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의 공과 연기의 이론
(1) 중론의 사상
전기와 저작
대승불교운동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다수의 경전이 발표되자, 이에
이론적 근거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대승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용수(龍樹, Nagarjuna)이다. 대승불교운동은
무명의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많은 경전의 작자가 누구인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용수는 그중에서 그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이는 그의 명성과 함꼐 이 시대에 이르러 점차로 대승이
교단형성의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말한다.
그는 중관파(中觀派)의 개조이지만 또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로도
추장되며 그 이후의 대승사상은 모두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과대한 평가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상이 대승의 근본적 입장인 대립의 초극(不二)에 가장 강력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용수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구마라집역 <용수보살전>이 유일한
자료이다. 풍부한 공상이 개재되어 있는 이 전설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지만, 그가 남인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이 지역의 왕조와 교섭을 가졌음은 사실이다.
하이데라바드의 동남방에 위치한 끄리쉬나강의 오른쪽 언덕에
나가르주나꼰다로 불리는 지역이 있다. 근년 이 지역에서 다수의
불교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지금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지명은
용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가 어느
왕에게 보낸 편지의 모음인 <용수보살권계왕송(勸誡王頌)>에 의하면,
기원후 수세기 동안 남인도에 군림하였던 사따바하나왕조의 국왕과
친교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수의 연대를 엄밀하게
알 수는 없다. 대개 2∼3세기경 또는 150∼250년경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용수보살전>에 의하면, 그는 상당히 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불교입문 이전의 생활은 꼭 도덕적이지는 않았다. 이것도 어디까지
신뢰되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역동적인 인상을
주며,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용수라는
이름은 그가 아르주나로 불리는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나가(Naga 龍神)의 인도로 도를 이루었다는 점에 의거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나가신앙은 남인도에서 융성하였다.
그의 저작은 많다. 그러나 후세 여러 책들이 그의 저작으로
가탁되고 있으므로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문헌들이 적지 않다. 그의
저작으로 확실시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한역이 있는 것은
그 이름으로 그리고 이를 먼저 표기한다).
(가) 공과 연기의 이론에 관한 것
1. <중론송(中論頌)>(산스끄리뜨본·한역·티벳역)
ㄱ. 청목(靑目)의 주(4권, 구마라집역)
ㄴ. 월칭(月稱)의 주(산스끄리뜨본·티벳역)
ㄷ. 그 이외의 주(생략)
2. <공칠십론(空七十論)> (티벳역)
3. <십이문론(十二門論)> (1권, 구마라집역)
4.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지겸역·티벳역)
5. <인연심론송석(因緣心論頌釋)> (한역·티벳역)
6. <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 (시호역·티벳역)
(나) 공과 연기의 이론을 기술하고, 이교(異敎)의
니야야(正理)학파의 논리학적 학설을 비판한 것
1. <회쟁론(廻諍論)> (1권, 毘目智仙·가루流支역·
산스끄리뜨본·티벳역)
2. <광파론(廣破論)> (티벳역)
(다) 그외의 저작
1.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의 주석)
2.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17권, 구마라집역)
(<화엄경> 십지품의 일부에 대한 주석)
3. <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지겸역, 산스끄리뜨본·
티벳역)(<화엄경>의 유심론을 기술한 것)
4.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1권, 진제역·산스끄리뜨본·
티벳역)(정치론을 기술한 것)
5. <용수보살권계왕송(龍樹菩薩勸誡王頌)> (義淨역·티벳역)
6. <보리자량론송(菩提資糧論頌)>(達磨급多역)
7. <사종찬가(四種讚歌)>(산스끄리뜨본·티벳역)
(가)의 저작은 분량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으며, 그 중에서도 5·6은
극히 짧다. 그리고 (가)의 3의 <십이문론>, (다)의 <대지도론>은
한역만이 존재하며, 최근에는 용수의 저작임이 의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자인 구마라집이 용수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사람이므로
여기에서는 역자의 설을 신뢰하기로 한다.
