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여래장(如來藏)

수선님 2019. 12. 29. 12:38

 

<여래장(如來藏, 산스크리트어 tath?gata-garbha)이란>


여래장(如來藏)이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gatagarbha)를 의역한 것으로, ‘여래’와 ‘장’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타타가타(Tath?gata), 즉 여래란 말은 ‘이렇게 오신 이’, ‘깨달음을 이루신 이’, 곧 부처라는 뜻이고, 가르바(garbha)는 장(藏), 자궁. ‘모태와 태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래장은 ‘그 태내에 부처를 잉태하고 있는 것과 성장해서 부처가 될 태아’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달리 말하면, 여래장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과 동일한 개념이다.

‘불성(buddha-dhatu)’이란 불(佛)의 본질 혹은 불의 본성과 같은 말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佛)과 같은 본성이 있으며, 이것은 중생이 장차 성불할 수 있다는 의미로 곧 불(佛)의 인(因), 또는 불(佛)이 되는 인(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불(佛)의 인(因)을 중생이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은 인도에서 발생된 사상이고, 불성사상(佛性思想)은 중국에서 발생한 사상이다. 여래장사상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불성사상은 이미 부처가 될 성품을 타고 났다고 하는 말이다. 불성사상에 따르면 이미 우리들은 부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품을 보기만 하면 성불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중국인들의 현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여래장사상은 단지 가능성만 있어서 성불하기까지 무량한 세월이 걸리는 것으로 보지만, 이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 왔을 때는 현실을 중요시하는 중국인들이 유교문화의 ‘성품(性)’을 ‘부처(佛)’와 접목해 ‘불성(佛性)’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부처님이 부처가 되기 위해 무량한 세월 동안 보살로 수행한 것처럼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生)에서 성품만 보게 되면 성불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이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만을 지칭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다양해졌다. 그리하여 <여래장경(如來藏經)>에서 최초로 ‘일체중생여래장(一切衆生如來藏)’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 <불성론(佛性論)>에서 이 교설을 이어받아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언명해 이러한 사상을 명백히 표명했다. 이에 따라 불성론도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성립된 여러 종파에서 불성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말은 ‘여래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생이 여래를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여래가 되지 못한 ‘여래의 태아’에 불과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佛)의 인(因)’ 곧 불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생에게도 여래장은 번뇌에 덮여있지만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고, 본래부터 절대 청정해 영원히 변함없는 여래법신(如來法身), 즉 깨달음의 본성이다.

헌데 ‘여래장’이라는 말 속에는 여래와 동등한 본질인 불성이 감추어져 있으나 함부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즉, 여래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아직 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중생들은 무지와 번뇌에 덮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장이란 말에는 중생의 현상, 즉 무량한 번뇌에 뒤덮여있는 여래장이라는 의미도 함축돼 있다.

그리고 여래장이란 무량한 번뇌에 뒤덮인 상태로 번뇌 안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자 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의미한다. 중생의 본성은 무지와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에 그 무지와 번뇌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자성청정심 - 곧 불성이 여래장이다. 이와 같이 여래장은 구체적으로 중생의 자성청정심을 가리키고, 그것이 중생에게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여래장사상은 <반야경>의 공관(空觀)에 입각하면서도 여래의 지혜는 보편성을 지니고 작용한다고 설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주장이나, 삼계(三界)의 중생이 모두 부처의 자식이라고 보는 <법화경(法華經)>의 일승(一乘)사상 등을 계승해 <여래장경(如來藏經)>에 최초로 ‘일체 중생은 여래를 태에 간직하고 있다[일체중생여래장(一切衆生如來藏)]’라고 선언한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교설을 이어 받은 <열반경>이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표명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래장사상을 결집시킨 논장으로는 <보성론(寶性論)>이 있다.

※보성론(寶性論)---인도 대승불교의 여래장(如來藏)사상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 논서(論書). 정식명칭은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이다. 북위(北魏)의 늑나마제(勒那摩提)가 한역했다.

