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信心이라. 믿는 마음인데, 이 신심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설명說한 것이 유식唯識인데,
유식이라고 하는 불교학은 사람 마음의 얼개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사량 思量은 생각이다.
그런데 신심信心이 그 유식학唯識 중에서 선善 십일十一 선심善心이 열한 가지가 있는데,
그 마음 중에는 여덟 가지가 있고, 오십 한 가지가 있는데, 여덟 가지는 왕에 속하고, 오십
한 가지는 그 왕을 따르는 추종자에 속한다.
신심信心이라고 하는 것은 51가지 심소心所중에서 좋은善 마음은 11가지가 있다. 그것을
선심善心이라 하는데, 그 선심善心 중에 첫째 마음이 신심信心이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
중에 제일 첫 번째 해당하는 마음이 신심信心이다.
그러면 믿는 마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 믿음이라는 것을 원효성사元曉聖師의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해석을 보면, “신심信心은 결정심決定心이다.” 결정決定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첫 번째가 승해勝解라고 한다. 승해를 한 마디로 말하면
참을 인忍자다. “참는다” 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혜 지智자의 의미
가 있고, 하나는 편안할 안安자의 의미가 있다.
“참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지혜이고, 편안한 것이다. 그래서 신심을 참을 인忍자 앞에 떡
놓았다. 그러니까 심인深忍, 깊은 참음의 세계라고 한다. 그 심인深忍을 승해勝解 휼륭한
이해, 또는 원효성사는 결정심決定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신심信心이다. 신심은 딱 흔들리지 않는 일심一心, 그래서 신심은 일심이
라고 하고 그리고 부동심不動心인데 이게 그냥 일심一心이 되고, 말로서 부동심不動心이
되는 게 아니다.
“틀림없다!.” “분명하다!.” 하는 훌륭한 이해가 먼저 와야 한다. 그래서 승해勝解라고 한다.
“야! 이것이다.” 이것이 “확실하다.” 이런 이해가 오지 않으면 일심一心이 안 되고 부동심
不動心으로 믿음이 안생기고 결정심決定心이 안 된다.
그래서 확실한 이해도 신심信心이고, 흔들리지 않는 결정심도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신심信心의 내용이다.
두 번째는 낙욕樂慾이라. 신심은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 틀림없다.”이렇
게 결정심이 생기면 낙욕이라.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는데, 이것을 희망希望이라고
한다 낙욕이 바로 희망이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唯識學이다.
그냥 대강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명칭, 정의, 의미, 성격 이런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서 설명
하는 것을 유식학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정심이 딱 들면 즐겁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
을 낙욕樂慾이라 즐겁게 하려고 하는 희망심希望心이 생긴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신심信心이 딱 생겨서 즐겁게 하려고 노력을 하면, 마음속에 복잡하던 생각과
망상에 헤매는 마음이 싹없어져서 깨끗한 마음<淨心>이 된다. 이것을 신심信이라고 한다.
신심信心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결정심決定心』이고 둘째는 즐겁게 하는『낙욕심樂慾心』
이고, 셋째는 청정한 마음 『청정심淸淨心』이다. 이런 신심信心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 신심을 가지고 도道도 닦고, 복福도 닦고, 학문學도 닦고, 세간사世間事도 닦고,
이게 다 닦는다. 그러니 이런 신심信心 하나가 없으면 도대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신심이 이렇게 중요重要하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는데도, 이런 신심信心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신심으로 정진精進을 계속해 나가는 그것이 불자佛子이다. 이런 신심으로 닦고 또 닦
고 이렇게 닦아 나가는 것이 불자이다.
그런데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닦다보면 자기 본래의 모습이나 생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사량思量이다. 신심으로 닦는 것이 불자이지 자기 생각으로 이러쿵저러쿵 해석하고 판단하
고, 정의定義하는 것은 아니다.
