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말부록] 학술논문 - 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 | |||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 임승택 sati@knu.ac.kr | ||
● 목차 1. 시작하는 말 2. 무아(anattan)라는 견해(diṭṭhi) 3. 실천적 무아의 양상 4. 형이상학적 무아와의 비교 5. 무아 실현의 모색 6. 마치는 말
* 이 논문은 지난해(2018.11.10, 동국대) ‘무아와 자아,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열린 불교학연구회 2018 추계학술대회에서 경북대 임승택 교수가 발표한 〈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의 완성본이다. 본지는 이 논문의 새로운 관점에 주목, 금년 봄호(77호) ‘세미나 중계’ 코너를 통해 그 요약본을 소개한 바 있다. 임 교수는 이 논문을 《불교학연구》에 투고하여 우수한 논문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논문의 일부가 타 저널에 게재되어 중복투고가 인정된다’며 최종적으로 게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에 본지는 이 논문의 전문을 권말에 실어 학계에 제공하고자 한다.
임승택 /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불교학연구회 현 회장.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 취득. UCLA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과정 수료. 제7회 반야학술상 수상. 《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종이거울, 2013),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불교학연구》 2015) 등 50여 편의 저 · 역서와 논문.
● 요약문 이 논문은 붓다가 가르친 원래의 무아를 ‘실천적 무아’로 규정하고서 그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형이상학적 무아’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의도된 것이다. ‘실천적 무아’는 오온(五蘊) 따위의 구체적인 적용 대상을 지닌다. 예컨대 물질현상(色) 등을 ‘나의 것’으로 볼 수 없고 또한 그것을 통해 ‘나’라든가 ‘나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무아 서술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상으로, 일체의 경험적 요인들이 무아라는 사실을 확인해 나아가는 실천적 과정과 연계된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무아’는 부파불교 이래로 전개된 교리적 내용을 반영하며, 초월적 실체라든가 연기의 원리와 같은 추상적 이론으로 무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무아’는 오온과 같은 구체적인 경험 요인에 대한 통찰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아에 대한 해석이 형이상학적 경향으로 치우칠 경우, 붓다가 우려했던 견해(diṭṭhi) 혹은 망상(papañca)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붓다의 모든 교설은 괴로움의 제거와 해탈의 성취라는 실천적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오온과 같은 경험적 요인들에 대해 스스로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무아의 가르침을 펼쳤던 것이다. 이 논문을 통해 필자는 ‘실천적 무아’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아라는 견해’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의 일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로부터 벗어나 ‘실천적 무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 주제어 무아(無我), 윤회(輪廻), 해탈(解脫), 견해(見), 망상(戱論), 형이상학적 무아, 실천적 무아
1. 시작하는 말 무아(無我, anattan)란 자아(我, attan)의 부정을 의미한다. 붓다가 이 교설을 내세운 이유는 윤회(輪廻)가 종식된 해탈(解脫)로 이끄는 데 있었다. “아라한에게는 내세울(施設) 윤회(vaṭṭa)가 없다.”라는 경문은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의 경지가 과연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자아 혹은 ‘나’를 중심으로 인과적 관계로 엮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나’ 혹은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자신과 타자, 안과 밖, 과거와 미래 등에 대해 초연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아 혹은 ‘나’에 대한 집착이 강화될수록 갈등과 불만족의 괴로움은 그 깊이를 더해간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순환구조 즉 윤회의 작동 원리일 것이다. 무아란 그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는 메시지이다. 자아가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일깨움은 윤회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자각으로 연결될 수 있다. ‘나’ 중심의 거짓된 삶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ṁ)의 실재(reality)를 나누고 구획하고 객관화하고 실체화시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에 해당하는 객관적 사물이란 찾을 수 없다. ‘나’를 이루는 어떠한 무엇도 대상화하는 그 순간 ‘나’일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물질현상(色) · 느낌(受) · 지각(想) · 지음(行) · 의식(識) 따위의 오온(五蘊) 전체가 그렇다. 대상으로서의 ‘나’는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굴레 지울 수 없고 어떠한 대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제삼자(第三者)가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다수(多數)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객관화를 억지로 밀어붙이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 탈바꿈하고 만다. 객관화된 ‘나’ 혹은 자아의 출현은 ‘나’를 둘러싼 주변 세계의 고착화와도 맞물린다. 필자가 이해하는 무아는 단순하다. 붓다는 ‘나’ 혹은 자아에 해당하는 존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무아를 설했다. 