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정토관계 저술에 나타난 信觀
한 보 광
내 용 차 례
1. 머 리 말 2. 원효의 정토관계 저술 | 3. 정토관계 저술에 있어서 信의 문제 4. 맺 음 말 |
1. 머리말
신라불교에 있어서 정토교학은 일찍부터 수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교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자료로는 자장법사가 『阿彌陀經疏』를 저술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전부터 정토신앙은 전래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정토교학이 사상적으로 체계를 갖추어 정리되고 널리 신앙이 확산된 것은 원효로 볼 수 있다. 특히 원효의 불교적 신앙의 실천은 정토신앙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금번 학회에서 원효의 信觀에 관한 주제로 세미나를 가짐으로 참다운 종교적인 불교인으로서의 원효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원효의 불교적인 실천중 가장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정토관련 저술에 나타난 신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원효의 정토관련 현존 저술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여기에 나타난 信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2. 원효의 정토관련 저술
지금까지 조사된 원효의 저술은 101여종이며 이중 정토관련 주석서로는 『般舟三昧經疏』,『般舟三昧經略記』,『般舟三昧經略疏』,『無量壽經疏』,『無量壽經私記』,『無量壽經宗要』,『阿彌陀經疏』,『阿彌陀經通鑽疏』,『彌勒上生經疏』,『彌勒上生經宗要』,『遊心安樂道』,『觀經宗要』,『彌陀證性偈』등 13종이나 되므로 전체 저술중 1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미타 정토관련서로는 『無量壽經宗要』와 『阿彌陀經疏』및 『彌陀證性偈』이며 『遊心安樂道』는 眞僞의 문제가 있다.
먼저 無量壽經宗要 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량수경종요 는 전체 4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大意, 둘째는 宗致, 셋째는 人分別, 넷째는 文解釋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文解釋은 현재 포함되어 있지않는 것으로 보아서 無量壽經疏 를 말하는 것 같다.
첫째 大意에서는 원효 특유의 一心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一心이란 起信論 의 一心二門을 말하고 있다. 즉 일심은 바로 衆生心이며, 이는 緣起法이며 如來藏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술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두에서
중생의 心性은 원통무애하여 큰 허공과 같고, 깊은 바다와 같아 그 체가 평등하여 분별할 상이 없으므로 따로이 정토와 예토를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緣을 따라 거역하지 않으므로 동과 정이 있고, 번뇌에 의해 오탁악세에 빠져 고통스러운 사바세계를 오래도록 流轉 하기도 하며, 혹은 선근을 이어받아 四流를 끊어 돌아오지 않고 피안에 이르러 오래도록 寂靜에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동과 적정은 모두 큰 꿈과 같은 것이다. 깨달음에는 此岸과 彼岸이 따로 없고 예토와 정토가 본래 一心이며, 생사와 열반이 결국 二際가 아니다. 그런데 大覺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공덕을 쌓아야 하지만 流轉하여 긴 꿈을 따르고 있어서 갑자기 열기가 어렵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름에는 멀고 가까움이 있으며, 가르침을 설함에는 칭찬하고 폄하함이 있다. 석가여래께서는 사바세계에 오시어 오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였으며, 아미타여래께서는 극락세계로 三輩衆生들을 인도하시니 이러한 방편의 자취는 이루 말로써 다할 수 없도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서두는 원효의 저술에 있어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논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문제로 삼고 있는 극락세계의 존재나 혹은 왕생의 문제를 깨달은 입장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입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이 얼마나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있고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본체론적인 입장에서는 사바와 극락,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으나 연기론적인 입장에서는 모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能隨緣而不逆?이라고 하였다. 즉 능히 연을 따라서 거역하지 않는다고 함이다. 이는 바로 연기법을 따라서 법을 거역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大意에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一心論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一心이란 衆生心이므로 원효는 극락세계와 왕생에 대한 설명을 연기론적으로 전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宗致에서는 총괄하여 정토의 果德과 因行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果德으로는 淨不淨門, 色無色門, 共不共門, 漏無漏門으로 나누면서 이를 네 가지의 相對로 설명하고 있다. 즉 因與果相對, 一向與不一向相對, 純與雜相對, 正定與非正定相對로 설하면서 이는 모두 중생의 自力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여래의 行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토에 대한 견해를 自受用土와 他受用土로 밝히면서 無量壽經 에서 설하는 정토는 正定與非正定相對의 淨土라고 한다.
