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이심전심의 전달구조

수선님 2019. 12. 15. 12:19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달 구조

 

 

김태완(부산대 강사)

 

 

<차례>

 

 

1. 서론 - 문제제기

2. 마음의 전달에 관한 문제

(1). 언어에 의한 설명의 방법

(2). 언어에 의한 지시의 방법

(3). 행위에 의한 지시의 방법

(4). 문제 제시의 방법

(5). 전해 주기와 일깨워 주기

3. 마음의 파악에 관한 문제

(1). 의리적(義理的) 이해

(2). 의리적 이해의 극복

(3). 직접 지시와 마음 깨닫기

(4). 제시된 문제의 해결

(5). 마음의 전달 방식

4. 결론

 

 

1. 서론 - 문제제기

8세기 중국 당나라 때에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불교계를 석권해온 것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 불리는 불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라고 하면 당연히 조사선(祖師禪)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글에서도 선이라고 하면 모두 조사선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조사선은 문자 그대로는 조사(祖師)들에 의하여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대대로 전해져온 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불교라는 종교를 개혁하는 새로운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사선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어로서 흔히, 언어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不立文字]가르침의 말씀 밖에서 따로 전하며[敎外別傳]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以心傳心]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며[直指人心]본성을 보아 깨달음을 이룬다[見性成佛]는 등을 거론한다.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체험을 언어문자를 매개하여 전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하는데, 스승이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면 제자는 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리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을 직접 전해준다는 말이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통상 무언가를 누구에게 전해준다고 할 때에, 그 전해주는 무엇은 추상물이건 구상물이건 파악 가능한 대상으로서 이름을 붙일 수가 있으며, 그리하여 다양한 형식의 언어를 통하여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전달될 수 있는 그 무엇을 정보(情報 information)라고 한다. 여러 측면에서 정보를 정의할 수가 있지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 정보의 기본적인 성격은 불확실성의 감소 즉 차이가 있어서 파악이 가능하고 해독할 수 있으며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정보란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그 무엇으로서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의미한다. 즉 정보의 기본 성격은 파악 가능성과 전달 가능성의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이렇게 보면 선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그 무엇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정보는 아닌 것 같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고 하므로 전달 가능성은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파악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은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든 언어문자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언어문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곧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불가사의(不可思議)니 하여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고 하여, 그 대상에 관하여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부정적 표현이긴 하지만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는 말이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다. 사실 인도의 사상적 전통에서는 진리는 단지 부정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긍정적으로는 표현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 고대부터 있었다. 불교의 입장도 바로 그런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선에서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주장의 참된 취지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교조주의(敎條主義)적인 것이 아니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의 참된 취지는,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말로써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므로 반드시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욱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그것을 전하려고 하였고, 그것을 전하려는 언어 역시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식을 띄게 된다. 불교에 그만큼이나 방대한 경전이 있고, 선에도 그에 못지 않게 방대한 어록(語錄) 등의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요컨대 선에서 깨달음이라는 그 무엇을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해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전하고 받는 과정에서 스승은 전하는 역할을 하고 제자는 받는 역할을 했으니, 스승은 전달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고 제자는 파악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다. 앞서 말했던 조사선의 표어 가운데,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며[直指人心]본성을 보아 깨달음을 이룬다[見性成佛]는 두 구절이 바로 스승의 전달과 제자의 파악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 무엇을 전달하고 파악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 무엇이 어떻게 전달되며 어떻게 파악되느냐를 밝힐 수가 있다면, ‘그 무엇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결국 선()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그 무엇이 어떻게 전해지며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밝히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연구 방법은 우선 스승에 의한 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여 볼 것이고, 다음으로 제자가 스승의 전달을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그 무엇의 전달 방법과 파악 방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무엇에 대한 명칭을 설정하는 것이 논의에 편리할 것이다. 선에서 그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은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불심(佛心)선지(禪旨)인심(人心)진심(眞心)() 등등 매우 많이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도 선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정보인 그 무엇의 명칭을 마음[]’으로 통일시켜 사용하겠다. 사실 ?능가경?, ?화엄경?, ?대승기신론? 등 대승(大乘)의 여러 경론(經論)에서 세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三界唯心]’ 혹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말하듯이 불교에서 깨달음의 대상으로 삼는 진리는 주로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선은 바로 이 마음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의 탐구는 선에서 마음을 어떻게 전해주고,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며, 이러한 탐구는 마음의 실상(實相)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마음의 전달에 관한 문제

먼저 선에서 마음을 전하는 방법들을 조사하여 이심전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보자. 이것은 곧 마음이라는 정보의 전달 가능성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다.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나 선사(禪師)들의 언행을 기록한 문헌을 어록(語錄) 혹은 선어록(禪語錄)이라고 한다. 어록의 기록을 보면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에 일정한 틀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가르침의 방법에 따라 그들을 분류해 보면 대체로 다음의 4가지 정도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가 있다.

