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근거와 실현의 원리
▸유식학의 轉依 이론을 중심으로◂*
金 妙 注
Ⅰ. 머리말
Ⅱ. 중생의 현실
1. 八識의 역동적 구조
2. 二執과 二障의 형성
Ⅲ. 깨달음의 근거
1. 불성의 존재
2. 三性의 전환적 구조
3. 무루종자와 二空所顯의 진여
Ⅳ. 깨달음의 실현 과정과 證果
1. 의지처[所依]의 전환
2. 五位의 수행단계
3. 轉依의 증과
4. 轉識得智와 頓悟頓修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불교수행의 궁극 목적은 성불, 즉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의 성취이고 사회적으로는 淨土의 실현이다. 그런데 갖가지 번뇌로 오염된 범부가 현실에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고, 실현의 과정은 어떠하며, 깨달음의 경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모든 중생은 佛性의 존재이므로 수행에 의해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성과 범부의 정신세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깨달음은 覺의 한글어이고, 覺은 菩提(bodhi)의 역어로서 智라고도 한다. 깨달음의 경지가 般若의 無分別智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불은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깨달음〔覺〕을 성불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대승에서는 성불의 경지를 대열반〔眞解脫〕과 대보리로 설명한다. 소승에서 열반의 세계에 안주함을 목적으로 하는 데 대한 비판으로 대승에서는 菩提를 강조한다. 이 논문에서 ‘깨달음〔覺〕’이란 용어는 깨달음의 경지, 즉 깨달음에 의한 지혜와 열반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논문의 목적은 轉識得智, 즉 범부의 識이 佛의 般若의 지혜로 전환되는 원리를 밝힘으로써 깨달음의 근거와 실현의 원리를 구명하는 데 있으며, 논지의 전개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에 역점을 둔다.
첫째, 만법유식의 입장에서 중생의 현실을 정신의 구조와 작용면에서 살펴본다.
둘째, 아집과 법집이 어떤 원리에 의해 형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아집에 의해 번뇌장이 생기고 법집에 의해 소지장이 생겨서, 생사고해에 윤회하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집과 법집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셋째, 轉依에서 依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유식학에서는 전의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말한다. 轉依는 所依를 전환시킨다는 뜻인데, 여기서 所依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의 문제가 있다.
넷째, 깨달음을 성취할 때 그 경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가? 아공에 의해 참다운 해탈〔無住相涅槃〕을, 법공에 의해 대보리〔四智〕를 성취한다고 한다. 이것은 곧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참다운 해탈과 대보리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살펴본다.
다섯째, 유식학에서 말하는 轉識得智는 선종의 頓悟頓修說과 頓悟漸修說에서 어떤 입장인가? 흔히 敎家에서는 돈오점수의 입장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유식학에서도 그러한지를 살펴본다. 실제 수행에 있어서 깨달음의 과정과 證果는 교종이니 선종이니 하는 구별을 떠나서 같아야 한다. 다만 그 설명 방법에 있어서 문자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논문의 연구범위는 인도유식학에 한정되며 轉依 이론을 중심으로 한다. 연구의 주된 자료는 ꡔ해심밀경ꡕ․ꡔ유가사지론ꡕ․ꡔ성유식론ꡕ․ꡔ섭대승론ꡕ 등이다.
Ⅱ. 중생의 현실
1. 팔식의 역동적 구조
유식학에서 깨달음이란 轉識得智, 즉 수행에 의해 중생의 無明業識을 반야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식 등 오식이 成所作智로, 의식이 妙觀察智로, 말나식이 平等性智로, 아뢰야식이 大圓鏡智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소작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식의 작용원리를 알아야 하고, 묘관찰지를 알려면 의식을, 평등성지는 말나식을, 대원경지는 아뢰야식의 작용원리를 알아야 한다.
아뢰야식으로부터 칠식이 전변 생기되므로, 안식 등 오식과 의식․말나식을 轉識이라 하고 아뢰야식을 근본식이라 한다.
1) 轉識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통틀어 五識 또는 前五識으로 부르는데, 그것은 오식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안식은 눈, 이식은 귀 등 감각기관〔根〕에 의지해서 외부대상을 감각적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둘째, 감각기관에 의지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영역만을 고수한다. 예를 들면 안식은 빛깔과 형체만을 인식하지 소리를 인식하는 일은 없다.1) 셋째, 현재 각 감각기관에 대면하고 있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어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계성을 지닌다. 넷째, 現量知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요별할 뿐 여기에 사량분별이 가해지지 않는다.
의식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오식이 각자 자기 영역을 고수하는데도 실제로는 종합적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제6 의식이 오식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의식은 기억․회상․추리․상상 등의 작용을 한다.
범부가 본능과도 같은 집요한 자기 집착심을 갖게 되는 근본원리는 무엇인가?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의지처로 하고 동시에 그것을 인식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라고2) 설명한다.
2) 근본식
근본식을 아뢰야식(ālaya-vijñāna)․異熟識(vipāka-v.)․일체종자식(sarvabījaka-v.)․阿陀那識(ādāna-v.) 등으로 부르는데, 이 중에서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이다. ālaya는 ‘저장’ ‘집착’ ‘無沒’의 뜻이다. 이 식에 종자를 ‘저장’하고, 말나식에 의해 상주불변의 자아로 착각 ‘집착’되며, 아득한 옛적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이 식의 흐름이 결코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윤회의 주체이다. 윤회 과정에서 이 식이 모태에 들어가 최초의 생명체〔羯羅藍〕가 형성되고 신체의 각 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이 식에 저장되어 있던 等流習氣로부터 점차 오식․의식․말나식이 전변 생기되어 팔식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셋째, 종자와 신체의 작용을 유지〔執受〕하는 근원적인 생명체이다. 아뢰야식에 의해서 신체가 헐지 않고 그 기능이 유지된다. 감각기관․신경계․순환계 등의 작용, 신진대사 등 갖가지 생리적인 기능들이 아뢰야식에 의해서 유지된다. 정신과 신체는 상호 작용하며 이것을 安危同一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에서 주도권은 정신에 있다.
