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스님/이화여대 대학원 심리학 석사.
보스턴대 비교종교학 박사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
서 문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마음의 본질과 작용, 그리고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통 해서 깨달음과 무지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또 마음이 오염되는 과정과 오염 된 마음을 정화시키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수행방법까지 제시하 고 있다. 나아가서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 진전되고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참고할 수 있는 수행지침서로도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마음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고 가야 할 아주 소중한 가르침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책의 첫머리에 밝혔듯이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방대하고 심오 한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아주 최대로 압축해서 요약했다. 한마디로 이해수준이 높고 정신수준이 높아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은 처음부터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니 었다. 그런데 무려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평범한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은 더욱 무리일 수밖 에 없다. 그 결과 지금껏 무수히 많은 해석서가 나왔다. 국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번역서와 해 석서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개된 책들은 모두 동일한 전통적인 체계를 따르고 있거나 한자 용어를 그 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본서는 전통적인 분류체계를 따르지 않고 이해를 중심으로 한문내용의 순서를 유지 하면서 장과 절을 새로 나누고 용어도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바꾸었다. 따라서 어떤 부분 은 다소 무리가 따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의 내용이 왜곡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그러한 허물을 감수하 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말과 표현으로 함께 논의하고 바른 뜻을 찾아가면서 마음 공부에 도움 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도했다. 기신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원효 스님의 소(은정희 역주)와 감산 대사의 풀이(송찬우 역)을 주로 참고했다.
귀경게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큰 자비심과 완전한 지혜를 갖추시고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서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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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술 목적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 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 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修習信心故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 善護其心 遠離癡慢 出邪網故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 必定不退信心故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等因緣 所以造論
問曰 脩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答曰 脩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 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 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 異類等解 則不須論 若如來滅後 或有衆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 或有衆生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 因於廣論而得解者 亦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이 책은 다음의 8가지 목적으로 저술했다.
첫째, 궁극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기쁨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 또는 존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둘째. 부처님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해석해서
모든 이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릇되게 알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본래부터 중생이 가지고 있는 선의 뿌리를 성장시켜서
깨달음을 향한 보살 수행을 통해서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넷째, 믿음의 뿌리가 약한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닦아 익히게 하기 위함이다.
다섯째,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악행의 장애를 제거하고
선을 행하는 마음을 보호하고 어리석음과 아만을 멀리하여
삿되고 그릇된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섯째, 마음을 고요하게 머물도록 하는 수행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을 닦아 익히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일반 중생과 또 부처님의 법을 듣거나 스스로 인연법을 알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다른 중생들도 함께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지 않는
성문과 연각승의 잘못을 바로 고쳐주기 위해서다.
일곱째, 염불에 전념함으로써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서,
그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함으로써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 신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여덟째, 수행 결과 얻게 될 이익을 보여주고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내용들은 이미 수많은 경전에 설명되어 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할 이유가 있는가?
경전에도 그러한 가르침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알아듣고 이해하는 정도도 또한 제각기 다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았고
설명하시는 부처님 또한 신체적ㆍ정신적 표현이 뛰어나서
원음(圓音)으로 한번 연설하시면 수준이 제각각인 온갖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따로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어떤 중생은 많이 들어야 이해하고,
어떤 중생은 적게 듣고도 많이 알고,
어떤 중생은 부처님 말씀을 해석해 놓은 글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중생은 부처님 말씀을 해석해 놓은 글이 많고 번거롭다고
진언과 같이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부처님의 방대하고 심오한 가르침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개괄하고자 하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서광스님)
Ⅱ. 핵심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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已說因緣分 次說立義分 摩訶衍者總說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法 二者義
다음에는 전체적인 개요를 설명할 것이다. 대승은 크게 대승의 본질과 대승의 의미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
1. 대승의 본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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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何以故 是心眞如相 卽示摩訶衍體故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중생의 마음은 세속적 마음과 깨달음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승의 의미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 마음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 어떻게 대승의 의미가 중생의 마음을 통해서 드러나는가?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마음 가운데 본래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마음 즉 진여는 대승의 본질을 보여주고, 인연 따라 생멸하는 세속적 마음은 대승의 본질이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양과 작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 명] 근본불교가 부처님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대승불교는 중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부처와 중생을 이원적으로 구분하여 중생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부처가 될 수 없다. 중생으로서 최고 경지는 부처님보다 한 단계 아래인 아라한의 경지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중생과 부처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본다. 그래서 근본불교에서는 부 처와 중생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고 그 차원이 다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본 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것이고 겉모양의 차이에 불과하다. 즉 부처는 순수한 깨달음만 있는 상 태고, 중생은 순수한 깨달음이 어리석음과 망상으로 뒤덮여 있어서 부처인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불성을 덮고 있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생멸하고, 중생의 본질인 깨달은 마음은 불생불멸 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 모습인 부처를 보고 자기가 원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의 길 을 나선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
2. 대승의 의미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滅故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대승이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본질의 위대성이다.
