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해설
唯識三十頌 解說
강사: 현성(玄性) 스님
불기 2552년 4월 23일
대한불교 조계종
불 타 사
BULTASA
Buddhist Temple of
CHIC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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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유식 30송 이란 1
제 1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제 2송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위이숙사량 급료별경식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초아뢰야식 이숙일체종
제 3송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료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제 4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부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 5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라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제 6송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사번뇌상구 위아치아견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병아만아애 급여촉등구
제 7송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유부무기섭 수소생소계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아라한멸정 출세도무유
제 8송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차제삼능변 차별유육종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료경위성상 선부선구비
제 9송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차심소변행 별경선번뇌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수번뇌불정 개삼수상응
제10송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초편행촉등 차별경위욕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승해념정혜 소연사불동
제11송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선위신참괴 무탐제삼근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근안부방일 행사급부해
제12송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번뇌위탐진 치만의악견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수번뇌위분 한부뇌질간
제13송 誑諂與害憍 无慙及無愧 광첨여해교 무참급무괴 掉擧與惛沈 不信幷懈怠 도거여혼침 불신병해태
제14송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방일급실념 산란부정지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부정위회면 심사이각이
제15송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의지근본식 오식수연현 惑俱惑不俱 如濤波依水 혹구혹부구 여도파의수
제16송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의식상현기 제생무상천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급무심이정 수면여민절
제17송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시제식전변 분별소분별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유차피개무 고일체유식
제18송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유일체종식 여시여시변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이전전력고 피피분별생
제19송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유제업습기 이취습기구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전이숙기진 부생여이숙
제20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유피피편계 편계종종물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차편계소집 자성무소유
제21송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 분별연소생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어피 상원리전성
제22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고차여의타 비리비불리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여무상등성 비부견차피
제23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즉의차삼성 입피삼무성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고불밀의설 일체법무성
제24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초즉상무성 차무자연성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후유원리전 소집아법성
제25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차제법승의 역즉시진여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상여기성고 즉유식실성
제26송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내지미기식 구주유식성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어이취수면 유미능복멸
제27송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현전입소물 위시유식성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이유소득고 비실주유식
제28송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약시어소연 지도무소득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시주유식 이이취상고
제29송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무득부사의 시출세간지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사이조중고 변증득전의
제30송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 부사의선상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안락해탈신 대모니명법
유식 30송의 개요(槪要)
유식 30송의 대의(大意)
唯 識 三 十 頌[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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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30송 이란 ??
불교에서 ‘무아(無我)’라고 하는데, 무아이면 무엇이 육도윤회를 하는가? ‘일체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보면 곧 부처를 보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러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무착보살 무착(無着) - Asanga 310~390? 북인도 간다라국의 사람
이 집대성한 것을 유식학이라 하는데 그 방대한 유식학을 그의 아우 세친보살 세친(世親) 세친(世親) - Vasubandhu 320~400; 무착의 아우.
이 오언(五言) 사구(四句) 삼십송(三十頌)으로 요약한 것을 유식 30송이라 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원효(元曉) - 617~686, 34세 때 의상대사와 같이 고구려를 통해 당나라에 유학가려다 고구려 순찰대에 잡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였음에 서해를 건너 당에 가기 위해 (45세 때, 서기 661) 당진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어 땅 막에서 하루 저녁을 자게 되었다. 그 다음날 일어나 보니 땅 막인 줄 알고 잔 곳이 다름 아닌 사람 뼈와 해골이 있는 무덤이었다. 다음 날 당나라로 가는 배가 없어 그 날 밤도 그 무덤에서 자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라 그 곳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새 귀신이 날아다니는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는 활연히 깨달았다. 간밤에 무덤인 줄 모르고 잤을 때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아 잠을 편안히 잤는데, 그 다음 날은 사람이 죽어 묻혔던 무덤인 줄 알고 자려고 하니 귀신이 계속 나타났으니, “마음이 일어나니 법이 일어나는 것이요, 마음이 사라지니 법도 또한 사라지는구나.” 라고 하고, 당나라 현장법사에게 가도 더 이상의 것을 배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는 다시 서라벌로 돌아오고 의상만 당나라로 갔다.
원효스님은 당시 당나라에 현장법사 (600~664)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자국에 돌아와 유식으로 유명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유식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가려고 나섰다가 간 밤 꿈에서 깨어나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유식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음으로 현장법사에게 가도 더 이상의 것을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란?
무엇이 행복과 불행을 좌우할까?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까?
잘 생기고 못생김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적인 병의 원인은 무엇이며 정신적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이 슬퍼하고 괴로워할까?
무엇이 편안해하고 즐거워할까?
무엇이 미워하고 두려워할까?
무엇이 나를 구속하고 협박할까?
세상에 있는 것을 내가 보는가? 내가 보는 대로 세상이 있는 것인가?
눈(雪)이 오는 것을 내가 보는가? 내가 보는 눈이 오는 것일까?
이 사람이 예쁜 사람인가? 내가 이 사람을 예쁘게 보는 것인가?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내가 이 사람을 나쁘게 보는 것인가?
무엇이 배우자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까?
무엇이 나를 바꿀 수 있을까?
무엇이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이 많을까 모르는 것이 많을까?
작년에는 무엇을 하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같이 공부하기 위해 유식 30송을 택하게 되었다.
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만법은) 아(我)와 법(法)을 가설함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서로 변전하는데, 그것은 의식에 의지해 변전되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능변(能變)는 오직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아(我)는 내가 아는 ‘나’이고, 법(法)은 ‘나’의 대상들이다. 이 대상에는 나의 사고, 관념, 기억, 희망, 성격 등과 같은 정신적인 작용, 나의 몸 그리고 ‘너’그리고 일체 사물이 포함된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의 대상, 불교는 이런 것이고 기독교는 저런 것이며, 가정은 이러해야하고, 민주주의는 저래야한다는 등의 관념, 나의 학창시절, 사랑, 가정, 부모 형제, 사업 등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희망, 근심, 걱정, 게으르거나 부지런하거나, 온화하거나 급한 성격 등과 같은 정신 작용, 그리고 혈압이 높거나 낮은 등 여러 가지 육체적 건강상태가 관심의 대상이 될 때,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너’나 내가 경험하는 ‘너’가 생길 때 이들이 모두 법(法)이 되어 나인 아(我)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곧 이들이 생김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인 아(我)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법(法)이란 없었고 법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의 상대되는 아(我)도 없는 하나의 그 무엇이 있었다는 원리가 불교의 정설이다.
여기에서 가설아법(假設我法)이라고 한 것은 원래는 아와 법(我法)이 나누어지지 않았는데 나누어졌다고 인식하니 가설(假設)이라 했다. 태중에 있는 아기나 갓 태어난 아기는 자기와 엄마가 하나라고 알고 있다가 의식이 발전되면서 자기와 엄마가 별개라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사춘기에 들어서면 부모와 자기는 완전히 다르다고 인식되어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게 되고, 장년기가 되면 부모에 대한 인식이 더욱 변하게 되는 것이나 이것은 각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뜻으로 가설(假設)이라 한 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나와 나의 대상이 원래는 둘이 아닌데 너와 내가 별개로 있다고 착각하여 상대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인식한다. 즉 내가 보는 네가 있고, 내가 경험하는 사물이 있으며 내가 아는 나의 주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상들은 나의 의식에 의해 변해진다. 나의 의식이 너를 좋게 보면 너는 좋은 사람이 되고, 너를 나쁘게 보면 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위 게송에서 상전(相轉), 서로 변전한다고 한 것은 너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아(我)가 되고 내가 너의 법(法)이 되니, 나는 네가 의식하는 대로 변해진다. 즉 내가 의식하는 네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너의 입장에서는 나는 네가 의식하는 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능변(能變), 나의 상대를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나의 의식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의 의식에 의하면 내가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서로 다른 전변에 의해 갑이 을을 무시하기도 하고, 을이 갑을 나쁜 사람이라고 협박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전(相轉)하는 변화는 의식(意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법이며, 이러한 변화를 능히 일으킬 수 있는 능변식(能變識)에는 오직 세 가지 뿐이라고 했다.
서양철학에서 보는 아(我)와 법(法)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한 데카르트의 명구는 이원론(二元論)적 사상이고, 이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해 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이 명구의 사상은 생각하는 주체의 생각이 그 존재를 결정짓는다고 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의 대상이 항상 이원화(二元化)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원리 하에서는 주체가 생각하는 대로 객체가 존재하는 이론이므로 주체와 객체가 항상 이분법(二分法)적으로 나누어져 주체는 그의 능력에 따라 항상 주체가 될 수 있고, 객체는 항상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정의를 내리게 되어,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남북미, 동양에 식민지 정책을 펴나가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 사상은 또 기독교의 이분법(二分法)적 선교활동의 받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또 기독교의 이분법적 교리에서 데카르트의 이 사상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이 사상은 주체는 객체를 정복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개념을 법칙으로 세워 다른 사람을 잡아 노예로 삼고,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취하고, 남의 나라를 정복하고, 타종교를 파멸시키고, 자연을 정복하여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상적인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에서 아법상전(我法相轉)은위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해당되는 명구이다.
나에게 어떤 경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아(我)와 법(法)이 동시에 일어나야 경험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경험이란 생각이니 생각이란 나와 네가 만날 때 시작된다. 아(我)와 법(法)이 만나기 전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나와 네가 만날 때 작용을 시작하여 자기 의사를 들어내는 법이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혹은 생각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객체가 만나야 됨을 말한다. 내가 없는 네가 존재할 수 없고, 네가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상전(相轉)이다. 그리고 네가 아(我)가 될 때는 내가 너의 법(法)이 된다는 상전(相轉)의 개념, 상대성(相對性)이 성립하게 되어 있어 상호보완적이고 협력적이 되어야 한다는 불교의 연기론이 성립되는 바탕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아(我)와 법(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서로 변전한다.”는 두 명구는 서양역사와 동양역사의 발전을 완전히 상반(相反)되게 만든 철학의 근원으로써 너무나도 대조적인 의미를 가진 명구임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알아도 불교의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이, 혹은 아법상전(我法相轉)이 이에 비교되는 불교의 존재론의 명구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보는 아(我)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주재자(主宰者)로서의 ‘나’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고 결정하고 행하는 주재자로의 ‘나’에는 피(被)주재자로서의 ‘나’도 있다는 것이 아법상전(我法相轉)의 의미이다. 이 ‘나’는 시간과 장소 대상에 따라 주(主)가 되기도 하고 객(客)이 되기도 하고, 능(能)이 되기도 하고 소(所)가 되기도 하며, 인(因)이 되기도 하고 연(緣)이 되기도 하며, 주는 자가 되기도 하고 받는 자가 되기도 하며, 말을 하는 자가 되기도 하고 듣는 자가 되기도 하는 ‘나’이다.
2)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자로서의 ‘나’이다. 나고 죽음이 없는 영생(永生)하는 ‘나’에는 또 나고 죽음이 있는 ‘나’도 있다. 나고 죽음이 있는 ‘내’안에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무엇이 있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이 몸의 생(生)과 멸(滅), 즉 윤회(輪回)를 주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시방세계를 먹음은 자로서의 ‘나’이다. 공(空)이 된 ‘나’, 적멸이 된, 혹은 열반에 오른 ‘나’는 시방법계와 하나가 된 ‘나’인 동시에 시방법계의 한 미진(微塵)으로서의 ‘나’이기도하고 과거, 현재, 미래가 내 한 생각 순간 속에 있기도 하고 한 찰나 앞을 볼 수 없는 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전체로서의 ‘나’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나’가 있다. 전체로서의 ‘나’는 능(能)이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소(所)가 된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유가설아법(由假說我法) 유종종상전(有種種相轉)
아(我)와 법(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서로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전한다.”는 여러 가지 모습은 ‘나’자신이 ‘너’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되고 싶지만 ‘너’도 나를 완전히 제압하여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할 것이니 대립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내가 너로부터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받거나,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지만, 상전(相轉)하여 네가 나로부터 그러한 경험을 당할 수도 있으니 자연히 ‘나’와 ‘너’의 관계는 복잡 미묘한 일들로 서로가 변전하는 것이니, 네가 잘됨으로서 내가 잘 될 수도 있고, 내가 잘됨으로서 네가 잘될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의미도 있다.
피의식소변(彼依識所變) 차능변유삼(此能變唯三)
‘나’와 ‘너’의 관계가 복잡 미묘한 일들로 변전되는 것은 의식(意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변전을 시키는 주체는 의식이다.
此能變唯三 이렇게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의식에는 오직 세 가지 뿐이다.
[다시 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원래는 ‘너’와 ‘나’의 분별이 없었는데, 너와 나의 과거세에 지은 업식(業識)에 의해 나와 너는 아(我)와 법(法)으로 나뉘어 지게 되었고, 나누어졌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원하는 것들이 있어 이들이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이 서로 간에 전변(相轉)하여 일어난다. 이 상전(相轉)은 의식(意識)(마음)에 의해 변전(變轉)되는 바이고, 이 의식에는 오직 세 가지뿐이다.
지난 주에는 아법상전(我法相轉)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구에 비교되는 불교의 존재론이라고 했다. 아(我)와 법(法)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서만이 만법이 생성 존재할 수 있고, 또 상전(相轉)함으로 너와 나의 입장이 서로 바뀔 수도 있고, 또 너와 내가 연(緣)해야 무엇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리고 연이 다할 때 법(法)도 다하고 상전(相轉)도 다하여 아(我)도 사라지는 이치를 설명했다.
그리고 아(我)와 법(法)이 상전(相轉)한다는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말을 할 때는 네가 있으니까 내가 말을 하는 것이니 아와 법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때, 내가 아(我)이고, 나의 말의 상대인 네가 법(法)이 된다. 그리고 네가 말을 할 때는 내가 너의 말을 들으니, 내가 법이 되고 네가 아가 되는 것이니 아법상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이러하니 말할 때 상대방에게 바르게 그리고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그 노력이 돌아서 상대방이 나에게 바르게 그리고 편안하게 대하게 되고, 또 그 반대도 성립된다는 뜻으로 아법상전(我法相轉)을 해석하였다.
그리고 아와 법은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무엇인가 일어난 것이 있으므로 내가 생각하게 되는데, 일어난 것이 법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다. 즉 법이 일어나니 동시에 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원효스님께서 간밤에는 잠을 편안히 잤는데 그 다음 날은 뼈와 해골을 보고 그 곳이 무덤인 줄 알았을 때 무엇인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있었기에 밤이 새도록 귀신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며 밤잠을 설치게 된 것이다. 이 때 그 해골 뼈를 보고 두려움을 느낀 마음이 법이요, 그 두려움을 보는 내 마음이 나이다. 이 경우는 내 마음 안에서 아와 법이 동시에 일어난 것인데, 이 때 아가 그 두렵게 생각되는 법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의 대상인 법과 두렵게 생각하는 아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고, 두려움이 소멸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 소멸될 경우 법이 소멸된 것이고, 법이 소멸되었으므로 해골을 두렵게 생각했던 아도 소멸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법상전이다.
이 때, 아(我)가 주체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므로 능변(能變)이라 하고, 이 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아래 게송에서 설명한다.
제 2 송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위이숙사량 급료별경식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초아뢰야식 이숙일체종
[위 일송(一頌)에서 차능변유삼(此能變唯三)]이라 말한 3식(三識)은] 이숙(異熟)과 사량(思量) 그리고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 한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며 이숙(異熟)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 하기도 한다.
제1송에서 의식(意識)(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 세 가지는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그리고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고 설명했다. 즉 마음에는 이 세 가지 식(識)이 있다고 하여 마음의 구성을 말했다. 이 세 가지 식(識)에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다른 이름들이 있다.
이숙식(異熟識)은 작용하는 공능(功能)에 따라 아뢰야식(阿賴耶識), 종자식(種子識), 함장식(含藏識), 심왕(心王), 심소(心所), 심(心), 제팔식(第八識)이라고도 한다.
사량식(思量識)은 말라식(末羅識), 의(意) 또는 제 칠식(第七識)이라고 하며,
요별경식(了別境識)은 요별경계식(了別境界識), 의식(意識), 혹은 제 육식(第六識)이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세 가지는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이라 했다. 첫째 이숙식은 전생에서부터 유전되어온 업의 종자와 금생에서 경험한 수많은 업의 종자들이 이 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경계를 만나면 순식간에 그에 해당되는 종자의 싹이 트이게 하여 심상(心相)을 이루어 그 경계에 대응하게 하는 마음이다. 사량식은 이 심상을 근거로 하여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등 다양하게 나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마음이다. 요별경식은 이 사량식에 근거하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오관(五官)과의 접촉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하려하고, 다른 것과 다른 점을 분명히 분별하여 신구의 삼업으로 행동을 취하는 마음이다. 한 사물이나 생각에 대해 행동이 일어나기까지 찰나사이지만 이 세 가지 단계에서 작용이 일어나니 이 세 가지 단계의 작용을 각각 이해하고, 상대방을 대하는 내 마음의 잘, 잘못을 찾아 수행을 통해 모두 공생(共生)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우리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그 다음 구절(句節)에서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이숙식(異熟識), 혹은 종자식(種子識)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여 제8식의 공능(功能)을 설명하려 한다.
아뢰야식이라 할 때는 그 공능이 능변(能變),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서 살아 있는 동안 나를 운전하는 주체이고, 죽을 때 죽어가는 몸에서 제일 마지막에 떠나고, 다음 생에 몸을 받을 때는 부모를 택하고, 모태(母胎)에 탁태하며, 그 식에 함장된 종자의 성격에 따라 육신(肉身)과 정신을 발육하게 하는 자이며, 발육이 완성되면 출태하게 하는 자이다. 출태하여 생노병사의 과정을 주도하고 죽을 때는 육신과 정신의 모습 그대로를 다시 수습하여 함장 한다. 육신이 죽어 멸해도 이 아뢰야식은 죽음이 없는 식이라 다음 생을 위해 부모를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식은 불생불멸의 체이고 사량식과 요별경식 그리고 육신은 생멸한다. 그러나 멸할 때는 이들이 모두 인(因)이 되는 종자로 아뢰야식에 함장 되어 있다가 다음 생에 일체 정신적 육체적 발육, 성장, 유지, 쇠퇴의 조건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공능을 갖는 이름이다. 인도말의 음역이다. 죽어서 멸하는 사량식, 요별경식, 그리고 육신은 종자로서 불생불멸하는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다음 생에 다시 연에 따라 다르게 싹이 트게 됨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 고 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의 원리에 의하면 다음 생에 택하고자 하는 부모에 탁태하는 일이 수많은 아뢰야식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됨으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고 수행해 해탈을 해야 한다고 한 것이고, 금생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그리고 소질은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이 진화론의 근거가 된다.
이 아뢰야식은 또 잠시도 쉬지 않고 작용하여 잠잘 때도 쉬지 않고 숨을 쉬게 하고 심장을 박동하게 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하는 역할을 한다. 몸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배설하며, 피로한 것, 위험한 것 등을 암시해 주고 또 많은 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는 면역성을 기르는 역할을 하는 등 다양하게 자기 보호를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하는데,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가 연을 만나 현상으로 나타날 때, 종자와 열매(因과 果)가 같지 않은 식이라 하여 이숙식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평소에 복을 많이 지어 놓았으면 좋은 연을 만나 가정이 좋은 집에 태어나게 된다든지 그와 반대로 나쁜 집에 태어나게 되는 수도 있고, 축생으로, 지옥으로 또는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어떠한 종자를 많이 심었느냐에 따라 현재와 다르게 익는다고 하여 이숙식이라 했다. 이는 한 종자가 열매를 맺을 때, 그 결과가 처음의 종자, 인(因)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데 그 다른 것이 같은 종류 중에서 다를 수도 있고 육도윤회(六道輪廻) 중에 천상에 태어난다든지, 짐승 혹은 지옥에 태어나는 것과 같이 다른 종류로 태어날 수 있으며, 시간적으로도 오늘 내일 사이, 일년, 십년, 내생 등 다양하게 다른 시간에 태어날 수 있는 공능(功能)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종자식(種子識)이란, 제8식의 뜻을 수많은 전생에서 지금까지 사람마다 자기가 지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그대로 제8식에 보관되어 있다가 어떤 연(緣)을 만나면 그 연에 따라 싹이 트게 되어 현실에 나타나게 됨으로 이를 종자식이라 했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의 기능에 따라 우리 육체와 정신에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그 중 하나라도 작용하지 못할 때 우리들이 받는 고통을 생각해보면,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학업 운, 사업 운, 관운 등 일체 운이 이 종자식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종자는 하나님이나 혹은 부처님이 심어주신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스스로 심은 것이다. 이것을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 하는데, 업(業)을 여기에서 종자라고 불렀다.
이 아뢰야식은 우리가 컴퓨터에 입력해 놓은 것을 우리가 언제나 이용할 수 있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업)가 우리 몸, 정신 및 생활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과응보 사상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제 3 송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료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제8아뢰야식의) 집수(執受), 처(處), 요(了)의 작용을 가히 알 수 없고, (또 이 식이) 항상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과 사(思)에 주는 영향도 알 수 없다. 오직 사수(捨受)에만 상응한다.