넷째, 종자와 신체를 생리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며, 또한 외부적으로 자연계〔器世間〕도 대상으로 인식작용을 한다. 꿈에 의해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아뢰야식의 이 기능에 의해서이다.
3) 심리작용〔心所〕
우리의 정신작용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식별작용 이외에 참으로 갖가지 심리작용들이 교차됨을 알 수 있다. 식별작용의 주체를 心王(8식)이라 하고, 심왕에 수반되는 심리작용을 心所라고 한다. 유식학에서는 遍行心所(5가지)․別境心所(5)․善心所(11)․번뇌심소(6)․隨煩惱心所(20)․不定心所(4)의 51가지 심소를 인정한다.
심왕과 심소의 작용의 차이는 어떠한가?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심왕은 대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취하고, 심소가 구체적인 모습들까지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상 인식작용이 가능해진다.4) 대상에 대하여 苦·․樂․捨 등의 감정을 일으키고, 대상을 선택하며, 선․악 등의 업을 짓게 한다. 팔식과 51심소는 體를 달리하며 相應하여 俱起한다.
4) 種子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佛性의 존재이며, 현실적으로 八識․心所 등 力動的인 정신구조를 갖춘다. 그런데 개인은 신체적 조건의 차이는 물론이고, 인지능력․정서․성격(character) 등 정신 기능면에서 個人差를 보인다. 그러한 개인차는 어떻게 생겨나며, 무엇이 정신현상의 動力因 역할을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種子說로써 해명한다. 개인은 일상생활에서 여러 외부 상황에 처하면서 지각하고 판단․사유하며, 갖가지 감정이 교차되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善․惡․無記의 業을 짓는다. 이러한 정신적 신체적 행위의 결과가 아뢰야식 속에 習氣(vāsanā)의 형태로 移植 저장된다. 이것을 種子(bīja)라고 하며, 여러 유식논서에 종자의 속성과 종류 및 기능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되어 있다.5) 종자는 단순한 생리학적 저장물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한 정신적 힘, 에너지’(śakti-viśeṣa, 功能差別)로서,6) 정신현상의 주체와 작용이 발생 존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종자가 정신현상의 동력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 작용원리에 의해서인가? 유식학에서는 熏習과 現行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훈습은 7식이 아뢰야식에 새로운 종자를 이식시키고, 본래 있는 종자를 生長케 하는 작용이다. 현행은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서 순간순간 생멸하면서 성숙되어 생연(生緣)을 만나 생기한다. 이 과정은 종자 자체의 힘만으로는 안 되며, 7식과 아뢰야식․심리작용〔心所〕․감각기관․환경요인〔境〕의 유기적인 작용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7) 이와 같이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種子生現行……의 유기적인 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인차가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정신세계는 팔식과 그에 상응하여 수반되는 51가지 심소로 이루어진다. 팔식은 역동적으로 작용하며, 개별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함께 일어난다. 오식은 대면하는 대상에 따라 하나 또는 여러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데 반하여, 의식․말나식․아뢰야식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 그리하여 팔식은 종자를 매개로 상호 인과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2. 二執과 二障의 형성
아집에 의해 번뇌장이, 법집에 의해 소지장이 형성되고, 번뇌장에 의해 생사고해에서 윤회하며, 소지장에 의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면 二執과 二障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1) 두 가지 집착
⑴ 我執
아집이란 자아〔實我〕에 대한 집착이며, 그것은 모든 유정이 각각 常一主宰性, 즉 상주하는〔常〕유일한 것〔一〕이면서 주관자〔主〕이고 자재함〔宰〕의 속성을 띤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것은 유정이 생사의 고해에 유전하는 근본원인이 된다.
아집에는 선천적인 것〔俱生起〕과 후천적인 것〔分別起〕의 두 종류가 있다. 먼저 선천적인 아집은 제7 말나식과 제6 의식에 의해 일어나며,8)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되게 훈습한 내부원인(종자)의 세력 때문이다. 말나식에 의해서 일어나는 구생기아집의 원리는 어떠한가? 그것은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또한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9) 아뢰야식의 견분을 인식대상으로 하면서 實我의 영상을 일으킨다. 아뢰야식은 아득한 옛적부터 성불 직전까지는 식의 흐름이 끊임없이 상속되기 때문에 ‘常․一’한 것으로 착각된다. 또한 말나식이 그것을 所依로 하므로 ‘主․宰’한 것으로 오인된다. 그리하여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實我의 집착을 일으킨다.
자아의 모습으로 似現된 상분과 견분 위에 허망되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는다. 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實我로 집착하며, 근본적으로 이러한 我癡에 의한 아집을 없애지 않고는 참다운 해탈을 증득할 수 없다. 이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4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치는 무명이다. 자아의 참모습에 어두워 무아의 이치를 모른다.10)
이처럼 無我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로부터 아견․아만․아애의 근본번뇌가 야기되고, 나아가 갖가지 번뇌의 심리작용〔心所〕이 항상 함께 일어난다. 이처럼 말나식에 의한 구생기아집은, 이 식이 평등성지로 전환될 때까지는 잠시도 중단되지 않는다.
제6 의식에 의한 구생기아집은, 식이 전변된 오취온의 相을 반연하여 實我의 영상을 그려서 집착함으로써 생긴다. 의식에 의한 구생기아집은 五位無心(깊은 숙면․기절함․無想天․무상정․멸진정)의 경우에는 잠시 중단된다.
