사)라고 그래요. 實字ㆍ實辭 ↔ 虛字ㆍ虛辭.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이 이 함허스님은 워낙 글이 뛰어나신 분이라서 그런 글자를 많이 씁니다. 强稱. 또한 强稱. 이 석자면 충분한데, 之ㆍ而ㆍ已, ←이렇게 석자를 더 붙였습니다. 이런 것은 뒤에 가서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故南嶽讓和尙이 道하사대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하시니

고남악양화상이 도하사대 설사일물이라도 즉부중이라하시니

故로 南嶽讓和尙(고남악양화상)이, 남악회양화상이라고 6조 스님 제자지요? 和尙이 道(도)하사대, 말씀 하사대, 道 = 말할 道자지요. 길 道자가 아니라, 말할 道자.

說似一物(설사일물)이라도 卽不中(즉부중)이라. 說似 = 가령. 說似라고 할 때 이 說자도 말씀 설자ㆍ베풀 설자. 통용입니다. 같이 써요. 說似 = 설혹 一物이라 하더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 맞을 中자. 백발백중 할 때... 곧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6조 스님 한테 젊은 청년인 남악회양화상이 왔어요. 동자라고 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자네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왔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처음에 방부 들일 때 그랬어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하니까, 아 그것 참 대답할 길이 없거든요. 아무리 대답하려고ㆍ대답하려고 해도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만치 불교수준이 높아졌으니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엉터리 대답은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끙끙 대다가ㆍ끙끙 대다가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요.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그 말의 뜻을 알았어요. 그래서 8년 뒤에 6조 스님 앞에 가가지고 한 말이 이겁니다.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

설사(說似)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맞지 않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라고 했는데, 8년 뒤에 한 대답이 “說似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맞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6조 스님으로부터 인가 받은 그런 연유가 있는 글입니다.

有一物於此者는 不離當處常湛然故로 云爾니라

유일물어차자는 불리당처상담연고로 운이니라

有一物於此者(유일물어차자)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고 한 것은

不離當處常湛然故(불리당처상담연고)로 云爾(운이)라. 그랬습니다. 不離當處常湛然. 於此. 當處라고 하는 말. 가끔 쓰는 말이지요. 當處 = 바로 이 자리.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순간 이 자리. 이 자리를 여의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게 湛然이라는 말은 아주 맑다ㆍ환하다ㆍ밝고 맑다. 이런 뜻입니다. 항상 밝고 맑다. 그래서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했다. 云爾. 이런 말도 가끔 나오는데요. 그렇게 말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라고 말했다. 이 뜻입니다. “여기에 있다.” 라고 했으니까,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여기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든지ㆍ각자 사찰이나 집에 가 있든지, 항상 자기가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有一物於此입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 책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든지 따라 다니는 겁니다. 어디에 가든지, 화장실에 가도 有一物於此입니다. 一物이 여기에 있습니다. 식당에 가도 有一物於此입니다. 그 물건은 거기에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도 그 물건은 거기에 있고ㆍ식당에 가도 그 물건은 거기에 있고ㆍ침대에 가도 그 물건은 거기에 있고ㆍ일터에 가도 그 물건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살아있는 법문입니다. 사실은 그냥 해설이 아닙니다.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가 싸움을 하든ㆍ공부를 하든ㆍ낮잠을 자든지ㆍ항상 그 물건은 거기에 있는 것. 아주 참, 3대 서문을 소개를 했습니다만, 첫 서문부터가 이렇습니다. <금강경>을 통해서 4대가, 四家스님들이 자신의 禪的(선적)체험과 어떤 禪智(선지). 선을 통한 智見을 한껏 다 쏟아놓는 그런 장이 우리가 공부하려는 <금강경 사가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금강경>보다 훨씬 격이 높습니다. 부처님께 죄송하지만, 아무튼 훨씬 격이 높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교설의 완성, 경전의 완성은 <법화경>이지만, 불교의 완성은 선불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참~~, 선불교에 맛들이면요? 안 되는 참선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이 禪文(선문)만 가지고도, 禪語錄(선어록)만 가지고도 선의 맛을 한껏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금강경 사가해 제1강 3부(絶名相호대~)|(2011. 04. 12)

釋대원성 | 조회 352 |추천 2 |2011.07.0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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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욕심은 스님들이나 우리 일반 불자들까지도 여기서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데서 가르칠 수 있고, 강의하실 수 있도록 공부를 그렇게 넉넉히 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조금 배우고 많이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글자 하나, 또 문장 하나까지 낱낱이 소홀히 여기지 말고, 알뜰하게ㆍ실속 있게 그렇게 공부가 되어 줬으면 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1강-2

이렇게 읽으니까 그새 벌써 뜻이 통하지요? 저는 좀 둔한 편이라서 내가 나에게 가르치듯이 아주 야무지게 반복하고ㆍ또 반복해서 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도 저는 머리에 들어갈까 말까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一物의 名相에 대한 내용입니다.

絶名相호대

절명상호대

명(名)[이름]과 상(相)[모양]이 끊어졌으되

명(名)과 상(相)이 끊어졌으니,

(說誼 ; 蕭焉空寂하며 湛爾沖虛하야 無名可名이요 無相可睹故也니라)

(설의 ; 소언공적하며 담이충허하야 무명가명이요 무상가도고야니라)

소연(蕭然)하여 고요하며 맑고 텅 비어서 가히 이름으로 부를 것이 없고 모양으로써 볼 것이 없느니라.

고요하며 공적하며 맑아서 깊고 허(虛)하며, 이름이 가히 이름할(이름 붙일) 것 없으며, 모양이 가히 볼 것 없는 까닭이다.

絶名相호대 貫古今하고

절명상호대 관고금하고

絶名相(절명상)호대, 絶 = 끊었다. 이름과 모양을. 이름과 모양을 끊었으되

貫古今(관고금)하고,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지만, 없지만, 이런 말입니다. 그것이 본래 없는 것이지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지요. 그것은 정말 무슨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貫古今이라. 古今을 관통하고 있다ㆍ古今을 관통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미래까지도 관통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은 같은 對句(대구)입니다.

(說誼 ; 蕭焉空寂하며 湛爾沖虛하야 無名可名이요 無相可睹故也니라)

(설의 ; 소언공적하며 담이충허하야 무명가명이요 무상가도고야니라)

說誼(설의)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蕭焉空寂(소언공적)하며, 여기의 蕭焉 = 쓸쓸한 모양이지요. 가을에 낙엽이 다 지고, 횅~~ 하니 바람 부는 그런 모습을 형용한 말이 蕭焉입니다. 그렇게 空寂하며, 횅~ 하니 空寂하며

湛爾冲虛(담이충허)라. 이것은 맑고 또, 冲虛라고 하는 말은 ‘깊다.’ 깊고ㆍ깊다 이런 말입니다. 아주 맑으면서도 깊다.

‘이(爾)’자는. 역시 ‘언(焉)’자나 ‘이(爾)’자는 虛字(허자)라고 써 놨지요? 實字(실자) ↔ 虛字해 놨는데, 전부 虛字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불으면서 어떤 형용하기도 하고, 형용사 내지 부사 같은 그런 역할을 하는데요.

이 한문의 성격은 옛날부터 문법적인 용어로써 한문이 정리 되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쓰여 졌습니다. 아, 이쯤에는 언(焉) 자를 하나 놓는 것이 좋겠다. 이(爾) 자를 하나 놓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출발해가지고 현대에 와서는 한문이 문법적으로, 또 글자의 성격 같은 것을 연구를 해서, 이것은 虛字다ㆍ이것은 實字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無名可名(무명가명)이요. 이름 가히 이름 할 것이 없음이요.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이름으로 가히 부를 수가 없다. 뒤의 ‘명(名)’ 자는 똑 같이 이름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름으로써 가히 부를 수가 없다.

無相可覩故也(무상가도고야)니라. (교재에 都라고 된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覩: 볼 ‘도’ ←이렇게 하세요.) 형상 가히 볼 수가 없는 연고니라ㆍ형상 가히 볼 수가 없는 연고다. 이름을 이름 할 수 없고ㆍ형상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絶名相이라고 했다 이 말입니다. ‘絶名相’이라는 글을 써놓고, 해설을 이렇게 붙인 것이지요.

貫古今하고

관고금하고

고금(古今)[옛과 지금]을 꿰뚫고 있고

고금(古今)을 꿰뚫으며,

(說誼 ;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多經海岳相遷하니 幾見風雲變態오)

(설의 ;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장금이라 다경해악상천하니 기견풍운변태오)

천겁(千劫)을 지나도 옛이 아니고 만세(萬歲)에 뻗쳐 있어도 항상 지금이라. 많은 세월동안 바다와 산악(山岳)이 서로 바뀜을 겪었으니 풍운(風雲)의 변태(變態)를 얼마나 보았던가.(“바다와 山“ 云云은 이 세계가 成 · 住 · 壞 · 空할 때 바다가 山이 되는 세계의 變을 말한 것이고, “風雲“ 云云은 君臣興亡의 人間變易를 말한 것이다.)

천겁을 지나되 옛적이 아니며, 만세에 통하되 항상 지금이다. 바다와 산이 서로 옮김(바뀜)을 많이(오래) 지내니, 바람과 구름의 변하는 모양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겁(劫)은 시간이다.】

貫古今하고

관고금하고

관고금(貫古今)하고. 古今을 꿰뚫었다.

(說誼 ;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설의 ;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장금이라

설의(說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하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이라. 이 유명한 글, 어디서 보신 적 있습니까? 이것이 해인사 일주문 주련입니다. 해인사 일주문에 들어가면 주련에 이 구절이 양쪽으로 붙었습니다.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그것은 해인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갖다 놓은 것이지요. 해인사는 천겁을 지냈으되 항상 새롭다. 옛것이 아니다 = 不古. 또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만세에 뻗쳐 있지만 길이 지금이다ㆍ늘 지금이다.

이것이 사실은 함허스님께서, 이 한 물건의 됨됨이는 古今을 꿰뚫고 있다. 한 물건을 가지고 설명해놓은 것을 갖다가, 해인사에다 떡~ 갖다 붙여놓고는 “해인사가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좋지요. 활용이 아주 멋지지 않습니까?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천겁을 지냈으되 옛것이 아니고 항상 새롭다. 이 말이지요. 만세에 뻗쳐 있으되 길이 지금이다ㆍ늘 지금이다ㆍ이 순간이다.

그렇습니다. 이 한 물건. 쉽게 우리 한 마음은ㆍ한 마음은 천겁이 지났지만 항상 새로운 겁니다. 이것은 만세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서 늘 지금입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꽉 차 있습니다.

多經海岳相遷하니 幾見風雲變態오)

다경해악상천하니 기견풍운변태오)

多經海岳相遷(다경해악상천)하니 幾見風雲變態(기견풍운변태)오. 아주 좋은 시를 여기다 갖다 놨는데요. 古今을 꿰뚫고 있다고 한 해석을 하면서 이렇게 갖다 놨습니다. 많이 지냈다ㆍ여러 번 지냈다. = 多經.

海岳相遷. 바다와 산이 서로 옮겨가는 것을 많이 지나갔다.

기견풍운변태(幾見風雲變態)오. 몇 번이나 보았는가? = 幾見. 風雲이 變態함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이 風雲이 變態하는 것을, 그 태도 바뀌는 것을 얼마나 보았느냐? 이런 말인데요. 多經海岳相遷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桑田碧海(상전벽해)’라는 말이 있지요? 뽕나무 밭이 동해 푸른 바다가 되고ㆍ동해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고. 그것을 금강산 신선이 세 번 보았다. 그런 설화가 있지요?

옛날에 금강산 어느 작은 암자에 옛날에는 불씨를 잘살려야 되는데, 불씨가 늘 꺼지는 겁니다. 새벽이 가보면 누가 자꾸 헤집은 흔적이 있어요. 그래 한 번은 누가 그랬는지 잡겠다고 부엌에서 지키고 있으니까, 어떤 신선이 나와서 불을 헤치고 불을 쬐는 겁니다. 신선이 힘이 다 하니까, 죽을 때가 되니까 몸에 기력이 떨어져서 몸이 쇠약해지니까, 불이 필요한 겁니다. 신선은 불이 필요 없어야 되거든요. 춥고 더운 것을 다 감내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신선인데, 신선도 명이 다 하니까 추운 겁니다. 추워서 불을 쬐러 내려와서 암자의 불을 헤치고, 불을 쬐고 하는 것을 잡았어요.

잡아서 “네가 누구냐?” 하니까 “이 금강산에 사는 신선이다.”

“그래? 얼마나 살았느냐?” “내가 몇 년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금강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금강산이 되고, 桑田碧海. 저 동해바다에 뽕나무 밭을 만든 것을 세 번을 보았다.” 이렇게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고ㆍ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고. 한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그것이 몇 년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하는 전설이 있지요.

다경해악상천(多經海岳相遷)이라. 해악(海岳)이, 바다와 멧부리가 서로 옮기는 것을, 서로 뒤바뀌는 것을 많이 지냈다. 風雲이 變態함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이 한 물건은 古今을 관통하고 있다ㆍ이 한 물건은 古今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해석이 더 근사하지요. 해석이... 우리도 경전이나ㆍ어록이나, 근사한 말 한 마디를 보면, 우리 나름대로 해설을, 자기 나름대로 잘 하는 것. 이것 중요합니다.

옛날에 청량스님이라든지ㆍ해설서 제일 많이 쓰신 분 규봉스님이라든지ㆍ원효스님이라든지ㆍ의상스님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자기 독창적인 저술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가 경전이나ㆍ어록에 당신의 소견을 피력한 해설서입니다. 그것이 疏(소)이고, 抄(초)지요. 疏를 한 번 더 설명하면 抄가 되고 그렇습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도, 그것을 잘해야 됩니다. 꼭 글로 쓰면 더욱 좋지만, 글로 안 쓰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충분히 소화해서, 소화하면 설명이 나오거든요. 설명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이 해설이고, 疏ㆍ抄이고 그렇지요.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처일진호대 위륙합이로다

한 티끌에 처(處)하되 육합(六合)[四方上下]을 에워쌈이로다.

한 티끌에 있으되, 천지 사방[六合]을 (에워)싸며 【6합은 법수에 있는 것이다.]

(說誼 ;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설의 ; 범유사물이 소불능대하고 대불능소로대

무릇 온갖 사물(事物)들이 작은 것은 능히 클 수 없고 큰 것은 능히 작아질 수 없으나

무릇 있는 사물이 작은 것은 능히 크지 못하고, 큰 것은 능히 작아지지 못하나니,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隣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니라)

차즉반시하야 능소이세입린허하고 능대이광포법계니라)

이것[한 物件]은 이[事物]와 반대로 능히 작고 미세하여 능히 인허(隣虛)[분자 정도의 작은 것]에도 들어가고 크고 넓어서 능히 법계(法界)를 에워싸느니라.

이는 곧 여기에 뒤집어서 능히 작아서 가늚이 인허(隣虛)에 들어가고 능히 커서 넓음이 법계를 에워싸는 것이다. 【인(隣)은 가까운 것이고 허(虛)는 허공이니, 티끌이 아주 가늘어서 허공에 가까우므로 인허(隣虛)라고 한다.】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처일진호대 위륙합이로다

處一塵(처일진)호대 圍六合(위육합)이로다. 저 위에는 絶名相호대, (단락) 貫古今하고, 이렇게 나누었고, 여기는 處一塵호대, (단락없이) 圍六合(위육합)이로다. 그랬습니다.

일진(一塵) = 하나의 먼지. 작은 먼지에 처해 있지만, 六合을 에워싼다. 六合. 圍자는 에워싼다는 뜻이고, 六合 = 동 서 남 북 상 하. ←이렇게 해서 六合입니다. 8방하고 상 하 해서 시방이라고도 하지만, 六合하면 4방하고 상 하를 해서 六合입니다. 그러면 시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방을 다 해서 먼지 하나에 있으면서 이 우주를 다 에워싼다. 먼지가 뭐겠습니까? 우리 육신이지요. 이 우주에다 대면 먼지 하나입니다. 이 드넓은 우주에 먼지 하나도 안 되지요.

이 작은 먼지 속에 있으면서도 그 한 물건이 온 우주를 감싸고 남는 겁니다. 천리만리도 순식간에 달려 갈 수가 있고, 아무리 빠른 비행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속도에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척~ 해놓고는 당신 스스로 설명을 합니다.

(說誼 ;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설의 ; 범유사물이 소불능대하고 대불능소로대

설의(說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凡有事物(범유사물)이, 무릇 어떤 事物이 있든지 간에

小不能大(소불능대)하고, 작은 것은 능히 크지 못하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있고, 大不能小(대불능소)라, 큰 것은 능히 작아지지 못 한다.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隣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니라)

차즉반시하야 능소이세입인허하고 능대이광포법계니라)

此則反是(차즉반시)라. 이것은 이것과 반대가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能小而細入鄰虛(능소이세입인허)하고. 작은 면으로는 세입인허(細入鄰虛)라. 인허(鄰虛)에 들어간다. 인(鄰)은 鄰虛塵(인허진)이라고 해서, 불교에서는 가장 작은 물질의 단위 이름을 “鄰虛塵” 그래요. 허공에 가깝다ㆍ텅 빈데 가깝다는 말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원자ㆍ분자. 요즘 쿼크(Quark) 라고 하는 물질도 개발이 돼가지고, 아주 쪼개고ㆍ쪼개고ㆍ쪼개고 하면 결국은 쿼크 라고 하는데 까지 이른다. 이런 말이 있는데, 그것 역시 결합체라는 것이지요. 쿼크 라는 것도...

인허(鄰虛)라고 하는 말뜻은요? 텅 빈데 가깝다. 그래 버렸으니까 더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겁니다. 있기는 있는데, 없는 것에 가장 가깝다 이 뜻입니다. 그런 데에 까지 작은 입장으로서는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 이 물건이고,

能大而廣包法界(능대이광포법계)니라. 큰 입장으로, 능히 큰 것으로는

포법계(包法界), 법계를 포함한다.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금강경 사가해 제1강 4부(內含衆妙하고~)|(2011. 04. 12)

釋대원성 | 조회 287 |추천 1 |2011.07.21. 12:03

http://cafe.daum.net/yumhwasil/HsLO/6

內含衆妙하고

내함중묘하고

안으로는 온갖 미묘(微妙)한 것[衆妙]을 머금었고

안에 많은 미묘함을 머금었고,

(說誼 ; 體量이 恢恢하야 恒沙性德과 無量妙用이 元自具足이니라)

(설의 ; 체량이 회회하야 항사성덕과 무량묘용이 원자구족이니라)

본체(本體)의 양(量)이 매우 넓고 커서[恢恢] 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성덕(性德)과 한량없는 묘용(妙用)[묘한 작용]이 원래 저절로 갖추어져 있다.

본체의 양이 커서 항사(恒沙) 같은 성덕(性德)과 그지없는 묘용(妙用)이 본디 스스로가 갖추어진 것이다.

內含衆妙하고

내함중묘하고

內含衆妙(내함중묘)하고. 안으로는 衆妙를 포함하고 있다. 衆妙 = 여러 가지 미묘한 것. 여러 가지 아름답고 묘한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 한 물건 속에... 그렇지요.

(說誼 ; 體量이 恢恢하야 恒沙性德과 無量妙用이 元自具足이니라)

(설의 ; 체량이 회회하야 항사성덕과 무량묘용이 원자구족이니라)

설의(說誼)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體量(체량)이 恢恢(회회)하야. 그 一物. 한 물건의 양이, 일체의 양이 恢恢하다. 크고 크다. 그래서

恒沙性德(항사성덕)과 無量妙用(무량묘용)이 元自具足(원자구족)이니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성품의 덕. 한량없는 미묘한 작용이 元自具足이라. 원래 저절로 구족하고 있다.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인데요? 사실 우리가 하루 종일 보고ㆍ하루 종일 듣고ㆍ하루 종일 말하고ㆍ온갖 것 다 감지하고ㆍ작용하지요. 그 작용은 하루 동안 작용한 그 양이 얼마냐?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서 지금 이 순간 까지 작용한 그 작용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보고ㆍ듣고ㆍ말하고ㆍ분별하고ㆍ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꺼지고ㆍ좋아 했다가 싫어하고ㆍ화났다가 기뻐하고,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無量妙用입니다. 한량없는 미묘한 작용. 그리고 恒沙性德이라고, 德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좋은 일 하기로 하면 보살도 되고ㆍ부처도 되고ㆍ때로는 아귀도 되고ㆍ축생도 되고ㆍ아수라도 될 수도 있습니다만, 하루 가운데 얼마든지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한 물건의 그 體가 워낙 커서 그런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元自具足입니다. 원래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주 참, 표현을 아주 잘 했습니다. 이것이 아까 불교의 견해 중에 두 가지 길이 있다. “無我사상과 一心사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一心의 문제는, 특히 선불교에 있어서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 이야기 빼버리면 우리 자신의 생명도 부정당하고, 불교의 생명도 없어집니다. 특히 선불교에서는 그 생명을 잃게 됩니다. 一心의 문제를 빼버리면요. 그런데 여기 一物序에는 그 一心의 문제를 “아주 참, 잘 그려놓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外應群機하며

외응군기하며

밖으로는 온갖 근기[群機]에 다 응(應)하며

밖의 모든 기틀이(근기가) 응하며, 【‘기(機)’는 기틀이다.】

(說誼 ;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설의 ; 물내즉응하야 감이수통이 여명경이 당대에 호내호현하고 한내한현하며

사물(事物)이 오면 곧 응(應)하여 느껴 통(通)하는 것이 밝은 거울[明鏡] 앞에 호인(胡人)[호나라 사람]이 오면 호인(胡人)이 나타나고 한인(漢人)이 오면 한인(漢人)이 비치는 것과 같으며,

사물이 오거든 곧 응하며, 감응하거든 곧 통해서 밝은 거울이 경대에 당하여 호인(胡人)이 오거든 호인이 나타나고(비치고) 한인(漢人)이 오거든 한인이 나타나며(비치며), 【‘감(感)’은 중생의 성감(誠感)이니,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호(胡)’는 오랑캐이고, ‘(漢)’은 중국 사람이고, ‘거(虡)’는 북을 거는 틀이다.】

洪鍾이 在虡에 大扣大鳴하고 小扣小鳴이니라)

홍종이 재거에 대구대명하고 소구소명이니라)

큰 종(鐘)이 틀에 걸려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림과 같으니라.

큰 북이 북틀에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듯 한 것이다.

外應群機하며

외응군기하며

外應群機(외응군기)하며. 外 應 群 機. 밖으로는 群ㆍ機. 여러 가지 근기에 응한다. 그랬습니다. 밖으로는 여러 가지 근기에 응한다. 群機에 응한다. “맞춘다.” 이 말입니다. 應자는 맞춘다.

(說誼 ;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설의 ; 물내즉응하야 감이수통이 여명경이 당대에 호내호현하고 한내한현하며

설의(說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物來卽應(물내즉응)하야, 사물이 오면 곧 응해서

感而遂通(감이수통)이, 느껴가지고 드디어 통하는 것이, 그렇지요. 지금 제가 <금강경>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또, 그 나름대로 ‘아이고 뭘 저렇게 설명하고 있나?’ 또 ‘아이고 그것 참, 들을 만하다.’ 별별 느낌이 있을 겁니다. 感자입니다. 바로 느끼면서 우리 마음에 그것이 뭔가 소통이 일어납니다. 遂通이, 드디어 통하게 되는 그것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如明鏡(여명경)이 當臺(당대)에, 밝은 거울이, 當臺. 臺에 당함에. 이 臺자. 많이 쓰이는 臺자인데 거울 받침대입니다. 거울이, 거울이 있을 자리. 거는 곳이 됐던지, 옛날에는 전부 銅鏡(동경)이기 때문에 받침대가 있습니다. 거기다 받쳐 놓는 겁니다. 그것이 臺입니다. 닦아서 받침대에다 떡 올려놓으면

胡來胡現(호내호현)하고 漢來漢現(한내한현)하며. 호(胡) 나라 사람이 오면 호 나라 사람을 나타내고, 한(漢) 나라 사람이 오면 한 나라 사람을 나타낸다. 이것은 중국에서 옛날에 胡ㆍ漢. 이것이 상대적인 말이거든요. “한나라 사람 외에는 전부 오랑캐라.”

지금도 56개 민족이 있는데요. 한족이 있고 그 나머지 55개 민족은 조선족으로부터 묘족이니ㆍ장족이니ㆍ별별 소수 민족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전부 胡라고 그랬어요. 누가 오든지 간에 거울 앞에서는 평등하게 똑 같이 비치지요. 그야말로 한 물건의 됨됨이가 그렇다. 또 비유가 하나 있어요.

洪鍾이 在虡에 大扣大鳴하고 小扣小鳴이니라)

홍종이 재거에 대구대명하고 소구소명이니라)

洪鍾(홍종)이 在虡(재거)에 大扣大鳴(대고대명)하고 小扣小鳴(소고소명)이니라. 참 멋지지요? 洪鍾. 큰 종이 말하자면 틀이라. 종을 다는 틀 거(虡)자입니다. 틀에 있음에, 종을 만들어서 종 틀에 갖다가 딱 걸지요? 걸어놓고 우리가 칩니다.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린다. 우리 한 물건의 됨됨이가 그와 같다. 外應群機라. 온갖 근기에 다 맞추어간다. 그렇지요. 욕하면 화내지요. 칭찬하면 기분 좋지요. 바로 이 도리입니다. 뭐 갖다 주면 기분 좋아요. 내 것 손해 보면 또 기분 나빠요.

바로 이 도리, 外應群機입니다. 참~, 이 한 물건의 됨됨이는 반응이 참 빠릅니다. 그렇게 반응이 빠를 수가 없어요. 조금도 가차 없이 반응하고, 속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주어삼재하고 왕어만법하니

삼재(三才)[天 · 地 · 人]의 주인(主人)이 되고 만법(萬法)의 왕(王)이 되나니,

천ㆍ지ㆍ인에 으뜸이고, 만법에 으뜸이어서, 【삼재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說誼 ; 天以之覆하고 地以之載하고 人以之處乎其中하며 以至日月星辰과 草木昆虫히

(설의 ; 천이지복하고 지이지재하고 인이지처호기중하며 이지일월성신과 초목곤충히

하늘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덮고[覆] 땅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싣고[載] 있으며 사람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그 가운데 처(處)하니 이로써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초목곤충(草木昆虫)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이)로써 덮으며, 땅이 (이)로써 싣고, 사람이 (이)로써 그 가운데 있으며, 해와 달과 별과 나무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凡有貌像形色者가 莫不以之爲宗하야 而得成立이니라)

범유모상형색자가 막불이지위종하야 이득성립이니라)

무릇 모양과 형색이 있는 것들이 이것으로써 근본(根本)을 삼아서 성립하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느니라.(이것은 “안으로 衆妙를 머금고 밖으로 群機를 따르며, 三才의 主가 되고 萬法의 王이 된 것“을 밝힌 것이다.)

무릇 모양과 형체의 빛깔 있는 것이 (이)로써 으뜸을 삼고 능히 일어서지(성립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주어삼재하고 왕어만법하니

主於三才(주어삼재)하고 王於萬法(왕어만법)하니. 主於三才. 於자 이것도 虛字에 해당 됩니다. 삼재(三才)에 王이 되고, 주인이 되고, 三才 = 天ㆍ地ㆍ人. 천지인이 三才입니다. 三才에 주인이 되고, 萬法에 왕이 된다. 바로 이 물건 하나가 天ㆍ地ㆍ人의 주인이고, 萬法의 왕이다.

(說誼 ; 天以之覆하고 地以之載하고 人以之處乎其中하며

(설의 ; 천이지복하고 지이지재하고 인이지처호기중하며

설의(說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天以之覆(천이지부)하고. 하늘은 그것으로써 덮고. 갈 ‘지(之)’자는 대명사로써 보는 것이 아주 똑 떨어집니다. 대개는 그냥 소유격으로 무엇의 하는 그런 의미로 많이 해석하지만, 이럴 때는 대명사로 그것을ㆍ그것으로써 덮고, 그것이 뭡니까? 一物이지요? 하늘은 一物로써 덮고,

地以之載(지이지재)하고. 땅은 그것으로써 싣는다. 실을 ‘자(載)’자. 그것로써 싣는다. 일물로써 싣는다. 하늘은 그 물건이 있어서 덮는 역할을 하고, 땅은 그 한 물건 때문에 만물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

人以之處乎其中(인이지처호기중)하며. 三才가 天 地 人이라고 했지요? 사람은 그것으로써 그 가운데 處한다ㆍ그 가운데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그 한 물건 역할로써ㆍ한 물건의 능력으로써 있게 된다.

以至日月星辰과 草木昆虫히 凡有貌像形色者가 莫不以之爲宗하야 而得成立이니라)

이지일월성신과 초목곤충히 범유모상형색자가 막불이지위종하야 이득성립이니라)

以至日月星辰(이지일월성신)과 草木昆虫(초목곤충)히. 토를 ‘히’라고 했어요. 日月星辰과 草木昆虫에 이르기까지, 앞에 이를 至자. 그런 뜻에서 전통적으로 히라고 토를 답니다, “이르기까지.” 日月星辰이나 草木昆虫에 이르기까지 전부

凡有貌像形色者(범유모상형색자)가, 무릇 貌 像 形 色이 있는 者가

莫不以之爲宗(막불이지위종)하야, 이것으로써 宗. 근본을 삼지 아니함이 없어서, 宗자는 우리종교ㆍ무슨 종ㆍ조계종, 많이 쓰지요? 정종분ㆍ근본ㆍ중심ㆍ우두머리ㆍ요점, 이런 뜻도 되고 그렇습니다. 천지만물 모든 것은 전부 그것가지고, 일물로써 으뜸을 삼지 아니함이 없다. 으뜸을 삼아서

而得成立(이득성립)이니라. 성립함을 얻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여기다 새겨야 되겠네요. 莫不을 끝에다가 새겨야 옳겠습니다. 그것을 으뜸 삼아서 성립되지 아니함이 없다. 전부 그것으로써 성립되었다. 한 물건. 그것이 들어서 성립되었다.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탕탕호기무비요 외외호기무륜이로다

창창(蕩蕩)하여 그에 비길 것 없고 외외(巍巍)하여 그에 짝할 수 없도다.

탕탕하여 비유할 것이 없으며, 외외하여 겨룰 것이 없으니

(說誼 ; 蕩蕩云云은 廣大勝第一者가 是요

(설의 ; 탕탕운운은 광대승제일자가 시요

탕탕(蕩蕩)하다는 것은 광대하여 제일이 되는 것이요,

“탕탕 운운”은 넓으며 크고 뛰어나서 제일인 것이 이것이고,

巍巍云云은 最尊極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니라)

외외운운은 최존극무상자가 시니 차소이위왕위주지세야니라)

외외(巍巍)하다는 것은 가장 높고 높아서 지극(至極)하여 위없는 것이니, 이것이 왕(王)이 되고 주(主)가 되는 형세[勢]의 까닭이다.

“외외 운운”은 가장 높고 지극하여 위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이 으뜸가며 으뜸 되는 형체인 것이다.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탕탕호기무비요 외외호기무륜이로다

蕩蕩乎其無比(탕탕호기무비)요 巍巍乎其無倫(외외호기무륜)이로다. 蕩蕩해서,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탕탕(蕩蕩)해서 그 비교할 바가 없고, 비교할 수가 없고 巍巍해서, 蕩蕩은 넓다는 뜻인데, 그냥 蕩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아주, 그래서 느껴야 됩니다.외외(巍巍)도 높다는 뜻인데, 그냥 巍巍하다 해서 그 巍巍함을 느껴야지, 이것을 “높고 높아서” 이렇게 해서도 뜻이 제대로 안 드러납니다. 높고 높아서 그 짝이 없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든지 한문으로 번역해도 제대로 번역이 안 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해도 사실은 정확하게 제대로 번역이 안 되고,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해도 그렇고,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해도 그렇습니다.

그것 뭐 어떻습니까? 요즘에 문제 된 것 있지요? 미국하고 자유무역협정문에, 그 전문가, 국내에서 제일가는 전문가가 번역했는데도 200여 곳이 번역오류가 있다 잖아요.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나 봐요. 그 나라만의 미묘한 어떤 감정 표현을 다른 나라의 말로 표현하려니까 그것이 비슷하지, 정확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최고전문가. 미국 유학도 열 번ㆍ스무 번 다한 사람들이 번역했는데 그 중요한 공문서에 200여 곳이 번역오류가 있다.

그래 한문 같은 것, 이것도 자꾸 읽어서 그 느낌을 그냥 느껴버려야지, 그것을 자꾸 우리말로 번역해 봐야 사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런 형용사 같은 것은 더욱 더 그렇지요. 우리말로 “비스무리하다.” 이것을 어떻게 번역할 겁니까? “비스무리하다.” 허허허허허허, 비슷하다는 소리도 아니고, 비슷하다는 소리 아닌 것도 아니고, 비스무리하다를 어떻게 번역합니까?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그래 한문도 역시 그런 것이 많지요. 사실은 번역을 하면, 어느 나라 말이든지 번역을 하면 그 본래의 느낌하고 멀어지지요. 그 맛과 뜻이 감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읽고 그 느낌을 그저 느끼고요. 그 방법이 제일 정확하지요. 蕩蕩해서 그 비교할 수가 없고, 巍巍해서 그 짝 할 수가 없더라.

(說誼 ; 蕩蕩云云은 廣大勝第一者가 是요

(설의 ; 탕탕운운은 광대승제일자가 시요

설의(說誼) :

蕩蕩云云(탕탕운운)은, 이 云云한 것은 생략했을 때, 云云이라고 이렇게 하지요. 蕩蕩乎其無比를 蕩蕩云云은.

廣ㆍ大ㆍ勝ㆍ第一者(광대승제일자)가 是(시)요. 廣하고ㆍ大하고ㆍ勝. 수승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제일가는 것이 이것이요.

巍巍云云은 最尊極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니라)

외외운운은 최존극무상자가 시니 차소이위왕위주지세야니라)

巍巍云云(외외운운)은 最ㆍ尊ㆍ極ㆍ無上者(최존극무상자)가 是(시)니. 이것도 한자ㆍ한자 떼어서 봐야 됩니다. 無上甚深微妙法할 때, 우리 불교에 無上이라는 말 많은데, 이것을 번역할 때 “위가 없는ㆍ위가 없는ㆍ위없는ㆍ위없는” 자꾸 그렇게 번역하는데 그것 틀린 번역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보다 위없는” 이렇게 해야 되고, “보다 위없는” 해놓으면 또 이상해지니까 그래서 “위없는ㆍ위없는” 그러는데.

그러면 가장 가까운 번역은 뭐냐? “가장 높은” 이렇게 번역해야 됩니다. “위없는” 하면 불자들은 다 알고 있어서 이해하지만, 그것 무슨 말인지 일반인은 몰라요. “위없는” 뭐가 위없다 말입니까?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보다 위없다ㆍ무엇보다 위가 없다.” 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차소이위왕위주지세야)니라. 이것이 왕이 되고ㆍ주인이 되는 세력의 所以다. 형세. ‘세(勢)’자는 형세지요. 왕이 되고ㆍ주인이 되는 형세의 所以다. 까닭이다. 이유다. 왕이 되고ㆍ주인이 되는 형세의 이유다. 그 이유가 그것이다. 이런 뜻이지요.

不曰神乎아 昭昭於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불왈신호아 소소어부앙지간하고 은은어시청지제하며

어찌 신비(神秘)하지 아니한가. 엎드리고 우러르는[俯仰] 사이에 분명하고, 보고 듣는 즈음에 은은(隱隱)히 스며 있으며,

신기하다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구부리며 우러를 사이에 환하되 보고 들을 사이에 은은한 것이다.

(說誼 ; 決定是無로대 性自神解하고 決定是有로대 尋之無蹤하니 此所以爲神也니라)

(설의 ; 결정시무로대 성자신해하고 결정시유로대 심지무종하니 차소이위신야니라)

결정(決定)코 이것이 없으되 자성[性]이 스스로 신비롭게 알고, 결정코 이것이 있으되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신비하다고 한 까닭이니라.

반드시 이것이 없다 하여도 자성(自性)이 스스로 신기하게 알고, 반드시 이것이 있다 하여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신기로운 까닭인 것이다.

不曰神乎아 昭昭於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불왈신호아 소소어부앙지간하고 은은어시청지제하며

不曰神乎(부왈신호)아 昭昭於俯仰之間(소소어부앙지간)하고 隱隱於視聽之際(은은어시청지제)하며. 참~, 집에 돌아가서 많이 읽고, 많이 써 보십시오. 부왈신호(不曰神乎)아? 신비롭지 아니한가? 신비롭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정확하게 번역하면 신비롭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曰자. 이르지 않겠는가? 하~! 신비롭지 않은가?

소소어부앙지간(昭昭於俯仰之間)하고, 昭昭. 밝을 소자지요? 俯仰之間에, 俯. 구부리고ㆍ우러르고ㆍ고개를 숙이고ㆍ고개를 들고ㆍ옆으로 돌리고 하는 그 사이에, 거기에 昭昭하다. 환하게 있어요. 이리 쳐다보고ㆍ저리 쳐다보고ㆍ여기로 돌아보고ㆍ저기로 돌아보고 해도 바로 거기에 다 있어요. 어디로 봐도 다 있어요. 누굴 봐도 보는 거기에 다 있어요. 俯仰之間에 昭昭하도다. 또

隱隱於視聽之際(은은어시청지제)하며, 視聽之際에 隱隱하다. 於가 들어오면 언제나 “에” 라고 거의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벌써 여러 번 나왔습니다. 視聽之際. 보고 듣는 즈음에 隱隱하다. 숨을 ‘隱’자지만, 은은하다. 보고 듣는 거기에 隱隱히 숨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영 없는 것은 아니고요.

(說誼 ; 決定是無로대 性自神解하고 決定是有로대

(설의 ; 결정시무로대 성자신해하고 결정시유로대

설의(說誼)라.

決定是無(결정시무)로대. 결정코 없는 것이지만,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야 없으니까요. 이것은 결정코 없어요. 그런데

性自神解(성자신해)입니다. 그 성품, 그 본성은 저절로 神解입니다. 신비롭게 알고 있어요ㆍ신비롭게 이해하고 있어요.

神解. 이것은 원효스님이 잘 쓰신 말씀입니다. 원효스님이 좋아하셨어요. 神解. 참 좋은 말이지요. 또 이와 똑 같은 뜻으로써 靈知(영지)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신령스럽게 안다. 똑 같은 말입니다. 神解도 똑 같습니다. 그것 참, 전혀 없는데, 決定是無. 전혀 없는데 무엇이 들어서 아는지 아주 잘 알아요. 또

決定是有(결정시유)로대. 틀림없이 있어요. 있는데

尋之無蹤하니 此所以爲神也니라)

심지무종하니 차소이위신야니라)

尋之無蹤(심지무종)하니, 찾아보면 자취가 없어ㆍ찾아보면 자취가 없어요. 참 신기한 도리입니다ㆍ신기한 도리예요. 찾아보면 자취가 없다.

此所以爲神也(차소이위신야)라. 이것을 神이 된다고 하는 까닭이다. 所以다. 이것이 神이 된다고 하는 所以다. 신이라고 하는 의미가 사실 이래야 신이지요. 이래야 신이지, 뭐 있으라 하면 있고ㆍ없으라 하니 없고, 그래서 신이라고 하면 그것은 참, 당치도 않지요. 이쯤 돼야 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불왈현호아 선천지이무기시하고 후천지이무기종하니

어찌 그윽[玄玄]하지 아니한가. 천지(天地)보다 먼저 됐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으니,

깊다고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깊다고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천지로부터 먼저라 해서 그 비롯함이 없으며, 천지로부터 나중이라 해서 그 마침이 없는 것이다.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불왈현호아 선천지이무기시하고 후천지이무기종하니

不曰玄乎(불왈현호)아? 현묘하다고 말하지 아니하겠는가? ‘玄’자는 현묘하다. 또 天地玄黃(천지현황)할 때 玄자는 “검을 현” 하는데, “아득할 현” 자지요. 아득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검은 색깔이 아닙니다. “아득하다” 멀어서, 아주 멀어서 아득할 때 이 玄자를 쓰지요.

先天地而無其始(선천지이무기시)하고 後天地而無其終(후천지이무기종)하니. 天地보다 먼저 됐으되 그 시작이 없고, 先天地. 天地보다 먼저 되 그 시작이 없고, 後天地而無其終이라. 天地보다 뒤에 있으되 그 끝이 없다. 天地보다 뒤에까지 있다 이 말입니다. 천지가 망해도 이것은 남아있다 이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끝이 없어요. 천지가 다 끝나도, 成住壞空(성주괴공)을 통해서 천지가 다 끝나도 그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끝은 없습니다. 영원하다 이 것이지요. 앞으로도ㆍ뒤로도...

(說誼 ;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요 有形之最後者도 亦天地也라

(설의 ;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요 유형지최후자도 역천지야라

형상 있는 것의 가장 먼저 된 것은 천지(天地)요 형상 있는 것의 최후의 것도 천지로다.

형상 있는 것에서 가장 먼저인 것이 하늘과 땅이며, 항상 있는 것에서 가장 나중인 것이 또한 하늘과 땅이니,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로대 而天地가 以此爲始하니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로대 이천지가 이차위시하니

형상의 가장 먼저 된 것이 천지로되 이 천지가 이것으로써 비롯되니 이것이 물질이 된 까닭이라.

