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淸華) 큰스님께서는 24세시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金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득도하셨습니다. 이후 5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안사 등 성지의 토굴에서 묵언, 일종식 및 장좌불와의 좌선으로 오로지 수행정진하셨으며, 원통(圓通)불법을 선양하고, 엄정한 계율의 준수와 염불선을 주창하셨습니다. | |
만양당(萬羊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 떼를 기르다가 양들이 흩어져서 이리저리 가버리는데 그 양을 잡는데 길이 하나만 있으면 잡기가 쉬울 것인데 길이 너무 많으므로 쉽게 잡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많으면 한편은 좋은데 한편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은가? 선택(選擇)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중국의 공자(孔子)님, 맹자(孟子)님 같은 분들이 나올 때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어느 정도 문명(文明)이 개명(開明) 되어서 무엇이 옳은가 하는, 정치(政治)는 어떻게 해야하고, 인간 정신(精神)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가지고 고민 끝에 가지가지의 그런 유파(流波)가 생겼습니다. 인간(人間)의 본성(本性)만 두고도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라.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 그렇게도 말하는가 하면, 또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이라. '인간의 본성은 악(惡)한 것이다. 그런 반대 이론도 있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法門)도 우리가 본래(本來)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어버리면 쉬울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들이 그런 업연(業緣)이 하도 복잡해서 또는 과거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장(業障)이 두터워 놓아서 우리가 갑자기 성불(成佛)이 안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팔만사천 갈래의 법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이 참선(參禪)할 때는 마땅히 그런 생각, 이런 생각 다 정리 해 가지고서 자기한테 안맞은 성불(成佛)의 법(法)이 딱 정립(定立)이 되어버려야 공부가 잘 되어갑니다. 여러 스님네도 만나보고 또는 우리 재가불자(在家佛子)님들을 만나보았습니다만 그 굉장히 자기 수행법(修行法)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회의(懷疑)를 품습니다. 경(經)에 보면은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의심을 잘하면 좋은데 의심을 잘 못하면 그것이 괜히 큰 망상(妄想)이 됩니다. 의시해본(疑是解本)이요 의시혹본(疑是惑本)이라. 의심(疑心) 이것이 우리 마음을 풀어가는, 마음을 여는 근본(根本)이 될 수도 있지만 미혹(迷惑)을 더하는 근본도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참선(參禪) 공부하시는 분들은 역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꼭 타성일편이라는 술어(述語)와 개념(槪念)을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이것은 모든 그런 천만(千萬) 갈래의 마음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안되면 사실은 참선이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 참선할 때는 타성일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은 이것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물질(物質)이 무엇인가? 그 유주무주(有住無住), 유상무상(有相無相), 모든 그런 존재(存在)가 많은 것인데, 그런 존재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적어도 철학적(哲學的)으로 해결이 안되면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이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다 보고서 다시 사상이 딱 통일 되어 가지고서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꼭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자기가 이래저래 생각하는 물질(物質)인가, 정신(精神)인가, 또는 무슨 주의(主義)인가, 자연(自然)인가, 모두 그런 것을 하나의 도리(道理)로 해결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무문관(無門關)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禪師)가 공부하는 화두(話頭)법을 48칙으로 꾸민 책입니다. 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無)'라 하는 없을 무(無)자,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하다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는 그 관문(關門)을 지금 우리가 넘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런 무(無)의 관문(關門)을 뚫고 못 넘어가므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무두가 없다는 무의 관문은 어째서 있는 것인가?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그냥 억지로 시설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처님 법문(法門)이나 도인(道人)들 법문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 말한 법문입니다. 진실(眞實) 법문(法門)입니다. 이른바 우주(宇宙)의 실상(實相) 그대로 말씀하신 법문(法門)입니다. 따라서 무문관(無門關)도 없지 않은 것을 어거지로 방편(方便)으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없는 것이기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이 번뇌(煩惱)의 경험으로 해서는 무(無)를 못 느낍니다.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흐리멍텅한 우리 중생의 안목(眼目)으로 해서는 무(無)를 못 느낍니다. 현상(現象)만 보고 현상만 실재(實在)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모두가 다 마음 뿐이요, 만법유식(萬法有識)이라! 