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불교의 무아론/한자경

수선님 2020. 2. 23. 12:06

불교의 無我/한자경

불교에서의 중요한 개념인 무아론(無,我論),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 연기(緣起), 오온(五蘊), 그리고 윤회와 해탈로 대표되는 불교의 존재론 등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경계하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불교의 진리성으로 상대성과 절대성을 함께 깨닫는 무아론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연기란 파티카-스무파다(paticca-smuppada)로서 파티카(patica)는 '.....를 인연하여'이고, 스무파다(smuppada)는 '일어나다'를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을 합한 연기는 '연(緣)하여 생기(生起)한다'를 의미한다. 존재한는 것은 본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 연기설은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의 본성인 자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인연으로 해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일체를 연기의 산물로 여기므로 세간 전체에 대해서도 그것을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생하고 또 인연에 따라 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연기설은 "세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는 유무의 존재 논리를 "세간은 인연 화합을 따라 생하는가, 멸하는가?"의 생멸의 발생 논리로 바꾼다. - 본문 62~63쪽에서



지은이 : 한자경

최근작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 공적영지>,<심층마음의 연구>,<선종영가집 강해> … 총 41종 (모두보기)
소개 :


저자의 말
절대의 눈을 망각한 채 상대만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음을 절대의 공으로 자각하지 않는 한, 일체가 무상이고 고이며 공이라는 인식, 아공 법공의 깨달음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세계를 보는 절대의 시점, 그것을 공의 마음으로 자각함이 없이 어찌 세계의 상대성을 감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아와 연기를 통해 현상 세계의 상대성을 논하면서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현실 인식의 바탕인 공과 일심을 놓지 않았다.

 


49.[잡아함경]<유아경>에서 붓다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내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찌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短見이다.”

 

붓다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 다가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恒常된 것에 대해서만 상이나 무상,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有我론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無我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51.-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기에,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견이나 단견으로 주장되는 자아, 즉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恒常된 자아와 붓다가 설하고자 하는 중도의 자아, 즉 연기 법칙에 따라 업으로써 이어지는 자아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자기 동일적 자아가 없이 과연 연기나 업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일생에서의 자아의 자기 동일성 문제를 두 순간에서의 행위자의 동일성 여부로 집약시켜봄으로써 상견이나 단견 상의 자아와 업의 자아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밝혀보자.

 

56.有業報 無作者

 

업과 보는 있어도 (주체로서의) 업을 짓는 작자는 있지 않다.”

 

*'남이 짓고 남이 받는 것'을 세존께서는 단견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이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 할까요?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가짜 나(가아)'라고 한다면

그리고 '진아(아트만)'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고 겪고 있는 일들은 모두 진아와는 무관한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은 '남이 짓고 남이 받는 것'이 됩니다.

즉 진아와는 무관한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인 가아는 단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견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59.석가는 실체적 논리에 따라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생각된 자기 동일적 자아인 아트만을 부정한다. 인간의 업에 대해 그 업과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작자로서 상정된 자아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설정이고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업이나 보는 존재하며, 그 둘간에 인과응보의 법칙은 성립하지만 그렇다고 업을 짓는 자, 보를 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며, 업과 보의 인과응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연기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작과 타작의 상견과 단견을 비판한 후에도 그렇고, 유업보 무작자를 논의한 후에도 그렇고, 언제나 상견과 단견의 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길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연기의 원리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면, 상견에 떨어지는 것이고, 남이 짓고 남이 깨닫는다고 하면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다. 바른 말은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며, 무상 · · 무아 삼법인을 모르는 것이며,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라고 한 의미를 특별히 유념해야 한다.

 

63.의 결과이고, 의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는 유무에 선행하는 생멸을 논하며, 생성과 소멸 각각을 통해 자체 내에 유전문과 환멸문을 포함한다. 유전문에서 보면 세간은 있는 것이 되므로 斷見이 부정되고, 환멸문에서 보면 세간은 없는 것이 되므로 常見이 부정된다. 그러므로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이루어진 연기의 논리는 세간의 유무에 대한 극단의 견해를 어선 中道의 논리가 된다. 세간 내의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고 연기에 따라 생성소멸/해체하는 것이다. 즉 중복된 인연들의 화합물인 것이므로 그 자체 안에 핵심 · 본질 · 자성 ·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자성 · 자아가 없으므로 무자성이고 무자성이므로 이다.

