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원시선의 본질과 그 수습구조에 관한 일고

수선님 2019. 12. 29. 11:48

原始禪의 本質 및 그 修習構造에 관한 一考




1)김 형 준 *



들어가는 말


오늘날 대다수의 불교인에게 있어서 수행은 곧 禪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고오타마 붓다에서 달마 그리고 현대불교에 이르기까지 선은 마치 불교수행의 전부인양 이해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과연 선은 무엇인가? 선은 어떻게 닦아야 하며, 그 닦은 마음은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여지는 선이라는 용어는 알고 보면 그 분명한 정체를 내보이지 않은 채, 마치 그렇게 간단히 알려질 수는 없는 비의를 지니고 있기만 하다. 그 때문인지 선은 정신통일과도 같이 이해되기도 하며, 묵상이나 명상 혹은 요가, 심지어는 단전호흡이나 氣 조차도 선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고 있기도 하다.

현존하는 아함․니카야에서 보아도 선은 명백히 원시불교의 수행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단적으로 표현해, 적어도 최초기 불교1)에 있어서의 수행자는 선수행자를 의미하며, 또한 수행자의 해탈, 혹은 깨달음이란 어디까지나 선이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고오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상황을 전하는 전승이나, 성도 이후의 제자들의 수행모습을 전하는 전승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이제 막 깨달음을 얻으신 세존께서는 우루베라 마을 네란자와강 기슭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으셨다. 저때 세존께서는 칠일간 오로지 결가부좌 한 채 해탈의 즐거움에 들어 있었다.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우루베라 교외 제타숲 아난다핀디카 장로의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저때 사리풋타장로는 세존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세우고 念을 눈앞에 둔 채 앉아 있었다.3)


이처럼 고오타마 붓다나 그의 제자에 비추어보아 선은 항상 「수행의 요체」이자 「해탈도」로서 일관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은 이같이 표면적으로 수행의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면서도, 막상 선을 실천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본 논고의 의도하는 바는 간단하다. 이와 같은 선의 베일을 벗기고 그 구조를 이해해 범부 일반이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선을 다시 드러내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불교의 개조인 고오타마 붓다를 통해 선의 정체를 다시 이해하고자 하며, 가능한 한 불교의 초기시대에 행해진 선의 자취를 탐색해 선이 지향하는 세계를 알기쉽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드러난 선은 분명히 누구나가 이해가능하고 실천가능한 선이여야만 하며, 고오타마 붓다도 설하듯이, 그 결과는 지금 이 자리에서 체험되는 평온(現法涅槃)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같은 취지하에 필자는 원시선의 결정이자 수습론의 중핵을 이루는 四禪을 중심으로 선의 본질과 그 수습구조를 밝혀보고자 하며, 나아가 원시선이 의도하는 대생명관 내지는 윤리관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논고를 진행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어야 할 점은, 적어도 필자가 이 자리에서 다루고 그 내용을 드러내고자 하는 선이란 원시불교에 국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선이든 대승선이든 그 본질을 따지자면 하나이겠지만, 일견 원시선과 대승불교 이후에 전개된 중국적 선사상은 서로 대치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시선은 지나치게 소박한 나머지 선에 대한 일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이야말로 고오타마 붓다의 정신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단순하지만 그 정체가 분명하며, 실행가능하면서도 측정가능한 수행이론이 바로 원시불교의 선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Ⅰ. 禪의 의미


선을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먼저 선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이다. 어떤 이들은 선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이러한 태도 역시 처음부터 선을 지나치게 비의적 세계로 오도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선은 빠리어 jhāna(싼쓰끄리트어dhyāna)의 음사어로, 이밖에 「禪定」, 「禪那」, 「定」, 「靜慮」, 「思惟修」 등으로 한역된다. 선과 더불어 일반적으로는 禪定이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고 있다. 팔리어로는 jhāna-samādhi가 되겠지만, 실제로 팔리어자료상에서는 그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4) 그 어근 √dhyai는 「to think」, 「to imagine」, 「to meditate」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삼매(samādhi)는 어근 √dhā에서 파생한 남성명사로,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 혹은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이 곧 「사유」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내용상 선은 오히려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5)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은 「사유」 나 「관찰」에 의해 도달되는 심적경지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곧, 원시불교의 선은 그 방법으로서 「사유」를 전제로 하면서도 그 내용은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제가 되는 「사유」는 다시 「고찰」이나 「관찰」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과 사유한다는 것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선은 「사유」 혹은 「관찰」이라는 마음작용과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얻어낸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선에서 본다면 그 마음의 상태는 「喜」 「樂」 「無尋無伺」 「不苦不樂」 「捨念淸靜」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선은 사유나 정려에 의해 도달된 마음의 경지, 곧 「평온심」이나 「적정심」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사유수」라는 한역은 원시선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번역예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상(saññā)․분별(viññāṇa)․감수작용(vedanāna)의 지멸을 적정의 상태로 보기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6), 이는 원시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주된 목적이 「감관의 제어」와 「想의 통어」에 있음을 의미한다.



Ⅱ. 고오타마 붓다와 禪


인도에 있어서 선의 기원은 불교발생 이전의 고대인도문명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원시불교의 선은 고오타마 붓다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고오타마 붓다는 無所有處와 非想非非想處라는 바라문의 修定主義와 사문들의 苦行主義를 버리고 선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7) 그렇다면, 고오타마 붓다의 선은 전혀 독자적인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이에 관해서는 원시선의 성립에 관한 불교내외적인 요인은 물론이거니와,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문제가 재고될 필요가 있지만, 선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고의 의도상 일단은 고오타마 붓다와 관련된 자료를 통해 불교적 선이 시작되는 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로 고오타마 붓다의 성도와 관련해, 선을 단지 고행방기후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자료상에서는 고행에 의해 선적 체험을 전하고 있으며,8) 무엇보다도 고오타마는 이미 출가 이전에 선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쟈타카 가운데에는 고오타마․붓다가 출가이전에 경험했던 선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9)


보디삿타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유모들은, “왕께서 잘 계시는지 보러갑시다”라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보다삿타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서둘러 일어나 결가부좌를 한 채 출입식을 조절해 초선에 들었다. 유모들은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먹느라 조금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다른 나무의 그림자는 (바람에)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앉아 있는 나무의 그림자는 둥그런 모양일 뿐이었다. 유모들은, “왕자님께서 혼자 계시네!”라며 서둘러 천막을 열고 들어가 보니, 보디삿타가 결가부좌를 한 채 방석 위에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과 그 불가사의함을 보고는 왕에게 달려가 보고했다.10)