형상 있는 것에서 가장 먼저인 것이 하늘과 땅이로되, 하늘과 땅이 이것으로써 비롯함[始]을 삼으니,

(說誼 ;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요 有形之最後者도 亦天地也라

(설의 ;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요 유형지최후자도 역천지야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有形之最先者(유형지최선자)가. 형상 있는 것 중에 가장 먼저 된 者가 天地也(천지야)요. 또.

有形之最後者(유형지최후자)도 亦天地也(역천지야)라. 有形. 형상 있는 것의 최후의 것도 또한 天地다.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로대 而天地가 以此爲始하니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로대 이천지가 이차위시하니

有形之最先者(유형지최선자)가. 형상 있는 것의 最先者가

天地也(천지야)로대. 天地지만,

而天地(이천지)가 以此爲始(이차위시)하니. 천지가 이것으로써 以此. 시작을 삼으니,

此는 物之所以始者를 不可得而窮也라

차는 물지소이시자를 불가득이궁야라

이것이 물질[一物]이 된 까닭이라. 가히 그것은 궁구(窮究)할 길이 없도다.

이 물건의 비롯한 까닭을 가히 능히 다하지[窮] 못하리니,

所以始者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도 亦不可得而窮也니 此所以爲玄也니라)

소이시자를 기불가득이궁즉소이종자도 역불가득이궁야니 차소이위현야니라)

비롯된 까닭을 이미 궁구(窮究)할 수 없은즉 마침도 역시 궁구할 수 없음이니 이것이 현현(玄玄)하다한 까닭이니라.

비롯함을 이미 가히 능히 다하지 못하면 곧 (그) 까닭 또한 가히 능히 다하지 못하리니, 이것이 (그) 깊은 까닭인 것이다.

此는 物之所以始者를 不可得而窮也라

차는 물지소이시자를 불가득이궁야라

此(차)는 物之所以始者(물지소이시자)를. 이것은 한 물건의 시작한 까닭을 不可得而窮也(불가득이궁야)라. 가히 다 알아낼 수 없다. 窮자는 궁구한다는 뜻입니다. 다 알아낼 수 없다. 다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요. 이것이 사물보다 먼저 됐어도, 아무리 궁구한다 해도 다 알아낼 수 없지요.

所以始者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도

소이시자를 기불가득이궁즉소이종자도

所以始者(소이시자)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기부가득이궁즉소이종자)도. 始者를, 처음 시작한 것을 가히 이미 다 궁구할 수 없은즉, 所以終者도, 시작을 우리가 다 알아낼 수 없다면 終者도, 그 마치는 것도

亦不可得而窮也니 此所以爲玄也니라)

역불가득이궁야니 차소이위현야니라)

亦不可得而窮也(역불가득이궁야)라. 또한 가히 다 알아낼 수가 없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此所以爲玄也(차소이위현야)니라. 이것이 玄이 된, 현묘함이 된 所以다. 까닭이다.

그리고 중간에 아주 좋지요.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공야아 유야아 오미지기소이로다

공(空)이냐 유(有)냐.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도다.

공[空]이냐? 유[有]이냐? 내가(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도다.

(說誼 ; 物體深玄에 虛澈靈通하야 有不定有요 無不定無니

(설의 ; 물체심현에 허철령통하야 유부정유요 무부정무니

(物自體는 볼 수 없다. 다만 우리의 눈망울 속에 나타난 그림자를 볼뿐이다. 그것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空과 有 두 가지를 놓고 무엇이라 할 것인가 망설인 것이다.) 물체가 현현(玄玄)하고[깊고 그윽하고] 비어 사무쳐 영통(靈通)해서, 있으되 결정코 있지 않고, 없으되 결정코 없지 않으니

물건의 체[體]가 깊으며 허[虛]하며 사무치며 신령하며 통하여 있음이 정해져 있는 있음이 아니며, 없음이 정해져 있는 없음이 아니니,

言語道가 斷하고 心行處가 滅일새 故로 云爾니라)

언어도가 단하고 심항처가 멸일새 고로 운이니라)

말로써 할 길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을사[言語道斷 心行處滅] 고(故)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말의 길이 끊어지며[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마음이 행할[마름이 갈] 곳이 없는 까닭으로 그리 이르는 것이다.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공야아 유야아 오미지기소이로다

空耶(공야)아 有耶(유야)아 吾未知其所以(오미지기소이)로다. 이것이 텅 빈 것이냐? 아니면 있는 것이냐?

吾未知其所以로다.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一物의 中道性, 일물의 중도성을 나타낸 말입니다. 모든 존재를, 유형ㆍ무형의 모든 존재를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中道로 봐야 됩니다. 그 중에서 특히 一心을, 한 물건의 문제를 中道로 봐야 됩니다.

이것이 있다고 치우쳐 봐도 안 되고ㆍ없다고 치우쳐도 안 되고, 사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연필이나 책이나 다 이것이 있다고도 할 수가 없고ㆍ없다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 사물이 다 그래요. 형상이 있는 것이든ㆍ형상이 없는 것이든 똑 같습니다. 그것이 전부 중도적으로 존재해요. 존재 원리가 중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중도적으로 봐야 그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이 “中道正見(중도정견).” 하도 ‘中道正見’ 노래를 많이 해서, 스스로 ‘中道狂(중도광)’이라고 그랬습니다. 성철스님 법문 테이프를 들어보면, 하도 中道라는 소리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中道狂이라고 한다.” 中道라는 것이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중도적으로 사물을 보는 겁니다. 사물을 이해하는 것. 중도적으로 사물을 이해하고ㆍ중도적으로 일심을 이해하고ㆍ중도적으로 우리육신을 이해하고ㆍ중도적으로 명예를 이해하고ㆍ중도적으로 돈을 이해하고ㆍ뭐든지 중도적으로 이해해야 그것이 中道正見이다.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명예나ㆍ돈이나ㆍ우리 육신이나ㆍ마음이나 전부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이것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내 그 까닭을 알지 못 하겠도다.

아~ 근사하지요? 여기까지의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입에 익숙하면 이것만 가지고도 법문 여러 수백 번 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다 부연하고ㆍ자기경험ㆍ자기지식, 살을 갖다 붙이면...

(說誼 ; 物體深玄에 虛澈靈通하야 有不定有요 無不定無니

(설의 ; 물체심현에 허철령통하야 유부정유요 무부정무니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物體深玄(물체심현)에. 물체가 깊고 현묘함에

虛澈靈通(허철영통)하야. 텅 비고ㆍ또 사무치고ㆍ맑고ㆍ靈通, 신령스럽게 통해서 有不定有(유부정유)요. 있다. 하더라도 결정코 있는 것이 아니요,

無不定無(무부정무)니. 없다. 하더라도 결정코 없는 것이 아니니

言語道가 斷하고 心行處가 滅일새 故로 云爾니라)

언어도가 단하고 심항처가 멸일새 고로 운이니라)

言語道(언어도)가 斷(단)하고 心行處(심행처) 滅(멸)일새. 이럴 때는 ‘가’자를 빼버려야 됩니다.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이라. 잘 쓰는 소리지요? 言語의 길이 끊어지고, 心行. 마음이가는 길이 또한 없어졌을세.

故(고)로 云爾(운이)니라. 故로 吾未知其所以로다. 라고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 그 자리는, 그 자리의 그 당체. 정말 그 자리의 속은.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입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또 생각으로도 안 됩니다. 言語道는 말ㆍ문자. 心行處滅은 생각ㆍ사량ㆍ사고로써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문중의 서문에 해당되는데요. 一物序중에서도 또 서론에 해당되는데 그 서론의 법문이 아주 근사합니다. 이것은 아주 명 법문입니다. 특히 여기까지가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이 <금강경>을 설하게 된 이유 같은 것, 또 석가모니부처님이 어째서 금강경을 이렇게 설했는가? 그 역시 이 한 물건, 有 一物. 한 물건이라고 하는 이 문제가지고 오늘날 석가모니가 됐고, 오늘날 <금강경>이 존재하게 됐다하는 그런 내용들로 쭉 이야기해나갈 차례입니다.

그러면 [1강-3]부터 쭉 읽고 끝내겠습니다. 같이 읽읍시다.

금강경 사가해 제2강 1부(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2011. 04. 19)

釋대원성 | 조회 241 |추천 1 |2011.07.25. 22:33

http://cafe.daum.net/yumhwasil/HsLO/7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 금강경 사가해강의 그 두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저런 서론을 좀 길게 한다고, 정작 본문은 얼마 못했습니다. 본문을 우리 소리 내서 한번 읽고 강의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설의(說誼)는 읽을 필요가 없고, 강의한 데까지 원문만 읽겠습니다.

有一物於此하니 絶名相호대 貫古今하고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內含衆妙하고 外應群機하며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不曰神乎아 昭昭於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정말 선불교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일물(一物)사상에 대한 것을 아주 확연히 잘 밝혔고, 그리고 글이 너무 간단명료하기 때문에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이 참 오묘합니다. 이것은 여러 수천 번ㆍ수만 번ㆍ읽어도 결코 손해가 되지 않을 그런 아주 명문이고,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부디 많이 읽으셔서 이러한 내용을, 불교의 생명이고 또 나아가서 우리 각자의 진정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데 까지 이르시기 바랍니다.

전통 경전 공부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論講(논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論ㆍ講. 우리가 쭉 숙소를 함께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도반들 끼리 며칠 씩 이렇게 모여서 論講을 하는 것이 공부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공부하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論講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論講이라고 하는 것은, 논문ㆍ논의, 그렇게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글을 가지고 우리가 같이 토론을 하는 것. 그 다음에 그 의미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것. 이것이 두 가지 논강(論講)의 주된 뜻인데요.

글을 가지고 토론을 많이 하다보면, 사실은 물리도 많이 나고, 정확하게 바로 새기는 훈련이 되고요. 그 다음에 그 의미를 가지고 토론을 하다보면, 불교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는 같은 공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ㆍ어디 발표할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만 논의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소견이 마음껏 표출이 되고, 또 그것을 귀담아 들으면 자신의 불교 관을 바로 세우는데도 상당히 도움이 될 공부 방법입니다. 이것이 수백 년 된, 아니, 불교역사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티벳 스님들 공부하면서 막 그냥 손뼉을 치고, 싸우듯이 토론을 하는 것 보셨지요? 그것이 결국은 論講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용이 우리하고 다르긴 하겠지만, 글도 익숙해지고, 특히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의미를 아주 거침없이 토론해 보는 데서 불교 관이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반들이 이렇게 모여질 수만 있으면, 며칠씩이라도 모여서 論講을 좀 해보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오늘은 9쪽.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이것이 텅 빈 것인가? 아니면 있는 것인가? 내 그 까닭을 알지 못 하겠도다.

이렇게 해놓고, 그 한 물건, ‘有一物於此’ 그랬지요? 마침 <선가귀감> 강의를 시작을 해서 거기도 첫 머리에 有一物於此로 출발을 하지요. 그 한 물건. 그것을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아가문이 득자일착자하사 보관중생이 동품이미하사 탄왈기재라하시고

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이 하나를 얻으시어, 중생(衆生)들이 다 같이 지니고[稟] 있으되, 모르고 있는 것을 두루 살피시고 탄식(歎息) 하실새 ‘신기(新奇)하다’ 하시고

우리 석가모니[迦文]께서 이 일착자(一著子)를 얻으시어 중생이 한가지로 받되(지니고 있으되) 모름을 널리 보시어 탄식하여 이르시되, “기이하구나!” 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향생사해중하사 가무저선하시며 취무공적하시니 묘음이 동지하고

생사고해(生死苦海)속을 향해 무저선(無底船)[밑 없는 배]을 타고서 무공적(無孔笛)[구멍 없는 피리]을 부시니 묘(妙)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震動)하고

살고 죽는 바다[生死苦海]의 가운데를 향하시어 밑 없는 배를 타시며, 구멍 없는 피리를 부시니,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법해가 만천이라 어시에 농애진성하고 고고실윤하야 대지함생이 각득기소하니

법해(法海)가 하늘 가득함이로다.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범부(凡夫)가 다 깨어나고 마른나무들이 다 윤택(潤澤)하게 되며 대지(大地)의 모든 생명들이 다 그 살 곳을 얻으니,

미묘한 소리가 땅을 움직이게 하며, 법해가 하늘에 가득하거늘,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이가 다 깨며, 시든(메마른) 것이 다 젖어 대지가 감싼 생물이 각각 그 (살) 곳을 얻었다.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아가문이 득자일착자하사 보관중생이 동품이미하사 탄왈기재라하시고

我迦文(아가문)이 得這一著子(득자일착자)하사, 그랬습니다. 我迦文. 我는, 우리들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석가문(釋迦文)’ 이라고 글월 ‘문(文)’자를 이렇게 써서, 이것은 音寫(음사)니까요. 音寫이기 때문에 釋迦牟尼라고도 표현 할 수가 있고, 釋迦文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이렇게 기록이 다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迦文 하면 석가모니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이 得這一著子하사, 이 ‘著’자가 사실은 ‘저’(著)로 됐는데, 혼용을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1강-2]. 이 一著子. 그냥 ‘일착자’입니다. 선문의 용어는 어떻게 우리말로 정확하게 전환이 안 됩니다. 一物.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한 물건” 하지만, 일착자(一著子) 같은 이것은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냥 “일착자” 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一著子를 얻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일착자(一著子)를 얻어 가지고서 普觀衆生(보관중생)이. 普觀. 널리 관찰해 보았다. 무엇을 관찰해 봤나요?

衆生이 同稟而迷(동품이미)하사, 그랬어요. 중생들이 다 같이 지녔다. 稟 자, ‘품’ 받다. 이런 표현입니다. 천연적으로 이어받아온 것을 稟이라 그럽니다. 同稟而迷하사. 같이 지니고 있으면서 미혹하고 있다ㆍ모르고 있다. 중생이 같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을 널리 관찰 하시사

歎曰奇哉(탄왈기재)라하시고, 탄식해 말씀하시기를 신기하다 = 奇哉라. 신기하다. 라고 그렇게 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향생사해중하사 가무저선하시며 취무공적하시니

向生死海中(향생사해중)하사. 生死의 바다 가운데를 향해서. “우리 인생사 중에” 이런 말입니다. 뭐 生死라는 것이 특별히 불교용어라기 보다, 그냥 우리 인생사 중에서 駕無底船(가무저선)하시며 吹無孔笛(취무공적)하시니, 이 글의 주인공이신 함허스님께서는 선사이시기 때문에, 경전을 해석하는데도 선문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無底船 = 밑 없는 배. 이것이 一物을 뜻하는 것입니다. 밑 없는 배를 노 저으시며, “멍에했다.” 하지만 배니까요. 노 저으시며

無孔笛, 이 역시도 一物을 가지고 어떤 그 선적인 용어를 표현할 때, 無底船이다ㆍ無孔笛다ㆍ또는 無影樹(무영수), 그림자 없는 나무 등등. 沒絃琴(몰현금)ㆍ無弦琴(무현금). 줄 없는 거문고. 이런 표현들을 아주 많이 씁니다. 똑 같지요. 無底船ㆍ無孔笛ㆍ無影樹ㆍ沒絃琴. 이런 것이 전부 같습니다. 밑 없는 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 이 한 물건만은 밑 없는 배입니다. 또 구멍 없는 피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한 물건이야말로 구멍 없는 피리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밑 없는 배를 노 저어서 無孔笛를 부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묘음이 동지하고 법해가 만천이라

妙音(묘음)이 動地(동지)하고 法海(법해)가 漫天(만천)이라. 아주 아름다운 소리, 妙音이 땅을 진동하고 法海가, 법의 바다가 하늘에 가득하더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어시에 농애진성하고 고고실윤하야

於是(어시)에 聾騃盡醒(농애진성)하고, 이에,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하나 깨달아서, 우리는 부처님깨달음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대개 교학적으로는 “空의 이치를 깨달았다ㆍ無我의 이치를 깨달았다ㆍ緣起의 이치를 깨달았다.” 이런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선문에서는 “空을 깨달았다ㆍ無我의 이치를ㆍ緣起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런 표현을 거의 안 합니다. “이 한 물건 깨달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불교의 正見. 바른 견해의 관점이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無我觀이요, 하나는 一物觀이다. 일물사상과 무아사상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문에서는 으레 “이 한 물건, 마음하나를 깨달았다.” 간단히 표현하면 그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을 깨닫고 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無底船을 노 저으며 無孔笛를 부시니 아름다운 소리가 뭐겠습니까? 부처님의 法音이지요. 천지를 진동하고 법의 바다가 하늘에 가득하더라.

그러니 그 법문 소리를 듣고 농애진성(聾騃盡醒)하고, 그랬습니다. “귀 먹고ㆍ어리석다.” 이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하면 “외도사견” 이런 말입니다. 외도들의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다 깨어나고, 여기는 귀 먹고ㆍ어리석은 사람들이 다 깨어나고 = 聾騃盡醒.

枯槁悉潤(고고실윤)하야, 둘 다 마를 고자지요. 아주 바짝 마른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다 윤택하게 되어서, 그런데 이것은 불교 안에서, 불교에 귀의해서 불교를 공부하느라고는 하지만, 소승들의 소견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바짝 마른 “윤기가 없다.” 왜냐? 대승보살심이 없으니까요. 자기만 위하니까요.

그래서 소견은 있기는 있되, 그것은 윤기가 없는 바짝 마른 소견에 가깝다. 해서 고고(枯槁)라고 표현 합니다. 그런 이들까지도 이 한 물건을 제대로 깨달으면 다 윤택해진다. 보살행이 절로 나온다.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대지함생이 각득기소하니

大地含生(대지함생)이 各得其所(각득기소)하니. 大地의 모든 생명들이ㆍ大地의 모든 생명들이 각각 그 있을 바를 얻었다. 其所 = 그 처소를 얻었다. 各得其所 =각각 그 처소를 얻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써놓고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해서 스스로 설의(說誼)를 달았습니다.

(說誼 ; 此物이 非聖非凡이로대 而凡而聖하며 非淨非染이로대 而染而淨이라

(설의 ; 차물이 비성비범이로대 이범이성하며 비정비염이로대 이염이정이라

이 물건은 성인(聖人)도 아니고 범부(凡夫)도 아니로되 능(能)히 범부이기도 하고 성인이기도 하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물든 것도 아니로되 때로는 능히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함이라.

이 물건은 성인도 아니며 법무도 아니로되 범부이며 성인이고, 깨끗함도 아니며 더러움도 아니로되 더러우며 깨끗한 것이니,

所以로 道호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하야

소이로 도호대 수파파사분하고 신피나금기하야

그러므로 이르시길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쥐고 몸에는 비단옷을 입기도 하며,

이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손에 깨뜨린 사기그릇 잡고 몸에 비단옷을 입으며

(說誼 ; 此物이 非聖非凡이로대 而凡而聖하며 非淨非染이로대 而染而淨이라

(설의 ; 차물이 비성비범이로대 이범이성하며 비정비염이로대 이염이정이라

설의(說誼) :

此物(차물)이, 이 한 물건이라고 하는 이 물건이

非聖非凡(비성비범)이로대,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지만,

그 한 물건은, 마음 그 자리를 어떻게 성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범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마음이라고 하는 말까지도 부득이 해서 붙인 이름인데, 거기에 중생이다ㆍ부처다ㆍ범부다ㆍ성인이다. 라고 하는 것은 더 불가피한 이름이지요. 그래서 성인도 아니고ㆍ범부도 아니지만 而凡而聖(이범이성)하며, 이럴 때 而자는 “능히 범부도 되고, 능히 성인도 되며,” ←이렇게 해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말 이을 而자. 虛字에 해당 되지만, “능히 범부도 되고, 능히 성인도 되며,”

非淨非染(비정비염)이로대, 청정한 것도 아니고, 더럽게 물든 것도 아니로되

而染而淨(이염이정)이라. 능히 물 들 수도 있고, 능히 청정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본래 천성이 선하다. 또는 악하다. 性惡說(성악설)이니ㆍ性善說(성선설)이니 하는 것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다 틀린 소리지요.

사실은 본래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불교가 참 바로 봤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인이라고 할 때, 정말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성인이라고 해야 되겠는가? 세상에 성인이라고 존경을 받는다든지, 우리가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요? 4대성인ㆍ5대성인이라고 한다든지, 또 어떤 종교에서는,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괜히 뒷사람들이 성인으로 격을 높여서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등등, 그럽니다. 요는 진정한 성인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본 사람. 특히 사람에 대해서, 사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못했는가? 이것을 가지고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성인과 가짜 성인을 그렇게 구분하면 된다.

모든 존재의 실상,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가치와 그 실상을 얼마나 제대로 파악했는가? 아닌가? 이것을 가지고 성인과 비 성인을 구분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은 우리 불자들은 그런 것을 확실히 하고 있어야 됩니다. 두루뭉실로 성인은 다 같다ㆍ종교는 다 같다. 그것 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우리 불자들도 그냥 무책임하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而染而淨이라.

所以로 道호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하야

소이로 도호대 수파파사분하고 신피나금기하야

所以(소이)로 道(도)호대, 그러므로 말하기를

手把破砂盆(수파파사분)하고 身披羅錦綺(신피나금기)하야. 손에는 破砂盆을 들었다. 破砂盆 = 깨어진 사발. 그런 말입니다. 깨어진 사발. 그러니까 거지가 밥을 얻어먹는데, 무슨 온전한 그릇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깨어진 사발 조각 하나 들고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신피나금기(身披羅錦綺)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비단입니다. 전부 비단을 입었다. 이것은 거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정반대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지요. 때로는 잘못하면 우리가 거지가 될 수가 있고, 혹은 아주 고귀한, 부귀공명을 누리는 고귀한 사람도 될 수가 있다.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라하니

유시에 취주매인이라가 홀이소향작례라하니

때로는 술에 취하여 사람을 꾸짖다가도 홀연히 향을 사루고 예를 드린다 하니,

이따금 술에 취하고 사람을 꾸짖다가도 문득 향을 피우고 절한다 한 것이다.

比之空日컨대 空豈長晴이며 亦豈常雨며 日豈長明이며 亦豈常暗이리오

비지공일컨대 공개장청이며 역기상우며 일개장명이며 역개상암이리오

저 허공의 해에 비유한다면 허공이 항상 어찌 맑기만 하며 또한 어찌 늘 비만 오며 해가 어찌 길이 밝기만 하며 또한 어찌 늘 어둡기만 하리오.

허공과 해에 비교한다면 허공은 어찌 항상 개며 또 어찌 항상 비가 오며 해는 어찌 항상 밝으며 또 어찌 항상 어둡겠는가?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라하니

유시에 취주매인이라가 홀이소향작례라하니

有時(유시)에는 醉酒罵人(취주매인)이라가, 술에 취해서 사람을 꾸짖다가 또

忽爾燒香作禮(홀이소향작례)라하니, 홀연히 부처님 앞에 가서 향을 사르고 예배를 올린다. 이것은 아주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글로 풀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禪文이라고 하는 것은, 선사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알듯 말듯 하면서도 뭔가 여운이 많이 남고, 의미심장한 것이 나타나 있지요. 때로는 거지가 되기도 히고, 때로는 아주 귀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표현보다는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라.

또 미친 사람이 되가지고 술에 취해서 사람을 꾸짖는다. 그러니까 술 취해놓으면 앞 뒤 안 가리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부처님 앞에 와서 향을 사르고 예를 짓는다. 참 아주 멋진 글입니다. 이런 것이 옛날 조사스님들이 아주 좋아 하는 글들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정반대의 입장으로 살아갈 수가 있고, 표현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말입니다. 서문의 원문도 좋지만, 이런 표현들이 아주 너무 좋지요.

比之空日컨대 空豈長晴이며 亦豈常雨며 日豈長明이며 亦豈常暗이리오

비지공일컨대 공개장청이며 역기상우며 일개장명이며 역개상암이리오

比之空日(비지공일)컨대, 그러한 상황을, 앞에 所以로 道호대, 부터 네 구절, 이와 같은 상황들을 空.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이라고 잘 말 안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무조건 하늘이지요. 하늘과 태양에다가 비유하건대 이 比자가 비교할 비자인데, 비유할 譬(비)자하고 역시 또 혼용합니다.

比자를 써놓고 비유한다 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교한다고 하기도 하고, 비교와 비유는 전혀 다르거든요. 비유할 譬자를 써놓고 비유한다 하기도 하고, 그러나 비교라고는 안 하지만, 그렇게 합니다. 하늘과 태양에다가 비유를 해서 말해본다면,

空豈長晴(공기장청)이며, 하늘이 어찌 늘 맑으며, 그렇지요. 순서대로 새깁니다. 하늘이 어찌 늘 맑으며

亦豈常雨(역기상우)며, 또한 어찌 항상 비만 내리겠는가? 그렇지요. 비 오다가 개이고, 개이다가 비오고 그렇지요. 우리 일물의 작용이 사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기 전에 누구하고 싸웠을 수도 있고, 화도 냈을 수도 있고, 얼마든지 어떤 희로애락에 젖어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오면, 그런 것 다 잊고 오로지 성인의 가르침에 이렇게 몰두 한다고 하는 것 그대로 잘 표현했지요. 얼마나 멋집니까?

日豈長明(일기장명)이며, 태양이 어찌 늘 밝기만 하는가? 또

亦豈常暗(역기상암)이리오? 또한 어찌 항상 어둡기만 하리오?

그렇습니다. 해가 넘어가면 어둡고ㆍ구름 끼면 어둡고ㆍ해가 떴어도 구름 끼면 어둡고 늘 한결 같지는 않은 것이지요. 참 이 한 물건에 대한, 우리의 주인공ㆍ우리의 참 생명ㆍ또 진실 생명입니다. 이것야말로 진실 생명이지요. 진실한 생명이고 이 생명의 격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무량공덕 생명이며, 그 또한 나의 생명과 똑 같은 그 한 물건. 그것을 지금 이렇게 아주 근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一念迷也에 雲起長空하야 上明下暗하고

일념미야에 운기장공하야 상명하암하고

한 생각이 미혹하면 구름이 허공에 일어나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게 되고

한 생각(잠깐) 미혹하매 구름이 긴 허공에 일어나서 위는 밝고 아래가 어두우며,

一念悟也에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하니 染淨所以興也며 聖凡所以作也니라

일념오야에 풍소미운하야 상하통철하니 염정소이흥야며 성범소이작야니라

한 생각을 깨달으면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서 상하가 훤출해지니 더럽고 깨끗함[染淨]이 이로써 일어나는 바이며 범성(凡聖)이 이렇게 지어지도다.

한 생각(잠깐) 깨들으매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서 아래위가 훤히 통하니, 더러우며 깨끗함이 일어나는 까닭이며, (이로써) 성인과 범부가 되는 까닭이니,

一念迷也에 雲起長空하야 上明下暗하고

일념미야에 운기장공하야 상명하암하고

그래서 一念迷也(일념미야)에, 한 순간 미혹하면

雲起長空(운기장공)하고, 구름이 長空에서 일어나고, 저 넓은 하늘에서 일어나서

上明下暗(상명하암)이요. 위에는 밝고 밑에는 어두워요. 이것을 요즘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잘 다니니까, 밑에는 비 오는데 잠깐 올라가면 아주 환하게 해가 떠서 비추는 걸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上明下暗입니다. 위에는 밝고 밑에는 어둡고,

一念悟也(일념오야)에, 한 순간, 一念은 한 생각이 아니라 언제나 한 순간입니다. 시간의 가장 짧은 단위를 우리가 “찰라” 라고 하는데 찰라보다 더 짧은 것이 一念입니다.

一念悟也에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하니 染淨所以興也며 聖凡所以作也니라

일념오야에 풍소미운하야 상하통철하니 염정소이흥야며 성범소이작야니라

한 순간 깨달으면 風掃迷雲(풍소미운)하야,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다 쓸어버려서,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상하통철)하니, 이럴 때, 洞→ 통이라고 발음하지요? 상과 하가 洞徹. 툭~ 터져서 사무쳤으니

染淨이 所以興也(염정소이흥야)며, 물든 것과 청정한 것. 더러운 것과 청정한 것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며 = 所以興也.

聖凡이 所以作也(성범소이작야)라. 성인과 범부가 지어지게 된, 만들어지게 된 까닭이다. 그렇지요. 우리의 그 한 물건의 입장은 부처님이나 미혹한 중생이나 똑 같습니다. 똑 같은데, 그것이 때로는 우중충하게 구름이 낄 수도 있고, 탐 진 치 삼독으로 구름이 뒤덮일 수도 있고 정말 또 때로는, 보통 사람도 그래요. 하루 중에 아주 맑고 밝아서 성인의 마음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을 경우도 있습니다. 뭐 뿐이겠습니까? 하루 24시간 중에 지옥도 수 없이 드나들고, 아귀ㆍ축생ㆍ아수라 이런 것도 몇 번 씩 하루 중에 왕래 하면서 윤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윤회하는 어떤 현상들을 우리가 너무 관심 쓸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 주인공 = 한 물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聖凡이 旣作則感應이 生焉하야 凡在迷而渴仰風化하고 聖在悟而爲物興悲하나니

성범이 기작즉감응이 생언하야 범재미이갈앙풍화하고 성재오이위물흥비하나니

성인(聖人)과 범부가 이미 지어진 즉 감응이 일어나서 범부가 미혹하므로 성인의 교화(敎化)를 목마르게 우러르고, 성인이 깨달으매 중생을 위해서 자비를 일으키시니

성인과 범부가 이미 일어나면 곧 감응이 나서 범부는 미혹에 있어서 (성인의) 교화를 목마르게 우러르고 성인은 깨달음에 있어서 사물[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일으키니,

聖凡이 旣作則感應이 生焉하야 凡在迷而渴仰風化하고 聖在悟而爲物興悲하나니

성범이 기작즉감응이 생언하야 범재미이갈앙풍화하고 성재오이위물흥비하나니

聖凡(성범)이 旣作則(기작즉), 성인과 범부가 이미 지어진즉은

感應(감응)이 生焉(생언)하야, 감동해서 응하는 것이 생기고,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느끼지요? 느끼면 거기에 응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처럼 공부하는 곳이 생겼다ㆍ거기에 가서 공부한다.’ 이것이 感應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어떤 감응을 준다.” 이런 표현들을 흔히 하는데요. 그것은 멀리 있는 이야기고요. 실지로 우리가 하고 있는 입장을 가지고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凡在迷而渴仰風化(범재미이갈앙풍화)하고. 범부가 미혹에 있어서 갈앙풍화(渴仰風化)하고, 風化를 渴仰한다. 목마르게 우러러보고 있다. 風化는 교화지요. 부처님 敎化ㆍ성인의 교화를 우러러보고 있고

聖在悟而爲物興悲(성재오이위물흥비)하나니. 성인은 깨달음에 있어서 爲物興悲. 그렇습니다. 物 = 중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을 위해서ㆍ중생들을 위해서 興悲라. 자비를 일으킨다ㆍ연민심을 일으킨다. 이 글이 참, 사실은 한 구절 가지고 실컷 이야기하고 넘어가고ㆍ또 실컷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은 그런 그야말로 주옥같은 내용들입니다.

所以로 我迦文이 於寂滅場中에 初成正覺하사 作獅子吼하사대 奇哉奇哉라

소이로 아가문이 어적멸장중에 초성정각하사 작사자후하사대 기재기재라

이 까닭에 석가모니불께서 적멸도량 가운데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시어 사자후(獅子吼)를 지으시고, '참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런 고로 우리 석가모니께서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사자후를 지으시되, “기이하구나!

普觀一切衆生호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但以妄想執著으로 而不證得이라하시고

보관일절중생호니 구유여내지혜덕상이언마는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부증득이라하시고

일체 중생을 두루 살피니 여래(如來)와 같은 지혜덕상(智慧德相)을 두루 갖추고 있건마는 다만 망상(妄想) 집착(執着)으로 증득(證得)치 못한다 하시니,

일체 중생을 널리 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다) 갖추어 두었으되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까닫지 못하는구나!” 하시고, 【적멸은 고요하고 없어지는(죽는) 것이니, 불성 가운데 한 모양도 없는 것이다. 장(량, 場)은 도리를 닦는 마당이고, 중(中)은 가운데이다.】

所以로 我迦文이 於寂滅場中에 初成正覺하사 作獅子吼하사대

소이로 아가문이 어적멸장중에 초성정각하사 작사자후하사대

所以(소이)로 我迦文(아가문)이 於寂滅場中(어적멸량중)에. 적멸도량 가운데서

初成正覺(초성정각)하사, “적멸도량” 하면 부다가야,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신 곳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적멸도량 가운데서 初成正覺하사, 처음 正覺을 이루사

作獅子吼(작사자후)하사대, 사자후를 지으사대ㆍ사자후를 지으사대

奇哉奇哉라

기재기재라

奇哉奇哉(기재기재)라.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것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있는 말입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 모습을 그려놨는데 아주 좋은 글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이 구절이 화엄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이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奇哉奇哉라. 출현 품에 말하기를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普觀一切衆生호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보관일절중생호니 구유여내지혜덕상이언마는

普觀一切衆生(보관일체중생)호니, 일체중생들을 널리 관찰 하니

具有(구유), 갖추고 있다. 무엇을요? 如來智慧德相(여래지혜덕상)이언마는. 여래가 가지고 있는 智慧와 德相을 그대로 다 갖추고 있건만

但以妄想執著으로 而不證得이라하시고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부증득이라하시고

但以妄想執著(단이망상집착)으로 而不證得(이불증득)이라.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써 證得하지 못한다.

여기에도 열 가지가 화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경지가 워낙 수승하고, 물론 공을 많이 들였지요. 6년 고행과 당신이 알고 싶었던 그런 어떤 기대감이 참 컸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말하자면 알맞은 큰 깨달음을 성취 했습니다.

그 깨달음을 성취하기까지 그 과정을 우리가 대강 살펴보면, 태자의 신분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금지옥엽 귀한 태자의 신분으로 고행을 했는데요. 고행을 아무렇게나 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피나는 고행을, 고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주 심한 고행을 6년이나 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천민이라면 그까짓 것 고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흙을 손에 만져보지도 않았고, 정말 귀하고 귀하게 자란 태자의 몸으로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행을 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그것은 참~~, 이제 부처님오신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높이 사야 됩니다. 천한 사람이 고행하는 것이야 평소의 생활도 고행인데요 뭘...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하고 나서 마지막 7일 간 선정에 들어서 깨달음을 성취 하셨는데요.

그 깨달음을 성취하기까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으며, 사실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습니까? 왕위를 계승 받을 그런 아주 어마어마한 지위를 포기를 했지요? 그리고 6년 고행이라고 하는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혼자 아~~ 즐기면서, 또 환희에 들떠 있기도 하고, 제대로 깨달았나? 어쨌나? 스스로 검증도 해보기도 하고, 이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을 관찰했습니다.

普觀一切衆生 했지요? 일체중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어요. 그 인도사람들 상황을 잘 아시지만, 어떻습니까? 4성 계급이 있고, 또 그 밑에 불가촉천민 이라고 해서 정말 ‘저것이 인간인가? 동물인가?’ 우리나라 같으면 동물도 그렇게 취급하지도 않고, 그렇게 험하게 키우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비가 오는데, 그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비가 오는데 저 사람들 왜 밖에 나와서 생비를 맞느냐?” 그러니까 “안에 있으면 흙이랑 더러운 물이 떨어져서 밖에 나와서 비를 맞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은 환경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하더라고요. 불가촉천민들은 지금 그런 상황에 삽니다. 신발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담요하나면 옷도 되고, 이불도 되고, 모든 것을 다 해결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지금 그러는데, 3000년 전에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까지도 부처님은 낱낱이 살펴본 겁니다. 普觀一切衆生. 살펴보니까 웬걸... 당신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깨달음이고 부처의 경진데, 그 불가촉천민에게 까지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뭐라고요?

여래의 智慧와 德相을 具有. 갖추고 있더라. 공히 갖추고 있더라. 똑 같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 신기하지요.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그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당신은 그 좋은 왕위까지도 다 포기하고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을 하고 얻어낸 경지인데, ‘저 사람들은 전혀,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기가 갖추고 있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 하는 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편 참 억울합니다. 그러면서 한편 너무 신기합니다.

부처님 같은 분이 뭐가 신기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촌사람들이나 어디가면 신기하지, 세존이 뭐가 신기하겠습니까? 그런데 평생을 통해서 딱 한번 신기하다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화엄경>에서 기재기재(奇哉奇哉)라, 신기하고 신기하다.

당신이 깨달으신 그 경지를 모든 사람들이 공히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이 신기한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히 이해해야 되고ㆍ믿어야 되고ㆍ이것을 우리가 활발발하게 써야 됩니다. 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면 사실은 불법 끝입니다. 특히 선불교에 있어서는 이 문제 하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면...

금강경 사가해 제2강 2부(我迦文이의 說誼-奇哉奇哉라~)|(2011. 04. 19)

釋대원성 | 조회 239 |추천 2 |2011.07.2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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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내용들입니다.

奇哉奇哉(기재기재)라. 普觀一切衆生(보관일체중생)호니. 일체중생을 널리 관찰 하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具有(구유),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妄想執著(망상집착)으로, 다만 妄想執著으로, 證得(증득)하지 못하고 있다.

망상집착(妄想執著)이 여기서 뭐겠습니까? 뭐 돈 좋아하고ㆍ명예 좋아하고ㆍ벼슬 좋아하는 것, 이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말하자면 ‘내가 중생이다. 나는 부처의 그 어떤 경지, 여래의 지혜와 덕상 이라고 하는 것은 나하고는 아득한 그런 거리에 있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고ㆍ비하하는 것. 이것이 妄想執著입니다.

우리가 보통 妄想執著 하면, 무슨 다른 일상사에 妄想하고 執著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가 아주 비굴하고ㆍ아주 못나고ㆍ온갖 탐 진 치 삼독과 8만 4천 번뇌로 뒤덮여 있다고 하는 이런 못난 중생으로 보는 그 생각입니다. 그것이 妄想執著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실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알면, 그것만 없으면 그냥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로써 활발발 하게ㆍ자신 있게 사는 것인데,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아~~ 참 나하고 똑 같은데? 너무나도 똑 같은데! 너무나도 똑 같은데 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를 뿐이고, 나는 알 뿐이다.’ 그러니까 6년 고행도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고행 안한 사람도 똑 같고ㆍ고행 한 사람도 똑 같고, 깨달은 사람도 똑 같고ㆍ깨닫지 못한 사람도 똑 같아요. 알고 모르고 간에 그 가치는 똑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려청자. 수 억짜리 고려청자를 가지고 있다. 그 고려청자인 줄 아는 사람이나, 고려청자인 줄 모르고 개 밥그릇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고려청자의 가치는 똑 같아요ㆍ고려청자의 가치는 똑 같습니다. 길거리에 내놓고 개 밥그릇으로 쓰든ㆍ박물관에서 아주 삼엄한 경비 하에서 그것을 전시하고 있는 그런 고려청자이든 그 가치는 똑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알아야 됩니다. 이런 문제 알면 그 다음부터는 불교ㆍ이 금강경 사가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어떤 불교도 다 풀리는 문제입니다.

於是에 運無緣慈하시며 說無言言하사 廣演敎海하야 徧注衆生心地하사

어시에 운무연자하시며 설무언언하사 광연교해하야 변주중생심지하사

여기에 인연 없는 자비(慈悲)를 굴리시며[運] 무언(無言)의 설법을 하시고 널리 가르침의 바다[敎海]를 펴서[演] 두루 중생의 마음[心地]에 넣어주시며[注]

이에 인연 없는 자비를 움직이게 하시며, 말씀 없는 말을 이르시어 널리 교해(敎海)를 펴시어 중생의 마음 바탕[心地]에 널리 부으시어

使之道芽로 榮茂하고 心花로 發明케하시니 大地同春에 萬物이 咸熙로다)

사지도아로 영무하고 심화로 발명케하시니 대지동춘에 만물이 함희로다)

도(道)의 싹으로 하여금 번성[榮茂]케 하고 마음의 꽃[心花]이 환하게 피게[發明] 하시니 대지가 똑같이 봄을 맞이하여 온갖 만물이 감동하여 빛나도다.

도의 싹이 피어 성하게 하며 마음의 꽃이 밝게 피어 대지가 함께 봄이며, 만물이 다 밝게 하셨다.

於是에 運無緣慈하시며 說無言言하사 廣演敎海하야 徧注衆生心地하사

어시에 운무연자하시며 설무언언하사 광연교해하야 변주중생심지하사

그래서 於是(어시)에, 이에

運無緣慈(운무연자)하시며. 인연 없는데, 인연 없는 사람까지도 제도하려고 하고, 건지려고 하는 그런 자비를 운전하시며, 無緣慈. 중요하지요.

인연 있는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자비를 베풀고, 친절을 베풀고 배려하는 것이야 그것은 보통 사람 다 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성인들은 無緣慈를 베푼다고 하는 사실. 나하고 전혀 인연 없는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푼다. 그리고 說無言言(설무언언)이라. 말없는 말을 설했다. 잘 아시고 있는, 부처님은 49년간 8만 대장경을 설해놓고도 나는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입장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 無言言입니다. 말없는 말을 설하셨어요.

부처님은 처음부터 그랬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아이고, 고생스럽게 이 먼데 까지 와서 내가 강의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無言言입니다. 말없는 말을 설하셨다.