모든 존재(存在)가 - 만법(萬法)이라는 것은 바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데 불법(佛法)의 법(法)보다도 일반(一般) 만유(萬有)를 말하는 것입니다. -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식(識)입니다. 이런 법문(法門)도 깨달은 분상에서 볼 때는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 뿐인 것이다. 또는 '일체 존재가 다 식(識) 뿐이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그렇게 안보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만법이 그때는 유색(有色)이라. 오직 다 물질(物質)로 보입니다. 만법이 다 물질로 보이기 때문에 이제 유물론(唯物論)이 생기고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가 생기고 모두다 그렇지 않습니까. 존재(存在)가 모두가 다 부처니 a사상(思想)대로 마음뿐이고 식(識)뿐이다. 이렇게 할 때는 유물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물 변증법(辨證法)에 의한 공산주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은 그와 같이 있다고만 봅니다. 그러기에 지금 사회(社會) 형태를 본다 하더라도 대체로 유물주의(唯物主義)가 판치고 있습니다. 유물주의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 뿐이라는 주의입니다. 내 몸뚱아리도 이대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기 몸뚱아리를 위해서 그때는 최선(最善)을 다해서 봉사(奉仕)를 해야 쓰겠지요. 자기 몸뚱아리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眷屬)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자기 권속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 희생(犧牲)같은 것은 별로 안중(眼中)에 없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團體)를 위해서는 다른 단체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국수주의(國粹主義)라-. 자기 나라만 제일 지상적(至上的)이라고 하는 그러한 주의를 심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환경(環境)과 물질(物質)이 '실재로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성자(聖者)가 보는 것은 그렇지 않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에 우리 수행(修行)이나 공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지금 바로 보고 있지가 않습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은 다 허망(虛妄)하다고 부정(否定)을 했습니다.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라. 우리 중생의 생리적(生理的)인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또는 촉각, 즉 우리의 신근(身根)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다고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보는 색(色)이나, 소리나 형기나 맛이나 감촉 그러한 것도 역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관(主觀)도 없고 객관적인 환경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판단력(判斷力)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식(認識)이나 판단(判斷)이라 하는 것은 우리 주객(主客)이 합해져서 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주관(主觀)이 있고 상대(相對)의 대상(對象)이 있고 해가지고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우리 육근(六根), 즉 우리 생리적인 근(根)이나 또는 환경적인 그런 대상이나 또는 거기에서 종합적으로 일어나는 식(識)이 있지 않다는 것을 누누히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같은 그런 소중한 진리(眞理)를 그때그때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중불공 모실 때는 꼭 반야심경 불공을 해야 하니다. 그것보고 신분(神分) 그럽니다. 귀신 신(神)자, 나눌 분(分)자. 어째서 해야하는가 하면 신중불공(神衆佛供)이라 하는 이것은 삼마(三魔) 외도(外道), 즉 마귀(魔鬼)나 그런 나쁜 기운(氣運)들을 몰아내고서 또 좋은 선신(善神)을 우리가 청(請)해서 가피(加被)를 받게끔 하는 것입니다.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우리 주변에 삿된 기운들이 있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기운들을 다 몰아 내고서 우리가 선신들의 가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쁜 신(神)들을 물리칠 수 있는 그런 법문이 필요합니다. 사람도 나쁜 사람들은 바른 견해가 있지가 않듯이 나쁜 신(神)도 바른 견해가 없으므로 나쁜 신이 됩니다. 천상(天上) 그러면 그렇게 실증적(實證的)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肯定)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봅니다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 저 밖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意識) 정도가 정화(淨化)가 되어서 욕심(慾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치심(痴心)이나 즉 삼독심(三毒心)이 차근차근 가벼워지면 바로이 자리가 저 높은 천상(天上)입니다. 탐욕심(貪慾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치심(痴心)이 더 무거워질수록 욕계(欲界)의 밑으로 떨어집니다. 지옥(地獄) 그러면 결국 그런 것이 그야말로 완전히 폐쇄(閉鎖)가 되어서 욕심(慾心)뿐인, 진심(瞋心)뿐인, 치심(痴心)뿐인 그런 세계의 의식(意識)을 갖는 존재(存在)가 이것이 지옥(地獄)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삼독심(三毒心)이 희박한 가벼운 맑은 존재(存在)가 이것이 천상(天上)입니다. 그것 역시 욕심(慾心)을 완전히 떠나 버리면 색계(色界)인 것이고, 또 물질(物質)의 관념(觀念)을 떠나버리면 이대로 무색계(無色界)입니다. 이런 삼계(三界)를 떠나버려야 비로소 그때는 참다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다. 아무튼 우리가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면 나쁜 신(神)들은 그냥 물러갑니다. 