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철학에서의 구원과 불교의 해탈의 비교*1)
홍영미(서강대)
【주제분류】윤리학, 불교철학 【주제어】예속, 고(둣까), 욕망, 무지, 지혜, 구원 【요약문】현 사회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 사회이며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인은 진정 자유롭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체 왜 인간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가?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는 스피 노자의 철학과 불교 사상에서 구원과 해탈의 문제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제 를 수행하기 위해 본고는 다음과 같은 논의들을 다룰 것이다. 먼저 스피노자와 불 교 양 사상은 삶의 철학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와 붓다의 기본적 관심사는 윤리적인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유로 운 삶을 살 수 있는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에 있다. 다음으로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고에 주목하고 있음을 밝히고 스피노자와 불교 철학에서 고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 로, 그렇다면 인간은 고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고가 삶 의 근본적인 조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은 자유와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스피노자와 불교 사상은 주장하고 있다.
I. 들어가는 말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리 모두 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왜 괴롭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구원과 자유를 외치는가? 실제로 사람들은 행 복을 원하면서도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제로 알지 못하는 것
투고일: 7월 31일, 심사완료일: 8월 14일, 게재확정일: 8월 15일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 구되었음(NRF-2011-35C-A00154).
철학논집(제38집)278
같다.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해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 인 관심이 있어 왔으며 인간을 불행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 가지 차 원의 노력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의사의 길에서, 어 떤 이는 교육자, 정치가의 길에서 또 어떤 이는 종교 수도자나 철학자의 길 에서 인간 존재가 가진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치열하게 싸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스피노자와 불교의 철학적 입장 을 탐구해 보는데 있다. 스피노자와 불교 사상은 자유와 행복, 해탈이라는 구원의 측면에서 볼 때 유사한 구조 속에서 논의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 양자를 비교하는 작업은 적지 않게 어려운 일 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서양 철학인 스피노자 철학과 동 양 철학인 불교를 비교하는 일은 방법론이나 개념적 틀, 사유 체계 등, 여 러 가지 상이함 때문에 비교 분석이 쉽지 않다. 실제로 양 철학을 세부적으 로 들여다보면 존재나 인식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적지 않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주제로서 다음의 과제로 넘긴다. 또한 니 체나 쇼펜하우어, 윌리엄 제임스나 현상학, 혹은 비트겐슈타인 같은 서양 철학자들과 불교 사상의 비교는 종종 있어 왔으나 스피노자 철학과 불교를 비교하는 일은 보기 어렵다. 더욱이 불교 철학은 B.C 6세기 경 고타마 싯 달타(B.C.563-483)가 창시한 이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학파로 분열되고 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접근에 어려움이 있다. 예컨 소승과 승, 혹은 유가행 학파, 중관학파, 선불교, 천태종, 화엄종, 정토 사상 등 다양한 종파로 갈라져 그 이론적 전개도 상이한 점이 많다. 본 연구는 이렇 게 다양한 불교사상 가운데 근본불교1)의 입장에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 다. 근본불교란 붓다가 직접 사유하고 설한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사상으 로 붓다 재세 시부터 불멸 후 약 100년까지의 기간에 전개된 철학을 말한 다. 근본불교는 다양한 불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원점이자 출발점이므로 불교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에 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불교 의 근본 성전이라 할 수 있는?아함경?은 붓다의 가르침이 원래의 형태로
1) 초기불교, 근본불교, 초기근본불교, 원시불교, 원시근본불교 등 다양한 용어들 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근본불교로 통일해서 사용함.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79
가장 잘 담겨져 있는 표적인 경전이다. 본고는 이에 근거하여 근본불교 사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될 것이다. 스피노자와 붓다에 따 르면 모든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고통에 쌓여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삶의 진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거나 외면하는 것은 철학하는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 니다. 유한하고 일회성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구원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시 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를 위해 양 사상가는 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주목한다. 우리의 삶에서 고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떻게 있는지에 한 분석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다음으로 고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발생하 는지를 비교 탐색하고자 한다. 원인에 한 분명한 진단 없이 해결책을 찾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항에서는 고로부터의 극복 방법 으로서 이성적 통찰과 지혜에 주목하는 스피노자와 불교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II.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스피노자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붓다는 동일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그들의 사유를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2)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구원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일상적인 가치와 삶에 한 불만 족을 일찍이 간파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길을 찾아 철학을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 명예, 쾌락을 최고의 선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쾌 락 다음에는 깊은 슬픔이 따르고 명예와 부의 추구는 우리의 정신을 혼란
2) Melamed는 스피노자의 정신적 조상이 데카르트가 아니라 동양의 붓다라고 말 하면서 스피노자와 불교 사상이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들 양 자는 모두 주지주의자이며 지성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고 결정론자이며 욕망을 삶의 근원으로 보았으나 동시에 욕망에서 오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S. M. Melamed, Spinoza and Buddha, Chicago, 1933. preface, vii & 274~275.
철학논집(제38집)280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언제 부를 잃을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명 예를 얻기 위해 중의 비위에 맞추려고 애쓰지만 중은 쉽사리 마음을 바꾼다. 이것은 참된 선도 아니요, 최고의 선도 아닌데 우리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온 힘을 쏟으며 살고 있다.3)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면서 자신의 철학 활동의 출발 을 알린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헛되고 무익함을 경 험을 통해 배운 다음, 그리고 내게 있어 불안의 원인과 상이었던 그 어 떤 일도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혹시 참된 선이 존재하는가, 그것을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모 든 것을 다 제쳐 두고 오직 그것만으로 영혼이 자극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그것을 발견하여 얻은 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탐구해 보기로 결정하였다.4)
붓다(Buddha)는 어떤 인물인가.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고타마 싯다르타를 일컫는다. 그는 인도 샤카족의 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온갖 영예와 특권을 누리면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왕위 계승자로 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훌륭한 교육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라는 귀한 신분과 화려한 삶을 버리고 스 스로 출가의 길을 선택하여 구도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5) 경전에서 보여주 듯이 제자 만동자의 물음에 붓다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무엇보다도 구 원이 절실한 문제임을 설파하고 있다.