세속과 세속을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에 있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들은
모두 한마음, 하나의 동일한 본질인 진여에서 나왔다.
따라서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동일하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둘째, 현상의 위대성이다.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중생의 마음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번뇌와 망상에 오염된 현상으로 드러나지만
그 오염된 현상 속에는 역시 본래부터 타고난 깨달음의 종자가 들어 있고
그 깨달음의 종자 속에는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셋째, 작용의 위대성이다.
한마음 속에 들어있는 깨달음의 종자는
모든 세속과 깨달음의 세계에서 착하고 선한 작용을 한다.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안에 모든 부처님, 즉 때달음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보살들은 이 중생의 마음을 통해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설 명]
앞에서 중생은 순수한 깨달음이 무지와 망상으로 오염된 부처이고, 부처는 순수한 깨달음으
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은 본질적인 깨달음의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생의 눈으로 보여지는 모든 현상은 중생의 무지와 망상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과 형
태로 드러나지만, 그 다양한 현상 속에 내재된 본질은 절대평등하고 동일한 하나의 마음이고
깨달음이고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진여라는 것이다.
또 그러한 오염된 현상 속에 들어 있는 본질, 즉 진여는 중생의 깨달음과 이익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중생의 필요에 의해 드러날 수 있는 무수한 선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의 종자는 중생의 깨달음과 이익을 위해서 상황과 조건에 맞추어 중생의 수준에
따라서 무수한 형태로 드러나고 작용한다.
3. 대승불교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는 목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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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已說立義分 次說解釋分 解釋分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顯示正義 二者對治邪執 三者分別發趣道相 설명은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하겠다. 첫째는 대승불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승불교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집착을 고쳐서 바르게 알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바른 길을 단계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서광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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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여심
1. 진여의 특징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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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不生不滅 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 故名眞如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마음의 본질, 즉 진여는 다양하게 드러나는 마음의 현상들을 모두 하나로 연결하는 본체다. 그리고 마 음은 근본적으로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질적 측면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본래 모습은 불생불멸이고 차 별하지 않고 평등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차별하고 평등하지 않다. 이유는 마음이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 편견에 의한 주관 적 해석에 의해서 각기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러한 그릇된 관념과 편견을 버리면 각기 다르게 보이는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다른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현상들을 말과 언어로 차별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이름이 다르다고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름은 인위적으로 붙인 꼬리표에 불과한 관념이고 개 념적인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일체 현상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차별이 없 으며 변화하거나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절대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며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을 진여라고 부른다. 말로써 설명되 어지는 것, 즉 개념이나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이름만 있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그 릇된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진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여라고 이름붙인 것도 역시 개념일 뿐이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진여를 말로써 설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여라는 말을 빌려서 다른 모든 그릇된 관념과 개념을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진여라는 말을 수단으로 모든 그릇된 말이나 관념, 개념을 버림으로써 진여 자체에는 더 이상 버릴 것도 보탤 것도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실만이 남는다. 또한 주장할 만한 것도 없는데, 이 는 일체 현상이 모두 차별없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마음의 본질을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참으로 그러하다’는 의 미의 ‘진여’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설 명]
실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감의 작용과 정서, 사고, 기억과정을 거 치면서 그릇된 편견과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들은 관념이나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이다. 아니면 눈ㆍ코 ㆍ귀ㆍ혀ㆍ몸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양이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을 각자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 편견으로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석해서 받아들인 표상이다.
심상은 허상이다. 심상은 관념적ㆍ인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생각의 이미지 또는 모양이기 때문에, 마음 안에서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마음 바깥의 외부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상은 생 각이 만들어 낸 환영에 불과하다. 한편 표상도 허상이다. 그러나 표상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 니라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이미지이고 겉모습이다.