淨土의 因行으로는 직접적인 正因과 보조적인 助因으로 나누고 정인은 發菩提心이며, 十念과 제공덕은 모두 助因으로 보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왕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래의 本願力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즉 여래의 본원력을 믿는 것이 발보리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의 본원력을 믿지 않으면 왕생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끝으로 人分別에서는 三聚衆生과 四疑衆生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삼취중생에 대해서는 『無量壽經』의 제11원에서 설하고 있다. 그런데 원효는 正定聚만이 왕생이 가능하며 이를 本性正定聚와 習成正定聚로 구분하고 있다. 또 본성정정취는 菩薩種性인데 반하여 習成正定聚는 不定聚衆生도 如來種性位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不定聚와 邪定聚도 신심을 성취하고 발심하면 정정취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하여 정정취 이외의 중생들의 왕생도 가능함을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정취의 지위를 初發心住 이상이라고 함으로써 신라 정토가들 중에서 왕생의 계위에 있어서는 최하위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많은 중생들의 왕생을 가능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四疑衆生으로는 의혹경계를 말하면서 『無量壽經』의 佛五智를 인용하고 있다. 이 중 佛智와 四智로 구분하여 四智를 의혹하는 중생을 四種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佛本願力과 佛四智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에서 가장 믿음을 강조하는 부분이 이곳이며, 원효의 信觀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阿彌陀經疏』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서도 大意, 宗致, 文釋으로 나누었는데 대의는 『無量壽經宗要』와 대동소이하다. 宗致에서는 『阿彌陀經』은 삼계를 벗어나 二種淸淨으로 宗을 삼으며, 중생이 무상도에 들어 불퇴전을 얻는 것이 意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종청정이란 器世間淸淨과 衆生世間淸淨이라고 하면서 청정에 대해서는 『無量壽經宗要』의 정토의 四門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正定聚門의 정토를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문의 해석에 있어서는 世親의 『往生論』의 29종장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발보리심이 정토왕생의 正因임을 강조하면서 일일 내지 칠일 동안의 일심칭명에 대하여 날자 중심의 日數念佛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 육방제불의 찬탄과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遊心安樂道』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본서가 오래도록 원효의 眞撰으로 여겨져 왔으나 최근에는 진위의 여부가 문제시 되었다. 그 이유로서는 첫째, 원효의 『無量壽經宗要』의 대부분이 전제되었다는 점. 둘째, 원효의 입적(617-686)으로부터 20년후에 중국에서 菩提流支에 의해 번역된 『大寶積經發勝志樂會』와 『不空羂索神變眞言經』이 인용되어 있다는 점. 셋째, 원효와 동시대인 懷感의 『群疑論』및 慈恩의 『觀彌勒上生兜率天經贊』이 게재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지학적인 이유 이외에도 사상적으로 볼 때도 원효 이후의 신라정토사상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유심안락도』 가 원효의 眞撰이 아니라고 하는 학설은 정설로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부학자들은 신라에서 찬술된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설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본서에는 신라 특유의 한자 사용법이 실려 있으며, 신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볼 때에도 신라의 정토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신라 경덕왕대(742-764)인 8c. 중엽경 신라에서 찬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찬술목적은 신라 서민들에게 정토교를 홍포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觀無量壽經』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凡夫爲主의 신라정토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宗致門, 所在門, 患難門, 因緣門, 品敎門, 難易門, 除疑門 등의 7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宗致門은 『無量壽經宗要』의 大意門과 같은 내용으로 언급되어 있다. 