 

세존께서 알려주신 가르침은 세상을 12연기의 흐름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이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majjhena)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너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엇을 인연으로 먹는 식이 있는가?” 그러면 나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은 능히 미래의 존재[]를 부르며, 상속하여 생하게 한다. 가 있으므로 육입처가 있으며, 육입처를 인연하여 촉이 있다.‘

 

*衆緣이 화합하여 생기하는 무자성의 연기에 의한 무아이지만/[依他起性] 오온이 소멸 해체되어도 업은 윤회하므로 다른 자, 특히 오온의 상속자가 받는다. 그러므로 누가 받든 선업을 쌓아라. 그 누가 무엇인 줄 어떻게 아는가? 異熟識. 衆緣으로 화합한 五取蘊의 오해로 자아가 있다고 생각.

非實有를 자아의 세계는 실아와 실법이 아니고 마음이 그린 영상이며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라는 것[遍計所執性-6식과 7].

자신이 보는 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세계가 보여진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유식성을 깨닫게 되어 의타기성을 그것으로 알면 변계소집성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를 圓成實性이라 하며, 아와 법, 자아와 세계가 아뢰야식의 식소변/견분과 상분이라는 것을 참되게 아는 것, 즉 아공과 법공을 깨닫는 것.<도봉생각>

 

65.. 물론 물리학에 있어 입자설만이 이와 같은 실체론적 사유를 고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입자설을 부정하면서 궁극적 실제를 더 이상 최소 단위로서의 입자가 아닌 무형의 에너지나 장 또는 파장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체론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문맥에서 현대 물리학을 불교의 공사상이나 유가의 사상과 연결지어 생각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초끈이론. 다중우주론.

 

68.미란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모든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조그만 씨앗 하나를 땅에 심는다고 합시다. 싹이 터서 점차 성장하고 무성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씨앗을 받아 다시 땅에 심으면 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개체적 씨앗의 연속은 끝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닭이 생기고 또 그 닭에서 알이 생겨납니다. 이런 연속의 끝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작이란 인식되지 않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그때 나가세나 존자는 땅에 원을 그려놓고 왕에게 물었다. “이 원 둘레에 시작과 끝이 있습니까?” “대왕이여, 그러므로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화두 1. 그런데 한 신하가 옆에 있다가 원을 발로 지우고 직선을 그리고, 존자시여, 당신이라면 읜쪽으로 가면 지옥이요, 오른쪽으로 가면 극락입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처럼 실체론을 반박하는 연기론적 사유는 무한소급을 끊을 수 있는 최초의 근원을 설정하지 않고 일체를 순환적으로 설명한다. 원의 둘레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듯이, 시작과 끝은 상호 의존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결국 그것과 이것이라는 일체의 발생은 동일한 구조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71.無作者緣起

일체는 자기 자성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화합의 결과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주관적 실체가 있다고 할 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有業報 無作者가 의미하는 바이다.

 

72.그런데 [잡아함경]은 식에 대해 누가 인식을 가지는가?” “무엇이 식을 가지는 식의 주체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식의 인연이고 또 무엇이 식의 결과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73.이처럼 느낌이나 인식 등의 현상을 자기 동일적 주체를 상정함이 없이 인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연기론적 사유이다. 연기론적 사유에 따르면 느낌이나 생각 등은 모두 여러 중연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단일한 주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86.12지 연기에서 성립하는 상호 인과성은 쌍방향의 동시적 상호 인과가 아니라, 일방향의 異時적 상호 인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지 연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발생의 논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안에서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써 표현하는 순환은 일종의 나선형의 원이지 동일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닫힌 원이 아니다. 시작점과 끝점이 맞물리는 닫힌 원이라면 그 안에서 발생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닫힌 원이 아니라 한 바퀴 돌아온 끝점이 시작점으로부터 멀어진 나선형 원이기에 그 거리만큼 시간이 경과하고 그 시간 안에 다른 것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무명에 대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사와 그 무명으로부터 생겨나는 노사는 이름은 같은 노사이지만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12지 연기는 발생의 논리이며 윤회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