신심信心이 곡식이라면, 사량思量은 풀, 잡초이다. 그래서 이 신심을 잘 키우기 위爲해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불상관不相關하면 된다. 사량은 망상妄相이고 분별分別이고, 계교計
巧이고, 의도意圖이고, 속셈이며, 잡념雜念이고 말이 많다. 생각에 따라가면 안 된다.
이것을 한 마디로 번뇌<束縛>라고 한다. 그래서 번뇌망상煩惱妄相, 사량분별思量分別 이런
것이 들어서 신심信心<淨心>을 흐리게 한다 그러니까 도道를 닦는데 가장 장애障碍를 주는
것이 『사량분별思量分別』이다.
이것이 들어오면 그게 마구니가 된다. 그래서 이 신심信心<淨眼>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니
까 정진精進을 해 나가는데 있어 굉장히 지장支障을 준다. 신심은 사량분별, 망상계교計巧
이것을 경계하고, 조복調伏하고, 멀리하라는 것이다.
신심信心의 의미는 이와 같고, 그럼 무엇을 믿는가? 대승기신론起信論에서는 사신四信을
말씀하셨다. 신진여信眞如, 신불信佛, 신법信法, 신승信僧의 네 가지신심信이라고 하였다.
신진여信眞如는 불.법.승과 우주 만물萬과 일체중생의 근본이다. 그래서 진여眞如를 믿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믿는다. 이것이 믿는 대상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결정심決을
가지고 진여眞如와 삼보三寶를 믿는 것이 불교의 신심信心이다.
그러면 삼보三寶<Buddha Dharma Sangha>가 무엇인데, 그 신심 믿음의 대상이 되는가?
첫째,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왜 중요한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탐욕貪慾을 채
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뭐라고 해도 생존활동의 목표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있다.
무슨 소리로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욕사신愚慾捨身이라, 욕망을 위해서 몸을 소모하는
것이다. 허망한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몸을 헌신하는 것이 중생 삶의 본질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이 몸을 소모하는 것이다. 愚 어리석을 우 捨 버릴 사
일생 거창할 것이 없는데 '내가 왜 사는가?'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구하기 위해 산다. 그러다 보면 몸은 점점 늙어 가는 것이고, 죽어 가는데 이게 몸을 버리는
것이다. 오감에 취해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고 더 많이 갈구求하다가 죽는게 인생이다.
이렇게 우욕사신愚慾捨身 탐애취구貪愛取求<3독毒>하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어리석은 욕
망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이 우리 본질이다 뭐라고 해도 이것은 누구나 똑 같다 그러면 우리
부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부처님도 탐욕을 위해 사시다가 돌아 가셨을까?
아니다!. 부처님은 바로 해탈解脫!, 해탈을 위해 사신 분이다. 부처님은 탐욕이 아니고 해탈
이다. 해탈은 무엇인가? 해탈은 열반<寂滅>인데, 열반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사 없는 자기
본래의 세계를 얻으셨다.
생사 없는 자기 본래의 세계로 돌아 가셨다.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하고 이것을 열반寂滅이
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사生死없는 자기 본래의 세계로 돌아 가셨는데, 어떤 방법
으로 돌아갔는가?
돌아가신 방법이 딱 하나다. 여러 가지가 없다. 그게 무엇인가? 욕망貪慾을 충족充足시키
는 방법이 아니라~ 탐욕을 정화淨化하는 방법이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
중생도 부처님도 다 탐욕을 가지고 태어났다.
탐욕貪慾을 조상들이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 탐욕慾을 하나 충족足시키고, 둘 충족시키고,
셋을 충족시켜 가면서 어느덧 인생 늙어가고 죽음이 온다. 그러나 이루고자 하는 욕망望은
아직 멀었는데, 몸은 먼저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恨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태산泰山같이 밀려있는데 몸은 벌써 죽는다. 이게 어쩐 일인가?
그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원통冤痛하다고 우는 것이다. 또 그 다음이 반복輪轉 된다.
