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 중국 일본

수선님 2019. 11. 3. 12:23

인도, 중국, 일본

유럽은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배울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연배에 속한 사람들은 대대적인 시누아즈리(Chinoiserie)1)의 끝자락을 보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18세기 중반 아름다운 운하 위의 예쁜 도로변에 세워진 로코코-중국풍의 찻집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사람들은 날씨가 너무 덥거나 습하지 않은 오후가 되면 그런 찻집을 신성한 장소처럼 드나들었다고 한다.

찻집에서 만난 사람들은 치렁치렁한 중국 비단옷을 입고 값비싼 중국차를 엄숙하게 음미했다. 차를 마실 때는 반드시 아름다운 중국산 받침접시를 사용했다. 차를 받침접시에 따라 마시지 않고 직접 찻잔으로 마시면 중국의 참된 다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의 예절을 알지 못하면 교양이 없다고 무시를 받았던 시대였다.

우리 세대가 태어날 무렵에는 병풍과 벽화 이외에 중국풍이 유행한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찻집은 이미 어구(漁具)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의 문학에는 바로 그런 중국식 탑에서 낭만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고 당시 화가들도 그런 만남을 즐겨 소재로 삼았다. 그 덕분에 나로서는 매우 점잖으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조상들의 삶을 재구성하기가 아주 쉽다. 그들이 그런 값비싼 도락을 즐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점잖고 평범했으므로 점잖고 평범한 이웃들이 하는 일은 모조리 따라해야 했다. 이웃들은 중국인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열광이 지나쳐 나중에는 순수한 네덜란드인이 중국어와 거의 비슷하게 생각되는 기묘한 말로 서로 이야기할 정도였다.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중국 열풍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예를 들면 '알레 사메 리케 수페' 같은 국적불명의 언어였는데, 우리가 일곱 살 때 우리끼리 만들어 쓴 은어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시누아즈리의 끝자락이었다. 그 시작은 상당히 오래전이다. 1667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궁정 무도회에서 페르시아풍과 중국풍이 반씩 섞인 복장으로 나와 유행을 선도했다. 그 뒤 유럽 대륙의 하급 군주들은 앞 다투어 그것을 모방했다.

루이 14세 시대 사람들의 속물근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윈저 공(혹시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영국의 에드워드 8세를 말한다.)은 오스트리아를 매우 좋아해서 겨울마다 오스트리아의 티롤에서 스키를 즐기고 티롤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그 때문에 멋을 부리는 여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여자들이나 모두 앞을 다투어 오스트리아 아가씨처럼 입고 다녔다. 덕분에 잘츠부르크의 이름 없는 양복점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남자들도 그 흉내를 내 지금도 티롤 모자를 쓰고 농부 윗도리에 가죽바지를 입는다. 골프를 치고 왔으면서도 포어아를베르크에서 사슴 사냥이라도 하고 온 것 같은 차림이다.

100년 뒤에 20세기 문화 발전의 특징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30년대에 뜬금없이 티롤 취향이 유행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1730년대의 시누아즈리에 놀라고 있지 않은가? 시누아즈리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유럽이 중국에 열을 올릴 때 중국도 똑같이 유럽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르사유에 중국식 탑과 기와지붕의 주택이 들어선 것처럼 중국에서는 강희제와 건륭제가 베르사유를 그대로 모방해 프랑스 로코코풍의 건물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우리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과 프랑스는 둘 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왕국이었고, 두 나라의 군주는 왕국의 수도를 대륙 전체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18세기 중국이 최소한 정신적인 면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로코코적이었는지는 당시의 그림, 찻잔과 칠기, 기묘하게 조각된 상아와 옥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부 화려하고 유쾌하며, 매우 세속적이다. 돈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치성을 내비치고 있다. 또한 성격이 활발하고 상당한 교양을 갖춘 여인들이 상류층의 정치와 사회생활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큰 잘못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아름다운 예술품이 많이 탄생했다. 예술품은 지금까지 전해지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죽고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남겨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종 판단은 자비의 여신인 관음보살에게 맡기도록 하자. 중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신인 관음보살은 군함, 다이너마이트, 총검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관용을 가르침으로써 다른 신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중국옷을 즐겨 입던 유럽인들은 중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중국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신비의 나라에서 온 것이면 까다로운 질문 하나 던지지 않고 무엇이든 열렬히 받아들였다. 광둥이나 닝보의 교활한 중국 상인들은 마냥 즐거웠다. 드디어 이상적인 고객들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딱하고 멍청한 이방인들은 진짜 송나라 도자기와 엉터리 모조품을 분간하지 못한다. 모조품도 얼마든지 환영을 받고 비싼 값에 팔리는데 진짜를 보낼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 결과 18세기 유럽의 시장에는 3류는 말할 것도 없고 13류쯤 되는 도자기들이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최하품을 식별하기 위해 3세대에 걸친 중국학 전문가들을 총동원해야 했다.

