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分別智와 眞如
-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분별식에서 무분별지에로의 이행을 논함 -
한자경(이화여대)
1. 들어가는 말
우리의 인식은 이것을 저것과, 인 것을 아닌 것과, 참을 거짓과 구분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므로, 늘상 분별적일 수밖에 없다. 분별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대상세계에 대해 행해지게 되지만, 그러한 분별의 기반에서 행해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 분별은 바로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의 분별, 즉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분별이다. 능연·소연의 분별과 더불어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된 세계가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아집과 법집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아집 법집과 허망분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불교는 분별 아닌 무분별을 추구한다. 능소의 분별, 자타의 분별 나아가 생사와 열반의 분별마저도 부정하며, 일체의 분별을 넘어선 차원의 앎인 무분별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의 깨달음으로서의 중관의 반야바라밀이 그것이며, 진여의 증득으로서의 유식의 무분별지가 그것이다. 이점에서 무분별지는 반야바라밀과 통한다.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둘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1)
반야바라밀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의 무분별지, 그리고 그 때 증득되는 진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상(相)을 가지는 식은 능취·소취의 이분구조로 발생하는 분별적 식이므로, 능소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지는 무상(無相)의 식으로서만 가능하다. 분별적 식의 능과 소, 식과 경이 함께 멸하는 것을 경식구민(境識俱泯)이라고 하며, 이 상태가 곧 무분별의 마음상태로서 진여증득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우리는 흔히 유식의 무분별지를 경식구민의 무상유식(無相唯識)의 설로 이해한다. 이와 달리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는 유상유식(有相唯識)은 무경(無境)으로써 식 바깥의 외경은 부정하되, 내식의 전변결과로서의 경을 인정함으로써, 식 자체를 능연식과 소연경의 분별적 대립구도로 이해하며 무분별적 무상(無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다.2) 나아가 무상유식이 지향하는 바는 경과 식이 함께 몰한 무상, 즉 무분별의 경지에서 자성청정심으로서의 진여를 증득하는 것인데 반해, 유상유식은 끝까지 경으로 전변하는 분별적인 유상의 식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무분별적 진여의 증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대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3)
본고에서는 유상유식으로 분류되는 법상종의 소의론인 『성유식론』에 있어서 무분별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식무경의 유식이 지향하는 바 역시 경과 식, 주와 객의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적 진여의 증득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의 진여란 바로 주와 객, 견분과 상분으로 전변하는 아뢰야식 자체의 본래청정의 자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보기로 한다. 결국 아뢰야식은 오로지 망식일 뿐이고, 유식은 식과 진여가 분리된 성상영별의 관점이라는 주장은 유식의 지향점을 간과한 주장이며, 이는 유식 다음에 여래장사상을, 그리고 그 다음에 화엄을 배치시키기 위한 중국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전변하는 식의 본성을 진여로 간주한 점에서 유식은 여래장사상 내지 일심사상과 다르지 않으며, 유식적 전의(轉依)를 통해 얻고자 한 무분별지란 바로 전변하는 아뢰야식 자체를 직관하는 자기 인식이란 점에서 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에 해당하고, 이는 곧 자기 본성의 자각이란 점에서 선(禪)에서의 견성(見性)과 다르지 않음을 살펴볼 것이다.4)
이하에서는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무분별지와 진여의 의미를 논하되, 이를 분별식과의 관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제2장에서 분별적 대상인식의 구조를 사분설(四分說)에 따라 해명한 후, 제3장에서 그러한 분별식으로부터 무분별지에 이르는 구체적 과정을 전의(轉依)를 통해 밝혀보기로 한다. 여기에서 무분별지란 대상을 인식하던 식의 자기 자각이라는 것, 따라서 식 자체의 본래자성청정인 진여의 증득이라는 것을 논할 것이다. 마지막 제4장에서 이상 논의된 무분별지와 진여의 의미를 재정리하면서 글을 맺기로 한다.
2. 분별식의 구조: 아뢰야식의 사분5)
유식에 따르면 우리의 식은 단층적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구조지어져 있다. 가장 표면적인 식은 눈으로 색을, 귀로 소리를 듣는 등의 감각작용인데, 유식은 이를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한다. 전오식에 있어서의 인식내용을 놓고 우리는 주와 객 또는 안과 밖이라는 분리를 행하지 않는다. 내적으로 인식된 주관적 빨간색과 외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빨간색 자체 등의 구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현량으로 증득할 때는 외적인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후의 의(意)가 분별하여 망령되게 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6)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감각을 넘어서서 그 감각내용들을 개념적 틀에 따라 정리하여 인식하면서부터 안과 밖, 주와 객의 분별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이런 분별적 인식을 제6 의식(意識)이라고 한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이 주관과 객관, 나와 세계로 분리되어 있다. 빨간 사과를 보는 나와 내게 보여진 빨간 사과는 각각 별개의 것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간주된다. 인식주관은 심리적 존재로, 인식객관은 물리적 존재로 실체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분별하는 나와 세계는 정말 그처럼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로서 실재하는 것인가? 불교 본래의 아공 법공 사상에 따라 유식은 자아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그 자체 실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와 법은 개념적으로 시설된 가(假)인 것이다.
가로서 아와 법을 설한다.7)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다 아와 법을 시설할 수는 없다. 객관적 실유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단 무엇인가가 허망분별적 시설의 의지처로서 있어야지, 의식이 그 무엇을 놓고 허망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8) 유식은 우리의 의식이 자아와 세계라고 허망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이 실은 우리 심층 식인 아뢰야식의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라고 주장한다.