억만년 세월이 지나고 몸이 바뀌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탐욕은 끝
나지 않았는데 몸은 가고, 욕망은 남아 있는데, 몸은 가고, 이렇게 끝임 없이 윤회輪回하고,
끝없는 고뇌苦惱가 이어지는 것이 중생의 살림살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삶의 이치를 보신 것이다. 욕망慾을 충족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탐욕貪을 정화淨化시켜 버리자. 이 탐욕 하나를 정화淨하면 탐욕으로 부터 일
어나는 속박束縛과 고통苦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본래本來面目의 나我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것을 열반Nirvana이라고 하고 번뇌의 소멸寂滅 진여眞如라고 한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욕망은 똑 같이 있는데, 이것을 충족시키려 들면 충족도 안되고 고통苦만 따르는데, 부처님
은 어리석은 욕구를 소멸滅시키고, 말끔히 정화시켜서 모든 탐욕의 속박束縛으로부터 벗어
날 뿐만 아니라 자기自己 본래의 자성을 만나서 그 지혜를 얻으셨다.
탐욕의 정화淨化로 말미암아 지혜가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욕에 젖어 번뇌束縛 속에
살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지혜智慧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위대하신 것이다.
위대偉大한 것에 별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탐욕 하나, 정화淨化 시킨 그것 하나뿐이다.
중생이 왜 고통을 받는가? 탐욕에 끄달려 사니까 거기서 고통苦痛이 오는 것이다. 욕심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화가 나는가? 원인原因은 이것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위대하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과법因果을 딱 말씀하시는 바 일체
고뇌苦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조상이 물려준 것도 아니고,
역사와 사회가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이 마음이 만들고 있다.
자업자득 유심소현
自業自得 唯心所現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유심소현『唯心所現 』은 부처님
아니고는 안 가르친다. 현상계 일체는 오직 이 마음에 나타난 바 인 것이다.《唯心所現》
그러면 그런 부처님만 가지고 되는가? 아니 된다. 여기서 아주 위대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승보僧寶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Pippala아래에서 출현出現
하셨고, 승보는 바라나시Varbnasi 녹야원鹿野園<최초 설법지>에서 출현했다.
그렇게 하여 부처님이 가르침을 펴는 것과 동시에 부처님의 제자弟子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서 승보僧寶가 생겼다. 그 승보는 부처님으로부
터 물려받는 동시에 새로운 역사가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부처님 제자弟子에서부터 제자로 오늘 날까지 유장히 내
려오는데, 그러면 오늘날까지 전傳해지는 부처님 제자들하고 제일먼저 전傳해주신 부처님
하고 어떤 차이差가 있는가? 똑 같은가? 똑 같지 않다!. 그러면 다른가? 다르지 않다!.
이것을 연속체라고 한다. 연속되는 연속성連續性이 있다. 이것을 계속 이어가면 상속성相
續性이라고 한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상속相해서 이어가는 것을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한다. '상승相承'이라는 것은 똑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도 절대 아니다.
그래서 승보僧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짐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법法이 세상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것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것을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먼저 법을 설하신 것은, 제일 먼저 발견하신 불火을 가지고 다른 것에 다시 점화
點火 시키는 것이다. 그게 설법說法이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이면 불씨가 옮겨 붙은 것
인데, 점화點火가 되어도 깊게 깨닫지 못하면 사라져 버린다.
깊게 깨달아야 생명력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발화發火라고 한다. 불씨하나가 온 산천을 다
태우는데, 어째서 태울 수가 있는가? 점화가 아무리 일어나도 하나하나의 풀이나 나무에서
새롭게 불이 발화 되지 않으면 타지 않는다.
불꽃이 옮겨 붙으면點火 거기서 다시 불길이 일어난다發火 또 다시 계속 옮겨 붙기를 이어
가서 불길 또 일어나고, 계속 점화 되고 발화 되어서 온 산천山川을 불씨 하나가 다 태우는
것이다.