지금은 그런 유감스러운 상황이 되풀이될 위험이 거의 없다. 오늘날의 전문가들은 델프트 도자기나 그리스 주화를 아는 것처럼 중국 미술품을 속속들이 잘 안다. 중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50년 전처럼 캄캄하지는 않다. 그러나 좀처럼 바로잡기 어려운 잘못된 지식이 여전히 많다. 이를테면 서양보다 수천 년이나 앞서 중국인이 이미 나침반에서 인쇄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발명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중국 역사는 근대사 정도다.

중국인들은 중국 최초의 왕이 쿠푸와 같은 시대에 속하는 복희라고 주장하지만, 중국 역사학자들이 내게 말해준 바에 의하면 복희는 전설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복희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며, 다른 민족들이 흔히 민족의 시조로 받들고자 하는 영웅과는 다르다. 그는 이웃 민족들을 살육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백성들에게 사냥과 고기잡이, 짐승을 길들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백성들을 여러 씨족으로 나누었고 혼인의 의식을 확립했다. 시간에 맞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달력도 발명했으며, 백성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지식을 자손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어주었다. 중국 문자는 우리 눈에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복희는 실용적인 정책을 정신적인 측면으로 보완하기 위해 현악기를 발명했다. 그가 만든 현악기로 백성들은 한가할 때 아름다운 음악을 즐겼다. 600년 뒤 순 임금의 치세 때 한 고관의 딸이 회화 예술을 추가했다. 그 아름다운 처녀가 무엇을 그렸는지, 어떤 기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중국 그림(기원전 1800~1200년이 분명하다.)은 새와 인간을 조잡하게 그린 것이다. 거북 등에 새겨져 있는 그림인데, 에스파냐 동굴에 있는 그림보다 훨씬 처진다. 중국인들이 인정하듯이 붓은 기원전 3세기, 종이는 기원전 1세기에 발명되었으므로 중국 예술의 시작은 기원 전후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이면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이미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실제 중국 역사도 이 가설과 모순되지 않는다. 중국사의 신화적 부분이 끝난 것은 기원전 256년부터 207년까지 존속한 진나라 시대부터다.2) 진나라에 뒤이어 한나라가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대의 중국 고분에서는 이집트 무덤의 초기 그림과 비슷한 매우 단순한 그림이 보인다. 인물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였다.

중국의 고대 예술

왼쪽은 청동과 금, 은으로 제작된 주나라 시대의 정식(頂飾, 탑 꼭대기에 올려놓는 장식물)이고, 오른쪽은 시황릉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실물 크기의 토우들이다. 지금 보아도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생생한 모습을 자랑한다.

풍경화는 기원후 264년부터 618년 당나라가 성립될 때까지 지속된 이른바 '분열시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예술이 정점에 달한 때는 송나라 시대다. 송은 960년부터 1279년까지 존속하다가 몽골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몽골은 먼저 중국 북부를 정복한 뒤 남부까지 손에 넣어 태평양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1368~1664년)가 들어섰다. 명나라 다음에는 만주 왕조가 일어나 1644년부터 중국을 지배했다. 그러다가 1912년에 민주주의가 승리해 중국은 몇 개의 작은 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책을 쓰는 현재(1937년)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은 독자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다. 중국 골동품상과 박물관장들은 일반 사람들이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나라들의 이름을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보다 더 낯설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진나라, 명나라, 송나라 같은 명찰을 달아놓고 문외한들을 당혹케 하는 데 큰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다.