또한 그는 자아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신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 주력했을 뿐이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논의가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모아야 하며, 객관화되고 실체화된 ‘나’의 존재를 ‘다만 거부하는 수준’에서 멈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부재를 내세우는 이면에 내밀한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었다느니, 그와 같은 초월적 존재의 가능성을 차단한 완전한 무아이어야 한다느니 따위의 주장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과 논의가 전혀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붓다의 원래 의도를 훼손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논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붓다는 자아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에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무아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필자는 두 편의 선행 논문을 통해 무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한 사실이 있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는 무아와 윤회의 교설을 모순적 관계로 파악하거나 혹은 상호 공존적 관계로 설명해 내고자 했던 그간의 여러 시도들이 두 교설 모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하였다.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에서는 무아에 대한 이해방식이 ‘형이상학적 무아’와 ‘실천적 무아’로 대별된다고 언급하였다. 붓다가 가르친 무아는 실천적이었던 반면에 후대에 등장한 각종의 무아 해석은 형이상학적 색채를 띤다는 것이다.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대표적 사례를 3가지로 들고서 거기에 내포된 문제점들을 일일이 들추었다. 이러한 선행 연구는 니까야(Nikāya)에 일관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실천적 무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실천적 무아’는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무아(無我)라고 선언하고서 그것은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러한 ‘나(aham)’는 있지 않으며, ‘나의 자아(me attā)’ 또한 그렇다고 언급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논리는 무아의 적용 대상이 다름 아닌 오온이며 오온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시킬 뿐이다. 또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들의 후미에는 대체로 ‘이와 같이 보고 듣는 거룩한 제자(evaṃ passaṃ sutavā ariyasāvako)’는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정형구로 제시되는 이 경문들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확인을 통해 해탈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필자는 바로 이것을 ‘실천적 무아’의 전형으로 판단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경전들에는 형이상학적 견해(diṭṭhi)에 해당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을 위배하지 않고서 ‘나’ 혹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는 내용이 나타날 뿐이다. 필자가 말하는 ‘실천적 무아’는 무아 자체를 내세우는 주장이나 견해마저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실제로 니까야에는 무아를 주장하는 것마저도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자아에 대한 주장이든 무아에 대한 주장이든 관념적 독단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새롭게 소개하는 경문들을 통해 ‘실천적 무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언급된 다른 관련 경문들에 대해서도 ‘실천적 무아’라는 관점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무아의 가르침이 견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괴로움의 제거와 해탈의 성취라는 실천적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해줄 것이다. 선행 논문들로부터 이어지는 필자의 일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에 빠지지 말고 본래적인 ‘실천적 무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2. 무아(anattan)라는 견해(diṭṭhi) 《아비야까따상윳따(Avyākata-saṃyutta)》에는 자아가 있다고 말하면 상주론(常住論)에 빠지게 되고 자아가 없다고 말하면 단멸론((斷滅論)에 빠지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또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는 “나는 있다(asmi).”라는 것도 “나는 이것이다(ayam aham asmi).”라는 것도 “나는 있을 것이다(bha-vissaṁ).”라는 것도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ṁ).”라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papañcitam)’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sutta)》에도 사후의 자아가 지각을 지니고서 존속한다는 16가지 주장을 비롯하여, 사후의 자아가 소멸한다는 7가지 주장들이 견해(diṭṭhi)와 갈애(taṅhā)의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 경전에 따르면 자아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련된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는 것마저도 붓다의 의도와 상충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붓다는 ‘메타(meta)’적 관점에서 특정한 견해를 내세우는 자체를 문제시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두삥디까숫따(Madhu-piṇḍika-sutta)》는 그릇된 주장이나 견해의 원인인 망상(戱論, papañca)에 대해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전한다. 