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25(111-115)

수선님 2019. 12. 15. 12:24

조주록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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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양쪽을 벗어나라'

조주선사가 한 때 말했다.

“밝은가 하면 아직 밝지 않고 어둡다고 하자니 밝아지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어느 쪽에 있느냐?”

한 스님이 말했다.

“양쪽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있겠구나.”

“중간에 있다고 하면 양쪽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스님이 여기 나에게 얼마간 있더니 이런 말을 다 하지만 아직 3구(三句)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설령 벗어난다 해도 역시 3구 속에 있으니 그대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3구를 부릴 수 있습니다.”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조주선사는 위 법문에서 무엇이 밝은가 하면 아직 밝지 않고, 어둡다고 하자니 밝아지려 한다고 한 것일까요? 달빛이 세상을 비추면 맑은 개울은 밝게 빛나는 반면에, 나무 아래에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도 있으며, 등불이 꺼진 시골 농가의 건넛방은 어두움에 휩싸여 있지만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환하게 밝아집니다. 마치 우리 마음속에 미망(迷妄)의 어두움이 그치고, 서쪽 하늘에서 밝은 달이 뜨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한 스님이 '저는 밝음, 어두움 그 어느 쪽에도 있지 않습니다' 고 말하니, 조주는 '그럼 중간에 있겠구나' 하고 말을 비틀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꾸로 “중간에 있다고 하면 양쪽에 있는 것이 됩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양변(兩邊), 즉 두 쪽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고 했는데, 하물며 중간에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의미입니다. 두 끝(邊)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네요. 맞습니까? 모름지기 이 수행자처럼 허공을 박차고 뛰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대가 여기서 머물면서 조사의 뜻을 들은 풍월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삼구(三句)를 꿰뚫어야 할 것인즉, 이 3구의 올가미에서 그대가 벗어날 수 있겠느냐?' 조주는 넌지시 이 스님을 다시 시험합니다. 3구(三句)란 말(言) 세 구절, 세 마디란 뜻인데 조주의 말 세 마디는 무엇입니까? 여기선 전혀 그 내용을 짐작할 수도 없는데, 보통 운문선사의 3구, 임제의 3구라 하여 자성(自性)을 드러내는 질문 또는 법어 3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운문종의 발상지라고 하는 중국 운문산의 대각선사(雲門寺)에는 지금도 운문선사의 3구법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운문이 어느날 법석에서 “내게 삼구화(三句話)가 있어 대중들에게 보인다” 하면서 ‘함개건곤(涵蓋乾坤). 즉,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즉,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는다, 수파축랑(隨波逐浪). 즉, 파도를 따라 흐름을 같이 한다.’라고 설하고 “만약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린 참 학인이 있다면 장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운문선사의 한 마디 말에는 이 3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주선사의 3구는 나중에 나오겠지만 3전어(三轉語)라 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되돌려서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하는 세 가지 법문으로, ‘쇠 부처(鐵佛)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 부처(木佛)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진흙 부처(泥佛)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위 문답에선 이 3전어를 염두에 두고 한 법문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조주는 '깨달음을 판가름하는 3구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자신 있게 '저도 3구 정도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하자, 조주는 '왜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고 그 수행인을 인정하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니 그 중은 아직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고, 조주는 화장실을 치우다가 똥물을 뒤집어썼다고 하겠습니다.

'3句가 하수구에 빠졌구나!

꽁지 빠진 제비는 처마 끝 연꽃 타고 하늘로 오르네.‘

112. '선(禪)을 버려야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시방세계에 통달하는 것입니까?”

“금강선(金剛禪)을 버려라.”

'시방을 통한다(通方)'. 이 우주 끝까지 가고 옴이 자유자재롭다, 온 세상에 현전(現前)하다,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우리 법신(自性)의 작용 범위가 무궁무진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시방세계에 통하는 것입니까?'

조주선사는“금강선(金剛禪)을 버려라.”고 말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한 선(禪)을 떠나라, 곧 벗어나라는 말인데, 그 반대로 말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도(道)를 깊이 닦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온 시방에 다 통한다고 해야 하는데, 금강선(禪)을 버리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됩니까?

힌트는 ‘금강선은 금강선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금강선일 뿐입니다.’ 바로 금강경에 나오는 법문 그대로 입니다. 결국 금강선이란 것도 공(空)한 것이라 아무 모습(相)이 없는데, 수행인들은 '금강선에 진력해야 한다. 아! 금.강.선' 그 이름과 모습(相)에 집착하여 그르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선정에 든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합니다.

화두만 오롯이 남은 채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마치 정신이 나간 지경에 이르러야 크게 깨칩니다. '눈멀어야 한다.'

113. '부처를 눌러 앉아라'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납자(衲僧家)라면 모름지기 보신불과 화신불(報化佛)의 머리에 그대로 눌러앉아야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앉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의 경계는 아니다.”