3)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부나 명예, 쾌락 등의 일상적 가치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것들이 목적 그 자체로서 추구된다면 해로우나 수단으로서 추구된다면 유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인 최고 선, 즉 지복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Spinoza, Opera-Werke: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hrsg. Konrad Blumenstock, Bd. II Darmstadt, 1967, § 11 참조. 4) Spinoza, Opera-Werke: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 1. 5) ?長阿含經?, 제1권, 제1경은 붓다 출생 후의 모습부터 출가에 이르기까지의 과 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81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나 동료 또는 친척들이 그를 위해 의사를 데려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화살 을 맞은 사람이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가, 바라문인가 귀족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 고 하자. ‘그의 이름은 무엇이고 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나를 쏜 그 활은 보통 활인가 아니면 큰 활인가. 또 나를 쏜 그 화살의 깃털은 무슨 털인가, 독수리의 털인가 솔개의 깃털인가, 아니면 공작의 깃털인가 그것 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만일 그가 그런 것을 알기 전에 화살을 뽑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알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수명을 마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어떤 사 람이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가 영원하다든가 유한하다든가, 또는 세 계는 끝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또는 사람은 사후에도 존재한다든가 존재하 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부처님 곁에서 수행하 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그것을 다 설명하기 전에 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6)
스피노자와 붓다, 양자에 있어 철학은 단순히 지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활동이 아니라 삶을 위한 활동이다.7) 이들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유의 윤리학이요, 불교 철학은 본질적으로 해탈론이 다. 그들이 볼 때 인간은 쾌락과 부, 명예 같은 것에 매달려 잘못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생로병사에 얽매여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어떻게 자유를 획득하고 어떻게 해탈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이에 한 탐구로 들어가 보자.
6) ?中阿含經?, 전유경. 7) 들뢰즈(G. Deleuze)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런 면을 가장 잘 드러내어 주목을 받 았다. 그는?스피노자; 실천 철학?이라는 저서 속에서 다음과 같이 스피노자 철 학을 평가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삶의 철학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해 그 철학 의 요체는 우리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 우리 의식의 조건들과 환상 들에 연결되어 있는 삶을 거역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들을 고발하는 것에 놓여 있다.” G. Deleuze,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1999. 43.
철학논집(제38집)282
III. 예속과 둣까(苦)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은 괴로움이라고 스피노자와 불교는 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절망과 좌절, 고통과 불행 속에서 신음하며 끝없 는 마음의 동요를 겪고 저급한 행복에 취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불교철 학에서 인간이 처한 실상은 길 잃은 나그네가 넓은 광야를 헤매는 모습으 로 종종 비유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과 삶 자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실제로 고(苦)인가? 그렇지는 않다. 스피노자는 그 자체로 좋은 것 이나 나쁜 것,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의 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 선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에 해서 말하자면 이것들 또한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 할 경우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나 우리가 사물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 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한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8)
스피노자에 따르면 마음의 병과 불행은 우리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한 지나친 사랑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 는 것에 해서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9) 만일 우리가 애 써 자유와 행복을 욕망하거나 추구하지 않고, 어떤 상에 해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야말로 아무 관심도 없고 영향도 받지 않는다 면 그것들은 우리를 구속하지도 불행으로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울 일도 없을 것이다.10) 어떤 일을 하려는 욕망이 전혀 없다면 속
8) Spinoza, Opera-Werke: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Ethica, hrsg. Konrad Blumenstock, Bd. II Darmstadt, 1967. 이하에서 Ethica를 E.로 약칭함. E., 4부 서 문. 스피노자의 저서 ?에티카?는 강영계 교수의 번역본을 주로 참조하고 영역 본과 원본으로 위의 책을 참조했음. 9) E., 5부 정리 20 주석. 10) 달라이라마는 우리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상들의 고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83
박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고 어떤 것에 해 관심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 도 전혀 없다면 그것으로 인해 괴롭거나 기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때문 에 “모든 행복 혹은 불행은 오직 우리들이 애착을 갖는 상에만 의거 한 다”11) 붓다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잡아함경?에서 카사파와 세존의 화를 보자.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짓는가’라는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남이 짓는가, 자신과 남이 짓는가,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 고 원인이 없이 생긴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는다고 답하시 면, 그렇다면 괴로움이 없다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카사파에게 말했다. “괴로움이 없지는 않다. 괴로움은 있다.” 다시 카사파가 묻는다.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저에게 이야기하여 제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12)
불교 사상은 인생과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 자체를 본성으로 갖는 존재는 없으며13) 고는 존재 자체의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 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감정으로서 고는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 이다. 다시 말하자면 본래 괴로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 가 환상이라거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붓다는 진실로 이 세 상이 고통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 세상 자체가 괴로움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가 괴롭다고 느낌으로써 우리에게 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해 고가 발생해서 내가 고를 겪 게 되는 것이다. 본래 고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삶은 그야말로 고로 가득 통스러운 측면의 원인과 결과가 설명된다고 말한다. Dalai Lama, ?하바드의 달라이라마?, 김충현 옮김, 새터, 1994, 27. 11) Spinoza,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 9. 12) ?雜阿含經?, 302경. 13) 쇼펜하우어는 불교와 달리 고 자체가 실재하기에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에게 고통은 사물 자체, 삶 자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적이 다. 이에 한 자세한 논의에 해서는, F. Lenoir, ?불교와 서양의 만남?, 양 영란 옮김, 세종서적, 2002. 131~154 참조.
