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와 반야바라밀 수행
참회는 돌이키는 것, 돌아보는 것,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 무엇을 참회하는가? 우리 중생이 자기도 모르게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음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는데, 하나는 어리석을 치, 어두울 암, 치암(痴暗)이라고 한다. 치암(痴暗)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게 되면, 보아도 못본다. 깜깜하게 모른다.
한 밤중에 어디 들어가 있으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른다. 어리석음이 그와 같다. 그래서 치암(痴暗),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리석은 것이 아무문제도 없다면 그것을 걱정할 것도 없는데, 어리석게 되면 보지를 못한다. 듣지 못한다. 느끼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어둡다고 한다.
두 번째는 치혹이라고 한다. 미혹할 혹(惑), 어리석게 되면 잘못 보게 된다. 괴로움을 즐거운 것으로 보고,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보고, 허망한 것인데, 진실한 것으로 보고, 이렇게 잘못 보게 된다.
이런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몸으로 죄를 짓고, 말로 죄를 짓고, 생각으로 죄를 짓고 그렇다. 그런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한 평생이여로여전(如露如電)이라.
인생이라는 것이 풀잎의 이슬과 같은 것이 우리 몸이고, 번개불처럼 지나가는 것이 우리 한 평생인데, 악(惡)을 지을 하등(何等)의 까닭이 없다.
인생이 뭐 오래 살아야 오래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한다지만 이 몸 자체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번개불처럼 일생이 금방 끝나는데, 무엇을 위해서 죄를 짓고, 무엇을 위해서 악을 지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탐진치에 의해서 죄를 자꾸 짓는다. 그래서 그것을 참회한다.
그래서 천수경에 보면, 아석소조죄악업(我昔所造罪惡業), 내가 옛적서부터 지은 모든 악업, 그 다음 개유무시탐진치(皆有無始貪瞋癡), 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그런 탐진치로부터 이루어졌다.
그 탐진치가 그냥 나왔겠나? 탐진치가 나오는 경로가 있다.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이라. 몸, 말,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라. 이것이 삼업참회다.
삼업을 반성하고 삼업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참회다. 삼업이 어리석게 잘못되면 십악이 되는데, 이것을 돌리면 십선이 된다. 그래서 일체불보살이 십선을 닦지 않는 불보살은 없다.
또 일체범부가 십악을 범하지 않는 범부가 없다. 그래서 십악은 범부요, 십선은 불보살이다. 그래서 십악을 돌리면 십선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십악범부, 십선보살, 따라서 십선을 닦으면 보살이다. 십악을 항상 짓고 있으니까. 범부라고 한다.
그러면 십악은 무엇인가? 천수경에 보면, 십악참회에서 참회진언까지 나온다. 십악참회를 한 번 음미해 보면,
십악참회(十惡懺悔)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살생으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도둑질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사음중죄금일참회(邪淫衆罪今日懺悔) 사음으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衆罪今日懺悔) 거짓말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衆罪今日懺悔) 꾸밈말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양설중죄금일참회(兩舌衆罪今日懺悔) 이간질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며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衆罪今日懺悔) 험한말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고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衆罪今日懺悔) 탐욕으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고
진애중죄금일참회(瞋碍衆罪今日懺悔) 성냄으로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고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衆罪今日懺悔) 어리석어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옵니다.
이것이 십악참회인데, 십악이라고 하는 것은 신삼, 구사, 의삼이라고 이야기 한다.
신(身)이 이게 삼업(三業)인데, 살도음(殺盜淫), 살생, 투도, 사음 이렇게 나온다. 구(口)가 네 가지 사업(四業)인데, 망어(妄語), 기어, 양설, 악구, 우리가 입만 벌렸다고 하면 이 네 가지 말이다.
입만 벌리면 네 가지다. 기어, 듣기만 좋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事業)을 하려고 하면 기어가 발달을 한다. 듣기 좋게 해야지, 진실을 말하면 않된다. 물건을 설명할 때, “이 물건의 않좋은 면도 있습니다” 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면 구매하지 않는다. 않 좋은 점은 빼고 좋은 것만 말한다.