제3송에서는 제8 아뢰야식의 작용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을 알 수 없는가? 이는 컴퓨터를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불가지(不可知) 집수(執受)라고 하는 것은 ‘받아 지니는 작용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한 생각, 말, 행동의 삼업들을 어떻게 아뢰야식이 받아 지니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작용을 보면 분명히 받아 지녔는데 어떻게 받아 지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말씀이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신구의 삼업의 종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서 지니는 그 기능의 한계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가지 처(處)란 이 아뢰야식이 있는 곳(住處)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또 수많은 세월동안 있었던 정보를 모두 저장하는 곳이라 하나, 그 저장하는 장소가 어디이며, 그 양과 질이 얼마나 무한한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불가지 요(了)란 저장된 정보가 수없이 많고 수많은 겁 전의 정보라 하더라도 그들이 섞여서 알기 어려운 일이 없도록 잘 보관되어 조금도 분별함에 어려움이 없고, 또 분별되지 않음이 없는 기능의 한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듣고 본 것을 분명히 기억하거나 암기한 것이 분명히 외워지는 것이나 한국말이든 영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를 명료하게 요별(了別)할 수 있기 때문인데 아뢰야식이 어떻게 이렇게 하는지 불가지(不可知)이다.
우리가 듣고 보고 말할 수 있고, 천수경을 외우고, 반야심경을 외울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아뢰야식이 이들을 집수(執受)하여 저장하는 장소(處)가 있고, 연(緣)을 만날 때 이들을 요별(了別)하여 즉시 상응(相應)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데, 치매증이 있는 사람은 이 아뢰야식의 요별에 혼란이 있는 사람이다. 만일 아뢰야식에 이 요별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혼란스런 세계에 살게 되었을까? 아뢰야식의 이 불가지한 능력에 신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이나 대상을 바르게 요별할 수 있는 능력이 성공과 행복을 좌우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할 때 너무나 귀중한 기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불가지(不可知)한 것은 아뢰야식이 항상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에 주는 영향이다. 아뢰야식은 이들이 의지하는 심소(心所)가 되는데, 어떻게 제8식의 작용이 제6식과 제7식의 작용의 근거가 되고, 또 그들의 작용을 어떻게 받아 지니는지, 어디에 그 작용의 씨앗이 저장되는지, 어떻게 그들을 분별하여 연(緣)이 닿으면 나타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제8 아뢰야식이 제6식의 작용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과 제7식의 작용인 사(思)의 심소(心所)로서 이들의 작용의 근본이 되지만 오직 사수(捨受)와는 상응한다고 했다. 이는 수(受)작용에는 고락(苦樂), 우희(憂喜), 사(捨), 다섯 가지의 수작용이 있는데 이 중, 고락과 우희작용과는 상응하지 않고 다만 사(捨)작용에만 제8식이 상응한다는 말이다. 사작용은 고락 우희가 없는 작용이다. 이는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지니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6식과 8식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면 좋다. 6식은 8식에 의지해서 행동하는 식이고, 8식은 행동하는 6식의 의지처이면서 6식이 행한 행동을 집수(執受), 즉 받아 지니는 곳이다. 6식이나 7식이 한 이 행동들은 누구에게서나 이 8식이 두루 받아들이는 마음이라 하여 변행심소(遍行心所)라 한다. 심소(心所)란 행동하는 마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이란 뜻이다. 주(主)가 아니라 객(客), 능(能)이 아니라 소(所)라는 말인데 헷갈리기 쉽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Yes라고 해야 할 때 No라고 하는 격이 된다. 아뢰야식이 변행심소(遍行心所)가 되어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다섯 가지 작용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두루 받아 지니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 한다. 이 오변행이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행이 일어나게 됨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종자가 오변행의 근본이 되니, 아뢰야식이 오변행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촉(觸)이라 함은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 접촉되는 것을 의미한다. 눈은 안근(眼根)이고 사물은 색경(色境)이며, 눈으로 본 것을 인식하는 마음은 안식(眼識)이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접촉이 불가능하고 세 가지가 접촉될 때를 촉이라 한다. 눈동자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안근(眼根)의 문제이고, 눈에 관련된 신경이나 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안식(眼識)의 문제이며, 빛이 없거나 사물이 없는 것은 색경(色境)의 문제이다. 이 세 가지 부분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접촉(接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육근(六根)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경(六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식(六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이들을 십팔계(十八界)라고 부른다.
작의(作意)는 접촉이 되었을 때 경각심을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반응이다.
이 반응에서 느끼는 것을 수(受)라고 하는데, 수(受)에는 육체적인 고락(苦樂), 정신적인 우희(憂喜), 육체이든 정신이든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을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 하기도 하고 사(捨)라고 하기도 한다. 이 사수(捨受)를 적멸(寂滅)이라 하기도 한다. 이 다섯 가지 느낌을 오수(五受)라 한다.
상(想)은 수(受)에서 느낀 바를 생각하는 것이고.
사(思)는 생각해본 결과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인가 해가 되는 것인가? 득이 되면 얼마나 득이 되고, 해가 되면 얼마나 해가 될 것인가 등 여러 가지로 나와 이해관계의 입장에서 재보는 생각이다.
제6 의식이 하는 촉, 작의, 수, 상과 제 7식이 하는 사의 작용이 제8식에 의지하여 행해지고, 그 행이 업의 종자로 다시 8식에 저장되는데 이 작용을 8식이 상여(常與), 즉 항상 주는 8식의 작용이라 했다. 그리고 이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 중 수심소에서는 고락(苦樂)과 우희(憂喜)와는 상응(相應)하지 않고, 사수(捨受)만 상응한다고 했다. 즉 좋고 나쁘다는 제6식의 감정(感情)에는 제8식이 상응하지 않으나 사수(捨受)와는 동격(同格)으로 상응한다는 말이다.
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부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으니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사(捨)[무부무기(無覆無記)]가 된다.
시무부무기(是無覆無記)란 아뢰야식의 체(體), 즉 근본 자리는 물들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도 치우침이 없는 자리이다.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니 번뇌가 없고, 선악(善惡)에 치우침이 없다는 말은 좋고 나쁜 것에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선인(善因)에 집착이 없으니 선과(善果)에도 집착이 없고, 선인(善因)이 없으니 악인(惡因)도 없다. 악인이 없으니 악과(惡果)도 지어지지 않는다. 이는 곧 인과(因果)가 없다는 말이 되고 인과(因果)가 없다는 말은 생(生)하는 것도 없고 멸(滅)하는 것도 없다는 뜻이 되니, 시무부무기(是無覆無記)가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비유로 아뢰야식의 체(體)를 설명하고자 한다. 음식을 담는 접시가 체에 비유된다. 어떠한 음식을 담아도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고, 그로 인해 오염됨도 없으며 선악(善惡)도 없다. 다만 그에 담긴 음식이 오염될 수도 있고, 좋은 음식 혹은 나쁜 음식이 있을 수 있고, 음식을 담았을 때는 생(生)이고, 그에 담긴 음식을 버리고 씻는 것은 멸(滅)인데, 접시 자체는 불생불멸이다.
이러하니 무부무기(無覆無記)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의미한다. 공(空)한 자리는 곧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하다는 말인데, 이 자리가 곧 제8아뢰야식의 체(體)라고 했다. 근본은 무부무기이지만 우리들이 숙세에 지은 업에 의해 우리들의 마음에는 번뇌가 있고 선악이 있으므로 선인(善因) 선과(善果), 악인(惡因) 악과(惡果)의 육도윤회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항상 폭포수가 흐르는 것과 같이 빠르게 전변되어 간다. 그러나 범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체 번뇌와 선악(善惡)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소멸하고 여의었을 때 아라한(阿羅漢)의 계위(階位)에 오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아라한은 생멸이 있는 제6식과 제7식을 항복받아 청정무구한 제8식에 안주(安住)하게 된다. 이 자리를 반야심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고, 또 이 자리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체험하게 된다고 하셨다. 표현은 다르지만 진실은 반야심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촉등역여시(觸等亦如是)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도 그와 같다고 한 것은 이들의 체(體)도 아뢰야식의 체와 같이 무부무기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작용은 제8식에 저장된 정보에 의지해서 작용하는 제6식이 능변식(能變識)이 되어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작용을 일으키고, 그 동작이 그대로 제8식에 저장되는데 이때 8식은 6식의 작용을 받으므로, 6식의 작용을 받는 8식을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고 하는데 이 오변행심소도 무부무기(無覆無記)하다고 했다. 이는 8식의 오변행심소도 그 체가 청정무구하다는 뜻이지, 제8식에 번뇌 종자나 선악의 종자가 없다는 말도 아니고 오변행이 무부무기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8식인 오변행의 심소(心所)의 체만이 무부무기로 봐야 한다. 제6식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오변행의 체는 무부무기이나 그 8식에 저장된 업식에 영향을 받은 상(相)은 유부유기(有覆有記)이다. 번뇌도 있고 선악이 있으며 인과(因果)도 있는 동작이다.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는 반야심경의 오온(五蘊) 중 수상행식(受想行識)에 해당하고 유식30송 첫 구절에 나오는 법(法)은 오온 중 색(色)에 해당한다. 그리고 촉(觸)은 색(色)을 전제로 한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空)하다는 말과 유식에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가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하는 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항전여폭유(恒轉如瀑流) :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다’고 한 것은 제6식과 7식이 제8식에 저장된 번뇌와 선악의 씨앗에 의지하여 항상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오행(五行)의 움직임이, 곧 사물이나 마음의 대상을 접촉할 때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해가는 것이 마치 폭포수와 같이 빠르게 흐른다는 말이니, 번뇌로 인한 생멸하는 인과가 빠르게 전개되어간다는 말이다.
아라한위사(阿羅漢位捨)는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사(捨)가 된다. 즉 적멸(寂滅), 혹은 무부무기(無覆無記)가 된다. 그러나 아라한의 계위에 오를 때까지는 번뇌의 흐름이 폭류(瀑流)와 같다고 했다. 번뇌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아라한위사(阿羅漢位捨)란 아라한의 계위에서는 아집과 법집을 모두 소멸하여 일체 번뇌의 흐름이 끊어졌음을 뜻한다. 즉 부처, 열반 혹은 극락세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아라한의 4계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설하셨고 그렇게 집행하셨으며 세존 스스로도 아라한이라 칭하셨음을 유의해야 할 줄 안다. 대승불교 권에서 아라한을 부처님 살아생전에 설하신 것과 다르게 해설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수행정도가 그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아라한과 보살을 분별하는 분별심을 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라한은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끊지 못하였다거나, 보살이 아라한보다 상위에 속한다.’ 고 하는 것 등은 불멸(佛滅) 후 약 400~500년경에 대승불교 권에서 주장한 설이라는 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지난주에 강의한 것을 간단히 복습하여 보자.
제 2송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요별경식(了別境識) 삼식(三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고, 처음 이숙식은 아뢰야식, 종자식(種子識), 함장식(含藏識), 심(心), 심소(心所), 심왕(心王), 제8식 등으로 불러 그 성능을 표현한다고 했다. 아뢰야식은 내 몸 안에 있는 일체 장기를 관장하여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유지하게 하며,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일체 업의 종자를 함장하고 있다가 연을 만나면 싹이 터 작용하고, 그 작용한 업을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생활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죽을 때는 우리들의 육체의 성질이 그대로 제8식에 함장 되고, 사량식과 요별경식도 그대로 제8식에 함장 되어 있다가 죽으면 육체를 이탈하여, 다시 연을 만나 다음 생을 맞게 된다고 했다.
제 3송에서 아뢰야식의 성(性)은 불가지(不可知) 집수(執受), 처(處), 요(了)하고, 불가지 상여(常與)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하고, 불가지 상응(相應) 유사수(唯捨受)라 했다.
제 4송에서 아뢰야식의 체(體)를 성명했다. 아뢰야식의 체는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체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번뇌 선악의 망상은 폭포수와 같이 흐르지만 아라한의 계위에 오르게 되면 일체 번뇌 선악시비가 사라지고 제8 아뢰야식의 근본자리인 무부무기에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제 5 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라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다음, 두 번째로 능변(能變)하는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그것[제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그것[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는다.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아뢰야식이 제1 능변(能變)식이고, 그 다음으로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식(識)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말나(末那)는 인도말의 음역이고, 의(意)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식(六識)인 의식(意識)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주로 말나식이라 부른다. 의(意)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意志)를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제6송에서 의지적(意志的)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의피전(依彼轉)의 피(彼)와 연피(緣彼)의 피(彼)는 제8 아뢰야식의 대명사이고, 주어 제7 말나식은 생략되어 있다. 말을 붙여보면, 제7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아뢰야식에 의지[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한다.
제8 아뢰야식에는 수많은 겁 동안 쌓여져온 생멸하는 수많은 인과의 종자가 함장 되어 있는데, 제7 말나식은 이 아뢰야식에 함장 된 업의 종자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이에 의지[반연]하여 사량하므로 이 함장식에 저장된 종자의 성질의 영향을 받아 제7식이 사량하는 성(性)과 상(相)이 결정되게 되어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유정(有情)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고, 건강하게 오래살기를 바라며, 자기를 사랑하고, 남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며, 남보다 낫기를 바라고, 항상 불안하여 안정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 요구하는 욕심(欲心)이 있다. 이러한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킬까하고 이리저리 재보는 성품을 성(性)이라하고, 이 성품이 구체적인 표상(表相)으로 나타날 때 이를 상(相)이라 한다.
어떤 사람의 제7 말나식의 사량(思量)하는 성(性)은 그가 사량하고 행동하는 습성에 따라 상(相, mode)이 형성되고, 그 상은 그 사람의 언행에서 표상(表相)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언행에서 그의 표상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고, 그 표상에서 그의 말나식의 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때 이 상과 그의 말나식의 성(性)은 같을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사량하는 상(相)을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했고, 이 상을 공하게 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취지이지 말나식의 성(性)을 공하라는 뜻은 아니다. 말나식의 성에는 무아상(無我相)이 될 수 있는 성이 있기에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기적인 상을 가진 사람도 이기적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량성(思量性)을 가지고 있으니 의식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언행, 즉 보시 행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의 말나식의 상(相)이 보살상(菩薩相)으로 바뀌게 되어 그가 하는 언행으로 그 상이 표출되어 보살위의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의 사량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에 반연하여 사량하므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관계는 말나식이 능연(能緣)이 되고 아뢰야식이 소연(所緣)이 된다. 말나식이 능변(能變)이고 아뢰야식이 소변(所變)이다.
심성(心性)을 바르게 하기 위한 수행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뢰야식을 소연으로 하여 반연하는 말나식이 능변식(能變識)이므로 말나식을 제어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말나식이 하는 사량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법이니 아뢰야식이 말나식의 사량하는 성질을 좌우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능인(能因)이 되고 말나식이 소연(所緣)이 됨으로 아뢰야식을 제어함으로서 말나식이 제어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종자들을 통틀어 업장이라 한다. 이는 업장 소멸하는 기도, 참선, 사경 등의 수행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의 관계를 또 다른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뢰야식 : 수많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뿌려진 종자를 이 몸의 아뢰야식에 함장하고 있다가 연을 만나면 발아(發芽)한다는 설과 유사한 용어 중에는 DNA 혹은 유전인자 등이 있다. 유래된 어원이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하게 제8식과 같은지는 모르지만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면에서만 보면 유사성이 있어 제8 아뢰야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前) 종자에 있는 DNA가 다음 종자로 유전된다는 설과 진화론(進化論)은 전생에 있었던 아뢰야식이 금생에 와 전생의 성품이 금생에 상속되고, 또 금생에 쌓은 성품이 다음 생으로 상속된다는 불교의 설과 유사성이 있다.
아뢰야식에 함장된 종자라는 말은 사람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쌓아온 경험에 따라 육체와 성격의 형성 및 변화가 있게 되는데, 사람마다 그 성격의 체성(體性)이 다른 원인이라는 말이다. 그 체성이 다르다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취향(趣向)이 다르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체성이나 취향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각자의 성품의 빛깔이 다르고 그 찐한 농도가 다르다는 말로 은유(隱喩)될 수 있다.
말나식 : 의피전(依彼轉),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色)에 의지하여 움직인다는 말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있는 업의 색을 ‘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고, 그 나에 집착하여 나를 유지 및 증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사량 및 그들을 취하려는 사량을 제8식에 반연하여 일으킨다는 말이다. 술, 담배, 노름, 마약 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들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인(業因)에 의지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자기인줄 알고 그들에 집착하고 사량하는 것이 한 예이다. 명예, 재물, 색욕 등에 욕심내고 탐하는 것들도 모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남에게 들어내고자 하고, 존재를 인식시키고자 하며, 남보다 우월함을 보이고자 하는 아상(我相)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일으키는 심한 사량을 아집(我執)이라한다. 그리고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色)에 의지해서 말나식에 나타난 색(色)을 법(法)이라 하고, 그 법이 실제로 있는 줄 알고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 한다.
‘나’라고 하는 나는 제7 말나식에 의해 이와 같이 조작된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대상도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그 대상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담배를 좋아한다 혹은 술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그럴만한 업인(業因)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있기 때문이고, 술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제8 아뢰야식에 그러한 업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술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술 담배를 좋아하는 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그러한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계속 취하는 것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나 술이 있다고 보는 것은 자기의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인(業因)에 의한 것이나, 그런 줄 모르고 그러한 담배나 술이 진실로 그와 같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상(法相)이고, 그들이 좋다고 계속 취하고자 하는 것을 법집이라 한다.
이러한 아상과 법상을 소멸하여 제7 말나식으로 하여금 진아(眞我)를 인식하게 할 수 있을 때, 제7 말나식은 참 나를 개별적인 ‘나’로 보기보다 일체중생의 일원(一員)으로서의 나를 보고 인식하고 더블어함께 즐길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정진하게 될 것이다.
제 6 송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사번뇌상구 위아치아견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병아만아애 급여촉등구
[제7식은] 4번뇌(四煩惱)를 항상 함께 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이다. 그리고 촉(觸) 등에도 모두 함께 영향을 미친다.
위 제5송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아뢰야식에 저장된 색(色)을 ‘나’라고 생각하여 그 ‘나’를 남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그 나를 남보다 잘나게 보이고 싶고, 남에게 그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고, 영원히 그 ‘나’를 유지하고 싶은 충동이 항상 작용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 불안해하고, 남으로부터 침해를 받아 존재에 위험이 있다고 느낄 때, 공포(恐怖)로 떨게 하여 제6식이 그에 대치하고자 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한 불안한 사정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경계하고, 남보다 안전하고 좋은 위치를 먼저 독점하고자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모든 정보에 반연하여 온갖 사량(思量)을 다하고, 사량된 것을 제6 의식에 전달하여, 그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하고, 그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도록 한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의 행을 사번뇌(四煩惱)와 촉(觸) 등으로 나누었다. 사번뇌(四煩惱)는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라고 하고 촉등구(觸等俱)라고 했다.
아치(我癡), 내가 어리석다고 한 것은 제8 아뢰야식에 불생불멸하는 나도 있고 생멸하는 나도 있다. 불생불멸하는 나는 항상 평온하게 변함없이 있는 나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수많은 겁 동안 쌓여져온 경험으로 이루어진 생멸하는 업(業)의 색(色)이 ‘나’라고 착각하여 업의 색에만 집착하니 어리석다고 하여 아치(我癡)라고 했다. 그리고 생멸하는 ‘나’는 무엇에 연하여 생하는 것이고, 그 연이 다하면 멸하는 것이니, ‘나’는 무엇과 연하여야만 존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독존(獨存)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남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거나,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식이나, 자기가 남보다 잘났다는 생각이나,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 등이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여 아치라고 한다.
이 송에서 말나식의 작용을 아치, 아견, 아만, 아애, 그리고 촉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아치(我癡)를 세분(細分)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명(無明)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견(我見)은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業) 덩이에 반연하고 사량(思量)해 심상(心相)을 만드는데 그 심상을 자기가 만든 것인 줄 알지 못하고, 그에 비춰지는 ‘나’를 확고한 나, 영원불변하는 나, 진실로 존재하는 나, 남과 다른 나, 남보다 우월한 나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이기에 사람마다 생각하는 ‘나’가 다를 수밖에 없고, 말나식이 강할수록 강한 아견(我見)이 만들어진다. 아견이 강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약하여 화합(和合)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함께 같이 일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항상 잘된 일은 자기가 했다는 것을 나타내야만하고, 못된 일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야만 하는 견해인데, 사정이 그렇지 못할 때는 불만과 분노가 대단해 화합이 깨지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 아견을 ‘가짜 나’라고 하여 가아(假我)라고 하고 참된 내가 아니라고 하여 이 아견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을 하게 한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이 말나식에 의한 사람의 심성(心性)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고 정립시킨 철학이라 개인주의(個人主義)와 개인의 인권(人權), 그리고 개인 이기주의를 중요시하는 정치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이기주의의 극단은 자식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친부모를 죽이는 일,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해 동료를 총살하는 일, 자기감정의 불만 해결을 위해 자녀를 두고도 이혼하는 일, 집단이기주의자들이 전쟁을 좋아하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 이기주의는 아견(我見)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불교적 사상은 아니나, 아견(我見)에서도 예지(叡智)를 개발할 수 있으므로 산업 및 사회발전을 기하여 왔다. 그러나 이 예지는 총명(聰明)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교에서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일체 업장을 소멸하여 아견을 없앰으로서 얻어지는 지혜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예지는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기 위한 총명이고, 지혜는 공동체의 고난을 함께하고 이를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한 방편이다.
아만(我慢)이란 위 아견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業識)에 말나식이 의지하고 사량해 만든 심상(心相)에 비춰진 나를 보고 착각하여 ‘인식된 나’를 아견이라 하고, 이 나가 그 심상에 비춰진 세계가 진짜이고 모두라고 착각하여, 자기만이 세상일을 모두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여 남을 경시하고, 남의 허물은 볼 줄 알아도 자기의 허물을 볼 줄 모르며, 자기가 아는 세계가 얼마나 좁은 세계인지, 자기가 모르는 세계가 얼마나 많고 넓은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태도이고, 자기의 욕망을 취하기 위해 남을 가볍게 여기고, 착취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러고도 남이 자기를 위대하다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불교에서는 아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자기를 남과 결별시켜 외롭게 하고, 자기가 만든 좁은 세계 안에 자기를 구속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되고, 또 연기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여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심상으로 본다. 이러한 심상을 소멸하게 하기 위해, 아공(我空), 하심(下心) 등의 법문을 한다.