철학논집(제38집)284
차 있다. 인간의 삶의 조건, 삶의 현실은 수많은 곤란과 불만족, 불안과 절 망, 슬픔과 괴로움, 고통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왜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한 진지한 성찰은 없다. 그러기에 이에 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우리가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를 알아야 한다.14) 스피노자는 고통과 슬픔, 부자유와 불행에 빠져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 을 예속상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부분의 인간 존재는 자유 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속상태의 삶을 살아간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예속은 정서(affectus)와 관련되어 있다.15) 정서는 인간이 외부 사물과의 상 호작용에서 오는 신체의 변용에 따른 관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외부 환 경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을 때 산출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식의 자극에 의해 자신의 활동 능력은 증되거나 감소되는 결과가 발생하고 이에 응하여 다양한 정서가 따라 나온다. 정서는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로 나누어지는바 스피노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신체의 활동 능력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신 체의 변용)의 어떤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 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16) 능동적 정서는 인간이 작용17)하는 한에서 따라 나오는 정서로서 정신적
14) 달라이라마가 하버드 학에서 한 강연에서; “당신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고통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 과 고통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Dalai Lama, ?하바드의 달라이라마?, 162. 15) 이에 해서는 홍영미, 「스피노자철학에 있어서 정서와 자유의 문제」, ?철학?, 제89집, 2006, 51~79 참조. 16) E., 3부 정의 3. 17) 스피노자는 ‘작용하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적합한 원인으 로 되어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 생길 때, 곧 우리의 본성 만에 의하여 명석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들의 본성에서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 생길 때 나는 우리가 작용한다고 말한다.” E., 3부 정의2.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85
이고 물리적인 변용에 있어서 그 변용의 원인이 나 자신 안에 있을 때 갖 게 되는 정서이다. 능동적 정서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활동 능력은 증 되고 우리의 힘과 완전성, 자유는 증가된다. 따라서 능동적 정서는 기쁨, 완 전성, 자유의 확장과 연결되는 긍정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수동적 정서는 예속 상태와 관련된다. 예속 상태를 표현하는 표적인 수동적 정서는 슬픔 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서는 크게 욕망, 기쁨 그리고 슬픔으로 구분된다. 슬픔의 정서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활동, 즉 인간의 활 동 능력을 감소하거나 방해하는 활동에서 나오는 것으로18) 여기에는 크고 작은 수동적 정서들이 포함된다. ?에티카?에 나타나 있는 우리를 슬픔에 빠트리는 정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움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 하는 슬픔이고, 싫음은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인 어떤 사물의 관념을 동반 하는 슬픔이다. 그리고 공포란 우리들이 그 결과에 하여 어느 정도 의심 하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라고 스 피노자는 규정한다. 또 절망이란 정서는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을 말한다.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 거의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을 의미하는 양심의 가책도 슬픔의 정서 에 속하고 연민이란 우리들이 비슷하다고 우리가 표상하는 타인에게 일어 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으로 규정된다. 또한 분노라는 정서는 타인 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한 미움을 말하고 후회는 우리들이 정신 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행하였다고 믿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 의 정서로 규정된다.19) 이 밖에도 겸손, 소심함, 치욕 등 크고 작은 다양한 슬픔의 정서들이 있다. 또한 기쁨과 욕망이라는 기본적 정서에 속하는 정서 들이 언제라도 슬픔의 정서로 이행될 수 있다. 이처럼 수많은 수동적 정서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수동의 정서는 우리의 활동 능력을 억제하거나 감소시키기에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수동의 정서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이러한 정서에 예속될 때 우리는 노예상태에 빠 지게 되는 것이다. 예속상태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불안정하고 서로 립
18) E., 3부 정서의 정의 3. 19) E., 3부 정서의 정의, 미움; 7, 싫음; 9, 공포; 13 절망; 15 양심의 가책; 17, 연 민; 18, 분노; 20, 후회; 27.
철학논집(제38집)286
하며 상를 미워하고 서로서로 해악을 가하려고 한다. 인간은 항상 수동적 정서에 필연적으로 예속되고 노예 상태의 인간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운명의 힘에 휩쓸려 이리 저리 파도처럼 려다 니며 고통스러워한다.
정서의 통제에 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예속 상태에 있는 인간,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으며 흔히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긴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처럼 운명의 힘 안에 있다.20)
스피노자의 예속상태에 해당하는 개념을 불교에서 찾는다면 고를 들 수 있다.21) 고는 팔리어 둣까dukkha의 용어를 한역(漢譯)한 것으로 그 어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괴로움, 즉 dukkha라는 말은 원래가 베다어에서의 duh와 kha의 바후브리히 합성어로 duh는 나쁜, 어려운의 뜻을 가진 전철이 며 kha는 베다어에서 수레의 바큇살을 의미하므로 합치면 나쁜 바큇살을 지닌 것이란 뜻이 된다..... 따라서 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나쁜 바큇살을 가 진 차의 불완전성, 동요성, 흔들림, 변화, 혼란이란 사태의 심각성을 지시하 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22) 일반적으로 둣까는 슬픔, 고통, 괴로움 등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 이 용어는 어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 이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신체적인 고통뿐 만 아니라 슬픔, 분노, 절망, 혼란과 오류, 동요, 실존적인 불안, 원하는 바 로 되지 않음 등, 우리 삶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괴로움, 전체적인 불만 족을 가리키는 것이다.23)
20) E., 4부 머리말. 21) J. Wetlesen, The Sage & the Way: Spinoza's Ethics of Freedom, Van Gorcum, Assen, The Netherlands, 1979. 13~15. 22) 전재성,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207. 23) 불교 철학자 칼루파하나는 둣까를 만족스럽지 못함, 불만족으로 이해한다. Kalupahana, J. David,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 Hawaii, 1976. 37. 그리고 뿔리간드라에 의하면 둣까는 그 근본적 의미에 있어서 무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R. Puligandla, ?인도철학?, 이지수 옮김, 민족사,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87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현상들, 불교에서 그것은 사 성제(四聖諦)24) 가운데 고성제(苦聖諦)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고 성제는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 그 자체로 가득 차 있어서 온갖 괴로움 속에 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단계를 말하는데 고의 성제란 이 렇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있어서 태어남은 괴로움이요(生苦), 늙음은 괴로 움(老苦)이다. 병드는 것은 괴로움(病苦)이며 죽음은 괴로움(死苦)이다. 또한 미워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이와 만나게 되고 만나야 하는 것은 괴로움이 요,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거나 헤어져야 함으로써 받게 되는 것은 크나 큰 괴로움이다. 그리고 구하거나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괴로움은 또 얼 마나 많은가. 그 외에 고성제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요소와 정 신적 요소에서 오는 근본적인 괴로움을 의미하는 오취온고(五取蘊苦)가 있 다. 그야말로 일체 존재가 고(一切皆苦)이며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 는 것이다. 경전 상에 이러한 괴로움은 그 성격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25) 첫째, 일반적인 괴로움을 뜻하는 고고(苦苦, dukkhadukkha)이다. 이는 태어나고 늙 고 병들고 죽는 사고(四苦), 사랑하는 상이나 현실, 조건과 이별하거나 미 워하는 상과 마주해야 하는 곤란과 괴로움 등, 물질적, 정신적 측면에서 오는 삶의 모든 괴로움을 말한다. 보통 우리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부 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변화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뜻하는 괴고(壞苦, viparinamadukkha)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끊임 없는 변화를 겪으며 살아간다. 젊고 건강한 신체는 병들고 늙어가며 뜨겁게 사랑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어 간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 은 어느 날 갑자기 불행한 삶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미래에 한 불안, 언
1991, 56. 24) 사성제란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후에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한 내용 으로서 인생을 참되게 살기 위하여 깨달아야 할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여기 에는 괴로움 자체의 진리인 고성제,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인 집성제, 괴 로움의 소멸에 관한 진리인 멸성제,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 한 진리인 도성제가 있다. 25) W. Rahula, What the Buddha Thought, Gordon Fraser, 1978. 19~20.