승보僧寶가 이와 같다. 부처님이 제자弟子한테 설법으로 점화點火 시킨다. 그러면 불꽃이
옮겨 붙는다. 그러나 불씨를 받고도 아무 반응이 없고 신심信心이 안생기고 거기에 깨달음
이 안생기면 발화發火 되지 못하고 사그라져 버린다.
그러나 거기서 불꽃이 일어나면 활활 탄다. 불길을 옮겨 주면 또 탄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
다 점화 하고 돌맹이나 흙 같은 곳에는 아무리 불을 붙여도 발화發火되지 않으니까 사그라
져 버린다.
그러면 부처님의 십대제자 < ①지혜제일 사리불 ②신통제일 목건련 ③수행제일 마하가섭
④해공제일 수보리 ⑤설법제일 부루나 ⑥천안제일 아니루다 ⑦논의제일 가전련 ⑧지계제
우바리 ⑨밀행密行제일 라후라[아들] ⑩다문多聞제일 아난다[종제]>라든지,
용수龍樹 ·마명馬鳴 ·무착無着 ·세친世親 같은 제자라든지, 또한 달마達磨 ·혜능慧能같은
고승들이 부처님의 불씨를 온전히 이어받아 자기에게서 새로이 발화 되어 활활 타올라서
물려주었기 때문에 승보僧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하고 똑같지도 않으면서 부처님하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연
속성連續性이고 부처님의 상속성相續性이라고 한다. 이래서 신심信心은 점화點火와 같고,
발심發心은 발화發火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심이 되어야 정말로 부처님의 법을 참으로 펼 수 있는 보살菩薩이고 도인道人
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심信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신심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불.법.승 삼보三寶가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처님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진여眞如이다. 중생의 근본 또한 진여眞如이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 제 80권, 입법계품立法界品, 대정장10, 444 제일 마지막 부분에 어떤
말이 있는가 하면, 허공虛空,진여眞如,실제實際,열반涅槃,법성法性,적멸寂滅 이런 것이 있
기 때문에 볼 수 있다.
유유여시진실법 가이현시어여래
唯有如是眞實法 可以顯示於如來
오직 이 같은 진실법이 있어서
여래를 나타내 보일 수가 있다. -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은 누구인가?『적멸寂滅』 부처님은 생멸이 없는 적멸이다. 또『법성法性』
만법의 본성本性. 또는 열반涅槃,실제實際,진여眞如,허공虛空 이런 법法으로만 부처님을
보일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허공虛空Space과 같다. 부처님은 억만겁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변하
지 않는 그것, 본래 그 진실상眞實相하고 같다고 해서 진여眞如이다. 진실상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하여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인해 부처님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다. 이것이 화엄경에 있는 게송偈頌이다.
화엄경 제 1권, <世主妙嚴品/ 世間淨眼品> 제일 첫 번째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시세존처우차좌 어일체법성최정각 지입삼세실개평등 기신충만일절세간
爾時世尊處于此座 於一切法成最正覺 智入三世悉皆平等 其身充滿一切世間
*그때 세존께서 사자좌獅子座에 머물러서 /일체법에 최상의 휼륭한 정각을 이루시니/
지혜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들어가서 다 평등하고/ 그 몸은 일체 세간에 충만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지혜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는 세계' 이것이
부처님이 도달한 세계이고, 깨달은 세계世界이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시간이 없는 세계, 지입삼세智入三世, 지혜가 과거過, 현재現, 미래未, 삼세에 들어갔다.
생각에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삼세三世가 있는데 지혜智慧에는 삼세가 없다.
그래서 평등平等하다.
그리고 기신충만일체세간<其身充滿一切世間>부처님의 몸은 일체 세간에 충만滿했다.
공간이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이다. 이것이 법성法性이고! 진여眞如이고!
적멸寂滅이다!
이런 세계를 하나 턱 얻어 놓으면, 이것이 불자佛子가 돌아가야 할 最上의 목표標이다.