또 다른 전승에서는, 마찬가지로 출가이전의 고오타마․붓다가 이미 사선을 체험하고 있으며, 이를 깨달음의 길이라고 자각하는 장면이 있다.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샤카족 부왕의 行事때, 나는 호수가 쟘부나무 그늘에 앉아 欲과 不善法을 여의고 有尋․有伺로, 여읨에서 생하는 喜와 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문 적이 있는데, 이야말로 깨달음에의 길이라고 알았다. 아기벳사나여, 그런 나에게 隨念智가 일어났다. 이것은 깨달음의 길이라고.11)


이 두개의 전승은 원시불교에 있어서 선과 깨달음의 관계 내지는 그 시점을 시사하는 의미 깊은 부분이다. 물론 선의 체계가 네 단계로 정형화된 것은 좀더 후대의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소년시절의 고오타마는 이미 즐겨 선에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선에 도달하는 기법 역시 숨을 조절하는 지극히 심플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12)

이 같은 전승의 내용은 당시에 있어서 선이 불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함과 동시에, 불교에 있어서 선의 기원을 고오타마의 성도 이전에서 구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Ⅲ. 禪의 내용


렇다면 禪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숫타니파아타의 일련의 게송에서는 수행자가 단절시켜야만 하는 심리현상으로서, 성냄(kodha)․탐(rāga)․갈애(taṇhā)․자의식(māna)․분노(kopa)․심(vitakka)․사(vicāra)․욕심(lobha)․진(dosa)․치(moha)․수면(middha)․애욕(kāma)․오개(nīvaraṇa)등을 들고 있다.13)

비교적 초기의 전승이라고 일컬어지는 숫타니파아타가 이같은 주제로써 서두를 장식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실로 원시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대의를 시사하는 것으로, 적어도 당시의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의 의미는 이같은 심리적 부조화를 근절하는 것이었으며, 선이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부조화가 해결된 경지, 다시 말해 깨달은 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 三毒心의 제거


삼독심이 제거된 마음이 곧 禪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이는 전술한 숫타니파아타에서의 심리적부조화가 삼독심으로 표현되는 경우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法의 수지이자 現在樂이며, 미래의 樂이 되는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격한 貪(rāga)을 일으키지 않아 항상 탐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 스스로 격한 瞋(dosa)을 일으키지 않아 항상 瞋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스스로 격한 痴(moha)를 일으키지 않아 항상 痴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 그는 諸欲을 떠나 … 初禪 ….14)


이 경에서는 삼독(rāga,dosa,moha)에 의해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법의 수지에 있어서의 현재락이자 미래락이라고 한다. 이어서 사선의 정형구가 이어지는데,15) 여기에서도 선이란 삼독이 멸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삼독의 지멸이 초선에 드는 조건이 되며, 이 지멸을 위해 제수습법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16)


2. 尋伺의 지멸


尋(vitakka)․伺(vicāra)는 선에 든 자가 경험하는 심리현상으로, 사선에서 본다면 초선의 단계에서 일어나고 제2선에서 사라진다. 불교내의 자료 가운데에는 심사의 지멸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세존이시여, 그 어떤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저는 그를 믿습니다. 無尋無伺의 삼매는 있으며, 尋․伺의 지멸은 존재합니다.17)

이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尋․伺의 지멸을 부정하는 니간타를 의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尋․伺의 지멸은 불교내외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수행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외도의 62견 중 다섯 가지 현재열반론과 관련해 심사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18)

62見을 외도의 견해라고 보는 한, 사선 역시 외도선이 된다. 그렇지만, 이 ������梵網經������에서 문제가 될만한 부분은 我論과 현재열반론으로, 사선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현재열반론 역시 다른 사선론에서는 사선수습의 果로서 설해지고 있으니, 결국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我論뿐인 것이다. 곧, 사선이 我論과 관련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선은 최초기 자료 가운데에는 직접적인 용례를 찾아볼 수 없지만, 想이 지멸한 경지를 나타내는 尋․伺의 지멸 내지는 그 경지인 捨(upekhā)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원시선의 초기적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보면,


Yassa vitakkā vidhūpitā ajjhattaṁ subikappitā asesā, so bhikkhu … (Suttanipāta.7)

諸尋이 남김없이 지멸해 내면이 잘 갖추어진 저 비구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모두 버리네]


vipiṭṭhikatvāna sukhaṁ dukhañ ca pubbe va ca somanadomanassaṁ laddhān������upekhaṁ samathaṁ visuddhaṁ (Suttanipāta. 67)

이전에 경험했던 즐거움(樂)과 괴로움(苦)을 던져버리고, 또한 유쾌함과 근심을 던져버리고, 맑은 그침과 무관심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거라.


성립시기가 이른 가타에서 발견되는 이 같은 요소들은 산문경전 가운데에서도 발견되는데, 尋과 伺의 通御야 말로 불교선의 주제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한 편에 앉은 칫타거사에게 니간타나타풋타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니간타;] ‘거사여, 그대는 사문 고오타마에게는 無尋無伺의 삼매가 있으며, 尋․伺의 지멸은 있다고 믿고 있는가?’

[칫 타;] ‘대덕이여, 제가 세존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간에 無尋無伺의 삼매는 있으며, 尋․伺의 지멸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니간타나타풋타는 자신의 무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니간타;] ‘諸師여, 보거라. 이 칫타거사가 어떻게 솔직하며, 이 칫타거사가 어떻게 거짓되지 아니하며, 이 칫타거사가 어떻게 虛妄하지 않겠느냐? 무릇 尋과 伺를 멸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치 그물로 바람을 막고자 하는 자이며, 자신의 손바닥으로 갠지스강의 흐름을 저지하겠다고 생각하는 자이니라’

[칫 타;] ‘[그렇다면] 대덕이시여,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혜와 믿음중 어느쪽이 더 뛰어난 것인지요?’

