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주. 공사상과 중도의 실천
▒ 10강. 중도의 실천 ▒
중도의 세계
용수 보살(Nagarjuna)은 중관사상을 정립시킨 대승 철학의 큰 별이다.
그는 150-250년 사이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당시는
대승과 부파가 서로 경쟁관계를 이루면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승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입장을 내세우고 선양할 수밖에 없었다.
용수는 공이라는 사상적 무기를 가지고
그런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인물이다.
용수가 당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외도(外道)들이다.
외도는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적 학파를 가리킨다.
당시의 외도들 가운데 실재론자들은 외형만 보고
모든 것이 ‘있다’는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그대로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용수가 상대해야 할 두번째 부류는
불교 내에서 부파의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특한 실재론자이다.
일반인들과 외도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있다’고 보았지만,
그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형상을 가진 모든 존재는 공이지만,
그 형상을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는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사람은 공하지만,
사람을 구성하는 오온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용수가 세번째로 상대해야 했던 부류는
불교인들 가운데 조금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모든 것은 공이다’ 라고 이해했지만
공의 적극적인 면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공은 비었어도 가득 찬 그런 바탕[眞空妙有]이다.
그런데 그들은 공한 줄만 알았지 묘하게 있는 즉,
불공(不空)의 면을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공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허무공적(虛無空寂)에 빠지고
현실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용수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 같지만, 내용은 아주 달랐던 것이다.
이 세 부류 사람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유(有)’라는 극단과 ‘공(空)’이라는 극단에 치우친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공묘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용수가 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자 과제였다.
용수는 공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여러 사견(邪見)을 논파했다.
유에 치우치면 공으로 타파하고 공에 치우치면
묘유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타파했던 것이다.
용수가 지은 『중론』 『관유무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있다함은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없다함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편견이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유(有)와 무(無)에 의지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중도에 입각한 사상을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고 한다. 즉,
중도로 보는 사상이라는 의미이다.
이 중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용수의 사상이다.
그런데 용수는 중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혁파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방법을 동원했다.
여기에서 정(正)이란 중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邪)란 유라는 극단과 공이라는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와 공의 극단을 혁파하고 중도를 드러내는 것이 파사현정이다.
이처럼 그는 양 극단을 혁파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 아니다’, ‘~이 아니다’ 하는 부정의 방법을 많이 동원하였다.
삿된 견해를 혁파하는 8가지 부정의 방법[八不]은 매우 유명하다.
파사현정의 내용은 팔부중도(八不中道)로 되어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를 네 개의 쌍으로 정리하여 부정한 것이다.
나는 것과 멸하는 것이 있다는 견해[生·滅],
죽으면 그만이다는 것과 항상하다는 견해[斷·常],
개체와 전체에만 치우친 견해[一·異],
오는 것과 가는 것이 있다는 견해[去·來]가 그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용수는
‘~이 아니다[不]’ 라는 방법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생멸(生·滅) → 불생불멸(不生不滅)
단상(斷·常) → 부단불상(不斷不常)
일이(一·異) → 불일불이(不一不異)
거래(去·來) → 불거불래(不去不來)
우리는 생도 있고 멸도 있다고 생각해서 생과 멸을 둘로 본다.
이것은 육신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치고
‘나’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
그런 개체적 나는 언제, 어디에 태어나기도 하고[生] 또 죽기도 한다[滅].
그래서 생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다’ 하는 놈, 그 울타리가 깨져서 연기적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나고 죽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생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으로 보면 생·멸이 따로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기이며 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과 멸이 있다고 보는 이유는
‘나’를 따로 놓고 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개체만 볼 줄 알았지 나와 관련된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영하의 온도로 되면 얼음이 되고
이 얼음을 끓이면 수증기가 된다.
물과 얼음, 수증기를 각각 따로 보면 생과 멸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생멸이 따로 없다.
물이 얼음이고 얼음이 수증기이다.
단지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단상(斷常), 거래(去來)도 마찬가지이다.
항상한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다.
오고 가는 것도 없다.
개체적으로 보면 오고 가는 것이 따로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고 가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一異)도 마찬가지이다.
전체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며,
부분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다.