아뢰야식은 일반 범부의 의식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심층식이다. 수행을 통해 마음 심층에서 아뢰야식의 흐름을 발견한 유가행파들은 흔히 객관세계로 간주되는 현상세계가 실은 마음의 영상이라는 것, 심층 아뢰야식의 전변(轉變)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9) 마음 심층에 일반 범부가 잘 포착하지 못하는 식의 흐름이 있어, 그로부터 세계의 영상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세계의 상으로 변현하는 아뢰야식의 활동성이 자각되지 않는 일반 범부의 의식에 있어 현상세계는 식 바깥에 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세계로 여겨지지만, 아뢰야식의 전변활동을 자각한 유가행파들에게 있어 현상세계는 바로 자기 자신의 아뢰야식의 식소변일 뿐이다. 객관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식 전변 결과를 식의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분을 대상적으로 바라보는 주관으로 전변된 결과를 식의 견분(見分)이라고 한다. 즉 상분과 견분은 식 전변결과 이원화된 객관과 주관, 소연과 능연의 한 쌍이다.
소연으로 나타나는 상을 상분이라고 하고, 능연으로 나타나는 상을 견분이라고 한다.10)
이렇게 보면 전변하는 아뢰야식 자체는 견상으로 이원화하기 이전의 식 자체분이며, 그 식 자체분이 주와 객으로, 견분과 상분으로 이원화하는 것이 된다. 식 자체분으로 보면 주와 객, 나와 세계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전변 결과의 견분과 상분의 차원에서 보면 나와 세계는 서로 분리된 독립적 실체로 여겨진다. 아뢰야식의 전변활동 또는 아뢰야식의 식 자체분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일반 범부는 그렇기 때문에 주와 객,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을 각각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자아와 세계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범부의 식이 곧 자기 자신의 심층식에 대해 밝지 못한 무명(無明) 상태의 식, 즉 제7 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이 맹목적으로 아뢰야식의 견분을 자아로, 아뢰야식의 상분을 세계로 간주하고 있음에서 아집과 법집이 발생하며, 제6 의식의 허망분별은 바로 이 말나식의 맹목적 집착에 기반하여 보다 개념적이고 분석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일반 범부가 갖게 되는 의식과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 즉 자아와 세계가 각각 독립적 실재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현상 심층에서 활동하는 주객통합적인 아뢰야식의 식 자체분 또는 아뢰야식의 전변활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언제나 현상적인 주객분리의 차원, 견분과 상분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일까?
자아와 세계, 주관과 객관을 이원적으로 분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인식의 참 거짓의 기준은 객관적 세계에 놓여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객의 이분법에 따라 정신과 물질, 인식과 존재를 별개의 두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저 책상은 노랗다'라는 나의 주관적 인식이 참일 수 있는 것은 실제 저 책상이 노란색으로 존재한다는 객관적 사실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사유가 단지 여기까지만 미친다면, 우리는 주객의 이분법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존재인식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객관적 존재로써 주관적 인식의 참을 확인하는 순간의 의식작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한 인식이 참임을 확인하는 그 순간 기준으로 작용하는 객관적 존재는 바로 그 순간의 그 존재의 인식과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그 확인하는 인식을 가지고 바로 그 존재 자체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그 순간에는 인식과 존재, 주관과 객관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 인식 너머로 다시 그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할 존재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 자체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상분(객관적 세계)을 인식하는 견분(주관적 인식)을 참으로 확증하는 식은 그 자체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식의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한다. 식의 자증분은 주와 객, 견과 상, 자아와 세계의 이분을 넘어서 그 둘을 미분적 하나로 안다는 점에서 바로 식 자체분이다. 바로 이 자증적 식체로부터 주와 객, 견과 상의 두 부분이 분화된 것이다.
식체는 자증분이다. 전변(전사)하여 상과 견의 두 부분이 생겨난다.11)
이렇게 보면 우리 일반 범부도 주와 객, 자아와 세계, 인식과 존재를 언제나 이분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존재의 인식이라는 심층의 차원에 있어 그 둘의 일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 범부도 단지 상분과 분리된 견분만으로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견상을 통합하는 자증분으로서 세계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객분리된 현상 전체를 조망하는 주객분리 이전의 자증분으로 의식한다는 말이다.
견분과 상분은 아뢰야식의 전변결과 이원화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는 그 각각을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세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분화되기 이전의 식 자체분이란 주와 객, 자아와 세계의 전체 현상세계로 전변하면서, 그 전변결과를 관망하는 현상형성의 주체 또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보는 눈을 현상전체를 보기 위해 현상너머에 있다는 의미에서 '초월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2) 우리의 식은 자증적이다. 식체 자체가 견상 이분의 근거로서의 자증분인 것이다. 우리가 현상적 자아로서 현상적 세계를 볼 때는 견분으로서 보지만, 세계를 보는 나를 의식할 때, 그 때는 자증분으로서의 내가 견분으로서의 나를 보는 것이다. 나를 견분으로 의식하는 자증분이 있는 것이다. 일상적 자기의식에 있어서도 의식된 나는 견분이고, 의식하는 나는 자증분이다. 식 자체가 자증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객을 포괄한 현상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 아뢰야식 자체로서 자증분이라면,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현상을 보는 눈을 다시 볼 수 있는가, 그 눈 자체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직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13) 유식은 자증분을 보면서 그것을 확증하는 식을 주장하는데, 이를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자증분으로서의 식 자체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증자증분이다. 따라서 아뢰야식의 증자증분이란 우리 인간이 아뢰야식의 자증분으로서의 식 자체를 명증적으로 직관할 수 있다는 것, 즉 아뢰야식 자체에 대한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14)
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그 인식에 있어 주와 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식 자체의 자기인식은 곧 식이 자신의 정체를 인식하고 자기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아뢰야식 자체의 자기 본성의 깨달음, 이것은 곧 본래자성청정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본성의 깨달음이다. 이것이 곧 진여의 증득인 것이다. 이점에서 식 자체를 확증하는 증자증분은 식의 자기인식, 곧 무분별지이다.