'납자(衲子), 수행하는 승려라면 모든 부처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서야 한다. 그때 진정으로 깨닫는다.' 조주선사의 위 법문은 이런 뜻인데, 부처, 조사를 다 죽여 버린다니 너무 섬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로부터 선가(禪門)에서는 오는 부처, 가는 조사 모두 다 죽여 버리고 홀로 설 수 있어야 눈을 조금 떴다고 합니다.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오역죄(五逆罪)에도 아무 걸림이 없이 훨훨 털어버릴 수 있어야 선(禪)을 통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스님이 '부처면 부처, 조사면 조사의 머리를 눌러앉은 사람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조주의 “그대의 경계는 아니다.”란 대답은 '그대가 아직 감당할 경지는 아니다'라는 뜻인데, 이 말 당연하겠죠?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고 기껏 말해줬는데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한심하게 물으니, 쯧쯧.

선사들의 법문에는 항상 독한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그 가시를 단박에 뽑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닥칠 때마다 입에서 모래를 씹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이에게는 중생도 부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마음 하나 뿐입니다. 이 한 마음도 훌훌 털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114. '눈앞에 있는 도'

조주선사가 시중하여 말했다.

“큰 도는 눈앞에 있는데 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눈앞에 무슨 물건이 있기에 제게 보라고 하십니까?”

“강남이건 강북이건 네 마음대로 해라.”

“큰스님께 사람을 위하는 방편이 어찌 없겠습니까?”

“아까는 뭘 물었더냐?”

'큰 도는 바로 눈앞에 있다(大道在目前). 그런데 보기는 어렵다' 그렇습니다. 도(道)는 우리 눈앞에 있고, 뒤에도 있고, 위, 아래 사방팔방, 시방에 다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깨쳐야 도가 보이는 법입니다. 하지만 깨친다 한들 도(道)는 아무 모습이 없는데 볼 수야 있겠습니까?

한 수행인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저더러 도대체 뭘 보라 하십니까?' 하고 주주선사에게 물으니, '강남이건, 강북이건 네 멋대로 보라'고 대답합니다. 어디를 보건 도(道)가 보일 리 없죠. 보긴 어딜 봅니까?

'큰 스님께서 어째서 좋은 방편으로 가르쳐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한탄하듯 말하니, '그대가 방금 뭘 물었지?' 라고 짐짓 질문을 잊어버린 척 합니다. 이 좋은 가르침에 눈이 퍼뜩 떠져야 하는데, 말에 이끌려 아무리 따라가 봤자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강북이건 강남이건 네 멋대로 보라'고 했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스스로 내면에서 계속 의심해야 합니다.

선사들은 오직 '의심하지 않는 것이 병(病)이다'고 했습니다. 깊이 의심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115. '법계에 들어오면'

한 스님이 물었다.

“법계에 들어오면 '있음'을 알게 됩니까?”

“누가 법계(法界)에 들어오느냐?”

“그렇다면 법계에 들어와서 나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싸늘한 재나 죽은 나무가 아니라 꽃 비단이 백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법계에 드는 경계에서의 작용이 아닙니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법의 세계(法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깨달음, 또는 중도(中道)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죠. 한 수행인이 묻습니다. '법(法)의 세계에 들어가면, '있음(有)'을 알게 됩니까?' 이 말은 깨닫게 되면 모든 법에 대해 통달하게 됩니까? 라는 뜻과 같습니다.

조주선사는 “누가 법계(法界)에 들어오느냐?” 라고 되물었는데, 이 말은 '자네는 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혹시 법계에 들어가 보고 하는 소리인가?' 하고 수행인의 마음을 찔러본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계에 들어오는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수행인은 '그러면, 법계에 들어와서 나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법계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들어와서 나갈 줄을 모른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이 말은 법의 세계에 들어와서 푹 파묻혀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즉 한번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죽은 다음에 굴속에 갇혀 버린 것이라고 비유한 말입니다. 이처럼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 수행이 진척된 것 같은데 글쎄요.

그 대답에 조주는 '(법계에 들어감, 즉 깨달음이란) 싸늘한 재나 죽은 나무가 아니다. 꽃 비단이 백가지나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꽃을 백가지 비단처럼 깔아놓았다는 표현으로 법계에 들면, 즉 깨달음의 구경열반에 들면 반야의 지혜가 드러나 그 밝고 신기한 작용은 무궁무진하여 그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났다는 말이죠.

이 스님은 “(그것이 바로) 법계에 드는 경계에서의 작용이 아닙니까?”라 하여 조주선사의 말을 알아챈 듯한데, 깨쳤다면 스스로 확신해야지 다른 사람의 처분을 기다린다면 옛날에는 아직 20년은 더 참구하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직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주의,“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란 말은 이 소리를 듣고 확실히 눈을 뜨라는 가르침인데, 뒷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말은 법계에 들어가고, 나오든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의미로, 중도(中道)의 길이란 법계에 들어감도 아니요, 들어가지 않음도 아니며, 법이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모든 알음알이를 떨쳐버리고 분별심을 떠난 그 자리입니다. 실제로는 깨달음도 없습니다.

흥화선사의 말. '내가 어제 시골의 결혼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나 길가의 옛 사당에서 비를 피했느니라!'​란 말은 실제 사당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그 암호가 감추어져 있으니 이것을 풀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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