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 -

수선님 2019. 12. 1. 12:21

주요 논저: [臨濟禪 硏究], [如來藏思想](역서), [ 仰의 禪思想 形成過程考] _이 논문은 1996년도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설 성철선사상연구원의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목 차 | (1/4) | (2/4) | (3/4) | (4/4) |
Ⅰ.
머리말 ◀ 첫 페이지 (1/4) ↙ No. 1
Ⅱ. 교설에 나타난 깨달음의 내용 중간>초기불교에서 설해진 법~

다음 페이지 ▽ (2/4) ↙ No. 2
Ⅱ. 중간>오온, 정신과 물질의 상관성~
Ⅲ.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 중간>실제론적 관점은~ 중간>찰나/달찰나/겁

다음 페이지 ▽ (3/4) ↙ No. 3
Ⅲ. 중간>수미산을 중심으로 Ⅲ. 중간>불교의 정신세계 Ⅲ. 중간>여래장계 경론에서는

다음 페이지 ▽ (4/4) ↙ No. 4
Ⅲ. 중간>잡아함은 색에 대해~
Ⅳ. 깨달음의 실천 Ⅴ. 맺는 말


Ⅰ. 머리말

불교는 깨달음을 얻은 正覺者(정각자) 붓다의 가르침이다. 無上正等覺(무상정등각)을 얻은 붓다는 이 깨달음에 입각해 삶을 살았으며, 모든 중생이 여기에 바탕해 자신과 동등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그의 모든 敎義(교의)는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실천행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깨달음에는 현상 속에서의 낱낱의 事象(사상)에 대한 이해 및 그 正體性(정체성)에 대한 파악과, 개개적 요소들의 본질, 곧 本源(본원)에 대한 체득이 함께 깃들어 있다.

따라서 개별적이라거나 독립 · 분립적, 혹은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것에 透貫(투관)되는 전체적 一味(일미)의 一圓性(일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사상의 핵심이자 중추이며 불교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본 요소이다.

불교 접근에의 출발점이며 지향하는 궁극 경지의 도달점이자 그에 바탕한 이상적 삶의 실존 형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고 또 거의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오직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지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세계를 헤아릴 수 없다는, 즉 未悟者(미오자)의 不可侵 不可解(불가침 불가해)의 영역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思量(사량)이나 이해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때문에 논리적 분석이나 의리적 접근은 잘못된 것이라 하며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해하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선 이는 깨달은 세계에의 표현이 개개의 낱낱 부분에 있어서나 또는 현재의 실상과 관련하여 직접적이고 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 모두를 포함한 전체적이고 종합적이면서 직관적인 형태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禪(선)에서 행해지고 있는 喝(갈)이나 棒(봉) 등의 격외 행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정된 의미의 언어적 용법을 피하면서 그 핵심을 드러내려 하니 자연 이런 방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이란 體得(체득)의 부분으로 悟道(오도)를 통한 진리의 自己化이기 때문에 그 세계를 나타내는 이들 표현은 가장 직접적이고 절대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방법이 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체계화된 이론 체제에 익숙해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겐 이런 설명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곧 깨달음이 이해하기 어렵고 무언가 애매하면서도 신뢰하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에 대한 기존의 표현 방식과 내용의 주장만을 한다면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박약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강한 열정을 갖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특히 단순 접근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한번도 인식하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神(신)을 仰信(앙신)하라는 여타 종교 형태의 맹신 논리와 똑같다는 생각을 줄 수도 있고,

불교의 이상 세계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일 뿐이라는 잘못된 오해 및 미지의 경지에 대한 불확신으로 불교 전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에서는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설명하며 無悟者(무오자)의 미접근의 영역으로만 설명하는 종래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현대적 논리와 오늘날의 사고 형태를 염두에 두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즉 여러 경전에 나타나 있는 깨달음의 내용들, 그리고 몇몇 師匠(사장)들의 행을 오늘날의 시각이나 관점에서 살펴보고 현실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Ⅱ. 교설에 나타난 깨달음의 내용

불교의 절대경으로 되어 있는 깨달음(bodhi)이란 무엇인가 ?
주지하다시피 깨달음이란 불교의 시발점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 관점이자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고, 불교의 본체이며 구경의 존재상이다.


따라서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체득은 불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팔만장경 모두가 覺者(각자)의 입장에서 고뇌의 현실 삶을 직관하고 그 원인을 설명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 眞法 眞理(진법 진리)의 체득자로서 삶을 살도록 그 방법과 도달된 경지에서의 法悅(법열)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이지만, 핵심은 깨달음의 세계와 그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즉 일반적으로 이해하거나 표현 및 설명하기 어렵다는 관점과는 달리 교설에 이미 깨달음의 세계와 내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교설에 나타난 깨달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현실적으로 이해해 보자.

우선 불교의 기본 사상은 일체 중생의 삶이 고통스럽다(苦; 고, du kha)는 문제의식 위에 이 고를 해결하여 해탈(vimok a)의 삶을 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고의 止滅(지멸)을 통해 해탈을 이루고 覺者(각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의 지멸을 위한 방법론이자 결과론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고뇌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지혜(praj )를 갖추고 대비(mah - karu )를 실천하는 覺者(각자)인 붓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원시교설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無上正等覺(무상정등각;anuttara-samyak-sambodhi)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선 그것은 "오직 올바른 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케 하고 等正覺(등정각)을 이루게 하였느니라. 나는 마땅히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기며 받들어 공양하고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法'(dharma)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원시교설은 물론이고 이후 부파나 대승, 그리고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며 불교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설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원시불교는 이 '法(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은 三法印(삼법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재하는 존재법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원리와 같은 법칙성으로서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붓다의 깨달음은 만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속에 영원불변한 불변체로서의 실체는 없으나 현상 존재의 理法(이법)으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皆變(개변)하는 것, 곧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그 속에 내재된 초월재로서의 常住(상주)의 法性(법성)에 대한 지칭이다. 생멸에 수순하면서도 생멸에 얽매이지 않고 자재하는 무규정적 절대의 존재, 體相一如(체상일여)이면서도 體相超脫(체상초탈)의 것, 不一不異(불일불이)하고 不離不合(불이불합)하는 법칙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잡아함경]에서는 이 법을 '緣起法(연기법)'이라고 하고 있다.

緣起(연기; prat tya-samutp da)는 흔히 12연기를 일컫는다. 이 12연기의 존재성은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나며[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하는[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법칙이다.

여기에서의 생[起(기)]이나 멸은 괴로움의 집적인 苦聚(고취)의 集(집; samudaya)과 滅(멸; nirodha)로 이어지지만 반대로 깨달음의 결과인 滅諦(멸체)의 滅(멸)에도 깃들어 있다.

또 다른 깨달음의 내용으로 설명되고 있는 四聖諦(사성체)에서의 苦集(고집)의 현상과 滅道(멸도)의 방법론에도 생멸로서의 起滅(기멸)과 無有(무유)의 관념으로 介在(개재)된 법칙인 것이다.

붓다는 이런 연기법, 곧 12연기를 무명에서 노 · 병 · 사로 관하는 順觀(순관)과 노 · 병 · 사에서 무명으로 관하는 逆觀(역관)의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고, 그것은 석존 자신뿐만 아니라 비바시불을 비롯한 과거 출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똑같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에 대해 [잡아함경]에서는 또한 '中道(중도)'라고도 하고 있다.

여래는 二邊(이변)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명에 緣(연)하여 행이 있게 되고, 내지 生老病死 憂悲惱苦(생노병사 우비뇌고)의 集(집)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다.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生老病死 憂悲惱苦(생노병사 우비뇌고)가 멸하는 것이다.

여래는 있다 없다는 有·無(유·무)나 항상하거나 항상하지 않는 常(상) · 無常(무상) 등의 二邊(이변)을 벗어나 중도를 설하는데 그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등이라는 것이다. 연기의 내용이다.

이에 의한다면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말로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중도법에 대한 체득으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이런 중도론에서 볼 때 연기법은 존재나 비존재, 혹은 영원하거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兩邊(양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無常性(무상성)이나 영원불변하는 恒存(항존)의 常一性(상일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만 연기나 중도는 그러한 내용은 아니다.

곧 단이나 상, 유나 무처럼 흑백론이나 이분법적 구조를 떠난 상태에서 밝히는 유 · 무 등에 대한 언급이 중도이다. 하지만 떠났다고 하여 또 다른 별개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세계를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事象(사상)에 대한 법칙의 표현이다.

이런 중도의 내용을 흔히 '空'(공; nya)이라고 한다.
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無相(무상)이나 무소유, 驕慢之心(교만지심)이 없는 지견을 얻을 수는 없으며, 색수상행식의 五蘊(오온)이 無常(무상)하고 變異(변이)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는 잡아함경 권3의 내용이나,


여러 인연에 의해 생한 법을 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假名(가명)이며, 그것이 중도의 의미라고 밝히고 있는 용수(N g rjuna)의 설처럼 事象(사상)이 존재하지만 그 참된 실체는 없다는 것이 공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존재 속의 無實體(무실체)를 특히 반야 계통에서는 諸法皆空(제법개공)이라고 하고 있다. 여러 인연에 의해 생긴 법,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현상이 공이라는 것이다.

