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자성(自性), 그리고 불성(佛性)의 문제>
자성(自性, 산스크리트어 svabhāva)이란 본질, 실체, 본성 등을 의미하는 말로 불교 철학상 부정적 비판과 적극적 긍정이 동시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말이다. 즉, 자성은 부정적 비판과 함께 적극적인 긍정의 입장에서 사용돼 복잡한 대승불교 철학의 양상을 드러낸다.
‘자성(自性)’이란 말을 산스크리트어로 ‘svabhava’라 하는데, 이는 ‘자신(sva)에게 고유한 성질(bhava)’이며, 자신의 본질, 본성을 갖는다는 의미의 말이다.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이르는 말로서,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만유의 독자적 본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本性)이 자성이다. 스스로의 성품은 자신이나 개인의 성품, 개성과는 다르다. 이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 즉 보편적 속성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병은 깨어지면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존재를 세속적 존재자라고 한다. 인간존재도 육체적, 정신적인 갖가지 요소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세속적 존재라 하겠다. 이에 대해 병의 색이 청색이었을 경우, 그 청색은 병이 깨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병을 무한히 부수면 최후에는 극미(極微)로 되지만 청색은 그 경우에도 존재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 svabhava)이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물(水)이라는 것인데, 물에다가 알코올을 넣으면 술이 되고, 간을 넣으면 소금물이 되고, 더 잘하면 간장, 된장이 되겠지만 그 근본이 되는 물은 달라진 것이 없다. 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차(茶)도 되고, 술도 되고, 국도 되고, 주사약도 되고, 밥도 되고, 사람 몸에 들어가면 사람 몸의 일부가 되고, 온갖 것이 다 된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이루는 바탕은 물(水)이고, 물은 항상 물이므로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한다.
인도 불교 역사상 부파불교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학의 핵심 개념이었다.
자신의 본질, 본성 등을 의미하는 자성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실체, 본체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法)이라 표현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각각의 법은 자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들의 삶은 각각의 법들의 집합으로서 소위 5위75법의 제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불교에서 다르마(dharma, 法)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법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사상전반에 걸친 키워드이기도 하다. 다만, 법을 일체의 존재 또는 모든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인도의 사상 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자의 것이다. 어원적으로 법은 ‘유지하다(hold)’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유지하는 것이 ‘자성(自性)’이다. 그래서 법의 특징을 ‘임지자성(任持自性)’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자성은 불교의 법만큼이나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의 입장은 인간의 내면에 본질적인 실체적 개념이 없다는 인무아(人無我)의 개념과 함께 일체존재로서 제법이 자성으로 실재한다는 법유(法有)의 개념을 설정해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설일체유부가 취한 입장에 대해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년경)가 등장해서 「무자성(無自性)-공(空)」을 주장하며, 비판을 가해 대승불교 중관학파(中觀學派)를 형성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자성이란 말은 중관학파와 같이 부정적 비판의 입장에서만 쓰이지 않고 불교 역사의 전개에 따라 적극적인 긍정의 입장에서 쓰이게도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 자성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즉, 삼성(三性)과 삼무자성(三無自性)의 철학적 입장이다. 곧 세 가지의 자성을 의미하는 삼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서 삶에 대한 의식의 세 가지 성질을 말하며, 자성을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을 또 무자성의 입장에서 재론한 것이 삼무자성(三無自性)으로 상무자성(相無自性), 생무자성(生無自性),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말한다.
삼성에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중생의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작용을 하는 6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이렇게 8가지 식(識), 즉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는 원성실성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했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성(自性)은 정신작용의 근원이란 것이다. 따라서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온갖 그림자는 인식작용이고, 거울은 그림자를 비추면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은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실체가 없는 현상적인 존재이고, 자성은 조건에 따라 생기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본질적인 존재이다. 자성(自性)은 정신작용을 포함한 모든 생명현상의 근원적인 바탕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를 자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삼무자성(三無自性)의 입장에서는 상무자성(相無自性)은 변계소집성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은 그 자체도 없고 그 상(相)도 없는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무자성(生無自性)은 의타기성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생무자성성에서 생(生)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란 것이다.
또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은 원성실성이 모든 법의 승의제(勝義諦)이고, 자성 없는 성품이 나타난 바[無性所顯]의 진성(眞性, 理)인 것을 말한다고 했다.
