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서 깨달음과 熏習의 관계 (고승학)

수선님 2020. 3. 8. 11:46

大乘起信論}에서 깨달음과 熏習의 관계 (고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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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에서 깨달음과 熏習의 관계
고승학

Ⅰ. 들어가는 말

기존의 {대승기신론} (이하 {기신론}) 해석 방식은 ⑴ 본 논서를 중관과 유식사상의 절충·지양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 ⑵ 본 논서를 유식사상 또는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결합으로 해석하는 '수정된 견해', ⑶ 본 논서를 비롯한 여래장사상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배척하는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의 견해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佛典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에게 그의 참된 마음은 본래 깨끗하지만, 우연적인 번뇌에 의해 물들어 있음(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을 일깨우려 하고 있다. {기신론}은 이러한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如來藏(tath gatagarbha)', '本覺' 등으로 부르며, 그러한 참된 마음을 실현할 것을 역설한다.

'전통적 견해'의 경우 이와 같이 실현된 깨달음(始覺)은 본질적 깨달음(本覺)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시각이 궁극에 이르더라도(究竟覺) 거기에는 '진여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어서 본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기신론}은 양자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또한 '수정된 견해'의 경우 {기신론}에 등장하는 '染法과 淨法의 상호 熏習(染淨互熏)'과 같은 개념이 여래장사상이라는 맥락에서 보다 잘 해석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비록 '熏習(v san )'이라는 개념이 유식사상으로부터 도입된 것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변형된' 훈습 개념은 여래장사상에서만 발견된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淨法=眞如(tathat )가 染法=無明(avidy )을 물들이거나 그로부터 물들 수 없다.

마지막으로 비판불교 사상가들은 모든 현상적 존재를 산출해내는 불변의 실체로서 여래장을 상정하는 여래장사상은 비불교적인 '일원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이 '있다'는 말(一切衆生 悉有佛性)은 중생에게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격려의 메시지로서 거기에는 존재론적 함의(ontological commitment)가 없다. 또한 그들은 모든 중생이 본질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본각 개념에 주목하여 {기신론}이 실천 수행을 필요없게 만드는 논서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훈습 개념을 통해 깨달음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성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Ⅱ. '熏習' 개념을 통해 살펴 본 {기신론}에서의 깨달음

⑴ {기신론}의 훈습 개념의 특징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苦와 樂을 이전에 행했던 業(karma)의 果報로 보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불교 교리인 業說이다. 그런데 유식불교는 그러한 업이 다시 행위자 자신의 미래의 행위를 유발하는 힘(習氣)이 있음에 주목하고 그것을 '熏習'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몸(身)과 입(口)과 의지(意)의 업으로 나타난 결과는 '現行'이라 불리는데, 그것이 다시 알라야식( layavij na)에 저장되어 미래의 행위를 유발할 경우 '習氣(경향성)' 또는 '種子(b ja)'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서 현행이 그 습기 또는 종자를 알라야식에 저장하는 작용이 바로 '훈습'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훈습된 종자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현상세계(現行)를 생겨나게 하며, 종자로부터 생겨난 이 현상세계는 그 영향력(습기)을 알라야식에 남겨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내어 결국 종자에서 종자로 이어지게 되는데(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種子生種子), 이것이 바로 輪廻(流轉, sa s ra)의 원리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신론}의 가장 독특한 점은 모든 존재의 실상으로서 淨法으로 간주되는 眞如, 여래장과 온갖 번뇌의 근본인 無明 사이에 상호 훈습이 이루어짐(眞妄交徹)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유식사상에서는 알라야식과 같이 변화될 수 있는 존재만이 중생이 짓는 업(現行)에 의해 훈습을 받을 수 있다(所熏)고 한다. 또한 유식사상은 불변의 진여가 다른 존재를 훈습할 수 있음(能熏)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여나 여래장과 같은 불변의 존재(常法)가 무명과 같이 변화하는 존재를 훈습하고 반대로 훈습을 받는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원효가 {기신론}의 훈습 개념을 '생각할 수 없는(不思議) 훈습'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신론}은 그러한 훈습을 ⑴ 무명에 대한 정법(진여)의 훈습, ⑵ 진여에 대한 무명의 훈습, ⑶ 무명에 대한 妄心(業識)의 훈습 ⑷ 망심에 대한 妄境界(6塵: 6식의 대상들)의 훈습의 4종으로 나누며, ⑴을 淨法 훈습, ⑵, ⑶, ⑷를 染法 훈습으로 부르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법 훈습은 중생이 무명의 세계로부터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훈습으로, 어떤 중생에게 정법 훈습이 가해지게 되면, 그는 번뇌로부터 벗어나 열반[滅]이라는 근원적 상태로 돌아가게[還] 되므로, 이러한 훈습은 '還滅'의 因緣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염법 훈습은 무명과 망심, 망경계가 번갈아가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끊임없이 業을 지어 미혹의 현상 세계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流轉'의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⑵ 染法 훈습과 流轉 연기