생사生死가 없는 해탈, 시간과 생멸이 없는 진여眞如 적멸寂滅 열반nirvana, 법성法性,
실제實際 자성自性 허공虛空의 마음자리인데, 이 자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불지혜佛智
慧-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안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탐욕<貪愛取求>, 번뇌망상으로 가려서
그렇다. 자기 생각에 따라가는 바람에 도道와는 점점 멀어진다.<取於相 動心>
그래서 이것을 얻는 방법은 욕망을 채우데 있는것이 아니라 욕망慾望을 소멸燒滅시키
고, 정화淨化시키는 방법에서 얻어진다. 이것이 참 묘<杳>하다. 이런 것을 경상도 말로
는 “디비쫀다”라고 한다. 구하는 데서는 만족이 없고 깨달을 때에 만족이 온다.
“디비”는 ‘뒤집다’ 라고 하고, “쫀다”는 ‘애쓴다’ 고 한다. 따라서 뒤집어서 애쓰는 것이
“디비쫀다”는 말이다. 중생衆生들은 욕망慾은 채워야 되는 줄로 아는데, 욕망을 정화
淨시켜야 되는 줄은 까맣게 모른다.
그래서 공부하는 중에도 욕망을 충족하는 쪽으로 자꾸 유혹誘惑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마구니라고 한다.<動卽魔音> 이 공부를 하는데도 욕망慾望 소멸消滅 쪽으로 가는 것은
정진精進인데, 욕망을 채우려들면 마구니라고 한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가 보면 욕망이 자꾸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것을 완전히 항복
시키는 것이 항마성도降魔成道 마구니를 항복降伏시키고 성도成道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욕망慾의 충족充足이냐? 욕망의 정화淨化냐? 욕망을 정화 했을 때에, 이런 본래
의 모습 <本地風光>을 볼 수가 있지,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가면 눈<淨眼>을 점점 가리
기 때문에 만족의 끝이 없다. 안 된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智慧는 허공虛空과 같다. 허공space이 시작이 있나? 끝이 있나?
보이는 것이 있나? 보이는 것이 없나? 일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허공虛空이다.
<眞心息妄> - 妄覺俱忘 名曰無心, 心中無物 名曰無心, 如言空甁 甁中無物 非甁體無
불지광대여허공 보변일체중생심
佛智廣大如虛空 普遍一切衆生心
불지가 넓고 큼은 허공과 같다.
모든 중생들 마음에 두루하다.
이런 법dharma을 믿고, 잘 닦으면 그게 공덕功德인데, 이 신심信心으로 공덕을 잘 닦으면
되는데, 중생이 가다가 또 욕망이 일어나고, 또 가다가 욕망慾望이 일어난다. 이것을 번뇌
束縛라고 한다.
번뇌煩惱는 무엇인가? 욕망이다. 욕망이 바로 속박인데 이걸 모르고 욕망을 채우려고 드니
내 몸은 상傷하고 결과는 허탈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다 조상들이 욕망으로 고통 받고
욕망으로 죽어간 것이 우리 조상祖上이다.
우리는 그 조상祖上을 물려받았으니까. 우리도 똑 같다. 그러니까 눈 밝은 이가 비춰 볼 때
일생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분주히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妄한 일인가?
실요세간제망상 불기종종이분별
悉了世間諸妄想 不起種種異分別
세간의 여러 망상을 다 깨닫고 나면
가지가지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네.
그래서 서산西山스님께서 임종게臨終偈頌를 하나 떡 지으시고 돌아가셨는데,
청허당집淸虛堂集- 休靜1520~1604제 4권본 권 1에 그 임종게가 다음과 같다.
천사만사량 홍로일점설
千思萬思量 紅爐一點雪
천 번 만 번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은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 눈이라.
홍로紅爐라고 하는 것은 쇳물이 끓는 용광로鎔鑛爐처럼 활활 타오르는 화로火爐를 말한다.
일점설一點雪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눈 한 점 딱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생각이
라고 하는 것이 그 모양이다.
그렇게 허망虛妄한 것이 우리 생각인데, 인생백년사 그 생각을 붙들고 끄달려 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보니까.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보이셨다.