所在門은 宗要의 宗致門에서 언급한 淨土果의 四門을 중심으로 설하고 있으며, 患難門은 佛智와 佛四智에 대하여 설하면서 佛智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믿음이 부족한 중생의 邊地胎生에 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因緣門에서는 三輩九品의 왕생 인연과 十念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그러나 정토왕생의 正因은 발보리심이며 십념은 助因으로 보고 있다. 십념을 隱密十念과 顯了十念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원효 입멸 후 菩提流志에 의해 번역된 『大寶積經發勝志樂會』가 인용되어 있다. 品敎門에서는 三輩九品의 階位에 관해서 諸說을 소개하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難易門에서는 미륵불의 도솔천 상생과 극락정토의 우열에 관해서 비교하면서, 아미타정토의 易行과 우수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除疑門에서는 9가지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문자답 형식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본서가 범부중심의 정토개론서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쉬우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문제들과 土砂加持眞言과 같이 신앙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최후의 追福利益에 관한 질문에서는 菩提流志의 『不空羂索神變眞言經』을 인용함으로써 원효의 저술이 아니라고 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3. 정토관계 저술에 있어서 信의 문제
(1).『無量壽經宗要』에 나타난 信의 문제
원효의 信觀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起信論』이다. 『起信論別記』에서
누가 無乘에 있어서 능히 大乘을 논하고 無信에 있어서 深信을 일으키겠는가
(誰能論大乘於無乘 起深信於無信者哉)
라고 하여 起信은 深信이라 하였다. 즉 그는 기신이야말로 여래의 가르침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起信論疏』에서는
기신이란 기신론의 말이다. 중생에게 믿음을 일으킴으로 기신이라고 한다.
(言起信者 依此論文 起衆生信 故言起信).
信은 결정코 그러하다고 여기는 말이니 이치가 실제로 있음을 믿음이며,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음이며, 닦아서 얻었을 때에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다. 이 가운데서 이치가 실제로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信實有者) 體大를 믿음이니 일체의 법이 그 실체를 얻을 수 없음을 믿기 때문에 곧 평등법계(平等法界)가 실제로 있음을 믿는 것이다.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信可得者) 相大를 믿음이니, 본성이 공덕을 갖추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곧 서로 훈습하면 반드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됨을 믿는 것이다. 무궁한 공덕의 마음의 작용을 믿는다는 것은(信有無窮功德用者) 用大를 믿는 것이다. 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하여 믿음를 삼대로 배대시키고 있다. 즉 믿음이란 중생에게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서 평등한 법이 있음이며, 공덕이 구족해 있으며, 하지 못함이 없는 무애자재함이라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起信論疏』에서는 起信은 發心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으며(信有如是無量功德 依論得發心 故言起信) 또 發心이란 同體大悲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원효에 있어서 起信이란 衆生心이며, 深信이며, 發心이고 이는 大悲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無量壽經宗要 의 大意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一心은 衆生心이라고 하였으므로 起信이란 바로 一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심의 원천은 일심이며 이는 바로 如來藏이다. 그러므로 신심의 원천은 一心 즉 如來藏에서 나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無量壽經宗要 의 大意에서 이미 원효의 信觀은 모두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一心은 衆生心이기 때문에 信心이 필요하며 반드시 起信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면 일심에서 나온 신심은 어떠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각의 근원에 돌아가려면(歸原大覺)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歸原이란 起信論疏 의 귀경게의 해석에서 말하는 歸命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歸命은 還源의 뜻이다. 그 이유는 중생의 육근은 일심에서부터 일어나면서도 스스로 근원에 배반하여 六塵으로 흩어진다. 