廣演敎海(광연교해)하야, 敎海. 가르침의 바다에 널리 연설하셔서

徧注衆生心地(변주중생심지)하사, 衆生心地. 중생의 마음 땅에다가 물대듯이 두루두루 대주었다. 敎海니까요. 가르침의 바다니까요. 그 가르침의 바다를 우리의 마음 땅에다가 대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성인의 가르침을 펼치고ㆍ보고ㆍ강의를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徧注衆生心地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땅에다가 함허스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물대듯이 죽죽 대주는 겁니다. 그것이 언제 효과를 볼는지 그것은 시간문제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使之道芽로 榮茂하고 心花로 發明케하시니 大地同春에 萬物이 咸熙로다)

사지도아로 영무하고 심화로 발명케하시니 대지동춘에 만물이 함희로다)

使之道芽(사지도아)로, 도의 싹으로 하여금

榮茂(영무)하고. 아주 무성하고ㆍ번영하고ㆍ무성하게, 번성하고ㆍ무성하게 하고

心花(심화)로 發明(발명)케하시니. 마음의 꽃으로 發明하게 한다.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한다.

그렇지요. 우리가 공부하는 뜻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성인의 가르침을 우리는 다행히 이 훌륭한 성인의 가르침인 경전이 많이 전해져서 우리가 마음만 내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가 있고, 그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가르침의 바닷물이 우리의 마음에 넘쳐흐르게 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도의 싹이 무성하게 하고,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하시니,

大地同春(대지동춘)에 萬物(만물)이 咸熙(함희)로다. 대지에 같이 봄이 왔어요. 어떻게 우리가 계절을 잘 맞추었습니다. 대지에 같이 봄이 옴에, 만물이 다 같이 빛나도다. 그렇습니다. 오늘 오면서 산천을 바라보니까 하나하나가 다 꽃입니다. 꽃만 꽃이 아니라, 나뭇잎ㆍ풀잎 다 꽃입니다. 어찌 그렇게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마침 우리가 공부하는 내용이 이렇게 표현이 됐습니다. 이것은 다 비유지요. 하나의 비유로써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상태가ㆍ마음상태가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와 같이 아주 밝고, 맑게 변화하는 어떤 현상을 대지에 봄이 오는 것처럼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한 물건을 얻어가지고 깨달았다 이 뜻이겠지요. 그래가지고 한 생을 살아오면서 만 중생에게 베푸신 그 혜택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안에 구석구석에 사실은 설명할 내용들이 많고, 생각할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의 부연설명은 모두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도 설명이 좀 장황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요. 사실은 그 안에 설명할 꺼리가 더 많지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스님들, 그리고 불자님들의 몫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말 더 많이 계발 해내야 되겠지요.

이제부터 금강반야경에 대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금반야경자는 묘음지소류요 법해지소자자야라

지금의 반야경(般若經)이라는 것은 묘음(妙音)이 흘러나온 바이며 법해(法海)가 이[金剛經]로부터 흘러온 바로다.

이제 반야경은 묘음(妙音)이 흐른 곳이며, 법해가 의지한 곳이다.

(說誼 ; 般若는 一物之强稱이요 經者는 現物之具也라

(설의 ; 반야는 일물지강칭이요 경자는 현물지구야라

반야(般若)는 한 물건을 굳이 말한 것이요, 경(經)이란 것은 한 물건을 나타내는 도구니라.

반야는 한 물건을 굳이 말함이고, 경은 물건을 나타내는 그릇이니,

此乃金口親宣이요 不是餘人之所說이니 法門淵源이 不同??之敎乘이니라)

차내금구친선이요 불시여인지소설이니 법문연원이 부동쇄쇄지교승이니라)

이는 부처님(金口)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설(說)한 것이 아니니, 법문(法門)의 깊고 깊은 근원[淵源]이 자질구레[??]한 작은 가르침[敎乘, 小乘]과 같지 않도다.

이는 금구(金口)로 친히 펴신 것이라서 다른 사람이 말한 바가 아니니, 법문의 깊은 근원이다. 자질구레한 교승[小乘]과 같지 아니한 것이다. 【금구는 부처님의 입을 사뢰니, 부처님의 몸이 금색이므로 금구라 한 것이다.】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금반야경자는 묘음지소류요 법해지소자자야라

今般若經者(금반야경자)는. 지금 우리가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라고 하는 경을 대하고 있는데요. 지금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은

妙音之所流(묘음지소류)요, 저 妙音이 뭐라고요? 흘러나왔다고 그랬지요. 妙音이 대지를 진동했다. 땅을 진동했다. 그런데 금강경. ←이것은 뭐냐? 그 妙音. 부처님의 아름다운 말씀의 소리. 그것이 흘러나온 곳. 所流. 흘러나온 곳이다. 그렇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부처님의 妙音이 다른 것이 아니지요.

法海之所自者也(법해지소자자야)니라. 법의 바다가ㆍ법의 바다가 시작한 곳이다. 所自. 이것을 옛날식으로 새기면 “부터 한 바라.” 그랬어요. “부터 한 바짜라.” 옛날 강원에 그렇게 새겼습니다. 부터 ‘自’자니까요. 시작한 곳이다. 부터 한 바짜라. 法海가 여기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흘러가서 저기 우리 팔공산 개울물이 흘러서ㆍ흘러서 낙동강으로 가서 결국은 바다에 가듯이, 말하자면 바로 부처님의 법의 바다. 아무리 많고 많다 하더라도 이 <금강경>으로부터 흘러간 바다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또 부연 설명이 계십니다.

(說誼 ; 般若는 一物之强稱이요 經者는 現物之具也라

(설의 ; 반야는 일물지강칭이요 경자는 현물지구야라

설의(說誼) :

般若(반야)는 一物之强稱(일물지강칭)이라. 一物을 强稱. 억지로 일컬은 것이다. 억지로...

“반야ㆍ반야” 하는 것도 사실은 시명(是名) 반야지요. 금강경에 나오겠지만, 반야는 우리가 지혜라고 하지만, 그것도 한 물건에 대해서. 한 물건을 두고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데, 그것을 억지로 한 번 말해본 것이다. 강칭(强稱). 또

經者(경자)는, 經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現物之具也(현물지구야)라. 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一物. 一物이라고 하는 그 한 물건을 나타내는 도구다. 아주 좋지요. 經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찻잔” 이라고 하는 것은 차를 담는 도구지요. 경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요? 우리 한 물건을 나타내는 도구다. 그래서 우리가 경을 볼 때ㆍ경을 볼 때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봐야 됩니다.

靑梅祖師(청매조사)의 ‘十無益頌(십무익송)’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요. 心不返照(심불반조) 看經無益(간경무익).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다가 반조(返照)해보지 아니하면, 돌이켜서 비춰보지 아니하면 看經無益이다.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心不返照看經無益. 이것이 우리가, 불교에서는 어록을 보든지 경전을 보든지 간에, 보는데 첫째 마음자세입니다. 경에 대한 마음자세. 결국은 경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을, 一物을 담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담는 도구다ㆍ마음을 나타내는 도구다, 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면 전부 우리 마음에다 비춰서 해석하고ㆍ마음에 비춰서 생각해보고요.

예를 들어서, 논강 이야기를 했는데 논강 하다가도 뭐가 안 풀리면 마음의 원리에 비춰서 해석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불교는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 열쇠는 오로지 마음 하나입니다. 사실은 어떻게 보면 쉽지요. 그 열쇠가 마음 하나니까요. 마음이라고 하는 그 열쇠 하나로 풀면 다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거기에 그 열쇠로 풀리지 않는 것은 전부 방편입니다. 방편불교예요. 물론 안 풀리지 않는 것이 많지요.

그것은 방편불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편불교, 그것은 그렇게 크게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문제니까요. 그래서 한 물건을 나타내는 도구다ㆍ한 마음을 나타내는 도구다. 라고 했습니다.

此乃金口親宣이요 不是餘人之所說이니 法門淵源이 不同??之敎乘이니라)

차내금구친선이요 불시여인지소설이니 법문연원이 부동쇄쇄지교승이니라)

此乃金口親宣(차내금구친선)이요, 이것은 이에 金口. 부처님 입을 金口 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 = 깨달은 사람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싯달태자가 깨닫지 아니했으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 불교에서 무슨 기념일을 성대하게 하는데요. 초파일 보다는 사실은 成道日(성도일). 그것을 사실 훨씬 비중 있게 해야 됩니다. 생일 그것 뭐 그렇게 중요 합니까? 생일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워낙 위대하신 분이니까 그 분의 생일도 우리가 성대하게 치르긴 합니다만, 다행히 대구에서는 성도재일 행사를 어느 도시, 어느 지역보다도 성대하게 하는데. 참~ 그것은 옛날부터 제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라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정말 成道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말씀이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親宣이라. 친히, 金口로서. 깨달은 분의 입으로서 친히 편 것이다. 금강경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不是餘人之所說(불시여인지소설)이니, 다른 사람 = 餘人. 나머지 사람들이 설한 바가 아니다. 그랬습니다. 함허스님께서, 이 말속에는 분명히 僞經(위경)이라고 할까? 또 어떻게 보면 너무 방편에 흐르는 그런 가르침들도 많이 있고 하기 때문에 아마 그런 뜻이 조금 담겨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설한 바가 아니다.

法門淵源(법문연원)이, 법문의 淵源이

不同瑣瑣之敎乘(부동쇄쇄지교승)이니라. 瑣瑣한 敎乘과는 같지 않다. 아주 부스러기 ‘쇄(瑣)’자지요. 쇠를 다루다보면 대개 부스러기 쇠가 많이 나오는데, 옥이나 쇠나... 瑣瑣한, 아주 부스러기, 소소한 그런 敎乘과는 같지 않다. 금강경은 다른 경과 격이 다르다 이런 말입니다.

이 ‘乘’자가, 우리 “대승ㆍ소승ㆍ보살승ㆍ성문승ㆍ연각승” 이런 표현들이 많지요. 乘자는 敎法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봐버리면... 말하자면 敎法이 많은 사람을 다 같이 제도 할 수 있는 敎法이라면 대승이라고 그러고,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敎法이라면 그것은 소승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이금강지견리로 잔아인지조림하시고 조혜일어중혼하시며 개혹무어삼공하사

금강(金剛)의 굳고 날카로운 것으로써 아인(我人)의 조림(稠林)[번뇌의 숲]을 끊으시고 지혜(智慧)의 태양으로 중혼(重昏)[첩첩의 어두움]을 비추시며, 미혹(迷惑)의 안개[惑霧]를 삼공(三空)[我空 · 法空 · 俱空]으로 여시사

금강의 굳으며 날카로움으로 아상과 인상의 빽빽한 (번뇌의) 수풀을 베시고 혜일(慧日)로 겹친 어두운 데를 비추시며 혹무(惑霧)를 삼공(三空)에 여시어, 【삼공(三空)은 인공(人空)과 법공(法空)과 구공(俱空)이고, 안개 가림[惑霧]이 무명혹(無明惑)이 진성(眞性)을 가림과 같은 것이다.】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이금강지견리로 잔아인지조림하시고

以金剛之堅利(이금강지견리)로, 금강의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으로써, 금강반야지요?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 이런 뜻입니다. 금강의 지혜. 다이아몬드와 같은 그런 지혜는, 아주 견고하고 날카로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날카롭다. 그런 말입니다. 비유니까요.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각을 내는 데는 다른 쇠로써는 각을 못 낸다지요. 다이아몬드만이 다이아몬드를 각을 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서 제일 견고한 물질로 되어있지요. 그리고 그것은 날을 세워 놓으면 제일 날카롭습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그와 같습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뭘 하지요?

剗我人之稠林(잔아인지조림)이라. 잔(剗), 깎아버린다ㆍ싹 잘라버린다. 我人之稠林. 我와 人에 대한,

나다ㆍ남이다하는, 나다ㆍ남이다하는 그런 소견에서 출발해서 온갖 좋지 않고, 삿되고 나쁜 소견들이 우리 마음속에는 아주 빽빽하게, 빽빽할 ‘조(稠)’자지요. 빽빽한 숲과 같아서, 조림(稠林)이라는 말 잘 씁니다.

숲이요? 좀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어야 사람들이 가서 쉬기도 하고ㆍ지나가기도 하고ㆍ깃도 날 수가 있는데, 너무 빽빽하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 我見ㆍ人見, 나의 어떤 소견ㆍ또 다른 사람에 대한 소견. 이것이 앞으로 계속 我ㆍ人에 대해서 나올 것인 데요. 그런 생각은 참~~ 

이것이 우리가 그냥 쉽게 상대하면 모든 사람이 다 소통이 가능한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한 사람도 서로가 소통되지 않아요. 통하지가 않습니다.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저 양보하고 ‘참자, 시끄러우니까 참자.’ 이익이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이렇게 해서 그렇지, 사실 솔직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다~~ 털어 내놓고 ‘같은가?ㆍ다른가?’ 를 우리가 맞추어 보려면 그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됩니다. 물도 흐르지 않아요. “바람도 안통하고 물도 흐르지 않는다.” 이런 표현들이 또 많이 나옵니다. 그런 좁은 소견들을, 빽빽한 그런 소견을 이 금강반야의 지혜로써 다 잘라버린다. 또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조혜일어중혼하시며 개혹무어삼공하사

照慧日於重昏(조혜일어중혼)이라. 지혜의 태양이 重昏. 아주 무거운 어두움을 비춘다.

<금강경>의 지혜는 태양처럼 밝습니다. 그래서 慧日이라고 했습니다. 지혜 慧자ㆍ태양 日자. 지혜의 태양. 캄캄한 어두움은 우리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어두움을 다 환하게 비춰버린다. 날씨가 아무리 어둡고 그래도 태양이 떠버리면 환 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금강경의 지혜는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아~ 참! 지혜라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가 살면서 지혜같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불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가 아니라,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지혜가 있고, 그 다음에 자비입니다. 그 다음에

開惑霧於三空(개혹무어삼공)이라. 惑霧를 三空에서 연다. 그랬습니다. 미혹의 안개. 미혹의 안개를 三空에서 연다.

미혹의 안개를 三空이라고 했는데요. 금강경 역시도 본문에 들어가면. 三空이라고 하는 것도, 금강경 대의가 이야기가 될 텐데, 三空 = 法空(법공)ㆍ我空(아공)ㆍ俱空(구공). 我 = 주관 적인 것. 法 = 객관적인 것. 俱空 = 주관과 객관이 함께 다 공한 것. 그것을 <금강경>에서 이야기하거든요.

<금강경>은 空이라는 낱말은 하나도 없어도 “공(空)의 이치를 어떤 경전보다도 여실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정평이 나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혹의 구름을 我空ㆍ法空ㆍ俱空이라고 하는 이 이치를 <금강경>에서 부단히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다 펼쳐서 열어버린다. 그런 말입니다. 法空ㆍ我空ㆍ俱空.

(說誼 ; 我人稠林이 蔚於心地라가 金剛焰下에 掃地無蹤이라

(설의 ; 아인조림이 울어심지라가 금강염하에 소지무종이라

아상(我相) · 인상(人相)의 번뇌[稠林]가 마음 땅에 무성(茂盛)하다가 금강(金剛)의 불꽃 아래서[焰下] 땅을 쓴 듯이 자취가 없음이라.

아상, 인상의 빽빽한 (번뇌의) 수풀이 심지(心地)에 무성했다가 금강의 불꽃 아래 땅을 쓸어 자취가 없으니,

法與非法此二惑霧가 掩蔽性空일새 故曰重昏이니

법여비법차이혹무가 엄폐성공일새 고왈중혼이니

법(法)과 비벙(非法)의 이 두 미혹의 안개[惑霧]가 성품(性品)의 공(空)함을 가렸음일새 그래서 중혼(重昏)이라 하시니

법과 법 아닌 이 두 무명의 안개가 성공(性空)을 가리므로 이런 까닭에 이르기를, 첩첩한 어둠이다. 【성공(性空)은 이(理)를 이르는 것이다.】

慧日이 一照에 重昏이 頓破하고 三空이 顯現이니라)

혜일이 일조에 중혼이 돈파하고 삼공이 현현이니라)

지혜(智慧)의 해가 한번 비추매 중혼(重昏)이 몰록 깨지고 삼공(三空)이 환히 나타남이니라.

혜일(慧日)이 한 번 비추면 첩첩한 어둠이 문득 무너뜨려지고 삼공이 나타나는 것이다.

(說誼 ; 我人稠林이 蔚於心地라가 金剛焰下에 掃地無蹤이라

(설의 ; 아인조림이 울어심지라가 금강염하에 소지무종이라

說誼. 부연 설명입니다.

我人稠林(아인조림)이, 나와 남에 대한 빽빽한 그런 숲이

蔚於心地(울어심지)하니, 마음 땅에 울창하게 서 있다가

金剛焰下(금강염하)에, 금강경의 불꽃 밑에서

掃地無蹤(소지무종)이라. 땅을 쓴 듯이, 마당을 빗자루로 아침에 싹 쓸어버린 듯이 자취가 없다. 이것도 우리 사찰에서는 마당을 쓸 때요?

세속에서는 앞으로 씁니다. 사찰에서는 뒤로 쓸어갑니다. 뒷걸음질 하면서 씁니다. 이것이 자취를 없애기 위한 그런 어떤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다 쓸어놓고 나면 쓴 사람의 발자취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쓸어야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아서 발자취를 남기면서 쓰는데, 뒤로 가면서 쓰는 것. 그것이 소지무종(掃地無蹤) 아닙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그것 法空ㆍ我空ㆍ俱空입니다. 쓴 사람의 발자취까지도...

물론 쓰레기는 없습니다. 당연히 없지요. 쓰레기 쓴 것은 뭐지요? 그것 我空입니다. 그 다음에 我空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발자취. 발자취가 法空입니다. 쓴 것에 마지 못해서 남은 것이 발자취니까요.

쓰레기를 쓴 것에서 마지못해 남은 것은 발자취입니다. 그런데 발자취라는 자취가 남으면 안 되지요. 제대로 청소가 덜 된 겁니다. 장판을 잘 닦아 놓고 손 짚은 것이 있는가? 옛날 까다로운 스님들은 햇빛에 비춰봅니다. 비춰보고 손 짚은 자리가 있으면 “너 다시 닦아라.” 그래요. 그런 자국이 있으면...

그것은 때가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청소한 자취마저 없어야 된다. 말하자면 그것이 구공(俱空)이 되는 것이지요. 쓰레기가 없고 쓴 자취까지도 없고, 그러면 쓴 쓰레기와 쓴 자취마저 다 없을 때, 그것을 합해서 俱空. 함께 공하다. 우리사찰의 어떤 생활법도에 담긴 의미만 우리가 제대로 알아도 불교공부가 상당히 되게 돼있습니다.

掃地無蹤. 그랬네요. 우리가 소지한다고 그러잖아요. 掃地하면서 자취를 없앤다.

法與非法此二惑霧가 掩蔽性空일새 故曰重昏이니

법여비법차이혹무가 엄폐성공일새 고왈중혼이니

法與非法此二惑霧(법여비법차이혹무)가. 법과, 그리고 비법(非法)이 차이혹무(此二惑霧). 이 두 가지의 미혹의 구름이

掩蔽性空(엄폐성공)일새. 性空을, 성품이 공함을 엄폐(掩蔽). 가려버렸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故曰重昏(고왈중혼)이다. 아주 중중첩첩으로 캄캄해진 상황이다.

性空. 사실 좋은 말이지요. 우리 성품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慧日이 一照에 重昏이 頓破하고 三空이 顯現이니라)

혜일이 일조에 중혼이 돈파하고 삼공이 현현이니라)

慧日(혜일)이, 지혜의 태양이

一照(일조)에, 한 번 비침에

重昏(중혼)이 頓破(돈파)하고, 아주 무거운 그런 어둠이 몰록 다 깨지고

三空(삼공)이 顯現(현현)이니라. 세 가지 공한 것이 顯現이니라. 俱空이 얼른 이해가 안 되지요? 俱空은 따로 없습니다. 我空ㆍ法空, 그것을 합해서 俱空. 그래요. 함께 구자니까 我와 法이 함께 없다. 결국은 我空ㆍ法空이 되면 俱空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마음 쓸 것은 아닙니다.

돈파(頓破)라고 했는데, 이 선불교에서 돈(頓)자, 參(참)자 많이 쓰는 글자입니다. 경전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인데, 선불교에서는 특히 頓悟(돈오)라는 말 쓰지요. 사전에 보면 몰록 돈 자라고 되어있는데, 몰록. 저는 처음에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몰록이라는 말이 뭔가?’ 또 학인 때, 전라도 학인이 한 분 있어서, 도반인데요. 그 사람이 “옴막” 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몰록을 옴막 이라고, ‘한꺼번에’ 또 ‘전체 다’시간적으로ㆍ공간적으로 ‘다 한꺼번에’ 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ㆍ공간적으로도 그렇고요. “옴막”하면 공간적으로 다겠지요? 그것을 ‘몰록’이라고 했습니다. 이 頓자가 선불교에서 아주 잘 즐겨 쓰는 글자지요. 頓破라. 그랬습니다. “한꺼번에 싹 다 깨진다.” 말입니다. 그래서 뭘하려고요?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사지출단상갱하야 등진실제하며 부만항화하야 성일승과케하시니

그로 하여금 단견(斷見)[空]과 상견(常見)[有]의 구덩이[偏見]에서 나오게 하여 진실제(眞實際)[참다운 이치]에 오르게 하며 만행(萬行)[六度萬行]의 꽃을 피워서 일승(一乘)의 과(果)[부처님의 지위 : 成佛]를 이루게 하시니,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구렁에서 나와 진실의 가[眞實際, 참다운 도리]에 오르게 하며, 만행(萬行)의 꽃을 피워 일승의 과[一乘果, 성불]를 이루게 하시니,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사지출단상갱하야 등진실제하며

使之出斷常坑(사지출단상갱)하야 登眞實際(등진실제)하며

敷萬行花(부만행화)하야 成一乘果(성일승과)케하시니,

그냥 산문 형식으로 썼지만, 사실은 구절 구절이 전부 시형식입니다. 詩. 使之. 우리들로 하여금 斷常坑. 斷見(단견)의 구렁텅이와 常見(상견)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서, 斷과 常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한다.

斷見ㆍ常見. 우리에게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상하다ㆍ없다ㆍ공하다ㆍ아예 없다. 죽은 뒤에도 없고ㆍ사실은 지금 이렇게 눈에 보이지만, 정말 이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허무주의적인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 그것을 斷見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다. 그래요.

常見은 뭔가 하니 그 반대현상입니다. 현실주의자지요. 뭐든지 있다. 뭐든지 있는 것으로 그렇게 보고, 무엇이나 다 영원할 것으로 알고 애착하는 것. 이것이 현실주의자. 너무 추하지요. 그리고 허무주의자. 斷見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람이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두 가지에 속하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만, 대개 그 두 가지 소견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벗어나서 뭘 하지요?

登眞實際(등진실제)하며. 眞實際에 오르게 한다.

斷見과 常見에 머물지 아니하고, 그것을 떠나 있으면서, 그러면 어디에 이르느냐? 진실한 경지. 際자는 즈음 ‘제(際)’ 자지만, 진실한 경지에 오르게 한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있음에도 치우치지 않고ㆍ없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인생을 무상하다고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현실주의자 같이 뭐든지 다 있다고 집착하는 것도 아닌, 그런 것을 다 수용하면서ㆍ또 어떤 면도 다 이해하면서ㆍ용납하면서, 그것이 어떤 진실의 경지지요. 거기에 오르게 하며ㆍ오르며,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부만항화하야 성일승과케하시니

敷萬行花(부만행화)하야. 만행의 꽃을 피워야 됩니다.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우리가 “육도만행ㆍ보살만행.” 이렇게 말하지요? 왜 꽃이라고 했느냐? 보살행은 아름답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 차가 막히는데, 서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양보해줘요. 양보해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아 저 사람 참 고맙다.’ 하고, 고맙다. 고 인사하고 갑니다. 불교의 꽃을ㆍ보살의 꽃을ㆍ선행의 꽃을 세상에 활짝 피웠을 때, 그 때가 불교가 세상에 할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成一乘果(성일승과)케하시니, 일승의 결과를 이루게 했다. 일승의 결과 = 부처노릇을 하게한다.

一乘 = 佛果라고도 하지요? 一乘果 라고 하는 것은 佛果라고 그럽니다. 一乘果를 이루게 했다. 참 글이 곱씹고 곱씹어서 아주 실컷 느끼고, 또 음미하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넘겨야할 그런 글입니다. 자꾸 해석하다 보면, 그것이 하도 의미심장하고 좋아서 자꾸 뒤돌아보아지네요. 우리 불교공부는 斷見과 常見, 있음과 없음의 구렁텅이. 그것을 벗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眞實際하면 中道라고 할까요?

中道라는 말도 뒤에 곧 나옵니다만, 어떤 중도적인 경지에 올라서 중도적인 삶을 제대로 펼치려면 보살행. 보살의 만행의 꽃을 피워야 된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답지요. 꽃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요? 우리는 보살행을 꽃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다. 成一乘果다. 그랬습니다. 부연설명을 좀 보겠습니다.

(說誼 ; 法非常而執爲有하고 性非斷而執爲空하나니

(설의 ; 법비상이집위유하고 성비단이집위공하나니

법(法)은 항상하는 것이 아닌데 집착(執着)해서 유(有)라 하고, 성(性)은 끊어짐이 아니로되 집착해서 공(空)을 삼으니

법이 한결같지 아니하거늘, 붙잡아(집착하여) 유[有]를 삼으며, 성(性)은 끊어짐이 아니거늘 붙잡아 공(空)을 삼으니,

執爲空而不知空之不空則是落斷見坑也요 執爲有而不知有之非有則是落常見坑也니라

집위공이부지공지불공즉시낙단견갱야요 집위유이부지유지비유즉시낙상견갱야니라

집착해서 공(空)을 삼으나 공이 공 아님을 알지 못한즉 단견(斷見)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집착하여 유(有)를 삼으나 유가 유 아님을 알지 못한즉 상견(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진다.

붙잡아 공(空)을 삼아 공이 공 아닌 줄을 알지 못하면, 곧 이는 단견(斷見)의 구렁에 떨어짐이고, 붙잡아서(집착하여서) 유(有)를 삼아 유가 유 아닌 줄을 알지 못하면, 곧 이는 상견(常見)의 구렁에 떨어짐이다.

(說誼 ; 法非常而執爲有하고 性非斷而執爲空하나니

(설의 ; 법비상이집위유하고 성비단이집위공하나니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法非常而執爲有(법비상이집위유)하고. 법은 항상 한 것은 아니다. 斷常할 때, 斷과 常. 그것을 염두에 두세요. 늘 있는 것은 아니로되, 집착해서 있다고 봐요. 여기서 法이라고 하는 말은 세상 모든 법을 말합니다. 유형무형의 모든 것을 法이라고 그래요. 항상 한 것은 아닙니다. 뭐든지ㆍ뭐든지 항상 한 것은 있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그것을 집착해서 있다고 하고, 돈이 됐든ㆍ명예가 됐든ㆍ벼슬이 됐든ㆍ우리 생명이 됐든ㆍ뭐가 됐든 간에 집착해서 있다고 여기고,

性非斷而執爲空(성비단이집위공)하나니. 우리의 마음자리, 성품은 ‘단(斷)’, 없는 것이 아닌데, 斷은 끊어질 단 자인데 “딱 끊어져서 없다.” 이 뜻입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집착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있다.” 는 뜻하고는 조금 달라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집착해서 ‘없다ㆍ공하다.’ 고 여기나니. 마음! 그것 참, 오묘한 것이지요.

執爲空而不知空之不空則是落斷見坑也요

집위공이부지공지불공즉시낙단견갱야요

執爲空而(집위공이)하야, 집착해서 ‘공하다.’ 고 여겨서

不知空之不空則(부지공지불공즉), 공하면서 공하지 아니한 것 = 空之不空. 그것 보세요. 공하면서 공하지 아니한 것을 알지 못한 즉, 그렇습니다.

공(空)하지만 공하지 아니해요. 공하지 아니하지만 공해요. 이것이 세속 논리로서는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말인데요. 불교에서 깨달은, 어떤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그것을 설명하려니까 세속 논리로서는 도저히 안 돼요. 불교논리가 따로 있습니다. 불교논리가... 세속 논리로 생각하면 불교 절대 이해 못합니다.

‘空之不空’ 이라는 것이, 이것이 뭐 공하면 공하고 안 공하면 안 공하지, 이런 말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다보면, 空之不空 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하면서 공하지 아니한 것을 알지 못한 즉 어떻게 돼요?

是落斷見坑也(시락단견갱야)요. 이것은 斷見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없다.’ 고 하는 구렁텅이. ‘없다.’ 고 하는 소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요. 또

執爲有而不知有之非有則是落常見坑也니라

집위유이부지유지비유즉시낙상견갱야니라

執爲有而(집위유이)하야, 집착해서 ‘있다.’ 고 여겨서

不知有之非有則(부지유지비유즉), 있으되 있지 아니한 것 = 有之非有. 있으면서 있지 아니한 것을 알지 못한 즉, 그것을 알아야 되는데, 있지만 있지 아니해요. 공하지만 공하지 아니해요. 있지 아니하지만 또 있어요.

그런 이치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다른 차원의 안목인데요. 우리는 세속적인 안목으로 보면, 있고ㆍ없고, 딱 잘라서 말하는데요. 불교적 안목은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튼 유형무형이든ㆍ마음이든ㆍ물질이든ㆍ명예든ㆍ돈이든, 뭐든 간에 있으면서 있지 않고, 있지 아니하면서 또 있어요. 그것을 동시에 알아야 됩니다. 나중에 알면 안 돼요. ‘아, 지나놓고 보니 참, 없구나ㆍ지나놓고 보니 없구나.’ 이렇게 알면 안 됩니다. 동시에 그것을 같이 봐야 됩니다. 같이 봐요. 그, 같이 보는 것이 참 어렵지요. 아무튼 같이 봐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 전에 우리나라에 책이 많이 소개된 그 사람이 미국 칼럼리스트 인데요. 선불교를 공부 많이 해서 이런 경우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거기는 ‘컵을 사용하되 이미 깨어진 것으로 알고 사용하라.’ 이런 이야기ㆍ이런 논리를 이렇게 했더라고요. ‘컵을 이미 깨어진 것으로 알고 사용하라.’ 그것이 空之不空입니다.

또 ‘有之非有’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주 불교를 이해해가지고 아주 쉽게 그렇게 표현을 했더라고요.

그것을 모르면ㆍ그런 이치를 모르면 是落常見坑也(시낙상견갱야)니라. 常見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된다. 항상 ‘있다.’고 하는 그런 안목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實際者는 空有兩忘하고 一味亦亡之處也니

실제자는 공유량망하고 일미역망지처야니

실제(實際)라는 것은 공(空) · 유(有)를 둘 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한 맛[一味]까지도 없어진 것이니,

실제는 공과 유의 둘을 (다) 잊고 한 맛[一味]이 또 없는 곳이니,

佛이 以三空으로 開示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하고

불이 이삼공으로 개시하사 사지불낙단상지갱하고

부처님이 삼공(三空)으로서 열어 보이사 그들로 하여금 단상(斷常)[斷見과 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부처님이 삼공으로 열어 보이시어 단견과 상견의 구렁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頓超空有之外하야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也니라)

돈초공유지외하야 여시원수하며 여시원증야니라)

몰록 공(空) · 유(有)의 밖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원만(圓滿)히 닦으며 이와 같이 원만하게 증득(證得)하게 하느니라.

공과 유의 밖에 문득 건너뛰어 이와 같이 온전히 닦으며 이와 같이 온전히 증득케(깨닫게) 하신 것이다.

實際者는 空有兩忘하고 一味亦亡之處也니

실제자는 공유량망하고 일미역망지처야니

實際者(실제자)는. 실제라고 했는데, 登眞實際 했잖아요. 眞實際라고 하는, 實際라고 하는 것은 뭐냐?

空有兩忘(공유양망)하고. 空과 有를 다 잊어버려요. 뭐 ‘이것은 있는 것이다ㆍ이것은 없는 것이다.’ 하는 이 견해를 다 잊어버리고,

一味亦亡之處也(일미역망지처야)니. 한 맛마저도 또한 없어진 그곳. 그러니까 法空ㆍ我空, 해서 俱空까지 된 상태. 그대로 구공을 설명했습니다.

空有兩忘하고. 有는 쓰레기를 쓸어버린 것이고, 空은 발자취를 쓸어버린 것이고요. 두 개 다 없어진 상태. 그것을 말하자면 俱空. 그렇게 표현했는데 一味亦亡. 한 맛마저도 또한 없어진 그곳. 그것을 眞實際, 實際라고 한다.

佛이 以三空으로 開示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하고

불이 이삼공으로 개시하사 사지불낙단상지갱하고

佛(불)이, 以三空(이삼공)으로. 부처님이 三空으로써 開示(개시)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사지불락단상지갱)하고. 그로 하여금 斷과 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頓超空有之外하야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也니라)

돈초공유지외하야 여시원수하며 여시원증야니라)

頓超空有之外(돈초공유지외)하야. 空과 有의 밖을 몰록 뛰어나서ㆍ다 벗어나서ㆍ초월해서, 空에도 초월하고 有에도 초월해서,

如是圓修(여시원수)하며, 이와 같이 원만히 닦으며

如是圓證也(여시원증야)니라. 이와 같이 원만히 증득한 것이다.

특히 선불교의 궁극적 안목에서 보면, ‘화두 들고 참선하고’ 이것 없습니다. 이런 말씀 듣고 그대로 이해해버리면, 제대로 알아버리면 그것이 끝입니다.

제대로 알아버리면... 사실은 우정 뭘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방편을 써서 참선도 하고 온갖 수행방법을 빌려오는데 여기 보십시오.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이라. 그랬잖아요. 이것이 원만히 닦는 겁니다.

완전무결한 수행이고ㆍ완전무결한 깨달음이다. 뭘 조건을 갖다 붙이지 않잖아요. 아무 조건도 붙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볼 때, 아주 궁극적 수행이고ㆍ또 궁극적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을 나열한데 불과하지요

금강경 사가해 제2강 3부(言言利刃當陽이요~) |(2011. 04. 19)

釋대원성 | 조회 250 |추천 0 |2011.08.01. 10:31

http://cafe.daum.net/yumhwasil/HsLO/9

불교에서는 어느 사찰이든지 법회를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교양강좌를 하려고 하거나 할 때, 스님들 자체부터도 그 수준이 너무 천차만별이 돼서, 행자 때부터 그렇지요. 어떤 사람들은 박사학위 받고 온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가르친다고요. 지금도 그 교육수준을 어떤 선을 정해놓고 맞추기는 어렵지만, 옛날 우리 어릴 때 강원의 생활을 생각해서, 그래도 그런 옛날 고리타분한 그 전통향기가 어떤 것인가? 그것 좀 맡고 싶어서 모였을 줄 믿고, 이왕이면 그런 어떤 향기를 좀 뿜어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 어릴 때는 몇이 안 앉아서 하지요. 기껏해야 10 ~ 15명 그렇게 앉아서 하면, 처음에 딱 시작하면 難(난)字부터 쭉~ 외워나가요. 처음에 누가 하늘 천하면 그 다음 옆의 사람이 따지ㆍ검을 현ㆍ누르 황, 이런 식으로 쭉~~ 돌아가면서 글자 한자도 難자에 막히지 않도록 점검을 딱 합니다. 점검을 다 하고 나서, 그리고 물어요. 강사가 막 무작위로 지적을 해가면서 무슨 자인지 아느냐고 물어가지고 만약 막히면 강사가 그냥 일어나버려요. 일어나가지고 그날 강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難자를 아주 철저히 익혀 와야 되고, 또 새겨보게도 하고 그러는데요. 사실 매일매일 공부하고 그런 상황이라면 새겨보게도 하고, 또 개인적으로 발표하게도 하고... ‘그런 것이 됐으면 참 좋겠다.’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라도 연결 되도록 한 번 읽겠습니다. 같이 볼까요?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2강–1]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2강–2]

한문 원문을 처음 대하신 분들은 따라가기 상당히 힘들겁니다. 그렇지만 아등바등 난자(難字) 찾고, 또 새기는 순서, 거기다 번호 매기고 어려운 것은 옆에다 써 넣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씨름을 한 3개월 남짓 하다 보면, 거의 비슷한 수준이 돼갑니다. 노력만 하면요. 어려워 마시고 그저 꾸준히 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著이로다

언언이인당양이요 구구수쇄불착이로다

말씀말씀[言言]이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에 반사된 것같이 무섭게 빛나고 구절구절(句節句節)이 물로 씻은 듯이 한 티끌도 붙지 않음이로다.

말씀마다 날카로운 칼이 햇볕에 당한 듯(반사된 듯)하며, 구절마다 물을 뿌려도 (티끌이) 묻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著이로다

언언이인당양이요 구구수쇄불착이로다

言言利刃當陽(언언이인당양)이요 句句水灑不着(구구수쇄불착)이로다. 그랬습니다. 지금 금강경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금강경은 말씀ㆍ말씀, 한마디ㆍ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당양(當陽). 햇빛에 비치는 것과 같고,

‘햇빛에 당함이요.’ 그렇게 했는데 햇빛에 비치는 것. 아주 날카로운 칼. 유명한 검객들이 마주 대결하고 있을 때 햇빛에 칼날이 번쩍하는 모습, 영화에 나오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섬뜩합니까? 또

한 구절ㆍ한 구절이 水灑不着이라. 물을 뿌려서 그 물이 말하자면 하나도 붙지 않는 그런 것과 같이, 물을 뿌려도 그 물이 하나도 붙지 않는 그런 것과 같은, 물을 뿌려서 안 붙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데도 물이 다 붙는데 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그와 같다. 물을 뿌려서 그 물이 붙지 않는 그런 것과 같은 그런 정도로 말하자면 빼어나고ㆍ아주 날카롭고, 그 경전의 말씀, 한마디 한 구절이 정말 날카롭기 이를 데 없다.

(說誼 ; 金剛妙慧가 堅不爲物挫하고 利能斷衆生冤結이니 般若雄詮은

(설의 ; 금강묘혜가 견불위물좌하고 이능단중생원결이니 반야웅전은

금강의 묘한 지혜가 견고하여 다른 사물에 꺾임을 당하지 않고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들의 원결(寃結)을 끊으니 반야경전(般若經典)은

금강의 묘한 지혜는 굳어 (다른) 물건의 꺾임이 되지 아니하며,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의 원수의 맺음을 끊으니, 반야경의 웅건한 말씀은

金剛妙慧之所現發이라 故로 利能破衆生疑網하고 堅不爲外魔所壞니라)

금강묘혜지소현발이라 고로 이능파중생의망하고 견불위외마소괴니라)

금강의 묘한 지혜가 드러나는 곳이라 그 때문에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들의 의심[疑網]을 깨트리고 견고하여 외도(外道)나 마구니[魔]들의 무너트림[壞]이 되지 않도다.

금강의 묘한 지혜가 나타나 일으키는 까닭으로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무너뜨리고 굳어서 외도와 마왕의 무너뜨림이 되지 아니한 것이다.

(說誼 ; 金剛妙慧가 堅不爲物挫하고 利能斷衆生冤結이니

(설의 ; 금강묘혜가 견불위물좌하고 이능단중생원결이니

설의(說誼) :

金剛妙慧(금강묘혜)가, 금강의 미묘한 지혜가

堅不爲物挫(견불위물좌)하고, 견고한 것이. 지혜의 견고함이 어떤 사물의 꺾임이 되지 아니 하고, 다이아몬드는 그렇지요. 어떤 사물도 다이아몬드를 상하게 못합니다. 단 다이아몬드만이 다이아몬드를 커트 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앞에서 드렸는데요. 그렇습니다. 정말 깨달음의 지혜는요? 그 어떤 것도 그 지혜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利能斷衆生寃結(이능단중생원결)이니, 이 날카로운 입장에서, 깨달음의 지혜가 날카롭기로 말하자면 능히 衆生의 원결(寃結)을 다 끊어버린다. 어떤 원한의 관계도, 정말 부모죽인 원수까지도 이 지혜 앞에서는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하~~, 부모죽인 원수. 정말 절천지 원한을 품고 있다 손 치더라도, 정말 이 금강경의 지혜를 나의 인격화 했을 때, 그 사람 앞에는 부모죽인 원수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사람을 높이 추앙해서 이 세상에 제일가는 성인으로 모신다든지, 전 세계 사람이 다 추천해가지고 무슨 전 세계 대통령을 만든다든지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입장이 돼버리는 것이지요. 왜냐? 그것이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요. 부모죽인 원수까지도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요. 그래서 날카로운 입장에서는 衆生의 寃結을 능히 끊어버린다. 그렇습니다.

참,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寃結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끙끙대고 합니까? 차 운전하고 가다가 누가 옆에서 조금만 위험하게 하면 무슨 목이 그냥 튀어나와가지고 지 혼자서 욕을 하고 화를 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아주 간단한 것, 순식간에 일어난 간단한, 그리고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이 행동 했는데, 그걸 가지고 그냥 욕을 쏟아 붓고 집에까지 돌아와 가지고 집에다 그것을 쏟아놓는 겁니다. “아이고 오늘 운전하는데 어떤 놈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래서 화가 막 났다고, 우리 중생들의 삶이라는 것이 이런 식입니다.