다음으로 후천적인 분별기아집은 제6 의식의 허망분별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치에 맞지 않는 학설이나 견해에 의해 아집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옛날 인도에서는 오온인 자아〔卽蘊我〕․ 오온이 아닌 자아〔離蘊我〕․ 오온도 아니고 오온이 아닌 것도 아닌 자아〔非卽非離蘊〕의 집착이 있었다.11)
⑵ 法執
법집에도 구생기와 분별기의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구생기법집은 제7식과 제6식에 의해 일어난다.12)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인식대상으로 해서 自心의 모습을 일으켜 實法이라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말나식이 평등성지로 전환될 때까지 잠시도 중단되지 않는다. 또한 의식이 식이 전변된 蘊․處․界의 모습을 인식대상으로 해서 自心의 모습을 일으켜 실법이라 집착한다. 이것은 오위무심에서는 잠시 중단된다.
다음으로 분별기법집은 제6 의식에 의해 일어난다. 잘못된 敎義와 잘못된 분별에서 말하는 法들을13) 반연해서 自心의 모습을 일으키고 분별 계탁하여 實法으로 집착한다.
⑶ 二執의 형성 원인
그러면 아집과 법집이 형성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범부의 실제 인식상황 속에서 식이 객관과 주관으로 분화되어 인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유식학은 유형상인식론(sākārajñānavāda)의 입장으로서, 외계 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말한다.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며, 이때 객관으로서의 식, 즉 識上의 영상을 상분이라 하며, 所量․似境相․有相識이라고도 한다.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을 見分․能量․能取相․有見識이라고도 한다.14) 이분화되기 이전의 식 자체를 自證分이라 하며,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識體, 즉 자체분이 변현하여 견분과 상분으로 되며, 이 二分을 식이 전변된 것〔識所變〕이라 한다.
바로 이 二分으로 인한 似我와 似法에 대하여 의식과 말나식이 實我와 實法으로 집착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이 일어난다. 이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모습들은 식이 전변된 것에 의지해서 가정적으로 시설된다.…… 상분과 견분은 모두 자증분에 의지해서 일어나며, 이 二分에 의거해서 자아와 법을 시설한다.…… 혹은 다시 내부의 식(견분)이 전변하여 외부의 대상(상분)으로 사현한다. 자아와 법으로 분별하면서 훈습하는 세력 때문에, 모든 식이 일어날 때 변하여 자아와 법으로 현현한다. 이 자아와 법의 모습은 비록 내부의 식에 있지만 분별에 의해서 외부 대상으로 현현한다. 모든 유정의 무리는 아득한 옛적부터 이것(似我似法의 相)을 반연하여 집착해서 實我實法으로 삼는다.15)
이처럼 상분과 견분에 의지해서 자아와 법을 가립한다. 식이 전변된 것은 似我와 似法으로서 허망된 것인데도,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되게 훈습된 내부 원인(종자)의 세력에 의하여 實我實法으로 집착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이 형성된다.
2. 두 가지 장애
1) 煩惱障
번뇌장은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그리고 의식이 오취온을 대상으로 實我로 집착하는 번뇌이다. 이에 128가지 근본번뇌와 20가지 수번뇌가 속한다. 이것은 유정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괴롭혀서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에 유전케 하므로 번뇌장이라 이름한다. 이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9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번뇌장이란 변계소집인 實我로 집착하는 有身見〔薩迦耶見〕을 첫째로 하는 128가지 근본번뇌 및 그것의 등류인 모든 수번뇌를 말한다. 이것이 모든 유정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괴롭혀서 능히 열반을 장애하는 것을 번뇌장이라 이름한다.16)
이처럼 번뇌장은 변계소집의 實我를 집착하는 有身見을 비롯해서 128가지 근본번뇌와17) 그에 等流하는 20가지 수번뇌를 가리킨다. 이 번뇌에도 역시 구생기와 분별기의 번뇌가 있다.
2) 所知障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인식대상〔所知〕의 참다운 모습〔法空〕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소지장이라 이름한다. 또한 참다운 지혜가 발현하는 것을 장애하는 점에서 智障․菩提障이라고도 한다. 소지장에 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9권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소지장이란 변계소집인 實法으로 집착하는 아견을 첫째로 하는 악견․의심․무명․탐애․성냄․거만 등이다. 인식의 대상(유위법과 무위법의 대상)과 전도됨이 없는 본성(진여)을 덮어서 능히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 이름한다.18)
소지장의 數도 번뇌장과 같다.19) 그것은 번뇌장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소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은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번뇌에 아집과 법집의 두 면이 있기 때문에 구분한다. 법집과 소지장은 법의 體에, 아집과 번뇌장은 법의 用에 미혹해서 일어난다.
번뇌장은 두드러진〔麤〕것으로서 많은 품류가 있어 알기 쉽기 때문에 二乘도 역시 단멸한다. 다만 이것은 不善이고 유부무기성이므로 앞에서 숫자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소지장은 미세한 것으로서 품류가 많지 않아 매우 알기 어렵기 때문에 오직 보살만이 단멸한다.
그런데 ꡔ성유식론ꡕ 제9권에서 소지장이 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이 소지장은 반드시 이숙식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 그것(이숙식)은 인식작용이 미세 열등하기 때문이고, 무명․慧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보살의 法空智品이 (제8식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20)
소지장은 이숙식과 반드시 함께하지는 않는다. 제8식은 인식작용이 미세하고 열등한데, 이 법집은 그것에 비하면 두드러지고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8식은 무명과 慧의 심소에는 상응하지 않는데, 법집은 무명과 혜에 반드시 함께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의 법공지품은 제8식과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된다.
