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제53집(2018.8), 63~94쪽
고대인도 슈라마니즘의 윤리 논쟁
불교「우팔리경」(Upāli-sutta)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201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6A3A02079749).)
최지연/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HK 연구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우팔리경」의 쟁점.
Ⅲ 불교와 자이나교의 윤리적 입장: 무엇이 해탈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인가?
Ⅳ 나오는 말.
<요약문>
인도철학은 해탈을 최종 목적으로 설정하고 체계화된 이론이라는 점에
서 서양철학과 차별화 된다.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인도철학의 선(善)은
해탈을 위해 좋은 것이고 불선(不善)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철학의 윤리관은 업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슈라마니즘의 대표적인 두 종교인 불교와 자이나교는 업론에서 큰 차이
를 보이는데 그러한 내용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우팔리경이다.「우팔
리경」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두 삼업(身口意)을 인정하지만 그 중요도
에 있어서 불교는 의업을 중시하는 입장, 자이나교는 신업을 중시하는 입장
을 취하고 있다. 본 논문은 불교와 자이나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의업과 신
업을 각 학파의 교리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업론이 두 종교의 교리
상 어떤 정합성을 갖는지 검토하였다.
자이나교가 신업을 중시하는 이유는 업을 물질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다. 윤회와 해탈을 포함한 모든 행위의 주체는 영혼(jīva)이다. 본래는 자유
로운 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던 영혼이 업물질의 유입으로 인해 신체에 속박
되고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신체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본래의 무애자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
서 육체적으로는 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는 고도의 명상과 삼매를 통해 영
혼의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는 수행론을 주장하게 된다.
반면 불교가 의업을 중시하는 이유는 다른 행위의 기저에 의도(cetanā)
가 있다는 전제를 갖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이나교의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오온의 일회적인 결합으로 설명할 뿐이다.
영혼을 대신하여 정신을 담당하는 것이 수상행식이며 이들의 활동이 의업
이다. 그래서 의업을 단속하면 다른 행위를 단속할 수 있다고 이해되고 이
는 수행론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과 지혜 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Ⅰ. 들어가는 말
인도철학 발전에 있어 논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
의 사실이다. 인도철학 학파들은 논쟁을 통해 타 학파의 오류를
공격하고 또 자파가 받은 비판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논리
적 완성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논쟁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자신들
의 경전마다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 경전에 소개된 논쟁 과
정은 자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 외에 논리적 설득을 통한 교육
의 목적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논쟁의 이러한 역할을 잘 활용한 학파 중 하나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학파들에 비해 문헌 기록이 빠른 불교 경전의 경우
기원전 5-6세기 경 인도에 유행했던 여러 슈라마나(śramaṇa, 사
문)들과 브라마나(brāḥmaṇa, 바라문)들과의 논쟁이 등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가운데 당시 유력한 슈라마나 전통이었던 자이
나교와의 논쟁 중 하나인「우팔리경」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우팔리경」의 논쟁 내용은 ‘인간의 세 종류의 행위 즉 신체적
행위(身業), 언어적 행위(口業), 정신적 행위(意業) 가운데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1)’에 대한 것으로서 붓다는 정신적 행위가 가장 무
겁다는 입장이고 마하비라는 신체적 행위가 가장 무겁다는 입장
을 취한다. 경전의 주인공인 우팔리는 마하비라의 신도로서 붓다
에게 논쟁을 시도했지만 붓다에게 패배하고 그의 제자가 되고 만
다. ‘정신적인 의도가 없었다면 신체적 살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 성자들은 초능력을 통해 생각만으로도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
는 점’ 등을 논거로 하여 정신적 행위의 무거움을 말한 붓다에게
설복당한 것이다.
1)「우팔리경」의 논의는 악한 행위에 대한 것으로서 팔리본에서는 ‘가장
비난받을만한 것(mahāsāvajjataraṃ)’이라고 하고 해당 한역본에서는 ‘가장
무거운 것(最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일반적인 행위 모두를
포함하고자 하므로 ‘책임이 크고 무겁다’ ‘중요(重要)하다’는 의미에서
‘무겁다’ 또는 ‘중요하다’는 표현을 선택했다.
이 경의 쟁점은 인간 행위의 도덕적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이가 건물 옥상에서
벽돌을 가지고 놀다가 아래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장난삼아 던
져보았다. 아이는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한 일이고, 사람이 벽돌에 머리를 맞을 경우 죽을 수
도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하자. 그런데 행인
이 그 벽돌에 머리를 맞아 죽고 말았다고 한다면 이 아이에게 살
인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것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일
어났던 사건으로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정신적 행위를 가
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붓다의 입장이라면 이 아이는 위험한 장난
을 한 잘못은 있지만 살인죄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신체적 행
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하비라의 입장이라면 벽돌을 던
져 사람을 죽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아이의 살인죄는 성립할 것이
다. 즉 어떤 행위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그 행위를 일으키는 생각
에 있는가, 아니면 그 행위가 미친 결과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서양철학의 윤리학 쟁점 중 하나인 동기주의와 결과주의2)
논쟁과 닮아 있다. 동기주의란 인간 행위의 도덕적 평가 기준을,
행위를 일으킨 동기가 선한가 악한가에 두는 것이고 결과주의는
그 기준을, 행위가 발생시킨 결과가 선한가 악한가에 두는 것이
다. 이를「우팔리경」의 논쟁에 적용한다면 붓다는 동기주의가,
마하비라는 결과주의가 될 것이다.
2) 동기주의와 결과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은 각각 칸트의 선의지와
공리주의다. 자세한 내용은 박경준(1992) 참조.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붓다의 윤리적 관점을 동기주의에 가까
운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서양 윤리학의 동기주의와 붓다의 윤
리관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견도 많
이 있다. 피터 하비(Peter Harvey) 같은 학자들은 서양 윤리학에서
말하는 동기(motive)가 붓다의 ‘행위를 일으키는 의업’, 즉 cetanā
(intend)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고3) 푸셍(Louis de la vall
ée Poussin)은 동기주의라는 말을 피해 의도주의(intentionalisme)
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도 하였다.4) 또 데미안 키온(Damien Keown)은
불교의 대기설법이나 보살의 방편(upāya-kauśalya)을 두고
상황윤리(situation ethics) 개념을 적용하기도 했다.5)
3) Harvey(2000) pp. 295-296.