般若雄詮은 金剛妙慧之所現發이라 故로 利能破衆生疑網하고 堅不爲外魔所壞니라)

반야웅전은 금강묘혜지소현발이라 고로 이능파중생의망하고 견불위외마소괴니라)

般若雄詮(반야웅전)은, 반야경의 큰 가르침. 雄詮. 아주 웅대한 가르침은

金剛妙慧之所現發(금강묘혜지소현발)이라. 그랬습니다. 이 <금강경>은 진짜 다이아몬드와 같은 미묘한 지혜에서 現發한 겁니다. 나온 거다 이 말입니다. 금강경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금강의 지혜에서 나와서 말씀해 놓은 것이 금강경이다 이런 뜻입니다.

故(고)로 利能破衆生疑網(이능파중생의망)하고. 날카로운 입장으로서는 능히 중생들의 의혹의 그물을 깨트려 버리고

堅不爲外魔所壞(견불위외마소괴)니라. 견고한 입장으로서는 외도나 마군이들이 무너트릴 바가 못된다. 되지 아니함이니라.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유출무변법문해하사 잉육무한인천사하시니

가없는 법문(法門)의 바다를 흘러 내시어 한량없는 스승[人天師]들을 길러 내셨으니

가없는 법문의 바다[法門海]를 흘려 내시며, 그지없는 사람과 하늘(신)의 스승을 배어[孕] 길러[育] 내(시)었다.

(說誼 ; 佛之與法이 皆從此經流出일새 故로 云爾니라)

(설의 ; 불지여법이 개종차경류출일새 고로 운이니라)

부처님과 법(法)이 다 이 경(經)으로부터 흘러나오므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부처님과 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까닭으로 그리 이른 것이다.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유출무변법문해하사 잉육무한인천사하시니

流出無邊法門海(유출무변법문해)하사 孕育無限人天師(잉육무한인천사)하시니. 이 <금강경>이 어떻습니까? 無邊法門의 바다를 흘려보내요. 흘려보내서 그 바닷물을 마시고, 無限人天師. 한없는 人天의 스승들을 孕育한다. 길러낸다. 그렇습니다. 우선 6조 혜능대사 같은 분을 보더라도 그야말로 나무 팔러 갔다가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짊어지고 돌아온 분입니다. 순식간에 금강경 한 구절 딱 듣고 그 순간에 나무 장사가 그 한 짐나무 값이 얼마겠습니까? 하루 품삯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런데 다이아몬드를 그 무게만치 짊어지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바로 금강 반야바라밀. 그것 깨닫고 온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說誼 ; 佛之與法이 皆從此經流出일새 故로 云爾니라)

(설의 ; 불지여법이 개종차경류출일새 고로 운이니라)

설의(說誼) :

佛之與法(불지여법)이, 부처님과 그리고 법이

皆從此經流出(개종차경류출)일새. 저~ 기 뒤에 나오지요.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하는 依法出生分이 나오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그리고 부처님의 법은 다 이 경전으로부터 流出됐다. 나왔다.

故(고)로 云爾(운이)니라. 그러므로 그렇게 말했다.

若大鑒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傳與鏡此五大士者는

야대감능과 규봉밀과 야보천과 전여경차오대사자는

대감 혜능[大鑑能(六祖慧能)]과 규봉 종밀[圭峰密(圭峰宗密)]과 야보 도천[冶父○川(冶父道川)]과 부대사(傅大士)와 종경(宗鏡) 이 오대사(五大士)는

대감 혜능과 규봉 종밀과 야보(야부) 도천과 부대사와 종경, 이 다섯 대사(大士)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개인천지소존이요 법해지소귀자야라

모두 인천(人天)이 존중할 바요 법해(法海)의 돌아갈 바라.

다 사람과 신들이 높이 받드는 것이며, 법해에 (돌아)가는 것이다.

若大鑒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傳與鏡此五大士者는

야대감능과 규봉밀과 야보천과 전여경차오대사자는

若大鑑能(약대감능)과, 여기 <금강경 오가해 서설>입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대감 혜능과, 圭峰密(규봉밀)과, 규봉 종밀과

冶父川(야보천)과, 야보 도천과 (父 : 아버지라고 할 때는 부라고 읽지만, 사람 이름을 말 할 때는 보라고 합니다.)

傅與鏡此五大士者(부여경차오대사자)는. 부(傅) = 부대사와 경(鏡) = 종경스님. 大士 = 보살. 此五大士者. = 이 다섯 분의 보살들은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개인천지소존이요 법해지소귀자야라

皆人天之所尊(개인천지소존)이요, 모두가 人天의 존경하는 바고,

法海之所歸者也(법해지소귀자야)니라. 법의 바다에서 귀의할 바더라.

불교라고 하는 이 법의 세계에서ㆍ불법의 세계에서 모두가 귀의하는 분들이더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오가해는 대감 혜능ㆍ규봉 종밀ㆍ야보 도천ㆍ부대사ㆍ종경. ←이렇게 다섯 분입니다.

(說誼 ; 五大士가 皆因此經하사 眼目夫人天이라

(설의 ; 오대사가 개인차경하사 안목부인천이라

5대사(大士)가 다 이 경(經)으로 인(因)해서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 됨이라.

다섯 분의 대사(大士)가 다 이 경을 말미암아 인간과 신들에게 눈이 되었으므로

故로 曰人天之所尊이요 無法不了라 故로 云法海之所歸니라)

고로 왈인천지소존이요 무법불료라 고로 운법해지소귀니라)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존중해야 하며, 법을 모두 통달하셨는지라[無法不了], 그러므로 법해의 돌아갈 바라고 이르셨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인간과 신들이 높이 (떠받드는) 것이다.” (하고,) 법을 투철히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법해(法海)에 가는 것이다.”고 했다.

(說誼 ; 五大士가 皆因此經하사 眼目夫人天이라

(설의 ; 오대사가 개인차경하사 안목부인천이라

설의(說誼) :

五大士(오대사)가 皆因此經(개인차경)하사. 다 이 경전을 인해서

眼目夫人天(안목부인천)이라. 여기 ‘부(夫)’자는 허사. 지난 시간에 허사ㆍ실사 말했지요? 人天의 안목이 되고

故로 曰人天之所尊이요 無法不了라 故로 云法海之所歸니라)

고로 왈인천지소존이요 무법불료라 고로 운법해지소귀니라)

故(고)로 曰人天之所尊(왈인천지소존)이요. 인천의 존경할 바고,

無法不了(무법불요)라. 법마다 깨닫지 못한바가 없다. 無法不了. 법마다 깨닫지 못한바가 없음이라.

故(고)로 云法海之所歸(운법해지소귀)니라. 그래서 법의 바다에서 돌아갈 바 다.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각구통방정안하사 직전제불밀인하시고 각출광장설상하사 개연최상종승하시니

각기 모든 것에 통하는[通方] 바른 눈[正眼]을 갖추사 바로 제불(諸佛)의 밀인(密印)[비밀한 가르침]을 전하시고 각각 광장설(廣長舌)의 모습을 내어서 최상의 근본 가르침[最上宗乘]을 펴시니

각각 통방(通方)한 바른 눈이 갖추어져 바로 제물(諸佛)의 밀인(密印; 비밀한 가르침)을 전하여 각각 넓으며 긴 설상(舌相)을 내어 가장 위의 종승(宗乘)을 열어 펼치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일일위진하악이요 휘등고금이라 수사당세에 맹자로 득견하며

낱낱의 위엄(威嚴)이 강산(江山)에 떨치고 빛이 고금(古今)에 드날림이라. 드디어 이 세상에서 눈먼 자로 하여금 보게 하며

낱낱이 위엄이 강산(江山)을 진동하며, 빛이 예와 지금에 솟아서 곧 당세(當世)의 눈 먼 이로 하여금 봄을 얻게(보게) 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농자로 득문하고 아자로 능언하며 파자로 능항케하시고

귀머거리는 듣게 하시며 벙어리는 말하게 하며 절뚝거리는 이는 걷게 하시고(영험적인 것보다는 법에 대한 안목을 열어 주셨음을 이름)

귀먹은 이로 하여금 들음을 얻게(듣게) 하며, 벙어리로 하여금 능히 말하게 하며, 발 저는 이로 하여금 능히 걷게 하셨다.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각구통방정안하사 직전제불밀인하시고 각출광장설상하사 개연최상종승하시니

各具通方正眼(각구통방정안)하사. 각각 通方. 어느 지방에도 막히지 않는, 모든 지방에 다 통하는 바른 눈을 갖추사, 그랬습니다. 모든 지방에 통하는 바른 눈을 갖추사. 불교 공부를 해가지고 어느 불교에서는 통하는데, 어느 불교에서는 안통하고, 이렇게 되면 그것은 불교를 아주 편협하게 치우치게 공부한 것이 되지요. 모든 곳에 다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直傳諸佛密印(직전제불밀인)하시고. 그 다섯 분을 추앙해서 아주 찬탄하는 말인데요. 通方正眼을 갖추고, 바로 諸佛密印을, 모든 부처님의 비밀한 도장을 바로 전한다. 그렇습니다. “전법의 계승자다.”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各出廣長舌相(각출광장설상)하사. 出廣長舌相을 각각 내가지고서, 부처님 설법이 아주 뛰어나고ㆍ말씀도 잘 하시고 해서, 그래서 부처님 설법을 말 할 때 이 혀 舌자를 씁니다. 廣長舌 하면 설명할 說(설) = 말씀 說자를 쓰면 참 좋겠는데 꼭 이렇게 혀 舌자를 씁니다. 아주 넓고 긴 혀의 모습을 내가지고,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아주 훌륭한 설법으로서,

開演最上宗乘(개연최상종승)하시니. 最上宗乘. 최상 가는, 그리고 근본종지의 교법. 乘자를 교법이라고 그랬지요? 최상의 근본종지의 교법을 開演. 열어서 연설하시니,

그러니까 오가해안에 금강경을 이 다섯 분이 낱낱이 부연 설명한 것. 당신 나름대로 부연 설명한 것,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공부하는 우리들도 사실은 여기의 금강경 서문. 이것만 가지고 여기다 우리가 부연 설명하고 주해를 달고, 아주 자상하게 다른 어떤 자신의 경험과 예문과 그리고 우리 일상의 교훈을 연결 시켜서, 사실은 새로운 그런 해설을 이 밑에다가 붙이면

이 <서문> 하나만 가지고도 아주 훌륭한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부하시는 분들이 그것을 한 번 시도 해봐도 좋습니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간단한 경전에 이런 뛰어난 다섯 분들이 이렇게, 말하자면 <금강경>을 통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피력한 것이지요. 그래서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일일위진하악이요 휘등고금이라

一一威振河嶽(일일위진하악)이요. 낱낱이 물과 강하와 산을, 그 위엄이 산을 떨치고

輝騰古今(휘등고금)이라, 그 빛이 고금에 높이 솟는다. 높이 오른다. 그래서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수사당세에 맹자로 득견하며 농자로 득문하고

遂使當世(수사당세)에. 드디어 當世에

盲者(맹자)로 得見(득견)하고, 눈 어두운 사람을 얻어 보게, 볼 수 있게 했고,

聾者(농자)로, 귀머거리로 하여금

得聞(득문)하며, 들음을 얻게 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아자로 능언하며 파자로 능항케하시고

啞者(아자)로 能言(능언)하며, 벙어리로 하여금 능히 말하게 하고,

跛者(파자)로 能行(능행)케 하시고. 앉은뱅이 ‘파(跛)’자입니다. 앉은뱅이로 하여금 능히 걸어가게 했다. 이 표현이 아주 참... 

무슨 다른 종교에서처럼 눈 어두운 사람, 맹인 앉혀놓고 어떤 식으로 해서 “눈을 떠라” 해서 눈을 뜨게 한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자면... 우리 모두 사실 어떻게 보면 다 맹인이지요. 어떻게 보면 다 귀머거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 벙어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 앉은뱅이입니다. 정신적으로 그것을 뜻하는 겁니다. 앉아서 살 수 밖에 없게, 말하자면 몸을 다쳤다든지 그렇게 되면 앉아서 사는 것이지요. 참 불교는 그런 이야기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을 얼른 보면 ‘누가 신통 부리듯이 이렇게 하는 건가?ㆍ기적을 나타내는 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 盲者요ㆍ농아요ㆍ벙어리요ㆍ절름발이인데, 정신적인 입장에서 그런 모든 문제들이 다 풀려났다.

(說誼 ; 通方正眼者는 明眞了俗하고 達乎中道하야 無所不通之正眼也라

(설의 ; 통방정안자는 명진료속하고 달호중도하야 무소불통지정안야라

통방정안(通方正眼)이라는 것은 진(眞)을 밝히고 속(俗)을 요달(了達)하며 중도(中道)를 통달하여 통하지 못함이 없는 바른 눈을 이름한 것이요,

통방정안(通方正眼)은 진(眞)을 밝히며 속(俗)을 투철하게 알아서 중도(中道)에 통하여 통치 못한 곳이 없는 정안이다.

密印者는 衆生所迷之眞理요 佛祖相傳之法印也라 五大士가 具如是正眼하며

밀인자는 중생소미지진리요 불조상전지법인야라 오대사가 구여시정안하며

밀인(密印)은 중생들이 알아야할 진리요 부처와 조사[佛祖]가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라. 5대사(五大士)가 다 이와 같은 바른 눈[正眼]을 갖추셨으며

밀인은 중생이 모르는 진리이고, 불조(佛祖)가 서로 전하는 법인(法印)이다. 다섯 대사가 이와 같은 정안이 갖추어졌으며,

傳如是密印하사 開大口說大話하시니 威光이 動地하야 照映今昔이라

전여시밀인하사 개대구설대화하시니 위광이 동지하야 조영금석이라

이와 같은 밀인(密印)을 전하사 큰 입[大口]을 열어서 크게 설법[大話]하시니 위광(威光)이 땅을 진동하며 고금(古今)을 비춤이라

이와 같은 밀인을 전하여 큰 입을 열어 큰 말을 이르니, 위엄과 광명이 땅을 움직이게 하며 예와 지금에 비추어

(說誼 ; 通方正眼者는 明眞了俗하고 達乎中道하야 無所不通之正眼也라

(설의 ; 통방정안자는 명진료속하고 달호중도하야 무소불통지정안야라

설의(說誼) :

通方正眼者(통방정안자)는. 通方. 모든 지방에 다 통하는 바른 눈이라고 하는 것은,

明ㆍ眞ㆍ了ㆍ俗(명진요속)하고. 眞ㆍ俗. 이것이 대표지요. 眞ㆍ俗 = 眞諦(진제) ⟷ 俗諦(속제). 이런 뜻입니다. 明과 了는 같은 뜻이고요. 眞諦를 밝히고, 俗諦까지도 밝히고, 眞諦와 俗諦를 다 밝혀요.

達乎中道(달호중도)하야. 中道가 나왔네요. 중도를 통달해서

無所不通之正眼也(무소불통지정안야)라.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는 바른 눈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일도 환하고ㆍ출세간의 일도 환하고, 明ㆍ眞ㆍ了ㆍ俗. 공부 좀 어쭙잖게 하면 다른 것 전혀 모르지요. 돈 좀 벌어온다고 가정사 깜깜한 사람 있고, 그래가지고는 안 되지요. 가정사도 잘 알고 밖에 나가서 돈도 잘 벌어오고요. 출세간의 일도, 출세간의 어떤 깨달음의 진리도 잘 알고, 세상사도 환하고... 그리고 그 양면을 또 다 통달해요.

達乎中道입니다. 中道까지도 다 통달해서 無所不通之正眼也라.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는 無所不通의 正眼. 바른 눈이다. 이 말입니다.

密印者는 衆生所迷之眞理요 佛祖相傳之法印也라

밀인자는 중생소미지진리요 불조상전지법인야라

密印者(밀인자)는. 密印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所迷之眞理(중생소미지진리)요. 중생이 미혹한바, 미혹하고 있는, 모르고 있는 참다운 이치다. 眞理 = 참다운 이치. 우리가 “진리ㆍ진리” 하는데 무엇이 참다운 이치인가? 모르고 있지요. 중생들이 모르고 있는 진리. 그것을 密印이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지요.

佛祖相傳之法印也(불조상전지법인야)라. 부처님과 조사가 서로서로 전한 그런 법의 도장이다.

五大士가 具如是正眼하며傳如是密印하사 開大口說大話하시니

오대사가 구여시정안하며전여시밀인하사 개대구설대화하시니

五大士(오대사)가 具如是正眼(구여시정안)하며, 이와 같은 바른 눈을 갖추었으며

傳如是密印(전여시밀인)하사, 이와 같은 비밀한 도장을 전하사. 그렇지요. 다 법을 깨닫고, 또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아니, 법을 전해 받았다기보다 당신이 깨달으신 그 안목을 인가를 받은 것이지요. 인가 받는 것을 “법을 전해 받는 것이다.” 이렇게 흔히 표현 합니다. 말이 “전한다ㆍ전한다.” 하지만 사물을 전해주듯이 그런 것은 없으니까요. 깨달았다는 것이 인정이 되면 그것이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이와 같은 密印을 전하사,

開大口說大話(개대구설대화)하시니. 開大口 = 큰 입을 열어 가지고서 說大話 = 큰 말씀을 설하시니

威光이 動地하야 照映今昔이라

위광이 동지하야 조영금석이라

威光(위광)이 動地(동지)하야. 아주 위엄스러운 광명이, 아주 위대한 광명이 땅을 진동해서 照映今昔(조영금석)이라. 지금도 그리고 옛날까지 비춘다. 그래서

遂使見聞으로 皆化하야 知非遷善케하시니 極於宗說兼通하며

수사견문으로 개화하야 지비천선케하시니 극어종설겸통하며

드디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다 교화해서 그릇됨을 알아 善에 옮기게 하시니 종(宗)[진리를 깨달은 것]과 설(說)[깨달은 진리를 말해줌]을 다 겸하여 통하니

곧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다 교화하여 그름을 알아서 어진 이에게 옮게 하며, 종(宗)과 설(說)을 다 통달하며 【종통(宗通)은 종지(宗旨)를 훤히 밝히며 본원을 깊이 통달하는 것이고, 설통(說通)은 12부 경을 잘 설하며 명상(名相) 법수(法數)를 통달하여 의심 없는 것이다.】

解行相應之大化者가 皆於此經에 得之矣니라)

해항상응지대화자가 개어차경에 득지의니라)

해(解)와 행(行)[解行]이 서로 응하여 큰 교화를 폄이 다 이 경(經)으로부터 얻었음이니라.

깨달음과 수행이 서로 맞음에 다다른 큰 교화가 다 이 경에서 얻은 것이다.

遂使見聞으로 皆化하야 知非遷善케하시니

수사견문으로 개화하야 지비천선케하시니

遂使見聞(수사견문)으로. 드디어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皆化(개화)하야. 다 교화를 해서

知非遷善(지비천선)케하시니. 그름을 알아서 = 非, 잘못된 것을 알아서. 善의 길로 옮기게 하시니 = 知非遷善하시니,

極於宗說兼通하며 解行相應之大化者가皆於此經에 得之矣니라)

극어종설겸통하며 해항상응지대화자가개어차경에 득지의니라)

極於宗說兼通(극어종설겸통)하며. 宗說兼通에 지극하며. 宗 = 宗旨(종지)를 아는 것. 불교의 아주 높은 안목에 투철한 사람.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일. 그것이 說입니다. 종설겸통(宗說兼通)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宗通說通 ←이런 말도 하고요.

宗旨. 우리가 불교의 근본취지에 일단 밝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느냐? 못 하느냐?는 그 사람 능력에 달려있을 수도 있는데,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못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바른 이치ㆍ진리ㆍ宗旨에 통하는 것. 이것은 불자의 첫째 의무입니다. 宗說兼通. 아주 잘 쓰는 말입니다. 宗과 說을 겸해서 통하며

解行相應之大化者(해행상응지대화자)가. 이해와 그 실천이 相應해서, 서로 잘 맞아서 크게 교화하는 자가

皆於此經(개어차경)에. 다 이 경전. 이 <금강경>에서

得之矣(득지의)니라. 그것을 얻었다. <금강경> 안 보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특히 한국 불교에서는 <금강경>을 알아야,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정해지기도 했고요. 왜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정해졌는가 하면 고려 때 와서 불교가 선불교 일색으로 되고, 선사들이 아주 간단명료한 것. 복잡한 것 싫어하니까요. 간단명료하고 아주 시원한 것. ←이런 가르침을 좋아하다 보니까 그래서 금강경을 좋아해가지고 금강경연구가 아주 많이 됐고, 그래서 지금에 와서 조계종의 소의경전, 宗定(종정) 교과서. 종단에서 정한 교과서. 宗定교과서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도 한국불교에서는 금강경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된다는 뜻이지요. 여기 그 말입니다. 원 불교 같은데도 그들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니라고 하지만, <금강경>만은 거의 소의경전으로 하듯이 금강경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기이요 역위보각장내하사 각자의경저해하야 이전천하후세하시니

이미 그러하였고 또한 장래에도 널리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각기 스스로 경(經)에 의지하여 해(解)를 지어서 천하후세(天下後世)에 전하시니,

이윽고 또 장래에 널리 알림(깨닫게 함)을 위하여 각각 경에 의지하여 새김을 나타내어(지어) 천하 후세에 전하니,

(說誼 ; 旣以斯經으로 現益當世하시고 且造斯解하야 流芳萬古삿다)

(설의 ; 기이사경으로 현익당세하시고 차조사해하야 유방만고삿다)

이미 이 경(經)으로써 당세(當世)에 이익을 주었고 또한 이 해석(解釋)를 지어서 그 아름다움을 만고(萬古)에 흘리셨도다.

이미 이 경으로 당세에 뚜렷이 이익 되게 하고, 또 이 새김을 지어 만고에 향기로움이 흐르게 한 것이다.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기이요 역위보각장내하사 각자의경저해하야 이전천하후세하시니

旣而(기이)요 亦爲普覺將來(역위보각장래)하사. 이미 그렇고, 과거에는 이미 그렇고 또한 將來. 장래에 올 사람들. 미래의 사람들을 普覺하사, 널리 깨닫게 했다.

各自依經著解(각자의경저해)하야. 각각 경에 의지해서 해석을 지어서 = 依經著解. 이럴 때는 著자가 그야말로 지을 著자로 자기 역할을 하네요.

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이전천하후세)하시니. 천하후세에 전하시니

(說誼 ; 旣以斯經으로 現益當世하시고 且造斯解하야 流芳萬古삿다)

(설의 ; 기이사경으로 현익당세하시고 차조사해하야 류방만고삿다)

설의(說誼) :

旣而斯經(기이사경)으로. 이미 이 경전으로

現益當世(현익당세)하시고. 當世에도 그 이익이 나타났어요. 이익이 당세에도 나타나고

且造斯解(차조사해)하야. 또한 이 해석을, 앞으로 사가해라고 하는 해석을 지어서

流芳萬古(유방만고)삿다. 그 꽃다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가르침이 萬古에 흘러 넘쳤다. 삿다. 라는 토는 옛날에 잘 달았던 토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달아놨는데요. “하셨다ㆍ하였다.” 이런 뜻입니다.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개시조문상덕이리오 가위금상첨화며

어찌 무늬를 새겨서 덕(德)을 잃으리오. 오히려 금상첨화로다.

어찌 이 무늬를 새겨 덕(德)을 헐어버리겠는가? 가히 비단 위에 꽃을 더했다고 이를 것이로다.

(說誼 ; 玉無瑕而彫文에 反喪良玉溫潤之德이어니와 斯解則反是하야 致令經語로

(설의 ; 옥무하이조문에 반상량옥온윤지덕이어니와 사해즉반시하야 치령경어로

옥에 티가 없는데 옥에 무늬를 새기매 도리어 좋은 옥의 매끄러움을 상해버리거니와 이 解[五家解]인 즉 이것과 반대되어서 경(經)의 말씀을

옥에 흠이 없는데 무늬를 새기면 도리어 좋은 옥의 온윤한 덕을 헐어버리는데, 이 풀이는 이를 뒤집어서 경의 말씀으로 하여금

益精하며 經義로 益明하야 遂使目之者로 披雲都日하고 耳之者로 豁然心開로다)

익정하며 경의로 익명하야 수사목지자로 피운도일하고 이지자로 활연심개로다)

더욱 정밀(精密)하게 하고 경(經)의 뜻을 더욱 분명(分明)하게 해서 마침내 보는 자(者)로 하여금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게 하며 듣는 자(者)로 하여금 활여(豁然)히 마음이 열리게 하였다.

더욱 정미하게 하며, 경의 뜻을 더욱 밝게 하여 곧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게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훤히 마음을 열게 한 것이다.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개시조문상덕이리오 가위금상첨화며

豈是彫文喪德(기시조문상덕)이리오 可謂錦上添華(가위금상첨화)며. 그랬습니다. 조문상덕(彫文喪德), 이것은 “옥” 에 흠이 있을 때 그 흠을 안 보이도록 하고, 흠을 파내면서 조각을 합니다. 그런데 옥이 좋으면 사실은 거기다가 조각 잘못하면 옥의 덕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여기 文자는 무늬지요. 어찌 무늬를 새겨서 덕을 손상 하는 것이겠는가?

可謂錦上添華다. 그러니까 5조사께서 금강경을 해석 한 것이 錦上添華다. 이겁니다. 그것 뭐 해석 잘못해가지고 괜히 금강경을 버려놓는 식이 아니고, 잘못해석하면 버려놓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버려놓는 것은 彫文喪德인데, 그것이 아니라 錦上添華다.

(說誼 ; 玉無瑕而彫文에 反喪良玉溫潤之德이어니와

(설의 ; 옥무하이조문에 반상량옥온윤지덕이어니와

설의(說誼) :

玉無瑕而彫文(옥무하이조문)에. 옥에 티가 없는데 무늬를 조각함에ㆍ무늬를 조각함에

反喪良玉溫潤之德(반상양옥온윤지덕)이어니와. 도리어 良玉. 아주 좋은 옥의 따뜻하고 아주 윤택한 그런 덕을 손상시키거니와

斯解則反是하야 致令經語로 益精하며 經義로 益明하야

사해즉반시하야 치령경어로 익정하며 경의로 익명하야

斯解則反是(사해즉반시)하야. 이 오가해 다섯 명. 우리 교재로 치면 네 분의 해석. 이것은 反是. 이것하고는 반대로 그렇지 아니 해서

致令經語(치령경어)로. 경의 말씀으로 하여금

益精(익정)하며. 더욱 정밀하게 했다. 말하자면 아주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낱낱이, 구석구석 사실은 경에서 숨어있는 뜻까지 다 드러냈다 이런 뜻입니다. 또

經義(경의)로 益明(익명)하야. 경의 뜻으로 하여금 더욱 밝게 했다. 경의 뜻이 환하게 드러나게 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금강경 원문만 가지고 공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원문만 가지고 공부해서는 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經義로 더욱 밝게 해서

遂使目之者로 披雲都日하고 耳之者로 豁然心開로다)

수사목지자로 피운도일하고 이지자로 활연심개로다)

遂使目之者(수사목지자)로. 드디어 目之者. 눈. 눈의 역할은 뭐겠습니까? 보는 것이지요. 드디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披雲覩日(피운도일)하고. 구름을 헤치고 태양을 보게 하고

耳之者(이지자)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 耳자 써놓고 “듣는다.” 하고, 눈 목‘目’자 써놓고 “본다.” 하고 이렇게 한문 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다양한 해석이 그 경우에 따라서 알맞게 해석할 줄 알면 어지간히 글을 보는 것이지요.

금강경 사가해 제2강 4부(何止重輝佛日이리오~)|(2011. 04. 19)

釋대원성 | 조회 205 |추천 1 |2011.08.15. 14:55

http://cafe.daum.net/yumhwasil/HsLO/11

耳之者(이지자). 귀의 사람. 귀사람ㆍ귀사람. 이래가지고는 뭔지 모르지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豁然心開(활연심개)로다. 활연히ㆍ시원하게 마음이 열리게 하는 도다. 그랬습니다.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하지중휘불일이리오 역내광양조도로다

어찌 부처님의 빛[佛日]을 더욱 빛내는 데에만 그치리오. 또한 조사(祖師)의 도(道)까지도 드날림이로다.

어찌하여 다시 불일(佛日)을 밝게 할 따름이겠는가? 또한 조사의 가르침을 빛내어 펴는구나.

(說誼 ; 古人이 道하사대 三乘十二分敎에 體理得妙하면

(설의 ; 고인이 도하사대 삼승십이분교에 체리득묘하면

옛사람[古人]이 이르시되 “삼승십이분교(三乘 十二分敎)의 이치를 체득하고 묘(妙)를 얻으면

옛 사람이 이르되, “3승의 12분교에 이치를 알아서 묘(妙)를 얻으면

何處에 更有祖師西來意리오하시니 則別傳之旨도 亦不外乎斯經이로대

하처에 갱유조사서내의리오하시니 즉별전지지도 역불외호사경이로대

어느 곳에 다시 조사(祖師)[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있으리오“ 하시니 즉 따로 전한 뜻[敎外別傳]도 역시 이 경(經) 밖이 아니로되

어느 곳에 다시 조사의 서래(西來)한 뜻이 있느냐? 하니, 곧 따로 전하는 뜻이 또 이 경에 나타나지 아니하되,

尙爲言敎의 所攝하야 隱而不現이어늘 今諸祖가 稱實發揚하시니 非獨敎義全彰이라

상위언교의 소섭하야 은이불현이어늘 금제조가 칭실발양하시니 비독교의전창이라

오히려 언교(言敎)의 섭수(攝受)한 바가 되어서 숨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제 조사(祖師)님들께서 사실에 맞춰서 드러내시니 비단 가르침의 뜻이 전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언교(言敎)의 잡힘[攝]이 되어 그윽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니, 이에 여러 조사의 사리에 맞게 베풀어 폄이 한갓 교(敎)의 뜻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別傳之旨도 亦乃昭然이로다

별전지지도 역내소연이로다

별전(別傳)의 뜻[禪旨]도 또한 여기에 환하게 드러나도다.

따로 전하는 뜻이 또 밝도다.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하지중휘불일이리오 역내광양조도로다

何止重輝佛日(하지중휘불일)이리오 亦乃光揚祖道(역내광양조도)로다. 아, 좋은 말이지요? 어찌 그치겠는가? 무엇을요? 重輝佛日. 중국 사찰 순례하다 보면 重輝佛日. 이런 말 참 많이 봅니다. 부처님의 태양을 거듭 빛나게 하는, 부처님의 태양을 거듭 빛나게 하는데 그치겠는가? 그렇지요. 금강경을 잘 드러내는데 그치겠는가?

亦乃光揚祖道로다. 조사의 법. 조사의 법의 그 빛이 조사의 道를 아주 빛나게 드날린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금강경 사가해만 봐도요? 선불교가 그대로 무르녹아 있습니다. 선불교정신이...

왜냐? 선사들이, 선을 체득하신 선사들이 해석을 했기 때문에, 선의 안목에서 금강경을 해석했습니다. 그럼 <금강경>은 원문 그대로 있으니까. 佛日. 부처님의 가르침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다음에 조사 스님들이 금강경을 해석하는 것을 빌미로 해서 당신이 깨달으신 그 깨달음을 거기다가 한껏 펼쳐 보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의 뜻이 잘 드러난 것은 “금강경 오가해다.” 이런 표현들을 합니다.

(說誼 ; 古人이 道하사대 三乘十二分敎에 體理得妙하면

(설의 ; 고인이 도하사대 삼승십이분교에 체리득묘하면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古人(고인)이 道(도)하사대. 옛 사람이 말하기를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에. 三乘十二分敎. 이것은 우리 불교경전을 분류할 때, 이렇게 三乘十二分敎로 분류하지요.

體理得妙(체리득묘)하면, 體理. 이치를 체달한다ㆍ체득한다ㆍ깨닫는다, 이런 뜻입니다. 體자. 불교에서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서예학원에서는 “체 받는다.” 그래요. 글씨를 써주면 그것을 “체 받는다.” 그러는 것도 이 體자를 쓰는데요. 여기서 體理 하면 이치를 체득한다ㆍ깨닫는다. 그리고 그 미묘함을 얻으면, 三乘十二分敎에서 얻으면

何處에 更有祖師西來意리오하시니

하처에 갱유조사서내의리오하시니

何處(하처)에. 어느 곳엔들

更有祖師西來意(갱유조사서래의)리오시니. 다시 祖師西來意가 있겠는가? 그렇지요. 3승 12분교에서 이치만 제대로 깨달으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선불교의 아주 근본 종지지요. 근본취지. 祖師西來意.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 와서 사실은 선불교를 창시했지요.

달마스님이 와서부터 사실 선불교가 생긴 것 아닙니까? 또 달마스님 당시 때는 썩 그렇게 꽃을 피우지 못했고, 후대에, 몇 대를 내려와서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요. 달마스님은 기껏 씨를 심은 정도에 불과 했습니다.

아무튼 선불교는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옴으로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렇지만 그것을, 선불교를 불교의 완성이라고 이렇게 보잖아요. 불교의 완성이다. 불교가 선불교에 와서 완전히 이뤄졌고, 그 이상 더 지금까지 크게 진보가 없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선불교도 결국은 8만 대장경 三乘十二分敎에서 이치만 깨달으면 다 있다.

則別傳之旨도 亦不外乎斯經이로대

즉별전지지도 역불외호사경이로대

則別傳之旨(즉별전지지)도. “敎外別傳(교외별전)” 그러지요? 敎外別傳.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그런 뜻도 亦不外乎斯經(역불외호사경). 그랬습니다. 이 경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敎外別傳ㆍ敎外別傳” 해서 선가에서 그것을 아주 높이 삽니다. “우리는 8만 대장경의 길 하고 다르다ㆍ8만 대장경 밖에 따로 전하는 취지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불교의 특색 아닙니까? 하지만 여기 함허스님의 말씀을 보면, 亦不外乎斯經이라고 그랬습니다. <금강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금강경 안에 다 있다 이 말입니다.

尙爲言敎의 所攝하야 隱而不現이어늘

상위언교의 소섭하야 은이불현이어늘

尙爲言敎(상위언교)의 所攝(소섭)하야. 오히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의 言敎에, 말과 그 가르침에 攝한바가 되어가지고서 隱而不現(은이불현)이어늘, 숨어서 나타나지 않거늘

今諸祖가 稱實發揚하시니 非獨敎義全彰이라 別傳之旨도 亦乃昭然이로다

금제조가 칭실발양하시니 비독교의전창이라 별전지지도 역내소연이로다

今諸祖(금제조)가. 지금의 여러 조사스님들이

稱實發揚(칭실발양)하시니.實에 맞추어서, 실법에ㆍ실다운 이치에 맞추어 가지고 稱. “칭합 시켜서” 그 말입니다. 稱實. 거기에 맞추어서, 진실에 맞추어서 發揚했다. “드러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非獨敎義全彰(비독교의전창)이라. 홀로 敎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새겨야 됩니다. 敎義가, 敎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別傳之旨(별전지지)도. 敎外別傳. “선불교의 종지도” 그 말입니다. 선불교의 종지도

亦乃昭然(역내소연)이로다. 또한 이에 환하게 밝혔다.

그렇습니다. 참,<금강경> 이 사가해. 이것은 정말 이 두 가지를 다 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불교에는 선불교ㆍ또 부처님의 경전의 가르침이면 경전의 가르침. 그것이 이 한 권의 책속에 다 무르녹아 있다. 이런 뜻이지요. 亦乃昭然이로다.

有云호대 單傳直指之旨가 豈斯敎의 所攝乎아하니 看於黃梅曹溪에 足可見矣니라)

유운호대 단전직지지지가 개사교의 소섭호아하니 간어황매조계에 족가견의니라)

어떤 이가 말하길 “홀로 전한 직지(直指)의 뜻[禪旨]이 어찌 이 교(敎)[金剛]에 섭수(攝受)한 바 되겠는가“ 하고 의심하니, 황매(黃梅)[五祖]와 조계(曹溪)[六祖]를 보면 족히 알 수 있도다.(바로 이 經 안에 禪旨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르기를, ”단벌로 전하시어[단전(單傳)] 바로 가르치시는[직지(直指)] 뜻이 어찌하여 이 교의 잡을[섭수(攝受)할] 바이겠는가?“ 하니, 황매와 조계를 보면 족히 알 것이다. 【황매는 산 이름이니, 5조 홍인대사가 살던 곳이고, 조계도 산 이름이니, 6조 혜능대사가 살던 곳이니, 이 두 대사가 다 단전(單傳) 직지(直指)의 뜻을 전한 것이다.】

有云(유운)호대. 어떤 이가 말하기를

單傳直指之旨(단전직지지지)가. 單傳. 한 사람ㆍ한 사람에게만 전해준, 예를 들어서 육조스님 제자도 무수히 많지요. 제자 중 마조스님 같은 이들은 몇 백 명이 될 정도로요. 그런데 대 수를 이어갈 때는 한 사람에게 전해진 것으로 그렇게 역사는 기록 됩니다. 그래서 單傳. ←이렇게 말합니다. 홀로 전하는 직지의 뜻이, 바르게 가르침. 그 뜻이

豈斯敎(기사교)의 所攝乎(소섭호)아하니. 어찌 이 교에 攝하는 바가 되겠는가? 선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요.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이런 거 안 보니까요. ‘敎外別傳이 어찌 금강경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하는...

看於黃梅曹溪(간어황매조계)에 足可見矣(족가견의)니라. 황매(黃梅) = 5조 홍인스님. 曹溪 = 6조 혜능스님. 이런 사람을 볼 것 같으면 족히 가이 그 이치가 드러날 것이다.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뜻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6조 스님께서 그야말로 떠꺼머리총각 나무꾼이 불교라는 불자도 모르고, 세상에 불교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금강경 한 구절을 떡~ 듣고는 그 순간 정말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지요.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것이 견성인지 뭔지 몰랐습니다. 그런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 딴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이 오로지 금강경 도리입니다. 또 황매산 5조 스님. 6조 스님 스승인 홍인스님은 자나 깨나 금강경만 가르쳤어요. 금강경만 가르쳤다고요. 그 분들이 다 敎外別傳之旨의 정통파고요. 단전직지(單傳直指)의 뜻을 고스란히 간직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중요한 대목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교를 하면, 경학을 공부하면, 또 자기한 것에 집착하게 마련입니다. 왜냐? 자기가 거기에 정력을 쏟았고, 공을 많이 들였으니까, 자기 공 들인 것을 좀 아끼고ㆍ사랑하고ㆍ그것을 또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경학을 안 보고 참선만, 참선일변도로 한 사람은 참선만 집착하고 참선만 좋은 것이라고ㆍ그것이 최고라고 아주 이렇게 집착하고요. 그것을 내세우는 경향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봐요. 또 근래에 남방에 가서 공부해온 사람들은,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아주 돈 받아가면서 공부합니다. 대접받아가면서 공부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그냥 공부합니다.

그런데 남방에 가가지고 그 말도 서툰데 영어해야지, 그 지역 말 배워야지 얼마나 고생고생 합니까? 기후ㆍ음식 하나도 안 맞지요. 가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공부해온 겁니다. 거기에서 한 철을 공부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10년 공부한 것 보다 고생이 더 심해요. 공이 더 들어요. 그것을 한 10년 간 공부해가지고 우리나라에온 겁니다. 그래 이 사람 마음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거기에서 석 달만 공부해도 우리나라에서 10년 공부한 것 보다 고생이 더 심해요. 그런데 그것을 10년을 공부하고 왔습니다. 한국불교ㆍ선불교ㆍ대승불교, 아무 것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와요. 왜냐? 자기가 공을 들인 것이 있으니까요. 그만치 고생 하면서 공부했고, 애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교리의 차원이 어떻고, 이것은 아무 관계없이 자기가 그만치 노력 들이고ㆍ고생했고, 고생고생 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는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얼마나 집착한다고.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근본불교ㆍ근본불교ㆍ초기불교. “이거야말로 불교다.” 라고 이렇게 막 그냥 고집합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거기 가서 그렇게 고생하고 왔으면 똑 같이 그렇게 아마 주장할 겁니다. 자기가 얼마나 마음을 쓰고, 공을 들이면서 공부했는가? 이 겁니다. 그 견해의 차이라든지, 교리의 차원 이라든지 이것은 아무 상관없다고요. 사람이란 그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을 이해해 줘야 됩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을 이해해 줘야 돼요. 한국에서는 한 10년 간ㆍ20년 간 있으면서도 아주 편하게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 없습니다. 선불교의 차원이 아무리 높아도 그 사람 의식 속에는 그것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래 그런 것을, 지금 남방에 가서 공부해온 분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고, 또 포교당 같은 것, 교육도량 같은 것도 많이 세우고 이렇게 하는데.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를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비교도 안 될 그런 교리인데, 그것을 그렇게 우수하게 보고, 선불교를, 조사를 “중국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요. 그런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도반입니다. “중국에 어떤 사람이 떠들어 놓은 글 가지고, 그걸 가지고 진짜 불교라고 하고 있다.” 선불교를 그렇게 말합니다. 야~, 신기하지요?