그러므로 命은 온갖 六情을 포섭하고 그 근본의 일심의 근원으로 還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歸命이라고 하며 돌아가 의지할 바는 一心이고 이는 바로 三寶이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無量壽經宗要』의 歸原은 『起信論疏』의 還源, 還歸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歸命, 歸敬, 歸依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仰信(sraddha)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一心이란 大覺이며, 三寶이고 나아가서는 衆生心이다. 원효의 信觀의 출발은 仰信 즉 귀의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仰信의 대상은 누구이며, 주체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누가 무엇을 믿는가하는 점이다. 그는 믿음의 대상은 一心이며 이는 三寶이고, 衆生心이라고 하지만, 정토교에서는 그 구체적인 대상이 아미타여래의 本願力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믿음의 주체는 의심 많은 범부중생이지만,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一心이고 이는 바로 如來藏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본원력을 믿을 수 있고, 또 중생에게 여래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發心이다. 이를 시현해 준 분이 바로 여래이며, 이것이 바로 여래의 본원력이다. 따라서 『無量壽經宗要』에서?무량수경은 정토의 인과를 체로 삼고 중생을 攝取하여 왕생시키는 것을 意致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여래께서 중생구제의 간절한 본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의 기본은 아미타여래의 본원력에 대한 믿음과 귀의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정토신앙의 근본은 흔들리고 만다. 따라서 원효도 이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모든 초점을 여기에 맞추고 있다.
그는 본서에서 앙신할 것을 권유하면서 그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앙신의 논리적인 근거와 이유 및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바로 구제의 대상과 이유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먼저 구제의 대상인 앙신해야할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가 구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下輩 중의 不定性人인 四疑凡夫이다.
四智에 대해 의혹을 내는 자들은 一性이 바르지 못하고 삿되어 아만이 총집결되어 있으며 道心이 얕은 사람들이다(一性非質直 邪聰我慢 薄道心人)(『대정장』, 37, 130 中)
이라고 하여 분명한 대상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보살이나 현인이 아니라 일반 민중이며, 대다수의 서민 대중들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부처님의 본원력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가장 근기가 하열하고 최하위인 不定性人의 疑惑凡夫가 구제된다면 그 이상의 중생 구제는 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제 방법은 부처님을 믿게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므로 누구나 마음만 낸다면 실천할 수 있다. 여기서 마음을 낸다는 것이 바로 發菩提心이므로 이는 왕생의 正因이 된다고 하였다. 이들에게는 仰信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는 無量壽經宗要 의 五智중 四智의 설명에서 四疑凡夫를 논하고 있다.
四疑惑衆生은 부처님의 五智에 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으나 죄복은 믿어 착한 일을 하고 극락에 왕생하길 원하였기 때문에 변지의 궁전에 태어나서 오백년동안 삼보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 … 不思意智라고 이름하나니 부처님의 지혜는 부사의한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능히 가까운 것을 멀게도 할 수 있고 먼 것을 가까이도 할 수 있으며, 무거운 것을 가볍게도 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게도 한다. 이는 실지로 있는 일이나 중생의 경계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므로 바로 마땅히 우러러 믿을 뿐이다(直應仰信). 경에서 설하신 것을 중생의 미천한 분별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믿고자 하거든 마땅히 이와 같이 하라 (若欲生信 應以事況).
라고 하여 앙신할 것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大乘廣智인 平等性智에서는 應信을 말하고 있다(是故應信平等性智 無所不度 而非有限 所以安立大乘廣智). 또 無等無倫最上勝智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疑難을 대처하기 위하여 無等無倫最上勝智를 安立한다. 이러한 大圓鏡智는 三智를 超過하여 等類가 없다. 二諦의 밖에 홀로 있어 둘이 아니며 두 가지의 二表를 초월하여 관계가 없으므로 다만 마땅히 우러러 仰信할 뿐이지 比量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無等無倫最上勝智라고 한다.