[니간타;] ‘거사여, 믿음보다도 지혜가 뛰어나니라’

[칫 타;] ‘대덕이시여, 저는 스스로 원하는 동안, 欲과 不善業을 여의고, 有尋․有伺이면서 [장애를] 여읨에서 생하는 喜와 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뭅니다. ­(중략)­ 不苦․不樂인 제4선에 도달해 머뭅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이와같이 알고 이와같이 본다면, 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도 그를 믿습니다. 無尋無伺의 삼매는 있으며, 尋․伺의 멸진은 있는 것입니다’19)


이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선의 구조상, 심․사가 지멸하는 시점은 제2선임에도 불구하고, 사선 전체를 ‘무심무사의 삼매’, ‘심․사의 지멸’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심․사의 지멸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상반되는 견해차가 보이는데, 이러한 견해차이는 심․사에 대한 양자의 이해가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곧, 자이나교에서는 심․사를 근본적인 원리라고 본다면, 원시불교에서는 삼매 이전에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想)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Ⅳ. 禪의 수습구조


원시불교에 있어서 禪은 반드시 戒를 전제로 해서 얻어진다고 규정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비구가 제증상심의 현법락주인 사선을 원하는 대로 얻고, 용이하게 얻고, 간단히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戒를 성취하고, … 乃至 … 만약에 비구가 色을 초월해 무색의 적정해탈에 도달해 머물고 싶다고 원한다면, 戒를 성취하고 …20)


사선은 물론이거니와 사무색정을 얻기 위해서도 계가 전제되고 있다는 것이다.21) 계 외에 도 감관의 통어․정념정지․만족을 더해 계온의 성취가 요구되기에 이르는데, ������沙門果經������에서는 이들 계온을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戒의 구족>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 채찍과 무기를 들지 않으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온갖 생명에게 연민을 기울입니다. 이 또한 그가 지니는 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으며 … 性的인 타락에 빠지지 않으며 … 헛된 말을 하지 않으며, … 남을 중상하지 않으며 …거친 말을 삼가고 … 희언을 삼가며 … 씨앗이나 풀, 혹은 나무를 해하지 않습니다.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밤에 식사를 한다거나 정해진 시간 외에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무용, 노래, 음악 따위의 오락을 즐기지 않습니다. 꽃장식, 향료, 향수, 장식을 삼갑니다. 높은 침대나 커다란 침대를 삼가며, 金銀을 받지 않습니다. 날곡식이나 생고기를 받지 않으며, 남녀노비를 받지 않습니다. 山염소나 암염소, 새, 돼지, 코끼리, 소, 암말을 받지 않습니다. 경작지나 미경작지를 받지 않습니다. 하인을 부리거나 혹은 심부름을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며, 무게를 속이거나, 가짜 돈을 쓰거나, 길이를 속이거나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꾸미거나 사기치는 삿된 행위를 삼갑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 남을 죽이는 일, 감금, 박탈, 강도질, 폭행 등을 삼갑니다. 이 또한 그에게 있어 지녀야 할 계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감관의 문을 보호함>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눈으로 형태(色)를 보고는 모습이나 부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안근이 통어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게는 애착과 근심이라고 하는 착하지 못한 법들이 들어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안근을 지키고, 안근의 통어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는 … 코로 냄새를 맡고는 … 혀로 맛을 보고는 … 몸으로 촉감을 접하고는 … 마음으로 현상을 분별하고는, 모습이나 부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심근이 통어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게는 탐욕과 근심이라고 하는 착하지 못한 법들이 들어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안근을 지키고, 안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성스런 감관의 통어를 구족하게 되면, 내면으로 무너짐이 없는 즐거움을 감수하게 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른 염과 바른 앎>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나아가거나 돌아올 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앞을 보거나 뒤를 보거나 할 때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팔을 뻗거나 오무릴 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옷을 걸치거나, 바루를 들거나, 법의를 걸칠 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을 볼 때에도, 혹은 소대변을 볼 때에도,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잘 때에도, 눈을 뜨거나 얘기하거나 침묵의 상태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바른 념과 바른 앎을 구족하는 것입니다.


<만족>

대왕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자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법의)과 배를 채울 정도의 탁발식에 만족해합니다. 그는 어디에 가든 그것들을 지니고 갑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날개달린 새가 어디로 날아가든 날개와 함께 하듯이, 그와 같이, 대왕이여, 수행자는 자신의 몸을 감쌀 정도의 옷과 배를 정도의 탁발식에 만족해합니다. 그는 어디에 가든 그것들을 지니고 갑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계온을 갖춤에 의해 비로소 수행자는 禪에 들 조건이 구비된 셈이다. 이로부터 수행자는, 寂靜閑處로 가서 앉아 염을 집중하는데, 이후 다섯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비로소 初禪에 들게 되는 것이다.


<적정한처>

그는 이 성스런 청정을 갖추고, 또한 이 성스런 감수작용에 대한 통어를 갖추고, 이 성스런 정념․정지를 갖추고, 이 성스런 만족을 갖추게 되면, 멀리 떨어진 坐處, 곧 숲이나 나무 밑, 산, 계곡, 동굴, 묘지, 황무지, 露地로 갑니다. 그리고 걸식에서 돌아온 뒤, 얻어온 음식을 먹고는, 결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念을 정면에 집중해 앉습니다.


<다섯 덮개의 사단(捨斷)>

그는 세간에 대한 애탐을 버리고, 애탐을 떠난 마음으로 머물며, 애탐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성냄을 버리고,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물며, 일체의 생명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기울여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昏沈과 수면을 버리고, 혼침과 수면을 벗어난 마음으로 머물며, 光明想있으며, 바른 염과 바른 앎으로 혼침과 수면에서 마음을 정화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버리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머물며, 내면은 적정해져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의심을 떨치고 의심을 초월해 머물며, 착한 법에 대한 의혹을 버리어 의혹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이후 수행자의 노력에 의해 정화된 마음이 진행하는 과정이 곧 禪이며, 그 구체적인 심화과정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선이다.

사선의 각 단계는 정화된 마음이 일으키는 집중도가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S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그는 諸慾에서 떠나고, 諸不善法에서 떠나 거친 생각 있고(有尋), 미세한 생각 있으며(有伺), [障碍를] 떠남에서 생하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문다.


Vtakka-vicārānaṁ b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그치고, 내면은 적정하며 마음이 전일하게 되어, 거친 생각 없고 미세한 생각 없어 삼매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 있는 제2선에 도달해 머문다.