그렇다면 자증분을 직관하는 증자증분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가? 자증분에 입각하여 견분이 상분에 대해 가지는 대상인식에서부터 식 자체 자증분의 자기 인식인 증자증분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3. 무분별지에 이르는 길: 전의
1) 염오의타기에서 청정의타기로
일상적인 대상인식이란 자증분의 바탕 위에서 견분이 상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견분이 상분을 인식하기 위해, 즉 주와 객이 분리되기 위해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하는 것을 식의 전변(轉變) 또는 변현(變現)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의 변현은 곧 아뢰야식 내의 종자들의 현행화(現行化)인 것이다.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들이 중연을 만나 현행화한 것이 곧 현상세계이다. 이처럼 아뢰야식 내 종자의 현행화, 식의 변현과정을 유식은 아뢰야식의 '의타기(依他起)'라고 부른다. 의타기에 의해 현상화할 종자들은 이전 순간까지 의식 말라식의 활동을 통해 현행훈종자의 과정으로 심어진 것들이다. 지각과 사유 및 의지활동의 흔적으로 남겨진 것들이다.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는 적당한 중연이 갖추어지면 현실화된다. 종자가 현행화되어 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상분인데, 아뢰야식의 상분은 아뢰야식에 의해 유지되는 종자 이외에 불공종자(不共種子)의 현행으로서 개체적 몸인 유근신(有根身)과 공종자(共種子)의 현행으로서 공통의 현상계인 기세간(器世間)이다. 그 상분과 대면한 요별작용 역시 종자의 현행화이며, 이를 식의 견분이라고 한다.15)
종자가 현행화되면 우리의 의식 또는 말나식이 포착할 수 있는 요별작용(견분)과 몸이나 세계(상분)로 드러나지만, 그렇게 현행화할 종자 자체는 의식표층이 아니라 심층 아뢰야식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다. 그것이 중연을 만나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현실화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가능태로서도 또 현실화하는 활동으로서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것이 현실화되고 표면화되어 나타난 결과적 산물만을 의식할 뿐이다.
이처럼 가능태로서의 종자와 그것이 현행화하는 마음의 심층 활동을 자각하지 못하고 단지 그 활동결과의 이원적 산물만을 의식할 뿐이므로, 우리는 항상 나와 세계를 이원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 심층 식의 활동이 가려져 있으므로, 나와 세계가 심층 식의 견분과 상분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막연한 의식, 자증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늘 나와 세계를 둘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식의 견분임을 모르고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집이며, 식의 상분임을 모르고 세계 자체라고 집착하는 것이 법집이다. 이것은 견상이 이원화되기 이전의 식의 자증분으로 스스로 활동하되, 바로 자신을 활동주체로서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증분을 직관하는 증자증분의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타기의 사실을 모르고 의타기의 결과만을 취해 그 결과를 실체로 간주하는 것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고 한다. 식이 활동하는 한, 자증분으로서 활동하기는 하지만, 바로 자신의 식의 활동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각되지 않음으로 인해 집착이 함께 하는 의타기, 즉 변계소집의 의타기를 '염오(染汚)의타기'라고 한다.
그런데 유식은 의타기에 염오의 부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정의 부분도 있음을 강조한다.16) 의타기는 염오의타기와 청정의타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일체 염오의타와 청정의타가 모두 의타기에 속하는 것이다.17)
의타기 중에서 염오의타기가 변계소집의 의타기이며,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을 제외한 부분이 곧 청정의타기로서 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원성실성이 변계소집을 벗은 의타기라는 말은 의타기과정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의타기의 결과를 실체화하는 집착, 즉 아집과 법집을 벗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아공 법공의 깨달음 속에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진면목의 깨달음, 즉 진여(眞如)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것[원성실성]은 의타기 상에서 변계소집을 떠난 것이며, 아공 법공에서 나타나는 진여를 성으로 삼는다.18)
분별식에서 무분별지로의 전환은 의타기에 대한 자각을 결한 집착적인 대상적 인식에서부터 의타기를 자각한 자기인식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는 곧 의타기에 있어 염분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버리고, 정분(淨分)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한마디로 전의(轉依)라고 한다. 전의란 식의 연기적 성품인 의타기(依他起)에 있어 변계소집을 버리고, 원성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전(轉)이란 두가지 부분에 대해 전환해서 버리고 전환해서 얻는 것을 말한다. 거듭 무분별지혜를 닦아 익혀서 근본식 중의 두가지 장애의 추중을 끊음으로써, 능히 의타기성 위의 변계소집성을 전환해서 버리고 의타기성 위의 원성실성을 전환해서 증득한다.19)
전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원성실성 내지 청정분이란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을 제거한 것이다. 변계소집이 제거된 의타기인 것이다. 즉 의타기가 의타기인 줄 모르고 그 결과를 실유로 간주하여 집착함이 변계소집이므로, 변계소집을 버린다는 것은 곧 의타기의 결과를 실유로 간주하는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며 이는 곧 의타기의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타기를 의타기로서 바로 아는 것이 곧 원성실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을 알아야 비로소 의타기를 의타기로서 바로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유식은 원성실성과 의타기, 법성(진여)와 법(의타기)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원성실성을 깨닫지 않으면, 의타기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원성실과 저 의타기는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법과 법성의 이치는 반드시 그럴 것이다. 승의와 세속이 서로 상대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성실성을 증득하지 않으면 저 의타기성을 본 것이 아니다.20)
이처럼 의타기의 식과 그 식의 본성인 원성실성 또는 진여는 둘이 아닌 것이다. 이는 곧 법과 법성의 불이, 분별식의 상(相)과 무분별적 진여인 성(性)의 불이를 말해주는 것이다.21) 의타기와 원성실이 둘이 아니기에, 의타기를 의타기로서 아는 것이 바로 원성실의 증득이며, 진여의 증득일 수 있는 것이다.