아애(我愛)도 위에서 설명한 아견(我見)에서 나오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기적(利己的)인 사랑이다. 주변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물건이나 사람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택하고 취하며, 언제라도 싫어질 때는 버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만족되었을 때 또 다른 사랑을 원하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성취되지 않을 때 분노가 극에 달한다. 남의 빚을 내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야하는 마음, 자기 분수에 넘치게 좋은 집, 좋은 동내를 찾는 마음 등도 아애심이다.
아애란 이러한 사랑이니 자연적으로 남의 원한을 사는 원인이 되는 사랑이고 그 과보를 받게 될 사랑이므로 불교에서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하여 적적(寂寂) 요요(遙遙)히 고요하게 하라고 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이상 네 가지 번뇌를 근본번뇌라 하고, 이 근본번뇌에서 파생되는 번뇌를 지말번뇌 혹은 수번뇌라고도 하는데 이를 촉등구(觸等俱)라고 했다.
촉등구(觸等俱)라고 하는 것은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중 촉(觸)을 들어 촉 등이라 하고, 여타 수번뇌를 포함하기 위해 구(俱)를 가하여 촉등구(觸等俱)라고 했다.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는 제6식과 7식의 작용인데, 제8 아뢰야식에 반연하여 일어나고, 아뢰야식은 이 작용들의 심소(心所)가 되므로 아뢰야식을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으므로 오변행(五遍行)도 제8 아뢰야식의 업식(業識)에 따라 제7 말나식이 일으키는 사번뇌(四煩惱)에서 파생하여 작용한다. 오변행심소에 대하여는 제3송에서 설명한 바 있고, 여타 수번뇌에 대하여는 아래 게송에서 설명될 것이다.
제 7 송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유부무기섭 수소생소계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아라한멸정 출세도무유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섭(攝)하여 생(生)하는 바에 따라 얽매인다. 아라한(阿羅漢)이나 멸진정(滅盡定) 혹은 출세도(出世道)[를 이룬 자에게는 7식의 유부(有覆)가] 없어진다.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유부무기섭 수소생소계
유부(有覆)라는 것은 제7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소장된 업식(業識)에 의해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수많은 번뇌로 물이 들여져 그 업식에서 표출된 나를 세우고 위하기 위해 온갖 번뇌를 사량(思量)한다는 말이다. 제 7식이 사량(思量)하는 바는 아뢰야식에 반연하여 행하고 그 행한 결과는 아뢰야식에 다시 저장된다. 자기중심적인 번뇌를 조장하여 제6식을 물들인다고 하여 제7 말나식을 염오식(染汚識)이라고도 한다.
무기(無記)란 제7 말나식 자신이 사량하여 그 감정을 제6식에 전달하여, 그 감정을 언행(言行)으로 실행 하는 것은 6식이 하므로, 말나식은 선악(善惡)을 짓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기(無記)라 했다.
섭(攝)은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으로부터 염오(染汚)를 섭수하고 무기를 섭수한다는 말이다. 나쁜 짓을 좋아하여 나쁜 짓을 좋은 일로 착각하여 받아들이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재고 따지고, 제6 의식을 물들게 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언행(言行)으로 지금 당장 실행하도록 하는 섭(攝)의 작용이 제7 말나식에 있다.
수소생소계(隨所生所繫)란 생하는 바에 따라서 계박(繫縛)되는 바가 된다.
수소생(隨所生)이란 유정(有情) 중생이 죽을 때, 제7 말나식이 지은 업은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7식은 소멸된다. 죽은 다음, 8식은 그가 지은 총체적인 업에 따라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 제8식은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중 8식에 저장된 업력에 따라 다음 생이 선택되어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 수소생(隨所生), 즉 ‘태어나는 바에 따라’ 이다.
소계(所繫)란 혹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서, 지옥중생으로 태어났으면 지옥중생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그에 구속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설사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제8식에 소장된 업의 구속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수소생소계(隨所生所繫)하므로 수행하여 제8 아뢰야식에 소장된 업의 종자를 소멸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제8 아뢰야식에 소장된 업의 종자를 소멸한 수행 계위를 아라한(阿羅漢), 멸진정(滅盡定), 출세간도(出世間道)라고 하는데 제7 말나식의 아(我)에 집착하는 사번뇌(四煩惱)를 소멸하여 만법의 본성은 평등하다, 혹은 만법의 본성은 같다는 진리를 깨달을 때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증득했다고 하고, 제8 아뢰야식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아라한, 멸진정, 혹은 출세간도를 성취하였을 때 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수행에 대해서는 아래 게송에서 설명된다.
지난주에 강의한 것을 간단히 복습하여 보자.
제5송에서 제2 능변식은 말나식이라 하고, 이 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이에 연하여 사량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한다고 했다.
제7 말나식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개인주의적 마음이 성(性)이고, 이에 의지하여 반복되는 마음의 작용이 어떠한 패턴을 만드는데 그 패턴을 상(相)이라 하고, 제6식이 이 상(相)의 영향을 받아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는다고 했다.
제6송에서 제7식이 자기의 이해(利害)에 집착하는 마음이 4가지 번뇌[상(相)]로 항상 작용하는데, 이 작용을 분류하면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라고 했다. 이들을 제7 말나식이 일으키는 네 가지 근본번뇌라고 하는데, 이 번뇌의 영향을 받아 제6의식이 51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이들이 모두 제7 말나식의 성(性)에서 일어나는 상(相)이다.
제7송에서 말나식은 유부무기에 섭(攝)하고 태어남에 따라 계박(繫縛)당한다고 했는데, 이 뜻은 금생에 지은 말나식의 업이 내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육도, 즉 지옥, 아귀, 축생, 사람, 아수라, 하늘에 연을 만나 몸을 받아 태어나고, 그 몸을 받아 태어남에 따라 제7식이 계박된다고 했다. 그리고 금생에 우리들의 수행에 의해 아라한, 멸진정, 출세간도에 오르면 제7 말나식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 8 송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차제삼능변 차별유육종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료경위성상 선부선구비
다음 제3 능변식(第三能變)은 여섯 가지 종류로 구별(差別)되어 있고, 경계(境界)를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으며, 선(善)과 불선(不善) 그리고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非善非不善)을 모두 함께 한다.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차제삼능변 차별유육종
다음, 제3 능변식(能變識)은 제1 이숙(異熟)능변식 (제8식), 제2 사량(思量)능변식 (제7식), 다음으로 제3 육종(六種)능변식 (제1~6식)을 논한다고 제목을 들었다.
이 제3 능변식에 차별이 있는 육종(六種)이 있다는 것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등 여섯 가지가 각기 다른 성능을 가지고 있어 차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眼根, 耳根, 鼻根, 舌根, 身根, 意根)을 포함해서 육종(六種)이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안근(眼根)이란 눈이고, 안식(眼識)이란 눈의 의식인데, 눈의 의식이 작용해도 눈이 멀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눈은 작용한다 해도 안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사물을 의식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각기 차별적으로 기능하는 여섯 가지의 쌍(雙)을 육종(六種)이라 했다고 해석한다.
了境爲性相 요경위성상
경계(境界)를 요별(了別)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삼는다.
앞에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에 관해 공부했다. 오변행(五遍行)은 6식과 7식의 작용인데 이 작용들이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고 또 반연하므로 오변행심소라 한다고 했다. 6식은 또 제7 말나식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경계(境界)에는 육경(六境)이 있는데 그들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제1 눈과 안식은 빛이나 사물을 요별(了別)하고, 제2 귀와 이식(耳識)은 소리를 분별하고, 제3 코와 비식은 냄새를, 제4 혀와 설식은 맛을, 제5 몸과 신식은 촉감 등을 요별(了別)하고, 제6 의식(意識)은 제8과 7식에 의지하여 앞의 5식이 사물과 접촉(觸)하는 작용을 뒷받침하고, 그 접촉에 반응하고, 좋다 나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감정적인 느낌을 일으키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가, 어떤 이익이 있고 해가 있는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등에 대해 사량(思量)하는 성질이 ‘경계를 요별하는 성(性)’이고, 이들에 대해 과거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제6식의 상(相)이 경계를 요별 하는 상(相)이다. 예를 들면, 김치 맛은 과거에 먹어본 김치 맛이 상이 되어 지금 보고 먹는 김치 맛을 분별하는 마음이 경계를 요별 하는 상(相)이다. 어제 썸어타임이 시작되었는데 그 전에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의 상(相)과 저녁에 잠자던 시간의 상에 혼란이 와 당분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것이 경계를 요별 하는 이 상(相)이 바뀌는 시간이다. 상(相)은 말과 행동으로 행위를 일으키는 바로 직전의 마음의 모습이기에 행위(行爲)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마음의 모습이다. 그 마음의 모습이 마음속에 있다가 외부의 경계를 만나면 상(相)에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그 사람의 상(相)을 볼 수 있고, 상(相)에서 성(性)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진행과정을 요경위성상(了境爲性相)이라 했다.
善不善俱非 선불선구비
경계를 요별한다는 것은 경계가 좋다, 나쁘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작용이다.
그러나 이 6식의 성질과 행하는 모습은 과거에 있었던 경험을 저장한 제8식의 업식(業識)과,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맛보면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제7식의 상(相)에 의지해 경계를 요별 하는 성상(性相)이 형성됨으로 6식이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그리고 맛보는 것이 사물, 즉 색성향미촉법이 있는 그대로 안이비설신의가 맛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제8 업식에 저장되어 있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제7식의 상(相)이 어떠냐에 따라 그 대상, 색성향미촉법이 변질되어 느끼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 변질되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물이 있는 그대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다고 생각하는 모순을 끝없이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業識)과 제7식의 상(相)에 의한 6식의 경계(境界)를 요별(了別)하는 성상(性相)은 참된 진(眞)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무엇이 선(善)이고, 불선(不善)이며 불선비불선(不善非不善)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각자의 제8식에 저장된 경험과 제7식의 자기중심적인 사량에 영향을 받아 제6식이 대상을 요별하고 행하는 선(善), 불선(不善), 불선비불선(不善非不善)이므로 갑(甲)이라는 사람의 선(善), 불선(不善)이 을(乙)이라는 사람에게는 불선비불선(不善非不善)인 무기(無記)가 될 수도 있으므로 참된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하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구에서 뜻하는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는 사람마다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라고 해석된다.
글자의 뜻으로는 착한 일, 착하지 못한 일, 착하지도 않고 착하지 않은 것도 아닌 무기이지만, 옳고, 그르고, 무기, 순역(順逆) 무기, 보시 탐욕 무기, 좋고 나쁘고 무기 등과 같은 상대적인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행하는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는 제8식에 소장된 업식(業識)과 제7식의 성상(性相)에 의지해 제6식이 그의 대상을 요별 해서 행하는 행위의 결과가 다시 제8식에 저장됨으로 새로운 종자가 제8식에 심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악한 일보다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함으로서 제8식에 착한 씨앗이 점점 더 많이 심어지게 된다. 이 좋은 씨앗들이 제8식에 많이 저장되면 될수록 좋은 인(因)이 좋은 연(緣)을 만나 복(福) 받게 되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게 된다. 이 가능성은 금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져 간다.
제 9 송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차심소변행 별경선번뇌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수번뇌불정 개삼수상응
이 식의 심소(心所)는 변행, 별경, 선(善), 번뇌(煩惱), 수번뇌(隨煩惱), 부정(不定)이고, 삼수(三受)와는 모두 상응한다.
차심소(此心所)란 이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51가지로 분류(分類)해 설명한다. 변행에 5가지, 별경에 5가지, 선(善)에 11가지, 번뇌에 6가지, 수번뇌(隨煩惱)에 20가지, 부정(不定)에 4가지를 합하여 51가지의 마음의 작용이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난다. 그리고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고(苦), 낙(樂), 사(捨) 삼수(三受)와 모두 상응한다고 했다.
위 삼능변식을 비유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제8 아뢰야식은 대통령직에 비유된다. 대통령은 무부무기, 번뇌가 없고 선악이 없으나 제6식이 하는 일체 신구의 삼업을 소장한 업을 제7식(장관)과 제6식(국장)의 의지처로 작용하지만 현상의 실무를 다루는 실무처는 아니다.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감정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즉 대통령은 화내는 일도 없고 좋아하는 법도 없다.
둘째 제7 말나식은 장관직에 비유된다. 장관은 유부무기, 번뇌는 있으나 선악의 감정이 없다. 장관은 대통력(제8식)에 의지하여 어떻게 국장(제6식)을 다스려 국가에(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게하고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게 하는 정책구상을 하고 이를 국장(제6식)에게 지시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즉 실무처는 아니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감정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셋째 제6 의식은 국장직에 비유된다. 이 국장(제6식)은 대통령(제8식)에게 직접 업무보고도 하고, 장관(제7식)의 지시에 의지해 업무집행을 하는데 광범위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고, 실무를 담당하는 국장(제6식) 밑에는 안과(眼科), 이과(耳科), 비과, 설과, 신과, 5개의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과장이 있고, 이 과장들은 국장(제6식)에 의지해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에 대처하여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행위를 하고 이를 대통령(제8식)에게 직접 보고하여 그 기록을 남겨 다음 행위의 인(因), 종자가 되게 한다.
이상 51 심소(心所)에 관하여 아래 제10, 11, 12, 13, 14송에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제 10 송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초편행촉등 차별경위욕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승해념정혜 소연사불동
처음은 변행의 촉등이 있고, 그 다음은 별경인데, 말하자면 욕(欲), 승해, 염(念), 정(定), 혜(慧)이고 이들이 반연하는 일은 같지 않다.
먼저 제6의식인 3능변(三能變)과 상응하는 것은 변행심소(遍行心所)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등이요. 다음은 별경오심소(別境五心所) 즉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니 이 다섯 심소(心所)는 반연하는 일(事)이 부동(不同)하다.
初遍行觸等 초변행촉등
먼저 제6식은 제8식과 제7식에 의지하여 작용하고 (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등 오변행(五遍行)은 제6 의식에 의지하여 작용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남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六識)에 의지하여 촉(觸), 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의 작용이 전개된다. 이 다섯 가지 작용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제8식과 6식에 의지하여 작용하므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 한다.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다음은 별경인데, 말하자면 욕(欲), 승해, 염(念), 정(定), 혜(慧)이다.
별경에는 욕(欲), 승해, 염(念), 정(定), 혜(慧) 다섯 가지가 있다. 이 다섯 가지 특별한 경계는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난다고 하여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라 하는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와 다르다.
오별경(五別境) :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는 불교 수행단계를 의미한다.
욕(欲)은 하고자하는 마음, 구하는 마음, 탐욕 등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세속적 욕구가 아니라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원(願)이다.
승해(勝解)는 수승한 이해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성(佛性)을 바르게 이해하였음이다. 일체 중생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 불성이란 성불할 수 있는 성품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대각을 얻는다는 말씀인데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씀일까? 첫째 :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 청정무구하여 구함이 없어도 자족(自足)함이 항상 하는 반야바라밀이다. 이를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했다. 둘째 : 불성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으로 역동적으로 일체 걸림을 파하고, 걸림이 없게 되면 이 찰나에 삼세가 함께하고, 이 자리에서 시방 법계와 함께하니 이 자리가 바로 법계이고, 이 시간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이다. 그러하니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 부처님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계심을 알게 되 일체 괴로움이 소멸되고 부족함이 없는 고요함에서 유정 무정 일체중생과 함께 하게 된다. 셋째 : 일체중생을 괴로움이 없고 자족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 청정무구하고 원융하신 부처님이 우리 중생의 마음깊이 상주하고 계심을 가르치는 길로 갈 원을 세우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염(念)은 생각 생각을 이어가게 하는 수행이다. 염(念) 염(念)이 이어가게 하는 수행이란 염불, 독경, 사경 등이 있다.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관하는 위빠사나 선이 염(念) 수행법이다. 염(念) 수행에서 유념(留念)할 바는 후념(後念)이 전념(前念)을 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관세음보살하며 염불을 하면, 관세음보살하는 나를 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세음보살하는 나는 전념(前念)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후념이다. 내가 걸어갈 때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을 바라볼 때, 걸어가는 발은 전념이고 그 발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자는 후념이다. 이 후념이 전념을 바라보는 식(識)이 발달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제7식)을 제6식이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달하게 된다. 이 후념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이 잡념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됨으로, 이 후념의 능력이 발달할 때 무수한 잡념을 제거하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후념이 전념을 바라보는 동안 근본번뇌와 수번뇌가 하나하나 소멸되기 시작하여 결국 잡념이 일어나는 일이 없게 되면 그 단계가 수행 중에 많은 새로운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 단계이고 정(定)에 들어가는 입문이다.
육바라밀 수행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팔정도에 있는 염(念)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대승불교권 수행론과 남방불교권 수행론과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팔정도에서나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에서 말씀하는 염(念)은 정(定)의 선수(先修) 과정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육바라밀에서는 염(念)이 정(定)에 포섭되어 있다고 하여 이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해석되나 수행초보자에게는 무리한 해석이고,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되어 오히려 염(念)을 세워 정(定)에 들게 하는 오별경 수행법과 팔정도가 순리적이라 생각한다.
정(定)은 정념(正念)이 이어지면 결과적으로 선정(禪定)에 들게 된다. 정(定)은 삼매(三昧)로도 알려진 단계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성취하여 무소유정(無所有定)에 드는 것을 뜻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삶에 들어가는 입문이다. 무소유정이란 내 개인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도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와 인연을 맺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그들이 공급하여 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공급하고 있으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오히려 큰 부자가 되어 부족함이 없는 즐거운 세계를 느끼게 되는 선정이다.
혜(慧)는 정(定)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한 진리를 깨달아 자신과 법계를 바르게 바라 볼 수 있는 무소유정에 들어가 이 법계가 나와 하나 되어 무상(無常)하게 변화되어 감을 보고, 이를 알지 못해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법계에 충만한 법력으로 일체중생의 고(苦)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를 능히 제(除)하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보살행이다.
所緣事不同 소연사부동
오별경마다 ‘인연되는 바가 다르다’고 한 것은 제7 말나식에 ‘나를 위해 하고자 하는 일’들이 수많이 있는데, 그 중 어느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종자의 세력과 제7 말나식에서 취하고자하는 탐진치의 정도, 그리고 제6의식이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의 강도와 능력이 과거에 수행한 경험의 정도에 따라 사람마다 그 의지와 능의 인(因)이 다르고, 또 수행하기 위해 만나는 연(緣)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유로 소연사부동이라 했다.
제 11 송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선위신참괴 무탐제삼근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근안부방일 행사급부해
선(善)이란 이른바 신(信)·참(慙)·괴(愧)와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이다.
제6의식을 심소(心所)로 하는 선(善)에는 이상 11가지가 있다. 이를 개별적으로 해설하면,
신(信) : 부처님의 세계와 위에서 설명한 불성을 믿는 마음이다. 믿는 마음이란 결정적인 믿음이다. 왔다 갔다 형편 따라 믿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앞으로 전진 하는 믿음이 믿는 마음이다. 이 믿음이 앞에서 설한 오별경 수행의 근본이 되고, 일체 보살도와 성불의 근본이 되고 앞으로 설할 10가지 선행의 근본이 된다.
참(慙) : 자기가 행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일요일 법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참석하지 못한 것을 부처님께 죄송하게 생각하고 도반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러울 참(慙)이다. 이 11가지 선행을 살펴 행하지 않은 것을 참회하는 마음이다.
괴(愧) : 자기가 이미 한 일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모욕적으로 느끼거나 책망하는 마음이다. 자신과 약속한 것을 자신이 어겼다든가, 남에게 부주의로 화를 냈거나 해를 끼쳤을 때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모욕적으로 느껴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다.
이 참괴(慙愧), 즉 자기가 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가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마음은 자기의 변화와 개선(改善), 발전에 원동력이 되지만 자기가 잘못한 일에 이유를 달고, 상대방의 탓이라고 돌리는 사람은 자기의 변화를 가질 기회를 놓치고, 자기를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동기를 잃음으로서 성격상의 결함이 더욱 심해지기 쉽다. 신(信)과 더불어 자기발전의 근본이 되는 마음이다.
무탐(無貪) :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가 있는 그대로가 귀하고 아름답고 나와 더불어 하고 있음을 아는 지라 욕심낼 것이 없는 이치를 이미 통달한 마음이다.
무진(無瞋) :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구하는 것이 구해지지 않을 때, 버리고 싶은 것이 버려지지 않을 때, 일의 진행이 기대에 어긋날 때 화가 나는 법이다. 즉 탐욕이 있을 때 그에 미치지 못하면 화가 나게 마련이다. 수행자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수행하면 있고 없음이 상즉(相卽)하고 있는 진리를 깨치게 된다. 이 진리를 깨달은 수행자는 구함과 버림이 상즉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구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며 기대할 것도 없으니 화낼 일이 없다. 이것이 무진(無瞋)의 원리이니, 어떠한 재해(災害)를 당하고 역경(逆境)에 임한다 해도 태연하게 일을 수습할 뿐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한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다.
무치(無痴) :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사리(事理)를 명백히 요달(了達)하여 어리석은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니 무치는 무명이 끊어짐이니 사실(事實)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이상의 탐·진·치(貪·瞋·痴)를 삼독(三毒)이라 하고 3독의 마음이 없으면 3선근(三善根)이라 하며 이는 일체 선법(善法)이 되기 때문이다.