즉, 우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사물의 모습이 감각기관을 거치는 동안 잘못 해석되고 왜곡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 기억 등이 외계의 사물을 보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에 먼지와 때가 끼어서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 하는 것처럼, 마음의 때로 인해서 실상이 왜곡된 표상으로만 지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주의 진실된 모습(실상 또는 진여)은 마음의 때를 완전하게 벗어버린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처나 신은 심상이다.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공간과 부피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이나 부처를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 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지 신이나 부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화려한 장미와 수수한 백합은 표상이다. 장미와 백합은 부처나 신과는 달리 마음 밖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장미 자체가 화려하고 백합 자체가 수수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식과 관념이 그렇게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미와 백합은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상관없이 장미와 백합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신과 부처는 믿고 인정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옥과 극락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은 바로 존재의 실상과 허상을 깨닫는 것이다. 또 심상과 표상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그 본질과 작용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
2. 진여를 깨닫는 방법
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 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 名爲得入
앞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상은 허상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심상이고 표상이라
고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 또는 진여의 모습을 우리는 어떤 방
법으로 깨달을 수 있는가?
중생은 일체의 정신적ㆍ 물질적 현상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거나 개념적으로 정의를 내려놓고
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런데 만약 말로써 설명되는 모든 현상들
은 실제로는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명할 만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만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바로 진여를 따르
는 것이다.
그리고 그릇된 관념이나 주의주장을 버리면 무념(無念 )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관념
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심상도 자연히 소멸되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존재의 실상인 진
여를 깨닫게 된다.
[설 명]
우리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갈등의 원인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생각, 주의주장, 이념, 관념으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관념의 특징은 생각의 모양, 즉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바로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모양, 이미지가 심상이다. 그리고는 생각이 만들어 낸 심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집착한다. 또 잘못된 생각과 관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왜곡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것이 표상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나
관념은 집단적으로 심상을 만들어서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念念相續)이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좀처럼 소멸
하기 힘든 단단한 형태로 굳어져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예를 들면 부처, 신, 알라 등이 가장 대표적인 심상에 해당한다. 즉 사람들은 생각이 만들어
낸 심상에 부처, 신, 알라 등의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집착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생각의 차이로 싸우고 갈등하고 미워하게 된다. 또 극락이나 천국도 말로써 설명되는
관념이고 심상의 차이일 뿐이다. 모두가 마음 바깥에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뿐이다.
이는 신과 알라는 다른 별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신과
알라의 차이만큼이나 멀고 다르다는 현상을 신과 알라라는 이름을 빌려서 보여주고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신과 알라가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서로 싸우
고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과 관념에 각기 다른 이름과 의미를 부
여하고 다시 그 이름과 의미에 부합하는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 즉 마음의 형상을 만든다
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에 다시 생각과 관념을 불
어 넣으면서 체계와 논리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마음이 창조해낸 심상을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 자기들만이 믿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은 자연히 다
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다른 사람도 같이 믿음으로써 더 안심하고 편안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정당화하고 확고하게 하려는 시도에서 믿음의 논리와 체계
를 발전시킨다. 심상을 중심으로 이익 손해를 계산하면서 포섭하고 뭉친다. 또 약하면 숙이
면서 세를 확장하고, 강하면 배척하고 공격하면서 세를 확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
은 갈등과 싸움,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위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의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들로 말미암아 비롯된 수많은 인간
고통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든 신이든 알라든 모두가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 낸 심상, 마음의 모양이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생각의 이미지요. 관념의 모양이지 정말로 마음 밖에 존재
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심상에 집착해서 부처 또는 신, 알라 등의 서
로 다른 이름표를 붙이고 사랑과 자비 대신 미움과 분노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3. 진여의 의미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 (1) 공(空 )과 불공(不)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설 명]
언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진실을 알게 되면, 서로 다른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을 진짜라고 굳게 믿고 집착해서 싸우고 갈등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가 사라지게 된 다. 즉, 종교, 지역, 학벌, 남녀 등 각종의 차별적인 생각과 관념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러한 차별적인 생각과 관념이 사라지면 마음은 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의 상태에서는 자 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무수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진공묘 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실제로는 비어있으면서 미묘하게도 비어있지 않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신, 알라, 부처는 심상이라고 했다. 심상은 우리가 실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생각과 관념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그러므로 신, 알라, 부처는 이름으 로 존재하고, 그 이름에 부여한 온갖 의미들과 정의,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신은 이러저러하고 알라는 어떻고 부처는 어떻고 등,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존재론적 실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말이나 개념정의가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주장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각 속에서 만 존재하는 인식론적인 존재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은 온통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라고 개념적으로 정의가 필요하다.