4) Poussin(1927) p. 127; 岡李貫瑩 역(1934) p. 188.
5)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는 조셥 플레처(Joseph Fletcher) 신부가 처음
제시한 이론으로서 보편적인 윤리규범은 없으며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윤리적 당위를 개인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레처는 판단의 기준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였는데 키온은 불교 윤리학에 이 이론을
적용하면서 기독교의 사랑(love)과 보살의 자비(karuṇa)의 유사성을
주목하였다. Keown(1992) pp. 185-188.
이외에도 박경준은 불교의 공리주의적인 면을 부각시켜서 불교
윤리관의 결과주의적인 면을 반증하기도 했고6) 샌더슨(Alexis
Sanderson)은 초기불교에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경향이 혼재했다
는 이론을 토대로, 의업 중심의 합리주의적 경향의 불교 윤리관이
무표업 개념 등이 도입되면서 점차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
다고 보았다.7)
6) 박경준(1992).
7) Sanderson(1995) p. 43.
이상의 선행 연구들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우팔리경을 통해
불교와 자이나교의 윤리적 입장을 검토하고자 하며, 자파의 교리
내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고찰할 것이다.
Ⅱ.「우팔리경」의 쟁점
1.「우팔리경」의 논쟁
「우팔리경」(Upāli-sutta)은 맛지마니카야(Majjhima Nikāya) 제
56경에 포함되어 있고, 한역본으로는 중아함(中阿含)「대품우파리
경」(大品優婆離經)에 해당한다. 전제적인 줄거리는 자이나교의 신
자였던 장자 우팔리가 붓다와 논쟁에서 패한 후 불교 신자가 되어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를 천대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경전 내용의 핵심은 우팔리가 붓다에게 설복당하는 장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행위에 있어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
고자하는 목적으로 보인다. 이 경의 전체 줄거리를 사건의 흐름과
논쟁의 내용적인 면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1>「우팔리경」의 내용(①~⑥ 불교 입장, ⒜~⒞ 자이나교 입장)
사건의 흐름 논의 내용
1 붓다와 자이나 고행자8)의 만 ①⒜신구의 세 가지 업 인정.
남 및 문답 ②업은 행위이고 삼업 중 의업
이 가장 중함.
⒝업은 죄과이고 삼업 중 신업
이 가장 중함.
2 고행자가 자이나 수행처로 돌
아가 이를 전함
3 우팔리가 붓다를 논파하겠다 ⒞신업이 가장 거친 것이기 때
고 마하비라에게 고하고 마하 문에 의업보다 중함.
비라가 이를 허락함
4 우팔리가 붓다에게 찾아옴
5 붓다와 우팔리 논쟁 ③찬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
에 집착하는 수행자9)
④뛰어난 수행자가 모르고 벌레
를 밟았을 때의 과보
⑤신통력의 위력
⑥선인의 저주
6 우팔리가 패배 후 부처님께 귀
의하고 가르침을 받음
7 우팔리가 집으로 돌아와 문지
기에게 자이나수행자들을 집
안에 들이지 말고 문밖에서 탁
발할 것을 지시함
8 소문을 들은 마하비라가 직접
우팔리 집을 방문하지만 우팔
리가 불교를 찬양함
9 마하비라가 이를 듣고 견딜 수
없어 입에서 피를 토함
8) 경전 상에는 dīgha-tapassī 즉 키가 큰 고행자라고 소개된다.
9) 한역본에서는 ③과 ④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 경전에서 자이나교를 대변하는 인물과 붓다가 직접 대화하
는 장면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붓다와 자이나교의 ‘키 큰
고행자’ 사이에 있었던 논의이고 두 번째는 붓다와 우팔리 장자
사이의 논의이다.
첫 번째 논의에서 붓다는 자이나교의 고행자에게 “니건자(마하
비라)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행위
(kamma=karma, 업)10)를 설하는가?”11)라고 묻는다. 고행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자이나교에서는 악업에 대해 ‘행위
(kamma)’라고 하지 않고 죄과(daṇḍa)12)라고 한다는 것이고 또 하
나는 신체적‧언어적‧정신적이라는 세 가지 죄과를 설한다는 것이
다. 붓다는 이어서 “그 중에서 무엇이 가장 비난받을만한가”13)를
묻는다. 이에 대해 고행자는 ‘신체적 죄과’라고 답했고 붓다는 ‘정
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받을만하다’고 말하며 논의를 끝낸다. 여기
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①⒜업에는 신체적‧언어적‧정신적인 세 가
지가 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하지만 업의 의미와 삼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에 대해 불교는 ②업은 ‘행위’를 의미하
고 삼업 중에서 의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자이나교는
⒝업이란 ‘죄과’이고 삼업 중 신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
하고 있다.
10) 여기서 업은 karma의 한역어로서 두 단어 모두 말 그대로 해석하면
‘행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도철학에서 karma는, 윤회 개념과 결부되면서
각 학파에 따라 행위에 관한 특수한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불교에서는
karma를 ‘행위’라고 번역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물질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행위’라는 번역 자체가 불교의 입장이 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윤회와 관련된 업(業)론으로서의 karma는 ‘업’이라고 쓰고 이에
대한 불교의 해석으로는 일반적인 의미의 ‘행위’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하였다. 11) MN.1, p. 372 : kati pana tapassi nigaṇṭho nātaputto kammāni
paññāpet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ti.
12) daṇḍa는 막대기, 지팡이, 몽둥이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맥락에서는
몽둥이나 매의 의미로서 어떤 죄에 대한 벌 혹은 대가 등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죄과’라고 번역하였다.