중국이라는 이름은 나라보다 문명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내가 보기에는 매우 현명한 견해다. 문명이 아니라면 중국인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는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하지만 문명은 한 국가를 일으킨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

수천 년 역사의 문명을 불과 몇 쪽으로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만 훑어보기로 한다. 중국이라고 할 때 대뜸 떠오르는 생각은 다행히도 중국이 소규모 농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에 밀착된 삶은 확실히 강렬한 힘이 있다. 농민은 아무리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도 도시인보다 오래 산다. 도시인들도 그 점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인들도 누구나 작은 땅뙈기라도 소유하려고 애쓴다. 촉촉하게 젖은 흙을 한 시간 동안 걸으면 아스팔트로 덮인 거리를 100시간 걷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을 얻는다.

둘째, 중국인은 죄의식에 뿌리를 둔 비관적인 종교에 예속된 적이 없다. 어디서나 그렇듯이 하층민들은 악마와 귀신이 등장하는 기괴한 신앙을 발전시켰는데, 중국의 예술에도 그런 존재들이 자주 모습을 보인다. 중국인들이 귀신을 묘사하는 솜씨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에 못지않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500년 전에 살았던 네덜란드 화가지만, 우리 시대의 만화가 아트 영은 지금도 짓궂은 도깨비 만화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상식이 풍부한 중국인들은 평등이 정치 연설의 주제로나 알맞을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하거나 생각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든 개들이 보르조이(borzoi)3)처럼 잘 달리고 점잖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중국의 농민들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믿을 수 있었다. 더 폭넓은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내적 필요에 부응하는 신조나 철학에 탐닉했다.

특정 계급의 신앙을 다른 계급에게 강요할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조물주를 숭배하는 방식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불교를 믿고 싶으면 마음대로 믿어도 되었다. (중국에는 수백만의 불교도가 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싶다 해도 그것을 못하게 하는 법률은 없었다. 비록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어리석은 종교이고 활력과 마음의 평화를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누구나 자신의 양심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4천 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종교전쟁에 시달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다른 형태의 갈등은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그런 태도는 갈등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었다.

글을 배우는 데 반평생이나 바쳐야 하는 중국의 상류층과 지식인층에게는 엄격한 교리가 확고하게 체계화된 서구적 의미의 종교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런 종교의 역할을 한 것은 유교와 도교 두 가지 사상의 혼합체였다. 공자가 등장했을 때 중국인들은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에서 막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전까지 중국의 종교는 원시 부족들의 전형적인 신앙으로, 오늘날 뉴기니와 보르네오 등의 오지에서나 볼 수 있는 특성이 잔존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중단했다. 피를 흘리거나 살생을 하지 않고,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그 동물들의 그림이나 형상을 제물로 바쳤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말을 비롯한 여러 동물, 인간, 가구 등을 작고 예쁜 토우로 만든 것은 장례식에서 많은 가축을 잡고 여자를 순장시켜 죽은 사람을 내세에서 보살펴주도록 했던 제사 풍습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자는 그런 세계에 태어났다.