그 사람도 한국에서 선방에 여러 해 있었습니다. 우리 같이 살고 그랬는데요. 그리고 심지어 대승불교의 원산지 영축산. 영축산에 가면 <법화경> 설한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말을 하기 싫어서, 그 말을 안 하려고 영축산에도 신도들 데리고 안 갑니다. 그 밑에 주차장까지 갔다가 돌아와요. 제가 그 사람하고 인도여행을 같이 했거든요. 그렇다고요. 그만치 집착이 심하다니까요. 대승불교이야기를 안 하는 겁니다. 입에 안 담는 겁니다. 거기 올라가면 대승불교이야기를 입에 담아야하고ㆍ법화경이야기를 입에 담아야하고 하기 때문에요. 사람은 자기가 공을 들인데 따라서 그렇게 집착이 심하다는 것, 아주 참, 깊이 깨달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골고루 다 섭렵을 해서, 아주 냉정하게 그 어떤 지견의 높고 낮음을 충분히 분별해놓고 자기가 애착 가는 불교는 자기가 애착 가는 데로 이야기하고, 아무리 높은 불교라도 애착이 안 가면 말 안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요. 그렇게 되어야지, 자기가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을 하는 것은 안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 이 금강경 사가해를 통해서, 정말 선불교와 대승불교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금강경을 겸해서 공부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이 참, 얼마나 정말 다행인지 모르지요. 그런 이야기를 여기에 썼습니다.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都하니 幸莫大焉이라

아조가 생우천재지하하야 득우난우지보하야 수접목도하니 행막대언이라

우리들이 천년(千年) 이후에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보배를 만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니 그 다행(多幸)스러움이 이보다 큼이 없도다.

우리들이 천년 이래(후)에 나서 만남이 어려운 보배를 만나 손으로 잡으며 눈으로 보니, 다행함이 이것만큼 큰 것이 없구나.

(說誼 ; 慶遇斯解也라)

(설의 ; 경우사해야라)

이 해[五家解]를 만난 것을 慶事스럽게 여기도다.

이 해설서(금강경오가해) 만남을 기뻐하도다.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都하니 幸莫大焉이라

아조가 생우천재지하하야 득우난우지보하야 수접목도하니 행막대언이라

我曹(아조)가. 우리들이

生于千載之下(생우천재지하)하야. 천년 밑에 태어나서, 그렇습니다. 우리들, 함허스님 당시 때니까요. 예를 들어서 6조 스님, 또 부대사 같은 분은 정말 한 천년 쯤 더 앞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대강 천년 밑에 태어나 가지고서

得遇難遇之寶(득우난우지보)하야, 정말 만나기 어려운 보물을 만나서

手接目覩(수접목도)하니. 손으로 직접 接하고, 책을 接하게 되고ㆍ눈으로 보게 돼서 幸莫大焉(행막대언)이라. 그 다행함은 막대한 바다. 다행함이 정말 막대하다. 더 이상 클 수가 없다.

(說誼 ; 慶遇斯解也라)

(설의 ; 경우사해야라)

설의(說誼) :

慶遇斯解也(경우사해야)라. 이 解書(해서). 우리는 사가해지만, 여기로 보면 五家解지요. 五家解 만난 것을 아주 경사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간단하게 해석했습니다.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이차로 가이양불조지여휘며 이차로 가이연군국지홍조로다

이로써 불조(佛祖)의 한없는 빛을 드날리며 이로써 나라의 큰 복(福)을 뻗치게 함이로다.

이로써 가히 불조(佛祖)의 남은(한없는) 빛을 펼 것이며, 이로써 가히 임금과 나라의 큰 복을 길게(오래) 하겠구나.

(說誼 ; 儻因斯解하야 豁開正眼則法印이 在握하고 化道가 在己니라)

(설의 ; 당인사해하야 활개정안즉법인이 재악하고 화도가 재기니라)

만약 이 오가해(五家解)로 정안(正眼)이 활짝 열리면 법인(法印)이 바로 우리 손 안에 있고 교화(敎化)의 길[化道]이 자기에게 있느니라.

만약 이 풀이(금강경오가해)를 말미암아서 바른 눈을 훤히 열면, 곧 법인이 (우리) 손에 있으며 교화하는 길이 몸에(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이차로 가이양불조지여휘며 이차로 가이연군국지홍조로다

以此(이차)로 可以揚佛祖之餘輝(가이양불조지여휘)며. 가이 佛祖. 부처님과 조사가 남겨준 그 빛을, 남겨준 빛을 드날리며

以此(이차)로. 이것으로써 可以延君國之洪祚(가이연군국지홍조)로다. 君國. 임금과 나라의 큰 복을 더욱 뻗치게 延자. 뻗어 나게 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정말 제대로 공부하면, 우리 승려들ㆍ또 불자들, 본분에만 충실하면요? 본분이라는 것이 뭡니까? 공부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장한 것, 아닙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공부하는 것. 이것이 사실은 본분입니다. 불자들의 본분인데... 본분에만 충실하면 불교는 저절로 잘 되게 돼 있어요. 그런 뜻이 여기 있습니다.

아~ 뭐, 나라에서 불교 못 알아준다고ㆍ무시한다고 막 그냥 꼭 어떤 세속에서 하듯이 그런 방법을 써가면서 알아달라고ㆍ알아달라고, 왜 푸대접 하냐고ㆍ푸대접 하냐고 그러는데, 우리 불자들이 불자로써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해서 그렇다 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以此로, 이 금강경 오가해 공부하는 것으로써 佛祖의 餘輝.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남겨준 그 빛을 드날릴 것이고, 또 이것으로써 나라도 잘 되게 한다. 이겁니다. 나라의 홍복이 된다. 君國의 큰 복을 뻗어 나게 하는 도다.

(說誼 ; 儻因斯解하야 豁開正眼則法印이 在握하고 化道가 在己니라)

(설의 ; 당인사해하야 활개정안즉법인이 재악하고 화도가 재기니라)

설의(說誼) :

儻因斯解(당인사해)하야. 만일 이 해석을 인해서

豁開正眼則(활개정안즉). 바른 안목ㆍ바른 소견ㆍ바른 지견. 正眼을 활짝 열어 제친다면 法印이 在握(법인재악)하고, 진리의 도장이 내 손 안에 있고,

化道(화도)가. 교화의 도가 在己(재기)니라. 자기에게 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 한 구절만 가지고도 수십 가지로 부연설명을 할 수가 있고,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주 잘 해석을 하고, 부연 설명을 잘 해서 책을 한 권 써도 좋을 일이지요.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연차편집이 출어하인지수완대 이불현기명호아

그러나 이 오가해(五家解)의 편집(編集)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길래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책의) 편집(금강경오가해)이 어떤 사람의 손에서 나왔기에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인가? 【편은 차례를 정하는 것이고, 집은 모으는 것이다.】

(說誼 ; 歎不現夫編者之名也라)

(설의 ; 탄불현부편자지명야라)

저 편집자(編集者)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음을 탄식(歎息)하노라.

편집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함을 탄식한 것이다.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연차편집이 출어하인지수완대 이불현기명호아

然此編集(연차편집)이. 그러나 이 편집이, <금강경 오가해> 편집입니다.

出於何人之手(출어하인지수)완대. 어떤 사람의 손에서 나왔기에, 이런 말입니다. 나왔기에

而不現其名乎(이불현기명호)아?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 했는가? 함허스님 당시에, 함허스님께서 금강경 오가해 편집된 것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누가 그렇게 엮었는지 이름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해석을 한 사람들이 고전만 하더라도 수백 종류가 되지요. 또 요즘 책으로 나와 있는 것만 해도 57가해란 책을 제가 봤을 정도입니다. 57명의 해석이 한꺼번에 있는 것을 봤는데요. 그런 정도로 많습니다. 많은데, 특히 오가해만 추려가지고 금강경하고 이렇게 딱 편찬을 해놓은 것은, 함허스님 보기에 너무 이것은 위대한 저술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說誼 ; 歎不現夫編者之名也라)

(설의 ; 탄불현부편자지명야라)

설의(說誼) :

歎不現夫編者之名也(탄불현부편자지명야)라. 편찬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탄식한 것이다.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오희기위일불오조사지심을 영일전이변견야하노라

나는 한 부처님과 5조사(五祖師)의 마음이 한번 굴리매 문득 보게 됨을 크게 기뻐하노라.

내가 한 부처님과 5조사의 마음[해설]을 한 번 옮겨 곧 보게 함을 기뻐하노라.

(說誼 ; 一軸之內에 佛燈祖焰이 交光互映하야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니

(설의 ; 일축지내에 불등조염이 교광호영하야 가일전이변견불조지심의니

한 권(卷)의 책 안에 부처님의 법등(法燈)과 조사(祖師)의 불꽃이 서로 어울려 비추어서 가히 한번 읽으매 곧 불조(佛祖)의 마음을 다 보게 되니

한 축(軸; 권)의 책 안에 불등(佛燈)과 조사의 불꽃이 섞이며 서로 비추어 가히 한 번 옮겨 불조의 마음을 곧 보리니,

此所以爲喜也니라)

차소이위희야니라)

이것이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이것이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오희기위일불오조사지심을 영일전이변견야하노라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오희기위일불오조사지심)을. 나는 기뻐하노라. 그런 뜻이지요. 그 한 부처님과 다섯 분의 祖師의 마음을

令一轉而便見也(영일전이변견야)하노라. 한번 굴림으로 해서ㆍ한번 굴림으로 해서 곧 다 볼 수 있도록 하게한 것. 다 보게 한 것을 나는 기뻐하노라. 그렇습니다. 이 오가해만 잘 보면 한 부처님과 다섯 祖師. 아니, 거기다 부처님의 제자 수보리까지 그것을 다 볼 수 있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 동안, 아니면 일 년 동안ㆍ일생 동안 쓰는 그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ㆍ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어떤 시간들이 가장 값지고ㆍ소중하고ㆍ보람 있고ㆍ자기 영혼에 유익하겠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아니면 한 시간을 어디에다 쓰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보람 있겠는가? 진정으로 나한테 보람 있겠는가?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가 성인의 말씀ㆍ성인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성인의 가르침에 골몰하고, 또 그것을 이렇게 천착해보는, 이렇게 해석해보고 저렇게 해석해보고 또 음미해보고 스스로 환희하고 기뻐하는 것. 여기는 吾喜. 내가 그러한 것을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아~! 금강경 오가해 읽으면서, 예를 들어서 금강경 원문 척~ 읽고 그 밑에 다섯 조사 스님들의 낱낱이 개인적으로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해 놓은 것을 읽으시면서, 환희에 차 있는 그런 함허스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說誼 ; 一軸之內에 佛燈祖焰이 交光互映하야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니

(설의 ; 일축지내에 불등조염이 교광호영하야 가일전이변견불조지심의니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一軸之內(일축지내)에. 한 권의 안에

佛燈祖焰(불등조염)이. 부처님의 등불과 조사의 불빛이

交光互映(교광호영)하야. 交光. 함께 빛나고 서로서로 비춰서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가일전이변견불조지심의)니. 가히 한 번 굴려서ㆍ한 번 굴림에, 오가해 책은 한 번 굴리면 불조의 마음을 곧 보게 된다. 부처님 마음도 읽고ㆍ수보리의 마음도 읽고ㆍ다섯 조사의 마음까지도 읽게 되었으니,

此所以爲喜也니라)

차소이위희야니라)

此所以爲喜也(차소이위희야)니라.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까닭이다.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소차는 수유탄현지묘지나 미우상음지가총이라

슬퍼하는 바는 비록 거문고를 퉁기는 묘(妙)한 손가락은 있으나 음(音)을 감상하는 뛰어난 밝은 귀[智慧人]를 만나지 못했음이라.

탄식할 바는 비록 (거문고의) 현을 타는 미묘한 가락이 있으나, 소리를 상완할 아름다운 듣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유시로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며

이로 말미암아 아아(峨峨)[산을 연상하는 곡]를 양양(洋洋)[바다를 연상하는 곡]이라고 잘못 듣는 자(者)가 많도다.

이로부터 ‘아아’를 잘못 들어 ‘양양’을 만드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아’는 산의 높은 모양이고, ‘양양’은 물이 넓은 모양이니, 백아(伯牙)는 옛날에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이고 자기(子期)는 소리를 알던(감상할 줄 알던) 사람이니, 백아가 마음을 산에 두고 타면, 자기는 이르기를, “높구나! 선생의 뜻이여.” 하고, (백아가 마음을) 물에 두고 타면 “양양하고나! 선생의 뜻이여!” 하니, 여기서는 ‘아아’(산을 생각하고 지은 곡)를 잘못 들어 ‘양양’(바다를 생각하고 지은 곡)을 삼는다는 말이다.】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소차는 수유탄현지묘지나 미우상음지가총이라

所嗟(소차)는. 그런데 내가 거기서 좀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탄식하는 바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좀 슬퍼하는 바는, 슬플 嗟자지요? 슬퍼하는 바는

雖有彈絃之妙指(수유탄현지묘지)나. 비록 彈絃. 거문고를 타는 미묘한 기술의 손가락은 있지만,

未遇賞音之嘉聰(미우상음지가총)이라. 賞音, 그 음악 소리를 감상할 줄 아는 아름다운 聽力(청력). 들을 줄 아는 그런 수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을 나는 슬퍼한다.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유시로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며

由是(유시)로. 이로 말미암아

誤聽峨峨(오청아아)하야. 峨峨. 산 높을 峨자지요? 산이 높고 높은 것을 연주했는데 그것을 잘못 듣고 = 誤聽. 잘못 듣고

作洋洋者(작양양자)가 多矣(다의)다. 洋洋. 큰 바다 洋자지요?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작곡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금강경>을 소의경전이라 해서 무수히 공부합니다만, 정말 얼마나 그것을 부처님 뜻에 맞게 이해하는가? 문제가 참 많겠지요? 이것은 말하자면 백아와 종자기의 옛 고사에서 나온 이야기지요. 춘추 시대 촉나라에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거문고 소리에 높은 산을 실어서 연주하면 나무꾼인 종자기가 그것을 듣고는 무릎을 치면서 ‘야~ 그 산 참, 아름답고 장쾌하구나. 어쩌면 산이 저렇게 웅장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없는 산을 당신은 그렇게 멋지게 연주합니다.’ 이렇게 알아 맞췄습니다. 소리 아는 사람을 知音者(지음자)라고 그러지요. 그리고 또 백아라는 사람이 바다를 연주를 하면, 종자기가 또 태평양 바다의 그 출렁거림과 그 호환함과 그 속의 오묘한 바다의 의미를 그대로 다 듣고는 표현 하니까 얼마나 근사했겠습니까? 세상에는 그렇게 서로 속속들이 이해해주고 알아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중에 종자기라는 知音者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백아는 거문고 줄을 잘라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아니했다. 하는 아주 멋진 고사에서 따온 말이지요.

(說誼 ; 三尺古琴에 妙音이 斯在하니 雖有妙音이나 若無妙指면 終不能發이요

(설의 ; 삼척고금에 묘음이 사재하니 수유묘음이나 야무묘지면 종불능발이요

석자[三尺] 옛 거문고에 묘음(妙音)이 거기 있으니 비록 묘음(妙音)이 있으나 만약 묘(妙)한 손가락이 없으면 마침내 나타내지[能發] 못하고

석 자 (길이의) 옛날 거문고에 미묘한 소리가 여기 있으니, 비록 미묘한 소리가 있으나, 만일 미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끝끝내 (그 미묘한 소리를) 나타내지 못하리니,

縱有妙指하야 善能彈絃이나 聞而賞音者가 蓋難하니 賞音者가 難故로

종유묘지하야 선능탄현이나 문이상음자가 개난하니 상음자가 난고로

비록 묘(妙)한 손가락이 있어 거문고를 잘 타더라도 그 선율을 감상하는 자를 만나기는 더욱 어려우니 훌륭한 감상자가 없으므로

비록 미묘한 손가락이 잘 능히 현을 탐(연주함)이 있어도 들어서 소리를 즐길 이가 (있기) 어려우니, 소리를 즐길 이가 (있기) 어려운 까닭으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로다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로다

곡조를 잘 못 들어서 ‘아아(峨峨)’를 ‘양양(洋洋)’이라고 들음이 많도다.

‘아아’를 잘못 들어서 ‘양양’을 지을(‘양양’이라고 할) 이가 많을 것이다.

(說誼 ; 三尺古琴에 妙音이 斯在하니 雖有妙音이나 若無妙指면 終不能發이요

(설의 ; 삼척고금에 묘음이 사재하니 수유묘음이나 야무묘지면 종불능발이요

설의(說誼) :

三尺古琴(삼척고금)에. 세 길이 나 되는 옛 거문고 속에

妙音(묘음)이 斯在(사재)하니. 아름다운 소리가 거기에 있다.

雖有妙音(수유묘음)이나. 비록 아름다운 소리는 그 거문고에 있어요.

그런데 若無妙指(약무묘지)면. 그 거문고를 연주할 술 아는 그런 손가락이 없을 것 같으면

終不能發(종부능발)이요. 마침내 능히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습니다. 피아노가 아무리 있어도 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없지요.

縱有妙指하야 善能彈絃이나 聞而賞音者가 蓋難하니

종유묘지하야 선능탄현이나 문이상음자가 개난하니

縱有妙指(종유묘지)하야. 비록 아름다운 아주 묘한 재주를 가진 손가락은 있어서

善能彈絃(선능탄현)이나. 잘 능히 거문고를 타지만,

聞而賞音者(문이상음자)가. 듣고 그 소리를 감상하는 사람이

蓋難(개난)하니. 대개 없다.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경전이야 두 말할 나위 있습니까? 조사들이 토해놓은 그 어떤 선문답이야 더 어렵겠지요.

賞音者가 難故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로다

상음자가 난고로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로다

賞音者(상음자)가 難故(난고)로. 소리를 감상하는 사람이 어렵기 때문에 誤聽峨峨(오청아아)하야, 잘못 峨峨, 산 높은 것을 잘못 들어서

作洋洋者(작양양자)가 多矣(다의)로다. 큰 바다라고 짓는 사람이 많도다.

一部靈文에 妙理斯在하니 雖有妙理나

일부영문에 묘리사재하니 수유묘리나

일부(一部)[冊] 신령스런 글에 묘(妙)한 이치가 그 속에 있으니 비록 묘리(妙理)가 있으나

일부(一部) 신령스런 글이 미묘한 이치가 여기에 있으니,

若非匠手면 孰能抽毫하야 稱實發揚이리오 雖有稱實發揚이나 目以善解者가 蓋難하니

야비장수면 숙능추호하야 칭실발양이리오 수유칭실발양이나 목이선해자가 개난하니

만약 장인(匠人)의 손이 아니면 누가 능히 붓을 빼어서 사실에 맞게 표현하리오. 그러나 비록 사실에 맞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그대로 이해하는 이가 매우 적으니

비록 묘리(妙理)가 있으나, 만일 솜씨가 좋은 손이 아니면 누가 능히 붓을 빼어 사실에 맞게 베풀어 펴리오? 비록 사실에 맞게 펴는 이가 있어도 (그 글을)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기) 어려우니,

善解者가 難故로 以淺爲深하고 以深爲淺者가 多矣니 是可歎也로다)

선해자가 난고로 이천위심하고 이심위천자가 다의니 是可歎也로다)

잘 이해하는 이가 없는 고(故)로 얕은 것으로써 깊은 것을 삼고 깊은 것으로써 얕은 것을 삼는 자가 많으니 이것을 탄식함이로다.

잘 알 사람이 (있기) 어려운 까닭으로 옅은 것으로 깊은 것을 삼으며, 깊은 것으로 옅은 것을 삼는 이가 많으니, 이것을 가히 탄식하는 것이다.

一部靈文에 妙理斯在하니 雖有妙理나 若非匠手면 孰能抽毫하야 稱實發揚이리오

일부영문에 묘리사재하니 수유묘리나 야비장수면 숙능추호하야 칭실발양이리오

一部靈文(일부령문)에. 한 部의 신령스런 글에

妙理斯在(묘리사재)하니. 아름다운 이치가 여기에 있으니

雖有妙理(수유묘리)나. 비록 아름다운 이치가 있으나

若非匠手(약비장수)면. 만약에 匠人(장인)의 손이 아니라면

孰能抽毫(숙능추호)하야. 누가 능히 抽毫. 붓을 뽑아가지고서

稱實發揚(칭실발양)이리오? 진실에 맞게 發揚하겠는가? 드러내겠는가?

雖有稱實發揚이나 目以善解者가 蓋難하니

수유칭실발양이나 목이선해자가 개난하니

雖有稱實發揚(수유칭실발양)이나. 비록 진실에 맞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하나,

目以善解者(목이선해자)가 그것을 보고 잘 이해하는 사람이

蓋難(개난)하니 대개 어려움이니

善解者가 難故로 以淺爲深하고 以深爲淺者가 多矣니 是可歎也로다)

선해자가 난고로 이천위심하고 이심위천자가 다의니 是可歎也로다)

善解者(선해자)가 잘 이해하는 사람이

難故(난고)로 어렵기 때문에, 만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 難故로

以淺爲深(이천위심)하고 얕은 것으로써 깊음을 삼고

以深爲淺者(이심위천자)가 깊은 것으로써 얕음을 삼는 자가

多矣(다의)니 많으니

是可歎也(시가탄야)로다. 이것이 내가 탄식하는 바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까지하고 한번 읽겠습니다. 서문만 읽읍시다. 옛날 강원식으로 교육을 하기로 하면 딱 누구 지적해가지고 “읽어봐라.” 하고, 아니 “외워봐라.”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 것은 생략하고 같이 읽겠습니다.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2강-1]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2강-2]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着이로다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若大鑑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傅與鏡此五大士者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2강-3]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覩하니 幸莫大焉이라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2강-4]

많이 읽으십시오. 자꾸자꾸 읽는 것이 글을 빨리 이해하는 길이고, 宗旨(종지). 宗旨를 빨리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금강경 사가해 제3강 1부(又於經疏~)|(2011. 04. 20)

釋대원성 | 조회 201 |추천 1 |2011.08.18. 22:02

http://cafe.daum.net/yumhwasil/HsLO/12

그 동안 공부를 두 번 했는데요.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 되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계층의 학인과 그리고 또 다양한 그런 수준들, 이것을 저 나름대로 감안을 해서, 또 우리 이 학교의 교육 목적이 한문불전을 수학하는 것이니까 거기에 맞게 한다고 저 나름대로는 연구를 해서 그렇게 합니다.

어떤 분들은 순전히 한문 공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한문 공부하는 것같이도 들릴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법회같이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다 포함되면서도 한문불전을 우리가 제대로 습득을 해야, 언제나 평생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스스로도 볼 수가 있도록 이렇게 여기서 학습을 하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서 불교의 어떤 뜻에 대한 내용. 그 다음에 물론 한문에 대한 것 까지도 곁들여서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전통적인 우리 전통 불교 강원의 공부가 그래요. 한문도 익히고ㆍ교리도 익히고ㆍ거기에 불교의 아주 심오한 그런 안목도 거기서 익히게 되고요. 그런 것이 다 포함된 그런 교육이 전통 강원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차츰차츰 사라지려고 해서, 이것은 하나의 아주 고유한 전통문화인데요. 이런 것이 이렇게라도 지속이 된다고 하는 것이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러한 모습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을 해서, 잘 익혀서 길이길이 전했으면 하는 그런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를 끝내고 원문을 한 번 읽었습니다만, 분위기가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서 2강-1(9쪽) ‘我迦文이’ 부터 원문만 한 번 쭉~~ 읽겠습니다. 소리 내서 천천히 읽읍시다.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2강-1]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2강-2]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着이로다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若大鑑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傅與鏡此五大士者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2강-3]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覩하니 幸莫大焉이라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2강-4]

한글이나 영어나 한문이나 할 것 없이 익숙하게 반복해서 읽는 것. 그 보다 더 좋은 길은 없습니다. 자고로 전통 강원이나 서당에서는 ‘讀書百遍(독서백편)에 義自現(의자현)이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뜻 모르거든 무조건 100번 읽어라. 100번 읽으면 저절로 뜻이 드러난다. 그런 말이 있고요. 그런 데에 대한 이야기가 강원이나 서당에서 참 많습니다. 아기자기한 그런 이야기들이요. 그러니까 뜻이 잘 안 통하면 여러 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맹자 양혜왕 - 미록장에 보면 맹자가 양나라 혜왕이 동산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사슴하고 기러기, 이런 것을 키우면서 그것을 감상하고 즐기는데, 맹자도 거기를 갔습니다.

양혜왕이 물어요. “賢者(현자)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나는 왕이니까 이런 것을 즐긴다. 동산에서 이런 동물 키우면서 구경하고 즐기지만, 賢者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하니까, 맹자 말이 그래요.

‘賢者而後에 樂此(현자이후낙차)라.’ 어진 사람이 되어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지, ‘不賢者는 雖有此나 不樂也(불현자수유차부락야)니이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비록 이런 것이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즐길 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서, 與民同樂(여민동락)이라고 하는 말이 거기서 나오지요.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 공유하는 것. 이것을 거기서 이야기하는데, 거기의 주가, 鴻鴈麋鹿(홍안미록)이라고 하는 원문이 있으니까요.

鴻鴈之大者(홍안지대자)ㆍ麋鹿之大者(미록지대자). 이런 말이 있습니다. 鴻이나 鴈이나 전부 기러기입니다. 큰 기러기 鴻ㆍ기러기 鴈. 큰 사슴 麋ㆍ사슴 鹿. 어떤 선비가 아침에 나무하러 가는데, 어떤 학동이 鴻雁之大者 麋鹿之大者. 鴻雁之大者 麋鹿之大者. 그 열자를 하루 종일 읽더래요.

일 다 마치고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그 학동 집 앞을 지나는데, 아침에는 그냥 鴻雁之大者 麋鹿之大者 ←이렇게 읽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鴻은 雁之大者요 麋는 鹿之大者라. ←이렇게 토를 딱 붙여서 읽더라는 겁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하루 종일 100번만 읽었겠습니까? 그렇게 읽다 보니까, 저절로 물리가 터져가지고 그 뜻을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알더라.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불교의 그런, 특히 函虛序(함허서)가, 이것은 “우리 불교의 3대 서문중의 하나다.”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런 것은 천 번ㆍ만 번 읽어도 결코 시간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 정말 깊고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을,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로 저는 자꾸 뒤 돌아 보아진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읽고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지요.

지금 여기는 어떤 이야기가 진행 중인가 하면 이 오가해가 누구 손에 의해서 편집이 됐는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불 오조의 마음을 이 속에 다 토로 했는데, 오가해라고 하는 이 한 권속에 한 부처님과 다섯 조사의 마음이 여기서 다 드러났는데, 그들의 심장. 그들의 심장이 여기 다 표현됐다. 그런데 내가 참 안타깝게 여기는 바는 비록 거문고를 잘 타는 능숙한 솜씨가 있다고 하지만, “妙指” 하면 고운 손가락이라는 뜻이 아니겠지요? 고운 손가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주 능숙한 솜씨가 있지만, 그런데 그 음악 소리를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것 참 곤란하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함허스님께서는 이 ‘오가해’.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고 하는 이 책의 내용의 깊이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시고, 이것을 누가 좀 잘 알아줬으면ㆍ정말 제대로 이해해줬으면 하는 그런 어떤 한탄의 소리와 당신의 바람을 여기다 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그런 표현도 그냥 제가 설명하듯이 이렇게 맛 뵈기로 설명하듯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고사를 이끌어가면서 아주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을 노래했는데 잘못알고 바다로 이해했다. 그렇게 되면, 연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 기가 막힐 일 아니겠습니까? 또

又於經疏에 以僞濫眞하야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니

우어경소에 이위남진하야 유비성외자가 파다하니

또한 경소(經疏)[註解]에서 거짓이 참된 것에 흘러 들어서 우유가 성 밖의 우유[진짜]가 아닌 것[가짜]이 많도다.

또 경소(經疏)에 거짓 것으로 참[眞]에 섞어, 우유가 성 밖의 (것이) 아닌 것이 자못 많으니,

豈非以去聖愈遠하야 歷傳多手而致然歟아

개비이거성유원하야 역전다수이치연여아

성인(聖人)이 가신지 더욱 멀어져서 많은 손을 거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성인에서 멀어짐이 더욱 멀어(오래되어) 여러 손을 지낸(거친) 까닭이 아니겠는가? 【유비성외(乳非城外)는 타락(駝酪)이 성 밖에 것은 좋은 것이고, 성 안에 것은 물 탄 것이므로 거짓말로 이르기를 우유가 성 밖에 것 아닌 것이 많다고 한 것이다.】

(說誼 ; 眞僞相雜하야 水乳를 難判하니 所以舛訛는 蓋緣傳寫之誤耳니라)

(설의 ; 진위상잡하야 수유를 난판하니 소이천와는 개연전사지오이니라)

진(眞)[참됨]과 위(僞)[그릇됨]가 서로 섞여서 물과 우유를 가릴 수 없으니, 잘못된 까닭은 대개 전하여 쓰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뿐이니라.

참과 거짓이 서로 섞이며, 물과 우유가 가림이 어려우니, 이런 까닭으로 잘못 된 것이 전하여 (글) 쓴 이의 잘못에 말미암을 따름인 것이다.

又於經疏에 以僞濫眞하야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니

우어경소에 이위남진하야 유비성외자가 파다하니

又於經疏(우어경소)에. 經疏. 疏 말고, 抄(초)가 있습니다. 경이 나오고, 또 그 경을 해설한 것을 疏라고 그러고, 소를 다시 재해석한 것. 좀 더 자세하게 부연 설명한 것을 抄라고 그래요. 그 소초 안에 다 들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근거를 못 대면 “그 화엄경 소초 안에 가보면 다 있다.” 이런 식으로 강원에서는 우스개 비슷한 소리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경이 있고ㆍ경 밑에 소가 있고ㆍ소 밑에 초가 있고 하니까 얼마나 복잡하고 말이 많습니까? 말이 많은데, 그것의 근거가, 출처가 불분명하면 그만 “소초 안에 다 있다.” 이렇게 밀어버릴 정도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여기서는 經疏에 있어서 

以僞濫眞(이위남진)하야, 그랬습니다. 거짓으로써 진실에 넘쳐흘러간다 이 말이지요. 진실이 진실대로 전해지고, 거짓은 거짓대로 전해져야 되는데, 거짓이 그만 진실로 넘어가버린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乳非城外者(유비성외자)가. 우유가 성 밖의 것이 아닌 것. “가짜 우유가” 이런 말입니다. 가짜 우유를 이런 식으로 표현 했습니다. 왜냐? 성 밖에서 소를 키우고, 성 밖에서 우유를 짰으니까 그것이 성 안에 들어오면 물을 타가지고 량을 불려서 으레 진짜가 아니고, 가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성 안에 것은 무조건 가짜입니다. 성 밖에 것이 진짜 우유고요. 그런 속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우유가 성 밖의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성 밖의 것이라야 되는데, 진짜라야 되는데 가짜가 頗多(파다)하니

豈非以去聖愈遠하야 歷傳多手而致然歟아

개비이거성유원하야 역전다수이치연여아

豈非以去聖愈遠(기비이거성유원)하야 어찌 去聖愈遠. 이것이 초발심자경문에 去聖時遙(거성시요)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요. 정확하게 글자대로 새기면 “성인에 가기가 시간적으로 더욱 멀어서” 이런 뜻입니다. 거슬러 가야 돼요. 지금 예를 들어서 “2600 년” 하면, 지금부터 2600 년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잘 못 알고, “성인 가신 때가 멀다.” 이렇게 오역을 하는데, 말은 틀리지 않지만 이 글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적으로 거슬러서 계산해볼 때, “성인에 가기가” 이렇게 해석을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지요. 성인에 가기가 더욱 멀어서

歷傳多手而致然歟(역전다수이치연여)아. 歷傳. 자꾸자꾸, 옛날에는 출판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사람의 손으로 써서 전하거든요. 또 전문으로 써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지나면서 다수의 손으로 전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豈非하는 非자를 거기다 해석 합니다.

그렇지요. 여러 사람이 쓰다보면 한 페이지가 아니라, 한 권이라는 책이니까 그것을 쓰다보면 오자가 많이 나올 수가 있지요. 오자ㆍ탈자ㆍ불필요한 것. 然. 여기서도 그런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이 한 번 베껴 쓰는데 열 번 틀렸다 그러면 다음에는 또 열 번 틀리면 20자가 되는 겁니다. 또 한 번 옮겨 쓰면 30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틀려가고ㆍ틀려가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 것일 것이다. 옮겨 쓰다 보면 틀린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說誼 ; 眞僞相雜하야 水乳를 難判하니 所以舛訛는 蓋緣傳寫之誤耳니라)

(설의 ; 진위상잡하야 수유를 난판하니 소이천와는 개연전사지오이니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眞僞相雜(진위상잡)하야. 眞과 僞가 서로 섞여서

水乳(수유)를 難判(난판)하니. 물과 우유를, 우유에다 물을 타서 량을 불려서 속여서 파니까요. 판단하기가 어려우니

所以舛訛(소이천와)는. 이것은 어그러질 舛자ㆍ그릇 될 訛자. 잘못 된 것.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蓋緣傳寫之誤耳(개연전사지오이)니라. 다 인연했다. 대개 이 인연 때문이다. 뭔가 하면 傳寫. 전해서 베껴 쓰는데 착오가 있었을 따름이다. 귀 耳자가 끝에 붙으면 으레 “뿐이다ㆍ따름이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귀라는 뜻이 아니고요. 대개 傳寫하는 인연의 잘못일 따름이다.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가 唯文不能設이요 空義不獨傳이라

부성언지소이전지어후지세야가 유문불능설이요 공의부독전이라

대저 성인(聖人)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글만 능히 베풀 것이 아니요 공연히 뜻만 홀로 전함도 아니로다.

성인의 말씀이 후세에 전하는 까닭은 다만 글월이 능히 펴지 못하며 한갓 뜻은 혼자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文義相資하야사 方成妙唱하야 作天下古今之龜鑒하야 開世與出世之眼目이어니와

문의상자하야사 방성묘창하야 작천하고금지구감하야 개세여출세지안목이어니와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 바야흐로 묘(妙)한 노래를 이루어서, 천하고금(天下古今)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세간과 출세간의 안목을 열어주려니와

글과 뜻이 서로 도와야 비로소 미묘한 말씀이 되어 천하 고금에 귀감이 되어 세간과 출세간에(사는 사람들의) 눈을 여는 것이다. 【귀(龜)는 점복(占卜)하여 길흉의 아는 것이고, 감(鑑)은 착하며 (착한 사람과) 상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니, 성현이 이르신 말씀을 귀감이라 하는 것이다.】

若義有誵訛하고 文有錯誤하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약의유효와하고 문유착오하면 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만약 뜻이 잘못 되어있고, 글에 착오가 있으면, 능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뜻에 어긋나게 함이 있으며 글에 그른 곳이 있으면 곧 능히 사람의 눈을 열지 못할 따름이 아니라,

亦令誤解하야 礙正知見하리니

역령오해하야 애정지견하리니

또한 잘못 알게 해서 바른 지견[正知見]을 막게 하느니라.

또 그릇 알아서 바른 지견(知見)을 막게 할 것이다.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가 唯文不能設이요 空義不獨傳이라

부성언지소이전지어후지세야가 유문불능설이요 공의부독전이라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부성언지소이전지어후지세야)가. 이것 아주, 전번에 그런 말했지요? 虛辭(허사)ㆍ實辭(실사) ←[1강-2]

한문(漢文)에는 두 종류의 글이 있다. 두 종류의 글자가 있다. 虛辭와ㆍ實辭가 있다. 그랬습니다. 虛字(허자)ㆍ實字(실자)라고도 하고요. 왜 글자 字라고도 하고, 말씀 辭라고도 하느냐? 그것도 중요합니다. 한문은 글자 하나가 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字라고도 해도 되고, 辭라고도 해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虛辭가 이렇게 많이 있습니다.

제가 부르는 것에 동그라미를 치세요.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 빨간색 다섯 글자 외의 글자는 싹 털어버리세요. 저부터도 한문의 초보인데, 이런 것을 이렇게 아주 미사여구로, 아름답게 장식은 해놨는데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데는 아주 복잡한 겁니다. 그래 이것 싹 털어 내버려야 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虛辭입니다.

夫ㆍ之ㆍ所ㆍ以ㆍ之ㆍ於ㆍ之ㆍ也. ←전부 虛辭입니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이것은 없어도 되는 겁니다. 지난번에 그랬지요? 법당에 온갖 장엄을 다해서, 여기 1000불전인데, 1000불이 없어도 법당은 법당으로서 완전해요. 1000불을 모시고ㆍ신중단모시고ㆍ그 외에 잔뜩 등도 달고 이렇게 하면, 법당으로서 장엄스러워지고, 모양이 갖춰지잖아요. “그와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는데 虛辭ㆍ實辭를 잘 분별해서 그 용도를 잘 알면, 거의 한문을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보십시오. 빨간색 해놓은 것만 해석해 보겠습니다. “성인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그 말입니다. 그 외에 之자니 그런 것 아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그대로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 ←이렇게 해서 읽으면 한문으로서는 맛이 아주 그럴 듯합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결국은 알아야 할 일들입니다.

唯文不能設(유문불능설)이요. 글만으로는, 唯文 = 오직 글만으로는 능히 베풀지 못하고, 그것이 글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이지요. 또

空義를 不獨傳(공의부독전)이라. 또 글이 아니면 空의 도리ㆍ空의 의미를 홀로 전하지 못한다. = 不獨傳이라.

文義相資하야사 方成妙唱하야 作天下古今之龜鑒하야 開世與出世之眼目이어니와

문의상자하야사 방성묘창하야 작천하고금지구감하야 개세여출세지안목이어니와

文義相資(문의상자)하야사. 글과 뜻이 서로 도와야

方成妙唱(방성묘창)이라. 바야흐로 아름다운 노래가 이루어진다, 妙唱. 아름다운 노래가 이루어진다. 곡이 일단은 좋아야 되겠지요. 하지만 뜻도 좋아야 명곡이 되는 것이지요.

作天下古今之龜鑒(작천하고금지귀감)하야. 天下古今의 귀감을 지어서, 그러니까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이루어졌으니까 그것은 천하고금의 귀감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開世與出世之眼目(개세여출세지안목)이어니와. 世與出世之眼目, 세상과 출세간의 안목을 열어 주거니와

若義有誵訛하고 文有錯誤하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약의유효와하고 문유착오하면 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若義有誵訛(약의유효와)하고.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말이 삐뚜러 지거나 함부로 된 말. 그것이 효와(誵訛)입니다. 만약에 뜻에 誵訛가 있고, 잘못된 것이 있고,

文有錯誤(문유착오)하면. 글에 착오가 있을 것 같으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능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 非唯不. 能開人眼目. 능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亦令誤解하야 礙正知見하리니

역령오해하야 애정지견하리니

亦令誤解(역령오해)하야. 또한 하여금 오해케 해서, 잘못 알게 해서

礙正知見(애정지견)하리니. 正知見을 장애한다. 바른 지견을 장애하게 된다. 그러니까 <금강경> 원문도 사실은 아직도 정해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글자 몇 자의 문제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하물며 오가해의 내용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오해를 할 수가 있고, 그 오해는 正知見을 장애 하는데, 불교에 대한 知見을 장애 하는데 까지 미치게 된다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說誼 ; 文字는 現道之具也며 導人之方也니 須文義相資하야 而血脉(=脈)이 貫通하고

(설의 ; 문자는 현도지구야며 도인지방야니 수문의상자하야 이혈맥(=맥)이 관통하고

문자(文字)는 도(道)를 나타내는 도구이고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이라.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서 혈맥이 관통하고

글자는 도를 나타내는 그릇이며 사람을 인도하는 법이니,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도와 혈맥(血脈)이 사뭇 꿰뚫으며(관통하며)

精審詳密이 備焉하야 而脫衍倒誤가 未嘗雜於其間然後에 能使人開解하야

정심상밀이 비언하야 이탈연도오가 미상잡어기간연후에 능사인개해하야

정밀하고 자세하며 깊게 갖추어서, 빠지고 넘치고 잘못된 것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은 연후에 사람들에게 이해하게 하여

정심(精審)하며 상밀(詳密)함이 구비[備]되어 떨어지고(글자가 빠지고) (뜻이) 더 불리며 거꾸로 되며 잘못됨이 조금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아니한 연후에야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며

得爲萬世之龜鑒也니라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反爲惑人之具也니라)

득위만세지구감야니라 불이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반위혹인지구야니라)

만세(萬世)에 귀감(龜鑑)이 되게 함이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안목을 못 열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미혹(迷惑)케 하는 도구가 되느니라.

만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능히 사람의 눈을 열지 못할 따름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그릇이 될 것이다.

(說誼 ; 文字는 現道之具也며 導人之方也니

(설의 ; 문자는 현도지구야며 도인지방야니

설의(說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文字(문자)는 現道之具也(현도지구야)며. 문자라고 하는 것은 道를 나타내는 도구다. 그렇지요. 문자나 말을 통해서 도가 거기에 실려서 전달이 되지 않습니까? 대승찬 같은 禪詩(선시)에는 보면, 文字卽是道(문자즉시도)라. 이래버렸습니다. 不立文字(불립문자)라고 하는 그런 말 때문에 文字를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무시까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만 보더라도 現道之具라고 했잖아요. 道를 나타내는 도구다.

導人之方也(도인지방야)라, 그랬습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방편이다.