전의란 자각되지 않은 변계소집의 의타기로부터 의타기 자체를 자각하는 원성실로의 이행이다. 이 전의를 통해 얻는 의타기의 정분인 원성실성이 곧 진여(眞如)다. 집착적 분별식을 버리고 얻은 무분별지에서 의타기의 정분인 원성실성이 곧 진여인 것이다. 본래자성청정으로서의 진여가 증득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진여의 증득으로서의 무분별지는 곧 본성의 자각, 견성(見性)인 것이다.
진여의 증득으로서의 무분별지란 곧 식 자체의 자기자각을 뜻한다. 식이 식의 대상이 아니라, 식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므로,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점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본성의 자각으로서 능연과 소연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분별지라고 하는 것이다.
2) 유루종자의 현행에서 무루종자의 현행으로
분별성의 염분의타기에서 진실성의 청정의타기로의 전환을 유식은 종자를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식의 현행화로서의 의타기는 인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인데, 현상의 인연은 종자이므로, 의타기의 염과 오의 차이가 종자의 염과 오의 차이를 따라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염오의타기는 염오의 유루종자(有漏種子)의 일어남이며, 청정의타기는 청정한 무루종자(無漏種子)의 일어남이다.
유루종자는 견분 또는 상분으로 이원화하는 종자들이다. 우리의 현상적 인식, 대상적 인식을 제공해주는 종자들이다. 대상에 주목하고 있는 한, 대상을 보는 주체는 망각된다. 밝지 않고 어둡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적 인식을 일으키는 종자가 유루종자이다. 우리의 일상적 인식은 일정한 내용을 가진 대상적 인식이다. 식의 내용은 유루종자의 내용이며, 그것은 곧 상분 또는 견분이 된다. 아뢰야식 내에 의식 말나식의 활동을 통해 훈습된 집착에 물든 유루종자의 변현이기에 그 종자의 내용이 주관적 또는 객관적 내용으로 구체화된 대상적 인식이며, 식 자체의 인식이 아닌 것이다.22)
이에 반해 현상 아닌 식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식이다. 그것은 유루종자의 현행인 대상적 인식이 아니라, 식 자체의 자기인식, 자기 자신을 일깨우는 자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인식을 일으키는 종자를 무루종자라고 한다. 청정한 무루종자의 현행에 의해서만 식 자체의 자기인식이 가능하다. 그래야만 식 자체의 본성인 본래자성청정인 진여의 증득, 무분별지가 가능한 것이다.
무분별지를 일으키는 무루종자는 식 자체의 자기 인식을 낳는 종자이므로 그 자체 번뇌에 물든 의식이나 말나식의 대상적 인식을 통해 생겨난 것일 수가 없다. 경험을 통해 비로소 훈습된 것이 아니라, 식 자체에 그 자신의 자각능력으로서 구비되어 있는 본유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유정은 무시이래로 무루의 종자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훈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성취한 것이다.23)
이제 문제는 그렇게 본래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그 청정 무루종자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는가 하는 것이다. 유루종자의 발현으로서의 대상적 인식으로부터 무루종자가 발현하는 식의 자기 인식으로의 전환, 변계소집된 염오의타기로부터 원성실성의 청정의타기로의 전환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상인식으로부터 자기 인식으로의 전환과정, 근본무분별지로 나아가는 그 과정을 유식은 견도(見道)의 통달위에 앞선 가행위(加行位)로 설명한다. 견도에 들기까지 주와 객, 능과 소에 대한 집착적 분별을 넘어서고자 노력하는 단계이다.
견도에 들어 유식성에 안주하기 위해 다시 가행을 닦아 이취(二取)를 조복하여 제거한다.24)
견도에서의 무분별지가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무분별지'라면,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자기 인식과정은 '가행무분별지'가 된다.25) 가행무분별지는 능취와 소취의 이취를 없애가는 과정상의 지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식 자체의 자기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대상적 현상세계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렇게 현상을 인식하는 자기 자신을 주목하면서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인식된 대상으로부터 인식하는 식 자체로 시선을 변경하면서 심층 식의 활동을 깨달아 집착적 분별을 없애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근본무분별지가 본유적인 청정무루종자의 발현이라면, 그 근본무분별지에 이르기까지 가행단계에서 가행무분별지를 일으키는 종자를 유식은 '정문훈습종자(正聞熏習種子)'라고 한다. 불법(佛法)인 바른 진리를 들음으로써 훈습되는 종자인 것이다. 이것 역시 분별식의 종자가 아니라 이취를 없애나가는 무분별지혜를 낳는 종자이므로 무루종자이지만, 본래부터 아뢰야식에 구비되어 있던 본유종자가 아니라, 구체적 경험적으로 불법을 듣고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종자이므로 훈습종자라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듣고 생각함으로써 문훈습의 종자가 쌓이면, 그로부터 능소분별의 집착이 서서히 제거되며, 결국은 견도에 이르러 근본무분별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본유무루종자가 근본무분별지를 일으키게끔 현실화되기 위해서도 정문훈습종자에 의한 본유무루종자의 증성이 요구된다. 즉 정문훈습종자에 의한 가행을 거쳐야만 출세심의 견도가 가능한 것이다.