13) MN.1, p. 372 : katamaṃ daṇḍaṃ nigaṇṭho nātaputto mahāsāvajjataraṃ
paññāpeti
이상의 첫 번째 논의는 우팔리와 주고받는 두 번째 논의의 예비
적 문답으로서 불교와 자이나교의 윤리적 입장 차이를 확인한 것
이다. 두 번째 논의가 시작되기 전 우팔리와 마하비라 등은 붓다
가 주장한 ②의 내용을 비웃으며 ⒞신업이 가장 거친 것이기 때문
에 의업보다 중요하다는 대화를 하는데 이러한 견해가 상식적인
것처럼 말한다. 큰 죄악 가운데는 도둑질, 음행, 살생 등 신체를
통해 범할 수 있는 것이 언어나 정신을 통해 범할 수 있는 것보다
많고 그 죄도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의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은,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살생과
같은 신업보다 무겁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논의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4가지 사례(③~⑥)를 통
해 우팔리를 설복시키는 과정에서 불교에서 의업을 강조하는 이
유의 타당성을 확보한다. 먼저 ③찬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에
집착하는 수행자의 예를 살펴보자.
붓다 : 여기 중병에 걸려 고통에 시달리는 니간타(자이나 수행자)가
찬물을 거부하고 끓인 물만 마신다고 하자. 그가 찬물을 마시지 못해
죽게 된다면 니간타 나타풋타(마하비라)는 이 자가 어디에 태어난다고
설하는가?
우팔리 : ‘마음만 존재하는’ 하늘에 태어납니다. 마음이 집착된 상태
로 죽었기 때문입니다.14)
14) MN.1, p. 376 : “… idhassa nigaṇṭho ābādhiko dukkhito bāḷhagilāno
sītodakapaṭikkhitto uṇhodakapaṭisevi. so sītodakaṃ alabhamāno kālaṃ
kareyya. imassa pana gahapati nigaṇṭho nātaputto katthūpapattiṃ
paññāpetī'ti.” “atthi bhante manosattā nāma devā, tattha so upapajjati, …
manopaṭibaddho kālaṃ karotīti”
여기서 붓다가 예로 들고 있는 내용은 자이나교의 계율과 관련
된 것이다. 자이나교에서 수행자들은 아무 물이나 마셔서는 안된
다. 물에도 영혼이 있고 또 그 속에 작은 미생물들이 산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물의 물을 길어서 깨끗한 거름천으로 거
른 다음 한 번 끓인 것을 각자의 주전자에 담아 그만큼의 물만 하
루 동안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할 물을 마련하는 과
정에서 생명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탁발(혹은 동행하
는 재가신자)을 통해 물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신구의를
통해 나쁜 행위를 한 신자에게서는 보시를 받지 않기도 한다.15)
15) Deo(1956) p. 171, p. 177 참조.
이처럼 엄격하게 물을 제한하는 것은 불살생(ahiṃsā)계 때문이
다.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 영혼(jīva)이 있다고 믿
기 때문에 음식은 물론 물까지도 최소한을 먹는다. 음식에 있어서
도, 육식을 금하는 것은 당연하고 식물과 열매도 크기가 큰 것은
먹지 않으며, 불이나 칼이 필요한 조리 과정에서 살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는 조리를 할 수 없다. 즉 탁발 시간이 아닐
때 수행자가 소지했던 물을 다 마시고도 갈증을 느낀다면 마실 물
을 스스로 마련할 방법은 없다.
보통은 아침에 탁발해온 물 이외에는 다음 날까지 물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지만 중병이 들어 물을 많이 먹어야 되는 상황이고 그
러지 못할 경우 죽음에 이르는 문제라면 어떠한가? 규율을 어기고
라도 일단 우물의 찬물을 마셔도 되는가, 아니면 죽더라도 불살생
의 규율을 지켜야 하는가? 만약 찬물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불살생
계를 지키고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 때 그는 해탈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팔리는, 마음이 묶여 있는 상태, 즉 집착된 상
태이기 때문에 해탈을 할 수 없고 ‘마음만 존재하는 천계’에 태어
난다고 답한다. 마음이 집착된 상태라고 한 것은 아마도 ‘물을 마
시고 싶다’는 생각이나 ‘찬물은 절대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
에 매여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팔리의 이 말은, 신체적 행위
가 계를 지키는 바른 행위라고 할지라도 정신적 행위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해탈을 완성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인다.
우팔리의 이러한 입장은 사실 자이나교의 입장보다는 불교의
입장에 가깝다. 자이나교에서는 찬물을 마셔서 불살생계를 범한
과보가 물을 갈망하는 과보보다 클 것이다. 그리고 신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영혼의 해탈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계를
지키며 명상에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해탈에 가까운 길일 것
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유사한 예로 붓다가
고행 끝에 고행의 무용함을 깨닫고 나서 목욕을 하고 우유죽을 먹
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씻지도 않고 머리카락이나 손톱도 자
르지 않으며 몸에 재를 바르거나 단식과 멸식을 하며 한 자세로
오랫동안 명상을 하는 것은 고행의 전형적인 방법이다.16) 붓다는
단식 등 고행이 신체적인 쇠약함을 초래하면서도 정신적인 완성
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단식에 대한 집착 때
문에 죽음에 이른다면 결국 해탈도 하지 못하고 인간의 몸만 버리
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붓다는 정신적인 적정, 즉 지혜가 진정한
해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반들의 비난에도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택했다. 이 예에서도 붓다는 의업이 신업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6) Bronkhorst(1993).
다음으로 붓다는 ④뛰어난 수행자가 모르고 벌레를 밟았을 때
의 과보의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붓다 : 여기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무소유(불사음)의] 네 가지 금
계17)를 엄격히 지키는 니건타가 있다. (중략) 그런데 그가 오고 갈 때
작은 생명들을 많이 해친다. 이에 대해 나간타 나타풋다는 어떤 과보
를 설하는가?
우팔리 :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크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설합
니다.18)
17) 자이나교에서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5개의 근본적인 계를 설하고 있다.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 무소유의 다섯 가지로 불교의 5계와
구분하여 5서(誓, vrata)라고 불린다. 그런데 여기서는 4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마하비라 이전의 자이나 지도자였던 파르슈바의 4서로 보인다.