거기에 따르면 눈(眼, cakkhu) 등의 감각기능(根, idriya)과 감각대상(境, viṣaya) 그리고 감각의식(識, viññāṇa) 따위는 인식의 발생에 요구되는 선험적 요인들이다. 바로 이들 셋을 조건으로 접촉(觸, phassa)이 발생하고, 접촉에 의존하여 느낌(受, vedanā)이, 느낌에 의존하여 지각(想, saññā)이, 지각에 의존하여 생각(尋, vitakka)이, 생각에 의존하여 망상(戱論, papañca)이 차례로 작동한다. 이렇게 발생한 망상이란 언어적 · 개념적 사고 및 그것을 통해 형성된 형이상학적 견해들을 망라한다. 이러한 분석은 자아에 대한 주장이든 무아를 내세우는 논리이든 망상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아시비사왁가》를 통해 언급했듯이 “나는 있다(asmi).”라는 것도 혹은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ṁ).”라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마두삥디까숫따》에는 망상이 발생하는 도중에 ‘나’ 혹은 자아의 존재가 개입된다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나타난다. 감각의식(識)에서부터 접촉(觸)을 거쳐 느낌(受)의 발생 단계까지는 인칭을 나타내는 표현 없이 각각의 과정이 단순히 열거되지만, 지각(想)에서부터 망상(戱論)에 이르는 단계는 “느끼는 그것을 그는 지각한다(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라는 방식으로 삼인칭 동사가 사용된다. 냐나난다(Bhikkhu Ñānananda)는 바로 여기에 주목하여 지각의 단계에서부터는 행위의 주체인 ‘나’가 개입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인식의 최종 분화 단계인 망상에는 ‘나’의 존재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에 공감하며, 바로 이것이 무아를 내세우는 논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무아를 내세우는 경우라도 망상일 수 있으며, 또한 망상을 일으키는 주체로서의 ‘나’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번뇌경(Sabbāsava-sutta)》에 나타나는 아래의 인용문은 사변적 관심에서 추구되는 무아의 위험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자아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한 견해도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언론 하면서 그들 모두를 일괄적으로 비판한다. 그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내는 그러한 자에게는 6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1]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2]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3]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4]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5]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혹은 그에게 이런 견해가 생긴다. [6]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에 갇힘,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이라고 한다. 인용문에 언급된 [1]의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 [3]의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6]의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는 등’의 견해는 자아를 주장하는 일반적 논리로 간주할 수 있다. 반면에 [2]의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 [4]의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5]의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는 자아의 부재 혹은 무아를 내세우는 부류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무아를 언급하는 후자의 셋은 자아를 주장하는 전자의 셋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6가지 모두가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견해로서 제시되는 자아의 유무에 관련한 주장은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용문에 거론된 6가지 견해의 족쇄는 앞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서 보았던 “나는 있다(asmi).”라든가 “나는 이것이다(ayam aham asmi).”와 같은 망상의 구체적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시비사왁가》의 후미에서는 망상에 처한 상황에 대해 ‘질병을 지닌 것’ ‘종기를 앓는 것’ ‘화살에 맞은 것’ 등으로 비유하면서, 망상이 없는 마음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한편 《마두삥디까숫따》에서도 인식의 발생 단계를 규명한 후 유사한 방식으로 망상을 대처해 나갈 것을 권한다. 즉 망상에 대해 환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탐냄 · 견해 · 의혹 · 자만 · 무명 등의 잠재적 성향이 사라지고 싸움 · 논쟁 · 언쟁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도 사라지게 된다고 언급한다. 망상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형이상학적 난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했던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천적 무아의 양상 견해(diṭṭhi) 혹은 망상(戱論, papañca)으로서의 무아는 불건전한 법(akusalā dhammā)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아의 가르침을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는 ‘실천적 무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것은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혹은 바른 지혜(sammappaññā)에 속하며, 해탈로 이끌어주는 실제적인 역할을 한다. 아래는 ‘실천적 무아’의 전형으로 간주할 만한 경문이다. … 모든 물질현상(色) 그것은(etaṃ)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어떠한 느낌(受)이든 [중략], 어떠한 지각(想)이든 [중략], 어떠한 지음(行)이든 [중략], 어떠한 의식(識)이든,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우수하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의식, 그것(eta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듣는 거룩한 제자는 물질현상에 대해 싫증 낸다. 