본유종자도 역시 훈습에 의해 증성되어야 비로소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내적 종자에 반드시 훈습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문훈습이 단지 유루종자인 것만은 아니다. 정법을 들을 때에 본유무루종자를 훈습하고 점차 증성케하여, 전전하여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를 문훈습이라고 말한다.26)
정문훈습종자는 인식된 현상세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인식하는 식 자체의 구조, 식 자체의 본성, 식의 상과 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세계가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인식된 세계와 인식하는 식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인식하는 식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교설을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문혜(聞慧)에서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가 아니라, 세계가 식을 떠난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 식의 견분과 상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그 가르침을 따라 논리적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사혜(思慧)라고 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수혜(修慧)라고 한다. 마음의 활동을 주체적으로 자각하려는 수행법인 호흡법이나 관법 또는 선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분별적 대상인식을 멈춤으로써 마음의 내용을 비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그 무심의 심을 자각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수행을 거쳐 대상적 분별적 인식이 멎는 순간, 식 자체가 자기 자신을 허령하게 자각할 때, 그 본성의 자각, 진여의 증득을 근본무분별지라고 하는 것이다. 멀고 먼 길을 통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처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길이 있기 때문이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성인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무분별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진여에 대해 듣고 생각하고 수행했기 때문이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 안의 진여 자체가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각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보는 눈으로서의 우리 마음이 바로 그 눈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눈을 보자면, 마음은 눈 밖에 있어야 한다. 마음은 눈이면서 또 눈을 넘어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눈 자신이면서 또 그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신비한 구조이다.
5. 맺는 말
진여의 증득, 곧 무분별지의 성취는 불교의 수행단계로 보자면 성인의 경지에 드는 견도에서의 일이다. 아공과 법공을 깨달아 앎으로써 이공(二空)을 통해 현현하는 진여를 증득하는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견도에 들지 못하는 한, 진여의 증득, 무분별지의 성취는 불가능하며, 우리 범부는 단지 분별식만을 가질 뿐인가? 그렇다면 분별식과 무분별지 간의 절대적 분별은 어떻게 다시 극복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범부적 분별식의 차원에서 무분별지와 진여를 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인생의 꿈으로부터 깨어남은 진여지각(眞如智覺)이다. 진여지각이란 세상을 보는 눈인 나를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세계가 내가 본 세계라는 것, 나의 세계, 나의 식의 전별결과라는 것, 한마디로 현상 또는 가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곧 유식성의 자각인 것이다. 내가 세계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보는 나를 보는 나로서 알지 못하면, 나는 내가 그렇게 세계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계는 단지 나에게 보여질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식성을 깨닫자면, 세계를 보는 나를 다시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근본무분별지인 것이다. 세계를 보는 나를 여실하게 자각하는 것, 그것이 곧 본래자성청정으로서의 진여의 증득이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객진(客塵)이나 유식(唯識) 또는 공과 진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진여지각이 없는 상태에서 유식과 공과 진여를 논하는 것을 『섭대승론』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한 추론적 지혜, 즉 비지(比智)라고 한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이 깨우침은 없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이미 얻게되면 이 깨달음은 반드시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 어떻게 추론적인 지식을 일으킬 수 있는가? 성스러운 가르침과 진리를 따라 능히 추론하여 헤아릴 수 있다. …… 문혜와 사혜의 두 위계에서는 …… 보살이 비록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였다고 해도 추론적인 앎을 통해 유식의 정의에 대해 추론적으로 알 수 있다.27)
이상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것은 진여지각의 차원에서 진여를 제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진여지각에 이르지 못한 분별의 차원에서 문혜와 사혜로써 무분별지와 진여가 무엇인가를 추론적으로 밝혀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곧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무분별지에 앞선 단계로 제시되는 가행무분별지의 단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유식이 논하는 가행무분별지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우리의 작업 자체가 가행무분별지의 성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비록 추론의 방식일지라도 근본무분별지에로 접근해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적 사유를 통해 본고가 밝히고자 한 것은 진여의 증득으로서의 무분별지란 아뢰야식 자체의 자기 인식이라는 것, 즉 아뢰야식 자체의 자증분을 직관하는 증자증분이라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우선 우리의 마음인 아뢰야식 자체를 견상 이원화의 동일근거로서의 자증분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객관화된 현상세계(상분)와 대립적으로 마주해 있는 주관적 자아(견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견상을 통합하는 주객미분의 활동성(자증분)인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현상적 분별식의 근저에는 주객미분적 동일성의 의식, 자타동체의 자비의 의식이 깔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증분을 자증분으로서 자각하는 증자증분의 활동이 곧 식 자체의 자기본성의 자각인 견성(見性)이며, 본래자성청정으로서의 진여의 증득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착적 분별식 너머로 불교가 추구하는 근본무분별지인 것이다. 결국 근본무분별지에서 알려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성품, 자성청정으로서의 진여이다.
이처럼 무분별지가 바로 자기 자신의 본성의 자각이기에, 무분별지와 진여를 능연과 소연의 관계로 이해한다 해도 다시 능소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不二)를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진여는 진여로서 자각이 되든 되지 않든 이미 자성으로서 범부의 심성 안에도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범부와 부처, 분별과 무분별,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호법· 현장의 '유식무경'의 유식이 결코 분별적 현상세계의 인식만을 논하고자 하는 '법상(法相)의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식 주체 또는 우리의 마음을 현상으로 전변하는 망식(妄識)만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이를 법성(法性)과 법상(法相)의 차이 또는 진망화합식과 망식의 차이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 무상유식이 여래장사상이나 일심사상과 상통한다면 유상유식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 無着 著, 眞諦 譯, 『攝大乘論』, 下卷, 「依慧學勝相」, 『大正新修大藏經』31, 128하: "此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密 名異義同." (이하 인용에서는 대정장이라고 약함. 그 다음의 수는 권수를, 그 다음의 수는 쪽수를 뜻하며, 상중하는 쪽 내에서 인용구절이 있는 위치를 말함).