須文義相資하야 而血脉(=脈)이 貫通하고 精審詳密이 備焉하야

수문의상자하야 이혈맥(=맥)이 관통하고 정심상밀이 비언하야

須文義相資(수문의상자)하야. 글과 뜻이 서로 도와서

而血脉(=脈)(이혈맥)이 貫通(관통)하고. 혈맥이 관통하고

精ㆍ審ㆍ詳ㆍ密(정심상밀)이. 아주 정미롭게ㆍ아주 세밀하게 살펴서ㆍ아주 자세하고 밀밀하게ㆍ아주 세밀하게 하는 것이 備焉(비언)하야, 갖추어져서

而脫衍倒誤가 未嘗雜於其間然後에 能使人開解하야

이탈연도오가 미상잡어기간연후에 능사인개해하야

而脫ㆍ衍ㆍ倒ㆍ誤(이탈연도오)가. 脫 = 脫字(탈자). 衍 = 衍文(연문)이라고 해서, 불필요한 것이 들어있는 글자를 衍이라고 그래요. 衍文. 넘칠 衍자지요. 倒 = 뒤바뀐 것. 글자가 앞뒤로 잘못 놓여진 것. 誤 = 오자. 이러한 것들이

未嘗雜於其間然後(미상잡어기간연후)에. 그 사이에 일찍이 섞이지 아니한 연후에, 그런 것이 없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일단 글이 정확해야, 글이 오자가 없고 정확해야 그 다음에 우리가 뜻을 이해를 하려고 하든지 하지요. 그래서 일찍이 그 사이에 그런 것이 섞이지 않게한 연후에,

能使人開解(능사인개해)하야.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열어서 이해하게 해서

得爲萬世之龜鑒也니라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反爲惑人之具也니라)

득위만세지구감야니라 불이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반위혹인지구야니라)

得爲萬世之龜鑒也(득위만세지귀감야)니라. 萬世에 龜鑒 삼음을 얻을 수 있다. 龜鑒 삼을 수 있다. 得爲 = 삼을 수 있다ㆍ할 수 있다. ←이 뜻입니다. 무엇을요? 萬世에 龜鑒. 만세에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렇지요. 만세에 귀감이 되려면 첫째 글이 오자가 없어야 된다. 우리가 소설을 한 권 읽든지, 아니면 누구 수필집을 읽더라도 오자가 막 나오면요? 내용이 좋다가도 그만 신임이 안 갑니다. 그 아주 사람들 감정이 묘해서, 뜻은 통하니까 그것 감안하고 읽어도 되겠는데 사람들 마음이 그렇게 안 된다는 겁니다. 글 읽다가 오자가 많으면 ‘에이 이것 제대로 안 만들어진 책이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不爾則(불이즉). 그렇지 아니한 즉은

非唯不能開人眼目(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여기도 금방 있었던 非唯不. 또 나왔네요. 아닐 뿐만 아니라. 能開人眼目. 능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反爲惑人之具也(반위혹인지구야)라. 반대로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ㆍ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잘못 오도하는 것이 되지요.

蓋不爲文字의 所惑하고 能體聖人之意者를 誠難得也로다

개불위문자의 소혹하고 능체성인지의자를 성난득야로다

대개 문자(文字)에 미혹(迷惑)하지 않고 능히 성인(聖人)의 뜻을 체득하는 이는 진실로 얻기 어렵도다.

(대개) 글자에 미혹함이 되지 아니하고 능히 성인의 뜻을 체득하는 이가 진실로 얻기가 어렵구나.

(說誼 ; 若非哲眼이면 不能不爲誵訛의 所惑也니라)

(설의 ; 야비철안이면 불능불위효와의 소혹야니라)

만일 철안(哲眼)[밝은 눈]이 아니면 잘못 어그러진 것에 미혹(迷惑)되도다.

만약 밝은 눈[哲眼]이 아니면 능히 효와(誵訛)에 미혹함이 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蓋不爲文字의 所惑하고 能體聖人之意者를 誠難得也로다

개불위문자의 소혹하고 능체성인지의자를 성난득야로다

蓋不爲文字(개불위문자)의 所惑(소혹)하고. 교재에 토를 ‘하야’라고 됐는데 ‘하고’ 입니다. 토 잘못 달아놓으면 글자가 엉뚱한 데로 갑니다. 토를 무시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율곡이나 퇴계 시절부터 서당에서도 토는 철저히 달아버릇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을 이해하는데 토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여기는 하고 라고 해야 됩니다. 대개 文字의 미혹하는 바가 되지 아니하고,

能體聖人之意者(능체성인지의자)를, 능히 체달한다. 성인의 뜻을 체달하는 자를

誠難得也(성난득야)로다. 그렇지요. 진실로 얻기 어렵다. 문자가 바로 돼야 성인의 뜻을 얻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說誼 ; 若非哲眼이면 不能不爲誵訛의 所惑也니라)

(설의 ; 야비철안이면 불능불위효와의 소혹야니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若非哲眼(약비철안)이면. 만약에 哲眼이 아니라면

不能不爲誵訛(불능불위효와)의 所惑也(소혹야)니라. 능히 효와(誵訛) = 잘못 된 것. 잘못 된 것에 미혹하는 바가 되지 않지 못할 것이다. 哲眼은 다 알아서 하지만, 哲眼이 아닌 사람은 전부 잘못 된다ㆍ미혹 한다 이것이지요. 글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요ㆍ말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보통 우리 일반 신도들도 절에 가서 스님들이 뭐라고 바로 말했든 틀리게 말했든 간에 말하면, 스님 말이니까 그냥 듣고 믿는다고요.

경전에 뭐라고 써져 있으면 그것 아주 함부로... 우리가 무슨 소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글의 물리가 툭 터진 것도 아니고, 그래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파리똥 학인” 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파리똥 학인. 여기 이런 강원 경험 있는 분도 계시지만, 전혀 없는 분도 계시니까 다 초보자라고 생각하고... 옛날 한문 토를 한토라고도 하고ㆍ구결(口訣)이라고도 하고ㆍ이두라고도 하고, 별별 이야기를 하는데요. 토를 이렇게 한글로 달지 않고, 토는 다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문 글자에서 따와서 사이사이에 ‘..하고ㆍ..하야’ 하는 이것을 “토” 라고 하는데, 이것을 이렇게 한글로 표시 안 합니다. 하는 방법이, 한문 글자에서 따가지고 와서 하는데, 그 “파리똥” 이라고 하는 말이 어디서 생겼는가 하면 羅(라)자를 온자를 쓰지 않고, 한 번 줄이고ㆍ두 번 줄이고ㆍ세 번 줄이고ㆍ네 번 줄여서 간단하게 점 하나 딱 찍으면 “라” 라고 하는 한토입니다. 한자에서 왔다 해서 흔히 한토라고 합니다.

어떤 학인들이 보니까 까만 점이 하나있었어요. 그래 그걸 가지고 ‘羅’자 토라고 한참 “아니다 기다” 하고 책을 잡고 다투고 시비를 하다보니까 파리똥이 똑 떨어져버렸어요. 파리가 똥을 싸가지고 “羅” 자 토처럼 된 것을 모르고는 그것이 羅 토라고 했다고 해서 아주 안목이 없는 학인을 파리똥 학인이라고 할 정도로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도, 전번에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가 있었지요? 경전 이외에, 문자 밖에 불교가 또 있는 것. 그것이 口傳佛敎(구전불교).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口傳佛敎도 사실은 많아요. 이런 것들도 일종의 口傳佛敎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와 같이 토가 아주 중요하고, 옛날 서당에서 퇴계나 율곡이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금강경 사가해 제3강 2부(則文義之舛錯者~)|(2011. 04. 20)

釋대원성 | 조회 183 |추천 1 |2011.08.2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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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이나 若心淸慮靜하야 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하면 則文義之舛錯者가

연이나 야심청려정하야 연문구의하며 의의심문하면 즉문의지천착자가

그러나 만약 마음을 맑히고 생각을 고요히 해서 글을 만나 뜻을 연구하며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으면 즉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이

그러나 만약 마음을 맑게 하며 사려를 고요히 하여 글로부터 뜻을 궁구하며 뜻으로부터 글을 찾으면 곧 글과 뜻의 그른 것이

不隱微毫하야 了然昭著호미 如世病脉이 不能逃於善醫之手하리니

불은미호하야 요연소저호미 여세병맥이 불능도어선의지수하리니

털끝만큼도 숨지 못하여서 확연히 밝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세상의 질병이 훌륭한 의사의 손에서 도망치지 못함과 같으니라.

적은 터럭만큼도 숨지 아니하여 환하게 밝아서 나타남이 (마치) 세상의 병맥(病脈)이 어진 의사의 손에서 도망하지 못하듯이 될 것이다.

(說誼 ; 雖非哲眼이나 若靜心慮하야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를 可得而詳也니라)

(설의 ; 수비철안이나 야정심려하야 이연지즉문의지천착자를 가득이상야니라)

비록 밝은 눈을 갖지 못하였으나 마음과 생각을 고요히 하여 연구하면 글과 뜻에 어긋나고 그릇된 곳을 자세히 밝힐 수 있으리라.

비록 밝은 눈[哲眼]은 아니나 만약 심려(心慮)를 고요히 하여 그것으로써 깊이 연구[窮究]하면 곧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을 가히 얻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然이나 若心淸慮靜하야 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하면

연이나 야심청려정하야 연문구의하며 의의심문하면

然(연)이나 若心淸慮靜(야심청여정)하야. 심청여정(心淸慮靜). 이렇게 하면 그냥 들어와야 되겠지요? 마음은 맑고 생각은 고요해져서

緣文究義(연문구의)하며, 글을 인연을 뜻을 연구하며, 연문구의(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의의심문)하면,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아, 이것 중요한 방법입니다.

글을 인연을 해서 그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글은 맞는데 이치가 아니라면, 그럼 뭔가 잘못 됐다고 의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의의심문(依義尋文)이라고 되어있지요.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아,

그러니까 옛날 선사 스님들의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글을 모르니까, 공부한 학인에게 글을 해석해보라고 하니까 해석을 쭉~~ 해나가니까 “너 해석 잘못한 것 같다.” 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해석 잘못한 것 같다.” 왜 그렇게 지적 할 수 있느냐? 당신은 소견에 의해서 뜻이 딱 서 있어요. 그 뜻에 기준해서 보니까 글을 잘못 해석한 것이지요. 다시 해석해보라고 하니까 그래 가만히 다시 해석해보니까 아.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사 스님이 “아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해석이 될 수가 없다.” 이런 말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의의심문(依義尋文)입니다.

우리가 소견이 딱 나가지고, 불교적인 소견이 나가지고 안목이 딱~ 서져 있으면요? 글도 그 안목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는 것이 의의심문(依義尋文)이지요.

則文義之舛錯者가 不隱微毫하야 了然昭著호미

즉문의지천착자가 불은미호하야 요연소저호미

則文義之舛錯者(즉문의지천착자)가.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이

不隱微毫(불은미호)하야. 작은 터럭 끝만치도 숨을 수가 없어요. 숨지를 못해요. 어디 도망가지 못한다 이 말이지요. 不隱微毫입니다. 해서

了然昭著(요연소저)호미, 了然하게, 환하게 밝게 드러난 것이

如世病脉이 不能逃於善醫之手하리니

여세병맥이 불능도어선의지수하리니

如世病脉(여세병맥)이, 세상의 病脉. 病脉이

不能逃於善醫之手(불능도어선의지수)하리라. 훌륭한 의사. 양의 라고하지요? 능히 훌륭한 의사의 손을 도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세상의 병의 문제. 세속적으로 병이 있다ㆍ병이 들었다. 병이 있다, 그러면 아주 뛰어난 양의가 있으면, 양의가 딱 진찰해보면 그냥 안다 이 것이지요. 그와 같이 경을 읽고, 조사 스님의 어록을 읽는 방법도 그렇게 해서 이해되는 길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說誼 ; 雖非哲眼이나 若靜心慮하야

(설의 ; 수비철안이나 야정심려하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雖非哲眼(수비철안)이나. 비록 哲眼은 아니라 하더라도

若靜心慮(약정심려)하야, 만약에 心慮 = 마음과 생각을 고요히 해서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를 可得而詳也니라)

이연지즉문의지천착자를 가득이상야니라)

以硏之則(이연지즉), 그것을 연구한 즉은

文義之舛錯者(문의지천착자)를. 글과 뜻의 잘못된 곳, 천착(舛錯)한 것을

可得而詳也(가득이상야)니라. 가이 얻어서 자세하게 할 수 있다. 可得. 可자도 가능성을 뜻하는 글자이고, 得자도 가능성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자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 버리면 간단합니다. 자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여기서 實字는 자세 詳자 하나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虛辭입니다. 자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予雖非善醫之儔나 幸粗識文義하야 略辨眞僞故로

여수비선의지주나 행조식문의하야 약변진위고로

내가 비록 좋은 의사의 짝은 못되나 다행히 글과 뜻을 대강 알아서 진(眞)과 위(僞)를 조금 분별하는 고(故)로

내가 비록 어진(좋은) 의사의 짝은 아니나, 다행히 글과 뜻을 조금 알아서 참과 거짓을 대략 분별하는 까닭으로

分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를 簡而出之하야 參之諸本하며

분지경지소지중지혹탈혹연혹도혹오자를 간이출지하야 참지제본하며

지금 이 경(經)의 소(疏) 안에 혹 빠졌거나 혹 넘치거나 혹 잘못되거나 혹 그르친 것들을 가려내고 다른 책들을 참고하며

지금의 경(經)의 소(疏) 가운데 혹 떨어지며(뜻에서 벗어나며) 혹 (뜻을) 더 불리며 혹 거꾸로 되며 혹 잘못됨을 분별해 내어 여러 책에 맞추며(참고하며)

質之諸師하야 以正之하노라

질지제사하야 이정지하노라

다른 스님들께 질문해서 그것을 바르게 하노라.

여러 스승께 질문하여 써 바르게 한 것이다.

然이나 他本所據外엔 未嘗一字一句도 妄自加損於其間이요

연이나 타본소거외엔 미상일자일구도 망자가손어기간이요

그러나 다른 책에 의거한 외엔 일찍이 한 자 한 구도 망령되이 스스로 그 사이에 더하거나 빼지 않았도다.

그러나 다른 책에 의지한 외에 조금도 한 자, 한 구절도 함부로 내가 그 사이에 더하거나 덜어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予雖非善醫之儔나 幸粗識文義하야 略辨眞僞故로

여수비선의지주나 행조식문의하야 약변진위고로

予雖非善醫之儔(여수비선의지주)나. 내가 비록, 나 ‘여(予)’자입니다. 내가 비록 善醫의 짝은 못되지만, 훌륭한 의사의 짝은 못되지만

幸粗識文義(행조식문의)하야. 다행히 文義를 거칠게 알아서. 대강 알아서 = 粗識. 아주 겸손한 말씀이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함허스님을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글과 그 소견이 원효스님보다 윗자리에 두고 싶을 정도입니다. 원효스님은 우리가 소설에서 아주 뛰어나고ㆍ아주 훤칠하고ㆍ탕탕 무애하고 그런 분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원효스님의 글을 읽어보면요? 얼마나 세밀하고ㆍ얼마나 아주 미세하고 그래서 아주 복잡합니다. 또 지식이 많아서 인용문이 많고요.

그런데 함허스님은 소견을 아주 시원시원하게 정말 선사다웁게 그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文과 뜻을 대충 = 粗識.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거칠게 알았다. 참 저야말로 거칠게 안 사람입니다. 거칠게 알아서

略辨眞僞故(약변진위고)로. 간략하게 眞과 僞를 가려낸 까닭으로 (빨간 글자는 허자) 여기도 추려 버려야할 허자가 너무 많습니다.

分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를 簡而出之하야 參之諸本하며

분지경지소지중지혹탈혹연혹도혹오자를 간이출지하야 참지제본하며

今之經之疏之中之(금지경지소지중지)에 或脫或衍或倒或誤者(혹탈혹연혹도혹오자)를. 지금 經의 疏中에 혹은 떨어져 나간 脫자. 衍 = 부연하는, 필요 없는 것, 달아놓는 연민. 혹 뒤바뀐 것. 혹은 誤자. 이런 것들을 

簡而出之(간이출지)하야. 가려내서

參之諸本(참지제본)하며 여러 본들을 참고를 했으며

質之諸師하야 以正之하노라

질지제사하야 이정지하노라

質之諸師(질지제사)하야 여러 스님들에게 질문을 해서

以正之(이정지)하노라. 바로 잡노라.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목각에 새겨서 세상에 출판하려고 하는데, 옛날 스님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ㆍ치밀하게, 다 교정하고ㆍ교정하고ㆍ또 했겠습니까? 성경 같은 것은 새롭게 한번 번역해서 출판하는데, 그 전에 신문에서 그러는데, 120번을 교정을 했대요. 120번.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경전은 스무 번 교정한 경전도 없어요. 한 너 댓 번 하면 그냥 다 해요. 제가 그 전에 탄허스님 모시고 책을 많이 출판 했는데, 탄허스님은 한 열두 번 정도 교정을 해요. 서로 바꾸어 가면서 읽습니다. 몇 번을 바꾸어 가면서 읽어요. 책에서 오자가 나오는 건, 이것은 정말 못 말릴 정도로 아무리 봐도 또 나오고ㆍ나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 이 스님도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서 바로 잡았다.

然이나 他本所據外엔 未嘗一字一句도 妄自加損於其間이요

연이나 타본소거외엔 미상일자일구도 망자가손어기간이요

然(연)이나. 그러나

他本所據外(타본소거외)엔. 다른 본에 의거한 바 밖에는

未嘗一字一句(미상일자일구)도. 일찍이 한 글자 한 구절도

妄自加損於其間(망자가손어기간)이라. 망령되게 그 사이에 加하거나 損하지 아니 했다. 내가 절대 한 글자도 내 마음대로 ‘아 뜻이 이러니까 여기에 글자가 하나 들어가야 되겠다. 이것은 빼야 되겠다.’ 이렇게 하지 아니 했다 하는 말입니다. 경을 대하는 고인들의 마음 자세지요.  

(說誼 ; 予以不敏으로 辨眞僞定誵訛也라 然이나 此는 以有據依而然이요

(설의 ; 여이불민으로 변진위정誵와야라 연이나 차는 이유거의이연이요

내가 불민(不敏)함으로 진(眞)[참]과 위(僞)[거짓]를 가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하긴 했으나 이는 증거가 있음으로써 그런 것이요,

내가 불민(不敏)함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며 제멋대로 잘못됨[誵訛]을 바로 고쳤으나, 그러나 이는 근거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

非爲臆斷이니라)

비위억단이니라)

내 소견으로 우김이 아니로다.

마음대로 결단한 것이 아닌 것이다.

(說誼 ; 予以不敏으로 辨眞僞定誵訛也라

(설의 ; 여이불민으로 변진위정誵와야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予以不敏(여이불민)으로. 내가 不敏함으로써

辨眞僞定誵訛也(변진위정효와야)라. 眞과 僞를 가리고 효와(誵訛)를 定함이라.

然이나 此는 以有據依而然이요 非爲臆斷이니라)

연이나 차는 이유거의이연이요 비위억단이니라)

然(연)이나 此(차)는. 그러나 이것은

以有據依而然(이유거의이연)이요. 의거 할 것이 있을 때 그렇게 했고,

非爲臆斷(비위억단)이니라. 臆斷으로 한 것은 아니다. 억단(臆斷) = 가슴으로 판단한 것. 그것을 우리가 臆斷이라고 표현하지요. 臆斷. 옛 사람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臆斷. “억단하지 말라.” 고, 이치에 맞지도 않게 지고집대로 그냥 밀어 붙이는 것을 “臆斷한다ㆍ臆斷부린다.” 이래요.

이런 것들도 책 출판하면서 거기에, 당신이 애썼던 내용들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도 하나의 경을 대하는, 또 조사 스님들의 한 말씀ㆍ한 말씀이 우리가 경을 대하는 자세를 이런 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凡有所疑를 他本無所據處란 據義以決하야 附之卷尾而已로라

범유소의를 타본무소거처란 거의이결하야 부지권미이이로라

무릇 의심이 있는 곳을 다른 책에서 의거하지 못한 곳은 뜻에 의거함으로써 결정(決定)해서 책 뒤에 붙일 따름이로다.

무릇 의심하는 바가 있고 다른 책에 근거할 곳이 없는 것일랑 의리(義理)를 의지해서 정해서 책의 끝에 붙일 따름인 것이다.

(說誼 ; 若以已意로 濫之於部內則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요

(설의 ; 야이이의로 남지어부내즉혹자가 위달자지소비의요

만약 자기의 뜻으로써 책 안에 붙여두면 혹 안목 있는 자[達者]가 할 바가 아니요,

만약 내 뜻으로 책 안에 멋대로 고쳤다면 곧, 혹 달인이 잘못 여길 바가 되고,

凡有所疑를 他本無所據處란 據義以決하야 附之卷尾而已로라

범유소의를 타본무소거처란 거의이결하야 부지권미이이로라

凡有所疑(범유소의)를. 무릇 의심한 바가 있는 것은.

他本에 無所據處(타본무소거처)라. 의거 할 바가 없는 것은, 이것은 틀림없이 잘못 됐는데, 이것은 어디에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이런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據義以決(거의이결)하야. 뜻에 의거해서, 뜻에 따라서 그것을 해결을 해가지고서

附之卷尾而已(부지권미이이)로라. 卷끝에다가ㆍ권말에다가ㆍ卷꼬리에다가 달아줬을 뿐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 자세도 좋지요? 함부로 경안에서 쓰지를 않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주해를 달아가면서 밑에다가 표시를 잘 하지요.

(說誼 ; 若以已意로 濫之於部內則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요

(설의 ; 야이이의로 남지어부내즉혹자가 위달자지소비의요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若以已意(약이기의)로. 만약 자기의 뜻으로써

濫之於部內則(남지어부내즉). 部. 책 안에다가 외람되게 거기다가. “써 놓은 즉은” 그런 말입니다.

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혹자위달자지소비의)라. 통달한 사람의 잘못된 바 = 所非. 그런 바라고 여긴다. “여기며,” 이 말입니다.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니 後世에 或聞較正之說하고

지유궐오이불사이전지즉미유금일교정지공야니 후세에 혹문교정지설하고

빠졌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써서 전하지 아니하면 오늘[今日] 바로 잡는[較正] 공(功)이 없음이니, 후세에 혹 바로 잡았다는 말을 듣고도

빠지고 그른 데가 있는 줄을 알고서 전하지 아니하면 곧 오늘날의 교정하는 공이 있지 않을 것이니, 후세에 혹 교정(較正)의 설(說)을 듣고

槩以爲全하야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가 幾乎墜地矣리라

개이위전하야 이불가찰언즉불조지정의가 기호추지의리라

대개 온전함을 삼아서 살피지 아니하면 부처님과 조사[佛祖]의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다.

한가지로 온전하다 하여 자세히 살핌을 더하지 아니하면 곧 불조(佛祖)의 바른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故로 不獲已書之於卷尾하야 而傳之也로라)

고로 불획이서지어권미하야 이전지야로라)

그러므로 부득이해서 책 뒤에 써서 그것을 전하노라.

이러므로 마지못하여 책의 끝에 써서(써 붙여) 전하게 한다.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니

지유궐오이불사이전지즉미유금일교정지공야니

知有闕誤而(지유궐오이). 빠지거나 잘못 된 것이 있음을 알고

不寫以傳之則(불사이전지즉). 쓰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면, 틀림없이 잘못 됐는데 그것을 쓰지 않고 그대로 전한즉,

未有今日較正之功也(미유금일교정지공야)니. 금일 교정한 그 공이 있지 못하다. 그렇지요. 실컷 교정해놓고, 이것은 어디다가 근거를 못 찾는다고 해서 기록을 해놓지 아니하면, 실컷 교정한 보람이 없지 않느냐? 이런 뜻입니다.

後世에 或聞較正之說하고 槩以爲全하야

후세에 혹문교정지설하고 개이위전하야

後世(후세)에 或聞較正之說(혹문교정지설)하고. 뒷세상에 혹 교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槩以爲全(개이위전)하야. 대개[槪] 온전한 것으로 여겨서, 以爲 = 여기다. 이런 뜻입니다. 온전한 것으로 여겨서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가 幾乎墜地矣리라

이불가찰언즉불조지정의가 기호추지의리라

而不加察焉則(이불가찰언즉). 가이 살피지 아니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佛祖之正意(불조지정의)가. 불조의 바른 뜻이

幾乎墜地矣(기호추지의)니라.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다.

故로 不獲已書之於卷尾하야 而傳之也로라)

고로 불획이서지어권미하야 이전지야로라)

故(고)로 不獲已(불획이)하야. 고로 부득이하야ㆍ不獲已해서, 같은 뜻입니다. 不獲已해서,

書之於卷尾(서지어권미)하야. 卷尾. 끝에다가ㆍ卷꼬리에다가 써두어서

而傳之也(이전지야)니라. 전하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아마 그 당시 轉寫(전사)해온 본들을 여러 가지를 봤는데, 그것이 엉망이었나 봐요. 전해오면서 오자ㆍ탈자ㆍ연자 너무 많아가지고, 그래서 이런 말씀을 여기다가 좀 장황하게 쓰고 있습니다.

若見盤根錯節之處하고 而抱拙拱手하야 不游刃於其間이면

야견반근착절지처하고 이포졸공수하야 불유인어기간이면

만일 뿌리가 얼키고 설키며 마디가 뒤섞인 것을 보고도 팔짱만 끼고 그 사이에 칼날을 놀리지 못하면

만약 (얽히고)서린 뿌리와 섞인 마디의 것을(글을) 보고 못난 생각을 가지고 손 꽂고(팔장 끼고) 그 사이에 칼을 가게 하지(대지) 아니하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리오 是以로 不揆不才하고 解其結通其碍하며

즉개위통인달사지소가호리오 시이로 불규부재하고 해기결통기애하며

어찌 통인(通人)과 달사(達士)의 할 바가 되리요. 이로써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맺힌 데를 풀고 막힌 것을 통하게 하며

어찌 통인(通人) 달사의 옳다 함이 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못났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맺힌 곳을 글르며 막힌 데를 통하게 하며

正未正齊未齊하야 永貽來學하노니

정미정제미제하야 영이내학하노니

바르지 못함을 바르게 하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히 해서 길이 미래의 학인(學人)에게 전하나니,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며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하게 하여 길이 뒤에 오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주니,

誰知王舍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가

수지왕사일륜월이 만고광명장불멸가

누가 왕사성(王舍城)의 둥근 달이 만고의 광명이 되어

길이 스러지지 않음을 아는가.

누가 왕사성의 한 둥근 달이 만고 광명이

길이 멸하지 아니함을 알 것인가?

呵呵他日에 具眼者가 見之면 當發大咲矣리라

가가타일에 구안자가 견지면 당발대소의리라

하하. 다른 날에 안목을 갖춘 자가

이것을 보면 마땅히 크게 웃으리라.

하하, 다른 날에 눈(안목)을 갖춘 이가 보면

마땅히 큰 웃음을 웃으리라.

若見盤根錯節之處하고 而抱拙拱手하야

야견반근착절지처하고 이포졸공수하야

若見盤根錯節之處(약견반근착절지처)하고. 만약에 盤根錯節. 뿌리가 막 뒤엉키고 마디가 착오가 난 그런 곳, 예를 들어서 문장에 따라서, 말하자면 나무뿌리가 막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그런 나무뿌리를 볼 수 있지요? 그와 같이 된 것을 보고,

而抱拙拱手(이포졸공수)하야, 자기 옹졸함을 안고 ‘아이고 이거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이렇게만 하고 팔짱을 끼고 있어서

不游刃於其間이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리오

불유인어기간이면 즉개위통인달사지소가호리오

不游刃於其間(불유인어기간)이면, 그 사이에 칼날을 놀리지 아니한다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즉기위통인달사지소가호)리오. 어찌 通人達士. 통달한 선비의 옳은 바겠는가? 통달한 사람이 할 바겠는가?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이 말입니다.

‘유인(游刃)’이라는 말 아시지요?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말인데요. 옛날에 포정이라는 백정이 칼을 한 번 갈아서 19년을,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19년을 소를 잡았는데 하루에 몇 마리씩 잡아요. 그런데 19년을 잡아요. 그래도 더 이상 숫돌에 갈지 않아도 금방 숫돌에 간 것과 같이 됐어요.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잡는데, 요즘 음악에 맞게, 동작도 무슨 춤에 맞게 동작 하고, 두드리는 소리도 요즘 난타도 있습니다만, 하여튼 음악에 맞게 그렇게 했어요. 왕이 그것을 보고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이 사람이 뒤에 칼을 딱~ 꼽고는 하는 말이 “나는, 물론 나도 처음에 소가 온 마리 다 보였다.” 이것은 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처하는 자세를 뜻하는 것인데요. “온통 소 한 마리 다 보였다. 그래서 소 한 마리를 잡는데, 사실은 칼을 몇 개를 버렸는지 모른다.” 이것 잘 들어야 됩니다.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처하면서 그 처하는 자세가, 세상에 모두 살잖아요. 그 처하는 자세가 그런 것이지요. “칼을 몇 개를 버렸는지 모른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자꾸 소를 잡으면서 소를 관찰해보니까," 소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세상이 소입니다. 보니까 전부 분해 돼있는 것처럼 보여요.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살도 이런 살 저런 살, 전부 낱낱이 분해가 돼있어요. 그것이 한 눈에 싹~ 들어와요. 그래서 “나는 그 분해 되어있는 그 공간으로 칼을 지나다녔지 한 번도 뼈를 자르거나, 뼈를 잘라도 그 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지나갔다. 이미 나눠져 있더라. 이미 텅 비어있더라. 그래서 텅 비어있는 그 공간으로 지나갔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다 정리가 딱 됐는데 칼날을 한 번도 살에 닿지도 않았고, 뼈에 닿지도 않았으니까 늘 숫돌에 새로 간 것처럼 됩디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참, 장자도 도가 있는 글입니다. 노자ㆍ장자는 정말 도가 있는 글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뜻만 알면... 이것 참 근사하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뭣도 모르고 살 때는 여기 부딪치고ㆍ저기 부딪치고 전부가 그냥 나한테 부딪치는 것뿐이지요. 그럼 칼날 다 상하잖아요. 하루에 칼이 몇 개라도 모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지간히 초연해가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세상사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거기에 문제 삼고, 나한테 틀리느니 맞느니 그래가지고는 칼날 상하듯이 내 마음이 다 상하잖아요. 내 마음이 다 상해가지고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는 그런 상황이 된 그런 것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 장자 근사하지요? 참~ 장자 글 좋고, 뜻이 좋습니다.

游刃이라고 하는 것이 “칼을 놀린다.” 이 뜻입니다. 칼이 그 사이로 쉭쉭 지나가는 겁니다. 모든 고깃점이 전부 분해가 돼 있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經과 疏를, 금강경과 疏를 보는데 그렇게 游刃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칼을 놀려서 말하자면 유영 하듯이ㆍ관광하듯이ㆍ감상하듯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어찌 通人達士의 옳은 바가 되겠는가? 通人達士라면 그렇게 해야지... 상당히 겸손하면서도 여기서는 아주 자신의 뛰어난 안목과 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是以로 不揆不才하고 解其結通其碍하며

시이로 불규부재하고 해기결통기애하며

是以(시이)로.

不揆不才(불규부재)하고. 내가 재주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解其結 通其碍(해기결통기애)하며. 뛰어서 제대로만 읽어도 글이 어지간히 글이 통하지요. 解其結. 그 맺힌 바를 풀고. 通其碍. 그 장애된 바를 통하게 하며 = 소통하게 하며

正未正齊未齊하야 永貽來學하노니

정미정제미제하야 영이내학하노니

正未正齊未齊(정미정제미제)하야. 未正한 것을 正하게 하고 =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하게 해서

永貽來學(영이래학)하노니. 내학(來學), 미래의 학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노니

誰知王舍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가

수지왕사일륜월이 만고광명장불멸가

誰知王舍一輪月(수지왕사일륜월)이 萬古光明長不滅(만고광명장불멸)가. 누가 왕사성의 밝은 달이 萬古에 광명을 비춰서 길이 멸하지 않는 것을 알겠는가? = 誰知. 이것은 말하자면 부처님의 뜻이란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의 가르침인데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말입니다. 당신은 안다는 뜻이지요.

수지왕사일륜월(誰知王舍一輪月)이. 왕사성. 부처님이 성도한 곳이지요. 성도함으로 해서, 말하자면 마갈타국 수도가 왕사성인데, 부처님 성도한 곳을 그냥 “왕사성” ←이렇게 말합니다. 誰知王舍一輪月이, 부처님이 성도함으로부터 불교가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萬古에 光明 비춰서 길이 소멸하지 않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요. 글자 좀 잘못되고,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글을 제대로 해석하든 못하든 부처님의 뜻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지요.

呵呵他日에 具眼者가 見之면 當發大咲矣리라

가가타일에 구안자가 견지면 당발대소의리라

呵呵他日(가가타일)에. 우습다. 呵呵라는 말은 허허하고 웃는 모습입니다. 허허~

他日에 具眼者(구안자) 見之(견지)면. 안목을 갖춘 사람이 본다면,

當發大咲(당발대소) 矣(의)리라. 마땅히 큰 웃음 꺼리가 될 것이다. 큰 웃음[笑]을 發할 것이다. 제대로 안목 갖춘 사람이 보면 한 바탕 웃을 것이다.

(說誼 ; 解之舛訛가 如盤根錯節하야 結礙不通하니 若一向畏人非之하야

(설의 ; 해지천와가 여반근착절하야 결애불통하니 야일향외인비지하야

이 해석의 잘못된 것이 마치 뿌리가 얼킨 것 같아서 맺히고 막혀 불통(不通)하니 만약 한결같이 남들이 그르다 할까 두려워해서

이 풀이의 잘못된 것이 서린 뿌리와 섞인(얽힌) 매듭과 같아서 얽히고 막히어 통하지 아니하니, 만약 한갓 사람이 그릇 여김을 저어하여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에 爲如何哉아

지오이불결언즉기어보불은지의에 위여하재아

잘못됨을 알고도 해결치 않으면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함이 되겠는가.

그른 줄을 알고 해결하지 아니하면 곧 그 불은(佛恩)을 갚는 뜻에는 어떠하겠는가?

後世에 必有承訛踵誤하야 妄生穿鑿하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라

후세에 필유승와종오하야 망생천착하야 이구기설지필통자의리라

후세에 반드시 잘못된 것을 이어 받고 그르친 것을 밟아서 망령되이 천착(穿鑿 : 思量)을 내어 그 설(說)로써 통(通)하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후세에 반드시 거짓 일을 이으며 그른 곳을 밟아(이어 받아) 천착함을 허망하게(망녕되게) 내어 그 말이 모름지기 통함을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夫如是則其不決之蔽가 至於使佛祖之言으로 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부여시즉기불결지폐가 지어사불조지언으로 종미면어박잡지건야리니

대저 이 같은 즉, 해결하지 못한 폐단이 부처님과 조사[佛祖]의 말씀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뒤섞인 허물을 면치 못하리니

이와 같으면 그 결정하지 아니한 폐단이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으로 마침내 박잡(駁雜)한 허물을 면치 못함에 이를 것이니,

此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니라 由是로 終不固讓於決焉하야 寫以傳之也로라

차는 통인달사지소불가야니라 유시로 종불고양어결언하야 사이전지야로라

이는 通人達士의 할 바가 아니로다. 이로 말미암아서 해결하는 데 굳이 사양하지 않고 써서 전(傳)하노라.

이것이 통인 달사가 잘못 여기는 바이다. 이로부터(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결정함에 구태여 사양치 아니하고 써서 전하니,

(說誼 ; 解之舛訛가 如盤根錯節하야 結礙不通하니 若一向畏人非之하야

(설의 ; 해지천와가 여반근착절하야 결애불통하니 야일향외인비지하야

설의(說誼) :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데,

解之舛訛(해지천와)가. 해석의 천와(舛訛)가, 잘못된 것이

如盤根錯節(여반근착절)하야. 마치 盤根錯節. 뿌리가 막 뒤엉킨 것과 같아서

結礙不通(결애불통)하니. 맺히고 장애되는 것이 통하지 아니하니, 結礙하야, 통하지 아니하니

若一向에 畏人非之(약일향외인비지)하야. 한결같이 = 一向에, 만약에 한결같이 사람들이 “잘못 됐다.” 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에 爲如何哉아

지오이불결언즉기어보불은지의에 위여하재아

知誤而不決焉則(지오이불결언즉), 知誤. 그릇 됨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지 아니한 즉은,

其於報佛恩之義(기어보불은지의)에. 그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뜻에

爲如何哉(위여하재)아? 어떻게 되겠는가? 부처님 은혜 갚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 겁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것. “네가 잘못했다.” 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해가지고 아무 짓도 안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를 좀 알든 모르든 용감하게 나가서 포교 좀 해야 됩니다. 하다보면 지공부도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도 주게 되는 것이지, ‘아이고 내가 완전히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그런 병에 떨어져 있는 사람 참 너무 많아서 정말 상당한 인재들을 사장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참,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완전히 깨닫고 나서 제도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 때가 언젠데요? 그것 참 딱한 일이지요. 그래가지고 결국은 나중엔 못 써먹잖아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려요.

일 년 배웠으면 일 년 배운 만치ㆍ한 달 배웠으면 한 달 배운 만치 남에게 자꾸 전하려고 하는 그런 의지ㆍ그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문제도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 은혜 갚는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선방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가지고, 깨닫는 것만 늘 그저 하늘에 별 떨어지는 것 기다리고 있듯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어가지고는, 세월 가니까 자꾸 세상은 저만치 가버렸는데, 본인의 사고는 더 쪼글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쪼글어 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봅니다. 그래서 참 안타까워요. 그것 우리 불교의 큰 손실이지요.

부처님 밥을 얼마나 많이 먹었습니까? 절 밥을 얼마나 축냈습니까? 그리고는 아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 돼버리면 너무 손해가 큰 겁니다. 그것이 손해가 되는 줄 몰라요. 불교에 손해가 되는 줄도 몰라요. 그래 저는 젊은 스님들이 아주 막무가내로라도 시중에 나와 가지고 열심히 포교하고,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아주 좋게 보이고ㆍ장하게 보이고 그렇습니다.

後世에 必有承訛踵誤하야 妄生穿鑿하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라

후세에 필유승와종오하야 망생천착하야 이구기설지필통자의리라

後世(후세)에,

必有承訛踵誤(필유승와종오)하야.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저 밑에 가서 새깁니다.) 承訛踵誤. 잘못된 것을 계승하고, 또 誤 = 오자. 잘못된 것을 이어 밟아서

妄生穿鑿(망생천착)하야. 망령되게 穿鑿. 자꾸 캐는 것이지요. 사실은 연구를 깊이 하는 것을 천착(穿鑿)이라고 합니다. 연구를 깊이 하다 보니 잘못 되버리는데 까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잘못 됐다는 뜻으로도 穿鑿을 쓰지 않습니까? 자꾸 파고 들다보면 엉뚱한 길로 가니까요. 망령되게 穿鑿을 내어서

以求其說之必通者矣(이구기설지필통자의)리라. 그 설함을, 그 설한 뜻을 구하는 것이 반드시 통하는 자가 있으리라. 必有할 때 有자를 거기다 새깁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夫如是則其不決之蔽가 至於使佛祖之言으로 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부여시즉기불결지폐가 지어사불조지언으로 종미면어박잡지건야리니

夫如是則(부여시즉) 대저 이렇게 된다면

其不決之蔽(기불결지폐)가 해결하지 못한 폐단이

至於使佛祖之言(지어사불조지언)으로. 佛祖의 말로 하여금

終未免於駁雜之愆也(종미면어소잡지건야)리니. 마침내 駁雜, 아주 시끄럽고 난잡해가지고 뭐가 뭔지 뒤섞여서 모르는 상태. 그런 허물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면치 못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를 至자를 거기다 해석해요. 이르게 될 것이다.

至於使佛祖之言으로,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愆 = 허물 ‘건’자지요. 막 뒤섞이게 하는 그런 허물을 면치 못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此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니라

차는 통인달사지소불가야니라

此(차)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통인달사지소부가야)니라. 이것은 通人達士로서 不可한 일이다.

由是로 終不固讓於決焉하야 寫以傳之也로라

유시로 종불고양어결언하야 사이전지야로라

由是(유시)로. 이로 말미암아

終不固讓於決焉(종불고양어결언)하야. 마침내 이것을 고양어결언(不固讓於決焉), 굳이 사양하지 아니하고 해결을 해서. 내가 사양하지 아니하고 해결을 해서

寫以傳之也(사이전지야)라. 써서 전하게 된 것이다.

夫然後에 一經之義天이 朗曜하야 當年之慧月이 將大明於天下矣니

부연후에 일경지의천이 낭요하야 당년지혜월이 장대명어천하의니

그런 연후에라야 한 경(經)의 뜻이 하늘에 밝게 빛나서 당년의 지혜(智慧)의 달이 장차 천하에 크게 밝으리니

그런 연후에야 한 경전의 이치가 밝아지며 그 해(年)의 지혜의 달이 천하에 장차 크게 밝을 것이니,

孰知夫如是之理乎아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로라

숙지부여시지리호아 금오자지기연이대경우회야로라

누가 이 같은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서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노라.

누가 이와 같은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그러함을 알고 크게 뜻에(마음에) 기뻐한다.