붓다는 마하비라와 거의 동시대거나 약간 늦는다고 알려지는데 아마도
붓다의 활동 당시 자이나교의 일반적인 교리 및 계율들은 파르슈바에 의해
정립된 것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파르슈바의 4서는 자이나
경전에서도 내용이 갈리는데 나머지 셋과 함께 무소유를 말한 곳도 있고
불사음을 말한 곳도 있다. 김미숙(2014) pp. 95-99 참조.
18) MN. 1, p. 377 : “idhassa nigaṇṭho cātuyāmasaṃvarasaṃvuto (중략), so
abhikkamanto paṭikkamanto bahū khuddake pāṇe saṅghātaṃ āpādeti.
Imassa pana gahapati nigaṇṭho nātaputto kaṃ vipākaṃ paññāpetīti.”
“Asañcetanikaṃ bhante nigaṇṭho nātaputto no mahāsāvajjaṃ
paññāpetīti.”
이 문답은, 계를 완벽히 잘 지켜 신구의를 통한 모든 행위를 잘
단속한다고 할지라도 의식하지 못하는 살생이 있을 수 있다는 예
를 든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는 금방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은 벌레들이 있고 걷고 앉고 누울 때 그러한 작은 벌레들을 모
르고 밟을 수도 있다. 고행자라고 해도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에
갔다 오거나 명상을 위해 혹은 쉬기 위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조
심한다고 해도 개미처럼 작은 벌레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잠이나 명상에 빠져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살생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살생은 죄가 되지 않는다. ‘살생하겠다’는 의
도가 없었기 때문에 ‘살생한다’는 행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자이나교에서는 살생이 발생한 상황에서 의도 여부를 따
지지 않으며 의도가 없었어도 살생의 과보를 받는다. 우팔리의 대
답 자체가 불교의 입장이며 자이나의 입장과는 멀다.
다음에 이어지는 ⑤와 ⑥의 문답은 의업이 물리적 세계에 영향
을 미칠 수 있음을 반증하는 예들을 들고 있다. 이는 앞서 마하비
라나 우팔리가 “별 것 아닌 정신적(마음의) 죄과가 거친 신체적 죄
과보다 어째서 더 중요하단 말인가”19)라고 한 것에 대한 반론이라
고 볼 수 있다.
19) MN. 1, p. 374 : kiṃ hi sobhati chavo manodaṇḍo imassa evaṃ oḷārikassa
kāyadaṇḍassa upanidhāya
우선 ⑤에서 붓다가 우팔리에게 드는 사례는 ‘신통력을 지니고
마음의 자유자재를 성취한 사문이나 바라문이 마음으로 한번 생
각한 것으로 날란다를 온통 재로 만들 수 있겠는가’20)하는 것이
다. 신통력이라는 것은 정신적 행위의 한 종류이다. 신체나 언어
를 사용하지 않고 물리적 세계에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다. 수행을 통해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능
력은 의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 MN. 1, p. 378 : pahoti nu kho s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iddhimā
cetovasippatto imaṃ nālandaṃ ekena manopadosena bhasmaṃ kātunti
다음의 ⑥에서는 ‘단다카 밀림과 칼링가 밀림과 멧자 밀림과 마
탕가 밀림이 어째서 밀림이 되었는가’21)라고 우팔리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 우팔리는, 이 밀림들은 원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으나
선인의 저주로 인해 마을과 사람이 사라지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밀림이 되었다고 답한다. 즉 정신력이 뛰어난 선인들의 마음
의 저주로 인해 마을이 폐허가 되어 밀림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주는 앞의 신통력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행위이고 정신력이 강
한 사람일수록 그 힘도 강하다고 여겨진다. ⑤와 ⑥에서 제시한
신통력과 저주의 예는 정신적 행위의 위력이 신체적 행위의 파괴
력보다 강할 수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이로써 우팔리는 최종적으
로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
21) MN. 1, p. 378 : kena taṃ daṇḍakāraññaṃ kāliṅgāraññaṃ mejjhāraññaṃ
mātaṅgāraññaṃ araññaṃ araññabhūtanti.
이상을 통해「우팔리경」에서 불교는 업을 행위로 이해하고 자
이나교는 업을 죄과로 이해하며, 불교는 의업을, 자이나교는 신업
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팔리경 외에도, 이
두 종교의 사상체계 안에서 실제로 의업과 신업이 강조되고 있는
지에 대해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2. 초기불교에서 의업의 중요성
「우팔리경」을 통해 불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의업의 중요성
이라고 할 수 있다. 신통력이나 저주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
적인 행위는 신체적 행위만큼 혹은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질 정도로
중요하다. 또한 신업과 구업은 의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의업은 다른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기 때문에 중요
하다.
특히 <표1> ④번의 내용의 경우 본래 의도한 의업에 따라 신업
을 일으킨 것이다. 즉 ‘걷겠다’는 애초의 의도대로 ‘걷는’ 신체적
행위를 한 것인데 그 신체적 행위 과정에서 살생이 발생한다면 그
죄를 물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앞서 말한대로 불교에서 이것은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같은 입장은 불교의 다른 경전에서도 확
인할 수 있고 특히 율장에서는 유사한 예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
다. 예를 들면,「사분율」권56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그 때에 투라난타 비구니가 새벽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속가에
갔더니 어린 아이 하나가 방앗간에서 자고 있었다. 투라난타가 곁으로
다가와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리니 방아공이가 아이의 머리에 떨
어져서 죽었다. 이를 걱정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느냐”
“죽이려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죄를 범함이 없다. 그러나 남의 방아공이를 건드리지 말아
라”22)
22)「사분율」권56(대정장 22, 982a23).
여기서 투라난타 비구니는 실수로 어린아이를 죽였다. 직접적인
행위는 방아공이를 만진 것뿐이고 그 행위로부터 일어난 사고로
아이가 죽게 된 사건이다. 현대의 법률로는 과실치사에 해당하는
이 일에 대해 붓다는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고 죄
가 없다고 판결한다.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의도한 죄만 성립되고 의도
하지 않은 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
데「사분율」권55에 다음과 같은 예가 등장한다.