기원전 6세기였다. 당시 중국은 만성적인 부패와 정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뱅이는 점점 더 가난해졌으며, 변화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는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으로 사회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다는 고결한 희망을 품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반 백성들이 수가 너무 많아 이치를 깨우치기 어려웠다. 실은 상층부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후대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초인이 나와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초인은 우리가 익히 아는 긴 장화를 신은 작은 사나이4)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폭력을 결코 찬양하지 않았다. 군인은 최후의 순간에 나타났다. 사실 공자의 눈으로 볼 때 군인은 사회적 가치 척도에서 하위에 위치하는 존재였다.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할 초인은 인자하고 부드럽고 정직한 귀족으로서 견실하면서도 사심 없는 정치를 펼쳐야 하며, 백성들의 가장이자 어버이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공자 같은 현인도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 원하는 지배자는 초인이 아니라 뇌물로 회유할 수 있는 악한이거나 약속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성자다. 공자의 사상은 그런 백성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너무 난해하고 고상했다. 결국 그는 보람 있는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 백성들은 낡은 형태의 자연숭배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나 공자의 말을 초보적인 형태의 생활철학으로 삼았다. 공자는 신으로 추앙받지도 않았고 그의 사당에도 이름을 적은 위패밖에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무척 광범위했다. 중국의 예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인의 생활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철학인 도교는 흔히 공자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유교와 달리 도교는 상류층을 교화시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중에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라고 설교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안 되는 일을 이루려 애쓰기보다 웃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도교는 중화의 나라를 찾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는 중국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는 태도를 낳은 직접적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불상이 탄생하기까지불교는 기원전 6세기에 생겼지만 불상은 한참 후대에 탄생했다. 불교 초기에 신도들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고, 굳이 부처를 시각적으로 묘사해야 할 때는 그림자나 빈 의자 등으로 대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 미술이 동방에 전해지면서 사진과 같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정신에 큰 영향을 준 세 번째 힘은 불교다. 인도 역사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부처('깨달은 자')가 있었지만, 진정한 부처로서 숭배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부처는 실존 인물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는 히말라야 산기슭에 사는 고타마 가문에서 용맹스런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른 살까지는 왕자로서 영화와 특권을 누렸으나 어느 날 궁궐에 들어가다가 홀연히 이 세상의 악과 죄를 깨달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청년은 당장 집과 처자식을 버리고, 번민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명상과 고행을 시작했다.

부처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는 신이 아니므로 신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했지만, 중국인들처럼 야만적인 자연숭배에 빠져 있던 인도인들은 성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고결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즉시 부처를 신격화하고 그의 교리를 중앙아시아 각지에 포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우 순조로웠다. 불교는 인도 전역만이 아니라 자바와 발리 같은 먼 섬에까지 퍼졌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은 보통 힌두인들에게 너무 난해했으므로 600년쯤 지나자 그들은 다시금 옛 신들에게 돌아가버렸다.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습을 개혁하고자 최선을 다한 부처는 완전히 잊혔다. 그러나 그 무렵 부처의 사상은 히말라야와 티베트를 넘었다. 한나라 시대인 기원후 67년에 불교는 중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처음에는 부처가 마침내 참된 정신적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모든 생명체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설파하는 '깨달은 자'의 자비로운 미소는 인간의 광기 어린 폭력성을 크게 완화시켰다. 이 선각자의 인자한 성품은 특히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가 문학, 회화, 조각을 지배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그 힘은 거의 고갈되었다. 중국 불교는 결국 고비 사막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보존된 유물을 제외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불교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 특히 티베트와 실론5)에서 살아남았으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발달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신성한 가능성을 깨닫게 하려는 불교의 노력은 후대의 그리스도교처럼 완전히 실패했다. 문명의 여명기에 탄생한 옛날의 신들은 여전히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인들은 다시 염소를 제물로 삼았고, 고대의 우상들 앞에 향을 피웠으며, 선한 신을 사랑하기보다 무서운 악령을 달래기 위해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 이유에서, 인도를 처음 방문한 유럽인들은 여행기에도 언급하지 않을 만큼 인도 예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인도에서 공포와 혐오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았다면 인도의 조각상이 그리스의 조각상과 대단히 비슷하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전반적인 무관심과 무지는 인도 예술이 피라미드보다 수천 년 앞선 신비로운 예술이라는 관념을 낳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그릇된 생각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호메로스 시대에 많은 문학작품이 있었으나 인도에서는 최초의 건축이 부처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되었다. 기원후 5세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졌을 때 불교 예술도 끝났다. 옛 힌두 신들이 불교를 대신해 예술을 지배하다가 10세기부터는 이슬람교가 들어와 인도에 이슬람 예술을 도입했다.

200년 동안 존속했던 무굴제국은 서인도에 독자적인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당시 건축가들의 솜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은 17세기 중반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인 뭄타즈 마할(궁전의 고귀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축조한 무덤이다.