(1). 언어에 의한 설명의 방법

정기적이거나 부정기적으로 법당(法堂)에서 학인(學人) 대중을 모아 놓고 행하는 시중설법(示衆說法)에서는 짤막한 선문답(禪問答)이 오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꽤 길다란 설명식 강의가 행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설법이 결코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인 강의는 아니지만, 비교적 조리 정연하게 잘못된 견해나 공부방식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올바른 공부방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거나, 마음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하는 것이다. 넓게 보면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관한 설명이겠지만, 여기서는 마음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밝히고 있는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겠다.

세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니, 삼라만상은 이 한 마음이 찍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현상은 전부 마음이 보이는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 독립하여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인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이 본래 깨끗한 마음은 중생부처세계산하모양 있는 것모양 없는 것과 더불어 온 세계에 두루하니, 일체가 평등하여 나다 너다 하는 모양이 없다. 이 본래 깨끗한 마음이 늘 두루 밝게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意識)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 뒤덮히는 까닭에 밝은 본체(本體)는 보지 못한다. 다만 바로 마음이라는 생각을 없애면[無心] 본체가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올라 온 세계를 두루 비추면 다시는 막힘이 없는 것과 같다.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아는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만약 말하지도 않고 또 작용(作用)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방향이나 위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럴 때에도 없다고만 할 수는 없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온 세계를 관통하니,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말한다 하며, 손에 있을 때에는 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걷는다 한다. 본래 일정명(一精明=一心)이 나누어져 육화합(六和合=十八界)을 이룬다.

그대가 생사(生死)거주(去住)탈착(脫著)에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을 듣는 사람[聽法底人]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발(活潑潑)하게 움직여서 만법(萬法)을 만들지만, 작용(作用)하는 곳이 따로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나니 이름하여 비밀(秘密)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란 마음의 진리[心法]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여 눈앞에 드러나 작용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이름과 말로써 알아차리고 문자 가운데에서 구하며 뜻으로 진리를 헤아리니 하늘과 땅 만큼이나 어긋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들은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견해(見解)를 가지게 만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설명만 듣고도 곧바로 마음을 체험하여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마음에 대한 하나의 관념적 견해를 가지는 것에 그친다. 이 설명 자체가 언어를 통한 관념적 설명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관한 관념적 견해를 가지는 것은 마치 마음에 관한 한 장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을 뿐, 스스로의 마음을 직접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관념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인 지시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2). 언어에 의한 지시의 방법

간략한 설명이나 명령질문 등을 통하여 마음을 지시(指示)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주로 문답(問答)에서 행해졌다. 이것은 상당설법의 경우보다는 훨씬 직접적이라고 하겠지만, 여전히 언어의 의미관념을 매개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매개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개념을 정의한다거나 체계적으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고, 짧은 경구(警句) 같은 말이나 암시(暗示)적인 말을 사용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신체 동작을 지시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음의 몇 가지 예화에서 선사들은 설명보다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마음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주혜해(大珠慧海)가 처음 마조를 참례했다.

......

마조가 물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바라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이리 저리 돌아다녀서 무엇을 하겠는가? 여기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으니, 무슨 불법을 구하겠는가?”

대주가 이에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혜해(慧海)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므로 쓰려고 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어찌 밖에서 구하려 하느냐?”

말이 끝나자 대주는 자기의 본 마음을 알아차렸다.

분주 무업(汾州無業:780-821)이 마조를 참례하였다.....

무업이 절하고 꿇어앉아서 물었다.

“3(三乘) 교학은 그 뜻을 대략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문(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무업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찾아와 가만히 전수하신 심인(心印)입니까?”

스님은 정말 시끄럽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

무업이 막 나가는데 마조가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이 바로 깨닫고 절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군가?”

저는 아무개입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분명히 압니다.”

백장(百丈)이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우더니 물었다.

불자를 보느냐?”

봅니다.”

백장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 예들에서 선사는 관념적으로 마음을 설명하여 마음에 관한 견해를 만들기 보다는, 지금 살아 있는 마음을 지시하고자 한다. 설명 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지만, 아직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관념적인 파악에 그칠 우려가 있다. 이에 비하여 말 없이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지시하는 방법은 더욱 직접적이다.

(3). 행위에 의한 지시의 방법

행위를 통한 마음의 직접적 지시가 제자의 깨달음으로 연결된 몇몇 일화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정상좌(定上座)란 스님이 임제(臨濟)를 찾아와 물었다.

무엇이 불법(佛法)의 큰 뜻입니까?”