※삼무자성(三無自性)>
• 상무성(相無性) - 온갖 분별과 망상으로 집착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변계소집성은 허구적인 것으로 자성이 없고, 일체만법의 상(相)은 무성이라는 것이다. 즉, 변계소집성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이다.
• 생무성(生無性) - 생무성이란 생겨난 것에 자성이 없다는 의미로 의타기성의 연기적인 존재는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의타기성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이 생무성이다.
• 승의무성(勝義無性) -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을 말한다. 즉,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진리를 더욱 나타내는 학설이 승의무성이다. 원성실성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의해 나타나는 진여성(眞如性)을 뜻한다. 원성실성 이것이 우리의 본성(本性)이다. 이것이 불성(佛性)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자성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성이 적극적으로 긍정되는 입장은 불교논리학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즉 법칭(法稱, 600∼660)에게서 나타난다. 법칭의 사상적 입장은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지만, 그가 유식사상에 근거해 철학적 논의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자성이란 말도 긍정적인 의미로 적극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칭이 사용하는 자성이라는 말은 네 가지 정도로 구분돼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긍정적이며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네 가지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1) 존재론적 문맥에서 자성은 실재하는 대상[승의적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해, 독자상(獨自相)과 동일시된다.
2) 실재하는 대상=독자상은 인과적 존재이며, 특유의 ‘인과효력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자성은 ‘인과효력’을 갖는 것과도 동일시된다.
3) 실재하는 대상에는 고유한 ‘본질’이 있다. 따라서 ‘자성’은 ‘본질’과 동일시된다.
4) 인과적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며 단일하며 그것이 놓인 상황에 따라 갖가지 인과효력=본질을 가지며, 논리적인 면에서 ‘본질인’에 해당되는 것 등의 넷이다.
이러한 법칭(Dharmakīrti)의 설명에서 자성의 개념은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개념을 구분 가능케 해주는 본질적인 속성을 갖는 것을 의미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인간심성론에 있어서 체(體)와 용(用)을 분명히 하면서 불성과 자성의 관계를 구분해 밝혔다. 유식학에 의한 자성론이 등장하다가 본격적으로 대승불교로 접어들어서는 진여(眞如) 등으로 불렸고, 이것이 점차 발전해서 여래장(如來藏)으로 불렸다. 그것이 중국에 건너와서 불성론(佛性論)으로 발전했다.
불성(佛性)이란 말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사자후보살품’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 나온다.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 속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서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생명의 본질적인 자성이 곧 불성이라는 것이다.
‘불성’이란 불(佛)의 본질 본성과 같은 말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佛)과 같은 본성이 있으며, 이것은 중생이 장차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로 곧 불(佛)의 인(因), 불(佛)이 되는 인(因) - 불성(佛性)이라고 설명된다. 여기서 성(性)과 인(因)은 동의어이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여래의 태아’라 불리며. ‘여래장’이라고 한역됐다.
여래장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여래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중생이 여래를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래(佛)가 될 수 있는 요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여래가 되지 못한 ‘여래의 태아’에 불과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佛)의 인(因)’ 곧 불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인간심성이 체와 용이 하나로 된 불성(佛性)이 아니라 체와 용이 나누어진 것이라는 자각을 한 것이다. 이 자각의 상징으로 불성의 체가 아닌 용(用)의 작용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그 작용에 대해 따로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자성(自性)이다. 말하자면 인간심성의 체(體)가 불성이고, 용(用)이 자성이라는 것이다. 그 자성의 의미를 처음으로 깨닫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육조 혜능(慧能, 638~713) 선사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선불교에 있어서는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합해 불교용어로 체용(體用)이라고 부르고, 그 의미를 확대해, 즉 체(體)와 용(用)을 개별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체를 일체만법의 본성으로, 용을 본성이 일체만법 곧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체를 본질로, 그리고 자성을 본질이 구체화된 모습인 차별적 현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선불교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불성과 자성은 어떻게 다른가. 불성의 작용이 자성이란 것이다. 불성(佛性)은 모든 법(法)이 갖추고 있는 변하지 않는 본성 혹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성이 불성이다. 이에 비해 차별적 현상, 즉 불성의 작용인 자성은 우리 개개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라고 믿고 있고, 전부라고 믿고 있는 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참‘은 바로 그 가운데 있는 자성(自性)이고,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니고, 거짓된 ‘나’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사대육신은 언젠가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므로 결코 ‘참나’일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상으로 몸을 바꾸어 가며 나고 죽기를 수 없이 하면서 이 몸통은 항상 없어지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것이 ‘참나’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참나’라고 하는 것은, 형체도 없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편의상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자성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 보여준다고 해서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배워준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수행을 철저히 해서 깨쳐야 한다. 또한 이것은 글자로 알 수도 없는 것이고, 형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본인의 수행정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바로 이 본래면목을 알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법문을 하신 것이다. 참 진리는 말이나 글로는 표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부처님께서 말로써 진리를 설하신 것이 불법(佛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늘 “나의 법문은 방편이요 뗏목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를 하나 들어, 해(日)에 비유해 보자.