위에서 여실공이라고 하는 의미는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의 실체는 이름뿐이지 실제는 텅 빈 허상 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모두가 우리의 생각과 개념, 관념이 만들어 내고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고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마음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여실불공은 비어있지 않다는 의 미다.
즉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이 이름만 있고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실상이라는 것이 다. 이유는 사랑과 진실을 말로 하지 않고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행동으로 실천하면 신, 알라, 부처 등 은 실제로 무한한 사랑과 진실, 자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빈 깡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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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공(空)의 의미
심상이 실상이 아닌 허상이라는 의미다. 즉 신, 알라, 부처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 알라, 부처를 생각하는 인간의 생각이 차이를 두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 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신, 알라, 부처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 른 것도 아니면, 같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같으면서 동시에 다른 것도 아니 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생들이 그릇된 마음으로 서로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어 차별하는 것뿐이다. 그렇 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고 그 이름에 붙여진 의미와 관념이 다르다고 해서 실제로 신, 알라, 부처에 해 당하는 실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은 그 본질이 공(空, 비어있다)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심상의 본질이 다르다는 그릇된 인식과 관념을 버리면 굳이 신, 알라, 부처가 공(空 ) 하다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다.
(3) 불공(不空)의 의미
에는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 자체는 참되고 항상 변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 은 깨끗함과 맑음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空)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닌 구체적인 뭔가를 관념적으로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차별적이고 그릇된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경지는 말로써 설명하고 개념 적으로 정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적으로 깨달아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 명]
이들은 생각과 관념, 즉 마음이 만들어 낸 이미지요, 모양이다. 중생의 마음 바깥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이나 부처는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 다.
이와 같이 신이나 부처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라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심상이고 허상이 라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 바로 깨달은 그 마음이 진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마 음은 불생불멸하고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는 그 깨달은 마음이 뭔지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될 수 없다. 오직 실제 깨달음으로써 체험되고 얻어져야만 된다. |
Ⅱ. 생멸심
1. 마음이 생멸하는 원인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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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
여래장은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과 생멸하는 마음의 현상이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상태 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생멸하는 현상적 마음과 화합되어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양면성을 갖게 되었다. 그와 같은 마음의 양면성을 저장식이라고 한다.
[설 명]
마음 저런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중생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수히 착각하고 오해해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생겨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진짜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데 그 마음 안에서 우리들의 감각, 정서, 생각, 기억의 파도 들이 수시로 생멸하면서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어지럽힌다.
또 온갖 그릇된 생각과 관념들을 만들어서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또 없애기도 한다. 이를테면 신, 알 라, 부처를 만들어내고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싫고 성스럽고 천하고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한다. |
2. 저장식의 작용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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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 生一切法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저장식은 모든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동일한 본질로 포섭하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의 동일한 본질에 서 모든 다양한 현상들을 드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저장식은 동일한 본질이 상황과 조건 에 따라서 다양한 현상들로 드러나기도 하고 반대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드러나는 현 상들이 하나의 본질로 통합되기도 한다. 그와 같이 하나의 본질이 서로 다른 현상으로 드러나거나 서 로 다른 현상이 하나의 본질로 통합되는 방식에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두 가지가 있다.
[설 명]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은 모두 무 의식의 깊은 심층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고 행하는 일체의 것들을 기억하고 저장하 는 기억창고를 저장식이라고 부른다.
그 속에는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익혀온 생의 습관, 기억, 경험의 종자들이 들어 있다. 저장식은 우리 가 살아서 행하는 모든 경험, 기억, 습관 등을 종자로 저장하는 작용과 동시에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저장된 과거의 경험과 습관, 기억의 종자들을 싹틔우고 생겨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저장식이 일체의 업을 저장하고 또 저장된 업을 상황에 따라서 드러내는 작용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깨달음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깨닫지 못함의 작용이다. |
3장 깨달음과 무지
Ⅰ. 깨달음
1. 깨달음이란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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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 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이 본체를 말한다.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은 허공처럼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주와 한몸이다. 깨달은 마음은 바로 여래의 절대평등한 진리의 몸이다. 또 그와 같은 진리의 몸을 본각이라고 한다. 본각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경 험적 깨달음(始覺)과는 상대적인 의미로 상용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경험적인 깨달음과 수행 이전에 본래부터 깨달아 있는 경험 이 전의 선험적인 깨달음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왜냐하면 수행을 통해서 깨닫고자 하는 깨달음이 바로 본각이기 때문이다. 또 본각이 있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라는 말도 상대적으로 성립된다. 다시 불각 이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시각도 있을 수가 있다.