임제가 의자에서 내려와 정상좌를 움켜쥐고 빰을 한 대 때리고는 곧 탁 놓아버리니, 정상좌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스님이 말했다.

정상좌! 어찌하여 예를 올리지 않는가?”

정상좌는 바야흐로 절을 하려고 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았다.

홍주(洪州)의 수로(水老) 스님이 처음 마조(馬祖)를 찾아와 뵙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로가 절을 하고 있는데 마조가 별안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여기서 수로는 크게 깨닫고 일어나 손을 비비면서 하하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신통하다, 신통해. 수많은 삼매(三昧)와 한량 없는 묘한 이치를 한 터럭 끝에서 그 근원을 알아버렸다.”

말 없이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직접 지시하는 방법이란, 몸을 움직여 보이거나, 신체를 접촉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어록에 보이는 행위의 예들만 하여도, (: 몽둥이질)(: 고함지름)(: 흔들기)(: 주먹질)(: 빰 때리기)파비(把鼻: 코 잡기)취이(吹耳: 귀에 입김 불기)박수(拍手: 손뼉치기)토설(吐舌: 혀 내밀기)수지(豎指: 손가락 세우기)고주(鼓柱: 기둥 두드리기)의세(擬勢: 자세 취하기)참묘(斬猫: 고양이 목베기)참사(斬蛇: 뱀 칼로 자르기)분경(焚經: 경전 불사르기)분불(焚佛: 불상 불사르기)양미(揚眉: 눈썹 치켜올리기)순목(瞬目: 눈 깜짝이기) 등등 다종 다양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취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행위를 통한 마음의 지시 방법임에 틀림 없다. 언어를 개입시키지 않으므로 의미를 통한 이해를 애초에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언어의 의미를 통한 파악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런 행위에 의한 마음의 직접 지시 방법이 효과를 거두기는 사실상 매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경험되는 모습과 언어의 의미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되는 모습과 의미의 구속에서 풀려나는 것이 마음을 깨닫는데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따라서 선승(禪僧)들은 모습과 의미의 구속에서 풀려나는 특별한 방법을 개발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문제 제시의 방법이다.

(4). 문제 제시의 방법

언어를 의미로 이해하는 익숙한 틀에서 풀려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문제가 제시되는데, 이 때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은 일종의 수수께끼를 내는 것과 같다. 이 수수께끼를 풀 것을 요구함에 전제하는 조건은 어떠한 경우에도 의미를 따져서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미를 따져서 풀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언어의 일반적인 격식을 벗어난다는 뜻에서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격외어(格外語)라고 한다. 이런 격외어들은 간화선(看話禪)이 성립된 뒤에는 화두(話頭)니 공안(公案)이니 하여 공식적인 선수행의 한 수단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격외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의 의미에서 말을 하는 것 같으나, 그 말을 함에 의도하는 것은 그 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 격외어는 듣는 사람이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마음을 파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격외어는 예컨대, 불교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다라 말한다든가 차나 한 잔 마셔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통의 의미에서 보아 전혀 답이 될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을 말하거나, ‘다리는 흘러가는데 물은 가만히 있다라든가 강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린다라는 등 그 말의 의미가 합리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넌센스의 문장을 말하는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말 모두 이 말을 듣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효과를 가지는데, 이것이 격외어를 말하는 첫째 의도이다. 여기서 혼란에 빠진다는 의미는, 도무지 합리적인 사고(思考)와 추리(推理)로는 이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혼란은 곧 분별심(分別心)으로부터 학인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혼란에 빠진 학인이 이 혼란을 빠져나오는 길은, 이 말을 무시하고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이 말이 완전히 이해되고 소화될 때까지 이 말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다.

만약 온 힘을 다하여 씨름하다가 마침내 이 말을 소화한다면, 이 말들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답이며 넌센스가 아니라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합리적인 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것이 바로 격외어를 문제로 제시하는 궁극의 목적이다. 즉 씨름 끝에 이 말을 진실로 조금의 미심쩍음도 없이 완전히 소화해 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향엄지한(香嚴志閑) 선사(禪師)가 깨달은 일화를 통하여 이러한 문제 제시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지를 알아보자.

향엄(香嚴)은 백장(百丈)의 문하에 있었는데,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뛰어나 대중들 가운데 말로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 정도였지만, 선문(禪門)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백장이 죽고나서는 위산(潙山)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위산(潙山)은 향엄의 말재주가 단지 지식(知識)에서 나오는 것일 뿐 근원을 통달한 것이 아님을 알고서, 어느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그대는 백장 선사(先師)의 처소에 있을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했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것은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뜻으로 알아차리고 식()으로 헤아리는 것이니 바로 생사(生死)의 근본이 된다. 이제 부모가 그대를 낳기 이전의 일을 한 마디 말해보라.”