Ⅲ. 깨달음의 근거
1. 불성의 존재
범부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본성이 佛性의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종교․철학 등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했는데, 크게 性善說․性惡說․性中說21)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많은 佛典에서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성불의 가능성이 있다고 천명한다. 佛性(Buddha-dhātu)은 ‘부처님의 성품’(佛의 本質),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佛의 因)이라는 의미이며, 眞如(tathatā)․如來藏(tathāgata-garbha)․大圓境智․一切種智(sarva-ākārajñāna)․自性淸淸心․法性 등 여러 가지 異名으로 불린다. 현실적으로 번뇌에 찌들리고 선업보다 악업을 더 짓는 범부들도--심지어 一闡提까지도22)-- 본성은 불성이므로, 궁극적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취지를 世親은 ꡔ불성론ꡕ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불성이란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체득함으로써 나타나는 진여이다.23)
모든 중생은 본래 청정한 불성을 갖추고 있다. 만약 (一闡提 등이) 영원히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불성은 반드시 本有이며, 有와 無의 상대성을 떠난 것이다.24)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참회하고 수행하면 궁극적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三性의 전환적 구조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로는 삼성의 전환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식교학에서 三性說은 현상계와 본체계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양식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삼성은 依他起性․遍計所執性․圓成實性의 세 가지를 말하는데, 그 개념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의타기성(paratantra-svabhāva)25)은 依他起, 즉 因緣所生法으로서,26) 유식학적으로 말하면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여덟 가지 ‘識’(vijñāna)이다.27) 식은 구체적인 인식상황에서 主〔견분〕와 客〔상분〕으로 나뉘어 인식작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분리 때문에 범부들은 實在性이 없는 대상을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므로, 식을 ‘虛妄分別’이라고도 한다. 의타기성의 존재성 부정은 三無自性에서 生無自性(utpatti-niḥsvabhāva)28)이다. 현재의 심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업의 습기와 현재의 여러 가지 緣의 세력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遍計所執性(parikalpita-svabhāva)은 假想된 존재 형태,29) 즉 사유에 의해 마음 밖에 추상화된 존재물이다. 여기서 遍計는 ‘周遍計度’의 의미로서, 이와 같이 두루 분별하여 착각하며 집착하는 것을 주체 면에서 能遍計, 대상 면에서 所遍計로 나눈다. 능변계의 작용은 우선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實我로 착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근본무명으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의식이 외부 대상을 두루 분별하여 선․악․무기의 삼성으로 인식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소변계는 식의 이와 같은 계탁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된 대상, 곧 似現된 자아와 사현된 법〔似我似法〕이다. 우리는 자아나 외부 대상이 실재성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집착하지만, 사실은 허망분별에 의해 가상(假想)된 변계소집성으로서 허공의 꽃처럼 실재성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식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개념이나 언어로서 파악 집착된다.30) 이러한 변계소집자성에는 自相이 없으므로 相無自性(lakṣaṇa-niḥsvabhāva)이다. 즉 언어에 의해 파악되는 경험세계의 사물은 비실재임을 말한다. 여기서 相은 사물의 형상 내지 특질이라는 뜻이다. 사물의 갖가지 표상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것을 언어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지 자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언어로써 표현되는 사물인 변계소집성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相無自性이다.
원성실성(pariniṣpanna-svabhāva)은 궁극적인 진실, 곧 완성된 진여이다. 그것은 존재적 측면에서 진여이고, 인식적으로는 無分別智이다.31) 모든 존재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갖는 勝義(paramārtha)이다.32) 따라서 승의무자성(paramārtha-niḥsvabhāva), 즉 ‘승의이고 자성 없는 성품이 나타난 바〔無性所顯〕의 진여’이다.33)
그런데 변계소집성에 대해서 유식논사들 사이에 팔식과 능변계의 有無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安慧(Sthiramati)는 팔식이 근본적으로 虛妄分別性이므로 팔식이 모두 능변계의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오식과 아뢰야식이 비록 두루 計度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有相의 망상, 즉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미세한 분열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難陀(Nanda)와 護法(Dharmapāla)은 능변계의 작용이 오직 의식과 말나식에만 있고, 오식과 아뢰야식에는 없다고34) 하였다. 소변계는 식의 이와 같은 계탁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는 대상, 즉 ‘似我似法’이다. 우리는 자아나 외부 대상이 실재성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지만, 사실은 허망분별〔識〕에 의해 가상된 변계소집성이다. 참으로 경험세계의 사물은 空華처럼 실재성이 없는데도, 우리의 識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개념이나 언어로써 파악되고 집착된다.35)
중생의 세계로부터 覺者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삼성에 내포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지각하고 판단하며 사유하는 모든 인식작용은 의타기성의 세계이다. 그 인식작용에 결부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외계에 실재하는 사물인 듯이 집착되어서 나타나는 중생의 顚倒된 생활이 변계소집성의 세계이며, 집착을 떠나 物自體를 如實히 직관하는 覺者의 생활이 원성실성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세계는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중생과 佛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동일한 세계가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 동일한 세계라는 것은,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緣起性으로서의 순수한 의타기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이다. 그 의타기의 세계가 일단 범부의 눈에 들어오면, 의타기는 변계소집의 허망 분별된 세계로 이끄는 動力因이 되며, 동시에 현상세계 그 자체(遍計所執의 세계)로 전환된다. 그러나 覺者의 現前에서는 변계소집된 세계가 脫却되어 순수한 의타기로서의 원성실의 세계로 전환된다. 이와 같은 양상이 ꡔ섭대승론ꡕ 중권에서 변계소집성은 의타기성의 잡염분으로,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청정분으로 표현되어 있다.36) 이에 관하여 世親은 ꡔ유식삼십송ꡕ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의타기성이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성이다.37)
변계소집자성을 제거할 때, 곧 오염된 의타기자성이 청정하게 될 때 그것이 그대로 원성실자성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삼성은 體를 달리해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타기성〔識〕과 원성실성〔眞如〕은 非一非異의 관계이다.38) 이것은 곧 번뇌 집착이 있는 우리들의 심식이 진여․無分別智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준다.
