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왜 인도에서 사라졌을까?
중국이나 일본, 한국은 물론 남방의 상좌부권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해온 불교가 왜 하필 고향인 인도에서는 멸망했을까. 이 문제는 모든 불교학자와 인류학자, 불교신자들이 1000여년간 궁금하게 여겨온 불교사(史)상 최대의 미스터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슬람의 침공으로 망했다고도 하고, 밀교화된 불교가 더 이상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띄지 못해서 힌두교로 흡수됐다고도 하고, 또 스님들이 나란다대학에서 공부만 열심히 해서 민중들이 외면했다는 등 수많은 설명들이 난무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답을 내린 학자는 거의 없었다.
일본 레이타구대 호사카 슌지 교수가 쓴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가 동국대 김호성 교수의 번역으로 7월초에 출간됐다.
이 책은 불교가 쇠망할 당시의 인도이슬람 최고(最古) 자료인 『차츠나마』를 통해서 불교의 쇠망요인을 분석, 7~8세기 서인도불교의 상황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차츠나마는 711년 이슬람이 인도에서 처음으로 침공한 신드지역의 이슬람 전파 경위를 담고 있는 사료이다.
호사카 슌지는 지금까지 제기돼온 기존의 불교쇠망 원인들을 모두 소개하면서 그 이유가 그럴듯하면서도 틀린 이유를 조목조목 제기한다.
우선 이슬람 침공으로 망했다는 설이다. 일반적으로 불교학계에서는 1203년 밀교의 근본도량으로 번영하고 있던 동인도의 비크라마실라사(寺)가 이슬람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살해된 것을 ‘인도불교의 종언’으로 본다.
그런데 이슬람 침공으로 불교가 쇠망했다면, 다른 종교들 즉 힌두교나 자이나교는 왜 망하지 않고 건재했을까. 설령 사원이나 승려가 전멸당했다 하더라도 불교를 지탱하는 신도들이 있었다면 충분히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이 설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둘째 불교가 가진 합리주의, 혹은 이성주의적 경향(현실부정의 경향까지 포함)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도 유력한 설이다. 대승불교가 대단히 심원하고 고상한 철학을 발달시켰지만, 그 무렵에는 대사원 깊숙한 곳에서 논의된 것일 뿐 일반 민중들에게는 보급되지 않았다. 이같은 ‘헝그리 정신’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힌두교와의 경쟁에서 지고 말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가설의 오류는, 당시 사료를 뒤져보면 금방 드러난다. 차츠나마에 등장하는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결코 민중들에게 유리되지 않았고, 밀교적인 의식까지 수용해 민중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셋째 밀교화된 불교가 더 이상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띠지 못해 힌두교로 흡수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불교는 가정의례나 일상의례를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힌두교사회에서 불우했던 하층민이나 이민족, 상인계층이나 정통성을 갖지 못한 하층출신의 왕(대표적인 예가 아쇼카왕), 이민족의 지배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훨씬 더 많은 계층에 흡수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같은 가설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면, 왜 불교는 멸망한 것일까.
호사카 교수는 “이슬람 침략 이후 안티힌두교라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이슬람이 대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의 정치적 역할은 소멸하고 말았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호사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은 힌두교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지탱되고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나름대로 균형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침입하자,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안티힌두교로서의 역할이 불안정해졌다.
당시 불교는 안팎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모으기 위해 불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안티 카스트세력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온 불교를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존속기반인 힌두교를 강화할 수 있었다.
무슬림 또한 불교도들에게 개종을 요구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차츠나마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이슬람이 쳐들어와 “개종, 공물, 죽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불교 승려들은 당시 정치 지도자에게 항복을 선택하도록 권유했다는 사실이다.
불교도들은 불상생계를 중시했기 때문에 전쟁을 거부했고, 차라리 이슬람의 지배에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를 선택했다. 당시 스님들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이교도의 탄압과 강제개종 후 불교는 이 지역에서 소멸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불교가 쇠망한 것은 이슬람의 침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무력적인 탄압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이 불교가 인도에서 지닌 사회적 지분을 너무도 강력하게 삼켜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칼’을 든 이슬람은 불교보다 훨씬 더 강한 충격으로 힌두교와의 대립관계를 형성했고, 이 둘의 팽팽한 대결구도 속에 불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호사카 교수는 “일찍이 불교가 융성했던 지역과 오늘날의 이슬람 우세지역 사이에서 아주 깊은 관련성이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인도사회에서 반(反)힌두나 반(反)바라문지상주의 세력이었던 불교와 이슬람교의 사회적 기능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원인이 반힌두 즉 계급과 신분을 넘어서는 평등사상 때문이었듯이, 불교가 쇠망했던 이유 또한 보다 더 강력한 평등사상을 내세운 이슬람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슬람이 침공하자 반힌두적인 이념 때문에 불교를 선택했던 수많은 이들이 불교보다 더 강력한 항힌두교인 이슬람으로 적잖게 개종했던 것이다.
힌두교와 불교, 그 팽팽한 사회적 대립관계가 깨짐으로서 불교 또한 인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 책의 재미는 책의 결말이 불교 멸망의 미스터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책의 스토리는 인도에 이어 일본, 미국으로까지 이어진다.
호사카 교수가 이 주제를 연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95년 3월 도쿄에서 발생한 옴진리교 사건이었다.
옴진리교는 변칙적이고 독선적이면서도 참된 불교를 표방하고 있었다. 불교교리를 빙자하여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이 신흥종교의 살인행위를 보면서 당시 일본 불교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찬성도 하지 않았지만, 반론이나 비난 역시 거의 없었다.
호사카 교수는 이 사건을 보면서 일본불교의 멸망 조짐을 발견했다. 종교적 자정능력을 잃어버리고 사회로부터 유리된 불교. 호사카 교수는 “어쩌면 일본불교 또한 인도불교와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나를 휩쌌다”고 설명했다.
호사카 교수는 이슬람이 쳐들어왔을 때 힌두교도들이 불교에 대한 탄압을 통해 힌두교의 단합을 도모한 것을 19세기말 일본의 폐불훼석 메카니즘과 같은 원리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미국 흑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경우 또한 인도인들의 이슬람 개종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를 토대로 하는 미국 노예제와 힌두교를 토대로 하는 인도 카스트제는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늬만 다른 똑같은 제도에 불과하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 대상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삶의 양식, 즉 생활의 수단이며 생존의 기본이다. 적어도 근대라는 이성만능주의의 베일을 덮어쓰기 이전의 인간에게 종교는 인간생활의 첫걸음이며 최후의 의지처였다. 그러므로 종교의 존재는 문화나 문명 연구에서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이다.”
호사카 교수의 이같은 결론은 이 시대 불자들에게 ‘종교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근대 이후 장례불교로 전락한 일본불교, 사회적 준거로서의 역할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있는 한국 불교. 그들은 과연 불교가 인간 첫걸음이며 최후의 의지처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도서출판 한걸음더,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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