니우수상생 대지허공렬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裂 찢을 렬
진흙소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대지와 허공이 다 없어진다.
진흙소가 물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한 순간에 진흙이 흐무러져 없어져버린다.
이런 것이다. 욕망慾望의 끝자락이 이런 것이다. 생각의 종말終末이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중생의 생각이 그냥 인연 따라서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법문法門을 하셨다. 그래서 절에서 어릴 때부터 쭉 하신 법문을 가만히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젊을 때 들을 때는 그 법문이 그렇게 중요한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중요하다.
사량분별思量分別하여 스스로 판단내지 말고 아주 일심정성一心精誠으로 잘 들으세요.
이것이 자기 깨달음覺에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항상 간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경계戒하고 신심信心으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문法門의 골자는 천 분, 만
분이 해도 이와 같다. <入此門來莫存知解>
“신심信心으로 공덕을 닦고 자기自己 생각<我相>으로는 판단하지 말아라!.”
“사량분별思量分別하지 마라!”라고 하는 것이다. 날마다 법문이 다 그렇다.
불취어상 여여부동 응무소주 이생기심 휴거게거 방하착 부동심 무념심 진공묘유
不取於相 如如不動 應無所住 而生其心 休去憩去 放下着 不動心 無念心 眞空妙有
망심무처즉보리 진심식망 사승마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妄心無處卽菩提 眞心息妄 蛇繩麻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 사량분별思量分別하지 말고 신심信心으로 닦아라!
또 법문法門을 잘 들어야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 思量分別》 이것이 참으로
무섭다. 어릴 때부터 듣던 법문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제일 많이 듣는 것이 무문관無門關
<無門慧開-集>라고 하는공안집 제 2칙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라는 법문이 있다.
거기에 중요한 화두話頭 48 가지를 정리해 놓았다. 그곳에 두 번째 나오는 화두話頭인데,
백장百丈스님이 법문을 하시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다 돌아가고 없는데, 어떤 노인이
혼자 오래도록 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노인은 왜 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여우다.
나는 옛날 세상부터 여기에서 그 당시 호號가 백장百丈으로 설법說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대수행인大修行人<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크게 수행한 사람도 나쁜 짓을 하면 죄罪를 받고 좋은 행을 하면 복福을 받는 인과응보
因果應報에 떨어지는가? 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대답하기를 '인과에 안 떨어진다<不落因果>'고 하였다. 그 한 마디
대답을 하고 여우의 몸을 오백생五百 동안 지금까지 받았다.”고 하였다.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자기 생각대로 부처님의 법法을 전한다면 큰일 난다”는 소리도 여기 있다.
말 한 마디 딱 하고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후 노인이 말
하기를“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말을 잘못해서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까?”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백장百丈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것을 나에게 다시 물어라”
하였다. 그래서 노인이 다시 물었다. “대수행인修도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백장스님이 말하기를,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
그 말 한마디 탁 듣고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첫 번째 경계警戒는 “부처님의 법法을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큰일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수행인은 인과응보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말 한 마디 했
다가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후 백장百丈은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했는데,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글자 한 자字가 차이가 나서 그렇게 되었을
까?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큰일 난다.
그러면 도인道人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
因果거나 마찬가지다. 이것도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여기 생각을 붙이면 다 소용없다.
그런데 그 당시 백장百丈스님이 그 여우를 화장火葬을 다해 마치고 저녁에 법문을 해서
그런 내역을 쭉 이야기하니까. 백장百丈懷海선사 로부터 인가를 받은 상수首제자 황벽
선사黃檗希運가 있었는데, 황벽이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 그렇다면 고인古人이 말 한 마디 잘못하고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면
질문할 때 전부 옳게 말한 선지식善知識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게 법法이다.
“누가 질문을 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옳게 말한 그 도인道人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생각을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
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백장이 황벽을 보고 말하기를, “이리 가까이 앞으로 오라 너에게 말해주리라.”