 

102.이 이어짐 속에서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명색, 즉 색수상행식의 오온일 뿐이다. 오온은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 과정의 변화 속에서 단지 연기의 인과 법칙에 따라 연속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현생의 오온이 다하고 내생의 오온이 생하는 것이 윤회이며, 윤회에 있어서도 자기 동일적 자아는 없고 단지 연기에 의한 이어짐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식이란 바로 오온을 형성해내는 힘, 업력을 뜻한다. 결국 윤회란 업이나 업력 또는 식의 상속으로 이해될 수 있다.

 

106.집착할 만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단지 오온의 화합물일 뿐이다. 화합물이라는 것은 인연 화합의 결과물, 연기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요소들이 쌓여서 나라는 일시적인 가상물인 오온을 만들어내고, 그 오온에 대하여 망상. 아견을 일으켜 아집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러한 주장은 인연 화합으로 구성된 요소들이 쌓인 연의 산물은 실유가 아니나, 각각의 요소, 즉 법은 실유라고 해석할/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붓다의 근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면, 소승 계열의 我空法有의 관점은 오온을 아무리 분석해도 그 안에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분석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실재, 단단한 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석가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이 점에서 소승의 아공법유에 대하여 대승의 비판은 타당하다. 따라서 석가의 무아사상은 인무아뿐 아니라 법무아까지도 포함하며, 원시불교의 공사상은 아공뿐 아니라 법공까지도 포함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무아사상을 논함에 있어 소승 유부의 아공법유의 인무아를 논한다면, 당연히 대승 유식의 아공법공의 법무아까지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07.유부가 논하는 무위법은 유위의 현상법을 넘어선 것으로 세 가지이다. 하나는 유우의 현상 세계의 터전으로서 불샐불멸 부증불감의 虛空繫縛/속박, 매임을 떠나 해탈을 이루도록 지혜로 선택되어서 그 번뇌가 멸해진 擇滅’, 아예 현상이 될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아 미래의 현상으로 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非擇滅이다. 연기의 적용을 받지 않으므로 번뇌 없는 無漏라고 한다. 道聖諦도 무루법이라고 하며 허공은 오직 장애 없음이 본성이 된다.

 

허공 등 세 가지 무위와 도성제를 무루법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온갖 번뇌가 그 속에서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된 세 가지 무위 중 허공은 오직 장애 없음이 본성이 된다. 장애가 없으므로 색이 그 안에서 행할 수 있다. 택멸은 계박을 떠남이 본성이 된다.

 

136.유부적 설명의 한계와 다른 부파의 설명

 

137~8.업력의 번뇌에 대한 유부의 설명은 다른 부파, 즉 대중부, 일설부, 설출세부는 물론 화지부나 독자부 등. 이 부분은 특히 중요하니 참조 및 재독 삼독을 권한다.

 

유부를 포함한 이들은 잠재적 번뇌로서 隨眠(6수면, 근본번뇌 6가지, 탐진치만의악견)’을 주장하는데, 隨眠은 유부의 575법의 분류에 따르면 심소법[심상응법]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재적 번뇌로 해석하면 그것은 현재적 마음에 상응하지 않음으로 더 이상 심상응법이 아니라 심불상응행법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불상응행법으로 분류된, 현재적이지 않은 수면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의식 표층상으로는 번뇌를 느끼지 않고 선한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 마음 심층에 수면이라는 잠재적 번뇌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표층적 의식 너머의 잠재적 수면을 통해 성자와 범인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39.여기서 번뇌란 업의 산물로서 업력이다.

업력의 전달자를 불상응행법 소속의 것으로 분류한 도 다른 부파는 正量部이다.

 

148.잠재 번뇌를 수면이라 하지 않고 종자라고 할 때, 그 번뇌 종자는 어떤 것인가?