2) 이상 간략히 언급한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이를 본 주에서 좀 더 자세히 상술하기로 한다. 무상유식은 인식작용을 의타기로 보고 인식대상을 변계소집성으로 간주하면서, 허망분별하는 인식작용과 허망분별된 인식대상 모두를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여 '경식구민'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유상유식은 인식의 허망분별성을 좀 더 세분한다. 즉 허망분별은 무엇(A)을 무엇(B)으로 잘못 분별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허망분별된 B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분별의 의지처로서의 A는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길에서 뱀을 보고 달아나는 자에게 그것이 허망분별임을 말하기 위해 "거기에 뱀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경우 허망분별된 뱀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허망분별의 의지처로서의 노끈은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허망분별된 것(B)과 허망분별의 의지처(A)를 구분한 후, 유상유식은 전자를 변계소집성으로 후자를 의타기성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유상유식이 '무경'으로써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변계소집된 외경이고, '유식'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의타기의 식, 즉 능변의 식과 소변의 경 둘 다인 것이다. 太田久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유식 가운데에서도 무상유식의 계통에서는 주관의 식에 관해서는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점은 같지만, 소연의 대상은 '의타기성'이라고 하지 않으며, 허망의 영상='변계소집성'이라고 말한다. 護法에서 玄장으로 전해내려온 유상유식에서는 주관의 식이 '의타기성'임과 마찬가지로 소연의 경인 대상세계도 여러 가지 힘의 구조에 의해서 경이 되어 나타나 있으므로 주관과 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역시 '의타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심층심리』, 정병조 역, 현음사, 1989, 194쪽). 그러므로 경식구민의 무상유식에 있어서 지향되는 것은 (의타기의) 허망분별하는 식과 (변계소집의) 허망분별된 경 모두가 멸한 이후 식과 경, 능과 소의 분별을 떠난 무상의 식(청정식=청정심)인데 반해, 유식무경의 유상유식에 있어서 지향되는 것은 (의타기의) 능연식과 (의타기 결과의) 소연경 둘 다가 능과 소, 식과 경의 분별과 더불어 남겨지는 유상의 식(염오식=염오심)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무상유식에서의 심은 청정심인데 반해, 유상유식에서의 심은 염오식이라는 이해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유상유식에서 식과 경 둘 다를 의타기에 포섭시켜 '유식' 아래 포함하는 것이 결코 능과 소, 식과 경의 분별차원에 머무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둘이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것, 즉 단일한 식 자체(자증분)의 견·상 이원화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바로 그렇게 이원화하는 식 자체의 자증분을 증득하는 증자증분이 견상, 주객, 능소의 이분을 떠난 무분별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유상유식의 궁극 지향점이 유루의 분별식을 넘어선 청정무분별지, 진여의 증득에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3) 이와 같은 문제제기의 배경 및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다소 긴 감이 있지만, 주로써 보충설명하기로 한다. 유식에 있어 아뢰야식은 능과 소, 식과 경이 분리된 분별적 식일 뿐이며, 따라서 능소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의 진여와는 구분된다는 설, 결국 유식 자체는 能所分別과 性相永別의 차원에 머무른다는 설은 주로 법장의 화엄교판에서 확립된 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유식은 무분별적 법성(性)이 아닌 현상적인 분별적 법상(相)만을 분석하는 '法相宗'으로 불린 것이다.
그러나 유식이 본래 그처럼 능소분별, 성상영별의 차원에 있지 않음을 발견한 현대의 유식학자들은 유식을 전기의 무상유식과 후기의 유상유식으로 구분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유식은 인도에서 이미 서로 다른 두 파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무착, 세친에서 안혜로 이어지는 전기의 무상유식이며, 다른 하나는 무착, 세친에서 진나, 호법으로 이어지는 후기의 유상유식이다. 전자는 『섭대승론』(세친 저, 진제 역) 등에 나타나며, 후자는 『성유식론』(호법 저, 현장 역) 등에 제시되는데, 중국 법상종은 현장의 제자인 규기에 의해 건립된 것이므로, 무상유식 아닌 유상유식의 설만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장 화엄교판에서의 유식은 바로 현장, 규기의 유상유식일 뿐이며, 그것은 심경일여, 성상융몰, 자성청정심의 진여를 주장하는 무상유식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요즈음 유식을 논하는 책은 대개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이를 크게 강조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강조되면 될수록, 인도 후기의 유상유식과 더불어 중국의 법상종 내지 『성유식론』은 자성청정심이나 진여를 주장하는 일심의 철학과는 거리가 먼 현상적인 분별적 인식의 분석으로만 이해되며, 아뢰야 망식설로 간주되는 것이다.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의 "후자의 유식설[유상유식]은 '심이 심을 경으로 본다'라는 대상화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설이 '심이면서 심을 보지 않는다'라는 '일심'의 입장에까지 철저하게 이르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 식 자신은 진여와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고, 이 식 자신이 진여와 불이(不二)라는 의미는 없다. 이것이 '성(=진여)상(=식)영별'이라 불리어 이 유식설의 특색이 되었다"(『대승불교의 사상』, 박태원 역, 민족사, 1989, 195쪽)라는 주장도 이런 기반 위에 있다. 원효를 통해 『대승기신론』을 유식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박태원은 "법장이 마련하고자 하는 여래장연기종의 지위와 개성은 신유식인 법상 유식설과의 관계에서만 유효할 뿐, 구유식설을 포함한 유식사상 전체에 대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박태원, "『대승기신론』사상평가에 대한 연구", 고려대박사학위논문, 1990, 168쪽)라고 하고, 또 "원효가 아리야식에 대한 기신론설과 유식설을 회통시키는 사상적 배경은 유식, 특히 구유식설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앞의 책, 101쪽)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 역시 기신론과 회통가능한 유식은 구유식이지 신유식(법상종)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점에서, 구유식과 신유식,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별점에 대한 기존 관념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에 반해 본고는 소위 구유식 또는 무상유식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섭대승론』(진제 역)에 등장하는 "染淨二分依他起性說"이나 "자성청정심으로서의 진여설"을 신유식 또는 유상유식의 근본논서인 『성유식론』에서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이점으로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가를 반문하고자 한 것이다.