성 같은 무덤언뜻 상아로 빚은 성처럼 보이지만, 실은 17세기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죽은 아내를 위해 지은 마우솔레움이다. 건물 주변에 모스크와 미나레트가 있어 이슬람교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언뜻 보면 이슬람 예술이 인도의 토착 예술을 짓밟은 것 같지만, 힌두인들은 여전히 힌두 사원을 굳게 지켰다. 사원에는 넓은 안마당과 목욕탕, 꼭대기에서 밑동까지 수많은 신상이 새겨진 금동 탑(이슬람교도라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 무덤처럼 보이는 어두운 동굴이 있었으며, 그밖에 신성한 동물들, 별로 신성하지 않은 신들, 매력 없는 여신들의 조각상이 있었다.

도시 전체를 차지할 만큼 넓은 힌두 사원에 비하면 서양의 고딕식 교회는 마냥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눈에 힌두 사원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사원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불길한 느낌이 가슴에 가득 찬다. 마치 준엄한 자연의 힘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설파하는 듯하다. 어두컴컴한 사원 내부와 달리 목욕탕으로 사용되는 연못은 무척 환하다. 그러나 지붕을 금으로 뒤덮고 신상을 보석으로 장식하는 것보다는 이 음울한 무덤 안으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장애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세우는 게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각상들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기 위해 만든 것처럼 뒤틀리고 고통스러운 형상이다. 조각의 기술은 전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조각의 주제인 브라마, 비슈누, 시바 같은 신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그들의 사촌, 삼촌, 형제, 자매들은 사원의 경내에 들끓는 심술궂은 원숭이들과 굶주린 소들보다 나을 게 없다.

하지만 불교 예술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나는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믿을 만한 권위자에게 문의해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까지 진격해왔을 때 처음 그리스문명과 접촉하고 석공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실제로 불교 조각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는 부처가 죽고 수백 년 뒤에 독실한 불교도인 아쇼카 왕이 펀자브를 지배하면서부터였다.

살아 있는 달팽이의 관을 쓰고 명상하는 인물의 전통적인 조각상이 탄생한 것도 그 무렵이다. '깨달은 자'가 나무 그늘도 없는 곳에서 묵상에 잠겨 있을 때 일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달팽이들이 머리로 기어올라가 가려주었다고 한다. 부처의 귓불을 길게 묘사한 것도 이 시기부터인데, 그것은 부처가 화려한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 무거운 귀고리를 달았던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제3의 눈, 즉 심안(心眼)의 상징으로 이마에 점을 찍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까지는, 즉 힌두스탄 민족이 알렉산드로스가 가져온 고대 그리스 신상을 보기 전까지는 부처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도 표현되지 않았다. 굳이 부처를 표현해야 할 경우에는 새나 코끼리 같은 화신의 형상을 빌렸고, 때로는 강한 불길로 부처의 영원불멸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법을 알게 된 불교 조각가들은 곧 부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13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처럼 구세주의 생애에 나오는 온갖 장면들을 즐겨 묘사했다. 가장 좋은 예는 아시아 최대의 두 유적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는 특히 유적이 많은 대륙이라는 점을 상기하라.) 자바 중부의 보로부두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은 전체가 수많은 조각으로 덮여 있다. 그 충실한 표현과 명료한 관찰은 서양의 어느 조각가도 따르지 못한다.

문명의 단절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인 앙코르와트다. 앙코르는 수도, 와트는 사원이라는 뜻이니까 앙코르와트를 일군 문명은 정교일치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자바의 보로부두르처럼 이곳도 수백 년 동안 번영한 뒤 15세기에 문명이 파괴되고 역사의 맥이 끊겼다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 박물학자에게 우연히 발견되었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에 인도차이나 출신으로 크메르 왕국을 건설한 민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왕국은 12세기에 번영을 이루고 15세기까지 존속하다가 나타날 때처럼 신비롭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앙코르와트는 처음에 불교의 영향으로 건축되었으나 나중에는 힌두교도가 불교도를 몰아내고 비슈누를 숭배하는 사원으로 만들었다. 이 사원이 언제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거대한 건축물이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서 홀로 광채를 발하던 수백 년 동안 소수의 독실한 승려들이 그 안에 살면서 예배를 계속했는지도 모른다.

보로부두르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이 자바에 왔을 때는 건축물 전체가 울창한 수목에 덮여 있어 그 존재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 언덕의 꼭대기 부분이라고 여겼던 것은 실제로는 방대한 불교 사원이었다. 여기에는 조각으로 장식된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고 무수한 불상들이 있었다.