라고 하면서 사량으로 분별하지 말고 오직 우러러 믿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앙신을 일으켜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왜 仰信을 일으켜야 하는가? 예를 들면 세계는 무변이면서 허공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萬境도 무한하지만 모두가 일심 내로 들어온다. 佛智는 상을 떠나지만 心原으로 돌아가며 智와 일심은 渾同하여 둘이 아니다. 始覺은 本覺과 같으므로 이 智 밖으로 벗어나는 경계는 하나도 없다. 이 도리로 인해서 다 할 수 없는 경계는 없고 유한이 아니다. 무한의 智로서 무변의 경계를 비춘다.
라고 하여 그 이유는 무한한 모든 경계가 一心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佛智 속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오로지 仰信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논리적인 근거를 起信論 에서 대고 있다. ?一切境界는 本來一心?이라고 하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심은 중생심이며 佛智이고 모든 경계가 다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불지를 仰信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 우러러 믿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앙신은 앞에서 말한 歸命과 같이 還源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서 歸原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하여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어떻게 앙신해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四智의 경계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心眼이 열리지 못했더라도 능히 스스로 겸손하여 오직 여래를 우러러보고 오로지 엎드려 믿으라(仰惟如來 一向伏信). 이와 같은 사람은 그 行品에 따라 저 극락국토에 왕생하여 邊地에 태어나지 않는다. 변지를 집착하여 태어나는 자는 달리 一類로 삼으며 구품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망령되이 의혹을 내지 말아라.
라고 하면서 본서를 끝내고 있다. 여기서 四智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심안이 열리지 않았더라도 佛智와 本願力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내지말고 믿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伏信이라고 하여 오로지 엎드려 믿을 것을 말하고 있다. 만약 의심을 내면서 믿는다면 변지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仰信이란 ?오직 여래를 우러러 보고 오로지 엎드려 믿는 것?이라고 한다. 즉 ?仰惟如來 一向伏信?에서 첫자와 끝자를 조합하여 仰信이라고 함을 결론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바로 앙신하는 방법에 관한 설명이다.
다음으로 원효가 주장하는 信은 深信(prasada)이다. 이는 仰信보다 한 단계 높은 順理發心한 菩薩種性人들의 신앙방법이며 十解 이상의 보살에게 해당된다. 그는 下輩에 왕생하는 사람으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설하고 있다. 즉 隨事發心하는 不定性人과 順理發心하는 菩薩種性人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 부정성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仰信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菩薩種性人에게는 深信을 설하고 있다.
第二人 중에는 三句가 있으니 첫째는 대단히 깊은 법을 듣고 歡喜信樂한다. 이 句는 發心 正因을 겸한다. 단지 앞사람(不定性人)과 달리 深信을 갖는 것이다. 둘째는 乃至一念으로 彼佛을 염하는데 이는 助滿業이다. 앞사람(不定性人)은 深信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十念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菩薩種性人)은 深信이 있기 때문에 十念을 구족할 필요가 없다. 셋째는 至誠心으로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을 원한다. 이러한 願이 앞의 行과 화합하여 因이 된다. 이는 菩薩種性人이 취할 바이다.
라고 하여 菩薩種性人은 深法을 듣고 歡喜信樂하므로 深信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깊은 신심이 있으므로 제18원의 乃至十念에서도 一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深信이 없는 不定性人은 반드시 十念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이들은 甚深法을 듣고 歡喜信樂했으므로 信解(adhimukti)는 이루어진 것이 전제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順理發心者는 諸法이 모두 幻이나 꿈과 같으며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는 것임을 알고 믿는 것(信解)이다. 이러한 信解에 의해서 廣大心을 발한다. 煩惱와 善法이 있음을 보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가히 끊을 것도 닦을 것도 없음을 다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모두를 끊거나 닦으려고 원하더라도 이는 無願三昧와 다르지 않다. 원컨데 무량한 유정들을 모두 제도코저 하더라도 제도하는 쪽과 제도 받는 쪽이 다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空無相에 능히 順隨한다.