4) 우에다 요시부미도 유식의 근본사상을 주체적 심의 자각으로서의 일심 사상으로 해석한다. "'일심'이 '진여'라는 것은 『기신론』으로 알 수 있으나, '유식'이 '진여'라는 것은 『유식삼십송』으로 알 수가 있다. 유식이 진여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식과 일심이 결국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대승불교의 사상』, 박태원 역, 민족사, 1989, 193쪽). 그런데 그는 일심과 통하는 유식은 오로지 전기의 무상유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후기의 유상유식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중국 법상종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불교에 있어서 [주체적 자기자각으로서의] 심에 대한 자각은 매우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같은 책, 204쪽)고 주장한다. 반면 본고에서는 유식무경의 유상유식 역시 근본적으로 주체적 심의 자각으로서의 일심사상과 통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5) 물론 호법 유식에 있어 사분(四分)은 일체 식의 심과 심소의 작용에 있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일체 식의 가장 바탕이 되는 근본식인 아뢰야식의 사분을 중점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밝혀지듯이 육식이나 제7말나식도 아뢰야식의 전변결과인 아뢰야식의 상분과 견분에 바탕을 두고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護法 等 著, 玄장 譯, 『成唯識論』, 제7권, 대정장31, 39중: "現量證時不執爲外, 後意分別妄生外想."
7) 『성유식론』, 제1권, 대정장31, 1上: "由假說我法."
8) 허망분별의 의지처(A)와 허망분별된 것(B)의 구분은 앞의 주2)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9) 아뢰야식의 발견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해심밀경』에 잘 나타나있다. 요가 수행 중 발견한 아뢰야식에 대해 그것은 일반 범부나 성문·연각조차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심히 깊고 미세하다(甚深細)"라고 말한다(『해심밀경』, 제1권, 「심의식상품」, 대정장16, 692하). 나아가 비바사나사마타 중에 나타나는 영상에 대해 그것이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영상은 오직 식일 뿐이기 때문이다(由彼影像唯是識故)." "식의 대상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일 뿐이다(識所緣唯識所現)"라고 주장한다. 이 때 영상으로 현현하는 식은 바로 아뢰야식인 것이다(『해심밀경』, 제3권, 「분별유가품」, 대정장16, 698상중).
10) 『성유식론』, 제2권, 대정장31, 10상, "似所緣相說名相分. 似能緣相說名見分."
11) 규기, 『성유식론술기』, 제1권, 대정장43, 1상: "識體卽自證分 轉似相見二分而生."
12) 물론 '초월적'이라고 해서 현상과 분리된 별개의 외적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주객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적 또는 경험적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현상적 주객구분을 넘어섰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상적 자아'가 세계의 일부분으로서의 나, 따라서 세계의 다른 부분들과 구분되는 나라면, '초월적 자아'는 현상적 자아(주관)와 현상적 세계(객관)룰 포괄하는 나라고 할 수 있다.
13) 세계의 경계에 서서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눈으로서의 초월적 자아의 자기인식이란 단순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직접 직관한다는 의미에서 "知的 直觀"이 된다. 따라서 초월적 자아의 자기인식의 문제는 곧 서양철학에 있어 칸트 이후 독일관념론자들의 주된 논쟁거리였던 지적 직관은 가능한가의 물음이 된다. 문제는 외적 대상이든 내적 대상이든 그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인식 주체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나를 다시 세계 속으로 대상화시키지 않은 채, 바로 보는 눈 자체로서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불교에서는 두가지 상이한 관점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인식은 항상 대상적 인식일 수밖에 없고 자기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대상적 인식이 아닌 인식자 자신의 자기인식이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전자는 자기인식의 불가능성을 말하기 위해 다른 것은 다 베면서도 자기 자신은 벨 수 없는 칼이나 다른 것은 다 보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는 눈을 비유로 든다. 그처럼 인식주관은 그 자신에 의해 객관화된 인식대상은 다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인식하는 인식주관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에게 가능한 인식은 언제나 대상적 인식, 즉 주객, 능소가 서로 구분되는 분별적 인식일 뿐이며, 그 둘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무분별적 인식이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후자는 대상적 인식이 아닌 인식자 자신의 자기인식의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 다른 것을 모두 밝게 비추기 위해 그 자체가 가장 밝게 빛나야 하는 빛을 비유로 든다. 그처럼 인식주관은 그 자신에 의해 객관화된 인식대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그럴 수 있기 위해서라도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로 주객, 능소가 분리되지 않은 무분별적 인식, 식 자체의 자기인식이 되는 것이다. 유식은 자기인식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입장에 있다.
14) 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을 설정하는 것에 대해 다시 증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증자증분이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자, 호법은 우리의 인식의 확실성이 그런 식으로 무한소급되어 無窮之失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증자증분을 확증하는 것은 그 다음의 증증자증분으로 나아갈 것 없이, 앞서의 자증분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는 자증분과 증자증분이 둘 다 自內證의 것이며, 자기인식(증자증분)의 확실성은 자기의식(자증분)의 확실성 속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5) 이상 견분과 상분은 다른 말로 식의 행상(行相)과 소연(所緣)으로 불린다. 『유식삼십송』은 이 둘을 "집수(執受)와 처(處)와 료(了)"로 설명하는데, 『성유식론』은 "료는 료별(了別)" "처는 처소(處所)로서 기세간", "집수는 종자와 유근신"임을 밝히고 있다. 『유식삼십송』의 제3게송. 『성유식론』, 제2권, 대정장31, 10상 참조.