Pītiyā ca virāgā ca upe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ṝ ca kāyena paṭisaṁvedeti yan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hako satimā sukhavihārī 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기쁨을 여의고 무관심해지며, 바른 念(正念)과 바른 앎(正知)으로, 이른바 聖人들이 “무관심하며 念있는 즐거운 머뭄(捨念樂住)”이라고 하는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제3선에 도달해 머문다.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 va somanassa- domanassānaṁ atthagamā adukkhaṁ asukhaṁ upe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puasampajja viharti.

기쁨을 여의고 괴로움을 여의며, 이전의 희열이나 근심을 멸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이(不苦․不樂) 무관심한 염으로 청정해진(捨念淸淨)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는 초선-제2선-제3선-제4선이라는 정형구조로, 5종선은 제2선을 無尋有伺와 無尋無伺로 양분한 경우이다. 여기서 사선 자체의 심화과정을 본다면, 제2선에서 비로소 삼매에 의한 심일경성을 얻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사선은 거친 생각(尋)․미세한 생각(伺), 기쁨(喜)․ 즐거움(樂)이라는, 이른바 想과 受가 가라앉는 심화과정을 단계별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선을 얻게 되는 구조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수행을 통해 계온의 성취→맑게 사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감수하기 위해 한적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앉음 (結跏趺坐)→念의 집중(호흡의 관찰) →다섯 마음의 덮개가 사라진 즐거움을 感受 (초선)→제2선→제3선→제4선」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결국, 선은 계온의 성취도를 재는 척도일 뿐이지 그 자체는 그 어떤 방법이나 대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수행에 있어서 계온을 성취하는 것은 그 전제가 되며, 완성된 계온은 그대로 선이라는 증과로서 진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五蓋의 사단→환희→身안락→樂의 기억→心삼매→초선」이라는 초선도입의 전단계가 상세히 설해지기도 하는 것이다.22)

이렇게 되면 수습법에 따라 계온의 성취도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사선은 바로 그 성취도의 차이를 세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청정도론������의 업처파취품에서는 수습법과 그에 의해 도달되는 계온의 성취도, 곧 선의 깊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안반념(安般念)과 十遍23)은 四禪 전체에 속하며, 身至念과 十不淨은 初禪에 속한다. 初三梵住(자․비․희)는 초선 내지는 제3선에 속하며, 제4범주와 사무색(四無色)은 제4선에 속한다. 이와 같이 禪의 區分에 의해 [업처의 결택을 알아야만 한다.](Visuddhimagga.p.111)


이는 수습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경지의 차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사무량의 수습에 의해 제4선이라는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원시선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무량은 그 내용상, 身至念이나 不淨觀과 같은 소극적인 수습법과는 달리, 自己外적인 혹은 대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선의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선과는 대단히 다른 차원의 禪觀이 되기 때문이다.



Ⅴ. 禪과 생명윤리


원시선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생명윤리적인 입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곧 선은 살생․도둑질 등의 비윤리적․비종교적인 행위에 대해 불교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또한 춘다여, 외도의 수행자는 이와 같이 얘기할지도 모른다. ‘샤카의 사문들은 安樂行에 專心해 머문다’라고. 춘다여, [만약에] 외도수행자가 이같이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 ‘친구여, 어떤 안락행이 있다는 것인가? 안락행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네’라고. 여기에 네 가지 안락행이 있으니, 저열하고 천하고 범부적인 것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도리에 맞지 않아 遠離로 이끌지 못하고, 離慾으로 이끌지 못하고, 滅로 이끌지 못하고, 적정으로 이끌지 못하고,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무엇이 넷인가? 춘다여, 여기에서 어떤 어리석은 자는 생명있는 것을 죽이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첫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어떤 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두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여기에 어떤 자는 헛된말을 하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세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여기에 어떤 자는 오욕락에 만족해 빠져있다. 이것이 네 번째 안락행이다. 춘다여, 이들 네 가지 안락행은, 저열하고 천하고 범부적인 것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도리에 맞지 않아 遠離로 이끌지 못하고, 離慾으로 이끌지 못하고, 滅로 이끌지 못하고, 적정으로 이끌지 못하고,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다시 춘다여, 외도의 수행자가 이와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샤카의 사문들은 안락행에 전심해 머문다’라고. 춘다여, [만약에] 이와 같이 외도수행자가 말한다면, ‘그렇지 않소’라고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 그는 올바로 얘기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것을 들어 그대를 비방하리라. 춘다여, 여기에 네 가지 안락행이 있으니, 반드시 遠離로 이끌며, 離慾으로 이끌며, 滅로 이끌며, 적정으로 이끌며, 지혜로 이끌며, 깨달음으로 이끌며, 열반으로 이끈다. 넷이란 무엇인가? 춘다여, 여기에서 수행자는 … 초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첫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수행자는 … 제2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두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수행자는 … 제3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세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안락행인 것이다. 춘다여, 이들 네 가지 안락행은 반드시 遠離로 이끌며, 離慾으로 이끌며, 滅로 이끌며, 적정으로 이끌며, 지혜로 이끌며, 깨달음으로 이끌며, 열반으로 이끄느니라”24)


곧, 선의 경지란, 살생, 도둑질, 망어, 쾌락 등의 비인간적․비도덕적인 행위를 떠난 순수정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오타마 붓다는 바라문의 동물희생제, 곧 살생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사선을 설함으로써 불교에 있어서 선의 정신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25)

하지만, 원시불교의 자비관은 단지 불살생에 그치지 않고, 남의 마음을 해하는 것 조차 그 범주에 넣고 있다. 이는 자칭 「害하지 않는 자」라고 부르는 바라문과 고오타마 붓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자칭] 해하지 않는 자인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인사하고, 즐거운 인사말을 나눈뒤 한쪽 구석에 앉았다.