망어,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참 문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양설, 서로가 말이 틀리는 것이다. 혀는 하나인데, 말은 둘이다. 그래서 혀 설(舌)자다. 말씀 설(說)자가 아니고, 혀 설(舌)자다.
저 쪽에서 움직이는 혀하고, 이쪽에서 움직이는 혀하고, (異)달라. 그것이 중생이다. 십악중생이다. 또 악구, 아주 좋지 않게 말하는 것, 생각으로 탐진치, 그냥 욕심을 낸다. 왜 욕심을 내는가? 미혹해서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은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데, 눈으로 딱 보고, 귀로 딱 듣는 순간에 그것을 잊어 버린다.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딱 잊어 버린다. 그래서 욕심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색(色)이 공(空)함을 모르는 것이 큰 문제다. 그것이 미혹이다.
무명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어리석음 이라고 하는가? 색(色)이 공(空)함을 모르는 것,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인생이 무상한 것임을 모르는 것,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가? 색(色)이 공(空)함을 깨닫는 것이다. 색(色)이 무엇인가? 무엇이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색이다. 그래서 색을 잊어 버려서 어리석게 된다.
그래서 자꾸 욕심이 나니까. 모든 것은 욕심대로 않된다. 그러니까. 자꾸 화가 나고, 탐진치로 인하여 십악 속에서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악을 짓는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위손(違損), 어길 위, 손해 볼 손, 나에게도 좋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한테도 좋지 않게 해서 서로 손실이 간다. 나도 괴롭게 하고 다른 이도 괴롭게 해서 서로 않좋다고 한다.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서 오복육극(五福六極)이 있는데,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도 한다. 그 중에 악이 하나 있다. 육극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않좋은 것인데, 그 육극에서 악이 나왔다. 그 다섯 번째에 있다.
육극에서 악은 무엇인가? 강함이 지나치면 악이 된다고 하였다. 악은 꼭 강한 사람이 짓는다. 강이 지나치면 악이 된다.
그래서 지혜를 쌓으려면, 외유내강(外柔內剛),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 강해야 된다. 군자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강해서 쉬지 않는 것, 그것이 지혜이고, 덕인데, 자강을 하지 않고 외강(外强)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한다. 그러면 악이 된다.
예를 들어 선생이 학생이 약하다고 학생에게 강해 버리면 악이 된다. 힘이 있다고 해서 힘없는 사람에게 강해 버리면 그것이 악이 된다. 그래서 강이 지나친 것이 악이다. 강하다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강을 보이면 않된다.
자본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다. 자본이 많으면 자본이 약한 것에 강해 버린다. 그게 독점이다. 그러면 약(弱), 약한 것은 무엇인가? 약도 않좋은 것이다. 약이라고 하는 것은 부드러운 것이 지나치면 약이 된다. 부드러운 것이 지나치면 약이 된다.
부드러움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약해져 버린다. 그것은 않좋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고, 화목하게 대하고, 서로가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자기 목표, 자기 중심, 자기 윤리는 전혀 없거나 미약하고, 하자는 데로 세상 흘러가는 데로 이 사람한테도 끌러가고, 저 사람한테도 끌려가고,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강이 과하면 악이 되고 부드러움이 과하면 약이 된다. 악하고 강한 것은 못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범하는 것이 범부다. 그래서 십악범부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다 참회하는 것, 삼업을 참회하는 것이다. 신구의 삼업을 참회하면 십선이 된다. 십선을 닦지 않고는 복도 못받고 성불 못한다. 십악 속에 살아 가지고서야 어떻게 복이 되며, 어떻게 성불하겠습니까.
그래서 십악참회를 항상 하는 것이다. 이 십악참회는 형상이 나타난 상태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형상을 나타내서 참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말을 자꾸해서 구업을 지었기 때문에 역시 큰소리로 외우고, 또 몸을 움직여서 지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여서 절을 하는데, 이것을 유상참회(有相懺悔), 행동으로 참회한다. 형상이 있는 참회다.
십악참회는 모두가 그것은 나타난 악이니까. 참회를 할 때도 의식을 갖추어서, 형상을 갖추어서 하는 그것이 진실한 십악참회 수행법이다.