중론
용수의 주된 저작은 <중론>으로서 그의 주요한 사상은 이곳에
기술되어있다. 약 500의 시구(게송)로 이루어져 있으며, 2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시구이므로 주석의 도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옛부터 중국 등지에서 읽혀져 온 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청목(Pingala)의 주이다. 이는 한역만이 전래하며, 아마도 초기의
주석으로 원시적인 <중론>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번역된 것이라고 하는 제약을 면할 수 없다. 언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산스끄리뜨문은 월칭(Candrakirti,
600∼650년경)의 주석인 <명구론>(明句論, Prasannapada)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명구론>은 주석으로서는 발달된 단계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 두 권의 주석이지만,
이외에도 티멧역·한역의 주석이 전래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5장의
제4절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용수의 후계자들은 전적으로 <중론>을 중심으로 연구하였으므로
그의 계통을 '중관파'라고 한다. 이와 같이 <중론>이 중시되어 온
전통에 따라 여기에서도 주로 <중론>에 의해 그의 사상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중론>에서 용수가 주장하였던 것을 일반화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 법은 연기의 도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다. 연기는 어떤
법이 다른 법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이라도 다른 것과 관계없이, 그 자체 독립적인 성질을 갖는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성(自性, 독립적 실체성)은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법은 공이다.
일체법이 공으로 귀착된다는 점, 그리고 공이 반야의 전일적인
직관으로서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실천적 의미를 갖는 점은
<반야경>의 사상과 동일하다. 사실 용수의 사상은 직접적으로 이
경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근거로서 연기의 논리적 의미를
명확히 밝힌 것은 그의 독창적인 작업이었으며, 이는 불교의
본질적인 사유구조에 관련된 문제의 전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예상한 불교는 <반야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보다 넓은 시야의 것이었다. 용수의 사상을 묻는 것은 불교사상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에 따라 이해 방식의 차이가 발생할 여지가 있으며,
또한 용수 자신의 개인적 의도가 개재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대립의 극복
여기에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중론>
첫머리의 시구와 마지막의 시구를 인용하여 보자. 처음과 마지막의
말에 저자의 의도가 요약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첫머리의 시구
불생·불멸(不生·不滅), 부단·불상(不斷·不常),
불일·불이(不一·不二), 불래·불거(不來·不去)로서 갖가지
분별(分別)이 적멸하고, 길상(吉상)스러운 연기를 설한 붓다를 설법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으로 나는 예경한다(歸敬序).
마지막의 시구
일체의 견(見)을 끊도록 하기 위하여 가련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법을 설한 고따마에게 나는 귀의한다.
첫머리의 시구에서 그가 연기를 이론의 중심에 두고 있는 점,
그리고 그 연기의 내용을 불생·불멸, 부단·불상, 불일·불이,
불래·불거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확인된다. 대립개념의 부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8구는 결국 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옛부터
'팔불(八不)'로 불리어 왔다. 이는 대승의 불이(不二, 이원적 대립의
부정) 사상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가 공을 설하는 경우, 항상
대립개념의 부정의 형식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생'의
부정과 '멸'의 부정이 별도로 설명됨으로써 양자 사이에 필연적
관계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팔불로
표현하는 것은 공이 대립개념을 부정하는 구조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여 차질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마지막의 시구는 원시불교에 고따마 붓다(석존)가 62견으로
분류되는 대립적인 학설을 극복하였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는
마지막 장인 제27장(觀邪見品)의 내용을 통해 확인된다. 견은
견해·학설·세계관의 의미이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불교의 입장에서
그릇된 견해, 사견을 말한다. 석존 당시 종교 사상가들은 상호 대립된
학설을 신봉하여 항쟁하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사유가 대립을
계기로 하여 구성되고 그 제약을 면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는 상주한다는 견해에 대해, 세계는 무상하다는
견해가 대립된다.