느낌에 대해… 지각에 대해… 지음에 대해… 의식에 대해 싫증 낸다. 싫증 내면서 탐냄을 떠난다. 탐냄의 떠남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게 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은 행했고,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향함이] 없다고 알아차린다. 미혹한 범부들에게 물질현상(色) 등 오온(五蘊)이라는 경험적 요인은 자아 혹은 자아정체성의 근거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인용 경문에서는 오온 각각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언급을 반복한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면 그것을 통해 ‘나’ 혹은 ‘나의 자아’를 내세우려는 생각 또한 버리게 된다. 이것은 곧 물질현상 등에 대한 싫증(厭離, nibbinā), 탐냄의 떠남(離貪, virāga), 해탈(解脫, vimutti)로 연결된다.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위의 인용문에서 “그것은(etaṃ)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는(eso) ‘나(aham)’가 아니며, 그는(eso) ‘나의 자아(attā)’가 아니다.”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라는 맨 처음 구절만이 오온에 상응하는 성(性)을 취하여 주어가 중성인 etaṃ(그것)으로 묘사된다. 나머지 두 구절의 주어는 남성 주격인 eso(그는)로 바뀌어 서술되고 있다. 칼루파하나는 이 차이에 대해 오온이라는 경험의 소유자로 간주할 만한 어떤 신비적 실재를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또한 마지막의 자아(attā)라는 표현은 신비적 실재로서의 ‘나’라는 개념을 거부한 뒤에도 ‘나’라는 존재를 절대적 허구로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서 그것의 쓰임을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나(ahaṃ)’를 대신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칼루파하나는 자아라는 용어에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와 용법이 있지만 형이상학적 의미만큼은 오온에 의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논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chrome://digitalpalireader〉 검색에 따르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를 부정하는 방식의 무아 서술은 니까야에서 전체 94회가량 반복된다. 사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정형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절대주의적인 언명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요인들에 대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또한 니까야에서는 오온 이외의 경험적 요인들에 대한 분류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예컨대 눈(眼) · 귀(耳) · 코(鼻) 등의 감각기능(根), 눈의 의식(眼識) · 귀의 의식(耳識) 등의 감각의식(識), 나아가 눈에 의한 접촉(眼觸) 등의 마음현상(法)을 비롯하여, 심지어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 등의 요소(界)에 대해서도 ‘나의 것’이 아니며 또한 이들을 통해 ‘나’, ‘나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언급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해서 무아의 적용 대상은 경험에서 포착할 수 있는 일체의 것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경문들에는 정작 무아(anattā)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 혹은 자아로 오인될 수 있는 경험적 요인들을 부정하는 방식의 언급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를 거부하는 논리가 무아라는 용어 자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의 경문이 바로 그것을 해명한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상(無常)이다. 무상인 [물질현상] 그것은 괴로움(苦)이다. 괴로움인 [물질현상]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느낌(受)은 무아이다… 지각(想)은 무아이다… 지음(行)은 무아이다… 의식(識)은 무아이다. 무아인 [의식]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인용문은 오온이라는 경험적 요인들에 대해 무상하고, 괴로우며, 무아라고 언급한다. 또한 무아인 그것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며, ‘나’라든가 ‘나의 자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기술한다. 이렇듯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를 거부하는 이유를 다름 아닌 무아에서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온 따위는 무아인 까닭에 ‘나’라는 존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것이 무아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 분석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을 해소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판단한다. 주지하듯이 무아의 원어인 anattā 혹은 anattan은 접두사 an과 일반명사 attā 혹은 attan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것에 대해 브롱코스트(Bronkhorst)는 ‘자아를 결여한다(without self, 無我)’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아니다(not the self, 非我)’라는 의미로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이 한역(漢譯)에서는 무아 못지않게 잦은 빈도로 비아(非我)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본고의 5장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러한 분석과 의견을 같이하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무아란 비아(非我)를 가리킬 뿐이며 진실한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이와 같은 분석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anattā란 ‘자아를 결여한다’는 의미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라훌라에 따르면 무아란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anattā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진행형이다. 