그런데 이 십악참회보다 더 깊은 참회가 있는데, 실상 참회(實相懺悔)'라고 한다.
또, 십악참회보다 더 깊은 참회를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라고 한다. 육정(六情)은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六根), 여섯 가지다. 이 육근에 좋고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육정(六情)이라고 한다. 지도론에서도 육정(六情)이라고 하고, 각 기록에 보면 의지하여 육식(六識)이라고도 많이 하는데, 육정(六情)이라고 한다.
육식(六識)이나 육정(六情)이나 같은 말인데, 눈으로는 형상을 보면서 좋고 나쁜 감정이 생긴다. 귀로는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 나쁘다는 감정이 생긴다. 이렇게 좋고 나쁜 분별심을 일으켜 바깥의 색, 성, 향, 미, 촉, 법, 육경(六境)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육정이라고 한다.
이 육정(六情)에 의해서 육진(六塵), 색, 성, 향, 미, 촉, 법을 대상화해서 자꾸 애증심(愛憎心),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 육정(六情)과 육진(六塵)으로 온갖 번뇌가 일어나니까. 이런 것을 근본적으로 참회하는 것이 실상으로 돌아가는 참회라고해서 실상참회(實相懺悔)라고 한다.
그 안, 이, 비, 설, 신, 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일어나는 어리석은 감정을 근본적으로 참회한다고 해서 육정(六情)참회라고도 하고 이것은 깊은 사유를 해야 가능한 참회다. 그래서 사유참회(思維懺悔)라고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해서 귀명참회(歸命懺悔)라고도 한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라고 하듯이 목숨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다. 목숨 명(命)자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참회, 귀명참회라고 한다.
그러면 귀명참회(歸命懺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 번째 참회는 부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참회다.
두 번째는 육정(六情), 안, 이, 비, 설, 신, 의를 실상(實相)으로 돌리면 지금까지 한량없이 지은 죄가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가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라. 백겁 동안 지은 죄가 일찰나에 다 없어진다.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그 성냥 불 하나를 켜면 마른 풀은 그냥 사라진다. 이것이 실상참회(實相懺悔)다.
지금까지 죄 지은 것을 전부 계산해보면 엄청나게 많은데, 이것은 실상(實相)을 보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음이다. 또 햇빛이 없는 어두움과 같다.
그래서 이 마음으로 죄가 없고, 어두움이 없는 실상(實相)의 세계, 불보살이 깨달아서 얻은 그런 세계를 사유하고 그 쪽으로 돌아가고, 그 세계를 관조하면 지금까지 지은 죄업이 그냥 없어져 버린다.
이것이 사유참회(思維懺悔)고, 이것이 실상참회(實相懺悔)고, 이것이 육정참회(六情懺悔)다.
지금 이 내용은 원효선사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고 하는 글이 있는데, 기가 막힌 저술이다. 보통 중요한 저술이 아니다. 그 실상으로 마음을 탁 돌리면, 한량없는 죄없이 다 녹아진다. 그게 실상참회(實相懺悔)다.
그래서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는 어떻게 설명을 했는가? 하면, 큰 나무가 있는데, 나무를 다 태워도 않타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 않탈까? 않타는 것없이, 다탄다. 그런데 무엇만 않타는가? 허공만 않탄다.
무엇이든지 타지만 허공은 않탄다. 그러니까 이 실상참회(實相懺悔)를 하면, 다른 죄업은 다 녹아지는데, 그 실상(實相)을 관조하는 지혜는 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실상참회(實相懺悔)다.
그런데 그런 실상(實相)을 관조하지 않고, 실상참회(實相懺悔)를 하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죄를 짓고 되는대로 욕심을 내고 되는대로 업을 지으면, 그냥 온갖 죄악을 다 받아서 지옥고를 한량없이 받는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중요한 말씀이 있다.
유여허공 불위화소(猶如虛空 不爲火燒),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많이 짓고 참회를 하지 않고, 실상을 보지 않으면 한량없는 지옥에 떨어져 못나온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설명을 했는가? 하면, 유여환호 환탄환사(猶如幻虎 還呑幻師), 마치 요술로 만든 환상의 호랑이가 도리어 요술쟁이(幻師), 마술사를 삼켜버림과 같다.