{기신론}은 위의 두 가지 훈습 가운데 염법 훈습을 먼저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른바 ⑴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⑵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⑶ 망경계의 染法의 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서 일체의 身心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위의 ⑴, ⑵, ⑶은 각각 '무명 훈습', '망심 훈습', '망경계 훈습'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⑴에서 무명염법의 因이 진여를 훈습하는 것은 근본무명의 훈습으로서 그 결과 나타난 '망심'은 {기신론}의 '生滅因緣'의 5意 가운데 業識에 해당한다. ⑵는 무명에 의해 생겨난 망심(업식)이 무명을 다시 훈습하여 미혹된 주관과 객관 의식인 망념(轉識)과 망경계(現識)를 산출하고, 그 결과 중생을 더욱 미혹하게 함을 말한다. ⑶은 이와 같이 알라야식의 자기 전변으로 나타난 現識(妄境界)이 다시 망심을 다시 훈습함을 말하는 것으로, 智識, 相續識, 分別事識 등은 이로부터 전개되어 流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다시 '3細 6 '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⑴과 ⑵의 단계에서 알라야식에는 無明業相, 能見相, 境界相이 생겨나고, ⑶의 단계에서는 이 경계상에 대하여 智相, 相續相, 執取相, 計名字相을 일으켜 분별·집착하고('念着'), 그 집착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起業相으로써 업을 일으켜('造種種業'), 결국은 業繫苦相이라는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受於一切身心等苦')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염법 훈습은 사실상 {기신론} 생멸문의 不覺, 곧 근본무명에 의한 연기(流轉)에 대한 설명이며, 알라야식(心)으로부터 (五)意와 (意)識이 전변함을 설명한 '生滅因緣'을 '무명 훈습' 등의 개념을 통해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기신론}에서 염법 훈습을 "진여법에 의하여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因이 있어 진여를 훈습하는 것"으로 정의하고는 있지만, 진여가 所熏이 된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러한 훈습을 통하여 중생의 생사유전을 다루는 방식은 유식의 설명과 유사하다. 오히려 {기신론}만의 독특한 훈습 개념은 이하에 설명할 정법 훈습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⑶ 淨法 훈습과 還滅 연기

{기신론}은 {勝 經}에서 여래장을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게 하는" 것으로 설한 것과 관련하여 (중생의 허망한 마음 속에) 진여가 있어 무명을 훈습하여 망심으로 하여금 發心, 修行하는 작용을 일으킨다고 설하고 있다(이를 진여의 '內熏' 또는' 本熏'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허망한 마음 속에 생겨난,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인연(厭求因緣)은 다시금 처음의 진여를 훈습하여 그 힘을 增長한다고 한다(이를 진여의 '新熏'이라 한다). 또한 이러한 정법 훈습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스스로 자기 본성을 믿어서 제 마음 밖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을 닦아 오랫 동안 훈습한 힘으로 무명을 없앨 수 있으며, 무명이 멸할 경우 心相이 사라져 열반과 부처의 自然業을 이룰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기신론}은 이와 같은 정법 훈습을 다시 ⑴ 망심 훈습과 ⑵ 진여 훈습으로 나누고 있다. 앞의 염법 훈습에서의 망심 훈습이 무명의 훈습으로 인해 업식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전개된 여러 번뇌(3세 6추) 및 生滅과 業繫의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면, 정법 훈습에서의 망심 훈습은 중생의 마음 속에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厭生死苦, 樂求涅槃)이 생겨나 發心, 修行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망심 훈습의 주체(能熏)를 여래장 자체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망심'이 곧 '여래장'이라면 다음에 살펴볼 진여 훈습, 특히 자체상 훈습과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망심 훈습이란, 번뇌로 뒤덮인 중생의 망심(生滅)이 처음에 여래장에 의해 훈습을 받고난 뒤(本熏), 그 망심이 주체(能熏)가 되어 중생심(알라야식) 속에 있는 진여(不生不滅, 여래장)를 대상(所熏)으로 하여 진여의 작용력을 키운 것(新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법 훈습으로서의 망심 훈습이 중생이 생멸심에 근거하여 수행을 일으킨 것으로서 그들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을 나타낸다면, 이는 생멸문의 始覺에 대응시켜도 좋을 것이다.