유식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심성에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그리고 원성실성이 갖추어져 있다. 범부들은 현실적으로 번뇌에 찌들리고 집착하면서 선업보다 악업을 더 많이 짓는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 본성에 대해 性惡說이 제시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나 유식학에서 삼성의 전환논리로 비추어 보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3. 무루종자와 二空所顯의 진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세 번째 근거로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무루종자와 이공소현의 진여를 들 수 있다. 유식학에서는 종자의 종류를 상세하게 분석 규명한다. 이 문제는 해탈을 향한 수행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종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가, 아니면 훈습에 의해 비로소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또한 本有無漏種子가 본래부터 존재하는가, 아니면 정법을 들음으로 해서 새롭게 형성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본유무루종자는 다시 말하면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깨달음의 가능력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식논사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데, 護法(Dharmapāla)의 本有新熏竝有說이 정설로 인정된다. 종자는 본성에 원래부터 갖추어진 것도 있고, 새롭게 훈습력에 의해 저장되고 성장되기도 한다는 이론이다. 본유이므로 유위무루종자의 존재가 가능하게 되고, 신훈이므로 붓다의 정법〔法界等流法〕을 들음으로써 무루의 聞薰習種子가 생겨나서39) 아뢰야식 안에 깨달음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이를 因으로 해서 전의가 가능해진다.
전의에 의해 八識이 四智(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로 전환된다. 네 가지 지혜의 종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가〔本有〕, 비로소 일어나는가〔始起〕? 여기서도 종자의 本有新熏合生說의 입장이 그대로 고수된다. 무루지의 종자가 본래부터 있긴 하지만 반드시 훈발함으로써 현행하게 된다.40)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본유와 신훈이 증장함에 의해서이고,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는 오직 본유생뿐이다. 왜냐하면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초지 이상에서 점차 나누어 증득되기 때문에, 그 나누어 얻어지는 무루지가 현행하여 종자를 훈습하고, 이 신훈종자가 본유종자와 화합하여 생겨난다.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는 오직 佛果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새롭게 훈습되는 종자가 없고 오직 본유뿐이다.
다음으로 二空所顯의 진여, 즉 아공관과 법공관에 의해 二障이 소멸되어 본래 갈무리되어 있는 진여가 현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집은 常一主宰하는 자아〔我, 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고, 법집은 외계 사물 또는 존재의 구성요소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아집에 의해 번뇌장이 생기고 법집에 의해 소지장이 생긴다. 이 두 장애로 인해 유정은 생사윤회를 되풀이한다. 이 두 장애는 각각 아공과 법공의 도리를 깨침으로써 소멸된다. 이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와 법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가 함께 일어난다. 두 가지 공을 증득하면 그 장애도 따라서 끊어진다. 장애를 끊는 것은 두 가지 뛰어난 증과(보리․열반)를 얻기 위해서이다. 윤회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을 끊음으로써 참다운 해탈을 증득한다. 지혜를 장애하는 소지장을 끊음으로써 큰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41)
자아(ātman)는 常一主宰性을 지니는 인격적 실체를 의미한다. 세간과 聖典에서 유정․命者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사실 찰나마다 생멸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識의 흐름으로서 존속적인 실체가 없다. 법(dharma)은 객체적 존재로서 蘊․處․界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사실상 식의 표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체가 없다.
아공은 人無我․生空이라고도 하며, 유정의 心身에 상일주재하는 인격적 실체〔我〕가 존재하지 않는 이치를 깨쳐서 아집이 소멸된 경지이다. 법공은 법무아라고도 하며, 외계 사물이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도리를 깨쳐서 법집이 소멸된 경지를 말한다. 아공의 도리를 깨쳐서 번뇌장을 끊으면 참다운 해탈, 즉 열반을 증득한다. 법공의 도리를 깨쳐서 소지장을 끊으면 곧 큰 깨달음〔大菩提〕을 성취해서 붓다가 된다.
二執은 二空觀을 닦음으로써 소멸된다. 우선 아집의 소멸은 아공관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분별기아집은 견도〔初地의 入心〕에 일체법의 아공진여를 관해서 능히 없앤다. 구생기아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修道에서 뛰어난 아공관을 반복적으로 닦아서 비로소 없앨 수 있다.42)
여기서 유의할 것은 구생기아집의 소멸은, 아공관뿐만 아니라 법공무루관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집과 번뇌장은 법의 用에 미혹하기 때문이고, 법집과 소지장은 법의 體에 미혹해서 일어난다. 결국 아집은 법집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법공관으로써 비로소 구생기아집을 없애게 된다.
법집의 소멸은 法空觀에 의해 이루어진다. 분별기의 법집은 그 行相이 두드러지기〔麤〕때문에 初地〔見道〕에 들어갔을 때 일체법의 법공진여를 관해서 능히 없앨 수 있다. 구생기의 법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십지에서 뛰어난 법공관을 반복 修習해서 비로소 없앨 수 있다.
유식의 참다운 성품이란 곧 진여와 무분별지혜이다. 이것은 아공과 법공의 이치를 체득하여 번뇌장과 소지장을 소멸하고 열반과 보리를 증득한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轉依로써 轉識得智를 이루어 여덟 가지 식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된 상태이다.
Ⅳ. 깨달음의 실현 과정과 證果
1. 의지처〔所依〕의 전환
집착과 갈등 속에서 번민하고 결함이 많은 범부들이 인격의 원만성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이며, 그것은 覺으로 성취된 진여 無分別智의 경지이다. 유식학에서는 覺을 성취하는 원리를 轉識得智, 즉 현상계의 허망된 識을 진여의 무분별지혜로 전환시키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전식득지는 轉依로써 이루어진다.
전의는 자기 존재의 基體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에서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질적으로 변혁시키는 과정, 또는 그 과정의 결과로 증득된 열반과 보리를 가리킨다.43) 轉依에 관한 내용은 ꡔ解深密經ꡕ 제3․5권, ꡔ瑜伽師地論ꡕ 제2․26․28․51․52권, ꡔ攝大乘論ꡕ 하권, ꡔ唯識三十論頌ꡕ, ꡔ成唯識論ꡕ 제9권 등 유식경론의 여러 곳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轉依(āśraya-parāvṛtti)는 ‘의지처〔所依〕를 전환시켜서 얻어진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전환과 依의 개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전환은 구체적으로 轉捨轉得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轉依에서 ‘轉’은 轉捨轉得, 즉 번뇌장․소지장의 종자를 轉捨하고, 菩提와 열반을 轉得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의지처(āśraya)란 어떤 사물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基體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지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전의의 개념은 부파불교에서도 사용되었다.44) 부파불교에서 所依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心身․오온을 가리켰다.
