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말하는 그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그것이 참다운 이치(實際理)라면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대가 한번 더 말해 봐라.”
앞의 법문과 연결되어 한 스님이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서 그것이란 법계에 들어오는 것은 싸늘한 재나 죽은 나무가 아니라 꽃 비단이 백가지로 나타나는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바로 선(禪)이요, 도(道)요, 불법이요, 바로 깨달음이고 중도(中道)를 말합니다.
이 스님은 ‘이것이 참다운 도리(道理)라면 어디서 얻게 되느냐’고 조주에게 묻습니다. 깨달음[道]이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까? 석가도 경전에서 '한 법도 얻은 게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 모습도 없고(無相), 텅 비어 공(空)한 그 도리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이 또한 이 도리입니다. 원래 있는 것을 재발견할 뿐입니다.
“그대가 한번 더 말해 봐라.” 무엇을 한번 더 말해 보라는 말인가요? 바로 앞의 질문을 다시 해보라는 것입니다. 같이 따라서 해보시죠.
“그것이 참다운 이치(實際理)라면 어디서 얻게 되는 것입니까?”
따라 말해보니 느낌이 좀 옵니까? 지금 따라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주가 한번 더 말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스님도 거의 98% 가까이는 온 것 같은데 2%가 부족한 것같아 조주는 안타까운 마음에 계속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 2%를 찾았을까요? 정말로 여기서 깊이 의심해 보십시오. 끝이 보입니다.헐!
117. '혹하지 않는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만가지 경계(萬境)가 한꺼번에 일어날때 혹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有).”
“어떤 사람이 혹하지 않습니까?”
“그대는 불법이 있음을 믿느냐?”
“불법 있음을 믿는 것은 옛사람이 이미 말씀하셨지만, 누가 혹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왜 내게 물어보지 않느냐?”
"이미 여쭈었습니다.”
“혹했구나.”
‘온갖 몹쓸 경계가 일시에 닥쳐오는 경우’라, 가령, 만화의 한 장면처럼 이런 식인가요?
직장에서 퇴근하여 집을 향해 가는데 동네 입구에서 칼을 든 강도를 맞아 돈을 다 털리고, 또 다시 100m쯤 가다 다른 강도를 만나 옷까지 모두 뺏겨 팬티 차림으로 가는데, 동네 어느 집 개가 밖에 나와 있다가 자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정강이를 물어버렸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멍청하게 사고란 사고는 다 저지르고 다닌다고 구박을 한다면 설상가상에 사면초가까지 합쳐서 그 주인공의 가슴은 완전히 폭발해 버릴 것입니다.
한 수행인이 조주선사에게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도 미혹되지 않고 한 치의 정신 줄도 놓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주선사는 당연하다는 듯 '(정신을 똑바로 차릴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고, 어떤 사람이 미혹하지 않느냐고 그 수행인이 다시 물으니, 그에게 “그대는 불법이 있음을 믿느냐?” 라고 캐묻습니다. 이 말은 '도대체 네가 불법에 대하여 제대로 믿는 것이냐? 믿는 자라면 어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느냐?' 라는 질책의 뜻이 담긴 것인데 그 수행인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이 와야 합니다.
그 수행인, 조주의 의중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물론 저는 불법이 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옛 조사, 선사들께서 이미 밝혀 놓은 불법은 불을 보듯 명확합니다. 그러니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 질문은 그게 아니고, 온갖 경계에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물은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주의 다음 대답을 유의 깊게 점검해봐야 합니다. “왜 내게 물어보지 않느냐?”
제가 위 문답을 훑어보니 그 수행자가 두 번이나 물어보았는데, '왜 나에게 묻질 않는가?' 라는 대답으로 모든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때의 '나'는 조주인가? 조주가 아닌 것인가요? 조주라면 왜 두 번이나 물었는데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을 하고, 조주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 그 누가 있어 '나'로 삼은 것인가? 여기서 알아채야 합니다. 조주의 의중을 곧 바로.
'제가 이미 큰스님께 여쭙지 않았습니까?' 다시 기러기는 저 3천만리 밖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람 구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에 조주는 '혹했구나' 라고 했는데, 조주 자신이 혹했다는 겁니까? 그 스님이 혹했다는 말입니까? 2중, 3중으로 그물이 쳐져 있는데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후후!
'조주는 왜 내게 물어보지 않느냐고 했는가?' 깊이 의심해 보십시오. 길이 보입니다.
118. '옛 사람과 지금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옛 사람(古人)과 지금 사람(今人) 사이에 가까운 데가 있습니까?”
“서로 가깝다면 가깝다 하겠지만, 같은 한 몸은 아니다(不同一體).”
“어째서 같지 않습니까?”
“법신(法身)은 법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신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큰스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십니까?”
“나는 여기서 대답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법신은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말하십니까?”