라고 하면서 順理發心者의 信解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즉 이들은 甚深法에 대하여 환희심으로 즐겁게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설사 이들은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광대심을 발하여 진리를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 비록 원력을 세워 수행을 하고 번뇌를 끊더라도 無願三昧에 해당되며, 중생을 제도 하더라도 중생과 보살이 하나이므로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空無相의 이치에 順隨한다. 이들은 진리를 깊이 이해하여 믿게 되었으므로 信解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므로 信認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梵本 無量壽經 에서 말하는 信解(adhimukti)에 해당된다.
따라서 원효의 無量壽經宗要 에 있어서 信觀은 仰信으로 시작하여 仰信으로 끝난다. 그러나 菩薩種性人에게는 이미 仰信이 성취되어 있으므로 信解와 深信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심은 모두 一心에서 나오며, 여래의 本願力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한다. 원효의 관심사는 不定種性人인 四疑凡夫의 구제이다. 그들을 위해서 佛智를 억지로 알려고 하지말고 오직 우러러 믿으라고 한다. 이 방법이 범부중생을 쉽게 구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2). 『阿彌陀經疏』에 나타난 信觀
본서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극락세계의 二種淸淨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二種淸淨이란 器世間淸淨과 衆生世間淸淨을 말하는데 이를 世親의 『往生論』에 근거하여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信觀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살펴본다면 大意에서 一心思想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 一心이란 緣起法이며 如來藏이고 衆生心이다. 여기에서 여래의 本願力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특히 『아미타경』은 극락정토의 모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믿음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원효는 『阿彌陀經』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이 경은 석가와 아미타여래께서 이 사바세계에 출세하신 대의를 밝힌 경전이며, 四輩가 도에 듦에 있어서 중요한 문이다. 정토의 本願力을 보이고, 妙德에 가히 돌아감을 찬탄한다. 묘덕에 돌아감(妙德可歸)이란 귀로 經名을 들음으로써 일승에 들어감에 반하지 않으며, 입으로 佛名號를 염송하는 것으로도 삼계를 벗어나 돌아오지 않으니, 하물며 禮拜하고 專念하며 讚嘆하고 觀察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토의 본원력을 보이심(淨土可願)이란 금모래의 연못에 목욕을 하면 생을 받는 染因을 떠남이며, 보배나무와 숲속에서 노닐면 죽음이 없는 聖果를 얻음이며, 다시 佛光을 보면 無相에 들며, 梵響을 들으면 無生을 깨닫게 된다. 그런후 五門에 의해 고삐 매인 생사의 동산에서 벗어나 번뇌의 숲속에서 쉬며,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널리 시방세계를 노닐며, 一念을 펴지 않고도 두루 無邊三世에 나투며, 그것이 樂이며, 勝度이므로 極樂이라고 하니 어찌 헛됨이 있으리요.
라고 하여 극락정토가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이는 여래의 본원력과 수행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조금의 거짓도 없음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극락정토에 대한 의심없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또 왕생을 발원하여 오념문을 수행하는 것은 이미 믿음이 전제된 것이다. 그는 ?아미타불이란 실다운 덕을 갖추어 만겁동안 영원한 명호(阿彌陀者 含實德之所立 萬劫無盡之名)?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 모든 공덕력과 영원한 생명력이 구족해 있음을 믿었을 때 염불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믿음이 전제된 말이다.
다음으로 六成就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如是란 총론으로 들은 법을 내세워 信順의 마음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如是者 擧所聞之法 表有信順之心).
我聞이란 별항으로 능히 듣는 사람을 내세워 違諍의 뜻이 없음을 나타낸다(言我聞者 別提能聞之人 表無違諍之意).