ꡔ유가사지론ꡕ의 「섭결택분」에서 소의는 아뢰야식을 가리킨다. 아뢰야식은 모든 잡염법의 근본이라는 입장에서 전의는 아뢰야식을 단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45) ꡔ유가사지론ꡕ 제28권에서 말하기를 “소의의 滅과 소의의 轉이란 무엇인가? 유가작의(瑜伽作意)를 부지런히 닦아 익힘으로써 모든 유루종자〔麤重〕가 함께 작용하는 所依〔아뢰야식〕가 점차 멸함을 말한다”46)고 한다.
ꡔ대승아비달마집론ꡕ에서는 전의를 心轉依․道轉依․麤重轉依로 구분하여 소의를 心․道․유루종자〔麤重〕로 나누어 그 변화를 고찰한다. 전의는 객관적으로는 진여가 現成하고 주관적으로는 마음이 진여로 변모하는 것이다.
ꡔ대승장엄경론송ꡕ에서는 소의를 아뢰야식에만 한정짓지 않고 팔식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널리 외부 대상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은 전의에 의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외적인 사물의 변화까지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전의는 자기의 마음과 신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까지도 완전히 청정하게 한다. 전의는 곧 ‘일체의 淨化’ ‘전 우주의 청정화’라고 할 수 있다.47)
전의에서 ‘依’는 轉捨轉得의 所依, 즉 의타기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9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십지 중의 무분별지혜)으로써 능히 저 두 가지 麤重을 버림으로써 문득 광대한 轉依를 증득할 수 있다. 依는 의지처〔所依〕로서 곧 의타기성을 말한다. 잡염법과 청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잡염법은 허망된 변계소집성을 말한다. 청정법은 진실된 원성실성을 말한다. 轉은 二分을 전환해서 버리고〔轉捨〕전환해서 얻는 것〔轉得〕을 말한다. 무분별지혜를 거듭 닦아 익혀서 근본식 중의 두 가지 장애의 추중을 끊음으로써, 능히 의타기성 위의 변계소집성을 전환해서 버리고 의타기성 위의 원성실성을 전환해서 증득한다. 번뇌장을 전환함으로써 대열반을 얻고 소지장을 전환해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증득한다.48)
즉 전의는 의타기성인 팔식을 변혁시켜서, 번뇌장과 보리장의 종자를 소멸시키고 보리와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번뇌에 오염된 팔식이 네 가지 지혜, 즉 아뢰야식은 大圓境智, 말나식은 평등성지, 의식은 묘관찰지, 오식은 성소작지로 전환된다.49)
십지의 수행 단계에서 무분별지혜를 닦고, 십바라밀이라는 뛰어난 행을 실천함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의 추중을 끊어야 한다. 무분별지혜는 대립적 개념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기와 우주의 참모습〔無我〕을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 지혜이다. 형상(nimitta)이 아닌 진여(tathatā)를 인식대상으로 하는 지혜이다. 십지의 각 단계에서 이러한 무분별지혜를 반복적으로 일으켜 진실을 관조함으로써 유루종자를 소멸시킨다. 이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9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두 가지 전의를 증득함인가? 십지 중에서 열 가지 뛰어난 수행〔十勝行〕을 닦고 열 가지 무거운 장애를 끊어서 열 가지 진여를 증득한다. 이것에 의거해서 두 가지 전의를 증득한다.50)
여기서 열 가지 뛰어난 수행이란 곧 열 가지 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방편․서원․힘․지혜의 바라밀)을 가리킨다. 십바라밀을 십지에서 실제로 모두 수행하긴 하지만 양상의 증성함에 따라 각 地마다 하나의 바라밀을 닦는 것으로 말한다고51) 밝힌다.
십지에서 각각 무거운 장애〔十重障〕, 각각 두 가지 어리석음과 그것의 추중〔二十二愚〕을 끊고 열 가지 진여를 증득한다고52) 한다. 제1 환희지에서는 보시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중생성품의 장애를 끊고 변행의 진여를 증득한다. 제2 離垢地에서는 지계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삿된 행의 장애를 끊고 가장 뛰어난 진여를 증득한다. 제3 發光地에서는 인욕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우둔함의 장애를 끊고, 뛰어나게 흘러나오는 진여를 증득한다. 제4 焰慧地에서는 정진바라밀을 행함으로써 미세한 번뇌가 현행하는 장애를 끊고, 섭수됨이 없는 진여를 증득한다. 제5 極難勝地에서는 선정바라밀을 닦음으로써 하위의 교법에서 반열반하고자 하는 장애를 끊고 종류의 차별이 없는 진여를 증득한다. 제6 現前地에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구체적인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끊고 잡염과 청정이 없는 진여를 증득한다. 제7 遠行地에서는 방편바라밀에 의해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끊고 법의 차이가 없는 진여를 증득한다. 제8 不動地에서는 서원바라밀에 의해 형상이 없는 관법 속에서 가행을 짓게 하는 장애를 끊고 증감이 없는 진여를 증득함으로써, 형상을 나타내고 국토를 변현하는 데 모두 자재하게 된다. 제9 善慧地에서는 힘바라밀〔力波羅密〕에 의해 남을 이롭게 하려는 가운데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장애를 끊는다. 지혜의 자재함이 의지처로 하는 진여를 증득함으로써 걸림 없는 지해에 대해서 자재함을 얻는다. 제10 法雲地에서는 지혜바라밀〔智波羅密〕에 의해 모든 법 속에서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장애를 끊는다. 큰 신통의 어리석음, 미세하고 비밀한 것을 깨달아 들어가는 어리석음과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 업의 자재 등이 의지처로 하는 진여를 증득함으로써, 널리 모든 신통스러운 작업과 摠持와 여러 선정에 대해 모두 자재하게 된다.