“나는 여기서 그대의 아비를 구하고자 하나 끝내 나오지를 못하는구나.”
위 선문답의 뜻을 제대로 밝히면, 깨달음의 당체(當體)인 자성 법신(法身)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법문이 좀 기니 한 문장씩 풀어가겠습니다.
위 수행인의 질문은 “잘 모르긴 하나 '옛 사람(古人)과 지금 사람(今人) 사이에 가까운 데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은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옛 사람은 석가모니, 달마대사, 육조 등의 옛 부처와 조사를 말하고, 지금 사람은 일반 보통 사람(凡夫)이 아니라 조주선사나 임제선사 등 현 시대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니 '옛 부처와 현 조주선사 사이에 서로 가까운 데가 있느냐? 즉, 서로 닮았느냐? 하고 물은 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선지식은 옛 부처, 석가모니가 깨달은 경지와 같습니까? 하고 어느 정도 시비를 걸어본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주선사는 “서로 가깝다고 하면 가깝다고 할 수야 있지만, 같은 한 몸은 아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조주의 뜻을 좇아 2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스님이 질문한 뜻대로 현상적으로는 옛 부처와 현재의 선지식이 깨달은 경지는 서로 가깝다고 하겠지만 업(業)과 인연에 따라 몸을 빌려 나온 시기나 장소 등이 다르므로 한 몸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본분의 일로 보면, 옛 사람은 사람 마음 속에 갖추어진 자성(自性) 삼신불(三身佛) 가운데 시, 공간을 초월한 본래 성품인 법신(法身)을 뜻하고, 지금의 사람은 본성에서 밝은 지혜를 꽃피워 작용하는 화신(化身), 또는 원만한 지혜 그 자체인 보신(報身)을 뜻하는 것으로 이 법신과 화신, 보신이 서로 가까이 있지만 하는 역할은 서로 다르다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삼신불은 마음 하나로 서로 다른 몸도 아님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 수행인은 “어째서 같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고서 되묻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주는 언제나 본분(本分)의 일로만 수행자를 응대하여 자신의 마음 그대로를 드러내니 사실 이 일은 깨치지 않으면 뜻을 짐작 하기조차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법신(法身)은 법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깨달음의 본바탕이라고 할 법신(法身)의 모습, 그 역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법신은 법을 설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있지만, 설법하는 사람은 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설하는 것입니까?
“법신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큰스님은 사람을 위하십니까?” '큰 스님이 우리를 앞에 두고 이렇게 설하시는 것도 결국 법신의 역할로 보이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설법은 어디서 나옵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답을 하고 있다." 법신은 법을 설하지 않는다니까 이 스님은 심통이 나서 도대체 조주선사 당신은 도를 닦는 수행자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고 투정을 부리니 붓다의 화신(化身)인 내가 너를 앞에 두고 대답하고 있잖아? 하고 언뜻 보면 놀리는 투로 말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법신은 설법하지 않는다고 말하십니까?” '법신은 우리 본성(本性)의 바탕이라 하는데, 법신이 아니면 그 누가 설한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하고 그 수행인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그대의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나 끝내 나오지를 못하는구나.” 조주는 '나는 여기서 반야의 지혜로써 너의 청정법신을 드러내도록 그토록 도와주려 했는데, 끝내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고 더욱 안타까워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서 콕 찌르는데 가슴에 콱! 박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의 아버지'란 바로 이 수행자의 성품(自性)을 말합니다.
부처의 3신불(三身佛)에 대하여 교(敎)적으로는 우주, 진리 그 자체로 항상 적멸상태인 법신, 온갖 수행후 공덕을 쌓은 과보로 극락세계에 태어난 보신, 중생 구원 등을 위해 세상의 몸을 빌려 태어난 화신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불지(佛地, 붓다의 지위)에 이르러야 스스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전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생각일 뿐입니다.
선(禪)적으로는 사람 마음속 자성의 근본인, 맑고 텅 빈 바탕을 법신(法身)이라고 한다면, 내면을 꽉 채우고 있는 반야의 지혜는 보신(報身)이라 하고, 반야의 지혜를 사용하는 것은 화신이라고 봅니다만,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허망하여 오직 한 마음일 뿐입니다.
육조혜능은 모든 법에 아무 걸림이 없는 성품은 청정법신,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은 보신, 한 생각이 착하면 생기는 지혜를 화신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모든 법이 자신의 성품 속에 있으니 법신(法身)이요, 생각하면 변하는 성품은 화신(化身), 생각 생각에 선(善)하면 보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말을 많이 쓰는데, 마음은 참으로 속이 텅 비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라 신기하게 온갖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텅 비었는데 신기하게도 무궁무진한 공덕(功德), 지혜를 스스로 갖추어 세상을 위해 법을 설하고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26(116-118)|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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