[설 명]
구분짓는 관념, 개념, 편견이 사라져서 허공처럼 텅 비어버린 마음 상태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구 분짓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하게 동일하고 절대평등하다. 또 ‘신은 성스럽고 인간은 속되 다’는 관념이나 ‘남녀가 다르고 인종과 빈부에 따라서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그릇된 편견과 관념이 완 전하게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깨달은 마음은 종교, 인종, 성별, 관념, 주의 등으로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인간과 자연을 갈 라놓는 벽을 허물어버린다. 그 결과 깨달은 마음은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본각의 의미는 모든 중생은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부터 이미 부처였으며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이 관념과 개념 속에 갇혀서 자기가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즉 신, 알 라, 부처, 보수, 진보, 남녀, 인종, 빈부 등의 그릇된 관념과 개념의 벽에 막혀서 다같이 똑같은 부처라 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또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돌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고 모래로 밥을 짓는다고 모래가 밥이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미 깨달은 마음이(本覺) 우리 안에 없다면 아무리 수행을 한다고 해도 깨달을 수는(始 覺)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부처가 아니라면 수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는 없다. 또 깨 달음과 깨닫지 못함은 상대의존적인 말이다. 음지와 양지의 관계처럼 각(覺)과 불각(不覺)도 서로 독 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본래 깨달은 마음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본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별하고 차별하는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깨달은 마음을 덮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볼 수가 없고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불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각을 가리고 있는 잘못된 생각과 관념, 편견, 개념들을 부수고 제거하여 맑고 깨끗한 본각 이 드러나고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을 통해서 무지를 제거하고 마침내 본래 깨달은 마음을 발견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시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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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상의 동질성에 대한 깨달음
如法身菩薩等 覺於念住 念無住相 以離分別?念相故 名隨分覺
관념과 개념, 생각의 차이가 각기 다른 심상과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
달은 단계다. 그래서 이름이나 모양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다양한 현상들
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완전하게
깨닫지는 못했다.
[설 명]
마나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예를 들면 부처, 신, 알라 등의 서로 다른 심상과 이름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생각, 개념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존재이며 허상이라는 사실을 의식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깨달은 단계다.
그 결과 자기 존재가 특별하고 자기 종교, 민족, 능력 등이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편견과
아만에서 벗어나 있다. 무의식 수준에서도 관념적 이미지와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나와 너의 다양한 외형적 차이에도 불고하고 본질적으로 절대동등하고 평등하
다는 사실을 의식ㆍ무의식의 수준에서 깨달은 상태다.
(4) 본질과 현상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한 깨달음
如菩薩地盡 滿足方便 一念相應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脩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저장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모양에 대한 차별에서 벗
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파악한다. 또 ‘나’ 와 ‘너’에 대한 온갖 개념과 관념, 편견이 사라
져서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현상을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대한다. 관념과 편견이
없는 무념으로 반응함으로써 최초의 근본 무명이 사라지고 본래 깨달은 마음에 한 생각이 최
초로 일어나는 모양이 공함을 깨달았다.
이는 무의식의 가장 심층에 자리 잡고 아주 미세하게 작용하는 최초의 그릇된 망념을 벗어난 것이다. 비로소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을 보게 되니 이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만일 중생이 무념을 볼 수 있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혜로 항한 것이라고 말했다.
[설 명]
여기서는 마음의 본질과 그 본질이 작용하는 현상의 관계를 선명하게 깨달은 단계다.
예를 들면 부처, 신, 알라 등의 심상에 담겨진 각기 다른 이름, 의미, 관념 등이 사라져서
허공처럼 텅 비어 버린 실체를 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념과 생각이 사라짐으
로써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서 부처, 신, 알라 등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한다. 또 맨 처음 알
라, 부처, 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게 된 동기와 무의식적인 탐욕, 양망, 무지를 깨달
았다.
즉 외로워서, 괴로워서, 등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신, 알라, 부처를 믿고 따랐던 최초
의 무의식적 동기를 깨닫고 신, 알라, 부처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편견과
갈등, 미움에서 벗어난다. 만일 부처, 알라, 신 등의 이름과 심상이 모두 다 관념의 차이, 생
각의 차이임을 보고 그러한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생각없이 관념없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 것이다.