16) 의타기를 염분과 정분의 두 측면으로 이해한 기원과 관련하여 勝呂信靜은 『해심밀경』에서는 의타기성이 단지 잡염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대승장엄경론』이나 『변중변론』에서도 의타기가 청정하다는 것은 설해있지 않으며, 『유가론』의 「섭결택분」에서 의타기성에 잡염의타기와 청정의타기 2종이 구별되기는 하는데, 단지 구별만 될 뿐 통일적으로 설해지지 않는데 반해, 『섭대승론』에서 비로소 그 둘이 통일적으로 설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그는 "염정이분 의타기성설은 『섭대승론』의 독창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勝呂信靜, "유식설의 체계성립", 平川彰 외 저, 이만 역, 『유식사상』, 경서원, 141쪽 참조.) 그러나 사실 의타기의 염정이분설은 내용적으로 보면 원시근본불교의 연기설 자체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기가 곧 의타기이며, 무명에 근거한 연기의 유전문은 염분의타기에 해당하고, 해탈에 이르는 연기의 환멸문은 정분의타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7) 『성유식론』, 제8권, 대정장31, 46중: "一切染淨依他皆是此中依他起攝."
18) 『성유식론』, 제8권, 대정장31, 46중: "此卽於彼依他起上 常遠離前遍計所執 二空所顯眞如爲性." 의타기와 더불어 염오의타기가 변계소집이고 청정의타기가 원성실성을 뜻하므로 이로써 식의 삼성(三性)이 설명된다. "잡염법이란 허망된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청정법은 진실된 원성실성을 말한다"(染謂虛妄遍計所執. 淨謂眞實圓成實性"(『성유식론』, 제9권, 대정장31, 51상) 이러한 삼성의 이해는 『섭대승론』(무착 저, 진제 역)과 다르지 않다. 『섭대승론』에서도 의타기성은 염오와 청정의 두 부분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의타성 가운데서 분별성은 염오의 부분이 되고, 진실성은 청정의 부분이 된다. 의타성은 염오와 청정의 부분이 된다"(『섭대승론』, 제2권, 「응지승상」, 대정장31, 121상).
19) 『성유식론』, 제9권, 대정장31, 51상: "轉謂二分轉捨轉得. 由數修習無分別智斷本識中二障추重故 能轉捨依他起上遍計所執及能轉得依他起中圓成實性." 전의에 대한 설명도 『섭대승론』이나 『성유식론』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섭대승론』에서도 전의는 변계소집인 분별성을 버리고, 원성실성인 청정법을 얻는 것으로 설명된다. "전의란 대치를 일으킬 때에 의타성이 부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바꾸며, 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이루는 것을 말한다"("轉依者對治起時此依他性 由不淨品分永改本性 由淨品分永成本性": 『섭대승론』, 제9 「학과적멸승상」, 대정장31, 129중).
20) 『성유식론』, 제8권, 대정장31, 46중: "此圓成實與彼依他非一非異. 法與法性理必應然. 勝義世俗相待有故. 非不證見此圓成實而能見彼依他起性."
21) 『성유식론』의 삼성설에 있어 이와 같은 성과 상의 불이(不二)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유상유식은 성상영별(性相永別)이라는 주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다.
22) 따라서 이런 유루종자들은 모두 식 자체에 본래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본유종자가 아니라, 현생 또는 이전 생에서의 의식과 말나식의 실제적 작용을 통해 훈습된 신훈종자로 분류된다. 종자의 본유와 신훈의 구별에 대해서는 『성유식론』, 제2권, 대정장31, 8중 이하 참조.
23) 『성유식론』, 제2권, 대정장31, 9상: "有諸有情無始時來有無漏種不由熏習法爾成就."
24) 『성유식론』, 제9권, 대정장31, 49상: "爲入見道住唯識性 復修加行伏除二取." 『성유식론』에서는 가행위가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네단계로 설명되는데, 이는 결국 객관세계가 그 자체 독립적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소취를 없애고, 나아가 그처럼 객관을 인식하는 주관자아 역시 독립적 실유가 아님을 깨달아 능취를 없애는 과정이다. 이렇게 해서 二取가 멸하는 순간 능소의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지에 이르며, 이를 見道라고 하는 것이다.
25) 이 둘에 '후득무분별지'를 더하면, 번뇌를 떠난 세가지 무분별지가 된다. 『성유식론』에서는 이 세가지 무분별지를 '무분별혜(無分別慧)'라고 해서 계정혜 삼학 중 혜학(慧學)의 세종류로 논하고 있다. (『성유식론』, 제9권, 대정장31, 52상 참조.) 『섭대승론』도 무분별지를 가행, 근본, 후득의 세단계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섭대승론』, 대정장31, 128중 이하 참조.)
26) 『성유식론』, 제2권, 대정장31, 9상: "本有種亦由熏習令其增盛方能得果, 故說內種定有熏習. 其聞熏習非唯有漏. 聞正法時亦熏本有無漏種子令漸增盛 展轉乃至生出世心, 故亦說此名聞熏習." 문훈습이 본유무루종자에 의한 출세심을 생하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은 가행·근본·후득무분별지를 구분하여 논한 『섭대승론』에서 이미 설해지고 있다. "출세심은 예로부터 습을 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훈습이 없다. 만약 훈습이 없다면 출세심은 무슨 인으로부터 생하는가? …… 가장 청정한 법계의 흐름인 바른 문훈습이 종자가 되기 때문에 출세심이 생할 수 있다." (『섭대승론』, 대정장31, 117상.) 이 과정이 곧 세제일법에서 견도에로의 이행과정에 해당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섭대승론』과 『성유식론』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본다.
27) 『섭대승론』, 제2권, 「의지승상품」, 대정장31, 118중하: "若人未得眞如智覺亦無此覺. 若已得眞如智覺必有此覺. 若人未得眞如智覺 於唯識中云何得起比智. 由聖敎及眞理可得比度. …… 於聞思兩位 …… 由此比知菩薩若未得眞如智覺 於唯識義得生比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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