이런 법=연기=중도=공에 대해 여래장계에서는 이를 如來藏(여래장; tath gata-garbha)이라고 하고 있다.

일체 중생은 스스로가 여래와 똑같은 법성(dharmata)을 갖추고 있고 그것은 불변 청정한 本性(본성;prak ti)이며, 이러한 본성은 보편타당한 진리, 곧 法爾(법이)의 도리로서

여래의 出(출) · 非出(비출)에 관계없이 상주불변하는 것, 곧 여래장을 설하면서 이것이 연기법과 같은 것(여래=여래법성=여래장=연기)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대반열반경 권27의 [師子吼菩薩品(사자후보살품)]에서는,

만약 어떤 사람이 12인연을 본다면 그것은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것은 佛(불)을 보는 것이다.

불이라는 것은 곧 불성이다. ··· 12인연을 이름하여 불성이라고 하고, 불성이 제일의공이며, 제일의공을 이름하여 중도라 하고, 중도가 곧 불이며, 불을 이름하여 열반이라고 한다.

라고 하며 연기=법=불=불성=제일의공=중도=열반임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禪家(선가)에서는 이러한 교의적 전거, 즉 여래장이나 불성이 불교의 궁극적 존재인 佛(불)과 같은 것이라는 자각하에 이의 直證(직증)을 추구하고, 그것을 선종 초조 보리달마의 眞性(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본원 체득의 요체로 설명하고 있다.

곧 정법 嫡傳(적전)의 조사 중 달마는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에서 범부나 성인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진성을 자각해 寂然無爲(적연무위)하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眞性(진성)'으로,

삼조 승찬은 信心銘(신심명)에서 '道(도)'로, 사조 도신은 性(성)과 함께 佛性(불성), 오조 홍인은 守心(수심) 및 自心(자심), 육조 혜능은 불성을 비롯한 자성 등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의 조사들 중 마조는 '心(심)', 五家(오가) 중 임제는 無位眞人(무위진인), 曹洞 洞山(조동동산)은 唯一寶(유일보)나 唯一物(유일물) 등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의미의 한정성을 가진 언어적 표현을 부정하고 拳(권) · 拂(불) · 棒(봉) · 喝(갈)과 같은 비논리적 행법으로 나타내고 있는 격외의 방법들도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이른바 '법'이 선불교에서는 보리달마의 凡聖同一眞性(범성동일진성)으로부터 이후의 여러 조사들의 설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깨달음의 즉현을 추구하는 선의 本領()이 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에 의해 볼 때 초기불교에서 설해진 '법'의 형태가 부파나 대승불교를 거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용어의 변형만 보일 뿐 내용적으로는 일관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곧 불=법=연기=중도=공=여래장=불성=심=무위진인=유일물 ··· 등인 것이다.

그러면 교설에서 설하고 있는 이와 같은 불교의 본원 경지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해해 볼 것인가 ? 이들 용어들이 표현만 다를 뿐 내용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펴본 바와 같다.

이는 석존이 보였던 爲人說法觀(위인설법관), 대기설법과 같은 양태를 가지고 있고, 그 출현은 대승의 공관사상이나 여래장, 선가의 성 · 불성 등과 같이 시대환경적 영향과 상관하고 있다.

즉 불법의 핵심 사상이 시대의 사상적 관점 등 여러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그 시대의 가장 이상적이고 적절한 표현이자 이해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깨달음, 곧 불교의 본원 경지를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해해 볼 것인가 ?

논자는 위의 용어들 중 특히 연기(緣起)와 공(空)이라는 것에 주목해 보고 싶다. 모두가 같은 내용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들이지만, 연기와 공에는 이해를 위한 구체적 내용이 보다 자세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석존이 깨달아 붓다를 이루었다는 연기, 곧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의 成句(성구)로 표현되는 연기법의 구체적 의미는 단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존재 영역 및 그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와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는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는 존재와 비존재의 실상, 곧 있다 없다는 등의 공간적 존재와 그 相依相關性(상의상관성;idam-pratyaya-t )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此起故彼起(차기고피기)와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는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은 생하고 없어지는 시간적 순서와 그 상의상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석존이 깨달아 부처를 이룬 것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석존의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원시교설의 핵심 교설 중 하나인 三法印(삼법인)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諸行無常(제행무상)과 諸法無我(제법무아)를 설하고 이를 체득하면 涅槃寂靜(열반적정)을 얻을 수 있다는 삼법인에 있어 제행무상은 시간적 연속성에서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말하고, 제법무아는 존재하는 사물에 내재되어 변하지 않는 참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행무상은 항상됨이 없이 변모 변화하는 사물의 실체성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제법무아는 변화하며 존재하는 실체에 불변의 진실제가 없다는 것을 공간적인 측면에서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연기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각은 이런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바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열반적정이라는 불교의 이상경지가 현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제법의 실상은 이런 시간과 공간에 내재된 성격으로, 시간적으로는 끊임없이 변천하고 있다는 無常性(무상성)과 공간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참된 실체는 없다는 無恒存性(무항존성;無我무아)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무상성은 시간 속에 깃든 존재의 본성을 나타낸 것이고, 공간의 무항존성은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체의 본질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일체 제법 제현상 그 모두가 시간적으로 항상함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것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공간적 실체성을 깨달았을 때 寂靜(적정)의 열반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유무와 생멸의 법칙으로 설명되고 있는 연기법에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관점이 들어 있고, 이것이 법=공=중도 ···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말하자면 깨달아야 할 요체로서 언급되고 있는 연기법은 차제적 형태를 띠고 있는 시간과 존재하는 영역으로서의 공간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특히 시간과 공간이 眞如(진여)와 같은 것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라든가, 삼세의 고집멸도에 대한 앎을 時通(시통), 삼계에 대한 통달을 處通(처통)이라고 하고 있는 것 등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불교의 본원 경지인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깨달음임을 알 수 있다.

空(공) 역시 연기나 중도 등과 같은 의미로 설명되고 있지만 제법개공을 설하고 있는 대승의 교의에서 보면 담고 있는 내용은 좀더 구체적임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오늘날 그 어떤 소의경전보다 중요시되며 常用(상용) 誦經 經典(송경 경전)이 되어 있는 般若心經(반야심경)에서는 그것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고액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설하고 있다. 이 내용은 앞서 공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무상하고 마멸되며 변이하는 것이 오온이라는 잡아함경의 내용과 같은 의미의 것이기도 하다.

오온은 주지하다시피 色 · 受 · 想 · 行 · 識(색·수·상·행·식)으로, 이는 흔히 물질과 정신에 관한 것으로 일컬어지며, 물질인 색과 정신인 수 · 상 · 행 ·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곧 공이란 이 오온개공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요, 이런 오온개공에 대한 체득이 깨달음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오온에 대한 깨달음은 물질과 정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고뇌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은 이처럼 오온개공에 대한 照見(조견)으로 이룰 수 있고., 오온개공에 대한 깨달음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깨달음이며, 이것이 공의 체득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초에 언급한 '법', 그리고 그 법인 연기 및 중도 등과 맞닿아 있다.

또한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의 세계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 그리고

수상행식도 또한 그와 같으며 이것이 제법의 공상이라는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한걸음 더 나아간 관점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법의 공상이 不生不滅(불생불멸)이요 不垢不淨(불구부정)이며 不增不減(불증불감)이라 하고, 따라서 공에는 오온과 육근과 육경, 육식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오온개공을 존재와 비존재의 영역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不一不二(불일불이)의 離卽(이즉)의 관점을 떠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온, 곧 정신과 물질의 상관성 및 不異性(불이성)을 밝혀 주는 부분이다. 무형인 정신과 유형인 물질이 ->>>다음장으로 ->>계속 ->(2/4)

 

앞장 계속 (1/4) ~

이는 오온, 곧 정신과 물질의 상관성 및 不異性(불이성)을 밝혀 주는 부분이다. 무형인 정신과 유형인 물질이 별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곧 물질이고 물질이 정신이라는 '정신=물질'에 대한 언급이다.