2. 五位의 수행단계
① 資糧位 : 자량위는 길고 긴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될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이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출발에서 善友․作意․資糧․信解가 중시된다. 여기서 자량이란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육바라밀을 닦는 과정이다. 十住․十行․十廻向 등 삼십위의 단계이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는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번뇌는 정화되지 않으며, 能取와 所取가 남아 있다.
② 加行位 : 가행위는 수행심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다. 네 가지 선근(난위․정위․인위․세제일위)을 닦는다. 煖位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관찰하고(下品의 尋思觀), 頂位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관찰한다(上品의 尋思觀). 忍位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인가하고, 인식주체도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하고(下品의 如實智觀), 世第一位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공함을 雙으로 인가한다.
집착심과 차별심을 발생하는 능취와 소취의 번뇌가 없어진다. 후천적인 번뇌만을 정화한다.
③ 通達位 : 통달위는 見道位라고도 하며, 이 지위에 오르면 진여성을 관찰하게 된다. 十地 중에서 初地〔환희지〕의 入心의 수행위이다.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비로소 진여의 一分을 見照한다. 분별심이 없어지지만, 아직 반연하는 작용이 남아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의 一分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견도의 지혜에 正體智와 後得智가 있다. 정체지, 즉 근본무분별지는 무차별을 관조하는 참다운 지혜〔實智〕이고, 후득지는 차별을 관조하는 權智이다. 참다운 지혜가 먼저 진여를 관조하고, 권지가 이에 일어난다. 참다운 근본무루지를 眞見道라 하고, 권지를 相見道라고 한다. 진견도에서 무분별의 정체지가 아공과 법공에서 나타난 진여의 도리를 인식대상으로 하여, 갖가지 희론의 모습을 전혀 취하지 않고 유식의 참다운 勝義의 성품에 계합한다. 그리하여 인식대상인 진여와 인식주체인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해서 모두 所取와 能取의 모습을 떠난다. 비록 진여를 인식대상으로 한다 하더라도 상분을 띠고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체상을 띠고서 반연한다. 진여의 體를 떠나지 않으므로 인식대상의 모습이 없고, 인식주체인 견분도 또한 분별이 없다. 진여와 무분별지가 완전히 계합하여 평등하다.
진견도 이후에 분별지혜로써 唯識相을 반연한다. 여기서는 상분과 견분이 있기 때문에, 진견도의 무분별지가 직접 唯識性을 반연하는 것과는 다르다. 상견도에서는 二空眞如를 반연하는 비안립제의 觀과 사성제를 반연하는 안립제의 관의 두 가지가 있다.
④ 修習位 : 수습위는 修道位라고도 하며, 초지의 住心부터 제10지 끝까지의 지위로서 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힌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정화해 나가는 지위이다. 多聞薰習과 聞慧․思慧․修慧의 三慧에 의해,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과 법공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정화되면서 그동안 장애를 받아 발휘되지 못했던 지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초지부터 제10지에 이르기까지의 수행인데, 번뇌장과 소지장이 초지부터 점차 정화되기 시작하여,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소지장을 정화함으로서 법집이 단절된다.
⑤ 究竟位 : 구경위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의 지위에 오른 果位이다. 대보리(네 가지 지혜)와 대열반(무주상열반)을 증득한다.
3. 轉依의 증과
1) 대열반․청정법계
대열반은 眞解脫이라고도 한다. 이에 本來自性淸淨涅槃․有餘依涅槃․無餘依涅槃․無住處涅槃을 든다.55)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일체법의 實相인 진여의 理를 말한다. 본래자성청정열반에 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10권에서 설명하기를, 비록 객진번뇌에 오염되긴 했지만 본성이 청정하고, 한량없는 미묘한 공덕을 갖추고,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湛然하기가 허공과 같고, 모든 유정에게 평등히 공통적으로 있으며, 모든 법과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참다운 성자만이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득한다. 그 성품이 본래부터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유여의열반은 진여가 번뇌장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미세한 괴로움의 의지처〔依身〕를 아직 멸하지는 않았지만, 장애를 영원히 고요하게 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依는 의지처인 신체〔依身〕를 말한다. 고통세계의 원인인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 과거의 업보로 받은 異熟苦果의 신체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대승에서는 괴로움의 과보의 주체인 제8식을 나머지 의지처〔餘依〕라고 한다. 이미 열반을 증득하긴 했지만, 아직 이숙의 의지처인 유루의 제8식을 멸하지 않았으므로 유여의열반이라 이름한다. 아라한의 最後身인 灰身滅智의 기간이다.
무여의열반은 진여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번뇌를 이미 모두 없애고 餘依도 역시 멸하여 많은 괴로움을 영원히 고요하게 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무주처열반은 진여가 소지장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大悲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하더라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모든 유정에게는 본래자성청정열반만이 있고, 二乘의 無學에게는 자성열반․유여의열반․무여의열반이 있으며, 오직 붓다만이 네 가지를 갖춘다.
2) 대보리․네 가지 지혜
팔식은 현상일 뿐 그 본성은 결코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이며, 전의에 의해 번뇌로 오염된 識이 청정하고 분별이 없는 지혜로 전환된다.
우선 大圓鏡智(ādarśajñāna)는 유루의 제8식을 전환하여 얻는 지혜이다. 이 지혜에 대해서 ꡔ성유식론ꡕ 제10권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심품(대원경지상응심품)은 모든 분별을 떠나고, 인식대상도 인식작용도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 모든 대상에 대해서 현전하고〔不忘〕미혹함이 없으며, 체성도 체상도 청정하고, 모든 잡염을 버린다. 순수하고 청정하며 원만함의 덕이 있고, 현행(현행의 공덕)과 종자(종자의 공덕)의 의지처이다. 신체․국토(자수용신의 신체와 국토)․지혜(나머지 세 가지 지혜)의 영상을 능히 현현하고 생겨나게 하며,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단됨이 없고 끊어짐이 없다. 마치 크고 원만한 거울에 많은 사물의 영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56)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이 소멸되어, 한 점의 티끌도 없는 大圓鏡처럼 된 상태이다. 자신과 진여법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우주 전체가 대원경처럼 변화되어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아는 원만한 지혜이다. 佛果에서 처음으로 얻는다.
