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알음알이-지해(知解)>

수선님 2020. 1. 12. 12:19

<알음알이-지해(知解)>

                                              

‘알음알이’를 국어사전에 ‘약삭빠른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약삭빠른 지식, 분별심 등을 말하며, 한자로는 ‘지해(知解)’라고 한다. 좋게 말하면 분석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리저리 잔머리(대가리)를 굴리는 것을 말한다. 현대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이 병에 걸려 있다.

그리하여 일반사회에선 이와 관련해서, 요령 부리지 말라, 눈알 좀 그만 굴려라, 수작 부리지 말라, 장난질 좀 그만 해라, 잔머리 좀 그만 굴려라, 이런 말들이 있다. 그런데 알음알이가 심한 자일수록 스스로는 대단히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속담에 ‘지(자기) 꾀에 지가 자빠진다’는 말이 있는데, 불교에서 화두 참구(話頭參究)에서도 그런 말을 한다.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가로 막고 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선(禪)에서는 최대의 적으로 여긴다. 그 까닭은 정면으로 화두를 참구하지는 않고 머리를 굴려서 암암리에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지능적으로 알려고 하고, 체험이 결여된 깨달음, 관념적인 깨달음이어서 영양가가 없다. 불교 입장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이외에 일반사회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모든 학문이나 지식을 알음알이로 본다. 그렇다고 세속의 지식을 기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경전에도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속의 지식도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그런 알음알이를 궁극의 진리로 생각하지 말고, 알음알이에 매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알음알이를 한자로 지해(知解)라고 한다. 지해(知解)란 ‘지견해회(知見解會)’의 준말로서, 흔히 지식(知識), 혹은 분석력을 말하고, 오온(五蘊)과 12연기에서의 ‘식(識)’이 곧 알음알이에 해당한다.

선(禪)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것도 다 알음알이를 마음에 두지 말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절에 가면 흔히 주련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이 절에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라고 적혀 있다. 중국 원나라 때의 중봉 명본(中峯明本, 1238~1295) 선사의 다음과 같은 게송에 나오는 말이다.

『신광불매(神光不昧) 만고휘유(萬古徽猷)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신령한 불성 광명은 어둡지 않아 만고에 이르도록 오히려 장엄하네, 불법의 문안으로 들어오려면 아는 체하는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라.』

이 신령한 광명은 결코 어둡지 않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이 광명은 홀로 밝다.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이 사라진 깊은 잠속이나 육신의 소멸 이후에도 이것 신령한 광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큰 지혜는 흡사 큰 어리석음과 같고, 분명한 앎[근본지, 본래지(根本知 本來知)]은 오히려 하나도 알지 못함과 같다.

이 신령한 광명은 억겁의 세월이 흘러 오래됐지만 늘 신선해 그대로이고, 너무나 새롭지만 언제나 변함이 없이 영원히 그대로 그렇다. 이 신령한 광명이 과거, 현재, 미래의 바탕이지만, 이 신령스런 광명 스스로는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이 신령한 광명은 나고 죽음이 없는 상주불변(常住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신령한 광명 이것이야말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도(道),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훌륭한 계책이다.

이 신령한 빛은 사람마다 누구나에게 완전히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는 까닭에 이 신령한 광명을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신의 성품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신령한 광명은 남에게서 구할 수도 없는 것이고 자신의 외부 바깥에서 찾을 수도 없는 것이고 결코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해설이 붙는 게송이다. 그만큼 우리 일상에서 알음알이를 제거하고 근본지(根本知, 본래지(本來知)에 계합하면 진리의 세계는 신령스런 광명으로 빛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많이 안다, 지식이 많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구도(求道)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지해를 가지고 이 산문에 들어오지 말며, 만일 선도(禪道)를 얻기 위해 선문(禪門)에 들어오려거든 상식이나 모든 학식과 자기 지견(知見)을 완전히 비어버리고 깨끗이 백지로 환원해 가지고 입참(入參)해야 도를 온전히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자기 지견을 가지고 이리저리 계교(計巧)하게 되면 현혹이 되고 교란이 돼서 응합이 되지 못하므로 도를 얻어 볼 수 없다. 도를 구하려면 전신전수(全信全受)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반만 믿으면 반만 되고, 믿지 않으면 받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도를 구하려 왔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진리에 맡겨버려야 한다.

다문지해(多聞知解)란 말이 있다. 많이 들어 많이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설사 팔만대장경을 읽고 익히며 강설해도 불성(佛性)을 실제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뿐 아니라 널리 배워 알음알이가 늘수록 정신이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듯,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한 마음 거울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도 오히려 먼지가 된다.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이 도를 깨닫는 데는 제일 큰 장애가 되므로 극력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니 산같이 쌓인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굶어 죽는 가련한 신세가 돼서는 안 된다. 오직 실제로 참구하고 실제로 깨쳐서 진여본성을 환히 보아 크게 해탈한 대자유인이 돼야 한다.

신령한 광명 이것을 깨닫는데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인간의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의식, 즉 분별심 분별의식이다. 무엇을 안다고 하면 이미 이 신령한 광명과는 틀렸고, 무엇을 이해했다고 하면 벌써 이 신령한 광명과는 어긋난 것이다. ‘유식(有識)하다’는 말이 선가에서는 오히려 기피해야 할 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498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