필자는 anattā의 온전한 의미 파악을 위해 이 용어가 등장하는 문맥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만약 anattā라는 단어 자체만을 따지자면 ‘자아를 결여한다(無我)’는 분석은 말 그대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급이 된다. 반면에 ‘자아가 아니다(非我)’는 언명은 어떤 것이 자아가 아님을 가리킬 뿐으로 자아의 실제 존재 여부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이 둘은 전혀 상이한 의미로 귀착된다. 그러나 인용문에서처럼 anattā는 물질현상 등의 경험 요인이 바로 그러하다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맥적 쓰임을 반영하자면 둘 중 어떤 분석을 따르더라도 anattā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즉 전자는 “물질현상 등은 자아(‘나’)를 결여한다(無我).”는 것이 되고, 후자는 “물질현상 등은 자아(‘나’)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이 둘은 물질현상 따위의 경험적 요인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으로 서로의 의미 차이는 크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후자가 더욱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자가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니까야에 나타나는 무아를 살펴보는 작업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서술 양식이 있다. 아래에 인용하는 유형의 경문들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상(無常)이다. 느낌(受)은 무상이고, 지각(想)은 무상이고, 지음(行)은 무상이고, 의식(識)은 무상이다. 비구들이, 물질현상은 무아(無我)이다. 느낌은 무아이고, 지각은 무아이고, 지음은 무아이고, 의식은 무아이다. 일체의 지음(諸行, sabbe saṅkhārā)은 무상이고, 일체의 법(諸法, sabbe dhammā)은 무아이다. 맨 마지막의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라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온이라는 경험적 요인들 각각에 대해서는 무상과 무아가 공히 적용된다. 그러나 이들을 ‘일체의 지음(sabbe saṅkhārā)’으로 묶는 경우에는 무상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일체의 법(sabbe dhammā)’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무아라는 언급이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라훌라는 무아의 적용 대상은 오온 따위의 유위의 현상(有爲法)에 국한되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체의 법’이라는 용어가 달리 사용되었다고 언급한다. 무상과 괴로움은 유위의 현상들에 한정되는 것이고, 무위의 법(無爲法)인 열반(涅槃, nibbāna)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열반마저 무상하고 괴롭다면 열반의 의의와 가치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상을 언급할 때에는 유위의 현상계를 포섭하는 개념인 지음(saṅkhārā)이라는 용어가 주어로 사용된 반면에 무아가 언급될 때에는 유위와 무위 모두를 포함하는 법(dhammā)이라는 용어가 주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라는 이 구절은 열반이라는 궁극의 이상마저도 스스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무아의 적용 대상은 오온이라는 경험 요인을 넘어 열반까지를 포함하며,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다. 범부의 삶에서든 아라한의 경지에서든, 어떠한 경험이라도 바로 그것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chrome://digitalpalireader〉 검색에 따르면 니까야 전체에 걸쳐 무아(anattā)라는 단어가 독립된 술어로 쓰이면서 주격으로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최소 75개소에 이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같이 주격의 형식으로 무아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에서는 예외 없이 이상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반복된다. 즉 오온 따위의 구체적인 적용 대상을 가리켜 “물질현상은 무아이다(rūpaṃ anattā).”라든가, “느낌은 무아이다(vedanā anattā).”라는 방식의 언급이 되풀이된다. 이것은 필자가 언급하는 ‘실천적 무아’야말로 초기불교에서 가르친 무아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4. 형이상학적 무아와의 비교 붓다가 가르친 무아란 구체적인 적용 대상을 지닌다. 물질현상(識) 등의 오온을 비롯하여, 감각기능(根)과 감각의식(識) 따위의 인식 조건, 접촉(眼觸)이나 갈애(愛) 등의 마음현상, 나아가 땅(地)이라든가 물(水)의 요소(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붓다는 무아라고 말할 때 바로 이들 현상에 대해 “‘나’가 아니다.”라거나 혹은 “‘나’를 결여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는 무아란 구체적인 실천적 과정을 통해 확인되어 나가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천적 과정에 연계되는 만큼 ‘이와 같이 보고 듣는 자(evaṃ passaṃ sutavā)’는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후속 과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붓다 이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실천적 무아’는 퇴색하는 듯하다. 가르침에 대한 체계화 작업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해석의 경향이 부각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이라는 선행 연구를 통해 이들의 사례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실천적 무아’와의 비교를 위해 이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되짚어본다. 