현대 과학에서 볼 때 성철선사가 즐겨 인용했다는 아인슈타인(Einstein)의 等價原理(등가원리), 즉 질량=에너지와 같은 논리이다. 이러한 면에서 깨달음에는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개념이 깃들어 있고 그 모두가 상의상관의 관계에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또한 깨달음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가진 능력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붓다는 외형의 신체상으로는 32相 80種好(종호)를 가지고 있고, 내면의 정신적 능력으로 오직 깨달은 붓다만이 가지는 十八不共法(십팔불공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 중 18불공법(a da ve ik buddha-dharm )은 일체를 了知(요지)하는 열 가지의 능력인 十力(십력; da a bal ni)을 비롯해 四無畏(사무외; catv ri vai rady ni)와 三念住(삼념주; tr i sa ti- upasth n ni) 및 大悲(대비; mah -karu )를 말하는 것인데,

이 가운데에서 十力(십력)에 處非處智力(처비처지력) 등의 열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곧 이들 내용 속에서 본 논에서 언급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다. 관련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만을 언급해 보자면


첫 번째의 處非處智力(처비처지력)은 모든 진실한 이치[應理(응리)]와 그렇지 아니한 이치[不應理(불응리)]를 그대로 여실하게 認知(인지)하는 지혜의 힘을 말하며,

두 번째의 業異熟智力(업이숙지력)은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의 모든 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여실하게 아는 것을 말하고,

네 번째의 根上下智力(근상하지력)은 중생의 근기가 제각기 달라 수많은 상하 우열의 다름이 있으나 이를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

다섯 번째의 種種勝解智力(종종승해지력)은 중생의 意樂(의락)에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를 여실히 그대로 아는 것,

여섯 번째의 種種界智力(종종계지력)은 중생의 性類(성류)가 각각 다르므로 그들이 머무르는 세간도 각기 다르나 그것을 모두 여실히 아는 것,

일곱 번째의 遍趣行智力(편취행지력)은 人天(인천) 등 一切處(일체처)에 이르는 道行(도행)의 인과를 여실히 아는 것,

여덟 번째의 宿住隨念智力(숙주수념지력)은 자신과 남의 과거세인 宿住(숙주)의 일들을 아는 것,

아홉 번째의 死生智力(사생지력)은 天眼力(천안력)으로 중생의 탄생과 죽음의 시기 및 미래생의 善惡趣(선악취)와 선악 업의 형성 등을 모두 여실히 아는 것 등을 말한다.

이를 본 논의 관점과 연관지어 보자면
첫 번째의 처비처지력과 네 번째의 근상하지력 및 다섯 번째의 종종승해지력은 정신적인 부분과 관련되어 있고,
두 번째의 업이숙지력과 여덟 번째의 숙주수념지력은 시간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여섯 번째의 종종계지력과 일곱 번째의 편취행지력은 공간적인 부분, 그리고
아홉 번째의 생사지력은 시간과 공간 및 물질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들 모두 시간과 공간, 정신 및 물질적 개념을 가지고 있거나 이들 각각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붓다만이 소유하는 능력, 곧 18불공법의 내용에도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또 같은 내용을 論藏(논장)들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아비달마순정리론] 권2에서는 중생 존재의 성립에 대해 밝히면서 그것이 四大(사대)와 識(식) 및 空(공)에 의지해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다.

사대는 물질을 말하고, 식은 정신을 말하며, 공은 공간을 나타낸다. 여기에 이들이 성립되고 유지 소멸되는 시간적인 부분을 고려한다면, 유정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의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유정 존재는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의해 성립되어 있고, 이에 대한 체득이 깨달음이므로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 대비바사론 권75에서는 유정 존재의 성립 因(인)으로 地界(지계), 水界(수계), 火界(화계), 風界(풍계), 空界(공계), 識界(식계)의 六界(육계)를 언급하며 이에 의해 유정 존재가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지수화풍의 四界(사계)는 곧 물질을 말하고, 공계는 공간, 식계는 정신을 말한다. 또한 이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적인 면을 참고한다면 유정은 시간과 공간, 정신 및 물질과 상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관점에 의해 논자는 불교의 본원 경지인 '깨달음'을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불타의 깨달음인 법이 연기나 중도, 공, 불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해 불교 교설에서는 어떻게 밝히고 있는지 그 구체적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Ⅲ.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

깨달음이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 내용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

우선 시간에 대한 부분은 불교 교설의 설명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교리의 지향점인 깨달음이 그 존재론적 기반에서 시간의 문제와 커다란 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無明(무명)의 타파를 역설하고 있는 불교에 있어 무명이 과거 · 현재 · 미래에 대한 無知(무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원시불교 및 이후의 아비달마 교설이라든가,

시간의 근본을 무명이라고 밝히고 있는 [미란타왕문경]의 설, 그리고 物不遷論(물불천론)에서
"
聲聞(성문)은 무상의 법칙을 깨달아 도를 이루고, 緣覺(연각)은 인연이 분리되어 사라지는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참된 진법의 도에 들어간다"고 언급하고 있는 僧肇(승조)의 말처럼,

시간에 대한 체득은 迷妄(미망)의 중생계를 벗어날 수 있는 핵심 요체이기도 하다.

흔히 과거와 현재, 미래의 三世로 설명되는 불교의 시간론(k la-v da)에는 여러 관점이 있지만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가 언급되고 있다. 인식론과 실재론, 절대론적 관점이다.

각 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의 인식론적 관점은 시간의 존재상이 인식론의 바탕 위에 있다는 관점이다.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렇지 못함이 인식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苦(고)와 樂(낙)으로 대별되게 된다는 견해이다.

교의에 의한다면 無常(무상)과 無我(무아) 및 涅槃寂靜(열반적정)을 중심으로 한 근본불교라든가 시간이 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주관의 인식 형식이라는 유식의 관점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인식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일단 객관과 주관의 인식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인식은 무상의 법칙 속에 있어 불완전하므로 열반의 절대적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식론적인 관점이다.

물론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不二(불이)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둘째의 실재론적 관점은 시간이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으로, 아비달마의 시간론이 이에 해당하며, 그 중심은 有部(유부)의 '三世實有(삼세실유)'설과 經量部(경량부)의 '現在有體 過未無體(현재유체 과미무체)'설이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시간 자체가 독립된 실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普光(보광)이 俱舍論記(구사론기) 12에서 "시간은 따로 실체가 없으며, 법에 의하여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오온이 체라고 한 것이다"라는 것이라든가, 衆賢(중현; Sa ghabhadra)이 [순정리론]에서

"여러 겁은 오직 오온을 사용하여 體(체)로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시간의 체를 얻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존재의 양태와 관련하여 실재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시간이 독립적으로 실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인 오온의 유위법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즉 존재법과의 작용(k ritra)의 유무에 따라 구별하는 관점이다.

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法體恒有(법체항유)를 주장하는 유부에서는 관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정신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곧 三世實有 法體恒有(삼세실유 법체항유)이다. 특히 미래세로부터 현재세의 법이 실유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부는 이 법이 또한 과거세로 투사된다고 설명한다.

미래세의 법이 실재하며 그것에 의해 탄생한 현재세의 법도 실재하고, 따라서 현재에서 과거로 투사된 과거세의 법도 실재한다는 관점이다.

유부의 시간관도 이에 기초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시간의 흐름을 유부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법의 존재가 生 · 住 · 異 · 滅(생·주·이·멸)의 四相(사상)에 의해 존재하며, 사상의 형성과 관련한 시간 단위가 1찰나이고, 이 찰나(k a a)의 사상이 쌓여서 현상의 변화가 성립된다는,

그리고 시간을 구성하는 법은 刹那滅(찰나멸)이고 1찰나 1찰나가 독립해 있다는 시간과 존재의 상관적인 관점이 깃들어 있다. 곧 상태의 변화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비해 經量部(경량부)의 '현재유체 과미무체'설은 현재만이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유부의 삼세실유설을 비판하고 있는 경량부는 생 · 주 · 이 · 멸의 四相(사상) 성립을 1찰나간이라는 유부의 관점을 부정하면서 사상을 다찰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 찰나를 기준으로 하면서도 다찰나의 상속 위에서 설명하는 사상의 인식이다.

'유위법에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생한 이후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현재라고 하며, 이미 멸한 것을 과거라고 한다'는 설에서 볼 때 미래는 아직 생하지 않았고 과거는 멸하여 없어졌으므로 法體恒有(법체항유)라는 유부의 설과는 달리 無體(무체)가 된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有(유)]하므로 現在有體 過未無體(현재유체 과미무체)인 것이다.

이런 경량부의 과미무체설은 시간을 현재에 존재하는 제법의 바탕 위에서 현재만이 존재함을 설명한 것으로, 과거나 미래는 현재 모습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시간의 실재를 주장하는 유부나 경량부의 설이 똑같이 시간의 독립적 실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법에 의해 존재한다는 존재와의 상관관계를 설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셋째의 절대론적 관점은 위의 인식이나 실재론의 범위를 초월해 절대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으로, 교리적으로는 반야나 화엄 등의 대승설이 이에 속한다.

특히 공사상을 정립, 대승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고 있는 용수(N g rjuna)는 [중론]에서 시간에 관한 절대론적 관점을 밝히고 있다.

[第19觀時品(관시품;k la-parik )]에서 용수는 이전의 시간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밝히면서

시간이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 사이에 존재한다는 상대적 존재론의 형태, 시간을 인식한다는 인식론적 관점, 시간 존재의 근거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으로 분류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가 어느 하나에 의해 다른 것이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며, 시간이 존재물의 변화와 생멸의 상태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정적이지 않은 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고, 존재하는 법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의 존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수는 시간의 실체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 허구성을 밝히면서 시간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은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한 緣起(연기)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본성이 없는 무자성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존재하는 것은 무실체 무자성인 채로 우리의 인식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고 보고 있다.