모두들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중생(衆生)들이 삼독심에 가리워진 안목으로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이제 나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나도 원래 허망(虛妄)한 것이고 너도 허망한 것이고 또는 좋다는 것도 허망한 것이고 이렇게 허망하다고 귀신(鬼神)들이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를 훼꼬지 할 수가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한번 외우면 그냥 옆에 있는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도 정화(淨化)가 되는 것이고 우리 주변도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염(汚染) 그러면 일산화탄소(一酸化炭素)나 이산화탄소(二酸化炭素)나 아황산(亞黃酸) 가스(Gas) 그런 것만 오염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짙은 오염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중생의 악심(惡心)입니다. 탐욕(貪慾)의 마음만 품어도 벌써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雰圍氣)를 오염(汚染) 시킵니다. 선량(善良)한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雰圍氣)를 그 반대로 정화(淨化)를 시킵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가 우리 불자님들이 선방(禪房)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하시는 분들이 누가 악심(惡心)을 품겠습니까. 그 성불(成佛)하겠다 하는, 모든 상(相)을 떠나서 성불로 지향하는 그 마음이 벌써 우주(宇宙)를 정화시킵니다. 이런데 있어서 진묵대사(震默大師)같은 분이 -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임란(壬亂)때 그냥 나가서 칼을 잡고서 의병장(義兵將)으로 싸웠지만 - 진묵스님은 한발도 나가지 않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전장(戰場)엔 한번도 안나가신 분입니다. 요즈음 말로 사회(社會) 참여라, 자기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장하는 그런 분들한테는 진묵대사(震默大師)같은 분은 애국자(愛國者)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 불법(佛法)은 그렇게 옅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칼을 잡고 안잡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사회에 나가서 그렇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있던지간에 그 사람 마음이 그 사람 의식(意識)이 얼마만큼 정화(淨化)가 되엇는가 그것이 문제(問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에 반야심경을 외우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쁜 귀신은 못 배겨냅니다.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執着)하고 그래서 나쁜 맘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풀어버리므로 나쁜 마음이 차근차근 풀어집니다. 내내야 나쁜 귀신도 우리와 똑같이 자성(自性)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불심(佛心)입니다. 다만 잘 못 생각해서 마음이 얽히고 설키고 해서 나쁜 귀신이 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귀신(鬼神)들은 이런 몸뚱아리가 없습니다. 유체(幽體)라, 보다 미세(微細)한 몸이기 때문에, 미세한 몸일 때는 말을 잘 알아먹습니다. 자기 몸뚱아리가 어떻게 밥을 얼마를 먹여야 하고 칼로리(Calorie)를 얼마를 섭취해야 하고,이렇게 할 때는 우리가 욕심을 내고 하겠지만 그런 유체라는 것은 미세한 분자같은 몸이기 때문에 밥이나 그런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더 잘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그 삿된 아귀(餓鬼)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하면 우리 사람보다 더 잘 알아 먹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신들이 있다가도 반야심경을 외우면 그냥 아! 그렇구나. 그야말로 참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분들은 거짓말을 절대로 않는 분인데 그 분이 비었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비었구나 느껴가지고 물러갑니다. 물러가면 그냥 또 우리 분위기에 있는 선신(善神)들은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다 알아 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모여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는 꼭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변의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고 선신(善神)들의 가호(加護)를 받고서 우리가 원력(願力)을 세우고 축원(祝願)을 해야 그래야 더 훨씬 효과적으로 되겠지요. 여담이 너무 길어 버렸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이 사회를 본다 할지라도 모든 병폐, 어떤 누구나가 이 사회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병은 어떻게 퇴치(退治)할 것인가? 그런 방법적인 문제는 다 모호합니다. 우리 종단(宗團)도 그야말로 지독한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느 분들은 제도(制度)를 바꿔야 하겠다. 별스런 말을 다 하겠지요. 그런 것도 일단은 의의(意義)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자세입니다. 감투가 실재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둥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단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에 착(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있는 바와 같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내 몸뚱아리는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각 원소(元素)가 모여서 인연(因緣) 따라 잠시간 이루어져서 지금 변화(變化)해서 마지 않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감수(感受)하고 우리가 상상(想像)하고 또는 의혹(疑惑)하고 또는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이른바 불교(佛敎) 말로 하면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과 이런 것들이 모여서 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 것이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모여져서 즉 말하자면 우리 존재(存在)가 된 것입니다. 