그 때에 어떤 비구가 방을 지키는데 어떤 소녀가 와서 공양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이 때 그 비구는 소녀를 붙들어 음행을 하였는데 소
녀의 여근이 손상되어 끝내 죽고 말았다. 그 비구가 걱정하니 부처님
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느냐”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살생은 범하지 않았고 음행의 바라이죄만 범했다.”23)
23)「사분율」권55(대정장 22, 974c28).
붓다는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건에서 비구가 그 사람
을 죽일 의도가 없이 한 행위라면 살생의 죄는 없다고 말한다. 대
신 남의 물건을 만지려는 의도로 만진 행위나 강간할 의도로 강간
한 행위에 대한 죄만 책망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율장에 빈번히
등장하며 비구가 평상에 누운 아기를 모르고 깔고 앉아 죽인 일,
쇠약한 아버지에게 길을 재촉하여 죽게 만든 일, 절을 수리하다가
벽돌을 놓쳐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든 일 등 사안도 다양하다.
이와 같이 비구의 행위가 살인을 범하는 결과를 일으켰더라도
의도가 없었다면 죄가 되지 않는 반면 오히려 살인이 성립되지 않
아도 살인할 의도로 한 행위에 대해서는 중죄(重罪)를 묻기도 한
다. 이것은 불교의 7단계의 죄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투란차죄’라고 불린다. 바라이죄나 승잔죄에 해당하는 죄가 미수
에 그칠 경우가 이 죄를 범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지
는 않았지만 죽이려는 마음으로 해를 가한 경우가 여기 해당한
다.24)
24)「사분율」권2(대정장 22, 576c07).
정리하자면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과 율장 등에서는 의도, 즉 의
업이 여타의 모든 행위를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았
고, 이 때문에 삼업 가운데 의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
음을 판단할 수 있다.
3. 자이나교에서 신업의 중요성
「우팔리경」에서 자이나교의 입장으로 소개된 것은 <표1>에서
보이는 것처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신구의 세 가지 업을 인정한다.
⒝업의 의미는 죄과이고 삼업 중 신업이 가장 무겁다(중요하다).
⒞신업이 가장 거칠고 의업은 가장 가볍다.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자이나교의 입장은 ‘업이란 죄과이고
그런 의미에서 신체적 죄과가 나머지보다 거칠기 때문에 중요하
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업을 죄과로 본다는 것과 ‘거칠
다’고 하는 말로 업의 정도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
용이 자이나교의 입장과 상응하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이 세계는 6개의 궁극적인 실재 즉 영혼
(jīva), 물질(pudgala), 운동(dharma), 정지(adharma), 허공(ākāśa),
시간(kāla)으로 구성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혼과 물질
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물질은 그 최소단위인 극미(極微,
paramāṇu) 상태로 존재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
외에 마음(manas)이나 업(karma)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25) 즉 자
이나교에서 업은 물질적 개념이다. 본래 자유로운 상태의 영혼을
업물질(karma)이 구속하고 있는 형태로 속박을 설명하는데 인간
에게 적용하면 결국 육체가 영혼을 속박하는 것이 된다.
25) PS.89: upabhogyam-indriyaiś cendriyaḥ kāyā manaś ca karmāṇi/ yad
bhavati mūrtamanyat tat sarvaṃ pudgalaṃ jānīyāt//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 감각기관, 신체, 마음, 업 등은 형태가 있는 것이고 이들은
모두 물질이다.
업물질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통해 유입되는 것이지
만 의도 여부는 물론 의식하지 못하는 행위까지도 업물질의 유입
을 초래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래 영혼은 자유로운 상태로 허공을 떠
다니고 있었는데 여기에 업물질이 달라붙으면서 최초의 결합이
발생한다. 이것을 업신(業身, karma-śarīra)이라고 하는데 이 업
신이 여러 형태의 자궁으로 들어가 신체를 받아 세상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혼과 업물질이 결합된 형태의 업신은 위로 상승하려는
영혼의 성질과, 무게감 때문에 아래로 하강하려는 물질의 성질이
충돌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동이 발생한다. 이것을 요
가(yoga, 진동)라고 하며 이 진동은 영혼과 물질이 완전히 분리되
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업물질이 유입된다.
이러한 업물질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크게 분류하면
유해업(ghātiyā)과 무해업(aghātiyā)으로 나눌 수 있다.26) 유해업
은 육체를 갖고 태어난 후에 일으킨 행위에 따라 유입되는 것이지
만 무해업의 경우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갖춘 상태로 태어난다.
신체적 특징과 가족, 국가, 수명 등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것
으로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여기 해당한다. 업신의 진동이 완전
히 멈춰야 제거할 수 있는 업물질이 바로 이것들이다.
26) Jaini(1990) p. 115
즉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이 육체에 속박되어 있는 한 심장이 멈
추기 전까지 업물질이 유입된다. 이렇게 육체로 인해 발생하는 영
혼의 괴로움은 악순환에 가깝다. 우리는 육체를 갖는 이상 먹어야
하는데 자이나에서는 동물은 물론 식물과 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먹기 위해서는 다른 영혼에게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
다. 이것은 또 업물질의 부착으로 이어지고 더 단단하게 영혼을
구속하게 된다.
그래서 자이나교는 육체를 부양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 즉 먹
는 것, 입는 것, 쉬는 것, 자는 것까지 차단하는 고행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자이
나교에서는 선행에 대한 과보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결론적으로
자이나교에서는 선행 역시 해당하는 업물질이 유입된다고 보고
있다. 물론 악행에 비해 작고 가벼워서 오랫동안 속박을 유지하지
는 않는다. 하지만 업물질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선행과 악행에
차이가 없으며 때문에 선행을 포함한 모든 행위를 끊는 것이 해탈
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고행과 명상만이 업물질을 제거하
는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이나교의 논사 쿤다쿤다의「사마
야사라」(Samayasāra)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기도 했다.