 

종자는 선행 원인에 따라 결과를 낳기까지 찰나마다 상속하며 변화하다가 어느 순간 차별적으로 변화하여 결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종자의 활동을 한마디로 相續轉變差別이라 규정한다.

 

150.경량부의 입장-종자 상호 훈습설

 

152.업보의 연속성

불교 업보설의 특징은 유업보 무작자이다. 업과 보의 관계는 성립하지만,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악업을 지으면 그것이 남아 누군가에게 떨어지므로 악업을 짓지 마라는 自利利他主義의 근본 사상이다.

 

153.자아를 설정해놓고 업보를 논하는 일반적 관점과 무아론에 기반하여 업보를 논하는 불교적 관점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공을 던지고 받는 상황에 비유에 보자. 그러면 업을 짓는 것은 공을 던지는 것에, 보를 받는 것은 그 공을 받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여기서 작자를 상정하는 것은 던져지고 받아지는 공 이외에 곁에 서서 공을 던지고 받고 할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업보가 정당하려면 공을 던진 자와 공을 받는 자는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던져 놓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공을 받는다면 정당한 업보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무아를 주장하는 것은 업을 짓고 벌을 받는 자아란 결국 오온인데, 오온 자체가 선행하는 업력의 결과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던져지고 받아지는 공 이외에 공을 던지거나 받을 자아를 따로 설정 하지 않는 것이다. 던져지는 공이 이고 그 업력에 의해 떨어지는 공이 이지, 그 공 너머로 따로 그 곁에 서서 공을 던지고 받고 할 자아, 업을 짓고 보를 받을 작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던져지는 공은 오늘의 오온이 짓는 업이며, 내일 떨어지는 공은 바로 그 업의 보이다. 우리가 자아로 여기는 오온은 바로 업의 힘, 업력에 의해 형성된 존재이지, 즉 굴러가는 공 자체이지 공 밖에 따로 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던져진 공 바깥에 따로 자아를 설정하는 것은 업 바깥에 자아를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아란 업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업력 바깥에 따로 존재해서 업을 받고 피하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업보론은 이런 의미에서 작자를 설정하지 않은 무아의 업보론이다. 이 업보가 12지 연기를 따라 현생에서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윤회이므로 불교의 윤회는 윤회 주체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 무아윤회인 것이다.-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이라는 것과 정식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유식의 아뢰야식 안에 종자식으로서 업종자가 내재되어 있다. 누가 이것을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업이나 보와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를 따로 설정해놓고 그 作者受者가 결국 둘이 아니고 하나여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아를 모르는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는 유업보 무작자를 설한 것이다. 자아란 업과 보의 관계로서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가는 것, 상속하는 것이지 업보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이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한다.

 

156.어떤 사람이 한 등에서 다른 등으로 불을 붙인다고 하는 경우, 한 등이 다른 등으로 옮겨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불이 같은가 다른가?

 

한 등에서 다른 등으로 불을 붙이면, 등이 바뀌어도 뒤의 등불은 앞의 등불로 계속 타게 된다. 앞의 것을 연하여 뒤의 것이 있기 때문에 인과 과의 관계로 연속성을 갖게 되며, 이러한 인과 과가 곧 업과 보이다. 두 불을 같다고 하면 동일한 자아가 상주한다는 상견이고, 다르다고 하면 자아의 단멸을 주장하는 단견인데, 불교가 말하는 것은 업과 보, 즉 오온 너머에 같은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아란 오온 자체도 아니고 오온 너머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설한다. 독자부의 非卽非離我蘊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은 독자부의 입장이고, 반면 무아론에 충실하고자 하는 經量部는 이런 독자부의 非卽非離我蘊로서의 補特伽羅를 부정한다.

 

독자부는 보특가라가 있는데, 그 자체는 오온과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불교 내부에서 외도로 불린 독자부

근본분열 이후 지말분열이 일어나는 시기를 살펴보면, 독자부의 약진을 확인해볼 수 있다. 독자부는 상좌부에서 분파된 부파인데, 이 독자부 안에서 다시금 실상부 · 현위부 · 밀림산부 · 정량부의 4부파가 갈라져 나오게 된다. 즉 독자부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부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독자부와 관련해서는 附佛法外道라는 비판이 있다. ‘불교 안의 외도라는 의미이다.

