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주. 해탈의 심리학
▒ 13강. 마음의 구조 ▒
해탈의 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유식불교(唯識佛敎)는
대승 중기에 여래장, 불성사상과 함께 발달한 중요한 학파이다.
‘모든 것이 마음뿐이다’라는 유식사상은 공사상과 함께
대승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은 조금 난해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많다.
그러나 중심을 잡고 불교의 핵심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본래 깨친 눈에 비친 존재의 모습을 설한 가르침이다.
깨친 세계를 각기 달리 설명하고 있지만 그 핵심은 동일하다.
근본불교에서는 깨친 내용을 연기라 표현하고
대승에서는 공이라고 해서 이 둘이 서로 다르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깨친 진리를 적극적으로 여래의 씨알, 불성 등으로 표현해서
그것이 공사상과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렇게 연기, 공, 불성 등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 바탕은 모두
‘하나’인 진리[不二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는 일체의 모든 것이 더불어 ‘하나’로 있다는 것이며,
공은 안팎이 텅 빈 대평등의 ‘하나’인 자리이며,
여래장과 불성은 그 자리가 나와 우주가 ‘하나’인 바탕이라는 것이다.
‘하나’인 자리는 ‘나다’ 하는 의식이 깨지고
주객이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드러난다.
그 체험이 기본이 되어 각기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유식(唯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식도 일체의 분별이 깨진 체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그 깨진 경지를 ‘유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유식은 문자 그대로 일체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대상을 둘로 보는 병에 걸린 환자와 같다.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 나와 자연을 둘로 보는 것이 병의 원인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나와 남을 나누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내 앞에 무엇을 더 많이 갖다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대로 안되면 진심(瞋心)을 내는 등
삼독의 괴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삶이다.
우리는 나와 대상, 주(主)와 객(客)을 나누지만
그것이 통일되어 ‘하나’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온통 밝은 마음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을 유식(唯識)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식은 오직 마음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대상은 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상이 무너지면 주관도 무너지게 된다.
사실 마음도 공한 바탕이기 때문에 유식은 안팎이 텅 비어
‘하나’된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 ‘하나’인 자리를 연기라고 하든지
아니면 공, 여래장, 불성, 마음이라고 하든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그 ‘하나’인 자리를 유식불교에서는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깨친 자리를 ‘하나’인 마음자리에서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 범부들의 마음에서부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유식불교의 구조이다.
아무리 우리의 본래 마음이 여래장, 불성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우리들의 마음은 ‘나다’ 하는 뿌리를 가지고 행동하는 중생심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고 트집을 잡는 것이며
자기과시도 하고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야, 이래서는 안되겠다. 잘 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서
선행을 하고 수행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재심이다.
유식은 이런 현상심을 대상으로 철저한 관찰과 분석을 가하고 있다.
유식은 이러한 분석과 심층적인 통찰을 통해
‘아하! 본래 나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마음이며,
이 마음이 잘못된 것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여래장이나 불성사상에서는
본래청정심으로 설명한 데 비해,
유식에서는 ‘나다’ 하는 뿌리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심이나 번뇌망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착각을 일으킨다.
유식은 이런 현상심의 구조를 명백히 밝힘으로서
그 착각을 치유하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유식에서 말하는 현상심과
여래장이나 불성사상에서 말하는
본래의 ‘하나’인 마음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유식불교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유식은 아주 친근감이 가는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에 대한 구조를 철저하게 파헤쳐서
표층의 마음, 즉 감각·지각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심층의 나까지를 명백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서양 심리학에서도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프로이드나 융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서양의 심리학은 19세기 말 경에 확립되었지만,
유식불교는 1,500년 전에 이미 서양 심리학보다 훨씬 심도 있게 확립되었다.
서양의 심층심리학은 정신분석을 통한 정신 치료에 주로 이용되고 있는데 반해
유식은 깨침을 얻게 하는 ‘해탈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불교의 중심경전으로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이 있다.
유식을 체계화한 사람으로 3명이 있다.
『유가사지론』을 지은 미륵(270-350)과
『섭대승론』을 지은 무착(395-470), 세친(400-480)이 그들이다.
여기에서 미륵은 도솔천에 있는 미래부처님이 아니라
실재했던 학승 미륵(彌勒)을 말한다.
그런데 무착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로부터
유식설을 배웠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무착과 세친은 형제이다.
무착이 형이고 세친이 아우이다.
무착은 실제로 『섭대승론』을 지어 유식의 기본구조를 세운 사람이다.
그리고 세친은 부파불교의 『구사론』을 쓴 사람이다.
대승의 유식학자인 세친이 부파불교의 대표적인 저술을 썼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래 세친은 처음에는 부파불교의 논사로서
대승을 공격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형인 무착의 지도로 대승에 귀의했다.