왜냐하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와 사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에 치우치면 개인주의가 되고,
사회에 치우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따라서 사회와 개체를 함께 보아야 한다.
개인을 무시한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무시한 개인생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융한 관계가 바로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불(不)’이란 다 버리고 다 포용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바로 공의 세계이며
개체와 전체 모두를 살리는 중도의 원리이다.
말이 끊어진 세계
용수의 사상적 기초는 깨침에 있으며,
그는 이것을 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 깨침 그 자체는
말이 끊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용수는 깨침, 즉 공에 대한 표현의 문제에 주목하였다.
깨침을 언어로 표현할 때,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오류를 지양하고 직접 말이 아닌 공,
깨침의 세계에 눈뜰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깨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깨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들과 교통할 수 있는 언어, 문자를 통해서
그 깨침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상대적인 세계에서 언어, 문자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문자는 위험한 수단이다.
마치 뱀을 잡는 사람이 뱀을 잘못 잡으면 물리는 것과 같이
언어, 문자는 위험한 도구이다.
언어, 문자에 집착하게 되면 진리 자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이나 언어, 논리의 겸손을 항상 강조한다.
‘둘이 아닌 진리[不二法]’는 오히려 말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서 더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존재의 실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의 세계,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일 뿐이다.
그래서 제일가는 설법은 말로 하는 설법이 아니라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했다. 즉,
존재 자체가 설하는 법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꽃피고 새우는 것이 바로 진리의 소식이며,
낙엽 지고 석양이 지는 모습이 바로 제행무상한 공의 소식이다.
이렇게 깨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어둡고 귀가 막혀있기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불교에는 독특한 격외(格外)의 방법이 있다.
침묵이나 할, 방과 같은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유마거사의 침묵도 바로 그런 방법이다.
선가에서는 할이나 방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누군가 선사를 찾아와서 “불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악(喝)!”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몸둥이[棒]로 내려친다.
그것은 말 이전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방법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45년 간을 말로 설법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이나 언어, 문자의 기능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표현된 언어,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之指]이라고 한다.
저 중천에 달이 떠 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달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여보시오, 저기 달이 떠 있잖소.” 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은 진리, 깨침을 나타내고 손가락은
언어, 문자 등의 상징체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 없다.
시선이 손가락에서 벗어나야 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교법도 버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입장이다.
용수의 경우 공의 세계 역시 말이 끊어진 진리의 세계이다.
그래서 그는 『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법의 실상이란 심작용(心作用)의 대상과 영역,
언어의 대상과 영역을 초월한 것이며,
생성되는 일도 소멸되는 일도 없다.
그것이 열반이다.”
그러나 언어,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와 교통이 힘들기 때문에
용수는 언어, 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진리에 대한 표현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로 논리를 초월한 역설적 구조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공(空)이면서 동시에 공이 아니라고[不空] 한다든지,
색이 곧 공이라는[色卽是空] 것은 모두 논리적 역설이다.
둘째로 용수는 ‘~이 아니다’, ‘~이 아니다’ 라는 부정적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앞에서 언급한 팔부중도(八不中道)가 대표적이다.
이런 역설과 부정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면 오해의 여지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용수는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진속이제설(眞俗二諦說)이다.
진제는 최고의 진리이며, 속제는 세속적 진리이다.
즉, 진제는 진리 그 자체이며,
속제는 진리의 세계에 눈뜨도록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
언어의 세계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표현된 문자에 집착하거나 말끝에 얽매이게 되면
오류를 범하게 되고 희론(戱論)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희론에 떨어지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空)에 얽매이면 유(有)로,
유(有)에 얽매이면 공(空)으로 타파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세계를 떠나 진리에 눈뜨게 하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를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진리와 그 진리를 표현한 것에 대한 구분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표현된 언어, 문자를 통해서
깨침으로 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 문자를 통해서 직접 깨침의 샘물을 마셔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손가락에서 달로의 전환이며 비약이다.
그러나 손가락도 중요하다.
세속적인 것을 진리[諦]라고 한 것도 바로
그 표현된 것을 통해서 진리에 눈뜰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자체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잘 이해해서 삶이 일대 전환되는 체험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깨침의 세계, 하나인 세계에서는 진·속이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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