然이나 此言此說이 如蚊虻之鼓大虛也니 達者가 當以是로 爲笑具也리라)

연이나 차언차설이 여문맹지고대허야니 달자가 당이시로 위소구야리라)

그러나 이 말들은 마치 모기가 허공(虛空)에서 요동침과 같으니 잘자(達者)가 마땅히 이것으로써 웃음거리를 삼으리라.

그러나 이 말씀과 이 설명이 모기와 등에가 큰 허공을 치는 것과 같으니, 달자는 마땅히 이로써 웃을 것을(웃음거리를) 삼을 것이다. 【박(駁은 얼룩얼룩한 것이고, 잡(雜)은 섞인 것이고, 문(蚊)은 모기이고, 망(虻)은 등에이다. 의천(義天)은 이치를 이르는 것이다.】

夫然後에 一經之義天이 朗曜하야 當年之慧月이 將大明於天下矣니

부연후에 일경지의천이 낭요하야 당년지혜월이 장대명어천하의니

夫然後(부연후)에. 그런 연후에

一經之義天(일경지의천)이 朗曜(낭요)하고. 한 경전의 뜻의 세계가, 뜻의 하늘이 아주 밝고, 朗曜. 아주 밝게 빛나서

當年之慧月(당년지혜월)이. 그 시대의 지혜의 달이

將大明於天下矣(장대명어천하의)니. 장차 天下를 크게 밝힐 것이니

孰知夫如是之理乎아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로라

숙지부여시지리호아 금오자지기연이대경우회야로라

孰知夫如是之理乎(숙지부여시지리호)아? 누가 알랴?ㆍ이와 같은 이치를 누가 알겠는가?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금오자지기연이대경우회야)로라. 지금 내가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서 크게 경사한 마음을 품는다.

大慶于懷也. 마음에 크게 경사해야 한다.  

然이나 此言此說이 如蚊虻之鼓大虛也니 達者가 當以是로 爲笑具也리라)

연이나 차언차설이 여문맹지고대허야니 달자가 당이시로 위소구야리라)

然(연)이나 此言此說(차언차설)이. 이 말과 이 말이

如蚊虻之鼓大虛也(여문맹지고대허야)니. 이 말이 그야말로 아주 작은 모기가 큰 허공에다 대고, 요동치는 것과 같다. ‘누가 내 이런 말을 이해해 주겠나?’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達者(달자)가 當以是(당이시)로. 통달한 사람은 마땅히 이것으로써

爲笑具也(위소구야)리라. 웃음꺼리를 삼을 것이다.

“뭘 쪼잔 하게 글자 몇 자 고쳐놓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참 좁쌀도 아니고 이게 뭐냐?” 아마 이런 소리를 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소리입니다. “그 뭐 글자 조금 틀리면 어떻고, 맞으면 얼마나 맞다고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지”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사실 솔직하게...

그런데 함허스님께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 잡듯이 하나ㆍ하나 정확하게, 토 하나라도 정확하게 해서 바르게 전해주고 싶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永樂乙未六月 日에 涵虛堂衲守伊는 盥手焚香謹序하노라

영낙을미유월 일에 함허당납수이는 관수분향근서하노라

유월에(1415년) 함허당(涵虛堂) 납자(衲子) 수이(守伊)는 손씻고 향 사르고 삼가 서문(序文)을 쓰노라.

영락 을미(1415년) 유월 일 함허당 납자 수이는 손 씻고 향 사르고 삼가 서문을 씀.

永樂乙未六月 日에 涵虛堂衲守伊는 盥手焚香謹序하노라

영낙을미유월 일에 함허당납수이는 관수분향근서하노라

永樂乙未六月(영낙을미유월) = 서기 1,415년입니다. 영락(永樂)이 명나라 때 연호입니다.

“명나라” 하면 저는 항상 ‘스님이 건립한 나라.’ 그것도 떠꺼머리총각, 아주 일자무식꾼 행자 탁발승, 탁발승 출신 주원장이, 그 때 나라가 하도 혼란해가지고 그만, 탁발하러 나갔다가 반란군들이 막 그냥 여기저기 일어나서 해대니까, ‘아이고 중노릇 하는 것 보다, 실컷 탁발해가지고 가서 스님들 공양올리고 하는 것 보다는, 저 군대에 따라가서 칼이나 창을 들고 설치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어서, 그만 들어가 버린 겁니다. 무식하기는 했어도 타고나기를 워낙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졸병에서부터 차츰차츰... 힘이 좋고 재주가 뛰어나고요. 그래가지고 나중에 대장이 되고 그래서, 한 개의 반란군을 다 장악하게 됩니다. 다른 반란군들을 하나씩ㆍ하나씩 전부 먹지요. 다 먹어가지고 나중엔 통일해서 大明(대명)이라고 하는, 이것도 중머리니까 나라 이름이 밝을 明자로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을 겁니다. 저는 주원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스님이 나라를 세워가지고 ㅎㅎㅎㅎㅎㅎㅎ. 그 명나라 때에 중국문화가 초기에는 그렇지 못했는데 중년부터 말년 까지 아주 상당히 많이 발전 했습니다. 성조 황제 땐데요. 1415년 유월에,

涵虛堂衲守伊(함허당납수이)는. 함허당(涵虛堂)이라고 하는 것은 별호고요. 衲은 납자라는 뜻이고요. 수이(守伊)라고 하는 것은 함허스님의 옛날 이름입니다.

盥手焚香謹序(관수분향근서)하노라. 손을 씻고 향을 사르고 삼가 서문(序文)을 쓰노라.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의 내용은 살펴보았듯이 전부가 책을 편찬하면서, 너무 뒤엉키고ㆍ잘못되고ㆍ혼란한 그런 내용들이 많아가지고 고생고생 했나 봐요. 그러니까 이렇게 장황하게 썼지요. 그래서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읽으시고, 그냥 이것으로써 서문(序文)은 마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1강-2]

‘일물서(一物序)’ㆍ‘왕복서(往復序)’ㆍ‘마방서(馬防序)’. 이것은 불교의 3대 서문(序文)으로써 우리가 알아주는 글이다. 이렇게 정리 하겠습니다. ☀

‘함허(涵虛)스님 일물서(一物序)’

有一物於此하니

유일물어차하니

여기에 한 물건(物件)[一物]이 있으니

한 물건[一物]이 여기에 있으니

說誼 ; 一物이 何物고

설의 ; 일물이 하물고

“한 물건(物件)이란 어떤 물건인가.”

한 물건[一物]은 어떤 물건인가?

○ 秖這一著子는 希夷焉하야 絶情謂하며 髣髴焉하야 看似有하며

○ 지자일착자는 희이언하야 절정위하며 방불언하야 간사유하며

○ 다만 이 하나는

희이(希夷)하여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며

방불(髣髴)하여 보면 있는 듯 하고

○ 오직 이 일착자(一著子)는 희이(希夷)하여 뜻(생각)으로 여김이 끊어지며, 방불(髣髴)하여 봄에 있는 듯하며, 【‘희’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이’는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고, ‘방불’은 희미하게 느끼는 것이고,】

蠁曶然하야 難可追하며 恍惚然하야 難可測이니 非迷非悟라

향홀연하야 난가추하며 황홀연하야 난가측이니 비미비오라

향홀(響昒)하여 따라갈 수 없으며

황홀(恍惚)하여 측량하기 어려우니

미(迷)도 아니고 오(悟)도 아니라,

매우 빨라서[蠁曶] 가히 좇음이 어려우며, 황홀(恍惚)하여 가히 헤아림이 어려우며, 모름(미혹함)도 아니며. 앎(깨달음)도 아니다. 【‘향’은 많은 것이고, ‘홀’은 어둑한 것이고, ‘황홀’은 어질어질한 것이다.】

不可以凡聖으로 稱이며 無我無人이라 不可以自他로 名일새 故로 但云一物이니라

불가이범성으로 칭이며 무아무인이라 불가이자타로 명일새 고로 단운일물이니라

범부나 성인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며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음이라. 가히 자타(自他)로써 이름할 수 없음이니 고(故)로 다만 한 물건이라 하시니라.

가히 범부나 성인으로 일컫지 못할 것이며, 나[我]도 없고 남[他]도 없어 가히 나와 남으로 이름짓지 못할 까닭으로 다만 이르기를 ‘한 물건’이라 한다.

六祖가 云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로대 柱天下柱地하고 明如日黑似潻하야

육조가 운유일물호대 무두무미하며 무명무자로대 주천하주지하고 명여일흑사서하야

육조(六祖) 스님이 이르시길 한 물건이 있으되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명(名)도 없고 자(字)도 없으되 위로는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꽉 차 있으며 밝기는 태양과 같으며 검기로는 옻칠과 같도다.

육조가 이르기를, “한 물건이 없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자(字)도 없으되, 위로 하늘을 괴며 아래로 땅을 괴며, 밝음이 해와 같으며 검음이 옻칠[漆]과 같아서,

常在動用中호대 動用中에 收不得者가 是니라

상재동용중호대 동용중에 수부득자가 시니라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있으되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서 거둘래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항상 움직임과 작용 가운데 있되, 움직임과 작용 가운데서 잡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이것이다. 【‘동’은 운동하는 것이고 ‘용’은 작용하는 것이다.】

然雖如是나 一物之言도 亦强稱之而已라 故南嶽讓和尙이 道하사대

연수여시나 일물지언도 역강칭지이이라 고남악양화상이 도하사대

비록 그러히 이와 같으나 한 물건이라는 말도 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라. 그러므로 남악회양화상[육조 스님 제자]이 이르시되

그리하여서 비록 이와 같으나, ‘한 물건’이라는 말도 또 굳이(억지로) 말할 따름이니, 이런 까닭으로 남악회양 화상이 이르기를,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하시니 有一物於此者는 不離當處常湛然故로 云爾니라

설사일물이라도 즉부중이라하시니 유일물어차자는 불리당처상담연고로 운이니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맞지 않다 하시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당처(當處)[바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말숙하고 고요함]한 고로 그렇게 말씀하셨음이니라.

“‘한 물건’이라 일러도 곧 맞지 못하리라.” 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함은 당처(當處)를 여의지 아니하여 항상 맑은 까닭으로 그리 이른 것이다.

絶名相호대

절명상호대

명(名)[이름]과 상(相)[모양]이 끊어졌으되

명(名)과 상(相)이 끊어졌으니,

(說誼 ; 蕭焉空寂하며 湛爾沖虛하야 無名可名이요 無相可睹故也니라)

(설의 ; 소언공적하며 담이충허하야 무명가명이요 무상가도고야니라)

소연(蕭然)하여 고요하며 맑고 텅 비어서 가히 이름으로 부를 것이 없고 모양으로써 볼 것이 없느니라.

고요하며 공적하며 맑아서 깊고 허(虛)하며, 이름이 가히 이름할(이름 붙일) 것 없으며, 모양이 가히 볼 것 없는 까닭이다.

貫古今하고

관고금하고

고금(古今)[옛과 지금]을 꿰뚫고 있고

고금(古今)을 꿰뚫으며,

(說誼 ;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多經海岳相遷하니 幾見風雲變態오)

(설의 ;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장금이라 다경해악상천하니 기견풍운변태오)

천겁(千劫)을 지나도 옛이 아니고 만세(萬歲)에 뻗쳐 있어도 항상 지금이라. 많은 세월동안 바다와 산악(山岳)이 서로 바뀜을 겪었으니 풍운(風雲)의 변태(變態)를 얼마나 보았던가.(“바다와 山“ 云云은 이 세계가 成 · 住 · 壞 · 空할 때 바다가 山이 되는 세계의 變을 말한 것이고, “風雲“ 云云은 君臣興亡의 人間變易를 말한 것이다.)

천겁을 지나되 옛적이 아니며, 만세에 통하되 항상 지금이다. 바다와 산이 서로 옮김(바뀜)을 많이(오래) 지내니, 바람과 구름의 변하는 모양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겁(劫)은 시간이다.】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처일진호대 위륙합이로다

한 티끌에 처(處)하되 육합(六合)[四方上下]을 에워쌈이로다.

한 티끌에 있으되, 천지 사방[六合]을 (에워)싸며 【6합은 법수에 있는 것이다.]

(說誼 ;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설의 ; 범유사물이 소불능대하고 대불능소로대

무릇 온갖 사물(事物)들이 작은 것은 능히 클 수 없고 큰 것은 능히 작아질 수 없으나

무릇 있는 사물이 작은 것은 능히 크지 못하고, 큰 것은 능히 작아지지 못하나니,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隣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니라)

차즉반시하야 능소이세입린허하고 능대이광포법계니라)

이것[한 物件]은 이[事物]와 반대로 능히 작고 미세하여 능히 인허(隣虛)[분자 정도의 작은 것]에도 들어가고 크고 넓어서 능히 법계(法界)를 에워싸느니라.

이는 곧 여기에 뒤집어서 능히 작아서 가늚이 인허(隣虛)에 들어가고 능히 커서 넓음이 법계를 에워싸는 것이다. 【인(隣)은 가까운 것이고 허(虛)는 허공이니, 티끌이 아주 가늘어서 허공에 가까우므로 인허(隣虛)라고 한다.】

內含衆妙하고

내함중묘하고

안으로는 온갖 미묘(微妙)한 것[衆妙]을 머금었고

안에 많은 미묘함을 머금었고,

(說誼 ; 體量이 恢恢하야 恒沙性德과 無量妙用이 元自具足이니라)

(설의 ; 체량이 회회하야 항사성덕과 무량묘용이 원자구족이니라)

본체(本體)의 양(量)이 매우 넓고 커서[恢恢] 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성덕(性德)과 한량없는 묘용(妙用)[묘한 작용]이 원래 저절로 갖추어져 있다.

본체의 양이 커서 항사(恒沙) 같은 성덕(性德)과 그지없는 묘용(妙用)이 본디 스스로가 갖추어진 것이다.

外應群機하며

외응군기하며

밖으로는 온갖 근기[群機]에 다 응(應)하며

밖의 모든 기틀이(근기가) 응하며, 【‘기(機)’는 기틀이다.】

(說誼 ;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설의 ; 물내즉응하야 감이수통이 여명경이 당대에 호내호현하고 한내한현하며

사물(事物)이 오면 곧 응(應)하여 느껴 통(通)하는 것이 밝은 거울[明鏡] 앞에 호인(胡人)[호나라 사람]이 오면 호인(胡人)이 나타나고 한인(漢人)이 오면 한인(漢人)이 비치는 것과 같으며,

사물이 오거든 곧 응하며, 감응하거든 곧 통해서 밝은 거울이 경대에 당하여 호인(胡人)이 오거든 호인이 나타나고(비치고) 한인(漢人)이 오거든 한인이 나타나며(비치며), 【‘감(感)’은 중생의 성감(誠感)이니,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호(胡)’는 오랑캐이고, ‘(漢)’은 중국 사람이고, ‘거(虡)’는 북을 거는 틀이다.】

洪鍾이 在虡에 大扣大鳴하고 小扣小鳴이니라)

홍종이 재거에 대구대명하고 소구소명이니라)

큰 종(鐘)이 틀에 걸려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림과 같으니라.

큰 북이 북틀에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듯 한 것이다.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주어삼재하고 왕어만법하니

삼재(三才)[天 · 地 · 人]의 주인(主人)이 되고 만법(萬法)의 왕(王)이 되나니,

천ㆍ지ㆍ인에 으뜸이고, 만법에 으뜸이어서, 【삼재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說誼 ; 天以之覆하고 地以之載하고 人以之處乎其中하며 以至日月星辰과 草木昆虫히

(설의 ; 천이지복하고 지이지재하고 인이지처호기중하며 이지일월성신과 초목곤충히

하늘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덮고[覆] 땅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싣고[載] 있으며 사람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그 가운데 처(處)하니 이로써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초목곤충(草木昆虫)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이)로써 덮으며, 땅이 (이)로써 싣고, 사람이 (이)로써 그 가운데 있으며, 해와 달과 별과 나무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凡有貌像形色者가 莫不以之爲宗하야 而得成立이니라)

범유모상형색자가 막불이지위종하야 이득성립이니라)

무릇 모양과 형색이 있는 것들이 이것으로써 근본(根本)을 삼아서 성립하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느니라.(이것은 “안으로 衆妙를 머금고 밖으로 群機를 따르며, 三才의 主가 되고 萬法의 王이 된 것“을 밝힌 것이다.)

무릇 모양과 형체의 빛깔 있는 것이 (이)로써 으뜸을 삼고 능히 일어서지(성립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탕탕호기무비요 외외호기무륜이로다

창창(蕩蕩)하여 그에 비길 것 없고 외외(巍巍)하여 그에 짝할 수 없도다.

탕탕하여 비유할 것이 없으며, 외외하여 겨룰 것이 없으니

(說誼 ; 蕩蕩云云은 廣大勝第一者가 是요

(설의 ; 탕탕운운은 광대승제일자가 시요

탕탕(蕩蕩)하다는 것은 광대하여 제일이 되는 것이요,

“탕탕 운운”은 넓으며 크고 뛰어나서 제일인 것이 이것이고,

巍巍云云은 最尊極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니라)

외외운운은 최존극무상자가 시니 차소이위왕위주지세야니라)

외외(巍巍)하다는 것은 가장 높고 높아서 지극(至極)하여 위없는 것이니, 이것이 왕(王)이 되고 주(主)가 되는 형세[勢]의 까닭이다.

“외외 운운”은 가장 높고 지극하여 위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이 으뜸가며 으뜸 되는 형체인 것이다.

不曰神乎아 昭昭於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불왈신호아 소소어부앙지간하고 은은어시청지제하며

어찌 신비(神秘)하지 아니한가. 엎드리고 우러르는[俯仰] 사이에 분명하고, 보고 듣는 즈음에 은은(隱隱)히 스며 있으며,

신기하다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구부리며 우러를 사이에 환하되 보고 들을 사이에 은은한 것이다.

(說誼 ; 決定是無로대 性自神解하고 決定是有로대 尋之無蹤하니 此所以爲神也니라)

(설의 ; 결정시무로대 성자신해하고 결정시유로대 심지무종하니 차소이위신야니라)

결정(決定)코 이것이 없으되 자성[性]이 스스로 신비롭게 알고, 결정코 이것이 있으되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신비하다고 한 까닭이니라.

반드시 이것이 없다 하여도 자성(自性)이 스스로 신기하게 알고, 반드시 이것이 있다 하여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신기로운 까닭인 것이다.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불왈현호아 선천지이무기시하고 후천지이무기종하니

어찌 그윽[玄玄]하지 아니한가. 천지(天地)보다 먼저 됐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으니,

깊다고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깊다고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천지로부터 먼저라 해서 그 비롯함이 없으며, 천지로부터 나중이라 해서 그 마침이 없는 것이다.

(說誼 ;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요 有形之最後者도 亦天地也라

(설의 ;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요 유형지최후자도 역천지야라

형상 있는 것의 가장 먼저 된 것은 천지(天地)요 형상 있는 것의 최후의 것도 천지로다.

형상 있는 것에서 가장 먼저인 것이 하늘과 땅이며, 항상 있는 것에서 가장 나중인 것이 또한 하늘과 땅이니,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로대 而天地가 以此爲始하니

유형지최선자가 천지야로대 이천지가 이차위시하니

형상의 가장 먼저 된 것이 천지로되 이 천지가 이것으로써 비롯되니 이것이 물질이 된 까닭이라.

형상 있는 것에서 가장 먼저인 것이 하늘과 땅이로되, 하늘과 땅이 이것으로써 비롯함[始]을 삼으니,

此는 物之所以始者를 不可得而窮也라

차는 물지소이시자를 불가득이궁야라

이것이 물질[一物]이 된 까닭이라. 가히 그것은 궁구(窮究)할 길이 없도다.

이 물건의 비롯한 까닭을 가히 능히 다하지[窮] 못하리니,

所以始者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도 亦不可得而窮也니 此所以爲玄也니라)

소이시자를 기불가득이궁즉소이종자도 역불가득이궁야니 차소이위현야니라)

비롯된 까닭을 이미 궁구(窮究)할 수 없은즉 마침도 역시 궁구할 수 없음이니 이것이 현현(玄玄)하다한 까닭이니라.

비롯함을 이미 가히 능히 다하지 못하면 곧 (그) 까닭 또한 가히 능히 다하지 못하리니, 이것이 (그) 깊은 까닭인 것이다.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공야아 유야아 오미지기소이로다

공(空)이냐 유(有)냐.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도다.

공[空]이냐? 유[有]이냐? 내가(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도다.

(說誼 ; 物體深玄에 虛澈靈通하야 有不定有요 無不定無니

(설의 ; 물체심현에 허철령통하야 유부정유요 무부정무니

물체가 현현(玄玄)하고[깊고 그윽하고] 비어 사무쳐 영통(靈通)해서, 있으되 결정코 있지 않고, 없으되 결정코 없지 않으니

물건의 체[體]가 깊으며 허[虛]하며 사무치며 신령하며 통하여 있음이 정해져 있는 있음이 아니며, 없음이 정해져 있는 없음이 아니니,

言語道가 斷하고 心行處가 滅일새 故로 云爾니라)

언어도가 단하고 심항처가 멸일새 고로 운이니라)

말로써 할 길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을사[言語道斷 心行處滅] 고(故)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말의 길이 끊어지며[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마음이 행할[마름이 갈] 곳이 없는 까닭으로 그리 이르는 것이다.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아가문이 득자일착자하사 보관중생이 동품이미하사 탄왈기재라하시고

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이 하나를 얻으시어, 중생(衆生)들이 다 같이 지니고[稟] 있으되, 모르고 있는 것을 두루 살피시고 탄식(歎息) 하실새 ‘신기(新奇)하다’ 하시고

우리 석가모니[迦文]께서 이 일착자(一著子)를 얻으시어 중생이 한가지로 받되(지니고 있으되) 모름을 널리 보시어 탄식하여 이르시되, “기이하구나!” 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향생사해중하사 가무저선하시며 취무공적하시니 묘음이 동지하고

생사고해(生死苦海)속을 향해 무저선(無底船)[밑 없는 배]을 타고서 무공적(無孔笛)[구멍 없는 피리]을 부시니 묘(妙)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震動)하고

살고 죽는 바다[生死苦海]의 가운데를 향하시어 밑 없는 배를 타시며, 구멍 없는 피리를 부시니,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법해가 만천이라 어시에 농애진성하고 고고실윤하야 대지함생이 각득기소하니

법해(法海)가 하늘 가득함이로다.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범부(凡夫)가 다 깨어나고 마른나무들이 다 윤택(潤澤)하게 되며 대지(大地)의 모든 생명들이 다 그 살 곳을 얻으니,

미묘한 소리가 땅을 움직이게 하며, 법해가 하늘에 가득하거늘,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이가 다 깨며, 시든(메마른) 것이 다 젖어 대지가 감싼 생물이 각각 그 (살) 곳을 얻었다.

(說誼 ; 此物이 非聖非凡이로대 而凡而聖하며 非淨非染이로대 而染而淨이라

(설의 ; 차물이 비성비범이로대 이범이성하며 비정비염이로대 이염이정이라

이 물건은 성인(聖人)도 아니고 범부(凡夫)도 아니로되 능(能)히 범부이기도 하고 성인이기도 하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물든 것도 아니로되 때로는 능히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함이라.

이 물건은 성인도 아니며 법무도 아니로되 범부이며 성인이고, 깨끗함도 아니며 더러움도 아니로되 더러우며 깨끗한 것이니,

所以로 道호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하야

소이로 도호대 수파파사분하고 신피나금기하야

그러므로 이르시길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쥐고 몸에는 비단옷을 입기도 하며,

이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손에 깨뜨린 사기그릇 잡고 몸에 비단옷을 입으며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라하니

유시에 취주매인이라가 홀이소향작례라하니

때로는 술에 취하여 사람을 꾸짖다가도 홀연히 향을 사루고 예를 드린다 하니,

이따금 술에 취하고 사람을 꾸짖다가도 문득 향을 피우고 절한다 한 것이다.

比之空日컨대 空豈長晴이며 亦豈常雨며 日豈長明이며 亦豈常暗이리오

비지공일컨대 공개장청이며 역기상우며 일개장명이며 역개상암이리오

저 허공의 해에 비유한다면 허공이 항상 어찌 맑기만 하며 또한 어찌 늘 비만 오며 해가 어찌 길이 밝기만 하며 또한 어찌 늘 어둡기만 하리오.

허공과 해에 비교한다면 허공은 어찌 항상 개며 또 어찌 항상 비가 오며 해는 어찌 항상 밝으며 또 어찌 항상 어둡겠는가?

一念迷也에 雲起長空하야 上明下暗하고

일념미야에 운기장공하야 상명하암하고

한 생각이 미혹하면 구름이 허공에 일어나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게 되고

한 생각(잠깐) 미혹하매 구름이 긴 허공에 일어나서 위는 밝고 아래가 어두우며,

一念悟也에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하니 染淨所以興也며 聖凡所以作也니라

일념오야에 풍소미운하야 상하통철하니 염정소이흥야며 성범소이작야니라

한 생각을 깨달으면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서 상하가 훤출해지니 더럽고 깨끗함[染淨]이 이로써 일어나는 바이며 범성(凡聖)이 이렇게 지어지도다.

한 생각(잠깐) 깨들으매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서 아래위가 훤히 통하니, 더러우며 깨끗함이 일어나는 까닭이며, (이로써) 성인과 범부가 되는 까닭이니,

聖凡이 旣作則感應이 生焉하야 凡在迷而渴仰風化하고 聖在悟而爲物興悲하나니

성범이 기작즉감응이 생언하야 범재미이갈앙풍화하고 성재오이위물흥비하나니

성인(聖人)과 범부가 이미 지어진 즉 감응이 일어나서 범부가 미혹하므로 성인의 교화(敎化)를 목마르게 우러르고, 성인이 깨달으매 중생을 위해서 자비를 일으키시니

성인과 범부가 이미 일어나면 곧 감응이 나서 범부는 미혹에 있어서 (성인의) 교화를 목마르게 우러르고 성인은 깨달음에 있어서 사물[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일으키니,

所以로 我迦文이 於寂滅場中에 初成正覺하사 作獅子吼하사대 奇哉奇哉라

소이로 아가문이 어적멸장중에 초성정각하사 작사자후하사대 기재기재라

이 까닭에 석가모니불께서 적멸도량 가운데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시어 사자후(獅子吼)를 지으시고, '참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런 고로 우리 석가모니께서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사자후를 지으시되, “기이하구나!

普觀一切衆生호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但以妄想執著으로 而不證得이라하시고

보관일절중생호니 구유여내지혜덕상이언마는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부증득이라하시고

일체 중생을 두루 살피니 여래(如來)와 같은 지혜덕상(智慧德相)을 두루 갖추고 있건마는 다만 망상(妄想) 집착(執着)으로 증득(證得)치 못한다 하시니,

일체 중생을 널리 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다) 갖추어 두었으되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까닫지 못하는구나!” 하시고, 【적멸은 고요하고 없어지는(죽는) 것이니, 불성 가운데 한 모양도 없는 것이다. 장(량, 場)은 도리를 닦는 마당이고, 중(中)은 가운데이다.】

於是에 運無緣慈하시며 說無言言하사 廣演敎海하야 徧注衆生心地하사

어시에 운무연자하시며 설무언언하사 광연교해하야 변주중생심지하사

여기에 인연 없는 자비(慈悲)를 굴리시며[運] 무언(無言)의 설법을 하시고 널리 가르침의 바다[敎海]를 펴서[演] 두루 중생의 마음[心地]에 넣어주시며[注]

이에 인연 없는 자비를 움직이게 하시며, 말씀 없는 말을 이르시어 널리 교해(敎海)를 펴시어 중생의 마음 바탕[心地]에 널리 부으시어

使之道芽로 榮茂하고 心花로 發明케하시니 大地同春에 萬物이 咸熙로다)

사지도아로 영무하고 심화로 발명케하시니 대지동춘에 만물이 함희로다)

도(道)의 싹으로 하여금 번성[榮茂]케 하고 마음의 꽃[心花]이 환하게 피게[發明] 하시니 대지가 똑같이 봄을 맞이하여 온갖 만물이 감동하여 빛나도다.

도의 싹이 피어 성하게 하며 마음의 꽃이 밝게 피어 대지가 함께 봄이며, 만물이 다 밝게 하셨다.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금반야경자는 묘음지소류요 법해지소자자야라

지금의 반야경(般若經)이라는 것은 묘음(妙音)이 흘러나온 바이며 법해(法海)가 이[金剛經]로부터 흘러온 바로다.

이제 반야경은 묘음(妙音)이 흐른 곳이며, 법해가 의지한 곳이다.

(說誼 ; 般若는 一物之强稱이요 經者는 現物之具也라

(설의 ; 반야는 일물지강칭이요 경자는 현물지구야라

반야(般若)는 한 물건을 굳이 말한 것이요, 경(經)이란 것은 한 물건을 나타내는 도구니라.

반야는 한 물건을 굳이 말함이고, 경은 물건을 나타내는 그릇이니,

此乃金口親宣이요 不是餘人之所說이니 法門淵源이 不同??之敎乘이니라)

차내금구친선이요 불시여인지소설이니 법문연원이 부동쇄쇄지교승이니라)

이는 부처님(金口)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설(說)한 것이 아니니, 법문(法門)의 깊고 깊은 근원[淵源]이 자질구레[??]한 작은 가르침[敎乘, 小乘]과 같지 않도다.

이는 금구(金口)로 친히 펴신 것이라서 다른 사람이 말한 바가 아니니, 법문의 깊은 근원이다. 자질구레한 교승[小乘]과 같지 아니한 것이다. 【금구는 부처님의 입을 사뢰니, 부처님의 몸이 금색이므로 금구라 한 것이다.】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이금강지견리로 잔아인지조림하시고 조혜일어중혼하시며 개혹무어삼공하사

금강(金剛)의 굳고 날카로운 것으로써 아인(我人)의 조림(稠林)[번뇌의 숲]을 끊으시고 지혜(智慧)의 태양으로 중혼(重昏)[첩첩의 어두움]을 비추시며, 미혹(迷惑)의 안개[惑霧]를 삼공(三空)[我空 · 法空 · 俱空]으로 여시사

금강의 굳으며 날카로움으로 아상과 인상의 빽빽한 (번뇌의) 수풀을 베시고 혜일(慧日)로 겹친 어두운 데를 비추시며 혹무(惑霧)를 삼공(三空)에 여시어, 【삼공(三空)은 인공(人空)과 법공(法空)과 구공(俱空)이고, 안개 가림[惑霧]이 무명혹(無明惑)이 진성(眞性)을 가림과 같은 것이다.】

(說誼 ; 我人稠林이 蔚於心地라가 金剛焰下에 掃地無蹤이라

(설의 ; 아인조림이 울어심지라가 금강염하에 소지무종이라

아상(我相) · 인상(人相)의 번뇌[稠林]가 마음 땅에 무성(茂盛)하다가 금강(金剛)의 불꽃 아래서[焰下] 땅을 쓴 듯이 자취가 없음이라.

아상, 인상의 빽빽한 (번뇌의) 수풀이 심지(心地)에 무성했다가 금강의 불꽃 아래 땅을 쓸어 자취가 없으니,

法與非法此二惑霧가 掩蔽性空일새 故曰重昏이니

법여비법차이혹무가 엄폐성공일새 고왈중혼이니

법(法)과 비벙(非法)의 이 두 미혹의 안개[惑霧]가 성품(性品)의 공(空)함을 가렸음일새 그래서 중혼(重昏)이라 하시니

법과 법 아닌 이 두 무명의 안개가 성공(性空)을 가리므로 이런 까닭에 이르기를, 첩첩한 어둠이다. 【성공(性空)은 이(理)를 이르는 것이다.】

慧日이 一照에 重昏이 頓破하고 三空이 顯現이니라)

혜일이 일조에 중혼이 돈파하고 삼공이 현현이니라)

지혜(智慧)의 해가 한번 비추매 중혼(重昏)이 몰록 깨지고 삼공(三空)이 환히 나타남이니라.

혜일(慧日)이 한 번 비추면 첩첩한 어둠이 문득 무너뜨려지고 삼공이 나타나는 것이다.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사지출단상갱하야 등진실제하며 부만항화하야 성일승과케하시니

그로 하여금 단견(斷見)[空]과 상견(常見)[有]의 구덩이[偏見]에서 나오게 하여 진실제(眞實際)[참다운 이치]에 오르게 하며 만행(萬行)[六度萬行]의 꽃을 피워서 일승(一乘)의 과(果)[부처님의 지위 : 成佛]를 이루게 하시니,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구렁에서 나와 진실의 가[眞實際, 참다운 도리]에 오르게 하며, 만행(萬行)의 꽃을 피워 일승의 과[一乘果, 성불]를 이루게 하시니,

(說誼 ; 法非常而執爲有하고 性非斷而執爲空하나니

(설의 ; 법비상이집위유하고 성비단이집위공하나니

법(法)은 항상하는 것이 아닌데 집착(執着)해서 유(有)라 하고, 성(性)은 끊어짐이 아니로되 집착해서 공(空)을 삼으니

법이 한결같지 아니하거늘, 붙잡아(집착하여) 유[有]를 삼으며, 성(性)은 끊어짐이 아니거늘 붙잡아 공(空)을 삼으니,

執爲空而不知空之不空則是落斷見坑也요 執爲有而不知有之非有則是落常見坑也니라

집위공이부지공지불공즉시낙단견갱야요 집위유이부지유지비유즉시낙상견갱야니라

집착해서 공(空)을 삼으나 공이 공 아님을 알지 못한즉 단견(斷見)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집착하여 유(有)를 삼으나 유가 유 아님을 알지 못한즉 상견(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진다.

붙잡아 공(空)을 삼아 공이 공 아닌 줄을 알지 못하면, 곧 이는 단견(斷見)의 구렁에 떨어짐이고, 붙잡아서(집착하여서) 유(有)를 삼아 유가 유 아닌 줄을 알지 못하면, 곧 이는 상견(常見)의 구렁에 떨어짐이다.

實際者는 空有兩忘하고 一味亦亡之處也니

실제자는 공유량망하고 일미역망지처야니

실제(實際)라는 것은 공(空) · 유(有)를 둘 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한 맛[一味]까지도 없어진 것이니,

실제는 공과 유의 둘을 (다) 잊고 한 맛[一味]이 또 없는 곳이니,

佛이 以三空으로 開示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하고

불이 이삼공으로 개시하사 사지불낙단상지갱하고

부처님이 삼공(三空)으로서 열어 보이사 그들로 하여금 단상(斷常)[斷見과 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부처님이 삼공으로 열어 보이시어 단견과 상견의 구렁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頓超空有之外하야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也니라)

돈초공유지외하야 여시원수하며 여시원증야니라)

몰록 공(空) · 유(有)의 밖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원만(圓滿)히 닦으며 이와 같이 원만하게 증득(證得)하게 하느니라.

공과 유의 밖에 문득 건너뛰어 이와 같이 온전히 닦으며 이와 같이 온전히 증득케(깨닫게) 하신 것이다.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著이로다

언언이인당양이요 구구수쇄불착이로다

말씀말씀[言言]이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에 반사된 것같이 무섭게 빛나고 구절구절(句節句節)이 물로 씻은 듯이 한 티끌도 붙지 않음이로다.

말씀마다 날카로운 칼이 햇볕에 당한 듯(반사된 듯)하며, 구절마다 물을 뿌려도 (티끌이) 묻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說誼 ; 金剛妙慧가 堅不爲物挫하고 利能斷衆生冤結이니 般若雄詮은

(설의 ; 금강묘혜가 견불위물좌하고 이능단중생원결이니 반야웅전은

금강의 묘한 지혜가 견고하여 다른 사물에 꺾임을 당하지 않고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들의 원결(寃結)을 끊으니 반야경전(般若經典)은

금강의 묘한 지혜는 굳어 (다른) 물건의 꺾임이 되지 아니하며,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의 원수의 맺음을 끊으니, 반야경의 웅건한 말씀은

金剛妙慧之所現發이라 故로 利能破衆生疑網하고 堅不爲外魔所壞니라)

금강묘혜지소현발이라 고로 이능파중생의망하고 견불위외마소괴니라)

금강의 묘한 지혜가 드러나는 곳이라 그 때문에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들의 의심[疑網]을 깨트리고 견고하여 외도(外道)나 마구니[魔]들의 무너트림[壞]이 되지 않도다.

금강의 묘한 지혜가 나타나 일으키는 까닭으로 날카로워서 능히 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무너뜨리고 굳어서 외도와 마왕의 무너뜨림이 되지 아니한 것이다.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유출무변법문해하사 잉육무한인천사하시니

가없는 법문(法門)의 바다를 흘러 내시어 한량없는 스승[人天師]들을 길러 내셨으니

가없는 법문의 바다[法門海]를 흘려 내시며, 그지없는 사람과 하늘(신)의 스승을 배어[孕] 길러[育] 내(시)었다.

(說誼 ; 佛之與法이 皆從此經流出일새 故로 云爾니라)

(설의 ; 불지여법이 개종차경류출일새 고로 운이니라)

부처님과 법(法)이 다 이 경(經)으로부터 흘러나오므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부처님과 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까닭으로 그리 이른 것이다.

若大鑒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傳與鏡此五大士者는

야대감능과 규봉밀과 야보천과 전여경차오대사자는

대감 혜능[大鑑能(六祖慧能)]과 규봉 종밀[圭峰密(圭峰宗密)]과 야보 도천[冶父○川(冶父道川)]과 부대사(傅大士)와 종경(宗鏡) 이 오대사(五大士)는

대감 혜능과 규봉 종밀과 야보(야부) 도천과 부대사와 종경, 이 다섯 대사(大士)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개인천지소존이요 법해지소귀자야라

모두 인천(人天)이 존중할 바요 법해(法海)의 돌아갈 바라.

다 사람과 신들이 높이 받드는 것이며, 법해에 (돌아)가는 것이다.

(說誼 ; 五大士가 皆因此經하사 眼目夫人天이라

(설의 ; 오대사가 개인차경하사 안목부인천이라

5대사(大士)가 다 이 경(經)으로 인(因)해서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 됨이라.

다섯 분의 대사(大士)가 다 이 경을 말미암아 인간과 신들에게 눈이 되었으므로

故로 曰人天之所尊이요 無法不了라 故로 云法海之所歸니라)

고로 왈인천지소존이요 무법불료라 고로 운법해지소귀니라)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존중해야 하며, 법을 모두 통달하셨는지라[無法不了], 그러므로 법해의 돌아갈 바라고 이르셨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인간과 신들이 높이 (떠받드는) 것이다.” (하고,) 법을 투철히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법해(法海)에 가는 것이다.”고 했다.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각구통방정안하사 직전제불밀인하시고 각출광장설상하사 개연최상종승하시니

각기 모든 것에 통하는[通方] 바른 눈[正眼]을 갖추사 바로 제불(諸佛)의 밀인(密印)[비밀한 가르침]을 전하시고 각각 광장설(廣長舌)의 모습을 내어서 최상의 근본 가르침[最上宗乘]을 펴시니

각각 통방(通方)한 바른 눈이 갖추어져 바로 제물(諸佛)의 밀인(密印; 비밀한 가르침)을 전하여 각각 넓으며 긴 설상(舌相)을 내어 가장 위의 종승(宗乘)을 열어 펼치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일일위진하악이요 휘등고금이라 수사당세에 맹자로 득견하며

낱낱의 위엄(威嚴)이 강산(江山)에 떨치고 빛이 고금(古今)에 드날림이라. 드디어 이 세상에서 눈먼 자로 하여금 보게 하며

낱낱이 위엄이 강산(江山)을 진동하며, 빛이 예와 지금에 솟아서 곧 당세(當世)의 눈 먼 이로 하여금 봄을 얻게(보게) 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농자로 득문하고 아자로 능언하며 파자로 능항케하시고

귀머거리는 듣게 하시며 벙어리는 말하게 하며 절뚝거리는 이는 걷게 하시고(영험적인 것보다는 법에 대한 안목을 열어 주셨음을 이름)

귀먹은 이로 하여금 들음을 얻게(듣게) 하며, 벙어리로 하여금 능히 말하게 하며, 발 저는 이로 하여금 능히 걷게 하셨다.

(說誼 ; 通方正眼者는 明眞了俗하고 達乎中道하야 無所不通之正眼也라

(설의 ; 통방정안자는 명진료속하고 달호중도하야 무소불통지정안야라

통방정안(通方正眼)이라는 것은 진(眞)을 밝히고 속(俗)을 요달(了達)하며 중도(中道)를 통달하여 통하지 못함이 없는 바른 눈을 이름한 것이요,

통방정안(通方正眼)은 진(眞)을 밝히며 속(俗)을 투철하게 알아서 중도(中道)에 통하여 통치 못한 곳이 없는 정안이다.