"금으로 된 자물쇠도 쇠로 된 자물쇠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속박하는
것과 같이 선행이든 악행이든 행위를 하는 것은 [모두] 영혼을 속박한
다."27)
27) SS, p. 153 : sovaṇṇiyaṃ pi ṇyalaṃ vaṃdhadi kālāyasaṃ ca jaha purisaṃ
/ vaṃdhadi evaṃ jīvaṃ suham asuhaṃ va kadaṃ kammaṃ //
즉 선행과 악행도,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의식을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모든 행위는 영혼을 구속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며
이를 ‘죄과’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이나교에서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극미라고 하고 이
극미가 결합하여 생성한 ‘물질의 성질을 갖는’ 최소단위를 스칸다
(skandha)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대와 업물질 등 그 성질을 갖는 최소단위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
다.28)
거 거칠게 거친 것 견고한 성질을 갖는 물질. 깨졌을 때 다시
친 (bādara-bādara) 합칠 수 없음. 나무나 돌 따위. 사대 중 地.
것 거친 것 액체와 같이 유동성이 있는 물질. 사대 중
(bādara) 水
미세하게 거친 것 외관 상 형태가 있긴 하지만 접촉할 수 없
(sūkṣma-bādara) 는 것. 그림자 따위.
미 거칠게 미세한 것 아주 작은 크기의 물질. 미세하지만 감각
세 (bādara-sūkṣma) 으로 인식 가능한 것. 사대 중 火와 風.
한 미세한 것
것 (sūkṣma) 미세하고 인식할 수 없는 물질, 업물질 등.
미세하게 미세한 것 모든 skandha 중에 가장 미세한 상태, 두
(sūkṣma-sūkṣma) 개의 극미로 구성된 skandha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눈으로 인식 가능한 것은 거친 것에 속하
고 사대 가운데는 지와 수가 여기 속한다. 화와 풍도 미세한 것에
속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는 거친 것에 속한다. 불교에서도 우리의
신체는 사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업물질 유
입의 결과물로서의 신체는 거친 것임에 틀림없다. 구업이나 의업
으로 유입되는 것은 미세한 업물질이다. 즉 자이나교에서는 미세
한 업물질이 유입되는 구업이나 의업보다 거친 업물질로 영혼을
강하게 속박하는 신업이 더 무겁고 중요한 것이다.
이상「우팔리경」을 통해 행위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았다. 불교는 육체나 입으로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
서는 그렇게 행위 하겠다고 하는 정신적인 작용이 우선 되어야 한
다는 입장에서 의업이 가장 무겁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죽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육체로 그 같은 행위를 하지 않
는다고 본 것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육체를 통한 악행으로 성립되는 죄가 살인, 폭
행, 절도 등의 큰 죄이기 때문에 신업이 나머지보다 무겁다고 말
한 것이다.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죽이고 싶다’ ‘때리고 싶다’
‘훔치고 싶다’와 같은 생각이 전부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업을
물질로 이해하는 그들의 실재론과 연관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
음 장에서는 두 종교의 입장 차이가 그들의 교리 안에서 어떻게
확장되는지 검토하겠다.
Ⅲ. 불교와 자이나교의 윤리적 입장:
무엇이 해탈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인가?
동기주의, 결과주의, 상황윤리 등의 개념이 관통하고 있는 핵심
은 선(善)의 규정, 즉 무엇을 선으로 보는가의 문제이다. 선의 정
의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지만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진리가 전
승되었다고 믿는 종교들에 경우에는 경전의 말씀이 곧 선이다. 예
를 들어 기독교, 이슬람교, 인도 브라마니즘의 신자들에게 선이란
성경, 꾸란, 베다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성전(聖戰)을
통한 살생처럼 그 내용이 인간의 일반적인 윤리에 반하는 것이라
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불교와 자이나교와 같은 종교는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이 깨달은 진리를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이다. 따라서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선 혹은 악이다. 이때 선과 악이란 이
원론적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탈에
도움이 되는 행위는 무엇인가? 혹은 해탈과 관련하여, 그것에 유
일하게 혹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무엇인가? 앞 장에
서 살펴본 것과 같은 자이나교와 불교의 쟁론의 기저에는 바로 이
러한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깔려있다.
「우팔리경」에서 불교가 의업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선과 악
을 가리기 위한 기준이 아니고 해탈을 위한 행위의 가치판단을 가
리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해탈에 도움이 되는 행위인가 방해가
되는 행위인가의 문제이고 그 판단 기준이 의도 즉 의업에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인도철학 학파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무아론을 주장한다. 육체의 실체성은 물론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
은 정신의 실체성까지 거부하지만 윤회에 대해서는 찬성하고 있
다. 대신 윤회의 고통을 인식하고 행위를 하고 그 결과를 받는 것
은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결합체이다. 즉 인간은 육체(色), 감수작
용(受), 판단작용(想), 의지작용(行), 인식-저장작용(識)의 일회적인
결합체이다. 앞서 논의한 삼업을 적용하자면 구업과 신업은 육체
적 행위이지만 의업은 나머지 정신적 작용 4가지와 관계된다. 즉
구업과 신업은 의업을 통해서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도식화하면 <그림 1>처럼 나타낼 수 있다.
앙굿타라니카야(Aṅguttara Nikāya)에서 정의한 업의 내용, 즉
‘의도가 곧 업이며 의도한 후에 신체, 언어, 마음으로 업을 행한
다’29)고 한 것은 <그림 2>처럼 도식화할 수 있다. <그림 2>는 삼
업을 단순히 인간의 행위를 분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의도
(cetanā, 思)가 발현되는 세 가지 양상으로서 이해하고 있다고 생
각할 수 있다. <그림 1>과 비교하면 cetanā를 삼업의 기저로서 제
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cetanā 역시 의도, 생각, 의지 같은
것을 뜻하는 정신적인 작용으로서 삼업 가운데에는 의업에 속하
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그림에서 모두 의업이 나머지 업들에 대
한 원인임에는 차이가 없다.
29) AN. 3, p. 415 :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가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후에 신체로 언어로 마음으로 업을 행한다.)