철학논집(제38집)288
제 나의 지위를 잃을지 알 수 없는 삶, 명예와 권력에 한 성공과 좌절 등, 자신이 가진 조건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기쁨과 즐거움, 행복한 삶의 조건들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에 끊임없이 변화 하는 삶 속에서 유한한 인간은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행 (行), 형성에 의한 괴로움을 뜻하는 행고(行苦, sankharadukkha)가 있다. 행이 라는 말은 쌍카라(sankhara)의 번역인데 조건지어진 것, 조작된 것, 지어감, 유위 등 다양한 용어로 번역되어 사용된다.26) 행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 는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덧없고 무상하기에 느끼는 괴로움, 그야말로 행고는 이 세상 전체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으로 고성제의 가장 중요한 측 면이라 하겠다. 불교 사상 역시 이에 주목하여 고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IV. 정념과 무지, 갈애와 무명
어떤 사람도 고통스러운 삶을 좋아하거나 예속 상태에 빠져 살고자 하지 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괴로움을 겪는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에 한 논의는 존재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스피노자 에 따르면 존재는 실체와 양태로 구분된다. 실체는 ‘자신 안에 있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실체적 존재는 오직 신이 있을 뿐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양태 존재에 속한다.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지만 양태인 모든 사물은 유한한 존재들이다. 이런 점에서 양태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가진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자기 존재 를 지속하고자 노력한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신 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27) 이것이 잘 알려진 스피노자의 코나 투스(conatus) 명제이다. 우리가 인간 존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기본 적이고 본질적인 사실은 코나투스, 바로 이것이다. 코나투스가 없다면 모든
26) 일반적으로 行은 불교철학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가운데 하나로 생 각된다. 행이라는 말은 팔리어 쌍카라를 한역한 것인데 쌍카라는 행, 형성, 의 도, 경향성, 결정, 결합, 지어감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7) E., 3부, 정리 6.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89
존재는 어떤 욕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욕구가 없으면 행동도, 결정도 없을 것이고 존재도 자신을 지속시킬 수 없다. 그야말로 코나투스는 모든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며, 행동하게 하는 동기이고 에너지이다. 그러기 에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이며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노 력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기만을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면서 살아가기를 욕망한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코나투스는 자기 보 존을 보다 잘 하려는 욕망, 자신을 더욱 잘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더욱 크고 강하게 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 노력은 자기의 존재를 긍정하고 자신의 존재 능력을 강화시키며 또한 그것을 확장 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파괴하려는 경향 에 저항하려고 하고 자신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에 환호한다. 그리고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 즐거움을 주고 유용한 것, 자신의 활동 능력이 증 가되는 것을 추구하고 이것이 달성될 때 기쁨과 자유 행복을 느낀다. “행복 하게 혹은 선하게 살며 행동하는 것에 관한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 즉 각자가 자신의 유를 유지하고자 애쓰는 노력”28)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방해나 제한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존재를 잘 보존 해 나갈 수 있다면 어떤 괴로움도, 악도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보존하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기에 인간의 능력 은 불행하게도 매우 제한적이다. 자립적인 실체 존재인 신과 달리 유한 양 태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존재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자 기 존재를 지속시키는 힘은 제한되어 있다. 인간은 다른 것이 없이 오직 자 기 자신만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서 자연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때 문에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쉽지만은 않다. 제한적인 인간의 능력은 언제나 외적 원인의 힘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은 매 우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무한히 압도당한다.”29)
28) E., 4부, 정리 21 증명.
철학논집(제38집)290
우리의 삶에서는 언제나 A라는 존재가 있다면 또 한편으로 A 자체보다 힘 있는 B라는 존재가 있고 또 한편으로 B자체보다 더욱 힘 있는 C라는 존재 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진행된다.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 려는 노력이 제한을 받을 때, 외적 원인에 의해 압도당하여 무능력의 상태 일 때 우리는 수동적 정서인 정념(passio)에 빠지게 된다. “무능력은 인간이 자기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 지배되고 자기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 라 외부 사물들의 일상적 조건이 요구하는 것을 하도록 결정되는 데에 있 다.”30) 정념은 우리가 무능력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외적 원인의 힘에 압 도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무수 히 많은 정념들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이 자기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변화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념 에 예속되고 예속 상태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예속상태로 빠뜨리는 또 하나의 주요 인자는 무지이다. 스피노 자에 따르면 인간이 정념에 예속되는 것은 우리의 인식 활동과 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수많은 정념들은 상상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식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제1종의 인 식인 상상지, 제2종의 인식인 이성지, 그리고 제3종의 인식인 직관지가 그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인간을 예속으로 이끄는 정념은 상상지와 연결된다. 상상지란 상상(imaginatio)에 의한 인식을 뜻하는 것으로 일상적인 삶의 세 계에서 갖는 막연한 경험에 의한 인식을 뜻한다. 막연한 경험에 의한 인식 은 지각하는 자 각각의 감각을 통해 손상되고 혼란스러우며 무질서하게 지 성에 나타나는 개물들로부터 관념을 형성하기에 불분명하고 혼동된 지식이 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상상이란 정신이 그것을 통해서 어떤 사물을 현존 하는 것으로 고찰하는 관념인 바, 이 관념은 보통 외부 사물의 본성보다 인 간 신체의 현재 상태를 더 많이 나타낸다. 그럼으로써 상상에 의해 형성되 는 관념들은 우리 신체의 성향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사물의 본 질에 접근하지 못함으로써 외부 상 그 자체를 올바로 규정할 수 없다. 상
29) E., 4부, 부록 제31항. 30) E., 4부, 정리 37 주석 1.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91
상의 차원에서 인간 정신이 작용할 때 정신은 사물의 참다운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 정념은 우리가 부적합한 관념을 가질 때 나오는 것이다. 상상지는 실용 적인 가치를 가질지 모르지만 오류와 혼란을 포함하는 사유로서 우리를 쉽 사리 정념에로 몰아간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들은 상상하는 한에서만 또는 우리 신체의 본성과 외부 물체들의 본성을 포함하는 정서로 자극을 받는 한에서만 필연적으로 수동적으로 된다”고 말한다.31) 부적합한 사유, 불분명하고 혼동된 인식은 인간을 쉽게 감정적인 동요에 빠지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주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무능력하게 외부 의 미지의 힘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상반된 정서에 사로잡혀서 자 신이 진정으로 욕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행하게 된다. 이는 불분명하고 혼란된 사유, 즉 무지로부터 행위가 이 루어지기 때문에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런 사유에 의한 행위들은 자 기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외부의 조건들에 휘둘려 행해지기 때문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스피노자가 슬픈 정서, 수동적 정서인 정념으로부터 고통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붓다 역시 욕망을 고통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다. 불교는 흔히 욕망을 부정하고 욕망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 해방, 금욕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불교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32) 붓다는 절로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성제의 체계는 한 마디로 욕망의 문제, 욕망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붓다가 설하는 말씀 속에는 무욕(無慾)이란 말은 없으며 그 신 이탐(離貪)이란 표현이 자주 나온다. 붓다는 언제나 무욕이 아니라 이 탐을 설명하고 있다.33) 음식에 한 적당한 욕구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건 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생식에 한 욕구가 없다면 인류는 벌써 종말
31) E., 3부, 정리 56 증명 32) 많은 서양 철학자들은 불교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 사상으로 본다. 예를 들 어 니체는 불교를 생의 의지에 찬물에 끼얹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종교라고 비판한다. 33) 增谷文雄, ?근본불교 이해?, 홍사성 옮김, 불교시사, 1992. 175.