한 편에 앉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오타마여, 나는 [남을] 해하지 않는 자입니다. 고오타마여, 나는 [남을] 해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름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에 의해서나 [남을] 해하지 않는다면, 그야 말로 진정 해하지 않는 자인 것이오”26)


곧, 바라문들이 고답적이고 형식적인 不殺生을 추구함에 반해, 불교는 보다 본질적인 생명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실천원리로 등장한 것이 자비관이다. 원래 수행관으로서의 자비관은 그 기원을 이미 古우파니샤드의 생명관에서 엿볼 수가 있다.27) 게다가 바라문의 수행덕목으로서, 혹은 최고의 이상계(범천)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선수습법으로 채용해, 전술한 ������淸淨道論������에서 보듯이 사선을 얻는 업처로 간주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관은 삼독 가운데에서도 특히 瞋의 소멸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원시불교자료 가운데에는 慈無量이 단독으로 설해지는 경우가 있으며,28) 또한 수행자에게 일어나는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수습법으로 권해지기도 한다.29)

이와 같이 자비관에 의한 觀想法은 일찍부터 정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수습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비되어, ������淸淨道論������(第九品 梵住의 解釋)에서는 선수습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는 것이다.30)



맺는 말


이상으로 원시선의 본질과 선이 의도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시불교 선수습의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곧, 불교의 선은 계온의 성취를 전제로 하며, 선이란 그 성취된 계온의 즐거움에 의해 저절로 초래되는 심리현상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지란 다름 아닌 탐·진·치 삼독이 지멸한 심경을 가리키고 있으며, 다시 이 삼독의 지멸도, 즉 계온의 성취도를 세분한 것이 바로 사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선을 얻는 수습법 가운데에서도 사무량은 제4선이라는 선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습법으로, 단순한 교의의 차원을 넘어 선의 업처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곧, 사무량은 분노(瞋)의 지멸에 유효한 수습법으로, 그 취지는 사랑, 연민, 기뻐함이라고 하는 생명에의 관심을 통해 차별심 없는 평등의 마음, 곧 禪心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청정도론������에서 설하는 사무량의 修習次第에서 주목해야한 하는 것은, 瞋을 소멸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습으로서 보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보시에 의해 자신의 분노는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이 품고 있던 원한 역시 사라진다고 한다. 이는 실로 사랑과 연민과 베풂에 의해 자타가 모두 禪을 얻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禪은 이미 앉기 이전에 얻어내는 경지이며, 「坐」란 단지 그 성취의 기쁨을 감수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과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가꾸어 가는 과정이 계온이라면, 그 열매를 따 먹는 행위가 바로 선인 것이다. 고오타마 붓다가 「禪은 즐거움」이라고 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31)

결국 원시불교에 있어서 선은 개인의 도덕적․종교적 성취도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나아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조화가 이루어 내는 이상적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다. 특히 다른 생명의 행복을 바라고, 이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자신 역시 마음의 이상경에 도달한다고 하는 사무량선의 구조에서 보듯이, 불교수행의 구체적 대상이 다름 아닌 나를 둘러싼 뭇 생명일 수밖에 없음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키워드: 原始禪, 四禪, 四無量禪, 修習構造, 不殺生, 三毒, 生命倫理


A Consideration on the Essence and Practical Structure of Jhāna in the Early Buddhism




Kim, Hyung-Jun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understand the essence and practical structure of Jhāna, which becomes the nucleus of all kind of practice in the early buddhism. It is well-known fact that Jhāna in the early buddhism is related with the itinerancy, practice and enlighenment of Gotama Buddha. However, we cannot see the clear image of such importance in the Nikāyas and Āgamas.

In this thesis I tried to catch the essential meaning of the Jhāna, and to understand the relation the Cattasso-appanmaññāyo-jhānani.

The ultimate object of Buddhist meditation is to stop three obstacles, that is, covetousness, anger, and delusion. And the Jhāna is a measure of those. Strictly speaking, it is said that purification of the mind is the prototype of Jhāna, and all practices are ways to purify the mind.

Consequently, Gotama Buddha must be an acomplisher of sīla as well as a meditator. Jhāna has its real value only at sīla. A result of Jhāna is never any supernatural world. It has a very clear goal to realize one's whole personality.

We have overlooked the true aim of Jhāna. The way to prac- ticing the Jhāna is never hallucination or self-effacement. When one acquires full consideration and noble character, he will approach Gotama Buddha's Jhāna.

「原始禪의 本質 및 그 修習構造에

관한 一考」에 대한 논평



32)이 중 표 *



불교는 수행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이고, 禪은 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법이다.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고, 이들은 불교의 禪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禪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믿고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선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신 있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뿐만 아니라 禪을 실천하고 있다는 소위 禪師들 마저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禪이다. 이런 실정에서 禪은 신비화되어 신통을 얻거나 도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불교가 현실에서 생명을 가진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禪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인지’가 명확히 밝혀져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시의 적절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 선의 정의


1-1. 논자는 선을 사유나 관찰에 의해 도달된 ‘심적 경지’, ‘마음의 상태’ 라고 정의한다. 논자의 이러한 정의는 선과 선에 이르는 과정을 구분하여 선을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선에 도달하는 과정, 즉 ‘사유나 관찰’(vipassanā)은 선과 분리되어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定(samādhi)과의 차이와 관계를 밝혀야 하지 않을까?

1-2. 한경수는 석사학위 논문 「아함경에 나타난 수행관 연구」(동국대, 1989)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漢譯의 禪定에 상당하는 jhāna-samādhi라고 하는 합성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예를 들면 jhānin(禪思者)와 samāhita(入定者)를 동의어적으로 쓰고 있는 예는 古詩句 중에 이미 볼 수 있다.(藤田宏達, 「原始佛敎における 禪定思想」 ������불교사상논촌������ p.289) 아함경에서는 禪과 定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구별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두 의미가 같이 쓰이기 때문에 漢譯에서는 하나로 합해서 하나의 술어를 만들어 禪定으로 번역했던 것 같다. ….

그러나 아함경에서는 禪과 定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뉘앙스에 의한 차이점은 발견된다. 禪이라고 했을 때는 禪定修行에 있어서 그 형식적인 면을, 定이라고 했을 때는 그 내용적인 면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즉 禪이 禪定의 수행반법 내지 과정에 대한 것이라면, 定은 禪定 수행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羅朗銀, 「原始佛敎禪定說의 一考察」, p.6.)


이와 같이 禪을 수행과정으로, 定을 의식상태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논자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四禪의 구조에서 본 禪의 의미


2-1. savitakka(有尋, 有覺)를 ‘거친 생각 있고’로, savicāra(有伺, 有觀)을 ‘가는 생각 있고’로 번역하고 있는데 ‘거친 생각’과 ‘가는 생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고로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에는 “尋은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尋究하는 것, 伺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밀하게 분별하고 伺察하는 정신 작용”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평자는 vitakka(覺)와 vicāra(觀)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四禪의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근본불교의 선정설은 三界와 연관되어 離欲을 통해 欲界를 벗어나 色界에 이르고, 色界에서는 覺觀喜樂을 떠나 無色界로 나아가고, 무색계에서는 有無 모순을 떠나 出三界(出世間)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覺觀喜樂의 구체적인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면 四禪의 이해와 실천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평자의 소견; 각관희락은 지각과 그 대상이 분별된 상태에서 나오는 의식작용이다. 色界 四禪은 이렇게 지각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생의 세계이다.)