실체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여러 조건으로 규정되며 인식되고 있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假有(가유)이고 이것은 임시로 존재한다고 파악, 옳고 그름 등에 대한 취사선택을 하지 않도록 설하고 있다.

시간의 절대론적 관점은 여기에 기초해 있다.

시간의 실체성과 존재성에 대한 부정이 여러 대승경전에서 밝히고 있는 것, 즉 과거 · 현재 · 미래가 서로 관련되며 각각의 특성을 발휘하여 빛나고 있는 불타의 세계, 시간을 초월한 절대의 시간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식론과 실재론, 그리고 절대론의 관점 등 이상의 시간관에 의해 볼 때 불교의 시간관은 인식론과 실재론에 이어 궁극적으로는 절대론의 시간관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본 논은 이의 어느 것에 대한 시비를 논하고자 함은 아니다.
형태론으로 본다면 절대론에 있지만 어느 것이든 그 시간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覺者(각자)의 깨달음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삼세의 시간, 그 속에 내재된 시간적 영역과 그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다음 시간의 장단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는 [대비바사론] 및 [구사론]의 8종설과 유가사지론의 10종설 등이 있으며, 모두 유위법의 차원에서 시설 설명되고 있는 것들이다.

곧 대비바사론 권136에서는 刹那(찰나), 달刹那(달찰나), 臘縛(납박), 牟呼栗多(모호율다), 晝夜(주야), 月(월), 歲(세), 劫(겁) 등의 8종을,

[구사론] 권12에서는 刹那(찰나), 달刹那(달찰나), 臘縛(납박), 牟呼栗多(모호율다), 晝夜(주야), 月(월), 年(년), 劫(겁)의 8종을,

[유가사지론] 권2에서는 時(시), 年(년), 月(월), 半月(반월), 日(일), 夜(야), 刹那(찰나), 달刹那(달찰나), 臘縛(납박), 目呼刺多(목호자다) 등의 10종을 밝히고 있다.

이 중 유가사지론의 月(월), 半月(반월)과 日(일), 夜(야)는 대비바사론과 구사론의 晝夜(주야), 月(월)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본 논에서는 8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찰나(k a a)는 불교의 시간관에서 가장 짧은 시간으로, 대비바사론에서는 '時之極少 謂一刹那(시지극소 위일찰나)'라고 하고 있다. 이 찰나를 오늘날의 秒(초) 개념으로 보면 1/75초, 약 0.013초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장사가 손가락을 퉁길 때 64찰나가 지나간다[如壯士彈指頃 經六十四刹那(여장사탄지경 경육십사찰나)]는 것이라든가 손가락을 한 번 퉁기는 데 60念이 있다[一彈指頃 有六十念(일탄지경 유육십념)], 또는 1찰나에 900의 생멸이 있다,

혹은 1,800의 생멸, 81,000의 생멸이 있다는 견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찰나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찰나(tatk a a)는 120찰나를 합한 것으로 약 1.6초 가량이 되는 시간이며,
瞬息(순식)이라고도 하는 랍박(lava)은 60개의 달찰나가 모인 것으로 약 96초,
須臾(수유)라고도 하는 牟呼栗多(모호율다;muh rta)는 30랍박으로 48분여의 시간,
주야(ahor tra)는 30모호율다로 오늘날과 같은 1일, 곧 24시간이다.
월(m sa)은 30주야, 년(var a)은 12월로 歲(세)라고도 한다.


(kalpa)은 가장 긴 시간으로 芥子劫(개자겁)과 盤石劫(반석겁)의 설이 있다.

[잡아함경]에 의하면 개자겁은 사방 둘레와 높이가 각각 1由旬(1유순은; 최소 16km)이 되는 鐵城(철성)에 가득 들어 있는 개자를 어떤 사람이 백 년에 하나씩 꺼내 그 개자가 다 없어져도 오히려 겁의 시간은 남아 있는 정도의 시간이라 하며,

반석겁은 깨어지거나 부서진 곳이 없이 사방 1유순의 돌산을 어떤 사람이 얇은 천으로 백 년에 한 번씩 쓸어 돌산이 모두 닳아 없어져도 겁의 시간은 남아 있는 정도의 시간이라 한다.

그리고 이런 가장 긴 시간이 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겁이 또한 한량없음을 밝히고 있다.

겁이 百千萬億(백천만억)이나 된다든가[如是長劫百千萬億(여시장겁백천만억)], 劫數(겁수)의 끝은 생각할 수 없는 것[不能憶念劫數邊際(불능억념겁수변제)],

과거의 겁수는 무량한 것[過去劫數無量(과거겁수무량)]이라는 잡아함경의 내용이라든가, 阿僧祗劫(아승지겁), 또는 여러 대승경에서 밝히고 있는 恒沙劫(항사겁)과 같은 내용들이다.

겁의 수가 헤아릴 수 없는 숫자만큼, 혹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는 이야기이다.

또 흔히 無始無終(무시무종)이라고 하는 불교의 시간관을 위 잡아함경의 過去劫數無量(과거겁수무량)이라는 구절에서도 헤아려 볼 수 있다. 과거겁이 무량이므로 미래겁도 또한 무량인 것이다.

그런데 주지해야 할 점은 이러한 시간들이 단계적 길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설명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法藏(법장)이 [華嚴一乘敎義分齊章(화엄일승교의분제장)] 권4에서

"혹은 長劫(장겁)이 短劫(단겁)에 들어 있고 단겁이 장겁 속에 있으며,
백천의 大劫(대겁)이 一念(일념)이 되고 일념이 곧 백천 대겁이고, 과거겁 속에 미래의 겁이 들어 있고 미래겁 속에 과거의 겁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자재하여 時劫(시겁)은 無애(무애)이며, 相卽相入(상즉상입)하고 혼융하여 이루어진다
"고 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義湘(의상)이 法性偈(법성게)에서 밝히고 있는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과 같은 내용이다.
또 대지도론 권30에 천만 무량겁이 一日(일일)이 되고 一日(일일)이 천만 겁이 된다는 구절도 있다.
이상이 시간의 길이에 대한 대략적 내용이다.


시간의 근본이 무명이요, 과거 · 현재 · 미래에 대한 無知(무지)가 무명이라고 하였듯 깨달음이란 일단 장단이 포함된 이런 삼세의 시간에 대한 覺悟(각오)라고 하겠다.

존재법의 변화와 그 초월지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 불교의 시간관이기에 삼세에 대한 깨달음은 거기에 내재된 일체에 대한 깨달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찰나 찰나가 永遠不斷(영원부단)하며, 1찰나에 담겨 있는 64념 중의 일념이 무량겁이기에 항상 현재에 대한 철저한 覺得(각득)이 바탕이 되어 있다.

곧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시간=일체 존재법=현재'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일체의 존재법은 본질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현상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이런 모두에 대한 깨달음이 된다.
한 개체의 존재와 관련해 볼 때 유한한 시간과 상관하며 존재하기에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유한 생명으로서의 삶의 태도와 행동 및 가치질서를 규정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은 일반적으로 十方(십방)으로 일컬어진다. 곧 동 · 서 · 남 · 북의 四方(사방)과 그 각 중간인 四維(사유), 그리고 위와 아래의 상하 등 사방 · 사유 · 상하로 이루어진 방위적 개념이다.

이러한 방위로서의 시방은 방향도 없고 중심이나 끝도 없는 그야말로 無方無形(무방무형)의 광대무변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형체나 모양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느 한 곳에 원점을 정하고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경우, 그 방향은 한 곳을 향해 끝없는 무한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여타 어느 방향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원점으로부터 일정 방향으로 나아간 그 방향에의 끝없음은 한 곳으로부터 전개된 길이가 얼마냐에 상관없이 역시 그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을 옮겨 놓고 또다시 옮겨 놓아도 그 길이 이상의 무한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정의 범위나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 불교의 공간이다.
또한 사방과 사유 및 상하 등의 방향은 해가 뜨고 지는 쪽이 동쪽과 서쪽이라는 것과 같은 규정된 방향이 아니라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편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方所(방소)이다. 임의 설정의 假方(가방)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방향이 가방이기에 시방은 미규정 상태로서의 일정처를 향한 무한 지향이며, 또 사방과 관련한 사유나 상하의 한 방향을 몇 천이나 몇 만으로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각각의 하나하나가 시방의 정방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방위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무한의 영역에 속해 있는 불교의 공간을 모양으로 도식화해서 설명해 내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그 영역이 무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억지로 그려내 본다면 일반적으로 표시하는 공간의 형태, 곧 하나의 둥그런 원형이 아니라 각 방향으로 끝없는 화살표를 가진 하나의 球體(구체)라고 할 수 있다.