근(勤) : 정진(精進)의 뜻이니 무엇을 하든 하는 일에 일념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안(安) : 안(安)은 경안(經安) 혹은 편안(便安)의 줄임말로서 생사(生死)의 번뇌에서 해탈하였을 때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으므로 이루어지는 가벼운 마음, 편안한 마음이다. 무탐, 무진, 무치를 성취한 이를 생사번뇌에서 해탈했다고 한다.
불방일(不放逸) : 공부를 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생각은 딴 데가 있다거나, 좌선한다고 앉아 있어도 허망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방일(放逸)하는 것이니 불방일(不放逸)은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자는 것이다.
행사(行捨) : 앞 송에서의 사(捨)는 무기(無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을 의미했으나 여기 행사는 근심을 놓아 버리라, 알음알이를 방하착하라, 걱정도 놓아 버리고, 오만도 놓아 버리며, 필요 없는 일에 집착도 버리는 수행이 행사이다.
불해(不害) : 모든 유정(有情)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발고여락(拔苦與樂) 즉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므로 불해(不害)라 한다. 발고여락하는 행이 보살도이다.
[중간 고사]
어떠한 제목이든 자신이 택하여 생각을 정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강의한 것을 간단히 복습하여 보자.
제8송에서 제3능변식에 6종(種)이 있다고 하고, 그 6종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이 6종식은 경계를 요별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한다. 경계란 색성향미촉법이다. 그리고 이 6종식은 좋고 나쁘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무기(無記)와 상응(相應)한다.
제9송에서는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51가지로 분류(分類)해 설명한다. 변행에 5가지, 별경에 5가지, 선(善)에 11가지, 번뇌에 6가지, 수번뇌(隨煩惱)에 20가지, 부정(不定)에 4가지를 합하여 51가지의 마음의 작용이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난다. 그리고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고(苦), 낙(樂), 사(捨) 삼수(三受)와 모두 상응한다고 했다.
제10송에서는 제6의식에 의지하여 작용하는 변행심소(遍行心所)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와 별경오심소(別境五心所)인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를 상세히 설명하고 이들 다섯 가지 심소(心所)는 반연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고 했다.
제11송에서는 선(善)이란 이른바 신(信)·참(慙)·괴(愧)와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 11가지라 하고 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제 12 송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번뇌위탐진 치만의악견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수번뇌위분 한부뇌질간
번뇌에는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이 있고, 수번뇌(隨煩惱)에는 분(忿)·한(恨)·부(覆)·뇌(惱) ·질(嫉)·간(慳)이 있으며.
근본번뇌로서 6가지를 열거하고, 근본번뇌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지말번뇌(支末煩惱)를 수번뇌(隨煩惱)라고도 하는데, 이 수번뇌에 20가지가 있다. 이 송에서 그 중 6가지를 열거하고, 다음 제13송에서 계속하고 있다.
제6식의 번뇌는 제8 아뢰야식과 제7 말나식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제6식의 번뇌는 제6식에 의지해 일어나는데, 경계를 요별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요별하고, 자기와 이해(利害)관계를 일으켜 집착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과 괴로움이다. 이렇게 일어나는 번뇌를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 6종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탐(貪) : 재물(財物), 이성(異性), 명예(名譽), 음식(飮食) 등을 접할 때 애착심(愛着心)을 일으켜 그를 자기 소유로 만들고자 배타적인 욕심이나 과분(過分)한 욕심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며 일체가 연기하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을 때, 자기중심적인 제7 말나식이 치성하게 작용하여 일어나는 심적 작용이니, 수행을 통하여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이타적(利他的)인 마음으로 전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전환되면 탐욕이 소멸되고, 탐욕이 소멸되면 세속적 욕심에서 벗어나게 됨으로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진(瞋) : 진노(瞋怒)라고도 하는데 성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이다. 탐욕이 만족되지 못할 때 그 불만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설사 탐욕은 아니더라도 바라는 마음,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대하는 마음이 있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분노이다. 부모에게 의지하고 기대했던 일이 실망으로 끝날 때 일으킬 수 있는 분노,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의지하고 기대했던 일이 실망스러울 때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과 화이다. 뿐만 아니라 학업 성취의 기대가 어긋날 때나, 친구, 동업자, 등등에서도 기대가 상실될 때 일어나는 심적 충격, 갈등, 고민 등이 분노나 화냄을 수반하게 된다. 사춘기 때는 이상한 불만도 있다. 자기 부모가 자기 코를 예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고, 눈 쌍가풀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고, 눈을 너무 적게 만들어 예쁘지 않다고, 키를 너무 작게 만들어 열등감이 들게 했다고, 부모가 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나 등등으로 부모를 원망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항의하고 부모에게 자주 화를 낼뿐만 아니라 불만이 목 끝까지 가득 차 답답해서 집에 들어오기 싫어 집을 나가고 싶어 하는 심정 등이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 불만이 있을 때 화를 심하게 그리고 자주 일으켜 난폭해지기 쉽고, 폭행 살인 등의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서운 마음으로 변할 수 있다. 총 등으로 동료를 살상하는 사건이나 강도사건 등은 원망이나 불만 등의 화를 그렇게 발산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설사 난폭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화를 자주 일으켜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고, 견디기 힘들게 하며, 상대를 포용하여 편안하게 하여 주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고 위압감을 느끼게 하여 결국 떠나게 만드는 무서운 마음이 될 수 있다. 부부사이에 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얽힐 때 풀기 어려운 실타래와 같이 될 수 있으며, 그 극이 이혼이라는 비극이 될 수 있다.
화는 이론으로 다스릴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상대방과 ‘내가 옳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따져서 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무조건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심하고 하루 500배 이상 절을 해야 한다. 절을 하기 어려우면 건강이 허락하는 어떤 운동이든 매일 1시간 이상 규칙적으로 하면 화를 다스리고 사실(事實)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 사경과 절은 화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가장 우수한 방편이다.
치(癡) : 어리석은 마음인데 밝지 못한 마음이라 하여 무명(無明)이라 하기도 한다. 탐욕을 부리고 화를 내는 것은 일체가 서로 평등하게 연(緣)하여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이치에 어두워 일으키기는 마음임으로 어리석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행위는 자기를 점점 더 깊은 파국으로 몰고 가는 마군이다. 어두움을 밝히는 명약은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이며 일체법은 연(緣)하여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며, 분명한 인과법(因果法)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수행법은 일요일 예불에 참여하고, 토요일 참선 수련을 하며,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성게, 유식 등 강의에 참여하여 무명에 대한 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불사(佛事)에 동참하며, 위에서 설명한 ‘화’ 수행법 등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밝히는 명약들이다.
만(慢) : 만에는 오만(傲慢), 자만(自慢), 교만(驕慢) 등이 있다. 오만은 다른 사람을 경시(輕視)하고 자기를 과시(誇示)하는 마음이고, 자만은 자기가 항상 남보다 더 잘났다고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교만(驕慢)은 무례(無禮)하고 버릇없이 남 앞에서 자기가 잘난 척하는 행위 등이다. 요즈음은 평등사상이 만연하고 있는 시대이니 아랫사람이라고 하대(下待)하는 것도 자만심에서 나오는 말이니 나이 드신 분들이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아랫사람이 나이 드신 분에게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반말 하는가.’ 라고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더 이상 위아래 위계질서의 기준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부모도 오히려 자녀들의 비위를 맞춰야하는 새로운 평등시대인데 남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러한 자만심(自慢心)에서 일으키는 행위는 상대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니 일체가 서로 평등하게 연(緣)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치에 어두워 일어나는 마음이고, 분위기를 거칠고 사납게 만드는 언행(言行)이 나오게 하는 마음이니 자숙(自肅)함이 바람직하다.
자만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심이 명약이고 하심을 하기 위해서는 반야심경 사경과 절을 많이 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왜 반야심경인가 하면 이 경에서 공(空)과 유(有)의 도리를 설명하고 유(有)에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疑) : 의심(疑心)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과 인과응보에 대한 의심이 계속되고 있는 한,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불문(佛門)에 들어오기 어렵다. 책을 많이 읽고 경전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도 의심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어떤 계기가 되어 믿음을 일으킬 때 의심이 사라지기도 한다. 믿음과 의심은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믿으면 의심이 사라지고, 의심이 있는 한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의심은 자신에 대한 의심일 수도 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고 의심하는 마음이다. 내가 과연 만 배를 할 수 있을까? 오계를 받으면 내가 5계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러한 의심들을 풀기 위해 많은 독서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독서에서 의심이 풀리지 않는 사람은 염불을 하고, 반야심경 사경을 하며, 하루에 500배 절을 매일 하면 일체 의심이 풀리고 자기의 갈 길이 바로 보일 수 있다. 의심은 남을 해하지는 않지만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여 자기의 존재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악견(惡見) : 잘못된 견해(見解)이다.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온(五蘊),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아(無我) 인과(因果), 중도(中道) 등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잘못 알고 일으키는 견해들이다. 통틀어 말하면 불교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이것이 불교다.’ 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견해이다.
악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위의 ‘치(癡)’에서 설명한 수행법이나 오별경 수행법 중 승해(勝解) 등이 있지만 일단 바른 신심(信心)과 그 신심(身心)을 세울 수 있는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번뇌(隨煩惱)는 위 여섯 가지 근본번뇌에서 유발(誘發)되는 20종의 지말번뇌(支末煩惱)이다. 이 20종 중 첫 여섯 가지는 분(忿)·한(恨)·부(覆)·뇌(惱) ·질(嫉)·간(慳)이다.
분(忿)은 분한 마음이고 한(恨)은 한탄하는 마음이니 원망하는 마음이다. 이 분한 마음과 한탄하는 마음은 근본번뇌인 탐진치에서 나오는 마음이니 위 탐진치를 참고하기 바란다.
부(覆)는 덮어씌우는 마음, 은폐시키는 마음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씌우는 마음,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그렇게 된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이다. 이 부(覆)는 위 11선(善) 중에서 설명한 참괴(慙愧)에 반대되는 마음이니, 자기 변화와 개선(改善)을 방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발전에 장애물이며 자신의 바르지 못한 성격을 더 경화(硬化)시키는 요인이 된다. 뇌(惱)는 위 6가지 근본번뇌에서 비롯되는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요즈음 사용되는 용어로는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가 시간과 더불어 쌓이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에 큰 병이 될 수 있다. 우울증, 불면(不眠)으로 시작하여 육체적인 병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념(滯念)에서 비롯되는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초기에 다스리는 것이 필수이다.
이를 다스리는 법으로는 위 근본번뇌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스님과 상담하는 것이 좋다.
질(嫉)은 질투(嫉妬)이니 시기하고 시샘 하는 마음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은 남을 음해하고 중상모략으로 상대방과 투쟁하는 마음으로 발전될 수 있다. 탐심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다.
간(慳)은 인색한 마음이니, 벌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니, 보시(布施)에 인색한 사람이다. 다른 일에 인색하더라도 불사에는 인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장래를 위해 좋다. 불사(佛事)에 보시하는 일은 복(福)과 덕(德)을 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 13 송
誑諂與害憍 无慙及無愧 광첨여해교 무참급무괴
掉擧與惛沈 不信幷懈怠 도거여혼침 불신병해태
속이는 마음(誑), 아첨하는 마음(諂), 피해를 끼치는 마음(害), 방자한 마음(憍),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無慙), 참회할 줄 모르는 마음(無愧), 잘난 척 으시 대는 행위(悼擧), 멍한 마음(昏沈), 믿음이 없는 마음(不信), 게으른 마음(懈怠).
광(誑)은 속이는 마음으로 사람을 기만하거나 유혹하여 재물을 가로채려는 마음이다. 이는 탐심에서 파생되는 마음이다.
첨(諂)은 아첨하는 마음이니 부정한 목적으로 힘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말한다.
해(害)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손해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도 탐욕에서 파생되는 마음이다.
교(憍)는 교만하고 당돌하고 거만한 마음이니 이도 근본번뇌 6가지 중 하나인 만(慢)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다.
무참(無慙)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더욱이 덮어 버리는 마음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무괴(無愧)는 자기가 잘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남의 탓이라고 변명하는 마음이다.
도거(悼擧)는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실은 들떠 있지만 남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자기가 잘난 체 으시대고 행동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사람은 쉽게 자극에 반응하여 남과 싸우려는 태도를 취한다.
혼침(昏沈)은 무엇인가에 마음이 쏠리어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있는 상태이다. 공부하다가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골몰히 무엇에 빠져 있다거나, 좌선 중에 화두 외에 딴 생각으로 헤매고 있는 것 등이 혼침이다. 혼침이 잦다보면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쉬는 것이 좋다.
불신(不信)은 앞 11선(善)에서 충분히 설명한바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해태(解怠)는 게을러서 몸과 마음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의미하니 불교를 믿는 사람이 몸으로 행해야하는 신행(身行)을 게을리 하니 점점 믿음이 약해져가게 되는 마음의 상태이다. 건강을 위한 운동을 게을리하여 몸이 점점 약해져가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제8송에서부터 계속 제6 의식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수번뇌 20가지 중 12송에서 6가지, 13송에서 10가지를 설명하고 14송으로 이어간다.
제 14 송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방일급실념 산란부정지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부정위회면 심사이각이
방일(放逸)과 실념(失念), 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이고, 부정(不定)에는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방일(放逸)과 실념(失念), 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 이 4가지 수번뇌는 제12송에서 시작한 20가지 수번뇌 중 마지막 4가지이다.
방일(放逸)은 자기 생명의 가치와 목적 그리고 능력을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물욕이나 애욕에 매달려 귀중한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불교를 믿고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발심이 필요하다.
실념(失念)은 기억력을 상실하여 사물이나 경전의 말씀을 착각하는 마음이니, 치매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는 주변 사람들이 괴롭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매사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도(道)를 닦는 일에 마음을 잃어 우울증 증세가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산란(散亂)은 마음의 중심을 잃은 마음이다. 한 가지를 생각하려 하면, 그 주변 일에 관심이 쏠리고, 또 그 주변에서 주변으로 관심이 옮겨 지면서 핵심을 놓쳐 아무 일도 바르게 성사시킬 수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염불, 위빠사나선, 절, 사경 등을 열심히 하여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단련을 해야 한다.
부정지(不正知)는 불법(佛法)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불법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착각해서 일으키는 마음과 언행이다. 제행이 무상하니 일을 하나 안 하나 무슨 차별이 있는가, 제법이 무아이니 내가 없는데 내가 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는 등 불법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하여 불법을 해손시킬 수 있는 마음이다. 불법을 전혀 모른다는 마음으로 바른 스승만나 처음부터 새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상으로 12송에서 시작한 20가지 수번뇌 설명을 모두 마쳤다. 우리의 마음 작용을 이미 그 옛날에 이와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부정심(不定)에는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2가지가 양변으로 쏠릴 수 있으니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회면(悔眠)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여 잠자는 것,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조용하게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후회하여 자기를 학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또 잘못할까 두렵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가 가장 옳고 좋은 것인가는 사람의 업에 따라 다르니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不定) 심소(心所)라 했다.
심사(尋伺)의 심(尋)은 심구(尋求)의 뜻으로 찾아내는 것을 말하고, 사(伺)는 사찰(伺察)의 뜻으로 도(道)를 구하고 찾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니, 모두 착한 행위이지만 시간이 아깝다고 밥 먹는 시간이나 운동하는 시간도 절약하고, 다른 해야 할 일들도 하지 않으며 도를 구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몸에도 마음에도 그리고 도에도 해가 된다. 어느 정도가 가장 적합한 심사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니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不定) 심소(心所)라 했다.
이상으로서 제8송에서 시작된 제삼능변식 [ 6식, 의식(意識), 제6식]의 심소(心所)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심소(心所)란 제6의식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처음에 오변행심소라 하여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마음 작용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근기의 고하에도 차이 없이 이 의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으로 오별경심소라 하여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의 수행 덕목은 사람마다 근기 따라 다르므로 오별경(別境) 심소라 하고 필요한 수행과정을 설명했다.
그 다음으로 11가지 선(善)의 심소, 6가지 근본번뇌 심소, 20가지 수번뇌 심소, 그리고 4가지 부정(不定) 심소를 설명함으로서 제3능변식 중 심소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쳤다.
다음 15송에서 5식(識)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상세하게 선(善)과 불선(不善)에 대한 마음작용을 설명하는 목적은 우리들의 마음작용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아서 이들을 알아차리고 돌려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청정하게 함으로서 전화위복(轉禍爲福), 즉 나쁜 마음을 돌려 복이 되는 마음으로 바꾸게 하고자 함에 있다.
지난주 강의에서 수번뇌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부정심(不定心)에 관해 설명했다. 부정심이란 정한 마음이 없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자기가 하지 않았거나 잘못한 일에 대해 참회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참회하는 방법이 자신을 학대하거나 우울증 내지 체념에 걸릴 정도로 자신을 이끌어 가는 것은 잘못이니 그 사정에 알맞은 참회라야 하니 정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을 세워 정진하는 것도 당연한 구도정신이지만, 육체적 건강을 무시하고 정진에 일념하는 것은 지속적인 수행이 될 수 없음으로, 이것도 역시 어느 선이 적정(適正)한 가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부정심(不定心)이라 했다.
제 15 송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의지근본식 오식수연현
惑俱惑不俱 如濤波依水 혹구혹부구 여도파의수
근본식을 의지하여 오식(五識)이 인연 따라 현기(現起), 즉 현재 일어나는데, [오식(五識)이] 모두 함께 작용하기도 하고, 모두 함께 작용하지 않기도 한다. 이는 마치 파도가 물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근본식(根本識)이란 제8 아뢰야식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으로 심어진 종자, 즉 업력(業力)에 의지한다.
오식(五識)은 전 오식(前五識)이라고도 하는데, 안식(眼識)이 제1식, 이식(耳識)이 제2식, 비식(鼻識)이 제3식, 설식(舌識)이 제4식, 신식(身識)이 제5식인데 그들을 총칭하여 오식(五識) 혹은 전 오식이라 한다. 육식(六識) 중에서 제6 의식(意識)을 뺀 다섯 가지 몸의 기관이 외부와 접촉할 때 그들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하는데, 이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 오식이 근본식, 즉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물을 전 오식이 접촉하고 제6 의식이 인식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하지만 이 작용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 경험의 종자들에 의지하여 일어남으로 인식의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되어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인식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라는 뜻이다.
수연현(隨緣現)은 인(因)이 연(緣)과 접촉함에 따라 그 대상을 인식하고 느끼는 감각이 결과로 현재 일어난다는 말인데, 이 때 인(因)은 전 오식과 제6 의식인데, 전 오식과 제6 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작용함으로 인(因)의 근본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력(業力)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전 오식과 제6 의식의 작용도 간과할 수 없다. 제6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고 좋고 나쁘다는 감정을 일으키기까지에는 다양한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관(五官)의 감각작용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즉 오관 각각의 건강상태, 작용하는 힘, 분별하는 분별력, 뇌의 정상적인 기능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는 이들의 건강상태에서 오는 영향이다.
연(緣)은 오관(五官)이 접촉하는 대상인데, 이 대상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 경계이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조건, 빛, 온도, 습도(濕度) 등 그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조건들도 연에 포함된다.
수연현(隨緣現)의 현(現)은 현재 일어난다는 현기(現起)의 준말인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五識)이 안이비설신이 색성향미촉과 접촉될 때, 접촉된 결과로 이들을 의식하고 감별하는 기능이 작용하는데, 이 기능은 오직 현재만 할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현재 식별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식별하는 것도 아니다. 수연현은 연을 접촉함에 따라, 그 결과로 느끼는 인식이나 감정이 오직 현재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작용은 말나식의 염정(染淨)의 정도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들의 업력에 따라 그 대상을 접촉할 때 느끼는 감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한 꽃을 내 눈으로 보고 꽃이라고 인식하고, 붉다 희다고 느끼는 감정도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에 영향을 받고, 눈귀코혀몸, 그리고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건강 상태 등의 조건에 영향을 받으며, 그 꽃이 존재하는 공간의 조건에 영향을 받아 그 꽃에 대해 현재 제6 의식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수연현(隨緣現)은 인(因)이 연(緣)을 따른 결과로 감정이 이 순간에 일어난다는 말인데, 그 뜻은 인(因)이 원인이 되고 연(緣)이 조건이 되어 이 찰나에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을 같이 하다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서로 상대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수연현(隨緣現)의 가르침에 의하면 내가 원인이 되고 상대가 연이 되었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이 인이고 내가 연이 되는 것이니 인(因)이 되는 양쪽에서 각자 자기의 성품, 즉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을 찾아 소멸함으로서 자기의 성품이 원만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 오식은 오직 현재의 대상만을 분별대상으로 할 수 있지 과거나 미래의 대상을 분별대상으로 할 수 없다. 전 오식은 추론이나 인식 등의 작용이 없고, 추론이나 인식작용은 제6 의식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전 오식은 항상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대상이 나타날 때만 작용하게 됨으로 일시적인 중단됨이 있다.
혹구혹불구(惑俱惑不俱) : 전 오식이 색깔, 형태, 소리, 냄세, 맛, 촉감 등을 모두 함께 느끼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함께 느끼기도 하며, 각기 느끼기도 한다는 말씀이다. 식당에서 서브하는 음식에는 다섯 가지 감각식이 모두 함께 작용하는 예이고, 분위기에 상관없이 듣는 소리는 이식(耳識)이 개별적으로 듣는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지하여 작용한다.
여파도의수(如濤波依水) : 이는 마치 파도가 물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물은 스스로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緣)에 따라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바람, 월력(月力), 인력(引力), 기온, 습도, 지형 등 다양한 조건에 의지해 물결을 일으키고, 또 그 물결의 높이와 모양도 그들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전 오식의 감각 작용도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수많은 업력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설명했듯이 전 오식에 따르는 수많은 조건들의 영향을 받아 전 오식이 그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결정된다는 말씀이다. 마치 수많은 모양과 힘이 다른 물결이나 파도가 일어나듯이.