그러자 황벽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 왔다. 와서는 백장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황벽
이 먼저 손바닥을 들어서 자기 스승인 백장스님을 몸에 닿도록 쳤느냐? 손바닥만 탁 때리
는 시늉만 했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사일장與師一掌이라. 손바닥을 들어서 하나 탁 해서 주었다고 한다. 빰을 쳤든지 아니
면, 차마 빰은 안 쳤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어찌되건 황벽이 먼저 손바닥을 낸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법法으로 보면 백장百丈懷海스님이 맞을 짓을 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곳에는 생각이 붙을 수 없는 자리라고 설한다.
“왜, 맞았는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맞았다.” 그것은 소용없는 소리다. 그러니까.
그때 백장百丈은 손뼉을 마주 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師拍手笑云>
장위호수적 경유적수호
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鬚 수염 수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고 여겼는데,
여기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무문관 제 2칙>
이게 백장스님 법문法門이다.
황벽黃檗이 손바닥을 한 대 치니까. 그때 백장百丈이 박수를 치면서 "오랑캐 수염이 붉은
줄 알았는데,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을
쉬운 말로 다시 바꾸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너도 알고 있구나.” 이 소리다.
이런 제자가 어디 있겠나? “법法 나 혼자 아는 줄 알았는데, 너도 아는 구나.”라는 소리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삼보三寶가 오늘 날까지 전傳해진 것이다. 그래서 백장이 그런 황벽
같은 제자가 나타났으면 그 법이 황벽에게서 스스로 발화發火 된 것이다. 그래서 황벽의
제자가 또 발심을 해서 도道를 이루면 거기서 또, 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삼보三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지는 것이지,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법法이 연속체로서 지금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
는 참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런 불가사의가 없고 그 신비롭기가 그렇게 신비神祕로운 수
가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법과 다를 바 없는 법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똑 같은가? 똑같지도 않지만 다른가? 같지도 다르지도 않는 법이 계속 삼보三寶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佛敎이다.
그래서 거기에 왜 여우의 몸을 받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가? 이게 화두話頭이다. 매昧자字
를 써서 해탈을 했고<不昧因果> 낙落자字를 써서 인과를 받았다고<不落因果> 하는 그런
생각은 억만년 해보아도 소용없다.
이게 바로 말없는 세계로 바로 인도引導하는 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잘못 말을 하면 이렇게 여우野狐의 몸을 받기도 하고 잘못 말하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야호野狐-두 발 달린 여우, 간사한 사람
또 하나 어릴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어느 절에 날이면 날마다 제비
가 울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래서 제비 때문에 대중들이 시끄러
워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큰 스님한테 가서 여쭈어 보았다.
“제비가 왜 저렇게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게 웁니까?”
“그게 다 사연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옛날에 이 절에서 불교를 잘 가르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부처님법 중에 하나를 잘못 말
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 크게 참회를 하고 그 잘못 가르친 법을 참회하기 위해서 일부러
제비의 몸을 받아 가지고 대중들에게 저렇게 깨우침을 주고 있노라.”
“그러면 왜, ‘지지배배’, ‘지지배배’ 합니까?”
“그게 아니라, 공자孔子 논어의 위정편 제 2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知謂知之 不知謂不知 是知也
『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
그러니까. 제비가 이것을 대중들에게 계속 깨우치는 것이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아는 것이다' 지위지지, 불지위부지, 시지야 이 구절을 소리대로
읽으면 마치 지지배배 하고 조잘대는 제비의 소리와 비슷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제비燕가 날마다 ‘지위지지知謂知之,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시지야是知也’ 이렇게
읽고 있는데, 사람이 들을 때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소리 밖에는 안 들리는 것이다. 한 번 해
보세요. 그런데 큰 스님이 이것을 턱 설명을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비도 참 대단하다.
대중을 위해 일부러 제비의 몸을 받아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아는 것이다.” 참 대단한 것이다. 이게 법문法門이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판단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이게 제비가 우는 사연이다.