2-2. 四禪의 起源

인도에서 수정주의적 전통은 아리안족이 이주하기 전의 토착민에서 유래하며, 붓다 당시에 선정의 수행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四禪의 기원이 불교 내부인가 외부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수정주의와 불교의 四禪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2-3. 논자는 자이나교와 불교의 尋伺(覺觀)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통해 불교와 자이나교의 선정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자이나교에서는 심사를 근본적인 정신작용으로 보고, 불교에서는 止滅해야 할 것으로 보는 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논자는 심사가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평자의 생각에는 두 사상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정신적 실체로서 ‘Jīva’(命我)를 인정하고 있으며, 물질적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 命我의 특성이 知(인식), 見(지각), 力(행위)이다. 그리고 명아에 의해 인식되고, 지각되고,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물질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의식작용인 尋伺를 지멸한다는 것은 命我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에서는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즉 四禪은 이러한 무아를 깨닫는 과정적 사유이다. 따라서 尋伺의 지멸이 필수적이다.


2-4. 四禪이 대사회적인 입장, … 비윤리적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논자는 ������청정경������을 들어 선에 의해 도달되는 경지는 … 비도덕적인 행위를 떠난 순수정신임을 引證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불교는 쾌락(지각의 대상을 통해 얻어지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불교도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은 욕망의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버림에서 오는 내면의 기쁨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장아함 구라단두경������에서 이러한 선의 정신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어떤 내용이 그것인지? 평자가 읽은 내용은 제사보다는 승가에 공양하고, … 계율을 지키는 것이 더 뛰어난 공덕임을 깨우치는 것이지 선의 정신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2-5. 논자는 “이같은 선의 성격은 뒤에 사무색정과 차제관계를 맺음으로써, 도덕성이 전제되지 않은 비불교적인 선정론을 불교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사무색정이 본래는 도덕성이 전제되지 않은 비불교적 선정론이라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주장인가? 그리고 선의 어떤 성격이 사무색정을 불교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3. 선의 수습구조.


3-1. 논자는 계를 성취해야 선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경전의 소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선의 성취를 위해서는 왜 계의 성취가 전제되어야 하는가를 밝혀야 하지 않을까?


3-2. 선은 계온의 성취도를 재는 척도인가?


<아쉬운 점>

1. 불교 수행의 목적이 선정의 성취인가? 계온과 정온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오분법신과의 관계를 논했으면 하는 아쉬움. <一例로 ������중아함 공경경������에서는 梵行恭敬 - 威儀法 - 學法 - 戒身 - 定身 - 慧身 - 解脫身 - 解脫知見身 - 涅槃의 과정이 설해지고 있음.>

2. 선정을 논하면서 三界, 七識住二處(������중아함 대인경������), 九衆生居(������장아함 十上經������), 九次第定(������중아함 분별관법경������), 八解脫(������중아함 대인경������) 등이 논의에서 제외된 점.

3. 주지하듯이 불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법이 禪定이다. 불교 선정의 특징은 선정이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수행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연기법과 선정의 관계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의문>

이 논문의 목적은 “그 정체가 분명하며, 실행 가능하면서도 측정 가능한 수행이론이 바로 禪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해 선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실행가능하고 측정 가능하게 되었는가?

「原始禪의 本質 및 그 修習構造에

관한 一考」에 대한 논평



32)안 승 준 *



1.


논자는 “원시선의 결정이자 수습론의 중핵을 이루는 四禪을 중심으로 선의 본질과 그 수습구조를 밝혀보고자 하며, 나아가 四無量禪을 통해 원시선이 의도하는 사회성을 새로이 조명해 보고자 한다”[p.363]라고 논문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평자가 읽기로는 사무량을 통해서 선의 도덕적 사회성을 조명한 부분은 이 논문의 성과로 보여지지만, 사선을 중심으로 선의 본질과 수습구조를 밝힌다고 한 것은 그 성과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평자가 보기에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구절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2.


논자는 “원시불교의 선은 그 방법으로서 사유를 전제로 해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를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p.364]라고 선에 대해서 어원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한편, 논자는 “당시의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의 의미는 이같은 심리적 부조화를 근절하는 것이었으며, 선이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부조화가 해결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p.368]라고도 말한다.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로 정의되는 선과 ‘심리적 부조화가 해결된 상태’로 정의되는 선은 서로 일치하는 것이라기보다 상반되는 관점에 있다고 보여지는데, 논자는 이 양자의 정의가 가지는 상반성을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논문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3.


“심, 사의 지멸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상반되는 견해차가 보이는데, 이러한 견해 차이는 심사에 대한 양자의 이해가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곧 자이나교에서는 심, 사를 근본적인 정신작용이라고 본다면, 원시불교에서는 특히 욕망과 관련된 단절되야만 하는 의식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p.394]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인 정신작용’이란 어떠한 것인지, 또 심사가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를 상세히 밝힐 수 있으면 좋겠다. 앞의 항목에서 논의한 대로 구분한다면, ‘尋과 司’는 ‘사유작용’에 해당할 것이고, ‘욕망에 관련된 것’은 ‘심리적 부조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심과 사’를 곧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논자는 앞의 항목에서 논의한 상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선에 의해 도달되는 경지는 살생 도둑질 망어 쾌락 등의 비인간적 비도덕적인 행위를 떠난 순수정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오타마 붇다는 바라문의 동물희생제에 대해 사선을 설함으로써 불교에 있어서 선의 정신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데, 이같은 사선의 성격은 뒤에 사무색정과 차제관계를 맺음으로써, 도덕성이 전제되지 않은 비불교적인 선정론을 불교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p.380]라고 했는데, ‘도덕성이 전제된 불교적인 선정론’란 선정 자체의 특성인가? 아니면 교학과 관련된 관법의 특성인가? 논자는 선정 자체의 특성인 것처럼 논술하고 있는 듯한데, 구체적인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5.