이에 대해 제3의 견해가 수립될지라도 곧 그
반대의 견해가 성립된다. 이와 같이 상호 대립하는 당시의 여러
학설을 정리한 것이 62견으로서, 석존은 이의 극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첫머리와 마지막의 시구는 대립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론>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사실을 의미한다. '중'은 '중도(中道)'로서 원시불교
이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중론> 본문에는 이 말이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제24장(觀四제品)의
제18시구이다(시구의 번호는 산스끄리뜨본에 따름).
연기를 우리는 공이라고 한다. 이 공은 짐짓 언어로 표현하는
것(假說)이며, 이는 참으로 중도이다(한역=인연에 의해 싱긴 바의
법은 곧 공이라고 나는 설한다. 이는 가명(假名)이며, 또한 이는
중도의 의미이다.).
이 시구는 요컨대 연기와 공과 가설(실체가 없는 것을 임시로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중도가 동의어임을 말한다. 원시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일체가 존재한다고 말함은 하나의 극단이다.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은 제2의 극단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로써 법을 설한다"고 한다. 중도는 대립하는 입장의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 않는 실천태도이며, 동시에 논리적으로는
대립개념을 초월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본문에는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말이 서명으로 채용된 것은 연기 및 공의 실질적
의의가 중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 입장
용수는 특정의 학설과 관념을 주장하는 입장을 일방적 고집이라고
하여 이를 비판·부정한다. 이러한 비판의 대사은 유부(有部)를
비롯한 소승의 제부파, 나아가서는 승론(勝論, Vaisesika)·정리(正理,
Nyaya)·수론(數論, Samkhya) 등 당시의 대표적인 인도철학의
제학파들이다. 이 경우 이들 개개의 학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그 학설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사고법이 관념의 고집,
실재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비판하고 있다.
용수는 당시 불교의 일반적 교의를 거론하고 있지만, 자신의
새로운 교의를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중론>의 27장 각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당시의 사상계의 일반적 문제로서 예를 들면
연(緣)과 생기(제1장), 거래(去來)와 운동(제2장), 육근(六根, 제3장),
오온(五蘊, 제4장), 유위상(有爲相, 제7장), 업과 그 주체(제8장),
윤회와 전후제(前後제, 제11장), 고(苦)의 생기(제12장), 제행(諸行,
제13장), 유와 무(제15장), 속박과 해탈(제16장), 업과 과보(제17장),
아(我, 제18장), 시간(제19장), 원인과 결과(제20장), 여래(제22장),
사제의 진리(제24장), 열반(제25장) 등이 논의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기성의
지식·개념을 거론하고, 이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법을
분석·비판하였다.
연기의 의미
연기의 문자적 의미는 '의하여 일어남'이지만, 이 내용에 A를
원인으로 하여 B가 생긴다고 하는 발생적 인과관계, A에 의존하여
B가 생긴다고 하는 의존관계, A를 이유·근거로 하여 B가
성립된다고 하는 논리적 관계 등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연기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광범위한 관계의 의미를 갖는 것은 '인연'의 경우와 전혀 동일하다.
인연과 연기는 실질적으로 동의어이지만, 이 경우 연기라는 술어에
'생기(生起)'라는 말이 들어 있듯이 관계는 발생적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찌기 학계에서는 연기를 상의상관(相依相關), 또는 논리적인
근거의 의미로 해석하여 발생적·시간적 인과관계와 엄격히 구별하는
의견이 유력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올바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연기는 발생적 인과관계임과 동시에 인과관계에 대한 '사고법'이다.
다만 후자에 불교 특유의 사유방법이 있고 이를 명백히 제시한
사람이 용수였으며, 그 사유방법을 법칙화할 때 상의상관 또는
논리적 근거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충분히 인정된다.