독자부가 이 같은 평가를 듣는 이유는 이들이 주장하였던 보특가라설 때문이다. 보특가라는 아트만과 유사한 의미로, 윤회하는 주체를 뜻한다. 실제로 <금강경>에서 비판하는 四相,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에서 아상이 바로 아트만이며, 인상이 보특가라에 해당한다.

-자현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사 100장면 148


165.[승의공경]에서 말하기를 업이 있고 異熟이 있으나 作者는 얻을 수 없다하였다. 이는 이 오온을 버리는 것과 다른 온을 취하는 것이 오직 법의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보특가라]는 이미 부정하였다.

 

176.윤회라는 것은 업을 짓는다. 그리고 보를 받는 (일시적, 임시적, 가상의)나가 존재하여 그 동일적 자아가 이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업으로 형성된 하나의 온이 멸하고/해체하고 나면 거기 남겨진 업이 다시 그 업력이 다시 그 다음의 온을 형성하고, 그렇게 해서 온에서 온으로의 연속성, 즉 온의 상속성만이 있을 뿐, 자기 동일적 실체가 오온 너머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으로서의 오온과 과로서의 오온을 하나라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은, 한 촛불에 있어서도 아침에 타는 불과 저녁에 타는 불을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길은 인과 과의 관계로 연속성을 가지며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그처럼 유정의 오온도 인과 과의 관계로서 연속성을 가지며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계속되는데, 이를 윤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자기 동일적 윤회 주체를 상정함이 없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오온 상속으로서의 윤회를 설한다.

 

177. 4장 미세식의 발견

 

180.種種心만이 없어지고 집기심은 남아 종자를 유지하여 종자의 무단한 상속전변차별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멸진정에서도 유지되는 집기심은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데, 아타나(集起)· 아뢰야(종자식)· 이숙과식 등이 그것이다.

 

능히 미래의 존재를 지속하고 몸을 잡아가지게 하기 때문에 이를 아타나(集起)식이라고 부른다. 일체 법의 종자를 거두어 간직하기 때문에 다시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며, 전생에 의해 이끌려진 업의 이숙이기 때문에 이를 또한 이숙과식이라고도 부른다.

 

181.소위 무심위에서도 업력의 종자를 유지하는 심이 아뢰야식이다. 이 식은 표층식의 차원에서 보면 없는 것 같지만 미세한 세심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해서 무아 윤회 과정을 업을 통해 설명하는 업설은 경량부/경량부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부파로 그 성격이 규정되기도 한다. 특히 이 부파의 많은 견해는 후대에 유식설을 내세운 유가행파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경량부 세친에 의해 종자설과 아뢰야식설로 종합된다. 업력의 종자를 유지하는 아뢰야식이 업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갖가지 표층의 의식 활동과 그 의식 대상인 현상 세계를 심층의 아뢰야식과 종자로 해명하는 것이 바로 유식이다. 유식은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세계 모두를 實有가 아닌 假有로 설명한다. 이러한 我空人無我法空法無我로써 불교적 무아론을 완성한다.

 

183.4부 유식의 무아론 : 인무아와 법무아

 