固定(고정)이 아닌 假定(가정)의 원점을 설정하고 그 원점으로부터 각 방향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무한 영역으로서의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시방의 개념을 교설에서는 무한의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 tri-s hasra-mah -s ha loka-dh tuva )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교설에서는 중생 거주의 所依處(소의처)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삼천대천세계, 즉 불교의 공간을 須彌山(수미산)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南贍部洲(남섬부주) 등의 ->>>다음장으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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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南贍部洲(남섬부주) 등의 네 개의 四大洲(사대주)가 있고,
여기에 수미산과 須彌海(수미해), 雙持山(쌍지산)과 雙持海(쌍지해) 등의 八山八海(팔산팔해)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鐵圍山(철위산) 등 九山八海(구산팔해)가 있으며, 이를 하나의 小世界(소세계)라 하고,


소세계가 천 개인 것을 一小千世界(일소천세계), 소천세계가 천 개인 것을 一中千世界(일중천세계), 중천세계가 천 개인 것을 一大千世界(일대천세계), 그리고 소 · 중 · 대 셋을 합하여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이다.

장아함경에서는 구산팔해의 넓이와 길이, 깊이, 모양 및 지옥과 천상세계 등 삼천세계의 여러 부분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곧 오늘날의 관점에 의해 볼 때 하나의 태양계를 하나의 소세계라 할 수 있고, 그것이 천 개인 것을 소천, 소천의 천 개를 중천, 중천의 천 개를 대천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천대천세계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重重(중중)의 無盡(무진)이다.

대지도론 권30에는 보살의 한 發意(발의)나 音聲(음성)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삼천대천세계를 지나 恒河沙(항하사)와 같은 시방의 모든 세계에 이른다"고 하고 있는 구절이 보이며,

권50에서도 삼천대천세계가 아승지의 수만큼이나 많다[十方阿僧祗三千大千世界(십방아승지삼천대천세계)]고 하고 있고, 또

삼천대천세계를 하나의 세계라 하며, 이는 일시에 생겨나고 일시에 사라진다.
이와 같이 시방에는 항하의 모래알과 같은 세계가 있으며, 이것이 일불의 세계이다. 이러한 일불의 세계 수 또한 항하사의 세계와 같으며, 이를 일불 세계의 海(해)라고 한다.


이러한 불세계 해의 수 또한 시방 항하사의 세계와 같으며, 이를 불세계의 種(종)이라 하고, 이러한 세계의 종은 시방에 무량하다. 고 하고 있다.

광범한 숫자 개념으로 海(해)와 種(종)을 들며 더욱 넓혀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삼천대천세계에 대해서도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다고 하고, 또한 그것을 해나 종, 그리고 종의 무량이라는 무한 숫자로 설명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광대무변한 무량무변의 세계가 교의에서 설하고 있는 공간의 영역이다. 나아가 대지도론 권93에서는 이런 세계와는 다른 세계, 곧 淨佛國(정불국)의 세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곧 三惡道(삼악도)나 邪見(사견) 및 三毒心(삼독심), 二乘(이승) 등이 없는 절대의 세계를 들고 있다. 蓮華藏世界(연화장세계)나 極樂淨土(극락정토)와 같은 세계이다.

이처럼 불교의 공간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소세계와 그 천 배씩의 세계, 그리고 항하사 수와 그 몇 곱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또한 유·무위의 공간 영역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일단 공간에 대한 깨달음은 이러한 공간 영역에 대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無方無圓(무방무원)하고 無邊(무변)한 廣大(광대)의 세계, 곧 하나의 소세계를 비롯하여 소천 · 중천 · 대천의 세계, 그리고 항하사의 대천세계에 대한 앎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들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서로 상관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후 살펴볼 물질의 관점과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개체로서의 절대 영역에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관련되어 존재하고 있다.

독립된 실체이면서도 서로가 相依相資(상의상자)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하는 개체는 모두가 成 · 住 · 壞 · 空(성·주·괴·공)한다는 불교의 기본 교설에 의거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물질은 無常(무상)과 無我(무아)의 법칙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이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성 · 주 · 괴 · 공을 반복하게 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해 한 영역의 공간은 다른 공간과 상관하여 성 · 주 · 괴 · 공하며, 다른 공간의 생멸 또한 이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물질은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의 요소, 현상적으로 말한다면 극히 작은 소립자들의 集合(집합)과 離散(이산)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즉 성 · 주 · 괴 · 공의 실제적 주체는 작은 소립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립자는 관념적으론 다양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곧 아무리 커다란 삼천대천세계라 할지라도 항하사 수의 삼천대천세계에서 볼 때에는 극히 작은 소립자에 불과하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반대로 극소의 공간이라도 삼천세계나 그 이상 등 무한의 영역을 담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중생이 知覺(지각)하기에는 한정된 영역이지만 그 한정된 영역 속에는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法性偈(법성게)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의 세계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일미진중함십방 일체진중역여시)]"는 내용도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며,

法藏(법장)이 [화엄일승교의분제장] 권4에서 "하나의 티끌 속에 삼세 일체의 부처님의 국토와 삼세 일체의 중생 등이 널리 나타나 있다"고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이다.

또한 존재의 측면에서 개인 立處(입처)로서의 공간은 개인적인 요소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과 관계하는 가정이라는 것이 있고, 이를 내포한 국지적 영역과 국가 및 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이상들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존재 공간은 이들과의 상관관계에 의해 존재한다. 공간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화엄 등 여러 대승경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보다 멀고 커다란 항하사의 삼천세계에 대한 앎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立處(입처)에 대한 공간적 깨달음을 갖는 것에 그 주된 목적이 있는 것이다. 立處(입처)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그 위치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 실존 영역에 대한 체득이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所立(소립)의 처소에 대한 확고한 앎은 安心(안심)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그 무지는 상관적 현상에 얽매인 피동적이고 종속적인 고통과 질곡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에 대한 앎이요, 나아가 항하사 수의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앎, 그리고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와 상관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그 공간 존재의 법칙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법칙에 의해 개개인이 살아가는 현상적 영역이 실재론이나 가치론의 측면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리고 그에 따라 被逮(피체)의 삶과 능동의 절대적 삶으로 구분짓게 된다는 그런 문제의식 위에 깨달음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일이다.

무위법의 세계에서는 生滅(생멸)이나 能所(능소)가 의미가 없지만 유위법에서는 생멸의 극복이 무위법으로 가는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바로 여기에 공간에 대한 깨달음의 필요성이 있다.

정신에 관한 내용은 사실 단층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색채가 이 정신적인 부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정신은 교의의 심화에 따라 이루어진 내용의 다양성과 구조체계의 복잡성, 그리고 특히 깨달은 각자의 경지에서만 취급될 수 있는 영역까지 매우 세분되어 있으며, 이는 불교 정신세계의 이해를 위한 접근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인식론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순수 인식만은 아니며, 도덕이나 철학 등 기초 윤리를 설하면서도 진리의 오도에 의한 절대경이 설해지는 등 불교의 정신은 존재의 전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곧 개인이나 집단, 인간의 내적 세계와 外境(외경)의 물질,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등 일체의 모든 것과 상관하여 설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구조체계가 복잡하고 세세하다. 상세한 내용은 피하고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상'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사상은 관련된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 정립되어 나타난 것으로, 관점이나 이론 · 환경과 같은 외적인 영향이 바뀌게 되면 그에 따라 변하게 되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가변의 것은 불교 관점으로 볼 때 외형으로 표출된 정신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은 개인적 내면 세계의 근저를 포함해 보다 근원적인 우주의 理法(이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흔히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마음, 즉 정신은 불교교리의 발달과 함께 세분화되고 상세함이 더해지고 있다.
일단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을 일체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인식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불교의 기본 관점이며, 이에 의해 볼 때 정신도 또한 여기에 입각해 기술되고 있다.

불교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원시와 부파 등 여러 관점이 있지만 궁극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여래장 사상이다.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원시에서는 인간 개인의 구성 요소를 五蘊(오온)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중 색은 물질로 육신을 말하지만 나머지 수 · 상 · 행 · 식의 넷은 정신이다.
곧 수(vedan )는 고통이나 즐거움 등의 감정 및 이를 받아들이는 感受作用(감수작용), 상(sa )은 마음에 비추어진 心像(심상)으로 오관의 감각 인식기관을 통해 취합된 取像(취상)의 起念(기념), 행(sa kh ra)은 수와 상을 제외한 여타 정신작용의 총칭, 식(vi a)은 體性(체성)으로 인식의 주체이다.


또 원시에서 불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로 언급하고 있는 十八界(십팔계) 중 '안∼신'의 전오근과 '색∼촉'의 전오경은 물질에 관한 것, 그리고 의근과 법경 및 육식은 정신에 관한 것이다.