平等性智(samatājñāna)는 유루의 제7식을 전환하여 얻는 무루의 지혜이다. 여기서 平等性은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체성이 평등하여 일체법에 두루하므로 평등성이라 한다. 또한 지혜가 그것을 반연하므로 평등성지라고 한다. 말나식에서 자아 집착작용에 의한 모든 차별심이 소멸되어 일체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 제도활동을 하게 된다.
妙觀察智(pratyavekṣājñāna)는 유루의 제6식을 전환하여 얻는 무루의 지혜이다. 통달위에서 그 一分을 얻고 불과에서 全分을 성취한다. 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재를 말하고, 관찰은 모든 법을 관찰하여 정통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개별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상태가 변화되어, 모든 사물의 자체상〔自相〕과 보편적인 특질〔共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묘관찰지의 작용에 관하여 ꡔ성유식론ꡕ 제1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많은 다라니와 선정의 방법 및 생겨난 공덕(육바라밀․십력 등)의 보배를 거두어 관찰한다. 대중의 집회에서 능히 한량없는 갖가지 작용을 나타나는 데 모두 자재하다. 큰 법의 비를 내리고 모든 의심을 끊고 많은 유정들로 하여금 다 이익과 안락함을 얻게 한다.57)
이처럼 묘관찰지는 중생의 근기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고 훌륭하게 법을 설하여 모든 의심을 끊게 한다.
成所作智(kṛtyānuṣṭhānajñāna)는 佛果에 이르러 유루의 五食을 전환하여 얻는 무루의 지혜이다. 本願의 해야 할 일을 해마치는 지혜로서, 五識의 감각작용적인 상태가 변화되며, 三業으로 여러 변화신을 보여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
4. 전식득지와 頓悟頓修
그러면 이 네 가지 지혜는 수행에 의해 점진적으로 증득되는가, 단박에 성취되는가, 아니면 지혜의 종류에 따라 다른가? 이것은 유식학의 轉識得智가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설 가운데 어떤 입장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변계성인 의식과 말나식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現量性인 아뢰야식과 오식이 각각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로 전환되는 것은 성불할 무렵에 단박에 이루어진다. 즉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통달위(견도. 初地의 入心)에서 一分을 증득하고, 이후의 십지 중에서 점차 닦아서 佛果에 이르러 그 全分을 증득한다. 대원경지는 해탈도의 시기, 즉 성불하기 직전에 처음으로 일어나게 된다. 金剛喩定이 현전할 때는 이숙식의 종자를 아직 단박에 버리지 못한다. 有漏善과 이숙식은 장애는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유루법이고, 10지에서의 무루는 불지에 비해 열등한 무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金剛喩定에서 훈습을 받는 식이 없다면, 무루가 증성해지지 않고서 성불하게 된다는 모순이 따르기 때문이다. 성소작지 역시 성불할 때에 무루의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비로소 일어나게 된다.
선종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이 있는데, 물론 頓悟의 개념을 解悟와 證悟로 구분하여, 돈오돈수설에서의 돈오는 증오를, 돈오점수설에서의 돈오는 해오를 가리킨다고58) 보면 결국 두 이론은 회통된다. 그런데 돈오점수는 敎家를 위해서 방편으로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식학의 전식득지는 분명히 돈오돈수의 입장이다. 頓悟에서 悟는 識이 반야의 무분별지혜로 전환됨을 가리킨다. 통달위에서 아공관과 법공관에 의해 의식이 묘관찰지로, 말나식이 평등성지로 一分이 전환된다는 것은 곧 ‘解悟’를 가리킨다. 또한 성불할 무렵에 아뢰야식이 대원경지로, 오식이 성소작지로 전환되는 것은 곧 ‘證悟’를 말한다. 이때는 이미 제8식 안에 유루종자가 완전 소멸된 상태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그야말로 ‘頓修’이다.
Ⅴ. 맺음말
팔만대장경을 한 손에 쥐었다가 펴보면 손바닥에 마음 心자 하나 남는다는 말이 있다. 또한 ꡔ達摩觀心論ꡕ에서 慧可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묻기를 “지성으로 불도를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무슨 법을 닦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요체로 삼습니까?” 하니, 달마대사가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은 곧 修心이고, 만법유식의 입장에서 말하면 轉依, 즉 식이 반야의 무분별지혜로 전환되는 것〔轉識得智〕을 의미한다.
중생의 정신세계는 八識과 51가지 심소 및 종자의 상호 인과관계의 역동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에 의해서 아집과 법집이 생겨난다. 아집에 의해서 번뇌장이 형성되어 생사고해에 윤회하게 하고, 법집에 의해 소지장이 생겨나서 사물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집과 법집이 생겨나는 근본원인은, 범부의 識(vijñāna)이 붓다의 智(jñāna)와 달리, 실제 인식상황에서 식이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으로 분화되기 때문이다. 이 二分으로 인한 似我와 似法에 대하여 實我와 實法으로 집착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이 일어난다.
둘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근거는, 佛性의 존재이면서 三性의 전환적 구조로 되어 있으며, 또한 아뢰야식 안에 本有無漏種子와 신훈에 의한 무루의 문훈습종자를 들 수 있다.
셋째, 유식학의 轉識得智는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의 입장이라는 점이다. 통달위에서 묘관찰지와 성소작지의 一分 증득은 곧 解悟이고, 대원경지와 성소작지의 증득은 성불할 무렵에 이루어지므로 곧 證悟이며, 이 무렵에는 제8식에는 모든 유루종자가 소멸된 상태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頓修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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