향엄(香嚴)은 한참을 궁리한 후 몇 마디 대답을 했으나 위산은 하나도 용납하지를 않았다. 마침내 향엄이 위산에게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위산은, “내가 만약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것일 뿐 결코 그대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향엄은 평소 보아왔던 서적을 뒤져서 대답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를 못하자 이제껏 보아왔던 서적을 몽땅 불태워버리고는, 불법(佛法) 배우기는 포기하고 떠돌이 운수납자나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위산(潙山)을 하직하고 남양(南陽)으로 건너가 혜충국사(慧忠國師)의 유적(遺跡)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향엄은 풀을 베다가 우연히 기와 조각을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부딧혀 소리를 내자 홀연히 깨달았다. 향엄은 급히 돌아와 목욕(沐浴)하고 향()을 피우고는 멀리 위산(潙山)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찬탄하여 말했다. “스님의 자비(慈悲)스런 은혜는 부모의 은혜 보다도 큽니다. 그때 만약 저에게 말해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5). 전해 주기와 일깨워 주기

지금까지 보았듯이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전해 주는 방법은, 언어에 의한 설명언어에 의한 지시행위에 의한 지시문제의 제시 등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심전심의 방법들을 살펴보면, 이심전심이란 마음이라고 하는 어떤 대상 혹은 정보를 전해준다기 보다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자각(自覺)하여 확인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일임을 알 수가 있다.

마음은 우리 모두가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주거나 받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범부는 그 마음을 올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고, 그 때문에 번뇌하고 괴로워한다. 따라서 불교와 선은 범부중생에게 자기가 갖추고 있는 마음을 올바르게 알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여기서 마음을 올바르게 알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범부중생이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 의미는 두 가지가 가능한데, 첫째는 마음에 관한 정보로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마음 그 자체를 직접 확인하여 의심이 없어지는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첫째 의미라면, 이심전심은 마음에 관한 정보를 전해 주고 받는 것을 가리키며, 둘째 의미라면 이심전심은 자신의 마음을 직접 체험하여 확인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가리킬 것이다.

이 장에서 살펴본 결과로는 둘째 의미가 된다. 즉 이심전심은 어떤 정보를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마음을 전해주는 방법들 가운데 언어에 의한 설명은 마치 마음에 관한 어떤 정보를 전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사들이 이렇게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말하기를, 자신의 말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지 말것이니, 자신의 말은 병에 따라서 약을 쓰는 것으로서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가짜 돈을 손에 쥐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자신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아 확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이심전심에서 전해준다는 의미를 정리해 보면,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확인하도록(깨닫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일일 뿐, 마음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 아니다. 즉 이심전심이란 마음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제 깨달음의 성격을 알아 보자.

 

3. 마음의 파악에 관한 문제

마음을 일깨워 주는 방법에 따라서 마음을 파악하는 방식도 나누어 볼 수 있다. 언어에 의한 설명을 듣는다면 마음을 뜻과 이치에 따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언어에 의한 지시나 행위에 의한 지시를 마주한다면 그 지시가 가리키는 바를 파악하게 될 것이고, 문제가 제시된다면 그 문제가 풀려야 할 것이다.

(1). 의리적(義理的) 이해

우선 언어에 의한 설명을 듣고서 뜻과 이치에 따라서 마음을 이해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에는 철학에서 이른바 심성론(心性論)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는 대승불교의 교리서를 응용하여 조사선의 심성론을 최초로 수립한 사람이 당() 나라의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인데, 그는 자신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마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성()이고, 인연따라 변하는 것이 상()이지만, 성과 상은 모두 일심(一心) 위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성과 상을 두 개의 다른 근본[]으로 보고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심(眞心)을 알지 못한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다만 이것을 팔식(八識)이라고만 여기고, 팔식이 곧 진심(眞心)이 인연(因緣)에 따르는 것임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마명보살(馬鳴菩薩)은 일심(一心)으로 법()을 삼고,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의 이문(二門)으로 뜻을 삼았던 것이니,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기를, “이 마음에 의지하여 대승(大乘)의 뜻을 드러내면, 심진여(心眞如)는 성()이요 체()이며, 심생멸(心生滅)은 상()이요 용()이다라 한 것이다.