철학논집(제38집)292
을 고했을 것이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건전한 욕망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생존은 보장될 수 없다. 구도를 향한 욕망,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욕 망이 아닌가. 긍정적인 욕망, 서원, 바램은 오히려 우리 모두가 힘써 추구해 야 할 것이다. 붓다는 세간의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 는 기쁨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세상이 욕망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붓다가 무조건적이고 절적인 금욕을 주장하지 않았 다는 것은 고행34) 수도에 한 비판적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고행 수도를 하는 이들은 인간의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한 다. 붓다 역시 출가 후 구도의 길을 걸을 때 6년여에 걸친 엄격한 금욕 고 행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스러운 행동이 아니며 마치 육지에 올려져 있는 배의 노처럼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음을 깨 닫고 중도(中道, majihima patipada)의 길을 설파했다. 고행을 부정적으로 보 는 붓다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붓다가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음 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과도한 욕망, 격정적 욕망인 갈 애와 탐욕이다. 욕망의 여러 가지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는 카마(kama), 찬 다(chanda), 라가(raga), 탄하(tanha)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35) 주로 고를 야기 하는 부정적인 욕망은 욕탐 혹은 탐욕으로 한역되는 라가와 갈애로 번역되 는 탄하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갈애, 욕탐이 있고 우리는 이로 인해 고통 을 겪는다. 일체의 번뇌를 표하는 탄하는, 그 본뜻이 목마름, 갈증을 의미 하는 말로 붓다는 인간의 욕망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라가는 붉은 색, 또는 연소를 뜻하는 말로 욕망 이란 마치 빨간 불꽃과 같이 맹렬한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붓다는 세상은 욕망, 갈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나 또한 갈애에 의
34) 고행은 고 인도, 특히 자이나교에서 유행했던 수도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고행수도는 단식을 하거나 신체를 혹사시키거나 호흡을 억제하는 등, 극단적 인 정도까지 자신의 신체를 괴롭히는 등의 방법을 통해 욕망을 끊음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절적인 금욕을 주장한다. 35) 카마는 주로 감각적인 욕망을 뜻하고 찬다는 의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 다.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93
해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결코 모든 욕망을 없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오는 과도한 욕망, 갈애를 갖지 말라고 말한다. 붓다에 따르면 갈애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형상에의 갈애, 소리에의 갈애, 향기에의 갈애, 맛에의 갈애, 감촉에의 갈애, 사물에의 갈애가 그것이 다. 이것은 주로 감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갈애이다. 그러나 갈애의 영역 은 훨씬 깊다. 다른 경전에서는 갈애를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하여 논하는 바, 욕애와 유애, 무유애가 그것이다. 욕애(欲愛, kama-tanha)를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쾌 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누구나 맛있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원하고 멋진 신체를 꿈꾸며, 안락한 주거 공간을 소망한다. 쾌락을 싫어하는 이는 없으며 고통을 좋아하는 이도 없다. 기쁨과 자유에 한 욕 망은 본성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어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가능한 한 영원한 행복을 꿈꾼다. 유애(有愛, bhava-tanha)란 존재에 한 갈망을 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피하려고 하며 가능하다면 계속 존재하기를 원한다. 살려는 의지만큼 강한 욕구가 또 있을까. 많은 철 학자들이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한편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무유애(無有愛, vibhava-tanha)가 있다.36) 유 애가 존재에의 갈애, 즉 상이 ‘항상하다, 영원하다’라고 보는 영원주의를 함축하는 갈망이라면, 무유애는 상이 ‘단절한다, 멸망한다’고 보는 허무주 의를 함축하는 갈망과 탐욕을 가리킨다.37) 갈애, 탐욕은 끝없는 욕망과 집착을 발생시킨다. 부분의 인간은 지족 (知足)을 모르고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한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
36) 무유애는 단멸애, 혹은 무색애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무유애에 해서는 여 러 가지 해석이 있다. 예를 들어 라훌라는 무유애란 존재하지 않는 것에 한 갈망이라고 하고, 전재성은 쾌락의 존재가 무상의 속성에 의해 불쾌의 존재로 변화되었을 때 불쾌의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무유애, 즉 비존재의 갈애의 본질적인 의미라고 말한다. Rahula, W., What the Buddha Thought, 29. 전재성,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291. 37) Visuddhimagga of Buddhaghosa., 전재성,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290에서 재인 용.
