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김성철 교수 유식관련

수선님 2020. 3. 8. 11:43

김성철 교수 유식관련

<문>:
대부분의 유식관련 서적을 요약하면 (아뢰야)식이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고, 상분은 기세간과 신체로 가현되며, 기세간은 공종자의 현행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종자는 타인의 '식'과 나의 '식'이 함께 공동으로 현현하여 작출한 것이며, 내 신체는 나의 '식'의 상분일 것이지만 타인의 신체는 나의 '식'과는 무관한 타인의 '식'의 상분이라고 설명하는 듯합니다.

<답>:
식(識)을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나누는 것은 난타의 학설이라고 합니다.

유식학을 공부할 때 ‘안난진호1234’라고 암기하는데, 안혜는 아뢰야식의 자증분(自證分) 하나(1)만 실재한다(一分說)고 보며, 난타는 아뢰야식이 상분과 견분의 두 가지(2)로 나누어진다(二분설)고 보며, 진나는 상분과 견분과 자증분의 세 가지(3)로 나누어진다(三분설)고 보며, 호법은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가지(4)로 나누어진다(四분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뢰야식을 상분, 견분 등으로 나누는 것은 상분, 견분 등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는 삼라만상을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설명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말씀하신 공종자(共種子: 나와 남들이 함께 지은 업으로 만들어져 아뢰야식에 심어진 씨앗, 즉 열매)와 같은 ‘업의 씨앗’ 또는 ‘과보의 열매’가 우리 마음 속에서 성숙하다가 씨앗 또는 열매가 발아하여 꽃을 피우듯이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種子生現行: 종자가 현행을 발생시킴).


그리고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와 삼라만상에는 나의 신체는 물론이고 물리적 세계인 기세간(器世間)과 남의 신체가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나 업종자가 발아하여 나타난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의 경우 그 성격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있을 때, 똑같은 자동차임에도 남의 자동차는 그 외관이 보이지만, 내 자동차는 내부가 보이듯이, 나에게 비친 나의 신체는 남에게 보이는 나의 신체와 전혀 다릅니다. 동일한 자동차임에도 내부와 외부가 다르듯이, 동일한 나의 신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인 측면(aspect)과 남에게 보인 측면은 다릅니다.

 

<문>:
결국 타인의 '식'이 나의 '식'과 어울려 기세간을 가현하는 것이고, 거기에 나의 '식'의 상분인 내 신체와 타인의 '식'의 상분인 타인의 신체가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답>:
나와 타인들이 부지불식간에 함께 지어 결실한 공업(共業)종자가, 과보로 변하여(異熟) 기세간으로 나타나며,
나 홀로 지었던 별업(別業)종자가 무르익어서 내 아뢰야식의 상분 가운데 하나인 나의 신체로 나타납니다.

공부하고, 수행하고, 삼명육통을 이뤄 하화중생을 해야 하는 이유!

나 혼자 열반은 있을 수 없다! 길이 멀다.


타인의 신체의 ‘내적 모습(자동차 내부에 비교됨)’은 그의 아뢰야식의 상분의 일부이며, ‘외적 모습(자동차 외관에 비교됨)’은 나의 아뢰야식의 상분의 일부입니다.

 

<문>:
원래 타인의 '식'은 나의 '식'과 마찬가지로 유정세간으로서 업력에 의해 윤회하는 존재이므로, 이렇게 보면 타인의 '식'과 나의 '식'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

<답>:
분명한 것은 타인의 아뢰야식과 나의 아뢰야식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 아뢰야식의 흐름을 자상속(自相續)이라고 부르고, 타인의 아뢰야식의 흐름을 타상속(他相續)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심지가 계속 타들어 가면서 불꽃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 순간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일 뿐이듯이,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매 순간순간 생멸하며 이어집니다(相續).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변치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변치 않는 나’일 수 없습니다(제법무아).
‘자상속’과 ‘타상속’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여법(如法)하게 ‘나’와 ‘남’을 부르기 위해 고안된 불교의 특수용어입니다.

 

<문>:
… 공종자의 현행으로서의 기세간 또한 나의 '식'이 없더라도 성립할 것이므로 나의 '식'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답>:
이 구절에서부터 오해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식’이 없으면, 나에게 비친 ‘기세간’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긴 것이 없으면 짧은 것이 없듯이 …. 눈이 없으면 시각대상이 없고, 시각대상이 없으면 눈의 존재가 무의미하듯이 ….
유식교학에서 ‘공종자의 현행으로서의 기세간’이라고 가르치지만, 나에게 비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지은 업종자의 현행으로서의 기세간’일 뿐입니다.


공(共)과 별(別)의 구분은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라 ‘이론’일 뿐입니다.
마치 상분이랄 것도 없고, 견분이랄 것도 없는 아뢰야식을 설명의 편의상 일분, 이분, 삼분, 사분 등 측면으로 구분하듯이 ….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신행하면서 제거해야 할 선입견 가운데 하나가,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들어있듯이, 내가 이 세상 속에 들어와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릇’에서 ‘과일’을 꺼내도 ‘그릇’은 남습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의 경우 ‘나’를 제거하면 ‘세상’ 역시 사라집니다.