187.삼매에서 내가 본 영상이 그 영상을 보는 마음과 동일한 차원의 것인가, 마음과는 구분되는 바깥 세계의 영상인가? 자씨 보살의 물음에 세존은 마음이 본 영상은 마음이 그린 것, 마음이 변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대상적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은 모두 마음 자체가 그린 것이며, 따라서 마음 바깥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의 대상은 곧 식이 나타난 것[識所緣, 唯識所現]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본 영상이 나타내는 세계는 마음 바깥의 다른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마음 자신이 그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존의 말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1.하나는 삼매에서 본 것은 실재의 천계나 지옥 등과는 무관하게 단지 마음이 그린 상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음이 그린 영상을 객관적 실재와 구분되는 주관적 상상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2.다른 하나는 삼매의 정신 집중을 통해 마음이 실재로 천계나 지옥을 본 것인데, 그 실재의 천계나 지옥이라는 것이 원래 마음이 그린 영상 세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계를 포함해서 육도윤회의 세계가 본래 그렇게 윤회하는 마음 너머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윤회하여 그리로 태어날 마음이 그리는 세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에 따르면 삼매에서 마음이 본 것은 실재에 미치지 못하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고, 후자에 따르면 삼매에서 마음은 실재를 보긴 보는데 그 실재 자체가 마음 바깥의 객관 실유가 아니라 마음이 그린 영상이며 식이라는 것이다. 결국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1.소위 마음 내지 마음의 영상을 객관 세계와 구분되는 주관적 반영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2.세계 자체를 마음의 영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주관적 상상의 심리 세계만이 마음의 영상인가? 아니면 객관적 물리 세계도 마음의 영상에 속하는가?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해 마음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마음은 단지 세계의 일부분일 뿐인가? 아니면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것인가?

앞의 인용에서 볼 때 유식이 주장하는 것은 후자이다.

 

188.“삼매에서 본 영상은 마음이 그린 상일 뿐이며, 범부들이 실재라고 고집하는 대상 세계도 실은 마음이 그린 상일 뿐이다라는 유식의 결론이 가능하다.

 

189.육도윤회 중 인간계에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그 인간의 근에 상응하는 인간의 기세간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삼매를 통해 마음과 대상세계와의 결합, 근과 경의 매임을 풀기 때문에, 그 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 다른 세계로 이행할 수 있다. 따라서 색계나 무색계 도는 천계나 지옥, 축생계로도 이행할 수 있으며, 그 세계를 직접 보고 감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근경에 매여 있으면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해 실상을 알 수 없으므로 그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이 만든 영상을 그것과 무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심층의 마음이다. 그것을 아뢰야식이라 한다.

 

191.이러한 일상의 의식에서의 깨달음의 전도양상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꿈의 모습이다. 그래서 유식은 우리의 일상 의식을 늘 꿈에 비유한다. 깨어있는 일상의 의식이 꿈의 의식에 비유되는 것은 꿈의 세계를 산출하는 의식과 현상 세계를 산출하는 아뢰야식이 공통의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194.아뢰야식에 의해 그려진 영상 세계의 비실유성, 그 세계 안에서 이원적으로 경계 지어진 나와 세계의 비실유성과 공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아뢰야식이 그린 영상이라는 유식성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성은 아공과 법공의 깨달음이 된다. 꿈이 꿈임을 알지 못하면 꿈의 세계와 그 속의 나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집과 법집을 버리지 못하고, 그 집착을 따라 업을 짓고 다시 그 업력에 따라 현상 세계로 되돌아오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분별과 집착을 벗어나면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 유식의 요지다. 그런 의미에서 유식은 무아론의 완성이다.

 

198.그런 의미에서 결국 유식의 교설은 꿈속의 이야기, 잠꼬대와도 같은 방편 교설이다. 다만 그것이 꿈을 깨우기 위한 말,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 교설이라는 점에서 다른 잠꼬대와 다르다. 이처럼 유식이 일반 범부를 향해 유식성을 논하는 것은 우리의 꿈 중에서도 두 종류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 중에서 꿈꾸는 자로 하여금 계속 꿈꾸게 하는 꿈이 있고,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꿈이 있다. 일체가 식의 변현이라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유식성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꿈속에서 꿈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꿈을 깨우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선정의 수행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직접적 깨달음의 現量定觀과 구분해서, 추론적 인식인 比量의 지혜, 比知라고 한다.

 

208.등류습기는 7전식에 의해 훈습된 종자로서 명언습기 또는 명언종자라고도 한다. 종자는 식에 남겨지는 정보라고 볼 수 있는데, 정보가 언어의 형식인 名言으로 존재하기에 명언종자라고 하는 것이다. 명언종자를 二取 습기라고도 하는데, 이는 각 식이 주관/견분과 객관/상분이라는 두 방식으로 작용하여 그 각각의 종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의식이나 말나식이 작용하 면, 그 작용의 결과가 종자의 형태로 아뢰야식에 남겨진다.