내가 어째서 없는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은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아리가 잠시간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인연생(因緣生)으로 이루어져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瞬間)도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고유(固有)한 것이 없습니다. 변동(變動)해서 마지 않는 것이므로 이 몸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이 지금 자취가 있습니까.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것이나 상상(想像)하는 것이나 의혹(疑惑)하는 것이나 분별시비(分別是非)가 자취가 없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없습니다. 내가 기분(氣分) 사납다 하면 그 기분 사나운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셔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便安)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 봐라!' 가져 오너라. 불안한 마음, 좋은 마음이 자취가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을 다만 우리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우리가 괜시리 슬퍼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이와 같이 내 몸뚱아리나 내 의식(意識), 관념(觀念) 이것이 다 비었다는 것을, 조견(照見)이라. 비칠 조(照)자, 볼 견(見)자.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우리 불법(佛法)이나 다른 종교(宗敎)나 철학(哲學)이나 모두가 다 인생(人生)의 행복(幸福)을 위함입니다. 일체 고난을 해탈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제거한다고 생각할 때는 딴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무명심(無明心)의 극단이 되어있는 '나'라는 존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재로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빈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아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착후백출(錯嗅百出)이라. 백 가지, 천 가지 그런 허물이 나온단 말입니다. 사실은 검은 것인데 억지로 희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지혜(智慧)로 볼 때에 또는 현대 양자(量子) 물리학으로 볼 때는 이 몸뚱아리는 물질(物質)이 아니라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복잡하게 공부 않더라도 사실은 반야심경(般若心經)만 잘 보고 느끼고 한다 하더라도 다 깨닫는 것입니다. 다 비었다고 그래서 차근차근 우리 마음을 비워버리면 그것이 허무(虛無)하니 완전히 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완전히 비었다고 하면 내 몸이 이렇게 나오고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나오겠습니까. 완전히 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몸도 나오고 다른 것도 나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잘못 된 것, 잘못 있다고 생각한 것만 그냥 그것만 비워버리면 정말로 실재적(實在的)인 진여(眞如) 실상(實相)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앞서 제가 말씀을 내다 말았습니다만 무문관(無門關)의 허두 제일칙의 평에 이런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래 구(久)자. 오래오래 공부를 해서 익혀 나가면 순숙이라. 순전할 순(純)자, 익을 숙(熟)자.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슨 공부든 간에 오랫동안 우리가 익혀 나가면, 자연내외(自然內外), 안 내(內)자, 바깥 외(外)자, 자연히 내 안이나 밖에나 다시 말하면 정신(精神)이나 물질(物質)이나 모두가 하나로 되어버립니다. 처음부터 화두(話頭)를 든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우선 급해서 '저는 자꾸만 그렇게 망상(妄想)이 나옵니다.' 대체로 다 그럽니다만 망상이 전혀 안나오면 그때는 도인(道人)이겠지요. 응당 망상이 나오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범부(凡夫) 하면 범부와 성자(聖者)의 차이는 어떤 것이고 하면은 범부는 이생성(異生性)이라. 다를 이(異)자, 날 생(生)자, 성품 성(性)자. 이것저것 구분해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고, 좋다고 구분하고 나쁘다고 구분합니다. 그것보고 범부의 이생성이라고 합니다. 달리 본단 말입니다. 도인(道人)은 어떻게 볼 것인가. 도인은 이생성의 뿌리를 뽑아버렸습니다. 뽑아서 그런 가짜를 안보고서, 그런 망령(妄靈)되게 안보고서 사실의 본바탕을 봅니다. 사실의 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르지 않고 일여평등(一如平等)이라, 여여(如如)하니 모두가 다 - 여여(如如)하다는 말은 무엇인고 하면 일체 모두가 다 진여(眞如)와 같다는 뜻입니다. - 같을 여(如)자 두 자를 써서 여여 아닙니까. 여여란 뜻은 일체 존재가 나나, 너나, 좋은 것이나, 또는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와 똑같다는 그런 뜻이 여여입니다. 따라서 성자(聖者)는 모두를 다 여여하니 일여평등한 걸로 보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이것 저것 구분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고 그렇게 할 때는 이것은 범부의 이생성(異生性)을 못 여읜 분명한 범부입니다. 