용수가 말하는 연기는 교의 개념으로서는 종전의 그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는 최대의 논적인 유부의 연기론인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그대로 승인하고 있다. 다만 유부가 입각하고
있는 유자성설(有自性說), 즉 제법에 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
의해서는 십이인연을 비롯한 모든 인과관계가 진실된 의미에서
성립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유부는 현상적 존재의 배후에 그 기체(基體)로서의 불변의 본질을
상정하고 이를 '자성'이라고 하며, 이를 정리하여 75법(法)으로
분류하고 있다. 75법은 각각 자기동일성을 갖는 실재로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상주·불변한다. 그러나
과거·미래에서는 작용을 갖지 않고, 오직 현재에서만 작용을 갖는다.
한순간 한순간의 현재에 각각의 작용을 드러내는 제법의 인연화합에
의해 현상세계의 차별상이 성립하지만, 개개의 법의 자성은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유부의 연기관이다.
유부 이외의 제학파의 학설 또는 상식적인 견해는 의식적으로
'자성'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으나 실재관을 고집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성을 상정하는 입장과 다르지 않다고 용수는 생각하여 그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을 하고 있다.
자성의 부정
그는 자성의 관념을 "인연에 의해 생기함이 없으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것에 관계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제15장
제1·2·8시구)으로 규정한다. 존재는 자신의 본질로서의 작용 또는
성질을 갖는 바, 그 작용·성질을 내적 규정으로 삼아 자신을
고정시키고, 단일·불변하며 타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자존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자성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본체의 관념에 거의 상당한다.
용수는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보는 자(눈)는 보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가는 자, 보는 자 등의 주체에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 감, 봄이라고 하는 작용이 이미
충족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이 간다 또는 본다 라고 함은 무의미한
중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등은 자신을 비추지 않는다'라고도 한다. 실체가 자기작용을 한다면
하나의 실체가 작용의 주체와 작용의 대상이라는 두개의 본질을 갖는
불합리에 빠지므로 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의 배후에 자성을 상정하는 입장에서는 현상세계의 작용·변화가
성립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었다.
생기의 개념의 부정
이와 같은 점에서 그는 많은 지식·개념을 분석하여 자성을
상정하는 한 그것은 불합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 지식·개념은
성립되지 안으며 그 자성은 부정되어 공으로 귀착됨을 논증하고
있다. 그러한 논의는 상당히 다채로운 것이지만, 대개 제1장과
제2장에 그 기본적인 형태가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1장(觀因緣品=인연에 대한 고찰)은 소위
4연(因緣·所緣緣·次第緣·增上緣)이 실체적인 것으로서는 성립되지
않음을 논증하는 바, 그 첫머리에 생기의 부정이 논의되고 있다.
갖가지의 존재는 그것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어디에 있을지라도,
언제나 (1) 자신으로부터, (2) 다른 것으로부터, (3) 자·타의
둘로부터, (4) 원인없이 생긴다고 할 수 없다(제1장 제1시구).
이와 같은 4구에 걸친 부저은 실은 원시경전 이래 언급되어 온
정형구이지만, 용수는 이를 채용하여 독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제1구는 수론의 설, 제2구는 승론의 설, 제3구는
자이나교(기원전 5세기 동인도의 마가다국에서 발생한 종교)의 설을
비판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용수가 이와 같은 의미로 위의 말을
하였는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구체적인 학설을 대상으로 하기 보다는 제학설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사고법을 문제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제1구의
'자신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제법의 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를 주장한다면 결국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것이 되어 현재 생기고
있는 것이 다시 생긴다는 불합리를 지니게 됨을 말한다.
제2구의 '다른 것으로 부터 생긴다'는 것은, 제법의 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결과가 그것과 전혀 무관계한 독립된
타자로부터 생긴다는 의미가 되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일체의
인과관계는 우연적인 것이 되는 불합리에 빠짐을 말한다. 그리고
제3·4구는 위의 사실에 준하여 각각의 불합리가 지적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4구 모두에 생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생기를 부정하는 이와 같은 논법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 양자가 자성을 갖는 것이라면, 그들이 동일하여도,
별개의 것이라도 인과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제20장(관인과품) 등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중론>에는 부정의
방법으로 이러한 4구의 형식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대상을
규정하는 관점을 총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생기라는 현상은 어떠한 개념 또는 명제의 형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음을 4구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거래의 개념의 부정
제2장(觀去來品)은 '감'과 '옴'이라는 두 운동에 관한 개념을
분석하여 자성을 상정하는 한, 그 어느 것도 성립되지 않음을
논증한다.