인간은 누구나 여래장을 품고 있다는 말은 부처님을 잉태할 수 있는 태아를 가지고 있어서,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들이 짓는 업(業)의 측면에서 보면, 여래장이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소화되지 않은 업장(業障)의 저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래장이란 한 면으로는 우주적 차원의 현현(顯現)인가 하면, 또 한 면으로는 개인적인 업(業)의 결과인 장식(藏識-아뢰야식)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생의 마음을 오염된 측면에서 아뢰야식이라 부르고, 깨달음의 가능성에서 여래장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그러면서 여래장은 같은 중생의 마음이라는 점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藏識)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다.

여래장사상은 부파불교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을 이어 받은 것으로, 대승불교의 초기사상인 반야공관설(般若空觀說)을 사상적 배경으로 해서 ‘공이 즉 자성청정’이라는 학설을 새롭게 전개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적인 탐구로 떨어지기 쉬운 반야공관의 오류를 보완하고 자비(慈悲)의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기 위해 대두된 여래장사상은,

① 초기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이어받았으며,

②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반야공관설을 계승했고,

③ 반야의 공성(空性)을 일체유정(一切有情)에게 체득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성립됐다.

그리고 <보성론(寶性論)>에서는 여래장을 3가지 의미로 이해한다.

① 여래의 태아인 중생 - 이것은 다시 모든 중생이 여래법신으로 감싸여 있다는 의미로 설명된다.

② 여래와 같은 본성[진여(眞如)]을 지닌 중생 - 진여가 무차별성인 점에서 보면 중생은 자신 안에 여래와 동일한 진여를 태아로서 지니고 있다.

③ 여래의 원인[불성]을 지닌 중생 - 중생은 여래가 될 종자(種子)를 태아로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번역된 <불성론(佛性論)>은 이것을 계승해 다음의 3가지로 표현한다.

① 소섭장(所攝藏) - 법신(法身)은 우주에 상당하고 중생은 그 일부이므로 중생은 법신에 포함된다.

② 은복장(隱覆藏) - 진여법신(眞如法身)은 중생 속에 감추어져 있다.

③ 능섭장(能攝藏) - 중생은 여래의 덕성을 본성으로서 갖추고 있다.

<여래장사상의 발전추세>

이상의 여래장사상을 재정리하면서 여래장사상의 발전추세를 살펴보자. 대승불교의 사상은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학(唯識學)으로 대별되는데,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선 유식설보다 먼저 성립해 별도로 발전하다가 합류해 두 사상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그리하여 중관파의 반야공관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형성하고, 유식학파에서는 아뢰야식의 발전적 측면을 형성했다. 중관불교는 유든 무든 그 모든 것을 파사(破邪)해 양극단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논파했고, 「무자성(無自性)-공(空)」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유식학은 「자성(自性)-공(空)」을 주장하고, 아뢰야식에 공으로서 깨끗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믿어 공하지만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불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진공묘유라 했다.

원래 유식설(唯識說)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오염된 망식(妄識)이라 했다. 따라서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했다. 이숙식이란 선(善), 악(惡), 무기(無記) 등 모든 종자를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들의 업(業)의 결과가 아뢰야식이라고 해서 이숙식(異熟識)이라 한 것이다. 즉, 아뢰야식은 과거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일어난 식이란 말이니, 이것은 아뢰야식이 전생의 업(業)의 과보라는 말이고, 그러하므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는 것이다. 헌데 윤회의 주체라면 오염돼 있으므로 아뢰야식은 깨달음에 해당하는 정식(淨識)이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원래 유식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번뇌로 오염된 마음의 밑바탕에 오염되지 않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는 여래장사상의 입장에서 여래장이란, 한 면으로는 우주적 차원의 현현(顯現)인가 하면, 또 한 면으로는 개인적인 업(業)의 결과인 장식(藏識-아뢰야식)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고 설했다. 즉, 여래장사상은 정식(淨識)과 망식(妄識) 합일시켜 모두 아뢰야식에 포함된다고 해서 합식(合識)이라고 설했다. 이는 망식의 측면과 정식의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중생의 마음을 오염된 측면에서 아뢰야식이라 부르고, 깨달음의 가능성에서 여래장이라 했다.