한편, {기신론}은 정법 훈습 가운데 진여 훈습을 自體相 훈습과 用 훈습으로 나누고 있는데, 자체상 훈습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안은 원효의 주석).

자체상 훈습이란 無始의 때로부터 無漏法을 갖추고 不思議業을 갖추며[本覺不空], 境界性을 짓는 것이다[如實空]. 이 두 가지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곧 자체상 훈습은 {승만경}의 空, 不空 여래장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아 중생에게 내재된 여래장이라는 소질(因)과 관련하여 정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용 훈습은 부처, 보살 등 善知識이 외적인 환경(外緣)으로서 중생을 깨우치는 작용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여래장의 훈습만을 말할 경우 중생이 모두 成佛하여 차별됨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반론을 예상한 것이다. {기신론}은 이에 대해 나무가 비록 불에 타는 성질이 있지만, 스스로는 탈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불·열반도 佛法의 因과 緣을 모두 갖추어야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체상 훈습과 용 훈습은 각각 중생에게 내재된 여래장(在纏位의 법신)의 上求 작용과 중생의 외부에서 그들을 이끄는 佛菩薩(出纏位의 법신)의 下化 작용을 나타낸 것이며, 이러한 진여 훈습은 결국 생멸문의 本覺을 '진여 훈습'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신론}의 染淨互熏說은 불각과 시각, 그리고 본각 개념을 여래장(진여)과 무명 사이의 훈습이라는 측면에서 서술한 것으로, 불각은 염법 훈습(무명·망심·망경계 훈습)에, 시각은 정법 훈습 중의 망심 훈습에 대응되며, 본각은 정법 훈습 중의 진여 훈습으로서 중생의 마음 속에서 열반을 희구케 하는 여래장의 무량한 공덕(자체상 훈습)과 중생 주변에 현현하는 佛菩薩의 작용(용 훈습)에 대응된다.

그런데 시각이 정법 훈습 중의 '망심' 훈습에 해당한다면, 그것은 정법 훈습 중의 '진여' 훈습에 해당하는 본각에 비해 열등한 깨달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각, 곧 진여 훈습 가운데 자체상 훈습의 주체(能熏)인 여래장은 중생의 실천 수행(시각)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수행을 통해 '도달되는' 깨달음의 경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래장이란 어디까지나 번뇌 속의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근거'를 가리키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 훈습의 주체인 불보살은 비록 범부 중생에 비해서는 뛰어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시각의 구경각보다도 더 심화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울러 시각(수행)이 완성되어 스스로 불보살이 될 경우에는 '다른' 중생의 시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 때에는 본각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때의 본각 역시 '완성된' 시각일 뿐, 시각의 '초월'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각을 시각 내지 시각의 구경각보다 더 뛰어난 깨달음의 단계로서 설정하기보다는 수행자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시각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의 고찰은 단지 본각과 시각간의 논리적 관계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신론}이 지향하고자 한 '큰 수레(大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신론}의 체계는 중생이 본각으로서의 여래장(因)과 불보살(緣)에 근거하여 시각을 일으키고, 시각을 완성함으로써 깨달은 이들이 다시 다른 중생들에게 본각이 되어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킨다(起信)는 '廻向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