3 가지 능변식의 차이는 ① 저장식(아뢰야식)은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고,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작용한다. ② 말나식은 저장식을 의지하여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작용한다. ③ 전 오식은 감각기관, 대상, 의식(意識), 세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해서 일어나므로 대상이 없을 때는 작용이 끊긴다. ④ 제6 의식(意識)에 대해서는 다음 16송에서 설명된다.
전 오식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무수한 조건들에 의해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되므로 우리의 의식은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제 16 송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의식상현기 제생무상천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급무심이정 수면여민절
의식은 항상 현기(現起), 현재 일어나지만 무상천(無想天)에 오르거나 무심(無心) 2정(二定)에 들었을 때와 잠잘 때 그리고 민절(悶絶기절)했을 때는 제(除)한다.
제6 의식(意識)도 항상 현재 어떤 대상을 만나고 그 결과로 감정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의식이 현재 작용하기 위해서는 작용하는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그 대상이 ‘나’ 밖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내 안에서 생각으로 떠올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들 대상을 만난 결과로 그 대상을 좋게 또는 나쁘게 혹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감정을 일으키고, 생각하고, 분별하며, 사량하고, 문제를 인식하며, 판단하고, 행동 등을 하는 작용을 잠시도 쉬지 않고 항상한다는 말씀이다. 단 무상천(無想天)에 오르거나, 무상(無想)과 무심(無心)의 2가지 선정이나 수면(睡眠)에 들었을 때나 민절(悶絶)(기절)했을 때는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이외는 항상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무상(無想)은 생각을 일으킴이 없는 것이니 번뇌(煩惱)로 인한 망상(妄想)이 없는 상태이다. 번뇌로 인한 망상이 없으려면 제8식에 저장된 업장(業障)을 모두 소멸시키는 수행, 예를 들면 오별경(五別境), 즉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 혹은 팔정도(八正道)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에서 무상정(無想定)을 이루게 되면 삼매에 들어 무상천(無想天)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 제6 의식이 현행(現行)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定), 즉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잠잘 때와 같이 제6 의식의 작용이 멈추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잠잘 때 제6 의식이 쉬더라도 제8 아뢰야식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작용한다.
무심(無心)은 일체 구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 탐(貪)과 진(瞋)이 소멸된 마음인데 수행법은 위와 똑 같다. 무심정(無心定)은 구하는 마음의 상이 없는 마음이라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도 하는데 이 때도 제6 의식이 현기(現起)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정(定), 삼매에 들면 제6 의식이 쉰다. 삼매에 들었다는 것은 제6 의식이 심(心) 내(內)근 외(外)근 그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니, 즉 연(緣)이 사라졌음으로 제6 의식이 현기(現起)할 수 없다.
우리가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도 제6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6 의식은 전오식에서 오는 정보를 입수하여 수상행식을 하는 작용을 하는데, 이 작용은 모두 제8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제7식의 사량(思量)에 의지해 일어난다. 의식은 수많은 조건들의 영향을 받아 그 대상을 접하고 수상행식을 하는 것이므로 사물이 사실 그대로 보고 느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제6 의식이 이와 같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의 과거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사량에 의한 생각과 행동과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의견이 옳다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리이고 나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 서로가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서로가 요구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불만에서 오는 것인데 제8식의 기능과 제7식의 작용을 바로 알고 보면 부딪치는 성격의 차이를 인지(認知)함으로서 자기의 성격상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 제8 아뢰야식에는 6가지 근본번뇌와 20가지의 수번뇌만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닦아 소멸할 수 있는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와 11 가지 선심소(善心所)가 있음도 살펴보았다.
오별경심(五別境心)의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의 닦음은 모두 제6 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면서도 제6 의식이 세우는 발심의 의지도 작용하는 것이고, 십일선심(十一善心)도 제6 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면서도 의식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다.
제8 아뢰야식이 본래부터 청정함으로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청정한 무위집에 들어 갈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수많은 업장도 동시에 있음으로 의식의 신념(信念)과 결단(決斷)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악을 제어하고 선을 택하는 것이 악업을 소멸하고 선업을 쌓아가는 도리가 되고, 미래에는 좀 더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밝은 세계를 열어가는 이치일 것이다.
제 17 송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시제식전변 분별소분별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유차피개무 고일체유식
이 모든 식(識)이 분별하는 자와 분별되는 자를 전변(轉變), 움직여서 변화를 일으키므로 이것과 저것은 모두 없는 것이니 일체가 유식(唯識)이다.
시제식(是諸識)이란 이 모든 식(識)이다. 이 모든 식(識)은 제8 아뢰야식, 제7 말나식, 제6 의식, 및 전오식(前五識)이다. 전 오식은 능히 변화를 주도하는 의식은 아니기에, 제6 의식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제8, 7, 6식이 변화를 능히 주도하는 세 가지 능변식이다.
시제식전변(轉變)의 전(轉)은 여덟 가지 식이 주체가 되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고, 변(變)은 제식(諸識)의 작용에 의해 변화되는 대상이다. 전(轉), 움직이는 주체는 식(識)이니 인(因)이 되고, 변(變)은 식(識)의 대상인 연(緣)이 변(變)해지는 것이니 과(果)이다. 이렇게 볼 때 전변(轉變)은 인과(因果)론이고, 만물(萬物)의 성주괴공의 원리로서 제식(諸識)의 무수한 작용에 의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변해 간다는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식(識)이 본래는 주객이 없는 하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에 있었던 업의 종자들이 아뢰야식에 쌓이고, 말나식이 이에 의지하여 자기중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되면서 객체와 이분화(二分化)되게 되었다. 이 이분화를 주도한 주체가 삼 능변식이기에, 분별하는 주체인 제식(諸識)과 제식(諸識)이 분별하는 대상인 삼라만상이 전변(轉變)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너를 분별하는 주체는 나의 제식이고, 나의 제식이 분별하는 대상은 너이다. 그리고 분별하는 제식은 인(因)이 되고 분별되어지는 소분별(所分別)은 연(緣)이 되며 제식(諸識)의 전변(轉變)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과(果)이다. 식의 전변(轉變)하는 작용이 분별심을 일으켜 주체와 객체로 이분화하고, 또 분별하는 자와 분별되어 지는 자의 변화를 초래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인과 연이 만나는 것을 인연(因緣)이라 하는데, 인연이 만나면 반드시 무엇인가 싹이 트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연의 결과이다. 이 때 인은 항상 내가 되고 연은 네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잘못을 보기 쉽고, 상대방이 바꾸어주기를 원하나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불만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제식(諸識) 전변(轉變)의 의미와 인연(因緣)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지 못해 생기는 불화(不和)는 항상 불안(不安)을 낳는다.
제식(諸識) 전변(轉變)은 내 마음이 먼저 움직임으로서 상대방이 변해진다고 했으니 내 의식을 우선 바르게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인연법에 있어서도 연을 탓하기 전에 종자인 인을 개량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리고 분별하는 자에 의해 그 대상은 분별당하는 것이니 나의 의식이 분별하는 주체가 되고 그 대상이 분별을 당하는 경계가 된다. 분별되어지는 것은 분별하는 자의 심성(心性)에 의해 분별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분별되어지는 대상의 진실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유차피개무(由此彼皆無) 고일체유식(故一切唯識)
이것과 저것이 모두 없으므로 일체가 오직 식(識) 뿐이다. 이것은 움직이는 자, 분별하는 자이고 저것은 변화되는 자, 분별을 당하는 자이다. 분별을 하는 자는 제식(諸識)이고 분별을 당하는 자는 경계이다. 그런데 분별(分別)을 하는 나나, 나에 의해 분별되어지는 너는 원래 능소(能所)가 없는 하나였으나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쌓여온 나의 업식(業識)에 의해 분별되어지는 나고 너이지 실재하는 나도 아니요 실재하는 너도 아니니 차피(此被)가 다 무(無)이다. 그러므로 일체만상은 항상 움직이는 제식(諸識)에 의해 조작되는 것일 뿐이라 하여 일체유식(一切唯識)이라 했다.
제15송 수연현(隨緣現)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바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체인 오관(五官)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그 순간에 일으키는데 그 감정은 오관 각각,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건강상태, 작용하는 힘, 분별하는 분별력, 뇌의 정상적인 기능 등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五識)이 안이비설신이 색성향미촉과 접촉될 때 이들을 의식하고 감별하는 기능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객체, 즉 연(緣)인 대상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 경계이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조건, 빛, 온도, 습도(濕度) 등의 조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또 이 감정은 말나식의 염정(染淨)의 정도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들의 업력에 따라 그 대상을 접촉할 때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도 있고, 제6 의식이 대상을 보고 추론하거나 인식하는 습관, 그리고 자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수행력 등등을 감안할 때 주체인 제식(諸識)은 제식대로 찰나찰나 변함으로 이것이 주체다. 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고, 객체는 객체대로 이것이 객체라고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주객(主客)이 개무(皆無)라고 하고, 제식(諸識)은 순간마다 변하고, 그 자체가 완적하지는 않으나 자신을 비롯하여 일체법의 변화를 일으키는 주재자(主宰者)임으로 일체법(一切法) 유식(唯識), 즉 일체법의 변화는 식에 의할 뿐이라 했다.
제 18 송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유일체종식 여시여시변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이전전력고 피피분별생
일체종식(一切種識)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함으로써 움직이는 힘도 힘을 받아 [전전력(展轉力)], 다양한 분별심을 일으키게 된다. [생기(生起)]
유일체종식(由一切種識)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
일체종식(一切種識)이란 식이 본래 능소(能所)가 없는 하나였는데 수많은 겁 동안에 있었던 업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되어감에 따라 삼 능변식으로 변해지고 또 능소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지금까지 행한 수많은 업이 저장되어 있다가 연을 만나면 발아(發芽)하는 기능이 있게 되었음으로 이를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일체종식이라 부를 때는 제6 의식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들에 의지해 연을 만나면 시비(是非) 선악(善惡)의 행위를 하고, 그 행위가 다시 제8 아뢰야식에 심어져 다음 연을 만나면 발아할 종자로 저장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일체종자식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와 같이 심어진 종자와 만나는 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해가는 식이다.
이전전력고(以展轉力故)란 아뢰야식안에 저장된 종자가 제6 의식이 연을 만날 때 발아(發芽)하여 모종의 행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행위가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다음에 연을 만나면 발아할 종자로 남게 된다. 이렇게 행위 - 종자 - 행위로 전전(展轉)하면서, 움직이는 폭이 넓어짐에 따라 그 행위와 종자에 새로운 힘이 가해질 수도 있고 감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제6 의식이 원하는 행위일 때 그 사이클이 돌아감에 따라 힘이 가해지고, 원하지 않은 일에는 그 힘이 쇠해지게 된다. 이러한 이치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바르게 할수록 바른 수행력이 증가하게 되고, 삿(邪)된 수행을 하면 삿된 힘이, 악한 일을 하면 악한 행위의 세력이 커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바른 일과 바른 수행으로써 바른 전전력(展轉力)을 증가시킴으로서 성불의 길로 가게 된다.
피피분별생(彼彼分別生) 중 피피(彼彼)는 여러 가지 혹은 대단히 많다는 뜻이고, 분별생(分別生)은 분별력이 생긴다 혹은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설명한 전전력이 어떤 방향으로 일어나느냐에 따라 그 분별력도 다를 수 있다. 노름하는 종자를 많이 심을 때는 노름하는 전전력이 강해질 것이니 노름하는 분별력이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요, 참선수행을 즐겨하면 그 수행력이 증가됨에 따라 수행에 대한 새로운 분별력도 일어날 수 있고, 이 분별력이 지력(智力)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전문문야를 보는 눈이 세련되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우리들이 수요일 저녁 유식을 공부하는 것은 제6 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선근의 힘을 입어 유식 공부를 하는 것이고, 이 유식 공부로 우리는 나날이 새롭게 공부하는 세력이 증가되게 되고, 그 증가되는 세력에 힘을 입어 만사를 보는 분별력이 매일 새롭게 증가되어 일어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러 가지 전전력(展轉力)과 분별력 중에서 예불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세상 사람들을 공경하는 마음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의해 동반되는 힘, 그리고 그 힘이 동반하는 자신과 대상을 바로보고 바로 행하는 분별력의 향상이 가장 수승하다고 본다.
제 19 송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유제업습기 이취습기구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전이숙기진 부생여이숙
모든 업(業)의 습기(習氣)로 말미암아 2취(二取)의 습기를 함께한다. 전이숙(前異熟)이 이미 다하고 나면 다시 남은 이숙(異熟)이 생기(生起)한다.
제17송에서 시제식전변(是諸識轉變) 분별소분별(分別所分別), 이 모든 식이 분별하는자와 분별되는자를 움직여 변하게 한다. 그리고,
제18송에서 유일체종식(由一切種識)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
이전전력고(以展轉力故) 피피분별생(彼彼分別生), 즉 일체종식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변화를 일으킴으로 전전력(展轉力)이 가(加)해지고, 그 전전력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분별이 생긴다고 했다.
제19송에서 유제업습기(由諸業習氣) 이취습기구(二取習氣俱)
모든 업의 습기(習氣)로 말미암아 2가지 취하는 습기가 함께 한다.
모든 업의 습기라는 것은 같은 동작을 반복함에서 일어나는 기운인데, 곧 제18송의 전전력(展轉力)을 기(氣)로 표현하고, 피피분별생(彼彼分別生), 여러 가지로 분별하는 마음이 선택한 행위의 반복이니 습(習)으로 표현된 것이다.
예를 들면 여러 가지로 분별하는 마음이 담배를 선호하여 담배를 반복해서 피우다보면 담배 피우는 습관이 붙고, 습관의 기운도 함께 증가하게 되는데, 그 습관에는 담배에 집착하는 능취자(能取者)와 그 집착의 대상인 담배, 즉 소취자(所取者)가 함께 있다는 말씀이다. 즉 담배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같이 있다는 말씀이 된다.
그 습관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습관의 기운도 점점 강해져 고치기 어려워지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행위란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같이 보여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일이라도 자주 반복하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그 자체의 세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제업(諸業)의 습기(習氣)이다. 장난삼아 하던 노름이 노름꾼이 되어 가업을 망치게 되는 경우,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 등이 모두 제업(諸業)의 습기(習氣)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또 이는 좋은 의미도 있다. 공부를 조금씩 하다보면 공부에 취미가 붙어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나, 처음에 긴가민가하고 절에 나왔다가 재미를 붙여 열심히 나오게 되는 경우 등도 모두 제업(諸業)의 습기(習氣)에 해당된다.
이러한 제업(諸業)의 습기(習氣)에는 두 가지 취(取)하는 바가 함께 일어나는데 하나는 능취(能取)이고, 다른 하나는 소취(所取)이다. 이를 이취습기구(二取習氣俱)라고 했다.
능(能)은 행을 하는 주체이고, 소(所)는 행의 대상인 객체이다. 능취는 특정한 일에 습기(習氣)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에 집착하는 주체이고, 소취는 능(能)이 집착하는 대상이다. 예를 들면, 능취는 술에 집착하는 주체이고 소취는 집착의 대상인 술이다. 술을 집착하는 능취와 소취인 술은 함께 일어난다는 말이다. 테니스를 열심히 치는 사람의 경우 테니스 치는 습관이 든 기운이 있음으로 열심히 치게 된다. 이 사람은 테니스에 집착하는 자, 능취이고, 테니스는 소취인데 능취와 소취가 함께 작용한다는 뜻인데 소취인 테니스가 이미 능취인 마음과 함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제8 아뢰야식과 제7 말나식의 영향을 받으며 제6 의식이 여러 가지 일들을 나름대로 주체의식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하다보면 그에게 독특한 습성(習性)이 생기게 된다. 이 습성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행위로서 반복되는 가운데 업의 습관적인 기운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을 제업습기(諸業習氣)라 하는데, 아뢰야식에서 어떤 습관이 습기로서 작용될 때 이를 제8식에 훈습된 종자 혹은 종자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심어진 종자 혹은 업의 습기는 이미 능소(能所), 행위자와 행위의 대상, 나와 나의 대상으로서의 너, 너와 너의 대상으로서의 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자로서의 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자로서의 나 등으로 이원화(二元化)된 습기가 모두 함께 종자식에 있게 된다는 말씀이 이취습기구(二取習氣俱)이다. 그대는 멀리 있지만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이미 있다는 말씀이다.
원래는 이원화(二元化)되어 있지 않고 능소(能所)가 없는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의 탐욕에 의한 업의 습기가 취하고자 하는 자와 취함을 당하는 자로 이원화되면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로 나누어져 제8식에 능취와 소취의 습기가 함께 저장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어떤 사람의 제8식에 저장된 능취의 습기(習氣)가 소취의 습기보다 강한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고, 능취보다 소취의 습기가 강한 사람은 환경을 개척하기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능소의 관계를 이해하고 오별경(五別境)을 수행하면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된다. 다툼은 결국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과의 다툼이라는 말씀이다.
전이숙기진(前異熟旣盡) 부생여이숙(復生餘異熟)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8식에 저장된 앞의 종자가 제6 의식의 활동에 의해 연(緣)을 만나면 발아(發芽)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이숙(異熟)이라 하는데 이 이숙이 다하면 나머지 종자가 또 연을 만나 발아하여 이숙 한다.
이 때, 종자는 인(因)이 되고 이숙(異熟)은 과(果)가 되니 인과가 반복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인과의 반복을 우리는 윤회(輪回)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곧 생(生)과 사(死)의 반복이다.
그리고 또 전(前) 종자가 연을 만나 발아하여 이숙을 하면 새로운 종자의 세력이 처음보다 더 증가 되고, 다음 종자가 연을 만나 발아하여 이숙하면 그 새로운 종자의 세력은 더욱 확장된다. 종자가 악종(惡種)이면 악종이 발아하여 이숙할 때마다 더욱 그 세력이 강해시고, 선종(善種)이면 그와 반대로 선의 인과가 반복되어 선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는 법이니 모든 불자들이 오별경(五別境) 수행을 열심히 할 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오별경 수행으로 현재 악업의 종자가 선업의 종자로 이숙하면, 제8 아뢰야식에 그 나머지 악업의 종자가 선업의 종자로 이숙하게 된다. 이 악업이 선업으로 이숙하는 행이 반복되면서 제8식에 남은 악업의 종자가 필경에 다하게 됨을 시사한다. 이러한 인과의 원리로 선인(善因) 선과(善果)를 반복하여 그 선(善)의 세력을 확대해 나아가 악(惡)의 종자가 다하고, 나와 이웃이 모두 함께 선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제 20 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유피피편계 편계종종물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차편계소집 자성무소유
여러 가지로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사물을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두루 계산하여 집착하는 대상의 자성(自性)은 없다.
유피피변계(由彼彼遍計)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앞 19송에서 유제업습기(由諸業習氣) 이취습기구(二取習氣俱), 모든 업(業)의 습기가 있기 때문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습기가 함께 있다고 했다. 습기에 분별하는 마음을 가하면 능취(能取)는 변계(遍計)가 되고 소취(所取)는 물(物)이 된다.
유피피변계(由彼彼遍計)는 능변(能變)을 설명하는 것으로 전오식이 어떤 사물을 접촉할 때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에 의지해서 스스로 자기 생각의 대상을 만들어 여러 가지로 그 이익을 두루 계탁(計度), 즉 계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전오식이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 두루 계산하는 행위가 전개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전개되는 행위에 집착하는 것이 소취(所取)이다.
예를 들면,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두루 계산하여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정하고 상상해서 개념화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마음속에서 믿고 또 남에게도 권유하여 믿게 함으로서 자기가 천당에 간다는 이익을 챙기고, 자기 관념의 존재성을 확인하고, 그 존재성을 견고하게 함으로서 그 이익을 계속하여 보고자 하는 습기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의 믿음이 절대적임을 상대에게 말해 믿도록 권하고, 강요하고, 강요해도 안 되면 자기 이익을 위해 친(親)과 적(敵)으로 갈라 투쟁도 불사한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관념을 만들어 이익을 보겠다는 믿음이기에 그 존재성이 항상 불안하여 강제로 믿게 만들고자 하는 심성이 발광적인 투쟁심으로 발전되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그려진 종교적인 혹은 사상적인 개념이나 관념 혹은 생각을 심상(心相)이라고 하는데, 이 심상은 제7 말나식이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에 의지해서 사량하여 만들어진다. 제6 의식은 이 심상에 근거하여 옳다고 생각 되는대로 집행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춘기(思春期)에는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을 의지해 발육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7식이 제8식에서 발육되기 전에는 자기와 부모는 하나라고 여겨오던 것이 발육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계산을 하는 마음이 일어나 자기와 부모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모와 차별화하고자 한다.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자기와 부모와의 관계를 너와 나로 이원화(二元化) 시키면서 아상(我相), 아애(我愛), 아소(我所), 아만(我慢), 아집(我執) 등이 일어나면서 실생활에서는 전혀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자기에 대한 추상화를 그리면서 부모, 형제에 대한 혹은 사회와의 차별화, 적대감, 혹은 염오(厭惡)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 추상화를 향해 가기위해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녀의 마음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가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평소에 오별경(五別境)과 같은 수행을 하지 않고는 자기가 왜 그런지 알 수 없고 또 자기(제6식)가 그런 마음을 제어하고 싶어도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본인 스스로 현실과 전혀 관계없음을 인식할 때까지는 제어가 불가능하다.