다음의 네 가지는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 이끌어 증명하게 된다. 기억하고, 듣고, 때와 장소를 밝혀 잘 들은 것에 오류가 없음을 말한다. 이미 大師 대중들은 설하신 것에 대하여 가히 믿을 수 있음을 증명하며, 이는 모두 항상함을 알게 된다(下四則引二對證成 明憶聞時處 成能聞之不謬 旣有大師大衆 證所說之可信 於中委悉如常可知).
라고 하여 이미 六成就에서 믿음은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특히 如是의 信成就는 信順之心이라고 하므로 순순히 믿는다는 뜻이 될 것이다. 즉 『아미타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없이 믿고 수용한다는 내용으로 이는 『무량수경종요』에서 말한 仰信과 같은 의미이며 歸依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음의 기억하고, 듣고, 설한 시기, 장소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조금의 오류도 없음을 나타내며, 대중들에게 확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미타경』에 대한 믿음은 이미 六成就에서 모두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또 원효는 본서의 말미의 六方諸佛의 證明에서 ?다른 부처님들의 설법을 인용하여 극락세계에 대한 믿음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이는 증인이나 증명을 세우므로 믿음에 대한 확신을 더 심어 주는 것이 된다. 특히 『阿彌陀經』에서는 아미타불의 설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의 ?難信之法?을 원효는 믿음을 권유함을 찬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본인이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권유하는 것도 대단히 찬탄할 만한 사항임을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간단히 『阿彌陀經疏』에 나타난 믿음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즉 본서에 있어서 원효의 신관은 『無量壽經宗要』의 내용과 대동소이 하지만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이미 믿음이 전제된 것으로 간주하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信順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순순히 믿는 것, 거역이나 거부감 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仰信과도 같은 의미일 것으로 생각된다.
(3). 『遊心安樂道』에 나타난 信觀
『遊心安樂道』가 원효의 眞撰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이 『無量壽經宗要』에서 전제되어 왔으므로 信觀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으므로 상이점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宗致는 『무량수경종요』의 大意와 대동소이하게 一心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 그런데 中下根의 왕생에 대하여 설하면서 『起信論』의 修行信心分중 말미의 明不退方便 念佛往生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起信論』에 말하기를,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正信을 구하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怯弱한 이는 이 사바세계에 머물러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한다. 두려워 하여 信心을 가히 성취하기 어렵다고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아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信心을 攝護했음이니 이르되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念하는 인연으로 願을 따라 他方의 淨土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영원히 惡道를 여의느니라. 저 修多羅에 설하시되 만약 사람이 오로지 西方極樂世界의 아미타불을 생각하여 닦은 선근을 廻向하여 저 세계에 가서 나기를 願求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고 하셨다. 항상 부처님을 보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만약 저 부처님의 眞如法身을 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태어남을 얻어서 正定에 머무르는 연고이니라.
라고 하는 『起信論』(『대정장』, 32, 583 上)의 설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부터 宗致의 마지막부분까지는 迦才의 『淨土論』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으므로 직접적인 인용보다는 『淨土論』을 의거했다고 보여진다. 중하근의 信成就는 자신의 수행이나 능력만으로는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수승한 방편으로 그들의 신심을 攝護하여 正定聚에 이를 수 있도록 구제한다. 그런데 그들은 오로지 여래의 대비 본원력을 믿고 念하고 願을 세우는 것으로만도 왕생이 가능하며, 정정취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원효설과의 차이는 여래의 방편은 중하근의 중생의 信心까지도 攝護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신심은 자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대비원력으로 이루어진다는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다음으로 正定與非正定對門의 不定種性에서는 『無量壽經宗要』와 같이 一萬劫을 지난 뒤에 信心이 성취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 여래의 佛智와 나머지 四智에 대해서도 『無量壽經宗要』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仰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四疑凡夫를 설명하면서 化生과 胎生의 우열에 대해서는 『無量壽經』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十念에서는 『無量壽經宗要』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특별한 견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제5 往生品數門에서 無根 二根이나 龍․鬼․八部까지도 發菩提心을 내고 아미타불을 專念하며,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欣樂한다면 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범부가 正生이며, 여기에 성인은 兼生한다고 하여 정토왕생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범부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방의 정토를 믿지 않거나 보살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왕생을 願하지 않는 자는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정토왕생의 기본적인 원인은 정토에 대한 믿음과 발원임을 알 수 있다.