먼저 단멸론적인 방식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무아’에 대해 살펴본다. 사실 단멸론적 주장은 니까야 시대부터 이미 언급된 것으로, 특히 죽음 이후 자아가 소멸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에 만연한 유물론과도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윤회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까닭에 태생에 의한 신분의 차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는 있겠지만 붓다의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니까야에는 죽음 이후의 윤회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적지 않은 분량으로 나타난다. 한편 무기(無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원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자아의 소멸을 강조하는 사고는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를 비롯하여, 살아 있을 때 즐기고 보자는 쾌락주의를 조장할 위험성이 있다. 다음은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이다. 이러한 무아 해석은 초월적 자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입장에 따르면 무아란 경험적 존재인 ‘나’는 참된 ‘자아가 아니다(非我)’는 의미이며, 궁극의 초월적 자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교 이전의 우빠니샤드 문헌을 비롯하여, 부파불교 시대의 보특가라(puggala, pudgala) 이론이 이러한 논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들은 붓다가 집착의 대상이 되는 거짓 자아만을 거부했을 뿐이며, 참된 영혼 혹은 진실한 자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에서 지적하듯이, 만약에 그러한 자아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온과 마찬가지로 경험에 종속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편 반대로 완전히 초월적인 것이라면 어떠한 작용이나 영향도 기대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구사론에서는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초월적 자아를 내세울 명분이 없다고 지적한다.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역시 경험적 사실에 근거를 둔 타당한 비판에 무력해 보인다. 세 번째는 무아의 논리로써 윤회를 규명해 들어간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업(業)의 상속(相續, saṃtāna)에 의해 윤회는 지속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불변의 존재로서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변불멸의 주체 혹은 자아가 없이 윤회가 진행되는 것을 일컬어 ‘무아 윤회’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무아와 윤회를 공존적 관계로 보게 되면 극복되어야 할 상태인 윤회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인 무아를 동일한 차원에 귀속시키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것은 무아를 실현함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실천적 과정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특히 이 입장을 고수하는 학자들은 연기설(緣起說)에 대한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해석에 근거하여 무실체성(無實體性)으로서의 무아를 거론한다. 그러나 상호의존적 연기란 초기불교의 연기와는 거리가 있으며, 무아의 실현 여부와는 무관하게 윤회는 계속된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는 별개로 다루어야만 하는 두 교설의 근본 취지를 망각한 것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에서 비판했던 이들 사례를 ‘무아라는 견해(diṭṭhi)’에 귀속시키고자 한다. 이들의 주장은 앞서 언급했던 ‘실천적 무아’와 구분되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닌다. 이들이 내세우는 무아는 그 적용 대상이 현실 삶에서 마주하는 오온 등의 구체적 경험 요인이 아니다. 추상적인 교리를 무아라는 개념 위에 덧씌운 형식을 취한다. 즉 사후의 자아라든가 초월적 실체 혹은 연기의 원리 등으로 무아의 이치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방식의 무아란 특정한 이론을 미리 가정하고서 거기에 무아의 가르침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사례는 탐냄의 떠남(離貪)이라든가 해탈(解脫) 등으로 연결되는 실천성을 담보해 내지 못한다. 자아의 유무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던 붓다의 모습과도 이질적이다. 5. 무아 실현의 모색 무아에 대한 논의가 타협이 불가능한 대립적 양상으로 갈린 현대 학자들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의 논의는 언뜻 소통이 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라훌라는 무아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에 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취하지 않고 아무런 관념적 투사도 없이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야말로 무아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이다. 영혼 없음이나 자아 없음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을 부정적인 것이거나 단멸론적인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한편 나카무라 하지메 또한 붓다는 애초 특정한 교리의 확립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유아설(有我說)이든 무아설(無我說)이든 모두 미혹한 범부를 구제하기 위해 설해진 방편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아에 관해 대론을 펼쳤던 이 두 학자에 대해 견해(見, diṭṭhi)나 망상(戱論, papañca)이라는 용어를 떠올리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극한의 대립 양상으로 치달았다. 