우리가 낮에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는 해(日)를 자성(自性)이라 한다면, “해는 나만의 해다, 우리나라만의 해다, 내 종교만의 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해는 누구의 해도 아니지만, 우리 모두의 해이다. 그러나 해는 해일뿐이다. 그리고 “나의 해니까 내게만 비치고 너에게는 비치지 말라.”라고 하면 너에게 비치지 않겠는가. 어느 사람이나 어느 곳이나 조건만 갖추어지면 다 비치는 것이 해이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착한 사람에게도, 게으른 사람에게도 부지런한 사람에게도, 산에도, 바다에도, 하늘에도, 달에도, 그 어느 곳에도 다 비친다.
그리고 이 해는 빛이 되고 따뜻한 요소, 즉 불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것이 해의 자성이다. 이 요소들도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누구에게나 다 같이 주어졌지만,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란 이런 태양의 비침과 같이 이 우주에 하나이며, 모든 인간에게 평등무차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또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이 둘이 아닌 진여(眞如),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성이다. 이런 불성은 인류와 우주를 포함한 평등무차별한 절대 진리, 즉 평화와 사랑과 행복을 다 가질 수 있는 단면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란 태양의 비침과 같으므로 불교에서는 남의 잘잘못을 따져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내 것만이 진리고 너의 것은 진리가 아니란 말을 하지 않는다. 진리는 어떤 판단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보는 ‘나’만의 해가 아니고 우리의 해가 아니고, 누구의 해가 아닌,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해의 자성과 같다. 자기라는 생각에 굴절돼 바라보는 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해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을 비추지 않으면 빛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가려진 구름이 사라지면 빛은 다시 비춘다. 우리의 자성도 (번뇌 망상에 의해) 차단당해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그 자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자성인데 우리는 그걸 모를 때, 태양의 빛은 가려진다. 불교의 목적은 바로 내가 나를 가리고 있는 번뇌 망상을 쳐부수고 본래 나를 깨달아 생사해탈을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선불교에서는 “우리가 불교를 믿고 절에 가는 이유는 자성을 깨쳐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데에 있다며, 자신을 제도하는 이는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자성시불(自性是佛)’이라 한다.
이렇듯 자성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의 성립과 함께 부정적ㆍ비판적인 입장에서 무자성의 규명이라는 철학적 명제가 됐다가, 대승불교의 철학적 전개와 함께 유식학에서나 선불교에서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돼, 그 사용 범위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에 있어서도 불교에서 불성 ‧ 자성의 존재에 대한 논의는 중대한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민감한 일이라서 찬반의 의견이 심각한 편이다. 이와 같이 자성은 불교 역사상 부정과 긍정의 양쪽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고 적극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부 경을 설명할 때는 공(空)을 말하며, 「무자성 공」이라 하지만, 여래장계 경을 이야기 할 때는 불성을 강조해 본래불(本來佛)을 말하고, 선가에서는 자성(自性)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바, 바로 이 적극적인 자성의 표현이 이른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하는 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자성에 대해 부정과 긍정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얼핏 보면 자가당착의 모순성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속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는 분들로부터 대승불교에서의 자성, 불성은 무아사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자체에서도 자성, 불성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를 두고 자가당착의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어 대승불교는 변질된 불교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488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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