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분별없는 가르침'
한 스님이 물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 선택하지만 말라고 했습니다. 말을 꺼냈다 하면 그것은 가려 선택하는 것이 되는데,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겠습니까?”
“어째서 옛 사람의 말씀을 다 인용하지 않느냐?”
“저는 거기까지 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함을 꺼릴 뿐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신심명의 이 법어(法語)가 계속 인용되고 있습니다. '도(道)란 단지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뿐입니다. 선(善)이니 악(惡)이니 가리지 않고(그렇다고 악한 일을 행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겠죠?), 좋음 싫음 구분치 않고, 괴로움 즐거움 나누지 말란 소리입니다. 그냥 이 모든 것, 바로 번뇌 망상이 오직 마음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위 질문은 '이 도(道)란 단지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스님께선 말을 꺼냈다 하면 바로 분별하는 것이라 말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말도 하지 않고 어떻게 수행자들을 가르치겠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후배들을 지도(指導)한다는 그 의미를 말해달라는 것이죠.
조주는 답하기를, '왜 법어(法語)를 모두 인용하지 않는가?', 즉 ‘지도무난 유혐간택’ 뒤의 구절(語句)인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은 말하지 않는가? 라고 되물었습니다. '다만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분명히 통하여 명백하리라!', 위에서 좋음, 싦음 구분하지 말라고 했죠. 증애(憎愛)에 대한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큰 도(道)와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 수행자가 '저는 여기까지 밖에 모릅니다'고 하자, 조주는 “그래 그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단지 가려 선택함을 꺼릴 뿐이니라.” 단막증애 통연명백, 이것은 몰라도 되니 지도무난 유혐간택만이라도 제대로 체득해라! 법안선사의 말씀처럼 병정동자(丙丁童子)가 다시 불을 구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106. '생사를 벗어나는 길'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설했다.
“경전을 보아도 생사 속에 있고 경전을 보지 않아도 생사 속에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한 스님이 불쑥 물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8만 대장경전을 다 보고 읽어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 읽지 않는다 하면 더욱 더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禪)의 이치인, 자신의 성품(自性)을 보지 못하면 결국 생사의 사슬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생사를 벗어나겠습니까?
한 스님이 '그러면 경전을 읽음도, 읽지 않음도 분별치 않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란 말은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즉 경전을 꼭 읽어야 한다, 또는 읽을 필요가 없다 하는, 가려 선택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조주의 대답은 '만약 그대가 그 말 그대로 한다면 당연히 생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만 말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사를 벗어날 한 마디를 해봐라!' '하늘 높이 치든 조주의 막야검, 산 속의 참새들 웃음 지으며 떨어진다.'
107. '예리한 칼날'
한 스님이 물었다.
“예리한 칼날이 잘 드는 때에는 어떻습니까?”
“나야 말로 예리한 칼인데 어디가 잘 드느냐?”
'예리한 칼날', 조사, 선사들의 예리한 한 마디 가르침은 수행자들의 가슴을 비수(匕首)로 후비는듯 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殺人刀)라고도 하고, 또한 죽은(어리석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활인검(活人劍)이라고도 합니다.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말 한 마디로 사지를 찢어발기고, 마음을 풍비박산 내어 버리니 어디엔들 눈을 둘 곳이 없습니다. 너무나 날카로운 칼날인 것입니다.
'이런 칼날로 잘 자를 때는 어떠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조주는 당연히 '이 노승이야 말로 진짜 예리한 칼인데, 어디를 한 번 잘라 줄까?' 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 뜻만 알아들으면 칼을 들 필요도 없을 텐데, '그대에게 칼날을 들이대면 그대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 하고 염려된다는 말씀입니다. 뒷얘기가 없으니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았는지, 조주의 표정이 궁금합니다. 저라면 우선, '저를 자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조주는 칼로 싹 베는 시늉을 했겠죠. 그 때 저는 그 칼을 칼로 맞받았을 것입니다.
108. '큰 난리는 좋은 것'
한 스님이 물었다.
“큰 난리(大難)가 닥쳤을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그 잘됐구나!”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서 백성들이 이리저리 달아나고 도망칠 때는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는데, 조주는 '그 잘됐구나!' 라고 대답했습니다. 도무지 이상한데요. 전쟁, 내란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갈 판인데, 그 좋다?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이지요?
그런데, 마음공부에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마음)에 폭풍과 같은 전쟁, 내란이 일어나고, 백성들(번뇌망상)이 추풍낙옆처럼 뚝뚝 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당연히 띵호아! 라는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수천년된 자기 고향 땅을 이제야 밟는 것입니다. '고향 땅 저 남쪽 바다, 잠방이 적신 푸른 물속에 산호 달을 따네.' 악!
109. '사람을 구한다'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한참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대중은 다 모였는가?”
“다 모였습니다.”
“한 사람이 더 오면 그때 말하겠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큰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 얻기가 참으로 어렵구나(大難得人)."
설법하려는 사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잠자코 있는 것을 한자어로 양구(良久)라고 하는데, 오늘은 조주선사가 강단에 올라왔는데도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윽고 말을 합니다. '우리 관음원의 대중은 모두 모였는가?' 라고 물으니 아마도 총무 격의 유나스님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모였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조주는 '그럼, 한 사람만 더 오면 되니 기다렸다가 나중에 설하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찾아온다고 기다리겠다는 것일까요? 짐작이 옵니까?
유나스님이 '기다리다가 아무도 오지 않으면그 때 큰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허! 기다려본들 올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여하튼 기다리겠다고 하시니, 나중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때 알려 드리겠다' 는 뜻입니다. 방문할 사람이 누가 또 있습니까?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곧바로 조주의 대답이 나옵니다. '사람 얻기가 정말 어렵구나(大難得人)', 여러분은 이 말이 수긍이 옵니까? 그 수행자는 '아무도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한 셈인데, '너라는 놈도 아직 사람 되기는 글렸구나!' 하고 말한 것입니다. 예전에 '너도 참 싹수가 노랗구나!', 이런 말 즐겨 쓰기도 했죠. 이 말은 곧, '깨달을 자 찾아보기가 정말 힘들구나' 이 의미입니다.
조주는 여기서 왜 사람 얻기가 정말 어렵구나 라고 말했을까요? 참구해야할 화두입니다. 힌트는 '한 사람 더 오면 설법하겠다' 입니다. 조주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인지 짐작이 오지 않습니까? '아무도 없는 시장을 걸으니 귀하게 사서 천하게 판다.'
110. '불생불멸, 더 이상은 없다'
조주선사가 시중하여 말했다.
“마음이 나니 갖가지 법(種種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한 스님이 물었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을 때(不生不滅時)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그 질문 하나로 됐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온갖 법(法)이 생겨나고, 한 생각이 없어지면 온갖 법도 없어진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모두 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에 속하는 것입니다. 생각들이 나고(生), 없어짐(死)을 반복하여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생과 사를 반복하는 생각들이 없어지면 큰 도(道)에 이른다는 말이 되겠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마음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생사를 반복하는 망념(妄念)을 없애는 것이 해탈' 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번뇌를 없애라는 뜻일까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일 때는 어떻습니까?’ 위 문답 104에서 설명드렸죠. '마음은 텅 비어 아무 형체도 없거늘 무슨 생겨나고 멸할 것이 어디 있느냐?'고요. 진실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 질문 하나로 됐다.” 이 질문 하나 제대로 해결하면, 참으로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으면 끝입니다. 모든 법(法)은 무생(無生)입니다. 무생(無生)과 분별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에 통달하면 정말로 붓다입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24(105-110)|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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