우선 '감'의 개념을 분석하며 '이미 가버린 것' '아직 가지 않은 것'
'현재 가고 있는 것'의 3상태로 구분된다. 이를 시간의 개념으로
말하면, 과거·미래·현재에 대응한다. 여기에서 '이미 가버린 것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을 완료한 것이 다시 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것은 가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 가고 있는 것은
간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경우 주어 '가고 있는 것'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가는' 작용과 술어로서의 '가는' 작용의 두 작용이
인정된다. 그런데 가는 작용은 '가는 주체'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두개의 '가는 주체'가 인정된다. 그런데 가는 작용은
'가는 주체'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두개의 '가는
주체'가 인정된다. 따라서 '가는 주체(주어)가 간다(술어)'라는 판단은
주어의, 그리고 술어의 두개의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합리하며, 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지 않는 주체가 간다'라는 것은
물론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주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가는 작용도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의 이유에 의해 '옴'의 경우에도 주체와
작용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제2장에서는 개념분석이 극히 세밀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주체와
작용, 또는 주체와 작용과 대상의 관계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의 방법은 그 밖에도 제3장(觀六情品=六根에 대한
고찰)의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작용', 제6장(觀심심者品)의
'탐하는 자'와 '탐하는 작용', 제8장(觀作作者品)의 '작용의
주체(作者)'와 '작용(業)', 제10장(觀燃可燃品)의 '태우는 것(불)과 '타는
작용'과 '타는 것(연료)' 등에도 보인다.
이들 문제에 있어 주체의 자기작용이 부정됨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그런데 나아가서는 주체와 작용, 또는 작용과 대상이
관계론적으로 논의되어, 양자가 동일한 것이라도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별개의 것이라도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부정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 제2장의 제19·20시구에 이러한 취지의 언급이
있는데, 이러한 예는 그밖에도 제6장 제4시구, 제10장 제1시구 등에도
나타나 있다. 동일하다고 하면 주체와 작용이 혼동되며, 다르다고
하면 양자는 관계없이 성립된다고 하는 불합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一)·이(異)의 개념의 부정
이상과 같이 <중론>에는 일(同一)·이(別二)의 개념이 원인과
결과, 주체와 작용 등 법과 법의 관게에 관련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성 즉 실체는 성질이 단일한 것이기 때문에 두 실체의
관계는 동일하거나 상이하거나 어느 한 편으로 그 이외의 길은 없다.
그리고 실체를 인정하는 한, 동일과 별이의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므로 제법은 무자성이며, 공이라고 용수는 논증한다.
전술한 부정의 8구 중에서 생멸·단상·거래의 6구까지는
운동·변화에 관한 개념인데, 이는 연기가 발생적·시간적인 인과를
중심으로 함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일이(一異)는 관계의 개념이다.
이는 시간적 인과관계 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상호의존관계, 논리적인
인과관계에도 사용될 수 있음으로써 원리적으로는 가장 적용범위가
넓다. 또한 양도논법(兩刀論法, dilemma)의 연기론에서 일·이의
논리를 추출하면 연기를 관계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가 개념·지식을 분석할 때, 개념의 '상호관계'에 대해 기술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불은 연료와 관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은 연료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연료는 불과
관계하여 또는 관계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제10장
제12시구). "정(淨)과 관계없이 부정(不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정에 의해 부정이 있다고 우리는 설한다"(제23장 觀顚倒品
제10·11시구).