“선은 계온의 성취도를 재는 척도일 뿐이지 그 자체는 그 어떤 방법이나 대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수행에 있어서 계온을 성취하는 것은 그 전제가 되며, 완성된 계온은 그대로 선이라는 증과로서 진행한다는 것이다”[p.377]라고 하였다. 선에 대해서 ‘어떤 방법이나 대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위와같이 말한다면 ‘계온의 성취가 곧 선의 방법이요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계 정 혜 삼학의 관련성에 주목한 관점이겠지만, 그렇다면 선정 자체의 본질을 밝히는 방법은 따로 없다는 것이 논자의 견해인지 확인하고 싶다.



6.


논자는 ������청정도론������의 「업처파취품」을 인용하고 나서, “이는 한마디로 수습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경지의 차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사무량의 수습에 의해 제4선이라는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점이다”[p.378]라고 결론 짓는다. 그런데 논자가 인용한 「업처파취품」은, “초삼범주(자, 비, 희)는 초선 내지는 제3선에 속하며, 제4범주와 사무색은 제4선에 속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따른다면 사무량은 초선부터 4선까지에 전체적으로 대응하는것이고, 제4선에만 속하는 것은 사무량이 아니라 사무색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논자는 여기서 사무량과 사무색의 특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7.


“사무량은 그 내용상 신지념이나 부정관과는 달리 자기외적인 혹은 대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선의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선과는 대단히 다른 차원의 선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이 최고의 업처로서 간주되는 사무량이야 말로 불교선의 취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p.378]라는 규정은 사선이 사무량과 관련되어서 불교선의 특색을 드러낸다는 점은 잘 지적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의 항목에서 논의한 대로 사무량을 선의 최고의 경지라고 규정한 근거는 그다지 확실한 것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논자는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



8.


“불교의 선은 계온의 성취를 전제로 하며, 선이란 그 성취된 계온의 즐거움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심리현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지란 다름아닌 탐 진 치 삼독이 지멸한 심경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 삼독의 지멸도, 즉 계온의 성취도를 세분한 것이 바로 사선이 것이다. … 결국 원시불교에 있어서 선은 삶의 조화, 나아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조화가 이루어진 이상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무량선에서 보듯이 선은 다른 생명의 행복을 바라고, 이를 성취함으로써 비로소 자신 역시 마음의 이상경인 선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듯이, 적어도 원시불교의 선은 불교의 대사회성을 표방하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p.383]라고 논자는 결론을 맺고 있다. 이에 따라서 논평의 결론을 내리자면, 사선 수행의전단계로서 계온의 성취가 가지는 의의를 분명히 하고 사무량이 가지는 도덕적 사회성이 사선 수행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은 논문의 성과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선의 본질을 밝힌다고 한 부분은 다소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몇 가지 질문으로써 새로운 해명이 있기를 기대한다.


* 위덕대학교 겸임교수

 


1) 「最初期佛敎」라는 표현은 근년 故中村元박사에 의해 제시된 용어이다. 현재 원시불교자료를 시기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은 없다. 원시불교에 대한 자료의 新古의 구분은 문헌 그 자체가 그 어떤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新古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미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시도된지 오래이며,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경우도 宇井伯壽나 和辻哲朗등에 의해 원시불교의 시대적 혹은 자료적 구분에 관한 이론들이 꾸준히 제기되 왔다. 그리고 근년 故中村元박사는 이들 연구성과를 토대로 「原始佛敎聖典成立史硏究の基準について」라는 논문을 통해 원시불교연구를 위한 가설적 기준을 제시했다. 박사의 논문은 中村元������原始佛敎の成立������(中村元選集決定版14卷, 春秋社, 1992)에 수록되어 있다.

 


2) Udāna. I-1, p.1.

 


3) Udāna. Ⅲ-4, p.27.

 


4) 단지, 四禪의 각지분을 jhāna-samādhi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Visud dhimagga, p.85, p.158, p.372, p.376).

 


5) 이에 관해서는 四禪의 진행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곧, 제2선에서 尋․伺가 그친다고 하는 것은 바로 禪이 심작용의 지멸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6) nandī-bhava-parikkhayā // saññā-viññāṇa-saṅkhayā // vedanānaṃ nirodhā upasamā // evaṃ khvāham āvuso jānāmi //(Saṃyutta-Nikāya I. 1.2, vol.I, p.2)

환희의 생존이 다함에 의해, 생각(想)과 분별이 다함에 의해 감수작용의 지멸로부터 적정이 있다네. 친구여,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있다네.

 


7) Mahāsaccaka-sutta에서는 고오타마가 고행을 버리고 사선에 의해 안온의 경지를 얻어는다고 한다. 곧, 고오타마 붓다의 성도를 전하는 전승에서는 고행과 깨달음과 사이에 명백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8) 일련의 전승에 의하면, 고오타마에 의해 고행은 일단 방기된 듯이 보이지만, 고오타마의 깨달음 내지는 해탈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도 이다. Suttani-pāta Mahāvagga 제3장 제2절(No.425~429)의 일련의 게송은 성도이전의 고오타마 붓다가 일종의 苦行을 통해 선의 경지를 얻는 장면이 있다.


Lohite sussamānamhi pittaṃ semhañ ca sussati,

maṃsesu khīyamānesu bhiyyo cittaṃ pasīdati,

bhiyyo sati ca paññā ca samādhi mama tiṭṭhati.(Sn.434)

‘피가 말라버리면 담즙도 膽汁이나 痰조차도 말라버리리라.

살이 말라가니, 마음은 점점 맑아지고,

나의 念과 智慧와 三昧는 점점 확고히 서네.’


Tassa m'evaṃ viharato pattass'uttamavedanaṃ

kāmesu nāpekhate cittaṃ, passa sattassa suddhataṃ.(Sn.435)

‘이처럼 내가 최대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머물고 있을 때,

마음은 온갖 욕망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보라, 유정의 청정을.’


이 일련의 게송에서는 고오타마 붓다에 있어서 선정과 고행의 밀접한 관련을 알 수 있다. 피가 마르고, 담즙이나 痰조차도 말라버릴 정도로 격한 고행에 빠져 있지만, 마음은 욕망을 여의고 맑아진다고 한다. 이 심적 청정과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은 그 대로 선의 최종적 경지를 가리킨다. 곧 苦行을 통해 이상적인 선의 경지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

 


9) 붓다의 成道와 관련돼 있는 전승으로 Mahāsaccakasutta와 Saṁgārava sutta가 있다.