마음이란 본래 하나의 마음[一心]으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밀은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편의상 마음을 두 개의 매우 이질적인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나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으로서 소위 상(: 모습)이라고 하는데, 차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모양으로 드러나는 마음이다. ()인 마음은 경험되어 알려진다고 하여 식(: 알다)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식을 여덟 가지로 분류하므로 팔식(八識)이라고도 한다. 또 상은 인연을 따라 생멸변화한다고 하여 생멸심(生滅心)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늘 활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양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마음인데 이것을 성()이라고 한다. ()은 모양이 없으므로 상()이 아니고, 그러므로 의식으로 경험되지는 않는다. 또 성은 모양이 없는 만큼 인연따라 생멸변화하지도 않는데, 이것을 일컬어 진여심(眞如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인 마음[一心]은 성과 상 혹은 진여심과 생멸심의 양 측면으로 분석된다. 이 양 측면 가운데 성인 진여심이 바탕[]이며, 상인 생멸심은 바탕의 작용[]이다. 상과 성이 경험되느냐 경험되지 않느냐, 생멸변화하느냐 생멸변화하지 않느냐 하는 점에서는 대단히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성은 바탕이요 상은 바탕의 작용이라는 면에서 둘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마음을 말하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음은 결코 둘로 분리될 수 없는[不二] 하나[一心]라는 사실이다. 바탕이니 작용이니 하는 것은 이해를 위하여 편의상 나눈 것일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곧 마음에 나타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세계이니, 우리 의식 속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흔히 삼라만상은 오직 우리의 의식일 뿐[萬法唯識]이며, 온 세계는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위에 나온 팔식(八識)이라는 말은, 안식(眼識: 색깔에 대한 의식이며 눈을 통하여 본다고 말한다)․②이식(耳識: 소리에 대한 의식이며 귀를 통하여 듣는다고 말한다)․③비식(鼻識: 냄새에 대한 의식이며 코를 통하여 맡는다고 말한다)․④설식(舌識: 맛에 대한 의식이며 혀를 통하여 맛본다고 말한다)․⑤신식(身識: 촉감에 대한 의식이며 피부를 통하여 감촉한다고 말한다)․⑥의식(意識: 앞서 5가지의 식을 포함하여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하는 모든 의식적 대상들에 대한 식)․⑦자아의식(自我意識: 무의식 가운데 내재해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⑧종자식(種子識: 모든 식이 발생하는 근원이요 바탕으로서 마치 식물의 종자처럼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씨앗처럼 저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8개의 식()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곧 우리의 외면적 내면적 경험세계를 총칭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분석하여 나타낸 것이다. 그밖에도 불교의 교리에서 경험세계를 지칭하는 소위 오온(五蘊)이니 십팔계(十八界)75()이니 108법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에 나타나는 세계를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곧 마음이며, 하나인 마음은 곧 하나인 세계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이러한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

()

모양없음

의식안됨

불생불멸

진여심

바탕

경험안됨

(세심)

()

모양있음

의식됨

생멸변화

생사심

작용

경험됨

)

이러한 심성론에 따르면, 우리들 범부는 통상 마음의 한 측면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상()만을 경험하며 인식할 뿐이고, 그 현상을 드러내는 바탕인 성()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단적 현상만 알고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근본인 성()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견성(見性)이다. 성을 깨달아야 비로소 하나의 마음을 온전히 다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은 결국 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성은 경험대상이 되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범부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부는 상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을 일깨우는 자극으로서의 이심전심의 행위는 상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상과 성은 작용과 본체라는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을 가지고 성의 존재를 일깨울 수가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스승이 상을 통하여 성을 일깨우는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에서 자극 받아 성을 깨닫는 사건이 하나의 인과관계로서 반드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즉 자극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여기에 깨달음의 어려움이 있다. 어쨋든 심성론에서는 상을 경험하되 성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이심전심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상을 보되 상을 상으로만 보지 않고 성으로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은, ?금강경(金剛經)?의 유명한 사구게(四句偈)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곧 진리를 보는 것이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 달마(達摩)의 저작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중기(唐中期) 조사선을 논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제오문오성론(第五門悟性論)?에서도 성을 보는 것과 상을 보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눈이 색을 볼 때에 색에 오염되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에 소리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모두 해탈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으면 눈이 선문(禪門)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귀가 선문이 된다. 묶어서 말하면, ()의 성()을 보는 자는 항상 해탈하고, ()의 상()을 보는 자는 항상 구속된다. 그러므로 성을 보는 것이 깨달은 자라면, 상을 그대로 상으로 보는 것은 중생이다. 상을 보면서 동시에 그것을 성으로 볼 때 비로소 일심(一心)을 온전히 보는 것이고, 성을 보지 못한다면 여전히 현상적 측면인 상만을 볼뿐이다.