숲 속의 사원

보로부두르 사원이 발견된 것은 버려진 지 1천 년 가까이 지난 20세기 초였다. 왼쪽은 공중에서 본 모습이고, 오른쪽은 부처의 생애를 묘사한 사원 벽의 부조다. 벽돌들에 부조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기법이 눈길을 끈다.

초기 불교 승려와 신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얕은 돋을새김으로 묘사한 보로부두르의 조각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슬람교가 자바를 정복하기 오래전인 것은 분명하므로 샤를마뉴의 시대가 아닐까 싶다. 이 먼 나라의 작품과 샤를마뉴 시대의 건축과 조각을 비교하면 서양 예술가들의 솜씨는 매우 초라해 보인다. 그 후손들도 별로 배운 게 없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불교의 아크로폴리스 부근에 흉물스러운 그리스도교 예배당을 세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더구나 여기서 조금 떨어진 멘두트 사원의 어둑한 곳에는 불상이 1천 년 동안이나 고즈넉이 앉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대단한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을 명령한 군주들은 이제 없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였는지도 모른다. 꽃과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이곳을 찾던 수많은 신도들도 지금은 없다. 그들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인근의 화산재와 섞여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침묵, 심원한 고독, 인내와 깨달음의 미소, 그리고 멘두트 사원 바로 맞은편의 회칠한 목조 오두막으로 미사를 집전하러 가는 도중 목사가 담뱃불을 붙이려고 잠시 세워둔 자전거뿐이다.

힌두 사원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교회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전처럼 신들의 거처에 가깝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사제만 지성소에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사제가 사용하는 작은 방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사리탑은 사원보다도 더 그리스도교 교회와 달랐다. 사리탑은 속이 비지 않은 구조로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달리 내부에 방 같은 게 없었다. 대개 보로부두르처럼 작은 언덕을 그냥 사리탑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당한 언덕이 없을 때는 인공으로 언덕을 조성하고 석조물과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정식 사리탑이 되려면 그냥 흙더미나 바위더미가 아니라 '깨달은 자'의 신성한 유물을 적어도 한 가지쯤 소장해야 했다. 성인의 머리털, 엄지손가락의 뼈, 치아 같은 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성물은 그리스도교 성인의 쇄골이나 발가락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성물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신도들은 그저 이 신성한 건축물 안에 성물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원래 사리탑은 피라미드와 비슷하게 무덤 위에 작은 둔덕을 쌓은 구조였을 것이다. 그 뒤 점차 피라미드처럼 커지다가 나중에는 초대형 사리탑이 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확고하게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옥외에 있을 필요도 없었으므로 일반 사원 내에 사리탑을 만들기도 했다. 인도의 바위사원 중에는 내부에 작은 사리탑을 갖춘 곳들이 많이 있다. 게다가 사리탑은 한 가지 형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리탑은 독특한 모양을 자랑했다.

18세기에 서양인들을 매료시킨 기묘한 지붕을 얹은 중국의 사리탑은 목조나 석조 건물의 형태를 취하지만 실론에서 보는 둥근 모양의 사리탑이나 티베트의 정사각형 또는 납작한 사리탑, 태국의 가파르고 뾰족한 사리탑과 똑같은 기능이었다. 중국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사리탑도 소박한 목조 건축물에서 유래했다.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사리탑은 매우 높아졌고 위에서 아래까지 색색의 기와로 덮였다. 그러나 원형 탑은 없었다. 나무는 둥근 형태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았고, 중국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을 실험하려는 의욕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실제에 충실한 기술과 전통이라는 두 가지 이념만을 중시했다.

탑 개념의 차이왼쪽은 중국의 사리탑이고, 오른쪽은 자바의 보로부두르에 있는 사리탑이다. 뾰족하고 높은 중국의 사리탑은 나중에 파고다가 되었다. 서양의 탑은 안이 비어 있고 거주가 가능한 건축물이지만 동양의 탑은 건축이라기보다 축조된 무덤 같은 형식이다.