유여(猶如), 같다. 환호(幻虎), 꼭두각시, 마술로 만든 호랑이 그런데 도리어 꼭두각시, 마술 호랑이가 그 마술사를 삼켜 버렸다고 하였다.
이해를 잘하면 좋은데, 이해를 잘 못하고 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내가 지옥고를 받는 것은 내가 마술로 호랑이를 만들어 가지고 내가 만들어 놓은 호랑이에게 내가 잡혀 먹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내 마술로 내가 만들어 놓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 것이다.
내가 마술사라고 했을 때, 내 업이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어리석은 것이다. 내가 업을 지으면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자기 업이 자기를 죽이는 줄을 잘 모른다. 그러니까. 실상참회(實相懺悔)를 해야한다. 내 어리석음이 나를 죽인다.
참회는 깊은 사유로 참회를 하면, 업은 다 사라지는데, 나의 지혜는 않사라진다. 그것은 불로 물질을 다 태우면 물질은 다 타는데, 허공은 않타는 것이 마치 에너지 질량 불변의 법칙과 같다.
그런데 참회를 하지 않고, 그냥 업에만 빠져서 살면 자기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호랑이한테, 자기가 잡혀 먹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전부 내가 만들어 놓은 업에게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악업을 지으면 그 악업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그것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절대 괴롭히지 못한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 업이 무몰식(無沒識)이라고 없어지지 않는 아뢰야식이 있는데, 거기에 다 쌓인다.
그 아뢰야식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나를 자꾸 끌고 간다. 무몰식(無沒識), 않없어진다. 내가 무슨 업을 지으면 무몰식(無沒識), 저장이 되어서 않없어진다. 그게 염라대왕(閻魔大王)이다.
무몰식(無沒識), 그것이 염라대왕(閻魔大王)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업을 지은 그것을 실상참회(實相懺悔)로 탁 관조를 하면,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중생이 실상의 세계로 돌아가는데,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탁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꿈을 없어지고, “꿈이라고 하는 것이 업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꿈은 없어지고 지혜, 본래 자기 자신이 확 드러난다. 그것이 꿈이다.
꿈에서 깬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몽경(夢境), 꿈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몽세계가 사라지는 동시에 어떻게 되는가? 자기 본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본세계가 드러났을 때, 몽경(夢境), 몽세계가 꿈인 줄 안다. 꿈을 꾸는 순간에는 그 꿈밖에 모른다. 그 꿈에서 깼을 때 그 꿈은 사라지고 자기 본래의 세계를 찾게 된다.
자기 본래의 세계가 어디인가? 자기 잠자리에 딱 누워있던 바로 그 세계다. 그런데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자기가 편안한 잠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가? 그게 꿈이다.
우리가 본래 실상의 자리에 있는데, 그 실상의 자리를 모르고 꿈처럼 자꾸 십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중생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자꾸 닦는 게 역시 실상참회(實相懺悔)고 그것이 반야바라밀 수행이다.
반야바라밀, 지혜를 닦는다. 그래서 악을 짓지 않고 지혜를 닦을 때, 그것이 참으로 그 실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해탈의 길이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인가? 아주 간단하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장애(無障碍),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 그것이 바라밀이다.
도피안(到彼岸)이다. 피안에 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피안은 장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은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다. 걸림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수도거성(水到渠成), 물이 이르면 그것이 바로 바다에 이르러 물길(도랑)이 생긴다. 둥근 것은 둥근 곳으로 가고 각진 것은 각진 곳으로 가고 낮은 곳은 낮은 곳으로 가지 물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오지는 않는다.
지혜가 있으면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다. 물이 물길을 따라 가듯이 물이 가고 나면 물길이 나듯이 물이 가면 물길이지, 길을 내고 나서 물이 가지는 않는다. 지혜라는 것이 그렇다.
그것을 진쾌활(眞快活), 참으로 쾌활한 것이라고 하고, 무장애(到彼岸)다. 그리고 진안락(眞安樂), 참으로 안락한 것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안락과 이런 쾌활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전부 쾌락(快樂)을 쫓는다. 그러나 이 쾌락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음식이 좋으면 아주 즐거운 것이고, 그것이 쾌락이다.
