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선(禪)의 세계와 우리 선시(禪詩)

수선님 2019. 11. 3. 11:42

선(禪)의 세계와 선시(禪詩)

 

 

종교란 제도와 형식을 벗어나는 것이며, 형식이나 규율까지 거부하는 것이 선(禪)이다.

서산스님이 선(禪)을 '말 없음에서 말없음의 세계로 가는 모습'이라고 하였듯이

선(禪)이란 말 없는 데서 말없는 세계로 나가는 것이요,

교(敎)란 말 있는 데서 말 없는 세계로 이르는 것이다.

 

 

초봄에서 늦가을까지가 유언(有言)의 세계라면 겨울은 무언(無言)의 세계이다.

법안(法眼: 885~958) 선사가 방장이 되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는 데 제비들의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제비들이 실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하면서 법상을 내려갔다 한다.

 

 

선(禪)을 통한 깨달음을 함축해서 표현하여 놓은 것이 선시(禪詩)이다.

 

 

석호산전투(石虎山前鬪)요

노화수저면(蘆花水底眠)이라.

 

 

돌호랑이는 산 앞에서 싸우는데

갈대꽃은 물 아래서 잠들어 있네.

 

 

'신원청규'에 나오는 시로 선의 직관과 에스프리가 뛰어난 선시(禪詩)이다.

 

 

정청어독월(靜聽魚讀月)이요

소대조담천(笑對鳥談天)이라.

 

 

고요히 앉아있으니 물밑에서 물밑에서 고기가 달 읽는 소리를 듣고

새들은 마주보고 웃으면서 하늘을 이야기 하고 있네.

 

 

'해인사 퇴설당의 주련에 있는 시'인데 깨치면

이렇게 자신의 선의 직관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시나 게송에서 '돌호랑이, 철마(鐵馬), 목인(木人), 석녀(石女)' 등은

자성을 상징한다.

 

 

'석호암전포아면(石虎巖前抱兒眠)하고

니우해저함월주(泥牛海底含月走)라.

 

 

돌호랑이가 바위 앞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잠들어 있고,

진흙소가 바다 밑에서 달을 물고 달아나네.'

 

 

<선요(禪要)>에 나오는 뛰어난 선시중의 하나이다.

 

 

석녀홀생아(石女忽生兒)요

목인암점두(木人暗点頭)라

곤륜기철마(崑崙騎鐵馬)하니

순야착금편(舜若着金鞭)이라.

 

 

석녀가 홀연히 아이를 낳았는데,

목인이 가만히 점두하네.

곤륜산이 철마를 탔는데,

허공이 금채찍질을 하고 있네.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 의 선시.

 

 

애애종문대악적(哀哀宗門大惡賊)이여

천상천하능기인(天上天下能幾人)이요

업연기진살수거(業緣己盡撒手去)하니

동가작마서사우(東家作馬西舍牛)던가.

 

 

슬프다. 우리 종문의 큰 도둑놈이여,

천상천하에 너 같은 놈 얼마나 되나,

이 생애 인연을 마치고 손 뿌리치고 가니,

동쪽에 가서 말이 되었는가, 서쪽에 가서 소가 되었는가.

 

 

성철스님에 대한 '향곡스님의 애도시'.

 

 

외외낙락자(巍巍落落子)여

간설산위신(澗舌山爲身)이라

누설비로게(漏洩毘盧偈)요

유통시석인(流通是石人)이라.

 

 

빼어나고 빼어난 이여,

시냇물은 그대로 법음이 되고 산은 그대로 법신이 되었네,

흐르는 물이 부처님이 전한 밀인(密印)을 누설하였고,

이 이야기를 석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네.

 

 

서산스님의 시.

 

 

'화엄경을 펼쳐놓고 창문을 여니,

새들이 이 나무 저 나무 옮기면서 다 읽었다고 조잘대네.'

 

 

백담사 회주 무산 오현스님.

 

 

풍송수성래침반(風送水聲來枕畔)이요

월이산영도상변(月移山影到狀邊)이라.

 

 

바람은 물소리를 베개머리로 실어 나르고,

달은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주네.

 

 

벽암록에 수록된 시.

 

 

설만공정낙엽홍(雪滿空廷落葉紅)이라.

빈 뜰에 눈은 가득하고 거기에 붉은 낙엽이 뚝뚝 지네.

 

 

청매(靑梅) 선사가 혜가(慧可)의 단비를 선시로 표현함.

 

 

결시석녀몽(結時石女夢)이요

해시목인가(解時木人歌)라

몽가도방하(夢歌都放下)하니

망월명여칠(望月明如漆)이라.

 

 

결재 때는 석녀의 꿈이었는데,

해제 때는 나무 사람이 노래하네.

꿈과 노래를 모두 놓아버리니,

달 밝기가 검은 옻칠함과 같네.'

 

 

만공스님의 시 '해제'

 

 

선이라는 것이 집착을 덜어내는 일이다.

생사의 진통이 없이 어찌 푸른 눈을 열수 있겠는가.

가부좌를 틀고 죽는 곳까지 자신을 몰고 가 보았는가.

그렇지 않고 어떻게 조사 스님들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번뇌의 불꽃 속에서 달구어진 지혜가 아니면 어떻게 빛갈과 형체와 모양과

형상이 없는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비워야 한다. 비우지 않으면

텅 빈 근원의 세계, 공적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에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생사(生死)를 삶아라.

살과 뼈를 삶고 삶아서 다 없어지고,

솥이 녹아 없어지고, 없어진 생각마저 없어질 때

녹지백우(露地白牛) 한 마리를 잡아서 대중공양을 시켜주어라.

 

 

 

 

 

 

 

 

 

아놀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4855028/1596833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