여기에 중국인 특유의 미덕인 인내를 덧붙일 수도 있겠다. 특히 청동과 옥, 법랑, 자기, 도기의 분야에서 중국인들은 시간관념이 완전히 부재해야만 가능한 엄청난 인내를 보여준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 한 폭을 그리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의 그림은 서예에서 발달했으므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글씨를 쓰듯이 '그림을 쓴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그림 한 점에 몇 주일이나 몇 달씩 걸리는 서양의 유화와 달리 중국의 그림은 몇 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서양의 화가가 물감 한 통과 무수한 명암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불과 몇 개의 줄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붓질의 솜씨를 터득하려면 평생의 기간이 걸렸다.

물론 모든 예술은 기법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거친 종이에 성냥개비로 그린 그림이 좋은 펜, 고급 종이, 고급 잉크를 사용해 그린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뛰어난 풍경화가들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고 싶다면(유럽 최고 대가들의 작품보다 아름다운 그들의 작품을 올바로 감상하고 싶다면), 펜과 잉크를 잊고 붓과 먹을 사용해보라. 미술관에서 1~2년 보내는 것보다 직접 붓을 5분쯤 사용해보면 중국인들이 최고의 성과를 거둔 중국의 회화에 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중국 화가들이 원근법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즐겨 그렸으므로 원근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다. (원근법은 평지에서 그림을 그릴 때 훨씬 중요하다.) 또한 중국 화가들은 소실점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훌륭한 효과를 얻었다. 바흐도 현대적 화성학을 배우지 않았으나 얼마든지 화성의 효과를 얻었다. 진정한 대가에게 그런 자질구레한 요소 따위는 전혀 무의미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중국의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크게 실망할지 모르므로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작품을 보지 말도록 하라. 눈빛만 잔뜩 흐려진 채 집에 돌아가기 십상이다. 모든 그림이 단조롭게 보일 것이다. 동양 예술을 보면 '실내장식'이라는 개념이 동양과 서양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양의 집은 온갖 물건들이 가득하고, 누대에 걸친 잡동사니가 득시글거리며, 벽에는 조상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국인와 일본인은 '서양 오랑캐'에게 팔아먹기 위해 갖가지 싸구려 골동품들을 만들면서도 정작 자기 집 안에서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한다. 그들은 수십 점의 그림을 갖고 있다 해도 한 점만 벽에 걸고 나머지는 깨끗한 상자에 넣어 창고에 보관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장미나 튤립 한 송이라도 꼭 어울리는 자리에 놓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 위나 찬장에 장미 30송이나 튤립 1천 송이를 많은 꽃병에 담아 줄줄이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 차이는 진정으로 위대한 작품에 대한 개념의 차이다. 유럽인은(매우 현대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상을 세심하고 정밀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하지만 고전 시대의 중국인과 일본인은 기본적인 몇 가지 사실들을 나타내는 데 만족하고 유럽인들이 중시한 세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부'를 경시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그들도 대상을 정밀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만약 어느 영국인이 에베레스트 산을 그릴 때 여기저기 보이는 크레바스를 빼놓고 그린다면, 에베레스트 산을 본 적이 있는 다른 모든 영국인들에게서 심한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 비판의 근거는 화가가 진실 전체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양인은 기본적으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므로(그들에게 서양의 과학이란 값싼 자동차를 만드는 데 필요할 뿐이다.) 그런 항의 자체를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에는 특유의 정기가 있다. 그 산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즉각 알아차린다. 그런데 오른쪽 등성이에 눈밭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거나, 왼쪽 등성이에 작고 검은 바위가 빠져 있는 것에 신경 쓸 이유가 뭐겠는가? 어쨌거나 그림은 등산객들에게 정상에 오르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지리적 조사를 거쳐 지도를 작성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림은 늘 곁에 두고 싶은 좋아하는 풍경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암시를 얻으려는 것일 뿐 사진처럼 풍경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6세기였다. 그때까지 일본은 문명의 범위에서 벗어난 미지의 섬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의 아일랜드와 같았다. 대륙과의 관계도 제한되어 있었다. 일본인이 외국인에게 적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정당한 의심을 품었을 뿐이다. 훗날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불교의 잘못된 신앙에 빠진 일본인을 개종시키겠다고 찾아온 것이 좋은 예다. 선교사들은 오만한 자세로 일본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다. 분노한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포함해 모든 외국인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다시는 오지 못하게 금지했다.