세친은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의 혀를 자르려고 했는데,
자르려는 그 혀로 대승을 선양하라는 형 무착의 충고에 따라
『유식 30송』 등을 저술하여 유식사상을 확립했던 것이다.
이 유식사상은 중국으로 건너가 진제(眞諦)의 섭론종(攝論宗)과
『서유기』로 유명한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으로 확립되었다.
현장은 나란다(Nalanda)절에서
계현이라는 유식의 장로에게서 유식을 배우고
많은 경전을 중국에 가지고 들여와서 번역작업을 했다.
이것을 신역(新譯)이라고 한다.
현장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까지
인도 출신의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번역을 구역(舊譯)이라고 하며,
현장 이후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서 번역된 것을 신역이라고 했다.
그러면 유식불교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상식처럼 알려진 대로 유식에서는 마음을 여덟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제 1식(識)은 우리의 눈을 통해 형상과 색깔을 구분하는 시각(視覺)이며,
제 2식은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청각(聽覺),
제 3식은 코를 통해 냄새를 아는 취각(臭覺),
제 4식은 혀를 통해 맛을 구별하는 미각(味覺),
제 5식은 몸을 통해 감촉을 아는 촉각(觸覺)이다.
이 다섯 가지를 전 5식(前五識)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최전방에서 바깥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즉,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한 감각작용이다.
그리고 제 6식은 전 5식을 종합·정리하는 의식(意識)이다.
우리말에 의식이 있다, 없다고 할 때의 의식이다.
우리가 책을 보고 이해하거나 교리강좌를 잘 듣고
‘아하!’ 하고 이해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식의 작용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식의 작용이다. 그리고
‘나도 한번 깨쳐서 일체의 중생을 건져야겠다.’고 발심하는 것도
바로 제 6식인 의식의 작용이다.
그 밖의 상상력도 이런 의식의 작용이다.
의식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마음이다.
그것은 깨어있는 마음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각종 과학이나 예술,
철학을 발달시키는 것도 바로 이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항상하지 못해서 끊긴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잠을 자거나 술에 만취하게 되면 이 의식작용은 끊긴다.
그리고 깊은 선정에 들었을 때도 이 의식활동은 중단된다.
따라서 이 의식을 마음의 전체라고 할 수 없다.
전 5식과 6식은 우리들의 표층의식(表層意識), 표층의 마음이다.
유식불교의 공헌은 이러한 표층의식을 제시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심층의 ‘나’를 발견한 데 있다.
6식 보다 더 깊은 심층의식이 7식이다.
이 7식을 말나식(末那識, Manas)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본래 ‘생각한다’,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나식은 항상 끊이지 않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다’ 하는 생각이 항상 끼여들어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있는 마음이다.
여기에 바로 문제가 있다.
‘나다’ 하는 이기심이 발동하는 것도 바로 이 말나식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항상 우쭐해하는 마음을 내는 것도 이 때문이며,
‘나’에 대한 집착으로 나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각종 탐심을 내는 것도 바로 이 말나식 때문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도 사실은
잠재되어 있는 말나식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7식보다 더 심층의 내가 있다.
그것은 제 8식이다.
이 8식을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밑에 깔려있다’, ‘감추고 있다’,
‘창고에 쌓아 놓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이 아뢰야식은 아주 깊은 심층에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저장하고 있다.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도 모두 여기에 쌓여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길을 가다 어떤 사람이 옆을 스쳐 지나갔는데,
어디에서 많이 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몇 일이 지나서 우연히
‘아하, 그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하고 기억하려는 것은 6식의 작용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우연히 몇 일 뒤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 기억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을까?
바로 아뢰야식에 쌓여 있다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습성이나 버릇도 이 아뢰야식에 모두 쌓여 있다.
평상시 예의도 바르고 점잖은 사람이
술만 먹으면 험한 행동을 하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버릇도 모두 아뢰야식에 쌓여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꽁하는 마음으로 있던 사람이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도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갑자기 폭발하여
험악한 행동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경험한다.
이것도 모두 아뢰야식에 꽁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나오는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뢰야식에는 과거의 경험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우리들의 한 생각,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업(業)이 되어 쌓여 있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이곳에는 과거에 아름다운 꽃을 보고 느낀 감정이나,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들이 모두 쌓여 있다.
그래서 속일 수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쌓이게 된다.
이렇게 쌓이는 것을 훈습(熏習)이라고 한다.
이것은 법당 안에서 예불을 드릴 때 향냄새가 옷에 베이는 것이나
안개 속을 걸어갈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촉촉이 젖는 경우를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습성이나 취향으로
하나하나 쌓여 성격과 인격을 형성한다.