또 동시에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는 무얼 잘 모르고 판단 잘 못하고 그런 것도 포함되나 어리석은 마음의 가장 기본은 무엇인고 하면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다르지 않은 것을 천지(天地) 우주(宇宙)가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인데 그렇게 못 보는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성자(聖者)가 미처 못되면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불성(佛性)을 증명(證明)해서 성자가 못되면 모두가 다 어리석다고 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래오래 닦아 나가면 그때는 우리가 본래(本來)가 부처가 아니면 되겠습니까만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부처님 법문에 보면은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 안 내(內)자, 훈할 훈(薰)자, 밖 외(外)자, 훈터불 훈(薰)자, 무슨 뜻인고 하면 내훈(內薰)이라는 말은 우리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법문을 안들어도 그때는 저절로 차근차근 불성의 훈기(薰氣)가 배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전에 한 40대에 어느 법회에 나가서 서투른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그 때 공부를 하신 분이 지옥(地獄)에 한 번 떨어진 지옥(地獄)중생(衆生)들에게는 스승도 없고 할 것인데 지옥 중생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와서 그 곳에만 있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한단 말입니다. 제가 그 때 답변을 못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헌데 지옥 중생도 지옥에 가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옵니다. 어째 나오는 것인가. 지옥에 있는 지옥 중생도 내내야 본 바탕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불성(佛性)은 어디가 가만히 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발랄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은 생명 자체의 법칙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衆生)을 다 성불(成佛)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중력(重力)인 인력(引力)도 모두가 다 그런 소치입니다. 물리학(物理學)적으로 말하면 중력이요 인력인데, 우리 불교(佛敎)적인 뜻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원력(願力)인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다 근본자리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끝에 가서 외우는 사홍서원(四弘誓願)도 원칙은 다 그런 뜻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해탈(解脫)시킨다. 모든 미혹(迷惑)을 다 끊는다. 모든 법문(法門)을 다 배운다. 완벽한 깨달음을 다 얻는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원래 부처님 성품(性品)이 그런 성질입니다. 우주(宇宙)에 존재해 있는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된 본질(本質)이라는 것이 다 그런 성질(性質)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잘 못 살아서, 잘 못 생각해서, 잘 못 행동하고 지옥에 들어 갔다 하더라도 오랜 동안 세월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자기 불성,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이 차근차근 그때는 훈기(薰氣)가 배여 나와서 좋아집니다. 마치 그런 것이 탁수(濁水)를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 앉아서 바닥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원래는 지옥이라 하더라도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이기 때문에 설사 잘 못 살아서, 잘 못 느껴서 지옥으로 갔다 하더라도 누가 옆에 가서 제도(濟度)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부처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밖에서 부처님 교법(敎法)이 있어 가지고서 인도(引導)하면 좀 더 쉽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불이라는 것이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 자기 안에 스스로 자기 불성이 차근차근 훈기를, 향기로운 성불의 훈기를 내 뿜어서 이제 불성 쪽으로 다가서고, 동시에 모든 성자들,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모두 그런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정도(程道)의 차이가 있고 철저하고 덜 철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본래 마음자리, 본래 진리(眞理)로 우리를 몰아 세우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우리는 아직은 다 못되었겠지요. 공부가 순숙이 안되었으므로. 순숙이라는 것은 공부를 아주 순순하게 해가지고 공부가 익어 나간단 말입니다. 익어 나가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고 몸이 가벼워 옵니다. 공부를 하는데 마음도 무겁고 찌푸데데하고 몸도 천근만근 항시 그렇게 상쾌하지 못하면 그러면 공부가 잘 안되는 것이지요. 본래 우리 불성(佛性)은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이 어떻게 무게가 있겠습니까.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겉만 보므로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바닥에서 볼 때는 물질이 아니라 그때는 그야말로다 불성 뿐입니다. 범부와 중생의 차이는 거기에도 있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겉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본 바탕을 봅니다. 본 바탕에서 보면 다 마음이고 다 부처고 다 식(識)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면 마음이 안보이는 것이므로 우리 중생은 마음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모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같이 모두 다 그때는 유물론(唯物論)을 부르짖습니다. 