마침 그 무렵 그 전까지 군사 지도자에 불과했던 쇼군이 천황을 제치고 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쇼군의 가문이 합법적인 지배자의 가문보다 정치에 유능했으므로 그 체제가 수백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 도쿠가와 시대는 1603년부터 일본이 다시 문호를 개방한 186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예술 형식은 서양 예술에 중국의 회화나 칠기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누구나 살 수 있는 싸구려 목판화였다. 이 판화는 초기에 흑백으로 찍었으나 점차 몇 가지 색깔이 추가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손으로 인쇄했으나 나중에는 인쇄기로 제작되었다. 마침내 인쇄 방법이 완벽해지자 판화가는 색깔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에게 처음으로 동양 예술에 관한 지식을 전해준 것은 값비싼 중국 그림(중국인은 국외로 가지고 나갈 수 없을 만큼 비싼 값을 매겼다.)이 아니라 일본의 싸구려 판화였다. 그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원근법을 지나칠 만큼 많이 배웠다. 이론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알게 된 화가들은 원근법 따위를 전혀 알지 못해도 풍부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고 풍경의 본질을 세세히 드러낼 수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그런 일을 해낼 뿐 아니라 값비싼 캔버스와 물감을 사느라 돈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모네의 일본 여인일본 판화의 영향은 특히 19세기 후반 유럽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런 경향을 자포니슴(Japonisme)이라고 부른다. 고흐는 여러 차례 일본 판화를 모사하는 연습을 했고, 모네는 연인인 카미유에게 일본 옷을 입혀 금발의 '일본 여인'을 그렸다.

물론 일본은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던 덕분에 중국에서 배운 것을 잊고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예술가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애정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일본의 위대한 화가들―우타마로(歌麿), 호쿠사이(北齋), 히로시게(廣重)―은 붓을 쥐고 물감을 섞어 사람과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 수많은 풍경, 새, 꽃, 다리(그들은 서양의 중세 화가들처럼 다리에 매료되었던 모양이다.), 길, 폭포, 파도, 나무, 구름 등이 그려졌다. 특히 그들이 숭배하는 눈 덮인 후지산을 사방에서 본 모습은 수백 장이나 그려졌다. 또한 남녀 배우, 연 날리는 소년, 강아지와 노는 소녀 등 신이 창조한 것은 무엇이든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거의 누구나 그 그림들의 '느낌'을 알 수 있다. 물론 서양의 회화와는 전혀 다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발리 섬의 가믈란 음악도 감상하는 법을 배우면 이해할 수 있듯이 그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의지와 인내다. 그리고 예술을 대할 때는 늘 그렇듯이 가능하면 진품을 감상하라. 책에 나온 해설 따위는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직접 보고 비교해보라.

예를 들어 브뢰헬 1세, 파티니르(Patinier), 니콜라 푸생의 풍경화를, 400년 전 정복왕 윌리엄 시대에 살았던 범관(范寬)6)이 그린 겨울 경치와 나란히 놓고 보라. 혹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61~1761)의 꽃을 네덜란드 화가 드 혼더쿠터(D'Hondecoeter)나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의 꽃과 비교해보라. 고린의 까마귀를 17세기 네덜란드 거장의 희귀한 새 그림과 비교해보라. 호쿠사이의 유명한 파도를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의 파도와 비교해보라.

그러면 중국과 일본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암시의 예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페리 제독이 1853년 7월 14일 미카도(御門)7)에게 필모어 대통령의 서한을 전하면서,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라고 강요한 그 유명한 사건이 과연 인류에게 이익이었는지 의문을 품어보라.

아마 페리 제독은 옳았을 것이고 그런 사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보가 필요하므로!

우리에게는 예술도 필요할까? 그렇다.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최선의 삶을 얻으려면 투쟁해야 하듯이 우리는 열렬한 투쟁을 통해 예술을 쟁취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도, 중국, 일본 - 유럽은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배울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