제7 除疑門의 4문인 西方得小果門에서는 ?어리석지 않는 법이다. 사람이 시방의 제불과 정토에 대해서 믿고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구경에 果를 깨달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法華經』에서도 설하였으며, 마음을 돌이켜 큰 것으로 향하니 『智度論』에서도 설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믿음과 발원을 강조하고 있다. 또 8문인 淨土非凡所行門에서는 淨土宗의 본의는 범부가 근본이며, 성인은 겸하게 된다. 정토종의 심오한 뜻은 범부가 중심이지 보살이 아니다(淨土宗意 本爲凡夫 兼爲聖人也 … 淨土奧意 本爲凡夫 非爲菩薩也) 라고 하여 정토세계는 범부을 위한 세계임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범부들의 왕생행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9문의 追福利益有無門에서는 밀교적인 土砂加持信仰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信을 강조하고 있다.
대저 대비는 無方하며 광장설은 잡됨이 없는데 행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후회가 막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는 厚恩에 빚이 되며, 보답함에는 점차 멀어진다. 순순히 따르는 자는 영혼을 연꽃으로써 접인하며, 효순하여 다행히 진언을 만났으니 삼계를 벗어남에 어려움이 없다. 무릇 군자들이여 누가 이를 받들어 행하지 않겠는가? 묘지 위에 모래를 뿌리면 삼계를 벗어날 것이다. 항차 呪文의 옷을 몸에 입고, 소리를 듣고 글자를 암송하여라
라고 하여 土砂加持의 光明眞言을 권유하고 있다. 이 공덕에 대하여 믿는자는 삼계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를 수도 있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은혜도 등져버리고 깨달음과는 점차 멀어짐을 염려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광명진언의 가피와 공덕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유심안락도』에 나타난 信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본서는 원효의 무량수경종요 를 많이 전제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상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토를 범부를 중심으로 설하고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으며, 신심의 성립도 여래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한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원효의 정토관계 저술에 나타난 信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원효는 누구보다도 믿음에 대한 이론적인 정립과 몸소 실천한 불교인이었다. 그의 信은 『起信論』의 如來藏思想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의 실천은 『無量壽經宗要』와 『阿彌陀經疏』에서 강조하였다. 특히 정토관련 저술은 삼국통일 이후의 어려운 신라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화된 국토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의 대중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가 주장한 南無阿彌陀佛은 불교적인 어려운 이론이나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단순한 실천이었다. 여기에서 전제된 조건은 바로 믿음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한마음인 一心에서 나오므로 衆生心이라고 하였고, 여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如來藏이라고도 한다. 범부중생은 여래의 본원을 믿음에 의해서 시작되지만 최종적으로는 여래와 같은 여래장으로 돌아감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으로 있는 동안은 여래의 불가사의한 지혜와 본원력에 대해 仰信이나 伏信이 강조되며, 菩薩種性人은 信解, 深信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四疑凡夫로부터 菩薩種性에 이르기까지도 仰信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仰信은 원효 信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阿彌陀經』에서는 『無量壽經宗要』와 대동소이하지만 범부의 信心은 여래에 의해 攝護되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본서는 범부를 위한 경이으로 아무런 이의없이 수용하는 信順을 말하고 있다. 또 『遊心安樂道』는 원효의 진찬이 아니지만 『무량수경종요』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특별한 신관은 별로 없다. 그러나 범부 뿐만아니라 축생인 용이나 귀신까지도 믿음과 원이 있으면 왕생할 수 있다고 하므로 정토사상사에서는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77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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