 

209.선악의 업에 의해 심겨지되 그 종자 자체는 선악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이숙종자는 그것이 생명체의 오온을 형성하는 종자이기에 업종자라고도 한다. 이 업종자는 전생의 업력을 담지하고 그 다음 생을 이끌어오는 식을 형성하는 종자이다. 업종자는 오직 의식적 행위인 제6식의 업에 의해서만 마음에 심겨지게 된다. 무의식적 번뇌나 집착에 물든 제7말나식의 행위는 업종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업종자는 선하거나 악한 업에 의해 심겨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기 형태의 보를 낳게 된다. 선업 도는 악업에 따라 형성된 다음 생의 오온은 업에 다라 즐겁거나 괴로운 차이를 가질 수 있어도,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라는 말이다.

 

216.변계소집성은 식의 실성인 의타기성 내지 유식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발생하는 망분별과 망집착이다. 즉 현상세계, 아와 법이 제8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는 것, 견분과 상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실유의 존재인 실아와 실법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다.

 

오직 제6식과 제7식의 심품에만 능히 변계함이 있다./성유식론 권8

 

심층의 제8아뢰야식의 전변작용을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나 말나식은 둘 다 망분별과 망집착을 일으키는 거친 식이다. 그러한 허망한 분별 중 제6식의 분별은 의식적인 사유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분별로 이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또는 특별한 이론 체계를 배움으로써 행하게 되는 분별과 집착이다. 반면 제7말나식의 분별과 집착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분별과 집착이다,

 

217.의타기를 안다는 것은 곧 연기를 아는 것이고 유식성을 아는 것이다. 즉 현상세계, 아와 법이 제8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220.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 앞서 변계소집성을 떠난 것이다. 두 가지 공/아공과 법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를 그 자성으로 삼는다.

 

근경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난 식, 번뇌와 집착을 벗은 식은 곧 해탈의 식이며, 그 마음이 곧 진여심이다. 일체의 唯識性을 깨달아 변계소집을 벗어난 마음이 바로 원성실성의 진여(眞如)이다.

 

*부록

1.중관학파의 공

용수 이후는 그의 사상에 근거하여 중관학파가 형성되고, 또 한편으로는 공성을 인식론적 또는 실천적으로 현실에 맞추어 해명함으로써 유가행파 즉 유식학파가 확립되어, 각각 다른 학파와도 접촉하면서 논리학적인 정확함과 체계화를 기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공성이 허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계속 문제시되었다.

 

공관은 공견 즉 공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는 다르다. 이미 용수 당시부터 공관이 잘못된 허무론(nasti - vada인간적인 모든 영위나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타락할 위험이 감지되었다. 용수가 스스로 말하기를, "공을 설한 것은 모든 견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기 위함이므로 만일 그 공에 대해 견해를 일으켜 거기에 속박된다면, 참으로 그것은 구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유가행파는 사람들이 이런 허무론으로 타락하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간주된다. 사실 유가행파에서는 식만을 구극의 실재라고 보아 '유식'을 설하고, 무자성에 대해 3자성을 설한다. 중관학파를 공()의 종파라고 부른다면, 이 학파를 유의 종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학 파는 단순히 공관에 대해 식의 실재론을 세웠던 것만은 아니다. 유가행파라는 명칭이 나타내듯이 무엇보다도 실천·수행이 그 관심의 중심이고, 이런 입장으로부터 공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즉 거기서 배격한 것은 그릇된 공[惡取空]이고, 바른 공[善取空]의 파악은 중시하기 때문이다.

 

초기 유가행파는 스스로를 중관학파의 보완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학파의 공에 대한 이해가 중관학파의 그것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도 사실이다.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 긍정의 면이 회복된다는 사실은 용수에게서도 분명히 인정되지만, 이것을 자각적으로 한걸음 더 진전시킨 것은 이 학파이며, 특히 미륵보살의 중변분별론 中邊分別論이다.