곧 원시교설에서는 만상의 구조를 '일체법'이라 하고 이를 오온과 십팔계로 나타내고 있는데,

오온은 그 중심을 인식 주체의 내외를 포함한 객관성에 두고 이를 외적인 물질의 색온과 내적 정신인 수 · 상 · 행 · 식의 사온으로 구분한 것이고,

십팔계는 중심을 인식 주체의 내적인 주관적 측면에 두어 육근 · 육경 · 육식의 십팔계로 설명하면서 전오근과 전오경을 물질로, 그리고 '법 · 의'와 육식을 정신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정신은 감각기관으로서의 오근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오경을 바탕으로 生起(생기)하고 있다. 또한 원시의 중요 교설인 四諦(사체)와 12연기도 정신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고뇌의 苦(고)와 그 원인인 集(집), 해탈인 道(도)와 그 방법인 滅(멸) 모두가 정신 작용이며, 무명으로부터 노병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혹은 그 逆觀(역관)도 모두 정신의 영역이다.

곧 중생사의 제현상으로부터 수행의 방법, 그리고 그 과정의 階位(계위) 및 도달한 깨달음의 聖諦(성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신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에 관한 이러한 원시의 관점을 부파불교에서는 心(심; citta)과 意(의; mano) 및 識(식; vinnana)이라 하고, 이것을 마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소위 心識論(심식론)이다.

부파는 이런 심식론, 곧 마음의 구조를 일체의 존재를 분류하는 五位法(오위법)에서 마음의 주체인 心法(심법)과 작용인 心所法(심소법)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정신을 주체적인 심식과 '수 · 상' 등 작용의 속성으로 나눈 구분이다.

원시의 오온에 의한다면 심식은 식을 말하고 심소는 수 · 상 · 행이다. 수 · 상 · 행 · 식의 사온을 대등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과 그에 내재된 속성으로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는 심과 심소가 각기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 구체적인 정신현상이 성립한다는 관점이 있다.

이후의 유가행파에서 설하고 있는 아뢰야식과 같은 일원론의 논리와는 다르지만 부파에서는 이를 주된 정신론으로 정립하고 있다. 물론 經量部(경량부)와 같이 이에 대해 부정하는 일부 이론도 있다.

이러한 심식론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점은 이것이 육식이라는 외형적 표면심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내면에 내재된 잠재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극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瑜伽行派(유가행파)의 이론이다. 唯識法相宗(유식법상종)에서는 마음을 眼識(안식) 등의 前六識(전륙식)과 표면심 보존처로서의 意界(의계)인 第七末那識(제칠말나식), 그리고 잠재식으로서의 第八阿賴耶識(제팔아뢰야식)을 들고 있다.

곧 나타나는 표면심으로 전육식을 설하고, 내재된 잠재심으로 제7식과 8식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의 오식은 시각 · 청각 · 후각 · 미각 · 촉각의 오관을 통한 의식 내용에 대응하는 객관적 자극이자, 감각과 동시에 지각하기도 하는 의식이다.

제6의식은 오식보다 포괄적인 사고작용으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統覺作用(통각작용)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제6의식은 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5식과 공동으로 작용하는 五俱意識(오구의식)과 단독으로 작용하는 獨頭意識(독두의식)이 있다.

제7말나식(manas)은 아뢰야식과 육식 중간에 존재하는 식으로 전육식을 발생하는 식이다. 즉 아뢰야식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개인적으로 본다면 개인 존재에 집착하는 아집이다.

이 아집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고 아뢰야식의 작용과 결합해 출생 생장하여 육식을 갖는다. 따라서 표면심의 보존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제7말나식이다.

아뢰야식( laya)은 藏識(장식)으로도 번역되고 있듯 일체 제법이 종자로서 존재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일체의 제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지속하는 식이며, 여러 식과 함께 작용하여 환경세계나 개인 존재의 신체, 자아, 대상 등을 성립시킨다.

또한 과거의 因(인)에 대한 응보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해 개인적 존재를 비롯한 胎(태) · 卵(난) · 濕(습) · 化(화) 등 모든 생명의 감각이나 생명, 체온 등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는 생명 근원으로서의 식이다.

대체로 부파불교와 이러한 유가행파에서 밝히는 식은 모두 표면심과 잠재심으로 생멸변화하는 現象心(현상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심의 관점과는 달리 불변하는 體性(체성)으로서의 마음이 있다고 보는 교설이 있다.

곧 현상심의 깊은 곳에 불생불멸의 실체로서 性心(성심)이 있다고 설하는 여래장계 계통의 경론으로 불교 정신계의 궁극적 관점이다.

여래장계 경론에서는 근원 본성의 본체인 性體(성체)로 불성이나 여래장을 설한다. 선과 악, 시와 비, 유와 무 등 제법으로 현상화되기 이전의 근본 본원계를 여래장이라 하고, 여기에서 일체의 제법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래장 설의 기본 관점에는 自性淸淨(자성청정)과 客塵煩惱(객진번뇌)라는 두 개의 정신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즉 여래장에는 청정심과 번뇌심이 공존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번뇌심을 제거하고 청정심을 드러낼 때 여래가 현현한다는 것이다.

여래장의 이런 관점은 원시교설에서 明(명; vidyà)과 無明(무명; avidyà)을 언급하며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드러내야 한다는 관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무명은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고를 낳지만 이를 제거하면 해탈의 삶이 나타나게 된다.

문제는 이런 교설의 내용을 체득하여 명의 삶을 사느냐 아니면 무명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있다.

곧 불교 정신의 근원인 性體(성체)에는 자성청정과 객진번뇌, 즉 명과 무명이라는 두 가지가 있고, 정신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이 성체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여하에 따라 고뇌와 해탈이라는 양자로 극명하게 나누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정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교설에서 밝히고 있는 정신의 성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明(명)과 自性淸淨(자성청정)이 현현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 반대인 번뇌심에 뒤엉킨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義湘(의상)이 法性偈(법성게)에서, 법성이란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하고 深深微妙(심심미묘)한 법으로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고 하고 있는 것도

이 성체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의한 현상법의 세계, 곧 명과 무명에 있어 어떤 연으로 나아가느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또한 현상계의 정신, 곧 오늘날 존재하는 사상이나 이념 등에 대한 부분과는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간과해서는 안 될 극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아의 완성이라는 개인적 해탈과 개공성불이라는 이상세계의 구현이 모두 이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인의 현황을 보면 대체로 불교의 내적인 면에만 치중되어 있고, 외부 사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는 느낌이다.

불타가 당시 96종 외도나 62見(견)의 사상을 모두 살피고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化度(화도)의 행에서도 이런 당시의 관점들을 비교 언급하여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려 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한 한 개인의 정신 구조는 좁게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의 정신세계와 상의상관하여 성립 존재하고, 나아가 학교나 사회, 그리고 국가나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의 정신들과 관계하고 있다.

하나의 지구촌이라고 하듯 정보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기존의 사상은 물론 새로운 이념들이 급속한 전파속도를 가지고 있고, 모든 정신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상의 정신계를 구성하는 주된 내용들은 개인적인 내면의 것만이 아니라 외부의 여러 관점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전체도 물론이지만 개인의 내적 정신세계는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 정신계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또한 현실 정신계에 대한 관심은 개인 정신의 문제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상에 사로잡혀 독존성을 고집하거나 이른바 法執(법집)에 가득찬 사고방식만 유지한다면 공존의 사회 속에서 폐쇄성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적 깨달음의 추구만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체 중생 성불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교의 기본 목적에도 위배된다. 즉 현상계의 정신에 대한 시비를 구분해 자타가 구경의 정각을 얻어 해탈의 삶을 살 수 있는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 어느 시대에서나 불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다.

현상계의 정신 또한 모두 性體(성체)에서의 현현이지만 무명으로부터 전개된 잘못된 정신세계에 대한 국집은 결국 자타 모두에게 고뇌로운 삶을 가져다 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의상관의 법칙에 따라 불국토 건설이라는 이상세계의 구현에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것은 결국 불교의 정신, 곧 성체에 대한 깨달음의 필요성과 중대성이 강조되는 것이며, 현상계의 정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류를 위태롭게 하고 고난에 빠뜨리는 정신 이념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에 대한 무관심은 객진번뇌를 제거하고 자성청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밝혀 해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불교적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에 대한 깨달음은 근원 본성인 성체에 대한 깨달음이며, 이는 객체적 모습인 현상의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선 및 해결을 통해 참다운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마음이라는 정신 위주로 설명되고 있는 불교의 교리에 있어 不淨(부정)하고 非常(비상), 非我(비아)의 것인 물질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色心不二(색심불이)라 하여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님을 밝히고 있듯이 일체법 존재 양태의 기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 물질이기도 하다.

이는 근원적으로는 물질과 정신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는 물질이 정신의 소의처이자 존재의 기반이고, 때론 인간의 정신까지도 지배하는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물질 구성의 원소인 사대와 이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계[色法(색법)]를 관찰하면 불타의 菩提(보리)를 능히 얻을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매개체이자 불교적 이상세계 구현의 중요한 기능과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 온 시간과 공간 및 정신적인 부분과 상관, 혹은 공존의 법칙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따라서 이런 물질에 대한 깨달음은 사물이나 존재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자 전제조건이 된다.