(2) 진리와 그 표현
일원적 세계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있다. 연기는 인연생기이므로 이에 의해
성립되는 제법은 시간규정을 받는다. 시간규정을 받는 것은 유한한
존재로서 업의 인과율과 윤회에 속박되어 있다. 이것이 미혹의
사실이지만, 불교의 수행자는 이 속박을 떠나 시간규정을 초월한
무한의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연기의
제법은 그 자체 미혹으로 부정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용수는 "윤회와 열반은 조금도 상위가 없다"(제25장
觀涅槃品 제19시구)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열반이라는 특별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법이 공이며, 불생불멸인 것이
열반이다. 또 윤회에도 특별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체법이 유전함은 경험적 사실이지만, 무엇인가 본체가 있어
윤회한다고 함은 옳지 않다. "상주하는 것이 윤회하는 것도, 무상한
것이 윤회하는 것도, 인간주체가 윤회하는 것도 아니다"(제16장
觀縛解品 제1시구). 윤회의 주체가 없으므로 그 속박으로부터
해탈함도 없다. "생멸의 성질을 갖는 모든 시간적 존재(諸行)는
속박됨도 없으며, 해탈함도 없다. 중생도 이와 같이 속박됨도
해탈함도 없다"(위의 품, 제5구). 대승불교의 미오불이(迷悟不二)
사상을 용수는 연기로써 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설(二諦說)
이상과 같이 일체법이 공임이 논증되었으나, 공은 부정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에 의해 종전의 불교학설이 모두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난이 제기 되었다. 이에 답하는 것이 2종의 진리 즉
이제설이다. 이는 주로 제24장(觀四제品)에서 논의되고 있다.
반대자는 말한다.
"일체법이 공이라면 석존께서 설하신 사성제 등의 진리는 허무하게
되며, 따라서 정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실천도 불가능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불·법·승의 삼보를
파괴하고 선악업을 부정하며, 세간 일체의 언어적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위의 품, 제1∼6시구)
이에 대해 용수는 답한다.
"그대는 공의 목적과 의의를 알지 못하므로 무익한 걱정을 하고
있다. 제불은 2제에 의해 법을 설하신다. 즉 일체법은 공이라고
설하심은 최고의 진리인 승의제(勝義諦)이며, 사성제 등 개념·언어를
사용하여 설해진 진리는 세간적인 진리인 세속제(世俗諦)이다. 이
2종의 구별을 모른다면 불교의 깊은 진리를 알 수 없다. 승의제를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면 이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세속제가 아니라 승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위의 품, 제7∼10시구).
뿐만 아니라 실천수행은 공에 기초하여서만 성립된다. 즉 제법이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에 번뇌를 끊고 괴로움을 멸하여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 만약 제법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면,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위의 품,
제20∼28시구).
승의제는 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제)로도 번역되며, 세속제는
단순히 속제라고도 한다. 승의제는 최고·궁극적 의미에서의
진리로서, 언어에 의한 표현을 초월한다. 이에 대해 세속제는
세간일반의 상식·관습적 입장에서의 진리로, 특히 언어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표현된 진리를 말한다.
언어는 지식전달의 수단으로 인간사회의 관습·약속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활동에 의해 표현된 진리는
이난사회의 관습·약속의 범위에서는 진실이지만, 이것이 궁극적
의미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용수의 이제설은 일반적으로 '언교(言敎)의 이제'라고 한다. 궁극적
진리는 공으로서 언어적 표현을 초월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공인
진리의 표현수단으로의 의의를 갖는다. 공도 언어로서는 입시로
언표된 것(假說)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된 모든
불교교의는 진리의 표현수단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설이다. 용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불교사상을 이제설로써 직접적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제설이 그의 독창은 아니다. 이는 이미 <반야경>에
언급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를 계승·발전시켰던 것이다.