신업 구업 신업 구업 의업
↖ 의업 ↗ ↖ ↑ ↗
思(사)
<그림 1> <그림 2>
업에 대한 이러한 이해 때문에 의도가 없는 살생은 살생으로 성
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불교만의
특별한 주장이 아니다. 유사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성립될 수 있
다. 앞서 예로 들었던 아이가 던진 벽돌에 행인이 사망한 사건이
나 집에 들어온 도둑을 내쫓으려 몸싸움을 벌이던 중 도둑이 위험
한 곳으로 넘어지면서 죽어버린 일, 연인끼리 싸움을 하다가 화가
난 남자가 아무렇게나 던진 우산이 하필 여자의 눈을 관통하여 여
자 친구를 죽게 만든 일 등 죽이겠다는 의도가 없었지만 살인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는 현행법상 고의성이 있어
야만 명확한 살인이 성립되고 그렇지 않으면 정상 참작이 가능하
다. 더군다나 형법 제10조 심신장애인 조항에 따른다면 조현병 환
자가 환청을 듣고 무고한 시민을 죽일 경우 죄를 벌하지 않는다.
이 예들은 불교에서 의도가 없었다면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가족 입장이라면 이러한 판단은 쉽게 받아들
이기 힘들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음주로 인한 만취 상태에서 일어
난 범죄에 대해 심신미약 상태로 보아 감형 사례가 많았으나 최근
에는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 경전과 율장 등에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를 두고 의도를 따져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분명히 논
란의 여지가 있다. 불교의 계율은 사회법이 아니고 종교적 목적의
것임을 감안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이나교의 경전
「수트라크리탕가」(Sūtrankṛtāṅga)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리
기며 비판한다.
불교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곡물더미를 ‘이것은 사람이다’라고 알고 불에 굽
거나, 조롱박을 ‘이것은 어린 아기다’라고 알고 불에 굽는다면,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다.(26) 그러나 만일 그가 사
람을 곡물더미의 일부로 착각하여 요리하거나, 어린 아기를 조롱박으
로 착각하여 불에 굽는다면, 우리의 견해로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
이 아니다.(27) 만약 어떤 사람이 곡물더미로 착각하고 사람이나 어린
아기를 찔러 불에 구웠다면 그것은 부처님들의 아침식사로도 적합할
것이다.(28)"30)
(중략)
올바른 수행자라면, 설사 고의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살
아있는 생명체에 해를 끼치는 행위가 무죄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31)
30) SK, 2.6.26-28 : bauddhoṃ ke apasiddhānta kā ādra ka dvāra khaṇḍana
evaṃ svasiddhānta-maṇḍana― piṇṇāgapiḍomavi viddhu sūle, keī paejjā
purise ime tti/ alāuyaṃ vāvi kumārae tti, sa lippato pāṇavaheṇa
amhaṃ//26// ahavā vi viddhū ṇa milakkhu sūle, pinnāgabuddhoe
ṇaraṃ paejjā/ kumāragaṃ vā vi alāue tti, na lippato pāṇavaheṇa
amhaṃ//27// purisaṃ va viddhu ṇa kumārakaṃ vā, sulaṃmi keī pae
jātatee/ piṇṇāyapiḍī satimāruhettā, buddhāṇa taṃ kppati pāraṇāe//28//
31) SK, 2.6.30 : ajogarūvaṃ iha saṃjayāṇaṃ, pāvaṃ tu pāṇāṇa pasajbhta
kāuṃ/ abohie doṇha vi taṃ asāhu, vayaṃti je yāvi paḍistuṇaṃti//30//
자이나교의 이러한 비판은 살생이라는 결과를 반대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발생한 살생에 대해 살생의 죄가 성립한다면 청정한 수
행자가 인식하지 못한 채 밟은 작은 벌레들에 대해서도 죄가 성립
하는가’라는 반론이 생길 것이다. 자이나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정신적 실재를 부정하는 불교와
달리 영혼을 지성을 갖는 행위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나(영혼)는 행동한다’ ‘나(영혼)는 말한다’ ‘나(영혼)는 생각한다’와
같은 명제가 성립된다. <그림 3> 영혼을 가두고 있는 신체는 물질
로서 지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혼은 신체와 자신을 동일시하
며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은 다시
업물질의 유입을 일으키고 이렇게 유입된 업물질은 영혼을 더욱
속박하게 된다. 즉 신업, 구업, 의업 세 가지는 정신적 실재인 영혼
이 물질에게 속박된 상태에서 일으키는 물질적 행위이자 죄과이
다.
구업
신업 ↑ 의업
↖ 영혼 ↗
이 행위의 주체인 영혼은 본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인
식과 지성을 갖고 있었지만 육체에 갇히면서 한계를 갖게 된 것이
다. 그리고 그 강도 면에서 신업이 가장 근본적이고 거친 종류이
기 때문에 자이나교에서는 신업을 다른 업에 비해 중요하다고 보
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영혼이라는 실체를 육체라는 물질이 속박하고 있다
는 실재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수행론에 있어서 영혼의 자유
를 되찾기 위한 육체적인 고행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영혼의 능력은 육체적인 한계와는 별개의 것
이다.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면 할수록 영혼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육체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제와 고행이 필요하고 영
혼은 명상과 삼매 체험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깨달아 육체와의
완전한 분리를 이루어야 한다.
영혼이라는 존재를 해탈의 주체로 보기 때문에 영혼을 속박하
는 육체를 단속하는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어떤 정신적인 실체
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 상 단식과 나체 수행과
같은 고행은 수행법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육체가 어떤 정신
적 실체를 속박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이러한 입장은 행위의 책임 소재 문제를 야기한
다. 이에 대해「현우경」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사례는 주목할 만
하다.
ⓐ어떤 사미가 스승이자 아버지인 비구와 걸식을 마치고 어두운 길
을 헤치며 돌아가고 있었다. 늙은 아버지는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아
들이 부축하며 밀고 갔는데 짐승들이 무서워 그만 아버지를 밀어 넘어
뜨렸고 죽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은 전생에도 부자관계였고 아들이 아버지, 아버지가 아
들이었다. 아버지가 병들어 누워 있었는데 파리가 자꾸 날아들자 아들
이 방망이로 그것을 잡으려다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이 있었다.32)
32)「현우경」권10(대정장 4, p. 418) 요약.