 


10) Jātaka. Vol.Ⅰ, p.58.

 


11) Majjhima-Nikāya I, p.246; II, p.212.

 


12) E. J. BRILL,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y Buddhism”, p.3.

 


13) Sn. 1-17.

 


14) Majjhima-Nikāya.I, pp.308~309(Cūḻadhammasamādānasuttaṃ).

 


15) 대응하는 한역아함에서는 사선이 설해지지 않는다. ������中阿含經������卷45(大正藏 1, p.713上).

 


16) 예를 들어, 중부경전������降魔經������에서는 삼독에 대해 각각 不淨觀과 四無量, 그리고 無常觀의 수습이 권해지고 있다. 그 구조는 부정관에 의해서는 탐이, 무상관에 의해서는 치가, 그리고 사무량에 의해서는 진이 지멸된다고 한다.

 


17) Saṁyutta-Nikāya Ⅻ. 8.8, vol.Ⅳ, p.299.

 


18) “친구여, 내가 諸慾에서 벗어나고 不善法에서 벗어나, 有尋․有伺로 멀리함에 의해 생하는 喜와 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물 때, 친구여, 이 사이에 나는 무상현법열반에 도달했던 것이다. 저 때, 이것은 有尋․有伺이기에 그 [상태]는 거칠다고 일컬어진다. 그로부터 나는 尋과 伺가 가라앉음에 의해 내면은 적정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가 되어, 無尋․無伺로 三昧에서 생하는 喜와 樂이 있는 제2선에 도달해 머문다. 친구여, 이 사이에 나는 무상현법열반에 도달했던 것이다”(Dīgha-Nikāya Ⅰ, pp.36~38, Brahmajāla-sutta).

 


19) Saṃyutta-Nikāya Ⅳ, pp.298~299.

 


20) Majjhima-Nikāya I, p.33(No.6:Ākaṅkheyyasuttaṃ).

 


21) 여기에서 우리는 고오타마 붓다가 출가후 만난 두스승을 떠나는 이유를 알게된다. 곧, 두 바라문스승의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는 戒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2) Dīgha-Nikāya I, p.73(Sāmaññā-phala-sutta).

 


23) 지․수․화․풍․靑․黃․赤․白․空․識 ; 삼계(三界)가 이들 중 어느 하나로 두루 차 있다는 觀을 순차로 행한다.

 


24) Dīgha-Nikāya Ⅲ, pp.130~132(Pāsādika-suttanta).

 


25) … 내지 초선에 달해 머문다. 바라문이여,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희생제보다 번잡하지 않고 장해적으며, 게다가 과보도 많고 공덕도 많은 희생제이다. … 제2선 … 제3선 …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바라문이여,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희생제보다 번잡하지 않고 장해적으며, 게다가 과보도 많고 공덕도 많은 희생제이다(Dīgha-Nikāya I, p.147:Kūṭadanta-sutta).

 


26) Saṃyutta-NikāyaVII. 1.5.2-4, vol.I, pp.64~65.

 


27) 나의 모든 감관에 정신을 집중해, 살아있는 동안, 聖處를 제외하고 일체의 생명에 대해 불살생을 닦아 梵界에 到達하는 자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네(Chāndogya-Upaniṣad.VIII, 15-1).

 


28) 숫타니파아타의 ������慈經������(No.149~150)에서 설해지는 자무량의 수습을 보면, 생명이나 세간, 그리고 온갖 방향을 향해 한없는 慈心을 일으킨다고 한다.

 


29) 자비관은 삼독 가운데에서도 특히 瞋의 소멸을 목적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한편 숫타니파아타의 주석인 파라마타조티카에서는, 히마라야의 기슭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수행자들이 신들에 의해 압박을 받자, 그들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護呪로서 이 경이 설해졌다고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달리 그대들에게 적합한 座所는 없다. 원래의 주처에 살면서 그대들은 번뇌의 지멸을 얻는게 좋겠다. 가거라, 수행자들이여, 같은 좌소에 살거라. 하지만, 만약에 신들에게 위협받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慈의 觀想)을 배우도록 해라. 이것이 바로 그대들에게 있어서 護呪이며, 업처이니라” (Paramattha-jotika.I, p.235)

 


30) Visuddhimagga, p.306. 여기에서는 사무량 각지분마다 수습의 대상과 그 순서를 상세히 구분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사무량에 있어서의 所緣(對象)과 그 순서를 보면, 慈와 悲는 각각 自己→愛者→無關係者→怨敵의 순으로 닦으며, 喜는 愛者→無關係者→怨敵의 순으로, 그리고 捨의 경우는 無關係者→愛者→怨敵의 順으로 觀想을 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所緣이 되어서는 안되는 대상으로는 異性과 死者를 든다. 그 이유로서는 異性에 대한 慈의 수습은 탐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死者의 경우는 安止도 近行도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 단계를 거쳐 禪心은 얻어지는데, 특히 怨敵에 대한 수습을 열가지 단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 간략하게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앞의 대상에 대해 누누이 慈를 행한다.

② 譬喩의 가르침을 수념한다.

③ 怨敵에 있어서의 身·口·意正行이 적정하고 두루 가라앉아 있음을 수념한다. 곧, 怨敵에게 身·口·意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바른 구석이 있다면, 그것을 수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한 원적에게는, 「비록 그는 지금 인간계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八大地獄․十大小獄에 떨어지리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킨다.

④ 분노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생각한다.

⑤ 자기와 남이 업을 공유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⑥ 世尊의 宿行의 덕을 수념한다.

⑦ 끝없는 윤회를 관찰한다.

⑧ 世尊이 말씀하신 慈의 공덕을 관찰한다.

⑨ 도대체 원적의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지, 界의 간별을 행한다.

⑩ 소유물을 주고 받는다.

 


31) 비구들이여, 무엇이 비구의 樂인가? 여기에서 비구여, 비구가 欲을 떠나 착하지 못한 법에서 떠나, 有尋․有伺이면서, 떠남에서 생하는 喜․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문다 … 「중략」 …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비구의 즐거움(樂)인 것이다. (Majjhima-Nikāya Ⅲ, p.78).

 


* 전남대 철학과 교수

 


* 동국대 강사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31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