한편 소승의 유부(有部, 근본상좌부의 분파인 소승의 대표)도
이제설을 말하고 있으나, 이는 <반야경>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부의
이제설은 진리를 실재에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내용으로서는
실재를 여러 단계·종류로 나눈다. 유부에 의하면 현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세속제, 현상을 성립시키는 실재적(實在的) 원인 즉
제법의 구성요소에 대한 인식이 승의제이다. 예를들어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 물질·정신을 다섯 종류 나눈 것)의
인연화합에 의해 인간이 성립되며, 수레의 부분의 집합에 의해
수레가 성립될 때, 오온 또는 수레의 부분은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인간 또는 수레의 실재적인 원인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용수는 연기론은 궁극시, 실체시되는 실재적
원인을 부정한다. 궁극적 원인이 정립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성립시키는 다른 원인이 상정되며, 나아가 그 원인을 성립시키는 그
다음의 원인이 상정되어 무한히 소급된다. 세계는 특정한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인의 총화로 성립된 것이다. 원인이
무한히 상정되기 때문에 원인은 동시에 결과로도 된다. 그리하여
제법은 상호 유동적인 인과관계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연기론의
사고법이다.
언어와 실재
<반야경>과 용수는 제법이 공이라는 사실을 '토끼의 뿔' '거북이의
털' '석녀(石女)의 아들' 등에 비유한다. 결국 언어로써는 통용되지만,
대응하는 실재물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는 일체가 임시로
언표된 것, 부정적으로 말하면 허구로서 실재를 갖지 않는다. 언어는
사유(분별)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는 실재를 갖지 않으며,
실재는 다만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
그러나 용수에 있어 언어와 사유는 전혀 실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열반은 불생불멸이라고 말하고 있다.(제25장 제3시구,
제18장 제7시구). 이 불생불멸의 관념은 당면의 그의 논리에 따라
말하면, 제법의 자성·실체를 부정하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불교는 전통적으로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를 현상을 초월한 실재,
또는 상대적인 언어표현을 초월한 절대계로서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열반에 대해 용수가 의미하고 있는 바도 이와 같다. 그러한 한,
언어는 부정이라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
된다.
또한 그는 지식·개념을 분석·구별하여 다수의 개념의 관계성을
지적하였다. 개념은 구별(분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이
분석·구별은 원리적으로 무한히 가능하기 때문에 어떠한 개념이
적극적으로 자기내용을 갖는다기 보다는 자기가 아닌 것과의
구별에서 자기를 한정하는 거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A는 비A에
대해 자신을 한정하여 성립되는 것으로, 이를 일반화하면 유와 무의
상대적 관계가 개념의 구조가 된다.
이러한 개념의 상대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사실세계에 있어서의
제법의 관계성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관계라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수도 이를
예상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에게는 현상세계 그 자체가
실재로서, 현상의 심층에 별도의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개의 사상(事象) 전체가 실재이다. 전체속의 개개의 사상을 보면
이는 상대적 관계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전체를 보면 상대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를 초월한다. 상대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절대라고 할 수 있다. 용수는 이러한 점을 들어 열반을
불생불멸이라고 하며, 연기를 중도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언어와 개념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성에서 실재의 상대적 구조를, 그리고 그 부정에서 실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용수 이후의 사상에서 언어·개념은 적극적으로
실재를 지시하는 것, 즉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가 중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가행파 또는
여래장사상 계통에 현저하다. 이들 사상에서느 진리의 종류와 단계를
구분하는 사고, 또는 상대와 절대의 관계에서 진리를 소위 변증법적
발전으로 파악하는 사고법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수직후의 후계자
용수의 제자에 제바(提婆 Aryadeva)가 있는 그는 예리한 논법으로
제학파를 논란·공격하였으므로 다른 학파로부터 살해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에 <사백론(四百論>)(티벳역·후반의
한여=현장역(廣百論>·산스끄리뜨단편), <백론(百論)>(2권,
구마라집역), <백자론(百字論)>(1권 菩提流支역·티벳역 등이 있다.
제바의 제자에 라후라발타라(羅후羅跋陀羅, Rahulabhadra)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의 계통에 대해서는 5세기에 중관파가
부흥하기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5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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