옷이 따뜻하면 그것이 쾌락이고, 즐거운 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쾌락인데, 음식도 없어질 수가 있고, 옷도 나빠질 수가 있고 사람도 있다가 않보일 수가 있고, 쾌락을 쫓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쾌활(眞快活), 진안락(眞安樂), 참다운 쾌활, 쾌활이라고 하는 것은 물처럼 가는 것이 길이다. 마음이 아무런 장애가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즐거움, 그것이 안락이다.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 몸을 막 좋게 만드는 것, 그것은 안락이 아니다. 그것은 오락(娛樂)이고, 쾌락(快樂)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락(娛樂)과 쾌락(快樂)을 쫓다가 거기서부터 근심이 오게 된다. 그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안락(安樂), 마음으로부터 편안해서 즐거운 것, 그것을 안락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은 그냥 놓아두고 몸에다가 온갖 자극을 주어서 즐거움을 느끼니까. 오락이 되고, 쾌락이 된다고 한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혜를 닦아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 쾌활과 안락을 얻으려고 하면 제상비상(諸相非相)임을 보는 것이다.
왜 인간이 괴로운 것인가? 상(相), 보이는 모습에 걸려서 그렇다. 그런데 이 상(相)을 상(相)이 아님을 탁보면 편안해진다. 그래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본다고 하였다.
금강경(金剛経), 여래실견품 제 5에 아주 중요한 경문이 있다.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것이 바로 여래다. 제상과 비상이 다르고 여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상이 비상임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그게 반야바라밀이다. 제상이 비상임을 보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금강경 정신희유분 제 6에 있는 불응취법 불응취비법(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법도 취하지 않으며, 비법도 취하지 않는다.
법상응사 하황비법(法尙應捨 何況非法), 법도 의당 버려야 하고 법 아닌 것도 모두 버려야 한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법, 제상비상(諸相非相)이면 해탈이 따로 없다. 해탈도 취하지 않고, 중생의 생노병사와 중생의 쾌락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탈도 취하지 않고 쾌락도 취하지 않는다. 세속적 기쁨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쾌활, 진안락이고, 그게 반야바라밀 수행이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알면, 금강경 함허당 득통(涵虛堂 得通)의 [즉견여래]에 목전무법(目前無法) 촉목개여(觸目皆如), 목전에 다른 법이 없고 형상이 없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마다 무두 실상법이다. 중생은 형상만 보지 실상은 못본다.
그릇을 볼 때 그릇으로만 보면 형상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중생이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면 실상(實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실상(實相) 하나 뿐이다. 모든 것이 지혜 하나 뿐이다. 이것을 하나 알면 진쾌활이 된다.
참으로 유쾌하고, 참으로 활달한 진쾌활을 얻게 되고 진안락, 참으로 편안하고, 참으로 즐거움을 얻는다. 단지여시(但知如是) 즉견여래(卽見如來), 다만 이와 같음을 알면 곧 여래를 본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문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있었다. 그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지은 법문이 있다. 그 태전선사를 어떤 사람이 파계(破戒)를 시키기 위해서 홍연(紅蓮)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여인을 보내서 백일 동안 시간을 주고 같이 살면서 파계를 시키라고 했다.
그런데 홍연(紅蓮)이라고 하는 여인하고 태전선사하고 그냥 한 달을 같이 살면서 같이 밥먹고, 같이 잠자고, 같이 이야기 하여도 끝끝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 백일이 다 된 다음에는 홍연(紅蓮)라는 여인이 울었다.
그래서 왜, 우느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홍연(紅蓮)이라고 하는 여인이 사실은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왔는데, 한퇴지(韓退之)이라고 하는 분이 불교를 싫어해서 태전선사를 파계시키라는 업무를 띠고 왔는데, 스님과 아무런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돌아가면 죽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물었다. 그래서 지은 게송이 바로 이것이다.
十年不下 鷲靈峰(십년불하 축령봉)십년을 축융봉에서 내려가지 않으니,
觀色觀空 卽色空(관색관공 즉색공)색(色)을 보는 관(觀)이 공(空)하니 마음이 공해졌다.