(2). 의리적 이해의 극복

이러한 심성론이 곧 뜻과 이치를 통한 마음의 이해이며, 이러한 이해는 언어에 의한 설명을 통하여 전달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설명들이 모두 일심에 관한 상의 측면에서의 정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설명은 마치 상품의 그림을 그려 놓은 포장지와 같아서 진짜 상품을 보려면 이런 포장지는 뜯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포장지가 뜯겨져야 할 운명을 가진 것처럼 이런 설명도 참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그 운명이다. 다시 말해, 포장지가 그럴듯한 그림을 보여주어서 광고의 효과는 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도리어 진품을 가려서 못보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듯이, 이런 마음에 관한 설명들이 참 마음에 관한 어떤 암시(暗示 hint)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리어 이런 설명이 가로막아서 참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참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런 설명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모든 의미와 관념의 상()에 머물지 않아야 참 마음인 성()을 만나게 된다. 선사들은 모두 언어의 의미와 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나름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비교적 알기 쉬운 것 하나를 소개하면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삼구(三句)라는 것이 있다.

백장(百丈)은 부처의 가르침이 삼구(三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삼구는 초선(初善)중선(中善)후선(後善)이라고 부른다. 먼저 초선에서는 명칭과 견해를 세워서 삿된 길로 빠진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끌어들인다. 다음 중선에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공부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에게는 이제 모든 명칭과 견해가 임시로 거짓 가설된 방편임을 납득시켜서 명칭과 견해를 모두 버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후선에서는 방편을 세웠다가 무너뜨린다는 생각조차도 버려서 방편이라는 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한다. 방편을 쓸 때에는 이 삼구를 모두 통과하여야, 방편을 통하여 노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언어에 오염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에게 처음부터 바로 언어가 극복된 해탈의 세계를 말해주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중생은 언어의 테두리 내에서만 그 말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언어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여 기억할 뿐, 언어를 넘어서 그 언어로써 가리키고자 하는 뜻을 바로 파악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임시로 방편상의 견해를 말하여 불설(佛說)을 긍정하고 따르게 하는 신심(信心)을 갖추게 만들고, 일단 믿음을 갖추게 되면 불설로써 기존의 여러 가지 사견(邪見)을 하나 하나 파괴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견을 버리고 불설만을 굳건하게 믿게 되었을 때, 이제는 불설이 사견을 파괴하기 위하여 임시로 가설된 방편임을 알려주어서 불설마저 버려서 언어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편설로 사견을 파괴하고 방편설도 버린다고 하는 생각마저 놓아버려서 일체의 언어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불설이 의도하는 바, 또 선이 목적하는 바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은 달성된다.

결국 백장의 삼구(三句)는 앞서 언급한 선의 표어 가운데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양파의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찾아가듯이 끝 없이 의미를 부정하고 끝 없이 상()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언어 관념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참 마음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3). 직접 지시와 마음 깨닫기

언어에 의한 지시나 행위에 의한 지시를 받고서 깨달음에 이르는 일화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도 의리를 통한 이해에서 알아 보았다. 여기서는 또 하나 잘 알려진 임제의 일화를 소개하여 언어에 의한 지시나 행위에 의한 지시가 어떻게 깨달음을 촉발시키는지를 살펴 보겠다.

임제가 처음 황벽(黃檗)의 회하(會下)에 있을 때였다. 그의 행동과 공부가 한결같음을 안 수좌(首座)가 감탄하며 말했다. “비록 후배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다르구나!” 이윽고 수좌가 임제에게 물었다. “스님은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가?” “3년 있었습니다.” “황벽 스님께 도()를 물었던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조실스님께 가서 불법(佛法: 부처가 깨달은 진리)의 분명한 뜻이 무었인지를 묻지 않는가?” 임제는 바로 가서 그대로 물었는데,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벽이 곧 몽둥이로 때렸다. 임제가 돌어오니 수좌가 물었다. “물어보니 어떻던가?” 임제가 말했다. “저의 묻는 말이 끝나지도 않아서 스님께서 바로 저를 때렸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수좌가 말했다. “한 번 더 가서 물어보게.” 임제가 다시 가서 물었으나 황벽은 역시 때렸다. 이와 같이 하여 세 번을 물었으나 세 번을 다 두들겨 맞았다. 그러자 임제는 수좌를 찾아가 말했다. “다행히 스님이 자비롭게 이끌어 주셔서 방장 스님께 법()을 물었습니다만, 세 번을 묻고서 세 번 다 두들겨 맞았으나 한스럽게도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려고 합니다.” “그대가 떠나려 한다면 꼭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게.” 임제는 절하고 물러갔다. 수좌가 먼저 황벽에게 가서 말했다. “()을 물었던 후배가 매우 여법(如法)합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오거든 방편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뒷날 법을 얻으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임제가 인사를 드리러 오자 황벽이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고안(高安) 탄두(灘頭)의 대우(大愚) 스님에게로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말해줄 것이다.” 임제가 대우에게로 가니 대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황벽 스님 계신 곳에서 옵니다.” “황벽 스님은 무슨 말을 하든가?” “제가 세 번 불법의 분명한 뜻을 물었는데, 세 번 다 두들겨 맞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우가 말했다. “황벽이 그와 같은 노파심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를 썼는데, 다시 여기에 와서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묻는가?” 임제가 이 말을 듣자 크게 깨닫고 말했다. “원래 황벽의 불법은 특별한 것이 없군요!”