(5) 완전한 깨달음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 以從本來念念相續 未曾離念 故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 本來平等同一覺故 또 마음이 최초로 일어난다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최초의 모습이란 없다. 그런데도 최초의 모습을 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최초에는 무념이었음을 아는 사실을 말한다. 그런 의 미에서 일체 중생은 무념상태가 아니라 항상 생각이 있으므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 냐하면 중생은 원래부터 생각생각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지금껏 그렇게 연속되는 망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을 무시무명(시작을 알 수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무념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 즉 심상이 생겨나서 머무르고 변 해가고 소멸되는 4가지 현상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심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바로 무념이기 때문이다. 또 심상의 생주이멸이 망념 속에서 만 존재하고 무념이 되면 없어지기 때문에 심상은 망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망념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도 원래 없는 것이므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시각이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던 본각과 똑같은 깨달음의 상태가 된다.
[설 명] 최초의 마음은 관념, 편견, 그릇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다. 그런데 무념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수많은 삶을 윤회하면서 그릇된 관념, 개념, 생각으로 오 염되었다. 관념, 개념, 생각은 다시 심상의 생주이멸을 만들면서 심상에 집착되고 고착되어 번뇌와 망상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수행을 통해서 모든 관념과 편견, 생각을 버리면 관념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심상도 함께 소멸된다. 심상의 생주이멸이 사라진 상태, 그것이 바로 무념의 경지다. 이 때 수행으로 얻어진 깨달음은 본각과 동일한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이란 바로 일체의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무지에 가려진 본각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수행을 통해서 얻은 시각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지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본각을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각과 시각이 일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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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지에 물들지 않는다
智淨相者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 滿足方便故 破和合識相 滅相續心相 顯現法身 智淳淨故
此義云何 以一切心識之相 皆是無明 無明之相 不離覺性 非可壞 非不可壞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而水非動性 若風止滅 動相則滅 濕性不壞故 如是衆生自性淸淨心 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 不相捨離 而心非動性 若無明滅 相續則滅 智性不壞故
순수한 지혜는 원래 중생의 내면에 있는 진여를 닦고 익힌 힘으로 마음의 때를 벗겨낸다.
그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이 화합되어 있는 깊은 무의식의 심층에 누적되고 저장되어 있는
과거 경험과 기억, 관념, 습관 등을 깨트린다. 그 결과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과 이미
지가 과거 현재 미래로 생멸하면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무의식을 소멸시키고 있는 그대로
의 참모습이 드러나도록 한다. 즉,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버림으로써 청정하고 고요한 지혜
의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중생이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가지고 느끼고 판단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그 작용이 모두 무지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의 작용은 선천적인
깨달음과 함께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
다. 이는 마치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움직이는 큰 바닷물과도 같은 이치다. 물의 속성이나 바
람의 속성은 버리거나 떠나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일어날 때 움직이는 파도는 물의 속성과 바람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서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바람이 멈춰서 잦아들면 물은 자연히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물의 젖는 습한 성질
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파도의 모양은 곧바로 사라지
지만 물의 젖는 습한 성질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선천적인 깨달음이 무지의 바람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무지의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버리고 떠나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무지가 소멸되면 무지로 인해서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던 그릇된 관념과 망상이 만들어 내는 심상도
저절로 소멸된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속성은 파괴도지 않고 남아 있다.
[설 명]
위의 이야기는 무지와 선천적 깨달음이 혼합되어 있지만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는 무지에
의해서 물들거나 오염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지가 제거되는 순간
에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는 맑고 깨끗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지혜가 무지에
가려서 없거나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이는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에 때가 껴서 옷의
색깔이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자기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더럽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무지에 가려서 맑고 깨끗한 자기 모습이 못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래서 무지에 비추어진자기 모습을 혐오하고 싫어한다. 어떤 이는 싫은 자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잘난 척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를 미워하고 열등감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안에 처음부터 맑고 깨끗한 지혜가 있지만 무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먼지 낀 거울에 비추어진 옷이 보기 싫다고 거울을 닦아서 먼지를 없애는 대신에
옷을 버리는 것과도 같다. 또 먼지 때문에 자기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더럽게 보이는
줄을 모르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더러워하고 싫어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질투심과 탐욕이 일어나는 것도 무지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와 미움, 질투, 탐욕을 버리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노, 탐욕, 미움, 질투 등의 마음 작용은 마치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와 같기 때문이다.