지금 공산주의(共産主義)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굉장히 위협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위협스러워서 우리가 여태가지 전전긍긍하다시피 하다가 다행히 러시아를 위시한 서구 공산주의의 붕괴(崩壞)로 인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나 지금도 역시 국내나 국외의 공산조의라는 것이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로서 우리한테 핍박이 옵니다. 그런 것은 기초가 어디에가 있는 것인가? 과학적 유물주의라, 모두가 다 물질이라 보는데서 온 것입니다. 모두가 다 물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 사람들이 서로 물질을 좋아하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당히 통제(統制)를 시켜야 한다. 사실 공산주의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대로 가만두면 그때는 서로 경쟁(競爭)해서 그야말로 아수라(阿修羅)같은 세계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저한 통제를 해 나가야만이 그야말로 평등(平等) 사회가 되고 자유(自由)가 되고 한다는 그런 주의(主義) 아닙니까. 그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도 똑같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관능적(官能的) 유물주의라, 그런 통제를 별로 않고서 자유경쟁(自由競爭)에 맡겨 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모두 따지고 보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지금 서 있습니다. 저쪽은 과학적 유물주의요, 또 자유민주주의는 관능적 유물주의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모순(矛盾)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家庭)이나 또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물질을 존중하고 물질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몇 번씩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통제가 있고, 청규(淸規)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관념(觀念) 자체가 본래 진리에서 보면 있지도 않지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대는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주의, 공자 주의, 예수 주의는 모두가 다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가장 분명하게 말씀한 것이 이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가르침 아닙니까. 가장 극명(克明)하게 표현한 것이 그것이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입니다.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은 제법(諸法) 실상(實相)자리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세계다. 이런 쪽으로 주로 적극적으로 표현 했지만 금강경, 반야심경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虛妄)한 것이다. 이것은 부정을 주로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못 본 것을 부정을 먼저 시켜버려야지 부정을 못 시켜 버리면 우리 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 모든 법(法)이 다 비어 있는 실상에서 보면 그 때는 색(色)도 없고 소리도 없고 이제 다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모든 법이, 모든 이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참선(參禪) 공부는 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이것저것 다 글러버립니다. 단체(團體)를 꾸며보나 가정(家庭)을 꾸며보나 다 그때는 불화스럽고 갈등을 우리가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선 공부도 앞서 말씀드린 바왁 kx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모두가 하나의 오직 하나의 - 둘에 상대되는 하나가 아니라 - 우주(宇宙)가 오직 하나의, 오직 한 성품(性品)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우리가 믿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태까지 여러 가지 배운 것이나 느낀 것이나 모두가 다 있다는 것만 배웠으니까 그렇게 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되풀이 해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구순숙이라는 말이 그렇게 중요하게 우리한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두고 두고서 다 비었다, 다 비었다. 내가 없다. 내가 없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암시(暗示)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부처다, 부처다, 이렇게 하다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염불(念佛)의 본 뜻은 그런데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자꾸만 부처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자꾸 나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참말로 마음이 어둡고 나쁘게 되어버립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기 때문에 화두(話頭)나 주문(呪文)이나 염불(念佛)이나 그런 공부는 모두가 다 원래는 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원래 모든 존재(存在)가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구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라고 딱 믿고 구해야지 본래 하나라고 안믿고서 구하면은 항시 괴롭습니다. 백년 묵은 체증도 우리가 그 좋은 사약(瀉藥 : 설사약)을 먹으면 그냥 내려갈 수가 있듯이 우리가 그 있다, 없다 - 있다, 없다는 결국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다는 것도 나오겠습니다만 - 그런 이른바 있다, 없다는 병(病), 그런 병이 중생의 병인데 우리 중생(衆生)은 있다, 없다는 그런 관념을 못 떠나면 우리의 병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우리 생리적(生理的)인 병도, 마음도, 몸도 빈 것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우리 관념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냥 즉시에 우리 마음에, 몸에 가서 반사(反射)가 옵니다. 