이 이야기의 골자만 보면 이렇다.

임제의 질문 : 불법의 분명한 뜻이 무엇인가?

=> 황벽의 대답 : 몽둥이로 때림 (행위에 의한 지시)

=> 임제의 의문 : 왜 때리는가?

=> 대우의 충고 : 때리는 것이 바로 질문에 대한 친절한 답변이다. (언어에 의한 지시)

=> 임제의 깨달음 : 특별한 것이 없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임제가 깨닫고 외친, ‘불법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佛法無多子)’라는 말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감상도 포함된 말이겠지만, 그 근본 취지를 말한다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하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의 진리에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 특별히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대상에 관한 어떤 종류의 정보를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말할 만한 것이 따로 없는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체험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임제가 애초에 질문을 했을 때에는 무언가 얻을 해답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무산이 되고 다만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한 의심만 남게 된다. 그 의심은 대우의 충고로 사라지게 되는데, 해답으로서 어떤 정보를 얻어서가 아니라 다만 의심이 사라진 것일 뿐이고 별다른 것은 없었다. 즉 다만 몽둥이를 휘두를 뿐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 활발히 살아 있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임제는 이후 제자를 지도할 때 늘 지금 작용을 드러낼[卽今現用]’ 뿐이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여 눈앞에 드러나 작용[目前現用]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이름과 말로써 알아차리고 문자 가운데에서 구하며 뜻으로 불법(佛法)을 헤아리니 하늘과 땅 만큼이나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눈앞에 드러나 작용하는것이 마음이라고 하는 말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차별하며,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다만 몽둥이를 휘두를 뿐인 것이다. 이것이 임제가 깨달은 살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이것은 마음에 관한 어떤 정보를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아 있을 뿐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본다면, 선에서 이심전심으로 깨우쳐 주고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은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 그 이름이 가리키는 마음에 관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마음은 다만 살아 움직일 뿐이고, 만약 객관화되어서 마음에 관한 정보의 형태가 되면 그것은 이미 지금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마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제시된 문제의 해결

제시된 문제의 해결 곧 화두라는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이심전심이 이루어지는 경우의 예를 살펴보자.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보면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圜悟克勤)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를 묘사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화두라는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조법연(五祖法演)은 어느날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제형은 연신 !” “!”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곁에 모시고 섰다가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진제형 거사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라면,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

원오는 이 말에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날개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혼자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소염시는 당나라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를 소재로 한 시이다. 몰래 만나는 낭군인 안록산의 정이 그립지만 낭군을 바로 불러올 형편은 아니기 때문에 일 없는 몸종 소옥이를 부름으로써 낭군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자신의 심정을 알아채도록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여기서 법연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부분은,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라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말의 소리를 파악함이 곧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법연의 가르침이다.

법연의 이 말을 듣고 원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견성(見性)하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앞의 잣나무라는 공안(公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것임을 알려 준다. 여기서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을 체험하게 된다. 원오는, ‘소옥아! 소옥아!’하는 말이나 뜰앞의 잣나무하는 말이나 !’하는 외침이나 꼬끼요!’하는 닭의 울음 등에서 동일(同一)한 그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무엇을 선에서는 마음[] 혹은 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체험을 두고 성을 본다[見性]’ 혹은 마음을 안다[識心]’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을 본다는 입장에서 보면, ‘소옥아! 소옥아!’, ‘뜰 앞의 잣나무’, ‘!’, ‘꼬끼요!’ 등은 모두 성을 나타내고 있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제각기 다르다. ‘소옥아! 소옥아!’는 부르는 말이고, ‘뜰 앞의 잣나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말로서, 이 둘은 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가진 언어이다. 또 고함소리인 !’과 닭의 울음소리인 꼬끼요!’는 의미를 가진 언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니라, 바로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임제가 말하듯이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 작용하는것이다. 즉 소리는 의미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살아 움직이는 마음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다. 이 까닭에 원오가 말이 아니라 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법연은 화두와 할()을 사용하여 원오의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두라는 문제를 푸는 것도 그 문제가 담고 있는 어떤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5). 마음의 전달 방식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해주는 마음의 파악은, 마음에 관하여 어떤 의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전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은 아직 관념화되거나 정보화되지 않은 것이다. 즉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은 그 무엇으로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다. 파악하는 주관도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이고 파악되는 객관도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에서는 분화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지금 살아 움직이는 마음은 주관이 객관을 파악하듯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로 살아 움직일 뿐이다. 이처럼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보고듣고생각하고행동하고말하고침묵하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지, 이 마음을 대상화하여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앞서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것이 무엇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하도록 자극하고 일깨워 준다고 하였듯이, 이심전심으로 전해 받는 것도 무엇을 전해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심전심은 어떤 파악 가능하고 전달 가능한 내용을 전하고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심전심에서 전하고 받는다고 하는 마음은 하나의 대상화된 정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이심전심의 구조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 골자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자극함 => 제자는 자극을 받고 깨어남.