철학논집(제38집)294
른 욕망, 더 많은 욕망을 세워서 거기에 집착하고 벗어나질 못한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에 어떻게 집착하는지에 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 일 마음을 내면 얽매어 집착하고 마음을 내지 않으면 얽매어 집착하지 않 나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어떻게 마음을 내면 얽매어 집착하는가. 어 리석고 무지한 범부들은 물질의 모임, 물질의 멸함, 물질의 맛, 물질의 근 심, 물질을 떠나기를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에 해서 사랑하고 기뻐하며 찬탄하고 취착하며 물질에 해서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내 것이라 고 하여 그것을 잡는다.”38) 그러나 탐욕과 집착이 가져오는 문제는 실로 크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병이 나고, 욕망 때문에 종기가 나며, 욕망 때문 에 가시가 난다.39)
탐욕에 집착하면 마음을 덮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기도 하고 남을 해치기 도 하며, 둘을 다 함께 해치기도 한다. 현세에서 죄를 받기도 하고, 후세에 서 죄를 받기도 하며 현세와 후세에서도 다 죄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제나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또 만일 성냄에 덮이고 어리석음에 덮이면, 자기를 해치기도 하고 남을 해치기도 하며 자 기와 남을 함께 해치기도 한다. 내지 언제나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또 탐욕은 장님이 되게 하고 눈을 없게 하며 지혜를 없게 하 고 슬기의 힘을 약하게 하며 장애가 된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갈애와 욕탐과 이에 한 집착이 얼마나 해 로운 것이며 무서운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붓다는 갈애와 욕탐이 얼 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여러 비유를 들어 강조하곤 했다. 끔찍한 재앙을 불러오는 홍수에 비유해서 지나친 애착에 빠져 쾌락에 몸을 맡기 는 사람은 결국에는 그 물살에 휩쓸려 흘러가 버리게 된다고 경고한다든지, 혹은 격정적인 욕망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유하면서 탐욕에 눈이 멀 고 그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바람을 향해 모닥불을 드는 사람과 같아서 그것을 빨리 버리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 불길에 휩싸여 큰 화를 당할 것이
38) ?雜阿含經?, 44경. 39) ?雜阿含經?, 1168경. 40) ?雜阿含經,?, 973경.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95
라고 말한다. 지나친 욕망에 매달리고 이로부터 괴로움을 겪는 것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혹은 단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갈애와 욕탐 은 모든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있어 우리는 이로 인해 온갖 번뇌에 시달 린다. 불교 사상에 따르면 고통을 야기하는 과도한 욕망인 욕탐과 갈애는 다름 아닌 무명(無明,avijja) 때문이다. 무명은 팔리어로 지식을 뜻하는 빗자 (vijja)의 반말, 아빗자를 한역한 것인데 무명이란 어리석음이요,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체 무엇에 한 무명이란 말인가. 붓다에 따르 면 무명이란 표적으로 사성제에 한 무지를 말한다. 괴로움에 해서 알 지 못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해서 알 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하여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명이다. 무명은 또한 현실 존재와 그것의 본성에 한 무지이기도 하다. ?잡아함 무명경?은 이에 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른바 무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이에게 그 무명이 있습니까.....무명이란 이른바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알지 못하면 그것은 무명입니다.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 이른바 물질은 덧없는 것이니 물질의 덧없음을 참되게 알지 못 하고 물질은 닳아서 없어지는 법이니 물질이 닳아서 없어지는 법임을 참 되게 알지 못하며 물질은 나고 멸하는 것이니 물질의 나고 멸하는 법임을 참되게 알지 못합니다.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은 덧없는 것이니 느낌(수, 受), 생각(상,想), 지어감(행,行), 의식(식,識)의 덧없음을 참되게 알지 못하 고...이 다섯 가지 받아들이는 쌓임에 해서 참되게 알지 못하고 보지 못 하며 지극히 평등하지 못하고 어리석고 어두어 밝지 못하면 그것을 무명 이라 하며 이것을 득한 사람을 무명이 있다고 합니다.41)
다수의 인간은 인생과 사물의 진상을 잘 모르고 무명 속에 빠져 살아 가기 때문에 집착, 자기의 선호, 편견, 이기심, 혼동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 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안정되지 않은 것을 안 정된 것이라 말하며, 상적인 것을 절적인 것으로 보고 마치 죽음은 자 신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이와 같이 무지하고 어리석기에 욕 탐을 추구하며 갈애의 지배로부터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고 고통을 겪게
41) ?雜阿含經?, 256경.
철학논집(제38집)296
되는 것이다.
V. 신에 대한 지적 사랑과 반야바라밀
고가 실제로 어떤 것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알았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 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방향을 잡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 다. 스피노자와 붓다는 고가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은 고통에 정복당하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존 재, 즉 자유와 지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한 다. 먼저 스피노자의 입장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정서의 실체를 잘못 이 해하고 있는 전통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정치론?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경건하게 보이려고 개는 그러한 정념들을 비웃거나 측은해 하거나 또는 비난하고 저주한다.42)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이 분노나 슬픔, 우울함에 빠져 괴로워 할 때 정념을 탓하기에 급급해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한하 고 제한적인 능력을 갖는 인간 존재가 정념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자신이 어떤 정념에 빠져 있다고 슬퍼할 것도, 화 낼 것도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가 약하다고 스스로를 탓할 것 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해 슬픔이나 분노를 느낀다면 정념을 탓하 고 정념에 빠진 자신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념을 이해하도록 애써야 한 다. 그리하여 어떻게 정념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념의 예속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의 일 은 정념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려 들지 말고 객관적이고 사심 없이 자신이 42) Spinoza, ?정치론?, 김호경 옮김, 갈무리, 2009. 1장, § 1.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97
가진 정념의 실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두고 객 관적으로 정념을 바라보라. 객관적으로 정념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념의 원 인과 기원을 통해서 그 정념의 실체를 알아보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단 순한 느낌에 불과하거나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정서 는 분명히 어떤 인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정서를 야기한 원인이 존재한다. 때문에 모든 정념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 “정서들은 정확한 원인 을 갖고 있으며 그 원인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3) 자신이 가진 정념에 해 그 이유를 충분히 그리고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그 정념이 어 디에 문제가 있으며 왜 그런 정념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무엇인지 등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 이 과도한 욕망이나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불필요한 분노와 슬픔, 고통에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진 정념의 실체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 다. 이로부터 정념의 극복을 통해 구원에 다가가려는 스피노자의 의도는 객 관적인 이해, 인식 활동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모색하는데 있어 결코 도덕적인 계율이나 윤리적인 법칙, 종 교적인 명령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인식 활동, 철학적 이해를 주장한다. 수동적 정서인 정념의 발생이 상상지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정념 의 극복은 이성지와 직관지에서 나온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지와 직관 지를 통해 인간은 올바른 사유를 할 수 있고 이로부터 적합한 관념을 형성 할 수 있다. 이성지와 직관지는 사물의 본성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의 질서에 따라 인식하는 적합한 사유 방식이다. 정신이 적합한 관념을 가질 경우에만 혹은 이성적으로 사유할 경우에만 사물에 관한 확실성은 담 보된다. 왜냐하면 적합한 사유 활동은 사물의 본성에 입각하여 사물을 그 내적 연관에서 깊이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이 이성의 차원에서 작용한다면 정신은 전체의 관점에서 모든 사물을 하고 그 자신 과 다른 사물을 내재적인 원인을 통해서 서로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도록
43) E., 3부, 머리말.