라훌라는 오온의 무아를 언급하면서 존재는 오로지 오온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또한 오온 안에서뿐만 아니라 설령 오온 바깥에서 오온과 유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붓다는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아뜨만이나 영혼 혹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입장에서 나카무라 하지메는 초기불교의 견해는 ‘아뜨만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아뜨만이다.’라든가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초기불교의 무아설은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되었으며, 최초기의 단계에서는 아뜨만을 승인했고, 바로 그것은 ‘진실한 자기’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라훌라와 나카무라 하지메는 무아에 대해 상반된 논의를 펼쳤던 현대의 대표적인 두 학자이다. 그들은 특정한 주장이나 견해에 매이지 말아야 하며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무아의 실천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 자신부터 양립 불가능한 정반대의 형이상학적 결론에 다다른다. 따라서 필자는 그들의 주장을 한꺼번에 동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쪽은 아뜨만 이외의 어떤 것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방식으로 ‘완전한 자아’를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완전한 무아’를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양쪽 모두가 추상적인 교리적 내용을 절대주의적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무아라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 이들 두 학자에게도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에 의해 시도된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에도 나름의 이유와 설득력은 있다. 또한 붓다 당시에 설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적 무아만을 무작정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필자는 무아의 원래 취지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절대주의적 태도는 독단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쳤던 붓다의 모습과 다르며, 어느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경직된 분위기를 조장한다. 더구나 이들은 경험적으로 입증하기 곤란한 절대주의적 결론으로 귀착되고 있다. 필자는 2장에서 언급했던 니까야 경구들이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했으며, 그 대책까지를 이미 내놓고 있다고 판단한다. 견해(diṭṭhi)의 족쇄에 매이는 것은 치료가 요구되는 비정상의 상황이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붓다는 견해와 망상의 악순환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으로 무기(無記)라는 대처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는 무기라는 소극적 대처법만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범망경(Brahmajāla-Sutta)》에는 반야(般若, paññā)로써 여섯 접촉 장소(六觸入處)의 일어남(集)과 사라짐(滅)과 맛(味)과 잘못됨(過患)과 벗어남(出離)을 알아차리라는 언급이 나타난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견해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 접촉 장소를 알아차리라는 가르침은 망상과 견해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지 말고 인식이 발생하는 첫 순간의 생생함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한편 《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서는 이처럼 ‘내가 있다’는 따위의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을 더욱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현명한 이라면 ‘내가 있다’라는 망상으로 인한 헤아림의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어떠한 갈애가 안에 있더라도 마음지킴(sati)을 확립하여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닦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마음지킴이란 초기불교의 명상을 특징짓는 고유의 술어이다. 이것의 실천이야말로 망상과 견해에서 벗어나 무아를 실현해 나가는 적극적 처방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마치는 말 이 논문은 붓다가 가르친 원래의 무아를 규명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필자는 바로 이것을 ‘실천적 무아’로 규정하고서, 그간 여러 연구자에 의해 주장되었던 형이상학적 무아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실천적 무아’는 구체적 적용 대상을 지닌다. 예컨대 물질현상(識) 따위의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볼 수 없고, 또한 그것을 통해 ‘나’라든가 ‘나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방식은 니까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무아 서술의 양상으로 실천적 과정과 연계되는 특징을 지닌다.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내용들에 대해 ‘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체험 과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니까야에서는 ‘이와 같이 보고 듣는 자’는 물질현상 등에 대한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고 묘사한다. 한편 ‘실천적 무아’와 대조를 이루는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은 부파불교 이래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유형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무아의 적용 대상이 오온과 같은 구체적 경험 요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에서는 추상적인 교리적 내용을 무아라는 개념 위에 덧씌우는 형식을 취한다. 