제자는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의 존재 즉 마음을 깨닫도록 자극한다. 제자는 자극을 받고 그 자극에 반응을 하는데, 제자가 깨닫는 것은 스승의 자극이 아니라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자신의 존재이다. 자극과 반응은 인과적(因果的)이므로 자극에 대하여 반응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반응을 하는 자기자신을 자각(自覺)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자극은 어디까지나 우연적 인연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선에서 마음의 전달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자극함 => 제자가 자극에 반응함(필연적으로 일어남) = 인과적 연속

=> 제자가 반응하는 스스로를 자각함(우연적으로 일어남) = 비인과적 불연속

한편 마음의 파악 가능성은 이미 살펴본 심성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자극과 반응 = ()의 측면에서 경험됨.

마음의 자각 = ()의 측면에서 체험됨.

따라서 상을 경험하여 성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파악 가능성이다. 상과 성은 일심(一心)의 양 측면으로서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지만, 상을 경험함으로써 동시에 성을 체험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즉 상과 성 사이에 인과적 필연성은 없다.

자극과 반응(見相) => 마음의 자각(見性) = 비인과적 불연속

이것은 곧 깨달음이 하나의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흔히 깨달음을 꿈에서 깨어남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한다. 상당히 그럴듯한 비유인데, 견상(見相)만을 하고 있는 상태를 꿈에 비유하고, 꿈을 깨어나 꿈꾸는 자신을 자각하는 것을 견성(見性)에 비유한다. 꿈과 깨어남 즉 견상과 견성은 불연속임을 알 수 있다. 꿈 속에서 아무리 깨어나려는 노력을 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꿈의 연속일 뿐, 깨어남은 전혀 다른 성질의 사건이다. 이처럼 꿈과 깨어남은 분명 불연속적이다. 그러나 꿈꾸는 자와 깨어난 자는 동일한 사람이다. 이것은 마음은 일심(一心)일 뿐으로 동일한 그 마음이지만, 견상과 견성은 전혀 성질이 다른 경험임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선에서 전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상()을 통하여 상의 테두리를 벗어나 성을 파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이라는 면에서의 파악 가능성과 전달 가능성과는 성격이 다르다. 우선 파악 가능성의 측면에서는, 성은 객관적이고 대상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파악자 자신이 바로 성임을 확인하는 그런 파악이다. 이것은 주관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객 관계를 형성하는 파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의 파악에 상(: -객 관계를 형성함)이 개입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전달의 문제에서도 상은 객관적인 것이므로 각 주관들 사이에 특정한 객관을 지적하고 파악하는 전달의 형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성의 경우는 전달자가 상을 통하여 성을 암시하면(자극이라고 하였다) 피전달자는 그 암시에 촉발되어 성을 보게 되는데, 인과적 관계가 아니므로 견성(見性)은 지극히 우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4. 결론

우리가 보통 의사소통을 통하여 주고 받는 정보는, 내용과 형식을 통한 파악이 가능함으로써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 전달이 가능한 특징을 가진다. 내용과 형식을 통하여 구별이 가능하게 되며, 주객의 분리를 통하여 주관들 사이에 객관이 전달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마음은 상의 측면에서는 이와 같은 통상적 정보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성의 측면에서는 그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심전심은 견상을 통하여 견성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객관적으로 파악 가능한 정보를 통하여 객관적 정보가 아닌 주관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심전심의 목적은 정보에서 체험으로, 죽어있는 이미지(데이터)에서 여기 이 순간 살아 있음에로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 즉 견성은 의식[]의 측면에서는 불확실성의 증가이다. 그러나 주-객으로 분별된 의식[分別心]이 일으키는 번뇌가, -객 미분의 깨달음의 체험을 통하여 사라진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안정감의 증가이며 동시에 불확실성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소멸이다. 깨달음은 감각적으로든 관념적으로든 객관적인 유형(有形)의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무형(無形)의 마음[]을 확인함으로써 모든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문제가 한꺼번에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깨달음을 통하여 확인하는 마음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보편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一切唯心造] 때문에, 마음을 알면 자기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고, 자기 존재의 본질이 파악되었다면 자기 존재와 관련된 세계의 불확실성은 근원적으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7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