철학논집(제38집)298
인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의 상 아래에 서(sub specie aeternitatis), 영원성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 을 영원성의 관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자연의 필연성의 관점에 따라 사유 하는 것을 뜻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은 곧 자연이기 때문에 이는 바 로 신에게 관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필연성은 신의 영원한 본성의 필연성 자체이기 때문에 사물을 필연성의 관점에서 지각하는 것은 신을 인 식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사유할 때 정신은 사물들의 필연적인 연결 관계 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사건은 그것이 일어나는 로 일어날 뿐 이다. 자연 안에 우연적인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필연성 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자연과 우리의 합일에 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사물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에 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s)이다. “신 에 한 지적 사랑은, 정신이 신의 본성을 통해서 영원한 진리로 고찰되는 한 정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44) 이것은 정서에 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과 자 신의 정서들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이는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들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신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 다.45) 우리가 영원성의 관점에서 사유함으로써 사물에 해 적합한 관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가진 정념에 해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면 정념들은 소멸되거나 상당 부분 그 힘이 약해질 것이다. 마치 분노, 슬 픔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감정으로부터 작용을 덜 받고 덜 자극받게 되는 것처럼 정신은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 로 인식하는 한에서 정념의 작용을 덜 받게 된다.
말하자면 사물이 필연적이라고 하는 이 인식이 우리가 더 명백하게 그리 고 한층 더 생생하게 상상하는 사물에 확장되면 될수록 정서에 한 정신 의 힘은 더욱 더 크며, 이것은 경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왜냐하면 상실 된 선에 한 슬픔은 그 선을 잃은 사람이 어떤 식으로도 그 선을 보존할
44) E., 5부, 정리 37 증명. 45) E., 5부, 정리 15.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299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벼워진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기 때문이다.46)
그러므로 예속상태를 벗어나 자유인의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성 혹은 이성 의 충실한 활동을 통해서 부적합한 사유와 관념은 상당 부분 제거될 것이 고 부적합한 정념은 명석판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사유 활동을 통해 서 수동적 정서는 능동의 정서로, 슬픔의 정서는 기쁨의 정서로, 무능력은 능력으로, 그리고 부자유는 자유로 이행될 수 있다. 불교 사상 역시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보고 알고 깨달을 것을 말한다. 붓다 또한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명령이나 초월적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 즉 해탈에 이르고자 한다 면 오직 자신의 지혜와 노력이 요구될 뿐이다.47) 갈애와 이를 야기하는 무 명으로 인해 고통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갈애를 멸하기 위해서 무명을 벗어 나는 일이 중요하다. 불교 철학에서 무명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은 존재의 실상을 보라는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로 보는 것, 붓 다는 그것을 여실(如實)히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존재 를 제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물을 있는 그로 여실히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방해하는 자신만의 호오(好惡) 집착, 탐 욕, 우매함, 두려움 등 수많은 주관적 태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46) E., 5부, 정리 6 주석. 47) “붓다는 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 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 구를 만족시켜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정하리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 고 존재와 인간의 진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참다운 구제 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업을 신에게 위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 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增谷文雄, ?아함경?, 이원섭 옮김, 현암사, 2005. 242~243.
철학논집(제38집)300
근본적으로 현상들의 참된 본질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통 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존재와 사물, 현상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보여지거나 들려오거나 생각되거나 느껴지는 등 우 리에게 나타나는 그로 여실히 보고 알라고 말한다.48) 사물을 있는 그로 여실하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최 고의 지식이다. 붓다에 따르면 존재를 여실하게 보는 것은 지혜에 의해서 가능하다. 지혜란 팔리어, 반야panna를 한역한 것인데 반야바라은 최고의 지혜,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여러 경전에서 지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 급된다. 예를 들면, 지혜는 ‘해탈을 위한 도구’로서 그것은 마치 ‘농부의 쟁 기’ 같은 것이고 ‘의사의 수술 칼’ 같은 것이며 ‘무사의 칼’ 같은 것이다. 때문에 지혜는 날카로운 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는 애착을 끊어낼 수 있 고 악마와 그의 군를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힘이요 능력으로 작용한다.49) 지혜의 그런 능력을 통해서 존재의 실상이 여실하게 통찰되며 무지의 장막 은 서서히 걷혀지게 된다. 완전한 지혜, 반야바라에 의해서 존재의 실상을 올바르게 본다는 것은 ‘실제 있는 그로’가 아닌 ‘되어 있는 그로’의 존재를 본다는 것이다. 불 교 사상에 따르면 일체의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 인연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서 상호작용하는 체계 속에 서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서로 인과적으로 의존해 있다. 이것이 바 로 불교 사상의 근본적 교리인 연기법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해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 게 되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소멸한다’는 연기(緣 起,paticcasamuppada)의 기본 정식은 잘 알려져 있다. 연기법에 따라 모든 것 은 인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요, 우리가 존재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행 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된 유위(有爲), 즉 쌍카타(sankhata)이다. 행이 있어,
48) 불교는 근본적으로 경험을 매우 중시하는, 경험에 의거한 사상이라 할 수 있 다. 불교사상가 칼루파하나는 불교 사상을 근본적 경험론으로 해석한다. 또한 이런 점에서 종종 윌리엄 제임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이에 해서는 「윌리암 제임스와 유가행 철학」, E. Conze, 外,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172~211 참조. 49) Johansson, E. A. Rune., ?불교심리학?, 박태섭 옮김, 시공사, 1996. 222.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301 행을 조건으로 하여 유위, 쌍카타가 만들어진다.?잡아함 캇자나경?은 이에 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물질을 물질성으로 유위로 조작해 내 며 감수를 감수성으로 유위로 조작해내며, 지각을 지각성으로 유위로 조작 해 내며, 형성을 형성성으로 유위로 조작해내며, 의식을 의식성으로 유위로 조작해낸다.”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생겨난 것이요, 인연에 의해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 영원한 것, 고정된 것, 한결 같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없 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야말로 모든 존재들은 덧없는 것, 항상됨이 없이 변하는 것, 무상한 것이다.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 혹은 인(因)으로 혹은 연(緣)으로 말미암아 모든 물 질이 생기더라도 그것도 또한 항상됨이 없느니라. 항상됨이 없는 인과 항 상됨이 없는 연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물질이 어떻게 항상됨이 있겠 는가. 이와 같이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도 항상됨이 없다.50)
그러므로 그 자체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세 상에 있는 모든 존재, 모든 현상은 인간이 만들어 낸 유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일 뿐, 어떤 존재도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실체적 존재 가 없다는 것은 고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괴로 움의 근원은 결국 자아에 한 사랑과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불교사상에 따르면 사실상 고통은 독립적이고 실체적인 나가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 객관적인 어떤 존재로 자신 을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예컨 철수라는 어떤 존재로 태어나서 성장하고 변화해 가며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일정 기간을 살아가다가 죽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철수라는 존재로서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타자와 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그런 존재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나이고 나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것은 나의 것이고 나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다. 이로부터 수많은 갈애와 집착이 발생되는 것이 다. 50) ?雜阿含經?, 11경.