‘나’와 ‘세상’은 분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체의 어디까지가 나의 것인지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장기이식수술의 예에서 보듯이 …

세상으로 보려면 모든 것이 세상입니다. 나의 몸도 세상이고 나의 뇌도 세상이고 나의 뱃속도 세상입니다.

나의 몸으로 보려면 모든 것이 나의 몸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사실은 바깥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내 눈의 망막의 모습입니다. 나의 망막의 살, 즉 나의 몸의 모습입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사실은 바깥의 소리가 아니라, 내 귀 속의 고막의 떨림입니다. 이 역시 내 몸의 느낌입니다. 내 사지도 내 몸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정혜쌍수, 지관쌍운)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 등 모든 것이 다 내 몸입니다.

이렇게 나의 몸과 내가 사는 세상은 분할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 생각의 가위가 임의로 자른 것입니다. ‘나의 신체’와 ‘내가 사는 세상’ 등으로 …

따라서 ‘주관’에 해당하는 ‘나의 식(識)’이 사라지면, ‘객관’에 해당하는 ‘세상’ 역시 사라집니다. 내가 죽는 날, 이 세상 사람들과 이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고 나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는 그 날은, 이 세상은 물론이고 온 우주가 폭발하는 날입니다.

있다고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생명의 수만큼의 기세간이 있고
없다고 보면 지금 이 순간에 세간이랄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고, 세상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긴 것이 없으면 짧은 것이 없고,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이 없듯이 ….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나'의 식(識)이 없다면, 공(共)종자로서의 기세간 역시 사라집니다.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아론(獨我論: Solipsism)적 조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철저하게 주관적 관점에서 세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것은 주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뿐입니다.
꿈의 예에서 보듯이 '남'이나 '세계'가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되지 않습니다.
풍경이든 사람이든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나와 만났다가 헤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걸어가든, 앉아있든, 잠을 자든, 기절을 하든 결코 나와 헤어지지 않는 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 나만 언제나 존재합니다.
내가 나를 파악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파악되는 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자동차에 타고 있을 때 나의 자동차는 내부가 보이지만, 남의 자동차는 그 외형만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나뿐이라면, 나랄 것도 없습니다.

나와 남의 구분을 떠나 의식의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의 흐름만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오직 내 식의 흐름일 뿐이라면
그것에 대해 '나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의식이 아닌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와 남의 구분에서 벗어나
나에 침잠
한 후
나조차 사라진 조망으로 들어갈 경우
나와 남을 포함한 세상만사가 '오직 식의 흐름'일 뿐으로 파악되며
그런 '식'조차 연기한 개념임을 알게 될 때,
이 세상만사에 대해 굳이 '식'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다고 알게 되며,
모든 현상을 찰나 생멸하는 '법의 흐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법계(法界)'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 '나와 남', '나와 세상'의 구분에서 완전히 벗어난 '법계'입니다.
이런 법계는 시간적으로는 한 찰나만 존재하는 법들의 흐름일 뿐이며
공간적으로는 한 점의 극미로 이루어진 법들의 흐름일 뿐입니다.
카드섹션이나 매스게임에서 한 점, 한 점의 개인들이 모여 커다란 형상의 움직임을 만들어내지만
실재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일 뿐이듯이
세상은 '실체가 없는 법'의 흐름, 즉 '식으로서의 법의 흐름'일 뿐이며
주관과 객관, 나와 남, 나와 세상 등의 구분은 모두 허구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렇게 모든 것이 허구이기에 허구랄 것도 없습니다.

아비달마교학에서는 '법(法)'들의 흐름으로 세상을 설명합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시간적으로는 한 찰나만 존재하는 법,
공간적으로는 한 점의 극미에 불과한 법들이
한 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세상만사입니다.
매 순간 나의 주의력이 머무는 그런 한 점, 한 찰나의 '법(法)'만 실재합니다.

중관학에서는 그런 법들에 자성이 없다는 점, 즉 '법공(法空)'을 가르쳤으며

유식교학에서는 그런 법에 대해 '식(識)'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불교인식논리학인 인명학에서는 그런 법을 '현량(現量)'이라고 부릅니다.
나에게 파악되는 매 찰나의 현상이라고 이름 붙이긴 하지만,
'인식자'와 '인식대상'과 '인식수단'이 나누어지지 않는 한 점, 한 찰나의 현상, 그것이 바로 '현량으로서의 법'입니다.

