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는 북방불교권에 속해 있는 대승불교입니다.
최초로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대승불교로 시작되었으며 신라 시대에는 더러 밀교쪽으로 기울기도 했으나 오늘날까지 선종 중심의 대승 사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대승사상은 원시불교의 소승사상에 대한 혁신사상으로 석존의 본래 정신에 입각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이 대승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은 공(空)과 반야(般若)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아울러 대승의 연기사상과 대승의 무아사상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공(空)
비어있는 것, 공간(空間) 공허(空虛)라는 보통의 개념과는 다른 불교 특유의 용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有)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란 실체가 있는 영원불변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무상(無常)- 불교에서는 < 이세상의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나>라는 존재가 있다(有)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눈이 있고, 눈이 있음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色)이 있으며, 눈을 통해 본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감촉도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지만 사실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상하여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가는 것이므로 역시 공입니다. 따라서 내몸의 눈을 비롯한 감각기관이나 그것을 통해 보고 느끼는 것은 역시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만물은 모두 무상하여 일체가 <공>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고(苦)에서 해탈할 수 있으며 이 놀라운 지혜야말로 붓다의 지혜이며 지혜로 바라본 세상-현실적인-은 모두 공(一切皆空)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의 사상을 가장 압축한 것이 저 유명한 『반야심경』입니다. 즉 모든 것(色)은 공이므로 공은 곧 색이라는 논리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눈 앞에 보이는 것, 나라고 착각하는 내 몸, 내 인생에 집착하게 되고, 재물 육체 부부 부자 친구 등의 대인관계에 얽매이고 청춘도 행복도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실에 빠져버립니다. 이런 탐닉이야말로 소유욕, 아유욕(我有欲) 때문이며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석존의 공사상은 곧 중도의 사상인 것입니다. 중도란 바르다는 뜻이므로 이 공사상은 곧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본다는 뜻이 됩니다.
●무아(無我)
무아란 곧 공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무아를 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아를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몰아(沒我)적인 상태, 즉 잠시 나를 잊고 어떤 생각이나 일에 몰입한 상태와 혼돈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아란 사상적인 표현이지 인간의 정신적 내지 감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내 몸과 마음을 항상 변함없이 주재(主宰)하고 있는 주체가 <나>인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결코 영원하지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무상한 것입니다. 즉 인과 연이 화합해서 잠시 사람으로 태어났다 죽는 존재이므로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
반야란 prajna의 음역이며 <밝음> 또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지혜 즉 즐기와는 전혀 다른 뜻이며, 일반적으로 슬기라고 하는 뜻의 지혜는 본래 불교의 지혜에서 나온 말입니다.
법 즉 석존이 설한 참다운 이치에 합당한 최상의 지혜를 뜻합니다. 이 반야-지혜-를 체득하면 곧 성불하므로 이 반야야말로 모든 부처의 스승이며, 차별없는 평등이며, 변함없는 절대이며, 편견없는 무념이며, 무분별(직관)이며, 인간을 교화할 수 있는 최상의 힘인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인 『반야경』이 모두 이 반야사상을 담은 것이며 그 정수(精粹)가 바로 『반야심경』이라 하겠습니다. 이 반야로 본 세상은 모두 공이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곧 성불하는 길인 것입니다.
● 대승의 연기
석존이 어떤 철학자, 종교가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연기를 설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연기법을 논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이스의 왕과 나가세나라는 사문하고 문답하는 형식으로 된 『미린다왕문경』에서 왕이 나가세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나가세나인가?」
그러자 나가세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가칭(假稱)하고 있소. 나가세나라는 존재는 눈, 귀, 코 등의 육신과 감각, 심적 작용의 총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을 뿐이요. 연이 일어났을 뿐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연기관으로 늙음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고뇌를 보고 분석한 것이 바로 12연기인 것입니다. 대승에서는 이런 12연기를 낳게 하는 작용, 운동 즉 상의(相依)자체를 참구해서 <연기란 무엇인가>하는 데까지 이르면 <연기는 공이며 고체적(固疜的)인 실체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체적인 실체가 없는 것을 불교 용어로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합니다.
이 무자성이 어떤 인연으로 모습을 나타냈지만(有) 그것은 다시 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공과 연기의 현상을 하나로 파악하는 지혜가 곧 깨달음인 것입니다. 반야를 증득(證得)하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이 대승불교 특히 반야의 사상이며 선(禪)의 사상입니다.
[출처] 공 무아 반야 대승의연기|작성자 임기영 불교자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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