이 때 제6 의식이 7식에 의해 그려진 심상(心相)이 진(眞)이라고 믿었던 마음이 진(眞)이 아니라고 깨닫게 될 때 고민하게 되고, 고민 끝에 오별경(五別境) 수행을 하게 되면 그러한 관념, 사상, 개념 등이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애욕(愛慾)에서 부모와 이원화(二元化)하려고 하였던 것임을 알게 되고, 6가지 근본번뇌가 모두 이로 인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그들을 소멸하는 수행에 들어가게 된다.
제7 말나식에 의해 그려진 아상(我相)에 대한 그림을 지워버리려면, 제6 의식이 아상(我相)이나 아애(我愛)가 일어날 때 그들을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제7 말나식을 다스려야한다. 말나식을 다스리는 법은 제8식에 저장된 탐진치 종자를 제거하는데 있다.
이러한 심상(心相)은 어떤 종교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유독(有毒)한 것일 수도 있고 환상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잘 다스리면 유익한 점도 있을 수 있다. 이 제7식의 상상력은 자기 이익을 위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무익(無益)한 식(識)으로 취급하기보다 수행을 통해 현실적으로 유익하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피피변계(由彼彼遍計)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여러 가지로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많은 종류의 사물을 두루 계산한다는 뜻이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은 제7 말나식에 예지력(叡智力)이 있기 때문이다. 제7식의 예지력에 의존한 상상력을 현실에 맞게 바르게 발달시켜 성공하는 예는 흔히 있다.
자기의 이익 추구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아애(我愛)를 근본으로 하는 제7 말나식을 유용하게 발전시켜가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제7식의 마음이 남에게 해(害)가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는 강력한 아집(我執)을 행사하는데 있다. 이 아집만 쉬게 하면 된다.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불교에서는 이 제7 말나식을 완전히 제어하기 위해 아애(我愛)를 없앰으로서 너와 나를 하나로 원융(圓融)하게 하고, 오직 제8식의 지혜에만 의지할 것을 수행의 근본으로 한다. 이와 같이, 제7식이 실제 사물이 없이도 제8식에 의지하여 얻은 기억을 사량(思量)의 대상으로 하여 자기중심적인 새로운 사상, 개념, 관념 등을 형성하여 그 관념이 실제 있는 것으로 변계(遍計), 즉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피피변계(彼彼遍計)이고, 실재하는 어떤 물건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감각(五感覺)으로 들어온 여러 가지 대상물을 7식이 8식에 저장된 경험과 비교하고 사량해 본 결과 이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심상(心相)을 그리고, 이 심상을 의지하여 제6 의식이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인식된 사물은 왜곡(歪曲)되고 착각되었으나 본인은 착각한 줄 모르고 사실대로 인식한 줄 알고 자기 소견에 집착하여 상대방과 시비하고 주장하는 가운데 왜곡(歪曲)이 더 깊게 증폭되어 처음에 본 그 사물과는 아무 관계없는 어떤 것들을 잡고 서로 계탁(計度), 즉 계산하고 시비하는 모습이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일 수 있다.
표상(表象)은 보고 들은 대상을 왜곡(歪曲)되게 인식하고 그 왜곡이 고리에서 고리로 물고 상속하여 일어나는 행위의 모습이다. 이렇게 상속되는 행위는 고민의 원인으로 발전되어가는 결과 우울증, 공포증, 불면증, 혐오증, 강도, 살인, 자살 등을 일으키는 성격으로 나타나고, 또 술, 담배, 마약, 노름 등의 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주변 사람들과 각(角)을 이루고 다투는 성격이 되기도 하며, 부부사이에 불화(不和)가 점점 악화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님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하여 ‘머리를 굴린다.’고 표현하는데 고립적(孤立的)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자주 경험한다. 고립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머리 굴림’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자기가 항상 옳다고만 생각하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 고립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머리를 굴리는 것’,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 불화(不和)의 원인이 되고 남에게 해롭고 결국 자기에게도 해로운 성품이고 병(病)이 되는 성품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머리 굴림’을 멈추게 되고 고립성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원만한 성품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변계소집(此遍計所執)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이렇게 두루 계산하여 집착하는 대상의 자성(自性)은 없다.”
집착하는 대상(所執)을 변계(遍計), 즉 두루 계산하는 것은 전오식이 보고 듣고 한 것을 제8 아뢰야식에 전달하고,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이 정보를 받아 여러 가지로 계산하여 조작한 심상(心相)을 제6 의식이 이 심상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에 대한 자기의 탐욕이나 원하는 바를 채우기 위해 혹은 자기의 존재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계산하고 행위를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서 집착하는 대상은 허상(虛相)이므로 집착하는 대상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으로 차변계소집(此遍計所執)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이라고 했다.
사물을 실제로 보았거나 혹은 보지 않았거나 제7식이 제8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에 의지해 사량심을 일으켜 사상, 개념, 관념을 만들어낸 것을 심상(心相)이라 하는데 이 심상이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믿고 남에게 믿음을 권하고, 강요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화를 내고 투쟁을 하는 것은 그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고, 이 대상에 대해 계속해서 사량해 자기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차변계소집(此遍計所執)이라 했다. 그리고 실제로 있는 사물을 오관을 통해 보았지만 제7식의 사량심에 의한 심상(心相)에서 왜곡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만을 관철하기 위해 계속해서 여러 가지 생각으로서 그 대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또한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 한다.
이러한 변계소집(此遍計所執)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수많은 생각의 대상을 만들어 수많은 종류의 우울증, 공포증, 불면증, 혐오증, 강도, 살인, 자살 등을 일으키는 성격 형성의 원인이 되고, 또 술, 담배, 마약, 노름 등의 중독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고립적(孤立的)인 성격이 되기도 하며, 부부사이에 불화(不和)가 나선(螺線)형으로 얽혀 점점 악화되어 지옥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대상에 ‘이것이다.’하고 내놓을 수 있는 변계소집성이 없다.
심상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니 그 자체에 진실성(眞實性)이 없고, 또 그 심상에 집착해서 계속해서 계탁하는 것에도 진실성이 없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고 한 것은 ‘나’나 ‘법’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은 없고, 또 ‘나’라고 할만한 자성이 없는데 변계소집(遍計所執)할 근거가 어디에 있으며,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할 것도 없고 피피변계(彼彼遍計)할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를 신행(信行)하고 신행(身行)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오별경(五別境) 수행을 해야 한다. 오별경은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이미 하였다.
제 21 송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 분별연소생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어피 상원리전성
타(依他)에 의지함으로서 [과(果)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 있음으로 연(緣)을 분별해서 생(生)하는 바가 있게 되고, 그에 있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항상 앞의 성품을 멀리 여읨에 있다.
제20송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무자성(無自性)임을 설명하였는데 제21송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 중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능변(能變)이고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은 소변(所變)이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인(因)이 타에 의지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니 능변(能變)이다.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자기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도 타에 의지해 존재하는 자성(自性)임을 알지 못함으로 자기가 자기를 모르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알고 싶으면 남을 접촉할 때 일어나는 자기의 성품을 잘 관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성품이 남을 의지할 때 드러나는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저 사람을 의탁해서 어떤 덕을 보고 해를 보는가는 생각해봐도 자기 성품이 어떠하였는가를 관찰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불교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그 접촉에서 들어난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봐 남을 불편하게 하였거나 남에게 손해를 보인 자기의 성격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개선(改善)하여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덕을 베풀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외에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수많은 일들이 모두 남에 의지함으로서 주관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는 능변식(能變識)이다.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은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즉 능변식(能變識)이 타(他)인 연(緣)을 어떻게 분별하느냐에 따라 무엇이 소생(所生)하는 바라고 했다. 자기의 마음속에 남에게 의지하는 자성(依他起自性)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연(緣)을 분별하는 대로 결과가 소생(所生)한다는 말씀이다. 이 때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 인연(因緣)법의 인(因)으로서, 자기 내면의 자성이 남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의지하는 성품을 갖추었을 때, 바르게 연(緣)을 분별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바라고 하여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이라 했다.
좋은 분별연소생을 갖기 위해서는 바른 의타기자성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다.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 상원이전성(常遠離前性)
어피(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니, 의타기자성 안에 원성실성이 있으니 이는 항상 전성(前性)을 멀리 여읨에서 드러난다. 전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니 의타기자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읜 마음이 원성실성이라는 뜻이다.
앞 20송에서 변계소집성은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들을 제7 말나식이 의지해 아상(我相),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만(我慢)이 일어키는 아소(我所)에 대한 욕구가 탐욕 탐애 등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변하여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표상(表相)을 일으킨다. 그들에 대한 집착심과 계탁하는 마음이 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질환, 대인 관계 등을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의기 위해서는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에 의지해 오별경 수행을 해야 한다. 오별경 수행 중에 일체 존재는 의타(依他)하여 서로 연계(緣繫)함으로서 삶을 이어갈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의게 된다. 삶이란 의타기(依他起)하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마음속에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음을 체험하게 됨으로 변계소집성을 항상 여읠 수 있는 곳에 원성실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원성실성과 변계소집성은 같이 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변계소집성이 소멸된 곳에 원성실성이 드러날 수 있으며, 변계소집성이 활개 칠 때 원성실성이 감추어진다. 변계소집성이 활개 칠 때는 의타기성하는 자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의타기성하는 자성의 도리를 깨닫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싹트고 그와 같이 행할 때, 변계소집성이 사라지고 원만실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제 22 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고차여의타 비리비불리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여무상등성 비부견차피
그러므로 이것이 의타와 더불어 있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치 무상(無常)과 성(性)이 같아서 이것과 저것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고차여의타(故此與依他)의 고(故)는 위 제21송에서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 상원이전성(常遠離前性)인 고로 라는 의미이다.
어피(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니, 의타기자성 안에 원성실성이 있으니 이는 항상 전성(前性)을 멀리 여읨에서 드러난다. 전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니 의타기자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읜 마음이 원성실성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는 의타기자성하는 진리를 깨닫고 나와 너를 분별하여 이익을 얻고자하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멀리 여의었을 때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는 나를 여의고 너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을 만났을 때 일어나던 모든 아상(我相)을 소멸하고, 법(法)을 접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 일으키던 모든 법상(法相)을 소멸하였으니 이 22송에서 말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변계소집성이 없는 마음이니 진성(眞性)을 의미하고 의타(依他)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니 일체가 의타기(依他起)하는 진리를 깨달은 마음이니 자기 욕망에서 일으키는 변계소집성이 아니라 남을 위해 일으키는 의타기성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인(因)이 연(緣)을 만날 때 일어남이 있고 연을 잃을 때 사라지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의타기성은 연생(緣生) 연멸(緣滅)하는 이치를 알고 위타(爲他)하는 생멸작용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하게 일체를 이루는 실성(實性)이니, 곧 법성(法性)이다. 법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수명을 가졌으니 무량수(無量壽)라고 하는데, 흔히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일체 생멸작용이 이에 의지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제8식의 역할이다.
원성실성을 증득한 성자(聖者)가 중생에게 자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 의타기성이다. 이렇게 볼 때 원성실성은 진성(眞性)이고 의타기성은 그 진성에서 비롯되는 언행(言行)의 모습으로 상(相)이 된다. 바다에 비유하면 성은 바닷물이고 상은 파도에 비유될 수 있다.
고차여의타(故此與依他) 비이비불이(非異非不異)
고차여의타(故此與依他)의 차(此)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의미하니, ‘그러므로 원성실성은 의타(依他)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이니,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가 된다. 의타기성은 원성실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다르지 않다고 하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성(性)이고, 의타기성은 원성실성의 상(相)이니, 성인 원성실성과 상인 의타기성은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불생불멸은 생멸과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닌 관계에 있다. 생멸은 불생불멸인 근본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면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지만 불생불멸은 생멸의 성(性)이 되고, 생멸은 불생불멸의 상(相)인 면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가 된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제8식은 제6식과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가 된다. 제6 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작용하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제6 의식은 제8 아뢰야식의 상(相)이고, 아뢰야식은 의식의 성(性)인 면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또,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를 보면 몸의 모습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表相)이고 말과 행동은 현재 마음의 표출(表出)이라는 면에서 몸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가 된다. 그러나 몸의 모습과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은 마음대로 분명히 있으니 몸과 마음은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가 된다.
또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도 서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파도는 바닷물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파도도 그 자체가 바닷물이므로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바닷물은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성(性)을 가지고 있고, 파도는 바닷물이 움직이는 상(相)이라는 점에서 보면 성과 상이 다르지 않다고만 할 수는 없다.
수행을 통해 견성(見性)을 했다는 것은 본성을 보았다는 뜻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저자거리로 나오는 자비행은 본성의 상이 된다. 본성은 성이고 자비행은 상이니 본성과 자비행은 같다고 아니할 수도 없고 같다고 할 수도 없는 관계이다.
여무상등성(如無常等性) 비불견차피(非不見此彼)
여무상등성(如無常等性)은 ‘무상과 성이 같은 것과 같이’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무상(無常)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멸하는 일체 만법을 의미하고 성(性)은 생멸하는 작용의 본성(本性)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성질이다. 무상한 것은 불생불멸하는 본성에 의지해 일어나는 현상이고, 불생불멸하는 본성은 생멸하는 무상한 현상에 의지해 드러남으로 무상과 성(性)은 등가(等價)라고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비불견차피(非不見此彼), 즉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생멸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나 물건의 성품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성품을 알면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가가 올라가면 경기가 나쁘다는 것을 모를 리 없고, 경기가 좋아지면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치를 알면 결과를 알 수 있고, 결과인 현상을 보고 그 원인을 모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무상(無常)과 무상의 성(性)은 등가이기 때문이다.
무상(無常)과 그 무상의 성(性)이 등가(等價)가 되려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먼저 소멸해야만 된다. 변계소집성이 있으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계산하는 마음이 있고 그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계교(計較)가 함유됨으로 무상과 그 성이 등가일 수 없다. 예를 들면, 물이 오염되고 있을 때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있기 때문에 무상과 그 성이 등가일 수 없다. 우선 오염의 원인을 제거하고 오염된 물을 정화해야 한다.
제 23 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즉의차삼성 입피삼무성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고불밀의설 일체법무성
곧 이 3성(性)에 의해 저 3무성(三無性)이 정립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설(說)하셨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의 즉(卽)은 ‘곧’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라는 뜻이고, 의차삼성(依此三性)은 이 ‘삼성에 의해서’ 인데 삼성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 입피삼무성(立彼三無性)은 곧 이 삼성에 의해서 저 삼무성(三無性)이 정립(定立)된다고 했다.
변계소십성은 제7식이 8식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심상(心相)이 자기 혹은 자기 것이라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득실(得失)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그 심상(心相)에는 자성(自性)이 없고, 또 오감관에 비춰진 사물을 제7식이 8식에 저장된 과거 경험에 의지해 만든 심상(心相)에 집착하여 희비고뇌(喜悲苦惱)의 감정을 일으키거나 손익(損益)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이 심상도 실재하지 않은 허상(虛相)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변계소집성에는 불변하는 고정된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은 무성(無性)이라 한다고 했다.
이 무성(無性)에서는 현재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쓰는 마음은 변계소십성이니 반드시 고쳐야 하고 또 고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서의 무성이고, 개혁(改革)되어야 할 성품이 무성(無性)이니 반드시 개혁될 수 있다는 의미로서의 무성(無性)이다.
의타기성은 인연법에 인(因)인 주체의 성품은 주체 자신만으로 자신을 알 수 없고, 또 주체 자신만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오직 연(緣)인 타(他)에 의지함으로서 자신의 성품을 의식할 수 있고, 또 그 연(緣)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서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주체는 객체에 의해, 객체는 주체에 의해 항상 변화됨으로 인해 의타기(依他起)할 수 있음으로 그 결과 자체도 항상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의타기의 자성(自性)이 없으니 의타기성은 무성(無性)이라고 했다.
의타기성의 무성은 주체인 ‘나’는 항상 자신과 상대를 바르게 관찰할 줄 알아야 하고, 그 관찰의 결과 나 자신을 위해, 상대를 위해, 어떤 결과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면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서의 무성이다. 무성(無性)이란 고정된 성품이 없다는 뜻이니, 못 고칠 성품이 없고, 결과적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서의 무성이고, 연을 따라 자신을 고침으로서 무엇이라도 창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법성게에서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여 자기성품 고집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지니,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이라 한 뜻이다.
원성실성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스스로 드러내지는 자성이 없다. 제6 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선근(善根)의 종자에 의지해 제7 말나식이 하는 변계소집성을 소멸함으로서 드러나는 법이니 실상(實相)은 변계소집성을 어느 정도로 정제(淨制)했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상이 다르다. 그러므로 원성실성 홀로 주제할 수 있는 자성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원성실성도 무성(無性)이라한다.
원성실성이란 이런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성상(性相)이 없다고 한 것은 수자(修者)가 의지하고 집착할 수행의 대상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으니 없다고 할 수 밖에 없고, 없다고 하고 무심코 앉아 있으면 코앞에 나타나니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무성이라 했다.
일체만법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삼상(三相)에 의해 나타나는데 이 삼상(三相)이 모두 무성(無性)이라고 했다.
고불밀의설(故佛密意說) 일체법무성(一切法無性)
이와 같은 이유로 일체법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삼성(三性)으로 설명되는데 이 삼성이 모두 무성이니 일체법도 무성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 암시적(暗示的)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이 삼무성(三無性)설은 반야심경에서 설한 공(空) 도리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다. 이 삼무성설도 공(空)도리에서와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니 집착할 것이 못 된다는 의미도 있고, 무성(無性)이니 끝없는 발전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들의 창의력이 무한하고 행복의 한계도 끝없다는 의미도 된다.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제 24 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초즉상무성 차무자연성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후유원리전 소집아법성
처음은 곧 상(相)이 무성(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초즉상무성(初卽相無性)
처음, 상(相)이 무성(無性)이라고 한 것은 상(相)은 변계소집(遍計所執)하여 일어나는 모습인데, 이렇게 일어나는 모습이 무성(無性)이란 말이다. 이는 금강경 제5송에서 제상비상즉견여래(諸相非相卽見如來)에서 제상(諸相)이 변계소집된 상(相)이고 비상(非相)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32송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한 말씀이 변계소집의 상(相)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한 말씀도 상무성(相無性)과 같은 뜻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모두 변계소집성이 만연되어 왔기 때문에 누적된 문제이다. 이 변계소집은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국제적, 국내적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불화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할 성품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 상무성(相無性)이란 변계소집하는 상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니 얼마든지 고칠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변계소집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수행목적으로 한다.
차무자연성(次無自然性)
다음은 자연성이 없다 이다. 자연(自然)은 음양의 조화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에 의해 작용되는데, 이 작용은 또 원인과 조건이 만날 때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이를 연기법이라 하기도 하고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주객이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성주괴공의 작용이 이루어지지만 주체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객에 의지해야만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데 이 주(主)와 객(客)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니 자연도 이에 따라 변하므로 그 성품이 무자성이라고 하여 무자연성(無自然性)이라고 했다. 이는 의타기성이 무성(無性)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이 말씀에서 고정불변하는 하나님, 홀로 일체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설을 부정하는 것이고, 일체 생과 멸, 성주괴공(成住壞空)은 항상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화합을 위해서는 인(因)도 변하고 연(緣)도 변해야 함으로 그 결과인 화합도 변해지는 것이니,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변계소집할 대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유유원리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해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라고 하여 다음 게송으로 이어진다.
위에서 이 우주의 법칙이 의타기성임을 깨달았으면 의타기(依他起), 즉 무엇인가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에 맞게 변해야하고, 그 조건들도 필요에 따라 변해야하며, 그 산물도 필요에 응하게 되기 위해서는 아상(我相)을 고집하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상(法相)을 고집해도 그 결과를 바르게 유도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원성실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我)와 법성(法性)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파도가 파도의 형상에 집착하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조건들에 집착하여 그 파도를 유지하고 키워가기 위한 온갖 사량이 변계소집이다. 이 변계소집을 여의고 파도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 파도는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조건의 변화에 따라 파도도 변하는 것이지만 물을 여의고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파도가 이는 조건들이 사라져 파도가 잠잠해져도 바닷물은 여전히 있는 것이니, 생멸하는 파도에서 불생불멸하는 바닷물을 볼 수 있을 때 살아가기 위해 변계소집하던 습성을 여의고 생멸하는 조건들을 수용하고 공경하는 새로운 습(習)을 들이게 된다.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차제법승의 역즉시진여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상여기성고 즉유식실성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이고 또한 진여(眞如)이다.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乃至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이다.” 중 ‘이것이’가 제24송의 “후유원이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를 받는 말이니, 말을 붙이면,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제법승의(此諸法勝義)이고 또 역시 이것이 곧 진여이다가 된다.
앞의 구절에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오별경 수행을 통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성취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이미 여의었다는 말씀이니 전생에서부터 가지고온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던 성질이 180도로 변하여 완전히 위타(爲他)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제법승의(諸法勝義)란 제법 중에서 가장 수승한 뜻이라는 말씀이다. ‘아상과 법상의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모든 법 중 가장 수승한 의(義)를 증득했다는 뜻으로 제8식 안에 선(善)이든 악(惡)이든 과거 경험에 의한 종자가 모두 멸진되어 더 이상 멸할 것이 없는 최상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문(眞如門)에 든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도 제법승의(諸法勝義)가 곧 진여(眞如)라고 했다. 진여란 참되어서 부정(不淨)함이 전혀 없어 여여(如如)하다,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곧 제법승의(諸法勝義)이고 진여(眞如)라고 했다. 한 가지 잘 알아야 할 것은 의타기성에 원성실성이 있고, 원성실성이 있음으로 의타기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즉 생멸에 불생불멸이 있는 것이지, 생멸을 멸한 곳에 불생불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생멸법 중에서 변계소집성 생멸을 멸해야 하는 것이지 생멸을 다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의타기성은 남아 있는 것이니 위타(爲他)를 위한 생멸작용은 있는 것이다.
