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서로 통하는 도리'
한 스님이 물었다.
“수행인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 곳에 서로 통함(廻互)은 있습니까?”
“서로 통하는 도리를 헤아렸구나.”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면 서로 통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대 자신이다.”
“큰스님의 경지를 남들이 헤아릴 수 있습니까?”
“사람이 가까워지면 도는 더욱 멀어진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숨으십니까?”
“나는 지금 그대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전신(轉身)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래야만 맞기 때문이다.”
위 문답은 바로 앞의 대화에서 계속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도 도(道)에 눈을 뜨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지입니다. 회호(廻互는 回互와 같이 쓰임)는 도리(理, 이)와 현상(事, 사)이 아무 걸림없이 서로 원융자재(圓融自在)한 것, 즉 이치(道)와 현상(物)이 막힌 데 없이 서로 자유롭게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첫 질문에 ‘수행인(學人)이 서로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수행인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데 눈을 뜨지 못한 까닭에 둘 다 상대의 마음, 성품(性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즉 서로 도(道)와는 동떨어진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품은 보일 까닭이 없으므로 서로 알아채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통함(廻互)은 있습니까?‘ 라는 말은 서로 도를 알지 못할지라도 서로 마음은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과 같습니다. 조주는 ’(서로 보지 못한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통한다는 도리에 대해 생각했구나‘ 라고 했는데, 그 수행자는 ’그것을 생각으로 알 수 없다면 서로 통함(廻互)이란 정말 무엇입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데, 무슨 마음이 통하겠습니까?
조주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대 자신이다’는 말을 풀어보면, 만약 우리 둘 사이라면 나는 너와 이렇게 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너는 통해지기가 참 어렵구나! 라는 말이라고 할까요? 그 스님이 한탄하며 하는 말, ‘큰 스님의 경지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란 소리에 조주의 ‘사람이 가까워지면 도는 더욱 멀어진다’란 말씀은 '나의 말을 쫓아다니다간 하세월이니, 네 스스로 언구를 의심하여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나는 너와 가까워지기 싫다'는 의미로 알아듣고는, “스님께서는 왜 스스로 숨으려고만 합니까?” 라고 투정을 부립니다.
‘내가 지금 너를 상대하여 이렇게 회호(廻互)를 논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째서 숨으려고 하는 것이냐?’ 그래도 그 스님 투정을 좀 더 부립니다. '큰 스님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수행자들이 몸을 바꾸게 만들어, 즉 온갖 방편을 사용하여 저 같은 중생을 구제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못 협박조입니다. 그러면 조주의 최종 신조(信條)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바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느 수행자가 오더라도 조주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오직 본분사(本分事)로만...
120. '그대는 사람을 보느냐?'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교화(敎化)시킬 수 있는 사람은 금생의 일이지만, 교화시킬 수 없는 사람은 제 3생(第三生)의 원수(冤)이다. 만약 교화하지 않는다면 일체 중생을 떨어뜨리게 될까 두렵고 교화한다 해도 역시 원수이니, 그대들은 교화하겠느냐?
한 스님이 말했다.
“교화하겠습니다.”
“그러면 일체 중생이 그대를 보느냐?”
“보지 못합니다.”
“어째서 보지 못하느냐?”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無相).”
“그렇다면 지금 노승이 보이느냐?”
“큰스님께서는 중생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를 알았으면 됐다.”
교화(敎化)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위로는 스스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즉 모든 번뇌를 끊게 하여 열반해탈로 이끄는 구원(救援)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주의 ‘내가 현생에서 교화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교화가 안되는 사람은 제 3생(第三生), 즉 후생(後生)까지라도 원수다’ 라는 말씀은 미래 생에 태어나더라도 구원해야 할 대상이다 이 말이죠. 제 3생은 과거생, 현생, 미래생 중에서 미래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법(法)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면 일체 중생을 타락시키는 것이니 두렵고, 구원하더라도 이는 역시 원수다. 그러니 그대들은 교화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여기서 조주는 왜 교화, 구원하더라도 역시 원수라고 했을까요? 원수가 될 텐데 너희들은 구원하겠느냐? 수행자들에게 매우 겁을 주고 있는데, 사실 원수라기보다는 서로 장물을 노리는 도적의 관계라고 함이 맞을 듯 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깨쳐야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한 스님이 “교화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고, 그 후 자신도 후생들을 구원하겠다는 뜻이죠.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조주는 “그럼, 일체 중생이 다 그대를 보느냐?” 라고 동떨어진 질문을 합니다. 중생 구원을 위해 교화를 하니, 안하니 하는 주제를 다루다가 '사람을 보는' 이야기로 옮아가 버렸습니다. 결국 교화하여 열반해탈을 성취하면 청정법신을 볼 수 있느냐? 이 주제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대의 청정법신을 중생이 볼 수 있겠느냐?' 그 수행자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습 니다.