참선(參禪)할 때에 우리가 여러모로 우리 젊은분들이 괴로워도 하고 고생도 하실 것입니다. 가장 큰 괴로움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근원적인 괴로움은 관념상 자기 관념(觀念)을 해결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내가 원래 없는 것인데 원래 없다는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은 나도 없고 우리 주변도 모두가 다 우리가 보는 것같이 있지가 않고서 참말로 있는 것은 다 불성(佛性)뿐입니다. 그 전(前)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이가 이렇게 공간적(空間的)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소(元素)의 차원(次元)에서만 보더라도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공간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원소의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차원, 불성 이것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 자체가 바로 불성(佛性)인 것이고,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고 화두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과, 이렇衁 모르고서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깨닫고 보면 위대한 도인(道人)도 되고 무엇을 많이 알고 하겠지?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우리가 하면 맘이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할 때나 무슨 공부를 할 때나 대신(大信)이라. 큰 믿음을 일으킨다. 큰 신근(信根)이 이른바 믿는 뿌리가 없어 놓으면 바른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우리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보통 부처님 도리(道理)를 믿는다고 합니다. 부처님 법(法)의 어떤 점을 믿는 것인가?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참선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집니다. 무얼 알아가지고 그런 정도의 상대적(相對的)인 문제 가지고 헤아리면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놓아버려서 모두가 다 텅 빈 것이다고 생각할 때에, 가사 우리가 심장병(心臟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빈 것인데 심장병만 따로 어디에가 존재하겠습니까? 내 몸뚱아리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비어 있는 것인데 내 세포(細胞)가 다 비어 있는 것인데 아! 심장병이나 암(癌)이 어디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그러나 사회(社會)에서 하도 많이 듣고 그렇게 배웠으므로 이제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100%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역시 공부를 하다보면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익히고 익히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비어 옵니다. 어느 누구나가 참선(參禪)을 막 배울 때부터서 그냥 시원스럽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 깜깜하고 그야말로 목구멍도 깔깔하고 어쩐지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나 오랫동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툭 트여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쉽게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 선근(善根)과 이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그야말로 자기의 하나의 결단심(決斷心)과 공부하는 방법과 모두가 다 상승(上昇)이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해서 부처님 법을 확실히 믿고서 '모두가 다 비었다' 이른바 반야(般若)의 사상(思想),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우리가 가지고 공부를 해야 그래야 참선(參禪)이 됩니다. 반야(般若)가 없어 놓으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구순숙(久久純熟) 자연내외(自然內外)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나의 공부하는 방법을 가지고서 먼저 확실히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믿고 그 공(空)은 다만 공이 아니라 - 공(空)을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허무(虛無)가 되어 버립니다. 공의 알맹이, 공의 자체는 그때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진여불성이 내 본성(本性)이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 우리 마음이나 몸에 끼치는 공덕(功德)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묵은 병(病)이 설사 있을 때도 정말로 믿는 정도가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순식간(瞬息間)에 그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인도(印度)에서 이른바 그 심령요법(心靈療法), 그런 것도 보면은 그런 걸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바라문교(婆羅門敎)나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을 말해 있고, 초기 원시불법(原始佛法)도 역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란 말입니다. 일체(一切)가 다 괴로운 것이고 모두가 다 무상(無常)한 것이고 이 몸뚱아리는 결국은 우리가 잘못 보아서 그렇지 참 더러운 것뿐입니다.
출처 - http://bowonsa.net/bo/board/view.php?menu_id=78&no=125&start=80&Mode=&how=&S_date=&S_cont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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