 

여기서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인식이 고찰의 출발점이 된다. 이 인식에서 이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주관과 객관이란 실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곧 공성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 공성에서 인식은 현실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에서 중도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은 용수가 '연기==중도'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과 매우 유사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 공성을 정의하기를, 공이란 "주관·객관의 비존재, 아울러 그 비존재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앞의 사상에서 직접 도출되긴 했지만, 공을 '비존재'뿐 아니라 '비존재의 존재'라고 적극적으로 말한 점은 16공에 대한 해석 등에서도 보이는 이 학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중관학파가 별로 주목하지 않은 원시경전의 공의 정의(소공경)와 연관되며, 부정의 면과 함께 긍정의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존재의 존재'를 후기의 중관학파는 모순된 말로서 잘못된 이해라고 간주하여, 유식설이나 삼성설과 함께 비판했다.

 

이밖에 진여·실제·승의·법계 등의 긍정적인 표현을 공성과 동의어로서 열거한 점도 이 학파의 동일한 이해 방식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한편 이 학파에서는 법과 법성을 구분하듯이 공과 공성을 구별한 듯한데, 전자가 소극적인 공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절대성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반야경이나 용수에게서는 이런 구별이 명료하지 않다. 결국 공사상은 7세기 무렵부터 밀교화되어 갔던 인도불교에서도 의연히 중심적인 교의로서 그 위치를 잃지 않았으며, 이후 티베트불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2.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산스크리트어: citta-viprayukta-saṃskāra, 팔리어: citta-vippayutta-dhamma) 또는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75(五位七十五法)의 법체계에서 색법(色法: 11가지) · 심법(心法: 1가지) · 심소법(心所法: 46가지) ·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14가지) · 무위법(無爲法: 3가지)5(五位)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100(五位百法)의 법체계에서 심법(心法: 8가지) · 심소법(心所法: 51가지) · 색법(色法: 11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 · 무위법(無爲法: 6가지)5(五位) 가운데 하나이다.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不相應], 행온(行蘊)에 속한 법()'이다. 행온에 속한 법들은 크게 마음과 상응하는 법들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들의 2그룹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그룹은 마음작용(심소법)으로 분류하고 후자의 그룹은 심불상응행법으로 분류한다.[1][2]

 

심불상응행법 또는 불상응행법은 심불상응행온(心不相應行蘊), 비색비심불상응행법(非色非心不相應行法), 비색불상응행온(非色不相應行蘊),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불상응행(不相應行) 또는 불상응(不相應)이라고도 한다.[3][4]

 

심불상응행법 또는 불상응행법은 색(: 물질, 육체)도 아니고 심(: 마음, 심왕, 정신)도 아니고 또한 심소(心所: 마음작용, 의식작용, 정신작용)도 아니지만 실재(實在)하는 구체적 존재, 즉 법()인 것들을 통칭하는 낱말로, 이러한 법들의 그룹[]을 말한다.[3] 말하자면, 물질적 감각 기관(5)에 의해 감지되지도 않고 마음과 함께 일어나지도 않는 것들, 예를 들어, 현상들 사이의 관계 · 작용 · 성질 · 세력 · 명칭 등을 말한다.[5] 논서들마다 개수나 명칭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대체로 14가지의 법이 이 그룹[]에 속하며,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교학에 따르면 대체로 24가지의 법이 이 그룹[]에 속한다.[3]

 

여기서 실재(實在)한다는 것에 대하여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유가행파의 견해 또는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을 주장한 설일체유부에서는 불상응행법에 속한 법들은 575법의 다른 나머지 법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존재[恒有]하는 실유(實有) 즉 실법(實法)이라고 본다. 이와는 달리 경량부와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불상응행법*에 속한 법들은 색(물질)과 심(마음)과 심소(마음작용)의 여러 분위(分位: 측면, 국면, 양태, 단계, aspect, phase)에 근거하여 가립(假立)한 것으로 실유(實有)가 아닌 가법(假法)이라고 본다.[4][6]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452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유식30송 (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성철 교수 유식관련  (0) 2020.03.08
유식30송 해설  (0) 2020.02.23
無分別智와 眞如 무분별지와 진여   (0) 2020.01.12
유식사상  (0) 2019.12.15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  (0) 201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