상여기성고(常如其性故) 즉유식실성(卽唯識實性)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중에 그 본성은 차제법승의(此諸法勝義) 역즉시진여(亦卽是眞如) (모든 법의 승의(勝義)와 진여(眞如))를 받는 대명사이니, 그것의 본성은 승의(勝義)와 진여의 체성이다.
상여(常如)란 항상 여여(如如)하여 변함이 없다는 뜻이니 승의와 진여의 체성은 항상 여여 하여 변함이 없는 까닭에 유식이 곧 실성(實性)이다. 유식이 곧 실다운 본성이다, 불생불멸하는 체성이다, 참된 성질이라는 말씀으로 금강경 제5송에서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의 여래와 같다.
그리고 이 유식실성(唯識實性)을 원만하게 이룬 실성이라 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도 한다.
승의(勝義) 중 최상의 승의를 제법승의 혹은 승의 중의 승의라 하여 승의승의(勝義勝義)라고도 하는데 우리들 수준에서 승의의 예를 들어 낮은 단계의 실성(實性)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의 근본은 ‘나와 내 것’이 인식되기 시작할 때 동시에 ‘너와 내 것’의 분별과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식과 ‘내 것’이라는 물욕(物慾)이 성립되어 능소(能所)와 주객(主客)이 이루어져 변계소집이 시작되는데 이 때 이미 제7 말나식이 발동하여 제8식에 저장된 업(業), 과거경험에 의한 심상과 표상이 전개되기 시작해서 너와 나를 분별하고 남보다 낫고자하는 경쟁심이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이원화(二元化)를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 서양철학이고, 이 경쟁심리를 극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요 자본주의이다. 이원화(二元化)를 원칙으로 하는 종교가 하나님의 창조설을 믿는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이다. 이원화를 원칙으로 하는 두 종교 간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전개되지 않을 수 없는 소지를 가지고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근본은 ‘나’를 내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치게 하고, ‘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너’가 필요함을 인식시키고, ‘나’가 무엇을 하려고 하더라도 ‘너’를 의지하여야함을 인식시켜서 ‘나라는 존재’를 유지 내지 보호하기 위해 ‘너를 차별’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음을 인식시킴으로서 너와 내가 평등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제7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게 되면 ‘나’를 포함한 이 우주 법계의 일체만상이 음으로 양으로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연기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순간이 일체법과 ‘나’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고, 너와 나의 상대적인 개념이나 대립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너로부터 득’을 보려는 마음이나, ‘나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마음에서 어떻게 하면 ‘너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일체만상이 있는 그대로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털끝만큼도 빠짐없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니 일체가 항상 평온함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곧 적정(寂靜)이고 열반이요 극락이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원리를 인식하고 이를 방해하는 변계소집(遍計所執) 즉 금강경에서 설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상(相)을 여의는 과정이 의타기성을 체험으로 실현하는 수행이 될 것이다. 변계소집성이 완전히 소멸되고 의타기성만이 운전될 때 제법승의(諸法勝義), 진여법성, 원성실성이 성취되는 때이다. 이 때 의타기성은 너와 내가 분별되지 않는 의타기성이다. 즉 너와 내가 분별되지 않는 관계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그들의 병에 따라 처방하여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자비행(慈悲行)이고 보살행이다.
즉유식실성(卽唯識實性)을 상여기성고(常如其性故)라고 하여 항상 여여 하게 있는 그 성품이 곧 유식실성이라 했으니, 유식실성은 원성실성, 진여법성, 제법승의이다. 만법이 오직 식(識)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했을 때의 식은 생멸법의 식이였으나 유식실성이라 할 때의 식은 불생불멸의 식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최상의 식이다. 제22송 여무상등성(如無常等性) 비불견차피(非不見此彼)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생멸하는 식에서 불생불멸하는 식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제 26 송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내지미기식 구주유식성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어이취수면 유미능복멸
또한 유식(唯識)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유식의 실성(實性)에 머물고자 한다면 2취(二取)가 수면(隨眠)에 들어가 오히려 능히 복멸(伏滅)할 수 없을 것이다.
내지미기식(乃至未起識) 구주유식성(求住唯識性)
내지미기식(乃至未起識) 중 ‘내지(乃至)’는 앞 25송 - 차제법승의(此諸法勝義) 역즉시진여(亦卽是眞如) 상여기성고(常如其性故) 즉유식실성(卽唯識實性)에 ‘이어서 그리고 또’ 라는 의미이고, ‘미기식(未起識)’은 식이 아직 일어나지 못했는데, 혹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니, 이 식은 곧 앞 구(句)에 나오는 유식(唯識)을 말함이니, 유식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유식성(唯識性)에 머물고자 하면,
어이취수면(於二取隨眠) 유미능복멸(猶未能伏滅)
이취(二取)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종자가 제8 아뢰야식에서 수면(睡眠)에 들게 되어 오히려 이취(二取)를 복멸(伏滅)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제25송에서 유식실성이 곧 진여이고 항상 여여하게 존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제26송에서는 그렇다고 하여 수자(修者)가 유식실성에 곧바로 머물고자하면 제8 아뢰야식에 있는 이취(二取)의 종자들이 잠복하여 있어 이들을 항복받아 없애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말씀이다. 즉 능취와 소취의 업장을 소멸하여 제8 아뢰야식을 청정하게 하면 유식실성이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니 업장소멸하는 수행부터 하라는 말씀이다.
이취(二取)인 능취와 소취의 업장은 능과 소가 만날 때, 일어나는 법이다. 소(所)가 없이 능(能)만 있으면 업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혹은 능은 없고 소만 있어도 업(業)이 성립될 수 없다. 즉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만 있고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 없으면 취(取)하고자 하는 욕심의 대상인 소취(所取)가 없으므로, 취하고자 욕심을 내는 능취(能取)가 일어날 수 없다. 이 때 취하고자 하는 욕심인 능취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제8 아뢰야식에 이미 저장된 욕심의 씨앗이 연(緣)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대로 잠복해있게 된다. 색성향미촉을 직접 대하지 않는 참선 수행으로 진여인 원성실성을 구하려고 해도 아뢰야식에 잠복해있는 욕심의 씨앗은 연(緣)을 만나지 못해 드러나지 않으니, 항복받아 소멸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 취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자하면 어떤 물건이나 명예 이성(異性) 등을 그가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놓아봐야 알 수 있고, 화를 내는 습(習)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 봐야 드러나는 법인데 참선수행만 하는 수자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므로 이 수자가 화를 낼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 수자가 화를 내는 습(習)이 없는 수자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화내는 씨앗이 잠복해있기 때문이다.
이치가 이러하므로 누구나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여 외롭게 사는 사람은 자기의 탐욕이나 화냄의 씨앗이 잠복해있을 뿐이므로 연(緣)을 만나는 환경이 주어지면 탐욕과 화냄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접촉하는 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접촉함으로서 나타나는 자기의 성품을 바로 인식하여 욕심을 내거나 화를 내는 성품은 바로 잡아 소멸시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편법을 써야한다. 이렇게,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자기의 잘못된 성품을 찾아 소멸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번뇌가 다 없어지고 마음의 평온이 자기에게 와 있다.
자기의 성질을 다스리는 방편 중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합장이다. 합장을 하면 바로 저 사람은 불교신자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합장은 불교적인 수행이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불법을 옹호하자는 의미가 있기에 감정(感情)이나 대립을 삼가고 자비심을 세우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둘째, 절이다. 먼저 반배를 하고 삼배하고 나서 또 반배를 하는 것이 삼배이다. 절은 하심(下心)의 표현인 동시에 상대방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심과 공경은 탐욕과 화냄을 소멸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부처님께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절은 지극한 하심의 표현이고, 세 번째 절에서 고두례를 할 때, 손을 합장하는 것은 명심하겠습니다라는 뜻이고, 손바닥을 귀까지 올리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발을 씻어드리던 관습이, 뒤에 발을 만져드리는 예로 변하고, 그 후 조계종에서 손바닥을 귀까지 올리는 예를 택하였는데 부처님을 받든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든다, 부처님을 공경한다는 의미로 지금은 해석한다. 부처님, 부모님, 스님들께 올리는 불교적인 예이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릴 때는 이 명(命)을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발심(發心)을 하게 되고 발심이 되어야 자기의 성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이웃과 더불어 화목을 이루기 위해 자기 성격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기 성격 개혁운동을 전개함으로서 아뢰야식에 심어진 탐욕과 화내는 씨앗을 모두 소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매일 예불을 모시고 108배를 하는 습관은 업장을 소멸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데 귀중한 의미가 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하는 예불 염불 108배 등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번뇌는 너와 나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것임으로 번뇌의 소멸은 분별심의 소멸로 이어지고, 분별심의 소멸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소멸하게 한다.
이취(二取)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하고자 한다.
능취(能取), 소취(所取)를 이취(二取)라 하는데 능취는 나에 집착하여 무엇인가 취하고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마음이고, 소취는 이 세상에 있는 사물이나 나의 생각에서 일어난 종교적 관념이나 정치적 사상 내지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말, 사물, 생각 들을 좋다고 취하고자 하거나 싫다고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대상이다. 우울증이나 불면증 같은 증세가 있는 사람의 경우 능취와 소취가 서로 반작용을 일으키며 나선형(螺旋形)으로 생각의 골이 깊어져 가는 증세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능취 소취의 개념을 능소(能所)라고 약칭하는데 능은 주체자인 나를 의미하고 소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대상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타(他) 혹은 ‘너’라고 부르지만 의미하는 바는 능소의 소(所)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능이 될 때는 내가 그의 소가 되는 것이다.
‘오늘 비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능이고 오는 비는 소가 된다. ‘오늘 비가 온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 말하는 사람의 업에 따라 바라보는 의식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며, 그 사람이 비가 오기 때문에 귀중하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든지, 가야할 곳을 가지 못했거나, 크게 손해를 보게 되었거나 할 때는 그가 비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게 되고, 그 집착은 불만과 번뇌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경우 불교적인 입장을 말씀드리면 그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오는 비라고 본다. 내 마음의 업식이 비가 아니라면 비가 아니고, 비라면 비라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내가 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업식이 본대로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비로 인해 득을 봤다 손해를 봤다고 하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의 업식이 계산한 결과에 웃고 울지만, 업식이 변하면 결산도 변하는 것이니 비를 나무라지 말고 업을 소멸하여 제8식을 청정하게 함으로서 편안함을 얻고 원성실성을 체험하고 증득하라는 말씀이다.
누가 나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한 사람은 능1이고 그 말은 소(所)1이며, 그 말을 들은 나는 소이면서 또 다른 능2가 된다. 같은 소를 놓고 능1의 의도와 해석 그리고 능2의 반응과 해석은 민감하고, 능2가 이 소에 집착할 때는 번뇌와 분노가 겹쳐 능1과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는 입에서 입으로 전전할 때마다 그 내용이 변하게 되어 소1, 소2, 소3으로 전변(轉變)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능1과 능2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발전될 수도 있다. 능1이 무심코 한 말이 이와 같이 발전될 수도 있고, 의도적일 때도 그럴 수 있다. 이것은 능1이 한 말이 능2의 심상에 비춰진 말을 능2, 능3이 듣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혹은 불교적일까?
능1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능2가 그 말을 듣고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능2는 그에 따른 업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능1은 능1이 의도하고 말한 바에 따라 업을 짓게 된다.
그런데 능2가 자기의 인격을 비하하는 말을 듣고 어떻게 무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능1은 능1이 가지고 있는 업식에 따라 말한 것이고, 그 말을 듣는 능2는 능2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업식에 의해 듣고 느끼고 해석하고 반응한다. 능2의 업식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고 반응하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1이나 능2가 자기들의 업식을 관하는 수행을 통해 그 업식에는 진실인 자성(自性)이 없고, 소1, 2, 3에도 모두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임을 깨달으면 반응하지 않게 되고, 혹 반응하고자 하는 업식이 작용할 때는 그 업식을 곧바로 인식하고 그를 소멸하면 청정한 제8식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자기의 잘못된 성격을 인식하고 그 업을 소멸할 수 있으므로, 업의 대상을 피하여 한가한 곳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능1을 대할 수도 있고 능1이 능2에게 그렇게 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병(病)의 원인을 너를 통해 볼 수 있었기에 고쳐질 수 있었고, 너의 병의 원인은 나에 의해 보여 질수 있어 고쳐질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니 이기심의 입장에서 너와 나, 너의 것과 내 것을 분별하던 단계에서 너와 내가 하나 되는 단계로 승화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식사상에 의해 옆에 사람의 반응에서 나의 허물을 비춰보고 고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단체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는 성품으로 개선할 수 있다. 옆 사람의 반응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성품은 자기의 나쁜 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집착이니 고립(孤立)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발전하여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스스로 비관하는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이 우주의 일체만물은 서로 얽혀 연기하는 것이니 연기의 대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습성은 외로운 길로 가기에 자기의 나쁜 습성을 인식하지 못하니 잠복해 있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 27 송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현전입소물 위시유식성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이유소득고 비실주유식
눈앞에 작은 물건을 하나 세워 이것이 유식성(唯識性)이라고 한다면 이는 소득심이 있는 것이므로 유식에 진실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어떤 작은 물건이 나타났다고 인식하고, 그 인식하는 마음을 유식성(唯識性), 즉 원성실성이라고 말한다면, 이 유식의 작용에는 소득(所得)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므로 실(實)다운 유식(唯識)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앞에 아무리 작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를 구하는 마음 내지 의지하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곧 소득심(所得心)이다. 소득심이 있으면 사량심(思量心)이 작용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이 일어나게 된다. 소득심에는 제7 말나식, 즉 사량심이 있고, 사량심에서 변계소집이 작용하게 된다. 변계소집이 작용하는 마음에서는 실다운 유식이 머물 수 없으니 변계소집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눈앞에 있는 작은 물건을 어떻게 보는 것이 유식성(唯識性)일까?
작은 물건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본래 내 마음이 보는 대로 그 물건이 있는 것인데 탐심에 가리어 그 물건이 있는 대로 내가 본다고 착각하고 보는 마음이다. 내 마음이 보는 대로 그 물건이 있다는 말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노란 색안경을 쓰고 있으면 그 물건은 노랗게 보이고, 미운 틀을 가진 색안경을 쓰고 보면 그 물건이 밉게 보이니 실제 존재하는 물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 보이는 것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그에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색안경을 쓰고 있는 마음이 있는 한 유식성(唯識性)이 드러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물건이 어떻게 비춰질까? 이 물건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성(空性)을 보는 것이다. 공성이란 그 물건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사물이 합성되었고 그것을 만든 손과 기술, 정성 등이 이 우주의 운동과 인연되어 만들어진 것이고 혼자 만들어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깨닫고, 아공 법공 무아를 그 한 물건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색공(色空)이 보이는 것도 마음이 보는 것인데 이는 제7 말나식에 형성된 탐욕, 아집과 법집의 상(相)이 완전히 제거된 마음이니 이를 유식실성이라 한다.
두 수자(修者)가 한 깃발 아래서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 “아니다.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이다.” 라고 하며 언쟁을 하고 있는 곳에 육조 혜능선사가 그 옆을 지나가시다가 “깃발이 흔들린다는 것도 틀렸고, 바람이 깃발을 흔든다고 하는 것도 틀렸다. 이것 외의 다른 답을 내놓아라.”라고 하셨으나 수자들은 갑자기 멍해지고 말았다. 혜능선사가 원하였던 답은 무엇일까? 그 답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흔드는 것도 아니요,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 공안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을 바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젊었을 때 대화 중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장마철에 산 계곡에 흐르는 물결이 세고 깊어 그 계곡을 건널 마음을 내지 못해 기다리고 있던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이 때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함께 산길을 가다가 이 여인을 만났다. 경허스님이 이 여인에게 왜 길을 가지 않고 서 있느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허스님이 아! 이 물을 건너지 못해서, 라고 하면서 그 여인의 앞에 앉아 자기 등에 업히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경허스님 등에 업혀 그 물을 건너고, 경허스님은 그 여인을 내려놓고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젊은 만공스님은 정말 황당하게 생각했다. 경허스님은 만공스님에게 가르치기를 여인은 독사와 같으니 마주 봐도 안 된다고 하시고 자기는 여인을 업고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히고 물을 건너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경허스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앞서가던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아시고 앉아 기다리는 사이에 만공스님이 가까이 와서 스님께 질문이 있다고 하면서 경허스님께 물었다. 여자는 독사와 같다고 쳐다봐도 안 된다고 하시고 어떻게 하여 큰스님은 여자를 업고 물을 건널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경허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벌써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안고 있구나. 라고 하시며 길을 재촉해 떠났다고 한다.
이 역시 그 여인에게 허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경허스님에게 허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광경을 보고 만공스님의 마음에 그 여인에 대한 상(相)이 그렇게 비췄으니 허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마음의 상(相)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다.
이 27송에서도 수행자가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좌차(座次)의 순서를 잘 따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제 28 송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약시어소연 지도무소득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시주유식 이이취상고
만약 소연경(所緣境)을 대할 때 조금도 소득심이 없는 지혜를 얻었다면, 이 때 유식성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이취(二取)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소연(所緣)은 능소(能所)의 소(所)이니 어떤 상대를 대할 때 조금도 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지혜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능취와 소취, 능과 소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이 때 유식성에 머무는 것이 된다. 능소의 상을 여의었다는 의미는 제7 말나식의 아상(我相), 아소(我所), 아애(我愛), 아만(我慢)을 여의었다는 뜻이고, 이는 곧 탐진치 삼독을 여의었다는 말이니 자기를 위한 소득심이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금강경 제5송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모두 여의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일체 소득심을 여의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원성실성을 보리라.
이 송에서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여의고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성취할 것을 말씀하신다.
도무소득(都無所得)은 반야심경에서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에서 시작하여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느니라.”까지 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다가 유식의 유식성(唯識性) 혹은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 오별경(五別境) 수행법을 다시 살펴보자.
이 수행의 순서는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이다.
첫째 욕(欲) : 위 게송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합장, 삼배, 예불, 염불, 108배 등을 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일심(一心)으로 하다 보면 도(道)를 깨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길 수 있다.
발심을 하고 스승을 찾는 것이 첫 단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초년에는 스승을 찾아다니셨다.
둘째 승해(勝解) :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부처님의 마음을 찾아들어가는 선(禪)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마음을 표현한 경전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를 하고나서 다른 것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쌍수(雙修)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왜냐 하면 이들은 상승(上昇)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양쪽을 폭넓게 그리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승해(勝解)이다.
나와 남을 분별하고 아상과 인상, 아만을 세우는 것은 내 업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닌 진리, 내 것과 남의 것의 분별도 제8식에 저장된 과거 경험에 의한 심상(心相)과 표상(表象)에 집착한 탓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본래는 일체가 평등하여 이 세계에 ‘나’아닌 것이 없고 ‘내 것’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또 그 세계와 세계가 상호 상부상조하는 우주의 진리를 수승하게 이해하여, 제 8식에 저장된 아집과 법집이 일체 번뇌와 병의 원인임을 깨닫고 이들을 소멸하고자 하는 큰 원을 세워 수행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셋째 염(念) : 은 일체 만법이 의타기성하는 자연법(自然法)을 염(念)하여 그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 업장 소멸하는 기도, 사경, 염불, 독경, 절 등을 일념으로 하면서 8식에 저장된 일체 업의 종자를 소멸하고 의타기성의 자연법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수행 도반이나 세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소홀히 할 일이 아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일념(一念)으로 하는 것도 자기 업장을 찾아 소멸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일념으로 행동하는 한 자세, 한 동작에 마음을 모으려고(mindfully) 노력하고 그 노력에 장애가 올 때 그것을 인식하고 소멸하는 작업을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위해 현성스님의 “나를 찾아 떠나는 선 여행”을 참조하고 또 토요일 오후에 하는 선수행에 참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와 다섯째 정(定)과 혜(慧) : 염(念)을 바르게 하여 어떠한 사물을 대할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 정(定)에 들게 되고, 정에 들게 되면 점차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를 무념(無念) 혹은 무상(無想)이라고도 하고 삼매라고 하기도 한다. 무념은 곧 공(空)이고 공은 불생불멸이다. 이것은 정(定)의 체(體)이다.
정념(正念)이 깊어지면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니 염(念)의 수행 단계에서 위에서 설명한 변계소집성을 완전히 소멸하고, 선정에 들면 공(空)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선정에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의타기성의 자연성(自然性)이 드러나게 된다. 이 자연성은 일체만법이 의타기성이므로 연기하고 있음을 깨닫고, 변계소집성이 없는 자연법의 세계에서는 어두움이 없는 밝은 세계가 열리니,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세계이다. 일체 만법이 평등하고 무한한 수명을 가지고 있으며, 부족함이 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이 지혜는 불생불멸의 용(用)이며, 이 식(識)이 유식실성, 원성실성, 진여, 법성의 용(用)임을 알게 된다.
유식실성에 도달하여 자연성(自然性)을 체득하게 되면 고통 받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집(二執)을 여읨으로서 일체번뇌에서 해탈하여 원성실성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자비행을 베풀게 된다.
제28송에서 이취(二取)를 여의었다고 함은 능소가 있는 유위법을 여의었다는 뜻이니 다음 29송에서 무위법에 대해 설명한다.
제 29 송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무득부사의 시출세간지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사이조중고 변증득전의
얻을 것이 없는 곳에 부사의(不思議)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곧 출세간지(出世間智)이다. 두 가지의 거칠고 무거운 것을 버렸기 때문에 곧 전의(轉依)를 증득했다.