즉 파도가 물과 바람이 함께 혼합되어 일어나듯이 분노나 미움, 탐욕도 지혜와 무지가 함께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욕이나 분노 자체를 버리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이들은 처음부터 버리거나 파괴할 어떤 특징이나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혜의 마음에 탐욕과 분노의 파도를 일으킨 무지의 바람이 멈추면 탐욕과 분노의 파도
는 자연히 소멸되고 만다.
우리는 흔히 욕심을 버리고 분노나 미움을 없앤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욕심은 버리거나 파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분노나 미움도 마찬가지다.
욕심과 분노의 뿌리가 무지이기 때문에 무지가 소멸되지 않는 한 욕심이나 분노도 소멸될 수
없다.
이를테면 파도를 잠재우려면 바람이 멈추어야지, 바람은 그냥 두고 파도를 없애려는 일은
불가능한 이치와 동일하다. 그런데 무지의 대표가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소멸되어야 한다.
(2)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不思議業相者 以依智淨 能作一切勝妙境界 所謂無量功德之相 常無斷絶 隨衆生根
自然相應 種種而現 得利益故
불가사의한 작용이라는 것은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가 무지로 인한 아집의 장애와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서, 중생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상황과 조건에 맞는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
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이다.
[설명]
앞에서 고요한 바닷물에 바람이 불어서 파도를 일으키듯이 맑고 평화로운 마음에 무지의
바람이 불어서 분노, 미움, 질투, 탐욕하는 마음 속에는 무지도 있지만 순수한 깨달음의 지혜
도 함께 섞여 있다. 이는 파도에 물의 젖는 성질과 바람의 움직이는 성질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 미움, 질투, 탐욕하는 마음 자체를 직접적으로 파괴하거나
없애지는 못한다고 했다. 파도가 없어지려면 바람이 멈추어야 하듯이 분노나 탐욕심이 없어
지려면 무지의 직용이 멈추어야 한다.
사랑을 예로 들면 무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사랑은 집착, 분노, 미움, 질투의 파도를 일으키고
지혜가 작용하는 사랑은 자비와 연민, 존중의 파도를 일으킨다. 이 때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에도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무지가 제거되면
지혜의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자비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고 사심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인연 따라 선행을 베풀고 사람들의 성장과 깨달음을 돕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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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혜종자를 물들이고 스며들게 하는 거울이다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不入 不失不壞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 具足無漏 熏衆生故
선천적 깨달음의 본질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속적인 차별을 드러내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 자체는 인식 대상들에 대한 세속적인 차별에 집착하지 않고 또 인식 주체
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 자체는 없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고 항상 한마음
에 머무른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비추기 때문에 깨달음의 거울로 비추어지는 모습은 모두가 진실된 실상의 모
습이다. 또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이 깨달음을 오염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혜 자체는 어리석음
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에 집착하면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릇
된 관념과 생각의 종자는 생겨나지 않고 순수한 지혜의 종자가 중생들을 지혜로 물들게 된다.
[설 명]
한 마디로 설명하면 선천적 깨달음 자체에는 어떠한 관념도 생각도 없기 때문에, 외부 대상의 인연
이 부딪쳐오면 그릇된 관념과 생각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또 집착하는 관념이나 생각이 없이 비추기 때문에 외부 대상에 물들지 않고 동요되지 않는
다. 그래서 잘못된 관념의 종자를 만들지 않고 순수한 지혜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지혜로 물들인다.
예를 들면 선천적인 깨달음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이든 알라든 부처든 그런 관념적인 심상
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인이고 기독교인이고 불교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
고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종교나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전
도한다고 해도, 관념적인 주장에 휘말리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말이나 관념, 심상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만들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본래
의 지혜로써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종교의 벽을 허물게 하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의 망상을 깨뜨리
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Ⅱ.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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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오염된 마음의 생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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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나식의 작용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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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 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 依於動心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 所謂能現一切境界 猶如明鏡現於色像 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卽現 無有前後 以一切時任運而起 常在前故 四者名爲智識 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 以念相應不斷故 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 能令現在已經之事 忽然而念 未來之事 不覺妄慮 是故三界虛僞 唯心所作 離心則無六塵境界 此義云何 以一切法 皆從心起 妄念而生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心不見心 無相可得. 當知世間一切境界 皆依衆生無明妄心而得住持 是故一切法 如鏡中像 無體可得 唯心虛妄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첫째, 업식(業識)이다. 무명의 힘에 의해서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습은 마치 밝은 거울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인식대상인 심상은 형태, 소리, 향기, 맛, 촉감과 함께 시간적인 순서없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심상은 생각과 관념으로 드러나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관념과 개념이 이어오면서 아득한 과거부터 지어온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고 또 현재와 미래의 고통과 즐거움의 과보를 성숙시켜 서로 인과에 어긋남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떠올려서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미래의 일 에까지 잘못된 생각과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미친다.