바로 이 점에서 ‘실천적 무아’와 구분되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형이상학적 무아는 나름의 교리적 내용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무아란 오온으로 구성된 경험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보기 힘들며, 니까야에 묘사되는 무아의 양상과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다. 더구나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이미 비판했듯이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은 자체적으로 해결 곤란한 논리적 난점들을 안고 있다. 필자가 이해하는 ‘실천적 무아’는 경험될 수 있는 모든 요인에 대해 ‘나’와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이 경우 무아의 원어인 anattā는 “‘나’가 아니다.”라는 비아(非我)로도, “‘나’의 존재를 결여한다.”라는 무아(無我)로도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둘 다 물질현상 따위의 경험 요인이 ‘나’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물론 후자가 ‘나’를 내세울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자는 경험적 현상들에 대해 ‘나’와의 동일시를 간명하게 거부한다는 점에서 실용적 장점을 지닌다. 필자는 둘 중 어떠한 번역을 선택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현대의 심리치료가들은 무아의 가르침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관찰되는 자기(me-self, 표상적 자기)’와 ‘관찰하는 자기(I-self, 기능적인 자기)’의 구분을 시도한다. ‘관찰되는 자기’는 경험과 동일시되는 개념화되고 실체화된 자기로서 초월되고 극복되어야 할 ‘나’이다. 반면에 ‘관찰하는 자기’는 객관화되지도 않고 대상화되지도 않는 기능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필자는 이러한 구분이 붓다가 가르친 원래의 무아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아의 가르침에서 부정되는 ‘나’란 오온 따위의 경험 요인들을 통해 구축된 허구적인 ‘나’이다. 한편 ‘관찰하는 자기’에 해당하는 ‘나’는 개념화되지 않는 언외(言外)의 영역에서 여전히 그 기능을 계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초점을 모은 ‘나’는 초월되어야 할 허구적인 자기에 국한된다. 붓다는 그러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무아를 가르쳤던 것이며, 무아라는 견해(diṭṭhi)를 절대화하기 위해 무아를 내세웠던 것이 아니다. ■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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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chrome://digitalpalireader(검색 일자, 2018.11.12)
● Abstract Practical Selflessness and Metaphysical Selflessness This paper defines the original teaching of selflessness (anattan) taught by the Buddha as practical selflessness and reveals its difference from the metaphysical interpretations of selflessness which were claimed by various researchers. Practical selflessness has specific objects of application. For example, it is described in such a way that the body (rūpa) is not mine, and the body does not mean me or my self. In addition, this teaching says that we should not identify ourselves with other empirical factors too, like feeling (vedanā), perception (saññā), formations (saṅkhārā), consciousness (viññāṇa) etc. Therefore, in order to realize selflessness, we have to notice the factors which are experienced in everyday life and affirm that all of these factors are not mine, not me or not my self. This means that the teaching of selflessness taught by the Buddha is inherently practical. on the other hand, metaphysical interpretations of selflessness which I call metaphysical selflessness, contrasted with practical selflessness, reflect the doctrinal contents developed by Abhidharma Buddhism and take the forms of explaining the concepts of selflessness as abstract theories. Therefore, the objects of application of metaphysical selflessness are not the empirical factors such as the body (rūpa). This is the crucial difference between practical selflessness and metaphysical selflessness. I do not deny that metaphysical interpretations of selflessness could have its own significance. However, most of the metaphysical interpret-ations of selflessness should be regarded as the metaphysical views (diṭṭhi) or the delusions (papañca) that the Buddha intended to avoid. This paper focuses on the practical aspects of the Buddha’s teaching on selflessness, and insists on the need to be free even from the views of selflessness for the realization of the original selflessness.
● Key word anattan, saṁsāra, vimutti, diṭṭhi, papañca, metaphysical selflessness, practical selflessness [출처] 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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