물질에 대한 교설의 내용도 무척 다양하지만 역시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구조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와 상관하여 존재한다.

작게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먼지 티끌에서부터 크게는 공간에서 살핀 항하사 수의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질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예외되거나 벗어나는 존재는 없다.

불교에 있어서의 물질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色(색)을 중심으로 설하고 있다.

인간의 육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색이다. 이를 원시에서는 五蘊(오온)에서 色蘊(색온)으로, 12處(처)에서 五根(오근)과 五境(오경)으로, 부파에서는 五位(오위)에서 色法(색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는 주지하다시피 地 · 水 · 火 · 風(지·수·화·풍)의 四大(사대)이다.

오늘날 물질의 구성 요소로서 수십 종으로 세분하여 언급하고 있는 원소와는 달리 다소 관념적인 성격은 짙지만 이보다는 물질 성립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사대이다.

이의 離合集散(이합집산)에 따라 물질의 성립과 소멸, 즉 물질의 成 · 住 · 壞 · 空(성·주·괴·공)이 이루어지게 된다.

잡아함경 권2에서는 색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이란 ->>>다음장으로 ->>계속(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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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경 권2에서는 색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이란 일체의 四大(사대)와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四大造色(사대조색)]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색이라고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부파의 아비달마품류족론 권1에서도 색을 사대와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오근, 오경, 무표색 등으로 들고 있다.

물질의 원소가 되는 사대에는 각각 고유한 성질이 있다. 지대의 堅性(견성), 수대의 濕性(습성), 화대의 煖性(난성), 풍대의 動性(동성)이다. 이 네 성질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에나 포함되어 있는 기본 요소이다.

하지만 단지 모든 물질이 가진 성질을 대표한 것일 뿐 유일한 것은 아니며, 이것이 확대되면 무한한 성질이나 작용력으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

사대에는 또한 造因(조인)으로서 五因(오인)이나 四業(사업)이 있으며, 이에 의해 물질의 成(성) · 住(주) · 壞(괴) · 空(공)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 사대의 기본 요소는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는 不增不減(불증불감)이며, 각각은 床(상)의 네 다리와 같아 하나라도 빠지면 能造(능조)와 所造(소조)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들 요소의 양적인 증감과 住異(주이)가 業緣(업연)과 연관하여 天體(천체) 등 일체의 물질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물질의 크기로는 16종이 언급되고 있다.
가장 미세한 물질로 단절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長短(장단) · 方圓(방원) · 高下(고하)가 없고, 더 나누거나 분석하고 눈으로 보거나 냄새 맡고 맛볼 수 없는 極微(
극미; param nu)에서부터

극미의 7배 크기로 天眼(천안)이나 轉輪王眼(전륜왕안), 菩薩眼(보살안)만이 볼 수 있다는 微塵(미진; a u-rajas) 및 가장 큰 크기의 踰繕那(유선나; yojana)까지이다.

이처럼 물질인 색은 사대와 11종의 색법, 四大性(사대성), 五因(오인), 四業(사업), 16종의 크기,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각종 性質(성질) 등 다양한 내용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들이 인연 화합에 의해 이합집산하고 성주괴공하는 물질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물질이 본 논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성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강한 현실적 존재성을 띠고 있고 근원적으로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를 잘 관찰하면 보리의 증득이라는 직접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본래는 性空(성공)의 관점에서 설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에 대한 올바른 체득을 통해 정신적 자재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禪家(선가)인 曹洞(조동)의 오위에서 본다면 현상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偏中正(편중정)의 방법이다.

사실 중생 무명의 근원인 貪(탐) 등의 三毒心(삼독심)은 물질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이란 無常(무상)한 것이고 인연 화합에 의해 생멸한다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기본 성격을 깨닫게 되면 삼독심도 소멸케 된다.

석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물질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능히 괴로움을 끊지 못하게 된다. ··· 비구들이여, 물질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그것이 항상하지 않음을 관찰하라.

이것을 분명하게 하는 자는 물질에 대해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진 자는 심해탈을 얻은 것이다"고 하시고 있다.

물질을 올바로 알면 물질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지면 解解脫(해해탈)이 아니라 心解脫(심해탈)이므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설하시고 계신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형태를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一色(일색)이 一塵(일진)이고, 一佛(일불)이 一色(일색)이며, 一切佛(일체불)이 一切色(일체색)이고, 一切塵(일체진)이 一切佛(일체불)이라고 하듯 일체법은 물질과 상관하여 있다.

물질도 하나의 진리이며, 진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물질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곧 깨달음의 길이다. 심성의 깨달음 못지 않게 우리 인간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물질계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는 학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이란 이제까지 살펴 온 것처럼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고, 이들은 다양한 내용으로 설명되면서 근원의 일체법으로서, 또한 유정 중생의 현실계에 올곧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근원법에 대한 체득은 일체에의 자재를 가져다 준다. 하지만 현상계를 제외한 본질계만의 추구는 결코 올바를 수가 없다. 본질이 현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근원의 체득에 있어 본질에서 현상을 추구하는 正中偏(정중편)만이 아니라 현상에 본질을 추구하는 偏中正(편중정)의 방법, 그리고 不回互(불회호)의 正中來(정중래)나 偏中正(편중정)의 방법도 있듯이 현상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근원법 체득의 遲速問題(지속문제)를 도와준다.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는 현상이 결코 본질과 괴리되어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논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1차적 깨달음이 아니라 明(명)으로부터의 전개인가 아니면 無明(무명)으로부터의 전개인가를 살펴 自他(자타)가 일시에 皆共成佛(개공성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오온이나 연기를 비롯한 원시경전의 수많은 내용들에서부터 대승경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설들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불타의 생애가 그러했듯, 이들 경론에서는 내적 청정계만의 국집이나 안주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Ⅳ. 깨달음의 실천

지금까지 교설에 나타난 깨달음의 내용과 이의 현상적 이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불교의 모든 교설의 핵심은 연기나 중도, 공, 불성 등 여러 異稱(이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이는 佛(불=法;법)이라는 一字(일자)에 귀결되어 있고, 여기에서의 중심 문제는 깨달음임을 논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란 四大(사대)와 空(공) 및 識(식)이라는 물질과 공간, 정신이며, 여기에 이들이 상의상관해 일체법을 이루는 시간성을 포함해 깨달음이란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임을 밝혔다.

본 논에서 제기된 핵심 사항은 시간 등의 이러한 깨달음이 관념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과 전체를 포함한 보다 현실적인 관점 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내용으로 설해지고는 있지만 그 중심은 현재의 중생이 가진 감각기관과 거기에 인식되는 현재의 인식대상, 그리고 이들과 관련하는 정신세계를 중심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미래를 포함한 과거도 현재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간 등 이들 각각은 독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관된 상태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관성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재로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내재하는 가치나 윤리, 이념 등은 모두가 유한하고 번뇌스런 것이지만 그 또한 제법의 현현이요, 현실태로서 유지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실천도 당연 현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존재의 바탕인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현재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어떤 실천도 있을 수는 없으며, 여기에 기점을 두지 않은 실천은 의미도 가치도 의의도 없다고 할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깨달음은 "일체의 모든 善(선)은 깨달음을 근본으로 한다. 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무량한 공덕과 열반의 果(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파상론]의 구절처럼 무엇보다 중요한 요체가 된다. 깨달음을 통해 유루의 세간고를 벗어나게 되며, 또한 해탈의 열반락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이 현실을 벗어나 있을 때 그 실재성은 갖지 못하게 된다. 불교의 깨달음은 윤리적 도덕성에 대한 자각이나 이론 및 관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法(법)의 깨달음이며, 법은 존재이다.

곧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불교의 깨달음이다.
이런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므로 깨달음은 생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생동성은 깨달음의 현현, 곧 실천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오직 실천인 것이다.


불타께서 "비구들이여, 세간에는 세간법이 있으니 나는 그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고 연설하여 나타내 보인다"고 하신 것이라든가,

법화경의 開示悟入說(개시오입설)은 깨달음이 실천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구절이다. 이런 말씀처럼 깨달음이 현실에서 실천으로 나타났을 때 여기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깨달음이 깃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의 실천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밝힌 바대로 법, 곧 존재는 항상 현실태이며,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불타의 교화행도 현실의 제반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논사나 조사의 실천행도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구절을 보자.

모든 제불보살은 일체 중생을 度脫(도탈)시키고자 하신다. 그것은 자연 熏習(훈습)되는 것으로 항상하며 버림이 없다. 同體(동체)로 생각하는 지혜의 힘 때문이다. 오직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행[作業(작업)]을 나타내신다.

보고 듣는다는 것에서의 보고 들음은 현실의 실상이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시고자 원력을 세우신 제불보살은 존재하는 현실의 실상을 見(견) · 聞(문)하고 거기에 맞추어 化度(화도)의 구제행을 보이시는 것이다.