철학논집(제38집)302
그러나 나는 없고 나의 것도 없다. 태어나는 내가 있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가 없이 인연에 따 라 이러저러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이를 나라 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수많은 것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에 편의상 철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뿐, 진정한 나는 없다. 모든 존재는 연 기한 것으로서 인과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 또한 모든 존재는 항상됨이 없는 덧없고 무상(無常, anicca))한 것이라는 것, 이로부터 제법무아(諸法無 我),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무아(無我, anatta)의 진리를 깨닫고 무명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혜의 궁극적 목표는 기쁨, 해탈, 열반이다. 올바른 지혜, 반야바라에 의해 연기의 법, 무아의 세계를 깨달을 때 무명은 제거 되고 우리는 해탈의 경지에 다가서게 된다. 스피노자가 이성의 차원에서 적 합한 인식에 의한 정념의 제거를 주장했듯이 불교사상은 올바른 지혜에 의 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 라.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 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 어지면 마음의 해탈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도 또한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 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마음의 해탈이라 하느니라.51)
Ⅵ.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스피노자철학과 불교 사상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구원 과 해탈의 문제를 중심으로 양자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이들 두 사상은 모 두 삶을 치유하고자 의도한다는 점에서 실천철학이요, 삶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기본적 관심사는 이론적인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적인 문제 51) ?雜阿含經?, 1경.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303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데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 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것으로 학문이 인간의 선을 위 해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은 탐구할 가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참된 철학을 찾아 일상적인 선과 가치, 기존의 잘못된 윤 리이론을 비판하면서 자유의 윤리학을 제시한 것이다. 불교 역시 스피노자 와 다르지 않다. 붓다는 원래 윤리적 스승이었지 사변적 형이상학자는 아니 었다. 붓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크게 유용하지 않으며 지적으로 불 확실한 형이상학적 논의보다는 실제적인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일 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철학은 단순히 지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활동이 아니 라 구원을 얻는 행위이고 구도적인 행각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붓다에 의하면 구원과 해탈이라는 실천적인 윤리적 과제를 위해서 존재에 한 이해나 진리에 한 통찰 같은 올바른 인식 활 동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구원과 해탈이라는 과제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어떤 신비한 능력이 아닌 인간 존재의 이 성적 통찰과 명철한 지혜의 힘으로부터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 정념과 갈애, 탐욕의 예속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오직 앎, 지 혜를 통한 사유 활동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먼 곳에서 헛된 구원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참다운 구원을 찾아 길을 나서야 한다. 스피 노자와 붓다는 올바로 알지 못하면서 자족하는 맹목적인 상태 속에 구원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직 이성으로써 지혜의 칼을 들고 고통의 실체에 의 연하게 맞설 때 구원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스피노자는 끊임없는 지성의 개선을, 붓다는 정신 수행과 명상을 통한 지혜의 통찰을 주문한다. 지성의 개선과 부단한 수행을 통해 세계와 자아에 한 올바른 성찰을 하라. 이를 통해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해탈의 길로 한걸음 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논집(제38집)304
참고문헌 ?雜阿含經? ?長阿含經? ?中阿含經? ?增一阿含經? 강영계, ?에티카?, 서광사, 1990. 이중표, ?근본불교?, 민족사, 2002. 전재성,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增谷文雄, ?근본불교 이해?, 홍사성 옮김, 불교시사, 1992. 增谷文雄, ?아함경?, 이원섭 옮김, 현암사, 2005. 홍영미, 「스피노자철학에 있어서 정서와 자유의 문제」, ?철학?, 제89집, 2006. 51~79. Conze, E. 外,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김종욱 편역, 민족사, 1994. Dalai Lama, ?하바드의 달라이라마?, 김충현 옮김, 새터, 1994. Deleuze, G.,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1999. Johansson, Rune E. A., ?불교심리학?, 박태섭 옮김, 시공사, 1996. Kalupahana, David J.,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 Hawaii, 1976. __________________, “The notion of suffering in early Buddhism compared with some reflections of early Wittgenstein”, Philosophy East & West, 27, no.4, 1977. Lenoir, F., ?불교와 서양의 만남?, 양영란 옮김, 세종서적, 2002. Melamed, S. M., Spinoza and Buddha, Chicago, 1933. Puligandla, R., ?인도철학?, 이지수 옮김, 민족사, 1991. Rahula, W., What the Buddha Thought, Gordon Fraser, 1978. Revel, J. F./Ricard, M., ?승려와 철학자?, 이용섭 옮김, 이끌리오, 1997. Spinoza, Opera-Werke: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Ethica, hrsg. v. Konrad Blumenstock, Bd. Ⅱ Darmstadt, 1967. Spinoza, ?정치론?, 김호경 옮김, 갈무리, 2009. Thomass, B., ?비참할 땐 스피노자?, 이지영 옮김, 자음과모음, 2013.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구원 305
Wetlesen, J., The Sage & the Way: Spinoza's Ethics of Freedom, Van Gorcum, Assen, The Netherlands, 1979.
[출처] 스피노자철학에서의 구원과 불교의 해탈의 비교|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인도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 중국 일본 (0) | 2019.11.03 |
---|---|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0) | 2019.10.20 |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의식 그리고 실천 (0) | 2019.10.20 |
불교의 생명사상에 관한 한 고찰-조수동 (0) | 2019.10.06 |
무아설과 윤회설의 문제 / 김진 (0) | 2019.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