제비가 그런 사연이 있어서 울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량思量』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생각하지 말고 오직 믿고 실천<實踐行>하는 것, 그게 불자의 정진精進이다.
생각하면 벌써 틀린다.<動卽魔音> 통도사通度寺 극락암極樂庵 바로 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한 번은 경봉鏡峰靖錫 노스님이 어디를 가시다가 일부러 연못을 쳐다보면서 말씀하셨다.
“저 연못蓮池을 보면 저 멀리 있는 산이 보인다.” 그래서 영지影池라고 한다.
정말 산이 훤하게 비쳤다. 그러나 어릴 때는 어째서 ‘산이 보인다’고 했는지 몰랐다.
산山은 나도 보는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나 몰랐다. 여기에 깊은 법문法門이 있다.
무슨 법문法門인가? 분명히 물속에 산이 보이는데, 산이 물속에 왔나요? 안 왔지요? 그럼
어째서 산[象]이 보일까요? 물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물이 없는 다른 곳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깊은 법문法門이 있다! <千江有水千江月 ↔ 月印千江 >
비유경譬喩經에 보면, 인도印度에 두 내외가 있었는데, 하루는 큰 독에다가 술을 담갔다.
술이 다 익어갈 때쯤 할머니가 가서 술독을 들여 보니까 어떤 할머니가 있었다. 그래서 할
머니는 할아버지한테 “어떤 할머니를 술독에 숨겼어요?” 그냥 온갖 푸념을 다했다.
이상해서 할아버지가 다시 가서 보니까. 거기에 또 할아버지가 거기 숨어 있었다. 또 이럴
수가 있나? 그냥 두 내외가 싸움을 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할머니, 어떤 할아버지
가 숨겨져 있는지, 한 번 보자고 술독의 술을 다 퍼냈는데도 없었다.
그러면, 왜 없는데 보였을까요? 그것은 물 때문에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해인
삼매海印三昧라고 한다. 해인삼매가 우리 마음[心]인데, 이 우리마음 안에 몸[身]이라고
하는 그림자[影]가 턱 보이고, 저 산山이라고 하는 그림자影가 보인다.
그러니까. 중생세간衆生世間, 기세간器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이 깨달음覺이라고
하는 것이 다 보인다. 이것이 해인삼매海印三昧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이 몸은 우리 마음에 비친 그림자이고, 저 국토도 마음에 비친 그림자
이고, 온갖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이 깨달음의 세간도 다 마음 <靈鑑> 에 비친 그림자라
다 일체가 다 해인삼매海印三昧 뿐이다. 바로 이 도리道理다.
그래서 모두가 다 우리 지혜의 그림자[影]다. 이것을 설명한 것이 " 해인삼매海印三昧" 다.
『해인海印』이라고 하는 말은 바다에 비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다는 무엇인가? 바다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까맣게 모른다. 海 바다해 印 도장인
그래서 이런 것을 믿고, 그럼 왜 안 보이는가? 탐욕의 그림자가 꽉 차서 못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믿고, 공덕을 닦으면 그런 번뇌煩惱가 다 밝아져서 환하게 보이게 되는데
그것을 정각正覺이라고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비유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이 혼자 지나가다 보니까.
그림자가 따라왔다. 그래서 그림자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쉬~쉬~ 말하지 마라.”
“무엇이냐?”
“내가 너한테서 생겼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력영자하처래
歷歷影子何處來
지지아시종여생
止止我是從汝生
역력한 그림자야! 어디서 왔느냐?
쉬! 쉬!~ 나는 너에게서 생겨났다.
역력영자歷歷影子, 분명하고 또렷한 그림자야!
하처래何處來, 대관절 어느 곳에서 왔느냐?
지지止止, 쉬잇! 쉬잇! 망상을 그치라
아시종여생我是從汝生 나는 너로 말미암아 나느니.
성불하십시오.
[출처] 진여眞如에 이르는 문 - 종범 스님|작성자 cjs17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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