그리하여 삼계는 거짓된 허상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을 벗어나면 다섯 가지 감 각과 의식의 대상도 없어진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일체의 현상이 모두 마음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고 그 릇된 관념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식대상이 실제로 좋고 싫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좋고 싫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인식대상이 될 수없다. 세간의 모든 인식대상은 다 중생의 무명과 어리석은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심상은 거울 가운데 비추어진 형상과 같아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차별 적인 인식대상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차별적인 인식대상도 없어진다.
[설 명] 여기서는 관념과 심상이 만들어지는 사고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무지에서 출발하는 마음은 모 든 관계를 주객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런 다음 자아를 주체의 자리에 놓고 나머지를 대상 으로 보고 좋고 싫고 선하고 악하고 더럽고 깨끗하고 성스럽고 천하고 등으로 분별한다. 그런 다음 각 각 분별된 것에 서로 다른 이름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떠올리고 기억하고 연구하고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에 따른 이미지 와 형상을 상상하고 그려서 관념과 개념의 덩어리, 즉 심상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창 조된 심상은 인간의 계속적인 인지작용으로 생각과 생각을 통해서 이어진다. |
2. 의식의 작용 | |
서광스님 지음/불광출판부/자료입력:조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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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 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 依於動心能見相故 三者名復次言意識者 卽此相續識 依諸凡夫取着轉深 計我我所 種種妄執 隨事攀緣 分別六塵 名爲意識. 亦名分離識 又復說明分別事識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지면 ‘나’와 ‘나의 것’을 계산하고 판단해서 각종의 그릇된 집착을 만든다. 그리고는 그와 같이 계산하 고 판단해서 집착하는 생각에 따라서 형태, 소리, 냄새, 맛, 촉감, 뜻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이름뿐인 것이다.
또한 눈, 귀, 코, 혀, 몸의 5가지 감각기관과 의식을 인식의 주체로 삼고 형태, 소리. 냄새, 맛, 촉감, 뜻 을 인식의 대상으로 분리해서 취하기 때문에 마나식과는 구별해서 분리식(分離識)이라고 한다. 또 사 물과 현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 분별사식은 이치를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인지적 번뇌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정서적 번뇌에 의해서 증폭된다.
저장식과 마나식은 무의식적인 작용인 데 반해서 의식은 의식수준에서 작용한다. 또 마나식이 저장식 을 바탕으로 한 관념의 작용이고 그 결과로 심상을 만드는 반면 의식은 주로 마나식의 영향으로 정서 적.감각적 작용이 발생하고 그 결과로 표상이 생성된다.
다시 말해서 마나식에서 인식의 대상은 관념과 심상이고 의식에서의 인식대상은 정서와 표상이다. 심 상은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듯이 오직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완전한 허상이다. 반면에 표상은 실제로 객관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이미지다.
그러므로 표상은 실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 알라, 부처 등과 같이 객관적으로 마음 바깥에 존재하 지 않는 인식론적 존재가 아니다. 표상은 객관적으로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각하 는 5가지 감각작용에 마나식이 영향을 미침으로써 실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사 물을 왜곡시킨 이미지다.
하는 데 정서적.인지적 심리상태가 영향을 미쳐서 어떤 주관적 이미지를 갖게 한다. 한편 신과 같은 심상은 실제 사물이 아니고 순전히 관념과 개념으로만 정의되고 설명되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장미가 화려하다는 것의 진위를 억지로 주장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장미는 실제로 누 구나 확인하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신이 최고이고 유일하다는 것의 진위는 억지로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은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장미를 로즈라고 하거나 아름답지 않고 천하다 고 하면, 이름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고 해서 장미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을 공(空)이라고 하거나 법신, 알라라고 하면 동일한 존재를 가리킴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다르고 뜻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우기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은 장미 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론적 존재가 아니라 인식으로 존재하는 인식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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