密印者는 衆生所迷之眞理요 佛祖相傳之法印也라 五大士가 具如是正眼하며

밀인자는 중생소미지진리요 불조상전지법인야라 오대사가 구여시정안하며

밀인(密印)은 중생들이 알아야할 진리요 부처와 조사[佛祖]가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라. 5대사(五大士)가 다 이와 같은 바른 눈[正眼]을 갖추셨으며

밀인은 중생이 모르는 진리이고, 불조(佛祖)가 서로 전하는 법인(法印)이다. 다섯 대사가 이와 같은 정안이 갖추어졌으며,

傳如是密印하사 開大口說大話하시니 威光이 動地하야 照映今昔이라

전여시밀인하사 개대구설대화하시니 위광이 동지하야 조영금석이라

이와 같은 밀인(密印)을 전하사 큰 입[大口]을 열어서 크게 설법[大話]하시니 위광(威光)이 땅을 진동하며 고금(古今)을 비춤이라

이와 같은 밀인을 전하여 큰 입을 열어 큰 말을 이르니, 위엄과 광명이 땅을 움직이게 하며 예와 지금에 비추어

遂使見聞으로 皆化하야 知非遷善케하시니 極於宗說兼通하며

수사견문으로 개화하야 지비천선케하시니 극어종설겸통하며

드디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다 교화해서 그릇됨을 알아 善에 옮기게 하시니 종(宗)[진리를 깨달은 것]과 설(說)[깨달은 진리를 말해줌]을 다 겸하여 통하니

곧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다 교화하여 그름을 알아서 어진 이에게 옮게 하며, 종(宗)과 설(說)을 다 통달하며 【종통(宗通)은 종지(宗旨)를 훤히 밝히며 본원을 깊이 통달하는 것이고, 설통(說通)은 12부 경을 잘 설하며 명상(名相) 법수(法數)를 통달하여 의심 없는 것이다.】

解行相應之大化者가 皆於此經에 得之矣니라)

해항상응지대화자가 개어차경에 득지의니라)

해(解)와 행(行)[解行]이 서로 응하여 큰 교화를 폄이 다 이 경(經)으로부터 얻었음이니라.

깨달음과 수행이 서로 맞음에 다다른 큰 교화가 다 이 경에서 얻은 것이다.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기이요 역위보각장내하사 각자의경저해하야 이전천하후세하시니

이미 그러하였고 또한 장래에도 널리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각기 스스로 경(經)에 의지하여 해(解)를 지어서 천하후세(天下後世)에 전하시니,

이윽고 또 장래에 널리 알림(깨닫게 함)을 위하여 각각 경에 의지하여 새김을 나타내어(지어) 천하 후세에 전하니,

(說誼 ; 旣以斯經으로 現益當世하시고 且造斯解하야 流芳萬古삿다)

(설의 ; 기이사경으로 현익당세하시고 차조사해하야 유방만고삿다)

이미 이 경(經)으로써 당세(當世)에 이익을 주었고 또한 이 해석(解釋)를 지어서 그 아름다움을 만고(萬古)에 흘리셨도다.

이미 이 경으로 당세에 뚜렷이 이익 되게 하고, 또 이 새김을 지어 만고에 향기로움이 흐르게 한 것이다.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개시조문상덕이리오 가위금상첨화며

어찌 무늬를 새겨서 덕(德)을 잃으리오. 오히려 금상첨화로다.

어찌 이 무늬를 새겨 덕(德)을 헐어버리겠는가? 가히 비단 위에 꽃을 더했다고 이를 것이로다.

(說誼 ; 玉無瑕而彫文에 反喪良玉溫潤之德이어니와 斯解則反是하야 致令經語로

(설의 ; 옥무하이조문에 반상량옥온윤지덕이어니와 사해즉반시하야 치령경어로

옥에 티가 없는데 옥에 무늬를 새기매 도리어 좋은 옥의 매끄러움을 상해버리거니와 이 解[五家解]인 즉 이것과 반대되어서 경(經)의 말씀을

옥에 흠이 없는데 무늬를 새기면 도리어 좋은 옥의 온윤한 덕을 헐어버리는데, 이 풀이는 이를 뒤집어서 경의 말씀으로 하여금

益精하며 經義로 益明하야 遂使目之者로 披雲都日하고 耳之者로 豁然心開로다)

익정하며 경의로 익명하야 수사목지자로 피운도일하고 이지자로 활연심개로다)

더욱 정밀(精密)하게 하고 경(經)의 뜻을 더욱 분명(分明)하게 해서 마침내 보는 자(者)로 하여금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게 하며 듣는 자(者)로 하여금 활여(豁然)히 마음이 열리게 하였다.

더욱 정미하게 하며, 경의 뜻을 더욱 밝게 하여 곧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게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훤히 마음을 열게 한 것이다.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하지중휘불일이리오 역내광양조도로다

어찌 부처님의 빛[佛日]을 더욱 빛내는 데에만 그치리오. 또한 조사(祖師)의 도(道)까지도 드날림이로다.

어찌하여 다시 불일(佛日)을 밝게 할 따름이겠는가? 또한 조사의 가르침을 빛내어 펴는구나.

(說誼 ; 古人이 道하사대 三乘十二分敎에 體理得妙하면

(설의 ; 고인이 도하사대 삼승십이분교에 체리득묘하면

옛사람[古人]이 이르시되 “삼승십이분교(三乘 十二分敎)의 이치를 체득하고 묘(妙)를 얻으면

옛 사람이 이르되, “3승의 12분교에 이치를 알아서 묘(妙)를 얻으면

何處에 更有祖師西來意리오하시니 則別傳之旨도 亦不外乎斯經이로대

하처에 갱유조사서내의리오하시니 즉별전지지도 역불외호사경이로대

어느 곳에 다시 조사(祖師)[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있으리오“ 하시니 즉 따로 전한 뜻[敎外別傳]도 역시 이 경(經) 밖이 아니로되

어느 곳에 다시 조사의 서래(西來)한 뜻이 있느냐? 하니, 곧 따로 전하는 뜻이 또 이 경에 나타나지 아니하되,

尙爲言敎의 所攝하야 隱而不現이어늘 今諸祖가 稱實發揚하시니 非獨敎義全彰이라

상위언교의 소섭하야 은이불현이어늘 금제조가 칭실발양하시니 비독교의전창이라

오히려 언교(言敎)의 섭수(攝受)한 바가 되어서 숨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제 조사(祖師)님들께서 사실에 맞춰서 드러내시니 비단 가르침의 뜻이 전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언교(言敎)의 잡힘[攝]이 되어 그윽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니, 이에 여러 조사의 사리에 맞게 베풀어 폄이 한갓 교(敎)의 뜻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別傳之旨도 亦乃昭然이로다

별전지지도 역내소연이로다

별전(別傳)의 뜻[禪旨]도 또한 여기에 환하게 드러나도다.

따로 전하는 뜻이 또 밝도다.

有云호대 單傳直指之旨가 豈斯敎의 所攝乎아하니 看於黃梅曹溪에 足可見矣니라)

유운호대 단전직지지지가 개사교의 소섭호아하니 간어황매조계에 족가견의니라)

어떤 이가 말하길 “홀로 전한 직지(直指)의 뜻[禪旨]이 어찌 이 교(敎)[金剛]에 섭수(攝受)한 바 되겠는가“ 하고 의심하니, 황매(黃梅)[五祖]와 조계(曹溪)[六祖]를 보면 족히 알 수 있도다.(바로 이 經 안에 禪旨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르기를, ”단벌로 전하시어[단전(單傳)] 바로 가르치시는[직지(直指)] 뜻이 어찌하여 이 교의 잡을[섭수(攝受)할] 바이겠는가?“ 하니, 황매와 조계를 보면 족히 알 것이다. 【황매는 산 이름이니, 5조 홍인대사가 살던 곳이고, 조계도 산 이름이니, 6조 혜능대사가 살던 곳이니, 이 두 대사가 다 단전(單傳) 직지(直指)의 뜻을 전한 것이다.】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都하니 幸莫大焉이라

아조가 생우천재지하하야 득우난우지보하야 수접목도하니 행막대언이라

우리들이 천년(千年) 이후에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보배를 만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니 그 다행(多幸)스러움이 이보다 큼이 없도다.

우리들이 천년 이래(후)에 나서 만남이 어려운 보배를 만나 손으로 잡으며 눈으로 보니, 다행함이 이것만큼 큰 것이 없구나.

(說誼 ; 慶遇斯解也라)

(설의 ; 경우사해야라)

이 해[五家解]를 만난 것을 慶事스럽게 여기도다.

이 해설서(금강경오가해) 만남을 기뻐하도다.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이차로 가이양불조지여휘며 이차로 가이연군국지홍조로다

이로써 불조(佛祖)의 한없는 빛을 드날리며 이로써 나라의 큰 복(福)을 뻗치게 함이로다.

이로써 가히 불조(佛祖)의 남은(한없는) 빛을 펼 것이며, 이로써 가히 임금과 나라의 큰 복을 길게(오래) 하겠구나.

(說誼 ; 儻因斯解하야 豁開正眼則法印이 在握하고 化道가 在己니라)

(설의 ; 당인사해하야 활개정안즉법인이 재악하고 화도가 재기니라)

만약 이 오가해(五家解)로 정안(正眼)이 활짝 열리면 법인(法印)이 바로 우리 손 안에 있고 교화(敎化)의 길[化道]이 자기에게 있느니라.

만약 이 풀이[금강경오가해]를 말미암아서 바른 눈을 훤히 열면, 곧 법인이 (우리) 손에 있으며 교화하는 길이 몸에(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연차편집이 출어하인지수완대 이불현기명호아

그러나 이 오가해(五家解)의 편집(編集)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길래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책의) 편집(금강경오가해)이 어떤 사람의 손에서 나왔기에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인가? 【편은 차례를 정하는 것이고, 집은 모으는 것이다.】

(說誼 ; 歎不現夫編者之名也라)

(설의 ; 탄불현부편자지명야라)

저 편집자(編集者)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음을 탄식(歎息)하노라.

편집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함을 탄식한 것이다.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오희기위일불오조사지심을 영일전이변견야하노라

나는 한 부처님과 5조사(五祖師)의 마음이 한번 굴리매 문득 보게 됨을 크게 기뻐하노라.

내가 한 부처님과 5조사의 마음[해설]을 한 번 옮겨 곧 보게 함을 기뻐하노라.

(說誼 ; 一軸之內에 佛燈祖焰이 交光互映하야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니

(설의 ; 일축지내에 불등조염이 교광호영하야 가일전이변견불조지심의니

한 권(卷)의 책 안에 부처님의 법등(法燈)과 조사(祖師)의 불꽃이 서로 어울려 비추어서 가히 한번 읽으매 곧 불조(佛祖)의 마음을 다 보게 되니

한 축(軸; 권)의 책 안에 불등(佛燈)과 조사의 불꽃이 섞이며 서로 비추어 가히 한 번 옮겨 불조의 마음을 곧 보리니,

此所以爲喜也니라)

차소이위희야니라)

이것이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이것이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소차는 수유탄현지묘지나 미우상음지가총이라

슬퍼하는 바는 비록 거문고를 퉁기는 묘(妙)한 손가락은 있으나 음(音)을 감상하는 뛰어난 밝은 귀[智慧人]를 만나지 못했음이라.

탄식할 바는 비록 (거문고의) 현을 타는 미묘한 가락이 있으나, 소리를 상완할 아름다운 듣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유시로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며

이로 말미암아 아아(峨峨)[산을 연상하는 곡]를 양양(洋洋)[바다를 연상하는 곡]이라고 잘못 듣는 자(者)가 많도다.

이로부터 ‘아아’를 잘못 들어 ‘양양’을 만드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아’는 산의 높은 모양이고, ‘양양’은 물이 넓은 모양이니, 백아(伯牙)는 옛날에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이고 자기(子期)는 소리를 알던(감상할 줄 알던) 사람이니, 백아가 마음을 산에 두고 타면, 자기는 이르기를, “높구나! 선생의 뜻이여.” 하고, (백아가 마음을) 물에 두고 타면 “양양하고나! 선생의 뜻이여!” 하니, 여기서는 ‘아아’(산을 생각하고 지은 곡)를 잘못 들어 ‘양양’(바다를 생각하고 지은 곡)을 삼는다는 말이다.】

(說誼 ; 三尺古琴에 妙音이 斯在하니 雖有妙音이나 若無妙指면 終不能發이요

(설의 ; 삼척고금에 묘음이 사재하니 수유묘음이나 야무묘지면 종불능발이요

석자[三尺] 옛 거문고에 묘음(妙音)이 거기 있으니 비록 묘음(妙音)이 있으나 만약 묘(妙)한 손가락이 없으면 마침내 나타내지[能發] 못하고

석 자 (길이의) 옛날 거문고에 미묘한 소리가 여기 있으니, 비록 미묘한 소리가 있으나, 만일 미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끝끝내 (그 미묘한 소리를) 나타내지 못하리니,

縱有妙指하야 善能彈絃이나 聞而賞音者가 蓋難하니 賞音者가 難故로

종유묘지하야 선능탄현이나 문이상음자가 개난하니 상음자가 난고로

비록 묘(妙)한 손가락이 있어 거문고를 잘 타더라도 그 선율을 감상하는 자를 만나기는 더욱 어려우니 훌륭한 감상자가 없으므로

비록 미묘한 손가락이 잘 능히 현을 탐(연주함)이 있어도 들어서 소리를 즐길 이가 (있기) 어려우니, 소리를 즐길 이가 (있기) 어려운 까닭으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로다

오청아아하야 작양양자가 다의로다

곡조를 잘 못 들어서 ‘아아(峨峨)’를 ‘양양(洋洋)’이라고 들음이 많도다.

‘아아’를 잘못 들어서 ‘양양’을 지을(‘양양’이라고 할) 이가 많을 것이다.

一部靈文에 妙理斯在하니 雖有妙理나

일부영문에 묘리사재하니 수유묘리나

일부(一部)[冊] 신령스런 글에 묘(妙)한 이치가 그 속에 있으니 비록 묘리(妙理)가 있으나

일부(一部) 신령스런 글이 미묘한 이치가 여기에 있으니,

若非匠手면 孰能抽毫하야 稱實發揚이리오 雖有稱實發揚이나 目以善解者가 蓋難하니

야비장수면 숙능추호하야 칭실발양이리오 수유칭실발양이나 목이선해자가 개난하니

만약 장인(匠人)의 손이 아니면 누가 능히 붓을 빼어서 사실에 맞게 표현하리오. 그러나 비록 사실에 맞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그대로 이해하는 이가 매우 적으니

비록 묘리(妙理)가 있으나, 만일 솜씨가 좋은 손이 아니면 누가 능히 붓을 빼어 사실에 맞게 베풀어 펴리오? 비록 사실에 맞게 펴는 이가 있어도 (그 글을)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기) 어려우니,

善解者가 難故로 以淺爲深하고 以深爲淺者가 多矣니 是可歎也로다)

선해자가 난고로 이천위심하고 이심위천자가 다의니 是可歎也로다)

잘 이해하는 이가 없는 고(故)로 얕은 것으로써 깊은 것을 삼고 깊은 것으로써 얕은 것을 삼는 자가 많으니 이것을 탄식함이로다.

잘 알 사람이 (있기) 어려운 까닭으로 옅은 것으로 깊은 것을 삼으며, 깊은 것으로 옅은 것을 삼는 이가 많으니, 이것을 가히 탄식하는 것이다.

又於經疏에 以僞濫眞하야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니

우어경소에 이위남진하야 유비성외자가 파다하니

또한 경소(經疏)[註解]에서 거짓이 참된 것에 흘러 들어서 우유가 성 밖의 우유[진짜]가 아닌 것[가짜]이 많도다.

또 경소(經疏)에 거짓 것으로 참[眞]에 섞어, 우유가 성 밖의 (것이) 아닌 것이 자못 많으니,

豈非以去聖愈遠하야 歷傳多手而致然歟아

개비이거성유원하야 역전다수이치연여아

성인(聖人)이 가신지 더욱 멀어져서 많은 손을 거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성인에서 멀어짐이 더욱 멀어(오래되어) 여러 손을 지낸(거친) 까닭이 아니겠는가? 【유비성외(乳非城外)는 타락(駝酪)이 성 밖에 것은 좋은 것이고, 성 안에 것은 물 탄 것이므로 거짓말로 이르기를 우유가 성 밖에 것 아닌 것이 많다고 한 것이다.】

(說誼 ; 眞僞相雜하야 水乳를 難判하니 所以舛訛는 蓋緣傳寫之誤耳니라)

(설의 ; 진위상잡하야 수유를 난판하니 소이천와는 개연전사지오이니라)

진(眞)[참됨]과 위(僞)[그릇됨]가 서로 섞여서 물과 우유를 가릴 수 없으니, 잘못된 까닭은 대개 전하여 쓰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뿐이니라.

참과 거짓이 서로 섞이며, 물과 우유가 가림이 어려우니, 이런 까닭으로 잘못 된 것이 전하여 (글) 쓴 이의 잘못에 말미암을 따름인 것이다.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가 唯文不能設이요 空義不獨傳이라

부성언지소이전지어후지세야가 유문불능설이요 공의부독전이라

대저 성인(聖人)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글만 능히 베풀 것이 아니요 공연히 뜻만 홀로 전함도 아니로다.

성인의 말씀이 후세에 전하는 까닭은 다만 글월이 능히 펴지 못하며 한갓 뜻은 혼자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文義相資하야사 方成妙唱하야 作天下古今之龜鑒하야 開世與出世之眼目이어니와

문의상자하야사 방성묘창하야 작천하고금지구감하야 개세여출세지안목이어니와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 바야흐로 묘(妙)한 노래를 이루어서, 천하고금(天下古今)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세간과 출세간의 안목을 열어주려니와

글과 뜻이 서로 도와야 비로소 미묘한 말씀이 되어 천하 고금에 귀감이 되어 세간과 출세간에(사는 사람들의) 눈을 여는 것이다. 【귀(龜)는 점복(占卜)하여 길흉의 아는 것이고, 감(鑑)은 착하며 (착한 사람과) 상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니, 성현이 이르신 말씀을 귀감이라 하는 것이다.】

若義有誵訛하고 文有錯誤하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약의유효와하고 문유착오하면 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만약 뜻이 잘못 되어있고, 글에 착오가 있으면, 능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뜻에 어긋나게 함이 있으며 글에 그른 곳이 있으면 곧 능히 사람의 눈을 열지 못할 따름이 아니라,

亦令誤解하야 礙正知見하리니

역령오해하야 애정지견하리니

또한 잘못 알게 해서 바른 지견[正知見]을 막게 하느니라.

또 그릇 알아서 바른 지견(知見)을 막게 할 것이다.

(說誼 ; 文字는 現道之具也며 導人之方也니 須文義相資하야 而血脉(=脈)이 貫通하고

(설의 ; 문자는 현도지구야며 도인지방야니 수문의상자하야 이혈맥(=맥)이 관통하고

문자(文字)는 도(道)를 나타내는 도구이고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이라.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서 혈맥이 관통하고

글자는 도를 나타내는 그릇이며 사람을 인도하는 법이니,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도와 혈맥(血脈)이 사뭇 꿰뚫으며(관통하며)

精審詳密이 備焉하야 而脫衍倒誤가 未嘗雜於其間然後에 能使人開解하야

정심상밀이 비언하야 이탈연도오가 미상잡어기간연후에 능사인개해하야

정밀하고 자세하며 깊게 갖추어서, 빠지고 넘치고 잘못된 것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은 연후에 사람들에게 이해하게 하여

정심(精審)하며 상밀(詳密)함이 구비[備]되어 떨어지고(글자가 빠지고) (뜻이) 더 불리며 거꾸로 되며 잘못됨이 조금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아니한 연후에야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며

得爲萬世之龜鑒也니라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反爲惑人之具也니라)

득위만세지구감야니라 불이즉비유불능개인안목이라 반위혹인지구야니라)

만세(萬世)에 귀감(龜鑑)이 되게 함이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안목을 못 열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미혹(迷惑)케 하는 도구가 되느니라.

만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능히 사람의 눈을 열지 못할 따름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그릇이 될 것이다.

蓋不爲文字의 所惑하고 能體聖人之意者를 誠難得也로다

개불위문자의 소혹하고 능체성인지의자를 성난득야로다

대개 문자(文字)에 미혹(迷惑)하지 않고 능히 성인(聖人)의 뜻을 체득하는 이는 진실로 얻기 어렵도다.

(대개) 글자에 미혹함이 되지 아니하고 능히 성인의 뜻을 체득하는 이가 진실로 얻기가 어렵구나.

(說誼 ; 若非哲眼이면 不能不爲誵訛의 所惑也니라)

(설의 ; 야비철안이면 불능불위효와의 소혹야니라)

만일 철안(哲眼)[밝은 눈]이 아니면 잘못 어그러진 것에 미혹(迷惑)되도다.

만약 밝은 눈[哲眼]이 아니면 능히 효와(誵訛)에 미혹함이 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然이나 若心淸慮靜하야 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하면 則文義之舛錯者가

연이나 야심청려정하야 연문구의하며 의의심문하면 즉문의지천착자가

그러나 만약 마음을 맑히고 생각을 고요히 해서 글을 만나 뜻을 연구하며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으면 즉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이

그러나 만약 마음을 맑게 하며 사려를 고요히 하여 글로부터 뜻을 궁구하며 뜻으로부터 글을 찾으면 곧 글과 뜻의 그른 것이

不隱微毫하야 了然昭著호미 如世病脉이 不能逃於善醫之手하리니

불은미호하야 요연소저호미 여세병맥이 불능도어선의지수하리니

털끝만큼도 숨지 못하여서 확연히 밝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세상의 질병이 훌륭한 의사의 손에서 도망치지 못함과 같으니라.

적은 터럭만큼도 숨지 아니하여 환하게 밝아서 나타남이 (마치) 세상의 병맥(病脈)이 어진 의사의 손에서 도망하지 못하듯이 될 것이다.

(說誼 ; 雖非哲眼이나 若靜心慮하야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를 可得而詳也니라)

(설의 ; 수비철안이나 야정심려하야 이연지즉문의지천착자를 가득이상야니라)

비록 밝은 눈을 갖지 못하였으나 마음과 생각을 고요히 하여 연구하면 글과 뜻에 어긋나고 그릇된 곳을 자세히 밝힐 수 있으리라.

비록 밝은 눈[哲眼]은 아니나 만약 심려(心慮)를 고요히 하여 그것으로써 깊이 연구[窮究]하면 곧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을 가히 얻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予雖非善醫之儔나 幸粗識文義하야 略辨眞僞故로

여수비선의지주나 행조식문의하야 약변진위고로

내가 비록 좋은 의사의 짝은 못되나 다행히 글과 뜻을 대강 알아서 진(眞)과 위(僞)를 조금 분별하는 고(故)로

내가 비록 어진(좋은) 의사의 짝은 아니나, 다행히 글과 뜻을 조금 알아서 참과 거짓을 대략 분별하는 까닭으로

分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를 簡而出之하야 參之諸本하며

분지경지소지중지혹탈혹연혹도혹오자를 간이출지하야 참지제본하며

지금 이 경(經)의 소(疏) 안에 혹 빠졌거나 혹 넘치거나 혹 잘못되거나 혹 그르친 것들을 가려내고 다른 책들을 참고하며

지금의 경(經)의 소(疏) 가운데 혹 떨어지며(뜻에서 벗어나며) 혹 (뜻을) 더 불리며 혹 거꾸로 되며 혹 잘못됨을 분별해 내어 여러 책에 맞추며(참고하며)

質之諸師하야 以正之하노라

질지제사하야 이정지하노라

다른 스님들께 질문해서 그것을 바르게 하노라.

여러 스승께 질문하여 써 바르게 한 것이다.

然이나 他本所據外엔 未嘗一字一句도 妄自加損於其間이요

연이나 타본소거외엔 미상일자일구도 망자가손어기간이요

그러나 다른 책에 의거한 외엔 일찍이 한 자 한 구도 망령되이 스스로 그 사이에 더하거나 빼지 않았도다.

그러나 다른 책에 의지한 외에 조금도 한 자, 한 구절도 함부로 내가 그 사이에 더하거나 덜어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說誼 ; 予以不敏으로 辨眞僞定誵訛也라 然이나 此는 以有據依而然이요

(설의 ; 여이불민으로 변진위정誵와야라 연이나 차는 이유거의이연이요

내가 불민(不敏)함으로 진(眞)[참]과 위(僞)[거짓]를 가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하긴 했으나 이는 증거가 있음으로써 그런 것이요,

내가 불민(不敏)함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며 제멋대로 잘못됨[誵訛]을 바로 고쳤으나, 그러나 이는 근거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

非爲臆斷이니라)

비위억단이니라)

내 소견으로 우김이 아니로다.

마음대로 결단한 것이 아닌 것이다.

凡有所疑를 他本無所據處란 據義以決하야 附之卷尾而已로라

범유소의를 타본무소거처란 거의이결하야 부지권미이이로라

무릇 의심이 있는 곳을 다른 책에서 의거하지 못한 곳은 뜻에 의거함으로써 결정(決定)해서 책 뒤에 붙일 따름이로다.

무릇 의심하는 바가 있고 다른 책에 근거할 곳이 없는 것일랑 의리(義理)를 의지해서 정해서 책의 끝에 붙일 따름인 것이다.

(說誼 ; 若以已意로 濫之於部內則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요

(설의 ; 야이이의로 남지어부내즉혹자가 위달자지소비의요

만약 자기의 뜻으로써 책 안에 붙여두면 혹 안목 있는 자[達者]가 할 바가 아니요,

만약 내 뜻으로 책 안에 멋대로 고쳤다면 곧, 혹 달인이 잘못 여길 바가 되고,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니 後世에 或聞較正之說하고

지유궐오이불사이전지즉미유금일교정지공야니 후세에 혹문교정지설하고

빠졌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써서 전하지 아니하면 오늘[今日] 바로 잡는[較正] 공(功)이 없음이니, 후세에 혹 바로 잡았다는 말을 듣고도

빠지고 그른 데가 있는 줄을 알고서 전하지 아니하면 곧 오늘날의 교정하는 공이 있지 않을 것이니, 후세에 혹 교정(較正)의 설(說)을 듣고

槩以爲全하야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가 幾乎墜地矣리라

개이위전하야 이불가찰언즉불조지정의가 기호추지의리라

대개 온전함을 삼아서 살피지 아니하면 부처님과 조사[佛祖]의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다.

한가지로 온전하다 하여 자세히 살핌을 더하지 아니하면 곧 불조(佛祖)의 바른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故로 不獲已書之於卷尾하야 而傳之也로라)

고로 불획이서지어권미하야 이전지야로라)

그러므로 부득이해서 책 뒤에 써서 그것을 전하노라.

이러므로 마지못하여 책의 끝에 써서(써 붙여) 전하게 한다.

若見盤根錯節之處하고 而抱拙拱手하야 不游刃於其間이면

야견반근착절지처하고 이포졸공수하야 불유인어기간이면

만일 뿌리가 얼키고 설키며 마디가 뒤섞인 것을 보고도 팔짱만 끼고 그 사이에 칼날을 놀리지 못하면

만약 (얽히고)서린 뿌리와 섞인 마디의 것을(글을) 보고 못난 생각을 가지고 손 꽂고(팔장 끼고) 그 사이에 칼을 가게 하지(대지) 아니하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리오 是以로 不揆不才하고 解其結通其碍하며

즉개위통인달사지소가호리오 시이로 불규부재하고 해기결통기애하며

어찌 통인(通人)과 달사(達士)의 할 바가 되리요. 이로써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맺힌 데를 풀고 막힌 것을 통하게 하며

어찌 통인(通人) 달사의 옳다 함이 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못났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맺힌 곳을 글르며 막힌 데를 통하게 하며

正未正齊未齊하야 永貽來學하노니

정미정제미제하야 영이내학하노니

바르지 못함을 바르게 하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히 해서 길이 미래의 학인(學人)에게 전하나니,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며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하게 하여 길이 뒤에 오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주니,

誰知王舍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가

수지왕사일륜월이 만고광명장불멸가

누가 왕사성(王舍城)의 둥근 달이 만고의 광명이 되어

길이 스러지지 않음을 아는가.

누가 왕사성의 한 둥근 달이 만고 광명이

길이 멸하지 아니함을 알 것인가?

呵呵他日에 具眼者가 見之면 當發大咲矣리라

가가타일에 구안자가 견지면 당발대소의리라

하하. 다른 날에 안목을 갖춘 자가

이것을 보면 마땅히 크게 웃으리라.

하하, 다른 날에 눈(안목)을 갖춘 이가 보면

마땅히 큰 웃음을 웃으리라.

(說誼 ; 解之舛訛가 如盤根錯節하야 結礙不通하니 若一向畏人非之하야

(설의 ; 해지천와가 여반근착절하야 결애불통하니 야일향외인비지하야

이 해석의 잘못된 것이 마치 뿌리가 얼킨 것 같아서 맺히고 막혀 불통(不通)하니 만약 한결같이 남들이 그르다 할까 두려워해서

이 풀이의 잘못된 것이 서린 뿌리와 섞인(얽힌) 매듭과 같아서 얽히고 막히어 통하지 아니하니, 만약 한갓 사람이 그릇 여김을 저어하여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에 爲如何哉아

지오이불결언즉기어보불은지의에 위여하재아

잘못됨을 알고도 해결치 않으면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함이 되겠는가.

그른 줄을 알고 해결하지 아니하면 곧 그 불은(佛恩)을 갚는 뜻에는 어떠하겠는가?

後世에 必有承訛踵誤하야 妄生穿鑿하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라

후세에 필유승와종오하야 망생천착하야 이구기설지필통자의리라

후세에 반드시 잘못된 것을 이어 받고 그르친 것을 밟아서 망령되이 천착(穿鑿 : 思量)을 내어 그 설(說)로써 통(通)하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후세에 반드시 거짓 일을 이으며 그른 곳을 밟아(이어 받아) 천착함을 허망하게(망녕되게) 내어 그 말이 모름지기 통함을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夫如是則其不決之蔽가 至於使佛祖之言으로 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부여시즉기불결지폐가 지어사불조지언으로 종미면어박잡지건야리니

대저 이 같은 즉, 해결하지 못한 폐단이 부처님과 조사[佛祖]의 말씀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뒤섞인 허물을 면치 못하리니

이와 같으면 그 결정하지 아니한 폐단이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으로 마침내 박잡(駁雜)한 허물을 면치 못함에 이를 것이니,

此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니라 由是로 終不固讓於決焉하야 寫以傳之也로라

차는 통인달사지소불가야니라 유시로 종불고양어결언하야 사이전지야로라

이는 通人達士의 할 바가 아니로다. 이로 말미암아서 해결하는 데 굳이 사양하지 않고 써서 전(傳)하노라.

이것이 통인 달사가 잘못 여기는 바이다. 이로부터(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결정함에 구태여 사양치 아니하고 써서 전하니,

夫然後에 一經之義天이 朗曜하야 當年之慧月이 將大明於天下矣니

부연후에 일경지의천이 낭요하야 당년지혜월이 장대명어천하의니

그런 연후에라야 한 경(經)의 뜻이 하늘에 밝게 빛나서 당년의 지혜(智慧)의 달이 장차 천하에 크게 밝으리니

그런 연후에야 한 경전의 이치가 밝아지며 그 해(年)의 지혜의 달이 천하에 장차 크게 밝을 것이니,

孰知夫如是之理乎아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로라

숙지부여시지리호아 금오자지기연이대경우회야로라

누가 이 같은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서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노라.

누가 이와 같은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그러함을 알고 크게 뜻에(마음에) 기뻐한다.

然이나 此言此說이 如蚊虻之鼓大虛也니 達者가 當以是로 爲笑具也리라)

연이나 차언차설이 여문맹지고대허야니 달자가 당이시로 위소구야리라)

그러나 이 말들은 마치 모기가 허공(虛空)에서 요동침과 같으니 잘자(達者)가 마땅히 이것으로써 웃음거리를 삼으리라.

그러나 이 말씀과 이 설명이 모기와 등에가 큰 허공을 치는 것과 같으니, 달자는 마땅히 이로써 웃을 것을(웃음거리를) 삼을 것이다. 【박(駁은 얼룩얼룩한 것이고, 잡(雜)은 섞인 것이고, 문(蚊)은 모기이고, 망(虻)은 등에이다. 의천(義天)은 이치를 이르는 것이다.】

永樂乙未六月 日에 涵虛堂衲守伊는 盥手焚香謹序하노라

영낙을미유월 일에 함허당납수이는 관수분향근서하노라

유월에(1415년) 함허당(涵虛堂) 납자(衲子) 수이(守伊)는 손씻고 향 사르고 삼가 서문(序文)을 쓰노라.

영락 을미(1415년) 유월 일 함허당 납자 수이는 손 씻고 향 사르고 삼가 서문을 씀.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序說

有一物於此하니

(說誼 ; 一物이 何物고 ○ 秖這一著子는 希夷焉하야 絶情謂하며 髣髴焉하야 看似有하며 蠁曶然하야 難可追하며 恍惚然하야 難可測이니 非迷非悟라 不可以凡聖으로 稱이며 無我無人이라 不可以自他로 名일새 故로 但云一物이니라 六祖가 云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로대 上柱天下柱地하고 明如日黑似潻하야 常在動用中호대 動用中에 收不得者가 是니라 然雖如是나 一物之言도 亦强稱之而已라 故南嶽讓和尙이 道하사대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하시니 有一物於此者는 不離當處常湛然故로 云爾니라)

絶名相호대

(說誼 ; 蕭焉空寂하며 湛爾冲虛하야 無名可名이요 無相可都故也니라)

貫古今하고

(說誼 ;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多經海岳相遷하니 幾見風雲變態오)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說誼 ;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鄰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니라)

內含衆妙하고

(說誼 ; 體量이 恢恢하야 恒沙性德과 無量妙用이 元自具足이니라)

外應群機하며

(說誼 ;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洪鍾이 在虡에 大扣大鳴하고 小扣小鳴이니라)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說誼 ; 天以之覆하고 地以之載하고 人以之處乎其中하며 以至日月星辰과 草木昆虫히 凡有貌像形色者가 莫不以之爲宗하야 而得成立이니라)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說誼 ; 蕩蕩云云은 廣大勝第一者가 是요 巍巍云云은 最尊極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니라)

不曰神乎아 昭昭於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說誼 ; 決定是無로대 性自神解하고 決定是有로대 尋之無蹤하니 此所以爲神也니라)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說誼 ;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요 有形之最後者도 亦天地也라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로대 而天地가 以此爲始하니 此는 物之所以始者를 不可得而窮也라 所以始者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도 亦不可得而窮也니 此所以爲玄也니라)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說誼 ; 物體深玄에 虛澈靈通하야 有不定有요 無不定無니 言語道가 斷하고 心行處가 滅일새 故로 云爾니라)

我迦文이 得這一著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槁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說誼 ; 此物이 非聖非凡이로대 而凡而聖하며 非淨非染이로대 而染而淨이라 所以로 道호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하야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라하니 比之空日컨대 空豈長晴이며 亦豈常雨며 日豈長明이며 亦豈常暗이리오 一念迷也에 雲起長空하야 上明下暗하고 一念悟也에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하니 染淨所以興也며 聖凡所以作也니라 聖凡이 旣作則感應이 生焉하야 凡在迷而渴仰風化하고 聖在悟而爲物興悲하나니 所以로 我迦文이 於寂滅場中에 初成正覺하사 作獅子吼하사대 奇哉奇哉라 普觀一切衆生호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但以妄想執著으로 而不證得이라하시고 於是에 運無緣慈하시며 說無言言하사 廣演敎海하야 徧注衆生心地하사 使之道芽로 榮茂하고 心花로 發明케하시니 大地同春에 萬物이 咸熙로다)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說誼 ; 般若는 一物之强稱이요 經者는 現物之具也라 此乃金口親宣이요 不是餘人之所說이니 法門淵源이 不同??之敎乘이니라)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說誼 ; 我人稠林이 蔚於心地라가 金剛焰下에 掃地無蹤이라 法與非法此二惑霧가 掩蔽性空일새 故曰重昏이니 慧日이 一照에 重昏이 頓破하고 三空이 顯現이니라)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說誼 ; 法非常而執爲有하고 性非斷而執爲空하나니 執爲空而不知空之不空則是落斷見坑也요 執爲有而不知有之非有則是落常見坑也니라 實際者는 空有兩忘하고 一味亦亡之處也니 佛이 以三空으로 開示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하고 頓超空有之外하야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也니라)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著이로다

(說誼 ; 金剛妙慧가 堅不爲物挫하고 利能斷衆生冤結이니 般若雄詮은 金剛妙慧之所現發이라 故로 利能破衆生疑網하고 堅不爲外魔所壞니라)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說誼 ; 佛之與法이 皆從此經流出일새 故로 云爾니라)

若大鑒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傳與鏡此五大士者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說誼 ; 五大士가 皆因此經하사 眼目夫人天이라 故로 曰人天之所尊이요 無法不了라 故로 云法海之所歸니라)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며 聾者로 得聞하고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케하시고

(說誼 ; 通方正眼者는 明眞了俗하고 達乎中道하야 無所不通之正眼也라 密印者는 衆生所迷之眞理요 佛祖相傳之法印也라 五大士가 具如是正眼하며 傳如是密印하사 開大口說大話하시니 威光이 動地하야 照映今昔이라 遂使見聞으로 皆化하야 知非遷善케하시니 極於宗說兼通하며 解行相應之大化者가 皆於此經에 得之矣니라)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說誼 ; 旣以斯經으로 現益當世하시고 且造斯解하야 流芳萬古삿다)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說誼 ; 玉無瑕而彫文에 反喪良玉溫潤之德이어니와 斯解則反是하야 致令經語로 益精하며 經義로 益明하야 遂使目之者로 披雲都日하고 耳之者로 豁然心開로다)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說誼 ; 古人이 道하사대 三乘十二分敎에 體理得妙하면 何處에 更有祖師西來意리오하시니 則別傳之旨도 亦不外乎斯經이로대 尙爲言敎의 所攝하야 隱而不現이어늘 今諸祖가 稱實發揚하시니 非獨敎義全彰이라 別傳之旨도 亦乃昭然이로다 有云호대 單傳直指之旨가 豈斯敎의 所攝乎아하니 看於黃梅曹溪에 足可見矣니라)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都하니 幸莫大焉이라

(說誼 ; 慶遇斯解也라)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說誼 ; 儻因斯解하야 豁開正眼則法印이 在握하고 化道가 在己니라)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완대 而不現其名乎아

(說誼 ; 歎不現夫編者之名也라)

吾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說誼 ; 一軸之內에 佛燈祖焰이 交光互映하야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니 此所以爲喜也니라)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說誼 ; 三尺古琴에 妙音이 斯在하니 雖有妙音이나 若無妙指면 終不能發이요 縱有妙指하야 善能彈絃이나 聞而賞音者가 蓋難하니 賞音者가 難故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로다 一部靈文에 妙理斯在하니 雖有妙理나 若非匠手면 孰能抽毫하야 稱實發揚이리오 雖有稱實發揚이나 目以善解者가 蓋難하니 善解者가 難故로 以淺爲深하고 以深爲淺者가 多矣니 是可歎也로다)

又於經疏에 以僞濫眞하야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니 豈非以去聖愈遠하야 歷傳多手而致然歟아

(說誼 ; 眞僞相雜하야 水乳를 難判하니 所以舛訛는 蓋緣傳寫之誤耳니라)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가 唯文不能設이요 空義不獨傳이라 文義相資하야사 方成妙唱하야 作天下古今之龜鑒하야 開世與出世之眼目이어니와 若義有誵訛하고 文有錯誤하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亦令誤解하야 礙正知見하리니

(說誼 ; 文字는 現道之具也며 導人之方也니 須文義相資하야 而血脉(=脈)이 貫通하고 精審詳密이 備焉하야 而脫衍倒誤가 未嘗雜於其間然後에 能使人開解하야 得爲萬世之龜鑒也니라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反爲惑人之具也니라)

蓋不爲文字의 所惑하야 能體聖人之意者를 誠難得也로다

(說誼 ; 若非哲眼이면 不能不爲誵訛의 所惑也니라)

然이나 若心淸慮靜하야 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하면 則文義之舛錯者가 不隱微毫하야 了然昭著호미 如世病脉이 不能逃於善醫之手하리니

(說誼 ; 雖非哲眼이나 若靜心慮하야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를 可得而詳也니라)

予雖非善醫之儔나 幸粗識文義하야 略辨眞僞故로 分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를 簡而出之하야 參之諸本하며 質之諸師하야 以正之하노라 然이나 他本所據外엔 未嘗一字一句도 妄自加損於其間이요

(說誼 ; 予以不敏으로 辨眞僞定誵訛也라 然이나 此는 以有據依而然이요 非爲臆斷이니라)

凡有所疑를 他本無所據處란 據義以決하야 附之卷尾而已로라

(說誼 ; 若以已意로 濫之於部內則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요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니 後世에 或聞較正之說하고 槩以爲全하야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가 幾乎墜地矣리라 故로 不獲已書之於卷尾하야 而傳之也로라)

若見盤根錯節之處하고 而抱拙拱手하야 不游刃於其間이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리오 是以로 不揆不才하고 解其結通其碍하며 正未正齊未齊하야 永貽來學하노니 誰知王舍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가 呵呵他日에 具眼者가 見之면 當發大咲矣리라

(說誼 ; 解之舛訛가 如盤根錯節하야 結礙不通하니 若一向畏人非之하야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에 爲如何哉아 後世에 必有承訛踵誤하야 妄生穿鑿하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라 夫如是則其不決之蔽가 至於使佛祖之言으로 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此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니라 由是로 終不固讓於決焉하야 寫以傳之也로라 夫然後에 一經之義天이 朗曜하야 當年之慧月이 將大明於天下矣니 孰知夫如是之理乎아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로라 然이나 此言此說이 如蚊虻之鼓大虛也니 達者가 當以是로 爲笑具也리라)

永樂乙未六月 日에 涵虛堂衲守伊는 盥手焚香謹序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