곧 중생 삶의 실제적 모습, 존재의 현황에 의함이다. 현실의 실상에 의한 이런 실천적 관점은 깨달음의 방법론에도 깃들어 있다.

불성을 보고자 하거든 마땅히 시절의 형색을 관찰하라.
출가한 사람은 그저 때와 시절을 따르면 된다. 추우면 춥다고 하고 더우면 덥다고 하라. 불성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시절인연을 관찰해라. 古今(고금)의 방편이 적지 않다.


열반경의 시절형색이나 法眼文益(법안문익)의 시절인연은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의 내용은 수행자를 중심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시절인연이란 수행환경의 전반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도의 계기나 수행법 등 수행자 개인과 관련한 내적 정신세계만이 아니라 수행자가 수행하는 시대환경 등 전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방법론적 이론으로서의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立處(입처)의 현상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가 서 있는 시점의 제반 현황,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신세계나 외적 물질계, 혹은 이들과 상관하여 실재하는 모든 존재들, 이것이 수행환경이요 시절인연이다.

바로 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을 때 불성의 이치, 곧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시절인연의 고찰, 시절인연에 의한 교화는 이미 불타의 행적에서부터 볼 수가 있다. 불타는 제자의 질문에 따라 대답하시고, 문법자의 근기에 상응하는 隨機說法(수기설법)을 보이시고 있다.

불타가 즐겨 사용하신 문답법이나 轉意法(전의법), 비유나 인연담의 인용들은 모두 對機(대기)에 따른 것들이다. 이 대기는 바로 시절형색의 산물이다.

바라문 아내의 모함으로 1,000명을 죽여야 했다는 희대의 살인마 앙굴마라, 아버지 빈비사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아사세 등 모두가 시절인연의 所産(소산)이다.

불타는 이들 모두를 제도하셨다. 또한 隨犯隨制(수범수제)의 행동윤리(계율)도 시절인연에 기초한 것이다. 이처럼 불타의 모든 교화행은 현실과 관련되고 현실 문제에 기초하고 있다. 대승의 출발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파의 이론적 심화에 따라 교의가 난해해지고 전문인화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타의 가르침에 목말라 했고, 이에 대중불교의 기치를 내세우고 등장한 것이 대승이다. 교의의 체계화와 실천불교를 지향한 중국불교 역시 중국인들의 사유방식과 현실적 삶의 형태에 기인한 것이다.

道(도)와 같이 모든 것을 근원의 정점으로부터 파악하려는 중국인들의 사유체제가 敎相判釋(교상판석)과 같은 교설의 체계화를 낳았고, 儒家(유가)의 현실성이 淨土(정토)나 禪(선)과 같은 실천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唐末(당말) · 宋代(송대)의 선승들이 중국의 역사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이들의 철저한 현실 직관과 그에 바탕한 구제행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麗代(여대)를 이끌었던 왕 · 국사들, 危難(위난)의 國事(국사)에 몸담았던 鮮代(선대) 조사들의 행적에도 시절인연에 대한 깊은 관찰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깨달음의 체득은 물론이요 중생 구제와 度世(도세)의 교화행 모두에 시절인연에 대한 성찰, 곧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이 바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실천은 근원법의 소의처인 현실 제문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불타와 역대 조사들의 구제행은 동일하지 않은 여건 속에서 그 각각에 적합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불타의 교화, 대승불교 흥기 무렵의 諸列祖(제열조)들의 행, 중국불교 諸祖師(제조사)들의 실천, 한국 조사들의 구제행들은 시기와 장소, 사상과 생활들이 각기 다른 상황 속에 있었다.

이는 無常(무상)의 법칙이나 인연 화합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연기법에 따른 것으로 당연한 귀결이지만 변화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가장 이상적인 실천행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불타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불타와 그의 가르침이, 그리고 불제자로서의 삶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인간의 삶과 역사 위에 실천되지 못한 깨달음은 관념의 깨달음일 뿐인 것으로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의 실천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존재의 법칙, 즉 연기법은 개인적 존재에서부터 전체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존재 형태와 질서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깨달음과 현실의 접맥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되고, 깨달음과 度生(도생)의 선후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불타와 역대 조사들의 삶을 통해 그것이 실재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이라고 본다.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사에 있어 같은 六祖(육조)의 문하이지만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선도적인 삶을 산 馬祖(마조)와 그 계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깨달음의 즐거움을 노래하며 낙도적 삶을 산 石頭系(석두계)의 일부 선사들도 있다.

논자는 오늘날에도 역대 諸祖(제조)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신 覺者(각자)가 적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분들의 삶과 사상이 현실에 미치고 있는 영향 또한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켠에 뭔가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불교는 보다 내부 지향적이며, 산중에서의 좌선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사회참여에는 소극적이었다.

현대화의 주창자들은 불교를 한국의 후진성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한 외국 학자의 견해에 귀기울여 봄직하다. '요르겐센 박사'의 견해를 좀더 살펴보자.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고려해 볼 때, 한국의 불교가 정적으로 남아 있거나 전통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반응은 때때로 중흥 또는 재건이라는 이름하에서 현상 또는 복고를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반응은 선의 수행과 사찰의 계율 준수와 같은 불교의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을 보존하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종종 산속으로의 은둔을 가져온다.

이것은 불교가 봉건적이고 반사회적이며 염세적이고 수동적이며 후진적이라는 인식을 높여 줄 수 있을 뿐이며, 또한 불교를 미신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기생적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유교와 현대의 과학적 비판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 불교인들이 사회적인 참여를 한층 더 늘리고 사회 내의 각 집단의 요구를 분석하고 적절한 불교적 대답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으면 불교는 민간종교나 기독교 및 신흥종교들에 가려 빛을 잃고 말 것이다.

박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불교는 깨달음의 현실적 체득과 이의 현실화에 부족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보다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깨달음의 실천은 어려운 것일까 ?

현실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성찰, 그리고 이에 대한 불교적 해법 모색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런 면에서 현재 조계종에서 진행하고 있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하나의 좋은 일례일 뿐더러 그 의의가 무척 크다고 생각된다.

Ⅴ. 맺는 말

불교의 기본 구조는 중생의 삶과 살아가는 세계를 苦界(고계)로 보고 이 苦(고)의 止滅(지멸)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붓다와 같은 해탈의 삶을 사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해탈의 전제인 깨달음의 중심 내용으로 설명되는 것에 智慧(지혜)와 慈悲(자비)가 있다.

곧 불교의 가르침은 고뇌의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혜를 가지고 자비를 실천하며 해탈의 삶을 사는 覺者(각자)의 삶으로 귀결되어 있다. 이런 불교적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旣述(기술)처럼 자신과 일체 諸存在(제존재)가 존재하는 공간적 영역과 시간적 상황,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정신세계와 물질적 부분에 대해 근원적 자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들 부분에 대해 지혜로, 그리고 覺者(각자)로서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목적은 자아 완성과 불국토 건설, 곧 개인적 見性(견성)과 일체 중생이 皆共成佛(개공성불)을 이룬 成佛界(성불계)의 건설에 있다. 그러나 대승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완성과 같은 개인적 성불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포함해 일체 중생이 覺得(각득)한 度世(도세)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 성불은 단지 이를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불교 구조의 핵심인 깨달음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본 논은 이런 깨달음과 실천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었고, 이를 여러 교의에 의해 논했다.

깨달음은 이론이나 관념, 인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이 상의상관하여 이룩한 현실에 대한 체득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항상 현실태로 존재한다. 현실에 바탕하지 않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또한 이에 의해 깨달음의 실천도 현실에 기저하고 있다. 현실에 나타난 諸事象(제사상)에 대하여 그 실천행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곧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과 解法(해법)의 제시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는 무한한 시간이나 無邊(무변)의 공간, 數多(수다)한 정신계와 無盡(무진)의 물질만큼이나 다양하다.

여기에 立處(입처)에서의 깨달음의 실천에 대한 필요성이나 당연성이 등장하게 된다.

覺者(각자)의 삶, 깨달은 자의 실천은 진리를 체득한 철저한 종교인의 자세이다. 依他的(의타적) 사고방식을 가진 稱名(칭명) 종교인이 아니라 우주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진리 체현자로서의 실천적 삶이다.

공존의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이고 세속적인 단순 행동이 아니라 본원 경지의 체득에 의한 度生(도생)의 삶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실천이 유한하고 무상한 인간 존재의 삶에 가치로움과 행동이념을 확립하게 해준다.

오늘날 이런 깨달음의 실천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

현대인이 안고 있는 아픔과 고민을 분석하고 치유하는 일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깨달음은 이에 대한 자각이며, 실천은 이의 치유이다.

제 7집_2 (4/4)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_d

 

 

 

 

 

 

 

 

 

 

 

 

 

출처 - http://www.buljahome.com/songchol_file/7_folder/file7_2.htm#Ⅰ.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