결국 유식학은 이러한 여래장사상의 양면성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에 공으로서 깨끗한 부분에 자성청정심이 존재한다고 해서, 공하지만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불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진공묘유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에서는 여래장사상의 입장에서 정식(淨識)과 망식(妄識) 합 일시켜서 합식(合識)의 아뢰야식을 설함으로써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양, 화합시켜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眞俗一如)]’,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染淨不二)]’는 사상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러한 여래장사상이 유식학파에 수용되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져 불성사상(佛性思想)으로 발전했다. 그러니 유식불교에서는 「자성(自性)-공(空)」사상으로 자성과 불성은 있다는 입장을 취해서 중관학파의 무자성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3, 4세기경, 여래장(如來藏)사상을 강조하는 경(經)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승만경(勝?經)>이다. 이런 경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여래장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래장사상에서는, 깨치지 못한 상태의 범부 중생의 마음은 비록 현실적으로는 미혹(迷惑)과 더러움에 뒤덮여 있지만 그 본성은 청정하고[(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수행에 의해 그 청정한 본성을 전부 나타낼 수 있으며, 그 청정한 본성을 전부 나타내게 된 상태가 여래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초기 여래장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에는 <승만경> 외에 <여래장경> ? <부증불감경(不增不?經)> 등이 있다. 이들을 여래장사상 제1기 경전이라고 한다.

그 뒤 4, 5세기경에 <보성론(寶性論)>이 저술돼 그 사상적 체계가 발전 정립됨으로써 대승불교의 한 학파의 성격을 띠고 조직화됐다. <승만경> 이전의 여래장사상은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보성론>에 이르러서도 중생은 왜 번뇌에 물들게 되는가에 관한 해석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아직 본성의 청정함과 마음의 정화에만 중점을 두고 추구하는 체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시기의 경론으로는 <보성론> 외에 <대승장엄경론(大乘莊儼經論)> ? <불성론(佛性論)> 등이 있으며, 이를 여래장사상 제2기 경전이라고 한다.

그 뒤 여래장사상은 아뢰야식(Alaya識)의 체계에 의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하는 유식설과 교섭하게 됨에 따라 해결이 어려운 인간의 현실적 마음의 문제로 폭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속하는 경론에는 <능가경(楞伽經)>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 있다. 이것을 여래장사상 제3기 경전이라고 하며, 여래장사상은 <대승기신론>에서 완성됐다.

그리고 7세기 중엽 이후는 밀교(密敎)와의 결합으로 여래장사상이 밀교화 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여래장계 경론을 그 성립연대 및 사상의 흐름을 통해 3기로 구분하는 것은 여래장사상 연구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한편 여래장사상이 중국에 들어와서는〈열반경>과 함께 불성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불성의 입장에서, 여래장은 일체중생의 타고난 불성(佛性), 곧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 마음속에 있음을 말했다. 따라서 중생들의 어리석음에 의해 우리의 불성을 가리고 있는 업식(業識)이 제거되면 곧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고 말했다. 즉, 중생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마음은 순수한 마음 그대로가 아니라 아뢰야식은 이미 전생의 업에 의해 오염된 것이다. 그 오염된 것을 걷어내면 불성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씨앗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무지, 소위 탐 ? 진 ? 치(貪瞋癡) 삼독심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미혹의 생각들을 버리기만 하면, 우리 속에 생래적으로 내재한 순진무구의 본성,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진여(眞如) 그 자체’가 저절로 빛을 발하고, 이로써 우리는 자유로워지게 된다. 즉, 해탈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데서 발단된 여래장사상은 반야의 지혜보다는 자비(慈悲)가 보다 깊이 있게 전개됐으며,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도 성불(成佛)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실천으로서 자비의 측면을 새롭게 부각시킨 여래장사상은 중생의 신행(信行)을 새로운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의 원효(元曉) 대사가 여래장사상이 가장 잘 정리되고 집약돼 있는 <대승기신론>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리하여 원효는 <대승기신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를 가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를 저술했으며, 여기에서 그의 윤리관과 선관(禪觀)의 기초를 찾았다. 또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해탈의 근거가 여래장에 있음을 밝힌 데서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 그 수행이 ‘일심본각여래장(一心本覺如來藏)’에로 귀일한다는 내용의 여래장사상을 천명한 논서이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을 근거로 해 여래장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논서로서, <금강삼매경> 자체가 원효의 저술이 아닌가 하는 견해까지도 있다. 그러다가 <능가경> ? <밀엄경(密嚴經)> ? <대승기신론> 등에서 아뢰야식과 여래장과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여래장사상에 대한 비판>