如下一滴 曹溪水(여하일적 조계수) 어찌 조계(曺溪)의 한 방울인들
肯墮一葉 紅蓮中(긍타일엽 홍련중) 홍련의 한 잎이라도 적실 수 있는가.
도를 잘 닦으니, 마음이 공해졌다. 색을 마음으로 보니, 색을 보는 마음이 공해졌다. 그 색이 어디서 나오는가? 내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공하면 색은 저절로 공해진다. 그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저절로 세상은 편안해진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자기 마음을 편안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자꾸 시비를 한다. 이것이 어리석다고 하는데, 이 문장이 반야바라밀이다. 조계(曺溪), 육조 혜능 선사가 계시는 곳이다. 그래서 불조혜명(佛祖慧命)은 지혜의 생명이다.
한 방울의 물이란, 지혜의 생명, 작은 것인들, 그리고 홍연 한 잎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조그마한 어떤 것, 순간적인 쾌락이나 순간적인 허망한 것, 작은 것들이라도 딴 생각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이게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그래서 마음이 공해지면, 색은 저절로 공해진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수행을 하는 단계가 있다. 경전을 깊이깊이 보면, 경을 보다 보면, 눈앞에서 경을 보는 순간에 느낌이 확 올 때도 있고, 그냥 눈에서 불이 확 날 때도 있고, 꼭 경을 보지 않더라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을 할 때나 경을 보던 생각이 휙 스치고 지날 때가 있다.
스치면서 마음이 확 밝아지고 그 다음에 몸에 뚝 떨어지는 감각이 있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데, 이런 순간을 격고 나서 우주 만물을 보면 환희 밝아져서 색이 다 공해진다.
그래서 참선을 할 때도 화두를 딱 두는데, 화두는 이 화두를 두는데, 머리 휙 스치는 것은 다른 화두가 탁 생각해서 그것을 깨치는 수가 있다. 이것은 참선하는 사람들의 경험인데, 경을 본 사람들의 경험은 경전을 떡하니 보다가 그냥 글자를 보는 순간에 눈에서 불이 확나서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경을 않보고 있다가도 경전을 오랫동안 보고 기억된 것이 있으니까. 그 기억이 휙 스친다. 그러면서 생각이 확 밝아지고 몸에 금방 반응이 온다. 전율이 쫙 일어나든지, 누워 있다가 그런 경험이 있으면 누워 있는 상태로 뚝 떨어지는 경험이 있다.
기억하고 생각하고, 몸하고 똑같다. 그렇게 되면 색이 공한 경지가 그 경지다. 마음이 텅빈 경지, 마음이 공해져야 색이 공해지지, 마음이 비어있지 않으면 절대 색이 공해지지 않는다. 심이라야 색공이 된다.
마음이 공해져야 색이 공해진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가 중요하다. 그 다음부터는 그 법을 잘 지켜서 그 법과 내가 혼연 일치가 되도록 노력하는 단계다.
如下一滴 曹溪水(여하일적 조계수) 어찌 조계(曺溪)의 한 방울 물로
肯墮一葉 紅蓮中(긍타일엽 홍련중) 홍련 한 잎을 적실 것인가.
어떻게 한 방울의 물인들 그저 허망한 정신에다가 둘 수가 있겠는가? 그 다음에 또 바쁘다. 그 다음에는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나서 계속 중생구제 하셨다. 그와 똑같다.
마음도 공하고 색도 공한 것을 보았으면, 그것을 그대로 잘 닦아 자기 인격이 되도록 간직해서 그 다음에는 마음이 공한 줄 모르고 색이 공한 줄 모르고 만날 악을 지어 가지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은혜를 갚아야 된다.
그것이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것이다. 그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전선사 같은 분은 그 길을 잘 닦으신 것이다. 그게 반야바라밀 수행이다.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다.
이런 영험이 없으면 지금까지 불교가 전해질 수가 없다. 그래서 십악(十惡) 잘하고, 지혜를 잘 닦아서 빨리 반야의 세계를 깨달아서 그것을 잘 간직해서 그 세계, 반야의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 꼭해야 할 일이다.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종범스님 설법 중에서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1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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