“보지 못합니다.” “왜 보지 못하느냐?” “모양이 없습니다(無相)." 법신은 모양이 없어(無相), 볼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고 그 수행자는 말했습니다. 깨달음은 얻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상당히 공부한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노승이 보이느냐?” 나 조주의 본래면목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소리입니다. “큰 스님은 중생이 아닙니다.” 저는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큰 스님은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조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이제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고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네 죄를 스스로 알았으면 됐다.” 라뇨? 큰 상을 줘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죄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병풍 밖으로 진주를 다발 채로 흩뿌리는 소리입니다. 칭찬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하는 법입니다.
121. '저절로 된 일'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용녀가 마음으로 친히 바친 것은 모두가 저절로 그렇게 된 것(自然事)이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이미 저절로 된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바쳤습니까?”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저절로 그렇게 되는 줄을 알겠느냐?”
'용녀가 마음으로 친히 바친 것'은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8살 난 용왕의 딸인 용녀가 품속에서 하나의 보배구슬을 꺼내어 세존에게 바쳤다고 하는 이야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에게 보배구슬을 친히 바친 것은 저절로 된 일이다는 말은 보배구슬을 바치는 인위적인 행동을 말한 게 아니라, 무위(無爲)의, 함이 없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실제 영롱하게 비치는 구슬을 부처에게 바치고 성불(成佛)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저절로 된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바쳤습니까?” 저절로 부처를 이루었다면 보배구슬은 왜 바쳤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보배구슬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죠. “만약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저절로 그렇게 될 줄 알겠느냐?”
'꽁꽁 숨긴 보배구슬 세존에게 바치니
낮잠 자던 돌호랑이 옥녀를 낳았네.'
122. '도인 한 사람 없구나'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8백명이나 있어도 도인은 한사람도 찾기 힘들다.”
조주선사가 머물던 관음원에 수행자가 8백명이나 되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주를 거쳐 지나간 납자들의 숫자인지. 그런데 이 많은 수행자 중에서 도(道)를 튼 사람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왜 그럴까요? 옛날엔 그렇다 치더라도 온갖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정보의 홍수를 이루는 현 21세기에는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바른 마음공부 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간화선, 염불선 외에 여러가지 실험도 필요하고요. 다양한 방법을 종합하여 최선의 부처 양성도량을 세워야 합니다.
123. '부처도, 사람도 없는 곳'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도 없고(無佛) 사람도 없는 곳(無人處)에 수행이 있습니까?”
“그 두 가지를 없앤다 해도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다.”
“도인이 올 때에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수행하지 말라.”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꼼짝없이 그대가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
조주선사는 한때 말하기를,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은 빨리 지나가라'고 했고, 동산양개선사는 여름 안거 후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빨리 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느 누군가는'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으로 가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 스님은 어디선가 이 말을 듣고 '부처도 사람도 없는 곳에도 수행이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조주나 동산이 말씀한 장소나 매 한가지인데 쯧쯧.. 이것은 이 세상에 없는 장소에서도 수행이 있는 것입니까? 우주가 생성되기 전이라든지, 말을 떠난 시공간에도 도(道)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 말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그 두 곳이 아니더라도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다.” 부처를 떠나고 사람도 없는 그 곳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라도 수백천만억의 부처가 불공을 올리고 있다 이 말이죠. 화엄경의 연화장엄세계를 그리고 있는 듯 합니다.
“도인이 올 때에는 어디에 계십니까?” 라는 그 수행자의 말은 큰 스님이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다고 하니 불가사의한 수행처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실제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을 떠나서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도인이 오고 감이 어디에 있기에 도인이 올 때니, 어디에 계시니 하고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조주선사는 '그렇다면 너는 수행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가르쳐 줘도 부처도 사람도 없다는 뜻도 모르고 그 따위 질문이나 하는 걸 보니 그대는 아무리 수행하더라도 깨닫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조주에게 절을 했는데, 무슨 깨달음이 있어서 절을 올린 것은 아니겠지요? 조주는 “꼼짝없이 그대가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대가 그렇게 수행해 가지고는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이니 다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라는 경고이며, 이 소리에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여러분 마음자리이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바로 깨어나십시오.
[출처] 조주록 강해 27(119-123)|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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