AD 5~7세기 당시 인도에서는 불교가 점차 쇠태해가고 있었다. 이에 대승불교는 그 지지기반을 확충할 필요성을 느끼게 돼, 힌두교사상을 대폭 채용함으로써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버린 것이 바로 여래장사상이란 주장이 나왔다. 이 무렵에 발전한 유식사상은 나름대로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발전시킨, 불교 최고의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은 부처님 사상에 배치되는 힌두교의 유아론(有我論)을 받아들인 여래장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이율배반적인 그런 현상이 동시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흔히 불자들끼리의 인사말에 “성불합시다”라는 격려의 말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를 거부하는 남방불교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아주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성불은 오직 부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권에서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래장사상 때문이다.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동일한 개념이다. 모든 중생은 여래의 씨앗, 즉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여래장사상의 핵심이고 보리심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이루어지는 수행, 즉 참선이든 염불이든 주력이든 간경이든 모든 수행은 여래장사상의 기초위에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수행을 하면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헌데 불성(佛性)은 불교사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주로 대승불교에서 쓰고, 선종의 논거가 되는 것이고, 특히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 강조되고 있다. 선종에서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을 자성(自性)이라 하기도 하고, 우리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성(眞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엄격히 얘기해서 불성은 불교사상이 아니라 비불교사상이고, 반불교사상이라는 것이다.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 ? 자아(自我)와 동일한 개념이고, 자아는 브라만의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불성사상의 논거가 되는 <열반경>에서도 “불성은 자아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불성은 아트만과 그 속성이 같다. 이래서 불교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소위 비판불교는 여래장의 전통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브라만의 아트만(atman)사상과 유사하다는 측면만 부각해 여래장은 불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아사상(無我思想)을 버린 것이 바로 여래장사상이라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스스로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에 투항해, 힌두교의 일파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래장사상은 나름대로 반격을 하고 있다. 여래장은 현실적으로 번뇌에 쌓여 있는 중생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부처와 동질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자비의 측면을 계승하는 사상체계이다. 그리고 이런 사상체계는 불교의 전통 가운데 보편적인 저류(低流)를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여래장이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도리를 모르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단정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한계만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고정된 이론이 아니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방편적으로 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설방법이 바로 붓다 당시부터 행해졌던 대기설법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장사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논의는 그 당시 인도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됐었고,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사이, 그리고 동아시아 북전불교 안에서조차도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이 중생심과 불성이 양립하는 것이라서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여래장 교설의 본래 의도가 중생들에게 믿음과 자비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전개된 일종의 종교적 부흥운동이라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합리한 교설이 자비정신으로 다 묻힌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여래장이나 불성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 전체의 난제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전남 장성의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百羊寺)에서 무차법회(無遮法會)가 열려 “불성(佛性)의 실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는 불성실체론을 집중적으로 다뤄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2012년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와 중국 런민(人民)대학 불교와 종교학이론연구소, 일본 도요(東洋)대학 동양학연구소 등이 공동주최하는 “동아시아에서 불성. 여래장사상의 수용과 변용” 세미나가 열려 역시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사상에 대한 토론이 행해졌다. 이와 같이 불성이나 여래장사상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아직 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299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