여기서 ⓐ의 상황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라면 고의가 아니므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 상황 역시
고의가 아니므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죄
가 성립되지는 않지만 다음 생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즉
행위의 의도가 결과와 상관이 없었더라도 그 책임은 어떤 형태로
든 다시 과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33)
33) 이것을 설일체유부에서는 무표업(無表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표업이란 업을 산출하는 직접적인 인과가 없더라도 잠재된 원인으로서
언젠가 업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 개념은 여러 불교학자들이
불교의 윤리관을 동기주의로 한정할 수 없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황순일(2006) 참조.
이 문제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의도에 따른 윤리적 가치판단이
실제 선악, 그리고 그에 따른 상벌 개념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의업 중심의 불교의 윤리관
에서 무심결에 밟고 다닌 작은 벌레에 대한 살생은 살생죄가 아니
지만 그에 대한 벌이 전혀 없다고는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가 행위 규범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불교가 집중하고 있는 의업의 가치는 결국 ‘무심결에’ 행위해
서는 안된다는 것이 된다.34) 항상 지혜를 견지하고 자신과 주변을
알고 있어야 한다.
34)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무심결에’나 ‘무의식적으로’와 같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말하는 ‘모르고 한 일’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며 경전 곳곳에
‘모르고 한 일’에 대한 잘못이 더 크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밀린다왕문경」67(정안 역 2009:121-122)에서 나가세나는 왕에게 ‘불에
달군 쇳덩이를 알고 붙잡은 사람과 모르고 붙잡은 사람 중 누가 더 심한
화상을 입겠는가’라는 비유를 들면서 모르고 죄를 지은 신하들에게 갑절의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수행론으로 직결된 것이다. 정리하자면「현우경」의 예에서
죄가 성립하지 않지만 일어난 일의 원인은 존재한다. 따라서 원인
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원인은 의업에서
비롯된다.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은 의업이기 때문에 의업을 항상 단속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 등 모든 것을 잘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기본 계율인 5계와 5
서에서도 나타난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라는 네 가지 공통된 계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 한 가지에서
차이가 나는데 불교의 불음주계와 자이나교의 무소유계이다.
불음주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술이
갖는 의미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며 항상 자신을 파악하
고 단속해야 하는 수행자가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행위와 그것의 인과를 관
찰해야 함을 강조하는 수행론을 대변하는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소유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주 세 가지의 기본적인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자이나교는 이 가운데 의복과 주거를 완벽히 포
기하며 음식에 있어서도 탁발을 통해 최소한만 먹고 있다. 육체적
인 포기와 고행을 중시하는 수행론을 대변하는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우팔리경」의 쟁점이었던 불교의 의업 중시와 자이나
교의 신업 중시가 자파의 교리 안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
았다. 첫째는 윤회 및 해탈의 주체 문제와 연관된다. 영혼이라는
실체를 인정하는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행위의 주체가 영혼이지만
이러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경우 행위를 판단하고 의지
를 일으키는 정신적 역할이 필요한데 의업이 그러한 정신성을 담
당하고 있다. 둘째는 수행론과 연관된다. 자이나교는 영혼의 해탈
을 위해 육체라는 물질과의 분리를 추구하며 육체적 고행과 정신
적 명상을 수행의 핵심으로 본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육체나 정신
어느 것도 실체로 인정하지 않지만 의업이 정신성의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의업의 단속과 명상을 통해 지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을 수
행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Ⅴ. 나오는 말
인간의 윤리 문제는 동서고금의 철학적 화두이다. 인간은 개인
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욕망에 대해 질서 혹은 규제가 필요하다.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
설, 서양의 동기주의와 결과주의로 대변되는 윤리 논쟁은 흉악범
죄가 등장할 때마다 처벌을 강화하라는 여론이 들끓는 지금도 계
속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윤리 문제의 핵심은 ‘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있다. 기독교와 같은 서양 종교의 기준으로 보자면
‘선’은 신이 정한 규범을 따르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지만
철학의 기준으로 보자면 복잡해진다.
인도철학은 해탈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체계화된 이론이라는
점에서 서양철학과 다르다. 윤리학에 있어서도 인도철학의 선(善)
은 해탈을 위해 좋은 것이고 불선(不善)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
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철학의 윤리관은 업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슈라마니즘의 대표적인 두 종교인 불교와 자이나교는 업론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러한 내용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우팔리
경」이다.「우팔리경」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두 삼업을 인정하
지만 그 중요도에 있어서 불교는 의업을 중시하는 입장, 자이나교
는 신업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본 논문은 불교와 자이
나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의업과 신업을 각 학파의 교리 안에서 이
해함으로써 이러한 업론이 두 종교의 교리 상 어떤 정합성을 갖는
지 검토하였다.
자이나교가 신업을 중시하는 이유는 업을 물질로 이해한 것에
서 비롯된다. 윤회와 해탈을 포함한 모든 행위의 주체는 영혼이
다. 본래는 자유로운 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던 영혼은 업물질의 유
입으로 인해 신체에 속박되고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속박에서 벗
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신체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
고 본래의 무애자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고
행을 하고 정신적으로는 고도의 명상과 삼매를 통해 영혼의 무한
한 능력을 체험하는 수행론을 주장하게 된다.
반면 불교가 의업을 중시하는 이유는 의업을 다른 행위의 기저
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이나교의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
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오온의 일회적인 결합으로 설명할
뿐이다. 영혼을 대신하여 정신을 담당하는 것이 수상행식이며 이
들의 활동이 의업이다. 그래서 의업을 단속하면 다른 행위를 단속
할 수 있다고 이해되고 이는 수행론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과 지혜
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두 종교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에
어떤 행위가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
체적으로 윤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혹은 해탈을 방해하는 것)이
행위 자체인가 행위의 결과인가, 그러한 행위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해탈에 도움이 되는 행위는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이는
두 종교의 업론, 실재론, 수행론에 해당한다. 따라서「우팔리경」에
서 쟁점이 된 의업과 신업의 견해 차이는 두 종교의 사상 체계 안
에서 나름의 정합성을 갖춘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348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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