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의 종체(宗體)를 나타냄
(논의 중요성과 펼친 이유)
(소)
저 대승의 체(體)가 고요하여 적막하며, 깊어서 그윽하다.
이 대승의 체가 깊고 또 깊으나 어찌 만상(萬像)의 밖을 벗어났겠으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의 말 속에 있다.
만상(萬像)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오안(五眼)으로 그 몸을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속에 있으나 사변(四辯)으로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고 싶으나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김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 싶으나 밖이 없는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유(有)로 이끌려고 하나 진여도 이를 써서 空하고,
무(無)에 두려고 하나 만물이 이 대승의 체를 타고 생기니,
무엇이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 한다.
(별기)
그 체(體)가 텅빔이여, 태허(太虛)와 같아서 사사로움이 없으며 ,그 체가 넓음이여,
큰 바다와 같아서 지극히 공변(공정)됨이 있기 때문에 동(動)과 정(精)이 뒤따라 이루어지며,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염정(染淨)이 이에 융합된다.
염정이 융합되므로 진속(眞俗)이 평등하며, 동정(動靜)이 이루어지므로 승강(昇降)이 가지런하지 않다.
승강이 가지런하지 않으므로 감응(感應)의 길이 통하며, 진속이 평등하므로 생각하는 길이 끊어졌다.
생각하는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 대승을 체득한 이는 그림자와 울림을 타서 방소(方所)가 없고, 감응의 길이 통하기 때문에 이 대승을 구하는 이는 명상(名相)을 초월하여 돌아가는 데가 있다.
타는 바의 영향(影響)은 나타낼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이미 명상(名相)을 초월하였으니, 무엇을 초월하고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이를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라 하며, 그러하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한 것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소)
스스로 두구대사와 목격장부가 아닐진대, 누가 말이 떠난 중에서 대승을 논할 수 있으며, 생각이 끊어진 데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것인가?
그러므로 마명보살이 무연대비(無緣大悲)로써 저 무묭의 헛된 바람이 마음 바다를 요동시켜 떠다니기 쉬움을 불쌍히 여기고, 이 본각(本覺)의 참된 성품이 긴 꿈에 잠들어 깨어나기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어, 이에 동체지력(同體之力)으로 이 논을 짓고 여래의 깊은 뜻을 담은 경의 오묘한 뜻을 찬술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한 두루마리의 책을 잠시 열어서 삼장(경율론)의 뜻을 두루 탐구하게 하고,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경계를 길이 쉬어서 드디어 일심(一心)의 근원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여는 것이다.
(별기)
치우친 다른 논과 달리, 이제 이 기신론은 지혜스럽기도 하고 어질기도 하며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세우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도리어 인정하고 있다.
도리어 인정한다는 것은, 저 가는 자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자가 주는 것을 다하여 빼앗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것을 모든 논의 조종(朝宗)으로서 모든 쟁론을 평정시키는 주인이라고 말한다.
은밀한 현문(玄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러한 것들(경) 가운데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 그러므로 아래 말에,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량없는 뜻을 총섭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신론을 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논의 뜻이 이미 이러하여 펼쳐보면 무량무변한 뜻으로 종지(宗旨)를 삼고, 합해 본다면 이문일심(二門一心)의 법으로 요체를 삼고 있다.
이문(二門)의 안에 만 가지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며, 한량없는 뜻이 일심(一心)과 같아서 혼융(混融)되어 있으니, 이러므로 개합(開合)이 자재하며, 입파(立破)가 걸림이 없어서, 펼쳐도 번잡하지 않고 합하여도 협착(狹窄)하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깨뜨려도 잃음이 없으니, 이것이 마명(馬鳴)의 뛰어난 술법이며 기신론의 종체(宗體)이다.
그러나 이 논의 의취(意趣)가 심원하여 종래에 주석하는 사람들 중에 그 종지를 갖춘 사람이 적으니, 이는 진실로 각자 익힌 바를 벗어나지 못한 채 문장에 이끌려서, 마음을 비워 종지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주(論主)의 뜻에 가깝지 아니하니,
어떤 이는 근원을 바라보면서 지류(支流)에서 헤매고,
어떤 이는 잎사귀를 잡고서 줄기를 잃으며,
어떤 이는 옷깃을 끊어서 소매에 붙이며,
어떤 이는 가지를 잘라서 뿌리에 두르기도 한다.
이제 바로 기신론의 글에 따라 이 논이 의거하여 찬술한 경본(經本)을 끌어다 해당시켰으니 뜻을 같이하는 이는 참작하기 바란다.
참고-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은정희역-일지사
무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ature0820/1375749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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