사람마다 취미가 다르고 식성이 다른 것도
바로 아뢰야식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습성은 오랫동안 쌓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우를 된장 속에 넣고 한 달이 지난 다음 꺼내어 보자.
그러면 그 무우는 된장 냄새로 찌들어 있어서
그 냄새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습성도 이와 같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쁜 습성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아뢰야식도 동시에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다. 즉,
우리들의 행위에 따라 아뢰야식도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8층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감각·지각하는 표층의식이 심층의식에 쌓이고
반대로 그 심층의식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심층의식의 내용물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의 나의 생각과 행위가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의 한 생각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층의식을 1,500여 년 전에 발견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을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고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유식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구조인 팔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 1식 : 안식(眼識)
제 2식 : 이식(耳識)
제 3식 : 비식(鼻識)
제 4식 : 설식(舌識)
제 5식 : 신식(身識)
제 6식 : 의식(意識)
제 7식 : 말나식(末那識)
제 8식 : 아뢰야식(阿賴耶識)
그럼 우리의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5관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며,
의식을 통해 종합하고 정리한다.
이런 행위는 모두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훈습된다.
예를 들어 빨간 꽃을 보면 빨간색이라는 느낌이 아뢰야식에 쌓인다.
이렇게 우리들의 경험은 아뢰야식에 종자(種子)로 훈습된다.
종자란 축적되어가는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꽃을 보면 그 꽃의 형체나 색깔 그리고
꽃을 본 느낌이 종자로서 훈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종자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빨간색을 보고 그것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영향이 우리의 전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의 행위가 종자로 훈습되면 그 훈습된 종자는
동시에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흐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은 그 대상의 객관적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은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훈습된 마음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을 보고 좋다, 싫다, 예쁘다,
밉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 자체에 예쁘고 미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라
우리의 훈습된 마음을 통해 예쁘고 밉다는 구별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보따리가 있는 한 우리는 깨치지 못한 중생이다.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마음의 그림자만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남산을 본다고 하자.
우리는 객관대상으로서 남산은 저기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으며,
우리가 그런 객체로서의 남산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런 남산은 없고 각자의 마음을 통해 남산을 볼뿐이다.
우리는 과거에 남산을 보았던 경험을 통해 남산을 본다.
그래서 사람마다 남산이 모두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남산에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보는 남산은 다르다.
그리고 남산의 탑에서 하루종일 근무하는 사람의 남산과
과거 이 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의 남산은 다르다.
반대로 이 곳에서 이별의 아픔을 맛 본 사람의 남산 역시 다르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에는 그 한계가 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오직 식(識, 마음) 뿐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왜곡하고 다르게 보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여기에는 세 단계의 과정이 있다.
첫째로 제 8식으로부터 달라진다.
우리는 훈습된 경험을 바탕으로,
즉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아뢰야식에 쌓인 영향을 통해 대상을 본다.
똑같은 한 사람을 보고도 제 각기 다르게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아뢰야식의 내용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둘째로 제 7식으로부터 변형되고 왜곡된다.
이 말나식은 ‘나다’ 하는 마음을 내는 곳이다.
‘나다’ 하는 의식이 강하고 약한가에 따라 상대방이 달리 보인다.
우리는 ‘나다’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점수를 더 주게 되고 미운 사람도 예쁘다고 한다.
반대로 밉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점수를 깎고
그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왜곡된 말나식이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전 5식과 6식으로부터 왜곡된다.
우리의 시각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무 작은 것은 못 보며
반대로 너무 큰 것도 보지 못한다.
다만 우리 시야의 테두리 안에 보이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외선이나 X-광선 등을 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감각기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의식도 생각에 따라 변형된다.
어떤 음식이 별 것 아닌데도
그것이 비싸거나 귀하다고 하면 맛있다고 느낀다.
소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아주 못 견딜 것처럼 생각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참을 수 있다.
고속도로나 철도 옆에 사는 사람들이
차나 열차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파도 소리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내가 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낀 것이 확실하다고 집착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것이 괴로움이다.
유식은 이러한 인식의 신뢰성에 깊은 의문을 제기하고 반성을 요청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밖에 있는 실체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의 한정된 경험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보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남산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남산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처음 본 남산은 일단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산이 우리 마음 속에 비치고
그 비친 마음의 그림자를 통해 남산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그림자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꽃을 보는 것과 같다.
거울에 한 송이 꽃이 비추고 있다.
우리는 거울에 보이는 꽃이 객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거울이 바로 우리의 주관적인 마음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도 거울이라는 주관적인 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관과 객관도 우리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객관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아는 것이 바로 유식이다.
조금 충격적인 것 같지만, 잘 반조(返照)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마음의 구조: 유식불교|작성자 임기영 불교자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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