그리고 화엄학에서는 그런 한 점의 법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통찰을 가르칩니다.
매 순간 우리의 주의력이 머무는 한 점의 법은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요약한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서 '한 점 크기의 공간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일미진중함시방) 한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한 시간이 모두 들어간다(일념즉시무량겁)'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곳이라고 하더라도 온 우주를 담고 있고 그 어떤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시간을 머금고 있기에
그 어떤 곳이라고 하더라도 '충만한 불국정토'입니다.
화엄경에서 가르치듯이 부처님 털끝만한 공간마다 중중무진의 무한한 불국정토가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화엄경에서는 '단힌 식(識)'이 아니라 '무한히 열린 식(識)'의 흐름으로 세계를 묘사합니다.

아비달마, 중관, 유식, 화엄 등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렇게 한 맛(一味)입니다.

<문>:
유식삼십송에는 세상은 꿈이고, 진여의 상태는 꿈을 깨는 것과 유사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꿈이라는 것은 나의 꿈에 타인이나 자연환경이 나타날 뿐이어서 내가 꿈을 깨고 나면 그 타인이나 자연이 모두 없어져버립니다.
타인의 '식'에 의해 제한된 존재로서의 나의 '식'인 이상 꿈을 깬 후, 즉 진여의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모든 것이 나의 '식'일 뿐이라고 깨달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
‘모든 것이 나의 식일 뿐’이라는 유식불교의 가르침의 목적은 ‘식(識)일원론(一元論)’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과 경(境)의 분할’, 즉 ‘주관과 객관이 별개라는 생각’을 타파하는 데 있습니다. ‘오직 식뿐이며 대상은 없다.’라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가르침이 부담이 될 경우 거꾸로 접근하면 됩니다. ‘유경무식(唯境無識)’, 즉 ‘오직 대상세계만 있을 뿐 식은 없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오직 풍경만 있을 뿐 주관은 없다.’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형상들도 풍경이지만, 지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어제 먹었던 빵의 모습도 풍경입니다. 내 피부를 누르는 촉감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풍경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마치 풍경처럼 바깥에서 일어납니다. 창밖에서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듯이, 내 머리 속에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풍경처럼 일어납니다. 오직 풍경의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유경무식입니다.

그 전까지는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는 줄 알았는데, 엄밀히 보니 주관과 객관 사이에 선이 그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유식무경), 모든 것이 객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유경무식).

<문>:
요컨대, 나의 '식'과 마찬가지로 업력에 의해 유정세간을 형성하는 타인의 식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타인의 신체도, 기세간도 이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니, 나 외부에 객관사물이 존재한다는 범부들의 생각과 결과 면에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답>:
그런데 불교를 공부할 때에는, 세상에 대한 조망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는 생각에서 멈출 경우 매사에 수동적인 ‘유심론자’가 되고 맙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라면,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마음이 아닌 것’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마음이기에 ‘마음 아닌 것’이 없어서 마음이라는 말 역시 무의미해집니다.

이런 경지를 ‘경식구민(境識俱泯)’이라고 부릅니다. 객관대상(경)도 사라졌지만, 아울러 주관인 마음도 사라진 경지입니다. 이 역시 심오하거나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앞에서와 같은 논리적인 생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식이다.‘라는 조망을 통해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무너뜨린 다음에는
“모든 것이 식이라면, 식이랄 것도 없다.”는 경식구민의 조망으로 향상해야 합니다.
그 때 나의 마음과 몸,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매 찰나 생멸하는 법의 흐름’일 뿐이며, 그런 법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空)는 조망이 생기게 됩니다.

진여(眞如)는 오묘하거나 신비한 어떤 경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진여의 범어 원어는 Tathaata인데 영어로 Suchness라고 번역합니다. 우리의 삶은 원래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실재한다고 생각했기에 나에게 무수한 고민을 야기했던 것들이 모두 마음이 만든 허깨비’라는 사실, 즉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사실을 알 경우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물론 앞에서 설명했듯이, 엄밀히 보면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유식의 가르침을 통해서, 경(境)을 식(識)으로 환원시켜 해석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 즉 ‘식(識)과 경(境)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유식의 가르침을 ‘식(識)일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식의 가르침은 ‘실체가 없는 법들의 흐름’으로 세상만사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설일 뿐입니다.

우리는 유식의 가르침을 통해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사고방식도 정화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 갖가지 사물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도 정화해야 합니다.
그 때, 더 이상 ‘인식(認識)의 고통’, ‘인지(認知)의 고통’, 다시 말해 ‘분별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분별의 고통, 인지의 고통이 사라진 것이 ‘불교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반쪽일 뿐입니다. 이와 함께 ‘감성의 정화’가 일어나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라한’이 됩니다. 다시 말해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같은 ‘세속을 향한 갖가지 감성들’이 모두 정화되어야, ‘진정한 마음의 평화(열반)’를 얻게 됩니다.

<문>:
제가 혼자 공부하다보니 유식학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듭니다. 많은 홈페이지를 찾아보았습니다마는 제대로 알려주는 곳도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심한 질문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부디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인간과 세상, 몸과 마음에 대해 깊이 천착(穿鑿)해야만 나올 수 있는 소중한 질문입니다. 답글 쓰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좋은 질문으로 생각되어 길게 답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