제28송에서 離二取相故 智都無所得을 설명하면서, 자기 자신의 잘못된 성품[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을 찾아 소멸하고,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바에 따른 잘못된 견해를 끊임없이 찾아 소멸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듯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대상임을 알게 되었으니 너의 안녕이 나의 안녕이 되고 나의 불행이 너의 불행이 될 수 있는 이치를 알게 되었으니 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하니 얼마나 네가 나를 알아주고 너에 의해 내가 득을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알아주고 너에게 득을 베풀 수 있느냐는 문제로 돌아서게 되니, 너로부터 득을 봄으로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덕을 베풂으로서 우리의 행복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너와 나를 분별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것을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하나의 관계로 정립한 지혜이니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즉 무분별지에서는 능취 소취의 상이 없고 상대로부터 조그마한 소득심도 없는 도무소득(都無所得)의 지혜이다.
무득부사의(無得不思議)
제 29송에서는 이러한 수행 단계에 이른 수행자는 28송에서 설한 무득(無得)의 이치를 깨달았고, 무득을 성취한 사람에게는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고, 이를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라고 했다. 무득(無得)은 체(體)이고 불사의(不思議)는 무득의 용(用)이 된다.
먼저 ‘불사의(不思議)’라 함은 너와 내가 하나 됨에서 얻어지는 공덕인데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면, 나와 모든 가족이, 사회가 그리고 이 우주법계와도 하나가 되어 법계가 나요 내가 곧 법계가 되어 법계에 충만한 공덕이 항상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불사의(不思議) 한 일이다. 이를 법성게에서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다고 하고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해인삼매 그 가운데에 불가사의 무진 법문 마음대로 쏟아내니 중생들은 그릇 따라 온갖 이익 얻는구나.’라고 했고, 부처님께서 ‘새벽 샛별을 보고 우주의 진리를 깨치신 것’이나, 조사(祖師)님들께서 ‘새 우는 소리에’, ‘낙엽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등등으로 진리를 깨치신 것들이 모두 이이취상(離二取相)하고 도무소득(都無所得)에 들어 얻어지는 불가사의한 지혜이다.
도무소득(都無所得)이란 한 티끌도 없는 공(空)을 의미한다. 이 공은 곧 불생불멸한 것이고, 불생불멸하다는 것은 마치 해가 주야(晝夜) 없이 밝게 비치는 것과 같이 항상 어두움이 없고 밝다. 어두움이 없다는 것은 지혜가 있어 괴로움과 번뇌가 없다는 뜻이고, 밝다는 것도 지혜가 있어 항상 마음이 평온하고 밝다는 뜻이다. 불생불멸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능생능멸(能生能滅), 즉 나고 죽음이 자재하여 대통령을 제도하고 싶으면 대통령의 몸으로 화현(化現)하고, 마음씨 나쁜 예쁜 여자를 제도하고 싶으면 예쁜 여자로 화현하고, 지옥중생을 제도하고 싶으면 지옥중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자재해지고, 일체 방편술을 갖출 수 있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했다.
시출세간지(是出世間智)
무득부사의가 곧 출세간지라는 말씀이다. 세간지(世間智)는 너와 내가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에서 내가 너를 이길 수 있고, 너보다 더 잘 살 수 있고, 사업에 성공하고 명예를 더 높일 수 있는 지혜이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명리를 위해 성공하는 사람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세간지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기의 명리를 떠나 남과 대립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면서 세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 주고 돌보아 주고자하는 사람의 지혜가 출세간지이다. 이 출세간지가 곧 무득부사의라고 했다.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
앞 구의 무득부사의를 어떻게 증득하는가를 제차 설명하는 구절이다.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의 조중은 거칠고 무거운 업장이라는 뜻이니, 두 가지 거칠고 무거운 업장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번뇌장은 제8식에 전생에서부터 저장된 종자 중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견해를 유지시키고 증장시켜가기 위해 일으키는 탐진치(貪瞋癡)의 행위가 다시 종자로 심어지고 그 세력이 가중되어가면서 제7식이 일으키는 번뇌이다. 그리고 소지장 역시 잘못된 종교나 사상, 학문, 사회생활 등에서 얻은 사상, 지식, 앎이 선행(善行)에 장애가 되는 업장인데 이를 주로 만의견(慢疑見) - 게을러서 꾀를 부리고, 의심이 많아 할 일을 미루고, 사견(邪見)이 많아 정법(正法)을 바로보지 못하는 악견(惡見) - 이라 한다. 말하자면 아는 것이 선행에 장애가 되는 악견(惡見)을 소지장이라 한다. 이도 역시 그들 행위에 의해 심어진 종자가 제8식에 저장되어 있고, 제7식이 이들 종자에 의지해서 제6의식으로 하여금 그렇게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의(轉依) : 제6식이 8식에 의지해 선(善)을 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 하여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를 증득하였다는 뜻은 제6 의식이 임의로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11선(善)에 의지해, 아뢰야식에 소장된 탐진치 등 번뇌장을 소멸하고, 악견(惡見)인 소지장(所知障)을 소멸하는 것을 자재(自在)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음으로 이를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라 하고, 이 전의가 두 가지 거칠고 무거운 업장을 소멸했다는 뜻이다.
전의(轉依)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소멸하고도 계속해서 작용하여 제8식에 선행(善行)의 종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어 그 세력이 증장됨에 따라 미세한 업장과 무명마저 소멸하게 되어 보리도(菩提道)를 이루게 되고 열반에 들게 된다.
이는 곧 제6식이 제8식에 저장된 11 가지 선행의 종자에 의지해 움직여서(轉依) 미세한 번뇌들마저 소멸하고 무명(無明)을 밝혀 대각(大覺)을 이루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증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구(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발심해서 전의(轉依)를 증득(證得)함으로서 제8식에 저장된 선행(善行)의 종자에 의지해서 탐진치 등 일체 번뇌장을 소멸할 수 있고, 또 잘못된 견해들, 즉 만의견(慢疑見) 등 악견(惡見)인 소지장을 복멸(伏滅)하고 더 나아가 선행(善行)을 계속함으로서 미세한 번뇌들마저 소멸하고 무명(無明)을 밝혀 출세간(出世間) 지(智)를 증득하여 불가사의한 힘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발심(發心)하고 그 힘으로 전의(轉依)를 증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예를 들면, 담배를 끊고 싶으면, 전의(轉依)에 의지해 즉시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29송에서는 미세한 번뇌마저 완전히 소멸하는 단계이다.
제 30 송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 부사의선상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안락해탈신 대모니명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한 선(善)이며, 상(常)이고, 안락(安樂)한 해탈신(解脫身)이고, 대모니(大牟尼)이니, 이를 법신(法身)이라 한다.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의 차(此)는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를 받는 말이다.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즉 번뇌장와 소지장을 여의였으므로 전의(轉依)를 증득해 미세한 번뇌마저 완전히 소멸하였으므로 이것을 곧 더 이상 번뇌가 없는 경계(境界)라고 하여 무루계(無漏界)라고 했다.
무루계(無漏界)의 상(相)은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하고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하며 대모니(大牟尼)인데 이름하여 법신(名法)이라 한다고 했다.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선(善)의 부사의성과 상(常)의 부사의성을 의미한다. 중생을 제도하는 선(善)은 세속(世俗)에서 보는 선(善)과 다르게,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善), 즉 선(善)이되 선(善)이라 해도 맞지 않고, 선이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으며, 선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으니 부사의한 선(善)이고, 그 선(善)을 행함에 온갖 필요한 방편이 따라오니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선(善)이기에 부사의(不思議)한 선(善)이라 했다. 그리고 상(常)이란 항상(恒常)한다는 뜻이니 영원불멸한 것을 의미하지만 상(常)이 상(常)아닌 무상(無常)과 구별(區別)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무상(無常) 속에 상(常)이 있는 법이고, 상(常) 속에서 무상(無常)이 일어나는 법이니, 상(常)이 무상(無常)이요, 무상(無常)이 곧 상(常)이 될 수도 있으니, 상(常)이 무상(無常)과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니, 그 상(常)의 모습이 부사의(不思議)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상(常)과 무상(無常)의 관계를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했다. 이러한 사실이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나타날 때 ‘참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고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이다.
스님은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대모니(大牟尼)까지를 부사의(不思議)가 받는다고 해석한다. 즉 부사의한 안락 해탈신, 부사의한 대모니로 본다.
안락해탈신은 살기위해 구하는 마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불만 등 일체 번뇌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면 부사의한 안락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앞 글에서 무루계(無漏界)에 들었으니 이미 해탈하였다. 해탈하였으니 일체 세속적인 일을 떠났는데 어떻게 해서 최소한의 의식주(衣食住)를 조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해탈한 몸은 의식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이 법계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러한 근심걱정으로부터 해탈하였고, 마음이나 몸에 병(病)도 없고, 죽고 삶에 전혀 두려움이 없으니 일체의 걸림과 나고 죽는 구속에서 해탈한 몸이다. 그러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중생을 이렇게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좋은 일을 하는 불사(佛事)에서 즐거움도 느끼게 되니 안락(安樂)이다. 이러한 모든 불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 역시 깨달은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부사의(不思議)한 일이라고 해석한다.
대모니(大牟尼)는 큰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대각(大覺)을 이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호이다. 유식 30송에 담긴 뜻이 오로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니 대모니(大牟尼)라고 부르는 것이나, 부처님 탄생 후 2천 6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적할 대모니(大牟尼 성자) 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부사의(不思議)한 대모니(大牟尼)이다.
명법(名法)은 법신(法身)이라 한다는 뜻인데 법신이라고 할 때는 때로는 그 근본인 법성(法性)의 의미로 쓰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적적(寂寂)한 고요함과 대광명(大光明) 및 인지(印指) 등은 법신(法身)의 상(相)을 표현 한 표상(表相)이다. 이 법신(法身)의 성(性)과 상(相)은 오직 깨달은 성인(聖人)의 체험으로서만 알 수 있는 법이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도 하고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한다.
즉,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불가사의한 성(性)과 상(相)을 가진 성자(聖者)가 된다.
유식 30송의 개요(槪要)
유식 30송 중 제1송에서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혔으며,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의 수행과정을 밝혔다.
제1송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我)와 법(法)은 사실(事實)을 바로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 변화는 식(識)을 의지해 일어나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에는 3가지 식(識)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사실대로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식(識)에 의해 감지(感知)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식(識)은 3가지뿐이라고 했다.
제1송에서 우리들의 마음에 3가지 식이 있음을 밝혔다.
제2송에서 이 3가지 식(識)은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그리고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다. 이숙식은 종자와 결과가 다르다고 하여 이숙식이라고 하는데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기도 하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짓는 일체의 업이 종자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는 의미로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제3송에서, 아뢰야식이 어떻게 일체 업의 종자를 받아서 지니는지, 어디에 저장하는지, 연(緣)을 만나면 어떻게 그 종자들을 요별해서 그 연과 상응하게 하는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로 작용하나, 오직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사수(捨受)에만 상응(相應)하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제4송에서, 아뢰야식 자체는 어떠한 신구의 삼업이 들어와도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차별의식이 없이 받아들이며, 그 업에 의해 물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마치 폭포수가 흐르듯 빠르게 일어나나,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일체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의 계위에 오르게 된다고 했다.
제2송에서 제4송까지 아뢰야식의 상(相)을 밝혔다.
제5송에서, 2번째 능변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는데, 이 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에 의지하고, 또 아뢰야식에 저장된 수많은 종자들과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서 성(性)과 상(相)을 삼는다. ‘나’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을 성품과 모습으로 한다는 뜻이다.
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종자들을 반연하여 작용하는 사량식(思量識)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제6송에서, 말나식은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등의 네 가지 번뇌(四煩惱)를 항상 일으키고, 제8아뢰야식의 작용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변행심소(遍行心所)와도 함께 작용한다.
제7송에서, 제7 말나식은 좋고 나쁜 것에 대한 감정은 없지만 신구의 삼업에 의해 오염되는 바가 있어 사량(思量)을 일으키는(生) 바에 따라 얽매임을 받는다. 그러나 아라한과(阿羅漢果)나 멸진정(滅盡定)에 들거나 세간도(世間道)에서 벗어나게 되면 사량(思量)이 소멸되므로 더 이상 오염되지 않는다.
제5송에서 7송까지에서 말나식의 상(相)을 밝혔다. 말나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마음작용으로 인한 번뇌의 근본이 되는 식이지만 수행하면 소멸할 수 있다고 했다.
제8송에서, 세 번째 능변식은 의식(意識)이다. 의식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가지 식(識)으로 구별되는데, 그 경계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섯 가지 경계를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성(性)과 상(相)을 삼는다. 그리고 그 성과 상에는 선(善)한 것과 선(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非善非不善)이 모두 함께 있다.
제9송에서, 이 의식의 심소(心所)에는 변행심소(遍行心所), 별경심소(別境心所), 선심소(善心所), 번뇌심소(煩惱心所), 부정심소(不定心所)가 있고 고락사(苦樂捨) 삼수(三受), 즉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감정과 서로 응한다.
제10송에서, 변행심소(遍行心所)에 6가지가 있으니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다. 즉 제8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심소작용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에는 5가지가 있는데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이다. 이는 수행하는 심소(心所)로서 수행자가 만나는 연(緣)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여 별경심소(別境心所)라 했다.
제11송에서, 선(善) 심소(心所)에는 11가지가 있으니, 신(信)·참(慙)·괴(愧)와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이다.
제12송에서, 근본번뇌(根本煩惱)에는 6가지가 있는데, 이는 탐(貪)·진(瞋)·치(痴)·오만(慢)·의심(疑)·악견(惡見)이다. 수번뇌(隨煩惱)에는 20가지가 있는데, 분한 분(忿)·한탄하는 한(恨)·덮어 씌우는 부(覆)·번뇌(惱) ·질투(嫉)·인색한 간(慳)이 있으며,
제13송에서 12송의 수번뇌(隨煩惱)에 이어서, 속이는 마음(誑), 아첨하는 마음(諂), 피해를 끼치는 마음(害), 방자한 마음(憍),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無慙), 참회할 줄 모르는 마음(無愧), 잘난 척 으스대는 행위(悼擧), 멍한 마음(昏沈), 믿음이 없는 마음(不信), 게으른 마음(懈怠),
제14송에서 13송의 수번뇌(隨煩惱)에 이어, 방일(放逸)과 실념(失念), 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로서 20가지 수번뇌(隨煩惱)를 모두 설명하고, 4가지 부정(不定) 심소(心所)로서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에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4가지라 했다.
제15송에서, 의식은 근본인 제8아뢰야식에 의지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오식(五識)이 연(緣)을 만남에 따라 나타나는데, 모두 함께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 마치 파도가 물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제16송에서, 의식은 항상 현재에 일어나는데,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났을 때나, 무상(無想)과 무심(無心)의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나, 깊이 잠들었을 때 그리고 기절했을 때는 대상을 만나도 현행(現行)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잠잘 때는 6식(識)이 작용하지 않고, 제7식과 8식은 작용을 계속한다. 잠자는 중에서도 심장(心臟) 박동, 호흡, 체온유지 외의 육체적 작용을 유지하게 하는 작용은 제8식이 하는 것이고, 몸을 치유하는 면역성도 제8식의 작용이다. 꿈은 제7식과 8식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제8송에서 16송까지에서 6식의 상(相)을 밝혔다.
제17송에서, 제8아뢰야식, 제7말나식, 제6의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분별하는 주체나 분별을 당하는 객체가 움직이는 것이 모두가 실다운 것이 아니니 일체가 유식(唯識) 뿐이라고 했다.
제18송에서,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수많은 종자식이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고, 그 작용의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분별심도 증가하게 된다.
제19송에서, 종자식의 작용은 변화를 일으키고, 그 작용의 씨앗이 또 종자식에 저장됨에 따라 그 세력이 증가하고, 그 세력의 증가에 따라 습기(習氣)의 세력도 커지게 되는데, 이 습기에는 능취와 소취 두 가지가 있다.
제20송에서, 능취와 소취의 작용은 자기중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하는데 이는 고정(固定)된 자성이 없어 심해질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는 것이므로 무자성(無自性)이라 했다.
제17송에서 20송까지에서 변계소집성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소멸할 수도 있지만 소홀히 대하면 심해질 수도 있는 성질(性質)이라 하여 무자성(無自性)이라 했다.
제21송에서, 능취와 소취를 여의어서 변계소집성을 여의면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자연성(自然性)이 드러난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 있다고 했다.
제22송에서, 원상실성은 의타기성에 의지하므로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른 것도 아니요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무상(無常)과 상(常)이 서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즉 무상(無常)을 보고 상(常)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상(常)을 보고 무상(無常)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제23송에서, 그러므로 의타기성도 타(他)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타(他)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무성(無性)이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 의지해 나타나는 것이니 무성(無性)이며, 변계소집성도 이미 무성(無性)이라 했으니 삼무성(三無性)이고, 삼무성(三無性)이니 일체법(一切法)이 무성(無性)이라고 했다.
제24송에서, 삼무성(三無性)임을 거듭 밝혔다.
제21송에서 24송까지에서 삼무성(三無性)이고, 따라서 일체법이 무성(無性)임을 밝혔다. 이 우주 법계에서 개선(改善)하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이고, 그렇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정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항상 일체의 변화에 대해 관심 있게 관찰하여 그것에 대치(對治)하고, 연(緣)의 변화보다 앞서가는 능변(能變)이 되어야 함을 지적하셨다.
제25송에서, 만법의 실성(實性)은 원성실성이고, 제법(諸法) 중에 가장 수승한 법이며, 이를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항상 여여(如如)한 본성이며, 유식실성(唯識實性)이라고 하여 유식의 본성이 곧 일체법의 근본임을 밝혔다.
제26송에서, 유식실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業識)은 소멸하지 아니하고 바로 유식실성에 들려고 하면 업장이 잠복해 있는 까닭에 실성을 증득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하여 점차적인 방편을 취할 것을 권한다.
제27송에서, 작은 물건이라도 현전(現前)할 때,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소득심(所得心)이 있는 것이고, 소득심이 있으면 유식성에 머물 수 없으니, 소득심을 여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소득심에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있으니, 이를 소멸해야 한다.
제28송에서, 능취와 소취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오별경(五別境) 수행을 해야한다. 그리고 염불, 독경, 사경, 절 등 다양한 업장소멸 수행방법이 있다. 이러한 수행에 의해 능취와 소취를 소멸하고, 어떠한 연(緣)을 만나도 소득심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지혜를 증득하게 되면 비로소 유식성에 머물게 된 것이다.
제29송에서, 무소득심(無所得心)을 얻어 유식성에 들게 되면 세간의 지혜에서 벗어나게 되고, 선근(善根)에 의지해 작용하는 전의(轉依)를 증득하게 된다.
제30송에서, 전의(轉依)를 증득하여 계속 수행하게 되면 번뇌가 없는 무루계(無漏界)에 들게 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선(善)과 상(常)을 얻고, 안락(安樂) 해탈신(解脫身)을 얻어 큰 성자(聖者)가 될 것이니 이름하여 법신(法身)이라 한다. 제30송은 수행하여 도달하게 되는 구경지(究竟智)를 설명한 것인데, 수행으로써 제25송에 설한 진여와 유식실성을 증득한 것이다.
제26송에서 30송까지는 수행해서 제1송에서 25송까지 설한 바를 하나하나 체험하여 유식실성을 실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식 30송의 대의(大意)
유식 30송의 대의(大意)를 말씀드리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몸에 있으니, 우리들의 몸에 지옥(地獄)과 열반(涅槃) 그리고 지옥과 열반의 중간 세계인 중생계가 동시에 함께 있다. 지옥과 극락이나 천국이 따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안에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제7말나식이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업(惡業)에 의지하여 분별하는 사량(思量)을 심하게 일으키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이끄는 대로 얽매여 그 감정이 격해져서 자기의 머리와 몸 그리고 사지(四肢)가 괴로워지니 자기의 몸이 지옥이 되는 것이고, 또 제6의식이 만법이 서로 의지해서 생기(生起)하고 유지하며 멸하는 이치를 이해하고, 제8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선근(善根)에 의지해서 발심하여 보살행(菩薩行)을 꾸준히 닦다보면 어느 날 자기중심적인 변계소집성이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바뀌어 일체 탐욕과 근심 걱정이 소멸되고 지혜(智慧)가 충만하게 되어 일체 걸림이 없는 대자유를 얻게 된다. 이 때 의타기성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드러나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도 편안해진다. 이러하니 이 몸이 곧 열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성실성을 얻었으니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일에 전념하게 될 때, 이러한 마음을 가진 이 몸이 곧 부처가 되고, 극락세계가 되며,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만법유식(萬法唯識), 유식실성(唯識實性) 혹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했다.
이것을 또 다르게 표현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너희 중생들 몸 안에 이미 있음을 알라.’ ‘일체중생이 곧 부처다.’ ‘어두움만 밝히면 부처가 된다.’ 는 등의 표현들이 나오게 되는 근거이다.
우리들 몸 안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체를 다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오직 우리들 자신의 식(識)에 달려있다.
唯 識 三 十 頌
世親 菩薩造, 玄藏 三藏譯
稽首唯識性 滿分淸淨者 我今釋彼說 利樂諸有情
1.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次能變唯三
2.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3.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4. 是无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5. 次第二能變 是識名末羅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6. 四煩惱常俱 爲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餘觸等俱
7.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8. 次第三能變 次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9.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10.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11.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12.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13. 誑諂與害憍 无慙及無愧 掉擧與惛沈 不信幷懈怠
14.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15.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16.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17.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18.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19.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20.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无所有
21.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22.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23.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无性
24. 初卽相無性 次无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25. 次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26. 乃至未起識 久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27.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28.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29. 無得不思議 時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30.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已依聖敎及定理 分別唯識性相義 所獲功德施群生 願共速證無上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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